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부부에겐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 임신했을 때부터 잦은 병원 진료로 정말 어렵게 얻은 아들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맛있는 거 먹기를 즐기는 아들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대뜸 부산에 있는 조리 고등학교를 가겠다는 겁니다. 깜짝 놀랐죠. ‘부산에 있는? 아니, 얘가 벌써 우리와 떨어져 살고 싶어 하나? 아니면, 꿈이 셰프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일주일만의 설득으로 조리 고등학교는 접었습니다. 맹모삼천지교까지는 아니지만, 중3 1학기 말, 우연 반 의도 반으로 부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운이 좋아 목표로 삼았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예민한 시기에 환경이 바뀌어서 여러모로 눈치도 보게 되고 걱정스러웠는데, 나름대로 큰 문제 없이 잘 적응하고 있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대학을 연극영화과로 가겠다는 겁니다. 제 직업도 그렇고 혹시나 했는데 그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지요. 왜 거기를 정했냐 물었더니, 연기가 하고 싶어졌답니다. 재미있을 것 같다네요. 평소에 아들에게 ‘네가 재미있는 거 하라’고 했던 저의 말문을 막아버렸습니다. 입시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애 엄마도 기도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수시로 삼성산성지, 남양성모성지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발이 좋다는 절두산순교성지에서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고 부천에서 103일 동안 빠짐없이 기도하러 다녔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옆에서 지켜보는 아비요 남편인 저는 늘어나는 날짜만큼 부끄러움이 쌓여 갔습니다. 아내는 얼굴도 핼쑥해지고 점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힘들면 그만하라 했더니 절두산순교성지 올라가는 언덕이 경사가 꽤 있는데 힘든 줄 모르겠답니다. 예수님께서 밀어주시는 느낌도 들고, 가볍게 즐겁게 하고 있답니다. 총 6개 대학 연극영화과에 응시했습니다. 결과는 모두 낙방. 공부만 중시했던 학교에, 없던 연극부를 만들어서 교장 선생님과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예술제를 만들었던 열정적인 아들이었는데 말입니다. 본인도 기운이 쭉 빠졌고, 저도 난감했습니다. 실망이 더 큰 사람은 애 엄마였습니다. 전쟁의 전리품이 하나도 없는 셈이 된 것이지요. 세 식구가 상의한 끝에 재수를 결정했습니다. 전리품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내 스텔라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서울 화양동에 있는 모 대학에 예비번호 4번이라도 받은 건 희망을 주신 것이요, 전리품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정성을 다해 기도(企圖)하고 기도(祈禱)한 사람은 뭔가 신호를 받은 모양입니다. 재수가 시작됐고 스텔라는 인천교구 중2동성당에서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를 비롯해 또 수시로 기도발 좋다는 성지를 신나게 찾아다니며 기도(企圖)하고 기도(祈禱)했습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 응답이 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응답이 왔습니다. 지난해 깜빡하고 못 주신 것에 보너스까지 얹어주셨는지 꿈에 그리던, ‘넘사벽’이라 생각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과 합격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아들을 얼싸안고 펄쩍펄쩍 뛰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세례를 받은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아내 스텔라를 통해 체험했지만 정말 기도의 힘은 위대했습니다. 아내의 기도에 기대는 제 자신을 오늘도 반성해 봅니다.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2025-01-19

