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으니 됐어, 그걸로 충분해

어린이부 주일학교에서 6학년을 담당하고 있다. 교리 시간에 십계명을 물어봤는데 제대로 대답하는 아이가 없었다. 자모회에서 준비해 준 맛있는 간식을 먹고 나서 식사 후 기도를 하자고 했는데 입을 떼는 아이가 없었다. “다들 첫영성체 했잖아! 세상에, 몇 년 새 다 까먹었어?” 물었더니 명랑한 목소리로 돌아오는 대답. “네!” 성당에서까지 공부 스트레스를 주긴 싫었지만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주부터는 지식 전달에 치중한 주입식 교육으로 교리 수업을 해야겠다. 활발한 토론과 잦은 야외 수업,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활용하여 흥미 위주 수업을 하려 했지만 무지몽매한 6학년 아이들을 깨우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흥미보단 지식이다. 지난 1학기엔 교리 시간의 상당 부분을 아이들과의 라포르 형성에 치중했는데 이제 그런 건 건너뛰자. 교리 시작하자마자 바로 본론에 들어가야지. 6학년 아이들을 이렇게 무식한 채로 졸업시켜선 안 된다. 그렇게 결심하고 얼마 안 지났을 때 초등학교 4학년인 우리 집 첫째가 내게 땡깡을 부리기 시작했다. “토요일에 성당 가는 거 싫어. 내 친구들은 토요일에 야구도 하고 자전거도 타는데 나만 못 하잖아.” 아이들이 엄마 따라 토요일을 성당에서 보내서 다행이라는 글을 쓴 게 바로 지난주였는데. 역시 입이, 아니 손이 방정이다. 첫째와 대화한 결과 합의점을 도출했다. 이번 주 토요일만 성당에 가지 않고 친구들과 만나서 놀되, 주일에 따로 미사를 드리기로. 일탈은 이번 한 번뿐이라고. 그 주 토요일, 첫째는 친구들과 놀러 가고 난 둘째, 셋째와 함께 평소처럼 성당에 갔다. 미사를 드리러 온 6학년 친구들이 달리 보였다. 저 아이들도 토요일에 할 일이 얼마나 많겠나. 친구들 만나서 마라탕도 먹어야 하고 인형 뽑기도 해야 하고 학원 숙제도 해야 할 텐데. 그런데도 이렇게 성당에 왔구나. 미사 시작 전 막간을 이용해 스마트폰으로 야구 중계나 보고 SNS를 하고 있지만 성전에 앉아 있는 것만도 기특하다. 스마트폰 화면에 고개를 박고 있는 아이들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OO아, 잘 왔어” 하고 한 명 한 명 인사했더니 아이들이 고개를 들어서 날 바라본다. 서로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쌤, 키링 예쁘죠?”,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주며) 쌤, 제 남편이에요. 인사하세요.”, “얘가 왜 네 남편이야! 내껀데!” 우스갯소리하는 아이들이 오늘따라 귀엽기만 하다. 문득, 준비한 교리 교안을 대폭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계명과 기도문을 정확하게 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리라. 성당에 가면 자신을 예뻐라 하는 선생님들과 신부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교리 시간 내내 빼곡한 빈칸에 답을 채우고 제대로 외웠나 확인하는 대신,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아이가 자신의 이야길 하도록 하자. 이곳에서만큼은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걸 알고 돌아가게 하자. 개인의 고유한 목소릴 지우는 세상에서 성당은 있는 그대로의 너를 드러내도 안전한 곳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그리하여 다음 주 토요일에도 수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성당에 온 우리 6학년 친구들을 만나길 바란다. 글 _ 정신후 블라시아(방송작가)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22면

