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버려라!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9,34) 또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한 마디로 자기 자신과 소유를 다 버려야 당신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버리다’는 ‘갖다’, ‘소유하다’, ‘모으다’의 상대어다. 흔히 우리는 무언가를 갖고 소유하고 모으고 싶어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욕구와는 반대된다. 이런 면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철저한 포기를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인(Christianos)은 ‘그리스도의 추종자’, ‘그리스도의 제자’를 뜻한다. 따라서 ‘버리라’라는 요구는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한다. 단 부르심에 따라 버리는 방법과 정도에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수를 따르는 길 복음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마태 19,27)라고 말한다. 실제 어부였던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그분을 따랐다. 그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삶의 터전과 가족을 떠났다. 어부에게 그물과 배는 생계를 위한 유일한 수단임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다. 이런 철저한 포기는 십자가를 지고 스승을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의 부르심, 특히 수도자나 사제로의 부르심은 일종의 소명이다. 그래서 직업 의식이 아닌 소명 의식이 필요하다. 소명 의식이 없을 때 단순히 한 직종을 선택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성소의 고귀함과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다. 사제직이나 수도 생활은 결코 일신의 영달이나 개인의 이상 실현을 위한 방편도 아니고, 생계를 위한 직종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며 예수를 따라 하느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삶으로의 부르심이다. 사막에서의 포기 일부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실 사막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자신의 고향과 환경, 가족과 친지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기는 고향과 가족에 대한 집착과 온갖 세상 근심·걱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아르세니우스와 같은 귀족 출신의 인물에게는, 화려했던 이전 삶의 조건을 포기하기 위한 영웅적 결단이 필요했다. 사막 수도승들의 포기는 철저하고 근본적이었다. 그들이 버린 것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었다. 예컨대, 부와 권력, 명예, 세상의 가치, 옛 생활 습관(악습), 온갖 인간적 집착과 애착 등이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고)과 의지도 버렸다. 수도승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하느님을 찾는 데 전적으로 투신하기 위해 자신과 세상 쾌락과 재물을 포기해야 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90쪽) 이는 사랑 때문에 사랑에 응답하려는 노력이었다. 이 응답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는 금욕적 노력이었다. 세 단계의 포기 카시아누스는 성경의 권위와 사부들의 전통에 따라 수도승이 실천해야 하는 세 가지 포기를 이야기한다. “첫째 포기는 현실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부와 재물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둘째 포기는 과거에 가졌던 마음과 육신의 습관과 악행과 감정을 배척하는 것이다. 셋째 포기는 우리 마음이 현세적이고 가시적인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직 미래의 것을 바라보며, 볼 수 없는 것을 열망하는 것이다.”(담화집 3,6) 이를 외적 포기, 내적 포기, 관상적 포기라고 한다. 포기는 수도승을 끊임없는 기도로 이끌어준다. 포기와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마음의 순결을 얻은 수도승은 순수한 기도로 나아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하느님 나라에 도달한다. 따라서 이러한 포기 없이는 끊임없는 기도도, 마음의 순결도, 순수한 기도도, 하느님과의 일치도, 하느님 나라도 불가능하다. 이것이 카시아누스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사막 교부의 가르침이다. 포기하는 자 어느 날 대(大)마카리우스가 우연히 만난 수행자들에게 “내가 어떻게 수도승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그들이 말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수도승이 될 수 없습니다.”(대(大)마카리우스 2) 그래서 카시아누스에 의하면, 수도승은 ‘포기하는 자’(Renuntians)로 불렸다.(규정집 4,1) 다시 말해 수도승은 ‘버리는 자’인 것이다. 독방에 하느님의 것을 가지고 있는 수도승은 이 세상 것을 포기한다. 사실 어떤 원로의 말처럼, 무소유의 감미로움을 맛본 사람은 의복과 물 주전자까지도 거추장스럽다. 그의 정신은 이제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46쪽) 사막 교부들은 자기 뜻의 포기도 강조한다. 테베의 압바 요셉은 이렇게 말했다. “주님 앞에 값진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아프고 유혹을 당할 경우 감사하게 그것을 맞이하는 것, 어떤 인간적인 것도 중히 여기지 않으며 하느님 현존 안에서 자신의 모든 일을 순수하게 수행하는 것, 끝으로 자기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영적 사부 밑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것으로 정말 고결한 왕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테베의 요셉 1) 압바 모세는 자기 뜻을 포기할 때, 하느님은 그와 화해하시고 그의 기도를 받아들이신다고 말한다.(모세 4) 압바 포이멘도 ‘인간의 의지는 그와 하느님 사이의 황동 벽이자 걸림돌’(포이멘 54)이라고 하면서 자기 뜻의 포기를 강조하고 있다. 버리는 훈련 ‘버리는 것’은 예수를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유한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자기 뜻조차 내려놓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기가, 예수의 참된 제자로 살기가 그토록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버리는 것, 내려놓는 것은 연습이 필요한 일종의 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 하지만 세월과 더불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지키려 너무 많은 시간과 힘을 쏟고 있다. 우리가 집착하는 이 세상 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져 갈 것이다. 우리 역시 이 지상 여정을 마칠 때 여지없이 우리가 소유하고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놓을 수밖에 없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하느님 외에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바로 버리는 지혜, 내려놓음의 지혜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깨끗함’의 새로운 의미