신기한 10대

“크게! 세우자! 대건!” ‘크게 세우자’는 모교 인천대건고등학교 동문들이 장난삼아 신나게 외치는 구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는 설레는 마음은 입학하던 날부터 시작됐다. ‘그래도 고등학교니까 더 멋있겠지?’ 입학하던 날, 내 눈에 들어온 대건고등학교는 며칠 전 졸업한 선인중학교보다 멋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순간에 날려버렸다.(1998년 연수구 동춘동으로 이사한 모교는 당연히 시설도 좋고 근사하다.) 실망한 기색이 만연한 내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있었다.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녹이 슬어버린 학교 교문 옆에 학교와는 자태가 전혀 다른 웅장한 건축물이 있었던 것이다. 화수동성당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아하, 역시 천주교 학교라서 성당이 큰집, 학교가 작은 집인가?’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생활 내내 일주일에 한 번씩 그 큰집에 꼭 가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금 같은 일요일엔 안 가도 됐다. 정확한 요일은 기억이 흐려졌지만, 주중에 한 번씩 미사를 드리러 갔다. 그렇게 나는 가톨릭교회를 만났다. 어린 시절에는 성탄절에 빵도 먹고 사탕도 먹고 친구들 만나러 가는 재미로 교회를 다녔지만 1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는 반강제(?)로 성당에 가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수녀님이 가르치시는 교리 시간도 있었다. 신기했다. 언제나 신비하고 차분한 모습의 동네 근처 수녀원 수녀님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하느님 얘기, 예수님 얘기, 성모 마리아님 얘기를 하면서 졸고 있는 우리에게 호통치시는 수녀 선생님은 훈육 선생님 다음으로 무서웠다. 더 신기한 것은 교리 시간이 한 주 두 주 지나면서 몇몇 친구들이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확실히 세례를 받은 친구들은 혼날 일이 없었다. 나도 그즈음에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세례를 받은 성당은 학교가 있는 화수동성당도 아니고 집 근처 성당도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우리 동네에서 버스로 40분 정도, 그것도 두 번씩 갈아타고 가야 하는 만수3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예쁜 여학생들이 많다고 나를 꼬드긴, 아니 선교한 친구들이 다니는 성당이었다. 그 성당에서 토요일마다 또 교리 공부를 했다. 주중엔 학교에서 주일엔 다른 동네 성당에서. 이 얼마나 열정적인 예비신자인가? 친구들의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했다. ‘얘가 여기서 여자 친구를 찾는 거 아니냐?’, ‘설마, 쟤가 신부님이 되려고 하는 건 아니지?’ 등등. 모든 추측은 다 빗나갔다.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자라나는 흑심은 다른 데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응원단장을 했던 끼를 마음 놓고 발휘할 수 있는 시간, 바로 교리 시간이 끝나고 이어지는 오락 시간이었다. 나에게 교리 시간은 단순한 요식 행위였고 오락 시간은 정말 즐겁고 신나는 시간이었다. 교리 공부 시간 학생들의 출석률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나의 능력인가? 본당 신부님의 은혜인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아 있다. 매주 성당에 가는 나는 걱정도 없고 매일 신나는 10대였다. 남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 나의 신앙이 돼버렸다. 그렇게 내 꿈을 키워 가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10대는 점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찬미 예수님!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2025-01-12

주님, 자식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엄마들에게 강복하소서(2)

그러던 어느 하루, 한밤중에 두툼한 갈치구이가 너무 먹고 싶어 잠이 안 왔다. 그래서 냉동실에 두 토막 남아있던 갈치를 모두 꺼내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구웠다. 그리고 찬밥을 물에 말아 두툼한 갈치 살과 함께 정신없이 퍼먹고 있는데 잠을 자다 냄새를 맡고 나온 남편이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먹고 있는 내 뒷모습을 본 거다. “뭐해??” 나는 무덤에서 간을 파먹고 있는 구미호처럼, 한 손에 갈치를 들고 남편을 돌아보았다. “밥 먹잖아….” “지금이 몇 신데?” 그 늦은 밤에 내가 왜 갈치를 들고 밥을 퍼먹고 있는지 설명해 준다고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먹을 갈치 뒷면을 아이들에게 모두 뺏겨버린 어미의 슬픈 비애는 어떻게 포장해서 말해본들 ‘쪽팔린 식탐’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날, 두툼한 갈치 두 토막을 야무지게 발라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나 혼자 다 먹은 다음, 몹시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딸기도 달콤하고 싱싱한 건 아이들에게 먹이고 짓무르고 덜 익은 건 내가 먹으며 ‘엄마니까 그래야 하는 거야’라고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나도 맛있고 좋은 거 먹고 싶다’며 억울해하던 철없는 엄마였다. 치킨을 먹을 때도 퍽퍽한 가슴살 말고 닭다리부터 뜯고 싶었지만 보고 듣고 배운 게, 엄마는 아이에게 더 맛있고 좋은 것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고 양보했다. 세상에 어떤 엄마가 애들한테 먹이는 걸 아까워하냐고 한심해할지 모르지만 스물일곱에 엄마가 되어버린, 어리고 미숙한 시절이라 그랬다. 전역한 아들에게 전복을 구워주며, 군대 있을 때 누가 제일 많이 생각났냐고 물었다. “물론, 엄마죠.” “왜 엄마가 제일 많이 생각났어?” “엄마가 해주는 밥, 그게 먹고 싶더라고.” “내가 음식을 좀 잘하긴 하지. 너네 어려서부터, 자장면이고 피자고 집에서 만들어 먹였잖아. 그러고 보면 참 좋은 엄마였어, 안 그래?”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엄마가 해주는 밥은 인간미가 있잖아. 군대라는 곳은 인간미가 없어. 때 되면 먹고 누가 더 먹으라고 챙겨주거나 맛없다고 타박도 못하고 그냥 욱여넣어야 하거든. 그래서 엄마가 해주는 밥이 먹고 싶었어요.” 인간미가 있는 밥. 아이의 표현이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아이들에게 최고의 엄마, 좋은 엄마였다고 자부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인간미 넘치는 밥을 먹여 키웠구나, 싶어서. 내가 해준 음식을 맛있게 싹싹 비우는 아들을 보며 엄마라는 게 뭐 대단하고 거창한 게 아니라 따뜻한 밥을 해서 먹이는 사람, 그 정도로 기억되는 것만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은 곧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을 먹기 전,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그리고 하나 더, 아이들을 위해 오늘도 따듯한 밥상을 차려내는 엄마들에게 강복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5-01-05

