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all in)과 해노비듣

좀 과분한 비유지만, 사도 바오로의 회심과 비슷한 인생전환은 내게도 있었다. 1980년대 한국수묵운동의 일원으로 서울 인사동을 누비고 다니던 먹 냄새 절은 화공이 지금은 한가한 산골에서 세상의 흐름과 비껴나 있으니, 그 먼 간극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한 일종의 해명은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이리라. 그게 지금의 내 좌표를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삼십 대 중반, NGO 단체의 국제회의가 있어서 한 달 정도 유럽에 갔다. 여정 중, 독일의 ‘비스 순례 성당’(바이에른 지방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모셔졌던 눈물 흘리는 목각 예수성상과의 대면은 나를 단숨에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때 마주한 예수님의 눈물이 내 감각증폭기에 윤활유가 되었고, 현재도 멎지 않는 눈물에서 알지 못할 주님의 고통이 내 마음으로 전해져 오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신비로운 천장화와 조각품들, 마음이 흐르는 대로 형상이 된 건축의 유려한 선들을 보며, 내게 주신 미술적 탈렌트로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리라고 다짐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그 일방적 약속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내 안의 예수를 따라나섰던 그 사건은 글자 그대로 올인(all in)이었다. 처자식이 있는 몸이면서도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고민은 무시한 채, 교회라는 광야(?)로 나섰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데, 잘 근무하던 교사직에도 사표를 썼다. 그와 동시에 뛰어든 성당신축 공사장에서 전례미술과 관련된 미술장식을 힘닿는 데까지 작업했다. 하느님이 나를 끝까지 책임져 주시겠지,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볼 수야 없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틈틈이 성체조배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켜켜이 얽힌 인간관계와 그에 맞선 나의 열정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었고, 나를 좌절의 벼랑으로 몰았다. 혼자의 외로움은 참으로 깊었고, 주님과의 동행은 날마다 서러웠다. 마음도 몸도 병들었고 살림살이도 거덜 났다. 그로부터 삼십여 년, 풀잎에 매달렸던 한 방울의 이슬이 구르고 굴러 바다에 이르듯이, 나는 길을 거슬러 산촌에다 터를 잡았다. 선행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고, 고독한 자기정화마저도 단죄하려고 덤비는 세상을 살다 보니, 모났던 고집도 조약돌만큼 닳았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사는 산마을에서는 누군가가 허세를 부리면 당장 들통이 난다. ‘생태계는 확장 없는 생존이 지속되는 곳’이라고 했던 백남준 화백의 말처럼, 원형적 생존본능들이 매 순간 올인하며 서로의 높낮이를 조율하는 곳이다. 이사를 오던 날, 울타리에는 새들이 수시로 다녀갔고, 소나기가 내리자, 제비들이 전깃줄에 어깨를 붙이고 모였다. 속 깃털이 젖지 않게 목을 움츠려 교회의 첨탑 모양처럼 주둥이를 하늘로 향하고 눈을 감는다.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새들을 보라’는 성경의 비유가 바로 연상되었다. 그 자체로 그림이고 노래였다. 모든 걸 하늘에 맡기고, 해가 뜨면 노래하고 비가 오면 듣기를 하는구나! 그래서 작업장의 당호를 ‘해노비듣’으로 지었다. 하루를 닫으며, 애비의 고민을 아는 자식처럼, 하느님의 고민을 넘겨 짚는 아들이고 싶어 그 현판을 올려다본다.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22면