마태오복음 5장 27, 28절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는 말씀을 불러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뵐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 ‘깨끗함’을 제시하시며, 구약 전승의 깨끗함과는 다른 의미를 말씀하셨다. 구약에선 ‘깨끗함’을 주로 생리학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성적인 불결함과 연결시켜 정결례(제의적 ‘깨끗함’)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자선과 기도, 단식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고, 조상 전통 논쟁(마태오복음 15장, 마르코복음 7장, 루카복음 11장)과 겸손과 봉사를 촉구하는 장면에서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는 마라”(마태 23,1-12; 마르 12; 루카 20 참조)라고 하시며, ‘깨끗함’을 새롭게 정의하셨다. 결국 마음의 그릇을 더럽히는 것은 탐욕(감사하지 못할 때)이며, 자족하는 마음이 없을 때 그리고 자비 즉 연민(자비, 긍휼)의 마음이 없을 때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새로운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베드로는 세례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1베드 3,21 참조)이라고 말한다.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내면, 곧 성령에 따른 삶과 육에 따른 삶의 대립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깨끗함은 ‘성령(Spirito)에 따른 삶’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 두 대립은 사실 성령과 함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또한 성령께서 원하신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육은 보이는 물리적인 몸이지만, 성으로 축소된 의미가 아니라, 외적인 인간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가 이해한 깨끗함은 윤리적인 덕이면서 성령이 주는 선물의 열매다. 바오로 사도는 존재론적 차원(육과 영), 윤리적 차원(윤리적 선과 악), 성령론적 차원(은총의 세계 안에서 하시는 성령의 활동) 등이 서로 겹치고 포개지는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인간은 초월성을 지니고 있고 이 초월성을 통해 자신을 확장시키는데, 자신의 욕망 안에 갇히면 초월성은 어려워진다. 초월성은 내적 힘이며 창조적 힘이다. 카롤 보이티와(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는 「부성의 광채」에서 아담의 한탄을 말한다. “우리 사이의 유대 중 너무나 많은 것들이 외적인 것이다. 내적인 유대는 너무나 적다. … 너는 아주 가까이 있지만 내 안에 아주 조금밖에 살지 않는다.” 부정적 욕망이 커지면 바라보는 시선, 가치 평가, 사랑의 방식이 이성에 의한 갈망보다는 감성적 영역에서 오는 힘에 압도될 수 있다.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관한 질문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육의 생활에서 탈출한 영에 따른 삶은 해방이요 새로운 창조다. 새로운 창조란 자녀 됨을 말한다. 자유가 선물로 주어진 해방된 삶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준 선물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나의 동참 없이는 불가능하다. 일상에서의 내 선택 하나하나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파스카다. 이는 죽음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로 가는 부활의 형태를 지니기 때문이다. 교회 윤리는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결국 ‘거룩한(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는 초대다. 거룩함의 근원은 이미 내 안에 내재해 있고, 나는 ‘깨끗함’을 통해 몸의 의미를 발견하고 실현한다.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깨끗함은 근원적 진리에 동참하고, 거룩한 삶의 양식을 가능케 하는 성화, 의화, 신화의 여정에 있는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0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하느님의 자유에 기초한 인간 자유의 충만함

현대의 몇몇 사상가들은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구속하거나 제한하는 신이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하느님의 섭리를 인정한다면 인간의 자유는 인정할 수 없다’는 신학적 결정론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 안에서는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모두 인정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주제를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에서 철저히 다루었다. 특히 모든 것을 잃고 상심했던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에서 신의 섭리를 고려하면 이해하기 힘든 선한 이들의 고통조차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밝힌다. 그러나 마지막 제5권에서 ‘전지전능한 신이 영원으로부터 모든 것을 예견하시므로 인간의 행동, 생각, 원의를 다 알고 계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산문 3) 보에티우스는 우연, 예지(豫知), 필연성 등의 개념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자유를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단순히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가 모순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을 넘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빛을 제공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하느님의 섭리 토마스에 따르면, 하느님의 실재는 인간의 자유와 양립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그 확실한 토대를 구성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을 창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창조주의 주권적인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는 하느님과 그의 피조물이 서로를 제한하는 경쟁자라는 잘못된 가정이 포함된다. 창조주는 피조물들의 본성에 폭력을 가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하시고 당신 피조물들을 존중하는 분이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의 존재 구조를 보존하면서 그들의 행위에 개입한다. “신적 운동을 통해서 필연적 원인으로부터는 결과가 필연적으로 뒤따르지만, 우연적 원인로부터는 결과가 우연적으로 뒤따른다. …하느님은 의지가 필연적으로 어느 하나로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운동이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인 채로 남아 있도록… 그렇게 의지를 움직인다.”(I-II,10,4) 토마스는 ‘영향을 미치는 것’(Immutare)과 ‘강요하는 것’(Cogere)을 구별하고, 하느님이 의지에 대해 강요할 수 있음을 부정하지만, 은총으로 그것에 영향을 미쳐 그것을 강화하거나 특정 대상들을 향하도록 만들 수 있음은 인정하고 있다.(「진리론」 22,8) 더욱이 하느님의 영원성은 신적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공존할 수 있게 한다. ‘영원성’은 “시작도 끝도 없는 지속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I,10,2) 만일 하느님이 시간 속에 있다면 그분의 전지함은 미래를 확실하게 예견하는 것을 포함하므로 인간은 하느님이 예견한 행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 로봇처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롭지 않게 되어 그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이며 인간의 기도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시간 속에 있지 않다면’, 그분은 문자 그대로 어떤 것도 ‘미리’ 아는 것이 아니며, 단지 현재 속에서, 우리에게는 과거나 미래인 모든 것을 그분 자신의 현재에서 알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특수한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분은 그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을 지켜보고 계실 뿐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사하신 가장 소중한 선물인 자유 인간의 모든 행동이 아니라 최종 목적에 비례하는 행동만이 인간을 그 목적 안에서 완성되도록 인도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에 의존되어 있다. 