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 파사드를 설계할 때 네이브와 아일의 높이 차이로 인해 발생한 문제에 적합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고딕 양식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파사드를 르네상스 양식으로 전면 재시공하면서 같은 문제에 부딪혔는데, 높이 차이로 생겨난 경사 부분을 그리스 신전의 소용돌이 문양이 있는 곡선으로 처리함으로써 난제를 해결하였습니다. 하지만 알베르티 이후 르네상스 건축가들에게는 여전히 바실리카 형태의 선형 공간에 로마 고전주의의 파사드를 접목하는 것이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숙제였습니다. 16세기의 르네상스 건축가들에게 있어 전형적인 성당의 형태는, 그릭 크로스의 중앙집중형 평면에, 고대 로마 신전의 페디먼트와 그것을 받치는 독립 원기둥으로 구성된 파사드였습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의 형태는 고대 로마의 신전이 아니라 공공건물인 바실리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런데 선형 공간인 바실리카식 성당은 내부 공간의 높이가 부분마다 달랐기 때문에, 그 공간에 고대 로마 신전의 위엄 있는 파사드가 결합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한 세기 전 알베르티가 제시한 해결 방법 대신에 고대 로마의 신전 파사드 두 개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산 프란체스코 델라 비냐 성당(Chiesa di San Francesco della Vigna)’과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Basilica di San Giorgio Maggiore)’의 파사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파사드를 보면 중앙 상부의 삼각형 페디먼트를 기단 위의 대형 원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자체로 신전의 위엄 있는 파사드를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원기둥들 뒤로 기다란 띠가 지나가는 것이 보이는데, 그 띠는 상당히 큰 페디먼트의 밑변에 해당합니다. 원기둥이 받치는 상부의 페디먼트가 성당 네이브의 폭에 해당한다면, 벽기둥이 받치는 하부의 큰 페디먼트는 건물의 폭, 곧 3랑식 평면 전체의 폭과 같습니다. 팔라디오는 이렇게 신전의 파사드를 응용하여, 두 개의 삼각형 페디먼트를 위아래에 배치함으로써 파사드의 높이 차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평면은 지금까지 봐 왔던 바실리카식 선형 평면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릭 크로스의 중앙집중형 평면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성당에서 평면의 선형성은 네이브와 제단 부분이 이어지면서 발생합니다. 네이브는 3랑식 3베이에 불과하여 선형성이 매우 약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제단 부분에서 제단과 사제석과 성가대석이 길게 늘어남에 따라 평면 전체의 선형성이 드러납니다. 동시에 성당은 중앙집중형의 평면 구성도 보여주는데, 크로싱을 중심으로 종방향의 트란셉트가 1베이 있고 그 끝에 반원 아치의 앱스가 있어서 그릭 크로스의 중앙집중성이 나타납니다. 또한 크로싱 상부에는 돔이 있는데 비잔틴 건축의 펜던티브가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은 바실리카식 선형 평면과 르네상스의 중앙집중형 평면이 혼합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당 내부는 장식이 절제되고 바탕에 흰색 면이 많아 추상적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다만 성당에는 고딕 요소가 적지 않게 담겨 있습니다. 먼저 선형 평면 자체가 르네상스 양식이 아닌 고딕 양식에서 주로 사용하는 형태이며, 르네상스 건축가들이 조각의 요소로 보는 몰딩이 구조 부재와 일체를 이룬 것도 고딕 양식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팔라디오가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에서 보여준 바실리카 형태의 공간과 고대 로마의 신전 파사드를 결합하는 해결책은 십 년 후에 지은 ‘레덴토레 성당(Basilica del Redentore)’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합니다. 팔라디오는 이 성당의 파사드에 로마 신전의 페디먼트를 삼중으로 배치합니다. 먼저 중앙 상부에 페디먼트가 네 개의 기둥으로 받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것은 네 기둥이 모두 기단으로 받쳐진 원기둥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기단 없이 두 개는 원기둥이고 두 개는 사각기둥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큰 페디먼트 아래의 두 원기둥 사이에 작은 페디먼트가 두 개의 가느다란 원기둥으로 받쳐져 있습니다. 이 작고 독립적인 신전 파사드는 이전에는 출입문 상부에 반원형 아치로 처리했던 부분입니다. 삼중 페디먼트의 마지막은 건물 전체의 폭에 해당하는 것인데 성당의 중앙 부분에는 나타나지 않고 바깥 부분에만 형성되어 있습니다. 레덴토레 성당의 평면은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처럼 3랑식 3베이의 형태를 보이지만, 사실상 아일 부분은 복도 기능을 갖지 않고 작은 경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평면의 이런 구성이 입면의 파사드에 반영되어 파사드의 양쪽 부분이 벽감 없이 매우 좁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레덴토레 성당의 파사드는 3랑식이 아닌 1랑식 평면의 성당이 보여주는 중앙 부분이 강조된 파사드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평면의 선형성은 네이브와 제단의 두 부분으로 나뉘지 않고 제단 부분이 간소화되어 한 공간으로 통일성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선형성이 약한 두 공간의 연속으로 선형성을 보였던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에 비해서, 한 공간으로서의 선형성이 구축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 성당의 성가대석이 있는 제단 부분이 확장되고 선형성을 띠게 된 것은 산 마르코 대성당에서 시작되는 전례 행렬과 관련이 있습니다. 매년 베네치아의 총독은 산 마르코 대성당에서 성가대와 함께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으로 대운하를 건너서 장엄 행렬을 하였고, 베네딕도회 수사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이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레덴토레 성당에서도 총독은 매년 대운하를 건너 행렬하였고, 프란치스코회 성가대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팔라디오가 중앙집중형이 아닌 선형의 성당을 설계하고 특별히 성가대석의 규모를 크게 만든 것은 베네치아의 전통적인 전례 거행과 연관된 것입니다. 팔라디오는 그의 저서 「건축 4서」에서처럼, 건축물들의 기본 원리를 찾아 체계를 세우고 그것을 실제 상황에 적용하는, 이론과 실천의 저울 바늘이 눈금의 중앙을 가리키는 균형감 있는 건축가입니다. 팔라디오 스타일이 존재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안드레아 팔라디오

볼로냐 출신의 화가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Sebastiano Serlio, 1475~1554)는 로마의 건축 공방에서 발다사레 페루치의 제자로 활동했고, 페루치로부터 공방에서 보관하고 있던 다량의 밑그림을 물려받았습니다. 이 중에는 브라만테의 것도 포함되어 있을 터인데, 세를리오는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건축의 일반 규칙과 다섯 양식, 비트루비우스의 법칙을 따른 고전 건축의 예들 그리고 실질적인 건축술을 다룬 일곱 권의 ‘건축서’를 출간하였습니다. 세를리오의 건축서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세를리오와 동향인 볼로냐 태생으로, 또 다른 건축서를 펴낸 건축가는 예수회 본원의 ‘예수 성당(Chiesa del Gesù)’을 설계한 자코모 바로치 다 비뇰라(Giacomo Barozzi da Vignola, 1507~1573)입니다. 그는 로마에서 말년의 페루치를 만났고, 프랑스에서 세를리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를리오에 이어서 다섯 가지 오더의 규칙에 대한 건축서를 출간하였는데, 세를리오의 저서보다 학술 면에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후 3세기 동안 건축학의 교과서로 쓰였습니다. 이후 세를리오의 건축서보다 학문적 깊이가 있고 비뇰라의 저서보다 광범위하게 연구된 「건축 4서(I quattro libri dell'architettura)」가 1570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파도바 출신인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1580)로, 그는 고전의 오더와 고대 로마의 건축물 그리고 팔라디오 본인 작품들의 도해를 이 책에 실었습니다. 팔라디오는 대부인 조각가 빈첸초 데 그란디의 영향으로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고, 열세 살부터는 석공으로 일을 하면서 건축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2년 후 집안이 비첸차로 이주하였고, 팔라디오는 그곳에서 석공 길드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팔라디오의 이러한 경력은 미켈란젤로나 산미켈리처럼 훗날 건축가로 활동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비첸차에 머물면서 석공으로서 성공 가도를 달렸으며, 돌을 다루는 일이 건축의 한 분야이기에 점차로 건축 전반을 배우고 이해하는 건축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수년이 흘러 비첸차는 그를 건축가로 만들어준 제2의 고향이 되었고, 그곳에서 팔라디오는 그를 최고의 건축가 대열에 들게 할 행운의 기회를 얻습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그의 첫 작품인 ‘빌라 고디(Villa Godi)’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비첸차 출신의 귀족이면서 인문주의자이고 아마추어 건축가이기도 한 잔 조르조 트리시노(Gian Giorgio Trissino, 1478~1550)를 만난 것입니다. 