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옛 성 베드로 대성당

교회 전승에 의하면 성 베드로 사도와 성 바오로 사도는 기원후 1세기 세상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고 그곳에 묻혔습니다. 로마는 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도시입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이 씻겨 사라지지 않고 땅속 깊이 스며들어 하느님 나라의 싹을 틔웠습니다. 로마 교회는 이렇게 두 사도의 두 기둥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전승과 후대에 쓰인 외경은 성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서 십자가형으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문학과 예술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더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때, 로마 교회는 땅속 깊숙이 좁고 어두운 곳에서 넓고 밝은 데로 나와 성당을 짓고 성찬례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 보편 교회가 11월 9일에 봉헌 축일로 기념하고 있는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이며, 이곳이 로마교회의 주교좌성당이 되었습니다. 또한 318년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실베스테르 1세 교황(314-335 재위)은 네로의 원형 경기장 옆 바티칸 언덕 기슭 성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곳에 첫 번째 사도의 순교를 기념하는 성당을 지어 봉헌했습니다. 이 성당이 새로운 대성당이 들어설 때까지 1200년 동안 여러 차례 이민족의 약탈을 견뎌 내며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맞이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당시 공공의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의 유형은 크게 ‘바실리카’와 ‘신전’의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먼저 바실리카는 공회당 같은 세속적 모임의 장소였기 때문에 다수의 대중을 수용하기 위해서 장방형의 기다란 형태를 가졌습니다. 반면에 신전은 종교적 모임의 장소로 제관만 들어갔고 일반인들은 신전 밖 공간에 머물렀기 때문에 소수의 인원이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정방형 혹은 원형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모임의 성격 면에서 본다면 성당은 사제가 하느님께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곳이기 때문에 신전에 가깝고, 따라서 정방형이나 원형의 형태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제사인 성찬례(미사)는 모든 신자가 참석하는 전례이기에 사제만 들어가는 신전 형태보다는 다수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는 바실리카 형태가 더 어울렸습니다. 이런 필요에 따라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선택하였습니다.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 평면을 보면, 중앙에 신자들이 앉는 넓은 공간인 ‘네이브’(nave)가 있고 양쪽에 통행로인 ‘아일’(aisle)이 두 겹으로 있는, 5랑식 구성입니다. 그리고 바실리카에서 안쪽 깊숙한 곳에 외부로 돌출한 반원형 공간이 있는데 이를 ‘앱스’(apse)라 부르고 그곳에 제단을 두었습니다. 네이브의 천장고와 아일의 천장고 차이를 이용해서 ‘네이브월’(nave-wall)의 상부에 외부에서 빛이 들어오도록 창을 만들었는데 이를 ‘클리어스토리’(clerestory)라고 부르고, 이 창 덕분에 성당의 중앙 바닥까지 빛이 닿았습니다. 천장은 목재로 구조 형틀을 만들고 그 하부를 평평하게 마감한 ‘목조 평천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금처럼 교황이 머무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교황은 로마의 주교이기 때문에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이 교황청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 후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은 황폐해진 상태였고, 이런 이유로 교황은 바티칸의 옛 성 베드로 대성당에 교황청을 마련했습니다. 이후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교회의 중심이 되었는데, 건축한 지 천 년이 넘은 이 대성당 역시 대대적인 보수 및 증축 공사가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처음으로 확장 공사를 시작한 교황은 니콜라오 5세(1447~1455 재위)입니다. 그는 처음에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를 통해서 새로운 대성당을 계획하였으나, 제단의 성가대석 부분을 확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즈음에 교회사적으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으로 멸망한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날인 1453년 5월 28일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에서는 마지막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서방의 로마 교회는 동방의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잃으면서 로마에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위상을 이을 대성당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니콜라오 5세 교황 이후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다시 무관심 속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렇게 50년이 지나고 1503년 율리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교황은 즉시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능가하는 새로운 대성당이 가톨릭교회에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대성당의 건립을 결정하였습니다. 1506년 브라만테의 설계로 새로운 대성당의 초석이 놓였으며, 브라만테는 이후 여러 차례 설계를 변경했는데 안타깝게도 설계 과정과 변경 내용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실 율리오 2세 교황은 브라만테뿐만 아니라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등 어느 시대도 비길 수 없는 건축과 예술의 대가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래서 브라만테가 설계한 대성당이 그대로 지어졌다면, <아테네 학당>이 있는 라파엘로의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에서 출발하여, <최후의 심판>이 있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경당(Cappella Sistina)’을 거쳐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르기까지 순례자들은 신앙과 예술의 향연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고, 브라만테는 그들과 함께 영원한 건축가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몬토리오의 산 피에트로 템피에토

로마의 자니콜로(Gianicolo) 언덕 남쪽 자락에서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Trastevere)에 못미처, ‘몬토리오의 산 피에트로 성당’(Chiesa di San Pietro in Montorio)이 있습니다. ‘몬토리오’는 자니콜로 언덕의 옛 이름으로 ‘몬테 아우레오’(Monte Aureo)에서 줄여진 말입니다. 이는 ‘황금 언덕’이란 뜻인데 이곳의 흙이 태양 빛을 받으면 황금색으로 빛이 났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성당의 안뜰 한가운데에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브라만테의 템피에토’(Tempietto del Bramante)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템피에토(작은 신전)는 스페인의 가톨릭 왕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가 브라만테에게 의뢰한 건물입니다. 자니콜로 언덕은 성 베드로 사도의 순교 장소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브라만테는 이 성당을 순교를 기념하는 신전의 형태로 설계했습니다. 성당의 평면 계획은 크게 선형 평면(라틴 크로스)과 중앙집중형 평면(그릭 크로스)으로 구분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처음 성당을 지을 때 당시의 종교 건축물이었던 신전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로마 제국의 공공건물인 바실리카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이는 종교의 자유화 이후로 신자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장소로서의 성당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대 교회 이후로 중세의 로마네스크 성당과 고딕 성당에서 주를 이루는 평면 형태는 바실리카양식의 선형 공간(라틴 크로스)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서 브루넬레스키에 의해서 계승되었습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는 초기 작품에서 이미 바실리카양식의 선형 공간에 중앙집중형 공간을 더하는 배치를 시도하였고, 후기에 와서는 중앙집중형 공간이 선형 공간을 압도하는 구성을 완성하였습니다. 