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에 참례하면 늘 비슷한 내용의 강론을 듣게 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이니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 덧붙여지는 이야기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일화입니다. 위대한 교부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 교리를 골똘히 생각하며 바닷가를 걷고 있었는데 어떤 어린이가 바닷가 모래밭에 구멍을 파고 열심히 바닷물로 퍼다가 붓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나고 물었더니 아이가 바닷물을 퍼서 구멍에 다 담으려 한다고 답을 합니다. 성인이 웃으며 작은 구멍에는 절대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으니 헛고생 그만하라고 타일렀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성인에게 말하기를, “맞다! 그러니 당신도 삼위일체 신비를 당신의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하려 하지 말라” 하고 사라졌다는 이야기죠. 한 번쯤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삼위일체는 신학적으로 가장 어려운 교리입니다. 하느님의 존재 방식에 대한 교리이니 ‘신비’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비’는 이성을 통한 논리적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전혀 알 수 없다면 교부들이 어떻게 토론을 통해 그런 교리를 정립할 수 있었을까요? 결국 삼위일체가 신비라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미사에서 함께 자주 바치는 사도신경과 간혹 바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삼위일체 신비를 고백하는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신앙 고백은 이성을 통한 논리적 이해를 넘어 믿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증언입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 신비는 성경과 삶을 통해 묵상하고 이를 통해 배운 것을 나의 신앙으로 고백해 볼 때 조금씩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삼위일체 대축일 복음은 아주 짧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모든 민족에게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라는 사명입니다. 그렇게 사명을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당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삶을 떠 올려 보면 그분은 늘 기도하면서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길 바라셨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비우며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신 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고, 광야로 예수님을 인도하여 아버지의 뜻을 찾게 도우셨습니다. 그런 성령이기에 부활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께서 자신들에게 내려옴을 체험합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진정한 사도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여정에 본격적으로 나섭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부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성부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며 애쓰시는지, 우리가 당신의 뜻에 따라 살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가 모든 것의 주인이신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세상과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아버지, 우리를 용서하시는 자비의 아버지임을 알게 됩니다. 제2독서는 성령 하느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해주는 분이심을, 예수님이 걸으신 사랑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심을 알려줍니다. 그렇기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됐습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마치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된 것처럼 복음을 증거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돕고 계십니다. 성부가 없었다면 성자는 세상에 올 수 없었고, 성자가 없었다면 세상은 성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없었다면 성자는 성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성자가 없었으면 성령은 세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는 하느님이 세 분 계시다는 이상한 교리가 아니라, 사랑은 함께 협력하는 것이며 일치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은총입니다. 이런 이유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삼위일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론하셨나 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신학적인 내용을 훈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삶의 방식에 혁명을 꾀한다는 뜻입니다. 각 위격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지속적인 상호작용 안에서 서로를 위해 사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타인들과 함께 타인들을 위해 살라고 부추기십니다. 열린 마음으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삶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 나는, 내가 살아가기 위해 다른 이들이 필요하다고, 다른 이들에게 나를 내어줘야 한다고,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한다고 정말로 믿고 있는가? 나는 이를 말로 입증하는가, 아니면 내 삶으로 입증하는가?”(바티칸뉴스, 2022년 6월 12일) 저는 믿습니다. 세상 창조부터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신 성부 하느님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의 삶으로 초대한 성자 하느님을,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예수님을 닮게 하시는 성령 하느님을 믿습니다. 또한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시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도 그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라는 이끄심을 믿습니다. 이런 저의 믿음이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삶으로 증거될 수 있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님의 꽃은 장미만이 아니다?

