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부활 제3주일, 생명 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 티베리아스라고도 불리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제자가 물고기를 잡기에 가장 좋은 때인 밤에 배를 몰고 나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밤새 허탕을 치고 맙니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이상합니다.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될 무렵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마치 짙은 어둠이 삼켜버린 것만 같았던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부활과 참 잘 어울리는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옛 교우들은 부활 새벽에 산에 올라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하고, 태양이 뜨고 있음을 알리는 수탉은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호숫가에 서신 예수님께서 약 100미터쯤 떨어진 배 위의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는 데 사용하신 ‘얘들아’(παιδία)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요한 21,5) 사실 이 단어로 제자들을 부르는 것은 어색합니다. 7세 미만의 어린아이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실까요?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당신을 배신하고 버린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 괘씸한 죄인이 아니라 마냥 무섭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도망쳐 버리고만 가련한 어린아이들로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오른편은 상서로운 방향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153마리나 되는 고기가 잡혔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에 따르면 당시 알려져 있던 물고기 종류가 153가지였다고 하니, 153마리의 물고기는 온 세상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첫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루카 5,1-11 참조)과 흡사한 이 장면은 예수께서 비록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떠났어도 그들을 다시 불러 모든 민족을 낚는 어부로 거듭나게 하심을 보여줍니다. 제자는 스승을 버렸으나, 스승은 제자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내 예수님을 알아본 베드로는 옷을 입고 그분께로 헤엄쳐 갑니다.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죄인의 반응입니다.(창세 3,10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죄책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의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해 세상으로 파견하기 전 손수 한 끼 식사를 챙겨 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과 생선을 나누어 먹이시는 모습은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신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신 죽음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성체성사 안에서 늘 일치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질문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는 슬퍼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슬픔은 곧잘 깨달음의 매개체가 되곤 합니다. 베드로도 슬픔을 통하여 세 번 배반한 자신에게 세 번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심으로써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두 번은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질문하시고 마지막 질문에는 ‘필레오’(φιλέω)라는 동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세 번 모두 ‘필레오’라는 동사로 대답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단어들을 모두 사랑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두 동사가 의미하는 바는 다릅니다. 필레오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 주로 사용되고, 아가파오는 신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아가파오로 물으시는 첫 두 개의 질문에 필레오로 대답한 것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이 아직 미숙함을 고백하며 그것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과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필레오로 질문하신 다음 당신 양들을 돌보라 명하십니다. 형제에게 향하는 필레오에 주님께로 향하는 아가파오의 비밀이 숨어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형제를 사랑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배우라는 가르침으로 이해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육체적 선(善)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재물, 명예, 권력을 모두 가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건강을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신체의 건강보다 나은 재산은 없다’(집회 30,16)고 말한다. 또한 동양에서는 ‘5복’ 안에 건강과 치아가 모두 들어있을 정도이다. 더욱이 현대의 젊은이들은 ‘프로필 사진 촬영, 식스팩 만들기’ 등 남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자신의 ‘건강한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지대하다. 아직 젊은이들은 건강 자체의 중요함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매우 절실한 생존의 문제가 된다. 성경의 대표적 의인 욥도 재산과 자식을 모두 잃었을 때보다 온 몸에 ‘고약한 부스럼’이 덮쳤을 때 더 큰 고통을 겪은 것으로 묘사된다.(욥 2,1-10 참조) 그렇다면 건강이나 쾌락과 같은 육체적 선이야말로 최종 목적으로서의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닐까? 육체의 선을 넘어서는 인간의 최종 목적 성 토마스에 따르면, 행복에 있어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을 능가해야 한다.(I-II,2,5) 그러나 육체의 선만이 행복의 유일한 기준이라면, 많은 동물이 인간보다 우월하다. 인간은 결코 사자의 용맹함이나 코끼리의 힘, 치타의 빠름을 능가할 수 없다. 영광스러운 ‘올림픽 금메달’조차 나약한 인간들끼리 경쟁해서 얻은 성과일 뿐이다. 