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당에 ‘피엑스(PX)’가 있다?

형제님들이 모이면 하는 군대 이야기 중에 종종 등장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성당에 ‘피엑스’가 있는 줄 착각하고 일어난 사연입니다. 이등병 시절에 성당에 피엑스가 있는 줄 알고 선임병 몰래 성당에 갔다던가, 같은 이유로 천주교 종교행사에 참가했다가 실망했다던가 하는 이야기지요. 피엑스(Post eXchange)는 군대에 있는 일종의 매점입니다. ‘어떻게 성당에 피엑스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라며 우스갯소리로 여기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사건의 발단은 교회에서 아주 자주 쓰이는 기호에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미 떠올리셨을 것 같은데요. 바로 기다란 P의 기둥 아래에 작은 x모양이 합쳐진 형태의 기호입니다. 힘든 군 생활 중 마음을 달랠 군것질이 간절한 장병들이기에 이 기호를 보고 오해하게 된 것이지요.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일단 이 기호는 ‘피엑스’(PX)라고 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엑스피(XP)도 아닙니다. 그리스어 ‘크리스토스’(ⅩΡⅠΣΤΟΣ)의 앞에 두 글자를 따서 만든 기호지요. 바로 ‘그리스도’를 뜻하는 기호입니다. 글자라기보다는 기호다보니 ‘그리스도’라 불러도 되고, 사용한 글자대로 읽자면 ‘키’(Ⅹ)와 ‘로’(Ρ)를 합친 것이기에 ‘키로’라 읽을 수 있습니다. ‘키로 십자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문자를 합친 기호를 모노그램이라 하는데요. 특별히 ‘키로’처럼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모노그램을 크리스토그램(Christogram)이라 합니다. 크리스토그램에는 ‘키로’ 외에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IHS’ 혹은 ‘IHC’는 예수(ΙΗΣΟΥΣ)의 그리스어 표기의 첫 3글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시그마(Σ)가 발음을 따른 S와 모양을 따른 C로 변형된 것이지요. 그리고 ‘IC XC’는 이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크리스토그램입니다. 그리스어 ‘예수 그리스도’(ΙΗΣΟΥΣ ⅩΡⅠΣΤΟΣ)의 약자입니다. 이콘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동방교회에서 널리 쓰인 크리스토그램입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라 불렀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예수님의 이름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사제나 예언자, 왕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데,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를 예수님을 공경하는 고유한 칭호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임금이요, 사제이며, 예언자이시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자 메시아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하신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어딘가에서 크리스토그램을 발견하셨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24-04-28

