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키지 경당

이형준
입력일 2025-07-29 17:06:09 수정일 2025-07-29 17:06:09 발행일 2025-08-03 제 3453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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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공간과 예술품의 조화가 만든 질서 있는 통일성
라파엘로 설계 원형 그대로 보존…고대 로마 중앙집중형 공간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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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가 설계한 ‘키지 경당’이 위치한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전경. 출처 위키미디어

로마의 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폭이 넓지는 않으나 말이 달리기 좋도록 곧게 닦아놓은 비아 델 코르소(Via del Corso)라는 길이 보입니다. 그 길의 왼편 안쪽에는 나보나 광장과 판테온이 있고 오른편에는 트레비 분수와 스페인 계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이르면 커다란 타원형의 포폴로 광장(Piazza del Popolo)을 만나게 되고, 그 광장을 빠져나가는 포폴로 문(Porta del Popolo) 옆으로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 Popolo)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13세기 초부터 교회의 기록에 나타나는데, 13세기 중반에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에 맡겨졌습니다. 16세기 초 브라만테는 율리오 2세 교황의 의뢰로 제단 뒤편의 성가대석 확장 공사를 맡아서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완성하였습니다. 교황은 또한 라파엘로에게 <베일의 성모 마리아>(1508년)와 <교황 율리오 2세의 초상화>(1511년)를 의뢰하였고, 두 작품은 16세기 말까지 성당 성구보관소(제의실)에 걸렸습니다. 1507년 교황은 친구이자 시에나의 은행가인 아고스티노 키지(Agostino Chigi, 1466~1520)의 요청으로 좌측 두 번째 경당을 그의 가족 경당으로 쓰도록 허락하였고, 키지는 그 설계를 라파엘로에게 맡겼습니다.

‘키지 경당’(Cappella Chigi)은 라파엘로가 설계한 성당 가운데 가장 원형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건축물입니다. 그가 공사를 시작한 때인 1512년에 작성한 설계 도면이 우피치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독립된 건물이 아닌 성당 안에 있는 경당은 별도의 외관을 갖고 있지 않고 정해진 공간 안에 지어졌기 때문에 설계 원안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아고스티노 키지는 1520년에 이 경당에 묻혔고, 라파엘로는 그보다 며칠 앞서 판테온에 묻혔습니다. 이후 공사는 지지부진했는데, 17세기 중반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경당의 보수 공사를 하고 벽감에 <다니엘과 사자>와 <하바쿡과 천사>의 조각상을 설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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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평면도와 ‘키지 경당’의 위치. 출처 위키미디어

키지 경당은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투시도법으로 그 규모를 축소하여 재현하는 라파엘로의 독창적인 방식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이 경당은 매너리즘 양식 이전의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에 속한 작품입니다. 키지 경당의 중앙집중형 평면은 브라만테의 산 피에트로 템피에토를 떠올리게 합니다. 브라만테의 템피에토는 구조물이 중심점을 기준으로 방사선 방향으로 질서 있게 배치되고 장식도 매우 절제되어 있습니다. 이는 로마 고전주의에 나타난 중앙집중형 공간을 요약하고 변형하여 발전시킨 좋은 예입니다.

라파엘로 역시 키지 경당에서 중앙집중형 평면을 취하고 있지만, 로마 건축물의 재현에 있어서 브라만테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그의 경당은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라파엘로에게 장식은 단순히 공간을 꾸미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장식을 통해서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그는 경당에 고대 로마의 중앙집중형 공간을 재현하였습니다. 정육면체와 반구형 천장으로 구성되는 단순한 기하학적 공간이지만 고대 로마의 대형 공간이 가지고 있는 건축 요소들을 담아내고 있으며, 그 위에 장식들이 화려하게 수놓아졌습니다. 이러한 장식적 요소는 정사각형과 원의 기하학적 완전함이 주는 과도한 안정감과 정적인 공간감을 완화하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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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지 경당 내부에서 바라본 돔. 화려한 장식들이 경당의 정적인 공간감과 안정감을 완화해 준다. 출처 위키미디어

또한 라파엘로는 건축 공간을 조각이나 회화 작품을 설치하기 위한 바탕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돔과 돔을 바치는 드럼, 펜던티브, 벽체, 벽감, 그리고 엔태블러처의 코니스, 프리즈, 아키트레이브 등이 모두 회화나 조각 작품의 바탕 공간이 됩니다. 이밖에 코린트식 오더와 볼트, 아치 등도 하나의 장식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이렇게 회화와 건축 그리고 장식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건물에 적용되었지만 복잡하거나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 있는 통일성을 띠었습니다.

라파엘로는 회화를 평면적으로만 다루지 않고 투시도법을 이용하여 축소된 입체 공간으로 해석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건축의 요소들 곧 펜던티브, 벽체, 벽감, 아치 등의 요소들이 서로 떨어져 있고 같은 면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축소된 입체 공간 안에서 그 요소들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펜던티브 돔은 비잔틴 양식에서, 기하학과 장식의 조화는 판테온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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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스티노 키지의 장례 기념비, 아돌포 아폴로니(1915년). 출처 위키미디어

라파엘로가 지은 성당 가운데 키지 경당과 유사한 성당으로 산텔리조 델리 오레피치 성당(Chiesa di Sant'Eligio degli Orefici)이 있습니다. 라파엘로가 브라만테와 함께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아도 라파엘로의 설계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성당입니다. 평면은 팔이 짧은 그릭 크로스 형태로, 내부는 원통형 드럼과 반구형 돔이 있는 단일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브라만테 외에도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깊게 교류했는데, 그가 설계한 프라토의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e Carceri)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라파엘로는 고대 로마의 건축, 특히 오더를 축소하여 표현하였고, 장식은 절제하였습니다. 또한 돔은 가볍게 보이도록 밝은색으로 내부를 처리했습니다. 이는 라파엘로가 이미 회화에서 시도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건축에 적용한 것으로, 색조를 비현실적으로 밝게 만들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의 고유한 방법에서 나왔습니다.

이밖에 성당은 아니지만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이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작품으로 1518년 짓기 시작한 ‘빌라 마다마’(Villa Madama)가 있습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베키오와 줄리오 로마노가 함께 작업한 이 빌라는 중앙에 원형 중정을 둔 중앙집중형의 건물입니다. 라파엘로는 중정을 중심으로 세 방향에 불규칙적으로 방들을 배치하였는데, 비정형적 구성이지만 공간 사이의 질서가 유지되었습니다. 비록 절반이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지만 라파엘로가 이 빌라를 계획한 가장 큰 이유는 로마 고전주의에 입각한 빌라를 세상에 내놓겠다는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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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