트리시노는 건축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팔라디오에게 라틴어와 인문학 교육의 기회를 주었고, 로마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를 함께 여행하면서 고대 로마의 고전 건축과 당대의 르네상스 건축을 보고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팔라디오는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훗날 그의 작품에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와 후기의 매너리즘 요소가 담기게 되었습니다. 비트루비우스의 고대 로마 건축론을 관심 있게 연구한 트리시노는 이탈리아가 로마제국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에 정통한 건축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트리시노와 팔라디오는 베네치아 르네상스가 지역주의에 머물지 않고 보편주의로 나가려면 로마의 고전주의를 바탕으로 베네치아 건축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를 인문학적 소양으로만이 아니라 실제의 건축 기술로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트리시노는 산미켈리와 세를리오에게 팔라디오를 맡기고 도면 작성과 건축 기술 등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팔라디오가 40대 초반이었던 1550년 그의 든든한 후원자인 트리시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다니엘레 바르바로(Daniele Barbaro, 1514~1570) 대주교가 그의 새로운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바르바로는 팔라디오와 1547년부터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De Architectura)」을 연구하였고, 9년 만에 「건축론」의 번역본이 바르바로의 이름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트리시노가 그랬던 것처럼, 바르바로는 팔라디오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주요한 건축물을 수주하여 공화국의 정치적 위상을 높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팔라디오는 먼저 비첸차에서 건축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비첸차는 오래 지속되던 전쟁이 끝나자 도시 재건 사업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는데, 그런 상황에 어울리는 건축 양식은 매너리즘보다는 전성기 르네상스였습니다. 실로 비첸차는 그들의 조적(組積) 전통과 어울리는 고전주의 양식을 원했고, 팔라디오는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팔라디오는 먼저 산미켈리와 산소비노의 작품에 나타난 베네치아의 지역주의를 이해하고 완성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양식이 베네치아를 넘어 보편주의 양식이 될 수 있도록 발전시켰습니다. 이 시기에 팔라디오는 그의 빌라와 팔라초가 대형 건축물로 규모가 확장되면서 비첸차를 넘어 베네치아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다수의 성당 건축도 이때 이루어졌습니다. 팔라디오 건축의 특징은 먼저 이전의 건축물들을 종합하고, 여기서 기본 원리를 찾아 규칙화한 다음, 이 규칙을 기본으로 건축의 상황에 맞게 설계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팔라디오가 지은 건축물은 90개 이상이 되는데, 이러한 활발한 건축 활동 덕에 그는 1570년에 산소비노의 뒤를 이어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되었습니다. 팔라디오의 작품은 빌라, 팔라초, 공공건물, 성당 등 건축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성당은 산타 마리아 델라 카리타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a Carità),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Basilica di San Giorgio Maggiore), 산소비노가 설계한 산 프란체스코 델라 비냐 성당(Chiesa di San Francesco della Vigna)의 파사드, 레덴토레 성당(Basilica del Redentore), 템피에토 바르바로(Tempietto Barbaro) 등이 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자코포 산소비노

자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1486~1570)는 피렌체 출신의 조각가이자 16세기 베네치아의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건축가입니다. 그는 베네치아의 명성 있는 화가인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90~1576)와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의 동료였고, 베네치아 매너리즘 건축을 대표하는 산미켈리(Michele Sanmicheli, 1484~1559)와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활동했습니다. 산소비노는 청소년기까지 피렌체에서 지내면서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제자로 조각과 건축의 기초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스무 살인 1506년 줄리아노를 따라 로마에 가서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안드레아 산소비노로부터 수학했습니다. 산소비노의 원래 이름은 자코포 타티(Jacopo Tatti)였으나 안드레아 산소비노에게 배우면서 ‘산소비노’라는 이름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브라만테의 로마 공방에서 산미켈리를 만나 함께 일했고, 5년 후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 설계 공모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경쟁에서 우승한 미켈란젤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1518년경부터 로마에서 건축가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때 ‘팔라초 조반니 가디’를 설계하였으며, 이어서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의 ‘산 조반니 데이 피오렌티니 성당’과 ‘산 마르첼로 알 코르소 성당’의 설계에 참여했습니다. 산소비노의 로마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로마 고전주의를 익힐 수 있는 귀중한 체험이 되었습니다. 이즈음인 1527년 로마 대약탈이 일어났고, 대부분의 예술가처럼 산소비노 역시 베네치아로 피신하였습니다. 피렌체 출신인 그가 베네치아를 활동 무대로 정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베네치아는 건축 수요가 많았고 그것을 수행할 건축가가 필요했습니다. 또한 베네치아는 매너리즘보다는 웅장한 로마 고전주의를 표현하는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선호했습니다. 그런 베네치아의 시대적 요구에 산소비노가 적임자인 것만큼은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베로나 건축가인 산미켈리도 같은 시기에 베네치아에 있었는데, 그는 건축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현장 중심의 건축가였기에 건축주들로부터 대형 공사를 많이 수주하였지만, 그의 건축은 로마 고전주의의 건축물보다는 성채 공사와 팔라초 공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반면에 산소비노는 로마 고전주의를 표현할 줄 아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가 약탈당한 후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건축 유산을 이을 도시가 되었습니다. 많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건축가들이 이탈리아 북부, 특히 베네치아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베네치아 지역주의의 성격이 강했던 산미켈리보다는 산소비노가 르네상스의 베네치아 보편주의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산소비노가 베네치아에서 이룬 건축적 성과는 대단했습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 ‘산 마르코 도서관(Biblioteca nazionale Marciana)’, ‘조폐국(Zecca)’, 산 마르코 종탑 기단의 ‘로지아’가 있습니다. 마르코 소광장(Piazzetta San Marco)에 접한 도서관 건물은 팔라초 두칼레(Palazzo Ducale)와 평행으로 마주하고 있는데, 도서관의 지붕을 팔라초 두칼레의 지붕보다 낮게 처리하여 팔라초 두칼레를 훼손하지 않았고, 동시에 도서관에 장식 조각상을 많이 설치하여 산 마르코 대성당과 팔라초 두칼레와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베네치아에서는 이 도서관을 ‘산소비노의 도서관’이라고 불렀고, 팔라디오도 고대 이후로 가장 풍부한 장식이 들어선 건물이라고 극찬하였습니다. 또한 산소비노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소유한 엄청난 보화를 보관할 조폐국을 도서관과 직각을 이루며 바다를 바라보도록 설계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토스카나식 오더를 베네치아에 처음 도입하였습니다. 산소비노가 베네치아에 세운 대표적인 성당은 ‘산 마르티노 성당(Chiesa di San Martino)’과 ‘산 제미니아노 성당(Chiesa di San Geminiano)’입니다. 산 마르티노 성당은 투르의 주교 성 마르티노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지금도 성인의 축일(11월 11일)이면 산 마르티노 과자를 준비해서 도시를 돌아다니며 축제를 지냅니다. 이 성당은 6세기 말이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산소비노가 전체 구조를 90도 회전시켜서 그릭 크로스의 중앙집중형으로 설계한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입니다. 성당 내부에서 파사드로 나가는 출입구 상부에 파이프 오르간이 있고, 그 아래에 제롤라모 다 산타크로체(Gerolamo da Santacroce)의 <최후의 만찬>(1549년) 성화가 있습니다.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산 제미니아노 성당은 동로마제국이 라벤나를 포위 공격할 때 베네치아인들이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554~564년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12세기에 산 마르코 광장의 확장으로 산 제미니아노 성당은 산 마르코 대성당의 맞은편 끝으로 이전하여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후 1505년 새로운 성당이 계획되어 공사가 시작되었고, 1557년에 산소비노가 완공하였습니다. 성당 외부의 파사드는 매우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었는데, 중앙에는 페디먼트가 있고, 양쪽에 첨탑이 세워졌습니다. 1층과 2층 모두 코린트식 쌍기둥 네 쌍이 정면을 세 부분으로 분할하여, 가운데 정문이 있고 정문 양쪽에 랜싯창이 정문 상부에는 원형창이 있습니다. 성당 내부는 정사각형의 중앙집중형 평면이며 높은 제단과 경당이 출입구 반대 방향에 있고,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작가 레오니코 골디니(Leonico Goldini)는 산 제미니아노 성당을 보고 베네치아의 다른 성당들과 비교하면서 진주들 사이의 루비와 같다고 극찬하였습니다. 산소비노는 1570년 세상을 떠나 이 성당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1807년 나폴레옹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을 병영으로 만들었는데, 그때 베네치아 예술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산 제미니아노 성당도 철거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성당의 성유물들과 예술품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유실되었고, 산소비노의 무덤도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전쟁은 성당도 평화도 모두 무너뜨립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미켈레 산미켈리