한티성지가 안겨준 선물

성지순례는 반드시 하느님의 이끄심이 작용해야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성지의 홍보대사가 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래 전, 나는 어느 수도회의 제3회 봉헌자가 된 기념으로 대구의 한티성지에 갔다. 삐뚤삐뚤 늘어선 그곳의 무덤들은 순교자들이 치명된 바로 그 자리에다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결과라 했다. 박해를 피해 세상과 단절된 오지를 찾아 옹기종기 주님과 함께 살려고 했으나, 그 소박한 꿈마저도 사냥개 같은 군졸들의 광기에 무참히 동강나고 말았던 현장. 거룩한 영혼들은 모두 부활해 떠나고, 지금은 고요한 평화가 되어 골짜기의 공기를 메우고 있었다. 무덤들 사이로 이어진 십자가의 길 기도처에서는, 순교의 전날, 하느님과 동거하며 평화로웠던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해서 맥없이 주저앉기도 하였다. 순교자들이 꿈꾸었던 지상의 평화를 묵상하고 있는데, 발 아래로 미니어처같이 나지막한 초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의 소유를 최소단위로 축약하고 외부와 단절하며 지냈던 모습에서 오로지 하느님만 바라보며 살겠다는 다짐이 진하게 전해져 왔다. 비록 생존을 위해 내몰린 마지막 도피처였지만, 이것이 바로 지상에서 꿈꾼 마지막 정주의 모습이었음이 분명했다. 하느님의 일을 일상의 중심에 두겠다는 봉헌의 삶, 발 달린 동물이 뿌리박은 식물처럼 살겠다는 각오를 정주 서원이라 하지 않던가? 우리 일행은 한 명씩 십자가의 길 묵상을 자유기도로 바쳤다. 나는 기도할 때만큼은 미리 말마디를 준비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다른 일은 몰라도,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싶은 것이 기도라고 생각되어, 순서가 닥치면 그때 입을 열어 성령이 시키는 대로 말해볼 요량으로 그런다. 마침내 나의 순서가 왔다. “제13처, 십자가에서 내려지심을 묵상합시다. 살아가는 곳이 바로 순교할 곳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려고 주님께서는 저를 이곳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아직도 정주할 거처를 찾지 못한 나그네이오니, 허락하신다면 제게 당신이 인도하시는 곳에서 당신과 결합하는 삶을 살게 해주소서!” 그로부터 한 달쯤 뒤, 일행 중의 한 분이 전화를 했는데, 나의 정주를 위해 줄곧 기도하다가 모종의 계시를 받았다고 그런다. 지금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보자고 그런다. 그러고 난 뒤에 또 기도해 보자고 그런다. 나는 단지 기도만 했을 뿐, 아직 땅을 살 돈을 준비하지는 못했다고 하자, 계약금을 빌려주겠다고 그런다. 나머지는 하느님의 일이 되도록 기도만 하면 된다고 그런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세상에…. 아무튼 그렇게 얼기설기 교묘히 이가 맞물리면서 지금의 작업장 ‘해노비듣’이 지어지게 되었다. 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면 그건 분명 선물이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꿈을 꾼다. 나에게 일어난 그 기적을 그림으로 엮어, 몇 년 동안 가톨릭 뉴스 사이트에다 ‘하삼두의 정주일기’를 연재했다. 한티성지는 내게 삼랑진의 작업장 ‘해노비듣’을 선물로 주었다. ‘해뜨면 노래하고 비오면 듣지요’를 압축한 ‘해노비듣’을 당호로 짓고, 선물을 준비하듯 자연채집을 하는 중이다.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22면

시간의 최소단위

들숨날숨의 길이와 시간의 마디에 대해서 나는 좀 별다른 경험을 하였다. 중학교 시절 나는 땅에 매몰되었다가 사람들에 의해 발굴된 적이 있는데, 워낙 별스런 사건이라서 사실인지 오해도 받았던 이야기다. 그 해는 유난히 가물었고, 천수답에 가까운 섬마을의 전답은 목이 타고 있었다. 임시휴교로 학교공부 대신 물대기 작업을 도우라는 지침이 있어서 우리집 식구들은 웅덩이의 수로 연장공사를 했다. 모래땅을 깊이 파내려 가면 지하수의 맥을 만날 수 있고, 그 물을 웅덩이에까지 연장하는 작업을 했는데, 지표에서 깊이 3미터쯤에서 마침내 내가 수맥을 찾았고, 기쁜 나머지 곡괭이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 그런데, 땅을 울린 소리의 공명이 좁고 깊던 좌우의 벽을 흔들어 순식간에 나를 덮어 버렸던 것이다. 땅속에서 느꼈던 흙의 움직임은 지금도 생생한데, 목과 팔다리 사이의 틈새를 공백 없이 채우며 압력이 증가하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속절없이 화석이 되어가고 있던 중에도 숨을 쉬면 살 수 있을 줄 알고 호흡을 시도해 보았으나, 모래땅인데도 마치 비닐을 막아둔 것처럼 공기는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손으로 파헤쳐 흙 속에서 얼굴이 드러나기까지는 5분가량이었다고 했는데, 들숨과 날숨이 얼마나 은혜로운 작용인가를 실감했다. 중년이 되어, 수년 동안 달고 살던 담배를 끊을 때도 불현듯 되살아난 이 기억이 수백 볼트의 전류처럼 한방에 나를 KO시켰다. 이 은혜로운 공기를 연기에 버무려 몸속에 불어 넣다니… 임종을 앞둔 부친의 병상을 지킬 때도 그랬다. 여러 개의 호스가 연결된 몸은 힘들게 이승의 시간을 연장하고 있었는데, 온몸의 근육을 다 움직여도 끌어당기기가 어려운 들숨, 그리고는 이내 비탈을 굴러떨어지는 날숨, 내쉰 숨이 다시 들숨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들이쉰 숨이 다시 날숨으로 바뀔 수 있을지, 속절없이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어둠 속의 그 숨소리는 마치 갯벌을 기어가는 집게고동의 발자국처럼 내 마음에 굵은 금을 그으며 저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풍경화 같았다. 그렇게 ‘숨 한 번 쉬는 동안의 시간’의 의미를 확인하였다. 100미터 달리기의 세계기록 보유자인 우사인 볼트는 출발해서 결승점까지 숨을 쉬지 않는다고 들었다. 온몸을 긴장시켜 폭발적 에너지를 방출해야 하는 9초 남짓한 시간 동안, 그야말로 무산소 운동을 한다는 것인데, 제주도의 해녀들 중에 상군급의 베테랑들도 한 번 몰아쉰 숨으로 5분 정도를 물밑에서 지낼 수 있단다. 암튼, 들숨과 날숨의 간극은 살아 있는 생체가 느끼는 최소단위의 시간이고, 자신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주장은 이 정도로 해두자. 복잡한 일들 속에서 사는 우리로서는 호흡을 가다듬는 일이 쉬운 과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모든 가치와 고정관념을 새로운 기준으로 정기점검하는 때가 신앙인에게 주어진 부활 시기다. 시간의 단위를 새롭게 재설정하고 가시영역에서만 바라보고 평가하던 것들을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것들과 연결지어 보자. 들숨과 날숨으로 시간의 단위를 나누고, 조심조심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상의 징검다리를 건너보자. 혹시 하느님께서 나에게만 설계해 두신 초월적 생명장치는 어떤 것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며.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6면

