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당에 ‘피엑스(PX)’가 있다?

형제님들이 모이면 하는 군대 이야기 중에 종종 등장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성당에 ‘피엑스’가 있는 줄 착각하고 일어난 사연입니다. 이등병 시절에 성당에 피엑스가 있는 줄 알고 선임병 몰래 성당에 갔다던가, 같은 이유로 천주교 종교행사에 참가했다가 실망했다던가 하는 이야기지요. 피엑스(Post eXchange)는 군대에 있는 일종의 매점입니다. ‘어떻게 성당에 피엑스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라며 우스갯소리로 여기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사건의 발단은 교회에서 아주 자주 쓰이는 기호에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미 떠올리셨을 것 같은데요. 바로 기다란 P의 기둥 아래에 작은 x모양이 합쳐진 형태의 기호입니다. 힘든 군 생활 중 마음을 달랠 군것질이 간절한 장병들이기에 이 기호를 보고 오해하게 된 것이지요.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일단 이 기호는 ‘피엑스’(PX)라고 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엑스피(XP)도 아닙니다. 그리스어 ‘크리스토스’(ⅩΡⅠΣΤΟΣ)의 앞에 두 글자를 따서 만든 기호지요. 바로 ‘그리스도’를 뜻하는 기호입니다. 글자라기보다는 기호다보니 ‘그리스도’라 불러도 되고, 사용한 글자대로 읽자면 ‘키’(Ⅹ)와 ‘로’(Ρ)를 합친 것이기에 ‘키로’라 읽을 수 있습니다. ‘키로 십자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문자를 합친 기호를 모노그램이라 하는데요. 특별히 ‘키로’처럼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모노그램을 크리스토그램(Christogram)이라 합니다. 크리스토그램에는 ‘키로’ 외에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IHS’ 혹은 ‘IHC’는 예수(ΙΗΣΟΥΣ)의 그리스어 표기의 첫 3글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시그마(Σ)가 발음을 따른 S와 모양을 따른 C로 변형된 것이지요. 그리고 ‘IC XC’는 이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크리스토그램입니다. 그리스어 ‘예수 그리스도’(ΙΗΣΟΥΣ ⅩΡⅠΣΤΟΣ)의 약자입니다. 이콘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동방교회에서 널리 쓰인 크리스토그램입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라 불렀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예수님의 이름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사제나 예언자, 왕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데,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를 예수님을 공경하는 고유한 칭호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임금이요, 사제이며, 예언자이시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자 메시아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하신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어딘가에서 크리스토그램을 발견하셨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알기 쉬운 미사 전례] 파스카 초의 상징

제단 위에서 빛을 밝히는 파스카 초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옛 추억이 있습니다. 하얀 눈이 덮인 설악산을 보좌 신부님과 선배 신학생들과 함께 등산하면서,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서 없어진 길을 헤치며 오르다가 해가 떨어지며 어두워지는 즈음에 만난 ‘산장의 불빛’이 파스카 초 촛불에 오버랩됩니다. ‘어둠의 골짜기’(시편 23,4)에서 만난 희망의 빛이었지요. 예전에는 ‘파스카 초’를 ‘부활 초’라고 했었는데, 현재 전례서에서는 ‘파스카 초’라고 합니다. 이유는 라틴어 ‘Cereus paschalis’를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파스카 신비에서 하나의 사건인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된 수난과 저승에서 살아나신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의 파스카 신비’(「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7항) 전체를 드러내는 초의 상징성을 제대로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파스카 초의 유래는 어떤가요? 이 초는 파스카 성야를 많은 횃불로 밝히던 초대교회에 널리 알려진 관습에서 유래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 크기의 초로 파스카 성야 동안 하느님의 집에 필요한 빛을 밝히던 로마 관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축복하는 관습은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로마 바실리카에서만 국한된 관습이었으며, 5세기까지는 교회 전체에 퍼지지 않았습니다. 갈리아 전례에서 파스카 초는 단 하나의 큰 초로 제한했으며, 갈리아의 신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한 상징성을 지닌 우의적인 요소들로 초는 장식됐습니다. 그 요소들로써 다섯 개의 향 덩이로 이루어진 십자가와 알파와 오메가와 당해 연도는 자유재량으로 남았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모든 거룩한 밤샘 전례의 어머니’라고 칭송한 거룩한 밤인 파스카 성야에 봉사자들은 성당 앞에 쌓여 있는 장작더미에 불을 지피고, 주례자는 그 불을 축복하여 파스카 초에 옮겨 붙임으로써 전례가 시작됩니다. 이 파스카 초는 칠흑같이 어두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행렬 맨 앞에서 행렬을 이끕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하시고 밤새 앞장서 이끄시며 자유를 향해 밝혀주셨던 불기둥을 연상시킵니다.(탈출 13,21 참조) 다른 한편으로 파스카 초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전에는 자연적으로 불을 얻기 위해 부싯돌의 불꽃으로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 불꽃은 돌무덤의 어둠에서 부활하시어 걸어 나오는 그리스도를 연상시킵니다. 