더 나아가 육체적인 선에만 인간의 행복이 있을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보다 높은 목적을 향해 살아가며 인간 자체가 최고선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이 생명 유지, 즉 인간 육체의 보존일 수는 없다. 성 토마스가 존경하던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는 이미 “살아있는 것들은 존재하는 것들보다 좋고, 인식하는 것들은 살아있는 것들보다 좋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살아있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강보다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더 높은 목적이 있다. 더욱이 성 토마스에 따르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에게서 육체의 존재가 영혼에 의존할지라도 인간 영혼의 존재는 육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육체 자체는 영혼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평생에 걸쳐 돈을 모은 부자들조차 중병에 걸리면,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거액의 치료비를 지불한다. 여기서 재물과 같은 외적 선들은 건강과 같은 육체의 선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 자체는 ‘지나가 버리는’ 본성을 지닌다. “삶 자체는 지나가 버리고 […] 우리는 자연적으로 [생명을] 가지기를 바라고 그 안에 영원토록 머물기를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으로 치닫기 때문이다.”(I-II,5,3) 이렇게 육체적 삶의 유한성은 장수와 건강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채우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육체적 쾌락을 능가하는 완전한 쾌락에 대한 성찰 그렇지만 육체의 선에는 건강만이 아니라, 인간을 즐겁게 해 주는 ‘쾌락’이 존재한다.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최종 목적이 아닐까?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을 극대화하는 삶은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며,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인 삶이라고 말한다. 또한 쾌락을 충족한다고 하더라도 그 즐거움은 단기적이어서 궁극적이거나 자족적일 수 없다. 그러나 쾌락을 이렇게 간단히 행복의 후보에서 제외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발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쾌락주의’의 대표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이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무엇보다도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행복은 즐거움 즉 쾌락이다. 모든 동물의 행동과 삶은 이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고통을 피하는 것 혹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든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쾌락을 욕구하고 그것을 최고선으로 즐긴다. 반면에 고통은 최고의 악으로 혐오하고 이를 가능한 한 피한다.”(키케로, 「최고선악론」) 그런데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런 주장들을 통해 오해를 많이 받았다. 그가 누명을 쓰게 된 데에는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영향도 매우 컸다. 그런데 그들의 오해와 달리 그가 생각했던 진정한 쾌락이란 결코 육체적 방탕이 아니었다.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정념에 사로잡힌 극적인 흥분 상태가 아니라 지극히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상태에서 찾았다. 따라서 쾌락은 그에게 ‘영혼의 혼란으로부터의 해방’, 즉 ‘정념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정의된다. 이런 상태를 에피쿠로스는 ‘영혼의 평온’(Ataraxia)이라 불렀다. 성 토마스는 육체적 쾌락을 인간이 누리는 대표적인 즐거움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물론 그는 육체적 즐거움이야말로 인간의 의지와 이성을 삼켜버려 다른 모든 선을 경멸하게 만들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쾌락이 곧 ‘최종 목적’이 아니라 “모든 즐거움은 행복을 따라오거나 행복의 어떤 부분을 따라오는 하나의 고유한 우유(偶有)”, 즉 행복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I-II,2,6) 더욱이 그는 즐거움은 선(善) 때문에 욕구될 만한 것이며, 이런 경우 선은 즐거움의 근원이며 그것에 형상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토마스는 만일에 인간이 자기에게 적합한 어떤 ‘완전한 선’을, 실제로 혹은 희망으로 혹은 적어도 기억 안에 가짐으로써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인간의 행복 자체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에 그것이 ‘불완전한 선’이라면, 그 쾌락이란 진정한 것이 아니라 행복의 한 부분만을 가진 것(分有)이나 행복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성 토마스에 따르면, 완전한 선을 따라오는 즐거움 그 자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행복의 본질이 아니고 우유로서 행복의 본질에 따라오는 어떤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토마스가 말하는 완전한 쾌락을 줄 수 있는 영혼의 선, 또는 정신적인 선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다음 회에서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7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다섯째 봉인이 열리다(묵시 6,9-11)

다섯 번째 봉인이 열린다.(9절) 제단이 등장하고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울부짖는다. 그 영혼들은 자신의 피 흘림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있다. 흔히 레위기 4장 7절을 떠올리며 이 대목을 해석한다. 레위기의 이야기는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친 동물의 피를 제단 밑바닥에 쏟는 유다의 속죄 예식을 소개한다. 동물의 피는 유다의 죄와 비례하여 희생되어야 했다. 나는 희생이라는 말마디와 우리가 읽고 있는 묵시록의 영혼들을 연계하여 해석하는 데 불편함이 있다. 제단 아래의 영혼들은 누군가의 죄를 대신하거나 자신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 살해된 것이 아니다. 요한묵시록 6장의 영혼들은 ‘증거자’였다.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의 증언’ 때문에 살해된 것이다. 무엇을 증언했을지 그 내용을 묻기 전에 살해되었다는 말마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사 ‘스파조’(σφάζω·살해하다)가 사용되었는데, 요한묵시록 5장 6절 어린양의 죽음에도 사용된 동사다. 제단 아래 살해된 영혼들은 어린양의 죽음과 하나가 되었다. 이 죽음은 요한묵시록 18장에 등장하는 대탕녀 바빌론, 곧 로마 안에서 죽어간 예언자들과 성도들의 죽음이기도 하다.(묵시 18,24) 영혼들은 죽음으로써 예수와 수많은 예언자들과 헤아릴 수 없는 신앙인들을 대변하는 상징이 된다. 영혼들은 외친다. 