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거짓과 중상모략으로 권력욕을 채우려 했던 디오트레페스

오래전 본당에서 사목할 때 주일학교 교사 한 명이 찾아와 “신부님, 제가 이번에 결혼하는데 신부님이 한번 만나주시겠어요?” 하고 요청했다. “왜?”라고 물어보니, 그는 “친척에게 소개 받은 배우자가 흠잡을 것은 없는데, 또 한편으로는 아주 마음이 끌리지도 않아서요”라고 답했다. “대학병원 의사인데 6개월째라 바쁘고 시간이 없어 병원에 찾아가서 몇 번 본 것이 다였어요. 설명하긴 어렵지만 마음이 조금 개운치가 않아요”라면서. 사목 경험이 많이 없던 나는 쉽게 조언을 내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더 깊이 상의해 보라고 다독여 보냈는데, 지금도 후회가 되는 일이다. 그 교사는 마지막 끈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한 결혼할 남편은 아무 직장도 없는 사기꾼이었다. 여자 쪽으로부터 돈만 갈취하려는 목적으로 벌써 여러 번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했다. 결혼 전 탄로가 나서 집안에 난리가 났지만, 결혼식을 안 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교회는 성령께서 이끌어주지만 동시에 인간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지상의 공동체인 교회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지닐 수밖에 없다. 교회는 지금도 구원을 향해 나가며 끊임없이 회개해야 하는 공동체이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크고 작은 인간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초대교회 때부터 성경을 잘못 해석해 신자들을 오류로 이끈 이단자들이 문제였다. 지역 교회의 책임자가 자신이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거나, 원로가 보낸 서간을 무시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요한의 세 번째 편지 안에는 특히 교회 내에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는 디오트레페스를 지적하는 내용이 있다. 디오트레페스는 교회 안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정통적인 교회의 권위조차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신자들을 현혹해서 분열을 일으키고 중상모략을 일삼았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공동체든지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공동체를 위하는 척하지만, 구성원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권력욕이 강한 사람은 전통적이고 상식적인 규율조차도 무시하고 조직 내 파벌을 조성한다. 그러면 자연히 공동체는 분열되어 반목과 대치를 일삼는다. 권력이라고 하면 정치인들을 떠올리지만, 우리의 모든 삶 속에 권력욕이 깊이 작용한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공동체에 있다면 그 공동체, 특히 교회는 더 치명적이다. 권력 지향의 사목자는 교회와 신자들을 지배욕과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일치는 본질이고 생명과 같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한 마지막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라고 기도했던 이유를 묵상해 보자.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덕을 채집하라!

‘덕을 채집하라!’ 이 주제어가 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이 말은 ‘덕을 쌓다’, ‘덕을 획득하다’, ‘덕을 닦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채집하다’란 표현은 ‘지혜로운 꿀벌’ 개념에서 착안한 것이다. 덕(德)을 라틴어로 ‘비르투스’(virtus)라 하는데, 이는 선을 행하는 ‘힘’ 또는 ‘용기’를 뜻한다. ‘나쁜 습관’을 뜻하는 ‘악습’(vitio)의 상대어로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겠다. 수행 생활은 악습을 제거하고 덕을 심는 과정이다. 그래서 악습과의 싸움과 동시에 덕의 획득을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악습에 대한 승리는 그에 상응하는 덕의 획득을 가져온다. 카시아누스는 인간 안에 악습과 그 반대 덕이 동시에 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양심에 따라 악마나 그리스도 중 누구에게 주도권을 부여할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다.(담화집 1,13-14) 지혜로운 꿀벌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안토니우스를 지혜로운 꿀벌에 비유하며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초기에 안토니우스도 자기 마을 근방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열정으로 가득한 어떤 사람에 대해서 듣자마자 그는 지혜로운 꿀벌처럼(칠십인역 시편 6,8 참조) 그를 찾아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그를 보고 덕의 길을 가기 위한 일종의 양식을 얻기 전에는 자기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안토니우스의 생애」 3,4) 꿀벌이 여러 꽃에서 꿀을 채집하듯 안토니우스는 다양한 사람에게서 덕을 채집하려고 노력했다. 어떤 한 사람에게서 모든 덕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서 각각의 고유한 덕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꿀벌이 꿀을 찾아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니듯 능동적으로 덕을 찾아 본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시아누스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다. “누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한 사람에게 모든 덕의 모범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 어떤 이는 인식의 꽃으로 장식되고, 또 어떤 이는 분별의 기술을 더 잘 갖추고 있으며, 어떤 이는 인내의 무게를 기초로 하고, 어떤 이는 겸손의 덕으로 승리하며, 어떤 이는 극기의 덕으로 승리합니다. 또 다른 이는 단순성의 은총으로 장식됩니다. 이 사람은 관대함, 저 사람은 자비나 철야, 또는 침묵이나 노동에 전념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능가합니다. 이 때문에 영적인 꿀을 채집하려는 수도승은 매우 지혜로운 벌처럼 어떤 덕에 더 나아간 사람들에게서 각각의 덕을 채취하여 자기 마음의 그릇에 정성껏 모아야 합니다. 상대에게 부족한 덕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오직 그에게 있는 덕을 얻는 데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게서 모든 덕을 얻으려 한다면 본받을 모델을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규정집 5,4,1-2) 참으로 일리 있고 유익한 가르침이다. 우리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모든 덕을 갖추고 있을 수 없다. 사람마다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지혜로운 꿀벌처럼 타인의 장점을 찾아 본받으려 노력할 때 영성 생활이 더욱 진보하게 될 것이다. 덕을 위한 노력 사막 수도승들은 덕을 얻으려 분투했다. 