그의 자유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자유이며, 인간은 하느님의 자유에 참여하는 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는 빛이 색을 완성하는 것으로 비유된다. 빛은 모든 색을 초월하므로 모든 색을 완성한다. 하느님 또한 피조물을 초월하기 때문에 그분의 은총은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힘, 특히 인간의 자유의지까지도 완성한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을 향하는 가운데 선을 선택할수록 더욱 자유로워지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선물로 주신 소명을 실현할 수 있다. 만일 인간 존재자가 자신의 근원적인 원리를 망각하고 참된 진리에 접근할 가능성을 잃어버리면, 근대의 인간들이 지상 과제로 여겼던 온전히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유는 인간 자유의 근본 원천이다. 하느님의 자유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가 어떻게 해야 충만함에 이르는지 그 진정한 모델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더 큰 관계, 즉 자연과 절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참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로운 커다란 삼각형(하느님, 이웃, 자연)의 세 변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또한 자기 자유의 수행을 위한 한계와 규칙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자유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사하신 가장 소중한 선물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자기실현에 있어서 필수적이고 필요한 도구로 이해된다. 자유는 진리를 알기 위해, 그리고 선을 추구하도록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귀중한 선물이며, 자기 자신의 인격의 깊이를 실현하고, 보다 아름답고 참된 세상을 건설하라는 소명을 수행하기 위한 값진 도구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너’로 부르시며 당신의 협력자로 삼으시고 그가 자유로운 결정을 통해 이 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하신다.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자신을 이루어가는 일종의 ‘공동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자유라는 이 도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할 때, 인간 각자는 참된 자기완성과 아름다운 세계 건설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약하는 내적인 요인 중에서 감정과 충동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현대 심리학은 바로 전통적으로 ‘정념’(Passio)이라고 불렸던 인간의 감정이나 무의식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놀라운 지식을 축적해 왔다. 토마스는 이에 대해서 어떤 통찰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다음 호부터 집중적으로 인간의 정념을 고찰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에로스’와 ‘에토스’의 만남

살아가면서 가장 억울한 일은 왜곡된 진리를 ‘참’이라 믿고 살아온 경우일 것이다. 성에 대한 의미도, 에로스에 대한 앎도 그렇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원론적이고 결의론적으로 사물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대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근대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데카르트,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가 말하는 인간과 인간의 성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그리고 에로스의 본질적 의미가 어떻게 축소, 왜곡됐는지를 설명한다.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 계획이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모로 분명히 인간에게 부여된 것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로스라고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에로스를 독살했으며, 에로스가 완전히 죽지 않았더라도 점차 악한 것으로 변질됐다고 주장했습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항) 플라톤은 ‘에로스’를 좋은 것, 참된 것, 아름다운 것으로, 진·선·미를 향해 인간을 끌어당기는 내적 힘(이끌림), 인간 정신의 주체적 행위의 강도로 표현했다. 구약성경의 아가서는 에로스의 특징, 즉 스스로 만족하는 법이 없고 계속 찾아다니는 특성을 노래한 것이다. 사랑은 관능적이면서 영적이다. 다만 그 힘이 너무 강해 절제하고 정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에로스에 담긴 최종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관능적 영역에서 ‘에로스’와 ‘에토스’가 서로 달리하지도 않고, 대립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두 가지 모두 인간의 마음 안에서 서로 만나도록 부름 받았으며 이 만남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부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47과 5항) 좋은 것, 참된 것, 아름다운 것을 향해 인간을 끌어당기는 내적 힘은 마음에서 일어난 부르심이기에 강하다. 즉 내적 일치에서 실제적 일치로 향하게 하는 사랑은 영적이며 관능적이다. ‘몸 신학’은 인간 사랑(에로스)의 의미를 다시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에로스는 인간의 본성 자체, 곧 하느님께 뿌리를 둔 것이다. 에로스의 역동성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의 현실에 다가가는 동시에 친교의 문을 열면서 그들 사랑의 출발인 ‘근원적 사랑’을 바라보게 된다. 이는 에로스적 긴장과 역동성 안에 숨겨져 있는 신비다. 그러므로 욕망을 무조건 덮을 것이 아니라 그 목적지를 바라봐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창조의 신비 속에 포함된 근원적인 힘이 그들 각자를 위한 구원의 신비가 지닌 은총의 힘이 된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46과 5항) 창조의 신비 속에 들어있는 근원적인 힘이 자신을 위한 구원 신비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시선에서 자신 안에 움직이는 욕망을 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性)은 처음부터 방향성을 지니고 있지만 나의 지향에 의해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을 인격으로 바라본다면, 결코 성애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기능적인 역할로 격하시키지 않을 것이다. 성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면이 있고 그 힘이 강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최고 성소는 세상 모든 것과의 관계를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영원한 질서를 바라고 지키는 것에 있다. 최고의 성소에서 오는 빛은 인간이 에로스를 바라보게 했다. 이로써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그 역사에 사람과 사랑이 선물로 주어졌고 완성하도록 초대됐다. 그래서 에로스는 단순히 관능적 욕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 대한 갈망으로 발전되고 완성에 이르는 질서를 지녔다. 그러므로 갈망이 최종 목적지를 바라보고 정화를 거쳐 새로운 형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인간 마음이 지닌 복음적 가치와 의무

