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참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선한 의지’의 중요성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세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을 인간의 ‘참행복’(至福)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구체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에 도달하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를 통해서 참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까?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 전체에서 이 질문을 방대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가능한 한 철저하게 이에 대해 단계적으로 다루어보겠다. 우리는 앞선 글(제5회)에서 성 토마스가 반사적인 행동들을 포함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이성적인 자유를 지닌 인간으로부터 생겨나는 행위, 즉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했음(I-II,1,1)을 살펴보았다. 토마스는 행복의 다양한 후보에 대한 고찰이 끝나자마자, 이 인간적 행위를 각자가 지닌 지성을 통해 “목적을 인식하면서 전개되는 의지적 행위”(I-II,6,1)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완전한 목적을 인식하고 또 그 목적을 향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의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윤리 규칙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의지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무려 15문제(I-II,qq.6-21)에 걸쳐 의지의 대상, 원인, 움직이는 방식 등을 토대로 ‘의지적 행위’에 대해서 상세히 다룬다. 지성적 욕구인 ‘의지’의 선함은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 성 토마스는 독특하게 ‘의지’를 욕구(appetitus)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욕구’란 자신과 유사한 것 또는 자신에게 편리한 것으로 기울어지는 경향(傾向)을 뜻한다. 짐승들은 감각적 본성에 따라 오직 물질적이고 개별적인 선을 향한 ‘감각적 욕구’만을 지닌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감각을 넘어서는 인식 능력인 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성적 욕구’도 지니며 토마스는 이를 ‘의지’(voluntas)라고 부른다.(I,80,2) 이 의지는 단순히 개별적 선들만이 아니라, ‘보편적 선’(또는 적어도 ‘선처럼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I-II,2,8) 이러한 표현은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외부적인 대상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의지가 종속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의지 자체가 발동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저지당할 수 없고, 원하자마자 즉시 실행된다. 물론 의지가 명령한 외부적인 행동들은 여러 요건에 따라서 저지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I-II,6,4) 토마스는 한편으로 의지를 강조하지만, 윤리적 고려에서 행위의 결과들을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행위자가 악한 결과들에 대해 책임이 있기 위해서는 그가 자기 행위의 악한 결과들을 미리 내다보고 의도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지에게 돈을 주었는데, 그 거지가 나중에 그 돈을 비윤리적으로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기부행위는 윤리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살인 청부업자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원수를 죽이도록 교사했다면, 그의 행위는 분명히 비윤리적이다. 앞의 예처럼 자기 탓 없이 무지(ignorantia)에서 행하는 행동은 의지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토마스는 ‘의지’ 개념이 너무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우려해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가 이성을 이용해서 구체적인 수단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에 ‘의도’(intentio, 지향)라는 별도의 명칭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서 봉사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같이, 비록 선한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다른 목적에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베푸는 행위는 결코 선한 행위일 수 없다. 이와 같이 토마스에 따르면, 윤리적 행위의 일차적인 조건으로는 우선, 주관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선한 의도’(intentio bona)를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인간이 지닌 ‘선한 의도’는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아직 충분조건은 아니다. 의지와 지성의 긴밀한 상관관계 그렇다면 의도가 선하다는 판정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선을 그 대상으로 삼을 때 선한 것이며, 의지가 작용하는 상황이란 선악의 판정에서 부차적이다.(I-II,19,1&2) 그런데 의지의 선성은 지성에 종속되어 있다. 지성이야말로 의지가 자신의 선택 능력을 실행해야 할 대상을 의지에게 제안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올바르다고 판정한 대상을 의지가 따르지 않는 경우에 이는 질서를 벗어난 것으로 악한 행위가 된다.(I-II,19,3) 반대로, 최고로 자유로우며 인간의 모든 능력에 대한 최고 통치권을 갖는 한에서, 의지는 “지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절대적으로 말해, 우위는 지성에 속한다고(I,82,3) 주장했기 때문에, 종종 ‘주지주의자’로 분류됐다. 그렇다고 토마스가 의지를 무시하고 지성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의지는 인간을 지성이 관련된 관조의 영역을 넘어서 인도하며 그를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한다. 의지는 욕구하는 대상, 즉 목적을 향해 인간을 밀어붙이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욕구하는 인간은 목적에 이를 때까지 이 목적을 향한 역동적인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의지는 또한 인간을 최종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I,82,1) 따라서 인간적 행위는 그것이 인간의 참행복을 보장하는 최종 목적에 얼마나 상응해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 이렇게 의지의 선성이나 올바름(rectitudo)은 근원적 규범인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의지는 세상에 있는 개별적인 선들보다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보편적인 선’을 원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 의지가 최종 목적인 지복 직관 또는 신적 의지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인간의 자유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의지의 고유한 특성은 자기 행위들의 주인이라는 데 있다. 즉, 의지는 자유롭다. 의지의 어떠한 행위도 필연에 의해 부과되지 않는다.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비록 이러저러한 결정된 대상이 아니라 행복을 자연적으로 욕구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해도, 선택될 수 있는 모든 대상 앞에서 자유롭다.(I,82,2) 그렇다면 최종 목적으로서의 하느님을 원해야 하는 의지와 필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들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다음 회에서 좀더 자세히 알아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성적으로 느끼는 부끄러움의 의미