계절의 여왕인 5월,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가 참 아름다운 시기입니다. 장미하면 또 다른 여왕이 생각나지요. 바로 ‘하늘의 여왕’이신 성모님입니다. 성모님하면 장미가 떠오를 정도로 장미와 성모님의 관계는 깊습니다. 성모님이 처음 발현하신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에서는 한겨울에 장미꽃들이 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의 라 살레트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장미로 둘러싸인 신발을 신고 있었고,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의 발치에도 노란 장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성모님과 장미를 결부시키곤 하는데요. 잘 아시는 것처럼 묵주기도(Rosario)는 라틴어로 ‘장미 꽃다발’을 의미합니다. 또 성모호칭기도를 바칠 때는 성모님을 ‘신비로운 장미’라 부르며 전구를 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을 상징하는 꽃은 장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다미아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백합으로 입히셨고, 장미로 덮으셨으며 꽃들로 치장시키셨도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꽃은 장미, 백합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백합은 성모님의 동정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중세기 화가들은 성화에 흰 백합을 그려 성모님이 동정녀임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에는 백합이 특별히 더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그래서 서구권에서는 흰 백합을 성모님의 백합(Madonna lily)이나 성모영보의 백합(Annunciation lily)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성모님을 표현하는 성미술에는 백합과 더불어 자주 등장하는 꽃이 또 있는데요. 바로 제비꽃입니다. 제비꽃은 성모님의 겸손과 겸양을 보여주는 꽃입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신비의 포도나무」라는 저서에서 성모님을 “겸손한 제비꽃”이라고 칭송했는데요. 성인은 “작고 땅에 가깝고 향기롭고 색이 소박한” 제비꽃에서 겸손을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제비꽃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겸손을 상징한다”고 전합니다. 아예 이름에 성모님의 이름이 담긴 꽃들도 있습니다. 메리골드는 마리아와 황금(Gold)이 합쳐진 이름인데요. 16세기 무렵 유럽에 이 꽃이 유래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이 꽃을 성모님에게 봉헌했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장미’라는 의미의 로즈마리는 성모님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요. 전설에 따르면 성모님이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던 당시 로즈마리 위에 옷을 두고 휴식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때 원래는 흰색이었던 로즈마리의 꽃이 오늘날처럼 파란색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파란색은 하늘의 모후인 성모님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합니다. 라벤더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습니다. 이 전설에서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의 옷을 라벤더 위에 널어 말리셨는데요. 그때부터 라벤더에 향기가 머물게 됐다고 하네요. 사실은 이밖에도 성모님과 관련 있는 꽃은 수십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신자들은 이렇게 꽃을 통해서 아름다운 어머니, 성모님과 성모님의 덕행을 기억했던 것이지요. 꽃들이 아름다운 이 시기, 꽃들을 바라보며 성모님과 함께 기도한다면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024-05-26

[알기 쉬운 미사 전례] 감사 기도인가 성찬 기도인가?!

불행과 행복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준 것을 기억하고 받은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준 것을 잊어버리고 받은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을 감사하게 여깁니다. 어떤 것을 기억하느냐의 차이가 불행과 행복을 나뉘는 듯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더 많이 기억하나요? 미사의 가장 핵심 단어는 ‘기억’입니다. 단순한 회상을 넘어서서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만드는 창조적 힘을 지닌 ‘기억’은 히브리어 ‘다바르’(dãbãr), 그리스어로 ‘아남네시스’(anamnesis)라고 합니다. 교회는 성찬 전례, 특히 감사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업적 전체를 ‘기억’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미와 찬양을 합니다. 예전에는 ‘감사 기도’(Prex eucharistica)를 ‘성찬 기도’라고 했는데, 그것은 ‘Liturgia eucharistica’(직역 ‘감사 전례’)를 ‘성찬 전례’로 번역한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그리스도께서 ‘사제요 제대이며 어린양’(부활 감사송 5)으로 주재하시는 거룩한 잔치라는 의미를 살려서 ‘성찬 전례’라는 용어는 그대로 사용하고, 대신에 ‘성찬 기도’를 본래의 뜻인 ‘감사 기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감사 기도의 용어들을 살펴보면, 유다인들이 종교적 식사에서 가장이 빵과 잔을 들고 바치는 찬양 기도를 ‘베라카’라 하고, 사도 교회는 이 기도를 찬양 기도라는 뜻으로 ‘에울로기아’(Eulogia) 또는 감사 기도라는 의미로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라 했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에우카리스티아’를 선호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며, 동방 교회는 ‘봉헌’이라는 의미의 ‘아나포라’(Anaphora)라고 부릅니다. 