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상식 팩트 체크] 미사보 착용은 남녀차별이다?

미사 시간만을 위한 특별한 복식들이 있지요. 주로 신부님이나 전례 봉사자의 복식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직자나 전례 봉사자 외의 신자들도 미사 때 착용할 수 있는 복식이 있습니다. 미사 등의 전례 중에 세례를 받은 여성 신자들이 쓰는 베일, 바로 미사보입니다. 교회가 전례 중 미사보를 사용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씀(1코린 11,2-16)에서 비롯됐습니다. 이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어떠한 여자든지 머리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면 자기의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1,5) 전례 때 여성은 베일을 써서 머리를 가리라는 것이지요. 심지어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11,9)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 구절들만 봐서는 남녀를 차별하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정말 미사보로 남녀를 차별한 것일까요? 사실 바오로 사도는 오히려 교회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자주 강조한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성의 머리를 가리는 것에 관해 언급한 후에 바로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다”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나온다”(11,11-12)고 강조했습니다. 다른 편지에서도 성별, 출신 모두 관계없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갈라 3,27-28)라며 예수님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머리를 가리라고 한 것이 당시 그리스도교 풍습을 말한 것일 뿐, 절대적인 규칙이나 본질적인 신앙의 행위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코린토 1서 강해」를 집필하신 이영헌 신부님(마리오·광주대교구 성사전담)은 “여성이 머리를 가리는 것은 당시 코린토의 문화 안에서 예의였다”면서 “바오로 사도가 머리를 가리라고 한 것은 기도할 때 예의를 지키도록 당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살던 시대의 문화에서 시작된 미사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사보에는 더 큰 의미가 담기게 됐습니다. 세례 받은 신자가 입는 ‘흰옷’을 나타내게 된 것이지요. 세례성사에서 흰옷은 세례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입었다”(갈라 3,27)는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음을 상징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43항) 이런 이유로 세례성사의 흰옷을 입는 예식에서 미사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미사보는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도 뜻합니다. 미사보 착용은 의무가 아니라 자유입니다. 쓰고 싶은 분만 쓰시면 되지요. 미사보에 있어서는 여성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히 선택할 수 있다는 권한이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 듯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입고’ 더 깊이 예수님의 성찬례에 함께하고 싶으시다면 미사보를 쓰고 미사에 참례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한 남성분들은 미사보를 선택할 권한이 없습니다.

2024-09-15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자기 착각에 빠진 요나의 기도(요나 2,3-10)

예언자 요나는 적국인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가라는 주님의 명을 피해 달아나다 폭풍을 만나고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냈습니다. 그는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며 니느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느님께서 벌을 거두신 것을 보고 죽고 싶다고 떼를 씁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드린 기도는 사실을 왜곡하는 기도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폭풍이 일자 이방인 뱃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지만 깊이 잠들어 있던 요나는 기도하라는 선장의 요구를 받고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뱃사람들은 요나를 바다로 집어 던지기 전에 주님(야훼)께서 폭풍을 일으키신 것을 알고 그분께 자신들이 하는 일에 용서를 청합니다.(1,14) 하지만 요나는 사흘 밤낮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2,1) 더구나 그의 기도는 왜곡된 사실로 그득합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2,3)라고 하지만 그는 사실 ‘배 밑창에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1,5) 요나는 ‘당신께서 바닷속 깊은 곳에 저를 던지셨다’(2,4)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를 던진 이들은 뱃사람들이었고(1,15) 그것은 요나가 자신의 사명을 피해 도망친 결과였습니다. ‘당신의 눈앞에서 쫓겨난 이 몸’(2,5)이라고 하지만 그는 스스로 주님을 피해 도망갔습니다.(1,3) “헛된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은 신의를 저버립니다”(2,9)라고 하지만 이방인 뱃사람들은 자신들을 불행에 빠뜨린 요나를 구하려 끝까지 애썼고 다른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주님(야훼)의 용서를 구하며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1,13-16) 하느님이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신 것 때문에 요나는 다시 기도합니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면,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4,1-8) 요나는 적에 대한 미움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하느님이 자신의 적을 용서하신 사실을 자기 죽음으로 부정하려 합니다. 