이후로 알베르티를 거쳐 전성기에 이르면서 르네상스 건축의 형태는 선형 평면이 점점 줄어들고 중앙집중형 평면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성당 건축이 고대 교회 당시의 바실리카 형태인 선형 평면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었던 초기 교회 시기에 교회가 신앙의 모범으로 공경한 대상은 순교자들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심한 박해로 드러내놓고 많은 신자가 모일 수 없었으므로 성당의 규모는 작았고 무덤 주위에 모여서 기도할 수 있는 중앙집중형 평면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전, 그리스도교 성당 건축의 시작은 많은 회중을 위한 바실리카 평면의 성당이 아니라 순교자를 기념하는 중앙집중형 성당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스페인의 왕들이 성 베드로가 십자가형을 받은 장소에 그의 순교를 기념하는 작은 성당을 원했을 때, 브라만테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평면의 형태는 중앙집중형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브라만테의 이 선택은 고대 로마의 고전을 로마 가톨릭교회 건축의 근간으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템피에토는 중앙집중형 평면 형태인데, 일반적인 형태인 정사각형이 아닌 원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원형 평면의 구성 요소들은 동심원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중심에는 원형의 셀라(cella, 신전의 중앙에 있는 방으로 신상이 안치됨)가 있고 밖에는 16개의 페리스타일(peristyle, 셀라를 둘러싼 외부의 기둥 열) 원기둥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템피에토가 있는 안뜰의 윤곽은 원형이 아닌 정사각형이고 네 모퉁이에 삼엽형의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템피에토의 평면 크기는 입면의 크기와 기하학적인 비례를 이룹니다. 먼저 페리스타일의 원지름은 셀라의 높이와 같습니다. 곧 템피에토의 너비는 돔을 제외한 본체의 높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돔을 포함한 건물 전체의 높이는 페리스타일이 받치고 있는 엔태블러처(처마처럼 기둥을 받치는 수평 부재로 아키트레이브, 프리즈, 코니스로 구성)에서 정확히 이등분됩니다. 그리고 돔의 높이는 그것의 절반으로 건물 전체 높이의 4분의 1이 되고, 셀라의 높이는 건물 전체 높이의 4분의 3이 됩니다. 브라만테는 템피에토를 설계하면서 티볼리의 시빌 신전(Tempio della Sibilla)과 로마의 헤라클레스 빅터 신전(Tempio di Ercole Vincitore) 등 고대 로마의 신전과 비트루비우스의 원형 신전의 설명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비트루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신전은 해당 신을 모시는 것이 주목적이므로 신에 따라서 그 모습이 다른데, 티볼리의 시빌 신전처럼 여신을 모시는 신전은 코린트식 오더를 사용하고 로마의 헤라클레스 신전처럼 영웅적 남성 신을 모실 때는 도리스식 오더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의 순교를 기념하는 템피에토를 설계하면서 로마의 도리스식 오더에 해당하는 토스카나식 오더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화강암으로 만든 고대 로마의 토스카나식 원기둥에 대리석 기단과 주두를 추가하였습니다. 또한 도리스식 프리즈(엔태블러처에서 장식 문양이 들어간 부분)에서는 보통 제의 도구들이 장식으로 새겨지는데, 그는 템피에토의 프리즈에 그리스도교의 전례 도구를 새겨넣었습니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서 토스카나식 오더를 사용하였고, 그럼으로써 템피에토는 범접할 수 없는 권위와 품위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브라만테는 고대 로마의 건축을 본보기로 르네상스 건축을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브라만테의 템피에토는 규모 면에서는 보잘것없는 건축물로 보이지만 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개축을 시작하였을 때 템피에토는 대성당 설계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1475~1554)와 안드레아 팔라디오(1508~1580)는 브라만테의 템피에토가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과 나란히 견줄만한 가치가 있다고 호평했고, 이후의 르네상스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라파엘로가 ‘성모 마리아의 결혼’(1504년)을 작업할 때 그 배경에 브라만테의 템피에토와 거의 유사한 성당을 그린 것은 전성기 르네상스에서 이 성당이 차지하는 위치를 말해줍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

도나토 브라만테는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교류하면서 밀라노의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전속 건축가로 일하였습니다. 이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탈리아를 지배하기 위해서 수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을때 레오나르도는 잠시 피신하였다가 밀라노에 다시 돌아와 프랑스 왕과 일했지만, 브라만테는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갔습니다. 로마에 왔을 때 이미 50대 중반이었던 브라만테는 생을 마칠 때까지 14년간 로마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중 교황 율리오 2세를 만나기 전인 처음 3년에서 4년 동안 그는 로마에 성당 두 곳을 지었습니다. 먼저 1500년에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a Pace)의 회랑을 지었고, 이어서 1502년에 몬토리오의 산 피에트로 템피에토(Tempietto di San Pietro in Montorio)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로마는 건축 분야에서 고대로부터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지만, 르네상스 건축이 피렌체에서 피어오르면서 15세기까지 르네상스 건축의 중심은 피렌체였습니다. 하지만 15세기 후반 교황 식스토 4세(1471~1484 재위)의 선출로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던 메디치가는 위기를 맞이하였고, 결국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의 사망으로 피렌체는 정치와 외교에서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6세기 율리오 2세(1503~1513 재위)가 교황이 되었을 때 정치와 예술의 중심은 로마로 옮겨졌습니다. 건축 분야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15세기 피렌체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는 고대 로마의 건축을 배우기 위해서 로마에 갔지만, 결국 그들이 작품 활동을 한 곳은 르네상스의 중심인 피렌체였습니다. 하지만 16세기의 건축가 브라만테와 라파엘로 그리고 미켈란젤로에게 로마는 건축의 고전을 배울 수 있는 장소를 넘어 그들의 삶과 활동의 무대였습니다. 16세기 르네상스 건축의 중심지는 확실히 로마였습니다. 브라만테가 로마에 와서 처음 수주한 공사는 나보나 광장 근처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의 ‘회랑’이었습니다. 교황 식스토 4세는 피렌체의 메디치가와 파치가의 충돌이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화의 성모 마리아께 성당을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1482년에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1500년에 이 성당의 회랑 공사가 계획되어, 밀라노의 산탐브로조 성당 회랑을 설계한 브라만테에게 공사가 맡겨졌습니다. 이 회랑은 회랑의 폭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모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회랑의 기둥들 역시 회랑의 폭과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16개의 기둥이 정사각형의 회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둥들로 둘러싸인 정사각형의 마당은 한 변이 4개의 모듈에 해당하기에 마당의 크기는 4x4, 곧 16개의 정사각형 모듈이 됩니다. 브라만테가 밀라노에서 실험한 오더를 통한 상징주의는 이 성당에서 큰 발전을 보입니다. 1층에는 벽체와 벽기둥이 함께 나타나는데, 연속되는 아치를 토스카나식 사각기둥이 받치고 거기에 이오니아식 벽기둥이 더해진 형태입니다. 그리고 2층은 벽기둥과 콤포지트식 원형 기둥이 교대로 구성되었습니다. 구조적인 면에서 1층과 2층은 서로 다르면서도 융합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먼저 1층은 벽체 구조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이오니아식 벽기둥이 첨가되어 2층의 오더 구조와 연결되고 있으며, 2층은 오더 구조이지만 코너에 벽기둥을 사용하여 1층의 벽체 구조와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브라만테의 이 회랑에서 특이한 점은 1층의 아치 상부 한가운데에 독립 원형 기둥이 놓여있는 점입니다. 