감사 기도를 이루는 주요 요소는 감사(감사송), 환호(거룩하시도다), 성령 청원(축성과 일치 기원), 성찬 제정과 축성문, 기념(주님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을 기억), 봉헌(흠 없는 제물을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봉헌), 전구(하늘과 땅에 있는 온 교회가 하나 되어 성찬례를 거행하고 있음), 마침 영광송(삼위일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림)입니다. 감사 기도의 핵심은 ‘감사’와 ‘축성’입니다. ‘감사송’에서 사제는 거룩한 백성 전체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고, 구원 업적 전체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고, 축성은 ‘축성 기원 성령 청원’과 ‘성찬 제정과 축성문’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가 봉헌한 예물인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경이로운 신앙의 신비가 이루어집니다. 이 순간에 모두 집중하라고 복사는 종을 칩니다. 「천주교 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과 답은 감사 기도의 의미와 연결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救)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천주를 알아 공경하는 기본은 하느님이 하신 구원 업적을 기억하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고, 자기 영혼을 구(救)하는 첫걸음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사는 것이기 때문에, ‘감사’와 ‘축성’을 이루는 감사 기도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행해야 하는 이치대로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손과 함께 우리의 마음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들어 올리며’(애가 3,41) 감사를 드릴 때, 하느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어 창조 때의 모습, 곧 ‘하느님의 모습’(창세 1,27)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26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불리한 전쟁에서 승리한 기드온

새로운 시대를 창출하려면 일반적인 용기와 태도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 비난 중에도 지지를 받으려면 험난한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길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확고한 신념과 큰 용기를 지녀야 한다. 중국의 맹자는 전국 시대에 살았는데, 각 나라의 왕들은 유능한 인재를 끌어들이려 혈안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학식과 덕망 높은 대학자였던 맹자는 왕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맹자가 도덕 정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맹자는 왕이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백성을 사랑하고, 욕심을 버리고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이 매일 일어나는 마당에 맹자의 이런 주장을 귀담아듣는 왕은 없었다. 어느 날 높은 관리가 와서 진정한 용기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스스로 옳다고 생각되면 1000만 명이 가로막는다 해도 가는 것이 용기라고 가르쳤다. 남의 말에 귀를 닫으라는 말이 아니라 타인과 자신의 의견이 다를 때 깊이 성찰하여 하늘과 자신에게 떳떳하다면 용기를 내서 실천하라는 의미이다. 미디안족의 세력이 이스라엘을 억압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피하여 깊은 산속에다 은신처와 동굴 등 밖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곳들을 마련하였다. 그래도 미디안족과 다른 종족은 올라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지은 소출을 모두 약탈했다. 이렇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하느님께 절규하며 기도하였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에게 나타났다. 주님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말했다.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너는 마치 한 사람을 치듯 미디안족을 칠 것이다.” 기드온은 이게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했다. 집안도 변변치 못하고 어린 자신이 미디안족과 싸움을 할 수 있냐며 반문했다. 살기등등한 미디안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많은 수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소집되었지만, 하느님은 군인 숫자를 줄이라고 명령하셨다. 안 그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전쟁인데 병력 숫자를 줄인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았다. 많은 병력으로 전쟁에서 이기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고, 하느님께서는 이 전쟁을 자신이 이끄신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었다. 시험을 통과한 군인들이 겨우 300명이었다. 군인을 시험하는 방법도 특이했는데 물가로 데려가 개처럼 물을 핥는 이들을 뽑았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합격한 것이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인을 이끌고 전쟁에서 대승하였다. 이스라엘이 몇십 배가 넘는 적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민족의 영웅인 기드온도 말년에 전리품으로 탈취한 금을 가지고 에폿을 만들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 에폿을 섬기며 음란죄에 빠졌다. 말년에 한 번 잘못 판단한 실수로 인해 자신이 쌓은 평생의 명예가 무너져 버렸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5-26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는 없다?