주님, 자식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엄마들에게 강복하소서(1)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심란한 마음이 들 때면 음식을 만들었다. 재료를 씻고 다듬어 프라이팬에 굽거나 튀기고, 갖은양념이 들어간 찜이나 탕을 냄비에 끓여 낼 때면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가 심란한 날은 아이들이 포식하는 날이었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요즘, 우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 이불에 파묻혀 누워있고 싶지만, 시장을 잔뜩 봐서 집으로 왔다. 오늘의 요리는 5000원짜리 전복이 들어간 알탕과 곱창볶음이다. 음식 만들기 좋아하는 나의 재능은 엄마와 외할머니를 닮았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집에서 식빵과 과자를 오븐에 굽고 감자를 으깨 속을 채운 크로켓도 만들어 줬는데 ‘왕준련 요리교실’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못하는 음식이 거의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추어탕을 참 맛깔나게 끓였다. 미꾸라지를 한 소쿠리 사와 노란색 낡은 양푼이에 쏟아놓으면 어린 나는 괜히 신이 났다. 미꾸라지를 해감하려고 굵은소금을 양푼이 속에다 촤르르 촤르르 뿌려 넣으면 온몸으로 용트림하는 그 몸짓이 재미나 “할머니 소금 더, 소금 더” 이러며 조르기도 했다. 조선호박을 큼지막하게 숭덩숭덩 썰고 산초가루를 듬뿍 넣어 끓인 추어탕을 이마와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잘 먹기만 해도 “어린애가 뭘 좀 먹을 줄 안다”며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밥이 보약이다.” 추어탕 한 그릇도 보약이고 청국장도 보약이라고. 그 보약을 받아먹고 살아서인지 스무 살에 서울에 올라와 난생처음으로 감기라는 걸 걸려봤다. 할머니와 엄마가 정성껏 만들어 먹인 밥 덕분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아들을 못 낳아 밖에서 아들을 본 할아버지와 산 할머니도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 맏며느리로 살아온 엄마도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려 그 많은 음식을 만들어 먹였는지 모르겠다. 몇 년 전, 아이가 전역하고 돌아온 날 오랜만에 밥상을 차려주었다. 고소한 버터를 녹여 칼집을 넣은 도톰한 전복을 노릇노릇 구워 감자와 버섯을 곁들였는데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사실 나는, 식탐이 많은 여자였다. 어려서부터 복스럽게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먹는다고 별명도 ‘똥뙈지’였다. 그런 나에게 무한 경쟁자, 음식을 양보해야만 하는 걸림돌이 나타난 건 아이를 낳고부터였다. 식탐 많은 내가 누군가에게 빵이나 고기를 양보해야만 하는 일이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 시어머니는 가끔 손질된 갈치를 비닐에 곱게 싸서 구워 먹기 좋게 가져다주셨는데 머리랑 꼬리 부분을 빼면 두툼한 가운데 토막이 기껏해야 두세 개 정도. 유독 갈치구이를 좋아하던 나는 노릇노릇 구워진 갈치를 아이들 입에다 몽땅 발라 넣어줘야 한다는 게 너무 슬펐다. 그래서 갈치의 앞면은 아이들에게 먹이고 뒷면은 내가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제비새끼처럼 입을 쫙쫙 벌리며 맛있게 받아먹고 있는 애들을 보고 있으려니, 나 먹자고 두툼한 살코기를 빼돌린다는 게 어미로서 조금 미안했다. 그래도 먹는 거 앞에서 사람은 치사해지는 법. 나는 독한 마음을 먹고 애들에게 말했다. “김치도 먹고 된장찌개도 먹고 뭐든 골고루 먹어야 튼튼해지는 거야. 그래그래. 생선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 하지만 눈치 없는 첫째는, “엄마, 꼬기 주세요 꼬기!” 이러며 통통한 명란 알 같은 손가락으로 갈치를 가리키곤 했다. 나는 너무 슬프고 분노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갈치 뒷면을 발라 아이의 밥숟갈에 얹어주었다.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5-01-01