자신들이 흘린 피에 대한 복수를 갈망한다. 살해된 영혼들은 죽음으로 제 역할을 끝내지 않는다. 죽었어도 죽은 게 아니다. 영혼들은 복수를 향한 갈망으로 살아 있다. 요한묵시록은 19장에 가서야 복수의 결말을 이렇게 노래한다.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자기 불륜으로 땅을 파멸시킨 대탕녀를 심판하시고 그 손에 묻은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19,2) 그러나 대탕녀 바빌론, 그러니까 로마제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요한묵시록이 쓰였을 당시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건재했고 군사적으로 위대했으며 경제적으로 화려했다. 제단의 영혼들이 갈망한 복수는 도대체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무너지지 않은 것을 무너진 것으로 해석하고 단정 짓는 그 복수는 어떤 것일까.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현실적이지 않은, 그러므로 ‘영성적인 해석’이라 단정 짓기도 한다. 그러나 살해된 영혼들의 외침은 현실적이다. 신앙을 증거하다가 죽어간 많은 영혼들은 우리 역사에 선명히 남아 있는 현실의 존재들이었기에. 증거와 대립한 객체가 아무리 건재하고 위대하며 화려할지라도, 증거의 외침은 결코 멈추지 않고 역사 속에 울려퍼져 나가고 있기에.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겠다. 죽은 영혼이 살아 외치는 것 자체에 대한 질문 말이다. 죽어서 끝난 게 아니라 여전히 외침으로 증언하고 있는 그 사실에 대한 질문.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요한묵시록 12장 11절을 통해 얼마간 유추해 볼 수도 있겠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자를 이겨 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요한묵시록 12장은 그 옛날의 뱀, 그러니까 악의 본령이자 근본인 용에 대한 승리를 이야기한다. 용을 이긴 이야기는 승리를 얻어 누리는 형제들의 모습을 서술하지 않는다. 다만 목숨을 잃은 것이 곧 승리라는 점을 각인시킨다. 증언을 하여 죽어가는 것이 증언의 실패와 좌절이 아니라 끝내 이기는 것이라는 생각은 무척이나 낯설어 우리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어렵다. 그럼에도 이 낯선 생각을 요한묵시록은 우리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살해된 영혼들의 죽음이 외침으로 살아 있는 이유를 꼭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요컨대, 죽음은 수동적 희생이 아니라 능동적 증언의 한 형태라는 것, 죽음의 자리를 기꺼이 감내하는 그 의지는 상대를 무너뜨리는 승리가 아니라 제 자신의 신앙을 끝끝내 드러내는 승리의 선포라는 것, 그리하여 요한묵시록 6장의 살해된 영혼들은 복수를 갈망하는 그 외침 안에서 이미 복수가 이루어졌다는 저들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해된 영혼에겐 살해되었으되 희고 긴 겉옷이 주어져 있다.(묵시 6,11) 천상의 영광과 기쁨, 그리고 승리를 상징하는 흰옷은 이미 주어졌다. 죽음과 승리는 부딪혀 튕겨지는 대립의 말마디가 아니다. 죽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라고 흰옷은 힘주어 말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그 죽음의 길이 아직 죽어가야 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찰 때까지 조금 더 쉬고 있으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묵시 6,11) 요한묵시록 6장의 살해된 영혼들은 역사의 한 사건에 국한된 죽음과 그 승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 살해된 영혼들의 죽음은 시간이 스쳐 가는 역사의 매 순간 벌어지는 또 다른 승리의 시작이다. 마지막 시간, 종말을 가리키는 전통적 시간 개념인 ‘수가 찰 그때’는(4에즈 4,35-36 참조) 증언으로 죽어가는, 그리하여 흰옷을 입을 많은 영혼들의 숱한 시간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영원의 시간이다. 역사의 매 순간, 살해된 영혼들은 끊임없이 등장하며 끊임없이 구원의 영광과 기쁨과 그 승리를 역사 안에 새겨놓을 것이다. 역사의 매 순간은 그렇게 종말의 영원성과 맞닿아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봉인이 열리기 전, 그러니까 앞선 네 개의 봉인이 열릴 때, 우리는 세상의 갈등과 다툼, 그리고 죽음을 똑똑히 목격했다. 천상의 달콤한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라 세상의 지독한 현실 체험이 요한묵시록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계시였다. 그리고 다섯 번째 봉인은 그러한 세상에 신앙을 증거하다 죽어가는 이들의 외침을 선명하게 들려준다. 봉인이 열리는 것은 그러므로 절절한 상처의 단면들을 읽어내는 이들을 요청한다. 상처 깊숙이 파고들어 세상의 갈등과 다툼, 그리고 죽음에 지지 않고 이기는 법을 신앙으로 배워나가길 요한묵시록의 봉인들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처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죽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는 건, 위선과 배신일 때가 많다. 상처 입고 죽어가는 일로 좌절하지 말자. 상처 입을지라도, 죽어갈지라도, 살아내는 이 순간, 우리는 늘 승리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에 관한 사두가이들의 이해에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4.27; 마태 22,29)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다. 교리서 본문은 예수님 이전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명확하게 선포한 가르침을 제시한 이가 없었고, 예수님의 대답이 지닌 의미는 대단히 깊고 정확하다고 말한다.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역사 안에서 인간의 지식과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에 상응하는 차원이고, 또 인간이 하느님 생명의 숨으로 불어넣어진 몸이라는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이야기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신화적 신들을 부정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얻어진 세계관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전수했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르게 표현된 내용들이 있음을 구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라며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 것이다. 즉 부활은 하느님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고, 죽음을 건너 저 세상의 일이라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논리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위대한 질문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전형적인 질문을 자신의 고통 앞에서 했던 욥을 만나 보자. 욥은 의인이었고 큰 죄를 범하지도 않았으며 부귀와 권세를 지녔다. 그런 그가 받은 첫 번째 시험은 자신의 소유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병을 얻은 후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욥은 그의 소유였던 집과 가축 그리고 귀한 자식을 잃었을 때도 동요하지 않고, 하나씩 잃을 때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라며 하느님을 찬미했다. 