베네치아 공화국의 베로나 출신인 미켈레 산미켈리(Michele Sanmicheli, 1484~1559)는 석공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가족 작업장에서 돌을 다루는 법을 자연스레 체득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또한 산미켈리는 베로나의 로마 유적들로부터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 건축물을 자주 접하였는데, 그 영향인지 10대 중반에 로마의 브라만테 건축 공방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비슷한 또래의 발다사레 페루치와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는 건축의 선배이자 인생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산미켈리가 건축가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곳은 오르비에토입니다. 그는 1509년부터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로 있으면서 성당의 파사드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처음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파사드는 네 개의 수직 버트레스 다발로 세 부분으로 구획되어 있고, 버트레스 위에는 첨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부의 페디먼트 삼각형은 상부의 페디먼트로 반복이 되고 여섯 개의 삼각형이 중앙의 원형창과 이중 사각형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산미켈리는 중앙 원형창 상부의 페디먼트 양쪽에 첨탑을 세우는 등 르네상스 양식으로 공사를 진행하였지만, 그도 대성당을 완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대성당은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와 이폴리토 스칼차에 의해서 매너리즘 양식이 추가되면서 16세기 말에 완공되었습니다. 산미켈리가 오르비에토 대성당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활동한 시기는 1527년 로마 대약탈이 발생했을 때부터입니다. 이탈리아 전쟁이 가열되자 바오로 3세 교황은 교황령을 지킬 수 있는 튼튼한 요새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도시들은 모두 성채 공사에 뛰어들었습니다. 산미켈리도 그때 고향 베로나와 베네치아에서 성채 설계와 공사 감독을 수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성채의 새로운 형태와 공법을 개발하여 성채 공사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베네치아령의 크레타, 달마티아, 코르푸에서도 그에게 성채 공사를 요청할 정도였으며, 이후로 그는 평생을 ‘군사 건축’ 분야에 헌신하였습니다. 산미켈리는 성채와 같은 대형 토목공사만이 아니라 팔라초와 성당 같은 고급 건축공사도 많이 수행하였습니다. 먼저 고향 베로나에 팔라초를 여러 채 지었는데, ‘팔라초 폼페이’, ‘팔라초 카노사’, ‘팔라초 베빌라쿠아’가 대표적입니다. ‘팔라초 폼페이’는 브라만테의 팔라초 카프리니(라파엘로의 집)를 베로나식으로 해석해서 지은 것입니다. ‘팔라초 카노사’는 역시 로마의 팔라초 양식에서 가져왔는데 발다사레 페루치의 빌라 파르네시나 혹은 줄리오 로마노의 팔라초 테를 연상하게 됩니다. 이 두 팔라초는 결국 ‘팔라초 베빌라쿠아’에서 종합되었는데, 줄리오 로마노와 매너리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산미켈리의 작품 중에서 중요한 성당으로는 ‘펠레그리니 경당’(Cappella Pellegrini)과 ‘마돈나 디 캄파냐 성당’(Chiesa della Madonna di Campagna)을 들 수 있습니다. 베로나의 산 베르나르디노 성당 안에 있는 ‘펠레그리니 경당’은 펠레그리니 가문의 묘지로 마르게리타 펠레그리니 백작 부인이 산미켈리에게 의뢰하여 1528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산미켈리는 로마에서 고향 베로나로 돌아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성채 공사를 시작하기 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묘지로 계획하였으나 경당을 짓는 것이 가문과 후손들에게 더 뜻깊을 것이라는 생각에 설계 방향을 경당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산미켈리는 경당의 설계 모티브를 로마의 ‘판테온’과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키지 경당’에서 얻었습니다. 우피치 미술관에 산미켈리의 도면이 남아 있는데, 그는 실제로 지어진 성당보다 규모가 큰 그릭 크로스 평면으로 설계하였습니다. 외부에서 볼 때 높은 기둥과 받침대가 있는 코린트식 오더, 그리고 높은 돔으로 구성하여 입체적이고 장식적인 형태로 표현하였습니다. 평면은 지름이 12미터인 원형으로 높이는 20.5미터에 이릅니다. 난간이 있는 발코니로 두 개 층으로 나뉘고, 격자 돔 상부에 랜턴이 있습니다. 1층은 코린트식 오더가 받치는 에디큘라(기둥이나 벽감 안의 작은 신전)가 네 개 있는데, 세 개는 제단으로 쓰이고 한 개는 출입구로 쓰입니다. 1층 위에는 난간이 있는 발코니가 있고 그곳에서 원의 지름이 더 큰 2층이 시작됩니다. 2층 역시 코린트식 오더로 드럼이 구성되어 있고 그 상부에 돔이 있습니다. 2층에도 네 개의 에디큘라와 네 개의 대형 창문이 있고 창문은 두 개의 기둥에 의해서 세 부분으로 구획됩니다. 2층의 창문은 1층의 제단 부분과 일치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마돈나 디 캄파냐 성당’은 산미켈리의 마지막 작품으로, 공사는 산미켈리가 사망한 해에 시작되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베로나 성벽을 철거하면서 그곳에 있는 성모자 프레스코화를 보존하기 위한 성당을 짓기로 하고 산미켈리에게 의뢰하였습니다. 그의 설계는 브라만테가 템피에토를 설계할 때처럼 티볼리의 시빌 신전과 로마의 헤라클레스 빅터 신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외부는 페리스타일에 해당하는 원형의 콜로네이드가 있고, 셀라 부분은 브라만테의 템피에토에 비해서 상당히 높이 설계되었습니다. 이렇게 외관은 원형이지만 내부는 팔각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펠레그리니 경당이 외부에 콜로네이드가 없고 외부와 내부가 모두 원형 평면인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평면은 성당의 동쪽에 제단이 있는 그릭 크로스의 중앙집중형 평면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제단에 성모자 프레스코화가 설치되어 있고, 제단 주변으로 성구실과 나선형 계단이 있는 탑이 있습니다. 1층 상부에는 돔을 받치는 팔각형 드럼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돔이 얹혀 있습니다. 미켈레 산미켈리는 르네상스 고전주의와 베네치아의 장식 지역주의의 조화를 이루어낸 건축가로 평가받습니다. 베네치아의 지역 전통은 장식적 기교로 인해 매너리즘과 유사하게 보이지만, 매너리즘 건축가들이 보인 고전에 대한 일탈보다는 고전의 전통을 이어받는 경향을 띠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산미켈리는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의 사이에서 고전과 일탈을 모두 포용하는 방향으로 16세기 베네치아의 건축 경향을 이끌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조르조 바사리

르네상스 시대에 성당 한 채도 짓지 않았으나, 조토부터 미켈란젤로까지 르네상스 성당 이야기 안에 그 어떤 건축가보다도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시대의 진정한 만능인이라고 평가되는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이자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근대 최초이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술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특히 그의 역서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ori)」은 13세기에 활동한 조토의 스승 치마부에(Giovanni Cimabue, 1240~1302)에서 시작하여 16세기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에 이르기까지 거의 3세기 동안 활동했던 예술가 200여 명의 생애와 작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의 초판은 1550년에 작고한 예술가들을 14세기, 15세기, 16세기(미켈란젤로 포함)로 나누어 3부로 출간되었고, 1568년에는 16세기의 생존 예술가들까지 포함된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바사리는 역사를 생성과 발전과 소멸의 과정으로 이해했고, 그러한 역사관에 의해서 미술도 태어나서 성장하고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미술은 고대에 생겨나서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중세에 쇠퇴하였고, 이제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태어나서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시기에 최고의 절정기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사리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를 미술의 ‘리나시타(Rinascita, 르네상스)’ 시기, 곧 재생(부활)의 시기라고 말한 첫 번째 사람입니다. 