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세의 기도 (탈출기 32~34장)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한 후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에 불안함을 느끼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탈출 32,1-6) 하느님은 이에 진노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32,10) 여기서 늘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과 완전히 다른, 화가 가득하고 복수하시려는 하느님 모습이 우리를 당황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분을 참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 화를 내십니다. 레위인들이 이 일로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3000명이나 죽였다는 이야기(32,25-29)는 우리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지 않고 우리 입맛에 따라 하느님 상을 조작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식구를 잃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모세의 중재 기도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함께 가시도록 하느님을 여러 번 설득합니다.(32,11-14,31-34; 33,12-17; 34,8-9) 모세가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라고(32,33)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32,34)는 말로 분명히 거부하십니다. 다시 모세가 하느님을 달래기 시도합니다. “보십시오, 당신께서는 저에게 ‘이 백성을 데리고 올라가거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누구를 보내실지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께서는 ‘나는 너를 이름까지도 잘 알뿐더러, 너는 내 눈에 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가 당신 눈에 든다면, 저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을 알고, 더욱 당신 눈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민족이 당신 백성이라는 것도 생각해 주십시오.”(33,12-13) 모세는 주님께 애교를 부립니다. 자신이 더욱 주님 눈에 들게 해 달라는 청은 모세가 하느님의 마음을 돌리려는 밑밥입니다. 그의 본래 관심사는 그가 말미에 살짝 언급하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번에도 “내가 몸소 함께 가면서 너에게 안식을 베풀겠다”(33,14)고, 즉 모세만을 언급하십니다. 다급해진 모세가 자신의 의중을 단도직입으로 말합니다. “당신께서 몸소 함께 가시지 않으려거든, 저희도 이곳을 떠나 올라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제 저와 당신 백성이 당신 눈에 들었는지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저희와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33,15-16) 모세는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늘 함께 이야기하지만 하느님은 계속 모세만을 언급하십니다.(33,17) 모세가 주님을 뵌 뒤(33,18-23) 재삼 간청합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34,8-9) 그제야 주님은 ‘너의 온 백성’, ‘너를 둘러싼 온 백성’, ‘너희’라는 말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시고 모세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십니다.(34,10-28) 우리는 아픈 이들이나 어려움에 부닥친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모세는 입술과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기도합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34,8)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께 애원합니다.(32,11)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면서 타인을 단죄하는 모습에서가 아니라 타인의 잘못까지 품어 안는 우리의 자세에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실 것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자도 있다?

수녀님, 수사님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수도복을 입고 있는 수도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갈색, 회색, 흰색, 남색 등 수수한 색상에 상하의가 나뉘지 않고 발목까지 길게 늘어진 모습입니다. 수녀님들의 경우 머리 수건을 착용합니다. 이런 수도복은 보는 이들까지도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해줍니다. 수도자들이 이렇게 수도복을 입는 것은 수도복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청빈을 실천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축성생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수도복은 봉헌의 표지로서 단순하고 단정하며 검소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수도 생활 교령」 17항)고 말하고, 교회법을 통해 “수도자들은 자기의 축성의 표지와 청빈의 증거로서 고유법의 규범에 따라 정해진 수도복을 입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제669조 1항) 수도복은 본래 수도회가 세워지던 당시 일반인들,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입던 평상복이었습니다. 3~4세기경 수도회들이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수도원 안에서 복장을 통일해 나갔는데요. 수도회들은 당시의 농부나 서민들이 입던 옷을 수도복으로 삼았습니다. 청빈의 삶을 서원한 수도자들이기에 가장 최소한의 옷을 입고자 했던 것이죠. 시대가 흐르면서 일반인들의 복장은 변했지만, 수도자들은 당시의 복장을 그대로 이어오다 보니 오늘날에 와서는 수도자들의 복장이 독특한 복장으로 여겨지게 됐습니다. 수도자의 수도복은 봉헌의 표지 단순·단정·검소하고 품위 있어야 사도직 현장에 따라 평상복 입기도 하지만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회들도 있습니다. 특히 예수회나 살레시오회 등 남자 수도회 중에는 별도의 수도복이 없는 수도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수사님 중에 사제품을 받은 신부님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에 수단이나 클러지 셔츠를 입고 계신 수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교회법은 “고유한 복장이 없는 회의 성직자 수도자들은 제284조 규범에 따른 성직자 복장을 입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제669조 2항) 예수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이창현(비오) 신부님은 “사람들 안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서 사도직을 수행하기 때문에 예수회 설립 당시부터 수도복을 따로 입기보다 사제들의 복장인 수단을 그대로 입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들 중에도 수도복을 입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성심 수녀회는 흰 블라우스에 감색 치마를 정복으로 하되, 사도직 현장에 따라 그에 맞춰 평상복을 입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복장이든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 수도회의 경우 정해진 수도복이 있지만, 가난한 이들과 같은 신분으로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공동체에서는 수녀님들이 사복을 입고 있습니다. 성심 수녀회 한화관구장 최혜영(엘리사벳) 수녀님은 “성심 수녀회는 설립 당시 과부들의 복장을 수도복으로 입어왔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창설자의 취지를 생각하면서 소박하고 검소한 옷으로 입자고 결의했다”면서 “사복을 입고 있지만 십자가 목걸이로 축성의 표지와 청빈의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07-2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예로보암