최고와 최선

화가로 활동하면서도 나는 성당공사의 현장 감독을 다섯 번이나 했다. 부산교구와 마산교구의 주보 표지화를 그리기 위해 두 교구 내 180곳 정도의 성당을 3년에 걸쳐 답사하고, 건축적 특징을 나름대로 분석했던 경험을 공유하고자 했던 때문이다. 내가 난데없이 그런 일을 한다고 소문이 나니, 화단의 동료들은 내가 그림만으로는 먹고 살기 어려운가 보다 하고 수군거렸다. 미켈란젤로와 가우디는 존경하면서도, 내가 건축현장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 했던 것이다. 또한, 짬짬이 썼던 시가 문예지에 실렸을 때는, 제발 좀 한 우물만 파라는 충고를 숨기지 않았다. 나를 위한 충고라고 했지만, 아마도 그건 그들이 길든 사고의 틀에 나를 가두어 두려는 것이었다. 암튼 영역에 얽매이지 않는 나의 활동 변화는 나 자신의 표현 욕구가 빚은 뜨거움이었다. 3년 전, 부산교구의 어느 성당 리모델링 공사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울의 유명 건축가가 설계했던 현대식 성전은 내부공간의 층고가 아주 높았는데, 바닥에서 15미터나 되는 높이의 천장구조물이 낡아서 보수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간 많은 공사업자들이 현장조사를 해보고는 다들 손을 내젓고 가버렸기에, 어쩌다 내게까지 연락이 닿은 것이다. 주임 신부님의 고민을 아는 나는 결국 그 일을 끌어안았고, 적은 비용 때문에 기존의 시방서와는 다른 온갖 돌파구를 모색해야 했다. 사목위원회와 건축위원들에게 대응 방안을 설명하고, 시공 절차를 이해시키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런 난공사를 두고, 기존의 검증된 방식 외에는 믿을 수가 없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결정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는 설령 공사가 진행되지 못하더라도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지나간 역사가 또다시 재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돌아서면 끝났겠지만, 성령께서 내 영혼을 깨우셨을까, 틀에 갇힌 그들의 고정관념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 성당이 지어질 때의 신종 공법을 채택할 때는 어떻게 수용했습니까?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언제나 처음이라는 관문을 거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교할 여러 데이터를 검토했음에도 끝내 반대의 입장이라면,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예술가에게 새로움에 대한 가능성을 묶어둔다면, 그 어떤 재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에 반대의 의견을 말할 때는, 다른 대안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로 인해 잠시 회의장은 조용해졌지만, 처음부터 반대를 작심한 사람의 고집은 끝내 변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이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형제님은 혹시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 보셨습니까? 살아보지 않은 시간이 두려워서 어떻게 오늘 현관을 나오셨습니까?” 그러고 난 뒤 회의는 끝났고, 다음날 나는 그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날에 일갈한 그 말은 아마도 여태껏 내가 뱉은 말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것이었다는 생각이다. 카이사르의 것이냐, 하느님의 것이냐의 문제를 두고, 신앙인은 양자택일의 기로를 만난다. ‘최고’와 ‘최선’은 분명히 다르다. 최고는 절대가치이고 최선은 상대가치이다. 세상은 최고를 지향하고 하느님은 최선을 바라신다. 신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유한한 인간이 이루어 낸 최고라는 것이 얼마나 초라한 것이며, 삶의 자리와 결합된 최선의 활동은 얼마나 아름다운 행적이 되는가!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22면