우리가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눈앞에 떠올리는 것이 요나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내 바람과 달리 잘 되고 하느님의 복을 받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부정하며 왜곡된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 생각과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삐뚤게 이해하는 위선자의 전형입니다. 예언자들과 예수님은 그런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거듭 지적하십니다.(이사 1,15;29,13; 마르 7,6-7; 예레 7,9-10; 호세 6,1-3;8,1-2; 미카 3,3-4; 스바 1,5-6; 즈카 11,5; 마르 12,40; 마태 6,5-7) 내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우리는 사실을 왜곡하는 위험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은총을 얻으리라 희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요나의 거짓된 기도를 들으시고도 요나를 육지에 뱉어 내게 하시고(2,11) 죽고 싶다는 요나를 타이르시고 그에게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느님이 요나와 니네베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회하고 회개하는 나 자신도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새로이 시작할 용기를 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휩 오스터하위스, 네덜란드 시인)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9-15

[성경 속 기도 이야기] 고통 속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예레미야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같이 하느님과 한 개인의 씨름을 다룬 고백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기록된 예례미야의 다섯 개 고백은 아주 오래되었으면서도 하느님께 따지는 고통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치욕과 비웃음을 당하지만, 자신의 기쁨이자 즐거움인 그분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기에 침묵할 수도 없습니다.(예레 15,15-16) 그는 자신의 사명 때문에 자신이 처하게 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화를 내고 따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을 계속 신뢰합니다. 그의 마음은 양쪽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습니다. … 그럴지라도 당신께 공정성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의 길은 번성하고 배신자들은 모두 성공하여 편히 살기만 합니까?”(예레 11,20;12,1) 큰 고난을 겪는 예레미야는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닥치게 하시고 그들을 부수시되 갑절로 부수어 주소서.”(예레 17,18)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지 마시고 … 그들을 당신 앞에서 거꾸러지게 하시고 당신 분노의 때에 그들을 마구 다루소서.”(예레 18,23) 나아가 자기의 운명을 욕하며 신세 한탄을 합니다. “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 …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 고난과 슬픔을 겪으며 내 일생을 수치 속에서 마감해야 하는가?”(예레 20,14.18). 그는 급기야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하느님께 실망을 느끼고 하느님을 나쁘게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이 되었습니다.”(예레 15,17)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예레 20,7) 하지만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원망에도 화를 내시지 않습니다. 다만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면’(예레 15,19)이라고 따끔한 주의를 주시면서 그를 당신의 대변인으로 만드시고 그에게 여러 가지를 약속해 주십니다.(예레 15,19;20-21) 하느님은 예레미야가 지금의 고통을 견디고 앞으로의 사명에 걸맞게 성장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사람들과 달리기를 하다가 먼저 지쳤다면 어찌 말들과 겨루겠느냐? 네가 안전한 땅에만 의지한다면 요르단의 울창한 숲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예레 12,5) 너무나 힘들어 타인과 하느님과 자신 등 누구에 대해서도 고운 말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마음을 토로할 수 있으며 하느님은 그것을 귀여겨들으시고 설령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의 고통을 가볍게 해 주십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어디인지를 내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계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 11,33)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마태 1,23)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요한 14,6)이십니다. 첫 번째 고백과 두 번째 고백이 예레미야의 기도(11,18-20; 12,1-4; 15,10; 15,15-18)와 하느님의 응답(11,21-23; 12,5-6)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세 번째 네 번째 고백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상대방을 저주하기에 이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자세가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 그분의 위안을 얻도록 이끕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9-0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아카펠라는 교회 음악이다?