“인간성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부끄러움은 내재적인 동시에 상대적입니다.”(28과 1항) 부끄러움은 자신의 욕망과 직결되어 양심이 불안한 상태임을, 인격 형성에 근본이 되는 자기 다스림을 위협하는 신호이다. 동양 사상에서도 수오지심을 의(義)의 발단이며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중 하나로 보았다. 지난 주(22회)는 영육의 내적 불균형으로 자기 다스림이 어려운 부분을 살폈고, 오늘은 상대적 의미로 ‘성적’ 특성 부분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부끄러움의 직접적 내용은 성적 가치이지만 간접적 대상은 한 인격, 즉 타자의 인격에 대한 한 인간의 태도를 말한다. 인간의 성은 욕망, 특히 ‘육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불균형이 잘 드러나고, 수치심의 현상으로 느껴진다. 이는 추구하는 가치가 충족되지 못한 상황에서 한편으론 가치에 대한 위협이고, 또 다른 편으론 그 가치를 보존하려는 것에서 느낀다. 그러므로 성적 부끄러움의 본질적 특징은 성적 가치를 숨기려는 경향을 띤다. 특히 개인의 마음속에서 성적 가치가 타자에게 ‘잠재적인 향유의 대상’으로 비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사랑이 부끄러움을 흡수한다’라는 사실에 의하면, 참된 부끄러움은 성숙한 사랑으로 성장할 긍정적 기회이다. 그러므로 성적 부끄러움은 사랑의 교육에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이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뱀이 사람에게 말을 걸어온다(창세3,1-5).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는 분명 다른데, 뱀은 인간에게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차이점을 헷갈리게 말한다. 그들에게 금지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규명하는 하느님의 독자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열매를 따 먹었다는 것은 원래의 근원에서 생명의 물을 끌어 올리지 않고 스스로 샘이 되고자 한 것이다. 뱀의 말을 듣고 사람이 잘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더하는 말이 있다.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에서 ‘만지지도 마라’를 덧붙여 자신들의 말로 강조했지만 사실은 선물에 대한 의심이다. 하느님께서 사랑의 자기 증여로 창조한 그 사실에 대한 의심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안에 있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그 인간성을 의심하기에 선물과 사랑에 대한 의심이 들어왔다.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는 결핍이 무화과나무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게 했고, 인간 본성에 새로운 상태가 더해지게 된다. ‘가림’, ‘숨김’은 그들이 세상에서 온 욕망을 알게 됐음을 말한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다스리기 어렵고, 자신을 가림으로써 너에게서 고립된다. 다 가질 것 같았는데 자신마저도 갖지 못하는 상태다. 교리서는 이 관계에서 특히 성적 부끄러움을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성의 다름을 통해 더 넓게 이루어졌던 친교가 어려워졌고, 가리고 숨김으로써 상호 소통 능력의 상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제 서로 다름을 탓하며, 책임이 ‘너’에게 있다면서 자신은 빠져나가려 한다. 상호 친교 안에서 충만함을 가능케 했던 단순함, 원체험의 순수, 아낌없는 자기 증여 능력은 포장되어 버렸다. 마치 흙 위를 아스팔트로 포장한 것처럼. 그러자 인간과 땅의 관계에도 변화가 왔다(창세 3,17-19). 그러나 완전한 절망의 상태는 아니다. 인간의 자유는 그대로 두셨고, 동물과 같이 본능에만 매이지 않고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사실 몸은 가시적인 세상을 초월하는 요소로, 인격으로서 인간은 이 초월에 힘입어 다른 생물들의 가시적 세상을 뛰어넘습니다.”(27과 3항)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원초적 알몸이 지닌 의미 변화

지난 6주 동안 우리는 전례 시기에 맞춰 교리서 제3부 ‘육의 부활’ 편을 공부하면서 부활의 개념을 좀 더 선명하고 새롭게 정립했다. 이제 멈추었던 제2부 ‘마음의 구원’편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하신 예수님 말씀으로 돌아가자.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한처음’과 더불어 ‘몸 신학’을 푸는 열쇠다. 간결한 문장 같지만 이 말씀의 정황과 의미는 매우 폭넓고 깊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사이들과의 대화에서 나온 이혼으로 우리를 ‘한처음’, 즉 창세기 1장과 2장에 옮겨 줬듯이, 이 말씀도 창세기 3장까지 올라가야만 말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한처음 인간은 기뻐하며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라고 고백한다. 이 두 문장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다. 이는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처음으로 보인 자신들의 내적(마음) 상태와 거기에서 변화된 마음 상태를 행위로 드러낸 표현이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지각하는 마음은 도덕의 안내자로 내적 진리를 말하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라는 고백은 두려움 때문에 두 가지를 잃어버렸음을 드러낸다. 하나는, ‘하느님 모상’에 대한 원초적 확신을 잃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왔다고 생각한 것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연결할 수 없게 했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 대한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신적 시각의 참여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참 좋았다”에 장애가 들어왔고, 그로 말미암아 심오한 평화와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됐음을 말한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의 존재요 선물이 아님을, 창조된 선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 모습 그대로임을 볼 수 없게 됐다. 이는 인간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변화됐다는 뜻이다. 타자는 나를 나누는 관계가 아니라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관계로 변하게 됐음을 말한다. 이는 원고독에서 타자에게 향했던 몸-인격의 통합체로서의 유일한 존엄성이 위협받는 상황이다.