주일학교 교사 엄마를 둔 기쁨과 슬픔

토요일 오전 11시30분부터 출근을 준비한다. 주로 재택근무를 하는 터라 집이 곧 일터인데 토요일만큼은 다르다. 어린이부 주일학교 선생님으로서 본당에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낮 12시30분에는 집에서 삼형제 점심을 먹여야 설거지 끝내놓고 1시30분에 집을 나설 수 있으므로 애들이 배가 고프든 안 고프든 그 시각에 밥을 차린다. 식탁에 앉은 아이들이 밥숟가락을 뜨면서 저희끼리 이야기한다. “오늘은 성당에서 뭐 할까?” “비 그쳤으니까 마당에서 놀 수 있겠다.” 본당 어린이미사는 토요일 오후 3시에 있다. 나는 보통 1시 45분쯤 성당에 간다. 교리에 필요한 인쇄물을 출력하거나 부서 활동을 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지만 우리집 아이들은 그 시간이 지루하기만 하다. 미사 전까지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놀거리를 찾아 성당 여기저기를 기웃댄다. 성당 주차장 옆 코딱지만 한 화단에서 개미를 구경한다. 일찍 온 다른 아이들이랑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해도 시간이 안 가면 괜히 교사실 앞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엄마가 뭐 하고 있나 감시한다. 무료한 시간은 저녁에도 이어진다. 미사를 드리고 교리를 마친 후 교사들이 모여서 회합하는 동안 우리집 아이들은 간식을 먹으면서 엄마가 회합 마치고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삼형제의 토요일은 지루한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다. 성당에서 미사를 기다리고 엄마를 기다린다. 금요일 밤마다 아이들은 ‘아, 내일도 성당에 가야 하는구나’ 한숨 쉬지만, 그러면서도 군말 없이 따라온다. 집에서 편하게 쉬는 대신 엄마랑 같이 성당 가서 하루 종일 뭉개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니 고마운 일이다. 작년 여름, 첫째가 첫영성체를 할 때 나도 교사를 시작했다. 결혼 전 주일학교 교사 생활을 즐겁게 했던 터라 다시금 즐거움을 경험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불안이었다. 내가 아이들 삶에 신앙을 깊이 뿌리내리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 혼자 힘으론 어렵고 주일학교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주일학교를 다니는 거론 부족하다. 아예 내가 교리교사를 하면 어떨까. 그러면 내 아이들도 주일학교에 강하게 결속되겠지. 성당이 미사만 드리는 곳이 아니라 숙제도 하고 놀기도 하고 밥도 먹으면서 뻔질나게 드나드는 곳이 되면 좋겠다. 그런 마음에서 교리교사를 시작했고 역시 잘했다 싶다. 어느덧 아이들은 자연히 주말을 성당에서 보내고 자전거 타고 성당 앞을 지날 땐 잠시 성모상 앞에 가서 인사를 드리기도 하니 말이다. 내가 교리교사로 연차가 쌓이는 만큼 우리집 삼형제도 주일학교 짬이 쌓인다. 부활과 여름, 성탄으로 이어지는 주일학교 행사에 참여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고, 매년 반복되는 전례 속에 안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느 날엔 아이들이 텅 빈 성전에 앉아 부모와 친구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을 예수님께 털어놓기도 하면 좋을 텐데. 주일학교엔 엄마가 줄 수 없는 좋은 것들이 있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글 _ 정신후 블라시아(작가·의정부교구 파주 목동동본당)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22면

지상천국

마지막 칼럼이다. 여러모로 송구하다. 다른 분들처럼 일상을 소재로 마음에 ‘울림’을 주는 좋은 글을 쓰지 못했다. 평소 신앙적 성찰이 부족했던 탓이다. 그나마 전공 경험에서 얻은 스페인, 중남미 관련 일화들로 간신히 횟수를 채웠다. 오늘 역시 보잘것없는 경험담이다. 이십여 년 전 마드리드 유학 시절의 일이다. 부르고스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그곳 수녀원에 한국 수녀님이 한 분 계시니 가는 김에 떡과 고추장 등 한국 식재료를 전달해 주라는 부탁을 받았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으나 아마도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창립한 맨발의 가르멜회 수녀원이 아니었던가 싶다.) 내심 귀찮았으나 물어물어 말로만 듣던 봉쇄수녀원의 면회실에 들어섰다. 잠시 후 창살 건너편으로 수녀님이 나오셨다. 뜻밖에도 젊고 아름다운 분이었다. 노총각이던 필자의 가슴이 뛰었다.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화는 길지 못했다. 같이 계신 할머니 수녀님들이 한국 음식을 좋아하셔서 떡볶이를 만들어드리려 한다며 고맙다고 하셨다. 헤어지면서 “저분은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 먼 곳까지 오셔서 세상과 담쌓고 사시는 걸까?” 하는 생각과 왠지 모를(?) 허탈감을 느꼈다. 세월이 흘러 2023년 여름, 필자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조용한 산골 마을 ‘베아스 데 세구라’에 있는 맨발의 가르멜회 수녀원을 찾았다.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였다. 이곳 역시 예수의 성녀 데레사께서 창립한 개혁수녀원으로, 한때 인근의 남자 수도원장으로 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이 수녀들을 지도했던 유서 깊은 장소다. 수녀원 내부 2층에는 면회실과 두 성인의 유물이 전시된 작은 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현재도 봉쇄수녀원으로 운영되고 있어 늘 문이 닫혀있다. 들어가려면 인근 관광사무소에 가서 소정의 입장료를 내고 안내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를 안내한 이레네라는 여직원은 여기까지 찾아오는 한국인 신자는 거의 없었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곳에 한국 수녀님이 한 분 계신다고 했다. 잠시 뵙고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 이레네를 통해 수녀원 측에 의사를 전달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아마도 관상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신 듯하다. 대신 우리 부부를 위해 기도해 줄 터이니 어디서 온 누구인지만 말해달라는 수녀님의 전갈을 받았다. 순례를 마치고 떠나려는 데 왠지 짠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았다. 이 외진 스페인 시골에 한국 수녀님이라니! 유학생 시절 부르고스의 한국 수녀님께 고추장을 가져다드렸던 기억이 났다. 성가신 불청객처럼 여기실까 조심스러웠으나 라면 등 남은 간편식을 되는대로 챙겨 이레네를 통해 수녀님께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마을을 등지고 시골길을 운전하는데 옛날과 똑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저분은 무엇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오셔서 세상과 담쌓고 사시는 걸까?” 이십여 년이 지났으나 필자는 여전히 그분들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다만 신앙이 깊은 독자분들은 이해하실 것 같아 수녀원 면회실 벽에 적혀있던 다음 문구를 소개한다. “만일 지상천국이 존재한다면 이 집이 바로 그곳입니다. 이 집은 오직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로만 기뻐하며, 자기 자신의 기쁨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위한 곳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완덕의 길」 중)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22면

