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버려라!

이주연
입력일 2025-07-29 16:24:13 수정일 2025-07-29 16:24:13 발행일 2025-08-03 제 3453호 17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오직 하느님 바라보며 세속적인 집착에서 자유로워지길
수도숭은 세상의 것 버리는 자…기도로 마음의 순결 얻으며 하느님 나라 도달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9,34) 또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한 마디로 자기 자신과 소유를 다 버려야 당신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버리다’는 ‘갖다’, ‘소유하다’, ‘모으다’의 상대어다. 

흔히 우리는 무언가를 갖고 소유하고 모으고 싶어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욕구와는 반대된다. 이런 면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철저한 포기를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인(Christianos)은 ‘그리스도의 추종자’, ‘그리스도의 제자’를 뜻한다. 따라서 ‘버리라’라는 요구는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한다. 단 부르심에 따라 버리는 방법과 정도에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다.

Second alt text
사막 수도승들은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진은 안토니우스 성인이 생애 마지막을 보냈던 이집트 콜짐 산 위 동굴 옆 십자가. 허성석 신부 제공

예수를 따르는 길

복음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마태 19,27)라고 말한다. 실제 어부였던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그분을 따랐다. 그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삶의 터전과 가족을 떠났다. 어부에게 그물과 배는 생계를 위한 유일한 수단임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다. 이런 철저한 포기는 십자가를 지고 스승을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의 부르심, 특히 수도자나 사제로의 부르심은 일종의 소명이다. 그래서 직업 의식이 아닌 소명 의식이 필요하다. 소명 의식이 없을 때 단순히 한 직종을 선택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성소의 고귀함과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다. 사제직이나 수도 생활은 결코 일신의 영달이나 개인의 이상 실현을 위한 방편도 아니고, 생계를 위한 직종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며 예수를 따라 하느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삶으로의 부르심이다.

사막에서의 포기

일부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실 사막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자신의 고향과 환경, 가족과 친지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기는 고향과 가족에 대한 집착과 온갖 세상 근심·걱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아르세니우스와 같은 귀족 출신의 인물에게는, 화려했던 이전 삶의 조건을 포기하기 위한 영웅적 결단이 필요했다. 사막 수도승들의 포기는 철저하고 근본적이었다. 그들이 버린 것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었다. 예컨대, 부와 권력, 명예, 세상의 가치, 옛 생활 습관(악습), 온갖 인간적 집착과 애착 등이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고)과 의지도 버렸다. 수도승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하느님을 찾는 데 전적으로 투신하기 위해 자신과 세상 쾌락과 재물을 포기해야 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90쪽) 이는 사랑 때문에 사랑에 응답하려는 노력이었다. 이 응답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는 금욕적 노력이었다.

세 단계의 포기

카시아누스는 성경의 권위와 사부들의 전통에 따라 수도승이 실천해야 하는 세 가지 포기를 이야기한다. “첫째 포기는 현실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부와 재물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둘째 포기는 과거에 가졌던 마음과 육신의 습관과 악행과 감정을 배척하는 것이다. 셋째 포기는 우리 마음이 현세적이고 가시적인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직 미래의 것을 바라보며, 볼 수 없는 것을 열망하는 것이다.”(담화집 3,6) 이를 외적 포기, 내적 포기, 관상적 포기라고 한다. 

포기는 수도승을 끊임없는 기도로 이끌어준다. 포기와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마음의 순결을 얻은 수도승은 순수한 기도로 나아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하느님 나라에 도달한다. 따라서 이러한 포기 없이는 끊임없는 기도도, 마음의 순결도, 순수한 기도도, 하느님과의 일치도, 하느님 나라도 불가능하다. 이것이 카시아누스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사막 교부의 가르침이다.

포기하는 자

어느 날 대(大)마카리우스가 우연히 만난 수행자들에게 “내가 어떻게 수도승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그들이 말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수도승이 될 수 없습니다.”(대(大)마카리우스 2) 그래서 카시아누스에 의하면, 수도승은 ‘포기하는 자’(Renuntians)로 불렸다.(규정집 4,1) 다시 말해 수도승은 ‘버리는 자’인 것이다. 독방에 하느님의 것을 가지고 있는 수도승은 이 세상 것을 포기한다. 사실 어떤 원로의 말처럼, 무소유의 감미로움을 맛본 사람은 의복과 물 주전자까지도 거추장스럽다. 그의 정신은 이제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46쪽) 

사막 교부들은 자기 뜻의 포기도 강조한다. 테베의 압바 요셉은 이렇게 말했다. “주님 앞에 값진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아프고 유혹을 당할 경우 감사하게 그것을 맞이하는 것, 어떤 인간적인 것도 중히 여기지 않으며 하느님 현존 안에서 자신의 모든 일을 순수하게 수행하는 것, 끝으로 자기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영적 사부 밑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것으로 정말 고결한 왕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테베의 요셉 1) 압바 모세는 자기 뜻을 포기할 때, 하느님은 그와 화해하시고 그의 기도를 받아들이신다고 말한다.(모세 4) 압바 포이멘도 ‘인간의 의지는 그와 하느님 사이의 황동 벽이자 걸림돌’(포이멘 54)이라고 하면서 자기 뜻의 포기를 강조하고 있다.

버리는 훈련

‘버리는 것’은 예수를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유한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자기 뜻조차 내려놓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기가, 예수의 참된 제자로 살기가 그토록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버리는 것, 내려놓는 것은 연습이 필요한 일종의 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 하지만 세월과 더불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지키려 너무 많은 시간과 힘을 쏟고 있다. 우리가 집착하는 이 세상 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져 갈 것이다. 우리 역시 이 지상 여정을 마칠 때 여지없이 우리가 소유하고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놓을 수밖에 없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하느님 외에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바로 버리는 지혜, 내려놓음의 지혜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Second alt text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