[알기 쉬운 미사 전례] 파스카 초의 상징

제단 위에서 빛을 밝히는 파스카 초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옛 추억이 있습니다. 하얀 눈이 덮인 설악산을 보좌 신부님과 선배 신학생들과 함께 등산하면서,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서 없어진 길을 헤치며 오르다가 해가 떨어지며 어두워지는 즈음에 만난 ‘산장의 불빛’이 파스카 초 촛불에 오버랩됩니다. ‘어둠의 골짜기’(시편 23,4)에서 만난 희망의 빛이었지요. 예전에는 ‘파스카 초’를 ‘부활 초’라고 했었는데, 현재 전례서에서는 ‘파스카 초’라고 합니다. 이유는 라틴어 ‘Cereus paschalis’를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파스카 신비에서 하나의 사건인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된 수난과 저승에서 살아나신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의 파스카 신비’(「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7항) 전체를 드러내는 초의 상징성을 제대로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파스카 초의 유래는 어떤가요? 이 초는 파스카 성야를 많은 횃불로 밝히던 초대교회에 널리 알려진 관습에서 유래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 크기의 초로 파스카 성야 동안 하느님의 집에 필요한 빛을 밝히던 로마 관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축복하는 관습은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로마 바실리카에서만 국한된 관습이었으며, 5세기까지는 교회 전체에 퍼지지 않았습니다. 갈리아 전례에서 파스카 초는 단 하나의 큰 초로 제한했으며, 갈리아의 신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한 상징성을 지닌 우의적인 요소들로 초는 장식됐습니다. 그 요소들로써 다섯 개의 향 덩이로 이루어진 십자가와 알파와 오메가와 당해 연도는 자유재량으로 남았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모든 거룩한 밤샘 전례의 어머니’라고 칭송한 거룩한 밤인 파스카 성야에 봉사자들은 성당 앞에 쌓여 있는 장작더미에 불을 지피고, 주례자는 그 불을 축복하여 파스카 초에 옮겨 붙임으로써 전례가 시작됩니다. 이 파스카 초는 칠흑같이 어두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행렬 맨 앞에서 행렬을 이끕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하시고 밤새 앞장서 이끄시며 자유를 향해 밝혀주셨던 불기둥을 연상시킵니다.(탈출 13,21 참조) 다른 한편으로 파스카 초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전에는 자연적으로 불을 얻기 위해 부싯돌의 불꽃으로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 불꽃은 돌무덤의 어둠에서 부활하시어 걸어 나오는 그리스도를 연상시킵니다. 파스카 초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파스카 초를 선두로 제대를 향해 들어가는 행렬은 세 차례에 걸쳐 멈추어 서고, 그때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독서대 옆이나 제단 안에 마련된 촛대에 파스카 초를 놓은 다음, 빛의 예식을 마무리하는 ‘파스카 찬송’(Exsultet)을 독서대에서 노래합니다. 곧 파스카 초를 옆에 놓은 독서대는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전례 공간입니다. 부활 시기 동안에 독서대 옆이나 제단에 마련된 촛대에 놓여있는 파스카 초는 성령 강림 대축일이 지난 후에는 성당에 세례대가 있으면 그 옆에 둡니다. 세례식에서 세례자에게 촛불을 켜줄 때, 파스카 초에서 불을 당겨주고, 장례미사 때에는 파스카 초를 고인의 머리맡에 놓는 까닭은 신앙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곧 교회는 신앙인 모두가 세상에서 ‘파스카 초’가 되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존재이길 기원하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2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스카풀라는 원래 옷이다?

스카풀라를 아시나요? 성물방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데요. 보통 성모님 그림이나 글귀가 적힌 두 개의 작은 천이 긴 끈으로 연결된 형태의 물건입니다. 스카풀라는 생김새 때문에 ‘목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 스카풀라는 목걸이가 아니라 옷입니다. 수녀님들이나 수사님들이 꼭 앞치마 비슷하게 몸 앞뒤로 길게 걸쳐 입고 있는 옷을 보신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옷이 바로 스카풀라입니다. 스카풀라(scapula)는 라틴어로 ‘어깨’라는 뜻입니다. 어깨너비의 천을 몸 앞뒤로 길게 늘어뜨려 입는 소매 없는 겉옷이기에 이런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스카풀라는 초기에는 수도자들이 일할 때 수도복 위에 걸쳐 입는 옷이었는데요. 점차 어깨에 지는 십자가와 멍에를 상징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각 수도회의 영성을 따르고자 하는 평신도들도 13세기경부터 스카풀라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16세기부터 점차 간소화되고 작아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착용하는 스카풀라의 모습이 됐습니다. 특별히 스카풀라 하면 ‘성모님’이 떠오릅니다. 성물방에서 파는 스카풀라들도 성모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곤 하지요. 스카풀라와 성모신심이 깊은 연관을 지니게 된 것은 1251년 가르멜수도회 성 시몬 스톡 신부님께 성모님이 발현하시면서부터입니다. 성모님은 스톡 신부님께 갈색 스카풀라를 보여 주면서 “이 스카풀라를 죽는 순간까지 착용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특권을 누릴 것이며, 그가 죽은 후 첫 번째 토요일에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천국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스톡 신부님께 나타난 성모님만 스카풀라를 언급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1917년 10월 13일 포르투갈 파티마에 나타난 성모님은 묵주와 함께 스카풀라를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파티마 성모님을 목격한 가경자 루치아 산토스 수녀님은 이것이 “모든 사람이 스카풀라를 착용하도록 하려는 까닭”이라면서 “스카풀라는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대한 봉헌의 표시이며 스카풀라와 묵주는 분리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보통 스카풀라라고 하면 갈색을 떠올립니다. 수도복에서 온 것이니 갈색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녹색 스카풀라도 있습니다. 1840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쥐스틴 비스케뷔뤼(Justine Bisqueyburu) 수녀님에게 나타난 성모님은 녹색 스카풀라를 보급할 것을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믿음을 지니고 (녹색) 스카풀라를 착용하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신앙이 없는 이들과 냉담한 이들을 회개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카풀라는 언제까지나 옷일 뿐입니다. 스카풀라가 아니라 스카풀라를 착용한 사람의 신앙생활이 더 중요하겠지요. 가르멜 수도회 윤주현(베네딕토) 신부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착용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부적처럼 여긴다면 왜곡된 신심에 빠질 수 있다”면서 “성모님의 마음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을 스카풀라를 통해 늘 상기시키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04-21