부모 입에 고기를 넣어주는 자식

어제는 아들의 두 번째 월급날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고기를 얻어먹었다. 그 얼마 번다고 고기까지 사내라 하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람이 돈을 벌면 고마운 사람에게 고기를 사야 한다. 왜? 인간의 사랑이란, 아가페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입에다 뭘 넣어주는 거다.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퍼부어줄 나이는 19세까지다. 그 이후엔 조건부로 바뀌어야 한다. 부모라고 해서 퍼주기만 하다가는 나중에 후회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엄마는 나에게 엄청난 사랑(돈)을 주셨던 분이다. 그 결과, 어른값도 못 하는 팔푼이가 되었다. 그러다 언니들의 피 토하는 투서로 친정에서 돈이 끊기고 바닥에서 몇 년을 벅벅 기어다니다 조금씩 정신을 차려 독립적인 인간이 되었다.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 아이들이 어렸을 때 오리고기 가공공장에 다닌 적이 있다. 냉동고처럼 추운 작업실에서 오리의 껍질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는 일이었다. 너무 힘이 들어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금요일마다 손에 들려주는 훈제오리와 백숙용 닭이 날 달래주었다. 애들에게 이걸 맛있게 먹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어젯밤, 고기를 구워 내 앞에 놔주는 아들을 보며 참 좋았다. “저는 돈을 많이 벌 거예요”라고 말하는 아들에게 맥주 한잔을 시원하게 들이키며 말해 주었다. “돈을 많이 벌면 물론 좋지. 하지만 그게 맘처럼 쉽진 않아. 중요한 건, 네 힘으로 열심히 살아내겠다는 다짐. 그거면 된 거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은 고기 1인분을 더 주문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를 낳아 키웠다. 목수인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가정을 지키고 보살피는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집을 떠나 자신의 삶을 살게 된 아들을 격려와 응원의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부모의 역할이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한자로 자식(子息)을 이렇게 쓰는데 ‘息’ 자는 ‘스스로 숨을 쉬고 생존한다’는 뜻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식이라는 한자를 ‘自食’이라 말하고 싶다. ‘스스로 일 해 돈을 벌고 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요즘 세상이 젊은 친구들에게 스스로 밥을 벌어먹기에 힘든 건 맞다. 최저시급이 만 원도 안 되고 직장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초봉이 200만 원도 안 되는 곳이 태반이다. 야간수당을 챙겨주는 곳도 거의 없다. 부당함에 대해 말하면 잘리기 십상이다. 일할 사람은 많고 일할 곳은 없다. 월급을 받아도 월세를 내고 나면 통장에 남는 돈도 얼마 없다. 큰돈을 벌기 위해 뛰어든 곳은 빚만 떠안기 일수다. 저 혼자 살아남기도 힘든 세상이지만 그래도 나는 아들에게 고기를 얻어먹는다. 자신을 먹여주고 키워준 부모 입에 고기를 넣어주며 뿌듯해할 그 마음을 아이가 느껴보길 바란다. 그 뿌듯함으로 힘든 세상을 견디고 다음 월급을 받을 때까지 다시 힘을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산다. 일하는 게 힘들고 고달파도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기 위해 버틴다. 그 힘으로 직장이 유지되고 나라가 돌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과 고기를 입에 넣어주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自食’ 스스로 일해 밥을 먹고 살겠다는 마음. 그것을 믿고 지지하고 부모가 있다면 아이들은 결코 연약하지 않다.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4-12-25

