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메디치가의 부흥

1429년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Cosimo di Giovanni de' Medici, 1389–1464)는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로부터 유럽 전역에 진출해 있는 메디치가의 은행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코시모는 유산을 지키기 위해서 피렌체의 정치에 개입하게 됩니다. 특히 피렌체의 대지주인 리날도 델리 알비치가 코시모를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1433년 코시모는 결국 피렌체 근교의 메디치 영지로 피신하였는데, 새 피렌체 정부로부터 시뇨리아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가문을 위해서 시뇨리아 회의에 참석하였지만, 즉시 체포되어 90미터 높이의 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알비치는 코시모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시뇨리아를 압박했으나 결국 추방으로 타협하였고, 코시모는 베네치아에서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알비치는 주요 가문들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를 지배하게 되었으나,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 그리고 소시민들은 여전히 메디치가의 편이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시기에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사 중이었고, 알베르티는 피렌체에 들어와서 활동을 막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르네상스의 열풍이 일기 시작했을 때였기에,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코시모는 비록 몸은 베네치아에 있지만 피렌체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비치는 인문주의를 그리스도교의 적대 세력으로 간주하여 탄압했고, 시뇨리아를 무력화하여 민주주의를 무너트리려고 했습니다. 이에 시민들이 반발하고 도시가 분열되는 등 내전의 긴장감이 커지자 알비치 집단은 피렌체에서 도망쳤습니다. 결국 시뇨리아는 1년도 못 되어 코시모를 귀환시켰고 피렌체 시민들은 코시모를 환영하였습니다. 이후 피렌체는 일상을 되찾았지만, 실제 통치권은 코시모에게 넘어갔습니다. 코시모는 시민들이 원하는 평화를 보장해 준다면 그들도 그의 정치를 용인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코시모는 더욱 낮은 자세로 일하며 자신도 평범한 시민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 교회는 마르티노 5세 교황의 선출로 40년간의 서방교회 대이교를 마감하고 쇄신을 위한 공의회를 준비하였습니다. 1431년 교황은 바젤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후임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공의회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오스만튀르크의 공격을 받고 서방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목적으로 황제의 요청에 응하여 페라라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에 황제와 총대주교를 비롯한 700명 규모의 동방교회 대표단이 페라라에 도착하였고, 공의회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일치를 이루지 못한 교리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페라라에서 서방교회만이 아닌 대규모의 동방교회 대표단이 함께 머무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려웠으며, 더구나 재정이 열악했던 교황청은 더욱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네치아 망명 기간 중 베네치아 출신의 에우제니오 4세 교황에게 도움을 받았던 코시모는, 피렌체가 공의회의 참석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고 공의회에 들어가는 비용도 충당할 능력이 있는 도시라며, 피렌체에서 공의회를 개최할 의향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교황이 코시모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피렌체 시민들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대표단을 맞이하고자 1439년 초에 코시모를 시뇨리아의 의장으로 선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공의회의 개최가 가져다줄 엄청난 이득을 알았던 시민들은 공의회 참석자들을 최대한 만족시키려고 준비하였는데, 피렌체에 들어오는 동방교회 대표단의 행렬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기이한 복장의 사제들, 다른 색의 피부를 가진 몽골인, 무어인, 아프리카 흑인, 그리고 원숭이, 화려한 깃털의 새, 사슬을 두른 치타 등은 피렌체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습니다. 서방교회의 대표단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짐을 풀었고, 동방교회의 대규모 대표단은 메디치가를 비롯한 유력 가문들의 저택들에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공의회는 피렌체의 여러 성당에서 진행되었는데, 많은 교리적 논쟁이 있었음에도 1439년 7월 6일 피렌체 대성당 브루넬레스키의 돔 아래에서 양 교회의 대표가 교회 일치 교령에 서명함으로써 마무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성령의 발출(필리오퀘), 성체로 축성할 제병, 연옥과 지옥, 로마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리고 동방교회 대표단은 서방교회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동방교회 내부에서 일치 교령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서방교회의 군사적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군대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하지만 피렌체는 공의회 덕분에 교황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메디치가의 위상은 더 높아졌습니다. 당시 인문주의는 플라톤 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것 역시 코시모가 피치노에게 플라톤의 저서를 번역하고 보급하도록 지원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부패한 실베스테르회를 추방하고 산 마르코 수도원을 도미니코회에 맡겼을 때, 코시모는 수도원 건축의 모든 비용을 대고 그 설계를 친구 미켈로초(1396-1472)에게 맡겼습니다. 코시모는 ‘팔라초 메디치’를 지을 때도 먼저 브루넬레스키에게 설계를 의뢰했으나, 결국 브루넬레스키의 웅장한 설계를 반려하고 미켈로초에게 맡겼습니다. 세간의 이목을 끌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습니다. 코시모는 메디치가와 피렌체,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헌신했지만, 고질적인 통풍에 시달리며 병상에서 지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만 갔고, 결국 1464년 그가 사랑하는 가족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히 잠들었습니다. 시뇨리아는 국가 원수에 해당하는 장례를 계획했지만, 코시모의 평소 바람대로 한 시민으로 산 로렌초 성당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시뇨리아와 시민들이 코시모에게 바치는 영예를 거절할 수 없어서 그의 무덤에 ‘국부’(Pater patriae)라는 비문을 새기는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베네치아의 산 차카리아 성당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 가운데, 피에트로 롬바르도의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과 함께 베네치아의 지역 양식을 대표하는 곳으로, 마우로 코두시(Mauro Codussi, 1440-1504)의 ‘산 차카리아 성당’(Chiesa di San Zaccaria, 성 즈카르야 성당)을 꼽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봉헌된 이 성당은 베네치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산 마르코 대성당과 두칼레 궁전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9세기에 비잔틴의 레오 5세 황제는 해상 무역의 요충지로 성장하고 있는 베네치아 공국과 우애를 다지기 위해서 즈카르야의 유해를 기증하였고, 베네치아 당국은 성인에 대한 공경의 표시로 유해를 안치할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습니다. 이후 10세기에 들어서 베네딕토 수도회가 이 성당을 맡아 재건하였는데, 12세기 초에 발생한 대형 화재로 백 명이 넘는 수도자들이 참사를 당하였습니다. 화재로 소실된 성당은 방치되어 오다가 15세기에 성당 지하실의 상부에 산 타라시오(San Tarasio) 경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1458년 옛 성당 옆에 새 성당의 신축이 결정되어 안토니오 감벨로(Antonio Gambello)가 건축 총책임자로 임명되었으나, 그가 사망하자 새 성당의 건축은 마우로 코두시에게 맡겨졌습니다. 성당 내부의 평면은 트란셉트가 없는 3랑식 바실리카 형태로서, 단순해 보이는 평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양식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먼저 네이브가 정사각형 베이를 갖고 크로싱에 돔을 얹는 방식은 산 마르코 대성당에서 가져온 것으로 비잔틴 양식에 해당합니다. 