바사리는 1511년 아레초에서 출생하여 고향의 공방에서 미술에 관한 기초 교육을 받았습니다. 십 대 중반에 그는 피렌체로 이주하여 실비오 파세리니의 도움으로 메디치 가문에서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미술 아카데미와 공방에서 회화와 조각의 기법을 체계적으로 배웠습니다. 이후 1531년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이폴리토 데 메디치의 후원으로 로마에 가서 고대 로마의 유적들과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접했습니다.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바사리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공작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메디치 가문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바사리는 1535년 이후 이폴리토와 알레산드로의 죽음과 함께 메디치 가문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이런 상황은 20년 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가 그를 피렌체로 다시 부를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541년 바사리는 피렌체 ‘사도들의 성당(Chiesa dei Santi Apostoli)’의 알토비티(Altoviti) 경당에 <무염시태의 우화(Allegoria della Concezione)>의 제작을 의뢰받았습니다. 이 그림은 바사리가 피렌체의 성당에서 완성한 최초의 제단화로, 그가 피렌체의 화단에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고 처음으로 명성을 얻게 해준 작품입니다. 바사리는 자주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며 줄리오 로마노, 티치아노, 파르미자니노 등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작품을 보고 배우며 그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실력 있는 화가로 인정받았지만, 그의 이상과는 달랐기에 베네치아를 떠나 로마로 향하였습니다. 1546년 로마에 도착한 바사리는 알렉산드로 파르네세로부터 교황청의 ‘팔라초 델라 칸첼레리아’(사무국)에 있는 ‘교황 바오로 3세 방’의 프레스코화 의뢰를 받고, 교황의 가문을 과거 역사에 비유한 방대한 작품을 조수들과 함께 100일 만에 완성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이런 방식의 작품 의뢰를 많이 받았는데, 이것을 두고 후대의 비평가들은 바사리가 세속적이고 출세 지향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후 바사리는 <피에타>와 <성가정> 등의 작품을 다수 그렸고, 이 작품들 역시 화가로서의 독창성과 생동감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사리는 1550년 드디어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의 초판을 출간하고, 대성공을 거둡니다. 이에 문인들은 물론이고 다양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특히 코시모 1세의 지원으로 다시 메디치 가문과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후 바사리는 피렌체에 머물면서, ‘팔라초 베키오(Palazzo Vecchio)’의 재건축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코시모(국부), 로렌초(위대한 자), 레오 10세 교황, 클레멘스 7세 교황 그리고 코시모 1세의 방에 그들을 추앙하는 내용의 프레스코화를 그렸습니다. 또한 그는 팔라초 베키오에 있는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의 서재(Studiolo)를 장식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그림들은 자연의 모방과 마니에라의 달성이라는 그의 미술적 이상을 구현하는 작품들이지만, 실제로는 마니에라가 과하게 표현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560년 그는 ‘팔라초 우피치(Palazzo Uffizi)’의 설계와 건축을 의뢰받았습니다. 현재 우피치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팔라초 우피치는 처음에는 피렌체의 행정관들을 위한 사무 공간이었습니다. 팔라초 우피치는 시뇨리아 광장에서 아르노강까지의 거리를 두 개의 직사각형 건물이 평행으로 가로지르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평면은 3베이 모듈로 반복되었고, 3베이는 두 개의 도리스식 오더와 그 양옆에 벽기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정교한 묘사보다는 대리석과 큰 조각상을 중심으로 고전주의를 부각한 작품입니다. 또한 1층과 2층 사이에 중간층을 넣어서 총 4층 높이를 가졌으며, 각 층의 수평성이 팔라초 우피치의 특징입니다. 건축가로서의 조르조 바사리는 화가나 미술사가로서의 그에 비해서 활동이 적은 편이었습니다. 사실 그의 건축 작품은 1555년 이후 피렌체에 머무는 기간에 메디치 가문의 도움으로 수주한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술에 진심이었던 그는 1563년 마니에라에 도달하기 위한 ‘디세뇨(Disegno)’를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서양 역사상 최초의 미술 아카데미인 ‘디세뇨 아카데미(Accademia delle arti del disegno)’를 설립하여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다양한 재능으로 많은 업적을 남기며 삶을 알차게 살아온 바사리는 1574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캄피돌리오 광장과 포르타 피아

1534년 클레멘스 7세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경당의 제단 후면에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를 의뢰하였고, 피렌체에 머물고 있던 미켈란젤로는 그 작품을 위해서 다시 로마로 왔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을 로마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하고 며칠 후에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하고 바오로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바오로 3세 교황은 미켈란젤로의 열렬한 후원자로서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미켈란젤로가 회화, 조각, 건축 등의 작품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다른 건축가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지은 성당은 없습니다. 피렌체에서도 산 로렌초 성당의 부속 건물을 설계한 것이고, 마지막 작품인 성 베드로 대성당 역시 여러 건축가에 의해서 수십 년 동안 진행되던 공사였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와서 건축가로서 처음 맡은 일은 1538년 캄피돌리오 언덕의 건물과 광장의 설계였습니다. 캄피돌리오는 항상 로마의 정부 청사가 있는 곳으로 로마 제국 시대에는 세계의 중심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따라서 교황은 로마 제국 권위의 상징인 캄피돌리오를 통해서 현재의 로마가 제국의 권위를 계승하길 원했습니다. 그 시작으로 교황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 동상을 이곳으로 옮기고 미켈란젤로에게 캄피돌리오 광장의 설계를 의뢰한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먼저 광장의 정면에 있는 ‘팔라초 세나토리오’(현재 로마 시청)와 그 오른편에 있는 ‘팔라초 데이 콘세르바토리’(현재 미술관)를 개축하였습니다. 그리고 팔라초 데이 콘세르바토리와 평행이 아닌 사다리꼴 형태로 마주 보고 있는 ‘팔라초 누오보’(현재 미술관)를 새로 설계하였습니다. 끝으로 이 세 건물로 둘러싸인 타원형의 보도가 있는 광장을 설계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 언덕이 로마의 중심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언덕으로 올라오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르는 길은 계단 형태를 띠면서도 경사로의 느낌을 주어서 편안하게 언덕으로 오를 수 있게 해줍니다. 언덕에 오르고 나면 광장을 만나는데, 사람들은 타원형 모양의 장축 방향으로 이끌려 들어갑니다. 하지만 양옆의 팔라초가 정면에 있는 팔라초 방향으로 벌어진 사다리꼴을 하고 있기에, 타원형 광장에서 느껴지는 급속한 유입감은 정면의 건물로 접근할수록 줄어들게 됩니다. 이 광장의 초점은 일차적으로 팔라초 세나토리오에 있습니다. 광장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팔라초는 단일 소실점을 갖는 투시도의 효과를 내면서 타원형 광장과 함께 사람들을 모아들입니다. 하지만 팔라초 파사드의 양방향에서 올라오는 계단이 건물의 중앙에서 만나 출입구로 이어지고, 이 출입구 위에 종탑을 세움으로써, 양옆 팔라초의 축이 만나는 소실점이 과하게 강조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 고전주의에 따라서 정면의 팔라초를 축으로 하여 양옆의 팔라초를 대칭으로 둠으로써 캄피돌리오 광장에 통일성을 주었습니다. 매너리즘의 경향이 강한 미켈란젤로지만 여기서는 고전주의에 대한 일탈의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고 고대 로마 제국의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또한 세 팔라초의 파사드에 여덟 개씩의 거대 기둥이 반복되도록 하여 ‘ㄷ’자 건물 전체에 총 스물네 개의 거대 기둥이 광장을 둘러싸며 기념비적인 공간을 창출하였습니다. 하지만 1층의 원기둥과 2층 벽감형 창의 작은 원기둥이 거대 기둥과 가지는 관계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범주를 넘어서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시기에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가 설계 후 마치지 못한 두 개의 건축물을 맡아서 완성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팔라초 파르네세’이고, 다른 하나는 브라만테에서 시작되어 라파엘로를 거친 성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 편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미켈란젤로 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건축 작품은 로마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문 가운데 하나인 ‘포르타 피아’입니다. 1560년경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밑그림이 세 점 있고, 1568년경의 판화도 남아 있습니다. 