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추모하며

사랑의 성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검소함으로 시작해, 실천으로 보여주신 그 사랑은 말이 아닌 삶 그 자체로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닿았고, 교황님의 존재는 이 시대의 빛이자 위로, 희망 없는 자들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셨습니다. 한국 땅을 밟으셨을 때, 작은 경차에 몸을 싣고 겸손히 가셨던 그 모습은 우리를 놀라게 했고, 감동하게 했으며, ‘교황’이라는 이름보다 더 큰, 한 인간의 진정한 사랑의 무게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이 계시기에 세상이 아직 괜찮다고 믿었던 마음과, 그분의 말 한 마디에 삶을 붙들 수 있었던 희망을 조심스럽게 떠나보내야 합니다. 교황님이 떠나신 이 순간, 우리 마음 한 켠엔 말할 수 없는 허전함이 남았습니다. 의지하던 어른이 떠난 것 같은 슬픔, 깊은 어둠 속에서 바라보던 등불이 사라진 듯한 불안함.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 빈자리는 곧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주는 울림이라는 것을. 교황님, 당신이 살아내신 사랑은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이 되었습니다. 부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세상을 위해 계속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떠남은 끝이 아닌 시작이며, 그 사랑은 이 땅 위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글 _ 노정남 아가다(서울대교구 한강본당)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22면

[독자마당] 예수님의 4월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시 <황무지>에서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시인 용혜원은 <목련꽃 피는 봄날>에서 4월의 대표적인 꽃 목련을, ‘삶을 살아가며 가장 행복한 모습 이대로 피어나는 꽃’이라 했습니다. 가장 잔인함을 체험한 뿌리라야 가장 행복한 꽃을 피울 수 있나 봅니다. 예수님의 4월이 그러했지요. 참으로 기막힌 잔인함의 삼 일이 일 년 중 가장 거룩한 성삼일이라네요. 가장 거룩한… 지난 겨울 우리 집 위층에서는 새로 이사 온 주인의 대대적인 집수리가 있었습니다. 중학생 정도의 소년과 그 소년의 어머니가 집을 수리하겠다며 동의서를 받으러 왔는데, 공사 일정을 물으니 얼마나 걸리는지도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파트에서는 아무리 작은 공사를 해도 연락처랑 일정, 공사 내용을 정확하게 게시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상례인데, 더구나 병원에서 퇴원한 남편이 종일 집에 있는데 바로 위층이라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습니다. 그러나 집을 장만하고 수리하고 이사 오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기쁠지 생각하니, 거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만 “환자가 있는데…”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동의서에 서명을 해주었습니다. 곧이어 업체의 연락처도 주인의 전화번호도 없는 종이 한 장에 일정이 20일이나 걸린다는 게시물이 승강기 벽에 붙었습니다. 공사 기간이 길어서 일부러 모른다고 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화가 났습니다. 바른대로 말하고 양해를 구했어도 서명을 해주었을 텐데 말입니다. 큰 소음과 진동으로 2~3일은 힘들었지만, 무리 없이 약속된 시간이 지나고 안심할 즈음, 현관문 앞에 놓인 예쁘게 포장된 작은 화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야생화처럼 겸손하고 다소곳하고 작은 얼굴을 가진 예쁜 꽃 속에, 메모지가 꽂혀 있었습니다. ‘덕분에 수리 잘하고 어제 이사를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꽃의 이름이 ‘꽃기린’이며, 일주일에 한 번만 물을 주면 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저는 기꺼이 선한(?) 이웃이 되어주려 했던 마음을 이해받지 못한 것에 화가 났었는데, 솔직하게 말 못 한 그 이웃도 화분을 준비하면서까지 노심초사했던 것입니다. 뿌리와 꽃이 다르듯 우리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참 많이 닮은 이웃이었습니다. 그 꽃의 꽃말이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예수님의 꽃)인 것을 후에야 알았습니다. 어느 날 청소를 하다가 예수님의 꽃, 꽃기린의 가시에 손이 찔려 아픈 손가락의 피를 훔치는데 언뜻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보시며 이런 기도를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리고 저도 잠시 멈추어 이렇게 기도합니다.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 17,8) “당신 계명을 떠나 헤매지 않게 하소서.”(시편 119,10) 주님의 성삼일은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뿌리를 가진, 가장 행복한 꽃들의 시간입니다. 글 _ 박명순 드보라(수원교구 초월본당)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6면