소유한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그는 병이 들었다. 이제는 소유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몸에서 느끼는 큰 고통은 절망을 주었고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욥 3,11-12)라며 자신의 생을 원망한다.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은 전통적 가르침에 따라 고난과 불행은 죄 때문에 당하는 형벌이니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라 말한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말을 받아들이지도, 더 이상 무릎을 꿇지도 않고 하느님께 질문한다. ‘왜 입니까?’ 병으로 인한 고통이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은 하느님에게만 가능하고 또 그분만이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입니까? 내가 죽어 어디로 간다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욥이 스스로 질문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폭풍 속에서 거침없이 말씀하신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욥 38,4이하). 이는 ‘내가 너를 만들 때 너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한 것이 뭐가 있느냐?’는 의미다. 지혜로운 욥은 질문의 속뜻을 알아듣고 고백한다.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뵈었습니다(보다)’는 하느님과 인격적 친교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고통 앞에서 온몸으로 던진 질문은 존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을 불렀던 것이다. 불렀고, 만났고,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에서 나와 그 사랑을 향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사두가이들이 범한 오류는 성경을 자신들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이해하려 했던 것이고, 욥의 친구들처럼 자신들의 공로로 얻어진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부활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능력과 스스로 당신을 드러내는 생명이신 그분과의 만남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9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입맞춤으로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2014년 8월 18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명동대성당에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마지막으로 로마로 귀국하는 사목방문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사가 끝나기 전 교황님 제의실로 가는 데 경찰 통제선 안쪽에서 한 어머니가 울고 있는 아이와 같이 나에게 손짓했다. 가서 들어보니 어머니가 교황님께 축복을 받으려고 꼭두새벽부터 기다렸는데 입장하실 때 교황님이 다른 쪽을 향해서 인사를 하셔서 안수를 못 받았다고 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간절해 나는 아이를 데리고 제의실로 가서 기다렸다. 미사가 끝나고 교황님께서 복사단과 함께 들어오셨다. 한여름의 빡빡한 한국 사목방문 4박5일의 일정을 다 마친 교황님은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교황님께 다가갔다. 그러자 교황님은 걸음을 멈추고 지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따듯한 미소를 띠시며 아이와 악수했다. 내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자, 교황님은 아이를 안으시고 볼에 입맞춤하셨다. 아이가 준 편지도 받아서 직접 제의 안으로 챙기셨다. 그때 보았던 교황님의 따듯한 미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입맞춤은 예로부터 평화와 우호의 상징으로 계약의 조인에도 사용되었다. 발이나 손에 하는 입맞춤은 겸손과 자발적 복종, 존경의 표시이다. 지금도 외국 성지순례 때 보면 성인상의 발등에 고개를 숙여 입맞춤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스승을 배신해 악인들에게 넘겨줄 때 입맞춤 장면이 언급된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22,47-48) 입맞춤은 본래 애정과 헌신의 표시였지만 주님을 배반한 유다에 의해 악용돼 배반의 표시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해 돈을 받고 팔아버려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로 생을 끝마쳤다. 예전에는 유다가 ‘예수의 13번째 제자’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13명의 사도단은 실제로 없었다. 지금도 서양권에서 성행하는 숫자 13을 기피하는 문화는 유다가 그 시작이었다. 유다는 사도단의 살림을 맡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뢰를 받았다. 단체에서 돈주머니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그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죄인들의 손에 팔아넘긴 이유는 성경에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스승이 유다인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킬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는 점이 그를 실망하게 했을까?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가끔 일하다 보면 진짜 걸림돌은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 장군이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앞으로 진격하는데 방해를 놓는 것은 독일군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편이 발목을 잡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처음 네 개의 봉인이 열리다(묵시 6,1-8)

