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16) 한국교회 정식 교계 제도 설정

박영호
입력일 2025-07-29 17:06:13 수정일 2025-07-29 17:06:13 발행일 2025-08-03 제 3453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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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교세 신장 바탕으로 ‘자립’…성숙한 지역교회로 인정받아
1962년 한국교회 역사 전환점…서울·대구·광주 대교구 정립

“대주교 삼위 임명 - 자치교구 및 교권상의 완전한 체제, 노기남·서정길·현헨리 대주교, 3대주교구로 정립.

교황 요한 23세 성하께서는 한국에 3대주교구(大主敎區)를 승격, 발령함으로써 전국 각 대목교구(代牧敎區)는 각 대주교구에 소속되는 자치의 완전한 교구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서울·대구·광주 등 3대주교구의 각 소속 교구를 결정하였다.

즉, 서울대주교구에는 평양·함흥·춘천·대전·인천교구가 소속되고, 대구대주교구에는 청주·부산교구가 소속되며, 광주대주교구는 전주교구를 각각 소속 교구로 하여, 3대주교구의 정립(鼎立)을 실현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바오로 노 대주교, 요안 서 대주교, 그리고 하롤드 헨리 현 대주교의 승진을 보게 된 것이다.

바티칸 성청 발령에 의하여 대주교구로 승격되는 서울, 대구 및 광주의 대주교구는 교회법이 규정하는 완전한 수부(首府, METROPOLITAN)가 되며, 승진되는 대주교 또한 교권(敎權) 상의 완전한 권한을 관장하게 되는 것이다.

소속 교구가 되는 각 속교구(屬敎區)는 각 대주교구의 관하에 들어서는 동시에, 대목교구에서 완전한 자치교구로 승격하여 속교구의 주교들은 대목(代牧) 주교에서 본교구 주교로 승진하게 된다.“(가톨릭시보 1962년 4월 1일자 1면 기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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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교계 제도가 설정됨으로써 한국 교회는 성숙한 교회로 인정받았다. 1962년 4월 1일자 가톨릭시보

성숙한 교회로 인정

1962년은 한국교회 역사 안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이룬 해입니다. 한국교회가 성숙한 지역 교회로 인정받은 해이기 때문입니다. 교황 요한 23세는 그해 3월 10일, 한국교회의 자립 능력을 인정하고 정식으로 교계 제도를 설정했습니다.

교계 제도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요청되는 ‘성품권’(Ordo)으로 규정됩니다. 동시에 교회 안의 입법·사법·행정 업무와 관련되는 재치권(裁治權, Jurisdictio)의 행사와 관련된 제도입니다. 교황청은 전통적으로 아직 복음이 깊이 뿌리내리지 않은 선교지의 경우에는 지역교회가 행사하는 재치권 일부를 제한해 왔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선교 지역의 교회는 재치권 행사와 관련해, 교황청 포교성성(현 복음화부)의 관할 아래 지도와 지원을 받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선교지 교회가 상당한 정도의 자립 능력을 갖추게 되면 정식 교계 제도를 설정해서 완전한 재치권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정식 교계 제도의 설정은 교회 제도적 측면에서 해당 지역교회의 큰 성장과 발전을 의미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계 제도 설정의 기쁨

가톨릭시보 1962년 4월 1일자는 1면 전체를 할애해 한국교회에 정식 교계 제도가 설정된 이 소식을 감격 어린 어조로 전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특히 3명의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교회의 반응과 뜨거운 감격을 전했습니다.

노기남 대주교는 가톨릭시보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 개인의 영광보다도 한국교회 전체의 영광을 우선 기뻐하여 마지않는다”며 “전교 지방을 벗어나 교직 체계로 승격되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이후의 한국교회가 짊어질 중대한 책임”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설에서는 “그 의의(意義)를 단지 홍은(鴻恩)에 접한 감격에서보다는 현재의 위치와 또 장래를 관망하면서 침착한 태도로 새겨볼 만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反射鏡’이라는 코너를 통해서는 “교구 자치권의 실현이 각 본당과 단체들의 자치 노력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제도적 발전

교계 제도 설정은 1950년대 한국교회의 성장을 고려한 것입니다.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을 겪고, 그로 인한 폐허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놀라울 정도의 교세 신장을 보였고, 각종 신심 운동과 대사회적인 봉사, 교회 제도와 기구 등이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교회도 스스로 완전한 재치권을 행사해도 될 만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충분한 성숙을 이뤘다고 본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재치권을 완전히 갖는 교회가 됐고, 서울·대구·광주 등의 대목구가 대교구가 되는 동시에 이들을 중심으로 3개의 관구가 설정됐습니다. 아울러 대목구였던 13개 교구는 교구로 정식 승격됐습니다.

한편, 교계 제도 설정 이후인 1963년 10월에는 수원교구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됐고, 1965년 3월에는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가, 1966년 2월에는 부산교구에서 마산교구가, 1969년 5월에는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각각 분리, 설정됐습니다. 1977년에는 광주대교구에서 제주교구가 분할됐습니다.

한편, 전국 교구장들이 모여 설립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1962년 9월 8일 국내법에 따른 사단법인체로 설립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제도적 발전은 서울대교구 김수환 대주교가 1968년 한국교회 첫 추기경에 서임 됨으로써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추기경은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 참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편교회의 주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데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첫 추기경의 탄생은 한국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큰 계기가 됐습니다.

성당 건립은 큰 경사

교계 제도가 설정된 1962년 당시 한국의 신자 수는 53만여 명이었습니다. 성당 수는 275개, 성직자는 한국인 296명, 외국인 250명이었고, 수도자는 한국인 55명, 외국인 43명이었습니다. 수녀는 한국인 1099명, 외국인 135명이었고, 대신학생도 314명으로 꽤 많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50만 명이 조금 넘었던 신자 수가 불과 13년 뒤인 1974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고, 다시 12년이 지난 1986년에는 200만 명을 넘어섭니다. 1980년대에도 여전히 전체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은 5% 아래 머물렀지만, 빠른 교세 신장률을 보인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1960년대 당시 가톨릭시보의 기사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성당 건축과 관련된 소식이었습니다. 가톨릭시보 1960년 10월 30일자에는 다음과 같이 두 곳의 성당 건축 소식을 전했습니다.

“소사성당 낙성, 거제본당 축성. 

우리들의 자모이신 교회, 천주께 바칠 기구할 집회소 구속사업이 계속되는 곳, 언제든지 찾아 뵈올 수 있는 예수님 계시는 곳, 성당들이, 즉 ‘로오마’에 떨어진 반석이, 온 세상을 계속 차지해 나가는 대사업이 이 나라서도 착착 진행 중이다. 

지난 16일에는 부산교구 거제본당이, 20일에는 서울교구 소사본당이 축성과 낙성식을 했다.”(가톨릭시보 1960년 10월 30일자)

지금은 전국에 수많은 성당이 건립돼 있지만 신자 수가 적고 새 성당 건립이 쉽지 않았던 당시에는 새 성당 건축이 교회의 큰 사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960년 전국의 성당 수는 불과 258개였는데, 한꺼번에 두 개 성당을 건축한 것은 큰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