제대가 있는 앱스 바깥쪽에 반원형의 경당들이 방사형으로 늘어서 있고 앱스와 경당들 사이에 앰뷸러토리(ambulatory, 보행 통로)가 있는 것은 고딕 양식의 요소입니다. 그리고 바실리카 형태의 선형 평면에, 앱스를 중심으로 하는 방사형의 경당들과 크로싱 상부의 돔 등 중앙집중형 평면의 요소들이 추가되어 선형적 요소를 상쇄한 것은 르네상스 양식의 전형입니다. 이렇게 여러 양식이 나타나는 것은 전임자인 감벨로가 설계한 고딕 양식의 방사형 경당을 코두시가 역으로 이용하여 르네상스 양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성당 외부의 입면은 먼저 출입구가 하나인 것이 특징입니다. 3랑식 평면의 경우 양측 아일에 해당하는 부분에 부출입구가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성당은 블라인드 형태를 포함한 어떤 출입구 흔적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성당의 파사드는 층마다 그 형태가 다릅니다. 이것은 성당을 올리는 단계마다 다른 양식이 적용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특히 1층과 2층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감벨로의 설계로 추측되는 1층의 외관은 중세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 건물 전체로 보면 일종의 기단 느낌을 줍니다. 벽면은 석재로 격자를 만들고 채색 대리석으로 채워 기하학적으로 장식하였고, 벽기둥의 모서리는 가늘게 꼬인 기둥 형태로 장식하였습니다. 그 위로 세 개 층의 본체가 올라가고 최상층의 반원형 박공 아래로 중간층이 한 개 더 있습니다.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 역시 수직으로 세 개 층을 이루고 있지만, 이 성당은 총 여섯 개 층으로 구성된 셈입니다. 2층의 입면은 아일에 해당하는 양쪽 끝에 두 개씩 총 네 개의 아치창이 있고, 그 외에는 모두 블라인드 아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블라인드 아치 상부의 반원 아치에는 조개껍데기 문양이 있는데 이는 토스카나식 로마네스크 양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파사드 전체의 네이브와 아일을 구분하는 기둥은 일치되어 있으나, 그 사이의 개구부는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1층은 격자형 벽면이고, 2층은 네이브에는 일곱 개의 구획이, 양쪽 아일에는 네 개의 구획이 있습니다. 이것이 3층에서는 네이브에 다섯 개, 아일에 세 개로 줄어듭니다. 또한 기둥의 형태 역시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벽기둥에서 가는 쌍기둥으로 변화됩니다. 또한 반원형 곡면을 이용해서 네이브와 아일의 층고 차이를 파사드에 반영한 점은 알베르티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파사드를 연상시킵니다. 그 결과로 반원형의 박공이 형성되었고 여기에 베네치아 고유의 장식주의가 더해졌습니다. 벽체와 벽기둥 등의 건축 요소들이 입체감을 형성하고, 많은 수의 소형 부재로 음영 효과가 나타나며, 층과 층 사이의 수평 부재는 두 겹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조각 개념이 건축의 원리로 치환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전의 요소를 사용할 때도 조각주의 전통이 적용되었습니다. 반원형 박공과 엔태블러처(프리즈)의 장식, 그리고 그 끝 지점의 조각물은 베네치아에서 조각주의가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반원형 박공과 장식주의 등은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과 공통되는 요소로,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지역 양식이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우로 코두시의 다른 작품으로 1490년에 착공한 산타 마리아 포르모사(Santa Maria Formosa) 성당을 들 수 있습니다. 성당의 내부는 3랑식 바실리카에 돔 천장이 있는 구조로 성 마르코 대성당과 유사합니다. 돔은 크로싱 외에도 아일의 천장에 사용되었고, 네이브의 천장은 그로인 볼트로 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 선형 평면에 중앙집중형 요소를 강화한 르네상스 양식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줍니다. 외부의 파사드에는 브루넬레스키의 엔태블러처가 있는 벽기둥과 알베르티의 거대 기둥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기둥 사이로 신전 파사드의 페디먼트와 개선문형 아치, 토스카나식 로마네스크의 반원 아케이드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성당에도 베네치아의 조각주의가 장식 요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지어진 이 성당은 10년 앞선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과 산 차카리아 성당과 비교했을 때 단순함이 돋보이는데, 이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

피렌체를 중심으로 시작된 르네상스 건축은 15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피렌체 밖으로 전해졌습니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과 건물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와 피렌체뿐만 아니라 만토바에 르네상스 성당을 세운 알베르티, 두 건축가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표준형을 제시하면서 당대의 건축 양식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르네상스 표준 양식을 배운 제자들은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 르네상스 건축물을 지으며 지역 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대표적인 지역으로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10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피엔차를 들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를 장려하는 인문주의 교황으로 알려진 비오 2세 교황(1458-1464 재위)은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나르도 로셀리노(Bernardo Rossellino, 1409–1464)에게 피엔차의 도시 계획을 맡겼습니다. 로셀리노는 비오 2세 광장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피엔차 대성당(Duomo di Pienza)을 서쪽에는 교황의 세속 이름을 딴 팔라초 피콜로미니를 배치했습니다. 로셀리노는 성당의 북쪽에 면한 좁은 광장이 가능한 넓은 면적을 갖도록 하려고, 성당의 파사드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성당을 가능한 한 남쪽의 끝에 배치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당의 제대가 있는 앱스 부분은 가파른 경사면에 지어졌습니다. 사실 이곳에는 작은 로마네스크 성당이 일반적인 배치에 따라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었는데, 성당과 광장을 모두 살리기 위해서 성당이 광장을 바라보도록 남북 방향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외관을 보면 파사드가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네 개의 기둥에 의해서 수직으로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는데, 이 분할은 내부의 3랑식(네이브와 두 아일) 구성과 일치합니다. 파사드 1층에는 세 개의 출입문이 있고, 2층은 세 개의 아치로 장식되었으며, 3층 페디먼트 안쪽의 팀파눔에는 비오 2세 교황의 문장이 있습니다. 남쪽에 있는 앱스에는 고딕 양식의 창문이 있어서 내부의 조도가 밝은 편입니다. 내부는 네이브와 두 아일의 높이가 같은 3랑식 평면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이브는 두 아일의 폭에 비해서 훨씬 넓게 설계되었습니다. 천장은 교차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앱스는 세 개의 경당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큰 경당에 성가대석이 있습니다. 로셀리노는 이렇게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의 영향을 받아서 르네상스 성당을 지역 양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초기 르네상스 건축에서 지역 양식이 발달한 도시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베네치아입니다. 베네치아 르네상스는 토스카나로부터 르네상스의 표준 양식을 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해양 도시에 남아 있는 고대 유적지에서 동로마(비잔틴)제국의 건축을 직접 습득하였습니다. 그러한 초기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이끈 건축가로 피에트로 롬바르도(Pietro Lombardo, 1435–1515)를 들 수 있습니다. 조각가이기도 한 그는 20대 청년 시절부터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을 통해서 피렌체의 르네상스 양식을 배웠는데,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i Miracoli)이 그의 대표작입니다. ‘기적의 성모 마리아’(Santa Maria dei Miracoli)라는 성당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이 성당에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기적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15세기 후반, 베네치아의 비단 장수 안젤로 아마디의 집 모퉁이에는 1408년에 봉헌된 니콜로 디 피에트로가 그린 성모 마리아 성화가 있었습니다. 