이 문의 형태를 메디치 경당의 벽감형 창과 비교해 보면, 미켈란젤로의 설계가 점점 복잡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르타 피아에서 반고전주의적 특징으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내부 문 상부에 곡선형 페디먼트가 삼각형 페디먼트 안에 있는 형태입니다. 그 아래에는 입구가 줄무늬 홈을 가진 사각기둥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중앙 문 양옆으로 두 개의 창문이 있는데 상부에 팀파눔이 있고, 창문 위로는 블라인드 창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 광장과 다르게 포르타 피아에서는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를 탈피하는 매너리즘을 표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르네상스 예술의 3대 거장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라파엘로 산치오를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모두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건축 분야에서는 세 거장의 위상에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장치나 기계의 설계 같은 지적 탐구 영역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건축물 같은 조형물의 영역에서는 남긴 작품이 거의 없습니다. 라파엘로는 회화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조각상을 만들지 않았고 건축의 영역에서도 투시도 등의 회화적 요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습니다. 반면에 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의 영역 모두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건축 분야에서도 종교적 역사적 기념물에 대해서는 전성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고전주의를 표현하고, 팔라초와 빌라 등에서는 매너리즘의 언어로 반고전주의를 나타내는 등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였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 메디치 가문과의 인연에서 얻은 견문으로, 그의 작품에는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인 인문주의와 플라톤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미켈란젤로는 그의 재능을 소중히 여긴 교황들 곧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와의 깊은 인연으로 로마에, 특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최고의 회화와 조각과 건축 작품을 남겼고, 그 안에 그의 신앙을 담아 아흔 해의 삶을 주신 분께 봉헌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12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산 로렌초 성당의 메디치 경당과 도서관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르네상스 예술의 고장인 피렌체에서 살았고 특히 로렌초의 배려로 메디치 가문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대 로마의 조각품들을 접하고 인문학과 철학 등의 학문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켈란젤로는 젊은 시절에 피렌체를 기반으로 로마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스물한 살에 처음으로 로마에 가서 <피에타상>을 조각했습니다. 그리고 피렌체로 돌아와서 로마에서의 유명세로 <다윗상>을 조각하고 그림 작업도 했으며, 서른 살이던 때 율리오 2세 교황의 부름으로 다시 로마에 가서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를 완성했습니다. 그 후 어렸을 때부터 잘 알았던 메디치 가문의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마흔한 살의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요청으로 피렌체로 돌아와서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 설계 공모에 참여하였습니다. 산 로렌초 성당은 15세기 초에 ‘구 성구실’과 함께 브루넬레스키에 의해서 세워졌지만, 성당의 파사드는 미완의 상태로 백 년이 흘렀습니다. 이에 레오 10세 교황은 당대의 이름 있는 건축가들인 줄리아노 다 상갈로, 라파엘로, 안드레아 산소비노, 미켈란젤로를 설계 공모에 초대하였고, 그 가운데 미켈란젤로의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시공에 필요한 도면과 목재 모형을 만들었는데, 석재의 수급 문제로 결국은 공사가 취소되어 지금까지도 파사드는 마감 없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머물며 ‘메디치 경당’과 ‘도서관’의 설계도 맡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당의 외관 특히 파사드는 성당의 내부 구조와 일치를 이룹니다. 예를 들어 3랑식 바실리카형 성당의 파사드는 네이브 부분이 높게, 아일 부분이 낮게 처리됩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네이브와 아일의 높이 차이 없이 파사드 전체를 같은 높이로 설계했습니다. 파사드는 벽기둥 네 쌍으로 분할되는데 이 또한 내부의 구조와 무관한 파격적 설계입니다. 이는 성당이 아닌 팔라초에서 볼 수 있는 파사드 형태로, 건물의 성격이나 내부의 구조가 아닌 오로지 파사드의 예술적 완성도만을 고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입체적 설계는 그가 조각가라는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결국 외관과 내부의 구조적 일치에서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미켈란젤로는 이런 규칙을 깨트림으로써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습니다. 레오 10세 교황은 산 로렌초 성당 안에 그의 동생인 느무르 공작 줄리아노 데 메디치(1516년 사망)와 조카인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데 메디치(1519년 사망)를 위한 메디치 경당(신 성구실)을 원했습니다. 1520년 이 경당은 브루넬레스키가 백 년 전에 만든 ‘구 성구실’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는데, 돔 천장을 가진 정사각형의 중앙집중형 공간과 세 개의 부속 공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경당 평면의 크기와 구성은 구 성구실과 유사하나 돔을 받치는 드럼의 높이를 두 배로 하여 공간을 수직으로 확장하였습니다. 높아진 드럼은 두 개의 층으로 분할되었으며 각 층은 여러 형태의 기둥과 벽감으로 분절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기존의 질서에 어긋나는 확장을 통해서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를 탈피했습니다. 특히 1층과 2층 사이의 코니스를 두 개로 분리 설치하여 층과 층의 유기성을 거부하였으며, 벽면의 양 끝에 벽감을 설치하여 벽면의 가장자리를 중앙에 예속된 부분으로서가 아닌 독립된 부분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조르조 바사리는 이 경당을 보고 미켈란젤로가 치수와 오더의 법칙으로 규정되는 르네상스 건축과는 매우 다른 건축물을 만들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런 메디치 경당은 줄리아노 로마노의 ‘팔라초 테’보다 수년 먼저 설계된 것으로, 매너리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으로 보입니다. 경당의 조각상들을 살펴보면, 제대의 정면에 레오 10세 교황의 아버지 로렌초와 삼촌인 줄리아노의 무덤이 있고 그 위에 성모자상과 양옆에 메디치 가문의 수호성인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의 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대의 양쪽에 느무르 공작 줄리아노의 무덤과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의 무덤이 있는데, 그들의 삶에 드러난 모습인 듯 하나는 활동적인 모습을 다른 하나는 관상적인 모습을 상징합니다. 먼저 줄리아노의 무덤은 활동적인 삶을 묘사하는데, 그는 고개를 돌린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아래에 두 인물상은 일종의 시간에 대한 알레고리로 낮과 밤을 상징합니다. 로렌초의 무덤은 관상적인 면을 보이는데,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괴고 성모자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새벽과 황혼을 의미하는 두 인물상이 있습니다. 1523년 미켈란젤로는 클레멘스 7세 교황의 의뢰로 피렌체의 마지막 작품인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설계를 맡았습니다. 이 도서관은 산 로렌초 성당에 부속된 건물로, 도서관에 들어가는 현관과 도서관 본관으로 나뉘는데, 본관은 폭 10.5m 길이 46.2m 높이 6.8m이며, 현관은 10.5m 정사각형 바닥에 높이 14.83m의 규모입니다. 따라서 현관에 서면 마치 우물 속에 갇힌 기분이고, 본관으로 들어서면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아서, 두 공간이 조성하는 대비가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바닥 높이에서 8m 이상의 큰 차이가 나는 두 공간은 계단으로 이어집니다. 계단은 중앙과 양옆의 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의 계단은 아래쪽을 향하는 원형의 형태이고 양옆의 계단은 위쪽을 향하는 직선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앙의 계단은 본관에서 용암이 흘러내리는 것 같아서 올라오는 사람을 밀어내는 느낌이고, 양옆의 계단은 3분의 2 지점에서 중앙 계단과 합쳐지면서 사람을 본관으로 끌어 올리는 느낌을 줍니다. 이렇게 중앙과 양옆의 계단 역시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현관의 벽면 역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탈피하고 있는데, 현관 전체에서 토스카나식 쌍기둥이 벽 안에 들어가 있어서, 독립된 기둥이나 벽기둥의 형태로 수행되는 일반적인 기둥의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둥 위에는 아무 하중도 걸리지 않은 채 기둥은 장식품으로 전락했습니다. 