(28과 2항) 결국 마음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자신의 인격이 갖는 가치의 존엄성도 타자의 존엄성도 위협한다. 몸으로 표현되는 하느님 모상인 그의 초월적 조직의 ‘일부’가 명백히 땅의 지배에 놓이게 된 것이다.(27과 4항) 이 사실은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품위, 피조물임에도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게 그분의 상대인 ‘너’로, 곧 책임 있는 주체이자 당신과 인격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동반자로 부르신 그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절대성에 참여하도록 인도한 그것을 땅에 묶어버린 것이다. 언뜻 보면 부끄러움은 어떤 외적인 사실이나 마음과 감정의 상태를 감추려는 경향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분명 인격과 관계된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은 인격의 존재가 내적이라는 사실, 인격은 자기 고유의 내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격과 결부되어 있는 부끄러움은 인격의 성장과 그 궤를 함께한다. “제가 알몸이기에 두려워 숨었습니다”라는 원초적 부끄럼은 그 자체 내에서 몸이 일으킨 구체적 굴욕의 표징들, 즉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한 것이다. 이 상황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나 자신과 싸우고, 내 자신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고백록」 VIII, X, 22)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끊임없이 기도하라!(상)

사막 교부들은 기도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도는 하느님께 정향된 그들의 삶 자체였다. 스케티스의 압바 이시도루스는 말했다. “젊은 시절 독방에 머무를 때 나는 기도하는 데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밤도 낮과 똑같은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이시도루스 4) 키프로스의 주교 에피파니우스는 “참된 수도승은 자기 마음속에 끊임없이 기도와 시편 낭송을 품고 있어야 한다”(에피파니우스 3)고 말한다. 에바그리우스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일하고 밤샘 기도를 하고 줄곧 단식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대신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라는 법이 있다.”(프락티코스 49) 사막 교부들은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 외 것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기도 수행을 위한 그들의 치열한 노력과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2회에 걸쳐 살펴볼 것이다. 끊임없는 기도의 이상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고 명령하셨다. 사도들은, 특히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명령에 따라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고 권고하였다. ‘항상 기도하라’는 예수님과 사도의 이 권고는 초세기부터 우리 시대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의 항구한 이상으로 남아 있다. 이 권고를 실현하기 위하여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어떤 이들은 너무 극단으로 치우치기도 하였다. 4세기 메소포타미아의 두 부류의 금욕단체, ‘에우키테스’(euchites, 기도하는 사람들)와 ‘아체미티’(acemiti,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가 대표적이다. 전자는 끊임없이 기도하기 위해 세속적인 일, 무엇보다도 손노동을 거부했다. 후자는 공동체에서 절대 기도가 중단되지 않도록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그리고 여러 그룹의 수도승이 바치는 시간 전례로 ‘항구한 기도’(Laus perennis)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원칙은 ‘항구한 성체 흠숭’과 ‘항구한 로사리오’란 이름으로 서방에서 확산했다. 사막에서 꽃핀 이상 성 바오로의 권고를 명심한 초기 사막 수도승들은 끊임없는 기도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전념했다. 그들은 부단한 시편 낭송과 묵상, 기도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손노동 중이나 식사할 때, 또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거나 휴식할 때조차 늘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이 ‘하느님 기억’을 영성 생활의 핵심으로 간주하였다. 사막 교부들은 언제나 카시아누스의 표현에 따른 기도의 상태(status orationis)를 살기 위해 기도에 할애된 시간을 늘리려 노력했다. 피곤함이나 분심도 그들의 외적 기도의 행위(actio orationis)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지속적 ‘기도의 행위’를 통해 항상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고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며 살려고 노력하여 마침내 ‘기도의 상태’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와 삶 자체가 기도가 되었다. 하느님 기억 사막 교부들이 영성 생활의 핵심으로 삼았던 ‘하느님 기억’은 특히 성 바실리우스의 핵심 개념이다. 바실리우스에 의하면, 하느님 기억을 위한 주된 방법은 ‘성경에 대한 되새김(meletẽ)’이다. 이것은 영혼 안에, 하느님에 관한 생각을 머물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기억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주의(prosoché)해야 한다. 이 주의(注意)는 영혼의 약이며, 영혼의 참된 약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욕정은 지속적인 하느님 기억을 방해하므로, 욕정을 거슬러 싸워야 한다. 이에 대한 가르침은 그의 「서간」 2의 기도에 대한 정의 안에 잘 요약되어 있다. “영혼 안에 하느님 생각을 분명하게 각인시키는 훌륭한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내주(內住), 즉 하느님 기억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하느님 기억이 세상 걱정으로 중단되지 않고 정신이 갑작스러운 욕정들로 동요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 됩니다. 하느님의 벗은 이 모든 것을 피하며 그를 방종으로 유혹하는 욕정들을 거부하고 덕으로 이끄는 행동 방식에 항구하면서 하느님께 피신합니다.”(「서간」 2,4) 멜레테 수행 사막 교부들은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창안해 냈다. 그들은 분심을 피하려고 반복해서 하는 짧은 기도문을 사용했다. 이 짧은 기도는 이집트에서 사용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나이, 팔레스티나, 시리아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全) 지역에서도 사용되었다. 이 기도의 일반적 특성은 간결성과 단순성에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한 구절, 특히 시편의 한 구절을 소리 내어, 혹은 마음속으로 반복하여 되뇌는 멜레테(meletẽ ,수행(되새김 수행))였다. 이 수행은 하느님 현존 의식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이 사용한 멜레테 양식은 다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몇몇 양식이 선호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은 복음의 세리의 기도를 즐겨 사용했다. 