성모 성월을 맞아 많은 분들이 성모님을 기억하며 기도를 바치시리라 생각합니다. 성모님하면 떠오르는 기도도 많은데요. 우리가 가장 가깝게 바치는 기도로는 성모송이 있겠고요. 그리고 묵주기도가 있습니다. 흔히 묵주기도는 로사리오(rosario), 바로 장미꽃다발이라는 의미로 성모님께 장미꽃다발을 봉헌하는 기도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성모상을 유심히 살펴보신 분들이라면 성모상 중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성모님의 모습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 같습니다. 성모님이 자기 자신에게 장미를 선물하고 싶으신 것은 아닐 테고요. 성모님은 왜 묵주를 들고 기도하시는 걸까요? 교회는 그 이유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어 당신의 수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섭리의 계획에 따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이시자 겸손한 종이셨기 때문에 우리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물론 구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다만 성모님은 “영혼들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키고자 온전히 독특한 방법으로 구세주의 활동에 협력”하고 계십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61~62항) 전구는 누군가가 바라는 것이 이뤄지도록 함께 기도해주는 중재기도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기도가 필요할 때 가족이나 주변 신자들에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경을 통해 고백하듯이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천상교회에 있는 성모님이나 성인, 복자들에게도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고 전구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 하고, 부활삼종기도에서도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바친다고 생각하는 기도들이 실은 성모님께 바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바쳐달라고 성모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 중에서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첫 기적이 이뤄지도록 전구하신 성모님께 청하는 전구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를 청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성부의 뜻과 성자의 구속 사업과 성령의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헌신함으로써 교회를 위해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되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967항)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공경함으로써 성모님의 덕행을 본받아 신자들이 죄를 극복하고 성덕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성모님을 향한 이 공경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지만, 성모님을 공경하는 일은 오히려 그 흠숭을 최대한 도와줍니다.(「교회헌장」 66항)

2024-05-19

[알기 쉬운 미사 전례] 예물 준비 성가? 봉헌 노래?

오랫동안 성가대 봉사를 하신 신자분이 “예물 준비 성가라고 해야 하나요? 봉헌 노래라고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은 전례위원회에서 2008년 라틴어 제3표준 개정판의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이 용어에 대해 논의했던 과정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라틴어인 ‘cantus ad offertorium’(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7, 74항)을 어떻게 번역하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미 2009년에 발간된 「한국 천주교 성음악 지침」에서는 ‘예물 준비 성가’라고 표현을 했었기에 이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직역을 하여 ‘봉헌 노래’라고 할 것인지를 논의하면서 다른 언어권에서의 번역을 비교 검토한 결과 직역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2017년 「한국 천주교 성음악 지침」 개정판에는 ‘봉헌 노래’(57항)를 기본으로 하고 옆에 (예물 준비 성가)라고 하여,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지요. 봉헌 노래는 신자들이 예물을 제단으로 가져가는 행렬에 동반하며, 적어도 예물을 제대 위에 차려 놓을 때까지 계속하는데, 분향이 이어질 경우에는 분향을 마칠 때까지 노래를 계속합니다. 이렇게 상을 차리고 고유 음식인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 놓는 예식을 ‘예물 준비’라고 하며, 이는 최후 만찬 때 그리스도께서 당신 손에 드셨던 빵과 포도주와 물을 제대로 가져가는 행위에서 유래했습니다. 초기에는 교우들이 예물을 아무런 기도나 노래 없이 행렬을 지어 제대로 가져갔으나, 4세기 말경부터 행렬이 더욱 길어지고 예물 봉헌의 의미를 드러내는 행렬에 동반한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8세기까지 동방이든 서방이든 누룩 든 일반 빵을 성찬 빵으로 사용했습니다. 9세기에 이르러 서방에서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때 사용하는 누룩 안 든 빵 사용을 도입하였고, 11세기경에는 현재와 같은 작은 제병들이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방은 여전히 누룩 든 빵을 성찬 빵으로 사용합니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는 ‘예물 준비 기도’는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파스카 축제, 학가다에 포함된 축복 기도인 베라카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빵 축복 기도는 빵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땅의 열매이며 인간 노동의 결실임을 기억하고, 이 빵을 주님께 돌려드리면서 생명의 빵인 주님의 몸이 되게 해주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포도주에 물을 섞는 이유는 고대 관습이 그대로 예식에 들어온 것으로, 의미는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인간인 신자 공동체의 결합을 상징합니다. 