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신앙도 신앙이더라

가톨릭신문으로부터 연재 요청 메일을 받고 걱정이 앞섰다. 과연 내 글이 신문에 실릴 만한 수준이 될까. 16개월 아기를 보육하며 틈틈이 원고를 써봤고 이 원고로 연재할 수 있을지 여쭈는 메일을 보냈지만, 며칠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남편은 바빠서 그럴 거라며 기다려보라고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가라앉았다. ‘하긴, 다른 필자분들은 정말 엄청난 분들이던데. 난 신앙심도 얕고 겪은 일도 평범하니 나라도 안 싣겠다.’ 내심 위로하며 포기하려던 그때, ‘일요한담’에 글을 실을 수 있다는 기쁜 답신이 도착했다! 나도 모르게 돌고래 소리를 내지르며 좋은 글을 쓰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치고 나니 ‘그래, 기쁠 때 기도할 정도면 신앙심이 아예 없진 않지!’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사실 나의 신앙생활은 억지로 부모님 손에 성당으로 끌려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부모님은 오랜 냉담을 풀고 가족 모두를 데리고 성당에 가셨다. 그땐 성당 건물이 없어 비닐하우스에서 미사를 드렸고 부모님은 냉담으로 성체를 모시지 못해 부끄러워하셨다. ​그 후 엄마는 성당 노인대학 교사까지 맡으며 누구보다 열성적인 신자가 되셨다. 그리고 주말마다 텔레비전 앞을 지키던 나를 성당으로 이끌었다. 미사와 주일학교를 빠지면 무서운 엄포가 떨어졌기에, 나는 ‘똥 씹은 표정’을 하면서도 매주 성당에 가야 했다. 미사 중 딴청을 피우고 친구와 떠들다 교리 선생님께 혼나면서도 꾸역꾸역 자리를 지켰고,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의 끈질긴 권유에 이끌려 잠시 교리교사 활동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마음의 한계가 찾아왔고, 나는 엄마에게 선언했다. “나도 이제 성인이야! 내가 공부해보고 믿든지 말든지 알아서 할게!” ​당연히 나는 일절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누군가 종교를 물으면 떳떳하게 ‘천주교’라고 답했다. 그 답을 들은 상대방이 나를 청초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바라봐 주길 바라는 추잡한 욕망 때문이었다. 성당도 안 가면서 천주교인이라는 껍데기만 탐냈으니 양심에 찔렸지만, 잠깐의 죄책감이 나를 공부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다 내 안에서 우울과 무기력의 전쟁이 터졌고, 나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서야 나는 가족들과 모여 앉아 다시 기도를 시작하고 성당을 찾게 되었다. 힘든 상황에 부닥쳐서야 하느님을 붙잡은 셈이다. ​그래도 스스로 성당에 발을 들인 후부터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성경 공부를 하고 피정도 다녔다. 생각해 보면 참 많이도 돌아온 길이지만 이 역시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었던 듯하다. ​이후 나는 바라고 바라던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취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 시절 잠시 친하게 지냈던 선배 오빠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게 된다. 독실한 교회 오빠였던 그 사람과 만나 결국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보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해 볼까 한다. 글 _ 마예은 엘리사벳(웹툰작가)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22면

