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유리알] 오늘도 기다린다

누구나 한 번쯤 친구를 보며 장난스럽게 ‘눈싸움’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눈물이 날 때까지 바라보다 깜빡이면 지는 게임. 그때 나는 친구의 솜털 같은 눈썹과 투명한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 존재를 주시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쳐다봄’이 아니라, 신비였다. 그 응시는 사회적으로 약 3초에서 5초 정도 허용된다고 한다. 물론 이와 달리 사랑하는 사이의 눈 맞춤은 길면 길수록 친밀감이 더하고…. 캐나다의 사실주의 화가 알렉스 콜빌(Alex Colville, 1920~2013)이 있다. 그는 일상을 그린 작품에 기묘한 불안과 긴장을 잘 숨긴다.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 그리고 ‘정지된 순간’이,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 내적인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작품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1965)에서는, 항해 중인 배 위에 한 여성이 쌍안경을 들고 바다가 아니라 관객을 보며 서 있다. 쌍안경의 렌즈가 나를 향할 때 그 시선은 도발적이게 된다. 어쩌면 ‘존재를 응시한다’는 건, 감시와 애정 사이에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아닐까.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성당 근처 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이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이른 아침 성당 마당에서였다. 가끔 직장인들이 성당에 와서 커피를 마시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그는 달랐다. 하루에 세 번 그녀를 보러 왔으니까. 출근하기 전에 한 번 보러 왔고, 점심때도 틈을 내 다녀갔으며, 퇴근하는 길에는 성당 철문이 닫혔어도 문밖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로 성당 마당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바뇌의 성모상이었다. 벨기에 산골 마을 바뇌에서 ‘마리에뜨’라는 소녀에게 여덟 번 발현하신 성모님은 마지막 발현 때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원하셨다. 사랑은 머무는 시간에 비례한다. 때때로 그는 성당 뜰에 놓인 벤치에서 뭔가 풀리지 않는 듯 깊은 생각에 빠졌는데, 그러다 사라지면 성모상 앞에 서 있곤 했다. 누가 보면 성당에 사는 사제보다 성모님을 더 지키는 것 같았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그가 성모상 앞에 설 때마다 그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아 신자들은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살금살금 다녔다. 나는 그 신태하 미카엘 형제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제님, 이렇게 오시는 데는 무슨 사연이 있으신가요?” 그는 순하고 조용했으며 수줍은 사람이었다. “무슨 사연이라기보다, 우연히 그렇게 됐습니다. 여러 성당을 다녀봐도 여기만큼 성모님이 단아하고 아름다운 분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퇴근할 때만 잠시 뵈었지요. 그때는 성모님을 만나기 위해 성당에 온 것이 아니라 귀가 전에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저녁에 오다 보니, 아침에도 오게 되고 저녁, 아침, 점심, 이렇게 성모님 앞에 자주 서게 된 겁니다.” 마음이 가서 자꾸 또 보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자주 보니까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나는 묻고 싶었다. 성모님 앞에 서면 기도 외에도 어떤 기분이 드는지. 성모님도 그를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분 앞에 서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어머니의 품과 같은 감미로움이 느껴집니다. 그만큼 따뜻한 곳이 없지요. 물론 성당에 오면 편안함이 있지만요. 저는 여기 성모님을 뵐 때부터 제 온몸이 포근하게 안기는 느낌을 받습니다. 성경에서 제자들이 거룩한 변모를 한 예수님 앞에서 횡설수설했듯이(마태 17,4 참조) 그 순간 제 머릿속에 있는 모든 기도들을 고백하게 됐지요.” 꾸밈없는 그의 모습에 나는 다시 궁금해졌다. “그러면 기도하면서 일상의 변화도 있었나요?” 그가 말했다. “이렇게 5년 반 동안 같은 방식으로 매일 기도를 했습니다. 대개 가족들이나 하는 일에 대한 기도였지요. 기도를 통해 어떤 신비로운 기운을 느꼈다기보다는 잔잔한 변화들이었습니다. 원래 저는 모든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다음 일을 못 했지요. 예전 같았으면 그것을 풀기 위해 혼자 노심초사했을 텐데 지금은 자동으로 ‘뭐가 풀리지 않아? 그럼, 성당에 잠시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다녀오면, 술술 일이 잘 풀리는 일상의 작은 변화를 체험합니다. 제가 점심에도 자주 성당에 가니까 밥 먹으러 가자는 동료들도, 으레 ‘성당 갈 거지?’ 합니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에서 화가 알렉스 콜빌은, 한 장의 그림을 사이에 두고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과 그림 속 쌍안경을 든 여인이 보이지 않는 교감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당신만이 아니라 ‘나도 당신을 보고 있다’는 서로의 응시.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 세 번씩 자신을 보러 오는 한 사람을, 성모님도 기다리고 계시지 않겠는가.’ 그는 말했다. “성모님 앞에 서 있으면, 그분도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걸 느낍니다. 그래서 그 앞에 가기 전에,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런 저에게 아내는 ‘자신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아마 사제가 됐을 거’라고 그래요.” 오늘도 성당 마당에는 성모상이 그대로 서 있다. 그러나 그는 올 수가 없다. 가끔 나는 빈 성당에서 그를 찾는다. 이제는 강원도의 한 부대로 전출한 그에게, 나는 오랜만에 퇴근 시간에 맞춰 전화했다. 강원도의 맑은 공기와 같은 청량한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렸다. 한결같이 그는 일요일이면 군인 성당에서 미사드리고, 가끔 성당 청소 후에 군종 신부님이 사주시는 짜장면을 함께 먹는다고 했다. 가족들을 떠나 혼자 근무를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그에게 가볍게 물었다. “미카엘 형제님, 여기에서처럼 그 성당에서도 매일 성모님을 만나고 계시나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부대와 성당이 거리가 있어서 퇴근길에만 들립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순간 그리움이 느껴졌다. 나는 이 말을 전하고 싶었다. 진정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으니, 분명 바뇌의 성모님도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찾아주던 그를 그리워하고 계실 거라고….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이별할 때 필요한 몇 가지

인생의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내가 누워 있을 장례식에서 어린이 성가대가 노래를 불러주는 거였다. 그러나 아이들이 무표정하고 차갑게 누워 있는 이 남자를 보게 되면, 무서워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 거라는 생각에 일단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타인의 죽음만을 아는 인간은 그 끝에 대한 상상이 언제나 두렵고 외롭다. 지난해, 10월 나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임종을 앞둔 아버지와 며칠간 보냈다. 세상에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의 사라짐을 앞두고, 가족들은 여러 궁리를 하고 있었다. 우선 평소 묵주기도를 자주 하셨으니, 소셜미디어에 있는 묵주기도 방송과 좋아하시던 야구 중계를 계속 들려드렸다. 그리고 서둘러 영정사진도 챙겨 왔다. 이 정도면 된 것일까. 죽음 앞에서 환자도 가족도 완벽할 수는 없다. 나중에 나는 호스피스 병동에 계신 조은경 마리아 수녀님께 이별할 때 필요한 준비에 관해 물었다. “가족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임종이 다가올수록 병실 복도나 저희 앞에서 우시는 걸 권합니다. 쉽지는 않아요. 슬픔이 북받치니까요.” 하얀 수도복을 입은 마리아 수녀님은 공감과 함께 담담한 시선으로 말씀하셨다. “환자는 의식이 없더라도 다 느끼고 계십니다. 그런데 가족들은 경황이 없으실 때가 많아요. 이럴 때 저는 먼저 가족들을 안아드립니다. 어떤 때는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환자가 평소 묵주기도를 좋아하셨더라도 내내 방송을 틀기보다는 차라리 일상적인 대화를 하시는 걸 권합니다. 날씨 이야기와 같은 오늘 있었던 사소한 이야기를…. 가까운 사람끼리 하는 일상적인 대화만으로도 환자는 안정감을 찾습니다. 우리 가족이 끝까지 나와 함께 할 거라는 확신. 손을 가볍게 잡아드리세요. 그러다 보면 살아온 시간에 대한 회한을 넘어 감사하게 됩니다.” 널찍한 임종실에서 보낸 이틀 동안 아버지는 신음하시다 어디를 가시려는 듯 누굴 찾으시는 듯 거칠게 일어나곤 하셨다. 이때 병실을 채웠던 음악들은 끄고 대신에 창밖에 내리는 가을 빗소리를 들려드렸더라면 어땠을까. 눈을 감고 있어도 삶의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 환자의 마음이라 했다. 어쩌면 나는 아버지의 고통을 덜어드리지 못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시간을 채우기에 급급했는지 모른다. 마리아 수녀님께 물었다. “환자 가족으로서는 후회 없이 끝까지 치료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언제쯤 환자를 위해 호스피스를 선택하는 게 옳을까요?” 수녀님은 이를 현실적으로 설명하셨다. “호스피스(통증완화 의료)를 선택하기 어렵게 하는 것은, 우선 환자와 가족들이, 더 이상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의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또 ‘호스피스’가 곧 환자를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지체하게 만듭니다. 