사설
주님은 젊은이들의 희망이다

한국교회는 매년 5월 마지막 주일을 ‘청소년 주일’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그리스도의 참 사랑과 진리를 젊은이들에게 전해 교회가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제정됐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겪고 있는 좌절과 절망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크고 무거워보인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어려서부터 고도의 경쟁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청소년기를 차지하는 입시지옥의 현실, 그리고 이어지는 취업 경쟁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헤쳐나가야 할 고통의 시간은 끝이 없어 보인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삶은 팍팍하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고통인 저출산 문제는 젊은이들의 어려운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처럼 힘들고 고된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젊은이들은 종종 교회 안에서도 존중받고 위로받지 못한다. 학업과 사회 생활에 쫓겨 신앙생활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함께 교회가 참으로 이들을 존중하고 귀 기울이는 모습이 부족했다는 점을 우리는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참된 희망을 길이요 진리이신 하느님과 함께함으로써 찾을 수 있음을 확신한다. 젊은이들이 자주 잃어버리는 희망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는 주님의 약속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2027년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이 대회가 단순히 규모가 큰 국제행사로 그치지 않고 전 세계 젊은이들이 만나 주님께 대한 희망을 발견하고 나누는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준비는 단순한 행사 준비가 아니라 우리 마음과 생활의 변화를 요구한다. 올해 청소년 주일이 그 준비의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올바른 성모신심이 필요하다

교회는 매년 5월을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며 성모님의 모범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성모성월로 지내고 있다. 성모님에 대한 공경은 초세기부터 교회 안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전통이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깊은 성모신심을 간직해왔고,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이러한 보편교회와 한국교회의 전통에 따라 오늘날에도 가톨릭신자들은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실제 신앙생활에서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신자들이 가장 폭넓게 참여하는 신심 단체가 레지오 마리애이고, 가장 사랑하고 자주 바치는 기도 중 하나가 묵주기도다. 이처럼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통해 구원의 은총을 주님께 전구해 달라는 기도를 바치는 교회 전통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심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성모 공경은 반드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마리아 공경을 우상숭배로 여겨 거부하려는 자세는 잘못된 것이다. 동시에 성모 마리아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마리아 숭배 역시 잘못된 신심 행위다. 종종 교회 안에서는 엇나간 성모 신심의 사례들이 발견되곤 한다. 특히 이러한 사례들은 허황된 사적계시를 바탕으로 확산돼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 실제로 여러 교구에서 공문을 통해 잘못된 신심 행위를 조장하는 활동에 대해 주의를 주고 있다. 대중적 신심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성숙하고 풍요롭게 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권장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교회의 공식적이고 권위 있는 가르침에 따라야 하고 겸손하고 순종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회가 인정하고 인준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내가 있는 곳은 천국인가요?

1991년 본격화된 몽골 선교. 여러 수도회와 대전교구에서 사제와 수도자를 파견해 선교의 기반을 다졌지만, 교세는 좀처럼 확장되지 못했다. 몽골의 선교사들은 여러 가지 원인을 지목했다. 먼저 9개의 본당 중 수도 울란바토르에 6개가 있지만 심각한 교통난과 먼 거리 등의 이유로 매주 미사 참례하기 어렵다는 점을 꼽았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선교를 펼친 한국 이단 종교로 인해 가정파괴, 경제적 피해를 겪은 몽골인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 인격적으로 신을 만나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거리감 등이 뒤를 이었다. 애초에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들에게 “좋은 곳이니 성당에 오라”는 식의 선교는 잠시 영세자를 늘릴 수 있을진 모르지만, 마음 안에 신앙의 토대를 만들진 못했다. 몽골인을 사랑했던 고(故) 김성현 신부는 그들과 함께 사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 찾은 몽골. 예수님을 몰랐던 몽골인들은 “김성현 신부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신부님은 항상 저희를 사랑하신다고 느꼈다”고 덧붙였다. 김 신부는 신앙생활에 필요한 미사참례, 성경과 교리공부를 앞세우기 보다, 먼저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의 진심은 몽골인들이 예수님 품으로 스스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예수님이 없는 줄 알았던 곳에 이미 예수님은 와 계셨던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불행이 내게만 일어난 것 같은 절망을 경험한다. 김성현 신부가 20여 년 전 몽골에서 겪은 상황도 낙관적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있는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었다. 그 힘은 복음적인 삶의 실천에 있었다.