결국 이 현관은 벽체가 내력 역할을 하면서 기둥을 받치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 미켈란젤로는 정해진 뻔한 규칙을 넘어서야 직성이 풀리는 상상 이상으로 흥미로운 사람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9-28 제3460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로마 베네치아 광장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과 마주 보는 한 건물의 외벽에는 다음과 같은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이곳에 신성 미켈란젤로(divino Michelangelo)가 살다가 숨을 거둔 집이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30년 동안 살다가 89세가 되던 156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그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피렌체 사람들이 몰래 미켈란젤로의 시신을 피렌체로 옮겨 산타 크로체 성당에 모시고 그 어떤 군주보다도 장엄하게 장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14세 때 미켈란젤로를 찾아와 제자가 된 조르조 바사리는 스승의 무덤을 설계하면서 회화, 조각, 건축을 상징하는 세 개의 조각상을 전면에 두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예술의 세 분야에서 모두 최고였음을, 굳이 역사에 맡기지 않고도 그 시대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1475년 아레초의 카프레세에서 포데스타(치안행정관)로 재직 중인 루도비코 부오나로티의 다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피렌체의 귀족이었던 부오나로티 가문은 생계유지를 위해 그곳에 갔고, 머지않아 피렌체의 세티냐노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은 피에트라 세레나라는 석재가 나는 고장으로 주민 대부분이 석공이었고, 그를 키워준 유모의 가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소년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돌을 다루는 법을 배웠고 훌륭한 예술적 기질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예술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기울은 가문이 사회적으로 아예 강등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미켈란젤로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12살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들어가서, 당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프레스코화 작업을 하는 스승으로부터 고도의 회화 기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라는 화실에서 조토와 마사초 등의 작품을 접하며 실력을 다졌습니다.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가 후원하는 예술 아카데미아가 있는 산 마르코 수도원의 정원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로렌초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습니다. 15살의 미켈란젤로는 그곳에서 당대의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신플라톤주의를 배웠고, 메디치가의 후손으로 훗날 교황이 된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를 만나 우정을 쌓았습니다. 이후 로렌초의 사망과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 그리고 사보나롤라의 등장으로 피렌체가 혼란에 빠지게 되자 미켈란젤로는 베네치아와 볼로냐 등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작품들을 접하였습니다. 그리고 21살에 로마에 도착하여 첫 번째 로마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이내 술에 취한 청년의 <바쿠스상>(바르젤로 미술관)을 선보였고, 다음 해에는 <피에타상>(성 베드로 대성당)을 조각하면서, 자신이 예술적 성숙기에 도달했음을 입증했습니다. 그는 이냐시오 성인과 가깝게 지낼 정도로 신심이 두터웠고, 그것을 표현한 그의 첫 번째 카라라 대리석 작품인 <피에타상>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5년간의 로마 생활을 마친 미켈란젤로는 1501년 다시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로마에서 얻은 명성으로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상 의뢰가 넘쳐났는데, 그중에서 피렌체 대성당의 ‘오페라 델 두오모’가 주문한 <다윗상>(아카데미아 미술관)이 유명합니다. 다윗상은 원래 대성당의 지붕에 올려질 계획이었기 때문에 올려다보기에 적합한 비율로 조각상이 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크기가 너무 커서 시뇨리아는 이를 도시의 상징으로 삼고자 시뇨리아 광장에 설치하였습니다. <다윗상> 작업을 마친 그는 원형 목판에 유성 템페라로 <성가정화>(우피치 미술관)를 남겼습니다. 또한 팔라초 베키오의 대회의실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앙기아리 전투>와 함께 <카시나 전투>의 프레스코화를 의뢰받았는데, 밑그림만 완성했고 지금은 그 사본만 남아 있습니다. 1505년 그는 다시 로마 생활을 하게 됩니다. 피렌체 출신의 줄리오 다 상갈로는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에서 이룬 업적들을 새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자랑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브라만테와 라파엘로 등의 예술가를 통해서 로마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교황에게 미켈란젤로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황은 먼저 자신의 무덤에 놓일 기념비 제작을 부탁했는데, 그로 인해 미켈란젤로는 온갖 시기와 모략 속에 교황과 관계가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508년 그는 교황으로부터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 제작을 의뢰받았습니다. 그동안 조각에 전념한 탓에 회화가 낯설었고 브라만테도 그것에 의문을 품었지만, 그는 5년 동안의 고된 작업 끝에 1512년 말 천장화를 완성하였습니다. 몇 달 후 율리오 2세 교황은 사망하고, 메디치 가문 출신의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새 교황을 위해 산탄젤로성의 교황 경당을 작업했고, 1515년 부오나로티 가문은 팔라티노 백작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1516년 피렌체를 방문한 레오 10세 교황은 미완으로 남은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를 설계 공모하였는데, 미켈란젤로의 목조 모형이 채택되었고 이로써 그의 피렌체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파사드 공사는 예산 등의 이유로 무산되었지만, 교황은 산 로렌초 성당에 메디치 경당(신 성구실) 설계를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하였고, 그는 브루넬레스키의 옛 성구실을 참고하여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1523년 다시 메디치가의 클레멘스 7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산 로렌초 성당 영내의 도서관 공사를 미켈란젤로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1534년 교황이 시스티나 경당 제단에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를 미켈란젤로에게 맡기면서 30년간의 세 번째 로마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바오로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미켈란젤로는 교황청 소속 예술가로 임명되었고, 그의 프레스코화는 1536년부터 7년간 작업 끝에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였으며, 율리오 2세의 무덤을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incoli)에 안치하고 <모세상>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71세의 미켈란젤로는 훗날 그의 첫 작품인 <피에타상>이 놓일 곳이며,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하느님에게서 받은 열정의 마지막 것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9-21 제3459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줄리오 로마노