1974년 3월, 중국 시안(西安) 교외에서 주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진흙으로 만들어진 토용과 청동 화살촉을 발견했다. 진시황의 무덤을 발견한 것이었다. 무덤 안에는 온통 구리를 녹여서 왕궁을 재현하고 수은을 환류시켜 은하수를 만들었으며, 천장에 이십팔수의 성좌를 그렸다. 죽어서 살 집의 규모가 이 정도라면 그가 생존했을 때 왕궁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 이후 아방궁(阿房宮)은 초호화 건물의 대명사처럼 사용된다. 초대형 건물을 짓고자 하는 것은 독재자들의 꿈인 것 같다. 제2차 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도 베를린 시내를 완전히 재건축하려 했다. 유럽을 지배하는 새로운 대(大) 게르만 제국의 수도로서의 위용을 갖추겠다며 세계의 수도 게르마니아(Welthauptstadt Germania) 건축계획을 세운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초대형 공사가 이루어지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노력 봉사에 동원되는 힘없는 서민들이다. 솔로몬도 거대공사를 진행했는데 예로보암은 그 책임자였다. 솔로몬은 통치 기간 특별히 이방인 여성들을 후궁으로 받아들였는데 외국인 아내들을 위하여 그들이 섬기는 이방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치도록 했다. 어떻게 보면 국방력과 경제력이 안정되어 너무 편안하고 부유한 생활이 그를 교만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어느 날 예로보암이 우연히 길에서 아히야 예언자를 만나는데, 아히야 자기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그중 열 조각을 예로보암에게 주면서 10개의 지파를 지배하는 왕이 된다고 예언했다. 소문이 퍼져 솔로몬의 귀에도 이 사실을 들어가 예로보암을 죽이려 하자, 예로보암은 이집트로 망명했다. 예로보암은 기원전 931년경에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솔로몬을 이어 왕좌에 오른 르하브암에게 힘겨운 백성들의 과도한 노동력 동원과 무거운 과세를 가볍게 해달라고 청했다. 며칠 말미를 주고 르하브암은 솔로몬의 원로들을 불러 다양한 의견을 청취했다. 그런데 결론은 “내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을 가죽 채찍으로 징벌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할 것이오”라며 강대강으로 맞섰다.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결국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두 개로 쪼개지는 분단의 상황이 시작된다. 자연스럽게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예로보암이 등극했다. 기세등등했던 예로보암은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스켐을 세우고 살다가, 그곳에서 나와 프누엘을 세웠다. 남유다의 침공이 두려워 군사 요충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의 노역과 무거운 과세로 고통을 받아 예로보암을 왕으로 세웠는데, 예로보암도 솔로몬이 했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었다. 또한 두 마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겨 하느님께도 죄를 지었다. 권력을 잡은 예로보암은 귀에 거슬리는 말은 듣지 않고 간신들의 기분 좋은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사람은 욕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배운다고 했던가. 북이스라엘 왕 19명 중, 예로보암의 성적표는 꼴찌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28

[말씀묵상]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안일해지는 어느 날이면, 일찍 일어나 장터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새벽 어스름을 깨고 전을 펴는 가운데, 끓어오르는 솥은 하얀 김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장터의 일상을 마음에 담다 보면 발걸음은 어물전에 이르고, 짠내가 덮쳐와 안일한 정신의 따귀를 칩니다. 제가 맡았던 어물전의 짠내는 생명이 넘치는 바다 냄새인가요, 죽음을 맞아 살이 썩어가는 고린내인가요. 물속을 춤추던 물고기들은 이제 나란히 누워 흐려져 가는 눈빛으로 대답합니다. 생선이 죽어야 산 사람이 밥을 먹지 않느냐고,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어느 서생이 말했습니다. 삶이란 “먹고 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는”(김훈 「라면을 끓이며」 중) 것이라고.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고요한 성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렇게 밥을 먹고 살고 있을 겁니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장터에 다녀옵니다. 돌아온 자리에서 성서를 폅니다. 5000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마주합니다. 먹고 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요. 요한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다른 세 복음서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네 복음서는 저마다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겠지만, 복음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5000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읽는 이들에게, 이야기의 쟁점은 이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11절)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었다.”(12절) 두 구절은 막 바로 이어집니다. 복음사가는 그 과정에 대해 조금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빵을 나누고 남은 것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만 이야기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 행간을 줄여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러합니다. 고대에는 지금처럼 숙박시설이나 요식업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여정을 떠날 때 간단한 식량을 챙기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을 겁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서, 긴 여정을 대비해서 먹을 것을 몰래 챙겨두고 있었겠지요. 그것은 생존과 직결된 사안이므로, 얼마만큼 식량을 챙겼는지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을 것이고요. 그러니까 군중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아이 하나가 자기 먹을 것을 꺼냈습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지요. 지금도 보리는 환영받지 못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도 보리빵은 가난한 이들의 음식이었습니다. 