2024-05-26
사설

주님은 젊은이들의 희망이다

한국교회는 매년 5월 마지막 주일을 ‘청소년 주일’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그리스도의 참 사랑과 진리를 젊은이들에게 전해 교회가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제정됐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겪고 있는 좌절과 절망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크고 무거워보인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어려서부터 고도의 경쟁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청소년기를 차지하는 입시지옥의 현실, 그리고 이어지는 취업 경쟁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헤쳐나가야 할 고통의 시간은 끝이 없어 보인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삶은 팍팍하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고통인 저출산 문제는 젊은이들의 어려운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처럼 힘들고 고된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젊은이들은 종종 교회 안에서도 존중받고 위로받지 못한다. 학업과 사회 생활에 쫓겨 신앙생활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함께 교회가 참으로 이들을 존중하고 귀 기울이는 모습이 부족했다는 점을 우리는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참된 희망을 길이요 진리이신 하느님과 함께함으로써 찾을 수 있음을 확신한다. 젊은이들이 자주 잃어버리는 희망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는 주님의 약속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2027년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이 대회가 단순히 규모가 큰 국제행사로 그치지 않고 전 세계 젊은이들이 만나 주님께 대한 희망을 발견하고 나누는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준비는 단순한 행사 준비가 아니라 우리 마음과 생활의 변화를 요구한다. 올해 청소년 주일이 그 준비의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2024-05-26
사설

올바른 성모신심이 필요하다

교회는 매년 5월을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며 성모님의 모범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성모성월로 지내고 있다. 성모님에 대한 공경은 초세기부터 교회 안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전통이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깊은 성모신심을 간직해왔고,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이러한 보편교회와 한국교회의 전통에 따라 오늘날에도 가톨릭신자들은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실제 신앙생활에서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신자들이 가장 폭넓게 참여하는 신심 단체가 레지오 마리애이고, 가장 사랑하고 자주 바치는 기도 중 하나가 묵주기도다. 이처럼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통해 구원의 은총을 주님께 전구해 달라는 기도를 바치는 교회 전통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심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성모 공경은 반드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마리아 공경을 우상숭배로 여겨 거부하려는 자세는 잘못된 것이다. 동시에 성모 마리아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마리아 숭배 역시 잘못된 신심 행위다. 종종 교회 안에서는 엇나간 성모 신심의 사례들이 발견되곤 한다. 특히 이러한 사례들은 허황된 사적계시를 바탕으로 확산돼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 실제로 여러 교구에서 공문을 통해 잘못된 신심 행위를 조장하는 활동에 대해 주의를 주고 있다. 대중적 신심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성숙하고 풍요롭게 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권장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교회의 공식적이고 권위 있는 가르침에 따라야 하고 겸손하고 순종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회가 인정하고 인준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2024-05-26
방주의 창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의정부교구 주교좌성당 한편에는 작은 갤러리가 있다. 이름은 ‘갤러리 평화’. 건물 외벽에는 ‘평화’를 뜻하는 단어들이 여러 나라말로 적혀 있다. 가장 크게 보이는 건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שְׁלָם)와 그리스어(εἰρήνη)다. 이 밖에도 라틴어와 영어, 중국어로 평화를 뜻하는 글자들이 십자가 형상을 이루고 있다. 벽면 자체가 십자가 희생을 통해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땅에 가득하길 기원하는 작품인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건넨 일성은 바로 평화였다. 끌려가는 당신을 내팽개치고 도망간 제자들에게 싸늘한 시선과 원망의 말을 건네도 인간적으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건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원하신다. 반면 제자들은 좌불안석이다. 복음사가들은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스승을 버리고 와서 죄송스럽긴 하지만 스승은 이미 돌아가셨고, 목숨 잘 보전하는 게 능사라고 생각해 문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는데, 그런 제자들 앞에 죽은 줄 알았던 스승이 나타나다니. 꾹꾹 눌러 왔던 죄책감이 온 존재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터져나갈 것 같은데, 스승은 온화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묘한 긴장감은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이는 성과 속, 영과 육의 대립으로 느껴지는 긴장감이다. 우리 안에 신앙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을 때, 그러니까 신앙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 일어난다. 먼저 머리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속엔 복음의 가치와 기준보다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더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치 있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마음속에는 그 가르침을 따라 살다 시쳇말로 ‘호구 잡히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떠나질 않는다. 그리하여 그 안에 뿌려진 신앙의 씨는 싹을 틔우지 못하고 말라버리기 일쑤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침묵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는 있지만 머릿속 계산이 마음을 압도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그저 감정에 지나지 않거나 더 심하게는 “나도 예수님 사랑해”라고 하는 일종의 립서비스에 그칠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은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그리스도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두고 있는 경우이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는지는 시대마다 다르지만, 주로 권력과 명예, 물질적 부였다. 하지만 요즘 사회에선 물질적 부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하다. 돈만 있으면 저절로 권력이 생기고 명예도 생긴다고들 이야기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 안에는 그 어떤 신앙의 씨앗도 그 어떤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자리할 공간이 없다.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필요한 것뿐이다. 당대의 주류 세력에게 배척을 받아 비참한 죽음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가르침과 뜻이 아닌 것은 단호하게 반박하며 이 땅에 하늘나라를 보여주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내셨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선포하신 평화는 더 큰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폭력의 부재로서의 평화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평화를 선포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일이다.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