이 성화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실제로 지역 주민들은 은총을 얻기 위해서 성화 속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1480년 그 성모 성화의 기적 은총을 영광스럽게 해줄 성당을 지어 성모 성화를 보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피에트로 롬바르도에게 성당 건축이 맡겨졌고, 그는 베네치아 최초의 르네상스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습니다. 성당의 내부는 1랑식 바실리카 평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배럴 볼트(원통을 반으로 자른 형태의 둥근 천장)로 되어 있는 네이브의 천장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성조들이 새겨져 있는 50개의 목재판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제단 부분은 2층으로 만들어졌는데, 아래층에는 성물이 안치되어 있고 위층에는 성 프란치스코, 성녀 클라라, 가브리엘 대천사와 주님 탄생 예고(수태고지), 그리고 양쪽에 팔각형 독서대가 다양한 채색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제단의 뒷벽에는 원형 문양으로 된 십자가가 있고, 양옆에 반원 아치의 창문과 그 위에 원형 창이 있습니다. 천장은 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외부는 두 단으로 되어 있는 직육면체의 본체 위에 반원통형 천장과 돔 천장이 얹힌 형상입니다. 정면(파사드)과 뒷면(제단 외부) 앞에는 작은 광장이 있고, 왼쪽에는 운하가 흐르고 오른쪽에는 통행로가 나 있습니다. 외벽은 아치 열을 사각 벽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아케이드가 아닌 장식 형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사각 벽기둥의 주두는 외벽의 1단에는 코린토 양식이 2단에는 이오니아 양식이 사용되었습니다. 다만 1단과 2단 사이의 엔태블러처는 1단과 2단에 통일성을 주지 못하고 마치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알베르티의 경우처럼 여기에 장식적 요소를 넣어 1단과 2단이 지루하지 않으면서 일체성을 갖도록 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출입구 부분은 다른 부분에 비해서 아치의 폭이 넓은데, 여기에 십자가 장식을 넣어서 양쪽의 아치와 구분하는 효과를 냈습니다. 출입구 상부의 팀파눔에 성모자의 흉상이 있어서 성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습니다. 파사드 최상층의 반원형 페디먼트에는 커다란 원형 창과 3개의 오쿨루스, 2개의 대리석 원형 장식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고대 로마의 벽체 구조와 유사한 면에서 토스카나 지역의 로마네스크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고,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의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여기에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 등에서 비잔틴 양식의 요소들을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피렌체의 르네상스 표준형 양식에 베네치아 고유의 비잔틴 양식이 더해져 베네치아 지역 양식을 형성한 것입니다. 건축 양식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지역에 맞도록 재탄생시키는 일은 우리나라 ‘성당 건축’도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4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만토바의 산탄드레아 성당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과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의 파사드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알베르티는 그의 인생 후반에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으로부터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Chiesa di San Sebastiano in Mantova)과 산탄드레아 성당(Basilica di Sant’Andrea in Mantova, 성 안드레아 성당)의 설계를 의뢰받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알베르티의 만토바 진출은 르네상스 건축이 피렌체 밖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게다가 두 성당은 이전 시대에 지어진 건물의 증·개축이 아닌 처음부터 온전히 알베르티의 손에 의해서 설계된 최초의 작품입니다. 또한 알베르티는 초기 르네상스 성당이 취하는 평면의 두 전형을, 곧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에서는 그릭 크로스 평면(중앙집중형 평면)을, 그리고 산탄드레아 성당에서는 라틴 크로스 평면(선형 평면)을 완성합니다. 먼저 설계한 것은 그릭 크로스 평면의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입니다. 이 성당은 1460년에 착공되었지만, 알베르티가 147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완공하지 못하였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알베르티의 설계를 그의 이론에 따라 재구성하였는데, 지금의 성당은 그의 설계와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성당의 내부를 보면 강력한 중앙집중형 평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원래 중앙의 크로싱 위에는 돔이 있었던 것 같으며, 크로싱에서 제단 방향과 양측의 트란셉트 방향에는 반원 앱스가 있고 입구 방향에 출입문과 포르티코(portico)가 있습니다. 이 평면은 정사각형이 여러 겹 방사선 형태로 확장되는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런 형태는 로마 고전의 중앙집중형 평면을 기하학적으로 해석하여 더 강한 중앙집중형의 평면을 만든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도 말년에 중앙집중형 평면을 선호했는데, 그런 경향을 알베르티가 그릭 크로스의 평면에서 더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당의 입면은 개선문 아치와 그리스 신전 파사드가 어우러져 배치되었습니다. 성당이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것은 거룩한 장소로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알베르티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각형의 벽면에 네 개의 벽기둥이 있고 그 위에 엔태블러처와 페디먼트가 놓였는데, 이는 신전 파사드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입니다. 또한 벽체에 개선문 아치를 기하학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켜, 본체는 정사각형으로 출입구는 사각형과 반원으로 페디먼트는 삼각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470년에 알베르티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산탄드레아 성당을 설계하였는데, 아쉽게도 성당의 착공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당 건축은 알베르티의 설계에 따라 그의 제자에 의해서 진행되었는데, 알베르티의 이론과 사상에 가깝게 표현되었습니다. 산탄드레아 성당의 평면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에서 보여주었던 라틴 크로스 형태입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의 설계는 네이브와 아일 사이의 네이브월이 가는 원기둥으로 되어 있는 아케이드 형태였습니다. 이런 선형 평면은 공간의 중심축이 성당 입구에서 제단을 향하여 형성되어, 이전 시대의 평면과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알베르티는 라틴 크로스의 평면을 사용하되 선형성을 약화하고 르네상스의 중앙집중성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일에 해당하는 공간에 큰 경당과 작은 경당을 번갈아 구성하여, 네이브에서 볼 때 기존의 제단을 향한 축에 아일의 경당들을 향하는 축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브루넬레스키 평면과 알베르티 평면은 같은 라틴 크로스여서 비슷해 보이지만, 알베르티는 선형 공간에 중앙집중형 공간을 추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축의 방향성이 만들어진 것은 알베르티가 네이브 천장을 폭 17미터의 석재 배럴 볼트로 올린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고딕 양식의 리브 그로인 볼트가 아니라, 로마 고전주의를 따라서 카라칼라 목욕장과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에서 볼 수 있는 배럴 볼트로 천장을 올렸는데, 그 경우 수직 하중을 견디기 위해서는 무게를 집중시키는 기둥 형태보다 무게를 분산시키는 벽체 형태가 유리합니다. 따라서 아케이드의 원기둥이 떠받치는 브루넬레스키식 네이브월은 육중한 배럴 볼트를 지탱할 수 없기에, 알베르티는 다시 로마 고전주의를 따라 먼저 거대한 받침대를 만들고 그 아래에 두꺼운 벽기둥(벽체를 포함하는 사각기둥)을 설치하였습니다. 벽기둥과 벽기둥 사이는 외부에 사용된 모티브인 개선문 아치가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선문 아치마다 큰 경당과 작은 경당을 번갈아 만들어 공간에 율동감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라틴 크로스 평면에 배럴 볼트의 천장과 두꺼운 벽기둥, 그리고 크고 작은 경당의 구성은 라틴 크로스의 전례적 장점을 살리면서 그릭 크로스의 르네상스 정신을 구현한 알베르티의 독창적인 설계입니다. 알베르티의 이 평면은 16세기 성당 건축의 중요한 모델이 되었고 17세기의 유행을 이끌었습니다. 산탄드레아 성당의 외부 역시 알베르티가 설계한 내부 공간과 연관되어 나타났는데,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의 외부에서 사용한 개선문 아치와 신전 파사드 형태가 다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먼저 알베르티는 네 개의 대형 기둥 위에 엔태블러처를 얹고 그 위에 페디먼트를 올려서 그리스 신전 파사드를 연출하였습니다. 