아카펠라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아카펠라는 악기 없이 목소리만으로 화음을 맞춰 부르는 음악인데요. 아카펠라를 들으면 사람의 목소리가 이처럼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카펠라가 교회 음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지금은 교회 음악에 다양한 악기가 사용되고 있지만, 초기 교회에는 전례 중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이후 9세기경 교회 음악에 오르간이 도입되고 여러 악기들이 차츰 교회 음악에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많은 클래식 음악들도 교회 음악으로 작곡된 곡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의 목소리로 내는 음악을 여전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큰 악기를 두기 어려운 작은 규모의 기도 공간, 경당에서 반주 없이도 하느님께 경건하게 찬미를 드리는 무반주 합창을 불렀습니다. 1500여 년 전부터 무반주 합창을 불러온 시스티나 성당 합창단이 대표적인데요. 이 합창단이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에서 무반주 합창을 노래해, ‘성당식으로’, ‘성당 풍으로’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아카펠라(A Cappella)가 성당에서 부르는 무반주 합창을 일컫는 말이 됐습니다. 아카펠라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인 16세기경에 많이 작곡돼,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그렇게 교회 음악을 뜻하던 아카펠라는 19세기 무렵 합창음악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변해 교회 음악과 관계없이 악기 반주 없이 하는 모든 합창을 부르는 말이 됐습니다. 카펠라, 바로 ‘성당’이라는 말이 음악의 한 장르를 뜻하는 말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성당을 뜻하는 카펠라는 이전에도 뜻이 변한 적이 있는 말입니다. 카펠라는 성당 중에서도 작은 규모의 성당, 즉 경당을 부르는 이탈리아어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 군인의 외투인 카파(cappa)가 뜻이 변한 말입니다. 세례 받기 전 군인이었던 마르티노 성인(316~397)은 어느 날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고 있는 걸인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카파를 반으로 잘라 내어줬습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 성인의 꿈에 마르티노의 반쪽 카파를 입은 예수님이 나타나 “예비신자 마르티노가 이 옷으로 나를 입혀 줬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그 후 세례를 받고, 나아가 주교가 돼 목자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선종 후에도 성인으로 널리 공경받았지요. 이후 성인의 카파를 보관하기 위한 작은 성당이 세워졌는데요. 사람들은 마르티노 성인의 카파가 있는 이곳을 카펠라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마르티노 성인의 성당처럼 작은 성당, 즉 다른 경당들도 카펠라라고 부르게 됐고, 그래서 카펠라는 성당을 뜻하는 단어가 됐습니다. 마르티노 성인의 일화에서 경당, 경당에서 찬미 노래를 부르는 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관련 없는 줄 알았던 ‘아카펠라’에 참 많은 교회의 이야기가 숨어있던 것 같습니다.

2024-09-0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인은 복자보다 높다?