라파엘로 산치오, 발다사레 페루치, 그리고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는 각기 우르비노, 시에나, 피렌체 출신이지만 로마에 와서 브라만테가 세운 교황청의 건축 공방에서 건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브라만테와 함께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을 이끌었고, 매너리즘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즈음인 1514년 브라만테의 건축 공방에 로마에서 태어나고 자란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9(?)~1546)라는 소년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조르조 바사리는 그때 그의 나이가 스무 살 정도였을 것이라고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고작 열다섯 살이었고 바로 라파엘로의 제자가 되어 회화와 건축을 배웠습니다. 줄리오 로마노는 페루치나 안토니오와 다르게 회화적 소질을 보였고, 그래서 라파엘로의 조수로 바티칸의 프레스코화 작업에 일찍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1520년 라파엘로가 사망하자 그는 라파엘로의 주요 회화 작품들을 물려받아서 마무리 작업을 거의 도맡았습니다. 특히 교황의 아파트에 있는 라파엘로의 방 연작 가운데 ‘보르고의 불의 방’에 있는 프레스코화에 줄리오 로마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고, ‘콘스탄티누스의 방’에 그려진 <십자가의 환시>와 <밀비오 다리의 전투>도 그가 완성하였습니다. 하지만 1524년 만토바의 페데리코 2세 곤차가 공작의 초대로 만토바로 이주하면서 줄리오 로마노의 화가로서의 인생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공작은 줄리오 로마노를 궁정 예술가로 임명하였고, 그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공직자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사실 줄리오 로마노가 당시 로마의 건축 공방 출신 중에서 실력 있는 사람이면 모두 거쳤을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그가 바티칸의 ‘라파엘로의 방’에 계획된 프레스코화를 모두 마치고 나서 만토바로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만토바에서 공작의 마음을 만족시킨 것은 줄리오 로마노의 회화 실력이 아니라 건축가로서의 역량이었습니다. 그의 건축은 스승인 라파엘로처럼 회화를 바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줄리오 로마노의 건축은 구조적인 면과 장식적인 면이 분리되었고, 그중에서 그가 관심이 있는 부분이 장식이었기 때문에, 그의 매너리즘도 장식 분야에서 나타났습니다. 줄리오 로마노는 만토바에 도착한 다음 해부터, 페데리코 공작의 요청으로 ‘팔라초 테(Palazzo Te)’와 ‘카사 디 줄리오 로마노(Casa di Giulio Romano)’를, 그리고 페데리코의 사후 에르콜레 곤차가 추기경의 요청으로 ‘산 베네데토 인 폴리로네 수도원(Abbazia di San Benedetto in Polirone)’과 ‘만토바 대성당(Duomo di Mantova)’의 개축 등을 맡으며, 15세기에 알베르티가 만토바에 진출하여 르네상스 건축을 전파한 이후, 16세기의 만토바 건축을 주도하며 발전시켰습니다. 팔라초 테의 평면을 보면 전형적인 로마식 빌라의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물은 정사각형의 안뜰 둘레로 방들이 배치되어 있고, 정면의 출입구와 반대쪽에 정원으로 나가는 문이 있습니다. 정원은 부속실 몇 개를 제외하면 벽으로 둘러친 넓은 개방된 공간이고 건물 반대쪽에 엑세드라(Exedra, 반원형 광장)가 있습니다. 안뜰의 네 면을 둘러 있는 방들은 고전적인 규칙성을 보이지만 ‘거인족의 방’의 벽화는 반고전성의 불규칙한 형태를 보입니다. 입면에서도 이러한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나는데, 전반적으로 고전적인 요소들을 사용하면서 페데리코 공작의 정치적 위상을 부각했습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고전적인 요소의 사용에 있어서 통일성보다는 다양성을 강조하여 여러 유형이 혼재했고 부재도 변형되었습니다. 건물의 정면은 중앙의 출입구와 양측의 베이가 삼분법으로 대칭 구획되었고, 중앙 출입구는 다시 세 개의 아치문으로 반복 구성했습니다. 하지만 아치의 키스톤과 창틀에는 거친 표면 처리를 하였고, 창과 프리즈 사이에 중간층을 넣어서 수직 분할이 비율에 맞지 않았습니다. 또한 양측의 베이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사이에 간격이 좁은 베이가 하나 추가되어 있습니다. 다른 베이보다 좁지만 그렇다고 쌍기둥도 아닌 형태입니다. 이런 형태는 정면이 전체적으로 갖고 있는 삼분법과 대칭과 반복에 의한 고전성을 무너트립니다. 또한 프리즈에 새겨진 조각을 보더라도 성경이나 역사 등에 관한 성스러운 내용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소재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안뜰에서 보이는 면은 토스카나식 오더와 신전 파사드(페디먼트)를 사용하여 고전적인 형태를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앙의 출입구를 보면 아치문 위에 페디먼트를 장식의 형태로 처리하여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가 갖는 위계질서와 구조적 안정을 무시하였습니다. 아치문과 페디먼트의 결합은 양측의 베이에서 더욱 반고전성을 드러내는데, 페디먼트는 작아지고 경사면의 두 변만으로 구성하고 그 속을 아치의 키스톤이 차지하였습니다. 양측의 베이도 넓은 베이와 좁은 베이가 교대로 배치되었는데, 좁은 베이는 건물 정면에서와 같이 쌍기둥으로도 볼 수 없는 형태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렇게 팔라초 테는 줄리오 로마노의 고전성과 반고전성의 양면을 모두 담고 있는 불균형의 형태를 취하면서 매너리즘을 드러냅니다. 이어서 줄리오 로마노는 산 베네데토 인 폴리로네 수도원과 만토바 대성당의 개축 공사를 맡았습니다. 만토바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는데 14세기 말에 파사드 등 일부가 고딕 양식으로 개축되었습니다. 하지만 1545년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어 에르콜레 곤차가 추기경은 줄리오 로마노에게 재건을 의뢰하였습니다. 그는 대성당을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하였는데, 이 건물이 팔라초와는 다르게 주교좌 성당이기 때문에, 반고전적 불균형보다는 고전주의적 안정성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파사드를 비롯한 외부는 이전의 형태를 존치하였고, 성가대석과 네이브를 중심으로 내부 공사를 진행하였는데, 그 모델은 그가 로마를 떠나기 전에 봤던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가 어린 시절부터 로마에 살면서 옛 대성당에서 느꼈던 신앙의 향수(鄕愁)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9-14 제3458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 1484~1546)는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베키오 형제의 조카이고,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아들인 조각가 프란체스코 다 상갈로와는 사촌지간이 됩니다. 그는 스무 살이 채 안 된 1503년 삼촌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손에 이끌려 로마로 가서 브라만테의 건축 공방에 들어갔고,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현장에서 1514년까지 브라만테의 조수로 일했습니다. 브라만테 이후 라파엘로 밑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과 빌라 파르마의 공사에 참여하였고, 라파엘로가 사망한 1520년 이후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공사의 총감독이 되어 설계를 진행하였으며, 이때 같은 공방 출신의 페루치가 조수로 그를 도왔습니다. 그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율리오 2세 교황 시기였는데 그 후로 세 명의 교황, 곧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와 친분을 쌓았고 그들이 발주하는 건축 공사를 수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설계한 건축물의 예술성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들이 대체로 칭찬을 아끼는 편입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지성인이나 예술가들이 보였던 만능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고, 조르조 바사리도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에서 그가 천재성으로 전인적 예술을 추구하는 당대의 예술가와는 다르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미술 분야에는 관심이 적었고 건축에 집중한 편이었으며, 건축에서도 독창성과 창조성을 요구하는 분야보다는 시공이나 기술적인 분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교황들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정치적 수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향 피렌체에서부터 가족이 운영하는 공방에서 삼촌들로부터 건축을 배웠고, 그 덕에 어린 나이임에도 삼촌들의 유명세를 업고 브라만테의 로마 공방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라파엘로 산치오와 발다사레 페루치 그리고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 자코포 산소비노, 미켈레 산미켈리, 줄리오 로마노 등과 교류하였습니다. 그는 1527년 로마 대약탈 때도 다른 건축가들과 달리 로마를 떠나지 않음으로써 로마에서 영향력 있는 건축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수주한 공사는 성채와 같은 군사시설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군사시설이 작품성보다 견고한 시공을 요구했고, 마침 그 시기에 ‘이탈리아 전쟁’이 한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는 군사시설 외에도 팔라초(궁전) 건축에 관심이 많았는데, 당대의 팔라초를 연구하여 팔라초의 유형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후대에까지 영향을 주었던 그의 팔라초 유형 연구는 건축에 대한 관점을 예술성만이 아니라 실용성에까지 확장하여 주었습니다. 그의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설계사무소의 운영도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후대는 그를 근대 설계사무소의 효시라고 말합니다. 그는 결국 건축을 시스템으로 이해한 최초의 건축가인 셈입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의 초기 작품 중에 ‘팔라초 발다시니(Palazzo Baldassini)'가 그러한 ‘유형주의’의 한 예입니다. 유형이란 ‘건축물의 기능’에 의거한 어떤 경향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예를 들어 특정 성향의 대규모 건물을 설계할 때, 그런 건물의 설계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건축가들이 건물의 대표적인 유형에 따라서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실용성에 바탕을 둔 방식입니다. 이런 유형적 접근 방식은 군사시설에 유용하였지만, 그는 팔라초 발다시니에서 그런 시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팔라초에 대해 전문가들은, 브라만테 밑에서 함께 있었던 페루치에 비해 육중한 면은 있지만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평가는 동시대에 미켈란젤로에 의해서도 내려진 바 있는데, 비록 팔라초 발다시니가 예술성은 떨어지나 팔라초의 한 유형으로 정착하여, 18세기까지 상류층의 주거지로 가장 인기 있는 유형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에게 군사 건축물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팔라초 파르네세(Palazzo Farnese)’일 것입니다. 