압바 이시도루스는 그 이유를 말한다. “악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서로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빨리 악에서 돌아서서 덕을 추구해야 합니다. 덕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고 서로 일치시켜 줍니다.”(이시도루스 4) 악습이 여럿이듯 그 상대 덕도 여럿이다. 그들은 가능하면 많은 덕을 얻으려 노력했다. 압바 포이멘의 다음 두 금언은 이를 잘 말해준다. “한 형제가 압바 포이멘에게 물었다. ‘사람이 오직 한 가지 행위에만 의지할 수 있습니까?’ 원로가 대답했다. ‘압바 요한 콜로부스가 말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모든 덕을 조금씩 갖고 싶습니다.’”(포이멘 46) “누가 집을 지으려고 준비할 때, 그는 집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한데 모읍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자재들을 수집하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온갖 덕을 조금씩 얻읍시다.”(포이멘 130) 압바 요한 콜로부스도 “사람은 모든 덕을 조금씩은 가져야 합니다”(요한 콜로부스 34)라고 말한다. 사막에서 여러 해 동안 함께 화목하게 생활한 두 형제의 일화는 그들이 덕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인내와 겸손에서 경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한 형제의 눈에 다른 형제의 성덕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 형제는 다른 형제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그 순간부터 그를 형제가 아니라 사부로 부르며 자기 원로로 대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96) 여기서 우리는 영적 경쟁에서 쉽게 빠질 수 있는 교만이나 시기심이 아닌 지극한 겸손을 보게 된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질투와 분노, 교만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 사막 교부들은 덕을 닦는 데 있어서 교만과 허영심을 가장 큰 걸림돌로 보았다. 교만은 영혼이 소유한 모든 덕을 무자비하게 약탈한다. 카시아누스는 말한다. “교만의 질병이 얼마나 위험하고 심각합니까! 세상의 본성과 법칙까지도 바꿀 만큼 그렇듯 많은 정의와 덕, 그렇듯 위대한 신앙과 헌신이 한 번의 허영심으로 파괴되어, 그 모든 덕이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규정집 11,10,3) 그리고 “교만의 악만큼 모든 덕을 제거하고 인간의 모든 의로움과 거룩함을 빼앗아 발가벗기는 악습은 없습니다. 교만은 온몸에 널리 퍼진 전염성 있는 질병과 같아서 단지 한 지체만을 오염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을 해치며, 이미 덕의 정상에 도달한 이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분쇄하려 합니다.”(규정집 12,3,1) 그래서 그들은 교만을 가장 경계했다. 어떤 원로는 덕행이 뛰어난 세속인이 있다는 계시를 받는다. 완덕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원로들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느님은 종종 그들을 교만에서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 못지않게 덕스러운 평신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어떤 독 수도승은 천사를 통해 자신이 평신도 농사꾼보다 거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를 만나 그의 말에 감명을 받는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288-9) 모든 덕의 으뜸은 겸손이다. 겸손이야말로 사막 수도승들에게 일상생활의 본질이었다. 그들은 모든 덕에 나아가고 온갖 악습을 없애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였다.(규정집 6,6) 그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완덕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완덕에 오른 사람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며(마태 11,29 참조), 늘 한결같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온유와 겸손, 평정심은 바로 덕스러운 사람의 표지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회·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7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예언의 힘(묵시 11,1-6)

요한묵시록 10장에서 예언자 소명을 받은 요한은 11장에 들어서면서 지팡이 같은 하나의 잣대를 받는다. 그 잣대로 성전과 제단,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이들의 수를 측량하라는 말씀을 요한은 듣는다. 에제키엘서(40~43장)에서도 성전을 측량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빌론에 유배간 유다 민족을 위해 이미 사라졌으나 여전히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성전을 이상적으로 소개하는 이야기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에제키엘서와 요한묵시록 11장을 함께 열거하면서 위로와 격려의 예언자적 소명을 짚어내곤 한다. 에제키엘이든 요한이든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의 보호로 굳건히 살아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게 예언자적 소명이라는 것이다. 성전이란 형상은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고 어렵고 힘든 시간,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위로와 희망이 성전을 측량하는 이야기 안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요한묵시록 11장은 에제키엘서의 성전 측량과 다르다. 측량의 수치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측량의 행위가 서로 다른 두 공간의 분리를 만들어낸다. 요한은 성전을 측량함으로써 성전 바깥뜰, 그러니까 이민족들의 공간을 분리해낸다.(묵시 11,2) 성전 바깥뜰의 이민족은 폭력적 캐릭터로 묘사된다. “그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묵시 11,2) 폭력과 분리된 듯 서술되어야 할 거룩한 도성은 더 이상 평온하지 않다. 불행히도 거룩한 공간이 폭력의 공간이 된다. 성전과 성전 바깥뜰로 구분된 두 공간은 폭력으로 점철된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요한묵시록의 공간적 배치는 늘 이렇다. 천상이 지상 속에 스며들고 지상이 천상의 공간으로 확대되며, 선과 악이 하나의 공간 안에 뒤엉켜 각각의 의미를 더욱 섬세히 살펴보게 독자를 이끈다. 세상의 일이란 게 이분법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논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의 경험칙에서 얻을 수 있는 평범한 지혜다. 요한묵시록은 거룩함을 지켜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폭력과 악의 세력 안으로 밀쳐 넣는다. 거룩함은 천상에서 홀로 빛나지 않는다. 성전은 홀로 거룩해서 세상을 등진 공간이 아니다. 세상 속, 그 어두움 속에서 성전은 반드시 세워지고 꾸며져야 한다. 이민족의 폭력은 마흔두 달이라는 시간으로 제한된다. 마흔두 달과 관련해서 요한묵시록은 1260일(묵시 12,6 참조)과 3년 그리고 반년(묵시 11,3; 12,14 참조)의 시간으로 다시 소개한다. 