사실 호스피스가 암을 없애지는 못하지만, 다른 시술을 동시에 진행합니다. 요즘은 완화의료의 수준이 높아져서 환자에 따라 치료와 여러 요법이 병행되는 추세입니다.” 나는 호스피스 병동에 계신 의료진을 비롯하여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의 헌신을 보며, 일찍 이곳에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했었다. 상상할 수 없는 죽음 너머의 여정을 준비하는 일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워야 하는 과정이지만 고되고 슬프다. 그러나 호스피스가 아름다운 동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신 분 중에 특히 기억나는 사례가 있는지 궁금했다. “인상적인 분이 계세요. 여자분이셨는데, 죽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셨어요. 본인이 담배도 안 피우는데, 폐암에 걸렸으니 오로지 가족 탓만 했고, 오자마자 의사의 처방 약을 일부러 골라냈으며, 병실에서도 나체로 있으면서 신부님들의 방문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사연을 들어 보니 가는 병원마다 의료 거부를 해서 결국 여기까지 온 거였습니다. 어쨌든 저희는 ‘이분을 끌어안자’라는 결정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분 때문에 한계가 온 적이 있었어요.” “‘하느님, 저런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도움도 받아들이지 않고.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당신께 맡겨 드리는 수밖에 없네요.’ 이렇게 기도하고 회진을 도는데 그분이 갑자기 제 손을 잡으며 잠깐 보자고 하는 겁니다. ‘수녀님이 말하는 그분이, 제 꿈에 나타나셨다’면서요. 저도 뵌 적이 없는 주님을 말이에요! ‘이름은 몰라요. 그냥 수녀님이 믿는 그분이에요. 지금 그분과 제가 겨루며 맞짱을 뜨고 있거든요’라며 고백을 하는 겁니다. 이 순간 제 역할은 사라집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니까요. 저는 이분을 통해서 하느님이 인간 내면의 깊은 속을 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중에 가족들과도 화해를 잘하시고 가셨습니다.” 수녀님은, 여러 가지 진료 데이터를 통해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분들은 지상에서의 편안한 마무리를 위해 1인실로 이동한다고 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임종을 앞두고 이틀 동안 고통 속에 아파하셨다. 아버지가 내쉬는 숨은 고스란히 병실에 있는 아들들에게 전해졌고, 아버지도 아들들의 숨을 호흡하셨다. 숨을 나눈 이들이 바로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내내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곳에 오지 못한 한 분. 엄마였다. 그러나 나는 치매로 요양원에 계신 엄마에게 아버지의 임종을 알릴 수 없었다. ‘어머니 걱정은 마시고 편안히 가시라’는 말씀을 드리자, 뜻을 아셨는지 오랜 기다림을 놓으시고 주님께로 돌아가신 아버지. 이 순간 무슨 긴말이 필요하겠는가. 기억은 언제나 짙은 후회를 남긴다. 그렇기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평소에 해두어야 한다. 그래서 이 기회에 나는 마지막 소원을 다시 말해볼까 한다. 나의 장례식에는 솜사탕이랑 시골 장터 핫도그를 팔았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했던 음식들을 크리스마스 마켓처럼 판매하고, 20살 때 들었던 음악이 흐르는 1일 찻집을 열어 잠시 소유하던 물건들을 경매로 팔아 수익금 전체를 아픈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했으면 좋겠다. 그럼, 아이들이 나의 장례식을 덜 무서워하지 않을까. 대신 이걸 다 준비해야 하는 분들은 냉담할지 모른다. 그래도 아름다운 이별 잔치로 어떠한가… 아니다. 됐다. 이제껏 살아온 모든 순간이 더 좋지 않아도 감사할 뿐. 세상과의 이별로는 더없이 충분할 것이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주님, 또 가야 합니까?’

“저에게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라는 좋은 스승이 계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어요. ‘이 신부 기도하는가?’ 그러시면 맨날 뒤통수를 긁으며 ‘잘 못합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기도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네. 그런데 30분이라도 성찰이 몸에 배어 있으면, 마음이 이슬 맺힌 풀잎과 같네. 주님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바라지 않고 머물러 있기만 해도 그렇네.’ 이 말씀을 들을 때 추기경님이 나보다 훨씬 바쁘신데, 나는 왜 기도하지 못할까? 생각했습니다.” 지난 8월 마지막 토요일, 나는 한 사제의 은퇴미사가 있는 성당으로 향했다. 42년 간의 사제 생활 중 20여 년을 군종사제로 살아온 이성운 미카엘 신부님은 신자들을 1층 로비에서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맞이하고 계셨다. 나는 세 번의 군 생활을 하신 신부님의 특이한 사목 이력이 궁금했었다 첫 번째 군 생활은 1975년 해병대 293기 입대였다. 그 후 사제가 된 그를, 교회는 두 번째 군 생활인 군종사제로 부대에 파견한다. 군종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장교 훈련을 똑같이 받아야 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꼭 꾼다는 악몽이 바로 ‘재입대하는 꿈’인데, 신부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세 번째에 해당하는 군 생활을 다시 하게 된다. 신부님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1989년 11월이었어요. 저는 대위로서 4년 간의 군 사목을 마치며, 정든 장병들과의 송별미사도 다 마치고 그랬는데, 당시 군종교구장 주교님이 장기 복무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교님, 이제 와서 왜 그러십니까? 안 됩니다. 밖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했지요. 물론 여러 신부님이 그런 제안을 이전부터 했지만, 거절했었습니다. 그리고 전역 신고도 드릴 겸 교구로 가서 김수환 추기경님께 인사를 드렸지요. 그런데 그날 뵐 때 느낌이 좀 이상했습니다. 갔더니, 추기경님께서 갑자기 그러시는 겁니다. ‘이 신부, 참 고마워~ 어려운 결정 해줘서. 군종교구장 주교님을 통해서 들었어.’ 기뻐하시는 추기경님 앞에서 ‘예?’ 하는 반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교회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망연자실 아무 말도 못 했지요. 그냥 집에 가서 끙끙 앓기만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안 되겠지만, 제 의사와 상관없이 전역이 취소되고 하루아침에 그렇게 세 번째로 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군종후원회 일을 계속했으니, 그것까지 합하면 네 번째까지 군 사목을 한 것일 수 있겠네요.” 나는 그 당시의 신부님을 한 번 떠올려 보았다. 한 사제로 살면서 꿈꾸던 일이 바로 ‘가난한 청년·청소년들을 위한 사목자’였는데 예기치 않게 세 번째 군 생활을 다시 해야 했을 때, 신부님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속에서 불이 날 텐데… 즉시 ‘예!’라고 답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아무리 천사의 소식이 기쁘다 하여도, ‘재입영통지서를 들고 오는 천사’라면 이는 악몽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성모님도 가브리엘 천사 앞에서 바로 답하시기 전에 곰곰이 새겨 보셨다고 성경은 전한다. “‘교회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는 휘몰아치는 마음에 힘들었습니다.” 그때의 힘겨운 상황을 신부님은 생생히 기억하고 계셨다. 그러나 이분을 그렇게 전역 취소까지 시키면서 군 사목자로 두고자 했던 당시 교회의 결정 또한 쉽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난 신부님은, 남달리 장병들에게 잘하셨다는 말을 주변으로부터 자주 들었고, 교회와 어른들을 각별히 공경하는 분이셨다. 피하고 싶은 일을 순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 한 인간의 고뇌는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군종교구장 주교님의 결정에 순명하셨다는 사실을 보면, 원치는 않으셨지만 군 사목 안에 분명 신부님의 오랜 소망 가운데 하나였던 ‘가난한 청년들을 위한 헌신’이 이미 이뤄져 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였다. “속으로 곪아갔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 춘천교구 동창 송병철 야고보 신부님이 같이 있으면서 이런 저를 자주 위로해 줘서 안정을 찾았지요. 그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여기로 보내신 것은 무슨 뜻이 있지 않을까?’라는…. 그때부터 하느님의 뜻을 찾기로 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 있는 후배 군종 사제들을 잘 챙기고 돌봐주는 게 내 부르심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서요.” 누군가는 자신의 군 생활을 떠올리며, ‘신이 버린 땅’, ‘군견들이 낙오하는 땅’ 등 평생 쳐다보지 못할 자리로 치부하는 게 바로 군대 생활이라 했지만, 신부님은 ‘몸과 마음이 고단한 청년들이 있는 곳이 바로 군대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방식은 참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기도는 매번 이뤄지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이뤄졌다. 신부님의 은퇴미사에는 많은 사제와 신자가 오셨다. 나는 생각한다. 이 순간 은퇴 사제를 위해 그동안의 노고를 ‘축하’ 해드리는 게 먼저인지, 아니면 마지막 본당을 마치시는 뒷모습을 아쉬워하며 슬퍼해야 하는 것이 우선인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신학생이던 시절에, 할아버지 신부님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사제는 한 번 떠난 본당을, 다시 찾아가지도 말고, 그 신자들을 따로 만나서도 안 된다’라고. 이유인즉슨 ‘떠난 사제에 대한 추억이 너무 깊으면, 새로운 사제가 본당 사목을 하기 어렵다’는 연유에서였다. ‘뭐, 그렇게 빡빡하게 구는가?’라고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배워왔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떠난 사제는 이전 본당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숨기고 살아가겠지만, 본당의 신자들에게 사제의 마지막 미사는 어떤 의미일까?’라는 생각. 분명 아쉽고 그리울 것이다. 한 사제와 인생 중에 만난 시간은 큰 인연일 테니까. 그리고 떠나는 사제를 눈물로 보낸 몇 분 후에, 바로 새로 부임한 사제를 향해 웃으며 환영하는 것 또한 인생의 순리라는 것을 신자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은퇴미사 후에 통화를 하게 된 신부님의 목소리는 밝았다. 큰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안긴 어린이처럼. 그분의 뜻을 따르는 순명이란 대체 무엇일까. 피하고 싶던 인생의 물살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은총의 물길을 깨닫는다. 순명에는 은퇴가 없듯이, 이성운 미카엘 신부님은 또 다른 부르심에 오늘도 응답하고 계셨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22년 만의 대화(하)

