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천심, ‘명동밥집’

세례명을 지어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가끔 뵙고 있다. 그 자리에는 가까이 지내시는 신부님과 처남 신부님이 동석하고는 했다. 신앙생활에서 마주치는 고민거리를 여쭙기도 했고, 사제의 일상에서 나오는 소탈한 이야기들로 언제나 따듯한 저녁이 되고는 했다. 어쩌면 사제와 평신도라는 차이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후배들의 다정한 해후 같은 것이어서 실로 감사할 따름이다. 그 자리에서 어느 날 ‘명동밥집’을 알게 되었다. 한 분은 책임을 맡고 있고, 한 분은 변복한 암행어사처럼 숨은 봉사자였다. ‘노숙인과 우리는 종이 한 장 차이도 나지 않습니다’, ‘봉사가 아니라 위안을 얻는 겁니다.’ 그날 그렇게, 한 달에 두 번 ‘밥집’에 가는 일은 시작되었다. 밥집에 와서 밥을 먹지 않는다 밥은 밥솥에서 밥그릇으로 옮겨가고 닭고기가 들어간 카레에 계란 프라이 미역국에 김치까지 1식 1국 3찬 밥은 바람결 따라 펄럭이는 천막을 따라 수만의 바람이 되어 바람으로 흘러간다 카레가 묻은 밥그릇과 미역이 붙은 국그릇과 고춧가루 새빨간 스테인리스 종지가 끝도 없이 쉬지 않고 몰려드는 주방 한 켠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시편 8,4) 바람이 모여 바람이 인다 수만의 바람이 인다 발바닥이 아려오는 늦은 오후 밥집에 와서 밥을 먹는다 - 졸시 <수만의 바람 - 명동밥집 1> 전문 처음에는 식판조가 되어 주방에서 배식대로 음식 나르는 일을 했고, 가끔씩 설거지를 하고 테이블을 닦았다. 묵묵히 음식을 담는 배식조와 그것을 나르는 홀서빙의 모습을 보노라면, 수도원의 대침묵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밥집 손님을 부르는 호명 소리, 식판 부딪는 소리, 발걸음 소리 사이로 유난히 바람 소리가 크게 들리는 풍경이었다. 언제나 어느 때나 밥심이 천심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헐벗은 몸으로 밥집을 찾는 노숙인들이라고 하여 영혼까지 황폐화된 건 아니다. 그들도 우리도 밥심으로 살고, 그것을 하느님 마음으로 알고 배가 부르는 사람이라는 걸 ‘한 달에 두 번’ 깨달으며 지내고 있다. 글 _ 김재홍 요한 사도(시인·문학평론가, 가톨릭대 초빙교수)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2면