당시 고전주의 건축의 규범에 의하면, 아치로 되어 있는 빈 공간 위에는 빈 공간이 오는 것이 맞는데, 이 회랑은 그것에 어긋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 건물과 이어지는 회랑이기에 회랑의 1층과 2층 높이는 정해져 있었고, 따라서 2층이 1층처럼 아치를 가질 수 없었기에, 상부의 엔태블러처를 지지하기 위해서 중간에 원형 기둥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브라만테가 로마에 도착하여 지은 건물 중에서 성당이 아닌 주거용 팔라초가 한 채 있습니다. 1502년 착공한 이 건물은 사도좌 공증인(Protonotario Apostolico) 아드리아노 데 카프리니스를 위해 지어졌기에 ‘팔라초 카프리니’(Palazzo Caprini)라고 불렸고, 라파엘로가 1517년에 구입하여 1520년에 죽을 때까지 살았기에 ‘라파엘로의 집’(Casa di Raffaello)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에 이르는 길인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Via della Conciliazione)의 건설로 단지 전체가 헐리어 현재는 이 건물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단지 안토니오 라프레리의 판화와 팔라디오의 드로잉으로 팔라초 카프리니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팔라초는 두 개의 층과 다섯 개의 베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층(지상층)의 벽은 울퉁불퉁하게 표면을 처리하고, 2층의 벽은 상대적으로 평평하게 처리함으로써 건물이 구조 면에서 안정적으로 설계되었습니다. 1층의 출입문들은 상부에 아치가 있으며 양 끝에는 중간에 아치를 한 번 더 설치하였습니다. 1층은 로마 고전에 기초하고 있는데 지상층에 가게를 두고 상부층에 주거 공간을 두었던 고대 로마의 공동주택인 ‘인술라’(insula)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따라서 2층에는 전통적인 팔라초에서 볼 수 있는 ‘피아노 노빌레’(귀족의 층: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2층)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키트레이브(기둥 위에 수평으로 얹힌 부분)와 프리즈(아키트레이브 위의 장식이 들어가는 부분)를 받치는 쌍으로 되어 있는 도리스식 원형 벽기둥이 다섯 베이를 정확히 구분하여 공간의 차별 없이 세워져 있습니다. 2층에는 발코니가 있으며 창의 상부는 삼각형 페디먼트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대칭과 반복, 기능 등의 원리는 브라만테의 팔라초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브라만테의 팔라초 카프리니는 15세기 피렌체식 팔라초와 구별되면서 16세기를 대표하는 로마식 팔라초가 되었으며 이후 이탈리아 팔라초의 주류 양식이 되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교회는 성 목요일 저녁에, 예수님께서 수난 전날 저녁 제자들과 함께 드신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후로 이 최후의 만찬은 교회 미술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 그림이나 조각 등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한 작품들 가운데 단연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일 것입니다. 가로 8.8미터 세로 4.6미터의 이 대형 벽화는 젖은 회반죽 위에 그림을 그리는 전통적인 기법의 프레스코화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마른 석고 위에 템페라와 유화를 혼합하는 기법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이 기법은 레오나르도가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얻은 것인데, 안타깝게도 내구성이 약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벽화는 손상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실험 정신은 르네상스와 잘 어울립니다. 이 그림은 루도비코 스포르차 일 모로가 레오나르도에게 의뢰한 것으로, 밀라노의 도미니코 수도원 식당 북쪽 벽에 그려져 있습니다. 1459년 밀라노에 진출한 도미니코 수도회는 스포르차 가문으로부터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은총의 성모 마리아)에 봉헌된 작은 경당과 안뜰이 있는 땅을 기증받았습니다. 이후 1463년부터 1469년까지 구이니포르테 솔라리가 ‘죽은 자들의 회랑’과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경당’ 등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1492년 밀라노의 새로운 공작 루도비코는 자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새로운 양식의 성당이 주변 도시의 대표적인 성당에 못지않게 세워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솔라리가 세운 성당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성당은 철거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다행히 성당의 제단과 성가대석 부분만 철거하기로 하고 이 공사는 공작의 건축가인 브라만테에게 맡겨졌습니다. 브라만테는 돔이 있는 크로싱, 뒤쪽의 성가대석과 앱스 그리고 양쪽 트란셉트, 그리고 외부에 ‘개구리들의 회랑’과 ‘구 성구보관실’을 설계하였습니다. 그는 새로운 성당에 원이라는 기하학적 특성을 이용하여 중앙집중형 양식을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크로싱은 정육면체 형태로 구성되었고, 그 위에 반구형 대형 돔이 얹혔습니다. 돔은 드럼이 받치고 있으며 그 아래 팬던티브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구형 돔은 원형이 지닌 기하학적 형태에 의해서 완벽함을 상징합니다. 그 아래로 거대한 둥근 아치가 정육면체의 네 면을 감싸고 있고, 그 가운데 두 개의 측면 아치는 반구형이면서 격자형의 천장이 있는 앱스와 이어지고, 두 개의 중앙 아치는 하나는 네이브 방향으로 또 하나는 성가대석 방향으로 열려 있습니다. 여기서 성가대석은 크로싱의 반지름이 한 변을 이루는 작은 정사각형 형태이고, 양쪽의 트란셉트와 앱스도 같은 지름의 크기를 갖는 반구형 천장입니다. 또한 네이브의 폭도 앱스 및 성가대석의 폭과 같습니다. 성당의 외부 공사는 브라만테가 밀라노를 떠난 후에 이루어졌지만, 외관은 새롭게 구성된 장식 없이 내부 공간의 형태가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크로싱의 돔 하단 부분은 외부에서 보면 거대한 육면체 덩어리로 나타납니다. 그 위에 내부의 반구형 돔이 있는 부분은, 외부에서는 16각형으로 올라가다가 갤러리가 있고 지붕과 랜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앱스 형태의 양측 트란셉트는 외부에서도 반원형 공간으로 드러나며, 제단과 성가대석 부분 역시 육면체 공간과 반원형 앱스가 외부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종탑이 성가대석의 북쪽 면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갤러리 높이까지 세워져 있습니다. 이렇게 육면체와 원통형 등의 기하학적 요소로 외관이 이루어진 것은 중세의 형태를 벗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외부 장식의 주를 이루는 테라코타와 화강암은 중세의 롬바르디아 지역주의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장식과 벽체, 그리고 기둥의 오더(고대 그리스 로마의 기둥 체계에 따른 양식) 등에서는 아직 중세와 르네상스의 중간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1492년 브라만테는 산탐브로조(성 암브로시오) 대성당의 북측에 밀라노 교구 사제들을 위한 사제관(canonica)을 세우고, 남측에는 시토회 수도자들을 위한 두 개의 회랑(chiostro)을 만들었습니다. 세 공간의 기본 요소는 아케이드이고 여기에 브루넬레스키식의 독립 원기둥 혹은 알베르티식의 벽기둥이 배치된 형태입니다. 먼저 사제관은 고대 로마의 포럼을 참조하여 네 면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4개의 대형 출입구가 있는 평면으로 설계하였으나 실제로는 한 개만 세워졌으며 정사각형의 기둥이 큰 아치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특히 가지를 다듬은 통나무 형태의 기둥이 4개 있는데, 이는 비트루비우스가 말하는 건축 오더에 있어서 나무의 기원을 암시합니다. 브라만테는 대성당의 남측 부속 건물을 철거하고 이오니아식 회랑(chiostro ionico)과 도리스식 회랑(chiostro dorico)을 만들었습니다. 각각 이오니아 양식과 도리스 양식이 사용되었고, 이 가운데 높이가 7.5미터인 아치가 있는데 이는 식당이나 도서관 같은 2층 높이의 공간에 수도자들의 낮은 높이 방을 2층으로 구성한 결과입니다. 특히 도리스식 회랑은 우르비노 팔라초 두칼레의 중정과 브루넬레스키의 피렌체 고아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브라만테의 건축에서 가장 완성도 있는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브라만테가 밀라노 시기에 지은 산타 마리아 프레소 산 사티로 성당, 파비아 대성당,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은 브루넬레스키의 초기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많이 따랐습니다. 이는 밀라노의 장식 전통이 롬바르디아의 고전 영향으로 중세와의 연속성이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산탐브로조 대성당의 사제관과 회랑 공사에서부터 브라만테는 알베르티의 영향으로 오더를 이용한 상징주의를 실험하였습니다. 오더에 있어서 상징성은 로마 고전 건축을 바탕으로 독립 원형 기둥을 다른 형태보다 우위에 두었습니다. 구조적 차원에서 원형 기둥을 주기둥으로 삼았고, 미적인 면에서도 고전 오더의 세 양식을 중심으로 원형 기둥의 기하학적인 명료성, 선형성, 부드러움, 리듬감 등을 표현하였습니다. 브라만테는 로마에서 활동하면서 오더의 상징주의를 더 발전시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산타 마리아 프레소 산 사티로 성당