우리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다

나는 89학번이다. 무개념 무의식.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대학 문턱을 넘었다. 그때 그 시절,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왜 시끄러운지 나에게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게스 멜빵 바지를 입고 톰보이 가방을 메고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테를 쓰고는 만화책에 나오는 얼빵하고 순진한 아이처럼 나풀나풀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찮게 가투(가두 투쟁)현장에 휩쓸려 아주 죽을 뻔한 적이 있다. 최루탄이 터지고 길가에 깨진 보도블록이 나뒹굴고 있었으며 숨도 못 쉴 만큼 지옥 같은 그곳에서 백골단이 학생들을 질질 끌고 가고 발로 차고 머리채를 잡아 두들겨 패고 있는 걸 봤다. 그 순간 나는, 이유가 있든 없든 무조건 도망쳐야 했다. 나는 미친 듯이 도망가다 좁은 골목길에 숨었고 골목 입구에는 주인 잃은 신발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흐느껴 울면서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꼭꼭 숨어야 했다. 그런데 그날, 여학생 한 명이 죽었다. 이름은 김귀정, 성균관대 학생이었다.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과잉 진압 작전에 떠밀려 압사당했다고 했다. 그때 내가 본 수많은 주인 잃은 신발 중에 그녀의 신발도 나뒹굴고 있었을지 모른다. 사실 나는 치열하게 살지 못했다. 두들겨 맞지도, 어디로 끌려가 보지도 않았다. 안전한 금밖에 서서 구경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의식이 있는 척 흉내라도 내보려 했으나 그건 말 그대로 가식일 뿐이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분노를 삼켜본 적도 없다. 며칠 전에 벌어진 ‘계엄 해프닝’으로 우리 가족 모두 밤잠을 설쳤다. 서울로 직장에 다니는 아들은 새벽 6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하지만 밤새 잠을 설쳐서인지 몇 번이나 깨웠는데도 일어나지 못했다. 알람 소리가 5분 간격으로 시끄럽게 울려대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어떻게 해야 눈을 번쩍 뜨게 할까, 고민하다 아이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내일이 월급날이야. 힘내자!“ 그제야 아들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씻으러 들어갔다. 아무리 일하는 게 힘들고 고달프다 해도 월급날 내 통장에 들어오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다시 한 달을 버티며 살아낸다. 아침마다 고단한 몸을 일으켜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뭐 대단한 걸 바랄까. 자식들이, 가족이, 별 탈 없이 안전한 나라에서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보장해 주지 못하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가.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 애쓰며 사는 국민들이 무슨 죄가 있나. 거리 곳곳에 폐업하는 가게들이 늘어나고 일을 해도 내 손에 돈이 안 들어와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국민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거리엔 주인 잃은 신발이 나뒹굴지도, 지랄탄이 터지지도, 백골단이 토끼몰이하며 학생들을 두들겨 패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살기 좋은 세상이 온 것 같지도 않다. 살아있다면 쉰 후반의 나이가 되어 나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을 언니.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스물네 살 꽃띠다. 그 시절, 전투경찰들이 쏜 지랄탄에 눈물 콧물 흘려가며 부당한 세상에 맞섰던 젊은이들은 어느새 중년의 나이가 훌쩍 넘어버렸다.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살아남았지만, 아직도 그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4-12-15

돈돈 하면 돈(豚) 된다?