파스카 초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파스카 초를 선두로 제대를 향해 들어가는 행렬은 세 차례에 걸쳐 멈추어 서고, 그때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독서대 옆이나 제단 안에 마련된 촛대에 파스카 초를 놓은 다음, 빛의 예식을 마무리하는 ‘파스카 찬송’(Exsultet)을 독서대에서 노래합니다. 곧 파스카 초를 옆에 놓은 독서대는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전례 공간입니다. 부활 시기 동안에 독서대 옆이나 제단에 마련된 촛대에 놓여있는 파스카 초는 성령 강림 대축일이 지난 후에는 성당에 세례대가 있으면 그 옆에 둡니다. 세례식에서 세례자에게 촛불을 켜줄 때, 파스카 초에서 불을 당겨주고, 장례미사 때에는 파스카 초를 고인의 머리맡에 놓는 까닭은 신앙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곧 교회는 신앙인 모두가 세상에서 ‘파스카 초’가 되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존재이길 기원하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28

[말씀묵상] 부활 제5주일

부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을 전해주던 앞의 주일 복음과 달리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포도나무와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복음에서 저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성경 구절은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입니다. 하느님이 ‘농부’라니, 여러분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저에게 농부는 푸근한 인상, 그러나 누구보다도 진실하게 땀 흘리는 삶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사람이 뭘 잘못하나를 감시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하며 좋은 포도나무들이 자라도록 땀 흘리며 애쓰는 농부라고 예수님은 말하시는 것 같습니다. 밭에는 돌이 있고, 잡초도 있고, 해충들도 있기에 농부는 바쁩니다. 이런 것들을 제거하고 거름도 주고, 비바람에도 대비하고 때론 가뭄이 들 때 물도 대어주어야 포도나무가 잘 자라기에 정말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로 바쁘실 것 같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세상에서 사랑과 평화가 넘치도록 온 인류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느님의 초대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초대에 응한 사람들에게는 사명을 주시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다 더 사랑하시는데 온 힘을 다 하실테니까요. 아니,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믿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이 가장 흡족해하는 포도나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포도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따뜻한 햇빛, 적절한 비, 땅이 주는 영양분이 다 필요하듯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 은총과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섬기는 삶 모두를 양분으로 해서 살아가셨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풍성한 열매를 살아가는 내내 맺고 나누셨기에 그렇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가장 건강한 ‘참 포도나무’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이 말씀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과 내 인생이 별 관계가 없는데도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말일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내 인생은 나 혼자 알아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인생의 진실을 물으며, 그분의 삶에서 구원의 신비를 발견하고, 따라 살아가고자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 우리는 성경 묵상을 통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아무 걱정도 없이 알아서 잘 살아가신 분이 아니라, 인간이 갖는 한계와 어려움을 온전히 겪으면서도 인간의 삶 안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그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신 ‘나와 같은’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성사 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에게서 내 삶의 근원적 지혜와 힘을 얻고 그분의 제자로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삶은 너무 이상적이기에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단정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일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이 쉽지 않고 치열하다고 느낄수록, 나 혼자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왜 우리에게 이런 인생을 허락하셨는지, 우리는 어떻게 인생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살 수 있는지를 묻고 배우도록 초대받은 것이 축복 아닐까요?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는 내 경험, 내 생각, 내 판단이 옳다고 믿고 그것들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인생에 관심을 갖고, 그분이 삶에서 가장 중시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나 역시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삶일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 삶의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맺게 해주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우리가 정말 원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주님이 필요한 은총을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맺는 열매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이고, 이렇게 서로 사랑할 때 아버지 하느님이 영광스럽게 된다고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을 부활과 연결지어 다시 묵상해 봅니다. 