압바 암모나스는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라는 세리의 말을 항상 마음속에 되새기라고 권고하였다.(암모나스 3) 압바 루키우스는 “하느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크신 선과 풍성한 자비로 제 죄에서 저를 구하소서”(시편 51,3)를 이용하였다.(루키우스 1) 카시아누스에 의하면, 압바 이사악은 “하느님, 어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시편 71,2)를 지속적으로 암송하도록 권고하였다. “하느님을 끊임없이 의식하려고 하는 수도승이면 누구나 갖가지 다른 생각을 쫓아버리고 마음속으로 이 문구를 끊임없이 되뇌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담화집 10,10) 그들이 되새김 수행을 위해 즐겨 사용한 기도는 결국 하느님 ‘자비를 구하는 기도’와 ‘도움을 청하는 기도’였다. 사막 교부들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되새김 수행을 통해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며 늘 하느님 현존 안에서 살려고 노력했다. 이로써 끊임없는 기도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다음 호에서는 기도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을 볼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부활에 관한 주님 말씀은 몸의 계시를 완성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부활을 믿었던 바리사이적 해석 유형을 완전히 넘어선 새로운 ‘몸의 계시’를 완성했다. 죽음은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인생 굽이굽이를 거치면서 ‘잘 살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할 뿐이다. 가끔씩 마주치는 이 고민이 죽음의 진리에 자신을 놓는 성숙한 주체성을 갖게 한다. 그리고 복된 전망을 향해 신성한 진리를 갈망하고 엿보게 된다. 결국 해결되지 않는 죽음이라는 주제가 도전처럼 하늘을 향한 문을 여는, 즉 내 마음이 하늘을 향해 열리고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에 대한 인식,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STh.,II-II,q.1,a.6)이라 표현했는데, 이는 인간이 일시적이고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하느님을 말함)에 일치하기를 갈망하는 것에서 드러나고, 현실에서 인간을 상승시키는 단계로 작용하여 사물의 해방을 넘어설 수 있는 경향을 얻게 한다. 여기에서 얻어진 체험은 지상 삶에서 그 어떤 일치보다 앞에 둔다. “오라”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네, 갑니다”라는 인간의 적극적 응답이 삶에서 드라마틱하게 일어나고, 그러한 삶은 자신의 모든 것에 중심이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진리를 매일 타자를 향해 전달하려 한다. 그것이 곧 사랑(Amor)에 응답하는 삶이다. 이런 사랑의 전달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역사에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은 희망을 낳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타자의 삶에 주체로 들어가는 변화를 겪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희망과 선은 미래에만 유효하고, 오로지 희망을 품고 있는 그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제한적으로 보았지만,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희망을 사랑이라는 덕행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사랑의 보편성에서 희망의 보편성을 끌어낸 것이다. 부활은 삶과 죽음의 주관자인 하느님의 개입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부활’에 관한 답은 우리가 이미 ‘하느님의 아들’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틈은 사라졌고, 죽음과 삶, 허무와 존재가 새롭게 연결됐다. 그래서 종말론은 관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인격에서 시작된다. 구원을 개인의 이기주의 충족이 아닌 인격적 관계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다. 내가 그분을 향해 돌아서야 하는 이유요, 오늘 내 삶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한은 끊임없이 무한을 알려고 한다. 유한이 무한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무한이 품고 있는 속성, 곧 ‘사랑’으로 가능하다. 사랑은 유한에서나 무한에서나 같은 속성이고, 이곳에서 시작한 것이 저곳에서 열매로 드러난다. 이 땅에서 유한인 우리는 불완전할 수 있지만, 그날을 맞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때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몸의 혼인성은 무한을 향해 열려 있고, 그 나라에서 완성될 것이다. 어떠한 성소의 길을 가든 예외는 없다. 모든 이가 전 생애를 통해 부활 상태의 몸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응답의 삶이요 아름다운 파스카적 삶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기능이 다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변화로 부르심이요, 완성을 위한 전 존재의 부름이다.(「사목헌장」 18항 참조) 인간은 두 가지 차원, 즉 시작과 최종 목적에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 인간학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의 존재와 실존 모두를 하느님께 기원을 두며, 하느님께서 존재하길 원하시고 유지하고자 하시기에 존재할 수 있으며, 부활로 부르시는 그날 자녀로서 되돌아간다. 영원하고 유일무이한 ‘오늘’로 들어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하느님에 대한 직관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행복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세상에 있는 창조된 선 안에서는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양한 이유를 들어 밝혔다. 이어 그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우주의 근거이며 스스로 최고의 무한한 선인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I-II,4,4) 그리스도교 전통은 인간의 지극(至極)한 행복(幸福)이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直觀)하는 데 있다는 의미에서 이를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이라고 불러왔다.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 개념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토마스는 「신학대전」에서 세 문제(I-II,qq.3-5)에 걸쳐 이 개념을 상세히 설명한다. 자연적 인식과 사랑에 의해서 지복직관이라는 궁극적인 선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적인 피조물뿐이다. 