물고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는 ‘옵살리온’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이는 상품 가치가 없어서, 어부들이 내다 버린 작은 물고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 가난한 아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예수님께 내어놓았던 거지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가난한 아이 하나가 자기 가진 것을 내어놓으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부끄러운 마음에 자기가 가진 것을 내어놓기 시작했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사람들이 내놓은 음식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이 사건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살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단시간에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은, 빵이 많아졌다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지요. 그러나 이런 따뜻한 해석을 세차게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표적인 기적을 인간적인 문제로 끌어내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이신 일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것은 하느님 아들의 절대적인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므로, 그저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두 구절은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할 뿐, 행간의 진실은 여전히 멀고 아득합니다. “빵이 어떻게 많아지는가? 그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혹은 “남은 빵 열두 광주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던진 이런 질문으로는 답을 찾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빵의 늘어남이나, 그 숫자가 아닐 겁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한 책입니다. 복음사가가 애써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유는 이 이야기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내고자 함이었겠지요. 다시 복음서를 마주합니다. 나누어 먹은 빵과 남은 빵을 살피다가, 잊어먹은 예수님의 얼굴을 봅니다. 예수님은 왜 수천 명의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건네셨을까요. 한 끼 굶는다고 사람들이 죽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하셨던 분이 아니시던가요. 빵과 물고기를 통해, 예수님이 건네주시고자 한 것은, 정말 무엇이었을까요. ‘먹고 살기 위해 지옥을 헤매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전해주고자 하셨을까요.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밥을 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성당을 찾는 사람들은 밥을 벌기 위해 땀을 흘리고, 그 땀 내음은 바다 냄새와 고린내 사이 어딘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성당을 찾은 분들에게,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풀이 많은 호숫가에 자리 잡게 하시고, 보잘것없은 음식이지만 저마다 원하는 대로 먹게 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가만히 앉아 쉬시라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 풍요로움을 누리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글 _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7-28

[말씀묵상] 연중 16주일

오늘 복음은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이야기는 우리에게 고유한 묵상 주제를 제공합니다. 복음의 앞부분은 지난 주일 들었던 복음(마르 6,7~13)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고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온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여러 고장을 돌며 회개하라고 선포했으며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의 병을 고쳐주고 돌아왔습니다. 이는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늘 함께했던 선생님 없이 제자끼리 둘씩 다니면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나, 제자들 간에 갈등이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서 회개를 외치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떨 때는 마귀들의 저항이 강해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하며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병자들을 최선을 다해 고쳐준 제자들이 긴 여정을 끝내고 돌아왔고, 그들은 예수님과 동료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체험을 나누었습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은 그들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과 너무도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 세상의 현실 때문에 아픔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묵상하게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상에 파견한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사도’라는 단어는 ‘파견된 이’라는 뜻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파견되어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 백성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복음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며, 이와 관련한 모든 활동을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천명합니다. 물질과 돈이 주인이 되어 버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나눔과 섬김의 복음적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회개를 권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 함께 살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세상을 치유하는 사도직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겪었듯이 세상의 냉소와 동료들과의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런 삶은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공동체는 파견되고 사명을 다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서로의 체험에 대해 나눔을 하고 하느님 안에서 쉬고 서로를 격려하는 터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미사 전례에 참여하여 세상 속에서 각자 살아간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고 위로를 얻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치를 이루고 다시 파견될 힘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또 다른 묵상을 하게 합니다. 