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부당한 법·정책 맞서 이주민 권리 보장 힘써야

한국 내 이주민은 2024년 말 기준 265만 명에 이르며, 이는 전체 인구의 5%에 해당한다. 그러나 법적·정책적 보호는 여전히 미흡하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결정 취지를 거스른다. 인권 보호가 아닌 통제를 우선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임시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임시 구제책 또한 추가 대책 없이 오는 31일 종료된다. 법의 테두리 밖 이주민, 그리고 한국이 모국이나 다름없는 미성년 아동을 추방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 교회는 이주민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돌봄과 연대의 정신을 줄곧 강조해 왔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여러 차례 이주민을 향한 환대와 사랑을 촉구하며, “이주민과 난민은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존재이며, 그들을 환영하는 것은 복음의 요구”라고 했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교회는 이주민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올 2월 국내 각 교구 이주사목위원회가 미등록 이주아동의 건강권을 위해 네트워크를 꾸렸다. 한 수도회가 운영하는 경기도 광주 ‘까리따스 이주민 초월센터’는 이주민을 위한 기본적인 지원활동과 더불어 본당과 지역사회를 아우르는 연대의 공동체 구현의 중심축으로 자리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이주민 사목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단순한 복지 차원을 넘어,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포괄적인 접근과 사목이 필요하다. 정부의 부당한 법과 정책에 대응하며, 이주민의 권리 보장에 앞장서야 한다. 이주민 사목은 선택이 아니라 본질적 사명임을 다시금 되새길 때다.

교황과 세상을 위한 기도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심각한 호흡기 질환으로 로마 제멜리병원에 입원한지 벌써 한 달째다. 다행스럽게도 교황청은 다소간 건강을 회복한 교황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3월 16일 공개했다. 그간 교황은 여러 차례 호흡 곤란을 겪으며 고비를 맞아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여전히 상당 기간의 치료를 요하지만 큰 위기는 넘은 듯하여 반가운 마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교황 선출 12주년을 맞았다. 교황은 지난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에 선출돼 수많은 도전에 직면한 가톨릭교회의 면모를 일신해 왔다.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언제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면서, 교회가 완고함에서 벗어나 자비와 사랑을 향하게 이끌었다. 불의에 단호하면서도 공감 어린 유머를 잃지 않는 소박한 모습의 교황에 모든 이들이 매료됐다. 교황은 특별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는, 참되게 시노드적인 교회로의 변모를 이끌고 있다. 비록 어떤 이들은 여전히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 변화에 저항하고 있지만 그러한 논란마저도 시노드 교회의 특징임을 우리는 깨닫고 있다. 동시에 그는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항상 가장 먼저 눈길을 돌리고 교회와 세상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교황의 건강 악화로 인해 일각에서는 사임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물론 교황은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결단처럼,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로 교황직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에는 사임의 길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와 세상은 그의 헌신을 필요로 한다. 주님의 섭리가 마침내 온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이끌 것임을 믿으며, 종들의 종인 교황을 위한 기도,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에 더욱 힘쓸 때다.