브루넬레스키가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을 설계할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공간의 통일성입니다. 그는 산 로렌초 성당과 산토 스피리토 성당의 건축을 통해서 선형 평면보다는 중앙집중형 평면에서 공간의 통일성이 더욱 잘 구현된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의 중앙집중형 공간 설계를 계승하였고,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연 브라만테는 중앙집중형의 공간 구성을 르네상스 건축의 기본 방향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중앙집중형 평면에 기하학적 구성과 깊은 공간감을 더하여 르네상스 건축물의 3차원 공간을 완성하였습니다. 또한 원형과 돔 등의 요소로 천상의 이미지를 표현함으로써 성당 건축에 그리스도교적 고전주의를 적용하였습니다. 브라만테가 밀라노에 머물렀던 시기(1480~1499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첫 번째 성당은 ‘산타 마리아 프레소 산 사티로 성당’(Chiesa di Santa Maria presso San Satiro)입니다. 이곳에 성 사티로(Satyrus, 334~377년)에게 봉헌된 성당이 세워진 역사는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성 사티로는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형으로, 동생이 밀라노의 주교로 선출되자 공직을 버리고 밀라노 교구의 세속 관련 행정 업무를 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배가 난파하여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게 되었고,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사티로는 세례를 받고 교회 일에 더욱 성실히 임하였습니다. 그 후 불과 마흔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동생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추모 기도와 함께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500년이 지난 872년에 밀라노의 주교는 밀라노의 베네딕토 수도원 안에 작은 성당을 지어 성 사티로와 성 암브로시오, 성 실베스테르에게 봉헌하였습니다. 산타 마리아 프레소 산 사티로 성당은 그로부터 600년 후에 그 성당 자리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로 세워진 성당입니다. 브라만테는 성당의 평면을 네이브의 선형 공간과 제단의 중앙집중형 공간으로 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네이브월의 기둥 간격에 비해서 네이브의 폭을 넓게 하여 네이브 전체 길이가 짧게 느껴지도록 하였는데, 이는 네이브의 선형성을 약화시키는 브루넬레스키의 방식에서 온 것입니다. 또한 알베르티의 영향으로 네이브월의 기둥을 사각기둥과 가는 벽기둥의 교차 리듬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성으로 평면은 전체적으로 라틴 크로스와 그릭 크로스의 중간 형태로 보이는데, 크로싱에 돔을 얹어 중앙집중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평면도에서 중앙 제단의 뒤편을 보면 보통 앱스(성가대석)가 있어야 할 공간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앙집중형 평면에서 앱스 없이 트란셉트 양쪽과 네이브 쪽의 세 개만 있는 형태입니다. 트란셉트 역시 앱스 방향에 경당들이 없어서 마치 성당의 앱스 부분이 잘려나간 것 같이 보입니다. 이것은 성당 뒤편의 길로 인해 부지가 좁아서 생긴 현상인데, 브라만테는 성당의 내부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 제단 뒤편에도 부지가 있는 것으로 가정하여 성당을 설계하였습니다. 그리고 뒷길로 인해 만들지 못한 제단 뒤편의 앱스 부분을 실제로 있는 것처럼 투시도로 처리한 것입니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마사초가 그린 유명한 삼위일체 성화가 있습니다. 브루넬레스키가 창안한 소실점이 있는 원근법을 적용하였는데 그림 속 건물이 마치 벽의 뒤편을 뚫고 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브라만테는 초기 르네상스의 이 화법을 이용하여 제단 뒷면 벽에 세 개의 베이로 되어 있는 앱스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가 화가 시절에 건물화를 자주 그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입니다. 이로써 존재하지 않는 제단 뒤편의 앱스 부분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입체적으로 눈앞에 펼쳐집니다. 중앙집중형 공간에 이어서 브라만테의 작품에 나타난 두 번째 요소는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입니다. 그러나 이 성당에 나타난 고전주의적 요소는 다른 양식들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볼트와 아치는 중세 건축의 형태를 띠고 기둥의 구조 체계는 독립 기둥과 벽기둥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중세의 건축 양식에 나타난 프로토-르네상스와 고대 로마 고전주의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외부에 설치된 사각 벽기둥은 로마 고전주의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브라만테의 중앙집중형 공간이 돋보이는 또 하나의 성당은 파비아 대성당(Duomo di Pavia)입니다. 이 성당의 설계가 브라만테에게 맡겨진 것은 아니지만, 크리스토포로 로키와 조반니 안토니오 아마데오가 공사를 맡았을 때부터 브라만테는 설계 및 공사에 대한 논쟁을 중재하고 자문하였기에, 기본 설계 과정부터 브라만테의 의도가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파비아 대성당은 아르놀포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브루넬레스키의 산토 스피리토 성당의 평면과 매우 유사하고,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과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성당의 평면은 전체적으로 보면 라틴 크로스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3랑식 네이브에서 아일과 아일 뒤편의 경당은 네이브의 선형성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그릭 크로스의 중앙집중형 공간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두꺼운 벽기둥이 받치고 있는 크로싱의 팔각형 돔과 크로싱을 중심으로 방사형을 이루는 트란셉트와 아일, 앱스 역시 중앙집중성을 배가시킵니다. 브라만테는 파비아 대성당 공사 때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도면을 처음 봤다고 전해지는데, 이때 받은 영감이 훗날 로마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할 때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브라만테는 르네상스 건축의 초기 단계가 완성되고 성숙의 과정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활동한 건축가입니다. 따라서 그의 건축은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방향보다는 새롭게 등장한 양식의 장점을 살리고 문제점은 해결하면서 르네상스 건축을 전성기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가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에게서 새로운 양식을 배우고, 나아가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연구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4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도나토 브라만테

