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세의 기도 (탈출기 32~34장)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한 후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에 불안함을 느끼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탈출 32,1-6) 하느님은 이에 진노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32,10) 여기서 늘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과 완전히 다른, 화가 가득하고 복수하시려는 하느님 모습이 우리를 당황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분을 참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 화를 내십니다. 레위인들이 이 일로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3000명이나 죽였다는 이야기(32,25-29)는 우리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지 않고 우리 입맛에 따라 하느님 상을 조작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식구를 잃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모세의 중재 기도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함께 가시도록 하느님을 여러 번 설득합니다.(32,11-14,31-34; 33,12-17; 34,8-9) 모세가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라고(32,33)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32,34)는 말로 분명히 거부하십니다. 다시 모세가 하느님을 달래기 시도합니다. “보십시오, 당신께서는 저에게 ‘이 백성을 데리고 올라가거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누구를 보내실지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께서는 ‘나는 너를 이름까지도 잘 알뿐더러, 너는 내 눈에 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가 당신 눈에 든다면, 저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을 알고, 더욱 당신 눈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민족이 당신 백성이라는 것도 생각해 주십시오.”(33,12-13) 모세는 주님께 애교를 부립니다. 자신이 더욱 주님 눈에 들게 해 달라는 청은 모세가 하느님의 마음을 돌리려는 밑밥입니다. 그의 본래 관심사는 그가 말미에 살짝 언급하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번에도 “내가 몸소 함께 가면서 너에게 안식을 베풀겠다”(33,14)고, 즉 모세만을 언급하십니다. 다급해진 모세가 자신의 의중을 단도직입으로 말합니다. “당신께서 몸소 함께 가시지 않으려거든, 저희도 이곳을 떠나 올라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제 저와 당신 백성이 당신 눈에 들었는지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저희와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33,15-16) 모세는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늘 함께 이야기하지만 하느님은 계속 모세만을 언급하십니다.(33,17) 모세가 주님을 뵌 뒤(33,18-23) 재삼 간청합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34,8-9) 그제야 주님은 ‘너의 온 백성’, ‘너를 둘러싼 온 백성’, ‘너희’라는 말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시고 모세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십니다.(34,10-28) 우리는 아픈 이들이나 어려움에 부닥친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모세는 입술과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기도합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34,8)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께 애원합니다.(32,11)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면서 타인을 단죄하는 모습에서가 아니라 타인의 잘못까지 품어 안는 우리의 자세에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실 것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7-2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자도 있다?