‘너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가난도 고독도 그 어떤 눈길도’(피천득 시(詩) <너는 이제> 중) 턱 위에 하얀색 수염 두 가닥이 처음으로 올라왔다. 허락 없이 세월은 잘도 간다. 나는 지난번 칼럼에서 22년 전 뵈었던 금아 피천득 프란치스코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소개했었다. 질문은 그 사람의 의도를 드러낸다. 왜 그때 나는 ‘성직과 예술을 병행할 수 있을지’에 관해 물었던가. 여러 대화 속에 선생님은 ‘나 자신을 절대 팔아서도 버려서도 안 된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60여 년을 보살피던 딸 이름의 인형 ‘난영이’까지 보여주시면서. 선생님은 인기와 죽음에 대한 말씀도 하셨다. “인기라는 게 참 우스운 거예요. 정당한 눈으로 보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결국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봐요. 누구나 사람은 한 번 가는 건데, 돈 많은 사람들도 그것 때문에 갖은 죄를 다 짓고 못 할 짓을 다 하고 그럽니다. 죽음 앞에서 다 놓고 갈 뿐인데 말이죠. 죽음은 아직 미지입니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게 있다고 믿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증명할 수는 없는데,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요.” 녹음하던 당시 나는 안식처를 찾고 있었다. 오랜 수고와 어두움을 벗어나 쉴 수 있는 자리. 타인의 시선으로 대화 녹음본을 듣다가, ‘하고 싶은 말을 망설이는 나’를 기억해 냈다. 질문 속에 가려진 이야기들. 선생님은 대화를 이끄시면서 내 마음을 서서히 열고 계셨다. 질문자와 답변자가 바뀌는 시점. 그러나 나는 입안에서 맴돌던 진심을 말하지 못했다. 녹음이 중반을 넘어서자, 선생님께 “글을 쓰시다가 절필하면 답답하지 않으시냐?”고 여쭤보았다. “누구나 글쓰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계는 양심적으로 자신이 판단해야 하지요. 대개 작업을 중단하기가 그래서 참 어려워요. 쓰던 글을 안 쓰면 세상에서 망각되는 걸로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자기가 쓴 작품을 더 이상 따라가지도 못하고, 기존 것만도 못한 것을 되풀이해서 씁니다. 서양에는 그런 말이 있어요.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술을 먹든지 아니면 침묵을 지키든지.’ 저는 술을 못 먹으니까 안 쓴다고 한 거고요. 글을 안 쓴 지가 오래됐어요. 그래도 소위 문운은 있어서 그런지 책이 팔리지만, 그 책들도 30년 전에 쓴 겁니다. 가끔 시 몇 편도 썼지만, 안 쓴 지가 10년이 되고요.” 그동안 문학과 인생에 관해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답을 주셨을 것이다. 금아 선생님의 절필은 작가의 근본적인 성찰에서 나온 결과였다. 한계의 선과 나를 포기하는 용기. 미사 때마다 강론해야 할 때 나는 기도보다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글쓰기로 대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강론하는 것도 어렵지만 말씀을 듣는 이들은 또 어땠을까. 그저 신앙의 신비와 착한 교우들 덕분에 살아가는 인생. 나도 이참에 선생님 흉내를 내며 강론 절언이라도 해야 하나 싶어 쓴웃음이 났다. 이런 답을 들으시면 특유의 ‘음~’하고 입소리를 더 크게 내시며 웃으셨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삶의 스승이 되는 분들께 자주 ‘삶이 고단한 이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해달라고 청을 드린다. 그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저는 일제강점기를 겪었어요. 지금은 비가 오고 늘 비가 올 거 같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이 세상에는 좋은 게 더 많거든요. 좋은 사람이 더 많고 암만 나쁜 사람도 종일 나쁜 생각만 가지지는 않아요. 앞으로 가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니까. 좋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이렇게 우주가 질서 있게 돌아가는 걸 보면 이게 그냥 우연은 아니지요. 지금 당장 고통이 있더라도, 하느님을 믿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금아 선생님이 계실 때보다 모습을 달리하면서 아픔이 많아졌다. 타인에 대한 연민의 마음은 커질 수 있는데, 다들 자신만 돌보느라 그 자비로운 마음에 소홀해지고, 점점 더 하느님보다 세상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산다. 나는 나침반이 알려주는 인생의 방향보다, 황금으로 된 나침반 바늘에만 관심을 두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난 그때 사제품을 앞두고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쭤봤다. “저는 그렇습니다. 사람이 먹고 입고 해야 하지만 건강하면 됐지 싶어요. 세상에 그렇게 욕심을 내면 벌써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간 20년이 넘는 세월을 어떤 사제로 살아왔나 돌아보았다. ‘가난’이 목적이 아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살아온 만큼 똥고집에 가까운 자기 확신만 쥐고 살았던 게 아닌가 해서 마음이 씁쓸했다. 녹음본이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부제님이 저에게 사람에 대한 욕심과 아름다운 이들에 대한 미련이 있다고 했지요. 그건 ‘정직한 마음’입니다.” 여기까지 왔을 때 22년 전에 ‘하고 싶었던 질문’이 드디어 떠올랐다. 천국에서 뵙게 되는 날 선생님께 다시 여쭤볼 수 있을까. 그때 금아선생님이 ‘예술과 성직’은 병행할 수 없으니, 둘 중에 하나만 골라야 한다고 하셨다면 어땠을까. 답이 없는 문제로 불안했던 그 시기. 인생의 길을 결정하기에 스물여덟은 미숙했다. 나는 첫 질문을 이렇게 했어야 했다. 좀 더 솔직하게 “예술만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요?”라든가 아니면 좀 더 절실하게, “선생님, 제가 다른 길을 선택하더라도 하느님은 저를 사랑하실까요?” 아니, 더 단순하게, “이 길이 제게 맞나요?”였을지 모른다. 그러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내가 아는 선생님은 아마도 그 답을 ‘신비’로 남겨둔 채, 침묵하셨을 것이다. 그건 하느님의 몫일 테니까. ‘아빠는 운동장에서 종 칠 때를 기다렸다.’ 이 문장은 선생님의 시 ‘기다림’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나는 이제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인생의 고단한 짐을 내려놓는 마지막 그날, 자녀의 하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느님은 나를 반겨주시리라. 그리고 조용히 물음의 답을 해 주실 것이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9-28 제3460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22년 만의 대화(상)

“인연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피천득 , 「인연」) ‘비가 내리는 8월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22년간 품어왔다.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언젠가 소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인연>이라는 수필을 비롯하여 서정적인 철학을 글에 담아 오신 금아 피천득 프란치스코 선생님을 뵈러 가는 길은 여름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부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 산 양복과 구두는 뻣뻣했고, 당시에 인생의 불안과 걱정은 영혼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초인종을 누르자, 선생님은 ‘여기까지 방문해 주셨냐?’라며 반기셨다. 오래된 성경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전해지는 경건한 종이 향처럼, 두 손 모아 기도하시는 선생님의 주름진 손등을 나는 기억한다. 인터뷰 당시 긴장한 탓에 어떤 질문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의 녹음은 공개되지 않고, 20여 년이 흐른 채로 나를 기다리고…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는 건, 고해성사 전 성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했던 질문들이 지금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일까. “고민이 있습니다”로 시작된 질문들은 이랬다. “선생님. 사제로 살아야 하는데, 예술과 함께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또 “집필하실 때 어떻게 준비하시나요?”,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이 있으신가요?", “30여 년 전 절필을 하셨다는데, 아쉽고 힘들지는 않으신지?" 그리고 인생의 외로움까지. 사제품을 앞두고 쏟아낸 한 부제의 질문들이, ‘구순의 선생님을 지치게 하지는 않았을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고민이 있습니다. 