신부님을 사랑(?)한 여인

이천 년 전의 로마 수도교로 유명한 스페인의 내륙 도시 세고비아에는 ‘가르멜의 성모 수도원’이 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르멜회 개혁(맨발의 가르멜회)을 주도한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어 한국 순례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그러나 성당 주제단 오른편에 있는 또 다른 무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세고비아 출신의 귀부인 아나 데 페냘로사(Ana de Peñalosa)가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1582년 1월 그라나다에서 시작되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개혁수녀원 창립을 위해 수녀들을 이끌고 왔으나 쇠락한 도시에 수도원이 늘어나는 걸 우려한 그라나다 대주교의 반대에 부딪혔다. 일행은 새벽에 도착했으나 들어갈 집이 없었다. 이때 아나가 기꺼이 자신의 집을 빌려주었다. 당시 아나는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까지 잃은 후라 삶에 대해서나 신앙적으로 심한 무기력감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요한을 고해신부로 삼고 영적인 지도를 받으며 점차 절망에서 벗어났다. 요한은 그라나다의 ‘순교성인들의 수도원’ 원장으로 6년간 있으며 아나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 그녀의 요청으로 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Llama de amor viva)」을 쓰기도 했는데, 비록 하느님과의 합일을 다룬 신앙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속세의 한 여인에게 헌정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한편, 아나는 요한의 권고에 따라 세고비아의 ‘가르멜의 성모 수도원’ 건립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요한이 1588년 이 수도원장으로 발령받자 그녀도 세고비아로 거주지를 옮겼다. 떨어져 있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제’와 ‘미망인’은 어차피 물리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성녀 데레사 사후 맨발의 가르멜회 내부의 권력 다툼에 염증을 느낀 요한은 1591년 6월 누에바 에스파냐(오늘날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지역)로 파송을 자원했다. 그가 세고비아를 떠나던 날 아나는 “신부님, 왜 저를 버리고 가십니까?”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요한은 출국 준비를 위해 안달루시아의 한 수도원에 머물다가 급성 감염병인 단독(丹毒) 증세를 보여 치료를 위해 우베다의 ‘산 미겔 수도원’으로 옮겨왔다. 이 삶의 마지막 여정에서도 그는 근황을 알리는 몇 통의 편지를 아나에게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생애 마지막으로 쓴 편지의 수신인도 그녀였다. 1591년 12월 요한이 선종하자 아나는 두 차례의 시도 끝에 그의 유해를 우베다 주민들 몰래 세고비아의 수도원으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잘린 그의 손가락 하나를 작은 은제 함에 담아 죽을 때까지 가슴골에 넣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그녀도 1608년 같은 성당에 묻혔다.(주제단 벽감의 무덤은 비어 있으며 진짜 유해는 납골당에 있다) 죽어서야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한 지붕 아래에서 영원히 잠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필자는 올여름 세고비아의 이 수도원을 찾았다. 성당의 주제단 앞에서 홀로 묵상하던 중 문득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아나 데 페냘로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사제로서 공경한 것일까, 아니면 남자로서 사랑한 것일까? 답은 납골당에 누워있는 그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22면