또한 가운데의 두 기둥 사이에 개선문 아치를 세우고, 양옆 기둥 사이에 작은 출입구를 두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성당 내부의 아일 방향에 구성된 큰 경당과 작은 경당의 반복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외벽의 대리석 색채를 이용한 기하학적 장식과 두 개 층에 걸친 거대 기둥의 등장도 눈에 띕니다. 브루넬레스키에서 시작된 초기 르네상스 건축은 알베르티에 의해서 완성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서로 다른 형태인 선형 평면과 중앙집중형 평면의 조화를 이루고 개선문 아치와 신전 파사드를 이질감 없이 결합하였습니다. 또한 구조적으로는 원기둥보다 안정감 있는 벽기둥과 거대 기둥을 사용하고, 장식에서는 정사각형 등의 기하학적 형태를 정착하였습니다. 이러한 알베르티의 르네상스 고전주의는 이후 미켈란젤로, 팔라디오, 베르니니 등이 이끄는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의 표준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 수학, 과학,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전인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건축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은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Chiesa di San Francesco in Rimini)의 중축 공사를 맡으면서입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9세기에 설립된 ‘트리비오의 산타 마리아 경당’(Cappella di Santa Maria in Trivio)이 있었는데, 13세기 중엽 프란치스코회가 새 성당을 성 프란치스코에게 봉헌하면서 ‘산 프란체스코 성당’이 되었습니다. 이 성당은 하나의 네이브(1랑식)에 세 개의 앱스가 있었고, 나중에 남쪽으로 두 개의 경당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14세기에 들어서 말라테스타(Malatesta) 가문의 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15세기 중엽 말라테스타 영주가 가문의 수호성인인 산 시지스몬도(San Sigismondo)에게 봉헌할 경당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증축 규모가 확대되었습니다. 증축 공사의 건축 책임자는 마테오 데 파스티(Matteo de’ Pasti)였는데 공사가 확장된 데에는 알베르티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성당 내부는 마테오 데 파스티와 아고스티노 디 두치오에 의해서 계획되었고, 외부는 내부의 공사가 시작되고 몇 년이 지나 알베르티가 설계를 맡았습니다. 알베르티가 설계한 원안의 파사드를 마테오 데 파스티가 제작한 메달에서 볼 수 있습니다. 파사드의 1층은 복합 주두가 있는 네 개의 벽기둥에 의해서 세 개의 베이로 분할되고, 각각의 베이는 상부에 반원 아치를 갖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출입구가 있고 그 상부에 페디먼트(기둥 상부의 삼각형 부분으로 박공지붕과 비슷한 일종의 장식 요소)가 있으며, 양쪽 베이는 개구부 없이 마치 블라인드 아치처럼 되어 있습니다. 파사드의 2층은 성당 내부의 네이브와 아일의 높이 차이에 따라서 계획되었는데, 네이브 부분의 전면은 1층의 중앙 부분과 유사하지만, 아일 부분은 곡면으로 설계되었습니다. 또한 설계의 원안이라고 할 수 있는 마테오의 메달을 보면 파사드의 뒷부분에 대형 돔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돔의 크기는 크로싱의 상부 면적에 상응하지만, 이 돔의 지름은 크로싱이 아닌 건물 전체의 폭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돔이 제대와 성가대석이 있는 성당의 동쪽 부분을 모두 덮도록 계획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알베르티가 이렇게 돔을 크게 설계한 것은, 성당의 중심이 네이브와 아일, 그리고 주출입구와 파사드가 있는 성당의 서쪽 부분(세속의 공간)에 있지 않고 제단을 중심으로 하는 동쪽 부분(거룩한 공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돔이 커지는 것은 르네상스 건축의 흐름이 바실리카 형태의 선형성보다는 중앙집중형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공사는 2층 부분에서 설계와는 다르게 진행되었는데, 먼저 아일 부분의 곡선 지붕이 직선으로 바뀌었고 네이브 부분은 1층과 같은 설계였지만 공사를 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알베르티의 대형 돔은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1460년 말라테스타 영주가 교황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공사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라테스타 영주는 이 건물을 가문을 위한 경당으로 만들고자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성당의 모습보다는 이교도적인 언어로 표현된 상징과 표상들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은 더 이상 ‘산 프란체스코 성당’이 아닌 ‘말라테스타 사원’(Tempio Malatestiano)으로 불렸습니다. 말라테스타에게 성당을 개축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은 기대하기 힘들었고, 그의 이런 행동이 교황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발단이 되었습니다. 알베르티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기둥보다 벽체를 중요시했습니다. 파사드를 보면 벽체가 내력 역할을 하고 기둥은 장식 역할을 합니다. 이는 로마식 고전주의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남측의 입면을 보면 아치로 구성된 아케이드라기보다 벽체에 가까운 기둥이 연속적으로 있는 콜로네이드로 되어 있는데, 이 또한 고대 로마 건축에서 볼 수 있는 형태입니다. 파사드에는 고대 로마의 개선문 아치와 그리스 신전 파사드의 페디먼트가 모두 나타나는데, 페디먼트가 아치 안에 포함된 이런 형태는 로마 건축의 아치와 바실리카형 파사드가 주를 이루고 그리스 신전의 파사드는 장식화되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알베르티가 설계한 대표적인 파사드는 1470년에 완성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Novella)의 파사드입니다. 산 프란체스코 성당의 경우는 내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파사드를 비롯한 외부 전체의 설계를 맡았기 때문에 알베르티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내부가 오래전에 완공되었고 파사드 역시 거의 시공된 상태에서 파사드의 나머지 부분을 설계해야 했기에, 알베르티에게는 중세 고딕 양식과의 조화를 비롯하여 설계에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우선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포인티드 아치(첨두 아치)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해결 과제였습니다. 알베르티는 기존의 건축 양식으로부터 기하학적 요소들을 찾아서 로마의 고전주의가 갖는 기하학적 요소들과 접목시켰습니다. 곧 원, 반원, 사각형, 삼각형의 기하학적 요소들을 원형 창, 아치, 벽체, 페디먼트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토스카나 지역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나타나는 것으로, 알베르티는 대리석의 다양한 색을 이용해서 중세의 기하학적 요소들을 파사드에 넣은 것입니다. 또한 알베르티는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과제로 남겨진 네이브와 아일의 높이 차이에 의한 경사 부분의 문제를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그리스 신전의 소용돌이 문양과 함께 곡선으로 마무리함으로써 해결하였습니다. 알베르티는 토스카나 로마네스크를 대표하는 피렌체의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중세의 기하학적 요소를 고대 로마의 기하학적 요소로 단순화하였고, 특히 고대의 정사각형 정수 비례에 의한 구성 체계를 선호하였습니다. 이렇게 알베르티가 중세의 성당에 르네상스의 아름다운 옷을 입힐 수 있었던 것은 그 성당에 그 아름다움이 어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의 성당들은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는지요?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사에 착수하고 피렌체 고아원과 산 로렌초 성당의 설계와 시공을 맡은 지 십 년이 훌쩍 지난 1432년, 그가 여전히 인생에서 가장 바쁘면서도 절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제노바(Genova,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태생의 한 젊은이가 금의환향(錦衣還鄕)하듯이 피렌체 땅을 밟았습니다. 격식 차린 옷매무새에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한 그는, 부친이 피렌체에서 은행업을 하다가 정치적 문제에 연루되어 제노바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태어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입니다. 다행히도 1428년 가문에 대한 추방령이 철회되고 알베르티는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아버지의 고향 땅에 드디어 발을 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낯선 피렌체에 온 것은 단지 이곳이 아버지의 고향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피렌체에 도착한 그는, 오래 지체하지 않고, 대성당 공사 현장에서 흙먼지 뒤집어쓰고 일꾼들에게 기중기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는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찾아갔습니다.