일요한담

‘깔’을 보는 즐거움

도깨비 풀의 씨앗에 바늘을 달아주기까지, 피조물이 졸랐을 하소연과 창조주가 조아렸을 사랑을 상상했다. 오른손과 왼손을 마주 들고, 그림자놀이를 한번 해 볼까? “이런 천덕꾸러기로 빚어 두시면 어떻게 살란 말이에요?” “네가 어때서? 너무 다 가지려고 하지 마라!” “그래도 온갖 잘난 것들이 설칠 텐데, 그 속에서 살아갈 일이 막막하거든요.” “음~ 알겠다. 너의 씨앗에다 바늘을 달아줄게. 널 깔보는 것들이 있으면 어디든 달라붙어서 그들이 가는 곳까지 가서 함께 살아 보아라.” 껄끄러운 그놈의 가시 바늘을 뜯어내어 아무데나 던지다 보니, 신작로 옆 풀숲이 온통 도깨비풀 천지가 된 이유는 그래서 그렇게 된 게 틀림없다. 어쩌다 집에까지 붙어 간 풀씨는 애지중지 기르는 화분의 귀퉁이에서도 싹을 틔웠으니, 이 귀찮은 도깨비 풀이 번창한 것은 순전히 하느님의 편애가 빚은 실수 때문이야. 하하하. 성깔, 빛깔, 때깔, 맛깔처럼 ‘깔’이라는 글자가 붙은 말들이 있다. 창조론을 지나 진화론의 페이지에 실린 단어이다. 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는 이 말마디는 서로의 관계나 비교를 드러낼 때 효과를 발한다. “저 성깔을 건드리면 골치 아파!”처럼 그의 특징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때 풍겨 나오는 아우라 같은 것이 바로 ‘깔’이다. 예술가들은 이 ‘깔’을 수집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데, 문자언어가 아닌 조형언어로 의사를 전달하려면 사물의 특징을 분명히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그것답게 하는 그것만의 특징’이 그들의 그물에 포집되고, 증폭과 과장의 단계를 거치며 재탄생되어 전시장에 진열되는 것. 이것이 예술품이다. 그러고 보면, 작품의 매력도 어쩌면 도깨비 풀씨의 바늘과 같아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예술가는 도무지 친절하지가 않다. 친절하면 오히려 매력이 없고 신비롭지도 않다고 어떤 평론가가 내게 말해주었다. 그 불친절 속에서 독자의 호기심과 미의식이 성장하게 된다나? 충분히 수긍이 되는 말이다. 암튼, ‘깔’을 대하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거북한 일이기도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호불호가 많은 주목거리이고, 독을 품은 보약이다. ‘깔’을 채집하러 마실돌이를 나선다. 풀잎들은 하나같이 태양의 행로를 따라 목을 빼고, 시냇물의 송사리는 흐름을 거스르고, 언덕 위의 깃발은 뒤로 펄럭인다. 이 단순한 섭리로도 얼마나 많은 피조물이 헤매던 길을 찾게 되는가? 내 그릇이 작아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가! 작업장의 대나무 울타리도 바람에 서걱대며, “뭐하노? 지금 뭐하노?” 그러다가, 돌아와 작업대에 서면, “그거다! 맞다 그거다!”하고 응원가로 바뀐다. 도시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자연은 신이 만들었다. 도시는 자연에게 경계의 대상이어도, 자연은 도시에게 커다란 선물이다. 그래서 자연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예술행위는 누군가의 처음을 향한 질서회복운동이며 신에 대한 순명이다. 아니, 예술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작품의 가격이 얼마라는 둥, 누가 어느 경매에서 어떤 작품을 사들였다는 둥, 마치 허망한 불꽃놀이 같은 그 가식의 너머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깔의 줏대로 바로 서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하느님의 영과 함께 찬찬히 바라볼 일이다.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2면
현장에서