온실 속 화초의 자포자기 기도 이야기

대학을 졸업하고 운이 좋게 우리나라 사람이면 대부분 알 만한, 그러나 인지도에 비해 연봉은 결코 높지 않은 회사에 입사해 일하며,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분명한 진리를 깨달았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 나는 일을 못 한다.’ 뼈아픈 진리를 깨달았지만 어렵게 취업한 회사이기에 그만둘 생각은 마음에만 간직한 채 안개 속을 걷듯 출근하던 날들이 이어졌다. 때마침 회사에서 외부 인사를 초청해 전 직원에게 강제로 강의를 듣게 하였다. 주제는 꿈. 강의가 끝나고 이어진 이사님과의 면담에서 나는 어릴 적 막연히 꿈꿨던 만화가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는 꿈이 뭔가?” “저는 … 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이사님의 지시로 만화를 그리게 된 나. 일상툰을 그리다가 내가 어릴 적부터 다니던 성당과 가톨릭 이야기를 친근하게 만화로 그리고 싶어졌고, 틈틈이 그린 만화로 잡지에 연재하게 되었다. 연재를 하면서도 언젠가 가톨릭신문에 웹툰을 연재하고 싶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는데, 무심히 메일을 확인하던 중 가톨릭신문의 ‘일요한담’ 연재 청탁 메일을 발견했다. 자신의 삶과 신앙의 경험을 자유롭게 풀어가면 된다는데, 일상툰을 그리다 가톨릭 만화를 그리게 되고 가톨릭신문에까지 연재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삶과 신앙의 환상적인 콜라보가 아닌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n년의 내 인생. 돌아보면 누군가에겐 굴곡이 별로 없는 무난한 인생으로 보일 수도 있다. 부모님 아래에서 평탄하게 자라 취업하고 결혼해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온실 속 화초 같았던 나는 남들은 쉽게 넘길 일에도 깊이 좌절하고 길을 잃곤 했다. ‘나는 왜 이런 별일도 아닌 일로 이렇게나 힘들어하는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거창한 불행은 없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이 매일의 전쟁이었다. 남들에겐 하찮을 고민이 내겐 삶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 중대해 기어코 부모님께 대학을 그만두고 싶다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가족은 과학과 신앙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는 낮에는 병원에 가고 저녁에는 가족들과 모여 앉아 기도를 하게 되었다. 각자의 활동으로 기도를 한 적은 있어도 가족이 모두 함께 기도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색했던 온 가족의 기도 시간. 성모상 앞에 무릎 꿇은 가족들의 바람은 모두 달랐겠지만, 당시 의지 제로였던 나의 바람은 이랬다. ‘주님 뜻대로 하세요. 난 어떤 게 좋은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 기도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든 일이 술술 풀리고 원하는 바를 이루었답니다’라고 이야기가 끝난다면 내가 믿는 가톨릭은 사이비일 것이다. 그 후에도 내 마음속 전쟁은 지지부진 끝이 요원해 보였지만 결국 종전은 왔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우울과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엄마의 강요로 억지로 이어오던 모태신앙이었지만 내 마음속 전쟁에 평화를 가져다준 것은 결국 신앙이었고 지금 살면서 제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알아서 좋은 길로 이끌어달라 했던 내 기도도 들어주신 듯하다. 앞으로 나는 8주간 ‘일요한담’으로 여러분을 뵙는다. 웹툰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신앙은 물론 재미도 담도록 노력하겠다. 잘 부탁드립니다, 독자분들 그리고 하느님! 다음 주는 억지로 다녔던 성당 이야기입니다. 글 _ 마예은 엘리사벳(웹툰작가)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22면

둔감하고 뻔뻔해도, 작은 몫의 빛이 되길!