아무것도 모른 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명동 거리만 아니라 종로와 광화문까지 한산하기만 한 때였다.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것처럼 온 나라가 입을 틀어막고 쉬쉬하며 살던 때였다. 그만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일상에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교중 미사에 참례하고 가족들과 점심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한 선배의 전화가 왔다.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이하 한국평단협)에서 발간하는 소식지를 책임지고 편집할 사람을 찾는다는 얘기였다. 학생 때부터 교지를 편집한다든가, 시인으로서 시집을 간행한 바 있고, 회사에서 홍보지를 만드는 데 참여한 적도 있어서 편집장의 역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경험이 있었으나, 한국평단협에 대해서는 사실 아무것도 몰랐다. 쉽게 화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침 학위 논문을 쓰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작되었다. 모바일 시대의 인쇄 매체라는 점을 고려하고, 열독률을 높일 방안을 찾아 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그리하여 들고 다니기 좋도록 판형을 작게 바꾸고, 두께도 줄이기로 했다. 그러자니 디자인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야 하고, 그에 따라 원고 분량과 내용도 바뀌어야 했다. 내용과 형식을 모두 변경하는 만큼 몇 달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편집위원들과 대면 회의를 할 수 없었던 점이다. 여덟 권을 발간하는 동안 전체 회의를 한 번도 갖지 못했다. 두세 명씩 만나 겨우 점심을 드는 정도에 그쳤다. 2년 동안 오직 SNS를 통해 아이템을 모으고, 필자를 선정하고, 원고 청탁서를 보냈다. 그럼에도 열심히 봉사해 준 편집위원들과 옥고를 보내준 여러 필자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그렇게 편집장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레 한국평단협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이 입국한 뒤 ‘명도회’가 결성되었다는 기록 외에도 1949년 전국 평협 창립총회가 있었고, 1968년에는 공식적으로 주교회의의 승인을 거쳐 ‘한국가톨릭 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 창립총회가 열린 것도 알게 되었다. 또 그해에 ‘평신도의 날’이 제정돼 올해로 58주년이 되는 것도 알았다. 류홍렬 라우렌시오 초대 회장을 비롯해 신앙심 깊은 역대 회장들의 면면도 알게 되었고, 평신도를 ‘사도직’이라 부르는 의미도 어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자꾸 부르시는지 모를 일이 또 생겼다. 어렵사리 편집장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한국평단협의 기획홍보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홍보라면 전 직장에서 경험하기도 했고 소식지를 발간하는 일도 그 일환이라 부담이 덜했지만, 기획이란 한 단체의 비전과 조직, 업무, 예산까지 모두 파악해야 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감히! 그러나 다시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직을 맡아 수행하고 있다. 비록 기대하는 만큼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한국평단협의 여러 모습을 지켜보면서 공부를 해오고 있다. 살면서 배우고, 일하면서 공부하는 게 봉사자에게 내려 주시는 주님의 은총이라는 생각이다. 봉사는 자신의 재능을 베푸는 게 아니라 배우고 공부하는 일이라는 생각! 글 _ 김재홍 요한 사도(시인·문학평론가, 가톨릭대 초빙교수)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22면

시그니스와 커뮤니케이션

오대산이었다. 방아다리 약수터로 가는 길은 돌밭과 같았다. 운동이라고는 숨쉬기운동밖에 하지 않고 살던 어느 날, 가톨릭 언론인 선후배들과 산행을 하게 되었다. 발은 무겁고 걸음은 느리고 숨은 가빴다. 말과 글로 평생 살아온 분들이라 여기저기서 ‘깊은 산 고요’(정지용 프란치스코, 「장수산 1」)를 깨우는 탄성이 나오곤 하였으나, 중력을 실감하며 걷는 한 중년에게 그것은 아득하기만 했다. 그래도 산행을 마치고 나눠 마신 막걸리는 달콤했다. 너나없이 세파 속에서도 언론인의 정도를 걸으며 살아온 이들이기에 수다스러워도 가볍지 않았고, 농담에도 뼈가 있었다. 으레 그렇듯 뒤풀이가 본풀이가 되려는 순간 산행 대장의 버스 승차 명령이 떨어졌다. 평창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있으니 그의 판단은 옳았으나, 다들 엉덩이 무게를 감당하기 힘든 눈치였다. 일은 귀경하는 버스 안에서 벌어졌다. 고속의 주행음 속에서도 다들 산행의 피로와 막걸리의 취기로 눈을 붙이고 있는데 두 선배가 옆자리로 와서 말하는 것이었다. ‘가톨릭독서아카데미’의 사무국장을 맡아 달라. ‘가톨릭언론인산악회’ 총무가 되어 달라. 그렇게 한 자리에서 두 가지 제안을 받았다. 다들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들이었기에 쉽사리 말하기 어려웠다. 실은 세례를 받던 해에 느닷없이 가톨릭 방송인들의 모임인 ‘서울커뮤니케이션협회’(시그니스) 사무국장을 맡아 정신없이 일하던 기억이 있었기에 더욱 답하기 어렵기도 했다. 일천한 신앙생활에 교회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처지였던지라 2년의 임기 동안 참으로 부실한 사무국장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KBS, MBC, SBS, EBS 등 시그니스 소속 교우회들의 연합 미사를 기획하고, 합동 피정과 성지순례를 추진하는 동안 조금씩 길눈을 뜨고 신앙생활도 깊어졌음을 느꼈던 터라 고민 끝에 가톨릭독서아카데미 사무국장을 맡겠노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방송계 선배가 회장으로 있는 쪽을 택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신문사 출신 선배가 회장으로서 어렵사리 부탁한 가톨릭언론인산악회 사무국장을 수락하지 못한 것은 못내 송구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작된 가톨릭 언론인 공동체에서의 봉사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 지난 2022년 8월 서강대학교에서 개최된 ‘시그니스 세계총회’는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일이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다 언어가 다른 형제자매들을 영접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전 세계 커뮤니케이터들이 4년마다 모여 회의도 하고 세미나와 이벤트도 펼치는 자리에 미력이나마 전시공연 PD로서의 경험을 보탤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기도 했다. 역시 오대산이었다. 방아다리 약수는 신체 건강에만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초기의 어리숙한 한 신자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뛰어들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버스 안에서 내게 사무국장을 제안했던 한 선배는 말했다. “봉사가 은총입니다.” 실로 그렇다. 글 _ 김재홍 요한 사도(시인·문학평론가, 가톨릭대 초빙교수)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22면