2024-05-26
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대림동을 걸으며

공휴일 오전 11시 대림역 6번 출구. ‘다양성의 큰 숲, 대림(大林)동을 걷다’라는 일회성 모임에 열 명이 모였다. 석박사 과정의 연구자와 언론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여럿이었고 재미교포와 중국계 미국인도 있었다. 중국 선양과 옌벤 출신의 재중동포 유학생 두 사람이 안내와 해설을 맡았다. 서울 영등포구의 제일 남쪽에 있는 대림동은 공원과 녹지가 가장 적은 동네다. 1990년대까지 500명이 채 되지 않던 중국인 주민 수가 이제 1만1000명이 넘는다. 전국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 된 이곳은 주말 유동 인구가 8만 명에 이른다. 대림동 길에는 환전소와 비자 업무를 대행하는 여행사가 많이 보인다. 대림역 12번 출구에서 대림중앙시장으로 들어가면 중국말이 주로 들리고 중국식 식재료에 중국 향기가 물씬 풍긴다. 프랜차이즈 상점이 거의 없고 개성있는 가게들이라 구경거리가 많다. 대림동은 언제부턴가 범죄의 온상이라는 나쁜 이미지가 씌어졌다. 영화 ‘범죄도시’와 ‘청년경찰’의 배경이 대림동이었다. ‘청년경찰’에서는 조선족 조직폭력배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하여 난자를 적출해 매매하고,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피해자들은 장기매매 조직에 팔아넘기는 악행을 저지른다. 대림동이 ‘경찰도 피하는 무법지대’라는 대사도 나온다. 대림동 주민과 이주민 단체는 “인종차별적 혐오표현물인 영화 ‘청년경찰’ 상영으로 인격권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의 침해를 입었다”며 제작사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1심에서 패했지만 항소심에서 화해 권고 결정이 나왔다. 결국 제작사가 공식 사과를 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대림2동에 있는 대동초등학교는 이주 배경의 학생들이 90%가 넘는다. 중국인 학생이 많아지면서 한국인 부모들이 자녀들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켰고 또 입학도 꺼린다. 작년 신입생은 모두 중국인이었다. 인구 절벽 시대에 ‘이민청’ 설립이 발의되었지만 이름부터 출입국·이민관리청이다. 이주민을 ‘관리’의 대상으로, 나쁘게는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법무부의 시선이 깔려 있다. 언제까지 조국(할아버지의 나라)에 오는 재중동포들을 노동력으로만 보고 그 자녀들이 2등 시민으로 자라도록 방치할 것인가? 그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해서 살 수 있도록 한국어 수업과 한국 사회 이해 교육 등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 스며든 중국인 혐오와 조선족에 대한 편견,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사실 다문화 이해 교육은 선주민인 한국인들에게 더 긴급히 필요하다. 대림2동과 대림3동을 걸은 우리는 숨은 맛집의 원형 식탁에 둘러앉았다. 가운데 유리 원반에 음식을 올려두고 돌리면서 덜어 먹는 것이 처음인 사람도 있었다. 먹어보지 못했던 맛있는 중국 음식을 먹으면서 대림동이 친근해졌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수사(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5-26
일요한담