돈키호테와 성 이냐시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유명한 고전 문학작품이다. 그런데 주인공 돈키호테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돈키호테는 ‘정신 나간 사람’이나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다. 스페인 왕립한림원은 돈키호테를 “자신의 이익보다 이상을 우선시하며, 올바른 대의를 위해 이타적이고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즉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부조리한 세상에 뛰어든 ‘이상주의자’이자 ‘영웅’인 것이다. 이런 돈키호테의 캐릭터는 스페인의 성인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와 닮았다. 이는 필자의 주장이 아니라 20세기 초 스페인의 저명 철학자인 미겔 데 우나무노의 견해이다. 우나무노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삶(Vida de Don Quijote y Sancho)」에서 두 인물의 행동양식은 물론 성격과 영적인 공통점을 분석했다. 우선 관상과 기질이 유사하다. 둘 다 넓은 이마에 대머리이며 진지하고 분노를 못 참는 다혈질인데,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대개 무인이 될 팔자이다. 독서가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도 같다. 기사 소설을 탐독하다가 자신이 직접 편력기사가 되어 세상의 불의를 평정하기로 마음먹은 돈키호테처럼 이냐시오 또한 예수와 성인들의 전기를 읽다가 그들의 삶을 모방하기로 결심하였다.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편력기사(돈키호테)와 순례자(이냐시오)가 되기 위해 무작정 집을 나선 행동도 흡사하다. 1522년 3월 하순 몬세라트 수도원에 들러 한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청하고 철야 고행을 하는 이냐시오의 모습은 주막집에 들러 주인에게 기사 서임식을 청하고 불침번을 서는 「돈키호테」 1부 3장의 에피소드를 상기시킨다. 한편, 이냐시오는 노새를 타고 몬세라트로 가던 중 우연히 만난 무어인이 성모님을 모욕하고 도망치자 복수의 칼부림을 하기 위해 뒤를 쫓다가 갈림길 앞에서 주저하게 된다. 얼마 전에 거칠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되기로 회심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심 끝에 복수의 실행 여부를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하고 고삐를 늦추어 노새가 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다행히도 노새는 무어인이 도망간 큰길이 아닌 몬세라트로 향하는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이냐시오가 자서전인 「순례자」에서 밝히고 있는 이 일화는 편력기사로 집을 나선 돈키호테가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며 타고 있던 말 로시난테에게 길을 맡기는 장면(「돈키호테」 1부 2장, 4장)들과 유사하다. 우나무노는 이들의 행동을 “하느님의 뜻에 대한 가장 깊은 겸손과 절대적인 복종”으로 해석한다. 이 밖에도 모험에 뛰어드는 용기, 순례적인 삶,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존중, 신앙이 결부된 자신감 등은 물론 쓸쓸하게 맞이하는 임종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여러 면에서 둘은 닮은꼴을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적인 공통점은 자신들을 둘러싼 적대적인 환경에 굴하지 않고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한 고귀한 정신에 있을 것이다. 우나무노는 이런 이냐시오와 돈키호테를 숭고한 ‘스페인 정신’의 대표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따지고 보면 성인에게도 국적이 있다. 스페인 출신 성인을 이해하려면 이 나라 사람들의 기질과 민족성을 알 필요가 있다. 이냐시오 성인을 한층 깊이 있게 그리고 정서적으로 느끼고자 하는 분들에게 이 가을, 「돈키호테」의 일독을 권한다.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22면