‘달빛콘서트’와 ‘별빛콘서트’

전시공연 PD라는 업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화사의 걸작들을 전시한다거나 언제 들어도 위안이 되는 명곡들을 무대에 올리는 공연이기에 처음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경험하면 할수록 어렵고 힘든 막노동에 가까웠다. 전시는 우선 국내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화가와 작품을 골라야 하고, 에이전시와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명화일수록 조건이 까다롭기는 말로 다할 수 없다. 교통 편의와 수용 인원을 고려해 전시장을 택해야 하고, 수익을 감안해 적절한 대관료를 산정하고 계약해야 한다. 또 시장의 흐름과 수지를 따져 합리적인 매표 단가를 산정해야 한다. 각종 인허가, 안전관리, 홍보와 마케팅, 미디어 플레이…. 한 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출퇴근도 모르고, 밤낮도 알 수 없는 몇 달이 훌쩍 지나곤 했다. 그와 달리 공연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되니 수월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페라나 뮤지컬, 연극은 공연 기간도 짧지 않을뿐더러 클래식이냐 대중음악이냐, 출연자가 한 명이냐 여럿이냐에 따라 저마다 완전히 다른 설계를 해야 한다. 공연장, 무대, 세트, 음향, 조명, 특수효과 등은 전문적인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에 수많은 관계자와 협의를 해야 한다. 출연자의 구매력과 객석 수에 따라 객단가를 책정해야 하고, 선곡을 해야 하고, 큐시트를 짜고 대본을 작성해야 한다. 어떤 전시나 공연도 제작자의 입장에 서면 결코 예술이 아니다. 중노동일 뿐이다. 꽤 오래 방송사를 다니며 여러 분야의 업무를 경험했지만, 유독 전시공연 PD라는 직함에 마음이 머무는 것은 그때의 노동에 대한 심리적 반응인지 모르겠다. 누구나 가장 힘든 기억, 가장 아픈 기억은 오래 품고 사는 법이다. 그렇게 노동하던 전시공연 PD는 7년 전 회사를 나왔다. 직장 생활에 치여 시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없었던 데 대한 반성이기도 했고, 더 늦기 전에 문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 또한 적지 않았다. 재직 중에도 “몸의 90%는 회사에 있지만, 정신의 90%는 문학에 가 있다”며 푸념을 토로하곤 했으니, 그다지 어려운 결정도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학위를 받고, 시간강사가 되어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퇴직 후에만 두 권의 시집을 더 냈고, 문학평론가란 직함도 얻었다. 첫 평론집을 냈고, 연이어 두 번째 평론집과 연구서가 곧 세상에 나온다. 시인들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는 논문을 써서 학술지에 게재하고, 문예지의 편집위원으로서 회의도 하고 원고도 쓰고 있다. 시집 해설도 쓰고, 시가 오면 무릎을 꿇고 받아 적고 있다. 분주하고 바쁜 나날이다. 늘 꿈꾸던 전업 시인의 길이 당당하고 자랑스러운가 하면, 불비한 생활 여건에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몇몇 성당에서 작은 공연을 준비한다며 연출을 부탁해 오고 있다. 이미 다섯 번의 공연을 진행했다.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깊은 신앙심의 발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달빛콘서트’와 ‘별빛콘서트’는 퇴직한 지 7년이 된 한 전업 시인에게 다가와 정신 바짝 차리고 하느님의 부름에 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글 _ 김재홍 요한 사도(시인•문학평론가, 가톨릭대 초빙교수)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22면