부활은 단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걸었던 사랑의 길이야말로 죽음을 이기고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 길임을 고백하는 사건입니다. 사랑의 길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사랑의 길을 믿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알게 되고 새롭게 태어난 사건이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셨을 뿐 아니라 그 구원 사업에 우리도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부활을 체험하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런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님이라 고백하고 그분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알아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농부이신 아버지 하느님은 포도나무가 건강히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시고, 건강한 포도나무인 예수님에게 달린 가지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사도로 파견하시면서 축복하십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4-2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힘과 용기의 지도자, 여호수아

이스라엘 역사에서 안타까운 장면 중 하나는 모세가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 숨을 거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광야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동고동락했던 사람들과 이별했다. 광야에서 자신들을 이끌었던 지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자, 이스라엘 민족은 큰 시름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전사로서 용맹하게 가나안의 각지에서 계속 싸우며 결국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찰하고 전략을 세워 전투를 벌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희세지웅(希世之雄)이란 사자성어는 난세에 보기 드문 영웅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역사에서 보면, 때에 맞는 지도자가 나타나 활약하는 것은 그 나라나 민족을 위해서는 큰 행운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탄생시킨 지도자라고 하면 여호수아는 실제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던 전사(戰士)형 리더였다. 이미 오래전에 터를 잡아 살고 있는 가나안 주민들을 공격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리한 점이 많았지만, 여호수아는 이를 극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한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실제로 국가를 세운 사람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였다. 모세는 그를 무척 신임하고 일찍부터 후계자로 생각했다. 여호수아는 실제 전투에서 많은 공을 쌓았고 실전 경험을 터득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측근으로 이집트 탈출을 하면서 광야 생활 내내 큰 공로를 세운 충직한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작 가나안 땅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그동안의 광야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모세에 대해 반란이라도 할 기세였다. 게다가 이들이 맞이한 가나안에는 만만하지 않은 적들이 버티고 있었다. 가나안에 있는 민족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보잘것없었다. 싸우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의 기세에 눌려 전전긍긍했다. 전투에서 전의(戰意)를 상실하면 싸움은 해보나 마나 필패이다. 이때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와서는 옷을 찢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과 같은 땅에 들어갈 수 있소. 적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하느님이 우리 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반대하고 이집트로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 환경에서 여호수아의 외침이 제대로 먹힐리 없었다. 오히려 전투를 독려하는 여호수아는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 빠졌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죽음을 무릅쓰고 소신있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위기에서 포기해 버리고 모험에 나서지 않는 지도자는 리더로서 자격이 없다. 여호수아의 용기 있는 행동은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꾼다. 그는 무엇보다 힘과 용기를 가지라고 하며 함께하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다. 여호수아는 전투에서는 맨 앞장서서 싸우는 힘과 용기가 있는 유능한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믿음이 강한 인물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4-2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스카풀라는 원래 옷이다?