내일이나 모레쯤

‘내일이나 모레쯤’이라고 말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늘 지금 당장 뭔가를 처리해 가며 자벌레처럼 시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우리들에게, 비록 일순고식(一瞬姑息)의 쉼표일지라도 ‘내일이나 모레’라는 평지 길이 있다. 터널을 지나면 어떤 풍경이 나올지 모르는 첫 여행길처럼 내일이나 모레면 대개 하늘은 개이고 바람도 따뜻했더랬다. 내일이나 모레가 될 때까지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걸어도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내일이나 모레가 선물이 될 때까지 자기자신을 뒤적이며 희망의 씨앗을 확인하게 되니 참 좋았다. 지금 내 삶의 자리를 차분하게 해주는 말, “내일이나 모레쯤 우리 다시….” 기쁨주일이다. 다들 잠시 쉬어가자고 그런다. 매일 놀기만 하는 백수도 노는 것 멈추고 하루쯤 쉬어보자며 우스개를 한다.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는 느려서 문제가 되는 경우보다 빨라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의 의지보다 신의 섭리가 끝내 이긴다는 말은 애국가의 후렴처럼 입에 잘 붙여 두어야 한다. 시간의 선물을 놓치지 않으려면 육식동물 같던 번득임을 내려놓고, 한가한 초원의 양들처럼 내일이나 모레쯤으로 시간을 건너짚는 여백을 만들어야 한다. 그 상상만으로도 옆 사람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과의 오랜 인연 때문에 나는 자주 수도원 전례에 참례한다. 신자들의 좌석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수도승들은 긴 복도에 늘어서서 전례 준비의 스타치오(Statio)를 한다. 스타치오에 대한 유래와 번역이 여럿 있지만, 내게 각인된 말은 ‘수렴’이다. 여기저기로 분산된 것들이 한 곳으로 집중된다는 의미를 담은 수렴!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말의 근원을 찾아가면, ‘들으라 아들아’라는 규칙서의 첫 문장도 만나게 된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공동체의 일상을 또 다른 모멘트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 xy축의 평면을 z축으로 확장하여 입체가 되게 하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앞과 뒤뿐만 아니라 위아래로 층을 쌓는 자기관조를 통해, ‘지금 여기’의 거룩함에 이르게 되고, 그 숨죽인 고요의 문을 열고 새로운 풍경 속으로 흡수되는 것이리라 상상해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도 일상의 스타치오를 한다. 오늘이 며칠이며 어제는 어땠고, 어제 계획한 오늘의 일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시간의 끈 잇기를 한다. 나의 좌표가 확인되기까지 5분 정도를 보낸다. 그런 습관 덕분에 누군가가 내게 무슨 제안을 해 올 때면, ‘고맙습니다. 집에 가서 우리 아부지한테 물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시간을 놓쳐 기회를 날려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내게 허락된 것은 어차피 나의 것이 된다는 믿음인 것이다. 일상의 소중함, 순발력보다는 항구함이 참인생인 것을 알기까지는 누구에게나 최소 60년 정도의 세월은 필요하지 않을까? ‘내일이나 모레’는 너무 먼 시간이 되어버린 오늘을 산다. 번득이는 인간의 지혜와 숨가쁜 문명의 변화가 인류에게 과연 무엇을 안겼는가. 더군다나, 전리품을 챙기듯, 정의를 가장한 약탈을 일삼는 국내외 정세를 보면, ‘아, 여기가 바로 소돔 땅이구나!’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제발 먼 세월도 말고, 내일이나 모레쯤까지만이라도.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2면

