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광복과 분단의 80년, 평화를 위해 행동하는 교회가 되자

오는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살아온 세월이 80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해방의 기쁨과 분단의 비극이 겹쳐 있는 이날, 한국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책임과 소명을 되새겨야 한다. 한국교회는 일찍이 ‘화해와 일치’를 복음적 사명으로 삼아 왔다.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교회는 일찍부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한반도 정세는 여전히 긴장과 냉랭함 속에 있다. 분단의 고착화는 단지 정치적 상황만이 아니라, 국민의 인식 속에도 상처와 무관심을 남기고 있다. 이제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를 넘어 ‘행동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민족의 아픔을 기억하고, 분단의 현실에 침묵하지 않으며, 평화와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북향민과 이산가족 등 분단의 직접적 피해자들을 향한 연대와 돌봄은 화해의 첫걸음이다. 동시에 정치적 이념을 넘어 하느님 사랑 안에서 북한의 형제를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꿔야 한다. 진정한 화해는 대화와 용서에서 비롯된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듯이, 교회는 남과 북 모두를 ‘우리 민족’으로 끌어안는 포용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분단 80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 교회가 먼저 손을 내밀고, 민족 공동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침, 한국 주교단이 오는 광복절을 앞두고 광복과 분단 80주년을 기념하는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전망이 담긴 이 성명서가 평화를 위해 행동하는 교회가 되는 마중물이 되길 기대한다.

생명을 더 쉽게 죽이는 법안은 철회돼야 한다

최근 국회에서 발의된 두 건의 '모자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해 주교단이 강력히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우리는 이 법안들이 생명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유감을 표하며, 주교단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해당 법안들은 수술과 약물에 의한 모든 방식의 낙태를 허용하고, 생명 파괴 행위를 일상적 의료 행위로 규정하며, 낙태에 공적 재원까지 지원하려 한다. 이는 윤리적인 면에서 반생명적이기도 하지만, 생명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헌법적 의무를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는 수정 순간부터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부여된다는 가르침을 견지해 왔다. 교회는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과 관련해서도 안타까움을 표시해 왔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적 합의와 법적 판단을 존중하고, 임신과 출산의 부담과 고통을 여성들이 짊어져야 하는 현실을 고려,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대체 입법을 촉구해 왔다. 헌재 판결 후 입법 공백 기간에 발생한 참담한 현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만약 이러한 입법안이 법률로 제정된다면, 신생아와 다름없는 36주 차 태아를 출산시킨 후 살해한 범죄 행위가 정상적인 의료 행위로 자행될 것을 우려한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은 존중돼야 하지만, 그것이 곧 태아의 생명권을 말살하는 논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자기 결정권은 생명을 죽일 자유가 아니라, 생명을 품고 기를 수 있도록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구조 속에서 보장되는 것이다. 생명을 더 쉽게 죽일 수 있는 법안은 철회돼야 하며,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입법의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

독자마당

[독자마당] 장미꽃 한 송이의 믿음에도

오늘은 꼭 실행에 옮기리라 결심했다. 요즘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말하지 않고 묵묵히 괜찮다고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불안과 불신의 마음이 엉켜 내 속이 편치 않았다. 저녁쯤,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초등학생인 아들과 함께 연산동 집에서 출발하여 서면까지 50분 남짓 지하철을 타고 내려 걸어서 남편 회사 부근에서 망을 보다가 퇴근하는 남편을 미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초등학교 5학년쯤, 내 아들 또래로 보이는 한 사내아이가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나에게 오더니 무작정 꽃을 사라고 했다. 내가 사지 않겠다고 해도 내 옆에서 가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장미꽃을 사라고 졸랐다. 내 아들 또래라서 왠지 측은한 마음에 3천 원을 주고 장미꽃을 샀다. 집에 가서 ‘성모님 상 옆 꽃병에 꽂아드려야지’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내 마음속에 저절로 평온이 찾아왔다. 성모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는데, 지금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싶어 부끄러운 마음에 아들의 손을 잡고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여는 순간, 매캐한 연기 냄새가 확 몰려왔다. 가스레인지 위 음식은 새까맣게 타고 있었고 집 안은 온통 연기로 꽉 차서 깜깜했다. 놀라서 얼른 가스불을 끄고 모든 창문을 연 뒤 안방 문을 여니, 아홉 살 어린 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무엇에 홀린 듯 성모님 앞에서 장미꽃을 들고 한참을 멍하니 그렇게 서 있었다. 마음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생각이 오갔다. 나에게 꽃을 사라고 졸라댄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모골이 송연했다. 그 사내아이를 누가 나에게 보냈을까? 왜 떠나지 않고 장미꽃을 사라고 끝까지 졸라댔을까? 성모님께서 이렇게 미약한 믿음에도 하해와 같으신 자애를 베풀어 주신다고 생각하면, 경건한 두려움으로 반성의 기도를 올리게 된다. 벌써 삼십여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게 된다. 초라한 나의 믿음에 너무나 큰 은혜로 지금까지 우리 가정을 이렇게 다복하게 지켜주신 성모님께 깊이깊이 감사드린다. 글 _ 김희님 마리아(부산교구 장림본당)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2면
일요한담