같은 시간을 다른 표현으로 곱씹는 이유와 관련해서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다니엘서 7장 25절이 암시하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임금(기원전 175~163년)의 박해 시절을 떠올린다. 역사의 한 사건은 그것이 폭력적이고 참담할수록 깊고 묵직한 슬픔과 상처를 남긴다. 기원전 2세기의 그 박해는 요한묵시록이 쓰인 기원후 1세기 말엽에까지 이어져 어렵고 힘든 모든 시절의 메타포로 작동한다. 마흔두 달은 거룩한 도성, 거룩한 백성이 살아내는 모든 시간들의 상처가 된다. 그럼에도 상처의 시간은 절망과 소외의 시간이 아니라 예언의 시간이어야 한다.(묵시 11,3) 두 올리브 나무와 두 등잔대로 상징화된 두 증인이 나타난다. 유다 전통에서 두 올리브는 이스라엘의 두 영웅, 그러니까 대사제 여호수아와 세상의 지도자 즈루빠벨을 암시한다.(즈카 4,1-14 참조)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아우르는 두 영웅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의 등장을 기다리는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묵시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종말론적 영웅으로 재해석되었다. 구원 상징하는 ‘두 증인’ 등장 박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 함께하신다는 위로 전달 강력한 하느님 권능 재확인 역사의 두 영웅은 구원과 희망의 상징으로 거듭났고 두 증인을 소개하는 요한묵시록은 폭력의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었을 터. 좌절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두 증인을 통해 희망을 견지하라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건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증인을 소개하는 서사는 역사 속 하느님의 권능을 배경으로 더욱 힘찬 형식을 빌어 진행된다. 희망은 분명하게 강력한 것이어야 한다는 다짐을 한 것 마냥 두 증인에 대한 묘사는 단단하고 선명하다. 먼저 두 증인 입에서 나오는 불이다.(묵시 11,5 참조) 원수를 삼킬 정도로 강력한 불은 하느님의 분노를 가리키는 전형적 은유다.(2열왕 1,10 이하; 루카 9,54 참조)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는 모든 이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전통적 믿음이 불이라는 형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두 증인은 하늘을 닫는 권한도 지닌다. 하늘을 닫는 권능은 엘리야의 이야기를 참조한 듯하다.(1열왕 17,1)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엘리야를 통한 하느님의 힘찬 권능에 대한 이야기를 소중히 여겨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그분을 향한 믿음의 근거로 사용하기도 한다.(루카 4,25; 야고 5,17 참조) 물을 핏빛으로 만드는 모세의 이야기도 첨가된다.(탈출 7,17 참조) 모세는 그야말로 민족의 영웅이고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서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셨다. 두 증인이 모세처럼 꾸며지는 건,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의 역사하심은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리라. 두 증인에 대한 묘사는 11장 6절 후반부에 이르러 절정에 치닫는다.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닌, 특정 민족이나 공간에 치우치지 않는, 그리하여 온 세상 위로 권능을 떨치는 두 증인의 모습은 경이롭다. 그 누구도 대적 못 할 두 증인이기에 그들이 존재하는 한, 예언의 힘은 맹위를 떨칠 것이다. 그런데, 두 증인은 자루 옷을 입고 있었다.(묵시 11,3 참조) 마흔두 달, 천이백육십 일 동안 자루 옷은 두 증인을 감싸고 있었다. 자루 옷은 고통과 회개의 은유로 사용된다.(이사 22,12; 예레 4,8; 마태 11,21) 요한묵시록은 천상의 기쁨, 영광 혹은 권능을 드러낼 때 ‘흰 겉옷’을 사용한다. 자루 옷은 아니다. 두 증인의 옷차림에서 요한묵시록 서사의 긴장이 진하게 느껴진다. 예언자의 운명은 그리 영광스럽거나 화려하지 않다는 것. 그들은 고통과 회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그래서인가. 11장 7절에 다다를 때, 두 증인은 죽음을 맞닥뜨리고 만다. 그들의 죽음이 무엇인지…, 우리는 밝혀야 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9면

[말씀묵상] 연중 제14주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 34,9 참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을 위하여 이런저런 것들을 소유하고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더해가면 갈수록, 자신의 공간을 채우는 수많은 것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행복, 하느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 행복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영원한 행복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파견하십니다. 곧 일흔두 명의 제자를 ‘주님의 일꾼’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견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루카 10,3)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이리 떼 가운데 놓여 있는 양들만큼이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롯이 하느님께만 의탁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고 제자들은 걱정할 필요 없이 오로지 하느님께만 시선을 두고, 하느님께만 속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한 제자들은 그저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라고 인사를 건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8)고도 말씀하십니다. 행복의 기초가 되는 평화의 인사와 음식을 서로 나누며, 한 식탁 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9)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걸어갈 이 모든 여정을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일러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스스로 걱정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사명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그간의 체험을 말씀드리며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진정 기뻐해야 할 일은 그들이 이룬 놀라운 일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때문에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0,20 참조) 이렇게 일흔두 제자는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낙인을 몸에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인생살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의 손길에 대한 체험을 예수님께 보고한 것처럼, 우리는 어떤 체험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매일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소중히 여길만한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 인생에서의 특별한 하느님 체험은 이렇습니다. 