무어라 부를 수 없는…

기도할 때 부르는 하느님의 이름은 그 호칭에서 그가 놓여 있는 삶의 자리가 드러난다. 사랑이신 하느님, 치유의 하느님, 인도자이신 아버지 등등, 상처받아 외롭다거나, 병고에 시달리거나, 참회의 길에서 자비를 구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고, 굽어살펴 달라는 일종의 구조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하느님의 보살핌이 몸으로 느껴지지 않고, 때론 교회공동체로부터 상처를 받기까지 하는 경우에 겪게 되는 좌절감은 하느님과 1;1의 관계맺음이 아니고는 치유되기 어렵다고 본다. 나의 하느님, 나만의 하느님을 찾아 영적 순례에 나섰던 지난날이 생각난다. 주일미사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 마음의 평화, 신학자들이 구사하는 사변적 용어들로부터 소외된 신심을 어떻게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교리신학원에 수강등록을 하였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신 삶의 자리가 있고, 각자에게 필요한 방식대로 은총을 베푸신다는 막연한 이야기로는 위로를 얻지 못하였기에 첫 수업에 대한 기대감은 컸었고, 드디어 강사 신부님께서 시작기도를 하셨다. “무어라 부를 수 없는 창조주여, 당신은 빛과 진리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의 시작이라 불리오니, 저에게 오시어 제 영혼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당신은 어린아이에게까지 말씀의 능력을 주시니, 제 입이 당신을 흠숭하는 찬미로 가득하게 하소서. 제게 예리한 기억력과 섬세한 해석의 능력을 주소서. 저의 시작을 질서 지워주시고, 그 진보를 이끌어 주시며, 그 마침도 당신으로 채워 주소서. 아멘!” ‘무어라 부를 수 없는 창조주!’ 아, 세상에 이런 기도문도 있었구나! 무어라 부를 수 없음으로 해서 모든 것이 되는 이름이 있었구나!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기도문의 원전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공부하며’라 했다. 진위 여부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대 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나처럼 그렇게 먼 곳에서 간절히 서 계셨던 증거라고 생각하니 나도 용기가 솟았다. ‘야훼’로 불리기도 ‘엘로힘’으로 불리기도 했던 하느님 호칭의 역사도 알게 되고, ‘이거다’하고 정의하고 나면, 이미 그 외연의 울타리 바깥에 서 있는 하느님이라서 수많은 학자들이 시도했다는 ‘신 존재 증명’이라는 학설도 흥미로웠다. ‘무어라 부를 수 없는’이라며 하느님의 오지랖을 파고들면 얼마나 많은 위로가 흘러 들어오게 되는지 느끼게 되어, 그 당시에 속기로 받아 적었던 기도문을 나는 지금도 종종 지인들에게 건넨다. 물론 나도, 하얀 화선지 위에 물을 뿌리듯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그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다. 비워진 그릇, 맡겨진 의지, 이끄심대로 따르는 순명을 위해 나는 얼마나 열려 있는가를 살핀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겠다는 예술현장에서도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단절이 도처에 만연하다.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이 자진해서 반납한 에고(ego)들은 신에 의해 재생되어 더 큰 선물로 되돌아올 것으로 믿는다. 언제가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날이면 바뀌게 될 호칭이지만, 지금의 내게는 더없이 따뜻한 포옹이 되어주는 셀프서비스, ‘무어라 부를 수 없는 나의 하느님!’ 조용히 불러보면, 뭐랄까 욕조에 몸을 담그듯 스르르 눈이 감기는 평화가 감겨져 온다.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2면