서양의 대학은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1088년)과 프랑스의 파리 대학(1150년)을 그 시작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 대학은 오늘날처럼 다양한 학문을 다룬 것이 아니고, 대체로 라틴어 교육을 기본으로 신학, 철학, 법학, 의학이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회화나 조각, 건축 등 예술 분야는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문하에서 도제 생활을 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물려받는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예술 분야도 학교 교육의 형태를 조금씩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대학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건축을 학교 교육 형태로 시작한 첫 번째 건축가로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를 꼽고 싶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활동한 시기에 건축 공방을 운영하였는데, 그곳에서 같은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를 비롯하여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e Peruzzi, 1481-1536),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 1483-1546), 자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1486-1570) 등의 건축가를 배출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를 제외하면 16세기에 로마에서 활동한 건축가들 대부분이 브라만테의 건축 공방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브라만테는 1444년 우르비노 근처의 페르미냐노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우르비노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우르비노에서의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은데, 그곳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5-1492)의 제자로 있으면서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41-1523)와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50-1523) 등과 교류하였고,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Francesco di Giorgio Martini, 1439-1502)로부터 건축을 배웠을 것입니다. 이후 1477년경부터 브라만테는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였고, 롬바르디아에서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 등의 작품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브루넬레스키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습니다. 1478년부터 밀라노에 체류한 그는 초기에는 화가로 활동하였는데, 그가 그린 작품의 배경에는 건축 공간의 기하학적 구성이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이후 건축가로서의 브라만테는 밀라노 시기(1480-1499)와 로마 시기(1499-1514)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밀라노 시기에 브라만테가 설계한 대표적인 작품들은 산타 마리아 프레소 산 사티로 성당(Chiesa di Santa Maria presso San Satiro), 파비아 대성당(Duomo di Pavia),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 등이 있습니다. 1482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밀라노에 오자 브라만테는 그와 교류하였고, 레오나르도와 브라만테는 롬바르디아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 일 모로의 전속 건축가가 되어 성당 외에도 일반 건축과 토목의 일에 관여했고, 밀라노의 인문주의자 및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그리스도교 고전주의를 습득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1499년 밀라노를 공격하자 로마로 피신하였고, 이때부터 그의 로마 시기가 시작됩니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 브라만테의 나이는 55세로 건축 현장을 이끌기에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유적들을 보는 순간 브라만테는 그것에 사로잡혀 건축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물론 이전에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가 로마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고전 건축의 원리를 배워서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알베르티가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로마에 소개하고 르네상스의 중심에 로마를 끌어들이며 초기 르네상스를 완성하였습니다. 하지만 브라만테는 피렌체가 아닌 로마에서 르네상스를 꽃피우며 로마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르네상스 건축을 한 차원 올려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브라만테가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 등 이전의 건축가와 다른 점은 그에게 로마는 배움의 장소가 아니라 삶의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 교황청의 수석 건축가로서 로마의 재건 사업에 투신하였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황청 안에 건축 공방을 설치하여 그곳에서 도시 계획과 건축 설계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브라만테는 로마의 고전 건축물들 사이에 자신의 작품을 나란히 놓은 로마의 건축가입니다. 브라만테의 이러한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인문주의를 장려한 율리오 2세 교황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교황이 공방을 허락하였고 그곳에서 브라만테는 설계, 감리, 시공 등의 업무를 총괄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브라만테의 건축 공방은 당시 개인 소유의 소규모 공방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늘날의 건축학과, 설계 사무소, 그리고 시공 회사를 합쳐놓은 건축 종합 센터 같은 곳입니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당대의 스타 건축가들이 배출되었으며, 후대의 건축가들도 브라만테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로마 시기 동안 브라만테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a Pace), 몬토리오의 산 피에트로 템피에토(Tempietto di San Pietro in Montorio), 그리고 팔라초 카프리니(Palazzo Caprini, 일명 Casa di Raffaello) 등입니다. 물론 실제로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바티칸의 벨베데레 안뜰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역작입니다. 로마에서 펼쳐진 브라만테의 활동은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에 국한되지 않고, 로마 자체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도 일조하였습니다. 그가 집중한 바티칸의 건축 공사는 바티칸을 로마의 중심으로 만들었고, 더 나아가 로마는 오래전 로마 제국 시대의 수도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중심으로, 유럽의 중심으로 거듭 성장하였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메디치가의 부흥

1429년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Cosimo di Giovanni de' Medici, 1389–1464)는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로부터 유럽 전역에 진출해 있는 메디치가의 은행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코시모는 유산을 지키기 위해서 피렌체의 정치에 개입하게 됩니다. 특히 피렌체의 대지주인 리날도 델리 알비치가 코시모를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1433년 코시모는 결국 피렌체 근교의 메디치 영지로 피신하였는데, 새 피렌체 정부로부터 시뇨리아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가문을 위해서 시뇨리아 회의에 참석하였지만, 즉시 체포되어 90미터 높이의 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알비치는 코시모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시뇨리아를 압박했으나 결국 추방으로 타협하였고, 코시모는 베네치아에서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알비치는 주요 가문들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를 지배하게 되었으나,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 그리고 소시민들은 여전히 메디치가의 편이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시기에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사 중이었고, 알베르티는 피렌체에 들어와서 활동을 막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르네상스의 열풍이 일기 시작했을 때였기에,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코시모는 비록 몸은 베네치아에 있지만 피렌체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비치는 인문주의를 그리스도교의 적대 세력으로 간주하여 탄압했고, 시뇨리아를 무력화하여 민주주의를 무너트리려고 했습니다. 이에 시민들이 반발하고 도시가 분열되는 등 내전의 긴장감이 커지자 알비치 집단은 피렌체에서 도망쳤습니다. 결국 시뇨리아는 1년도 못 되어 코시모를 귀환시켰고 피렌체 시민들은 코시모를 환영하였습니다. 