봉인이 열린다. 숨겨진 진실이 혹은 감추어진 계시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그 시작은 ‘오너라’(Ἔρχου)라는 명령형의 동사다. 헨리 바클레이 스위트(Henry Barclay Swete)와 같은 고전적 성서학자들은 ‘오너라’라는 동사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믿는 이들의 외침을 읽어내곤 했다. 요한묵시록은 ‘오다’라는 동사를 통해 예수님의 오심을 수차례 언급하기도 한다.(1,4.7.8; 2,5.16; 3,11; 4,8; 16,15 참조) 요한묵시록 끝자락에서는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는 어린양의 ‘신부’가 예수님께 ‘오시라’고 외치기도 한다.(22,17 참조) ‘오다’라는 동사를 두고 예수님과 믿는 이들의 서로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도드라진다. ‘오너라’의 외침이 들리는 처음 네 개의 봉인은 어쩌면 예수님을 향한다는 것과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그리하여 어느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지를 일깨우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봉인이 열리면서 네 마리의 말이 등장하는데 각기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 즈카르야서 6장 1절부터 8절까지에 나타나는 병거 넉 대와 말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네 마리 말들로 인해 벌어지는 재앙들 때문에 탈출기의 열 가지 재앙과 연결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또 아니면 서기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을 ‘종말’의 징표로 이해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해석이 네 마리 말들로 표현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무엇이건, 마지막 시대에 주님께서 직접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셔서 당신의 구원 의지를 드러내신다는 해석으로 마무리된다. 문제는 첫 번째 말의 색깔이 하얗다는 데 있다. 대개 천상의 기쁨이나 영광을 드러내는 하얀색이 다른 말들의 색깔들, 그러니까 붉고 검고 푸르스름한 색깔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하얀색의 말을 탄 이는 ‘활’을 들고 있는데,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을 이야기할 때, 활을 등장시킨다.(신명 32,41-42; 하바 3,8-9; 에제 5,16-17) 활이라는 형상은 인간 세상사 그 어떤 대목에서도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이 가득하다는, 그리하여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대적하지 못한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요한묵시록은 19장에서 마지막 시대, 마지막 승리자로서 백마 탄 기사, 곧 예수님을 소개한다. 6장의 백마 탄 기사는 19장의 예수님을 미리 알리는 하나의 표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린양이 여는 봉인의 시작은 말하자면 예수님을 계시의 첫 자리로, 그 자리에서 그 어떤 것도 예수님과 대적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앙을 갖추도록 독자를 이끈다. 첫 번째 말의 색이 하얗다는 건, 우리가 누릴 천상의 기쁨과 영광은 세상이 어떻든, 그 세상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든, 우리에게 유일한 승리자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바라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꽃길만이 보장된 편안하고 행복한 길이 아니다. 어린양이 두 번째 봉인을 뜯고 나서 붉은 말이 나오는데, 그 말 위에 탄 기사는 큰 칼을 들고 있다. ‘칼’의 형상은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통적 형상이다.(이사 27,1; 에녹 90,19.34; 91,12) 유다의 묵시문학 작품들은 ‘칼’을 통해 메시아 시대의 갈등과 다툼, 그리고 전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이 쓰인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느꼈을 또 다른 마지막 시대의 징표를 로마 제국의 군사력에서 찾기도 한다. 이를테면, 무시무시한 로마의 군사력은 공포의 대상이지만 또한 비로소 마지막 시대가 도래했다는 희망의 징표로 해석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살해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 일로 파멸이 아닌 메시아 구원의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신앙의 해석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함으로 맞닥뜨리는 눈물겨운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다짐일 것이다. 세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삶의 애환과 고통은 배가된다. 세 번째 말은 기근과 결핍을 가리키는 검은 색을 지녔고 그 말 위의 기사는 저울을 가지고 있다. 네 생물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어떤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밀 한 되가 하루 품삯이며 보리 석 되가 하루 품삯이다.”(묵시 6,6)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가정했을 때, 어떤 목소리가 말하는 밀 한 되의 값은 1세기 당시 거래되는 가격의 여덟 배에 가깝다. 검은 말을 타고 있는 기사의 저울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는 경제적 상황을 상징하며 서민이 감당해야 할 힘겨움을 암시한다. 요한묵시록이 쓰였을 당시 로마의 황제는 도미티아누스였는데, 그는 포도밭을 갈아엎어 보리를 심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만큼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시기였고, 요한묵시록은 배고픈 시대의 아픔과 슬픔 안에서 신앙의 가치를 고민하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유다의 전통은 마지막 메시아 시대에 벌어지는 현상으로 빵과 포도주의 결핍을 이야기한다.(요엘 1,10-11 참조) 현실이 결핍투성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희망과 그 신앙은 결코 하느님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봉인은 삶의 애환과 고통을 비껴가지 않는다. 그 삶을 직시하게 독자들을 이끌며, 그 속에서 각자의 신앙 자세를 다시금 다듬어 볼 여지를 살피게 한다. 네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나타나는 말은 죽음을 이야기한다. 에제키엘서 5장 12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이 대목은 하느님을 외면하고 그분께 불충하는 백성을 향한 심판을 가리킨다.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로 하느님을 저버리는 좌절과 포기의 삶은 죽음으로 향한다는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가 네 번째 봉인을 통해 드러난다. 비록 거칠고 투박한 경고의 메시지라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강조하고 싶은 요한묵시록의 의도는 명확하다. 어린양이 봉인을 열면서 보여주고자 한 하느님의 계시는 결코 인간 세상의 부조리나 아픔을 외면한 유토피아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늘 마주하고 살아가는 인간 삶 그 안에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분명히 전하고 계신다는 것. 우리가 사는 삶은 지금 이 순간의 것이고 다른 세상 다른 시간을 꿈꾸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므로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하느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망상이라는 사실을 요한묵시록은 우리에게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승리자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지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이 삶을 살아내기를 우리는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할 것이다. ‘오너라’라는 그 외침을 향한 응답은 이 삶을 온전히, 열심히, 살아내는 이들의 몫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9면