詩詩하며 살아가는, 진짜 ‘시시한’ 시인

유난히 맑은 봄날이었다. 막 교실을 빠져나온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뛰어가기에 골목은 너무 비좁았으나, 빛나는 봄의 화음은 그들의 내면에 드리워진 그늘을 아주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그들은 소리치고 노래 부르며 뛰고 달렸다. 그 순간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솟구치는 청춘의 열정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날은 백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수업을 빼먹고 대낮에 경주까지 간다는 건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에겐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기회였다. 골목을 빠져나온 학생들은 큰길을 따라 거침없이 울산역으로 향했다. 그들은 모두 입상을 목표로 했지만, 그렇다고 상을 받는 데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수업시간에 열차를 타고 경주에 간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희열에 달뜬 한 무리의 불덩이들 사이에 한 시커먼 1학년 학생이 있었다. 그는 조금 전 문예부 교실에서 선배들로부터 ‘줄빠따’를 맞은 터였다. 문예부장을 비롯한 3학년들이 차례로 2학년과 1학년들을 때리고, 다시 2학년들이 1학년을 때렸다. 밀대자루로 한 사람이 10대씩은 매질을 하니 1학년은 적어도 200대 정도는 맞아야 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대구나 경주 애들보다 더 많은 상을 받아야 한다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입상자는 겨우 한 명이었다. 갈 때와 달리 돌아오는 객차 안에서 말을 꺼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3학년도 2학년도 1학년도 침묵뿐이었다. 다짐의 매질을 시작한 문예부장부터 막 입학한 1학년까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유일한 수상자였던 그 시커먼 1학년 학생은 달랐다. 꼴찌 상인 입선(入選)이었지만, 그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부심과 환희가 끓어올랐다. 땅을 디뎌도 구름 속을 걷는 것 같았고, 하늘을 보면 구름 위에 올라탄 것 같았다. 실로 그 도화지 한 장의 힘은 거대했다. 추위와 우울 속을 살던 아직 어린 영혼에게 그것은 좀처럼 식지 않는 시인에의 꿈을 심어주었다. 그날 이후 시커먼 1학년 학생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참으로 많은 상을 받았다. 입선이 아니라 장원과 차상을 무수히 받았다. 그것을 통해 만성적 우울을 이겨내고, 그것을 통해 생의 활력을 얻었다. 시의 길을 쉬지 않고 걸어 이제 등단 22년 차의 중견 시인에다 비평가이자 문학 연구자란 호칭까지 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안다. 시인은 영광의 궁전에 무늬를 덧대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의 움막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시인은 언제나 詩詩하며, 진짜 ‘시시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시는 한없이 낮고 낮아져서, 더는 자기 아래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을 때까지 낮아져서 마침내 세상의 모든 것을 우러러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하느님을 따르는 길임을. 글 _ 김재홍 요한 사도(시인·문학평론가, 가톨릭대 초빙교수)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22면