스카풀라를 아시나요? 성물방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데요. 보통 성모님 그림이나 글귀가 적힌 두 개의 작은 천이 긴 끈으로 연결된 형태의 물건입니다. 스카풀라는 생김새 때문에 ‘목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 스카풀라는 목걸이가 아니라 옷입니다. 수녀님들이나 수사님들이 꼭 앞치마 비슷하게 몸 앞뒤로 길게 걸쳐 입고 있는 옷을 보신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옷이 바로 스카풀라입니다. 스카풀라(scapula)는 라틴어로 ‘어깨’라는 뜻입니다. 어깨너비의 천을 몸 앞뒤로 길게 늘어뜨려 입는 소매 없는 겉옷이기에 이런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스카풀라는 초기에는 수도자들이 일할 때 수도복 위에 걸쳐 입는 옷이었는데요. 점차 어깨에 지는 십자가와 멍에를 상징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각 수도회의 영성을 따르고자 하는 평신도들도 13세기경부터 스카풀라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16세기부터 점차 간소화되고 작아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착용하는 스카풀라의 모습이 됐습니다. 특별히 스카풀라 하면 ‘성모님’이 떠오릅니다. 성물방에서 파는 스카풀라들도 성모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곤 하지요. 스카풀라와 성모신심이 깊은 연관을 지니게 된 것은 1251년 가르멜수도회 성 시몬 스톡 신부님께 성모님이 발현하시면서부터입니다. 성모님은 스톡 신부님께 갈색 스카풀라를 보여 주면서 “이 스카풀라를 죽는 순간까지 착용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특권을 누릴 것이며, 그가 죽은 후 첫 번째 토요일에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천국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스톡 신부님께 나타난 성모님만 스카풀라를 언급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1917년 10월 13일 포르투갈 파티마에 나타난 성모님은 묵주와 함께 스카풀라를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파티마 성모님을 목격한 가경자 루치아 산토스 수녀님은 이것이 “모든 사람이 스카풀라를 착용하도록 하려는 까닭”이라면서 “스카풀라는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대한 봉헌의 표시이며 스카풀라와 묵주는 분리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보통 스카풀라라고 하면 갈색을 떠올립니다. 수도복에서 온 것이니 갈색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녹색 스카풀라도 있습니다. 1840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쥐스틴 비스케뷔뤼(Justine Bisqueyburu) 수녀님에게 나타난 성모님은 녹색 스카풀라를 보급할 것을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믿음을 지니고 (녹색) 스카풀라를 착용하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신앙이 없는 이들과 냉담한 이들을 회개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카풀라는 언제까지나 옷일 뿐입니다. 스카풀라가 아니라 스카풀라를 착용한 사람의 신앙생활이 더 중요하겠지요. 가르멜 수도회 윤주현(베네딕토) 신부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착용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부적처럼 여긴다면 왜곡된 신심에 빠질 수 있다”면서 “성모님의 마음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을 스카풀라를 통해 늘 상기시키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04-21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오늘 부활 제4주일에 교회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복음’으로 선포합니다. 부활 제2주일과 제3주일의 복음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 곧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사건이었다면, 부활 제4주일에는 목자에 관한 비유를 복음 말씀으로 듣게 됩니다.(「미사독서 목록지침」 100항 참조) 전례력에 따라 매년 선포되는 복음 내용이 달라지는데, 올해의 복음은 요한 10,11-18입니다(가해: 요한 10,1-10; 다해: 요한 10,27-30)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착한 목자’로 소개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예수님의 ‘착함’은 윤리적 혹은 도덕적 행위의 결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착한 목자’입니다. 그분의 희생적 죽음으로 구원, 곧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내놓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디테미’는 오늘 복음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요한 10,11.15.17.18), 이 단어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요한 13,37; 15,13; 1요한 3.16) 목자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자신이 관리하는 양들을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양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목자(1사무 17,34-35; 이사 31,4)는 자기 목숨을 내놓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삯꾼과는 다릅니다. 삯꾼은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에, 양들이 이리의 거센 공격을 받더라도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알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기노스코’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안다.”