이후 피렌체는 일상을 되찾았지만, 실제 통치권은 코시모에게 넘어갔습니다. 코시모는 시민들이 원하는 평화를 보장해 준다면 그들도 그의 정치를 용인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코시모는 더욱 낮은 자세로 일하며 자신도 평범한 시민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 교회는 마르티노 5세 교황의 선출로 40년간의 서방교회 대이교를 마감하고 쇄신을 위한 공의회를 준비하였습니다. 1431년 교황은 바젤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후임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공의회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오스만튀르크의 공격을 받고 서방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목적으로 황제의 요청에 응하여 페라라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에 황제와 총대주교를 비롯한 700명 규모의 동방교회 대표단이 페라라에 도착하였고, 공의회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일치를 이루지 못한 교리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페라라에서 서방교회만이 아닌 대규모의 동방교회 대표단이 함께 머무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려웠으며, 더구나 재정이 열악했던 교황청은 더욱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네치아 망명 기간 중 베네치아 출신의 에우제니오 4세 교황에게 도움을 받았던 코시모는, 피렌체가 공의회의 참석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고 공의회에 들어가는 비용도 충당할 능력이 있는 도시라며, 피렌체에서 공의회를 개최할 의향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교황이 코시모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피렌체 시민들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대표단을 맞이하고자 1439년 초에 코시모를 시뇨리아의 의장으로 선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공의회의 개최가 가져다줄 엄청난 이득을 알았던 시민들은 공의회 참석자들을 최대한 만족시키려고 준비하였는데, 피렌체에 들어오는 동방교회 대표단의 행렬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기이한 복장의 사제들, 다른 색의 피부를 가진 몽골인, 무어인, 아프리카 흑인, 그리고 원숭이, 화려한 깃털의 새, 사슬을 두른 치타 등은 피렌체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습니다. 서방교회의 대표단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짐을 풀었고, 동방교회의 대규모 대표단은 메디치가를 비롯한 유력 가문들의 저택들에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공의회는 피렌체의 여러 성당에서 진행되었는데, 많은 교리적 논쟁이 있었음에도 1439년 7월 6일 피렌체 대성당 브루넬레스키의 돔 아래에서 양 교회의 대표가 교회 일치 교령에 서명함으로써 마무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성령의 발출(필리오퀘), 성체로 축성할 제병, 연옥과 지옥, 로마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리고 동방교회 대표단은 서방교회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동방교회 내부에서 일치 교령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서방교회의 군사적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군대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하지만 피렌체는 공의회 덕분에 교황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메디치가의 위상은 더 높아졌습니다. 당시 인문주의는 플라톤 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것 역시 코시모가 피치노에게 플라톤의 저서를 번역하고 보급하도록 지원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부패한 실베스테르회를 추방하고 산 마르코 수도원을 도미니코회에 맡겼을 때, 코시모는 수도원 건축의 모든 비용을 대고 그 설계를 친구 미켈로초(1396-1472)에게 맡겼습니다. 코시모는 ‘팔라초 메디치’를 지을 때도 먼저 브루넬레스키에게 설계를 의뢰했으나, 결국 브루넬레스키의 웅장한 설계를 반려하고 미켈로초에게 맡겼습니다. 세간의 이목을 끌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습니다. 코시모는 메디치가와 피렌체,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헌신했지만, 고질적인 통풍에 시달리며 병상에서 지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만 갔고, 결국 1464년 그가 사랑하는 가족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히 잠들었습니다. 시뇨리아는 국가 원수에 해당하는 장례를 계획했지만, 코시모의 평소 바람대로 한 시민으로 산 로렌초 성당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시뇨리아와 시민들이 코시모에게 바치는 영예를 거절할 수 없어서 그의 무덤에 ‘국부’(Pater patriae)라는 비문을 새기는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베네치아의 산 차카리아 성당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 가운데, 피에트로 롬바르도의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과 함께 베네치아의 지역 양식을 대표하는 곳으로, 마우로 코두시(Mauro Codussi, 1440-1504)의 ‘산 차카리아 성당’(Chiesa di San Zaccaria, 성 즈카르야 성당)을 꼽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봉헌된 이 성당은 베네치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산 마르코 대성당과 두칼레 궁전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9세기에 비잔틴의 레오 5세 황제는 해상 무역의 요충지로 성장하고 있는 베네치아 공국과 우애를 다지기 위해서 즈카르야의 유해를 기증하였고, 베네치아 당국은 성인에 대한 공경의 표시로 유해를 안치할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습니다. 이후 10세기에 들어서 베네딕토 수도회가 이 성당을 맡아 재건하였는데, 12세기 초에 발생한 대형 화재로 백 명이 넘는 수도자들이 참사를 당하였습니다. 화재로 소실된 성당은 방치되어 오다가 15세기에 성당 지하실의 상부에 산 타라시오(San Tarasio) 경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1458년 옛 성당 옆에 새 성당의 신축이 결정되어 안토니오 감벨로(Antonio Gambello)가 건축 총책임자로 임명되었으나, 그가 사망하자 새 성당의 건축은 마우로 코두시에게 맡겨졌습니다. 성당 내부의 평면은 트란셉트가 없는 3랑식 바실리카 형태로서, 단순해 보이는 평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양식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먼저 네이브가 정사각형 베이를 갖고 크로싱에 돔을 얹는 방식은 산 마르코 대성당에서 가져온 것으로 비잔틴 양식에 해당합니다. 제대가 있는 앱스 바깥쪽에 반원형의 경당들이 방사형으로 늘어서 있고 앱스와 경당들 사이에 앰뷸러토리(ambulatory, 보행 통로)가 있는 것은 고딕 양식의 요소입니다. 그리고 바실리카 형태의 선형 평면에, 앱스를 중심으로 하는 방사형의 경당들과 크로싱 상부의 돔 등 중앙집중형 평면의 요소들이 추가되어 선형적 요소를 상쇄한 것은 르네상스 양식의 전형입니다. 이렇게 여러 양식이 나타나는 것은 전임자인 감벨로가 설계한 고딕 양식의 방사형 경당을 코두시가 역으로 이용하여 르네상스 양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성당 외부의 입면은 먼저 출입구가 하나인 것이 특징입니다. 3랑식 평면의 경우 양측 아일에 해당하는 부분에 부출입구가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성당은 블라인드 형태를 포함한 어떤 출입구 흔적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성당의 파사드는 층마다 그 형태가 다릅니다. 이것은 성당을 올리는 단계마다 다른 양식이 적용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특히 1층과 2층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감벨로의 설계로 추측되는 1층의 외관은 중세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 건물 전체로 보면 일종의 기단 느낌을 줍니다. 벽면은 석재로 격자를 만들고 채색 대리석으로 채워 기하학적으로 장식하였고, 벽기둥의 모서리는 가늘게 꼬인 기둥 형태로 장식하였습니다. 그 위로 세 개 층의 본체가 올라가고 최상층의 반원형 박공 아래로 중간층이 한 개 더 있습니다.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 역시 수직으로 세 개 층을 이루고 있지만, 이 성당은 총 여섯 개 층으로 구성된 셈입니다. 2층의 입면은 아일에 해당하는 양쪽 끝에 두 개씩 총 네 개의 아치창이 있고, 그 외에는 모두 블라인드 아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블라인드 아치 상부의 반원 아치에는 조개껍데기 문양이 있는데 이는 토스카나식 로마네스크 양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파사드 전체의 네이브와 아일을 구분하는 기둥은 일치되어 있으나, 그 사이의 개구부는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1층은 격자형 벽면이고, 2층은 네이브에는 일곱 개의 구획이, 양쪽 아일에는 네 개의 구획이 있습니다. 