올해 2월, 학회 발표를 위해 오랜만에 일본에 갔다. 종교와 평화 관련 학회라 참여자들은 가톨릭, 개신교, 불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 배경을 지녔고,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평화로운 태도가 배어 있었다. 가톨릭 신자는 세 명이었는데, 그중 한 분이 숙소에서 가까운 성당을 찾았다며 다음 날 새벽미사에 함께 가겠느냐고 물으셨다. 종일 진행된 학회에 피곤했지만, 반갑게 약속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는데, 번쩍 눈을 떠보니 아침이 되었다. 5시 47분, 화들짝 깨어 옷만 챙겨 입고 후닥닥 뛰쳐나갔다. 오전 6시 미사에 간다고, 알람을 오후 5시 반에 맞췄던 거다. 다행히 성당은 걸어서 3분 거리에 있었고, 언제나처럼 성모님이 작은 아이를 안고 고요히 나를 맞아주셨다. 환대하는 성모상을 지나 들어간 대성전은 어두웠다. 바로 옆 작은 경당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쫓아 들어서니, 중년 남녀 두 분이 신부님과 함께 제대를 바라보며 기도문을 읊고 계셨다. 성무일도의 아침기도 중이신 듯했다. 기도를 마치자, 직접 미사 준비를 하러 초로의 신부님이 일어나셨다. 그때 드러난 갈색 옷과 두건, 깜짝 놀랐다. 내가 틈날 때마다 가는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자주 보던 수도복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어리더니,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어 미사 내내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일본인 세 명과 한국에서 온 세 이방인이 함께 드린 그 미사는, 내게 평생 기억할 순간이 되었다. 일본의 가톨릭 신자는 전체 인구의 0.35% 정도이다. 그토록 소수인 성당이 숙소 바로 옆에 있었다는 것도, 그 성당이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라 사는 수도회였다는 것도 단순한 우연 같지 않았다. 새롭게 감지한 평화의 사도 프란치스코, 평화를 찾던 내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미사가 끝난 후, 나는 처음 본 세 일본인 앞에서 주체할 수 없던 눈물을 닦으며 선언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르기로 결심했노라고. 그동안 나는 교회에서 평화를 강의할 때면, 깊이 알지도 못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얘기하며 새와 대화하는 그림을 보여주곤 했다. 팬데믹으로 미사가 중단됐을 때나 본당 미사를 놓치면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으로 가서 미사 참례를 했고, 특히 신부님 강론이 좋아 월요일마다 갔다. 거슬러 생각해 보니, 그곳은 평화 활동을 금기시하던 정권하에서 모든 곳이 장소 대여를 거부할 때 공간을 내준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게다가 제주에서 진행하는 평화캠프도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해왔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내가 평화를 따지러 간 본당에서 첫 시작을 동반해 주신 분도 프란치스코 신부님이셨고, 내게 감동의 구절과 순간을 보여주신 분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아니시던가. 내 삶에 가득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을 그렇게 강렬하게 울어내야 알아차리다니.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인 이때, 이토록 둔감한 나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끈질긴 주님이시다. 이리 둔하게 나를 내셨으니, 끝까지 책임지시겠지. 이리 뻔뻔해도 애타게 사랑하시니, 나 또한 사랑할밖에. 덜렁대고 헤매도 눈부신 빛으로 내 갈 길을 비추시니, 그 큰 빛에 기대어 조금씩 나아갈 수 있으리라. 나를 스친 인연들에 진 큰 빚을 작은 몫의 빛으로나마 비출 수 있기를! 그동안 그리고 앞으로 함께해 주실 모든 분의 평화를 빌며, 이 뜨거운 여름의 막바지 인사를 전한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22면