우리는 성적 표현의 여러 양상이 공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개방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성이 모두에게 선으로 체험되진 않는다. 단순히 쾌락과 순간적 감정에 몰입해 행동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에서 인식하고 바라보는지 개인의 의식과 사회적 분위기는 중요하다. “육의 욕망 영역에서 생기는 음욕은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모든 ‘역사적’ 인간이 경험하는 일종의 내적이고 신학적인 실재입니다. 역사적 인간이란 비록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지 못한다 해도 자기의 ‘마음’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는 사람입니다.”(44과 1항) 성적 욕구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긴 역사 동안 왜곡되고 숨겨져 왔다. 철학적 사조, 문화와 관습으로 성(性)의 의미를 축소·왜곡하거나 보지 못하게 덮었다. 만약 누군가 성(性)을 공론화한다면 그는 불순하고 품위 없는 사람, 덕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됐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 의미가 변질, 변형되게 한 원인으로 영지주의와 마니교를 말한다. 그들은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다. 영지주의는 정신을 선으로 육체를 악으로 단정하고, 육적인 인간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마니교는 물질과 육체를 악의 근원으로, 성은 단지 성적 위안을 줄 뿐 인격적 사랑의 길을 열어 주지 못한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들의 구원관은 그리스도 역사 전반에 걸쳐 몸에 대한 종교적 사고를 병들게 했다. 그래서 교황은 인간의 몸, 특히 성적인 모든 가치를 폄하, 평가, 이해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과 맞지 않다고 말한다. 교황은 육의 욕망 행위에서 더 근원적인 ‘갈망’을 보도록 한다. 갈망이 인간 존재의 주체성을 결정하면서 인격체로서 자신의 존엄성에 참여하는 요소라 말한다. 몸의 윤리적 의미를 ‘몸의 속량’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악은 몸의 근본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경항, 습관)과 관련되므로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는 뜻이고, 욕망에 든 진리가 무엇인지 질문하자는 것이다. “마니교적 태도는 결국 인간의 성을 ‘무가치하게’ 만듭니다.”(45과 3항) 몸과 성은 성사적이고 사랑은 인격이다.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며, 성과 관련된 행위, 감정, 욕망, 정체성 등은 두 사람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결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랑하는 이 안에 사랑받는 사람의 현존을 가능케 하는 사랑의 역동성이 있음을 뜻한다. 성을 통해 ‘너 내 안(Intus)에 있음’이 더 깊은 안(Interior)까지 파고 들어간다. 서로의 안에서 서로가 ‘나의’로 소속되고 ‘하나’ 됨을, 타자 안에 나의 세상이 만들어진 신비함을 이룬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교황은 남자에게 더 큰 책임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여자는 성과 생명 탄생이 연결됨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지만, 남성은 그런 변화를 체험하지 못하므로 성행위를 하나의 행위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몸으로 직접 성과 인간의 신비(잉태, 출산)가 연결된다는 것을 체험하는 여성이기에 더 진중하게 생각하고 성행위에 저항하는 마음도 크다. 인간의 선(Bonum)은 ‘최종 선(Bonum)’을 향해 있고, 인간 행위는 자신의 자유 안에서 이 선에 대한 응답을 찾는다. 성 또한 몸의 질서에 있다. 힘으로 열 수 없는 문이 하나 있으니 마음의 문이다. 힘으로 그를 꺾을 수는 있어도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그토록 존엄하고 귀한 나와 너가 서로 다른 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사랑을 드러내라!

4세기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간 일차적 동기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그들을 사막의 고독과 침묵 속으로 이끌었고 하느님만을 찾게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웃사랑을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사랑을 환대와 애덕 실천, 봉사와 섬김 등으로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압바 포이멘이 말했다. “모두에게 가장 유익한 일은 이 세 가지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 끊임없는 기도, 그리고 이웃에게 행하는 선입니다.”(포이멘 160) 사막 교부들은 독방의 고독 속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며 개인의 성화에만 열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압바 포이멘의 말대로 그들은 이웃에 대한 구체적 사랑 실천 역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웃에게 드러내는 사랑, 곧 선행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필수 불가결인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사막 교부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금언집에는 인간애를 보여주는 일화가 여럿 있다. 대표적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압바 아가톤은 말했다. “나병* 환자를 만나 그와 서로 몸을 교환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아가톤 26) 이런 생각과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과 사랑, 그리고 인간애 없이는 결코 나올 수 없다. 같은 암자에서 여러 해 동안 함께 지내면서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두 압바의 다음 일화도 깊은 상호 사랑을 보여준다. “한 압바가 다른 압바에게 말했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우리도 한번 다투어 봅시다.’ 그러자 다른 압바가 대답했다. ‘나는 어떻게 다투는지 모르오.’ 첫 번째 압바가 말했다. ‘보시오, 내가 우리 사이에 벽돌 한 개를 놓고 그것이 내 것이라고 말하겠소. 그러면 당신이 ‘아니오, 그것은 내 것이오’라고 말하시오. 그러면 이로 인해 다툼이 시작될 것이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사이에 벽돌 하나를 놓고 첫 번째 압바가 ‘그것은 내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압바가 ‘아니오, 그것은 내 것이오’라고 했다. 다시 첫 번째 압바가 말했다. ‘그것이 당신 것이라면 가져가시오.’ 이렇게 해서 결국 논쟁을 계속할 수 없어 다툼은 끝나버렸다.”(익명의 압바 352)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 두 압바는 싸움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여, 결국 싸움을 포기하고 말았다. 반면 우리는 싸움의 기술을 너무 잘 터득하여 매번 사소한 것으로 분노하고 싸우고 있지는 않은가? 방문객에게 드러낸 사랑 독수도승들은 누가 방문하면 주저 없이 자신의 고독과 침묵, 엄격한 삶의 질서를 깨고 손님을 환대했다. 