[알기 쉬운 미사 전례] 복음의 탁월함

‘우월’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예전 어머니들이 자식을 야단치면서 주변에서 보기 쉬운 비교 대상이자 자기 자식이었으면 하는 허상인 ‘엄마 친구 아들’(엄친아), ‘엄마 친구 딸’(엄친딸)을 말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비교 우위를 말할 때 ‘우월’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반대로는 ‘열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교급의 ‘우월’보다는 최상급인 ‘탁월’이 복음에 더 적합한 수식어가 아닐까 합니다. 말씀 전례의 전체적인 구성은 ‘복음 선포’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제1독서 구약, 화답송, 제2독서 서간서, 복음환호송으로 이어지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대화 구조는 ‘복음’에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이러한 배치로 신구약 성경과 구원 역사의 단일성이 밝혀지고, 그 중심에는 파스카 신비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교우들이 인지 했든 못했든 교회는 전례에서 복음의 탁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예식을 행합니다. 백성 전체의 일어섬, 복음 준비 기도, 향과 촛불 행렬, 교우들에게 인사, 십자 표시, 복음집 분향, 복음 후 기도, 복음집 강복 등은 모두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요약하면 복음을 통해 현존하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준비, 환영, 존경, 경청, 감사, 결심, 간청 등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 환호송(알렐루야)을 부를 때는 모든 이가 일어섭니다. 이는 복음을 선포하러 오시는 주님께 대한 존경심과 환영을 드러내며, 그분 말씀을 경건히 경청하여 실천하겠다는 자세입니다. 복음을 봉독할 부제는 주례자 앞에 나아가 고개를 숙이고 축복을 청합니다. 부제가 없는 경우에는 주례자가 제대에 허리를 굽히고 속으로 “전능하신 하느님, 제 마음과 입술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합당하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은총을 청합니다. 이 기도는 11세기경 미사에 들어왔으며, 이사야서 6장 5-7절의 소명 기사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부제는 제대로 가서 입당할 때 들고 온 「복음집」을 높이 들고 향로와 촛불을 든 복사들과 함께 독서대로 갑니다. 이런 성대한 행렬은 고대 로마의 황제 행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복음집」에 존경과 예우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복음집」은 주일과 의무 축일 미사 때 봉독하는 복음만 수록해 놓은 전례서로, 동방과 서방의 전례 전통에서는 늘 「복음집」과 「미사 독서」를 구별했습니다. 복음을 봉독하는 부제나 사제는 독서대에서 먼저 교우들에게 인사합니다. 12~13세기에 도입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는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복음을 선포하심을 암시하며, 다른 때와 달리 손을 벌리지 않습니다. 복음 선포자는 복음서와 이마, 입술, 가슴에 십자를 그으면서 복음 명칭을 알립니다. 복음의 참 저자는 하느님이시고, 복음사가는 오직 그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기에 “○○○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교우들은 “주님, 영광 받으소서”하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분향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반면에,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금요일의 수난 복음 봉독 때에는 복음 전 인사, 십자 표시, 분향, 촛불 등이 모두 생략됩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죄인이 되어 수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일시적으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예식들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전례에서 선포된 복음의 탁월함은 이런 예식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살아있는 복음집’인 우리들을 통해 드러날 때 그 탁월함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21