[독자마당] 아름다운 동행

입춘, 우수가 지났지만, 아직도 차가운 바람이 귀를 얼리는데 길가 빌라 기둥 옆에서 전화를 받는 자매를 보고 있다. 갑자기 “영분아! 정신 차려! 누구든지 한 번은 겪게 돼 있어. 연령회에 연락을 해놓을 테니 형제님이 운명하시면 전화해. 내가 갈게!” 휴대전화 저편에서 겁에 질린 율리아나 씨의 목소리가 울먹거렸고 통화를 하면서도 루치아 씨는 울고 있었다. 내 코끝이 시큰거렸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동행인가!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 같이 울고 위로해 주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행복한 신앙의 동행들이 아닌가! 우리는 인자하신 어머니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고 이들은 한 동네에 30여 년을 살면서 신앙 안에서 신뢰와 우정을 쌓아온 절친들이다. 결국 그날 저녁에 율리아나 씨의 형제님(대세를 미리 받으셨다)은 안타깝게 운명하셨고 성당에는 연도 공지가 떴다. 나는 갑자기 토사곽란이 나서 자정에 응급실에 갔고 3일을 꼼짝 못 하다가 삼우제 날에 기를 쓰고 미사를 봉헌하러 가서 율리아나 씨를 만나 때늦은 위로를 했다. 그다음 주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 출석한 율리아나 씨는 핼쑥하지만, 밝은 얼굴로 우리에게 식사 대접을 했다. 내가 식사를 끝내고 “율리아나 씨 대단하세요. 나 같으면 못 일어났을 텐데”라고 했더니 그는 웃으며 두 손으로 15명 정도 되는 자매들을 가리키며 “모두들 도와주신 덕분에”라고 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다. 율리아나 씨는 형제님을 떠나보낸 그 힘든 상황을 세속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교우들과 소통하며 하루하루를 이겨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쏟아지는 햇빛 속을 걸으며 ‘나도 그런 동행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한 자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나도 어려울 때마다 기도해 주는 영적인 동행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주님은 공평하십니다” 고백이 절로 나온다. 따뜻해지는 등에 기운을 얻으며 행복한 걸음으로, 다음엔 만나면 즐겁게 얼굴을 마주하고 그 자매의 긴 하소연을 들어주리라 다짐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네. 푸른 풀밭 시냇가에 쉬게 하사. 나의 심신을 새롭게 하네.” 글 _ 조선자 아나스타시아(서울대교구 면목동본당)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22면

[독자마당] 영화 〈콘클라베〉를 통해 돌아본 신앙인의 자세

최근 개봉한 영화 <콘클라베>를 보고 신앙인으로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인간 창조 섭리를 다시금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이 영화를 두고 교황청을 배경으로 한 최고의 정치 드라마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황 선출에 따른 온갖 음모와 권력 투쟁에 대한 현상을 뛰어넘어 개인적으로 교황 선출 과정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가톨릭 신앙의 본질과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자세를 다시금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잔잔한 감응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이 영화 속으로 잠시 들어가 봅니다. 교황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교황청은 혼란에 빠집니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전 세계의 추기경 108명이 철저한 보안 속에서 시스티나 경당에 모입니다. 콘클라베(Conclave)라 불리는 이 과정은 신성한 의식이자 치열한 정치 싸움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습니다. 스캔들, 배신, 음해, 권력 다툼이 얽힌 선거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의미와 메시지를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권력의 속성입니다. 신앙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교황 선출 회의조차도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둘째, 도덕성과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신의 뜻을 따르려는 이들이 인간적인 욕망과 갈등에 휘말리는 모습을 통해 깊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셋째, 선택의 의미입니다. 한 사람의 결정이 전 세계에 미치는 커다란 영향력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교황 선출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인물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후보가 되고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져 ‘세상사가 거의 엇비슷하구나’, ‘이 또한 나약한 인간의 행태에 지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됩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도 대선이든 총선이든 처음 기대와는 달리 의외의 변수가 크게 작동한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이 또한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일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다고 믿게 됩니다. 신의 인간 창조는 신비스러움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고 거스르는 일은 어리석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성소수자나 양성을 한 몸에 간직하고 태어남도 역시 신의 섭리라 믿어야 하겠지요.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특별한 목적이 있음에 분명하니까요. 이를 거슬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수정하거나 강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을 역행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교우들 중에는 신부님과 수녀님 때문에 성당에 나오기 싫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제가 볼 때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알면 다쳐~”,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어쩌면 교황청의 교황 선출이나 본당의 상황,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신앙을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는데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듯이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은 어떤 구실과 핑계에도 뛰어넘을 수 있는 강력한 처방전임을 믿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데살로니카 5,16-18)라는 말씀에서 확고한 신앙인의 자세를 찾고자 합니다. 글 _ 전재학(대건 안드레아, 인천교구 중3동본당)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2면