복음을 보면 이렇게 최선을 다해 애쓴 이들을 좀 쉬게 놔두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도움을 절박하게 원하는 많은 사람이 제자들이 쉬어야 할 곳에 먼저 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명을 갖고 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숨 돌릴 틈도 없이 사람들이 밀려오면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쉬어야 하는데 자신들 생각만 하고 우리를 배려하지 않는구나 하는 매정함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이 사람들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있나 하는 의문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제자들의 상황, 능력과는 별개로 수많은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가 도움을 바라며 그토록 매달리듯 찾아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비롯하여 선의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애쓰고 있지만 세상의 아픔과 고통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어떨 때는 우리의 노력과 애씀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보입니다. 불가능, 좌절, 절망, 포기, 이런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렇게 밀려오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줍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사람들이 밀려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이 요동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그들을 보면서 일어난 ‘가엾은 마음’입니다. 복음서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가엾은 마음’은 절박하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 예수님 안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그리스어로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인데 이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Compassion입니다. 흔히 ‘연민’이라고 번역되지만, ‘함께’(Com)와 ‘고통’(Passio)이 결합한 단어로, ’함께 고통을 겪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야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좀 불쌍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는 고통을 창자가 끊어지듯이 함께 아파하시며 마주합니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죄와 고통 중에 있는 인간들과 함께 아파하기 위해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은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이, 절망 가운데 도움을 바라는 이,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함께 아파했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셨습니다. 하느님은 창조 때부터 우리에게도 당신과 같은 사랑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마음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의무로만 다가올 것입니다. 제자로 살아가는 삶은 그분의 삶을 보고 배울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느끼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에 파견된 우리들이 어떤 마음을 느끼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엾은 마음’이 어디서 오는 마음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7-21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은 몇 번 치는 걸까?

유명한 성당이나 성지를 순례하다보면 성당 종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전 6시, 정오, 오후 6시에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요. 바로 삼종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삼종기도 종소리를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종을 제법 많이 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종을 몇 번 치는 걸까요? 그래서 삼종기도 시간에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을 찾아가 직접 세어봤습니다. 모두 33번이었습니다. 수원교구 안성성당에도 가서 세어보니 마찬가지로 33번이었습니다. 안성성당에서 7년째 종지기를 하고 계신 유국형(요한) 형제님께 물어보니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예수님 나이가 33세라 33번을 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이라니! 삼종기도에 참 어울립니다. 그런데 삼종기도 종이 33번이 아닌 성당들도 있었습니다. 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의 삼종기도 종은 42번 울립니다. 대전교구 주교좌대흥동성당에서 2019년까지 50년간 종지기를 해오신 조정형(프란치스코) 형제님은 작은 종, 중간 종, 큰 종을 각각 세 번씩 울리고 다시 종들을 20번 가량 연속으로 울리는 방식으로 종을 쳐오셨다고 합니다. 꼭 33번을 쳐야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타종 횟수는 달랐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었는데요. 처음 9번은 타종 방식이 같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3번씩 끊어서 3차례 치는 것이지요. 이는 삼종기도 안에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가 셋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삼종기도를 다 바칠 동안 종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하기 위해 계속 종을 치는 것입니다. 삼종기도는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가 담긴 세 가지 성경 구절(루카 1,28; 루카 1,38; 요한 1,14)과 성모송, 본기도로 구성된 기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3번 종이 칠 때 바치는 기도라 해서 삼종(三鐘)기도라고 부르지만, 기도문이 “주님의 천사가(Angelus Domini)~”라는 구절로 시작하기에 ‘안젤루스’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삼종기도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13세기 무렵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성당에서 저녁 종이 울릴 때마다 성모송을 3번씩 바쳤고, 이것이 신자들 사이에 크게 퍼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16세기에 성경 구절이 추가됐고, 17세기경에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삼종기도의 형태가 됐다고 합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이 기도를 가능한 한 언제 어디서나 계속 바치도록 간곡히 부탁한다”면서 “말씀이 강생한 신비를 묵상하고 복되신 동정녀께 인사하며 그녀의 자비로운 전구를 바라는 것 등은 변함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41항) 이처럼 삼종기도는 우리가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과 수난과 부활로 이루신 파스카 신비에 이르기까지를 묵상하면서 우리의 아침, 낮, 저녁 시간을 거룩하게 해주는 기도입니다. 비록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삼종기도를 정성껏 바치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성당 종소리 같은 우리가 돼보면 어떨까요.