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와 한 세대 차이가 났지만, 인문학적 지성을 갖춘 중견 건축가와 건축에 관심이 많은 젊은 인문학자는 그것만으로도 친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알베르티는 인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대학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제노바에서 베네치아로 이주한 알베르티는 10대 중반에 파도바 대학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10대 후반에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알베르티는 혼외 자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삼촌들의 지원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천재 조카가 인문학은 물론이고 수학과 물리학, 예술과 문학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고 나 몰라라 하는 삼촌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문학 섭렵한 당대 최고 지성 브루넬레스키와 교류하며 영향 받아 원근법·비례 숙고한 「회화론」 펴내 고대 로마 유물 복원했던 경험 토대 10권의 건축 이론서 「건축물론」 집필 알베르티는 피렌체에 머물면서 1435년 그의 첫 번째 예술 관련 저술인 「회화론」(Della Pittura)을 썼습니다. 이 책은 회화의 기초 이론에 관한 것으로, 알베르티는 그 서문에서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기베르티, 마사초 등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회화에 있어서 입체적으로 다른 거리에 있는 여러 사물을 한 평면에 표현하는 것과 그 사물들을 같은 비율로 축소하는 것, 곧 원근법과 비례에 대해서 깊게 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원근법(투시도법)을 창시한 브루넬레스키에게 이 책을 헌정하였습니다. 알베르티는 이렇게 회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실제로 회화 작품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작품 활동보다는 회화와 관련된 학문적 연구에 더 몰두한 듯합니다. 하지만 회화와는 다르게 건축과 관련해서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의 조언과 지도를 받으면서 몇몇 공사를 수주하였고, 이후 루첼라이 가문과 인연을 맺으면서 건축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교회법을 공부한 알베르티는 피렌체에 가기 전인 1430년대 초에 로마 교황청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20년이 지난 1450년대 초에 그는 다시 로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알베르티는 피렌체에서 ‘팔라초 루첼라이’의 파사드 작업을 마칠 즈음이었는데, 최초의 인문주의자 교황으로 불리는 니콜라오 5세 교황이 1450년 희년을 보내면서 로마의 도로와 수로를 새롭게 정비할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니콜라오 5세 교황은 볼로냐와 피렌체에서 공부하고 1444년 피렌체 공의회에도 참석한 바 있는 인문주의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알베르티는 교황청 건축 자문직을 맡았고, 교황의 배려로 하위 성직자로 임명되어 고대 로마 유적의 복원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중요한 공사가 천년이 넘은 ‘아쿠아 비르고(Aqua Virgo) 수도교’의 보수인데, 멀리 수원지(水源池)에서 로마 시내까지 깨끗한 물을 끌어다 중앙 급수대까지 공급하는 수로 복원 공사입니다. 그 중앙 급수대에 세 개의 길, 곧 ‘트레 비에’(tre vie)에서 물이 흘러들어와 만난다고 하여 그 이름을 ‘트레비’(Trevi)라고 지었고, 훗날 그곳에 지금의 ‘트레비 분수’가 만들어졌습니다. 알베르티는 로마에 머물면서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고, 로마의 고전 건축에 대해 깊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피렌체에서 건축가로서 활동한 알베르티는 총 10권의 건축 이론서 「건축물론」(De re aedificatoria)을 집필하여, 1452년 로마에 갔을 때 니콜라오 5세 교황에게 증정했다고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건축서인 이 대작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수정을 거듭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알베르티의 「건축물론」에 영향을 준 책은 1세기 고대 로마의 가장 훌륭한 건축가이자 공학자인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De Architectura)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은 사라지고 내용만 전해져 왔는데, 그 필사본이 1415년경 인문학자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iolini, 1380-1459)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알베르티는 1400년 전 고대 로마의 건축학을 최초로 연구하여 「건축물론」을 쓴 것입니다. 세상은 알베르티에게 ‘만능인’(萬能人) 혹은 ‘전인상’(全人像)이라는 별칭을 붙입니다. 이런 표현은 반세기 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어울리지만, 알베르티 역시 이런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엄청난 지식욕을 가졌고, 그것 때문에 그들의 삶에는 사실상 만족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알베르티는 가정환경 덕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조르조 바사리는 알베르티의 생애를 쓰면서 독서를 많이 하는 예술가는 독서로부터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갖기 때문에 그림이나 건축에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자신의 영감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다면 그 예술가는 자신의 재능을 한껏 펼치게 됩니다. 알베르티는 그의 인문학적, 과학적, 예술적 역량을 모두 동원하여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말라테스타 사원), 피렌체의 루첼라이 팔라초와 산타 마리아 노벨라 파사드, 그리고 만토바의 성 세바스티아노와 성 안드레아 성당 등을 설계하고 지었습니다. 알베르티 덕분에 피렌체의 르네상스 성당들이 바깥세상을 향하게(ad extra) 되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교회와 메디치가

역사 이래 유례없는 대이교(大離敎) 사태에 직면한 교회는 파리 대학에서 제안한 세 가지 해결 방안, 곧 자발적으로 사임하거나, 재판을 통해서 해결하거나, 공의회를 통해서 교황을 선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와 아비뇽의 두 교황은 자발적 사임이나 중재 재판 등을 거부하였으며 계속해서 두 곳에서 후계자들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러자 공의회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결국 두 교황에 거슬러 13명의 추기경이 1409년 피사에서 공의회를 열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피사 공의회(공의회로 인정 안 됨)에는 교회가 당면한 이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400여 명의 주교, 주교 대리, 수도원장, 대학의 대표들이 참석하였고, 회의장 분위기는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공의회는 먼저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 교황과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 교황의 소송을 진행하여 폐위를 선언하였고, 이어서 알렉산데르 5세 교황을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습니다. 하지만 두 교황은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교회에는 세 명의 교황, 정확히는 한 명의 교황과 두 명의 대립 교황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 알렉산데르 5세 교황이 사망하고 요한 23세 교황이* 선출되면서, 피사의 교황도 후계자를 잇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은 발타사레 코사라는 나폴리 사람으로 비리가 있어서 평판이 안 좋은 추기경이었는데, 사람을 끄는 매력과 탁월한 수완으로 교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문제 해결 없이 점점 더 안 좋은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 요한 23세 교황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개회를 선언했지만 정통 교황이 되지 못하고 폐위되었습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성 요한 23세 교황(안젤로 주세페 론칼리)은 교회 역사의 이러한 아픔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요한 23세’를 자신의 교황명으로 선택함으로써 교회를 쇄신하고 현대화(aggiornamento)하고자 했습니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독일 왕 지기스문트(1410-1437 재위)는 요한 23세 교황을 압박하여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를 열었습니다. 