[독자마당] 사순의 때를 보내며

사순의 때는 회개의 시간 잘못 가던 길 멈추고 돌아서서 주님께로 마음을 향하여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제, 나는 돌아온 탕자의 마음으로 십자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사랑, 한없이 내어주신 펠리컨 사랑 그 사랑 앞에 고개 숙이고 나를 돌아봅니다. 모든 관계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무심히 던진 무례한 말과 행동들, 사랑과 정의를 외면한 죄악들을 돌아보며 주님께 참회의 눈물로 용서를 청합니다. 사순의 때는 은총의 시간 십자가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 지고 가시는 골고타 언덕길의 주님 고통을 아파하며 내 죄의 허물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지는 은총 입기를 원합니다. 미움과 질투, 완고함과 교만함. 탐심과 집착으로 칭칭 감겨진 내 몸을 주님 십자가 희생 사랑으로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타작마당의 빛나는 알곡처럼 언제나 주님 앞에 수정같이 맑은 모습으로 서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순의 때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안에서 한없이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인류를 위해 비우고 비우신 사랑 죄악에 가득 찬 세상 구하시려 권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신 사랑 찢기고 상처 난 성체에 피 흘리시며 한없이 낮아지신 희생의 사랑 ‘창으로 찌르니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무례함과 무지와 완악함을 용서하시며 그 성혈과 생명수로 온 인류를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애끓는 사랑을 바라봅니다. 사순의 때는 거듭나는 축복의 시간 이제는 미움과 분열로 닫힌 마음이 주님의 영을 받아 용서와 화해로 강물 같은 평화 이루기를 다짐합니다. 은혜로 내려주시는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약동하여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끌어안는 사랑, 머리에서 멈추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 안는 뜨거운 사랑 이루기를 다짐합니다. 주님! 이 사순의 때에 제 존재와 하느님 사랑 기억하게 하시어 십자가 주님의 희생 사랑을 닮아 가게 하소서.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 글 _ 김영희 요셉피나(서울대교구 묵동본당)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2면