수녀님, 수사님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수도복을 입고 있는 수도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갈색, 회색, 흰색, 남색 등 수수한 색상에 상하의가 나뉘지 않고 발목까지 길게 늘어진 모습입니다. 수녀님들의 경우 머리 수건을 착용합니다. 이런 수도복은 보는 이들까지도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해줍니다. 수도자들이 이렇게 수도복을 입는 것은 수도복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청빈을 실천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축성생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수도복은 봉헌의 표지로서 단순하고 단정하며 검소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수도 생활 교령」 17항)고 말하고, 교회법을 통해 “수도자들은 자기의 축성의 표지와 청빈의 증거로서 고유법의 규범에 따라 정해진 수도복을 입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제669조 1항) 수도복은 본래 수도회가 세워지던 당시 일반인들,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입던 평상복이었습니다. 3~4세기경 수도회들이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수도원 안에서 복장을 통일해 나갔는데요. 수도회들은 당시의 농부나 서민들이 입던 옷을 수도복으로 삼았습니다. 청빈의 삶을 서원한 수도자들이기에 가장 최소한의 옷을 입고자 했던 것이죠. 시대가 흐르면서 일반인들의 복장은 변했지만, 수도자들은 당시의 복장을 그대로 이어오다 보니 오늘날에 와서는 수도자들의 복장이 독특한 복장으로 여겨지게 됐습니다. 수도자의 수도복은 봉헌의 표지 단순·단정·검소하고 품위 있어야 사도직 현장에 따라 평상복 입기도 하지만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회들도 있습니다. 특히 예수회나 살레시오회 등 남자 수도회 중에는 별도의 수도복이 없는 수도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수사님 중에 사제품을 받은 신부님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에 수단이나 클러지 셔츠를 입고 계신 수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교회법은 “고유한 복장이 없는 회의 성직자 수도자들은 제284조 규범에 따른 성직자 복장을 입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제669조 2항) 예수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이창현(비오) 신부님은 “사람들 안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서 사도직을 수행하기 때문에 예수회 설립 당시부터 수도복을 따로 입기보다 사제들의 복장인 수단을 그대로 입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들 중에도 수도복을 입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성심 수녀회는 흰 블라우스에 감색 치마를 정복으로 하되, 사도직 현장에 따라 그에 맞춰 평상복을 입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복장이든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 수도회의 경우 정해진 수도복이 있지만, 가난한 이들과 같은 신분으로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공동체에서는 수녀님들이 사복을 입고 있습니다. 성심 수녀회 한화관구장 최혜영(엘리사벳) 수녀님은 “성심 수녀회는 설립 당시 과부들의 복장을 수도복으로 입어왔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창설자의 취지를 생각하면서 소박하고 검소한 옷으로 입자고 결의했다”면서 “사복을 입고 있지만 십자가 목걸이로 축성의 표지와 청빈의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07-2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은 몇 번 치는 걸까?

유명한 성당이나 성지를 순례하다보면 성당 종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전 6시, 정오, 오후 6시에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요. 바로 삼종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삼종기도 종소리를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종을 제법 많이 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종을 몇 번 치는 걸까요? 그래서 삼종기도 시간에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을 찾아가 직접 세어봤습니다. 모두 33번이었습니다. 수원교구 안성성당에도 가서 세어보니 마찬가지로 33번이었습니다. 안성성당에서 7년째 종지기를 하고 계신 유국형(요한) 형제님께 물어보니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예수님 나이가 33세라 33번을 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이라니! 삼종기도에 참 어울립니다. 그런데 삼종기도 종이 33번이 아닌 성당들도 있었습니다. 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의 삼종기도 종은 42번 울립니다. 대전교구 주교좌대흥동성당에서 2019년까지 50년간 종지기를 해오신 조정형(프란치스코) 형제님은 작은 종, 중간 종, 큰 종을 각각 세 번씩 울리고 다시 종들을 20번 가량 연속으로 울리는 방식으로 종을 쳐오셨다고 합니다. 꼭 33번을 쳐야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타종 횟수는 달랐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었는데요. 처음 9번은 타종 방식이 같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3번씩 끊어서 3차례 치는 것이지요. 이는 삼종기도 안에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가 셋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삼종기도를 다 바칠 동안 종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하기 위해 계속 종을 치는 것입니다. 삼종기도는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가 담긴 세 가지 성경 구절(루카 1,28; 루카 1,38; 요한 1,14)과 성모송, 본기도로 구성된 기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3번 종이 칠 때 바치는 기도라 해서 삼종(三鐘)기도라고 부르지만, 기도문이 “주님의 천사가(Angelus Domini)~”라는 구절로 시작하기에 ‘안젤루스’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삼종기도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13세기 무렵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성당에서 저녁 종이 울릴 때마다 성모송을 3번씩 바쳤고, 이것이 신자들 사이에 크게 퍼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16세기에 성경 구절이 추가됐고, 17세기경에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삼종기도의 형태가 됐다고 합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이 기도를 가능한 한 언제 어디서나 계속 바치도록 간곡히 부탁한다”면서 “말씀이 강생한 신비를 묵상하고 복되신 동정녀께 인사하며 그녀의 자비로운 전구를 바라는 것 등은 변함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41항) 이처럼 삼종기도는 우리가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과 수난과 부활로 이루신 파스카 신비에 이르기까지를 묵상하면서 우리의 아침, 낮, 저녁 시간을 거룩하게 해주는 기도입니다. 비록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삼종기도를 정성껏 바치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성당 종소리 같은 우리가 돼보면 어떨까요.