공의회는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 교황을 자발적으로 용퇴하게 하였고, 피사의 요한 23세 교황은 폐위하여 감옥에 가두었으며, 끝까지 저항하는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 교황 역시 폐위하였습니다. 그리고 1417년 마르티노 5세 교황(1417-1431 재위)을 새 교황으로 선출하여 교회의 대이교는 40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로 대이교 막 내려 은행업으로 부와 권력 축적한 조반니 새 교황과 폐위된 교황 화해 이끌어 브루넬리스키의 천재성에 주목하며 고아원과 ‘산 로렌초 성당’ 건축 맡겨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태어난 1377년은 시에나의 성 가타리나가 아비뇽에 있는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에게 로마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썼던 해이고, 바로 다음 해인 1378년부터 1417년까지 교회 안에 이런 대이교가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인 1401년 브루넬레스키가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 공모에서 공동 당선되었을 때, 오만하게도 이를 거부하고 로마로 떠난 그를 지켜본 한 위원이 있었습니다. 우연히도 대이교가 끝난 1417년 마흔 살의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에서 돌아와 피렌체에 정착했을 때 그는 청동문 공모전 때보다 훨씬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피렌체의 건설 위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1419년 피렌체 당국이 유럽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의 건축을 계획했을 때, 그는 그 시설을 가장 잘 구현할 건축가로 브루넬레스키를 지목하고 그에게 피렌체 고아원(Ospedale degli Innocenti)의 설계를 맡겼습니다. 지저분한 옷차림에 성격은 까다롭고 강한 자존심에 오만하기까지 한 거부감투성이인 브루넬레스키의 천재성을 알아본 그 사람은, 1421년 시뇨리아의 의장으로 뽑히기도 한, 치밀하고 조심스러우며 속마음을 쉬이 드러내지 않으면서 바라는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내는 당대의 신흥 은행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입니다. 1340년 피렌체 대성당의 공사가 중단된 큰 원인 중의 하나가 피렌체의 바르디 가문과 페루치 가문 등 주요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이 모두 도산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피렌체에는 소규모의 가족 은행들만 남았습니다. 사촌이 운영하는 작은 은행의 직원인 조반니 데 메디치는 실력을 인정받아 로마 지점장이 되었고, 1397년 사촌이 은퇴하자 로마 지점을 인수하고, 이어서 피렌체에 은행을 열었습니다. 조반니는 성공 후에도 평범한 집에서 살았고, 매일 메디치 은행까지 상점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서 출근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사람들 사이로 길을 내며 출근하는 다른 가문들의 행색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조반니가 그렇게 은행가로 성공하고 명망을 얻기 시작할 즈음, 후에 피사의 요한 23세 교황이 될 나폴리 출신의 코사 추기경은 조반니를 설득하여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립 교황이 되자 이에 격분한 나폴리 왕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평화 조약을 빌미로 거금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조반니 데 메디치는 돌려받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에게 돈을 대부하였습니다. 이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폐위된 요한 23세 교황이 지기스문트 왕에게 구금되었을 때, 조반니는 교황의 석방금을 내주고 피렌체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으며, 죽은 후에 산 조반니 세례당에 묻어 주었습니다. 조반니의 이런 행보는 은행의 자금 사정을 심각하게 악화시켰지만, 메디치 은행은 고객의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지원해 주며, 그만큼 재정 상황도 안정적인 신용 있는 은행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후 새롭 뽑힌 마르티노 5세 교황이 로마로 가기 전에 피렌체에 머물렀을 때 조반니는 새 교황과 폐위된 교황이 화해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에 마르티노 5세 교황은 조반니에게 감사를 표하였고, 몇 년 후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의 모든 계좌를 관리하는 은행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로 돌아온 때이고, 조반니는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사 중인 브루넬레스키에게 피렌체 고아원뿐만 아니라 메디치가와 인연이 있는 산 로렌초 성당의 공사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1429년 조반니 데 메디치는 장남 코시모와 막내 로렌초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라. 가능한 시뇨리아에 가지 말고, 송사에 휘말리지 말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남 코시모는 메디치가의 신조와도 같은 아버지의 유언을 마음에 담고, 이제 자신 앞에 펼쳐질 시대를 당당히 맞이할 것입니다.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르네상스와 교회

조반니 치마부에(1240-1302)와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10)는 중세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을 13세기 후반 중세적이면서도 새로운 회화와 건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나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와 조토 디 본도네(1267-1337)는 14세기를 열면서 문학과 회화 분야에서 새로움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후 15세기에 들어서서 건축, 조각, 회화 분야에서 브루넬레스키(1377-1446), 도나텔로(1386-1466), 마사초(1401-1428) 삼인방은 르네상스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는 시기에 교회의 상황은 조금 복잡다단했습니다. 11세기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 이후 인노첸시오 3세 교황(Innocentius III, 1198-1216 재위)은 교황의 권한을 확립했습니다. 그는 정치와 종교 면에서 황제와의 긴장과 대립이 고조되었던 시기에,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내적인 일관성으로 통일된 질서 원리를 구축하였습니다. 그에게 그리스도교 백성은 초자연적이고 초국가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황은 교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서구 세계 전체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이렇듯 강한 교황권을 수립했지만, 교황은 세상의 부와 사치로부터 거리를 두었으며, 프란치스코회를 인준하고 제4차 라테란공의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인노첸시오 3세 교황 이후 교황권은 다시 약해졌는데, 한 세기가 지나 보니파시오 8세 교황(Bonifacius VIII, 1294-1303 재위)에 의해서 교황권을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왕권을 강화하려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Philippe IV, 1285-1314 재위)와 충돌하였습니다. 이때 교황은 세속 권력이 영적 권력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Unam Sanctam」(하나이고 거룩한 교회, 1302)을 반포하고 필리프 4세를 파문하였습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아냐니에 머무는 교황을 체포하도록 명령하였고, 저항할 힘이 없었던 교황은 여러 고초를 겪고 얼마 후에 사망하였습니다. 이후 추기경단은 프랑스인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프랑스인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 특히 클레멘스 5세 교황(Clemens V, 1305-1314 재위)은 리옹에서 필리프 4세가 참석한 가운데 착좌식을 거행하고 로마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채 1308년 프랑스 아비뇽에 교황의 거처를 정하였습니다. 교황이 로마에 머물지 않게 되자 로마 시민들은 이를 두고 ‘바빌론 유배’라고 비난했는데 여기서 ‘아비뇽 유배’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후 클레멘스 5세 교황은 성전 기사 수도회를 해체하고 죽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소송을 진행하는 등,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의 후임자 요한 22세 교황(Ioannes XXII, 1316-1334 재위)이 프랑스와 적대 관계에 있는 독일 황제 루드비히 4세(Ludwig IV, 1314-1347 재위)를 직무에서 정지시킨 것은, 교황권이 프랑스의 국익에 좌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외에도 아비뇽의 교황들은 교황청 유지를 위해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그것으로 인해 교황청에 대한 세상의 평판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런데 1324년 루드비히 4세는 교황 반대자들을 궁정에 모아 놓고 요한 22세 교황을 공의회에 항소하였습니다. 