2024-07-2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노래하며 춤추며 온 백성이 함께 바치는 기도(탈출기 15장)

“나의 힘, 나의 노래이신 주님!” 가수 고(故) 김광석씨는 ‘나의 노래’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흥겨운 리듬과 희망찬 가사를 담고 있는 이 노래에서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이라는 후렴이 반복되는데, 이는 가수가 가지고 있는 삶의 정수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을 나오면 울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갈대 바다를 빠져나오면서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자유를 얻은 백성은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이 노래는 성경에 나오는 첫 노래이자 함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바빌론의 패망에(묵시 18장 참조) 대한 하늘에 있는 무리의 환호와(묵시 19장 참조) 같이, 이 노래는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이라는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 앞에서 터져 나오는 인간의 응답입니다. 백성은 주님과 그분의 종인 모세를 마음으로 믿는(탈출 14,31 참조) 데에 그치지 않고 마음과 입을 열어 찬양 노래를 부릅니다. “나의 힘, 나의 노래(성경 번역은 ‘굳셈’)이신 야(훼)!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다”(2절; 이사 12,2: 시편 118,14 참조)는 대목이 노래 전체를 요약합니다. 여기서 힘과 노래라는 조합은 주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그분의 멋짐을 드러냅니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 사건을 전하는 기도문의 수준 높은 시상이 ‘노래’의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전쟁의 용사’와 ‘오른손’ 및 그분께 맞서는 이들은 거센 물속에 가라앉은 납덩이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표현이 그분의 탁월한 ‘힘’을 보여줍니다. 주님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야’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줄임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서 그분을 얼마나 친밀히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누가 당신과 같겠습니까?”(탈출 11절)는 노래의 중심이자 그 전환점입니다. 이 질문에서 어떤 신들과도 비길 수 없는 주님의 탁월함이, 또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적의 뛰어남이 드러납니다. 그분에 맞설 이나 비길 이는 아무도 없고 그분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의 노래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찬양하고 12~18절은 미래를 지향합니다. 지금까지 선사된 것이 감사의 이유이지만 또한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 이미 찬양에 포함됩니다. ‘힘과 노래’는 주님의 권능 드러내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기도문과 비유로 그분의 탁월한 힘 보여줘 하느님은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해 함께 부르는 노래로 고백받아야 이와 같이 기도 안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들어섭니다. “땅이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16절)는 민수기 16장의 반역을 암시하고,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필리스티아, 에돔, 모압, 가난안 민족들을 거쳐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당신께서 살려고 만드신 곳’(17절)은 후에 솔로몬이 세우게 될 성전을 가리킵니다.(1열왕 8,49; 2역대6,39) “주님께서는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신다.”(18절)는 마지막 구절은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여 언제나 도와주시고 이끄시는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노래 전체는 점차 확장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남성)이 “나는 노래하리라”(1절)로 시작하지만 미리얌과 여자들은 “너희는 노래하여라”(20절)라는 추임새를 넣고 남성과 여성이 마주하여 웅장한 이중의 합창을 하는 듯합니다. 게다가 여자들은 손북을 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동반합니다.(판관 11,6-8; 1사무 18,6-8; 예레 31,4 참조) 합창단과 관현악단과 무용단이 모두 함께 신나는 음악을 엮듯이 찬양의 기도는 모든 이들을 포괄합니다. 누구보다 위대하신 하느님은 시간을 넘어 변함없이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십니다. 나의 노래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함께 부르는 노래로 찬양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7-2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의 말씀에 잡혀 활동한 예레미야 예언자

중국의 두보(杜甫)는 사회풍자와 교훈적인 주제를 담아낸 시를 많이 썼다. 두보가 살던 당나라는 찬란한 문화와 막강한 군사력을 지녔다. 당나라의 뛰어난 문물과 정비된 제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강했던 당나라도 잦은 전쟁과 반란,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차츰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현종이 임금일 때 아름다운 여성 양귀비에 빠져 정사(政事)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 틈을 이용해 낙양 등의 큰 도시를 점령한 큰 군벌들이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왔는데, 당나라 중엽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이 가장 유명하다. 부패한 관리들은 모두 꽁무니를 뺐고 장안을 지키는 군인들도 변변하게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의 굴욕을 당했다. 당시 말단 관리였던 두보도 포로가 되었다가 1년 만에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도망쳐 나오다가 높은 성 위에서 수도 장안이 불타고 부서져 내려 폐허가 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보가 눈물을 흘리며 쓴 시 “國破山河在(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여전하고) 城春草木深 (도성에 봄이 오니 초목은 우거지는구나)…(후략)”는 그의 시집 「춘망」(春望)에 남아있다. 