김대건 신부님 성상, 피에트라산타에서 조각하다

43년 전인 1981년,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미술대학을 다니며 피에트라산타에서 십여 년간 작업을 했었다. 바로 이곳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할 김대건 신부님 성상을 제작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준비시킨 것이라 생각된다. 성스러운(Santa) 돌(Pietra)이라는 뜻을 가진 피에트라산타는 이탈리아 중부 베르실리아(카라라와 피에트라산타 일대를 지칭하는 고장 이름) 지방이며, 로마에서 북쪽으로 400여 km 떨어져 있는 산과 바다(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인구 2만5000여 명이 거주하는 아름다운 조각의 도시다. 작은 도시지만 26개의 갤러리와 예술 공간이 있고 장인들과 같이 작업할 수 있는 대리석 작업장이 18곳, 또한 5개의 브론즈 공장이 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모인 조각가들의 개인 스튜디오가 셀 수 없이 많이 있는 곳이다. 그리하여 피에트라산타는 이탈리아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예술 갤러리가 집중된 역사적인 도시가 되어 수만 명의 방문객이 찾아온다. 국제예술도시에 걸맞게 이곳에서 작업을 했거나 전시했던 세계 유명 조각가들의 모형을 한곳에 모아놓은 모형박물관이 있다. 도로를 따라 건설된 로타리에는 크고 작은 조각 작품이 있고 도시 곳곳에 대리석 브론즈 작품들이 설치돼 있어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야외 조각공원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토라이(Mitorai)와 보테로(Botero)의 조각 작품을 감상할 수가 있기 때문에 밀라노와 베네치아, 피렌체에 있는 유명 갤러리들이 이곳에도 문을 열기 시작했다. 1995년 칸 야수다(Kan Yashuda)의 작품 전시가 피에트라산타의 중심에 있는 두오모 광장(Piaza dei duomo)과 산타고스티노 성당(Sant'Agostino)에서 열린 이후로 두오모 광장은 야외전시장이 되었고 산타고스티노 성당도 박물관으로 재탄생됐다. 광장에서 열리는 전시는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 동안 이어지는데 이 전시를 관람하러 전 세계에서 약 4만 명 정도가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피에트라산타는 돌이나 브론즈, 테라코타 등 어느 재료를 선택하더라도 조각을 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다. 이곳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춰진 곳으로 바다 쪽에는 하얀 백사장이 수십 km가량 이어져 있다. 산 쪽에는 올리브나 포도나무로 덮여있는 푸른 산들과 계곡이 아름다움을 뽐낸다. 아름다운 돌산에는 옛날부터 건축가와 조각가들의 재료인 하얀색 대리석과 여러 가지 다양한 색의 대리석들이 풍부하게 자리하고 있다. 16세기에 미켈란젤로도 그의 작품 제작을 위한 양질의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수개월을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곳은 좋은 음식으로 유명하다. 피에트라산타에 있는 크고 작은 레스토랑들은 예약이 필수일 만큼 인기가 좋다. 두오모 광장에는 4개의 유명한 바가 있는데 이곳에서 즐기는 와인 한잔은 특별한 시간을 선물한다. 피에트라산타가 근처의 다른 도시들보다 사람들이 붐비는 이유는 작은 예술 도시가 두오모 광장을 중심으로 걸어서 모든 곳을 체험할 수 있고 예술가들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피에트라산타는 최고의 대리석뿐만 아니라 예술을 느낄 수 있는 매우 활기찬 도시로서 예술가들의 최종 목적지가 되고 있다.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성상이 탄생됐다. 글 _ 한진섭 요셉(조각가)