금아 선생님. 사제로 살아가야 하는데,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글 쓰는 일도 그렇고요. 병행해도 될까요?” 이게 첫 질문이었다. 글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 순수하게 성직을 해 나갈 수 있을지 묻는 소년 같은 물음. 따뜻한 눈빛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제가 아는 신부님은 그림만 그려요. 그림 그리는 걸로 성직자의 본분을 한다는 거지요. 아주 고운 색채를 쓰세요. 그분은 ‘그림 그리는 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림과 색채를 통해서 하느님을 섬긴다’고 그러세요. 또 어떤 분은 성당의 유리화 작업을 하세요. 그분도 성직자세요. 그러니 성직과 예술은 함께할 수 있습니다. 글 쓰는 것을 성직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성직으로 생각하시고요. 바흐, 헨델, 베토벤도 음악을 거룩한 성직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런 음악이 나올 수 없어요. 그건 아주 정확한 거예요.” 어쩌면 그때 선생님의 시를 읽고 갔더라면, ‘시를 쓰실 때 가슴이 뛰시는지’ 여쭤봤을 것이다. 그저 쉽게 대가의 글쓰기 방법을 배우고 싶어서였을까. “아니요. 그건 무슨 방법이 없어요. 소위 ‘법칙이 없는 법칙’이지요. 글에는 이래야 한다는 게 없어요. 저는 많이 쓰는 타입이 아닙니다. 하루에 조금씩 썼어요. 그야 뭐 날마다 쓰지 않고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서 썼지요. 그러니까 아까 말한 것 같이, 무슨 법칙이라는 게 없는 거예요. 물론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소설가들은 밤새 집필을 합니다. 자기 습관으로 쓰는 거지요.” 나는 여기서 녹음파일 청취를 잠시 멈춰야 했다. ‘과연 대화를 통해 나는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서품을 앞둔 젊은 그 시절 나에게 묻고 있었다. 대화 녹음은 들으면 그럴수록 켜켜이 쌓인 기억을 들춰낸다. “여러 작가의 글을 보셨을 텐데요. 좋은 글의 기준이 있으신가요?” 순간 나는 질문들의 결이 같아지는 걸 느꼈다. 선생님은 답하시기 전에 ‘음~’하고 그윽한 소리를 자주 내셨다. “음~ 그건 금방 보면 알지요. 기준은 진실성입니다. 글은 진실되어야 합니다. 일부러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누가 그 어려운 글을 읽나요? 이상스럽게 써도 그래요. 진실되고 참되게 쓰는 게 중요합니다. 읽는 사람이 ‘이게 무슨 글인지 모르겠다’고 위화감을 느끼면 되겠어요? 또 우선 재밌어야 합니다. 바쁜 세상에 누가 재미없는 걸 읽어요? 그리고 내면이 따뜻하고 그래야지요. 마치도 사제가 제단에 올라가는 기쁨과 정성으로 미사를 봉헌하듯 그렇게 글을 대해야 합니다.” 대화가 무르익자, 딸의 이름을 가진 ‘난영이 인형’을 보여주셨다. “… 인형이 이제 육십이 넘었어요. 하하하! 육십이 넘었는데 제가 목욕도 시키고 옷도 갈아입히고 그래요. 이건 잘 때 덮는 이불이고요. 저녁이면 눈을 감지요. 낮에는 다시 앉히고요. 또 이게 장난인데 옆에 있는 새끼 곰 인형에는 밤에 안대를 가려주고 아침에는 벗겨줍니다. 이렇게 누가 보면 장난하는 것처럼 살아요.” 오래된 녹음을 들을수록 나는 부끄러워졌다. 금아 선생님은 처음부터 솔직하고 담백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망설이며 하고 싶은 질문을 위해 용기를 내지 못하고 빙빙 말을 돌리고 있었다. 다시 뵙게 된다면, 바로 말씀드릴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을 아셨는지 이어지는 말씀에는 마음이 녹아 있었다.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참되게 존경해야 합니다. 자신을 존경하고 남에게 자기를 존경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물건이 뭐든지 버릴 수 있어도, 나 자신만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 이해하시나요? 나 자신만은 누구에게도 줘서는 안 되고. 무엇에 팔지도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돌아가신 분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시간은, 어느새 아득한 세월을 메우고 오늘을 사는 나에게 다시 묻고 있었다. “신부님, 어떠세요? 사제로 20여 년 살아보니 거기에 구하던 질문의 답이 있던가요?” 아니요, 선생님. 저는 아직도 질문들만 가득합니다. ‘왜 나이를 먹으면 그럴수록 지나간 이들이 그립고, 기억하면 더 아픈 건지.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세며 여전히 오늘을 살아야 하는 건지….’ 이제야 입안에 맴돌던 질문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9-14 제3458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아직도 사랑인가

어둠이 스며들기 직전, 우리가 탄 차는 노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주일학교 어머니들은 헌신적이었다. 아이들의 여름 캠프 저녁 식사를 위해 6시간 이상 도로에서 보내고 돌아오는 길. 묵직한 침묵을 깨고 나는 물었다. “사춘기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세요? 많이 힘드시죠?” 답이 없는 물음에 각자는 기억을 떠올리고… 나 또한 얼마 전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밥 먹자’고 했다가, ‘바쁘다’며 거절당했던 일이 생각나 공감을 원했는지 모른다. 어머니들은 어느새 커 버린 자녀들이 자신의 손목을 잡으며 거부 의사를 드러낼 때 상실감이 크다고 했다. 이럴 때는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른다’고 했고, 또 ‘자녀들에게 손목이 잡히면 발로 휘젓는다’고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풍경을 이루던 논과 밭은 흩어지고 어둠이 출렁인다. “신부님, 앞으로 애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참 답답해요. 말을 잘 안 듣거든요.” 어머니의 입가에는 가볍지 않은 한숨이 흘렀다. 2003년 제작된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영화 <리턴>이 있다. 영화는 12년 만에 어린 형제에게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로 인해 차가워진 집안 풍경을 보여준다. 낯선 아버지는 형제와 친해지기 위해 낚시 여행을 제안한다. 강압적이며 직설적인 아버지의 성격은 형제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 속 아버지는 단순히 개인이 아니며, 인간이 늘 갈망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권위적 존재’라고 설명했다. 나는 이미 아이들보다 부모들의 이야기를 상대적으로 많이 들어, 자녀들의 그런 행동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들이 안전하게 어른이 되어 주길 바랄 뿐. 그러나 이 또한 어른이 만든 인생 설계 중 하나일지 모른다. 나는 어느 편에도 만족스러운 답을 줄 수 없다는 걸 고백한다. 다만 어른들도 베푸는 사랑만큼 ‘존중’을 받고 싶어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무례함’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그건 자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풍경을 볼 틈도 없이, 어둠 속을 달리는 차 안에서 답까지는 아니어도 문고리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들자, 청소년들과 함께했던 돈 보스코 성인이 떠올랐다. 그분이시라면 답을 아실 텐데…. 성인의 영성을 따르는 살레시오 수도회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이시라면 뭔가 알고 계실 것만 같았다. 얼마 전 후배 시몬 신부는, 수도회에서 어릴 때 축구했던 이야기를 했다. 시골 삼촌처럼 구수하게 말씀하시며 놀아 주시던 양 신부님을 기억한다고. 축구 이상으로 아이들은 그때 존중받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사고뭉치 아이들과 함께 뒹굴며 수도 생활을 한 지 42년 차인 양 신부님께 바로 연락드렸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다정한 목소리. 나는 그 시절 축구 이야기를 비롯하여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알고 싶었다. “제가 그때 어려운 친구들을 대했던 마음은 돈 보스코 성인이 말씀하신 ‘환대의 영성’이었습니다. 성인은 이탈리아 고위층이 오든, 뒷골목의 부랑아가 방문하든 똑같은 모습으로 환대하셨지요. 가난한 청소년이 와도 상석에 앉히고 대화에 경청하며 인간에 대한 존중을 표하셨습니다. 아마 저도 축구할 때, 그런 차별과 사심 없이 그들을 대하려고 했을 겁니다.” 지난해 여름, 피정 센터 식당에서 설거지하던 모습으로 처음 뵈었던 양 신부님께, 어느 순간 나는 부모 측의 변호사가 되어 말썽꾸러기 아이들의 죄를 묻고 있었다. “신부님. 부모들이 어떻게 아이들을 대해야 하는지 현실적으로 자주 묻습니다. 무턱대고 그들이 변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는 걸까요? 오늘날 청소년들을 대하실 때도 여전히 ‘사랑’이라고 말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아직도 나는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 청소년들이 문제’라고 내심 답을 내고 있었다. 양 신부님은 말을 끝까지 들으셨다. “그렇지요. 맞습니다. 가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의 청소년들이 며칠 동안 충남 태안에 있는 살레시오 피정 센터로 옵니다. 제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아이들을 보면, 존재 자체로 살아 있는 게 ‘고맙다’는 생각이 더 듭니다. 딱하기도 해요. 보통 아이들이 여기 오면, 먼저 전지작업이나 배수로 작업을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다 같이 놀러 다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아이들이 어려운 시대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중 2인데 ‘희망이 없다’고 그럽니다. 들어보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부모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우울한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영화 <리턴>의 감독은, 영화 속에 여러 회화작품이 떠오르는 구도를 설치해 두었다. 