밥심천심, ‘명동밥집’

세례명을 지어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가끔 뵙고 있다. 그 자리에는 가까이 지내시는 신부님과 처남 신부님이 동석하고는 했다. 신앙생활에서 마주치는 고민거리를 여쭙기도 했고, 사제의 일상에서 나오는 소탈한 이야기들로 언제나 따듯한 저녁이 되고는 했다. 어쩌면 사제와 평신도라는 차이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후배들의 다정한 해후 같은 것이어서 실로 감사할 따름이다. 그 자리에서 어느 날 ‘명동밥집’을 알게 되었다. 한 분은 책임을 맡고 있고, 한 분은 변복한 암행어사처럼 숨은 봉사자였다. ‘노숙인과 우리는 종이 한 장 차이도 나지 않습니다’, ‘봉사가 아니라 위안을 얻는 겁니다.’ 그날 그렇게, 한 달에 두 번 ‘밥집’에 가는 일은 시작되었다. 밥집에 와서 밥을 먹지 않는다 밥은 밥솥에서 밥그릇으로 옮겨가고 닭고기가 들어간 카레에 계란 프라이 미역국에 김치까지 1식 1국 3찬 밥은 바람결 따라 펄럭이는 천막을 따라 수만의 바람이 되어 바람으로 흘러간다 카레가 묻은 밥그릇과 미역이 붙은 국그릇과 고춧가루 새빨간 스테인리스 종지가 끝도 없이 쉬지 않고 몰려드는 주방 한 켠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시편 8,4) 바람이 모여 바람이 인다 수만의 바람이 인다 발바닥이 아려오는 늦은 오후 밥집에 와서 밥을 먹는다 - 졸시 <수만의 바람 - 명동밥집 1> 전문 처음에는 식판조가 되어 주방에서 배식대로 음식 나르는 일을 했고, 가끔씩 설거지를 하고 테이블을 닦았다. 묵묵히 음식을 담는 배식조와 그것을 나르는 홀서빙의 모습을 보노라면, 수도원의 대침묵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밥집 손님을 부르는 호명 소리, 식판 부딪는 소리, 발걸음 소리 사이로 유난히 바람 소리가 크게 들리는 풍경이었다. 언제나 어느 때나 밥심이 천심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헐벗은 몸으로 밥집을 찾는 노숙인들이라고 하여 영혼까지 황폐화된 건 아니다. 그들도 우리도 밥심으로 살고, 그것을 하느님 마음으로 알고 배가 부르는 사람이라는 걸 ‘한 달에 두 번’ 깨달으며 지내고 있다. 글 _ 김재홍 요한 사도(시인·문학평론가, 가톨릭대 초빙교수)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2면
사설

광복과 분단의 80년, 평화를 위해 행동하는 교회가 되자

오는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살아온 세월이 80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해방의 기쁨과 분단의 비극이 겹쳐 있는 이날, 한국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책임과 소명을 되새겨야 한다. 한국교회는 일찍이 ‘화해와 일치’를 복음적 사명으로 삼아 왔다.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교회는 일찍부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한반도 정세는 여전히 긴장과 냉랭함 속에 있다. 분단의 고착화는 단지 정치적 상황만이 아니라, 국민의 인식 속에도 상처와 무관심을 남기고 있다. 이제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를 넘어 ‘행동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민족의 아픔을 기억하고, 분단의 현실에 침묵하지 않으며, 평화와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북향민과 이산가족 등 분단의 직접적 피해자들을 향한 연대와 돌봄은 화해의 첫걸음이다. 동시에 정치적 이념을 넘어 하느님 사랑 안에서 북한의 형제를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꿔야 한다. 진정한 화해는 대화와 용서에서 비롯된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듯이, 교회는 남과 북 모두를 ‘우리 민족’으로 끌어안는 포용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분단 80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 교회가 먼저 손을 내밀고, 민족 공동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침, 한국 주교단이 오는 광복절을 앞두고 광복과 분단 80주년을 기념하는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전망이 담긴 이 성명서가 평화를 위해 행동하는 교회가 되는 마중물이 되길 기대한다.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3면
현장에서