2024-05-26
독자마당

[독자마당] 성모의 밤에 드리는 기도

성모님, 오늘 밤은 아름다운 밤입니다. 거리에 서성이는 외롭고 병들고 가난한 마음들이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오는 계절, 당신의 하늘빛 이름을 가슴 깊이 새기며 5월의 수목처럼 오늘은 제가 이렇게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 성모님! 당신은 자기를 온전히 포기하셨고, 누구보다도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참으셨던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겸손한 자아포기는 텅 빈 영에 충만함을 가져왔습니다. 이 완전한 자아포기는 주님의 은혜로운 섭리와 충만함을 가져왔습니다. 이 완전한 자아포기는 주님의 은혜로운 섭리와 성령의 개입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성모님의 일생은 고통과 눈물로 점철되었지만 은총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것이 천국으로 가는 여비라고 하는데, 그 절대적인 액수가 바로 무소유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그 어떤 욕심에서도 해방되어 그저 이 세상에 왔을 때처럼 맨몸으로 떠나는 삶을 터득하고자 성모님 당신께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어머니시여, 저는 한 평생 살아온 세월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도움받기보다 서로 도우며, 사랑받기보다 사랑을 주는 일에 나의 여생을 바치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보다 용서하고 십자가를 피하기보다 십자가를 즐겨 지고 살게 하소서. 지치고 피곤할 때 발걸음마다 푸른 옥빛으로 감싸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과 사람들을 저와 함께하게 하소서. 겸손의 어머니 마리아여, 저의 나이 89세, 얼마 남지 않은 여정에 주님의 종으로서 가장 값진 은총의 선물인 십자가의 고통을 잘 참아 받으며 세상 풍파 뒤에는 큰 축복이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어머니시여! 모후시여! 오늘 밤 당신의 아들이 마음 다하여 바치는 찬미와 감사와 사랑의 기도가 빈 가슴에 고이는 정화의 샘물이 되게 하시고, 온 누리 가득히 사랑의 꽃으로 아름답게 하소서. 당신의 은총 속에 자라나는 모두가 땅끝까지 구원의 등불이 되게 하소서. 5월의 햇살처럼 티 없이 맑고 포근한 어머니, 저희의 티와 나약함과 못난 회개도 모두 사랑으로 덮어주시는 어머니시여, 오늘 밤 가련한 저희는 부끄러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어머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우리의 믿음이 당신 사랑 속에 승천하는 오늘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글 _ 강병순(아우구스티노·마산교구 고성본당 상리공소)