순교자 성월인 9월, 우리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억하며 본받으려 노력합니다. 특별히 기도와 순례를 통해 성인들과 복자들을 공경하고 전구를 청하고 있지요. 순교자 성월은 우리가 기억하는 복자들의 시성이, 하느님의 종들의 시복이 하루빨리 이뤄지기를, 바로 시복시성을 염원하는 마음을 북돋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시복시성이라고 하면 교회가 어떤 인물을 복자로, 그리고 성인으로 선포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 신자들이 영웅적으로 덕행의 길을 닦고 하느님의 은총에 충실한 삶을 살았음을 장엄하게 선언”하는 것이지요.(「가톨릭 교회 교리서」 828항) 시복시성은 교회법적인 절차에 따라 엄정한 검증을 거쳐 진행되는데요. 시복시성 대상자인 ‘하느님의 종’에게 복자, 성인의 순서로 칭호를 부여합니다. 시성을 위한 과정에 복자가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보니 성인이 더 대단하고 높은 분이고, 복자는 그보다는 덜 높은 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자·성인이라는 칭호는 그분들의 공덕이나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고 있는 영광의 차이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복자를 일컫는 라틴어 베아투스(Beatus)는 ‘복된, 행복한, 축복받은’이라는 뜻도 있지만 ‘천국에 있는’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상태를 말합니다. 지복직관이란 하느님을 직접 뵙는(直觀), 지극한 행복(至福)을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1코린 13,12)이라고 말씀하시듯,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표현합니다. 성인은 의미상으로 거룩한(聖) 사람(人)을 의미하는데, 실은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거룩한 분은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친교, 일치를 통해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지복직관에 이른, 하느님 나라에 든 분들입니다. 우리는 시성식을 하면 “○○이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엄밀히 이야기하면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 사실 시복식·시성식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하느님 나라에 계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복시성을 하는 이유는 아직 지상교회를 순례하고 있는 우리 모든 신자들이 그분들이 보여준 완덕의 모범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또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길 청할 수 있는 분들을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성인들이나 복자들의 명부에 올린 하느님의 종들만을 공적 경배로 공경할 수 있습니다.(「교회법」 제1187조) 그렇기 때문에 아기들은 시복시성을 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죄의 물들지 않아 하느님의 영광 안에 있다고 믿지만, 우리가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영웅적인 성덕을 제시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시복시성을 염원한다는 것은 우리가, 또 우리의 후손들이 이분들을 본받으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길 바라는 일입니다. 순교자 성월, 함께 시복시성을 위해 기도하면 어떨까 합니다. “후손인 저희들이 그들을 본받아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 내려 주소서.”(‘시복 시성 기도문’ 중)

2024-09-0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백성 전체를 위한 기도,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1열왕 8장)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과 같이(2사무 22장) 주님께 긴 기도를 바칩니다.(1열왕 8장) 8장 전체는 겹겹으로 앞뒤 대칭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임(1-4), 제사(5-13), 축복(14-21), 기도(22-53), 축복(55-61), 제사(62-64), 모임(65-66) 등 장 전체가 그러하고, 둘째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23), 찬양과 기억(23-28), ‘눈을 뜨시고’(29), 일곱 청원(31-51), ‘눈을 뜨시고’(52), 찬양과 기억(53),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53) 등 기도 부분(22-53)도 그러합니다. 성전 봉헌에서 기도가 중심입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신 분이고 예수님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전, 교회 건물이 기도에 꼭 필요한 것일까요? 솔로몬은 기도의 시작에서 이미,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하느님을 모시기에 턱없이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27) 하느님은 ‘짙은 구름 속에’ 계시지만(12) 성전을 향해 올려지는 기도와 간청과 부르짖음을 ‘눈으로’ 보시고 들어 주십니다.(28-30) 성전은 ‘하느님께서 굽어보시고 들으시는 특별한 자리’이고 사람이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고 성경을 통해 하느님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래된 성당에 앉아 있으면 고요함 속에 갑자기 지난 세월 동안 거기에서 근심 보따리를 하느님 앞에 풀어 놓았던, 기쁨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한 수많은 신앙의 선인들이 되살아나고 시간을 초월해 인간을 살피시는 하느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지만 성전에서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모든 성인의 통공을 특별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왕은 마치 사제처럼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황님은 매주 수요일 일반 알현 때와 주일 삼종기도에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을 언급하시고 그 일을 겪은 이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하십니다. 