방문객을 맞아들이는 것은 곧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며, 그에게 베푸는 환대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방문객의 성향이나 방문 목적을 불문하고 그를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처럼 환대했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사람의 첫째 의무는 단식을 깨고 방문객에게 식탁 봉사를 하고 함께 식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방문객에게 한 말씀이나 교훈적 담화를 통해 영적 활력을 되찾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의 회복도 도와주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빵과 물밖에 없는 독수도승은 손님에게 딱히 내놓을 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손님에게 더 좋은 식단을 제공하기 위한 음식을 따로 보관해 두었다. 사실 손님이 왔다고 오랫동안 유지해 온 자신의 질서와 규칙을 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님도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주인에게 규칙을 깨게 한 것에 사과하곤 했다. 그러면 주인은 이렇게 다정하게 대답했다. “나의 규칙은 그대에게 원기를 회복시켜 평화로이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익명의 압바 283) 어떤 원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내 뜻을 포기하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이중의 공로를 얻게 됩니다.”(익명의 압바 288) 손님의 방문은 수도승에게 애덕 실천의 기회를 제공하고 수도승을 일깨워 자신의 독수도승생활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검증해 주는 이점도 있었다. 손님이 떠나면 그는 다시 규칙적인 생활로 돌아갔다. 다양한 방문객 사막에서의 방문은 통상 수도승 간의 방문이었다. 보통은 젊은 형제가 원로나 영적 사부를 방문했다. 유명 인사는 신분을 불문하고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유명 인사의 방문을 피하곤 했다. 압바 시몬은 한 행정관이 찾아왔을 때 “띠를 두르고 종려나무를 전지하러 나무 위로 올라갔다. 방문객들이 도착하여 그에게 소리쳤다. ‘원로, 그 독수도승은 어디 계시오?’ 그가 대답했다. ‘여기에는 독수도승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다시 떠나갔다.”(시몬 1) 압바 모세는 어느 날 집정관이 자신을 보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습지로 달아났다. 집정관 일행이 길에서 만난 모세에게 “원로, 압바 모세의 암자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그들에게 말했다. “그에게 뭘 원하십니까?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모세 8) 사막 교부들은 오히려 자기에게 적대적인 사람이나 악명 높은 사람을 더 환대했다. 방문객 중에는 물건을 훔치거나 수도승을 살해하기도 했던 도적과 강도들도 있었다. 대개는 약탈을 방치했다. 압바 마카리우스는 도적들이 자기에게서 훔친 물건을 낙타에 싣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했다.(대(大) 마카리우스 40) 한 원로는 약탈하는 강도들에게 “형제들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서두르시오”라고 말해 강도들을 몹시 당황케 했다(익명의 압바 554). 또 어떤 원로는 기도 시간에 강도들이 들이닥치자, 형제들에게 “그들이 자기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시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합시다”(익명의 압바 607)라고 말했다. 사막 교부들이 하느님 사랑을 드러낸 방식은 우리에게는 너무 낯설고 심지어 불가능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서 모든 이를 향한 열려 있는 자세,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 애덕 실천을 위한 적극적 자세와 노력, 비폭력,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의 자유로움 등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현재는 ‘한센병’으로 부릅니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것만으로 참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현대인은 이전 세대보다 자연재해, 궁핍과 기아, 갖가지 질병, 미신, 폭군들의 압정과 같은 많은 굴레에서 벗어나 생활하고 있다. 최근 등장한 인공지능(AI)으로 상징되는 과학과 이에 함께 급성장한 교통과 통신의 기술은 인간을 제약해 왔던 시간과 공간의 장벽마저도 허물어뜨렸다. 이처럼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편리한 수단들을 누리며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향유해야 할 인간 본연의 천부적 권리, 즉 ‘자유권’의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에는 역사적으로 큰 발전을 이룬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은 참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만큼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의 등장과 이에 대한 비판 결정주의를 거슬러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더 나아가 사르트르(J. P. Sartre)와 같은 현대의 사상가들은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투신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주목할 만한 성찰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일부 학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자유에 대한 어떤 종류의 구속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비결정주의’를 절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인간이란 자유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완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신과 같은 더 높은 힘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인정하려는 입장은 많은 비판에 부딪혔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그 자신이 세계와 사회와 역사에 의존해 있는 상태로부터 제약을 받는다. 인간은 또한 외부적인 요인들뿐 아니라 자신의 열정이나 심리적 중압감 등으로부터도 제약을 받는다. 실제로 자신이 정말 자유롭다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아 보이고 그들 중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들은 더욱 적어 보인다. 자유 개념의 다양성에 대한 성찰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이를 추구할 때 ‘불안’이나 ‘고독’을 느끼게 되고 때로 그 심리적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그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한다.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려면 인간의 자유는 단일한 성격을 지니지 않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선을 향한 의지의 경향 자체는 필연적임(「진리론」 14,2)을 인정하면서도, 의지가 자유롭게 작용할 수 있는 경우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실행(Exercitii)의 자유는 의지가 자신의 의지 행위를 실행하거나 실행하지 않을 수 있는, 곧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종별화(種別化, Specificationis)의 자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반대(Contrarietatis)의 자유는 악이 아니라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진리론」 22,6) ‘실행의 자유’는 전적으로 의지의 재량에 달려 있지만, ‘종별화의 자유’는 권력, 명예, 재화 등의 가치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마음껏 누릴 수 있고, 외적으로 방해받지 않을 때 누리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단계에서 프롬(E. Fromm)이 ‘~로부터의 자유’(Liberty from~)라고 부른 ‘소극적 자유’, 즉 관계·강제·구속·방해 등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서 ‘~을 위한 자유’(Liberty for~)로 나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그러나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하는 ‘반대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의 측면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이런 측면에서도 자유가 증진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현대인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고 실제로는 자유롭지 못하고, 일부 측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하는 듯하다. 