2024-05-26
사설

전인교육과 복음화에 발벗고 나서야

한국교회는 해마다 ‘청소년 주일’을 포함해 그 전 주간을 ‘교육 주간’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2006년부터 시작된 교육 주간은 가톨릭 교육에 대한 의식을 높이고 이를 위한 구체적 실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제정됐다.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교육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교육적·영적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특히 교육 현장에서는 경쟁주의 교육, 입시 중심 교육, 인권 침해와 교사 권위의 추락 현상이 심각하다. 주교회의 교육위원회 위원장 문창우(비오) 주교는 올해 교육 주간 담화에서 이러한 현상의 밑바탕에는 생명 존중과 공동체 의식의 결여가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교육 현장에서 가톨릭적 가치에 기반한 전인교육과 복음화에 매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전인교육은 모든 교육기관이 추구하는 목표지만, ‘가톨릭’ 전인교육은 학생의 지덕체 발달뿐 아니라 영성의 발달까지 지향한다.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염두에 두고, 더욱 인간답게 각자의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교육을 통해 복음 정신으로 인간의 가치관과 생활방식, 사회제도 등을 변화시키는데에도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가톨릭 교육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실천 방안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가톨릭학교교육포럼 같은 단체들이 더 많이 늘어나길 바란다. 또한 이러한 활동에 귀 기울이고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교회의 지원도 더 늘어나야 할 것이다. 교육은 말 그대로 100년을 바라보고 이뤄야 하는 ‘백년지대계’이기 때문이다.

2024-05-19
사설

기도로 희망의 희년을 준비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9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聖門) 앞에서 열린 주님 승천 대축일 저녁 기도회에서, 2025년 희년을 선포하는 칙서 「희망은 실망하지 않는다」(Spes Non Confundit, Hope Dose Not Disappoint)를 발표했다. 이로써 가톨릭교회는 올해 12월 24일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을 열면서 시작되는 2025년 희년을 2026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까지 기념하게 된다. 교황은 이날 희년을 공식 선포하면서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힌 세상에 기쁘게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자고 권고했다. 2025년 희년의 표어는 ‘희망의 순례자들’이다. 이 표어는 너무나 절망적인 세계 상황 속에서 인류,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희망과 신뢰를 희년을 기념하는 가운데 찾을 수 있으리라는 바람을 담고 있다. 교회는 특별히 2025년 희년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 2024년을 ‘기도의 해’로 선포했다. 교황은 지난 1월 21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 삼종기도 중 기도의 해를 선포하면서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고 호소했다. 희년을 이처럼 기도로 준비하는 이유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가까이 닿아 우리 삶을 변화시키며 그럼으로써 희망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의 희망을 되새기는 2025년 희년은 오늘날 너무나 많은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 희망을 전하고 주님께 대한 신뢰를 발견하고 고백하는 기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대로 기도를 통해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체험으로 희년을 준비하고, 기도한 바를 직접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24-05-19
현장에서

[현장에서] 가운데 자리

성당에서 아기는 천덕꾸러기 신세다. 초등부쯤 되면 주일학교라도 있지만, 그 전의 어린 아이는 성당에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전례가 시작되면 대부분은 유리벽 너머에 ‘격리’되고, 아기가 얌전해 뒷자리 어디쯤 있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아기가 자연스럽게 하는 일들을 성당에서는 자연스럽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성당 가운데 자리에서는 울 수도, 먹을 수도, 기저귀를 갈 수도 없다. 혹여 신부님이 괜찮다해도 신자들의 눈총은 여전히 따갑다. 고령를 넘어 초고령이 된 한국교회에서 아기란 존재는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5월 11일 수원교구 시흥지구 중심 성당인 시화성바오로성당 가운데 자리에 어린아이들이 가득 찬 모습은 참 반가웠다. 우는 아이, 젖병을 물고 있는 아이, 두리번거리는 아이,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아이, 잠자는 아이…. 아이들은 각양각색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 있었다. 이 각양각색의 어린이들이 성당 가운데 자리에 모여 참례하는 전례에서는 어느 때보다 생명력이 느껴졌다. 물론 유아세례식이니 어린아이들이 가운데 자리를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성당에서 사제들, 봉사자들, 전례에 함께한 모든 신자들이 어린이들을 불편해하지 않았고, 또 어린이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는 모습이 따듯하게 다가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세계 어린이 날을 제정하면서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어린이들을 가운데 자리에 두고 그들을 돌보기 원한다”고 말했다. 보편교회의 흐름에 한국교회는 얼마나 함께하고 있을까? 언젠가 모든 성당에서 어린이들에게 가운데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때가 오길 손꼽아본다.

202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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