[교회 상식 팩트 체크] (15) 부활삼종기도는 원래 성모찬송이다?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1년 중 50일 동안 바치는 기도가 있지요. 바로 부활의 기쁨을 가득 담은, 마치 노래와도 같은 기도, 부활삼종기도입니다. 부활삼종기도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말씀처럼, 부활의 기쁨과 즐거움이 담겨 있기에, 예전에는 희락삼종경(喜樂三鐘經)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삼종기도는 무릎을 꿇고 바치는 기도지만, 기쁨을 드러내는 이 기도는 늘 일어서서 바쳐야 합니다. 아무래도 삼종기도(안젤루스) 대신 바치다보니 부활삼종기도는 삼종기도 중 하나라 여기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활삼종기도는 교회의 오랜 역사 안에서 기도해온 성모찬송 중 하나입니다. 찬송은 라틴어 안티포나(Antiphona)를 번역한 말입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공적기도인 시간전례, 즉 성무일도 중 시편과 찬가 전후에 바치는 짧은 노래 선율과 그 기도문을 말합니다. 중세의 수도자들은 성무일도의 끝기도를 바친 후에 성모님을 위해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이것이 성모찬송이 됐습니다. 오늘날 「성무일도」 책에는 5가지의 성모찬송이 실려 있습니다. 끝기도 후에는 성모찬송 중에서 선택해서 바칠 수 있는데요. 주로 전례시기에 따라 성모찬송을 바치게 됩니다. 대림·성탄 시기에는 ‘알마 레템토리스 마테르’(Alma Redemptoris Mater)를, 성탄 이후부터 재의 수요일까지는 ‘아베 레지나 첼로룸’(Ave Regina Caelorum)을, 부활 시기에는 ‘레지나 첼리’(Regina Caeli)를, 연중시기에는 ‘살베 레지나’(Salve Regina)를 바칩니다. 그리고 ‘숩 투움’(Sub Tuum)을 바칠 수도 있습니다. 성모찬송은 「성무일도」에만 실려 있는 기도는 아닙니다. 한국교회 공인 기도서인 「가톨릭 기도서」에도 여러 성모찬송이 실려 있습니다. 특별히 ‘살베 레지나’는 신자들에게 성모찬송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기도인데요. 많은 신자분들이 묵주기도의 마지막에 바치는 성모찬송이며, 「가톨릭 기도서」에도 ‘성월 기도’ 중 ‘묵주기도 성월’에 분류돼 있습니다. 그리고 ‘숩 투움’(Sub Tuum)은 ‘일을 마치고 바치는 기도’(성모님께 보호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성무일도」에는 1971년에 추가된 성모찬송이지만, 실은 이미 3~4세기경부터 신자들이 바쳐온, 오래된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활삼종기도’로 바치는 성모찬송이 ‘레지나 첼리’입니다. 레지나 첼리는 10~11세기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1742년 베네딕토 14세 교황님이 부활 시기 동안에는 삼종기도 대신 레지나 첼리를 바치자고 정하면서 ‘부활삼종기도’가 됐습니다. 교황청 경신성사부는 「대중 신심과 전례에 관한 지도서: 원칙과 지침」을 통해 “(부활삼종기도는) 말씀의 강생 신비와 파스카 사건을 적절하게 결합시키고 있다”면서 “교회 공동체는 성자의 부활을 기념해 이 기도를 성모님께 바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2024-04-14