이것이 3층에서는 네이브에 다섯 개, 아일에 세 개로 줄어듭니다. 또한 기둥의 형태 역시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벽기둥에서 가는 쌍기둥으로 변화됩니다. 또한 반원형 곡면을 이용해서 네이브와 아일의 층고 차이를 파사드에 반영한 점은 알베르티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파사드를 연상시킵니다. 그 결과로 반원형의 박공이 형성되었고 여기에 베네치아 고유의 장식주의가 더해졌습니다. 벽체와 벽기둥 등의 건축 요소들이 입체감을 형성하고, 많은 수의 소형 부재로 음영 효과가 나타나며, 층과 층 사이의 수평 부재는 두 겹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조각 개념이 건축의 원리로 치환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전의 요소를 사용할 때도 조각주의 전통이 적용되었습니다. 반원형 박공과 엔태블러처(프리즈)의 장식, 그리고 그 끝 지점의 조각물은 베네치아에서 조각주의가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반원형 박공과 장식주의 등은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과 공통되는 요소로,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지역 양식이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우로 코두시의 다른 작품으로 1490년에 착공한 산타 마리아 포르모사(Santa Maria Formosa) 성당을 들 수 있습니다. 성당의 내부는 3랑식 바실리카에 돔 천장이 있는 구조로 성 마르코 대성당과 유사합니다. 돔은 크로싱 외에도 아일의 천장에 사용되었고, 네이브의 천장은 그로인 볼트로 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 선형 평면에 중앙집중형 요소를 강화한 르네상스 양식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줍니다. 외부의 파사드에는 브루넬레스키의 엔태블러처가 있는 벽기둥과 알베르티의 거대 기둥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기둥 사이로 신전 파사드의 페디먼트와 개선문형 아치, 토스카나식 로마네스크의 반원 아케이드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성당에도 베네치아의 조각주의가 장식 요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지어진 이 성당은 10년 앞선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과 산 차카리아 성당과 비교했을 때 단순함이 돋보이는데, 이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

피렌체를 중심으로 시작된 르네상스 건축은 15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피렌체 밖으로 전해졌습니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과 건물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와 피렌체뿐만 아니라 만토바에 르네상스 성당을 세운 알베르티, 두 건축가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표준형을 제시하면서 당대의 건축 양식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르네상스 표준 양식을 배운 제자들은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 르네상스 건축물을 지으며 지역 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대표적인 지역으로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10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피엔차를 들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를 장려하는 인문주의 교황으로 알려진 비오 2세 교황(1458-1464 재위)은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나르도 로셀리노(Bernardo Rossellino, 1409–1464)에게 피엔차의 도시 계획을 맡겼습니다. 로셀리노는 비오 2세 광장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피엔차 대성당(Duomo di Pienza)을 서쪽에는 교황의 세속 이름을 딴 팔라초 피콜로미니를 배치했습니다. 로셀리노는 성당의 북쪽에 면한 좁은 광장이 가능한 넓은 면적을 갖도록 하려고, 성당의 파사드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성당을 가능한 한 남쪽의 끝에 배치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당의 제대가 있는 앱스 부분은 가파른 경사면에 지어졌습니다. 사실 이곳에는 작은 로마네스크 성당이 일반적인 배치에 따라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었는데, 성당과 광장을 모두 살리기 위해서 성당이 광장을 바라보도록 남북 방향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외관을 보면 파사드가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네 개의 기둥에 의해서 수직으로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는데, 이 분할은 내부의 3랑식(네이브와 두 아일) 구성과 일치합니다. 파사드 1층에는 세 개의 출입문이 있고, 2층은 세 개의 아치로 장식되었으며, 3층 페디먼트 안쪽의 팀파눔에는 비오 2세 교황의 문장이 있습니다. 남쪽에 있는 앱스에는 고딕 양식의 창문이 있어서 내부의 조도가 밝은 편입니다. 내부는 네이브와 두 아일의 높이가 같은 3랑식 평면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이브는 두 아일의 폭에 비해서 훨씬 넓게 설계되었습니다. 천장은 교차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앱스는 세 개의 경당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큰 경당에 성가대석이 있습니다. 로셀리노는 이렇게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의 영향을 받아서 르네상스 성당을 지역 양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초기 르네상스 건축에서 지역 양식이 발달한 도시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베네치아입니다. 베네치아 르네상스는 토스카나로부터 르네상스의 표준 양식을 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해양 도시에 남아 있는 고대 유적지에서 동로마(비잔틴)제국의 건축을 직접 습득하였습니다. 그러한 초기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이끈 건축가로 피에트로 롬바르도(Pietro Lombardo, 1435–1515)를 들 수 있습니다. 조각가이기도 한 그는 20대 청년 시절부터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을 통해서 피렌체의 르네상스 양식을 배웠는데,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i Miracoli)이 그의 대표작입니다. ‘기적의 성모 마리아’(Santa Maria dei Miracoli)라는 성당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이 성당에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기적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15세기 후반, 베네치아의 비단 장수 안젤로 아마디의 집 모퉁이에는 1408년에 봉헌된 니콜로 디 피에트로가 그린 성모 마리아 성화가 있었습니다. 이 성화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실제로 지역 주민들은 은총을 얻기 위해서 성화 속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1480년 그 성모 성화의 기적 은총을 영광스럽게 해줄 성당을 지어 성모 성화를 보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피에트로 롬바르도에게 성당 건축이 맡겨졌고, 그는 베네치아 최초의 르네상스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습니다. 성당의 내부는 1랑식 바실리카 평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배럴 볼트(원통을 반으로 자른 형태의 둥근 천장)로 되어 있는 네이브의 천장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성조들이 새겨져 있는 50개의 목재판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제단 부분은 2층으로 만들어졌는데, 아래층에는 성물이 안치되어 있고 위층에는 성 프란치스코, 성녀 클라라, 가브리엘 대천사와 주님 탄생 예고(수태고지), 그리고 양쪽에 팔각형 독서대가 다양한 채색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제단의 뒷벽에는 원형 문양으로 된 십자가가 있고, 양옆에 반원 아치의 창문과 그 위에 원형 창이 있습니다. 천장은 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외부는 두 단으로 되어 있는 직육면체의 본체 위에 반원통형 천장과 돔 천장이 얹힌 형상입니다. 정면(파사드)과 뒷면(제단 외부) 앞에는 작은 광장이 있고, 왼쪽에는 운하가 흐르고 오른쪽에는 통행로가 나 있습니다. 외벽은 아치 열을 사각 벽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아케이드가 아닌 장식 형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사각 벽기둥의 주두는 외벽의 1단에는 코린토 양식이 2단에는 이오니아 양식이 사용되었습니다. 