착한 배교자

삶이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사람들이 있다. 곤살로 게레로(1470~1536)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1511년 8월 다리엔(파나마)에서 산토도밍고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유카탄 마야족의 포로가 되었다. 일행 중 최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그와 가톨릭 수사인 헤로니모 데 아길라르뿐이었다. 이후 두 사람의 행보는 갈렸다. 아길라르 수사는 가톨릭 신앙과 스페인 왕에 대한 충성심을 지키며 노예 생활을 감수했다. 반면 군인 출신이었던 게레로는 마야족에게 전투기술을 가르쳤으며 모시고 있던 주인을 악어의 습격에서 구출하여 자유인이 되었다. 그 후 연이은 무공을 세워 ‘나콤(대장)’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마야족의 공주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수년이 지난 1519년 2월, 멕시코 정복을 위해 유카탄반도 앞 한 섬에 상륙한 에르난 코르테스는 현지 원주민에게서 인근에 스페인 사람들이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코르테스는 원주민 인편으로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 구조 의사를 밝혔다. 아길라르 수사는 감격에 겨워 코르테스에게 합류했다. 그리고 8년간 익힌 마야어를 바탕으로 원정대의 통역 역할을 하며 정복에 기여하게 된다. 반면 원주민 문화에 완벽하게 동화된 게레로는 잔류를 선택했다. 그는 함께 떠나자는 아길라르 수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절했다. “아길라르 형제여! 나는 이미 결혼했으며 세 명의 자식이 있네. 나는 이곳에서 추장이자 대장이 되었네. 문신한 얼굴에 귀를 뚫었는데 이런 내 모습을 본다면 스페인인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할 것인가? 하느님과 함께 떠나게. 자네는 내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이미 보지 않았는가!” 가족 때문에 남기로 결심한 게레로는 마야인들에게 정복자들에 맞서는 방법을 가르쳤다. 스페인 원정대는 자신들의 전술을 꿰뚫고 있는 마야 전사들 앞에서 연이어 난관에 봉착하며 곤혹스러워했다. 끝내 게레로는 1536년 8월 13일 온두라스 울루아 강의 계곡에서 스페인인들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게레로는 죽기 직전 부하 원주민들에게 처자식을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했다. 게레로는 이후 수 세기 동안 스페인 역사에서 ‘배교자’로 불리며 지탄받았다. 특히 가톨릭 신앙을 저버린 죄가 컸다. 그러나 게레로의 이야기를 전한 연대기의 기록은 모두가 유일한 생환자인 아길라르의 일방적인 증언에 근거한 것이다. 아길라르는 자신을 여러 유혹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지조와 왕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의인으로 미화했다. 반면 게레로에 대해서는 여색에 눈이 멀어 이교도와 가정까지 꾸린 부정적인 인물로 전했다. 그러나 멕시코 독립 이후 게레로는 멕시코인들 사이에서 식민주의·제국주의와 싸운 상징적 인물로, 그리고 ‘최초의 메스티소(스페인인과 원주민의 혼혈 인종)의 아버지’이자 ‘고귀한 귀순자’로 불리며 높이 추앙받게 된다. 필자는 가끔 곤살로 게레로가 천국에 갔을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가 신앙을 저버렸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아길라르의 버전과는 다른 이유에서였을 가능성이 크다. 배교행위가 나쁘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나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약자인 원주민을 지키려는 선한 의도와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착한 배교자’인 게레로의 영혼은 구원받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신학적 지식이 짧은 필자의 소견이다.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22면

성모의 기사

알론소 데 오헤다(1466~1515)라는 스페인 정복자가 있었다. 콜럼버스에는 미치지 못하나 신대륙 초기 정복사에서 꽤 알려진 인물이다. 스페인에서 풍부한 전쟁 경험을 쌓은 후에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의 추천으로 콜럼버스의 2차 항해(1493년) 때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콜럼버스 아래에서 ‘라 에스파뇰라섬’(오늘날의 도미니카와 아이티공화국) 정복에 앞장섰으나 이후 왕실과 독자적인 협약을 맺고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파나마 일대를 헤집고 다녔다. 그는 체구는 작았으나 용감하고 겁이 없는 사람이었다. 라 에스파뇰라섬에서 스페인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 족장을 적진 한가운데로 찾아가 도금한 수갑을 팔찌 선물이라고 속이며 – 원주민들은 수갑의 용도를 몰랐다 - 스스로 차게 만든 후에 체포해 버린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잔인하고 호전적이기도 했다. 황금과 노예를 찾는 과정에서 많은 원주민을 학살했으며 심지어는 산채로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현대 역사학자 휴 토마스의 인물평에 의하면 ‘야망과 잔혹함의 화신’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헤다는 소문난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다. 스페인을 떠나올 때 폰세카 주교가 안전을 기원하며 선물로 준 성모상을 늘 군장 안에 넣고 다녔으며 자나 깨나 곁에 두고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 덕분이었는지 수없이 사선을 넘으면서도 죽지 않았으며 심지어 크게 다치는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성모의 기사’라 불렀다. 한편, 그는 스페인 정복자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말년에 과거를 뉘우치고 회심한 사람이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510년 그를 태운 배가 허리케인을 만나 쿠바 남부 해안에서 좌초했다. 오헤다는 폭풍우 속에서 악전고투하면서도 성모상만큼은 챙겨서 탈출했다. 그는 굶주림과 질병을 견디며 수일간 위험으로 가득한 습지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성모님께 빌었다. 만일 살려주신다면 가장 먼저 발견하는 마을에 성모님을 위한 경당을 세우겠노라고. 마침내 한 우호적인 원주민 족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오헤다는 그동안 지니고 다녔던 성모상을 원주민들에게 건네주고 마을에 작은 경당 하나를 세웠다. 그리고 라 에스파뇰라섬으로 돌아오자마자 왕실이 부여한 모든 직책과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고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들어가 참회하며 생애 마지막 5년을 보냈다. 죽을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은 재산을 기부했다. 또한 속죄의 의미로 자신을 수도원 출입문 밑에 매장하여 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필자는 오헤다가 진짜 ‘성모의 기사’가 된 것은 그의 생애 마지막 5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 군장에 넣어 다니던 성모상은 진짜 성모님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부적’에 지나지 않았다. 등 뒤에 성모님을 모시고 어찌 눈앞으로 원주민을 학살하고 불태워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진짜 성모님은 군장 속이 아니라 마음속에 계셨다. 오헤다는 그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필자의 연구실은 성상으로 가득하다. 성모상도 여럿이다. 스페인, 중남미를 다녀올 때마다 현지의 성모상을 하나둘 사 모으다 보니 그리되었다. 남들이 보면 ‘성모의 교수’라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솔직히 자문해 본다. 과연 내 마음속에 성모님이 모셔져 있는가? 답하려니 낯이 뜨거워진다.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