사제 수품을 준비하며 가진 30일 피정이 그 첫 번째입니다. 한 달이라는 긴 여정을, 그것도 성 이냐시오 영성에 따라 처음 걷게 되는 피정이었기에 낯설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피정을 마치며, 제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함께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자리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본당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의 사제 생활 가운데의 체험이, 체험을 더욱 키워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 또한 하느님의 체험을 더욱 깊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연수 봉사자들과 연수를 준비하면서, 연수가 진행되는 가운데 연수생들의 변화를 통해서, 그리고 연수 여정 안에서 제 안에 자리하고 있는 미성숙하고 미성장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치유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손길을 펼쳐주셨습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이제 우리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손길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8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간음, 표징의 왜곡과 인격적 계약의 파기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간음은 구약을 ‘능가하는 의로움’(마태 5,20)이다. 몸과 마음 모두에 기초를 둔 인간학에서 간음을 바라본 복음적 에토스다. 그리고 간음을 명백히 ‘몸의 죄’라 한 것은 참된 몸의 결합이 아니기에 그렇다. 표징을 왜곡하고 인격적 계약을 파기한 것이다. 배우자와 계약으로 갖게 된 ‘너에게만’ 하는 배타적 권리를 침해했고, ‘하나’, ‘한 몸’을 말하는 표징을 허위로 만들었고, 상호 조건을 지닌 인격적 관계로 맺어진 계약을 크게 훼손한 것이다. 그러므로 간음은 첫 번째로 혼인의 순수한 ‘내적 진리’, 곧 ‘한 몸’을 허위로 만드는 ‘몸의 죄’다. 두 번째로 계약에 의한 배타적 관계로 사랑에서 나온 서약이 몸의 표현을 통해 이뤄지는 선(善)에서 정반대인 탈선, 윤리악이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한 몸을 이루는 일치가 혼인 서약의 정상적 표징이라면, 인간의 몸은 그 본래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해 “영의 표현이 되고 창조의 신비에서부터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인격체들의 친교 가운데 실존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32과 1항)에 더 깊이 다가갔다. 복음의 에토스는 ‘몸의 복음’을 살라는 초대이고, 창조의 신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는 자연적 갈망이 초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돼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의 에토스는 구성상 이미 완성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 율법의 참된 의미를 실현했고, 그래서 과거도 현재도 영원히 그분은 살아 있고 인격적인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말씀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긴 요한복음 8장은 간음한 여인과 죄의 관계다. 예수께서는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자를 보호하면서도 간음과 죄를 동일시한다.(요한 8,7-11 참조) 율법의 조항을 들어 여인을 고발하러 온 바리사이들에게 율법이 아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시며 당신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어디에 호소하셨는가? 각자의 양심이다. 바로 한처음 상태의 양심에 호소하신 것이다. 이는 어디에서 회복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왜냐하면 죄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인간에 관한 진리를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땅인 인간의 마음에 말한다. 마음이 구원받는 것, 그것이 회복이다. 즉 원순수를 회복하기 위한 내적 의미가 들어있다. 인간의 양심에 새겨진 선과 악에 대한 식별은 어떤 법규범보다 더 바르고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에토스를 향하는 길은 창조의 에토스, 즉 사람이 누구인지 재발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구약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에토스가 상실됐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에게 질문할 시간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첫 질문, “무엇을 찾고 있느냐?”에는 인간의 길이 포함되어 있기에 삶의 본질을 묻고 있다. 많은 사람이 ‘무엇’을 찾기 위해 예수를 찾아왔다.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어떤 이는 죽어가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또 어떤 이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요한복음 마지막에 이르러 ‘무엇’은 ‘누구’로 바뀐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으로부터 “누구를 찾느냐?”고 질문받은 곳은 그분의 빈 무덤 앞이었다. 그녀가 그곳에 간 것은 그분으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에 대한 그리움, 즉 그분이었던 것이다. 참된 신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찾는 인간’에서 ‘누구를 찾는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궁극적으로 내 안에 그분의 모습을 형성시키는 것이요, 발견한 그 참된 보화를 사는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작은 두루마리(요한 묵시록 10장)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지기 전, 작은 두루마리를 펴 들고 있는 천사가 나타난다. 구름에 휩싸인 천사의 모습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의 개입을 알리는 ‘사람의 아들’(다니 7,13 참조)과 닮았고 당신 백성 앞에 장엄히 나타나시는 하느님에 대한 서술과도 닮았다.(탈출 16,10; 1열왕 8,10 참조) 천사는 땅과 바다를 발판 삼아 서 있다. 천상과 지상의 공간적 구분은 천사의 형상 안에서 희미해지고, 희미해진 만큼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 역사 안에, 백성들 삶 한가운데 천상의 섭리가 천사를 통해 구현된다. 천사의 머리 위 무지개는 그래서 특별하다. 하느님과 인간 세상을 연결하는 계약의 상징인 ‘무지개’(창세 9,13 참조). 천사는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는 메타포로 등장한다. 천사를 둘러싼 시간적 구성도 매한가지다. 