‘깔’을 보는 즐거움

도깨비 풀의 씨앗에 바늘을 달아주기까지, 피조물이 졸랐을 하소연과 창조주가 조아렸을 사랑을 상상했다. 오른손과 왼손을 마주 들고, 그림자놀이를 한번 해 볼까? “이런 천덕꾸러기로 빚어 두시면 어떻게 살란 말이에요?” “네가 어때서? 너무 다 가지려고 하지 마라!” “그래도 온갖 잘난 것들이 설칠 텐데, 그 속에서 살아갈 일이 막막하거든요.” “음~ 알겠다. 너의 씨앗에다 바늘을 달아줄게. 널 깔보는 것들이 있으면 어디든 달라붙어서 그들이 가는 곳까지 가서 함께 살아 보아라.” 껄끄러운 그놈의 가시 바늘을 뜯어내어 아무데나 던지다 보니, 신작로 옆 풀숲이 온통 도깨비풀 천지가 된 이유는 그래서 그렇게 된 게 틀림없다. 어쩌다 집에까지 붙어 간 풀씨는 애지중지 기르는 화분의 귀퉁이에서도 싹을 틔웠으니, 이 귀찮은 도깨비 풀이 번창한 것은 순전히 하느님의 편애가 빚은 실수 때문이야. 하하하. 성깔, 빛깔, 때깔, 맛깔처럼 ‘깔’이라는 글자가 붙은 말들이 있다. 창조론을 지나 진화론의 페이지에 실린 단어이다. 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는 이 말마디는 서로의 관계나 비교를 드러낼 때 효과를 발한다. “저 성깔을 건드리면 골치 아파!”처럼 그의 특징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때 풍겨 나오는 아우라 같은 것이 바로 ‘깔’이다. 예술가들은 이 ‘깔’을 수집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데, 문자언어가 아닌 조형언어로 의사를 전달하려면 사물의 특징을 분명히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그것답게 하는 그것만의 특징’이 그들의 그물에 포집되고, 증폭과 과장의 단계를 거치며 재탄생되어 전시장에 진열되는 것. 이것이 예술품이다. 그러고 보면, 작품의 매력도 어쩌면 도깨비 풀씨의 바늘과 같아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예술가는 도무지 친절하지가 않다. 친절하면 오히려 매력이 없고 신비롭지도 않다고 어떤 평론가가 내게 말해주었다. 그 불친절 속에서 독자의 호기심과 미의식이 성장하게 된다나? 충분히 수긍이 되는 말이다. 암튼, ‘깔’을 대하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거북한 일이기도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호불호가 많은 주목거리이고, 독을 품은 보약이다. ‘깔’을 채집하러 마실돌이를 나선다. 풀잎들은 하나같이 태양의 행로를 따라 목을 빼고, 시냇물의 송사리는 흐름을 거스르고, 언덕 위의 깃발은 뒤로 펄럭인다. 이 단순한 섭리로도 얼마나 많은 피조물이 헤매던 길을 찾게 되는가? 내 그릇이 작아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가! 작업장의 대나무 울타리도 바람에 서걱대며, “뭐하노? 지금 뭐하노?” 그러다가, 돌아와 작업대에 서면, “그거다! 맞다 그거다!”하고 응원가로 바뀐다. 도시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자연은 신이 만들었다. 도시는 자연에게 경계의 대상이어도, 자연은 도시에게 커다란 선물이다. 그래서 자연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예술행위는 누군가의 처음을 향한 질서회복운동이며 신에 대한 순명이다. 아니, 예술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작품의 가격이 얼마라는 둥, 누가 어느 경매에서 어떤 작품을 사들였다는 둥, 마치 허망한 불꽃놀이 같은 그 가식의 너머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깔의 줏대로 바로 서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하느님의 영과 함께 찬찬히 바라볼 일이다.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2면