성령 안에서의 재회를 기다리며

경북 청송군 경북북부제1교도소 교육관에서 진행된 교정 사목 현장 취재는 교도소 관계자분들과 사단법인 꿈나눔 재단, 수용자분들의 큰 협조로 이뤄졌다. 소공동체 모임 후 개별 인터뷰 시간, 방문 전 미리 전달해드렸던 질문에 한 분씩 다가오셔서 건넨 답변지에는 손 글씨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컴퓨터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감 27년째라는 한 수용자는 “사회에 있을 때 자장면이 2000원 정도 했던 것 같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새삼 이곳이 사회와 동떨어진 곳임을 느꼈다. 얼마 전 기자가 보도한 꿈나눔 재단의 ‘네팔바람부 폴 직업기술학교’ 설립 기사 얘기가 나왔다. “기사 잘 읽었다. 스크랩해서 붙여놨다”는 수용자분의 말에 가톨릭신문을 교정 시설에 후원하는 분들께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마무리하려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꿈나눔 재단 신원건 이사장은 자신이 끼고 있던 묵주 팔찌를 빼서 오늘 모임에 새로 온 수용자분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동행한 꿈나눔 재단 후원자 김미자 씨도 팔에서 묵주 팔찌를 뺐다. 생각해 보니 내 팔목에도 언젠가 한 교구 주교님께 받은 묵주 팔찌가 걸려있었다. 신기하게도 세 명 모두 비슷한 나무 묵주 팔찌였다. “제 것은 주교님께 받은 묵주 팔찌에요.” “아이구야, 오늘 새로 온 함영(가명) 씨가 주교님 것으로 가져요.” 주교님께 받았다고 해서 더 효험(?)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예비신자가 됐다는 두 분께도 묵주 팔찌를 드리고 인사를 나눴다. 기도 안에서, 또 교회와 세상에서 성령과 함께 다시 만날 것을 기다리며.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3면
사설

부당한 법·정책 맞서 이주민 권리 보장 힘써야

한국 내 이주민은 2024년 말 기준 265만 명에 이르며, 이는 전체 인구의 5%에 해당한다. 그러나 법적·정책적 보호는 여전히 미흡하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결정 취지를 거스른다. 인권 보호가 아닌 통제를 우선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임시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임시 구제책 또한 추가 대책 없이 오는 31일 종료된다. 법의 테두리 밖 이주민, 그리고 한국이 모국이나 다름없는 미성년 아동을 추방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 교회는 이주민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돌봄과 연대의 정신을 줄곧 강조해 왔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여러 차례 이주민을 향한 환대와 사랑을 촉구하며, “이주민과 난민은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존재이며, 그들을 환영하는 것은 복음의 요구”라고 했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교회는 이주민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올 2월 국내 각 교구 이주사목위원회가 미등록 이주아동의 건강권을 위해 네트워크를 꾸렸다. 한 수도회가 운영하는 경기도 광주 ‘까리따스 이주민 초월센터’는 이주민을 위한 기본적인 지원활동과 더불어 본당과 지역사회를 아우르는 연대의 공동체 구현의 중심축으로 자리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이주민 사목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단순한 복지 차원을 넘어,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포괄적인 접근과 사목이 필요하다. 정부의 부당한 법과 정책에 대응하며, 이주민의 권리 보장에 앞장서야 한다. 이주민 사목은 선택이 아니라 본질적 사명임을 다시금 되새길 때다.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3면
나의 하느님 공부