2024-07-2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노래하며 춤추며 온 백성이 함께 바치는 기도(탈출기 15장)

“나의 힘, 나의 노래이신 주님!” 가수 고(故) 김광석씨는 ‘나의 노래’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흥겨운 리듬과 희망찬 가사를 담고 있는 이 노래에서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이라는 후렴이 반복되는데, 이는 가수가 가지고 있는 삶의 정수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을 나오면 울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갈대 바다를 빠져나오면서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자유를 얻은 백성은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이 노래는 성경에 나오는 첫 노래이자 함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바빌론의 패망에(묵시 18장 참조) 대한 하늘에 있는 무리의 환호와(묵시 19장 참조) 같이, 이 노래는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이라는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 앞에서 터져 나오는 인간의 응답입니다. 백성은 주님과 그분의 종인 모세를 마음으로 믿는(탈출 14,31 참조) 데에 그치지 않고 마음과 입을 열어 찬양 노래를 부릅니다. “나의 힘, 나의 노래(성경 번역은 ‘굳셈’)이신 야(훼)!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다”(2절; 이사 12,2: 시편 118,14 참조)는 대목이 노래 전체를 요약합니다. 여기서 힘과 노래라는 조합은 주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그분의 멋짐을 드러냅니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 사건을 전하는 기도문의 수준 높은 시상이 ‘노래’의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전쟁의 용사’와 ‘오른손’ 및 그분께 맞서는 이들은 거센 물속에 가라앉은 납덩이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표현이 그분의 탁월한 ‘힘’을 보여줍니다. 주님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야’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줄임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서 그분을 얼마나 친밀히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누가 당신과 같겠습니까?”(탈출 11절)는 노래의 중심이자 그 전환점입니다. 이 질문에서 어떤 신들과도 비길 수 없는 주님의 탁월함이, 또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적의 뛰어남이 드러납니다. 그분에 맞설 이나 비길 이는 아무도 없고 그분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의 노래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찬양하고 12~18절은 미래를 지향합니다. 지금까지 선사된 것이 감사의 이유이지만 또한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 이미 찬양에 포함됩니다. ‘힘과 노래’는 주님의 권능 드러내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기도문과 비유로 그분의 탁월한 힘 보여줘 하느님은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해 함께 부르는 노래로 고백받아야 이와 같이 기도 안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들어섭니다. “땅이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16절)는 민수기 16장의 반역을 암시하고,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필리스티아, 에돔, 모압, 가난안 민족들을 거쳐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당신께서 살려고 만드신 곳’(17절)은 후에 솔로몬이 세우게 될 성전을 가리킵니다.(1열왕 8,49; 2역대6,39) “주님께서는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신다.”(18절)는 마지막 구절은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여 언제나 도와주시고 이끄시는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노래 전체는 점차 확장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남성)이 “나는 노래하리라”(1절)로 시작하지만 미리얌과 여자들은 “너희는 노래하여라”(20절)라는 추임새를 넣고 남성과 여성이 마주하여 웅장한 이중의 합창을 하는 듯합니다. 게다가 여자들은 손북을 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동반합니다.(판관 11,6-8; 1사무 18,6-8; 예레 31,4 참조) 합창단과 관현악단과 무용단이 모두 함께 신나는 음악을 엮듯이 찬양의 기도는 모든 이들을 포괄합니다. 누구보다 위대하신 하느님은 시간을 넘어 변함없이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십니다. 나의 노래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함께 부르는 노래로 찬양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7-21

[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교회에도 법원이 있다?