동티모르의 희망이 되길

폭염이 막 몰려오기 시작한 7월 24일 낮 서울 경복궁도 달아올랐다. 동티모르 리퀴도이에서 온 현지 고등학생들이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한복을 입고 등장했다. 그렇게 그들의 ‘경복궁 투어’에 동행했다. 날씨는 순탄치 않았다. 경복궁 구조상 그늘이 많지 않아 긴팔인 한복을 입고 다니기에는 더 불편했다. 하지만 궁내 시설들을 구경할 때면 안에 뭐가 있는지 고개를 쑥 내밀고 열심히 내부를 둘러본다. 사진 찍는 데에도 적극적이다. 동행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선교사 이형우 신부는 스마트폰으로 학생들을 찍어 주며 연신 “한복 입으니 다들 예쁘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애정이 남달라 보였다. 한 달간의 한국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가 현지에서 학업을 잘 이어간다면, 다음에는 유학생으로서 다시 한국에 올 수 있다. 학생들은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고향에 돌아가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동티모르의 발전에 이바지하길 기대하고 있다. 이 일련의 프로젝트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동티모르 학생들의 질 높은 교육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 확실히 똘똘하고 총명한 모습이 아이들이었지만, 아직은 영락없는 ‘학생들’이었다. 한 학생은 수원 스타필드에 있는 ‘별마당 도서관’에 꼭 가보고 싶다고 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인증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게 요즘 외국인들 사이에 유행이라고 한다. 학생들 표정은 무더위 속에서도 호기심, 앞으로의 체험들에 대한 기대감도 역력해 보였다. 마치 이날 날씨처럼 모든 게 순탄치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들과 동행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학생들의 미래와 동티모르를 응원하게 된다.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3면
나의 하느님 공부

“다행이야, 사람들이 안 믿어서”

나는 아직도 밤마다 악몽을 꾸고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였다. 더구나 이 사건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도 나에게는 작지만 의문이다. 영화 <레퀴엠>(동명의 미국 영화가 아니라 2006년도 독일 영화)과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에밀리 로즈의 퇴마) 2005>가 그들이다. 이 두 영화는 모두 1976년 독일에서 일어난, 아넬리즈 미헬의 구마 의식으로 인한 사망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이비 종교가 아니다. 직접 교구의 허락을 받은 가톨릭의 두 신부가 이 구마를 집전했었다. 미헬은 당시 대학 휴학 중이었고, 죽었을 때 체중은 탈수와 영양실조로 30kg에 불과했다. 두 신부는 물론 부모까지도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유죄가 확정되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왜 30년도 더 지나 영화화가 될 만큼 화제가 되었던 것일까. 두 영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질문에 답해간다. 독일 영화 <레퀴엠>이 좀 더 현대적이고 심리학적 방식으로 그리고, 미국 영화는 할리우드의 전형적 방식으로. 미헬은 16살 때부터 간질 발작을 보였다. 정확하게 간질은 아니었다. 의학도 정확히 그 원인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원인 불명의 기억상실, 환청과 환시 성물이나 교회에 대한 혐오, 극도의 종교적 불안 등이 증상으로 나타난다. 바야흐로 1970년대 독일의 대학. 68혁명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는 독일에서 미헬이 이런 증상을 호소할 자리는 없었다. 그녀의 신앙은 비웃음을 당했고, 가족은 구태의연했다.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전통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란 미헬이 이런 분위기에서 외로웠을 것도 짐작이 된다. 친구들이 끝까지 병원행을 권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다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증상은 악화했고 미헬 자신도,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구마를 허락한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정신병이든 빙의든 한 젊은 여성이 그렇게 죽어가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처음으로 영화 말미에 악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법정에서 증거로 제시된 녹음테이프를 통해서였다. 모두 여섯 명으로 자신을 소개한 그들의 실제 목소리가 – 미헬의 입을 통해 나오지만, 그 여섯 명의 목소리는 모두 다르다 - 영화 말미에 소개된다. 우리가 살면서 악마의 목소리를 듣게 될 날이 또 있을까? 가장 끔찍했던 것은 묵주에 관한 질문이었다. 신부가 묻는다. “왜 묵주를 무서워하지?” 그러자 악마가 대답한다. 여러분은 설마 악마의 대답이 순하고 논리적이라고 상상하지는 않으시리라. 그는 단절적인 단어로 중얼거리며 혼란스럽게 대답한다. 정리하자면 대답은 이랬다. “왜냐하면 그게 우리를 방해해.” 그리고 악마는 웃는다. “하지만 아무도 기도하지 않아. 다행이야 사람들이 안 믿어서.” 법정은 유죄를 인정했으나 신부 두 사람에게는 모두 집행유예를, 부모에게는 그동안 그들이 겪었던 고통이 어떠한 형벌보다 더했으리라는 것을 참작하여 석방한다. 녹음테이프를 통해 생생히 전해지는 악마의 목소리를 중세 법정도 아닌 곳에서 인정하기도, 그렇다고 거짓말로 치부해 버리기도 난감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여름, 나는 두 영화 덕에 묵주를 꼭 붙들고 살고 있다. 그들이 또 이렇게 말할까 봐 말이다.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 우리가 없다고 말하는 거야. 다행이야, 그들이 안 믿어서.”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2면
사설