사랑이 밥 먹여 준다

아주 오래된 어느 날, 그러니까 지금은 마흔이 다 되어가는 우리 딸이 고3이었던 날, 나는 당시 수원교구의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새벽 미사에 다녀온 딸이 아침을 먹으며 호들갑스럽게 내게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오늘 우리 본당 신부님 어디 가셨는지 다른 신부님이 오셨어. 이탈리아 사람이래. 그분은 성남시에서 노숙자들을 위한 밥 나눔을 하고 계신다고 자신을 소개하셨어. 그러더니 어눌한 한국어로 강론을 짧게 하시는 거야. 이렇게. ‘여러분 사람들은 노숙자들에게 묻습니다. 왜 술 먹습니까? 왜 일하지 않습니까? 왜 희망 안 가집니까? 하고요. 그러나 나도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건 꼭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일까요?” 나는 이십여 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도 그 강론을 기억한다. 내가 들은 – 실은 딸이 들은 - 강론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게 감동적인 말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분이 운영하시는 곳이 ‘안나의 집’이었다고 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신부님은 30세 때 한국에 오셔서 성남시의 노숙인들에게 밥을 제공하시는 일을 40년이 다 되도록 지금도 하고 계신다. 그 후로 바로 서울로 이사를 가느라 안나의 집에 찾아가지 못했지만, 특별한 날이 오면 나는 그분과 노숙자들을 기억했고 그곳에 약간의 봉헌을 했다. 그리고 딸과 그분 이야기를 더 나눌 일은 없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지나가고 딸은 유럽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다녀와 그녀가 말했다. “엄마 인천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뜨자마자 미친 듯이 흔들렸어.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나도 너무 무서웠어. 이러다가 죽는 거구나 싶어 기도했어. ‘하느님 제가 지금 죽는다면 죽으면서 받는 이 고통을 안나의 집과 그 이탈리아 출신 김하종 신부님께 봉헌하니 받으세요’ 그랬는데, 그 순간 비행기가 흔들림을 딱 멈췄어. 이거 진짜야.” 딸은 내 얼굴이 영 마뜩잖아 보였는지, 진짜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순간 몇 가지 생각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만일 죽는 일이 있다면 나도 몇 번 봉헌하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아이들, 우리나라의 평화, 북한의 해방 같은 말들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대학을 막 졸업한 젊은이인 딸이 자신의 목숨이 죽는다 치고 그걸 안나의 집을 위해 봉헌한다니 그게 더 놀라웠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아니야 믿어. 집채만 한 비행기가 흔들림을 멈출 만해. 네 착한 마음에 하느님이 감동받으셨을 것 같아. 너무나 대견하구나” 하고…. 그리고 이상하게도 힘들거나 희망이 사라진다고 느낄 때,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아니면 그냥 속상해서 술을 한 잔 마실 때 이상하게 내가 바로 옆에서 들은 듯이 그분의 말이 생각났다. “왜 술 먹습니까? 왜 일하지 않습니까? 왜 희망 가지지 않습니까?” 신비했다. 이즈음 뒤숭숭하다 못해 황당한 시국 때문에 나는 거의 글을 못 쓰고 있었다. 책들도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나라가 집채만 한 비행기처럼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이런 때 김하종 신부님과 안나의 집 생각이 났다. 찾아보니 다행히 그분의 저서가 있었다. 「사랑이 밥 먹여준다」였다. 상한 음식만 먹고 있다가 모처럼 신선한 채소를 섭취한 것처럼, 내 영혼은 책 속으로 바로 빨려 들어갔다. 집채만 한 비행기처럼 난기류를 만나 흔들리고 있는 이 나라를 위해 나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하느님, 우리가 받는 이 고통을 가난하고 희망 없는 사람들, 그분들을 위해 애쓰시는 안나의 집 여러분을 위해 봉헌합니다”하고…. 그러고 보니 또한 신비였다. 사제 한 사람의 짧은 강론이 엄중하다는 것이.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2면
사설

교황과 세상을 위한 기도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심각한 호흡기 질환으로 로마 제멜리병원에 입원한지 벌써 한 달째다. 다행스럽게도 교황청은 다소간 건강을 회복한 교황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3월 16일 공개했다. 그간 교황은 여러 차례 호흡 곤란을 겪으며 고비를 맞아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여전히 상당 기간의 치료를 요하지만 큰 위기는 넘은 듯하여 반가운 마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교황 선출 12주년을 맞았다. 교황은 지난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에 선출돼 수많은 도전에 직면한 가톨릭교회의 면모를 일신해 왔다.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언제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면서, 교회가 완고함에서 벗어나 자비와 사랑을 향하게 이끌었다. 불의에 단호하면서도 공감 어린 유머를 잃지 않는 소박한 모습의 교황에 모든 이들이 매료됐다. 교황은 특별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는, 참되게 시노드적인 교회로의 변모를 이끌고 있다. 비록 어떤 이들은 여전히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 변화에 저항하고 있지만 그러한 논란마저도 시노드 교회의 특징임을 우리는 깨닫고 있다. 동시에 그는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항상 가장 먼저 눈길을 돌리고 교회와 세상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교황의 건강 악화로 인해 일각에서는 사임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물론 교황은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결단처럼,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로 교황직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에는 사임의 길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와 세상은 그의 헌신을 필요로 한다. 주님의 섭리가 마침내 온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이끌 것임을 믿으며, 종들의 종인 교황을 위한 기도,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에 더욱 힘쓸 때다.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3면
방주의 창