잔 축복 기도는 포도나무를 가꾸어 얻은 결실인 술을 주님께 돌려드리니 구원의 음료, 곧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신 피가 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우리의 예물로 준비하며 아버지 하느님께 이 빵과 포도주를 마치 우리를 보듯 보아 달라고 청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준비합니다. 예물을 준비한다는 것은 예물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곧 주 예수님께서 감사 기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놓으시듯,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해 봉헌되는 제물처럼 우리 자신을 ‘높이 들어 올리는’ 과정의 시작입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 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19

[말씀묵상] 성령 강림 대축일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부활 제7주간이 끝나고 맞이하는 주일, 곧 주님 부활 대축일 후 49일이 되는 날에 교회는 성령께서 한자리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내려오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현상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심은 귀로 들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사도 2,2) 또한 성령 강림은 눈으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3) 여기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불꽃’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6항 참조) 히브리인들에게 이날은 ‘오순절’ 축제입니다. 그들은 과월절 첫날에서 일곱 주간이 지난 시반 달(5월) 6일에 축제를 지냈는데. 이 오순절 축제는 농경민족이었던 가나안인들이 첫 번째 보릿단을 수확할 때 지냈던 맥추절에서 비롯됐습니다(신명 16,9-13; 레위 23,15-16). 히브리인들은 이날 함께 모여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을 되새기고, 또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을 기념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으로 오순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날이 됐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이 완성됐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31항 참조).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파견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날은 노아와의 계약 또는 시나이산의 계약을 기념하는 오순절 축제일이 아니라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위업이 널리 알려지게 됐으며, 이는 모든 민족들에게 기쁜 소식이 됐습니다.(「강론지침」 56항 참조) 유학시절, 제가 거주하던 교구에서는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이 거행되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보내면서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제대 앞에 엎드려 서품을 받은 이들이 성령을 받고 파견을 받아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맡기신 구원의 사명, 곧 사도들에게,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후임자들에게 위임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특별한 은총을 청하는 바람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전례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점은 흥미롭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여러 사건 중 하나를 전해주는데, 이미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됐던 복음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에 해당합니다.(요한 20,19-31) 요한복음서 저자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저녁에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숨을 내쉬어 ‘성령’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여기에서는 ‘숨을 내쉬다’ 혹은 ‘숨을 불어넣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그리스어 동사 ‘엠퓌사오’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창조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칠십인역)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첫 번째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신 것처럼(지혜 15,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부활, 곧 새로운 창조를 통해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복음’으로 선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주간 첫날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 오순절에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손에 넘겨지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한 14,15-31 참조), 이 약속은 주간 첫날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며 성취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약속이 성취됐음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으로 파견을 받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믿는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요한 6,39-40.57 참조)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기에, 누군가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 또한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복음으로 배정된 두 번째 이유는 성령 강림 사건이 부활 사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 위함입니다.