천사가 등장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묵시 10,6 참조)이다. 우리말 성경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번역했지만, 그리스말 본문은 ‘더 이상 존재할 시간이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시간은 도대체 어떤 시간일까. 천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없는 그 시간에 천사는 창조의 하느님을 호출하고 그분을 두고 맹세한다. 이 맹세는 마지막 때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대목과 겹친다(다니 12,7 참조). 다른 시간을 허용하지 않아 더 이상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 시간은 사실 마지막, 완성의 시간이(어야 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시는 하느님께 맹세하는 천사는 마지막 종말의 때를 이야기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온다. 처음과 끝이 하나가 된다. 우리의 이야기는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울리는 시간’ 또한 소개하고 있다.(묵시 10,7 참조) 혹자는 ‘아직 다다르지 않은 종말의 시간’이라고 해석하고 종말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과도기적 시간이 우리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해석하다 보면 우리말 성경처럼 하느님의 섭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그 완성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울릴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대로 그분의 신비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묵시 10,7) 그러나 그리스말 본문은 ‘과거형’ 동사를 사용한다.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가 울리는 장면은 이야기의 서술상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11장 15절에 가서야 등장한다), 그 시간을 물리적 시간의 미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고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 울리는 시간은 하느님의 섭리가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것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 요컨대, 천사가 외치는 이야기의 현재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는 ‘진공(眞空)의 시간’이라면 그 시간이 바로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라는 것이고,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시간이라는 것이다. 사실 믿는 이들의 시간은 늘 ‘완성의 시간’이고 ‘마지막 시간’이다.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다가올 시간에 대한 설렘은 믿는 이들의 몫이 아니다. 믿는 이들은 온전히 지금을 전부로, 마지막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기록은 필요치 않다. 더 이상 읽어야만 하고 그래서 깨달아야 하고, 깨달음을 기반으로 무언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외침이나 환시의 시간은 무용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마지막이고 완성된 시간을 살아갈 ‘주체’, 곧 ‘예언하는 주체’를 소개한다. 천사가 요한에게 제시하는 작은 두루마리는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히기 위해 등장한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두루마리를 먹는 행위를 두고 말씀을 받는 것, 그러니까 예언자적 소명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에제키엘서 2장 참조) 요한의 캐릭터는 본 것을 글로 옮기는 필자에서(묵시 1,19 참조)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변모한다. 글이 말로써 생명력을 얻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 이어지는 요한묵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묵시 11,3.6.10 참조) 일곱째 천사 나팔 울리는 때를 물리적 ‘미래’로 해석해선 안 돼 믿는 이들에게 시간은 언제나 완성의 시간이며 마지막 시간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언자의 운명은 혹독하다. 작은 두루마리를 삼키는 것이 입에는 달지언정 배 속은 쓰리기 때문이다.(묵시 10,10; 예레 15,10.15-18 참조) 예언의 말씀은 고맙거나 기쁘거나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때론 반감과 대립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예레 20,3 참조) 예언의 말씀이 불러오는 반응의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꾸며놓은 시간의 성격을 다시 되짚어 보면 어떨까. 마지막이라서 더 이상의 기대와 바람이 필요 없는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설렘이나 지금에 대한 비판이 아닐 것이다. 빗대자면, 생의 마지막에 내놓아야 할 마지막 말이 앞으로의 계획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 혹은 제 삶에 대한 후회가 전부일 수 없듯이 마지막에 외쳐야 할 예언의 말씀은 그저 마지막 꼭 해야 할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꼭 해야 할 그 말은 머뭇거림이 없어야 하고, 계산이 없어야 한다. 그 마지막 말이 예언의 말씀이라면, 그 마지막 말을 듣고 기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실은 마지막을 살지 못하는 이들의 섣부른 편견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이 마지막 시간에 예언자들의 등장은 울려 퍼져야 할 말들을 늘어놓는 도구가 필요해서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두루마리를 삼킨 요한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며 요한묵시록 어디에도 요한이 설파하는 예언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요한은 그저 말씀이 체화된 한 ‘주체’가 된 것이고 그 주체가 있음으로 되었다고, 그것이면 충분하고 그것으로 마지막 시간에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것이라고 요한묵시록 10장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말씀의 사람, 예언자는 온 생애 매 순간, 마지막을 살듯 살아가는 사람이고, 삶의 모든 순간에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길 제 몸으로 증거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제 속으로 삼켜져 말씀 자체로 거듭나는 이가 예언자일 것이다. 예언은 늘어놓는 말과 언변이 아니라 살아내는 인격을 통해 하느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9면

[말씀묵상]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 주일