따라서 지복직관이야말로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기도 하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도 모르고 남이 타니까 덩달아 자기도 타고 가는 사람과 같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최종적인 진리, 즉 제1원인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토마스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인간이 지상에서의 여행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의 본질을 직관하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I-II,3,8)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이 세상에서의 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학이었다면, 토마스는 내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비되는 토마스의 지성 강조 우리는 이러한 토마스의 결론을 보면서, ‘하느님을 소유할 때에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를 통해 자연사물을 향유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을 향유하느냐 하는 태도에 따라 행복이 결정된다.(「신국론」 8,8) 두 성인의 가르침에 차이가 있다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토마스는 그 지성적인 인식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더 나아가 인간의 참행복은 실천적 지성의 작용보다는 사변적 지성의 작용, 하느님에 대한 관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많은 일에 사로잡히는 실천적 삶보다는 진리를 관상하는 삶이 더 행복하다.(I-II,3,2,ad4) 이러한 관상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인간적 행위이며, 이는 다른 것들보다 그 자체로 갈망되기 때문이다.(I-II, q.3, a.5) 그런데 토마스에 따르면, 현세에서는 신앙이 있든 없든 완전한 행복이 없다. 인간 인식이 육체적 역량에 본질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세의 조건 아래에서는 신적 본질 직관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I,12,11) 토마스는 이를 올빼미나 박쥐가 너무도 밝은 태양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 것에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현세의 인간도 본성만으로는 진리의 근본인 신적 본질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이 끝난 뒤에야 우리 자신의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지복직관이 지닌 중요한 특성들 어렸을 때부터 교리를 통해서 내세에 얻게 될 ‘지복직관’이란 개념을 배운 신자들에게도 이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멀게만 느껴진다. 도대체 지복직관은 어떤 구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토마스에 따르면, 참행복이란 완전한 상태이므로 그 상태에서 모든 행위와 욕구는 정지되며 획득한 선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천상에서의 참된 행복은 결코 상실되지 않아야 한다. 지복직관에 도달하게 되면 의지는 적절한 질서를 가지게 됨으로써 어떠한 잘못도 불가능하게 된다. 외부적 요인도 지복직관을 위협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악을 배제하는 셈이고, 따라서 그것을 상실할 두려움까지도 사라지게 된다.(I-II,5,4)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으므로, 지복직관에 이르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은총과 도움이 필요하다.(I-II,5,6,ad1) 인간의 자연적 본성만으로도 불완전한 행복을 가질 수 있지만,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는 데는 하느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지복직관’이라는 진정한 행복은 인간의 성취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약속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세상의 선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하느님은 홀로 인간의 의지와 지성이 지복직관에 이를 수 있게 할 수 있지만, 각 개인의 선행과 공로를 통해서 이를 추구하기를 원하신다.(I-II,5,7) 현세의 삶에서 하느님을 사랑했던 의지는 궁극적 단계에서의 ‘즐거움’으로 보상받게 된다.(I-II,4,1,ad1)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얻게 되는 지복직관이라는 참행복은 “덕스러운 행위들에 대한 포상”(I-II,5,7)인 셈이다. 비록 불완전한 행복을 주는 ‘세상의 선’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서도 우리는 가장 좋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우리가 이제까지 고찰해 온 외적인 선(재물, 명예, 권력 등)이나 육체와 영혼의 선들이라도 이를 올바로 추구한다면, 내세에서의 완전한 “행복으로 향하는 원동력”(I-II,5,8,ad3)이자 이를 누리기 위한 준비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지닌 자연적 역량과 도달해야 하는 진정한 행복 사이의 차이는 ‘공로’(meritum)의 성격을 가지는 행위들을 통해서 극복되어야 한다. 현세에서 ‘나그네’(viator)로서 살아가는 인간이 걷는 여정은 끝없는 방황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그를 위해 마련하신 초자연적인 목적인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지복직관’이 인간의 최종 목적이라고 해도, 짐승들이 자연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인간도 이를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복직관이란 목적지를 향해 끝까지 여행할지, 또는 도중에 있는 역에서 머물러 이를 포기할지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지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논의들을 통해 진정한 행복에 다가가는 방법들에 대해서 본격적인 성찰을 시작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7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악습과 싸워라!(하)

네 번째 악습, 슬픔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슬픔은 갈망하는 것을 얻지 못한 데서 생기며 이따금 분노를 동반한다.”(프락티코스 10) 슬픔은 욕구의 결핍, 채워지지 않은 갈망에서 온다. 사막으로 물러난 수도승은 가정과 부모, 이전 삶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러한 것들의 결핍으로 인한 슬픔에 빠질 수 있었다. 세상에 있는 이들의 경우는 부모나 사랑하는 이와 사별했을 때나, 뜻하는 바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슬픔에 빠진다. 이것은 자연적인 슬픔으로 우리를 좌절과 절망으로 이끌 수 있다. 슬픔의 치료제는 세상의 쾌락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모든 세속적 쾌락을 멀리하는 사람은 슬픔의 악령이 접근할 수 없는 망루다.…우리가 지상의 어떤 대상들에 애정을 쏟는다면 이 적을 몰아내기란 불가능하다.”(프락티코스 10) 이와는 매우 다른 영적인 슬픔(penthos)도 있다. 이것 역시 채워지지 않은 갈망에서 온다. 즉 하느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지 않으려는 갈망, 악에서 해방되려는 갈망, 완전함에 대한 갈망, 하늘나라에 대한 갈망, 하느님을 뵙고 싶은 갈망이 자신의 인간적 한계와 나약함으로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이것은 좌절과 절망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찬 슬픔이다. 사막 교부들은 이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생각했다. 다섯 번째 악습, 분노 요즘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분노 조절 장애가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이 성급하고 참지 못하여 쉽게 화를 내고 분노에 사로잡힌다. 