훗날 바오로 3세 교황이 된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은 그에게 파르네세 가문을 위한 궁전을 의뢰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공사가 느리게 진행되었는데, 추기경이 1534년 교황 자리에 오르면서 건물의 평면이 확장되고 전체적으로 설계 변경이 이루어졌습니다. 팔라초 파르네세는 출입구가 있는 정면의 높이가 30미터에 폭도 60미터가 넘고 건물의 깊이도 80미터에 이릅니다. 평면은 중앙에 있는 정사각형의 중정을 중심으로 각 실이 배치된 형태입니다. 건물의 뒤편이 테베레강인데 그곳에 거대한 로지아가 있습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는 팔라초의 각 층을 코니스와 창문을 둘러싼 원기둥의 기단 상부를 가로지르는 석조 띠로 구분하였습니다. 출입구를 지나서 팔라초에 들어가면 중정에 원기둥이 늘어서 있는데,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의 고전주의적 경향이 드러난 곳으로 마르첼로 극장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것입니다. 중정의 지상층과 1층은 아케이드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2층은 매우 세련된 설계의 창문들이 있습니다. 그는 원래 모든 층을 아케이드로 구성하여 층마다 오더를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으로 설계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면의 코니스 설계가 공모에 부쳐졌고 미켈란젤로가 당선되면서 미켈란젤로는 팔라초 파사드에 자신의 디자인을 넣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코니스를 고전 형식으로 설계하였는데 건물의 제일 위층이 눌리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원래 설계보다 더 높이 올려서 계획하였습니다. 일반적 관례에 따르지 않는 이러한 설계는 미켈란젤로의 매너리즘 경향에서 나온 것입니다. 중정의 2층 전체와 1층의 이오니아식 오더 위로 고전에 어긋나는 프리즈를 계획하고 아치 안에 창틀을 넣은 것도 미켈란젤로의 설계일 것입니다. 비록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과 ‘팔라초 파르네세’에 대한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의 설계에 만족하지 않고 외관의 많은 부분을 수정하였지만, 두 건물 모두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의 흔적을 담고 있는 대성당과 팔라초로 지금도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9-07 제3457호 20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발다사레 페루치

브라만테는 로마에서 활동하면서 교황청 안에 건축 공방을 만들어 설계에서 시공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건축 교육을 하였습니다. 라파엘로가 그 공방에 있을 시기에 시에나 출신의 건축가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re Peruzzi, 1481~1536)가 합류하였습니다. 1481년 시에나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화가로 활동한 페루치는 키지 가문의 ‘빌라 레 볼테’를 설계하면서 키지 가문과 가까워졌고, 건축가로서의 경력도 쌓았습니다. 율리오 2세 교황의 신임이 두터웠던 시에나 출신의 교황청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는 고향의 건축가 발다사레 페루치를 교황에게 추천하였고, 1503년 페루치는 로마에 입성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건축 공방에서 일하면서, 브라만테와 라파엘로에게서 고대 로마 유적의 연구와 르네상스 건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특히 브라만테의 중앙집중형 공간 구성과 로마 고전주의의 해석법, 그리고 라파엘로의 공간 규모의 축소 방식과 장식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이력에서 페루치도 라파엘로처럼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에서 매너리즘 건축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던 건축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후 키지는 테베레강가 자신의 별장인 ‘빌라 파르네시나’(Villa Farnesina)의 설계를 페루치에게 맡겼는데, 이 빌라는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인 ‘빌라 마다마’(Villa Madama)보다 10년 앞선 것이었습니다. 빌라 파르네시나는 규모는 작으나 중앙에 본 건물이 있고 양쪽에 부속 건물이 이어지는 초기 빌라의 유형을 띠는데,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가 다수 있으며 상당히 호화롭게 지어져 당대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페루치는 로마 생활 초기에 화가로 활동하면서, 연극 무대 설계를 부활시켰고 원근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그의 밑그림 수백 장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15세기에 알베르티가 그랬던 것처럼, 전인적(全人的) 재능을 갖춘 16세기의 만능인이었습니다. 특히 건축 이론서를 제자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Sebastiano Serlio, 1475~1554)와 함께 작업했는데, 「건축 7서」가 세를리오의 이름으로 발간되었지만, 책에는 페루치의 이론과 밑그림 상당 부분이 담겼습니다. 또한 페루치는 브라만테 아래서, 그리고 라파엘로와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1520년 라파엘로가 사망하자 그가 설계한 ‘산텔리조 델리 오레피치 성당’(Chiesa di Sant'Eligio degli Orefici)의 공사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브라만테 이후 라파엘로가 맡았던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는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가 총감독이 되었고 페루치는 보조 감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페루치는 2년간 볼로냐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서 산 도메니코 성당의 ‘기실라르디 경당’(Cappella Ghisilardi)을 설계하였습니다. 기실라르디 가문의 의뢰로 설계한 경당은 그릭 크로스 평면으로 계획되었으며 모서리에 있는 네 개의 도리스식 오더가 지붕을 받치는 형태입니다. 경당 설계 후 페루치는 로마로 돌아왔지만, 그의 실험주의가 표현된 경당 공사는 1530년대까지 설계안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1527년에 로마가 약탈당하는 혼란의 시기가 있었고, 이후 페루치는 1531년에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 다시 참여하여, 1534년에 건축 총감독이 되었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의 총감독이 된 페루치는 그의 설계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계획안이었던 브라만테의 평면도에서 중앙 크로싱의 돔은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평면은 사방에 작은 공간으로 분할되었고, 공간의 크기뿐만 아니라 형태도 달랐는데, 원, 타원, 반원, 사엽형, 사각형 등의 형태가 겹 공간으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브라만테가 처음에 설계한 중량감 있는 공간 구성은 사라지고, 라파엘로의 평면보다도 훨씬 다양해지고 작게 분할되었습니다. 그 결과 중앙집중형 평면이지만 공간은 중심으로 집중되지 않았고 오히려 바깥으로 분산되었습니다. 페루치의 이 계획안은 전형적인 매너리즘 형태를 보여줍니다. 매너리즘의 문을 열었던 라파엘로도 성 베드로 대성당 계획에서는 로마 고전주의에 입각한 전성기 르네상스의 정통성을 이었는데, 페루치는 르네상스의 전체적 통일성과 중심성을 과감히 파괴하였고 매너리즘의 특징을 전면에 드러내었습니다. 특히 페루치가 타원형의 형태를 사용한 것은 전형적인 반고전주의에 해당합니다. 타원형의 대표적인 로마 건축물이 콜로세움인데, 고대 로마 건축물이 원의 형태를 선호한 것을 보면, 타원형의 건축 형태는 분명히 로마 고전주의로부터의 일탈에 해당합니다. 페루치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팔라초 마시모 알레 콜로네’(Palazzo Massimo alle Colonne)입니다. 이 팔라초의 중요성은 본격적으로 초기 매너리즘을 시작하였다는 점입니다. 팔라초 마시모 알레 콜로네는 로마 약탈 때 소실된 건물 자리에 세워졌는데 남아 있는 건물을 최대한 살려서 설계되었습니다. 이 팔라초는 마시모 가문의 두 형제를 위해 지어졌기 때문에, 건물의 평면도를 보면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대지를 최대한 활용한 탓에 건물의 축이 기울어져 있고, 파사드도 곡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팔라초 마시모가 매너리즘 형태인 것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질서를 벗어난 파격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파사드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쌍기둥이 아니면서 기둥 두 개가 애매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전 고전주의의 형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파사드가 건물의 중심에 있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지상 2층의 작은 창도 위쪽은 단순한 데 비해서 아래쪽은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불균형을 이룹니다. 또한 1층의 기둥들이 보여주는 수직성과 코니스의 강한 수평성은 조화롭지 못한 구성입니다. 페루치는 대표적인 한두 건물을 제외하면 성 베드로 대성당처럼 대부분 다른 건축가들과 연계된 것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닿은 건물에는 로마 고전주의가 아닌 매너리즘적 요소가 스며 있으며, 이를 통해서 후대의 건축가들에게 페루치 방식의 잔잔한 여운을 남겨주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8-31 제3456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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