‘교회 상식 팩트 체크’에서 종종 ‘교회법’을 인용했다는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법은 교회에 관한 여러 제도나 성사, 전례 등에 관한 규범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와 형벌, 재판에 관한 다양한 법규도 실려 있는데요. 그렇다면 재판을 하는 곳, 법원도 있을까요? 네, 교회에도 법원이 있습니다. 교회 법원도 사회의 법원과 비슷한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전국 교구들에는 법원이 있는데요. 15개 교구에는 1심 법원이, 관구를 관장하는 대교구, 바로 서울·대구·광주대교구에는 2심 법원이 있습니다. 대법원 역할을 하는 법원도 있습니다. 교황청에 있는 사법기구(Institutions of Justice)입니다. 이전에는 ‘법원’이라고 불리다 2022년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가 반포되면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사법기구 안에는 대사(大赦) 등을 다루는 내사원, 교회의 사법을 올바로 관리될 수 있도록 감독하는 대심원, 그리고 다른 법원들에서 이미 심판한 사건을 제3심이나 그 이상의 심급으로 재판할 수 있는 상급심 법원인 공소원이 있습니다. 사회의 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이 활동하듯이, 교회 법원도 비슷한 구성으로 재판이 열립니다. 먼저 청구인을 변호하는 변호인, 판결을 하는 재판관이 있습니다. 사회의 법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성사에 관한 재판을 하기 때문에 성사보호관이 검사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 법원은 사회의 법원과 구조가 비슷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요. 각 교구가 운영하는 법원은 누군가를 단죄하거나 처벌하기 위한 재판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가 각 교구에 법원을 설치한 이유는 혼인장애로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이 교회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성사생활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성사를 통해 맺어진 부부는 하느님께서 맺은 것으로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혼’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 안에서는 결혼생활 중에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고, 또 사회적으로 이혼·재혼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성사생활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이를 교회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혼인이 무효임을 밝히는 소송이 필요합니다. 이를 교구 법원들이 돕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혼인법에 관한 재판 외에도 여러 재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재판들은 법원에서 하기 보다는 별도의 위원회 등을 구성해 진행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시복시성을 위한 재판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교구 법원이 오롯이 신자들의 성사생활 회복을 돕는 역할을 하도록 합니다. 수원교구 사법대리이자 재판관인 박석천(안드레아) 신부님은 “교구에 법원이 있는 목적 자체가 혼인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을 돕기 위해서”라며 “사회 법원처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고민 상담하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오시면 좋겠다”고 전하셨습니다.