두보는 지금도 시성(詩聖)으로 불리며 애민정신에 투철하고 사람의 마음과 역사적 진실을 아주 섬세한 감정으로 표현한 시들을 많이 써서 중국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시인이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지방 사제의 아들이었다. 예레미야는 20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유다의 마지막 왕 때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인 약 40여년간 예언자로 활동했다. 그의 활동 기간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가장 비참하고 혹독한 시기였다. 55년간 왕들의 폭정이 계속됐고, 요시아왕의 개혁정책도 뒤이은 왕들의 실정으로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다. 나라가 부실한 상태가 되다 보니 암흑과도 같은 시대가 지속되었고,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굶주림과 고통으로 몹시 피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종교가 더 부패하여 일반 백성들의 고충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였다. 그는 예언자와 사제들을 정조준했다. 그들의 부패상을 모두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실 당시의 시대상은 정치,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가 부패하고 썩은 상태였기에 예레미야가 멸망을 예언하는 것은 지나친 경고가 아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활동은 녹록지 않았다. 한마디로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예레미야는 그럴 때마다 하느님께 불평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는 와중에 예레미야는 펑펑 울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 항복하라고 하여 매국노라는 오해를 받고 백성들의 미움까지 사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너무 억울했지만, 백성들의 어두운 미래가 측은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언자가 된 예레미야는 웃음거리, 조롱거리로 내몰려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칠 수 없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철저히 잡혀있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21

[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눈빛으로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걷다가 그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아,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르 1,16-20 참조)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했고,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기적을 눈으로 봤고 그분의 가르침을 귀로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동반자이자 목격자이며, 동시에 특권을 가진 청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라고 약속하셨지만, 그들은 아직 ‘사람 낚는 어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전해주는 ‘예수 이야기’에서 그들은 아직 ‘조연’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심으로써, 그들은 ‘사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보내다’ 혹은 ‘파견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아포스톨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르 6,7 참조) 예수님의 ‘파견’을 통해 제자들은 ‘따르는 이’ 혹은 ‘배우는 이’에서 ‘파견 받은 이’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 제자들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부여한 ‘권한’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권한’ 혹은 ‘권위’라고 번역할 수 있는 ‘엑수시아’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와 함께 머무른 이들이 ‘권한’을 받음으로써 ‘사도’라고 불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마르 3,14-15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았으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마르 1,15) 그들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아픈 이의 병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권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다른 이(예를 들면, 군중 혹은 여인들)와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사도, 곧 파견받은 이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사도들이 복음 선포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마르 6,8-9 참조), 먼저 사도들은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아야 합니다.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벌의 옷은 선교활동을 위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림으로써 부여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당부하십니다. 베드로도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옆에서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두 번째로 파견받은 사도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사람들의 환대나 거절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마르 6,10-11 참조) 여행자를 환대하는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미덕이었습니다(창세 18,1-8; 19,1-3; 욥 31,32 참조). 