[알기 쉬운 미사 전례[(15) 복음 환호송과 부속가

‘굶는다’는 것은 주로 먹는 것에 사용하는 동사이지만, 어떤 것을 꾹 참고 기다리는 상황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순 시기에 가톨릭신자들은 미사 중에 두 가지, 곧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굶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수난받고 묻혔다가 부활하신 사건을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때에 웅장한 악기 연주와 함께 장엄하게 노래로 부르기 위해서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아꼈던 거지요.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부터 파스카 성야 전까지는 ‘알렐루야’ 대신에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또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등을 복음환호송의 후렴구로 사용합니다. ‘하느님(ia)을 찬미하라(allelu)’는 뜻의 ‘알렐루야’(alleluia)는 시편에서 사용되던 고대의 전례 환호로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모두의 전례적 유산에 속합니다. 서방의 여러 지역에서는 4세기 말 복음에 앞서 화답하는 후렴인 알렐루야가 50일 동안 곧 부활절부터 오순절(성령강림)까지 불렸고, 아프리카에서는 이 시기를 ‘알렐루야 시기’라고까지 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말로 하지 않고, 말 없는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라고 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설명에 가장 적합한 것이 환호의 알렐루야일 겁니다. 부활 시기 50일 동안 바치던 알렐루야를 대 그레고리오 교황(재위 590~604년)의 전례 개혁을 통해 연중 주일에도 알렐루야를 노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황께서 모든 주일이 주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 대축일과 동일시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알렐루야의 ‘야’(ia)는 지금은 ‘주님’으로 번역하는 ‘야훼’를 의미하며 이를 음악적 용어로 ‘유빌루스’(Jubilus, 환희)라고 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성가로 ‘알렐루야’를 부르는 경우, 특히 ‘야’(ia)의 음절에 많은 음을 사용하여 길고 화려하게 부르는 멜리스마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이후 점차로 ‘야’(ia)가 지니고 있던 멜로디와 여기에 추가된 새로운 가사가 별도의 노래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부속가’(Sequentia)입니다. 9~10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부속가는 16세기에는 수천 곡에 이르게 되어 전례에 혼란을 야기했고,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부속가를 4곡, 곧 주님 부활 대축일의 ‘파스카의 희생께 찬미를’, 성령 강림 대축일의 ‘오소서, 성령이여’,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시온아, 찬양하라’, 그리고 위령의 날의 ‘분노의 날’로 제한합니다. 여기에 1727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재위 1724~1730)에 의해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15일)의 ‘십자가 아래의 어머니’가 추가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의 전례 개혁으로 부속가는 모두 4개로 제한됐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의 부속가는 의무이고,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의 부속가는 선택입니다. ‘십자가 아래의 어머니’(Stabat mater)의 11절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각 처를 이동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사용하여 귀에 익습니다. 미사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위령의 날 부속가인 ‘분노의 날’(Dies irae)은 성무일도 연중 제34주간 독서기도 찬미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알렐루야를 뒤따르던 부속가가 지금은 전례적 흐름 때문에 알렐루야 앞으로 배치된 것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14

[교회 상식 팩트 체크] (14) 묵주로 바치는 또 다른 기도가 있다?