희(喜)를 찾아서

이번 여름, 다시 평화의 섬 제주에 다녀왔다. 3년 전, 국제평화학과 가톨릭교육학을 접목해 만든 평화교육 프로그램인 ‘삶을 살리는 평화캠프’의 첫발을 떼었다. 교육 현장의 중심이 아닌 시민 단체와 교회 기관에서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지 미지수였는데, 서귀포 강정마을의 평화센터에서 시작한 평화캠프가 벌써 세 번째 시즌을 맞았다. 특히 이번에는 지난해 참여한 멋진 청년들의 주체적 역할이 더해져, 다양한 참여자들과 함께 더욱 풍성하게 구성되었다. 언제나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삶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반갑고 신비롭다. 더욱이 첫 캠프에서 청소년으로 만났던 친구가 청년으로 성장하고, 또 친구까지 초대해 같이 온 모습을 보니 더욱 기뻤다. 첫 평화캠프의 소중한 기억, 그중에 자꾸만 떠오르는 한 얼굴이 있다. 활기찬 얼굴로 재잘거리던 ‘희’의 모습이다. 왠지 SNS 활용을 두려워하는 나는, 참여자를 모집할 때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던 이전 참여자들에게 조심스레 소식을 전하며 안부를 전한다. 그때마다 항상 가장 기쁘게 응답하던 희와 어느 날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안읽씹.’ 대학 입학을 앞두고 평화캠프에 참여했던 희가 신나게 청춘을 즐기느라 카톡을 읽을 틈도 없나 보다 가벼이 넘겼는데, 희와의 채팅창에서 1이 한참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얼마 후, 희의 전화번호가 바뀌고 연락도 두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개인정보가 도용되고 사기를 당했다는 거다. 아, 왜 힘든 환경에 힘듦은 더 쉽게 겹쳐지고, 열악함은 쉬운 공격의 대상이 되는 걸까. 좀 더 자주 연락해 볼 걸 그랬나. 온갖 자책과 염려가 쌓인다. 내가 평화교육을 통해 만난 이들은 참여 동기부터 성장 배경까지 다양했다. 평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활동을 겸비한 청년부터 그저 단순하게 지인 추천으로 여행객 모드로 온 청년, 탄탄한 직업을 지닌 청년과 진로를 탐색 중인 청년, 부모 없이 시설에서 자랐거나, 가까운 가족에게 폭력을 당하며 자란 청년, 분쟁 지역을 떠나 바다 건너 먼 나라로 피난을 온 청년까지, 그런 색다름은 서로에게 더욱 다채로운 배움을 주었다. 구획 지어진 교육 현장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의 만남이 주는 혜택은 엄청난 자원이 되지만, 평화에 대한 고민이 현실의 억울함과 비탄한 삶을 마주하면 다시 어쩔 수 없이 ‘왜 그런 세상이냐’고 또 주님께 묻게 된다. 때론 버려지고 때론 도망쳐야 하는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는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나 밝게 자라며 꿈을 키워가기도 한다. 그런데 돌봄의 빈틈을 이용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다시 맨땅에 내동댕이치고 황야로 내쫓는다. 그리 기쁘게 웃던 희가, 어쩌면 그렇게 희망을 잃었을까 봐 겁이 난다. 아이에겐 잘못이 없다. 미숙한 어른이, 또 그런 어른을 키운 그 위의 어른들이 만든, 그런 잘못된 세상을 방관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평화를 공부한 거다. 그 잘못된 회로를 끊어낼 수 있는 끈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만난 걸 거다.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런 희망의 회로가. 주님은 구체적인 상황과 사람 안에서 기적을 행하시기에, 알게 모르게 구성한 다양한 관계망이 결국 우리를 살릴 거다. 희야! 연락 한번 줄래? 우리가 함께 웃던 그 시간에 기대어, 같이 가 보자! 다시 기쁜 시간을 살아갈 희(喜)를 찾아서, 이 글을 띄운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22면