주교님들과 신부님들도 각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개인은 각자의 기도를 바치지만, 그것이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의 전부일 수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전체를 대표해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사회는 시멘트와 모래로 만든 튼튼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바람에 끊임없이 흩날리는 사막의 모래알과 같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사회에서 생긴 갈등을 의롭게 판결해 주시기를(31-32), 적과의 싸움에서 도와주시기를(33-34.44-45), 가뭄 때 비를 내려주시기를(35-36), 온갖 환난과 질병에서 개인이나 전체를 도와주시기를(37-40), 이방인을 도와주시기를(41-43), 장차 바빌론의 포로가 될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시기를(46-51) 청합니다. 이 집을 향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내용은(48)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 실제와(다니6,11)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무슬림들의 관습을 연상시킵니다. 솔로몬은 거듭해서 “용서해 주십시오”(30.34.36.39.50)라고 청합니다. 우리는 매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청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늘 새로이 용서해 주심을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데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전쟁과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갈등 뒤에는 상대방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증오가 자리합니다. 용서는 삶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샬롬)의 길이자 기도의 목적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9-0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이 다 아시는데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다윗의 감사 기도 (2사무 7,18-29)

한나와 사무엘 또 다윗과 솔로몬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물려 줄 수 있음을, 기도는 부모로부터 배운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다윗은 공도 많고 흠도 많은 사람이지만 하느님과 매우 가깝게 지냅니다. 그는 여러 번 하느님께 여쭙고, 그분으로부터 답을 받으며(1사무 23,10-12; 30,8; 2사무 2,1; 5,19.) 하느님을 찬미하며(1사무 25,32.39) 그분 앞에서 흥겹게 춤을 춥니다.(2사무 6,5.14.21) 이러한 돈독한 관계를 바탕으로 다윗은 하느님께 집을 지어드리기를 원합니다.(2사무 7,2.5) 하지만 하느님은 이를 거절하시면서 오히려 그에게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과 하느님은 똑같이 집을 말하지만, 다윗이 말하는 집은 하느님의 거처할 성전이고 하느님이 지어주실 집은 다윗의 가문입니다.(2사무 7,11) 다윗은 하느님으로부터 큰 약속을 받고 긴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2사무 7,18-29) 다윗은 하느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18절) 기도합니다. 다윗은 11번 하느님을 ‘야훼’라고 부르고(우리말 성경은 이 부분을 ‘하느님’, ‘주’, ‘주님’ 등으로 문맥에 따라 번역하는데, 모두 굵은 글씨로 표기합니다) 그중에서 7번은 그 앞에 ‘주님’을 덧붙입니다.(우리말 성경은 이 부분을 ‘주 하느님’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열 번이나 자신을 ‘당신의 종’으로 칭합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다윗이 하느님과 얼마나 친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겸손함을 보이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제가 누구이기에”(18절)라는 말은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부당함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다윗이 당신께 무슨 말씀을 더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알고 계십니다”(20절)라는 구절은 ‘하느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신다면 그분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청하는 다윗은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시더라도 인간의 기도는 새로운 것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25.28.29절)라는 말과 함께 다윗은 하느님께 자기 집안에 복을 내려주시길 청원하는데, “당신이 하신 말씀”,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25절),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28절),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29절) 등은 다윗의 청원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함을 잘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은 하느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다룹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당신께서는 당신 종의 귀를 열어 주시며, ‘내가 너에게서 한 집안을 세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종은 이런 기도를 당신께 드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27절)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셨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께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은 하느님을 성가시게 하는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돈독하고 생생한 관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귀한 것을 선물하시는데도 인간이 그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다윗이 하느님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원의는 좋은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십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거절을 체험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거절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허락하시는 바를 수행할 때 필요한 믿음만큼 큰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다윗은 하느님과 친하게 지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8-2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미사 봉헌금은 꼭 앞에 가서 내야 할까?