성당에 가면 묵주를 들고 기도하시는 분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묵주알을 넘기는 속도가 남다르신 분들을 볼 수 있는데요. 성모송을 아무리 빠르게 외워도 그렇게 빨리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기도를 하시는 걸까요? 어쩌면 그분은 묵주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자비를 구하는 기도(이하 자비의 기도)’를 바치고 계시는 걸지도 모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0년 성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M. Faustyna Kowalska, 1905~1938) 수녀님을 시성하면서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선포하셨는데요. 파우스티나 수녀님의 환시 속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에 관해 가르치셨고, 또 이 신심을 널리 퍼뜨릴 것을 당부하면서 자비의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묵주는 전통적으로 묵주기도(로사리오기도)를 바치는 도구입니다. 파우스티나 성녀도 묵주기도를 많이 바치셨고요. 자비의 기도는 묵주기도와는 다른 기도입니다만,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고자 한다면 묵주를 사용해서 자비의 기도도 바칠 수 있습니다. 자비의 기도를 바칠 때는 성호경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먼저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1번씩 바칩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에 해당하는 1개의 묵주알에서 “영원하신 아버지, 저희가 지은 죄와 온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바치나이다”라고, ‘성모송’에 해당하는 10개의 묵주알에서 각각 “예수님의 수난을 보시고,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묵주기도처럼 1개와 10개의 묵주알이 넘어가면 1단이 됩니다. 자비의 기도는 모두 5단을 바치게 되는데요. 5단을 마친 후에는 “거룩하신 하느님, 거룩하신 용사님, 거룩하신 불사신,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를 3번, “오, 예수 성심, 저희를 위하여 피와 물을 흘리신 자비의 샘이신 주님, 저는 주님께 의탁하나이다”를 1번 바치고 기도를 마무리하면 됩니다. 주교회의는 2022년 춘계 정기총회에서 ‘하느님 자비를 구하는 기도’의 통일된 변역문을 승인했습니다. 예수님은 파우스티나 수녀님을 통해서 “마음이 완고한 죄인이라도 이 기도를 한 번만 바치면 그는 나의 무한한 자비로부터 은총을 받을 것”이라면서 “나는 온 세상이 나의 무한한 자비를 알게 되기를 갈망한다”고 전하셨습니다. 특별히 자비의 기도를 바친 사람이 임종할 때, 또 임종하는 영혼을 위해 기도해 줄 때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자비의 기도는 특별히 오후 3시에 바치면 좋은 기도입니다. 오후 3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우스티나 수녀님에게 “오후 3시에 나의 자비 속으로 잠겨들라”고 명하시면서 “이 순간에 나의 자비는 모든 영혼들을 위해서 넓게 열려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 자비 신심을 전하는 천주교사도직회(팔로티회) 한국지부장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는 “예수님께서는 파우스티나 수녀님을 통해서 자비의 기도를 널리 전하라 가르치시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약속을 해주셨다”며 자비의 기도의 중요성을 설명하셨습니다.

2024-04-07

[알기 쉬운 미사 전례] (14)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시는 하느님! 화답송