가톨릭 학교의 이상한 사람들

“엄마는 왜 그렇게 성당에 가요?” 평화를 찾아다니다 어느덧 매일미사가 일상이 된 어느 날, 처음 받은 어버이날 편지에 꾹꾹 눌러쓴 아이의 글씨는 내 맘에 또렷이 새겨졌다. 그러게, 그렇게 가던 성당에서 만난 주보 안의 가톨릭 학교 간지는 내 맘을 또 가로챘다. 어떻게든 살아낼 스펙을 쌓겠다고 유명 대학원 원서를 쓰던 그때, 하느님에 대한 궁금함이 세상의 이치를 이겼다. 결국 돈 안 되는 공부를 하러 대출을 받아 가톨릭 대학원에 입학했다. 처음으로 스스로 찾은 학교, 함께하는 동료들의 지식에 감탄하며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는 즐거움에 마냥 기뻤다. 아이를 키우던 나는 교육을 중심으로 탐구했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오가는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과제를 썼다. 내 지도교수가 된 신부님은, 그런 내가 아이에게 읽어 준 그림책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도 칭찬하는 ‘고래도 춤추게 하는’ 분이셨다. 그런 분께 “신부님도 60년대생이시죠?”라며, 내가 존경하던 세대의 이중성에 대한 실망을 투사하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엉뚱한 힐난에도, 깜짝 놀란 눈으로 곰곰이 새기시던 맑은 눈빛이 떠오른다. 또 성인의 영성에 대해 강의하던 한 신부님께는 장문의 항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호기심을 결코 참지 못하는 내가 한 질문에, “여러분 수준에서는 아직 몰라도 돼요”라고 한마디하셨던 탓이다. 거센 질책을 보냈는데, 정중하게 사과를 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철저하게 가난을 사는 영성의 대가셨다. 내가 만난 첫 가톨릭 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가톨릭 학교, 평화교육과 연구를 위해 교사로 갔던 학교에서 오히려 학부모로서의 감탄을 안고 돌아왔다. 내가 갔던 가톨릭계 일반 고등학교는 큰아이가 다니던 학교와는 정반대였다. 동물을 좋아하던 큰아이는 방학 중에도 매일 학교에 가서 실험을 하더니 전국 1등으로 국제대회에 나갈 정도로 과학에 열중했다. 그런데 담임과의 상담에서 들은 한마디는 나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다른 학교에 갔다면, 참 사랑받았을 텐데요.” 이게 무슨 뜻이지? 그럼 지금 학교에서는 아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인가? 교사의 말인즉슨 명문대 입학 요건이 부족한 아이에게 관심을 둘 수 없단 뜻이었다. 과학 중점 학교지만 과학보다 성적이 중요했고, 인간보다 성과가 먼저였다. 그런데 내가 갔던 가톨릭 학교는 달랐다. 꼴찌를 하고, 학교를 빠지며, 말썽 피우는 아이를 위해 밤낮없이 고민했다. ‘그 누구도 저버리지 않는 교육’을 실현하는 공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수녀님과 교사의 모습에 그저 눈물이 났다. 그 경험 덕분에 가톨릭의 ‘가’자만 들어도 도망치던 둘째 아이를 겨우 얼러서 가톨릭 학교에 지원했다. 운 좋은 아이는 추첨이 되었고, 싫다던 기숙사 체험에 가자마자 축구화를 보내 달라며 신이 났다. 철학 교사인 신부님을 보고 “저렇게 잘생기고, 성격도 좋고, 똑똑한데, 왜 신부가 됐는지 이해가 안 간다”더니 그 신부님이 좋아서 견진성사를 받았고, 가장 행복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다. 가톨릭 학교에서 나는 실력도 태도도 엉망인 꼴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하고 달래며 응답하는 이상한 사람이 가톨릭 학교에는 가득했다. 그런 이상한 사람들 덕택에, 가톨릭 학교는 내 교육 ‘맛집’이 됐다. 맛집이 붐비는 건 좀 아쉽지만, 맛난 건 같이 나눌수록 더 좋다는 걸 이제는 좀 알게 되었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22면