생명을 더 쉽게 죽이는 법안은 철회돼야 한다

최근 국회에서 발의된 두 건의 '모자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해 주교단이 강력히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우리는 이 법안들이 생명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유감을 표하며, 주교단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해당 법안들은 수술과 약물에 의한 모든 방식의 낙태를 허용하고, 생명 파괴 행위를 일상적 의료 행위로 규정하며, 낙태에 공적 재원까지 지원하려 한다. 이는 윤리적인 면에서 반생명적이기도 하지만, 생명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헌법적 의무를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는 수정 순간부터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부여된다는 가르침을 견지해 왔다. 교회는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과 관련해서도 안타까움을 표시해 왔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적 합의와 법적 판단을 존중하고, 임신과 출산의 부담과 고통을 여성들이 짊어져야 하는 현실을 고려,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대체 입법을 촉구해 왔다. 헌재 판결 후 입법 공백 기간에 발생한 참담한 현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만약 이러한 입법안이 법률로 제정된다면, 신생아와 다름없는 36주 차 태아를 출산시킨 후 살해한 범죄 행위가 정상적인 의료 행위로 자행될 것을 우려한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은 존중돼야 하지만, 그것이 곧 태아의 생명권을 말살하는 논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자기 결정권은 생명을 죽일 자유가 아니라, 생명을 품고 기를 수 있도록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구조 속에서 보장되는 것이다. 생명을 더 쉽게 죽일 수 있는 법안은 철회돼야 하며,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입법의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3면
방주의 창

생명은 선물! 생명은 책임!