그들은 교계제도를 비판하고, 교황 수위권의 신적 기원을 부인하였으며, 교회의 최고 권한은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공의회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황을 공의회에 종속시키고 공의회의 결정에 교황이 복종해야 한다는 이 ‘공의회 우위설’은 교회사에서 지속적인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는 교황의 보편교회에 대한 권한을 실추시켜서 독일 교회가 교황권에 등을 돌리는 빌미가 되었고, 결국 일어나서는 안 되는 서방교회 ‘대이교’(大離敎)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신자들 대부분은 교황이 로마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특히 스웨덴의 비르지타 성인과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인의 간절한 호소는 아비뇽 교황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습니다. 다음은 가타리나 성인이 교황의 로마 복귀를 호소하는 내용의 서한 일부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진정한 후계자이신 그레고리오 11세 교황 성하께,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지금 겪고 있는 폭풍우 같은 시련과 교황 성하의 권위에 도전하는 몹쓸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교황 성하를 돕기 위해 가까이 계십니다. 지체하지 마시고 교황 성하께서 시작하신 일을 마무리하십시오. 로마로 오십시오. 더 이상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성하께서는 예수님의 대리자이시므로, 당신의 자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로마로 돌아오십시오. 아무런 무기도 없는 어린양처럼 오셔서 사랑이라는 무기로, 적들을 물리치십시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십시오. 군사들의 호위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순한 양처럼 십자가를 들고 오십시오.”(장 콤비, 「세계 교회사 여행 I」, 577-579 참조) 결국 1377년 그레고리오 11세 교황(Gregorius XI, 1370-1378 재위)은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의 개혁을 시작할 틈도 없이 선종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에서 70년 만에 콘클라베가 열리게 되었고, 로마인 추기경단은 이를 놓칠세라 선거인단에게 압력을 가하여 1378년 봄 이탈리아 출신의 우르바노 6세 교황을 선출하였습니다. 프랑스 추기경단은 일단 로마에서 물러난 후 그해 가을 이번 교황 선거가 강압에 의한 무효라고 주장하며 새 교황으로 클레멘스 7세 교황을 뽑고 1379년 아비뇽에서 착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두 교황(교황과 대립교황)을 갖게 되면서 40년 동안의 대이교가 시작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와 충돌한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1300년에 처음으로 성년을 선포한 교황이지만 단테와는 악연으로 신곡의 지옥편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가 죽고 1305년부터 1377년까지 70년 이상 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시기를 보내고 이후 40년 동안은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의 교황을 두는 극단의 분열 시기를 보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에 엄청난 시련이 닥쳤습니다. 이 혼란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교회의 삶과 사명에 미친 영향을 몇 마디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동시대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그 혼돈 안에서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열심히 쓰고, 그리고, 지으면서 교회가 초대 교회의 삶을 본받아 새로이 태어나기(Rinascita)를 바랐을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산토 스피리토 성당

브루넬레스키의 마지막 작품인 산토 스피리토 성당(Basilica di Santo Spirito, 성령 성당)은 그의 건축적 이상을 가장 잘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최초의 성당은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가 피렌체에 정착하면서 1269년에 성령께 봉헌되었습니다. 피렌체에 있는 탁발 수도회의 성당들인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의 산타 크로체 성당, 도미니코 수도회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과 함께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의 산토 스피리토 성당은 당대의 예술과 신학과 문학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수도원 안에는 대규모의 도서관이 있고,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등 문인들의 방문이 잦았습니다. 이후 14세기 말에 새로운 성당 건립이 추진되면서 1434년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인 1444년에 성당 건축의 첫 삽을 뜨게 되었는데, 브루넬레스키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2년 후인 144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공사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스승의 설계대로 진행되어 1482년에 새 성당이 완공되었습니다. 산토 스피리토 성당의 설계는 산 로렌초 성당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평가일 것입니다. 산 로렌초 성당은 정사각형 모듈을 기본으로 하여 평면과 입면이 모두 정형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아일이 하나의 정사각형 베이로 구성되었다면 네이브는 정사각형 두 개를 나란히 놓은 크기의 베이로 구성되어, 성당 전체에 통일성을 준 것입니다. 하지만 아케이드와 클리어스토리(천측창이 있는 2층)의 높이가 3대2로 완전한 정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중을 고려하지 않고 기둥의 크기를 일률적으로 통일하여서, 하중을 많이 받는 기둥에 구조적으로 부담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네이브를 따라 형성된 아일과 경당도 트란셉트를 만나면서 끊기게 되어 평면이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산토 스피리토 성당은 산 로렌초 성당에 나타난 이러한 통일성의 문제점들을 대부분 해결하였습니다. 특히 아일과 경당이 네이브만이 아니라 트란셉트와 제대 뒤편의 앱스에 이르기까지 통일성을 유지하며 이어졌습니다. 네이브와 트란셉트가 만나는 코너 부분의 아일은 양쪽으로 모두 개방되어 있고, 네이브 쪽의 마지막 경당은 네이브 방향으로, 트란셉트가 시작되는 곳의 경당은 트란셉트 방향으로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두 경당이 만나는 곳의 벽은 45도로 설치되어 공유하고 있으며 벽기둥도 두 경당에 모두 작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평면 구성은 네이브와 트란셉트가 균일한 형태를 취하면서 통일성을 강화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케이드와 클리어스토리의 비율도 산 로렌초 성당에서는 3대2였는데 산토 스피리토 성당에 와서는 1대1로 해결되었습니다. 네이브의 경당 수는 두 성당이 같지만, 산토 스피리토 성당은 트란셉트와 앱스를 네이브와 같은 형태로 구성함으로써 경당 수가 많아졌고, 경당을 원하는 후원자들의 요구를 만족시켰습니다. 조도의 통일성은 산 로렌초 성당에서도 시도되었지만, 산토 스피리토 성당은 크로싱을 받치는 벽기둥을 두껍게 하고 돔에 창을 내어 빛을 더 들어오게 함으로써, 천장(하늘)과 바닥(땅) 사이의 조도 차이를 줄였습니다. 이는 성(聖, 하늘)과 속(俗, 땅)의 공간이 균형을 이루며 통일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간의 통일성은 선형 공간 안에 중앙집중형 공간을 배치함으로써 더 잘 드러납니다. 네이브의 8베이 중에서 6베이를 제외하고 2베이만 잘라서 보면 산토 스피리토 성당은 완전한 대칭의 중앙집중형 평면을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완전한 대칭의 라틴 크로스(장방형 십자가) 구성과 완전한 대칭의 중앙집중형 혹은 그릭 크로스(정방형 십자가) 구성이 한 평면에 결합한 형태입니다. 이렇게 선형 공간에 중앙집중형 공간이 더해지는 배치는 브루넬레스키의 초기 작품에서 보이기 시작하여 후기에 와서 완전한 대칭으로 정리되었고, 이로써 중앙집중형 공간이 선형 공간을 능가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변화는 르네상스 건축이 선형에서 중앙집중형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의 이러한 설계 방향이 알베르티에게 이어지고 전성기 르네상스로 접어들면서 중앙집중형 평면이 대세를 이루게 됩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전의 건축가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건축가였습니다. 그는 먼저 수학과 기하학에 기초한 공학 기술자이면서, 설계 및 시공을 직접 지휘하는 현장형 건축가였습니다. 그리고 고전 정신과 시민 정신을 교육받은 인문주의자이면서, 효율적인 시공을 위해서 다양한 기계들을 발명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이렇게 현장을 중시했던 실용주의 건축가인 브루넬레스키는 정밀한 시공을 추구하며 불필요한 자원의 낭비를 줄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시공 기술을 끊임없이 연구하여 현장의 장인들에게 가르쳤고 그것을 통해서 작업 능률을 올렸습니다. 