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된 복음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다시 한번 선포됨으로써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완성하는 사건임이 증명됩니다. 50일 전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알렐루야’를 다함께 노래 부르며 시작된 부활축제가 어느덧 끝나갑니다. 그러나 부활의 축제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축제의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축제는 주님께서 당신의 충만함에서 풍성하게 부어주신 성령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축제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총을 청하며 기도합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환호송)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5-19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무적 장사(壯士) 삼손

중학교 시절 단체 관람으로 친구들과 함께 영화 ‘삼손과 들릴라’를 보았다. 솔직히 지금 생각나는 장면은 삼손이 사자를 맨손으로 죽이는 것과 소경이 된 그가 기둥을 무너뜨려 사람들과 함께 죽는 것만 기억난다. 나중에 성경을 읽으면서 들릴라가 필리스티아인들의 계략으로 삼손에게 일부러 접근한 스파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미인계는 일반적으로 예쁜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여 조종하는 작전을 의미한다. 현대의 가장 유명한 미인계 첩보전은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만한 ‘마타 하리’ 사건이다. 네덜란드 출신인 마타 하리는 아름다운 미모와 춤 실력을 이용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연합군 고위 장교들을 유혹해 군사 기밀을 빼돌렸다. 그녀는 스파이 활동이 발각되어 1917년 10월 15일 프랑스 정부에 의해 총살형을 받았다. 마타 하리는 배짱이 좋아 총살을 당할 때도 눈가리개도 거부하고 군인들에게 ‘총을 계속 들고 있는 것도 힘들 테니 어서 쏘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마음에 거슬리는 생활을 하자 필리스티아인들의 지배를 받게 했다. 단 지파의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아기를 낳지 못했다. 하루는 하느님의 천사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 이제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몸을 조심하여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을 일절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 천사는 또 한 가지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아들을 낳으면 그의 머리카락에 면도칼을 대지 말라며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으로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에게 구원할 것이라 전했다. 마노아의 아내는 천사의 말대로 아들을 출산했고 삼손이라 이름을 지었다. 삼손은 엄청난 힘을 가진 장사였다. 삼손은 당나귀의 턱뼈를 들어서 필리스티아인 1000명을 때려죽일 정도로 힘으로는 그를 상대할 수 없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꾀를 내어 미모가 출중한 들릴라를 포섭해 삼손에게 접근했다. 들릴라는 그의 힘이 근원이 머리카락임을 알게 되었다. 들릴라는 삼손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머리카락이 잘린 삼손은 힘이 빠져 필리스티아 군인들에게 잡혀갔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삼손의 눈을 빼어 소경으로 만들고 노예로 부리며 재주를 피우게 하며 복수하고 농락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삼손의 머리카락이 자라났다. 삼손은 축제가 있던 날에 한 소년의 도움을 받아 집의 기둥을 무너뜨려 많은 필리스티아인들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삼손은 큰 힘을 발휘하며 승승장구했다. 삼손이 경각심을 잃고 방심한 것이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 삼손의 괴력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힘이었다. 우리가 가진 탈렌트는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무상의 선물이다. 이것을 망각하고 교만해질 때 오히려 우리의 탈렌트가 오히려 독이 되어 멸망케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5-19

[알기 쉬운 미사 전례] ‘보편지향기도’인가 ‘신자들의 기도’인가?!