오늘은 초대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두 사도는 여러 면에서 아주 다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인데, 예수께서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로 케파(바위)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마태 16,18 참조) 베드로는 아람어 케파의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촌 벳사이다(어부의 집)에서 요나의 아들(시몬 바르요나)로 태어나 어업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물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께 불림을 받습니다.(마태 4,19 참조)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그는 순수하고 솔직하기도 하지만, 수제자의 자격이 의심될 정도로 허술하기도 합니다. 바위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나약하고 겁도 많습니다. 스승은 근심과 번민에 휩싸여 계시는데 잠을 이기지 못하여 잠들어 버리기도 하고,(마태 26,40 참조)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나아가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에 빠지기도 합니다.(마태 14,30 참조) 결국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의 배반은 작지 않은 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3) 하물며 갈릴래아인 특유 억양의 사투리 때문에 예수님의 일행임이 탄로 난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부정했습니다.(마태 26,70 참조) 비록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주의 맹세까지 하면서 말입니다.(마태 26,74 참조) 그래서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를 깨달은 베드로가 대사제의 저택 밖으로 나가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8,12) 하지만 베드로는 죄에 절망하지 않고 회개했습니다. 단순한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후회는 주저앉아 뒤만 돌아보고 있는 것이고, 회개는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보다 큰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가 회개를 가능케 합니다. 한편,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였던 사울은 유다 땅 안에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17㎞나 떨어진 다마스쿠스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쫓아 서둘러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뵌 사울은 눈이 멉니다. 그런데 사울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눈이 먼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사울이 눈을 떴으나 볼 수 없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사도 9,8 참조) 이는 영적인 어둠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흘 동안 사울은 영적인 혼란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 시간 동안 사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 보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혀 기꺼이 박해자가 되기로 작정했지만, 이제는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이었던가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바오로는 더는 그분을 신성모독자로 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신성모독 죄를 지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사형 외에는 다른 형벌이 없는 그 치명적인 죄를 말입니다. 사흘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니아스로부터 성령의 안수를 받아 사울은 눈을 뜨게 됩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갔다는 표현(사도 9,18 참조)은 영적인 어둠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눈을 뜬 바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유다처럼 자신이 지은 죄에 절망하여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그 큰 죄에도 불구하고 감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거나 말입니다. 여기서 바오로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그로써 사울이 바오로로, 최악의 박해자가 최고의 선교사로 거듭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1코린 15,10)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 모두 죄를 지었지만, 절망하여 주저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 ‘담대히’(사도 4,13; 28,31 참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이 담대한, 어찌 보면 뻔뻔한 복음의 선포자가 될 수 있게 해준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렇게 두 사도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회개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누구나 회개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8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율법과 예언서에서의 간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28)며 이어지는 예수님의 선포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원래의 의미를 율법과 예언서들을 통해 회복하면서 행위의 전환점을 ‘마음’이라 선포하신 것이다. 그들이 지켰던 구약의 에토스는 외적인 면에 치중하여 율법을 경직되게 해석했고, 그 결과 과정의 중요성이 소홀히 됐으며, 또한 선과 악에 대한 올바른 의미가 가진 자의 기준에 따라 그 저울의 추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계명 자체가 음욕에 싸인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지에 있기에 율법 실행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마음이라 하신 것이다. 사라와 아브라함(창세 16,2), 라헬과 야곱(창세 30,3)은 혼인의 본질적 목적을 자녀 출산으로 생각했던 그 시대의 상황과 타협해 일부일처제로부터 어떻게 조직적으로 이탈하고 합리화했는지를 보여준다. 타협된 율법의 실천이다. 이들은 당시 종교, 정치, 사회적으로 기득권에 속한다. 지키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욕망을 왜곡하는 자신의 약점, 결핍, 의지적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율법을 하느님의 정의에서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 정의 안에서 타협된 율법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성조들의 시대와 이스라엘 왕,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는 일부다처제가 그들의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는 그들이 마음에서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행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음이 드러난 것이다. 