사막 교부들은 분노를 우리 영혼에 하느님의 영을 몰아내고 악령을 거주하게 하는 끔찍한 욕정으로 보았다. 우리 영혼에 분노가 들어오면 시야를 왜곡시키고 생각을 흐리게 하며, 마음을 혼란케 하고 사탄의 공격에 무력해진다고 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분노는 가장 격한 욕정이다.…무엇보다 기도 중에 우리를 슬프게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을 빼앗는다.”(프락티코스 11)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악도 분노만큼 정신을 악령으로 변형시키지 못하며,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예수기도’와 같이 ‘짧고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부르면서 분노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교부들은 분노가 우리 정신을 흩뜨려 순수한 기도를 방해하기 때문에 기도에 가장 큰 장애물이자 관상가의 가장 큰 적으로 보았다. 분노의 치료제는 온유다. 온유로 나아가는 길은 먼저 자신에게 화내는 사람에게 화내어 대꾸하지 않는 것이며, 그에 대해 격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유의하지 않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수행이란 분노에서 온유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여섯 번째 악습, 아케디아 아케디아(akedia)는 영적 태만, 나태, 무기력을 뜻한다. 이는 독수도승에 고유한 악습으로 우리의 소홀함으로 하느님과의 계약(kedos)이 깨진(a) 상태다. 특히 클리마쿠스는 이 악습의 증세를 매우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아케디아는 영혼의 마비입니다. 이로 인해 정신은 약해지고, 금욕 수행을 소홀히 하며 성소도 혐오스러워집니다. 이것은 세상의 부를 찬양하며, 하느님 자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비방하고, 시편 낭송을 게을리하며, 기도할 때 무기력하게 합니다.”(천국의 사다리 13,90) 아케디아는 정오 무렵 수도승을 더욱 강하게 공격한다고 해서 ‘정오의 악령’(시편 91,6)이라고도 불린다. 이 악습에 사로잡힌 수도승은 한가함과 게으름에 빠지게 되고, 온갖 분심에 싸여 독방(경기장: 영적 투쟁의 장)에서 달아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게 된다.(프락티코스 12) 이 악습에 대한 치료제로 에바그리우스는 손노동과 죽음에 대한 기억을, 클리마쿠스는 항구함(인내)과 공동생활을, 그리고 카시아누스는 노동에 대한 열성을 제시하고 있다. 일곱 번째 악습, 헛된 영광 헛된 영광은 남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갈망이다. 이는 영성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지속적인 유혹으로 다가오는 교묘한 악습이다. 이 악습은 피하기가 힘들다. 그것을 물리치려고 행하는 것 자체가 헛된 영광의 새로운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프락티코스 30)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말한다. “태양이 만물 위에 빛나듯 헛된 영광은 모든 선행 위로 펼쳐집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단식하면서 헛된 영광에 사로잡힙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단식을 중단하면, 내 현명함에 대해 헛된 영광에 빠집니다. 나는 옷을 화려하게 입고서는 헛된 영광에 빠지고, 또 초라한 옷을 걸치고서는 헛된 영광에 사로잡힙니다. 말할 때 헛된 영광에 사로잡히고, 침묵하고 있는 동안에도 헛된 영광에 사로잡힙니다.”(천국의 사다리 22,122) 헛된 영광은 자기를 과시하며, 선행조차도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행하기에 우상 숭배자와 같다. 클리마쿠스는 그 치료법을 다음 세 단계로 제시한다. 즉 ‘모욕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혀를 제어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헛된 영광의 생각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을 단호히 잘라 버리는 것’으로 발전하여 ‘사람들 앞에서 치욕을 당하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습관’으로 끝난다. 카시아누스는 공동생활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유별난 것을 피하라고 권고한다.(규정집 11,19,1) 여덟 번째 악습, 교만 클리마쿠스는 “애벌레가 자라 날개가 생기면 높이 날 듯이, 헛된 영광은 완전히 성장하면 교만을 낳습니다. 교만은 모든 악의 뿌리이자 절정”(천국의 사다리 22,126)이라고 말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교만의 악령은 영혼을 가장 심한 타락으로 이끈다. 실제로 이 악령은 영혼에게 하느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선행의 원인이라고 믿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면모를 몰라주는 형제들을 어리석은 자로 여겨 그들에게 거만을 떨게 한다.”(프락티코스 14) 헛된 영광과 달리 교만은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여 남들을 무시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거부하는 태도로 신성모독의 뿌리다. 클리마쿠스는 말한다. “교만한 수도승에게 다른 악령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악령이요 자신의 적이기 때문입니다.”(천국의 사다리 22,129) 그래서 사막 교부들은 교만을 모든 악습의 우두머리라고 했다. 교만의 치료제는 자기가 이제껏 받은 하느님의 자비와 도움을 기억하고 성인들의 모범을 기억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빚지고 있음을 늘 잊지 않는 것이다. 교만은 타락한 천사 루치펠과 첫 인간이 범한 죄로서 겸손을 통해 무너진다. 여덟 가지 악습과의 싸움을 통해 악습을 극복한 후 얻게 되는 승리의 월계관은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과 어떤 유혹에도 동요하지 않는 평점심(apatheia)이다. 이런 순수하고 평온한 마음 안에서 비로소 하느님과의 순수한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천사들과 같아져서…”의 의미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30; 마르 12,25; 루카 20,36)는 말씀은 인간의 본성이 천사의 본성으로 변화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부활 후 인간의 본성이 천사처럼 된다면, 그것은 부활이 아니다. 반육화되거나 비인간화된다면 그것도 부활은 아니다. 이 말씀 전후에서 드러나는 부활의 진리는 인간의 종말론적 완성과 행복이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만의 상태가 아님을 명확히 하며, 모든 이해와 표현을 초월한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인간 본질을 회복함을 뜻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고, 고통과 시련을 거치면서 하느님과 같은 신성(영)이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영의 힘은 인간의 본성을 영화(靈化)로 이끈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것은 영에 대한 몸의 새로운 순종을 의미한다. 영화는 주체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기울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부활은 세속적인 시간 안에서 죽음에 종속되었던 인간의 육체성이 참된 생명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66과 5항) 교리서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순간 일어나는 영화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영화’가 인간 이해의 새로운 출발점이기에, 그 결정적인 의미들을 깊이 들여다봐야 막연한 부활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다양한 형태로 드러내는 선택과 결정을 하고 행동할 때가 많다. 