2024-07-14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짝을 찾으며 바치는 기도

“아내를 얻은 이는 행복을 얻었고 주님에게서 호의를 입었다.”(잠언 18,22)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은 뒤 이사악의 부인감을 자기 고향에서 얻어 오도록 자신의 가장 나이 많은 종을 파견합니다. 아브라함은 과거에 함께해 주시고 자기에게 미래를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천사를(창세 24,7 참조) 그에 앞서 보내시리라 믿습니다. 자신의 짝을 찾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짝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자신의 사명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종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제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 오늘 일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제 주인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제 제가 샘물 곁에 서 있으면, 성읍 주민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것입니다. 제가 ‘그대의 물동이를 기울여서, 내가 물을 마시게 해 주오.’ 하고 청할 때, ‘드십시오. 낙타들에게도 제가 물을 먹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 소녀가, 당신께서 당신의 종 이사악을 위하여 정하신 여자이게 해 주십시오. 그것으로 당신께서 제 주인에게 자애를 베푸신 줄 알겠습니다.”(창세 24,12-14) 여기서 자기에게도, 또 달리 말하지 않아도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소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러한 소녀는 친절하고, 다른 이를 돌보고, 나그네를 맞아들이며,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까지 배려하는 부지런한, 훌륭한 여인의 덕을 갖춘 이를 의미합니다. 목마른 낙타 한 마리가 70리터의 물을 마시니 그가 데려온 열 마리 낙타에게 주저함 없이 물을 샘에서 길어 먹이는 소녀는 배려심과 수행 능력을 겸비한 아름답고 뛰어난 여인으로서 이사악의 아내,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종의 행위와 하느님의 도우심이 복합되면서 하느님이 누구를 이사악의 아내로 정하셨는지가 드러납니다. 종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창세 24,15 참조) 레베카가 등장하고 자신이 기도한 대로 그녀가 행동하자 종은 무릎을 꿇어 주님께 경배합니다. “나의 주인에게 당신 자애와 신의를 거절하지 않으셨으니,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창세 24,27) 그는 주님께서 그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이어 그는 주인의 아우 집안인 레베카의 집에 들어가고 그 가족들에게 자기가 바친 기도와 그 기도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졌음을 증언합니다. 이로써 그의 말을 듣는 가족들은 이 일에 분명히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시고, 하느님께서 몸소 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고 이사악과 레베카의 결혼을 승낙합니다.(창세 24,50 참조) 이에 다시 한번 종은 땅에 엎드려 하느님을 경배합니다(창세 24,52 참조). 평생의 반려자를 찾는 것은, 또 그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는 것은 우리 현실에서 매우 어렵습니다. 결혼 문제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에 부딪힐 때, 더 이상 자신의 힘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거대한 과제 앞에서는 언제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많은 종은 그런 자세의 모범입니다. 그는 사건 전체에서 하느님께서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며 다섯 번이나(24,12-14;26-27;42-44;48;52) 기도합니다. 누구에게나 미래를 향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에서 보이듯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만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셨고 앞으로도 우리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누구나 혼자 길을 걷지 않고 그분과 함께 갑니다. 그분의 도움을 믿고 그분과 함께 내리는 결정에 큰 축복이 함께 할 것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7-14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이사(移徙)하면서 바치는 기도

올 연말까지 기도에 대해 여러분과 생각을 나눌 신정훈 미카엘입니다. 언젠가 어느 신자분이 “어떤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까?”하며 여러 번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끝까지 저는 그분에게 시원한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분은 어려운 문제를 안고 계셨고, 올바른 기도를 드리면 그 문제가 즉시 풀어지리라 여기셨던 듯싶습니다. 명의의 한 수에 깊은 병이 씻은 듯이 나는 것처럼 기도를 문제의 해결 도구로 삼고자 하는 생각은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사람은 그분을 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안에 이미 하느님의 부르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기쁜 일, 또 슬프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 활동하시도록 합니다. 기도에서 각 사람이 처한 상황과 그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기도의 구체적인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기에 우리는 성경을 따라가면서 기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칼 라너 신부님은 어떤 이에게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넘쳐나는 것이 곧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하느님과 가까워질 것입니다. 제 글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의견 주시면(shinmichael@hanmail.net) 짧고 부족하지만, 여건이 허락하는 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나이 마흔의 야곱은 형 에사우를 피해 부모 집을 떠나 먼 고장으로 가면서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 28,20-22) 야곱의 기도는 여러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아직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야곱은 하느님을 ‘당신’으로 표현하면서 그분과 친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야곱은 되돌아오는 길에 형이 장정 사백 명과 온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하느님을 찾습니다. “저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저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 ‘너의 고향으로, 너의 친족에게 돌아가거라. 내가 너에게 잘해 주겠다.’ 하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당신 종에게 베푸신 그 모든 자애와 신의가 저에게는 과분합니다. 사실 저는 지팡이 하나만 짚고 이 요르단강을 건넜습니다만, 이제 이렇게 두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제 형의 손에서, 에사우의 손에서 부디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가 들이닥쳐서 어미 자식 할 것 없이 저희 모두를 치지나 않을까 저는 두렵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너에게 잘해 주고, 네 후손을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만들어 주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이 두 번째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 말씀으로 시작하고 맺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야곱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그 안에서 위안과 도움을 찾는 야곱은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하느님과 친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기도가 야곱에게 힘을 줍니다. 학교나 일자리 등 많은 이유에서 우리는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낯선 환경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그분에게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고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이끕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01년 서울대교구 사제로 서품됐으며, 뮌헨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전공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강의했으며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부 자문 위원이다. 2020년부터 독일 뮌헨 상트 막시밀리안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역서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신학 주석」 시리즈, 「그리스도교 신앙」(공역) 등이 있다. 기획 ‘성경 속 기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전 교수인 서울대교구 신정훈(미카엘) 신부가 성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기도를 바로 알고 행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입니다.