[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예루살렘의 구도시(old city)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하는 순례지가 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시작해 골고타 언덕까지 이어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으신 ‘고통의 길’입니다. 지금은 옛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끄러운 시장이 됐습니다. 비아 돌로로사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며 골고타까지 가다 보면, 순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상인과 행인들의 눈길이 꽂혀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형틀 나무를 지고 올라가는 나자렛 사람 예수의 행렬을 많은 이들이 구경하였듯이 말입니다.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 구경하며, 메시아가 저럴 수는 없다고 혀를 찼을 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골고타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죄인들의 형 집행이 이루어졌고, ‘해골터’라는 지명 뜻처럼 무덤도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형벌 가운데 가장 잔인한 종류로서, 베드로도 이 형벌이 두려워 예수님과 한패가 아니라며 세 차례 부인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은 고통에 시달리다 서서히 죽었다고 하니, 예수님이 당일 운명하신 것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마르 15,44)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이 그런 십자가 위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점이 가장 놀라운 일이지만 말입니다. 마르코복음 15장 39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이방인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지는(마르 15,38) 광경을 그가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전은 예부터 주님의 현존이 상징적으로 자리하신 곳으로서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성전이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곳임을 암시해 주는 실마리는 성경에 여럿 존재합니다. 첫째, 에덴동산에서 원조들이 하느님을 자유롭게 뵐 수 있었듯이, 성전도 하느님께서 인간을 공식적으로 만나 주시던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두 곳 모두 죄 없는 상태, 정결한 상태여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원조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건 죄를 지어 합당한 정결함을 잃어서였고, 옛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정결 예식을 치러야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과 9장의 실로암 못이 예수님 시대 사용한 대표적인 정결 예식터였습니다. 셋째, 커룹의 존재도 공통됩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따르면 에덴동산의 입구에서는 커룹이 불 칼과 함께 지켰고, 성전에는 지성소의 계약 궤에 커룹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원조들이 에덴동산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커룹들이 지켰듯이, 지성소 또한 커룹이 자리해 있음으로써 일반 백성의 접근을 상징적으로 제한하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두 곳의 공통점은 ‘기혼’이라는 지명에서 드러납니다. 기혼은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네 강 가운데 하나이자(창세 2,13) 예루살렘 성에 자리한 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옛 예루살렘의 중심에는 성전이 봉헌돼 있었고, 기혼 샘은 성전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형태였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기혼강이 흘러나왔다는 에덴동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컨대, 옛 이스라엘 백성은 부분적으로나마 성전에서 에덴동산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현존을 상징한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사제만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위 16,2.29.33) 그러나 신약 시대에 교회의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로 그 금지된 정원, 곧 에덴동산을 상징한 지성소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비가 이방인 백인대장의 고백 안에 담겨 있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확인하고 그분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서야 믿지만, 이방인 백인대장은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지는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신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다만 에덴동산을 상징적으로 재현해 준 성전은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무너졌고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덴동산을 상징한 성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신께서 성전이 되셨고(요한 2,20-21 참조), 또한 우리 모두가 그 이후 성령을 모신 성전이 됐기 때문입니다.(1코린 3,16; 2코린 6,16 참조).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세관에 있는 마태오를 부르신 예수님