그러나 사도들이 환대를 받을 때에도, 그들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혹시 거절을 당한다면 거절이 가져올 결과가 무엇인지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할 때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이방인 지역을 다녀왔을 때 옷이나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곤 했는데(2열왕 5,17; 이사 52,2 참조), 이 행동은 정결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절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제1독서에서 ‘파견 받은 이’의 또 다른 모델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모스입니다.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예언자였습니다(아모 7,15 참조). 그는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아모 7,14)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들어 올려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 성장은 사회적 불균형 현상으로 이어졌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화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법적 부조리 또한 만행했습니다. 외적으로는 평화롭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부정과 불의로 가득 찬 이스라엘로 아모스 예언자는 파견됐고, 그곳에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주님의 날, 거룩한 미사성제에 참여한 우리는 사제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말씀과 성찬의 식탁으로 초대해 주셨고,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습니다. 미사가 끝나면서 파견을 받는 우리는 더 이상 말씀을 듣고 몸과 피를 모시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것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미사경본 총지침」 90항은 파견의 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제 또는 사제는 신자들 각자가 돌아가 선행을 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그들을 파견한다.” 미사의 은총을 가득 받고 파견된 우리는 주님의 사도로서 미사 안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을 힘차게 고백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7-14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지혜로운 왕 솔로몬의 타락

지혜로운 사람은 가난해도 즐겁고 어리석은 사람은 부유해도 걱정에 잠을 못 이룬다. 신라시대의 대학자 최치원(857-?)은 생활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했다. 만족하면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고 자기 일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원님과 백정이 있었다. 원님은 그야말로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고 착하고 예쁜 부인을 만나 자식도 여럿 두었다. 백정은 천한 신분 때문에 매일 무시당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여 일찍 늙어 보여 결혼도 못 하는 신세였다. 어느 날 원님이 산책 중에 백정을 만났다. 백정은 예의를 갖추어 절을 하였다. “그런데 원님, 안색이 불편하신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안 좋으신 곳이라도?” 원님은 하늘을 한참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걱정이 너무 많네. 혹시 고을에 강도나 도둑이 들지 않을까? 혹시 누가 나에게 불만이 있는 자가 나를 모함하여 임금님이 갑자기 벼슬에서 파직시키지 않을까? 그 밖에도 걱정거리가 많다네. 내가 이런데 자네는 오죽하겠나?” 그 말에 백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쇤네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가족이 없으니 걱정할 게 없고, 가진 재산도 없으니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고기를 사람들에게 팔면 돈을 받으니 기쁘고, 매일매일 그냥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그 백정의 말에 원님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충격이 왔다. 비로소 백정의 밝은 얼굴을 바라보며 만족의 삶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보통 인간의 고통은 욕심에서 비롯되고 이 욕심이 사람들을 죄와 잘못된 길로 이끈다. 솔로몬은 그야말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태평성대를 이룬 왕이었다. 솔로몬 하면 항상 지혜라는 단어가 따라붙을 정도로 영민한 왕이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정을 확립했다면 그의 아들 솔로몬은 안정된 정치적 수완으로 왕국에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정략적인 혼인과 무역을 바탕으로 경제적 성장을 이뤄냈고, 그리고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부전자전이라 했나? 솔로몬도 아버지를 닮아 호색가의 DNA(?)를 갖추었다. 그는 수많은 외국 이방인 여인들, 모압 여인, 아몬 여인, 에돔 여인, 시돈 여인, 헷 여인 등 온갖 외국 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분명 정치적 장점도 있었지만, 왕궁 깊숙한 곳에서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공공연하게 이뤄지게 됐다. 이스라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종교국가이며 항상 이스라엘의 문제는 역사는 잡신들과의 투쟁과정으로 점철돼 있었다. 솔로몬은 우상숭배가 궁정 안에서 이루어지게 했고, 지나친 세금 부과와 강제노역으로 백성의 원성을 샀다. 큰 둑은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가장 약한 부분부터 방심한 사이 어느새 전체가 무너진다. 하느님의 축복을 약속받는 것으로 시작된 솔로몬의 통치는 하느님의 분노를 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풍요와 큰 성공은 솔로몬을 교만하게 만들었고, 그는 결국 타락하게 됐다. 인생에서 겸손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의 마음을 지니자.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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