한 우주가 온다

그 아이를 만난 건,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였다. 당시 나는 국제평화학을 공부하고 평화 활동에 몰두했지만, 특정 전문가 내에만 머물던 한계와 모순을 고민하며 잠시 멈췄다. 그동안 우연히 둘째 아이의 학교에서 봉사하다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 교육을 비판하더니 교육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하느님께 따지더니 가톨릭교육에서 평화교육을 탐색했다. 결국 나를 겸손히 내려놓게 하는 것은 세계적인 대학도 아니었고, 주님 안에서의 공부였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기는 많은 활동을 집 안에서 하는 비대면체제로 전환됐고, 덕분에 어린아이를 키우던 나는 돌봄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내던 2020년, 성탄을 앞둔 어느 날 고해를 했다. 마침 새로 부임하신 신부님은 내게 선행을 하라는 보속을 주셨고, 그때 들은 ‘선행’이라는 단어는 유독 어렵게 다가와 무거웠다. 그 의미를 성찰하면서, 개인·가정·사회 차원의 선행 목록을 작성했고 그중에 시작한 것 하나가 교육 봉사였다. 그동안 배웠던 것들을 활용해서 평화교육 프로그램을 설계했고, 여러 지역에 있던 학교 밖 청소년이라 불리는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학교 안에서보다 더욱 반짝이는 눈빛과 열정을 보았다. 그 반짝임 중에 있던 그 아이, 우리가 함께 읽었던 책을 바탕으로 멋진 프로젝트를 기획해 전시를 열었고 나를 초대했다. 기쁜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갔다. 열심히 사는 아이의 모습이 온통 담긴 전시는 정말 뜻깊었다. 같이 사진도 찍고, 카페에서 즐겁게 수다를 나누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말했다. “이렇게 멋진 일을 끝내면, 오늘은 정말 좋단 말이에요. 근데 저는 또 내일 죽을 걸 생각해요.”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알지 못하던 자살에 관한 이야기는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제네바 국제기구에서 무급으로 인턴 생활을 하면서 실직한 가장들의 비애를 짐작해 본 경험은 있지만, 자살에 대한 고백을 이리 담담하게 내 앞에서 얘기하는 현실의 아이를 만날 줄은 몰랐다.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질문과 대화를 이어가려 노력했지만, 나의 당황함과 어쩔 줄 모름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을 터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자살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조금씩 공부했다. 모르던 삶과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자살 예방 교육도 받았다. 몇 년 후, 다행히 잘 살아내고 있는 이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갑자기 연애를 한다고 고백했다. 너무나 축하할 자리에서 나는 또 당황했다. 성소수자, 내게 모르던 세상을 가지고 다시 온 거다. 아니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평화를 공부했던 아일랜드는 가톨릭국가임에도 동성혼이 합법화되었고, 그때 만난 친구의 경험을 통해 이미 감정적으로도 충분히 공감한다고 믿었는데 아니었다. 또 책을 찾아 읽었고, 성소수자를 위한 미사에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내게 다른 우주를 자꾸만 가져온다. 우리는 흔한 통념으로 학교를 잘 다니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견디고, 정해진 성으로 살아야 함을 규정으로 여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은 다양한 이슈와 삶의 문제를 지니며, 어떤 이는 더 어려운 상황들을 온통 마주하며 겨우겨우 버틴다. 그런 우주를 나는 이 아이를 통해 만난다. 나의 배움은 사람에게서 온다. 한 사람은 온 우주를 안고 오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우주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선행의 하나일 것이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22면

내게로 보내신 아기

모든 아기는 정말 신기한 존재다. 인간 근원으로부터 존재에 대한 찬미와 순수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아기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내가 미국에 머물 때였다. 당시는 시민권 획득을 위한 원정 출산이 한창 유행하던 때라, 아이를 낳고 귀국할 수 있겠다며 주위의 부러운 눈길을 받기도 했다. 특히 남자아이일 경우, 병역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게 덤으로 주어지니 당연한 선택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나는 가족이 없는 땅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내가, 나의 엄마인 할머니의 사랑과 지혜 없이 아기를 낳고 키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더욱이 편법은 싫고, 군대도 필요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곧 오리라 믿었다. 그렇게 귀한 생명을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매콤한 낙지볶음도 먹고, 모국어로 자유롭게 소통하며 동네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으니 더욱 편안했다. 그런데 아기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서둘러 세상에 왔다. 아직 폐가 완성되지 않았을 시기라 급히 종합병원으로 옮겼고, 나는 열이 40도까지 오른 상태로 꼬박 하루를 진통한 끝에 첫 아이를 만났다. 의사들의 염려와 달리, 아기는 다행히 숨도 잘 쉬었고 크고 건강했다. 위험할 만큼 출혈이 심했다지만 그런 상황은 이미 흘러갔고, 그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가 내 품 안에 놓여 있다는 것만 보였다. 아기는 젖을 빨 힘이 부족해 마냥 울기도 했고,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에 놀라 깨기도 했다. 그러던 아기는 어느새 말을 하고 걷기 시작하더니, 바람을 쌩쌩 가르며 두발자전거를 탔다. 품 안의 아기는 아이가 되었다. 마구 달리는 아이를 따라가기 위해 자전거를 배웠고, 아이의 말 속에서 “아하!”를 외치며 순간의 진리를 발견했다. 엄마에게 첫 아이는 세상에서 최고로 예쁘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슈퍼 천재’다. 그리고 둘째 아이를 낳고 보니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아기가 또 존재할 수 있다는 데에 깜짝 놀랐다. 그런 아기도 성장 과정을 거치며 때론 깨어지고 또 빛난다. 동시에 엄마를 깨우치고 깨지게도 한다. 세상 모든 아이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 독립심을 키우며 엄마의 틀을 깨고 나간다. 사춘기 아이를 걱정하던 나에게 “엄마 말만 잘 들으면, 엄마처럼밖에 더 되겠어?”라고 하시던 내 스승의 말이 떠오른다. 엄마의 부조리함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해 온 아이는, 어리숙하고 무딘 엄마가 꼰대가 되지 않도록 날카롭게 지적하고 반항하며, 새로운 세대의 원리를 알려주고, 세상을 배우는 동시에 또 바꾸어간다. 그런 나의 첫 아이가 훌쩍 커서 군대에 갔다. 입대하고 딱 1년이 지난 지금,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기대했던 만큼 평화롭지 않다.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 다시 전쟁이 난무하고, 난 내 아이와 세상의 모든 아이를 걱정한다. 노인이 된 나의 엄마가 그렇듯이, 엄마에게 자식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에게서 아이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이 구유의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듯이, 요람 속의 아기는 결국 우리의 스승이 된다. 주님은 가장 가까이서 서로를 돌보고 배울 존재로, 우리에게 새로이 고유한 아기를 보내신다. 그 순리의 과정에서 결국 구원으로 닿으리라 믿으며, 세상의 모든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2면