신학생 때 읽었던 책 중 요즈음 다시 읽는 책이 있습니다. 루이 에블리의 「어떻게 祈禱할 것인가」인데, 서두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아주 적게 기도하고 보기 드물게 기도하며 또 보잘 것 없이 기도한다. … 무엇보다도 우리는 몹시 분주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생활은 활동과 혼란, 때로는 선행으로 가득 차 있다. … 즉 우리는 일을 정지하고 정신을 집중시키며 기도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 통찰력있는 지적은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예수님은 혼자보다는 이웃과 함께,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합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1티모 2,1-2; 2코린 1,11; 에페 6,18-19 참조). 이러한 모범에 따라 교회는 이미 1세기 말경부터 세상 구원을 위한 특별기도를 전례 중에 바쳤습니다. 95년경에 기록된 클레멘스 교황 저서에는 고통받는 이, 국가 지도자, 평화 등을 위한 여러 청원 기도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강론 후 예비 신자들을 보낸 다음 신자들만 남아서 이 기도를 바쳤는데, 기도 내용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예비 신자들과 모든 이의 구원이 그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전통이 남은 형태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에서 바치는 ‘보편지향기도’인데, 당대의 기도 내용과 형식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사라진 원인은 전례 시간을 줄이려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전례 역사가 테오도로 클라우저는 「서방 전례의 역사」에서 밝힙니다. 현재의 ‘신자들의 기도’와는 달리 기도의 수가 많았고, 각 기도 다음에 주례자의 본기도가 있어서 다소 장황했으며, 반복이 잦아서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축일 미사가 세 시간 이상 지속되는 것을 문제 삼은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개혁을 통해 신자들의 기도를 없앴습니다. 당시 ‘신자들의 기도’에 대한 회중의 응답이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는 현재의 자비송이 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1400여 년 전 사라졌던 ‘신자들의 기도’의 가치를 인정하여 복구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용어인 ‘신자들의 기도’(oratio fidelium)와 예전에 사용하던 ‘공동기도’(oratio communis)를 ‘보편지향기도’(oratio universalis)로 대신하면서, 누가 기도하고, 어떤 지향으로 해야 하는 지를 더욱 분명하게 했습니다. 이 기도는 세 가지 특징, 곧 ‘하느님을 향한 간청’이며, ‘보편적인 선’을 지향하고, ‘교우들의 참여와 그들의 현실 반영’을 특징으로 합니다.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여 세상 구원을 위하여 헌신, 봉사하는 사람임을 이 기도를 통해 실천합니다. 물론 기도한 내용을 살아가려는 실천 의지가 있어야 결실을 볼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하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12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상에도 종류가 있다?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을 맞이하는 성상이 있지요. 바로 성모상입니다. 성모님은 가톨릭신자라면 아마 누구나 사랑하는 성인이 아닐까합니다. 그런데 여러 성모상을 자세히 살핀 분이라면, 성모상의 모습이 대체로 몇 가지 모습으로 나뉜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듯합니다. 성모상의 모습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저 유명한 작품을 따라 만들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많은 성모상이 ‘성모 발현’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 발현이란 성모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 일입니다. 기적의 메달에 새겨져 있기도 하고, 레지오마리애 회합에 사용해서 볼 수 있는 성모상은 1830년 프랑스 파리 뤼드박에서 성 가타리나 라부레 수녀님에게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이 성모상은 머리에는 흰 수건을, 어깨에는 푸른 망토를 두르고 양손을 아래로 펼쳐 보이는 모습인데요. 발로 지구를 감싼 뱀을 밟고 있는 모습이 특징입니다. 혹시 성모상이 동굴에 모셔져 있다면,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나타나신 성모님의 모습이 아닐까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루르드 성모상은 흰 머리 수건과 흰 옷, 푸른 허리띠를 착용하고,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형상입니다. 발 등에는 노란 장미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루르드의 마사비엘르 동굴에서 성 베르나데트 수녀에게 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세 어린 목동에게 발현한 성모님은 전신을 감싸는 흰 베일에 지구 모양을 한 금색 목걸이를 하고 있는 형상입니다. 묵주를 팔에 걸고 두 손을 모은 채 구름 위에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모상은 비오 12세 교황님이 1946년 ‘세계의 여왕’으로 선포해 왕관을 쓴 모습으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또 푸른 망토에 붉은 옷, 검은 허리띠를 두르고 기도하는 인디언 여인 형상의 성모상이라면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이고, 루르드 성모상 같은 복장인데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인 성모상이라면 1933년 벨기에 바뇌에서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할 때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전하셨지요. 물론 성모 발현과 관계없이 예술적으로, 또 성모님에 관한 교리를 담아 성모님을 표현한 성모상들도 다양하고 많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다양한 성모상을 통해 성모님을 기억하는 이유는 성모님을 공경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성화를 증진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어머니로 세우신 천주의 성모 복되신 평생 동정 마리아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특별하고 효성 지극한 공경을 권장”하고 “신자들이 성인들의 모범으로 성장하고 성인들의 전구로 도움을 받는 올바른 경배도 장려” 합니다.(교회법 제1186조) 성모상을 앞에서 그냥 고개만 숙이고 지나치기보다 이 성모상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성모님은 이 성모상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는지 생각하며 기도하면 어떨까요.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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