2025년 7월 15일 남인순 의원은 ‘모자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의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살펴봐야 한다. 여러 쟁점이 있지만, 가장 중대한 것은 국가의 생명존중 책임을 훼손했다는 점이다. 우리 헌법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국가의 의무를 명시해 왔다. 태아는 여성이 출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 생명이기에 존엄하다. 만일 여성의 출산 결정이 태아 존엄의 근거가 된다면, 생의 말기 생명도 누군가 돌봐주기로 ‘결정’했을 때만 존엄하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이는 생명의 시작을 보호하지 않는 사회가 결국 생명의 마지막도 보호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선택적 약자 정의는 설득력이 없다. 결국 그것은 법적·정치적 위선에 불과하다. 생명의 존엄을 외치면서도 가장 연약한 생명을 외면하는 정치인들에게 이 위선은 그대로 드러난다. 비록 헌법불합치 결정은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 결정은 결국 법 테두리 안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통해 낙태가 허용된다고 보는 논리를 열어놓았다. 그 출발점은 ‘태아 살해가 정당하다’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어떤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그 권리가 정당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권리는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행사되기 때문이다.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이는 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게 된다. 낙태의 경우, 그 사회적 압력은 제도적으로 건강보험과 의료진에게 전가되어, 낙태 수행을 위한 제반 조건을 뒷받침하라는 요구로 작용하게 된다. 이 논리 안에서 태아의 생명권은 이미 배제됐고, 여성의 자기결정이라는 이름 아래 자유와 권리의 남용은 예고되어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2020년 법무부 산하 양성평등 정책 위원회가 제출한 권고안이다. 이 권고안은 임신 주수와 상관없이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라고 주장했고, 이는 출산 직전까지도 낙태를 허용하라는 요구였다. 이 권고안이 말하는 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태아를 법적으로 보호하지 않는 체계를 만들겠다는 것이었고, 사회 전체에 걸친 생명경시 인식에도 분명한 영향울 끼쳤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2024년, 한 20대 여성이 임신 36주 차에 낙태한 뒤 유튜브에 그 과정을 공개한 일이다. 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죄책감조차 없는 태도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낙태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하며 자기연민에 빠져 있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36주 태아가 몸 안에서 움직일 때 아무 감각도 없었던 것인가?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 정말 몰랐던 것일까? 그러나 이미 2020년 권고안은 이러한 일이 법에 따른 제재 없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사회는 그런 일이 가능하도록 방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발의된 ‘모자보건법 일부개정안’은 임신 주수와 무관하게 낙태할 권리뿐만 아니라, 태아의 생명을 종결하는 시술과 약물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고까지 한다. 이는 공적 자금의 윤리적 배분 기준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건강보험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제도이지, 생명을 제거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방심하는 사이, 태아의 생명뿐 아니라 의료인의 양심권도 침해될 수 있다. “깨어 있어라”(마태 24,42)는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들리는 오늘이다. 인간 생명은 보호하고 증진해야 할 우선적 가치라는 점에는 모두 이의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7월 25일, 이번에는 이수진 의원이 무제한 낙태 허용을 위한 ‘모자보건법 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겉으로는 ‘약자 보호’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특정 집단의 이해만을 반영한 편향적 입법이다. 이는 법과 정책이 보편적 정의가 아닌 정치적 입장과 선택적 가치에 따라 좌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의의 기준이 자의적으로 설정될 때, 그 결과는 사회적 혼란과 도덕적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3면
나의 하느님 공부

모든 어미들의 모범

친구 하나가 딸 때문에 고통받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위 때문에 고통받는 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집도 장모와 사위가 대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이 들어 알게 되었지만 사람 사이의 갈등이 생기면 일단 거리를 두는 것이 첫 번째 처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나의 충고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은 마흔이 다된 딸의 일상을 어미인 내 친구가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안다. 어미들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유혹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그의 하느님이 되고 싶은 것 말이다. 비록 개신교이나 신앙이 깊은 그였기에, 하느님께 맡기고 모든 것을 침묵하기를 권했으나 “자신은 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말로 내 충고는 거부되었다. 그가 딸 인생에 개입하려 하듯이 나 또한 친구의 인생에 개입하려 하는 것 같아 대화를 끊었다. ‘성모님께서 십자가 아래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던 것을 떠올려봐’ 했지만, 그것 또한 공허한 메아리가 되리라. 외람되지만 나는 가급적 우리 순교성인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공감 능력 과잉으로 고통받는 터라 그랬다. 그러나 주교회의에서 발간한 「한국천주교 성지순례」 책자를 들고 성지를 방문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당연히 그중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곳을 주목하게 되었다.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추자도, 거기에 아들 황경한을 놓고 떠난 정난주 마리아를 알게 된 것은 그때쯤이었다. 말들이 사지를 묶어 끌고 가며 젊은 육체를 생으로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으로 남편 황사영을 잃고 난주 마리아는 시어머니와 함께 두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유배길에 오른다. 아시다시피 정약용의 조카이며 황사영의 아내, 정하상 바오로의 누이였던 그녀는 유복한 양반 집안에서 자랐다. 제주로 유배 가는 길에 그녀는 몰래 감춰놓았던 패물들을 사공에게 다 주며 추자도에 들러 거기에 아기를 놓아두고 가자고 애원한다. 제주에 가서 관노로 살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죄인의 아들로 손가락질받으며 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감옥에서 이미 아기 경한의 옷에 이름과 생년 집안을 수놓아 둔 후였다. 햇볕이 작열하는 갯바위 위에 강보에 싸인 아기를 두고 떠나는 난주 마리아의 신앙 이야기는 울음을 참기 힘들었다. 세 아이를 낳고 키워본 어미인 나로서는 차라리 일찌감치 내가 죽는 것을 선택할 것이며, 그도 아니라면 차라리 아이가 죽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을 터였다. 실종은 죽음보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대체 얼마만 한 신앙이 아기를 갯바위 위에 놓는 모험을 택하게 한 것일까. 모세의 어머니도 나일강에 모세를 띄우고 모세의 누이를 시켜 지켜보게 하였는데 난주 마리아의 경우 이는 그보다 더 끔찍한 형벌 아닌가. 그녀는 아주 훗날 아이가 오씨 집안의 어부에게 발견되어 양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의 관노가 되어 60여 세의 일생을 산다. 살아생전 그들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성모님께서 나중에 요한 사도와 함께 제법 긴 인생을 사신 것과 비슷하다. 그녀는 아직 성녀도 복자도 아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성인의 삶이 있을까. 이 치욕을 견디며 산 그녀의 신앙은 어떤 순교 성인의 삶보다 우리를 울린다. 이 고되고 치욕스러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이 어떤 자세여야 하는지 그녀보다 더 가르쳐 주는 스승이 있을까 싶다. 그녀야말로 신앙을 가진 모든 어머니의 모범, 가장 성모님을 닮은 우리의 신앙 선조가 아니실까. 진도에서 추자도로 떠나는 배의 이름이 산타 모니카인 것은 우연일까. 아무래도 추자도를 방문하게 되면 오래오래 그 갯바위에 앉아 기도하게 될 것 같다. 난주 마리아, 우리 모든 어리석은 어미들을 위해 빌어주소서.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22면
독자마당