‘가톨릭페이’로 봉헌금을 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가톨릭페이는 가톨릭신자 앱 ‘가톨릭하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선불 전자 지급 수단인데요. 아직 모든 본당에서 가톨릭페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점차 가톨릭페이를 쓰는 본당이 늘고 있습니다. 가톨릭페이로 봉헌금을 낼 때는 가톨릭페이에 돈을 충전하고 봉헌할 금액을 설정해 둔 다음, 봉헌 바구니에 있는 QR을 찍는 방식으로 봉헌합니다. 현금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봉헌금을 낼 수 있지요. 가톨릭페이로 봉헌을 하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현금으로 봉헌을 할 때에는 직접 내야 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결국 모바일기기로 헌금을 하는데 꼭 제대 앞까지 나가야 하는 걸까요? 자리에 앉아서 터치로 송금해도 봉헌금이 전달되는 것은 같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전례 안에서 앞으로 나가서 봉헌을 하는 것과 온라인 송금으로 봉헌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봉헌 중 제대 앞으로 나아가는 봉헌 행렬은 하느님께 나아가 봉헌금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봉헌 행렬은 예물 준비 행렬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예물 준비란 그리스도의 성찬례를 위해 상을 차리고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 놓는 예식입니다. 예로부터 신자들은 성찬례를 위해 빵과 포도주를 준비해 왔습니다. 신자들은 빵과 포도주를 가져올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선물도 가지고 모였습니다. 처음에는 물품을 가져오던 이 선물은 11세기경부터 돈으로 변화했는데요. 이것이 오늘날 봉헌금이 됐습니다. 이 봉헌금에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이 담겼습니다.(2코린 8,9 참조) 그리고 무엇보다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제물을 봉헌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당신 희생 제사 안에서 완전하게 하신다”며 “신자들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노동 등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봉헌과 결합되며, 이로써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된다”고 강조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50, 1368항) 결국 제대를 향해 나아가는 봉헌 행렬은 그저 빵과 포도주, 그리고 봉헌금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봉헌과 결합하게 될 우리 자신도 제대에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런 봉헌 예식은 미사가 참례한 모든 이의 희생 제사임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미사 중에는 봉헌 행렬 말고도 제대를 향해 나아가는 행렬이 더 있습니다. 사제와 부제, 봉사자들이 제대로 나아가는 입당 행렬, 복음 선포 전에 복음서를 독서대로 모셔가는 복음 행렬, 영성체를 하러 나아가는 영성체 행렬이 그렇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은 “이러한 행위와 행렬은 각각의 규범에 따라, 알맞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아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44항) 이번 주일도 봉헌금을 잘 준비하셨나요? 현금으로 준비한 봉헌금이든, 가톨릭페이로 내는 봉헌금이든, 한 주간 우리가 겪은 모든 삶을, 우리 자신을 함께 봉헌하는 마음,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2024-08-25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삶의 무게에 허덕일 때 드리는 기도(민수 11,11-16)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모세는 백성 및 자신을 시기하는 동기, 아론과 미르얌을 위해서(민수 11,2; 14,13-19; 21,7; 12,1-2.13) 주님께 탄원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민수21,7; 12,11-12)라고 모세에게 청합니다. 모세는 하느님이 내리시는 벌이 멈추도록 중재 역할을 충실히 합니다. 하지만 백성은 이미 이집트를 탈출하기도 전에(탈출 5,21), 탈출하면서(탈출 14,11-12), 또 탈출하자마자(탈출 15,24;16,2;17,3) 불평을 늘어놓았고,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뒤에도 백성의 불평은 그치지 않습니다.(민수 11,1-6.10) 급기야 백성들의 성화에 탈진한 모세는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 백성은 울면서 ‘먹을 고기를 우리에게 주시오.’ 하지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민수 11,11-15) 지칠 대로 지친 모세는 왜곡과 과장을 섞어 말합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느님의 눈에 들었음에도(탈출 33,12-13) 자신이 그분의 ‘눈 밖에 났다’(11,11)고 하고, 하느님이 자신에게 백성을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품에 안고 가라’신다고(11,12) 넋두리하며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기까지(11,21-22)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곧바로 해결책을 마련해 주십니다. 일단 하느님은 이스라엘 원로 72명에게 영을 내리시어 모세의 짐을 나눠서 지게 하시고(11,16-17.24-30) 고기를 내려 주십니다.(11,18-20.31-33) 적게 거둔 사람이 열 호메르(대략 2000~3000리터)의 메추라기 고기를 모았을 정도로 하느님은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십니다. 백성은 하느님을 무시하면서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의 삶을 그리워했습니다.(민수 11,4-6.10) 민수기 11장의 이야기는 단순한 음식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자유를 누릴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삶을 택할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벌하시는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 상에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사람이 하느님 없이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소진한 삶, 번아웃 증후군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모세의 기도는 그러한 상황에서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것이 효용이 있음을, 아니 꼭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자신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하느님께 넋두리하면 당장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거운 짐과 걱정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은 나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는 이를 보내 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무거운 짐을 덜어 주시는 분입니다. 화가 치밀고 미움이 끓어오를 때 우리는 그에 걸려 넘어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짐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가져가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비록 그것이 내 눈에 가려져 있더라도 내가 갈 길을 알고 계시고, 나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욕심과 불평이 아니라 생명, 건강, 소중한 사람들과 같이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선물이 우리 마음을 채울 때 우리는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8-1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대세(代洗)는 반쪽짜리 세례다?