육에서 오는 것과 영에서 오는 것의 대립을 어둠에서 빛이 들어올 때까지 수없이 체험하지만, 영의 영향권에 있는 곧 ‘종말의 인간’은 그 대립에서 자유로워진다. “‘영화’란 단순히 영이 몸을 다스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는 영화를 영이 몸에 완전히 스며들어, 영의 힘이 몸의 에너지로 스며드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67과 1항) 스며들어 생명의 힘이 확장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한다. 영이 받은 사명이다.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상 삶에서 일어나는 대립과는 다른, 몸에 대한 영의 결정적 승리를 말한다. 완전한 참여로 이루어지는 영화다. 교황은 부활한 이들이 갖는 ‘몸의 영광’을 ‘신화된 영화’의 종말론적 결실이라 말한다. 교황은 이 상태가 ‘한처음’과는 다른 차원이라 한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 한처음의 상태를 회복하는 정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운 인류의 완성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화’의 상태를 넘어 신화(神化)의 상태에 이른다. 그 모습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만날 수 있다. 제자들도, 마리아 막달레나도, 부르기 전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부르자 바로 ‘주님’이라 고백했다. 이어지는 부분과 변화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 자체로 신이지만 인간은 영에 의해 영화됨으로서 신화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3, 1136항) 영은 성령을 말하고, 종말론적 인간은 성령의 힘이 몸에 스며들어 삼위일체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내재해 있는 하느님의 영이 그 반대되는 세력들과 대립을 거치면서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과 영적 앎이 진·선·미로 성장된다. 결국 신화는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특징을 가진 친교로 이루어진다. 교리서 66과 6항은 이렇게 정리한다. “사실 부활의 진리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종말론적 완성과 행복은 몸으로부터 분리된(플라톤에 따르면 ‘해방된’) 영혼만의 상태로 이해할 수 없고, 결정적이고 완전한 통합을 특징으로 하는 몸과 영혼의 일치를 통해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통합된’ 인간 상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글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진정한 행복은 ‘영혼의 선’ 안에서 발견될까?

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행복에 대한 전통적인 후보들에 대해 하나씩 검토해 왔다. 토마스가 받아들이는 인간의 세 가지 선에 대한 구분, 즉 외부적인 선, 육체와 관련된 선, 영혼의 선에 비추어보았을 때, 진정한 행복은 재물 등의 외적인 선이나 건강 등의 육체의 선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있다. 영혼의 선, 달리 말하면 인간성 자체의 완성이야말로 인간의 최종 목적이자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널리 알려진 ‘건강한 육체에 깃드는 건강한 정신’(mens sana in corpore sano)이라는 라틴어 속담도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은 건강한 정신이라는 영혼의 선에 있음을 보여 준다. 현대 사회의 욕구 이론을 대표하는 매슬로(A. Maslow)도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소속 욕구’, ‘존중 욕구’를 넘어서는 ‘자아 실현 욕구’를 강조한 바 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이 영혼의 선에 있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전통적인 철학자는, 바로 토마스가 행복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신의 멘토로 삼아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 한계와 극복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종 행복을 찾기 위해 ‘좋은’ 또는 ‘잘’(eu)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들을 분석한다. 우리는 수행해야 할 기능을 제대로 지닌 대상에 대해서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거나, 혹은 해야 할 행위를 ‘잘’하는 사람에 대해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판단의 기준은 바로 그 평가 대상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됐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특정 분야에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좋은’ 인간이 되게 해 주는 기능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전체로서의 인간이 갖는 기능을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기능, 즉 이성과 사유에서 찾는다. 좋은 의사가 환자를 잘 치료해 주는 사람이듯이, 훌륭한 인간도 인간의 고유한 이성적 역량을 충만하게 실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자로 대표되는 지혜로운 사람이야말로, 신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며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다. 인간이 수행해야 할 기능이 잘 이루어지는 것에서 행복이 온다는 주장을 듣게 되면, 현대 사회에서 난무하는 자기계발서들의 저자나 독자는 환호성을 지를지도 모른다. 자기계발서는 대부분 개인의 노력과 태도 등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고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많은 자기 계발서는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가짐만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식의 비현실적 약속을 남발한다. 실제로는 불평등과 차별 등 사회 구조의 문제 때문에 삶을 바꿀 수 없는 경우에도, 모든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는 비판도 등장한다. 이러한 성과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자기 영혼을 다른 방식으로 돌보려는 시도도 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 가고 있다. 종종 매스컴에서도 소개된 ‘멍 때리기 대회’나 템플스테이 등과 연계된 ‘명상에 대한 열풍’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런 시도는 외적인 선, 육체의 선만을 추구하는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바람직한 운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찾을 능력을 과연 인간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은 검토가 필요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질문에 대한 답에서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를 뒤따라가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최종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이 삶에서 가능한 관조(contemplatio)에 있을 수 없다. 