라고 할 때, 목자는 양들에 대한 정보를 지식적 차원에서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양들과 인격적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를 알 때, 이러한 ‘앎’이 바탕이 되어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의 희생적 죽음은 목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사랑의 표현이며, 이를 통해 목자의 존재 이유와 사명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 곧 제자들을 목자와 양에 비유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농경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경 민족은 어느 한 장소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유목민으로서 한 곳에 오랜 시간 동안 머물지 않고 양들의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유목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절해 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나라를 잃고 바빌론으로 끌려가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백성의 목자’로 제시하면서 그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모아들이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 그들을 지켜주시리라.”(예레 31,10. 참조: 예레 23,3; 이사 40,11) 에제키엘 예언자 역시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모습을 양 떼를 돌보는 목자에 비유하여 묘사하였습니다.(에제 34,11-16 참조) 요한 10장에서 사용된 목자와 양의 비유는 구약성경, 특별히 에제키엘 예언서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착한 목자’의 이미지로 예수님을 백성을 위한 메시아로서의 목자의 모습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의 죽음과 사랑을 소개하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활 시기의 주일에 선포되는 복음 말씀인데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암시를 포함함으로써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목자 비유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비추는 부활의 빛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10장 17절의 말씀이 이러한 묵상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내놓지만, 착한 목자를 사랑하시는, 곧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와 원로들 앞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 곧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힘주어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사도 4,10) 착한 목자의 비유가 우리를 위한 기쁜 소식으로 선포되는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인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나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60년 전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성소 주일을 제정하셨던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의 권고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울려 퍼져야 합니다. 성소자의 수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 지금,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자신을 희생하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성소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두 손 모아 기도합시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4-2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명예와 재물에 빠져 타락한 예언자 발라암

예전에 사목했던 본당 중에 주변에 무속인들이 유난히 많았던 곳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여성 무속인이 예비자 교리에 등록했다. 그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교리를 들었고 시간이 흘러 세례식을 앞두고 있었다. 개인 면담 시간에 그는 “그동안 너무 심한 어지러움과 두통과 구토에 시달렸”면서 “그런데 열심히 기도하고 특히 주변의 신자들이 함께 기도해 주어서 다행히 오늘까지 왔다”고 말했다. 이어 “신자들도 열심히 기도하지만 무속인들도 정말 무섭게 열심히 기도한다”며 알듯 모를듯한 이야기를 했다. 무속인을 찾은 사람에게 예언을 해주면 그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무속인도 산속에 올라가 며칠씩 잠을 자지 않고 금식하면서 자신이 모시는 신(神)에게 기도를 바친다고 한다. 점술이 맞지 않으면 밥줄(?)이 끊긴다고 하면서 웃었다. 그분은 세례를 받고 모든 고통에서 깔끔하게 벗어나 열심히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을 하고 계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요르단 건너편 모압 평야에 진을 쳤는데, 모압 왕인 발락의 눈에 이스라엘 백성의 기세가 등등했다. 그 숫자도 너무 많아 겁에 질릴 정도였다. 모압 왕은 당시 명성이 자자한 점쟁이 발라암을 불렀다. 그러나 처음엔 발라암이 순순히 왕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따라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면 안 된다”고 단단히 이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끈질기게 부르자 결국 발라암은 왕이 보낸 관리들을 따라나섰다. 왕은 발라암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주면 무엇이든 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발라암은 제단을 쌓고 황소와 숫양을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발라암이 왕에게 점술 내용을 밝혔다. 재미있는 것은 왕의 소원과는 정반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상심한 왕은 발라암에게 세 번씩이나 장소를 옮겨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제사를 지내게 했지만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발라암은 계속해서 제사를 지냈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떠한 재앙도 어떠한 불행도 내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왕은 할 수 없이 아무런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발라암에게 돌아갈 것을 분부했다. 그러자 발라암은 왕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패시키는 비법을 가르쳐주었다.