대세(代洗)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죽을 위험에 처해있거나 죽음을 앞둔 분이 세례를 받고 싶어 하는 순간, 성직자가 찾아오기 어렵다면,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간단한 예식으로 세례를 집전할 수 있는데, 이런 세례를 대세라고 부릅니다. 성직자 대(代)신에 세(洗)례를 집전한다는 의미의 한자어지요. 아시다시피 세례성사의 주례자는 성직자입니다. 교회법도 “세례의 정규 집전자는 주교와 탁덕(신부)과 부제”라고 말합니다.(제861조 1항) 또한 세례의 장소도 “성당이나 경당”으로 규정돼 있습니다.(제857조) 죽음에 임박한 분이 성당을 찾아갈 여유는 없겠지요. 그러다 보니 대세는 정규 집전자가 집전한 것도 아니고, 하물며 성당도 아닌 곳에서 세례가 이뤄집니다. 그리고 대세를 받았는데, 천만다행으로 건강을 회복했다면 보례(補禮)를 받아야 합니다. 예비신자처럼 정식 교리를 받고 대세를 받을 때 생략된 다른 입교 예식들을 보충하는 예식이지요. 이렇게 보니 어쩐지 대세는 완전한 세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세는 결코 불완전하거나 반쪽짜리 세례가 아닙니다. 대세 역시 세례로서 부족함 없이 유효한 세례성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의 일반적인 집전자는 주교와 사제지만, 교회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까지도 성삼위의 이름이 명기된 세례 양식문을 사용하여 세례를 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56항) 교회법 역시 “부득이한 경우에는 합당한 의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지, 적법하게 세례를 줄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제861조 2항) 위급한 상황이라면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적법한 세례를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박해시대를 살아가던 우리 신앙선조들은 성직자가 부족하고 박해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대세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세가 박해시대에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분들이 많이 계시고, 또 죽음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병원에서 대세를 받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어느 날 우리 곁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앞둔 분이 세례를 원한다고 말한다면, 바로 우리가 세례를 집전해 그분이 하느님 곁에 가실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대세를 집전하는 방법을 알아둔다면 예상치 못한 그 어느 때 누군가의 영혼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대세를 집전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깨끗한 자연수를 이마에 부으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에게 세례를 줍니다”고 말하면 유효한 세례가 됩니다. 물론 죽음을 앞뒀다고 누구에게나 다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 되겠죠. 어른의 경우 대세를 받기 위해서는 신앙의 주요한 진리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고, 어떤 형태든지 세례를 받겠다는 의사를 표시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아기의 경우는 죽을 위험이 있다면 지체 없이 세례를 받아야 하고요. 이렇게 대세를 집전한 후에는 ‘대세 보고서’를 작성해 본당에 제출하면 됩니다.

202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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