다만 1단과 2단 사이의 엔태블러처는 1단과 2단에 통일성을 주지 못하고 마치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알베르티의 경우처럼 여기에 장식적 요소를 넣어 1단과 2단이 지루하지 않으면서 일체성을 갖도록 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출입구 부분은 다른 부분에 비해서 아치의 폭이 넓은데, 여기에 십자가 장식을 넣어서 양쪽의 아치와 구분하는 효과를 냈습니다. 출입구 상부의 팀파눔에 성모자의 흉상이 있어서 성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습니다. 파사드 최상층의 반원형 페디먼트에는 커다란 원형 창과 3개의 오쿨루스, 2개의 대리석 원형 장식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고대 로마의 벽체 구조와 유사한 면에서 토스카나 지역의 로마네스크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고,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의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여기에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 등에서 비잔틴 양식의 요소들을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피렌체의 르네상스 표준형 양식에 베네치아 고유의 비잔틴 양식이 더해져 베네치아 지역 양식을 형성한 것입니다. 건축 양식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지역에 맞도록 재탄생시키는 일은 우리나라 ‘성당 건축’도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4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만토바의 산탄드레아 성당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과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의 파사드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알베르티는 그의 인생 후반에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으로부터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Chiesa di San Sebastiano in Mantova)과 산탄드레아 성당(Basilica di Sant’Andrea in Mantova, 성 안드레아 성당)의 설계를 의뢰받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알베르티의 만토바 진출은 르네상스 건축이 피렌체 밖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게다가 두 성당은 이전 시대에 지어진 건물의 증·개축이 아닌 처음부터 온전히 알베르티의 손에 의해서 설계된 최초의 작품입니다. 또한 알베르티는 초기 르네상스 성당이 취하는 평면의 두 전형을, 곧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에서는 그릭 크로스 평면(중앙집중형 평면)을, 그리고 산탄드레아 성당에서는 라틴 크로스 평면(선형 평면)을 완성합니다. 먼저 설계한 것은 그릭 크로스 평면의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입니다. 이 성당은 1460년에 착공되었지만, 알베르티가 147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완공하지 못하였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알베르티의 설계를 그의 이론에 따라 재구성하였는데, 지금의 성당은 그의 설계와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성당의 내부를 보면 강력한 중앙집중형 평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원래 중앙의 크로싱 위에는 돔이 있었던 것 같으며, 크로싱에서 제단 방향과 양측의 트란셉트 방향에는 반원 앱스가 있고 입구 방향에 출입문과 포르티코(portico)가 있습니다. 이 평면은 정사각형이 여러 겹 방사선 형태로 확장되는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런 형태는 로마 고전의 중앙집중형 평면을 기하학적으로 해석하여 더 강한 중앙집중형의 평면을 만든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도 말년에 중앙집중형 평면을 선호했는데, 그런 경향을 알베르티가 그릭 크로스의 평면에서 더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당의 입면은 개선문 아치와 그리스 신전 파사드가 어우러져 배치되었습니다. 성당이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것은 거룩한 장소로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알베르티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각형의 벽면에 네 개의 벽기둥이 있고 그 위에 엔태블러처와 페디먼트가 놓였는데, 이는 신전 파사드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입니다. 또한 벽체에 개선문 아치를 기하학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켜, 본체는 정사각형으로 출입구는 사각형과 반원으로 페디먼트는 삼각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470년에 알베르티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산탄드레아 성당을 설계하였는데, 아쉽게도 성당의 착공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당 건축은 알베르티의 설계에 따라 그의 제자에 의해서 진행되었는데, 알베르티의 이론과 사상에 가깝게 표현되었습니다. 산탄드레아 성당의 평면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에서 보여주었던 라틴 크로스 형태입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의 설계는 네이브와 아일 사이의 네이브월이 가는 원기둥으로 되어 있는 아케이드 형태였습니다. 이런 선형 평면은 공간의 중심축이 성당 입구에서 제단을 향하여 형성되어, 이전 시대의 평면과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알베르티는 라틴 크로스의 평면을 사용하되 선형성을 약화하고 르네상스의 중앙집중성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일에 해당하는 공간에 큰 경당과 작은 경당을 번갈아 구성하여, 네이브에서 볼 때 기존의 제단을 향한 축에 아일의 경당들을 향하는 축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브루넬레스키 평면과 알베르티 평면은 같은 라틴 크로스여서 비슷해 보이지만, 알베르티는 선형 공간에 중앙집중형 공간을 추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축의 방향성이 만들어진 것은 알베르티가 네이브 천장을 폭 17미터의 석재 배럴 볼트로 올린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고딕 양식의 리브 그로인 볼트가 아니라, 로마 고전주의를 따라서 카라칼라 목욕장과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에서 볼 수 있는 배럴 볼트로 천장을 올렸는데, 그 경우 수직 하중을 견디기 위해서는 무게를 집중시키는 기둥 형태보다 무게를 분산시키는 벽체 형태가 유리합니다. 따라서 아케이드의 원기둥이 떠받치는 브루넬레스키식 네이브월은 육중한 배럴 볼트를 지탱할 수 없기에, 알베르티는 다시 로마 고전주의를 따라 먼저 거대한 받침대를 만들고 그 아래에 두꺼운 벽기둥(벽체를 포함하는 사각기둥)을 설치하였습니다. 벽기둥과 벽기둥 사이는 외부에 사용된 모티브인 개선문 아치가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선문 아치마다 큰 경당과 작은 경당을 번갈아 만들어 공간에 율동감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라틴 크로스 평면에 배럴 볼트의 천장과 두꺼운 벽기둥, 그리고 크고 작은 경당의 구성은 라틴 크로스의 전례적 장점을 살리면서 그릭 크로스의 르네상스 정신을 구현한 알베르티의 독창적인 설계입니다. 알베르티의 이 평면은 16세기 성당 건축의 중요한 모델이 되었고 17세기의 유행을 이끌었습니다. 산탄드레아 성당의 외부 역시 알베르티가 설계한 내부 공간과 연관되어 나타났는데,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의 외부에서 사용한 개선문 아치와 신전 파사드 형태가 다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먼저 알베르티는 네 개의 대형 기둥 위에 엔태블러처를 얹고 그 위에 페디먼트를 올려서 그리스 신전 파사드를 연출하였습니다. 또한 가운데의 두 기둥 사이에 개선문 아치를 세우고, 양옆 기둥 사이에 작은 출입구를 두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성당 내부의 아일 방향에 구성된 큰 경당과 작은 경당의 반복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외벽의 대리석 색채를 이용한 기하학적 장식과 두 개 층에 걸친 거대 기둥의 등장도 눈에 띕니다. 브루넬레스키에서 시작된 초기 르네상스 건축은 알베르티에 의해서 완성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서로 다른 형태인 선형 평면과 중앙집중형 평면의 조화를 이루고 개선문 아치와 신전 파사드를 이질감 없이 결합하였습니다. 또한 구조적으로는 원기둥보다 안정감 있는 벽기둥과 거대 기둥을 사용하고, 장식에서는 정사각형 등의 기하학적 형태를 정착하였습니다. 이러한 알베르티의 르네상스 고전주의는 이후 미켈란젤로, 팔라디오, 베르니니 등이 이끄는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의 표준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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