여러분은 언제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아버지, 어머니 사랑해요’라고 했나요? 저의 경우에, ‘아버지, 사랑해요!’라는 처음 사용한 것은 군대에서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에서입니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대부분 가는 군대에서 힘든 훈련을 받으면서, ‘아버지도 이런 힘든 훈련 과정을 거치셨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병상련의 마음에서, 그동안 저에게 베푸신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감사함이 흘러나왔던 것이지요. 사람의 관계는 서로 주고받으면서 형성되고 더욱 굳건해집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 사이의 대화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말씀 전례에서 ‘화답송’은 그 말 그대로 하느님이 먼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그에 따른 구원의 사건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응답의 노래입니다. 화답송은 말씀 전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며, 전례적으로 사목적으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화답송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묵상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사목자는 화답송에서 바치는 시편의 내용을 연구하여 교우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소위 ‘화답 시편’(Psalmus Responsorius)은 고대 유다인들이 회당 예배 중에 성서를 봉독하기 전이나 후에 시편을 읊던 관습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4세기경에는 대부분 지역에서 독서 후에 시편이나 창작 성가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다. 그런데 4세기 이후에 교리적 이유로 대부분의 창작 성가가 폐지됨에 따라 시편은 교회의 공식 성가로 굳어졌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저서나 대 레오 교황의 강론에서 화답 시편으로 불렀던 구절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초기 화답송은 독서대에서 불렀는데, 7세기경부터 서방 전례의 중심이 로마에서 프랑크 지역(현재의 프랑스와 독일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 노래와 복음의 등급 차이를 드러내려고 층계에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층계’(Gradus)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의 ‘층계송’이라는 명칭이 생겼고, 층계송을 모은 성가집을 ‘Graduale’라고 했습니다. 현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 개혁을 통해 본래의 의미를 살려서 ‘층계송’이 아니라 ‘화답송’(Responsorium)이라는 용어를 되찾았으며, 고유한 몇 가지 특징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첫째, 대부분의 화답송은 시편으로, 일부는 성서 찬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째, 모든 화답송은 제1독서를 염두에 두고 선택한 것으로 그 내용에 있어서 제1독서와 조화를 이룹니다. 셋째, 화답송의 내용은 말씀을 들려주신 하느님께 올리는 찬미, 감사, 고백, 결심, 청원 등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넷째, 반복하여 부르는 후렴은 화답의 기능을 강화하며, 화답 시편의 주요 구절이나 그에 상응하는 환호로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들려주시고 사랑을 풍성히 내려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응답인 화답송은 전례에서 울려 퍼지고, 더 나아가 우리의 삶 자체가 화답송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베트남의 응우옌 반 투안 추기경은 오랜 감옥살이를 통해 얻은 신앙의 지혜를 담은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에서 참된 응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적 삶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에 가장 참되게 응답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일에 자신의 열정을 쏟으며 인정받기를 원하는 뿌리 얕은 신앙인이 되기 쉬움을 통찰하는 영적 가르침이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07

[교회 상식 팩트 체크] (13) 부활 ‘전야’ 미사는 없다?

전례주년의 절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님 부활 대축일이 왔습니다. 우리는 주일이 되기 전날 어두운 밤, 미사를 통해 부활초에 불을 밝히는데요. 바로 파스카 성야 미사입니다. 부활 전날 밤에 드리는 미사다보니, 많은 분들이 이 미사를 ‘부활 전야 미사’라고 부르시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미사, 부활 전야 미사가 아닙니다. 전야(前夜)라고 하면 전날 밤인데, 어째서 전날 밤에 드리는 파스카 성야 미사가 어째서 ‘전야’ 미사가 아닌 것일까요? 그렇다면 일단 파스카 성야 미사가 어떤 미사인지를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파스카 성야 미사는 크게 4개 부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먼저 제1부 빛의 예식이 있습니다. 이어 제2부 말씀 전례가 거행되는데, 독서를 무려 9번이나 합니다. 사목적 이유가 있으면 구약 독서를 줄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어느 미사보다 독서 개수가 가장 많습니다. 제3부는 세례 전례입니다. 영세자가 없더라도 세례 서약 갱신 예식을 하지요. 그런 후에야 성찬 전례가 거행되는 장엄하고 성대한 예식입니다. 예식이 많다 보니 미사 시간이 참 깁니다. 왜 이렇게 길까요? 그 이유는 파스카 성야 미사가 원래 주님 부활 대축일 전날 밤부터 시작해서 주일 동틀 무렵까지 이어지는 미사였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다 보니 파스카 성야 미사는 “모든 밤샘 전례의 어머니”라고도 불리고요. 무엇보다 교회는 파스카 성야 미사를 “모든 장엄한 예식 가운데 가장 드높고 존귀하다”고 말합니다.(「로마 미사 경본」 파스카 성야 2항 참조) 이쯤 설명하면 눈치를 채신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실은 파스카 성야 미사가 곧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입니다. 밤샘 전례를 하던 시절에는 주님 부활 대축일인 주일에는 전례를 따로 거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축일 미사를 대축일 ‘전야’ 미사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 성탄 대축일을 생각해 보면 또 궁금증이 생깁니다. 성탄 전례에는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인 ‘밤 미사’도 있고, 또 ‘전야 미사’도 있는데, 부활 전례에는 없는 걸까요? 이는 우리가 ‘부활’만을 따로 떼어 기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탄은 예수님의 탄생만을 기념하지만, 우리는 파스카 성삼일이라는 연결된 전례를 통해서 “주님의 복된 수난과 함께 이 부활 축제를 가장 장엄하게 지내고” 있습니다.(「전례헌장」 102항) 파스카 성야 미사는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일의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라는 또 다른 전례로 부활 축제를 이어갑니다. 그러다 보니 “성야 미사를 드렸다면, 낮 미사는 참례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라는 질문도 있는데요. 이 답은 어느 신부님의 말씀을 빌리고 싶습니다. “파스카 성야 미사를 드리면 좋은 일이고, 낮 미사도 드리면 더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과 더 좋은 일 중 선택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2024-03-31