신앙인의 ‘확신’과 ‘의심’

“왜 신앙인으로 사는가?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레지오 활동을 하고 구역모임 반모임에 빠지지 않는 이유가 뭔가? 크고 작은 봉사직을 맡아 헌신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사업이 잘되어 돈 많이 벌고 자녀들 건강히 자라 원하는 대학에 딱딱 붙게 해달라는 간절함 때문인가? 나와 가족들이 병에 걸렸는데 절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고 살려주셨기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뜨거운 신앙인으로 사는가? 신앙의 궁극적 바람은 무엇인가? 나와 내 가족의 안녕과 행복인가? 내 사업과 내 일들에 대한 보답인가? 내가 꿈꾸고 갈망하는 지위와 명예와 권력인가?”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어 초중고 내내 성당 주일학교를 다니며 학생회와 쎌 활동까지 한 뒤 대학생이 되어서는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다가 혼인 뒤 본당 사목위원으로, ME 발표팀으로 신앙생활을 지속해 온 나에게 스스로 묻는 질문이다. 나는 왜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가? 대학 4학년을 앞둔 겨울방학 때 서울에 우리집이 처음 생겨 감사한 마음에 집 가까운 잠실성당에 찾아가 미사를 드린 뒤 보좌신부님께 뭐든 시켜달라 했더니 주일학교 교사로 불러주셨다. 교사학교를 수료한 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는데 첫 수업 때 학생들에게 들은 얘기는 “교리 수업 재미없어요”였다. ‘멘붕’을 가라앉히며 그럼 뭘 하면 재미있겠냐고 물으니 축구를 하자길래 다음 주일엔 학생들을 데리고 한강에 가서 실컷 축구를 한 뒤 커다란 들통에 라면을 끓여 먹였더니 더없이 좋아했다. 교리를 전달하는 것보다 예수의 생애를 생생하게 알려주고 싶어 동료 교사들과 ‘예수 공부’를 시작했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와 사회를 이해하고, 예수가 만난 사람들과 어떤 일들이 있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공부했다. 특히 예수가 누군가와 만나 음식과 술을 나눈 ‘잔치’에 관심이 끌려 복음서에 나오는 잔치 이야기들만 따로 모아 비교표를 만들기도 했다. 지도를 펴고 예수가 33년 생애를 보낸 장소들도 짚어보았다. 이현주 목사의 「예수가 만난 사람들」에 실린 세리 자캐오 이야기를 읽을 땐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톨릭교회에서 발간된 책들뿐만 아니라 안병무 박사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간한 책들과 잡지「살림」도 읽었고 좋은 강의가 있을 땐 직접 들었다. 민중신학, 해방신학, 사회학적 성서해석 등을 공부하며 예수가 살고 죽고 부활했던 그때 그곳이 생생한 ‘현장’으로 다가왔고, 그 현장은 2000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동료·학생들과 함께했던 젊은 날의 예수 공부 덕에 오랫동안 신앙을 잃지 않고 살았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또 내게 묻는다. “나는 왜 신앙인인가?” 같은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왜 이렇게 서로 다를까? 대한민국은 지금 두 쪽이 난 것 같다. 신앙인들의 정치적 견해야 다를 수 있겠지만 마치 같은 신앙의 이름으로 전혀 다른 신을 섬기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예수 신앙의 핵심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약자들에 대한 사랑 아닌가? 예수 신앙의 뿌리인 야훼 신앙 또한 노예들을 해방해 주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아닌가? 입으로는 예수를 외치면서 실은 예수를 처형했던 유다 기득권과 로마 군대를 섬기는 것은 아닐까? 하느님을 부르짖으며 바알신 맘몬에게 달려가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영화 <콘클라베>를 보며 가슴에 꽂힌 말이 있다. 로렌스 추기경의 대사였는데, 우리 신앙인들에게 전하는 하느님 말씀처럼 들렸다. 한 톨도 안 되는 너의 그 확신을 버리고 의심하라는.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다양성’이고,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확신’입니다. 확신은 화합의 가장 큰 적이고 관용의 치명적 적입니다. 믿음은 살아 움직입니다. 믿음은 ‘의심’과 함께 존재합니다.” 글 _ 정석 예로니모 교수(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3면
현장에서