2024-07-07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당에 들어가면 어디에 절을 할까?

우리는 성당에 들어가고, 또 나올 때마다 고개를 숙여 절을 합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지요. 성당 앞의 제단을 향해서 예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인사를 하기는 하는데, 정확히 어디에 인사를 하는 것일까요? 의외로 신자분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립니다. 일단 예수님께 인사드린다 생각하니 예수님이 매달려 계신 십자가에 인사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감실에 인사를 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분은 제대에 인사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올라온 답변들이 서로 달라 헷갈리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성당에 들어갈 때 ‘제대’를 향해 절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미사 중 독서자들도 제단에 오르기 전에 제대를 향해 절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상징하는 제대는 성체성사가 재현되는 주님의 식탁이자 성당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제대를 중요하게 여겼는데요. 교회는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해 교회가 그 둘레에 모이는 제대는 한 신비가 지니는 두 가지 측면, 곧 주님께서 희생되신 제단과 주님의 식탁을 나타낸다”며 “그리스도교의 제대가 상징하는 것이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3항) 제대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제사가 이뤄진 제단임과 동시에 예수님과 모든 신자들이 함께 하늘나라의 잔치를 만끽하는 식탁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분명하게 지속적으로 나타”냅니다.(「로마 미사경본 총지침」 297항) 4대 교부 중 한 분으로 유명한 암브로시오 성인도 “제대는 성체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성체는 제대 위에 계신다”, “사실 그리스도의 제단이란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말씀들로 제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제대는 주로 돌로 만드는 데요. 그 이유도 “살아 있는 돌”(1베드 2, 4)이자 “모퉁잇돌”(에페 2, 20)이신 예수님을 더 잘 드러내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교회는 감실을 “성당 안에서 눈에 잘 뜨이는 뛰어난 곳에 아름답게 꾸며져 기도하기에 적합하게 설치”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교회법 제938조2) 감실을 “최대의 존경심으로써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설치하라고도 말합니다. 다만 감실의 외양과 위치는 “제대에서 이루어진 성체성사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는 주님께 드리는 경배에 도움이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83항) 감실은 신자들이 제대 위에서 거행되는 성체성사와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고, 성체 앞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대에서 거행되는 성찬례가 없다면 감실도 없는 것이지요.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11항) 제대를 향해 고개 숙여 절할 때마다 성찬례를 통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시고, 또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2024-07-07

[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교황님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는다?