바람이 전하는 말

완성하고 보니 꼬박 10년이 걸렸다.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된 다큐멘터리 ‘바람이 전하는 말’ 이야기다. ‘바람이 전하는 말’은 작곡가 김희갑의 인생과 음악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자 나의 첫 감독 데뷔작이다. 김희갑, 1970년대 키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에서부터 양희은의 <하얀목련>, 혜은이의 <열정>, 김국환의 <타타타>,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바람이 전하는 말>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작곡한 바로 그 작곡가다. 그뿐인가. 온 국민의 애창곡인 정지용 시인의 <향수>, 올해 30주년을 맞은 뮤지컬 <명성황후>도 그의 작품이다. 너무 많아 작곡자 본인도 다 헤아리지 못한다는 그의 작품 수는 약 3천 곡. 김희갑 선생님과의 인연은 2006년 시작되었다. 칠순을 기념하는 헌정 음악회 ‘그대, 커다란 나무’를 세종문화회관에서 올리면서 공연의 작가로 처음 선생님을 만났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좋아했던 수많은 노래가 모두 한 사람의 곡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그 후 가끔 부부 동반으로 만나 맥주도 마시고 사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이번엔 인품에 반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어느 자리에서나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늘 편안한 미소와 친절함을 잃지 않았다. 연장자라 하여 가르치려 하거나 ‘대가’라 하여 다른 이를 낮추어 보지도 않았다. 2014년 봄, 다큐멘터리 창작자인 우리 부부는 카메라를 들었다. 공연이나 연주회, 가족 모임 등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촬영을 시작했다. 2016년 신사동의 ‘룰라톤’에서 인터뷰할 적만 해도 선생님은 기억력이 꽤 좋았다. 난청이 시작돼 큰 소리로 질문해야 했지만 그 정도면 괜찮았다. 그러다 본격적인 촬영을 하려던 참에, 코로나19로 세상이 닫혔다. 선생님이 사시는 곳은 실버타운이라 더더욱 나올 수도, 들어갈 수도 없었다. 2021년 겨우 선생님을 모시고 다시 인터뷰했을 땐 이미 많은 기억이 지워지기 시작한 터였고, 난청이 심해져 대화가 어려웠다. 대화가 어려워지면 선생님은 예전의 그 맑고 순진한 미소로 웃기만 하셨다. 1936년생인 선생님의 시간은 우리와 달랐다. 속수무책으로 푹푹 사라졌다. 이러다 영영 다큐멘터리가 완성되지 못하는가보다 싶어, 선생님과 함께한 음악과 시절을 말해 줄 주변 분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 <눈동자>를 구성지게 부르는 장사익, <타타타>로 인생이 바뀐 김국환, 지금도 <열정>으로 통하는 혜은이, 기타의 신이라 불리는 기타리스트 김광석 등 20여 명의 가수들과 연주자들, 평론가들과 뮤지컬 음악 감독을 만났다. 만나서 인터뷰하니 더 조바심이 났다. 혹여 선생님께 이 영화를 보여드리지 못하게 될까 싶어 편집 작업을 서둘렀다. 영화는 완성되어 지난봄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했다. 하지만 가을이 되어 가톨릭영화제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상영할 때까지도 선생님은 극장에 나오지 못하셨다. 선생님의 컨디션이 좋아지길 기다리면 안 될 것 같아 극장은 아니지만 계신 곳 가까운 곳에서 상영회를 만들었다. 선생님은 그날 영화를 보시며 아이처럼 활짝 웃으셨다. 영화 속 혜은이의 말처럼 대중음악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고 또 위로’다. 희로애락의 순간마다 노래가 있어서 한고비 한고비 잘 살아왔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가지만, 다행히 작곡가 ‘김희갑’이 남겨준 수많은 노래는 우리에게 남아 있다. 우리는 그의 노래에 기대어 많은 날을 또 살아갈 것이다. 더 많은 이와 김희갑의 음악과 인생을 나누고 싶어 올가을 영화를 개봉하려고 한다. 11월이 될 것 같다. 여덟 번의 ‘일요한담’ 연재를 마치며 개봉 소식을 미리 전한다. 길고 지루할 여름, 애창곡들과 함께 잘 견디시고 가을에 극장에서 꼭 뵙기를!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22면