외적인 성공에만 집착해서 이기주의와 향락주의가 팽배하고 희생, 절제, 정의, 이웃에 대한 배려 등을 경멸하게 됐기 때문이다. 올해 봄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등장한 애순과 관식의 사랑이 전 세계를 눈물바다로 몰아넣었다. 양친으로부터 결혼을 허락받지 못한 이 청춘 남녀가 단지 부모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으로 부산으로 도망갔지만 그들은 원했던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없었다. 단순한 벗어남, 혹은 도피만으로는 개인의 독립이 아니라 당사자와 양친들에게 더 큰 속박을 만들었을 뿐이다. 오히려 자신의 행위가 순수한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함을 뚜렷이 자각하고 살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자신들의 결정을 통해서 엄청난 어려움들이 생겨났지만, 애순과 관식은 자유로운 결정을 통해, 새롭게 맺어진 관계를 기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확신에 찬 의식과 행동이 자신들의 결정에 반대했던 이들도 설득했고 전 세계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인간의 자유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의하여 제약을 받으면서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다양한 가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 가치 자체를 최종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이것이 좋으니까 내가 한다’라고 말해야지 ‘내가 하니까 좋은 것이다’라고는 주장할 수 없으며 그 가치의 기준은 행위 주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만약 인간의 의지가 나쁜 것을 결정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자유의 결함을 의미한다. 비도덕적인 결정은 그것이 비록 형식적으로 자유의 모습을 지녔지만, 자유도 아니며 자유의 한 부분도 아니다. 많은 현대인이 빠져드는 도박, 마약 등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중독이라는 부자유를 남길 뿐이다. 인간은 항상 선한 대상과 악한 대상 중, 자신의 자유를 성숙 또는 억압하는 방향 중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도덕적인 욕구가 의지의 자유를 감소시킨다면, 의지가 확고히 선을 향하고 있을수록 그 자유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것만으로 참행복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외적 환경이나 자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또 다른 요인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섭리가 우주 내의 모든 일을 관장한다면, 과연 그 안에는 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있을까? 이 난해한 문제에 대해 다음 호에서 진지하게 성찰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욕망의 다양한 얼굴

인간은 자신 앞에 나타난 다른 성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오직 순수한 사랑으로만 발전시킬 수 있을 만큼 완전한 존재는 아니다. 성 자체가 매우 유동적(Liquid)이면서 다양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내적 변화가 시선으로 드러나기에 먼저 자신 안에 움직이는 그 변화의 원인, 즉 욕망을 보아야 한다. 성(性)은 처음부터 방향성을 지녔지만 나의 자유와 지향에 의해 신호등처럼 바뀔 수 있다. 자신도 타자도 인격으로 바라봐야 하나 유혹에 의해 단지 성애적 필요를 만족하는 기능적인 역할로 격하시킬 수 있다. 달라지는 양방향의 변화는 바라보는 시선, 즉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음을 비추는 이유다. 이러한 맥락을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체험과 구원 과업의 맥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38과 2항)라고 한다. 사랑은 단순히 관능적 욕구가 아니라 인격에 대한 갈망으로 발전되고 경험되어 완성에 이르는 질서를 지녔으나, 욕망은 그 질서를 바꾼다. 부정적 얼굴은 인간이 욕망을 느끼는 대로 실행하여 하강으로 빠지는 상태이고, 긍정적 얼굴은 성 충동에 자신을 버려두지 않고 자신의 최종 목적에 비추어 충동을 조절하여 긍정적 힘으로 드러내는 모습이다. 욕망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 마음에서 선택하게 되는 지향성이다. 감정은 파도처럼 우리를 높이 올라가게도 내려가게도 하지만, 지향성에 의해 움직인다면 감정의 강도에 자신을 버려두지 않고, 욕망이 최종 목적을 바라보고 정화를 거쳐 새로운 형태를 갖추게 된다. 오늘날 현대인은 삶에서 윤리가 크게 두 가지로 흔들리는 체험을 한다. 신앙과 행위를 분리시키고, 진리와 자유를 분리시켜 왜곡되게 한다. 마태오 복음 5장 27절과 28절은 바로 이 부분을 다시 보게 한다. 인간의 마음과 행위라는 윤리적인 부분을 각 상황마다 규칙을 적용하는 결의론적 방법에서 탈피해, 윤리 주체로서의 그리스도인을 양성해야 한다. 윤리의 기초적 문제를 해석하는 인식 체계를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계명을 다 지키고도 슬퍼하며 떠나간 ‘부자 청년’이 지니고 있던 마음의 진실이 여기에 있다.(마태 19,16-22) 예수께 어떤 사람이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질문한다. 그의 질문에서 그가 최종 목적을 알고 있음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17절)라며 ‘선한 일’로 물었는데, ‘선하신 분’ 즉 존재로 응답한다. 행위와 존재가 분리되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젊은이가 지킨 율법 조항들은 외적인 것이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21절 참조) 주는 것으로 대변되는 사랑과 별개로 행하는 계명 준수는 ‘슬픔’을 가져온다.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가게 하는 이 슬픔은 ‘참행복 선언’에서 말하는 슬픔(“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과는 분명 달라 보인다. 회칙 「진리의 광채」는 무한을 향해 열려 있는 근본적 의지의 존재를 언급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블롱델(Blondel, Maurice Édouard, 1861~1949)과 동일한 관점에서 이 젊은이의 질문을 해석한다. 그것은 “삶의 충만한 의미”에 관한 것으로, “모든 결정과 행위의 핵심에 자리잡은 열망이요, 자유를 움직이는 은밀한 추구이며 내적 충동”의 발로이다. “우리를 끌어당기며 부르는 절대선을 향한 간구”인 동시에, “인간 생명의 원천이자 목적인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의 반향”이다.(7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2764항은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소원을, 곧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하는 우리의 내적 지향을 새롭게 해 주신다”고 말한다.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 교리는 ‘몸에 관한’ 신학일 뿐 아니라 인간학과 신학의 새로운 체계를 호소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상학적 방법론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9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덕을 채집하라!