예수님과 마태오가 처음 만난 장소는 세관이었다. 마태오는 세리였다. 유다인에게 세리라고 하면 창녀에 버금가는 죄인이었다. 세리는 유다인 사회에서는 배척을 받는 직업으로 같은 유다인들에게 두 배 내지 세 배의 세금을 징수하는 등 부당한 이익을 취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로마제국의 앞잡이와 같은 일을 하는 세리들은 유다인 사회의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세리들을 이방인과 같이 취급했고 겉으로는 내놓고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경멸했다. 당시에 로마의 징세 제도에서 세리들은 미리 담합을 벌여 다음 해의 세금 징수권을 따냈다. 세리로 등용된 이들은 자신이 사용한 돈 이상으로 이익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통행세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임산부를 2명으로 간주하는 등 비상식적인 세금 징수로 유다인들은 세리를 이방인 취급하여 ‘개’라고 부르곤 했다. 세리도 돈을 많이 벌고 호의호식했지만, 마음속에는 평화가 없었다. 인간에겐 돈과 재물보다도 중요한 것이 많다. 명예와 평화로운 마음을 회복하고 싶은 것은 인간 모두의 본성이다. 마태오도 적당히 법을 이용하여 재물을 많이 축적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진정한 친구나 지인보다 돈으로 얽혀있는 인간적인 만남이 많았을 것이다. 마태오는 주변 유다인이 자신을 도둑과 개처럼 멸시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죄인들과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저 다른 보통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해주시며 손을 내밀어 주셨다. 전혀 새로운 만남에 감동한 마태오는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 사도들의 명단 속에는 항시 마태오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태오 복음서만이 세리 출신의 제자를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10,3 참조)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을 위해 쓰였다. 마태오 복음서는 ‘팔레스티나 복음서’로 간주될 만큼 팔레스타인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교리서와 같은 책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그 선교의 대상이 되는 유다 세계와 유다 문화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집필연대는 내적 특성을 고려하여 마태오 복음서는 서기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10여 년이 지난 80~85년에 결정적으로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화에서 마태오는 성경(에제 1,10; 묵시 4,7)에 언급된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해 날개 달린 사람, 다시 말해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마태오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복음서를 시작한 것에 대해 리옹의 주교이자 교부인 이레네오 성인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세리였던 경력으로 인해 은행원과 경리,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교회 미술에서도 장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되기도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8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마음을 드러내라!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을 관찰하고 악한 생각과 선한 생각을 식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악한 생각일 경우 시초부터 몰아내야 뿌리를 내려 발전하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영적 스승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자기 마음속 생각을 모두 밝히는 것이다. 수도승 생활 초심자에게 ‘마음의 개방’은 매우 중요했다. 이 주제는 지난 호의 ‘마음을 돌봐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마음 돌보기의 핵심 내용인 악한 생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먼저 영적 스승에게 마음을 개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적 스승에게 마음을 개방하는 것은 초기 수도승 생활의 본질적 수행이었다. 영적 스승의 역할 초심자는 영적 수행과 영적 투쟁, 기도와 모든 육체적, 정신적 수행과 관련해서 영적 스승의 조언과 도움과 격려를 받아야 했다. 영적 스승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즉 숱한 실패와 잘못, 시행착오 등을 통해서 마침내 분별력의 은사를 얻은 사람이다. ‘분별’(diakrisis)이란 ‘영들에 대한 식별’을 뜻했다. 수도승을 공격하는 생각이 악령에게서 온 것인지, 천사나 성령에게서 온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분별력을 얻은 사람만이 영적 투쟁 중인 다른 사람을 안내할 수 있다. 초심자에게는 열정만 있고 이런 분별력이 없기에 이 길을 먼저 걸어간 경험 있는 원로를 안내자로 삼고 그에게 마음을 열고 순종할 필요가 있다. 제자는 영적 스승에게 마음속 생각을 남김없이 드러내야 스승이 그 생각들을 식별해서 적절한 처방을 내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제자 역시 점차 분별력을 얻고 영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어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이로써 제자는 또 다른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없이, 누구도 남을 올바로 지도할 수도 없고 감히 지도해서도 안 된다. 분별력이 없는 안내자는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14) 스승의 분별과 판단에 순종하며 마음속 생각 남김없이 드러내야 교만은 영성생활에서 가장 위험…마음 개방은 겸손 실천하는 수행 생각을 드러내는 이유 누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영적 스승에게 굳이 이처럼 마음을 열고 순종할 필요가 있는가?’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악령에게 굴복하지 않고 그를 정복하기 위해서다. 초기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막으로 들어간 이유 중 하나는 악령과 직접 맞닥뜨려 싸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경험자의 조언과 도움이 없다면 초심자는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 익명의 압바는 악한 생각들이 싸움을 걸어오면 그것들을 감추지 말고, 즉시 영적 사부에게 이야기하라고 권고한다. 악한 생각은 구멍에서 나온 뱀과 같아서 드러나면 멀리 달아나지만, 감추면 감출수록 더 강해지고 많아져 나무 속에 있는 구더기처럼 우리 마음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은 즉시 치유되지만, 감추는 사람은 교만으로 병이 든다고 한다. 카시아누스는 악습과 악령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 중 하나를 제시하는데, 곧 연로하고 경험 많은 영적 사부에게 자기 마음을 개방하는 것이다.(규정집 4,9.37) 그 이점에 대해 안토니우스 압바는 알려지는 것이 부끄러워서라도 죄짓기를 멈추고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안토니우스 생애 55,11-12) 수도승에게 가장 큰 위험은 자기 마음을 영적 사부에게 개방하지 않고 자신 안에 가두는 것이다. 반대로 스승에게 마음을 연 제자는 스승의 기도와 조언으로 온갖 위험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 자기 뜻의 포기인 순종 제자가 스승에게 순종하는 이유는 자기 뜻과 싸우기 위한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모든 죄가 하느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더 좋아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영적 사부에게 순종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 뜻의 포기를 강조한다. 포이멘 압바는 말한다. “인간의 의지는 그와 하느님 사이에 가로놓인 황동 벽이자 걸림돌입니다. 