공간은 시간을 기억합니다

3년 전부터 다큐멘터리 감독인 남편과 함께 전남 동부지역으로 촬영을 다닌다. 지금은 그저 인적 없는 고갯길이고 갈대 흔들리는 강둑이나 시골의 초등학교 운동장인 곳들. 그 한쪽 곁엔 표지판이 서 있다. ‘여순1019사건’ 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시다. ‘경찰은 이곳에서 주민 30여 명을 네 차례에 걸쳐 학살했다.’ 광양시 옥룡면에 있는 이 작은 표지판은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말해준다. 무심코 지나쳤을 공간에서 시간을 본다. ‘기억은 평범한 순간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나중에야 그들이 남긴 상처에 의해 기억된다’는 크리스 마크의 말처럼 평범하지 않은 순간이 남아 있는 공간, 그 상처들이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10여 년 전, 남편은 혼자서 한국과 일본에 남겨진 터널과 굴, 참호와 진지, 탄광을 찾아다녔다. 컴컴한 지하에 들어가서 별로 찍을 것도 없는 굴 속을 촬영하기 시작한 지 4년, 대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따라가 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지하 공간에 살았던 또 일했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그곳엔 사람이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온천으로 알려진 관광지인 일본 미이케 탄광. 그곳은 92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어 가혹한 노동으로 비참한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나가사키의 하시마섬과 조선소도 마찬가지다. 그곳뿐 아니었다. 아름다운 제주도의 오름 360여 개 중 120여 개는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결호작전’의 지하 진지였다. 송악산에도 수월봉에도 일출봉에도 제주도민들의 노동과 굶주림과 고통으로 만들어낸 지하 구조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는 그야말로 온 섬이 눈물 구멍이었다. 내가 선 땅의 시간을 알아가면서 그 공간들이 새롭게 보였다. 그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고 해서, 그저 웃고 먹고 떠들며 놀다 올 수는 없었다. 우리가 두 발 디디고 선 이 땅, 저 아래는 우리가 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 땅에서 살았던 누군가의 시간이 남겨져 있다. 마을 입구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의 나고 자람을 지켜보며 나이테를 넓혀왔듯이, 이 땅에도 그 위에서 살던 사람들의 시간이 스며들며 쌓여왔다. 어떤 땅은 슬픔이 가득 차 있고 어떤 땅은 한이 서려 있고 어떤 땅은 축복이 깃들어 있다.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땅, 그 공간의 시간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슬픔이 있다면 위로를, 한이 있다면 해원(解冤)을, 축복이 있다면 감사를 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공간의 맨 끝, 시간의 겹 맨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 끝에, 그래서 맨 앞이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슬픔과 한이 서린 공간에 가게 된다면, 먼저 그 공간의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 전부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더듬어 살필 수 있는 역사, 특별한 사건은 기억하고 충분히 애도하는 것. 그것이 맨 앞에 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그러고 나서 그곳을 오래 걷거나, 풍경을 감상하고 또 즐거운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낸다. 새로운 시간을 그 공간에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슬픔의 시간이 모두 흘러넘치도록 말이다. 우리는 공동의 사건을 기억하며 위로하기 위해 표지와 기념의 장소를 만든다. 아프고 억울한 사회의 공동 기억은 지우거나 잊는 것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함으로써 치유되기 때문이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22면