안배의 황금비율 7:1

사순의 고갯길, 시련과 고통의 역설적 은혜로움을 놓치지 않으려고 감각을 곤두세운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시작하는 사순 시기의 독서들은 꾸중으로 들리다가도 고마운 마음이 우러나오게 되는 아내의 다그침 같기도 하다. 마음을 다독이는 따뜻함이 묻어 있으니, 겉은 바삭해도 속은 촉촉한 겉바속촉의 감칠맛이라고나 할까. 나는 종종 월요일 새벽미사에서 독서 봉사를 한다. 언제 자리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맏물 봉헌에 대한 경외심이 신앙생활의 중심에 있다. 새벽미사에 오신 분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게 목소리의 피치를 가다듬고, 끊어 읽기의 마디 간격을 조율하고, 코에 걸친 안경이 흘러내리지 않게 나사도 조이고, 거울을 보며 입성도 살펴보고…. 멀지 않은 과거의 어느날, 여느 때처럼 독서 내용을 대여섯 번씩 반복해서 읽다가, 불현듯 말씀의 내용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내가 읽게 된 제1독서는 ‘창세기 노아의 방주’ 부분이었는데,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지시하신 말씀이었다. “정결한 짐승은 모두 수놈과 암놈으로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수놈과 암놈으로 한 쌍씩 데려가거라. 하늘의 새들도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데리고 가서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남게 하여라.”(창세 7,2-3) 노아의 배에 올라 살아남게 된 여덟 쌍의 목숨들 중에 왜 부정한 것이 한 쌍 뽑힌 것일까? 세상의 혼탁함을 야기한 주범이었을 이 부정한 것들의 존재가치를 하느님은 어떤 관점에서 여전히 인정하시고, 새 판을 짜는 세상에다 동참시키려 하셨는가 말이다.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구글에다 ‘7:1의 비율’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해 보았다. 어라? 이건 또 뭐지? 태초에 우주가 생성되던 빅뱅 때에는 양자와 중성자의 비율이 1:1이었다가, 점차 안정기에 들면서 그 비율이 7:1로 바뀌었다는 게 아닌가! 그것도 검색 페이지의 맨 윗줄에. 그 옛날 창세기의 저자가 첨단 천문학적 지식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저 신기하고, 또 신기할 따름이었다. ‘칠대일, 칠대일, 왜 그랬을까? 7:1….’ 며칠을 입에 달고 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아마도….’ 그 ‘아마도’의 물음표를 뒤집어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살아온 인생의 반고비도 무한반복으로 반추해 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릎을 쳤다. ‘맞다! 1의 역할이 7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구나!’ 미꾸라지를 키우는 도크에 천적인 메기를 풀어두면 미꾸라지가 살아남기 위해 민첩해지고 튼튼해진단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될 빌미를 주었다는 억측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정화 노력을 통해 창조주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게도 일곱 번쯤은 내 뜻에 맞았고, 한 번쯤은 참아내야 하는 시련이 왔던 거구나! 5:5는 균형이 아니고 대립이며 분열이었지! 그러고 보니 사순 시기의 날 수도 1년의 1/8인 7:1이 되는구나! 그러니, 지금의 시련도 1의 시간, 곧 7이 다가올 때를 기다리면 되는 거구나! 이 엄청난 유레카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단초였고, 내 몸에 내장된 소중한 유전자를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말씀을 살아낸다는 것은 어떤 풍경화를 그려내는지 상상하게 하여, 마음속에 따뜻하고 동그란 여백을 지어주었다. 알게 모르게 쌓여온 매일미사의 은혜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오래오래 생각하게 되었고.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22면

용돈의 가르침

신부님, 평안히 계시지요? 은퇴 후 잘 지내신다는 안부는 건너 건너 듣고 있지만 넘쳐 나는 그 열정은 어떻게 다스리고 계신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제가 알고 있는 많은 신부님 중에 가장 뜨거운 분이셨습니다. 점잖으시면서 발휘하시는 어마어마한 유머 감각도 그립고요. 일 년에 몇 번 성당에 행사 갈 때마다 신부님 생각이 먼저 떠 오르곤 한답니다. 20여 년 전, 부평1동본당 주임 신부님으로 계셨을 때 함께 했던 가을 음악회의 추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늘 기분이 좋아집니다. 얼마 전 가수 남궁옥분님도 근사한 신부님, 참 감사한 신부님으로 기억난다고 신부님의 안부를 궁금해했습니다. 예산은 적지만 우리 본당 신자들과 멋진 가을 음악회를 하고 싶으니 스테파노가 힘 좀 써보라고 말씀하셨죠. 충분치 않은 예산이었지만 신부님의 기에 눌려 한소리 못하고 준비하게 되었지요. 다행히도 그날 초대된 가수 남궁옥분님과 유익종님도 흔쾌히 수락해 주신 덕분에 성황리에 잘 마쳤지요. 앉아서, 서서 빈틈없이 성전을 꽉 채운 형제자매님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웃음으로 만든 추억이 지금도 맴맴 돌고 있습니다. 농담조차도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묘한 매력을 지니셨지요. 갑자기 성가 가수들은 많이 왔다 갔으니까, 이번엔 대중 가수들로 가을 음악회를 하고 싶다는 말씀에 다소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대중가요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신부님이 좋아하시는 유익종님은 꼭 섭외해야 한다는 말씀에 취향도 알게 되었지요. 제가 웃겨도 잘 웃지도 않으시면서 다른 분들에겐 무지하게 웃기니 섭외하면 후회 없을 거라며 여기저기 매니저 역할까지 해 주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부님을 생각하면 꼭 따라붙는 단어가 있습니다. ‘감동’이란 단어입니다. 가을 음악회가 끝나고 그다음 주일에 저를 호출하셨죠. 혹시 음악회 때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어 걱정 속에 달려갔는데, 그 걱정을 오히려 감동으로 반전을 주신 신부님. 정말 열의를 다해 무대를 꾸며주신 가수분들에게 본당에서 준비한 예산이 민망해서 잠을 못 잤다 하시며 건네주신 봉투 3개. 잘은 몰라도 그 당시 신부님 한 달 월급을 봉투 하나씩 담으신 3개월분 월급을 꼭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따로 챙겨 주셨지요. 이건 개런티가 아니고 신부가 주는 용돈이라고 안 받으면 혼난다고 아주 강경하셨죠. 두 가수분도 신부님에게 받는 용돈은 생전 처음이라며 당황해하면서도 기뻐했습니다. 저는 더더욱 이게 맞는 건가 싶어 어리둥절했지요. (그 뒤로 다른 신부님에게 받은 적은 아직 없습니다.) 아마도 이 용돈의 추억은 제가 100번도 넘게 자랑하고 다녔을 겁니다. 성당 밖에서요. 왜냐하면 제가 성당 행사에 갔을 때 이 신기하고 기쁜 추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 본당 신부님이 부담 느끼실까 봐 그때마다 꾹꾹 눌렀답니다. 지금이야 말씀드립니다. 그때 주신 용돈, 제 주머니에 없습니다. 나만의 용돈이 아닌 공동체가 같이 쓰는 용돈이라는 가르침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어딘가에서 유용하게 역할을 다하고 있을 겁니다. 그때 이후로 신부님이 주신 용돈의 가르침 성실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안부를 드린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건강하시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윤화 베드로 신부님.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22면

