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메시아의 승리(묵시 12,5-12)

정정호
입력일 2025-07-29 16:24:12 수정일 2025-07-29 16:24:12 발행일 2025-08-03 제 3453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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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이들 증언으로 승리의 기쁨 노래

여인이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사내아이였고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리실 분이다. 그러나 아이의 탄생은 용의 저항과 함께 서술된다. 용은 사내아이를 삼키려 했다. ‘삼키다’로 번역된 ‘카테스티오’(κατεσθίω)는 완전히 먹어 치워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 파멸에 가까운 뜻을 지닌다. 한쪽은 생명의 시작을, 다른 한쪽은 생명의 파괴를 말하고 있는 서사의 대립은 하늘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진다.

사내아이는 하늘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다. 사내아이의 승천을 두고 메시아의 승리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내아이의 운명에 대해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린다는 시편 2장 9절의 내용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내아이를 예수님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프랑스 성서신학자인 A. 프이에(A. Feuillet) 신부는 사내아이의 탄생을 부활의 아침으로, 여인이 겪는 산고의 고통을 예수님의 수난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전통적 해석은 요한복음을 통해서도 강조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여인의 산고와 아이의 출생에 빗대어 말씀하신다.(요한 16,19-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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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카브레라 <묵시록의 여인>. 출처 위키미디어

그럼에도 전통적 해석들은 한 가지 의문을 남긴다. 메시아가 하느님 백성 혹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관련된 존재라면 이 땅 위에서 펼쳐지는 메시아의 활동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 메시아라는 말마디 자체가 땅과 관련된 개념일진대, 메시아인 사내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곧장 하늘의 어좌로 들어 올려지고 만다. 메시아로서 이 지상을 쇠 지팡이로 다스리는 일은 예고되었으나 서술되지 않는다. 지상의 하느님 백성 안에 메시아의 역할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반면, 여인은 광야로 달아난다. 여인은 하느님 백성,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가리키는 형상이다. 하늘로 올라간 메시아와 달리 광야로 달아나는 하느님 백성을 우리는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메시아와 더불어 천상의 기쁨을 누려야 할 것 같은 상식적 바람은 광야라는 공간 앞에 허무하게 무너진다.
 

메시아 삼키려던 용 떨어지며 미카엘 천사와의 전쟁서 패배
속임수 안에서도 굴하지 않고 증언 통해 전지전능함 드러내

요한묵시록, 나아가 요한계 문헌의 전형적 특징은 대립적 공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광야를 두고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는 곳이 광야라고 선언한다. 여인은 천이백육십일 동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처소에서 보살핌을 받는다. 천이백육십일은 기원전 2세기 셀류코스 왕조의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누스가 유다를 박해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상징적 숫자다. 그 박해는 삼 년 반 동안 이어졌고, 삼 년 반의 시간은 마흔두 달로, 혹은 천이백육십일로 달리 표현된다. 

박해의 시간과 광야의 공간은 서로 상응한다. 사실 광야는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노예와 죽음, 억압과 고통의 땅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복지로 걸어가는 필연의 공간이었다. 광야의 공간은 구원의 설렘을 담아낸 공간이었고 하느님을 체험한,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자리였다. 척박한 광야는 하느님의 자비로 가득 차게 되었다.

하느님의 백성, 메시아를 삼키려 했던 용은 어떻게 되었나. 사탄은 떨어졌다. ‘떨어졌다’라는 동사가 9절에 세 번이나 반복된다. 미카엘 천사와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인데, 미카엘은 하느님의 보호로 이스라엘을 지키는 천사로 구약은 소개한다.(다니 10,13.21; 12,1 참조) 욥기에 따르면 사탄 역시 하늘에 오르고 하늘의 어좌에 다가설 수 있었다. 사탄이라도 본디 자리는 하늘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사야의 승천’이라는 묵시문학 작품은 하느님의 어좌 곁에 있던 사탄은 끝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하늘 아래 어느 지역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전한다.(이사야의 승천 7,9 이하 참조) 사탄은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캐릭터로 해석되고 전해졌다. 

요한묵시록 역시 하느님의 보호를 상징하는 미카엘 천사를 등장시켜 전쟁의 형식을 통해 사탄의 성격을 다시금 복기하고 있다. 사탄은 하느님의 자리와 그분의 보호를 막아서고 저항할 수 없다. 사실 용은 사내아이를 삼키려 했으나 삼키지 못했고 그러므로 용은 무력했다. 사내아이는 살아남아 메시아로서의 위용을 떨친다. 용의 저항은 실패했는데, 그 실패의 원인을 요한묵시록은 서술하지 않는다. 다만 사내아이를 삼키고자 하는 ‘원의’만을 언급할 뿐이다.

사탄은 옛날의 뱀이었다. 사탄을 그리스말로 바꾸면 ‘갈라지다’는 뜻을 지닌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이고 우리말로 ‘악마’라 한다. ‘세상을 속이는 것’이 사탄의 일이고 악마의 일이다. 그 옛날 뱀이 그랬다. 하와를 속여 아담을 속이게 했고, 그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를 요원한 것으로 갈라치고 말았다. 옛날의 뱀인 사탄은 그의 부하들과 함께 떨어져 땅이라는 공간을 제 근거지로 차지하고야 만다. 땅은 그리하여 속고 속이는 공간으로, 믿는 이를 고발하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늘과 땅은 그렇게 갈라지고 땅은 불행의 공간이 되어버린다.(묵시 12,12 참조)

그러나, 바로 이러한 땅은 믿는 이의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더불어 증언을 살아가야 할 공간이기도 하다. 메시아가 탄생하고,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는 이유는 이 땅 위에 믿는 이들의 증언이 펄펄 살아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속임수에도 굴하지 않고, 속임수 안에서도 진리와 신앙과 사랑을 증거할 형제들이 여전히 이 땅 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묵시 12,11 참조) 메시아는 믿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승리를 자축하신다.

어쩌면 하느님은 참으로 무력하시다. 우리 믿는 이들의 증언 외에 다른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실 수 없을 만큼 하느님은 무력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참으로 전지전능하시다. 당신의 그 무한한 권능으로 마음껏 호령할 수 있는 세상을,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가냘프고 소박한 증언의 방식으로 끝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실 만큼 전지전능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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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