특히 12년 만에 돌아온 낯선 아버지가 낮잠을 자는 첫 장면은, 안드레아 만테냐의 명화 <죽은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죽은 예수님에 대한 해부학적인 묘사와 인물에 극적인 원근법을 사용해 유명한 작품이다. 이 장면은 ‘아버지’라는 영화 속 인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복선이기도 했다. 형제는 통제 불가능한 세상 속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마주하고 갈등하다가 다시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 성장한다. 그 모습이 신 앞에 선 인간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청소년들의 변호사처럼 그들의 마음을 읽어 주시는 양 신부님은, 어른들의 마음도 이해하고 계셨다. “세상은 청소년들을 ‘평가’만 하려고 합니다. 급격한 사회의 성장 속도에 따라갈 수 없는 청소년들은, 말썽꾸러기처럼 행동하고 희망 없이 살아가기도 합니다. 세상 ‘최고의 가치’는, 최첨단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인 것 같아요. 살면서 ‘무엇인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기쁨과 동시에 고통과 상처가 동전의 양면처럼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왕 이를 너그럽고 관대하게 받아들이면 축복이 되는 것이지요. 그 존재의 약점과 실수, 병고와 죽음까지…. 진정한 관계는 그의 삶 전체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자녀가 부모의 세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일지 모른다. 그래도 그 여정 안에서 ‘더 솔직한 대화로 덜 아프게’ 가족은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불쑥 이런 질문에 사로잡혔지만, 묻지 않았다. 세상엔 갈등 없이, 아픔 없이 오는 그런 행복은 없다. 다만 이를 위해 더 깊이 사랑하는 아픔의 길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 뿐.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 (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8-31 제3456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여러분의 본당신부’가…

하느님의 벗 테오필로스 님. 한국은 무척이나 덥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무더위가 불행은 아니지만 불편하고, 그 때문에 힘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날씨에 임병헌 베드로 신부님이 계시는 성당으로 모금을 다녀왔습니다. 올 8월에 은퇴하시는 임 신부님을 저는 교수와 제자로 신학교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사실 한 사제가 마지막 본당을 떠나게 될 때, 교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모금과 같은 일들은 줄입니다만, 이번엔 간절히 청을 드렸습니다. 저도 모르게 이런 표현까지 썼지요. “저희 본당은 모금보다 신부님의 위로가 더 필요합니다.” 테오필로스 님, 절실하면 모든 게 통하는 걸까요? 바라고 원하는 것을 아는 건 행운입니다. 여전히 저는 ‘길’을 찾고 있었고, 흔들리지 않는 사목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내심 위로도 바랐던 모양입니다. 동료 신부들 사이에서 임 신부님은, 은퇴하시기에 아까운 분이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교우와 사제들에게 더 가까이 계시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지요.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신학과 1학년 시절, 유난히 기억에 남았던 문장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비구원의 상황이고, 교회는 구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 성인들처럼 잘 살고 싶어 앞만 보고 달렸던 제가,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세상은 비구원의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에 ‘무관심’해 보였습니다. 교회는 거침없이 변하는 세상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테오필로스 님. 저는 그래서 비결을 찾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쯤 찾아온 가을 어느 날 신학교 운동장에서, 장교처럼 선글라스를 쓴 분이 신학생들의 축구 경기를 보고 계셨습니다. 친구들은 신학원론 과목의 임 신부님이라고 했지요. 충청도 억양이 살짝 섞인 큰 음성은 수업 시간에 졸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선지 강의 시간에 들었던 그리스어 ‘Crisis’(크리시스)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지요. ‘위기’를 뜻하는 이 단어는, ‘위기의 상황’이 때때로 결단의 순간이며,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수업을 들으니 ‘교회도 세상 앞에서 이제 당당히 희망을 외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지요. 테오필로스 님. 저는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분처럼 즐거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요? 신부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으니, 은퇴하시기 전에 그 비결을 꼭 알아볼 작정이었습니다. 모금을 위해 성당에 도착한 시간이 토요일 오후 4시경. 어쩌면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광화문을 방문하셨을 때 무전기를 들고 교구 행사를 뒤에서 지휘하시던 사무처장 시절의 모습을 은근히 저는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마침, 주일학교 미사가 끝나 있었습니다. 꼬마들은 성당 문을 나오며 신부님 품에 있는 사탕 통에 손을 넣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사춘기 친구들도 한순간 강아지처럼 응석을 부렸지요. 테오필로스 님도 아시겠지만, 아이들은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에게만 이런 행동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럴 수 있을까요? 저도 배우고 싶었습니다. 신부님은 주일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이라는 주보 편지를 게재하셨습니다. 말씀으로는 당신이 주일미사 때, 모든 교우와 만날 수 없어서 본당 행사를 소개하고 안부를 물으신 거라고 했지만, 사목자의 연애편지 같은 글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습니다. 이 교우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편지 끝에는 ‘여러분의 본당신부가’라고 매번 쓰셨지요. 왜 그렇게 쓰셨는지에 대해 여쭤봤습니다. 수줍은 미소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한결같이 가르쳤습니다. 사목자는 교우분들을 위해서 존재하려고 온 거라고. 제가 오기 전부터 여기 교우들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 여정을 계속 걷고 있으셨지요. 그저 이분들과 함께 이 순간을 걸을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본당에 있는 신부’라는 표현을 했고, 동시에 ‘여러분의 목자’라는 뜻에서 글 끄트머리에 그런 표현을 쓰게 된 것입니다.” 테오필로스 님, 저는 보물의 문 앞에 선 모험가처럼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비결을 쥘 수 있을 것 같았지요. “신부님은 본당에 계시면서, 자신만의 사목 철학 내지는 구체적인 기준들이 있으신가요? 이를테면 신자들 앞에 절대 화를 내지 않는다든가, 입관식에 꼭 참석한다든가.” 그러나 임 신부님은 오히려 평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통해 저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려고 했지요. 세상살이는 참 바빠요. 그래서 만나는 이들에게 ‘너 얼마나 지치냐? 본당에 와서 주님 곁에서 그냥 쉬어라’ 합니다. 그래서 졸든지, 딴생각을 하든지, 상상을 하든지 주님 곁에 그대로 머물게 합니다. 그럼 그러다가 마음 안에 한두 마디 들리면, 그렇게 살면 되고요. ‘그동안 고생했지? 여기서 숨도 고르고 쉬었으면 또 한 주간 가서 고생해라’라는 마음으로 말합니다. ‘파견과 부르심 그리고 머무름 또 파견’이 반복되는 곳이 바로 성당입니다. 저는 그랬습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 동안 머무는데 사목자가 화를 내면 안 되지요. 따뜻한 격려와 위로를 주려고 했습니다. ‘버릇을 고쳐준다?’ 다양성의 시대에서 사목자가 모든 것을 소유한 양 가르치는 건 불가능합니다. 삶의 결정은 누가 해야 하나요? 본인들이 하게 하는 거지요. 택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이런 삶으로의 초대 속에서 기운 내 다시 살아보자고, 저는 늘 말해 왔습니다.” 일요일 마지막 모금 미사가 끝나자, 청년들은 신부님을 모시고 성모상 앞으로 가서 여러 자세로 단체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은퇴를 앞둔 분과의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겠지요. 그 몸짓들은 한마디로 ‘자꾸 더 보고 싶어질 것 같다’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공경하올 테오필로스 님. 임병헌 베드로 신부님을 통해서 제가 찾았던 사목의 보물은, 손자병법 같은 비결이 아니라 이미 배운 주님의 그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시선과 손길 그리고 따뜻한 숨결까지. 이제 이 사목자, ‘여러분의 본당신부’는 은퇴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들 곁에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 (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8-17 제3454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기억 저 깊은 곳에(하)