가위바위보를 아십니까

‘가위바위보’를 처음 한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요? 일단 우리나라는 아닙니다. 가위바위보의 원조는 중국입니다. 중국의 도교 사상에서 비롯되어 장사하는 상인들 사이에서 숫자놀이 게임인 ‘수권’으로 발전, 그것이 나가사키 무역항을 통해서 일본으로 수입됐다고 합니다. ‘잔켄폰’이라는 이름으로 사무라이부터 노동자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 때 들어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가위! 바위! 보!” 여러분은 주로 어떨 때 가위바위보를 하십니까? 짜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 순서를 정하거나 편을 나눌 때? 승부가 지지부진하거나 팽팽할 때? 이기면 기분이 참 좋지요. 졌다고 해도 못 견디게 기분이 나쁘진 않습니다. 설령 졌다고 해서 크게 화를 내거나 고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몇 년 전, 모 광역시 관광과 직원들과 도시 관광 유치에 관한 아이디어로 가위바위보 대회를 하자고 했더니 팀장이란 분이 대뜸 “그거 유치한 거잖아요”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일어나 사무실을 나온 기억이 아직도 지워지질 않습니다. 가위바위보란 게임이 유치하다면 승패에 대한 과정이나 이기는 방법에 쉽게 통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기는, 부동의 승자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렵습니다. 가위바위보는 게임 방법이나 규칙이 간단합니다. (게임 방법이 다 동일하지만, 운영 방식이 조금씩 다른 나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기고 싶다고 이기고, 지고 싶다고 질 수 없습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히 운에만 의존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간단한 게임이지만, 그 뒤에 숨겨진 깊은 전략과 고도의 심리전이 뒷받침돼야 하는 흥미진진한 게임입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서양에서는 주로 ‘동전 던지기’를 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가위바위보로 합니다. 앞이냐 뒤냐, 그 단면만으로 결정하는 동전은 ‘독백’이며 결정 자체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하지만 상대의 표정을 살피며 손과 만났을 때 의미가 생기는 가위바위보는 ‘관계’이며 ‘대화’입니다. 요즘처럼 대립의 세상이라면 가위바위보 한 판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구식 게임인 이항 대립의 동전 던지기만 하고 있는가? 앞면 아니면 뒷면. 오로지 흑백 논리로만 치닫고 있는 게 아닌가. ‘도 아니면 모’ 식의 중간 결과 없이 성공 아니면 실패, 전부 아니면 전무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위바위보는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줍니다. 주먹이 아니면 보자기의 뻔한 싸움에는 양자택일의 대립밖에는 생기지 않습니다. 서로의 힘자랑만으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위바위보의 가장 큰 매력은 삼자 견제의 철학이 있다는 겁니다. 가위는 바위에게 지고 바위는 보자기에 지고 보자기는 다시 가위에게 지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게임입니다. 아무리 부드러운 ‘보자기’가 단단한 ‘바위’를 이기는 가위바위보의 ‘덕’(德)이 있다지만, 이 두 개만으로는 가위바위보를 할 수 없습니다. 바위와 보 사이에 절대 승자를 없게 만드는 반쯤 열리고 반쯤 닫혀 있는 ‘가위’가 있습니다. 가위바위보는 세 개로 하는 겁니다. 서로의 주장이 팽팽해서 결론 내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가위바위보 한 판 합시다.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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