세상에 나쁜 독서는 없다

필사적으로 필사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내게 독서는 두 번 읽는 것이었다. 눈으로 한번 읽고 손으로 쓰면서 한 번 더 읽었다. 좋아하는 구절을 노트로 옮기기도 하고 김승옥의 「무진기행」 같은 단편은 아예 전체를 다 필사했다. 문장은 내게 스며들었고 필사는 습관이 되었다. 새해가 되면 두꺼운 노트를 준비하고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고 무술을 연마하는 듯 필사를 시작했다. 연말이 되면 빛나는 문장들이 빼곡히 적힌 노트가 뿌듯하게 남았다. 필사를 하려고 독서를 하는 날도 많았다. 그중 가장 즐거운 시간은 방송 원고를 보내고 맥주 한 잔을 옆에 두고 천천히 써 내려가는 필사였다. 원고를 쓰느라 쌓인 피로를 다른 글을 쓰며 풀었다. 좋아하는 책이 있고 아름다운 문장이 있고 애정하는 색이 담긴 만년필이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매일 읽고 매일 쓰면서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라는 파스칼 키냐르의 말은 내 삶의 표어였다. 필사의 독서는 환희였고 보람이었으며 나의 성실한 습관이었다. 소리 내어 독서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필사 이전의 독서 방식이었는데 말 그대로 낭독을 했다. 눈으로 읽던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면 그 맛이 달랐다. 어떤 글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작가가 얼마나 리듬감 있게 쓴 글인지 느낄 수 있다. 시나 에세이를 읽을 때 특히 좋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정끝별 시인의 ‘은는이가’ 같은 시를 읽을 때면 가슴이 설레도록 좋았다. 내가 쓴 시도 아닌데, 마치 내가 쓴 것처럼 나무 아래서도 읽고 창가에 앉아서도 읽었다. 시인이 쓴 시는 내 목소리를 통해 바람을 타고 세상으로 날아갔다. 그럴 때 나는 읽는 게 아니라 노래한다. 그렇게 노래한 글들은 마음에 오래 남아서 세상을 살아갈 때 가슴을 쭉 펼 수 있게 해 주었다. 낭독의 독서는 위로였고 기쁨이었으며 나의 비밀스런 독창이었다. 세 번째 방법은 함께 읽는 ‘동아리’ 독서다. 다양한 독서토론 모임을 통해 벗들과 함께 책을 읽었다. 도서관 독서동아리, 동네 책방 책모임, 녹색평론 읽기 모임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모여 책을 읽고 밥을 먹는 모임까지. 15년 가까이 지속되는 모임도 있다. 함께 읽는 독서는 풍성해서 참 좋다. 혼자 읽을 때는 나의 취향이 반영된 책들만 읽게 된다. 어려운 책,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은 읽을 기회조차 없다. 그러나 동아리에서는 책을 고를 때부터 다양성을 갖추게 된다. 모임의 구성원들이 다양한 만큼 추천하는 책들은 전 분야에 걸쳐 무궁무진하다. 그뿐 아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해보면 하나의 책에서 탄생하는 다양한 이야기와 생각들을 만나게 된다. 혼자 읽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세상을 알게 되고 발견하지 못했을 문장들을 찾아낸다. 지루하고 힘든 ‘벽돌책’ 독서도 동지가 있어 밀고 끌어주어 완독을 가능하게 해 준다. 혼자 읽기도 좋지만 함께 읽기는 더 좋다. 책은 참 묘하다.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참 한결같다. 책 속에는 분명 길이 있다. 하여 읽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길을 찾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길을 찾는 사람은 분명 자신만의 길을 발견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신인’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독서의 축복이다. 필사를 하며 읽거나, 소리 내어 읽거나 함께 읽거나 어떤 방법도 좋다. 세상에 나쁜 독서는 없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22면

사진의 의미

나에게는 만나보지 못한 외할아버지가 있다. 해방 이후 가치와 이념의 대혼란을 겪던 1949년, 그는 젊은 아내와 어린 남매를 남겨두고 북으로 떠났다. 가는 이도 보내는 이도 머지않아 다시 만날 줄 알았기에 작별의 인사는 짧았다. 하지만 곧이어 닥친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북으로 간 아버지’가 있는 남매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랐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채 십 년도 되지 않아 어머니마저 잃었다. 남매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았다. 오빠인 외삼촌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서야 남매는 그동안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버지와 헤어질 당시 세 살과 여덟 살이던 남매는 아버지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눈을 비벼봐도 아버지의 모습은 희미하기만 했다. 사진, 어딘가에 사진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북으로 간 가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얼굴이 드러나는 사진은 이미 태워지고 버려진 지 오래였다. 얼마나 찾았을까? 처분의 운명을 피한 단 한 장의 사진이 남매의 손에 들어왔다. 고향 집 앞에 나란히 선 두 명의 청년. 하지만 남매는 그 두 사람 중 누가 아버지인지 가려낼 수가 없다. 어떤 날은 동그란 얼굴의 왼쪽 청년이, 어떤 날은 안경을 쓴 오른쪽 청년이 아버지일 것 같다. 결국 남매는 두 청년을 모두 아버지라 여기기로 했다. 때로 쓸쓸하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남매에게 사진은 아버지가 있었다는 유일한 징표였다. 엄마를 모시고 강릉으로 2박3일의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사위도 며느리도 손자 손녀도 다 두고 오로지 엄마가 낳은 4남매만 동행했다. 우리는 모처럼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엄마 앞에서 어리광을 부렸고 깔깔거리며 바닷가를 거닐고 오죽헌을 둘러보고 향기로운 커피도 마셨다. 그러다가 마지막 여정은 사진관이었다. 우리는 여러 포즈로 가족사진을 찍었고 다음은 엄마의 독사진 차례였다. 엄마는 준비한 새 옷을 입고 더 곱게 화장을 하고 멋지게 사진을 찍었다. 특별히 뇌경색으로 표정이 사라진 왼쪽 얼굴이 덜 보이도록 신경을 써서 포즈를 취했다. 훗날 인화된 사진을 보고 엄마는 무척 마음에 든다 하셨다. 그리고 당부하듯 덧붙이셨다. 이 사진으로 엄마를 기억하면 좋겠다고. 엄마에게 사진은 세상에 남겨질 또다른 자신이었다. 핸드폰 속 사진 보관함을 열어봤다. 거기엔 ‘34359’라는 엄청난 숫자가 찍혀 있었다. 그동안 부지런히 찍은 사진의 숫자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보기 전에, 찍는다. 우리는 찍음으로써 기억하고 찍은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적으로 존재한다. 단 한 장의 아버지 사진이 절실했던 어머니와 달리, 지금 우리에게 사진은 ‘삶을 구성하고 연출하며, 공유하는 방식’ 그 자체가 되었다. 그렇다면 사진의 숫자만큼 우리의 기억은 단단해지고 추억은 풍성해지고 있는 것일까? ‘34359’. 디지털 시대에 넘쳐나는 사진들 속에서도 나는 잊지 않고 싶다. 어떤 사진은 여전히 삶을 증명하고, 누군가에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사람을 꺼내어 보여주는 창이다. 사진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22면