또한 그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도면이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전수된 경험에 의지하여 건축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면을 그리고 정확한 수치를 써넣음으로써 건축의 전 과정에서 작업의 표준화와 시공의 정밀화를 이루었습니다. 현대 건축에서는 당연한 방식이지만, 당시에는 모두에게 생소하였던 파격적이고 선도적인 시공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브루넬레스키는 그가 죽고 6년이 지나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와 자주 비교되곤 합니다.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서 암호와 기호로 비밀 수첩을 만들어 보관했던 점도 두 거장의 비슷한 점입니다. 모두 본인 작품에 대한 독창성을 중요시한 것인데, 그만큼 그들이 발명한 작품들에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것이 담겨 있습니다. 저작권이 법적으로 보호되지 못했던 시대에 발명가들이 겪는 고초일 것입니다. 다빈치의 발명품이나 스케치 중에는 브루넬레스키의 톱니바퀴와 도르래, 크랭크축 등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브루넬레스키가 그의 비밀 수첩을 없애지 않고 후대에 남겼더라면 그의 첨단 기술은 다빈치를 거쳐 최첨단 기술로 발전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브루넬레스키는 설계 및 건축 분야에서 비밀 수첩의 내용들을 이미 남김없이 쏟아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최고의 건축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 고맙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피렌체 대성당 돔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산 조반니 세례당 청동문 공모에서 결국 낙선하여 로마로 향한 것이 1403년경의 일입니다. 그때 피렌체 대성당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습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대성당을 설계하고 공사를 시작한 1296년 당시는 피렌체가 은행업과 양모 산업의 발달로 어느 나라에 못지않게 경제적 성장을 이루고 있을 때였습니다. 따라서 피렌체는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웃 도시 국가들보다 더 높고 더 아름다운 성당을 갖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피렌체는 유능한 건축가의 기술력과 그것을 현실화시킬 자금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사가 오래 진행되는 가운데, 피렌체의 은행들이 도산하고 흑사병의 창궐로 1340년경 피렌체 대성당의 공사는 멈춰 섰습니다. 완성된 건물은 아름답지만, 공사가 중단되어 방치된 건물만큼 흉물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쌓다가 만 벽돌 사이에 잡초가 자라고, 지붕이 없어 눈비가 들이치니 사방에 이끼가 끼고, 쓰레기와 음식 찌꺼기에 들쥐가 우글거리는 대성당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향했을 때의 대성당이 이랬습니다. 피렌체와 로마를 오가며 고대 로마의 건축을 배우고 익힌 브루넬레스키는 1417년 불혹의 나이에 피렌체로 완전히 귀향했습니다. 로마에서의 고전 연구는 그의 예술적 능력을 향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관심이 조각을 넘어서 건축 분야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수학과 기하학에 뛰어났던 브루넬레스키는 고향의 삶에 적응하면서, 기중기 등의 건설 기계들을 발명하고 단일 소실점을 갖는 원근법을 창안하였습니다. 그렇게 로마 수학의 결과물들을 조금씩 내고 있을 즈음인 1418년 어느 날 시뇨리아 광장에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세울 건축가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었습니다. 평소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다소 냉소적인 브루넬레스키였지만, 그 공고는 그의 가슴을 두드리며 요동치게 하였습니다. 사실 대성당의 공사가 시작된 지 120년이 넘었고 공사가 중단된 지도 80년이 흘렀습니다. 다행히 돔의 건축 공고가 났을 때는 돔을 제외한 다른 부분의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었는데, 그래도 지름이 42미터나 되는 돔을 세운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엄두도 못 낼 난제 중의 난제였습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는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피렌체 설계 위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고는 대뜸 주머니에서 달걀을 하나 꺼내어 그들에게 세워보라고 말하였습니다. 콜럼버스보다 80년 먼저. 도저히 속셈을 알 수 없는 사람이기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위원들에게, 브루넬레스키는 달걀의 밑을 조심스레 깬 후 탁자 위에 세웠습니다. 달걀 세우기를 통해서 브루넬레스키는 자신의 설계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설계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그의 돔 건축 설계는 독창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도용됨 없이 온전히 본인의 것으로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브루넬레스키는 설계 위원들에게 설계 방안의 골자를 설명하였습니다. 먼저 대성당의 돔이 반구형이 아니라 방금 보여준 달걀처럼 위가 뾰족한 형태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딕 구조에서 반원형 아치보다 뾰족한 아치가 더 넓은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반구형 돔보다 뾰족한 돔이 더 큰 지름의 돔을 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브루넬레스키는 달걀형의 돔에 여덟 개의 석재 리브가 마치 우산살처럼 펼쳐 들어가서 돔을 받칠 구상도 밝혔습니다. 설명을 들은 설계 위원회는 약간의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 채 브루넬레스키에게 돔 공사를 맡겼습니다. 돔 공사의 일반적인 방법은, 고딕 성당에서 리브 그로인 볼트(rib groin vault, 석조로 된 둥근 천장)를 시공할 때처럼, 먼저 반구의 형틀을 아래부터 설치하고 그 위에 벽돌을 얹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렌체 대성당의 돔은 지름이 42미터이고 거기에 들어가는 벽돌은 약 2만 5천 톤에 달합니다. 따라서 브루넬레스키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첫째는 지름이 42미터인 돔의 벽돌을 쌓을 목재 형틀을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거대한 돔의 하중을 최대한 분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가 내놓은 방법은 ‘이중 돔 구조’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판테온과 피렌체 대성당 산 조반니 세례당의 지붕 구조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돔을 두 겹으로 만들고 내부와 외부의 돔 사이의 공간에 두 돔을 연결하는 수평 부재를 여러 층으로 쌓아서 이중 돔 전체를 일체화하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벽돌을 쌓는 방법인데, 판테온의 예처럼 브루넬레스키는 돔을 받치는 벽체 두께가 4.3미터인 점을 이용해서, 내부 돔은 2.3미터 외부 돔은 1미터의 두께로 벽돌을 쌓기 시작하여 위로 갈수록 두께가 줄어들게 하였습니다. 또한 고대 로마의 축조 기술을 응용하여 벽돌을 수평 쌓기와 수직 쌓기로 혼합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쌓은 벽돌의 모양이 마치 물고기의 뼈와 비슷하다고 하여 헤링본(Herringbone) 스타일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방식은 하중이 수평과 수직으로 분산되어 벽체를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또한 돔에 여러 개의 리브(rib, 하중을 받아 내는 갈비뼈 모양의 구조적 요소)를 구성했는데, 먼저 팔각형 모서리에 8개의 대형 리브를 만들고, 그 사이에 두 개씩 16개의 소형 리브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 리브에 전달된 힘을 수평으로 분산시키는 수평 부재를 설치하여 돔의 골격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구조는 대형 8개와 소형 16개의 리브가 팔각지붕을 지지하는 산 조반니 세례당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이 밖에도 주로 내력벽의 역할을 하는 내부 돔에 강철과 사암으로 고리를 만들어 일정한 간격으로 벽돌을 고정함으로써 벽돌벽이 바깥으로 밀리지 않게 하였고, 내부 돔에 긴결되어 있는 외부 돔은 붉은 벽돌로 치장되어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16년간 현장에서 공사를 직접 감독하였고, 드디어 1436년 피렌체 대성당의 봉헌식에도 참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돔 꼭대기의 6미터 원형 공간에 랜턴이 올려지는 화룡점정의 순간은 함께하지 못하고, 1446년 그가 온 힘을 기울여 올린 ‘브루넬레스키의 돔’을 지붕 삼아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잠들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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