‘덕을 채집하라!’ 이 주제어가 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이 말은 ‘덕을 쌓다’, ‘덕을 획득하다’, ‘덕을 닦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채집하다’란 표현은 ‘지혜로운 꿀벌’ 개념에서 착안한 것이다. 덕(德)을 라틴어로 ‘비르투스’(virtus)라 하는데, 이는 선을 행하는 ‘힘’ 또는 ‘용기’를 뜻한다. ‘나쁜 습관’을 뜻하는 ‘악습’(vitio)의 상대어로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겠다. 수행 생활은 악습을 제거하고 덕을 심는 과정이다. 그래서 악습과의 싸움과 동시에 덕의 획득을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악습에 대한 승리는 그에 상응하는 덕의 획득을 가져온다. 카시아누스는 인간 안에 악습과 그 반대 덕이 동시에 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양심에 따라 악마나 그리스도 중 누구에게 주도권을 부여할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다.(담화집 1,13-14) 지혜로운 꿀벌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안토니우스를 지혜로운 꿀벌에 비유하며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초기에 안토니우스도 자기 마을 근방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열정으로 가득한 어떤 사람에 대해서 듣자마자 그는 지혜로운 꿀벌처럼(칠십인역 시편 6,8 참조) 그를 찾아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그를 보고 덕의 길을 가기 위한 일종의 양식을 얻기 전에는 자기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안토니우스의 생애」 3,4) 꿀벌이 여러 꽃에서 꿀을 채집하듯 안토니우스는 다양한 사람에게서 덕을 채집하려고 노력했다. 어떤 한 사람에게서 모든 덕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서 각각의 고유한 덕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꿀벌이 꿀을 찾아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니듯 능동적으로 덕을 찾아 본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시아누스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다. “누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한 사람에게 모든 덕의 모범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 어떤 이는 인식의 꽃으로 장식되고, 또 어떤 이는 분별의 기술을 더 잘 갖추고 있으며, 어떤 이는 인내의 무게를 기초로 하고, 어떤 이는 겸손의 덕으로 승리하며, 어떤 이는 극기의 덕으로 승리합니다. 또 다른 이는 단순성의 은총으로 장식됩니다. 이 사람은 관대함, 저 사람은 자비나 철야, 또는 침묵이나 노동에 전념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능가합니다. 이 때문에 영적인 꿀을 채집하려는 수도승은 매우 지혜로운 벌처럼 어떤 덕에 더 나아간 사람들에게서 각각의 덕을 채취하여 자기 마음의 그릇에 정성껏 모아야 합니다. 상대에게 부족한 덕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오직 그에게 있는 덕을 얻는 데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게서 모든 덕을 얻으려 한다면 본받을 모델을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규정집 5,4,1-2) 참으로 일리 있고 유익한 가르침이다. 우리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모든 덕을 갖추고 있을 수 없다. 사람마다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지혜로운 꿀벌처럼 타인의 장점을 찾아 본받으려 노력할 때 영성 생활이 더욱 진보하게 될 것이다. 덕을 위한 노력 사막 수도승들은 덕을 얻으려 분투했다. 압바 이시도루스는 그 이유를 말한다. “악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서로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빨리 악에서 돌아서서 덕을 추구해야 합니다. 덕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고 서로 일치시켜 줍니다.”(이시도루스 4) 악습이 여럿이듯 그 상대 덕도 여럿이다. 그들은 가능하면 많은 덕을 얻으려 노력했다. 압바 포이멘의 다음 두 금언은 이를 잘 말해준다. “한 형제가 압바 포이멘에게 물었다. ‘사람이 오직 한 가지 행위에만 의지할 수 있습니까?’ 원로가 대답했다. ‘압바 요한 콜로부스가 말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모든 덕을 조금씩 갖고 싶습니다.’”(포이멘 46) “누가 집을 지으려고 준비할 때, 그는 집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한데 모읍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자재들을 수집하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온갖 덕을 조금씩 얻읍시다.”(포이멘 130) 압바 요한 콜로부스도 “사람은 모든 덕을 조금씩은 가져야 합니다”(요한 콜로부스 34)라고 말한다. 사막에서 여러 해 동안 함께 화목하게 생활한 두 형제의 일화는 그들이 덕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인내와 겸손에서 경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한 형제의 눈에 다른 형제의 성덕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 형제는 다른 형제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그 순간부터 그를 형제가 아니라 사부로 부르며 자기 원로로 대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96) 여기서 우리는 영적 경쟁에서 쉽게 빠질 수 있는 교만이나 시기심이 아닌 지극한 겸손을 보게 된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질투와 분노, 교만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 사막 교부들은 덕을 닦는 데 있어서 교만과 허영심을 가장 큰 걸림돌로 보았다. 교만은 영혼이 소유한 모든 덕을 무자비하게 약탈한다. 카시아누스는 말한다. “교만의 질병이 얼마나 위험하고 심각합니까! 세상의 본성과 법칙까지도 바꿀 만큼 그렇듯 많은 정의와 덕, 그렇듯 위대한 신앙과 헌신이 한 번의 허영심으로 파괴되어, 그 모든 덕이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규정집 11,10,3) 그리고 “교만의 악만큼 모든 덕을 제거하고 인간의 모든 의로움과 거룩함을 빼앗아 발가벗기는 악습은 없습니다. 