내가 너를 안다는 그 말!

오랜 친구들이 있다. 십대 초반에 만나 지금까지 헤아리기 무서울 만큼 긴 시간을 함께 했다. 우리는 서로의 안타까운 첫사랑도 알고 꿈을 찾느라 흘린 땀도 알고 엄마로서 딸로서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도 안다. 하지만 처음 만날 때는 똑같은 단발머리였는데 이젠 다르다. 살아가는 도시도 자주보는 사람도 지지하는 정당도 다르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니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친구가 누구를 지지하는지는 물으나 마나다. 안다. 참아야 한다. 부자 지간이라도 종교와 정치 얘기 하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상대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하니, 친구를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어서 그 거짓의 선동에서 헤어나오라고 소리치고 싶다. 어떤 날은 그 후보가 싫으니 친구까지 이상하게 보인다. 이래저래 저 혼자 속이 시끄럽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같은 학교를 다녀 어릴 적부터 알고 가끔 만나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누는 사이, 이 사람은 친구일까? 지인일까?” 예리한 질문이었고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선거에다 질문까지 겹쳐 복잡한 마음으로 무릎이 아프도록 걸었다. 그러다 집에 돌아와 시리즈 드라마 한 편을 보았다. 보다가 ‘폭삭’ 울었다. 나를 울린 드라마는 ‘폭삭 속았수다’ 였다. 명장면 하나가 있었다. 세월이 훌쩍 지나, 세상 풍파와 시련을 겪은 애순이 치매로 기억을 잃은 할머니 곁에 앉아 있다. 애순이 할머니에게 말을 건다. “할머니 이는 까막새가 안 갖다 주잖아, 이제 내가 해 드려야지.” 그때 할머니는 천천히 애순의 손을 잡고 말한다. “니 속 내가 안다, 내가 다 안다.” 그 한마디에 애순은 눈물보가 터지고 만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세월의 기억을 다 지운 듯한 할머니였지만 실은 다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손녀가 가장 마음 아픈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힘들다 속상하다 말한 적 없지만 할머니는 듣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속을 다 안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안다는 것은 그런 힘이 있는 말이다. 그래, ‘친구’는 속을 아는 사람이다. 또 다른 나, 그래서 말 하지 않아도 그 속을 알고 눈물을 알고 짐을 아는 사람이다. 함께한 시간 속에 쌓인 깊은 이해, 그리고 형식보다 진심이 앞서는 마음, 잔잔하지만 깊이 있는 연결이 바로 친구인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 그의 짐과 허물을 같이 져줄 수 있다면 그는 절친이다. 우리가 언제 정당의 지지 성향을 보고 친구를 먹었던가! 그랬으면 이렇게 오래 함께 할 리도 없지만 친구일리도 없다. 그저 지인일 뿐. 그날 밤 굳이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읽었던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를 고이 적어 친구에게 보냈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며…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이것은 고백이자 다짐이었다. 너는 나를 아는 사람이므로, 나 역시 너를 앎으로.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22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