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고, 예쁜 모압 여자로 유혹해 죄를 짓게 하라는 것이었다. 발라암의 비법이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게 되어 수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발라암도 결국 칼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발라암은 다른 예언자 못지않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했지만 결국 명예와 재물의 유혹에 빠져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예전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이 점술이 발달하고 번성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하고 닥쳐올 화근을 없애줄 방법을 찾으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 성향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은 점술에 여전히 매력을 느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4-21

[알기 쉬운 미사 전례] 복음의 탁월함

‘우월’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예전 어머니들이 자식을 야단치면서 주변에서 보기 쉬운 비교 대상이자 자기 자식이었으면 하는 허상인 ‘엄마 친구 아들’(엄친아), ‘엄마 친구 딸’(엄친딸)을 말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비교 우위를 말할 때 ‘우월’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반대로는 ‘열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교급의 ‘우월’보다는 최상급인 ‘탁월’이 복음에 더 적합한 수식어가 아닐까 합니다. 말씀 전례의 전체적인 구성은 ‘복음 선포’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제1독서 구약, 화답송, 제2독서 서간서, 복음환호송으로 이어지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대화 구조는 ‘복음’에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이러한 배치로 신구약 성경과 구원 역사의 단일성이 밝혀지고, 그 중심에는 파스카 신비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교우들이 인지 했든 못했든 교회는 전례에서 복음의 탁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예식을 행합니다. 백성 전체의 일어섬, 복음 준비 기도, 향과 촛불 행렬, 교우들에게 인사, 십자 표시, 복음집 분향, 복음 후 기도, 복음집 강복 등은 모두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요약하면 복음을 통해 현존하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준비, 환영, 존경, 경청, 감사, 결심, 간청 등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 환호송(알렐루야)을 부를 때는 모든 이가 일어섭니다. 이는 복음을 선포하러 오시는 주님께 대한 존경심과 환영을 드러내며, 그분 말씀을 경건히 경청하여 실천하겠다는 자세입니다. 복음을 봉독할 부제는 주례자 앞에 나아가 고개를 숙이고 축복을 청합니다. 부제가 없는 경우에는 주례자가 제대에 허리를 굽히고 속으로 “전능하신 하느님, 제 마음과 입술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합당하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은총을 청합니다. 이 기도는 11세기경 미사에 들어왔으며, 이사야서 6장 5-7절의 소명 기사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부제는 제대로 가서 입당할 때 들고 온 「복음집」을 높이 들고 향로와 촛불을 든 복사들과 함께 독서대로 갑니다. 이런 성대한 행렬은 고대 로마의 황제 행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복음집」에 존경과 예우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복음집」은 주일과 의무 축일 미사 때 봉독하는 복음만 수록해 놓은 전례서로, 동방과 서방의 전례 전통에서는 늘 「복음집」과 「미사 독서」를 구별했습니다. 복음을 봉독하는 부제나 사제는 독서대에서 먼저 교우들에게 인사합니다. 12~13세기에 도입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는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복음을 선포하심을 암시하며, 다른 때와 달리 손을 벌리지 않습니다. 복음 선포자는 복음서와 이마, 입술, 가슴에 십자를 그으면서 복음 명칭을 알립니다. 복음의 참 저자는 하느님이시고, 복음사가는 오직 그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기에 “○○○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교우들은 “주님, 영광 받으소서”하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분향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반면에,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금요일의 수난 복음 봉독 때에는 복음 전 인사, 십자 표시, 분향, 촛불 등이 모두 생략됩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죄인이 되어 수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일시적으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예식들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전례에서 선포된 복음의 탁월함은 이런 예식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살아있는 복음집’인 우리들을 통해 드러날 때 그 탁월함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21