힘에 의해 타협된 율법은 이미 마음의 진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예수께서 율법 본래의 정신을 선포하신 것이다. 종교, 정치, 사회, 지도권에 있던 남자인 그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아내를 소유권의 의미로 해석했고, 이 소유권에는 아내의 몸에 대한 ‘권리’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간음을 소유권의 침해로 해석하여 일부다처제를 허용, 합법화했다. 스스로 하느님 백성이라 말하는 이들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내용을 모호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 호세아(1~3장)와 에제키엘(16장) 예언자는 계명의 참 내용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하느님께 불충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간음한 아내로, 부부간 혼인적 사랑으로 유비 해석했다. 간음의 추악함과 윤리적 악을 드러내는 비유로 신부인 이스라엘의 간음, 배반으로 표현했다. 이사야는 애틋한 하느님의 사랑을 신랑의 사랑으로 표현했다. 예언자들의 탁월한 비유와 상징으로 불충실한 신부 이스라엘이 하느님 편에서 맺는 영원한 계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말한다. 계약에 의해 이들은 서로에게 ‘나의’가 성립되지만, 이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배타적 의미다. ‘나의’는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상호성을 뜻하며, 선물의 균형을 표현한다(33과 4항).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속함의 의미로 사랑이 원인이 되어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는 특별한 차원의 ‘나의’이다. 그래서 ‘나의 자동차, 나의 열쇠’ 등 소유를 말할 때와 ‘나의 주님,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자녀’와 같이 인격을 가리킬 때의 ‘나의’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전자는 나의 소유를 말하지만, 후자는 서로 상호성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즉 타자가 ‘나의 아내’, ‘나의 아버지’라 부르도록 수용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가 스스로 그에게 속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어”(에제 11,19) 창조의 에토스에서 벗어나 닫혀 버린 내적 주체, 즉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8.21-22)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은 과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자유를 가졌을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교 사상가가 인간이 지닌 의지의 근본적인 특성을 자유라고 봤지만, 모든 학자가 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결정주의적인 입장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인간의 행동은 운명이나 별들 또는 악령들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신화적 결정주의, 자유로워 보이는 행위도 인체를 구성하는 요소의 영향에 따른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리학적 결정주의 이외에도 사회학적, 심리학적 결정주의 등이 있다. 특히 근대 이후 많은 이가 추종했던 것은 과학주의적 결정주의이다.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의지의 자유’에 따라 행한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일이 실제로는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법칙적으로’ 내지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에 불과하다. 도덕적 책임을 위해 필수적인 인간의 자유 이렇게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강한 결정주의’의 경향들을 거슬러 성 토마스는 여러 논거를 통해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하려 시도한다. 간접적인 논거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를 부정하는 자들은 일체의 윤리적 판단을 부정하는 부조리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필연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면, 도덕 철학의 성립 근거가 되는 숙고, 권고, 계율과 처벌, 칭찬과 비난 등은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악론」 6,1) 토마스에 따르면,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는 윤리 영역에서의 모든 칭찬과 비난이 객관적 기반을 상실할 것이므로, 만일 자유가 없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결정주의는 또한 실천적으로 큰 문제점을 지닌다. 자기의 선택과 행동들이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활동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자유롭게 존재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노력하는 등 인생의 근본적 의미들에 대한 통찰들은 결정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맹목적 본능이나 외적인 영향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내적인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자유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스토아학파에 속했던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어느 폭군이 “나는 네 주인이니 너한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위협하면서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을 경우 목을 베겠다고 위협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바로 신성 자체요. 신은 자기의 아들 하나가 당신의 권력에 짓밟히고 있다는 그 사실을 잠자코 허용하고 있다고 생각해 두시오. 당신은 내 몸뚱이의 주인이오. 그러니 자, 마음대로 하시오! 그밖에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없소!” 이 일화는 어떠한 외적인 상황이나 억압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자유, 내적인 자유는 어찌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목적을 향한 ‘의지’와 그 수단을 선택하는 ‘자유재량’ 토마스는 또한 사물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이성과 선(善)을 고유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의지의 구조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자유를 증명하려 한다. “선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선 곧 참행복이 아니라 다른 특수한 선들과 연관된다.