누군가 내게, 일을 해 돈을 버는 것과 글을 쓰는 것 두 가지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돈을 버는 것’이라고 대답할 거다. 먹고 사는 일이 내겐 그만큼 중요하다. 나이 쉰이 넘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젠 아이들이 다 커서 예전처럼 악착을 떨고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이 돈이 되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하다. 워낙 책이 안 팔리는 시대라 거기에 기대 살 수는 없다. 가끔 원고청탁이 들어오긴 하지만 원고료가 언제 지급되는지 물어보지 못한 채 글을 써 보내기도 했다. 우리나라 정서상 돈 얘기를 꺼내는 건 왠지 속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서울 봉천동에서 잠시 살았던 적이 있다. 서울에서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 봉천동 산꼭대기에 있는 빌라를 월세로 얻었다. 아토피가 있는 큰아들 때문에 반지하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남편 월급의 반이 월세로 들어가다 보니 늘 돈이 모자라 허덕였다. 그때는 아이들이 어려 내가 일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의 월급 말고는 따로 돈이 들어올 데가 없었다. 하지만 가끔, 가뭄에 단비 같은 돈이 생겼다. 그게 바로 남편의 ‘강연비’였다. 지방에 가서 강연을 하면 교통비까지 해서 20만 원. 서울에서 하면 10만 원 남짓. 그 돈이 들어오면, 우리 가족은 돼지갈비도 사 먹고 애들 데리고 바람도 쐬러 갈 수 있어 그게 참 좋았다. 통장에 돈이 똑 떨어졌던 어느 날, 남편에게 강의 제안이 들어왔다. 서울 변두리에 있는 어느 성당에서였는데 보통 성당에서 강연을 하면 주임 신부님이 알아서 강연료를 챙겨주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쩔 땐 강사비를 못 받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어쨌거나 그날 아침, 애들도 나도 신이 나 남편을 따라나섰다. “아빠 일 끝나면 우리 맛있는 꼬기 먹자~~.” 미사가 끝날 때까지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과 기다리고 있는데 강연을 마치고 걸어 나오는 남편의 표정이 왠지 어두워 보였다. “강사비는 받았어?” “별말이 없네. 좀 기다려 보자.” “뭐야, 그런 게 어딨어?” 성당 마당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주임 신부로 보이는 분이 느릿느릿 걸어나왔다. 그리고는, 애들 머리를 한 번씩 쓱쓱 쓰다듬어 주더니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저 말은 강연비 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주말에 사람을 불러내 일을 시켰으면 당연히 줘야 할 돈이었다. 우리는 약속이 있어 그냥 가보겠다 말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나왔다. 그날, 아이들에게 돼지갈비를 사주지 못해 얼마나 미안하고 초라한 기분이었는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일을 하면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지만 혼자 속앓이를 하면서도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곱창집에서 일을 할 때, 외국인 노동자들이 몇 달째 월급을 못 받고 있다며 울분을 토하는 모습도 보았다. 가끔 TV 프로에서 우스꽝스럽게 써먹는, “우리 사장님 나빠요”라는 말이 실상은 참 가슴 아픈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런 말을 서슴없이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원고료는 언제 입금되나요?’ ‘그 일을 하게 되면 얼마를 줍니까?’ 그건 돈에 대한 것이기 이전에 부당함을 거부하겠다는 의지이다. 봉사나 재능기부 같은 일도 스스로 원하고 합의 된 이후에 하는 것이 맞다. 일을 시키는 상대가 그걸 판단하고 정해서는 안 된다.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은 종교만큼이나 성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4-12-08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주말이라 조용히 공원 산책이나 할까 싶어 나선 길, 저만치 앞에서 아저씨 한 분이 벤치에 앉아있는 젊은 남녀에게 뭔가를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얼른 지나가려 했지만 티 나게 빨리 걸은 게 오히려 눈에 띄었던지 아저씨가 방향을 획 틀더니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예수 믿으세요. 불신지옥! 아시죠?” 아저씨는 계속 따라오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었지만 웬만해선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조용히 산책하며 이런저런 생각 정리나 좀 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짜증이 확 솟구쳤다. “예수님 믿어야 천국 가요. 이거 읽어보면 다 나옵니다.” 화를 꾹꾹 참으며 처음엔 점잖게 말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그만 따라오세요.” 하지만 아저씨는 껌딱지처럼 내 곁에 달라붙어 계속 말을 시켰다. 할 수 없이 나는 아저씨 쪽으로 돌아서서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아저씨. 예수님 믿으면 진짜 천국 가요?” “그럼요. 천국 갑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저희에게...” “그러니까 언제든 믿기만 하면 된다는 거잖아요.” 갑자기 내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잠시 주춤하는 아저씨. 그 틈을 노려 쐐기를 박았다. “그럼 전 죽기 하루 전부터 믿을게요. 언제든 상관없다 그러셨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따라오지 마세요. 아셨죠?” “아니 그래도,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고...” 손에 전단지를 잔뜩 들고 서있는 아저씨를 바라봤다. 후줄근한 차림에 볼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마른 얼굴. 언제든 천국이 보장된 삶을 사는 사람치고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저씨 손에 들린 ‘불신지옥’ 종이를 받아주고 잠시 얘기라도 들어주면 될 일이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도 하느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지만 여태 살면서 누구에게 성당을 다녀야 구원받는다는 말을 해본 적 없다. 하물며 내 자식에게도 말이다. 첫째는 불교 쪽이 끌린다기에 그럼 절에 다니라 했고, 군대에 들어가 늘 배가 고팠던 둘째는 초코파이를 얻어먹기 위해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고 했다. 본인의 선택으로 믿기 시작한 종교가 아니라면 별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자기가 믿는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고 불지옥에 간다고 겁을 주는 건 일종의 협박이다. 그러므로 내가 좀 전에 한 행동은 ‘정당방위’라 볼 수 있다. 영화 ‘신과 함께’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승에서 진심어린 용서를 받은 자는 저승에서 누군가가 다시 심판할 자격이 없다.” 죄를 지었으면 죽기 전에 잘못한 사람에게 용서받아야 하는 거지, 실컷 죄짓고 살다가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저 교회 목사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전단지에 나와 있는 번호로 전화해서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이 추운 날, 사람들 내보내 고생시키지 말고 당신이나 부끄럽지 않게 사세요. 믿지 않아 지옥을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남들에게 무엇을 잘못하고 사는지 모르기 때문 아니겠어요? 올바른 종교는, 전단지 나눠주며 겁이나 주는 게 아니라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오늘 하루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몸소 보여주는 겁니다. 신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지 구원 팔이나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라고 입을 놀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야산에 파묻힐 수 있으니, 일단은 안 하는 걸로. 아저씨는 불신지옥에 떨어질 나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노상 전도의 발걸음을 돌렸다. ‘천국에 가기 위해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은 따르지 않으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공허한 헛소리가 종교라는 이름을 달고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평화로운 주말 아침을 망쳐놓지도 말고!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4-12-01