[교회 상식 팩트 체크] (15) 부활삼종기도는 원래 성모찬송이다?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1년 중 50일 동안 바치는 기도가 있지요. 바로 부활의 기쁨을 가득 담은, 마치 노래와도 같은 기도, 부활삼종기도입니다. 부활삼종기도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말씀처럼, 부활의 기쁨과 즐거움이 담겨 있기에, 예전에는 희락삼종경(喜樂三鐘經)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삼종기도는 무릎을 꿇고 바치는 기도지만, 기쁨을 드러내는 이 기도는 늘 일어서서 바쳐야 합니다. 아무래도 삼종기도(안젤루스) 대신 바치다보니 부활삼종기도는 삼종기도 중 하나라 여기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활삼종기도는 교회의 오랜 역사 안에서 기도해온 성모찬송 중 하나입니다. 찬송은 라틴어 안티포나(Antiphona)를 번역한 말입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공적기도인 시간전례, 즉 성무일도 중 시편과 찬가 전후에 바치는 짧은 노래 선율과 그 기도문을 말합니다. 중세의 수도자들은 성무일도의 끝기도를 바친 후에 성모님을 위해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이것이 성모찬송이 됐습니다. 오늘날 「성무일도」 책에는 5가지의 성모찬송이 실려 있습니다. 끝기도 후에는 성모찬송 중에서 선택해서 바칠 수 있는데요. 주로 전례시기에 따라 성모찬송을 바치게 됩니다. 대림·성탄 시기에는 ‘알마 레템토리스 마테르’(Alma Redemptoris Mater)를, 성탄 이후부터 재의 수요일까지는 ‘아베 레지나 첼로룸’(Ave Regina Caelorum)을, 부활 시기에는 ‘레지나 첼리’(Regina Caeli)를, 연중시기에는 ‘살베 레지나’(Salve Regina)를 바칩니다. 그리고 ‘숩 투움’(Sub Tuum)을 바칠 수도 있습니다. 성모찬송은 「성무일도」에만 실려 있는 기도는 아닙니다. 한국교회 공인 기도서인 「가톨릭 기도서」에도 여러 성모찬송이 실려 있습니다. 특별히 ‘살베 레지나’는 신자들에게 성모찬송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기도인데요. 많은 신자분들이 묵주기도의 마지막에 바치는 성모찬송이며, 「가톨릭 기도서」에도 ‘성월 기도’ 중 ‘묵주기도 성월’에 분류돼 있습니다. 그리고 ‘숩 투움’(Sub Tuum)은 ‘일을 마치고 바치는 기도’(성모님께 보호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성무일도」에는 1971년에 추가된 성모찬송이지만, 실은 이미 3~4세기경부터 신자들이 바쳐온, 오래된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활삼종기도’로 바치는 성모찬송이 ‘레지나 첼리’입니다. 레지나 첼리는 10~11세기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1742년 베네딕토 14세 교황님이 부활 시기 동안에는 삼종기도 대신 레지나 첼리를 바치자고 정하면서 ‘부활삼종기도’가 됐습니다. 교황청 경신성사부는 「대중 신심과 전례에 관한 지도서: 원칙과 지침」을 통해 “(부활삼종기도는) 말씀의 강생 신비와 파스카 사건을 적절하게 결합시키고 있다”면서 “교회 공동체는 성자의 부활을 기념해 이 기도를 성모님께 바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2024-04-14

[알기 쉬운 미사 전례[(15) 복음 환호송과 부속가

‘굶는다’는 것은 주로 먹는 것에 사용하는 동사이지만, 어떤 것을 꾹 참고 기다리는 상황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순 시기에 가톨릭신자들은 미사 중에 두 가지, 곧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굶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수난받고 묻혔다가 부활하신 사건을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때에 웅장한 악기 연주와 함께 장엄하게 노래로 부르기 위해서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아꼈던 거지요.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부터 파스카 성야 전까지는 ‘알렐루야’ 대신에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또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등을 복음환호송의 후렴구로 사용합니다. ‘하느님(ia)을 찬미하라(allelu)’는 뜻의 ‘알렐루야’(alleluia)는 시편에서 사용되던 고대의 전례 환호로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모두의 전례적 유산에 속합니다. 서방의 여러 지역에서는 4세기 말 복음에 앞서 화답하는 후렴인 알렐루야가 50일 동안 곧 부활절부터 오순절(성령강림)까지 불렸고, 아프리카에서는 이 시기를 ‘알렐루야 시기’라고까지 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말로 하지 않고, 말 없는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라고 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설명에 가장 적합한 것이 환호의 알렐루야일 겁니다. 부활 시기 50일 동안 바치던 알렐루야를 대 그레고리오 교황(재위 590~604년)의 전례 개혁을 통해 연중 주일에도 알렐루야를 노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황께서 모든 주일이 주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 대축일과 동일시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알렐루야의 ‘야’(ia)는 지금은 ‘주님’으로 번역하는 ‘야훼’를 의미하며 이를 음악적 용어로 ‘유빌루스’(Jubilus, 환희)라고 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성가로 ‘알렐루야’를 부르는 경우, 특히 ‘야’(ia)의 음절에 많은 음을 사용하여 길고 화려하게 부르는 멜리스마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이후 점차로 ‘야’(ia)가 지니고 있던 멜로디와 여기에 추가된 새로운 가사가 별도의 노래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부속가’(Sequentia)입니다. 9~10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부속가는 16세기에는 수천 곡에 이르게 되어 전례에 혼란을 야기했고,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부속가를 4곡, 곧 주님 부활 대축일의 ‘파스카의 희생께 찬미를’, 성령 강림 대축일의 ‘오소서, 성령이여’,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시온아, 찬양하라’, 그리고 위령의 날의 ‘분노의 날’로 제한합니다. 여기에 1727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재위 1724~1730)에 의해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15일)의 ‘십자가 아래의 어머니’가 추가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의 전례 개혁으로 부속가는 모두 4개로 제한됐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의 부속가는 의무이고,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의 부속가는 선택입니다. ‘십자가 아래의 어머니’(Stabat mater)의 11절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각 처를 이동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사용하여 귀에 익습니다. 미사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위령의 날 부속가인 ‘분노의 날’(Dies irae)은 성무일도 연중 제34주간 독서기도 찬미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알렐루야를 뒤따르던 부속가가 지금은 전례적 흐름 때문에 알렐루야 앞으로 배치된 것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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