‘무류성’(無謬性)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무류(無謬)는 ‘오류가 없다’는 뜻입니다. 라틴어 인팔리빌리타스(infalliblitas)를 번역한 말인데요. 이 라틴어는 단순히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라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절대 오류에 빠질 수 없다’는 강한 의미를 담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무류성’이라는 단어와 함께 언급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교황님입니다. 교회는 “교황은 자기 임무에 따라 그 무류성을 지닌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25항)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교황님을 참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교황님도 실수도 하고, 잘못 말하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황님이라고는 하지만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이니까요. 만약 교황님이 절대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면 미사를 시작하면서 “제 탓이오, 제 탓이오”라며 고백의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고해성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없다면 죄를 짓지도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미사 중 고백의 기도도 바치시고, “15일이나 20일마다 고해성사를 한다”고 밝히신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님이 무류성을 지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교회법은 “교황은 그의 형제들을 신앙 안에 굳세게 하는 것이 소임이므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으로서 신앙이나 도덕에 관해 고수해야 할 교리를 확정적 행위로 선언하는 때 그의 임무에 의해 교도권의 무류성을 지닌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제749조) 교황님이 모든 분야에서 오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목자이자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선언할 때 무류성을 지닌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라”(요한 21,15~17)고 명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께도 그 책임과 권한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의 무류성을 교의로 천명한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실로 베드로의 후계자들에게 성령이 약속된 이유는 그분의 계시로 새로운 교리를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사도들을 통해 전승된 계시 또는 신앙의 유산을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하게 보호하고 신실하게 해설하려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영원하신 목자」 제4장) 교황님이 새롭게 계시를 받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이미 주어진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는데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고,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류성은 이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 곧 교회와 함께 머무시면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계신다는 믿음에서 오는 교의입니다.

2024-06-30

[알기 쉬운 미사 전례] 축복 속의 파견

50세가 되면, 공자가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서 말한 ‘지천명’(知天命), 곧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사제품 25년이 넘으면 당연히 하느님의 영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이 50세를 넘기고, 서품 은경축을 지내도 당연히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지천명은 지학(志學), 이립(而立), 불혹(不惑)의 단계들을 잘 밟아간 사람들이 이룰 수 있는 경지이지요. 또한 하느님의 영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사제와 교우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날은 하느님 백성의 전례 거행, 특히 성찬의 희생 제사와 성무일도로 성화된다”(「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 3항)는 교회 가르침에 따라 전례 거행에 온전하고 의식적이며 능동적으로 참여한 이들에게 이루어지는 일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모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집회를 해산해야 할 때가 옵니다. 미사의 마침 예식은 공지 사항, 인사, 강복, 파견, 퇴장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초세기 마침 예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교부도 자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영성체 후에 별도의 예식이 없거나, 있었다면 로마 관습에 따라 사제나 부제가 “가십시오. 파견입니다”(Ite missa est) 하고는 파견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사제의 강복은 늦게 도입됐습니다. 6~7세기 「로마 예식」 제1권에 의하면, 주교는 제대에서 내려와 개별적으로 강복을 청하는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이라고 했음을 전해줍니다. 10세기경 이 강복이 미사 끝부분에 들어왔지만 적어도 13세기까지는 주교에게만 맡겨져 있었습니다. 현재는 강복 양식이 ‘보통 강복’, ‘장엄 강복’, ‘백성을 위한 기도’ 등 세 가지가 있습니다. 현재의 파견문인 “가십시오. 파견입니다”(Ite missa est)는 「로마 예식」 제1권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강복 전에 행했습니다. 이것 외에도 “가도 좋습니다”, “평화 안에 나아갑시다”(밀라노 전례), “평화로이 가십시오”(동방의 안티오키아 전례; 마르 5,34; 루카 7,50 참조) 등이 있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Ite missa est”를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의역해 사용하며, 네 개 양식을 추가 삽입해 놓았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들은 잠시 성당에 남아 개별적으로 미사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고, 복음과 성체에 대한 감사 기도를 바치면 좋습니다. “신자들 각자가 돌아가 선행을 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도록 파견”(「로마미사경본 총지침」 90항)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음을 말합니다. 파견된 교우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하느님의 놀라우신 구원 업적에 대한 감사인 성찬례를 회상합니다. 이로써 미사의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양육된 하느님 백성은 이제 그분과 함께 사랑하러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Dilige et fac quod vis)라는 성 아우구스티노(353~430년)의 말씀은 ‘신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 그러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파견된 하느님 백성이 미사를 통하여 신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지천명(知天命)이며, 또한 그분의 영을 따르는 삶이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그동안 ‘알기 쉬운 미사 전례’를 집필해 주신 윤종식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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