미리 말해 두자면, 지난 칼럼 ‘기억 저 깊은 곳에’ 상편을 읽지 않았더라도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나는 소셜미디어에서 ‘밀라논나’라고 불리는 장명숙 안젤라 선생님(이후 밀라논나 님으로 칭함)과 이야기를 나눴고, 그 대화 중에 당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 특히 무관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가 작품을 통해 형상화했던 엄마에 대한 양가감정에 대한 것도 적었다. 밀라논나 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나에게 질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상처가 넘쳐난다. 나는 먼저 물었다. 힘든 상황에 있는 청년들을 어떻게 보시는지. “제가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권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오늘 하루는 성실하게 살아. 하지만 내일은 하늘에 그냥 맡겨!’ 아무도 몰라요. 저는 삼풍백화점 고문으로 있었는데, 퇴근하고 그 다음 날 그곳이 무너졌거든요.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다만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오늘만 잘 살면 되지요. 오늘 하루 당신이 하는 게 즐거우면, 그냥 하라고 자주 말합니다.” 소셜미디어에서 나는 선생님의 아침 일상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자리에서 눈뜨자마자 손에 쥔 묵주로 기도를 바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 영상을 통해 가톨릭 신앙을 모르는 젊은이가 ‘세례를 받았다’는 댓글을 달자, 무척 기쁘셨다고 했다. “저는 다니는 성당 주변을 함께 청소해 주는 조건으로 세례 대모(代母, Godmother)를 서 주곤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기도가 ‘사도신경’이에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어떨 때는 그런 생각까지 들어요. 하느님은 왜 저를 이렇게 만드셨을까 하는. 제 어린 시절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잖아요. ‘하느님, 당신이 저를 우리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하셨잖아요. 그래서 구박을 받고 살았던 게 아닌가요?’ 솔직히 이런 식으로 하느님과 대화를 많이 한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 주님께 드리는 기도로 승화시켜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분노가 강했던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작품 <엄마>(Maman, 1999)를 통해 모성에 대한 양가감정을 9미터의 거미 형상으로 표출했다. 엄청난 크기의 거미 조각상은 알을 품고 있었으며, 긴 다리로 알들을 향하는 어떠한 접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보였다. 아버지의 불륜을 참았던 어머니를 향한 냉소와, 안전한 삶을 지키고 싶었던 작가의 희망이 작품에는 녹아 있었다. 후기 작업에서 작가는 ‘엄마’라는 존재를 이상적으로 꾸미거나 비판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 자체로 보고 용서하며 품고자 했다. 나는 작가 루이스 부르주아와 밀라논나 님의 사연을 들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왜 내 생일이 가까울수록 불안해했고, 엄마에게 더 차갑게 대했던가. 태어난 존재를 축하하는 첫 번째 생일 케이크를 스물다섯 해가 지나서야 받아보았다는 게 그 이유였나’. 엄마가 해 주길 바랐다. 언제나 제사음식으로 내 생일을 축하하던 가족들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무심해서 지나쳤다. ‘하기야 그게 뭐 대수라고 혼자 케이크를 사 먹으면 되지’ 싶기도 하다. 속 좁은 아들은 여전히 인생 첫 번째 생일 케이크를 놓친 엄마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움은 인정과 그리움에서 온다는 사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본다. ‘엄마를 미워할 권리가 자녀에게 과연 있을까. 상처라면 그녀가 받은 것이 더 클 텐데….’ 서운하면서도 그리운 이름. 밀라논나 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이미 용서하고 계셨다. “나이 드신 어머니는 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셨어요. 이건 하느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하느님. 제가 어머니한테 착한 딸이라는 인정을 받게 해 주세요.’(여기서 길게 한숨을 쉬셨다.) 저는 그래서 어머니한테 더 잘해드린 거 같아요. ‘나에게 미안하게 해야지’하고 결심했나 봐요. 어머니가 낙상하시고 7년 정도 병상에 계시다 그 충격으로 치매가 오셨어요. 그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꼭 가서 챙겨드렸지요. 요양원도 집 근처로 해서 자주 뵈었고요. 어머니가 정신이 드실 때면 저에게 깊이 사과하셨어요. ‘너는 참 착한 딸이었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어.’ 누구나 임종의 순간이 오면, 원래 마지막까지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린다잖아요. 그게 바로 저였어요. 저를 보신 후에야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상처는 영혼을 떠다니게 한다. 다만 용서와 사랑만이 이를 잠재울 뿐…. 나는 저녁 미사를 끝내 놓고, 다시 시작된 두 번째 인터뷰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신 밀라논나 님에게 옷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다.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이나 복식 심리학에 관한 이야기였다. 특히 십자군 전쟁 이후, 중국 복식에 영향을 받은 옷 중 하나가 사제들의 옷인 수단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웠다. 그러나 내가 옷에 관해 물었던 것은, 얼마 전 그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저의 아버지는 지난해 10월 말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지금 중증 치매 2급이고요. 물론 저를 알아보지 못하십니다. 형제는 아버지의 죽음을 아직도 어머니에게 전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버지 장례식 이후, 엄마는 한동안 아주 아프셨다고 해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끈이 부부에게는 연결된 거 같아요.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장롱 속 엄마의 옷들도 제가 사는 성당 신자 분들에게 나눠드렸어요. 지금 입어도 좋은 옷들만 골라서요. 그러던 어느 날, 미사를 하는데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 아들만 알 수 있는 엄마의 진달래 빛 블라우스를, 교우 할머니 한 분이 입고 오셨거든요. 그것은 분명 엄마의 옷이었어요. 치매로 제가 사는 성당에는 오실 수 없었는데 이렇게 옷으로 만나고 보니, 제 앞에 꼭 서 계신 것 같았습니다.” 세상의 엄마들은 무결점의 여신들이 아니었다. 나는 줄곧 밀라논나 님과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이야기를 하며 오랫동안 간직한 엄마의 실수를 지우고 싶었다. 이제 그럴 때도 됐다. 기억의 감옥을 깨고 한 여인을, ‘엄마’라는 이름으로 가두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 순간 솔직히 고백한다. ‘나의 미움은 결국 그리움의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기억은 저 깊은 곳에서 눈을 감으며 나직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이제 다시 사랑하고 사랑해라.’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기억 저 깊은 곳에(상)

저녁 미사 전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언덕 위의 작은 성당에서 장명숙 안젤라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다. 소셜미디어에서 ‘밀라논나’로 불리며,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는 분이었다. 선생님(이하에서는 밀라논나님으로 칭함)을 부르는 애칭 밀라논나는, ‘밀라노 할머니’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에서 비롯됐다. “제가 머리가 하얗잖아요. 하루는 그 방송을 만드는 친구들이, ‘밀라노 논나’라는 채널명을 제안했어요. 거기에 대고 ‘할머니 소리는 싫어’ 하기도 우습고, 그런 것에 저는 자유롭거든요. 그때부터 이 애칭을 쓰게 됐어요.” 영상을 보는 이들은 밀라논나님의 가식 없는 이런 모습들을 좋아했다. 나는 요양원에 계신 엄마가 잠시 떠올랐다. 누군가 엄마를 ‘할머니’라고 불렀을 때의 거북했던 기억과 함께, 몸만큼이나 이 호칭은 엄마를 더 멀리 느껴지게 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세례명도 안젤라였다. 패션의 도시 밀라노에서 밀라논나님이 공부를 시작했을 때 느꼈던 문화적 차이에 대해 먼저 가볍게 물었다. “우선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유롭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것에 저는 무척 놀랐어요. 그리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의 이름을 그냥 부르는 모습에서 ‘평등한 관계가 이렇게 시작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러니 세월이 지나도 서로 트집 잡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했습니다.” ‘내가 살던 밀라노에 이미 계셨구나…’ 우리는 이미 밀라노 중심 스칼라 극장 건너편 있는 고풍스러운 카페에 앉아 있는 듯했다. 질문을 준비하면서 밀라논나님이 출연하신 영상과 책을 먼저 읽었다. 책에서는 장기기증에 관해 쓰신 문구 ‘나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를’ 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저는 이제 살아온 만큼 더 살지는 못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달려만 가던 생각들에서 멈칫 서서는,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를 더 고민하게 되었지요." 나이가 드니 생각도 바뀌는 느낌. "나이 듦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역시 소탈한 표정으로 답하셨다. “저는 그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나이를 어떻게 안 먹나요?! 떡국을 안 먹는다고 나이를 안 먹나요. 