발행일 2025-09-28 제3460호 22면

세상을 바꾼 강론

때로는 신부님의 강론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 1511년 12월 21일, 라 에스파뇰라섬(오늘날의 도미니카와 아이티공화국) 산토도밍고의 한 성당. ‘엔코멘데로(Encomendero)’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그들은 개종과 보호를 명목으로 원주민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하던 스페인 식민자들이었다. 대림 제4주일인 이날 도미니코 수도회의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Antonio de Montesinos) 신부가 강론대에 올랐다. 성탄을 앞두고 엔코멘데로들은 “이역만리 타향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와 같은 따뜻한 위로의 말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부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발언이 터져 나왔다. 원주민을 착취하는 엔코멘데로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표현도 직설적이었다. “여러분은 지금 죽을죄를 짓고 있습니다.…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무슨 권리로, 무슨 명분으로 이 원주민들을 이토록 참혹하고 처참한 노예로 부리고 있단 말입니까? … 이들은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들에게는 이성적인 영혼이 없단 말입니까? … 명심하십시오.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신앙을 거부하는 무어인이나 튀르크인들처럼 구원받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섬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흥분한 엔코멘데로들은 도미니코 수도회 측에 발언 취소와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본국에 대표단을 보내 왕(페르난도 2세)에게 몬테시노스를 비롯한 수도회 신부들의 즉각적인 추방을 요구했다. 왕은 양측의 견해를 듣고 나서 신부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12년 12월 신대륙에 적용된 최초의 법률인 ‘부르고스 법’을 제정했다. 법안에는 원주민의 노예화와 강제노역을 금지하고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멀리 떨어진 바다 건너편에서 이 법이 준수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때까지 당연시되거나 쉬쉬해오던 원주민 인권 문제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린 첫 신호탄이 되었다. 몬테시노스 신부의 강론은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사실 전교를 정복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16세기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파문당하거나 목숨을 잃을 위험성도 있었다. 게다가 엔코멘데로들은 본국에서 온 성직자들을 후대했고 뇌물을 찔러주기도 했다. 자신들의 치부를 눈감아주고 본국의 교회와 왕실에 잘 이야기해 달라는 암묵적인 청탁이었다. 몬테시노스 신부도 엔코멘데로들이 원하는 내용의 강론을 했더라면 속 편하고 무탈했을 것이다. 아마도 감사의 표시로 봉헌 예물이 쏟아져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의하게 얻은 것으로 제사 드리면 부정한 제물이 되고, 무도한 자들의 봉헌물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법”(집회 34,21-22 참조)이다. 몬테시노스 신부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믿음 즉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는 복음의 진리만을 따랐다. 전쟁과 테러, 빈곤과 기아, 기후위기와 환경문제 등 세상은 여전히 혼탁하다. 약자를 착취하는 현대판 엔코멘데로들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세상을 바꿀 신부님의 강론이 다시 한번 나올 때가 되었다.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