왜왜왜 우리가 왜!

수원역 북스 리브로에 주문해 놓은 책을 찾아 나오는데 멀리 버스 정류장에서 싸움판이 벌어진 게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단속반이 나와 노숙인들을 거칠게 쫓아내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빈 박스를 깔고 앉아 술을 마시거나 누워있는 노숙인들이 모여있었고 어떨 땐, 어린아이가 엄마와 함께 앉아있기도 했다. 그곳에서 풍겨 나오는 역한 냄새 때문인지 버스를 기다리며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 중 누군가 민원을 넣어서인지 가끔 단속반에서 나와 실랑이가 붙곤 했다. 한참을 고성이 오가다 그들 중 한 남자가 갑자기 웃통을 훌떡 벗어 던지더니 경찰에게 맞섰다. “왜 왜 왜 우리가 왜!!!”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으니 단속반도 더 이상 강압적인 행동을 하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웃통을 벗고 달려드는 아저씨와 경찰들 사이에 껴서 싸움을 말리던 노숙인 한 분이 갑자기 ‘왜왜왜 아저씨’의 뺨을 냅다 갈겼다. “정신 차려 새꺄!!!” 뺨을 맞은 아저씨의 눈이 벌게졌다. 계속 이렇게 맞서다가는 경찰서로 연행될지도 모르니 먼저 선수를 친 게 아닐까 싶었다. 우르르 몰려있던 노숙인 중 한 명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던 박스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다른 누군가는 막걸리 통을 주웠고 내 곁에 서있던 할아버지는 분하다는 듯 버스 정류장 쇠기둥을 맨손으로 퉁퉁 쳐댔다. 거기서 쫓겨난 사람들은 수원역 지하도로 자리를 옮기거나 골목에 숨어서 단속반이 가기만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보고 서 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왜 왜 왜 우리가 왜!”라고 부르짖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계속 마음을 긁었다. 아마도 이런 말이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왜 우리가 여기서 쫓겨나야 하는지 말해 보란 말입니다!” 단속반도 거기에 서 있던 많은 사람도 그 질문에 어떤 답을 해줄 수 있을까. 민원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냄새나고 불쾌하니 당신들이 여기서 물러나는 게 맞다고 말한다면 그게 답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건 질문이 아닌 항변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같은 노숙인도 이런 식으로 함부로 쫓아내고 몰아내선 안 되는 거라는. ‘함께 사는 사회, 더불어 행복한 사회’ 이런 아름다운 문구들이 거리 곳곳에 붙어있지만 우리는 과연 그런 것들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불편함을 감내하더라도 다른 누군가를 배려하고 함께하려는 마음에서 오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며칠 전, 맨발로 찾아온 노숙인에게 신발을 사서 신겨 보낸 가게 주인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열심히 일해 신발값을 꼭 갚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는 이야기. 누군가의 이런 작은 선행 속에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주님을 본다. 거창한 무엇이 아니더라도 이런 작은 배려와 따듯한 마음이 누군가를 살리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4-11-24