[알기 쉬운 미사 전례] (13) 독서대와 독서자

1980년대 초까지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에는 한국에서 유일한 ‘설교대’(pulpitum)가 제대를 바라보며 오른쪽 세 번째 기둥에 있었습니다. 현대적 음향 시설이 없던 시절, 성당 회중석 중간에 이런 ‘설교대’를 만들어 복음과 강론 및 특별한 설교를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했지요. 로마의 트라스테베레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Trastevere)은 ‘설교대’에 마이크를 설치해 여전히 복음 선포를 위하여 사용하는 전통과 발전의 조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미사의 말씀 전례는 독서대에서 주로 이뤄집니다. 「로마미사경본 총지침」에 따르면 “독서대에서는 오로지 독서들, 화답송, 파스카 찬송을 한다. 그러나 강론과 보편 지향 기도도 할 수 있다”(309항)라고 합니다. 화답송의 경우 ‘시편 담당자 또는 독서자가 시편 구절을 바치고, 일반적으로 교우들은 후렴을’(129항) 바칩니다. 한국 성당에서는 대개 해설자와 성가대가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각 성당에 가면 독서자가 독서대에 가면서 인사하는 곳이 있는데, 대개 세 곳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대입니다.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성사적 표지로 재현되는 곳이며, 미사에 모인 하느님 백성이 다 함께 참여하는 주님의 식탁’(296항)인 제대는 성찬례로 이뤄지는 감사 행위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집전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집전자의 인격 안에’(27항) 현존하시며, 이를 통하여 집전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회중을’(30항) 이끌어 거룩한 백성 전체와 모든 참석자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칩니다. 세 번째는 독서집이지요. 하느님 말씀을 전례 주년에 따라 배분한 독서집을 하느님 말씀을 대하듯 인사합니다. 이렇게 인사하는 곳이 각기 다른 이유는 현재 전례 규정에 독서자가 인사해야 하는 곳에 대한 지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각 교구에서 관련 지침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제가 미사를 드리기 위해 입당하여 제단 아래에서 제대를 향하여 인사하는 것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퇴장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독서자도 독서를 하기 위해 제단 위 독서대로 오르기 전과 후, 제대에 인사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부활 시기에 명동대성당을 가보면 파스카 촛대가 독서대 옆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성주간 파스카 성삼일」 예식서에 “부제는 독서대 옆이나 제단 안에 마련된 큰 촛대에 파스카 초를 놓는다”(195쪽)는 지침에 의한 것이며, 파스카 촛대를 파스카 선포 장소인 독서대 옆에 두는 오랜 교회 전통을 강조한 배치입니다. ‘용약하여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로 시작하는 파스카 찬송이 부제나 사제의 입을 통해 독서대에서 울려 퍼지며 그 옆에 어둠을 이기고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파스카 초 촛불이 타오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찬미의 시간입니다. 성당에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공간, 독서대는 이미 구약의 느헤미야서에서 미리 보여졌습니다.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물 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가 ‘나무 단 위에’(느헤 8,4) 서서 낭독하는 율법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건이 선포되는 독서대를 향해 집중하여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고 있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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