발행일 2025-09-21 제3459호 22면

방치된 성지

올여름에도 출장길에 잠시 짬을 내어 바르셀로나 인근의 소도시 만레사를 찾았다. 2023년부터 내리 삼 년째 방문이다. 몇몇 지인들이 볼거리로 넘쳐나는 스페인에서 왜 매번 같은 장소를 가느냐고 묻는다. 이 도시에는 무언가 신비한 매력이 있다. 아마도 예수회를 창립한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 성인의 영적인 고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적 출세를 꿈꾸는 기사였던 그는 한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경을 넘긴 후 재활의 무료함을 달래러 기사 소설을 찾았으나 구하지 못하자 대신 「예수의 삶」과 성인 열전인 「황금빛 전설」을 읽었다. 그리고 ‘왕의 기사’에서 ‘하느님의 기사’가 되기로 삶의 목표를 바꾸었다.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위해 바르셀로나 항구로 가는 길에 만레사에 들러 11개월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고행과 영적인 체험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영신수련」 초고를 완성했다. 만레사를 이냐시오 성인의 ‘초기 교회’로 그리고 ‘예수회의 요람’으로 부르는 이유이다. 중요한 성지이므로 전 세계에서 순례객이 찾아오며 한국 신자들의 발길도 잦은 편이다. 하지만 대부분 ‘성 이냐시오 동굴’ 한 군데만을 둘러보고 떠난다. 이냐시오 성인이 자주 기도와 명상을 했으며 「영신수련」의 집필을 시작한 곳이다. 그러나 만레사는 이냐시오가 거의 일 년 동안 머물렀던 도시이기에 그의 자취가 남아있는 장소들이 많다. 한 관련 사이트(covamanresa.cat)에 의하면 모두 22곳에 달한다. 도보로 가기에는 좀 먼 곳도 있으나 대부분 도시 앞을 흐르는 카르데네르 강가와 마요르 광장 주변의 구시가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모든 장소가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방치된 곳도 꽤 된다. 그중 하나가 강과 구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도시 외곽의 한 언덕 위에 조성된 야외 조형물인 ‘빛의 우물(Pozo de Luz)’이다. 이냐시오가 ‘대 조명’이라 알려진 엄청난 깨달음의 은총을 받은 장소에 세워졌다. 이냐시오는 말년에 3인칭으로 기술한 자서전 「순례자」에서 관련 일화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수많은 사안들, 영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신앙과 학문에 관련된 것들을 이해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모든 것이 새롭게 여겨질 만큼 놀라운 조명이었습니다. (...) 그렇게 예순 두 해가 지날 때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도움과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합쳐도 그 단 한 번의 순간에 얻었던 깨달음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El Peregrino」, Ediciones Mensajero 참조) 이 영적인 체험은 이냐시오의 측근과 전기 작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언급하는 만레사 체류의 ‘하이라이트’이다. 필자가 보기에 ‘성이냐시오 동굴’ 못지않게 중요한 성지이다. 이곳에 2008년 철제로 된 기념 조형물인 ‘빛의 우물’이 조성되었다. 그런데 조형물의 형태가 추상적인 데다가 외지고 인적이 드문 곳에 있어 지역 주민들조차 장소의 의미를 모르는 듯하다. 주변에 쓰레기가 난무하고 술병까지 뒹굴고 있다. 순례객이 남긴 흔적일 리가 없다. 작년과 재작년에도 그랬던 것으로 보아 어쩌다의 관리부실은 아닌 듯하다.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