인간은 의지를 포기할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성벽을 뛰어넘습니다'(시편 18,3) 의지가 올바른 것과 조화를 이룬다면 인간은 참된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포이멘 54) 초심자는 그릇된 수치심 때문에 자기 마음을 갉아먹는 생각을 감추지 말고, 그런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영적 사부에게 드러내라고 배운다. 그리고 그 생각을 분별하기 위해 자기 개인의 의견을 신뢰하지 말고, 원로가 검토한 후 나쁘거나 좋다고 판단한 것을 믿도록 배운다.(규정집 4,9) 수도승 생활 초기에는 사막에 새로 도착한 사람이 원로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동굴이나 암자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때로 비참했다.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증언한다. “어떤 이들은 금욕 수행으로 자기 몸을 해치지만, 그들은 식별력이 부족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집니다.”(안토니우스 8) 이처럼 스승의 분별과 판단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젊은 수도승은 마음이 깨끗해지고 자신의 욕정을 길들이게 되어 마침내 내적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영성 생활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스스로 남의 스승이 되어 지도하려는 유혹은 상존한다. 이런 유혹은 교만에서 나오는 헛된 망상일 뿐이다. 겸손으로 이끄는 순종 자기 뜻을 포기하는 순종은 우리를 모든 덕의 정점인 겸손으로 나아가게 해 준다. 하느님을 향한 영적 여정에서 제자가 스승에게 마음속 모든 생각을 드러내고 스승의 분별과 판단에 따르는 것은 겸손이 바탕을 이루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스승에게 마음을 개방하는 이 수행은 결국 겸손과 순종을 실천하는 수행이기도 하다. 영성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교만이다.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와 분별력이 아니라, 얄팍하고 피상적인 지식으로 섣불리 남을 가르치려 하거나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판단을 무시하고 자기 뜻과 판단에 따라 모든 것을 처리하려는 자세는 모두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막 교부들의 “마음을 드러내라!”는 이 권고는 영성생활에서 경험 있는 안내자의 중요성, 분별력의 중요성, 마음의 개방성, 남의 조언을 청하고 경청하는 겸손한 자세, 자기 뜻을 내려놓는 자유로움 등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육의 부활

너무나 특별하고 생명력 넘치는 우리 주님의 부활이 일상으로 스며들게 하는 봄의 향연을 선물 받았다! 얼마 전 우리는 교리서2부 ‘마음의 구원’편을 시작했지만 잠시 멈추고, 전례 시기가 주는 은총과 함께 주님의 부활에 우리의 부활을 묵상하려 한다. ‘육의 부활’편을 6회로 나누어서 공부하고, 다시 ‘마음의 구원’편으로 돌아오려 한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그분이 빵을 떼어 주실 때야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고 그분은 더 이상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셨다”(루카 24,30-31 참조)는 말씀의 의미가 ‘마음의 구원’편에 강하게 이어지길 바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쓴 최초 원고를 보면, ‘육의 부활’ 교리는 3장 1편 ‘육의 부활’(64과~72과), 3장 2편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과 동정’(73과~86과)으로 종말론적 관점에서 부활을 설명했다. 그 이유는 동정과 독신의 삶이 현재 역사 안에 존재하는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속에서 죽음과 부활을 얻은 우리의 삶은 내 안, 즉 마음에서 그분의 현존을 찾는다. 왜냐하면 세례는 부활의 만남을 전제한 죽음이면서 동시에 그 부활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결실인 대사건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활 성야 전례에서 촛불을 들고 세례 때 한 신앙 서약을 새롭게 갱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활 신앙은 결의론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을 벗어나 복음의 에토스가 마음에서 이루어지도록 한다. 육의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던 사두가이들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공관복음(마태 22,23-33; 마르 12,18-27; 루카 20,27-40) 모두가 이를 전하지만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단어의 의미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부분들이 있다. 먼저 복음 간의 다름을 분석한 후 전체를 다시 바라본다면, 육의 부활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선명해질 것이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은 야훼를 믿는 신앙인이었지만, 그들이 지닌 언어나 풍습, 민족성에 따라 당파가 지닌 종교적 색깔은 조금씩 달랐다. 사두가이파도 그중 하나로 종교적으론 보수적이었으며, 성문화된 모세오경만을 인정했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육의 부활, 천사, 영 등 이런 일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사도 23,8 참조),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생각했다. 또 모세오경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완전히 이루어졌으므로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없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정경으로 인정하는 모세오경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판단에 정당성이 있다고 믿고, 신명기 25장 5절에서 10절을 근거로 부활에 관한 믿음은 부질없음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가장 권위 있다 자부하며 성전에서 가르치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를 모르기에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마르 12,24)가 그 하나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마르 12,26)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 또 하나라 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인정하는 탈출기에서 모세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탈출 3,2-6) 만난 하느님과의 대화를 불러오면서 부활에 관한 다른 차원을 열어 주셨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했고,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는 큰소리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고 부르셨다. 죽은 라자로가 어떻게 주님의 부름을 들었을까? 우리가 부활에서 풀어야 할 질문들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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