잠을 안 잔다고 세월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물결 따라 가는 거지요. 인생을 역행한다는 게 얼마나 흉해요. 사람들이 그래요 ‘염색하면 더 젊어 보일 텐데…’ 젊어 보이면 어쩔 건데요? 연애할 것도 아니잖아요. 이대로의 내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염색을 안 하니까 제일 화를 내시는 건 어머니였어요. 당신은 염색을 하셨거든요. 딸이 당신보다 나이 들어 보이니까 그러신 거지요.” 어머니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 사제 아들을 두고 서로 당신들을 더 닮았다고 농담하시는 부모님이 생각났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무도 닮지 않았다고 차갑게 답했던 기억. 받은 것은 많으나 작은 가시 하나가 늘 아픈 법이다. 이럴 때는 왜 엄마가 더 미웠던 것일까. “’하느님 아버지’를 부를 때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평소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밀라논나님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알고 있었다. 저편에서 기억을 길어 올리는 듯한 얼굴. “제 아버지는 은행원이셔서 바쁘셨지만, 저를 사랑하셨어요. 울타리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하느님 아버지’를 말할 때 오히려 든든했지요. 저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저를 보며 ‘어떤 때는 네가 얄미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맨날 못생겼다고 구박하셨고. 지금은 다들 스타일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때는 그러셨거든요. 아마도 우리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굉장히 엄격하셔서 시집살이를 모질게 시키신 거 같아요. 신교육을 받은 어머니는 저를 그래서 귀찮아하신 거 같고요. 게다가 어릴 때 제가 할머니를 많이 닮아서 더 그러셨나 봐요.” 밀라논나님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했던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그의 사진에는 부드러우면서도 말없이 타인의 내면을 감싸줄 것 같은 응시가 있다. 내면의 상처를 작품에 형상화했던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 그녀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나약했고, 남편과 가정교사의 오랜 불륜을 보고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던 인물로 그려졌다. 작가는 ‘덧없음’과 ‘안정’이라는 감정에 깊이 파고들었다.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기억의 덧없음은, 상실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이었다. 동시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존재하는 영속성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했다. 그랬다. 낳아 준 존재를 미워한다? 고맙고, 밉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우리는 가족에 대해 말하면서 ‘상처받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다. 친부에게 성범죄를 당한 아이들의 이야기. 밀라논나님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가출 소녀 쉼터’에서 20여 년 동안 봉사활동 중인 이야기를 여러 차례 했다. “거기 애 중에는 아버지에게 성범죄를 당한 애들이 참 많아요. 그 아이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마다 손끝에서부터 몸서리를 치는 거 같아요.” 꽝 하고 마음의 문이 닫히는 소리. ‘이해와 용서’라는 단어가 강요될 때, 피해자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에 갇힌 채 곪아 간다. ‘엄마’라는 이름, 태어나서 처음 만난 존재이며 사랑, 사랑하면서도 아픔을 주는 관계. 중증 치매로 요양원에 계시는 나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든든한 울타리이자 찌르는 가시관이었다.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그녀의 작품 전반에서 ‘엄마’라는 존재를 ‘양가감정’으로 다루었다. 즉 엄마에 대한 분노와 함께 사랑하는 존재로, 존경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이 그의 작품에는 공존했다. 강하면서도 무기력했던 존재의 이름. 내가 오히려 엄마를 아프게 한 적이 더 많은데, 식지 않은 미움은 어찌할 것인가. 밀라논나님은 공감하듯 말을 이었다. “저의 어머니는 따뜻한 분이 아니셨잖아요. 그래도 묵주기도를 할 때면 제 마음이 따뜻해져요. 저는 엄마에게서 따뜻한 손길을 받은 기억이 없었어요. 어머니는 돈을 잘 주시고 제가 부탁한 것은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셨지만, 마음에는 살가운 온기가 없던 분이셨어요.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용서를 청하셨어요. 그 후로는 ‘성모님’을 부를 때마다 오히려 마음이 훈훈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내 영혼은 설명할 수 없는 기억을 향해 돌을 던지며 묻고 있었다. 그 존재를… ‘엄마’라는 이름을 다시 사랑할 수 있냐며.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 (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신부님의 마지막 음악수업

명동성당에서 친구 비오 신부를 만나기로 했다. 그는 얼마 전 나와 함께 차인현 알로이시오 신부님을 방문했었다. 지하성당 입구에 도착하자, 젊고 뚝심 있는 차 신부님의 장례 상본사진이 조문객을 맞이하고…. 차 신부님을 기억하는 이들은 대부분 대신학교 성음악 수업시간이라든가, 「가톨릭 성가」를 편찬하신 인물 정도로 알고 있었다. 또 피아노와 첼로를 즐겨하시며, 신학교 출강 때는 가끔 차에 키우던 개를 데리고 오셨다고 기억했다. 가난했던 로마 유학 시절, ‘동료 사제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 성지까지 태워 줬다’ 하여 생긴 별명이 ‘의리의 차돌쇠.’ 보통 교구 사제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 기간 성당에 마련된 냉장 유리관에 모시게 된다. 미사 전, 고인과 함께했던 교우들은 슬픔을 노래하는 연도로 성당을 채우고…. “(사제 차 알로이시오)를 위하여 자비를 베푸소서.” 무심코 나온 가사 빈칸에 신부님 이름 대신 내 이름을 슬쩍 넣어본다. 어쩌면 연도 음이 틀린 걸 아시고, 신부님이 “다시 불러봅시다!” 하시며, 일어나시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도 해봤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이들의 헛된 바람일 뿐. 신학생들은 금요일 오후 5시가 되면, 대성당에 모여 그레고리안 성가를 배웠다. 대성당 중앙 복도를 통해 신부님이 오시면 정적 속에 ‘딱! 딱! 딱!’ 구둣발 소리만 들렸다. 차 신부님은 무거운 서류 가방을 제단 앞에 내려놓고, 수업 전 잠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수업 중 ‘키리에’의 선율을 타지 못하는 제자들에게는 직접 노래를 불러 주셨는데, 나는 성음악보다 신부님이 해주시는 옛날이야기가 더 좋았다. 내 기억으로 ‘신부님의 마지막 수업’에는 이런 말씀이 있었다. “너희가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이제 함께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애틋하게 평생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맞지 않겠냐… 하물며 그럴진대 하느님은 우리를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냐.” ‘우웅~’하고 차 신부님을 품고 있던 냉장 유리관의 모터가 다시 답하듯 으르렁댄다. 바람과 달리 누워 계신 신부님은 표정도 미동도 없으셨다. 나는 유리관 곁에서 노 사제의 구두와 상복을 살폈다. 사제들은 자신의 장례식 때 서품식에서 입었던 제의를 상복으로 흔히 입었다. 다시 3주 전 찾아뵐 때 기억이 나를 붙든다. 죽음을 앞둔 스승에게 ‘인생에서 배울 수 있는 한 가지 질문’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방 안을 채우는 침묵과 거친 숨소리가 이어진다. 동생 차 알로이시아 수녀는 “조금 더 빨리 오셨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재차 아쉬움을 표했다. 두 제자를 보셨을 때, “아주 많이 아프다”며 미풍보다 작은 기운으로 맞아 주셨다. 제자가 물었다. “차 신부님. 늦게 뵈어서 죄송합니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신부님은 어떻게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셨습니까?” 흔한 질문이었다. 고통 앞에서 질문은 이미 힘을 잃었고…. “우연히 가게 된 거야. 성당에 가다 보니까 신학생들을 자주 보게 되었고, 우연히 가다 보니까 신학생들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성당 활동을 하다가, 사제가 되고 싶으니까 신학생처럼 행동하고 그랬던 거지.” 그러나 동생 수녀님의 말씀은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저희는 원래 다섯 남매인데 둘은 유산되었고, 한 명은 천연두로 죽었어요. 둘만 남았지요. 어머니는 그냥 자녀들이 살아있어서 좋다고 하셨어요. ‘숙제 잘하고 나가 놀아라’ 그뿐이었지요. 전쟁 이후 아이들은 갈 데가 없었어요. 집들은 모두 무너졌고요. 그런데 용산성당 시약소 수녀님이, ‘얘들아, 저녁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줄 테니 오너라’ 하셨어요. 거기서 「요리강령」을 들으면서 우리는 교리를 배웠고. 신부님은 성당 복사를 하다가 신학교에 입학했지요. 수녀님들이 성소를 키워 주신 거예요.” 새벽부터 내리는 명동의 비는, 퇴장성가와 함께 마무리되어 갔다. 나는 고인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음이 틀릴까 성가 가사만 붙잡고 있었다. 처음보다 유리관 속 신부님은 편안해 보이셨다. 차인현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전, 나는 단 한 가지 질문만 드리려고 했다. ‘살아오시면서 어려울 때, 어떤 성가 곡이 위로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러나 말씀이 없으셨다. 그 차분한 침묵은, 어쩌면 당신이 공부한 성음악이 단지 개인의 재능 발휘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을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동생 차 알로이시아 수녀가 말했다. “차 신부님은 라틴어 공부를 참 열심히 하셨어요. 