발행일 2025-09-14 제3458호 22면

성인의 사춘기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A 양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엄마를 잃었다. 성모님께 엄마의 부재를 메워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으나 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성모님보다 A 양의 마음을 달래준 것은 스마트폰이었다. 아빠의 감시를 피해 가며 온종일 스마트폰과 인터넷게임에 빠져 지냈다. 어쩌다 손에서 기기를 내려놓으면 불안해하는 금단 증세까지 생겼다. 온라인상의 일탈은 오프라인으로도 이어져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기 시작했다. 무리 중에는 막 사춘기에 접어든 A 양을 플러팅하는 사내아이도 하나 있었다. A 양도 갈수록 외모에 신경 쓰며 짙은 향수까지 뿌리고 다녔다. 아빠의 근심이 깊어만 갔다. 아빠는 A 양을 강제로 기숙형 대안학교로 보내버렸다. A 양은 처음엔 반발했으나 다행히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과 잦은 상담을 하며 안정을 되찾고 방황에서 벗어났다. 방금 소개한 A 양은 필자가 꾸민 가상의 인물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에 속한다. 입시 경쟁과 사교육 등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스마트폰 중독에 빠지거나 친구와 이성 문제로 부모님 속을 썩이는 청소년들이 어디 한둘일 것인가. 그런데 시대적인 소품을 몇 개만 바꾸어 놓으면 A 양의 사연은 16세기 스페인의 성인인 예수의 성녀 데레사(1515~1582)의 사춘기 시절 일화로도 읽힌다. ‘스마트폰’을 ‘기사 소설’로, ‘인터넷게임’을 ‘체스’로, ‘기숙형 대안학교’를 ‘수녀원’으로 바꾸면 다른 문장은 손댈 필요도 없다. 데레사의 「자서전」(Libro de la Vida, 이하 LV)을 보면 성녀도 열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울면서 성모님께 대신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LV 1,7) 그러나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기사 소설에 빠져 “아버지 몰래 숨어서 밤낮으로 읽었으며, 읽을거리가 떨어지면 불안해할 만큼 극단적으로 심취해 있었다.”(LV 2,1) 기사 소설은 당시 최고의 인기 장르였으나 허황된 내용을 다루고 있었기에 신앙심 깊은 아버지는 딸의 지나친 몰입을 걱정했다. 데레사는 체스에도 빠져들었는데 이 놀이는 이후 그녀가 평생 즐기는 취미가 되었다. 행실이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려 집 밖으로 나돌아다녔으며 개중에는 연정을 품고 접근해 오는 사촌도 있었다. 데레사도 허영에 들떠 “손과 머리카락 손질에 공들이고 향수와 온갖 장신구들로 한껏 멋을 부렸다.”(LV 2,2)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아버지는 데레사를 아빌라의 ‘은총의 성모님 수녀원’에 기숙 학생으로 강제로 집어넣었다. 데레사는 다행히도 이곳에서 한 자상한 지도 수녀를 만났다. 그리고 “수녀님과 좋은 교제를 통해 마침내 예전의 나쁜 교제에서 비롯되었던 습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LV 3,1) 혹시 비슷한 자녀 문제로 속 썩는 부모님이 계신다면 이 글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성인에게도 사춘기가 있었고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 누가 아는가? 지금은 골칫덩어리인 우리 아이가 커서 공경받는 인물이 될는지.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

발행일 2025-09-07 제3457호 22면

기도하는 나날들

늦게나마 문학 공부를 제대로 하겠다며 회사를 나온 지 7년째다. 그 사이 학위를 받았고, 문학평론가가 되기도 했다. 한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배우며 보람을 찾고, 작은 봉사로 큰 위안을 얻는 신앙생활도 이어가고 있다. 배부른 돼지가 아니라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소박한 꿈은 이뤘지만, 불비한 여건을 불안해하며 기도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등단 전후 소장(少壯) 시절에는 세상을 바꾸는 시의 힘을 믿었고, 그렇기에 골방에 틀어박힌 외로운 투사가 되어 세계와 대적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몸은 사무실에 두었지만, 정신은 언제나 시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언제나 시는 높고 빛나는 데 있지 않고 낮고 어두운 곳에 기거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단 한 편의 우뚝한 시를 얻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허기를 두려워하지 않겠다던 다짐은 눈앞의 현실 앞에서 갈수록 연약해지고 있다. 논문과 평론을 쓰고, 시를 받아 적는 일이 문학 열망의 표현이 아니라 호구책이 되었다. 글쓰기를 가르치고 출판물 교열을 하고 간간이 공연을 연출하는 일이 더는 여흥이 아니다. 기도는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는 시구와 같이 시인은 재능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견뎌내는 사람이다. 시는 몇몇 표현론적 기예로 도달할 수 있는 예술이 아니라, 도저한 생의 무게를 견디고 견디다 마침내 분출하는 어떤 비명과 같은 것이다. 수백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시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사무치게 절실한 깨달음이 내장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배고프지만 배고프지 않으며, 외롭지만 외롭지 않다. 시인은 넘치는 풍요 속에서 살 수 없으며, 그것을 누리려는 자는 시인이 될 수 없다. 시인에겐 ‘가진 것’이 오히려 해로운 독약이다. 시적 “자아(moi)의 참된 대립은 비-자아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le mien)”(가브리엘 타르드)이다. 이것이 시인의 운명이며, 이것을 견뎌내야 시인이 될 수 있다. 얼마나 당당한가. 얼마나 자부심 넘치는 일인가. 나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시인이 되었고, 그 운명을 견뎌내고 있다. 그렇다. 이제야 진짜 시인이 된 것 같다. 퇴직한 지 7년 되어서야 참다운 시인의 길은 어떠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 것 같다. 아침기도로 시작하여 묵주기도를 거쳐 저녁기도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기도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기도를 필요로 하는 주변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기도문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느님, 몸이 아픈 모든 이들을 도와주소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도와주소서. 글 _ 김재홍 요한 사도(시인·문학평론가, 가톨릭대 초빙교수)

발행일 2025-08-31 제3456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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