철학적 사변은 모든 인간 인식 밑에 깔려 있는 조건, 곧 감각들의 영역에 묶여 있는 채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한다.(I,83,‘머리말’) 인간의 지성은 궁극적 원인을 본래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I-II,3,6) 더 나아가 토마스에게 ‘자기실현’은 결코 인간의 최종 목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잠재력과 개방성 덕분에 인간 영혼은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실현되고 완성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현세의 행복은 불완전한 행복일 뿐 그렇지만 토마스는 ‘영혼의 선’이 진정한 행복과 관련이 있음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개념이 매우 모호한 개념임을 지적하면서, 최종 목적으로서 ‘욕구되어야 하는 대상’과 ‘그 대상 자체를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작용’의 측면을 구별한다. 그 안에 인간의 최종 행복이 있는 대상은 영혼 자체도 아니고 영혼의 어떤 한 능력도 아니라 영혼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의 획득이나 사용에 관해 말한다면, 이는 ‘영혼의 선’과 직접 관련된다.(I-II,2,8) 최종 행복에 대한 강력한 후보들에 대한 검토를 마치면서 토마스는 창조된 세계의 그 어떤 것도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참된 행복은 잃어버릴 수 없어야 하고 확실하게 지속되어야 하는데, 이 삶에서는 어떤 것도 확실하게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매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 행복을 방해하는 질병이나 불행에 맞닥뜨릴 수 있으며, 이 삶에서 근본적인 위협이나 도덕적인 결함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 자신의 능력을 재창출하기 위해서 무위와 휴식의 단계가 필요하며, 심지어 어떤 개인이 이룩한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다시 파괴되어 버린다.(ScG III,48) 따라서 토마스는 현세에서의 행복을 ‘불완전한 행복’이라고 규정한다. 철학적 명상, 영혼의 선한 활동을 통해 일시적 만족을 얻을 수는 있지만, 창조되지 않은 신적 진리와의 완전한 합일 없이는 이런 만족은 지속될 수 없다. 선을, 창조된 선과 창조되지 않은 선으로 이등분한 것은 이제까지의 행복에 대한 논의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 토마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제시했던 현세의 이성적 삶은 불완전한 행복일 뿐, “욕구를 전적으로 쉬게 해야 하는 완전한 선”인 최종 행복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발견된다.”(I-II,3,3) 그렇다면 오직 “인간의 행복은 본질적으로 최종 목적인 창조되지 않은 선, 즉 하느님에게서만 발견된다”는 주장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며, 우리는 언제 어떻게 여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다음 회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1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마르 12,25)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큰 오해를 불러올 말씀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6)는 말씀이 이어진다.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들은 인간에 대해 깊고 일관된 내적 진리를 지니고 있다. 내적 진리가 역사 안에서 우리의 이성과 체험에 의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지만 우리의 지성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리의 빛을 받는다면 초본성적인 힘에 의해 그것을 관조할 수 있다. 물론 육체를 지닌 인간 상태로서 그 한계를 넘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이 세상에서 체험되는 몸의 경험은 하늘나라에서 체험할 몸의 경험을 알기 위한 토대와 기초를 제공받는다. 즉 한처음이 현재와 관련 있듯이 미래 또한 현재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됐고(창세 1,27 참조), 서로 다름 안에서 “한 몸이 되리라”(창세 2,24)는 섭리가 있었다. 저 세상에서 새롭게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완성에 속한다. 이 세상에서 상호 자기 증여를 표현하는 부부 행위는 생명이라는 선물에 대한 열림을 가져온다. 이 행위는 신체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이다. 그래서 번식 능력이 주어졌고, 출산의 축복을 통해 충만을 이룬다. 그러나 저 세상은 이미 축복과 충만의 상태임으로 출산을 통한 충만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 그 스스로에 관한 진리가 무엇인지 다루고 있다는 사실, 즉 남자와 여자의 진리를 출산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 역사가 구원의 신비로 가득하고, 그 신비가 완성되는 부활의 관점에서 인간의 가장 깊은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몸이 지닌 혼인성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의 진리에서 ‘혼인적’ 혹은 ‘혼인성’의 의미는 혼인과 출산 그 자체에만 결정적 의미가 있지 않다. 왜냐하면 몸의 혼인성은 직접적인 혼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내어주는 인격성의 관계로 여러 종교에서나 사회 안에서 여러 형태의 영적 낳음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세상에서는 몸의 혼인성이 완성됐기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리서 69과 4항 본문 마무리 부분에서는 혼인성의 아름다움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곧 부활한 미래의 삶에서 몸이 지닌 ‘혼인적’ 의미는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격이라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들 간의 친교에서 실현된 그 이미지에 완전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으로 존재하는 것의 그 ‘혼인적’ 의미는 완벽하게 인격적이고 공동체적인 의미로 실현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신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6)의 뜻을 알 수 있다. 교황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지는 문턱에서 몸의 영화가 이루어짐에 더 머물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인간 이해의 새로운 출발점이기에 변화하는 그 결정적인 의미들을 깊이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인격인 인간 존재와 남자와 여자의 몸으로 존재하는 의미를 분명히 하는 통합된 인간 진리의 새로운 문턱을 넘기 위해서다. 에페소 서간 5장 30절과 31절에서 “한 몸이 된다”가 다시 소환됐고, 그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선명히 계시됐다. 땅에서 유한한 존재였던 인간은 몸에 쓰인 혼인성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 영원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없어지거나 폐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활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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