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다.”(I-II,13,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지는 필연적으로 참행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이 행하는 ‘수단의 선택’은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의지’(Voluntas)가 자유로운 선택들의 근원으로 취해질 때 그것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자유재량’(Liberum Arbitrium)이라고 부른다. 토마스는 “의지와 자유재량은 두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능력”이란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의지의 고유한 대상이 일차적으로 ‘목적’이라면, 자유재량은 목적으로 인도하는 ‘수단’들을 선택하는 역할을 한다.(I,83,4) 최종 목적인 지복직관에 도달하기를 원하는 신자들은 사제의 길을 통해, 또는 결혼과 자녀 출산을 통해서 등 다양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는 “수단들에 관한 한, 어떤 규정되고 확실한 목적에 대해 단 한 가지 유일한 길만 따를 수 있는 자연 사물들에서 발생하듯이, 필연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진리론」 22,6) 인간의 육체와 감각은 모두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오직 의지만은 자유로운 특권을 향유한다. 성 토마스는 의지가 자기 행위와 대상의 절대적인 주인이라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최상급인 ‘최고로 자유로운’(Liberrima)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지는 최고로 자유로우므로, 거기서부터 의지는 예속 상태로 강요될 수 없다는 데 이르게 된다.”(「명제집 주해」 II,39,1,1,ad3) 따라서 자기 행위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가능성과 대안들을 숙고한 후에 선택한다. 예컨대 결혼하기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원하면서도 이를 실제로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는 이 사람과 아니면 저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의지는 행복을 필연적으로 원하지만, 개별적 선 혹은 목적을 향하는 수단들의 선택, 그리고 행위의 실행 여부와 관련해서는 자유를 갖는다. 각 개인은 자주 외적인 환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에 빠지게 되지만, 그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그의 자유 안에 남아 있다. 이 자유야말로 모든 악한 것이 빠져 나온 후에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은 ‘희망’인 셈이다. 토마스는 「신학대전」(I, qq.105-106)에서 자유로운 행위의 원인은 이를 이루는 인간 인격이지 하느님도 악령도 별들이나 이런 부류에 속하는 다른 것들도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다. 의지나 자유재량은 자연이라는 광대한 우주 전체에서 의심할 바 없이 아주 독특하며 유일한 천부적 재능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 재능을 소유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실재에게는 그것이 없다. 이런 특징 때문에 현대 사회로 올수록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자주 나타났다. 인간의 자유가 그렇게 특별하다면, 이것만으로 인간은 참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음 회에서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7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사쿠(1923~1996, 바오로)의 소설 「침묵」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로마 교황청에 한 가지 보고가 들어왔다.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크리스토발 페레이라 신부가 나가사키(長崎)에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것이다.”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에서 33년 동안 체류한 일본 교회의 총책임자였다. 그의 제자인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일본인 젊은이 기치지로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 입국하게 된다. 로드리고는 신자들의 환영을 받고 사목활동을 이어가지만, 결국 나가사키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된다. 이후 로드리고 신부는 기치지로의 배신으로 관가에 붙잡히고, 수많은 신자가 고문을 당한 뒤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힘없이 죽어가는 신자들을 바라보며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의 침묵에 점점 믿음을 잃어간다. 그는 배교한 자신의 스승을 직접 보게 되고, 더욱 혼란에 빠진다. 로드리고 신부도 후미에(예수나 성모 마리아 모습을 새긴 목판이나 금속판)를 밟게 된다. 후미에는 일본 내 기리시탄(가톨릭신자)을 색출하고 박해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였다. 그가 동판에 발을 올리자 예수님의 음성이 들린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리라.” 그제야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이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계셨음을 깨닫는다. 엔도 슈사쿠는 평소 강연에서 자주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순교자를 존경하지만, 배교한 사람들을 경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신약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는 스테파노 부제였다. 그는 돌에 맞아 순교했다. 초대교회에는 예수님의 사도들 외에도 처음으로 일곱 명의 부제를 선출했다. 신자 수가 늘어나자, 사도들이 선교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신심 깊은 신자 중 일곱 명을 뽑아 부제로 세우고, 음식 분배와 재정 등을 담당하게 했다. 스테파노 부제는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고,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거짓 고발과 위증으로 체포되어, 의회에서 심문을 받은 후 성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그가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외치자, 군중은 더욱 격분해 그를 돌로 치기 시작했다.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라고 기도하였다. 이어 더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성 스테파노의 유해는 415년경 예루살렘 근처에서 발견되어 스페인, 아프리카, 콘스탄티노폴리스, 로마 등지로 나뉘어 전해졌다. 유해가 안치된 기념성당들에서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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