교만은 온몸에 널리 퍼진 전염성 있는 질병과 같아서 단지 한 지체만을 오염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을 해치며, 이미 덕의 정상에 도달한 이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분쇄하려 합니다.”(규정집 12,3,1) 그래서 그들은 교만을 가장 경계했다. 어떤 원로는 덕행이 뛰어난 세속인이 있다는 계시를 받는다. 완덕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원로들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느님은 종종 그들을 교만에서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 못지않게 덕스러운 평신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어떤 독 수도승은 천사를 통해 자신이 평신도 농사꾼보다 거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를 만나 그의 말에 감명을 받는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288-9) 모든 덕의 으뜸은 겸손이다. 겸손이야말로 사막 수도승들에게 일상생활의 본질이었다. 그들은 모든 덕에 나아가고 온갖 악습을 없애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였다.(규정집 6,6) 그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완덕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완덕에 오른 사람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며(마태 11,29 참조), 늘 한결같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온유와 겸손, 평정심은 바로 덕스러운 사람의 표지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회·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간음, 표징의 왜곡과 인격적 계약의 파기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간음은 구약을 ‘능가하는 의로움’(마태 5,20)이다. 몸과 마음 모두에 기초를 둔 인간학에서 간음을 바라본 복음적 에토스다. 그리고 간음을 명백히 ‘몸의 죄’라 한 것은 참된 몸의 결합이 아니기에 그렇다. 표징을 왜곡하고 인격적 계약을 파기한 것이다. 배우자와 계약으로 갖게 된 ‘너에게만’ 하는 배타적 권리를 침해했고, ‘하나’, ‘한 몸’을 말하는 표징을 허위로 만들었고, 상호 조건을 지닌 인격적 관계로 맺어진 계약을 크게 훼손한 것이다. 그러므로 간음은 첫 번째로 혼인의 순수한 ‘내적 진리’, 곧 ‘한 몸’을 허위로 만드는 ‘몸의 죄’다. 두 번째로 계약에 의한 배타적 관계로 사랑에서 나온 서약이 몸의 표현을 통해 이뤄지는 선(善)에서 정반대인 탈선, 윤리악이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한 몸을 이루는 일치가 혼인 서약의 정상적 표징이라면, 인간의 몸은 그 본래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해 “영의 표현이 되고 창조의 신비에서부터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인격체들의 친교 가운데 실존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32과 1항)에 더 깊이 다가갔다. 복음의 에토스는 ‘몸의 복음’을 살라는 초대이고, 창조의 신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는 자연적 갈망이 초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돼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의 에토스는 구성상 이미 완성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 율법의 참된 의미를 실현했고, 그래서 과거도 현재도 영원히 그분은 살아 있고 인격적인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말씀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긴 요한복음 8장은 간음한 여인과 죄의 관계다. 예수께서는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자를 보호하면서도 간음과 죄를 동일시한다.(요한 8,7-11 참조) 율법의 조항을 들어 여인을 고발하러 온 바리사이들에게 율법이 아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시며 당신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어디에 호소하셨는가? 각자의 양심이다. 바로 한처음 상태의 양심에 호소하신 것이다. 이는 어디에서 회복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왜냐하면 죄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인간에 관한 진리를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땅인 인간의 마음에 말한다. 마음이 구원받는 것, 그것이 회복이다. 즉 원순수를 회복하기 위한 내적 의미가 들어있다. 인간의 양심에 새겨진 선과 악에 대한 식별은 어떤 법규범보다 더 바르고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에토스를 향하는 길은 창조의 에토스, 즉 사람이 누구인지 재발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구약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에토스가 상실됐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에게 질문할 시간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첫 질문, “무엇을 찾고 있느냐?”에는 인간의 길이 포함되어 있기에 삶의 본질을 묻고 있다. 많은 사람이 ‘무엇’을 찾기 위해 예수를 찾아왔다.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어떤 이는 죽어가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또 어떤 이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요한복음 마지막에 이르러 ‘무엇’은 ‘누구’로 바뀐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으로부터 “누구를 찾느냐?”고 질문받은 곳은 그분의 빈 무덤 앞이었다. 그녀가 그곳에 간 것은 그분으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에 대한 그리움, 즉 그분이었던 것이다. 참된 신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찾는 인간’에서 ‘누구를 찾는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궁극적으로 내 안에 그분의 모습을 형성시키는 것이요, 발견한 그 참된 보화를 사는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9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