천체, 과학 공부를 좋아하셨고요. 또 화석을 좋아하셨어요. 이 생선 화석 좀 보세요. 무엇보다 오빠 신부님은 평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치지 않으셨어요. 그 많은 고통 앞에서 어떻게 조용히 참으셨나 싶어요.” 단단한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무너지는 자신을 기도와 자비의 손길에 의탁해야 했던 한 영혼은, 평소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유언처럼 남기셨다.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어. 그저 후배들이 세상 물을 좀 덜 먹고, (누워 계시면서도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수줍게 웃으셨다) 험난한 세상을 잘 헤쳐 나갔으면… 그게 선배 신부들의 바람이겠지… 싸우지나 말고 잘 지내. 작은 거 가지고 싸우지 말라고. 양보도 좀 하고.” 마지막 질문은 “신부님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였다. 이 질문에 말문이 막혀 하셨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하려니까 확 막히네. 우선 그보다도,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느님은 계셔! 그걸 느껴야지 그 다음이 되지. 하느님은 계셔. 이렇게 확실하게 느껴야지만 되는데… 그렇게 못 느낄 수도 있거든.” 모든 존재는 마지막 숨결을 하느님께 향하며 사라진다. 순간 사랑도 미움도 그리움이 되고. 한 제자가 신학교 때 ‘차 신부님의 행복’에 대해 들었다고 했다. “신부님을 따로 뵙고 ‘행복한 순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제관 거실에서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을 들으며, 긴 소파에 누워 계실 때 신부님은 가장 행복하셨다는 말씀을.” 그랬다. 그분은 하느님 곁에서 베토벤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갖고 계시리라. 언젠가 차 신부님의 새 수업을 듣게 될 날이 다시 올까. ‘하느님은 계시고 우리가 잘 느낄 수만 있다면.’ 아마 그럴 것이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3면

[당신의 유리알] 날개가 없는 이유

냇가에 선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오리를 노려보는 길고양이를 본 적이 있다. 순간 상상은 저 너머로 향하고. ‘고양이에게 날개가 있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에 이른다. 그러면 ‘물에 닿지 않고도 독수리처럼 오리를 사냥하고, 쥐 대신 박쥐와 높이뛰기를 하며, 이왕 날개를 달았으니 위험에 빠진 아이들을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나 사람이나 하늘을 난다는 건 신비로운 상상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고양이는 너무 잠이 많다. 나는 지난해 ‘신학생들의 위로자’라고 불리던 남상근(라파엘) 신부를 만나러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앵무새 두 마리를 기르던 그는, 이제 통통한 고양이 아슬란까지 키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날개 달린 고양이가 그의 사제관 안에는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첫 번째 질문은 이랬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제직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는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만화에서 나오는 로봇 박사님 같은 그의 진지한 표정이 좋았다.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사제직 같아요. 변화무쌍하니까. 모르면서 시작했고, 안다고 생각했지만, 분명했던 것들이 갈수록 희미해져만 가요. 새 신부일 때, 주교님이 첫 본당에 보내셨는데 열심히 살려고 얼마나 긴장을 했겠어요. 본당 신부님과 처음 차를 마시는데 패기를 보여주려고 대뜸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다부지게 말했지요. 그런데 본당 신부님이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뭘 그렇게 열심히 살아? 그냥 살아~’였어요. 그 말씀이 오히려 제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짝 얼어서 있었는데, ‘그냥 신자들과 살면 되는구나’ 아무 탈 없이 기쁘게!” 남상근 신부는 내가 ‘답’이 아니라 ‘위로’를 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여주었다. “서품 50주년을 맞은,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수도회 신부님이 계셨어요. 누군가 할아버지 신부님에게 질문했다고 해요. ‘사제로서 어떻게 그리 잘 사셨나요?’ 보통은 하느님을 위해서 좋은 말씀을 하실 거 같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그러셨대요. ‘오늘 그만둘까 내일 그만둘까 하다가 50주년이 되었다’고. 사는데 왜 힘들고 험한 갈등이 없겠어요. 그냥 사는 거지.” 입학을 함께 한 사이라 그런지 나는 아직도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그런 든든한 어깨 같은 사람. 신학원 같은 반 친구가 짐을 싸서 다시 세상을 향해 떠나야 했을 때, 형님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한참 울어주던 사람이었다. 고학년이 되어서도 그의 방에는 언제나 위로와 쉼이 필요한 신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때 우리는 깨지기 쉬운 유리알 같았다. ‘저러다 공부는 언제 하나?’ 싶을 정도로, 한 명 빠지면 바로 다른 한 명이 그의 방을 채우고 그랬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내 문제로는 그를 귀찮게 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나는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인기가 있는 그가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때 그는 신학생다웠고 지금은 사제다웠다. 태어날 때부터 형님이 사제다웠을 거라는 생각에서 ‘부르심-성소’에 관해 물었다. 그는 대학원 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읽었던 ‘성가복지병원의 청년봉사자에 관한 기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집 가까이에 그 병원이 있었고,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 병원 간판이 보이자, 바로 내려 ‘봉사를 하고 싶다’고 시작한 것이 안내실 차트 정리였다. 그러던 중 병원의 한 수녀님이 ‘라파엘! 꼭 사제가 되면, 서품 첫 강복 받으러 갈게’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이게 부르심인가?’ 해서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 입학한 지 4년이 흘러 신학교 성소 주일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첫 강복을 받으러 오신다던 그 수녀님을 우연히 만나 너무 기뻤다고 했다. 그런데 그분이 오랜만에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왜 여기에 있어?”였다니! 당시 수녀님은 병원에 봉사 오는 모든 청년에게,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가라’고 했는데 ‘거기에 자신이 딱 걸린 것’이었다고. 이쯤이면 성소가 아니라 ‘착각’이 아닌가 싶은데. 그 후 형님의 서품식에 수녀님은 약속대로 오셔서 첫 강복을 받으셨다. 돌이켜보면 하느님의 손길은 자주 인생의 ‘우연’을 사용하신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바스테트’(Bastet) 여신의 머리는 고양이상으로, 처음에는 전쟁의 신으로 여겨졌다. 후에 이 여신의 비밀스러운 눈인 고양이가 어둠 속에서 은밀히 다니며 악한 기운을 부수고 모두를 보호하자, 밤의 수호신으로 추앙되었다. 이쯤이면 이집트 고양이들은 적어도 그 위세에 날개가 없다고 사냥을 못 하거나 누구를 돕지 못해 아쉬워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때론 그런 생각도 든다. ‘고양이에게 보이지 않는 날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천사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는 것처럼. 2025년 1월 12일 주일 새벽. 내가 사는 성당에 불이 났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남상근 신부가 연락해 왔다. ‘성전에 불이 난 것을 이제사 들었다며. 주일 저녁 미사를 마치고 늦게라도 꼭 오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는 차가 없었다. 분명 지하철로 그 밤에 왔을 것이다. 우리는 휴대전화 불빛을 켜고 아직 유독가스가 가시지 않아 매캐한 현장을 둘러보았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다치지는 않았냐’며 그는 안타까워했다. 오랜만에 만난 착한 동네 형 남상근 신부는 그렇게 찾아와 위안을 해주었다. 그는 말미에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요한 2,1-12)를 했다. ‘혼인잔치에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 않았냐고… 아직 이 좋은 술이 남아있었냐는. 우리가 눈앞에서 희망을 잃게 되고, 아픔이 찾아올 때 생각해 봐야 한다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이 변화시키신 그 좋은 술은, 바로 화재에도 서로를 지키고 있는 이 공동체가 아니겠냐고.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새 사제의 첫 번째 안수처럼 내 머리를 꼭 감싸며 기도를 해주고 그는 돌아갔다. ‘그의 위로’는, 주기 위해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다가가는 마음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형님은, 키우는 앵무새와 고양이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돕고 싶어한다는 것을.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 주님의 천사들은 날개를 접고 위안을 전한다. 형님 같은 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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