[내 눈의 들보]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한국교회는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2027년 세계청년대회(WYD)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뜩이나 청년 신자가 귀해진 상황에 청년들이 함께 대규모 국제행사를 준비해서 성공시킨다면 순교자의 피로 세운 한국교회의 국제적 위상도 높아질 것이고, 침체하고 있는 교회 성장의 새로운 동력도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큰 규모의 국제행사이기도 하지만, 가톨릭신자가 다수를 점하지 않는 종교다원사회에서 개최되기에 교회의 힘만으로는 행사 준비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웃 종교와 함께하기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조도 구해야 한다. 이런 현실적 고민, 그리고 행사를 더 잘 준비해야 한다는 의지로 어떻게든 국가기관과의 협력구조를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 정점이 ‘2027 제41차 서울 세계청년대회 지원 특별법안’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법안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서울 세계청년대회의 성공을 위해 국가와 국가기관, 단체의 행정, 재정지원을 의무화하고 조직위원회 활동을 제한할 수밖에 없는 기존 규정에 예외를 적용해 달라는 것이다. 많게는 전 세계 수백만 젊은이들이 참여하는 행사인데 인구의 10% 남짓을 점유하고 있는 종교인 가톨릭교회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고, 국가적 지원 없이는 행사 자체를 진행할 수 없기에 특별법의 요청은 정당하고 불가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특별법이 가톨릭교회에 대한 특혜라는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당장 불교계가 큰 반발을 하고 있고, 작은 규모의 민족종교도 염려를 거두지 않고 있다. 종교 간 갈등이 가장 적은 안정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종교다원사회인 한국 사회에서 불필요한 갈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지점이다. 교회가 나서서 이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법안 제정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사실인 만큼 이 법안을 통해 얻게 될 ‘혜택’을 버릴 생각은 없어 보인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에서 현실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와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세계청년대회라는 이 거룩한 행사를 돈과 권력의 힘으로 치르고자 하는 욕심이 없는지? 그리고 큰 의미를 가진 축제이지만 이웃에게 행여나 불편을 초래하는 것이 맞는지? 사순 시기, 버림과 비움을 묵상해야 할 때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인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인지, 가난한 교회인지를 선택하기는 힘들어도 낮은 자리를 굳이 찾아가 말할 수 없는 이, 들을 수 없는 이, 걸을 수 없는 이의 입이 되고 귀가 되고 손과 발이 되는 길이 바로 복음의 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길은 영광과 환희로 가득 찬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는 그 길 끝에서 구원이라는 상급을 받을 것을 믿는 사람, 그리스도인이다. 그 믿음이 약하기에 세상의 권력과 돈의 힘으로 영광된 외향과 승리의 표상을 얻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 더 큰 믿음을 가져 보자. 한국의 신앙인들이 믿음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복음을 살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보인다면 명문화된 특별법 같은 규정이 없더라도 이웃 종교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권한을 가진 정부나 기관들의 협력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우리 교회의 힘으로 성공시키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글 _ 이은석 베드로(정의평화민주가톨릭행동 전 사무국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22면

[독자마당] 생명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박봉일 베드로’

나는 보았네, 그날의 아름다움을! 나는 보았네, 그늘 주님께서 역사하심을! 그날, 저는 아들 시몬과 며느리 세라피나, 손녀 소피아와 함께 경북 영천시 괴연동 마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박봉일 베드로 공덕비 제막식, 괴연공소 설립 123주년 기념행사’라는 현수막이 아름답게 걸려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민들도 마을회관에 현수막을 정성껏 걸어 두었더군요. 공경하올 신앙의 선조 박봉일 베드로(1867~1950) 증조부님! 우리 후손들에게 천지 창조주 천주님, 참 진리를 믿도록 이끌어 주심에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 증조부께서는 30년 동안 공소회장을 하시면서,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배고픈 이웃에게 먹을 것을 주셨고,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셨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옷을 주셨고, 잠잘 곳이 없는 걸인에게 2~3일씩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셨으며, 걸인의 옷을 세탁하여 입혀 주셨습니다. 병든 이에게는 손수 약을 처방하시어 달여 먹여 정성을 다해 돌보셨으며, 비신자 임종자에게는 대세를 권유하여 대세를 주셨으며, 복음 전파를 위해 두루 찾아다니셨습니다. 또 교우들이 하느님께 예배드릴 장소(공소)가 없을 때 당신의 땅을 기증하여 공소를 지어주셨고, 후손들에게는 신앙을 엄하게 가르치셨으며, 막내 아드님을 사제로 키우셨고, 8남매 아들·딸들을 잘 키우셔서 후손에 사제 여섯 분과 수녀 두 분이 나게하셨습니다. 저는 어릴 적 집안 어른들로부터 증조부께서 신앙인으로 잘사셨다는 막연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증조부의 거룩한 삶을 찾아서 기록으로 남겨 두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해보았으나, 찾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온 지도 아마 40여 년이 훌쩍 넘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애써 찾으려고 하는 저에게 많은 은인을 보내 주셔서, 드디어 공덕비를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 모인 후손들은 다짐했습니다. 물려받은 거룩한 신앙을 후손들에게 잘 전해 주어야겠다고. 글 _ 박경순 수산나(대구대교구 성김대건본당)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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