[독자마당] 코끼리 때

땡볕이 내리는 정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 폭풍우가 올 것 같은 바람이 부는 날, 경북 의성에 다녀왔다. 문화마을길 6-5 하얀 문 앞에 서니 지난 4월 선종하신 두봉 주교님의 ‘기쁘고 떳떳하게’ 좌우명이 새삼 눈가를 촉촉하게 하는 날이다. ‘세상에 예수님의 모습을 더 보여주고 가셔도 되었는데…’ 하면서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어쩌다 시작한 독서 모임이었다. 서로에게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 오래되었다. 가족사와 서로의 걱정을 아는 사람들이다. 만나면 정답고 즐겁다고 지은 이름이 ‘독서 정겨미’다. 창의성이 조폭 이름 짓는 경찰도 울고 갈 수준이다. 창의성이 늙어감의 즐거움이다. 또 하나의 좋은 점은 힘 빼고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믿음이 가장 강한 크리스티나의 신앙 설명을 잠시 듣고 자리를 옮겼다. 아녜스는 취향에 맞는 차를 섬세하게도 챙겨왔다. 누가 누가 가장 남을 잘 웃기나 하는 시간이다. 크리스털 목소리의 소유자이자 우아한 크리스티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재야 개그우먼 아녜스를 이길 수 없었다. 개그 감각은 하느님이 주신 재능이다. 언젠가 빛을 보게 될 테니 더 갈고 다듬으라고 우리는 아녜스를 격려했다. 이번에 크리스티나가 독서한 내용을 말했다. 그녀는 책 제목을 말했다. 동화이지만 어른을 위한 동화 같았다. 내용이 어렴풋하지만 적어본다. 목욕탕이 있었다. 손님으로 코끼리가 때를 밀고 갔다. 주인은 목욕탕이 더러워져 코끼리보다 작은 하마를 받았다. 그런데 그 동물 역시 목욕탕을 더럽혔다. 그래서 하마보다 작은 동물, 그보다 작은 동물을 차례차례로 받았다. 마지막에는 화가 난 주인이 개미만 받는다고 했다. 개미가 목욕탕에서 안 나오자, 주인이 탕 안으로 들어가 봤다. 개미는 커다란 수챗구멍에서 발견되었는데, 알고 보니 코끼리의 때 때문에 익사하지 않은 것이다. 때가 수챗구멍을 막고 있었다. 여기까지 줄거리를 듣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쓸모 있음을, 모든 것이 귀함을 다시 깨달았다. 하찮은 때가 아니었다. 우리는 기쁘게 살자고 결의하고 대구에서 헤어졌다. 만물이 지어진 이유는 하느님이 아신다. 오늘 아침 읽은 성경 구절 또한 깨달음과 무관하지 않다. 이사야 44장 21절이다. “야곱아, 이것을 기억하여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나는 너를 잊지 않으리라.” 우리는 하느님께서 빚으셨다. 어디에 있든 소중하며 필요한 존재다. 떳떳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글 _ 정영란 가타리나(대구대교구 월성본당)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22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