교회가 기억해야 하는 것

3월 1일, 서울 광화문광장은 인파로 북적였다. 두 진영 모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었지만 한쪽에선 대통령의 탄핵을, 다른 한쪽에서는 탄핵 기각을 외치고 있었다. 106년 전 일본에게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벌였던 만세 운동을 기념하는 2025년 3월 1일, 대한민국은 독립의 기쁨을 기억하는 것이 무색할 만큼 둘로 쪼개져 있었다. ‘하나된 대한민국’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현장에서 일본으로부터 고통받은 이들을 기억하는 미사가 봉헌됐다. 9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남·녀 장상연합회 등이 포함된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천주교 전국행동이 주관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미사’였다. 미사에 참례한 이들은 50명 남짓. 광화문광장의 거대한 인파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인원이지만 이들이 함께한 기도는 큰 울림을 남겼다. 힘없는 소녀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희생된 것은 역사 안에 살아있지만 피해 할머니들은 “돈을 벌러 자진해서 간 것”이라거나 “돈을 더 받아내고자 대중 앞에 나오는 것”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같은 민족으로부터 들어야 했다. 나라가 지켜주지 못한 누군가의 인권을 기억하는 이날 미사는 광화문광장에 끝없이 수놓인 태극기와 겹쳐 아픔과 상처를 남겼다. 교회는 이처럼 정부가 외면한 작고 힘없는 이들의 인권을 되찾고자 30여 년째 기도로 힘을 모으고 있다. 미사를 집전한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하성용(유스티노) 신부는 “이 문제는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이고 사람의 도리에 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더 이상 힘에 의해 인권이 무시당하고 도리를 해치는 일이 없기를 이번 미사를 통해 바란다.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23면
사설

청년 대상 영성 프로그램 계발 강화돼야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영성 프로그램 계발이 필요하다. 최근 한 본당 사목자가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기도와 묵상, 피정 등 영신 수련 프로그램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과 열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젊은이들이 오로지 재미와 흥미에만 몰두한다는 인식이 선입견이나 편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젊은이들이 초월적이고 진지한 주제와 활동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단지 이를 지루해할 뿐이라는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사실 젊은이들과 조금만 깊게 대화를 하게 되면 이들이 사실은 삶의 참된 의미와 영원한 가치에 대한 관심과 영적 목마름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젊은이들이 가볍고 피상적인 흥미와 재미에만 이끌린다는 편견은 자칫 잘못된 사목적 접근을 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청년들의 즉각적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발랄한 활동과 쾌활한 프로그램들은 청년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직접적이고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반드시 초월적인 하느님 체험, 내면의 깊은 영적 갈망에 연결되는 신앙적 의미와 연결되지 못할 경우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관건은 청년들의 영적 갈망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다양한 영성 프로그램의 계발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 반드시 시류에 영합하는 흥미와 재미로만 이뤄질 필요는 없다. 그들의 영적 갈증을 이해하고 삶의 희망과 보람을 일깨우려는 배려와 고민이 깃든 영신 수련 프로그램은 자연스럽게 청년들을 관심과 참여로 이끌어줄 것이다.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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