우리 어머니 신나셨네!

나의 세례명은 비비안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영세를 받았고 주일마다 꼬박꼬박 미사에 나갔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도 나는 성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로 기도를 드렸으며, 대학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가기 전날도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하느님!”이라며 성당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친정과 시댁 모두 골수(?) 가톨릭신자라 결혼식도 성당에서 했고 두 아이 모두 유아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엄마가 새벽 미사 드리러 가는 소리를 듣고 자란 나의 신심은 한 마디로 굳건했다. 그랬던 내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성당에 발길이 뜸해지다 어느날부터인가는 미사 참례를 전혀 하지 않게 됐다. 주일미사에 나가지 않는 건 대역죄를 짓는 거라 생각하는 시어머님은 이런 나를 보며 가슴앓이를 하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어려서부터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듣지 않고 자란 이유는, 하라면 더 하지 않는 내 성격을 부모님도 아셨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머님이 자꾸 가라고 하니 더 가기 싫어졌다고나 할까. 거기다 변명을 조금 덧붙여 보자면 주말에도 일을 하고 있어 미사에 참례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나는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주말에도 일을 하고 있어서 미사에 참례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전에는 잡지사에서 편집 에디터와 기사 쓰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출퇴근 시간이 5시간 가까이 소요 되다 보니 도저히 못 하겠다 싶어 그만뒀다. 하지만 어머님은 아직도 내가 잡지사에 다니고 있는 거로 알고 계신다. 며느리가 편의점에서 밤을 꼴딱 새우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 가슴 아파하실까 봐 그냥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11월부터 가톨릭신문에 칼럼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때가 된 것인가!’ 계속 핑계를 대며 성당과 멀어지고 있는 나를 하느님이 더 이상 두고만 보실 수 없다, 생각하셔서 이렇게 불러주신 게 아닐까, 하는. 미사에 참례하라며 어머님이 수시로 보내오는 문자 중에 제일 나중 것을 읽어 보았다. ‘어멈아, 이번 주부터는 주일미사 나가야 해. 일주일에 1시간을 참석 안 하면 어떡해. 내가 지쳐서 어멈 때문에 소화가 안 돼. 오늘부터 꼭 실천해.’ 어머님이 나 때문에 소화도 안 되신다는데 어찌하겠나. 편의점에서 퇴근하고 오면 잠이 쏟아지겠지만 주일미사에는 어떻게든 참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랜만에 동네 성당을 찾아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고 예쁘게 꾸며져 있는 화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어머님께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 ‘어머니, 저 이제 미사 열심히 나갈게요. 걱정 마세요.’ 그러자 어머니에게서 바로 답변이 날아왔다. ‘잘했다. 고마워. 빠지지 말고 잘 다녀. 너무 기쁘다 어멈. 사랑해.’ 우리 어머니, 완전 신나셨다. 평생을 신앙생활 안에서 살아오신 분이라 며느리가 미사에 참례 안 하는 것 때문에 속을 많이 끓이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 때가 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누가 등 떠밀어서 억지로 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다고 제가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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