처음으로, ‘스승’을 만나다

학창 시절, 매해 다가오는 스승의 날이면 뭔가 학급에서 행사를 기획하거나 선물을 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스승의 날에 특별히 챙기고 싶은 선생님이 없었다. 딱 한 명 평생 찾아뵐 교사로 여겼던 초등학교 때 담임은 당시 무슨 행동인지 인식도 못 하던 어린 나에게 성추행을 했었고, 내가 경험한 대한민국의 학교는 위계로 가득했다. 주어진 지식을 넘어선 질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질문이 닿지 않으니 진정한 소통과 존중이 생겨날 틈도 없었다. 그렇기에 안정된 직업으로 교사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던 그 시절에도, 난 교사가 될 꿈은 단 한 번도 꾸지 않았다. 그렇게 ‘스승’이란 그저 사전 속에 묻혀있던 단어이던 그때, 내가 당연하다고 믿던 평화가 깨어졌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런 세상인지. 내가 어릴 때부터 믿어 온 하느님은 뭘 하는 건지. 이런 세상과 개인의 우여곡절을 통해 무엇을 전하는 것인지.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답답함과 궁금함이 끓어올랐다. 그렇게 나는 평화를 찾아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던 교회로 갔다. 불합리한 삶에 관해 물으러, 아니 하느님에게 따지러 갔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매일미사에 가는 것이었다. 나의 절실함과 세상의 불합리함을 따지러 간 곳은, 집에서 15분 남짓 개천을 따라 걸으면 닿는 자그마한 동네 성당이었다. 마침 막 부임한 새 신부님은 첫 본당 사제 소임에 열정이 가득했다. 직접 잼을 만들어 이웃들과 나누었고, 신자들에게 매일 묵상 글을 문자로 나누어 주며 홀로 하루에 3번씩 미사를 집전하셨다. 그 덕분에 젖먹이를 키우던 나는 온갖 불규칙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매일미사를 거르지 않을 수 있었다. 차가운 겨울에는 담요로 꽁꽁 싸맨 아이를 노오란 유모차에 태워 눈발을 헤치며 성전에 들어섰고, 유아실에서 젖을 먹이면서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단어 하나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열중했다. 보통 30분이면 끝나는 평일 미사에서 강론은 10분도 채 되지 않지만, 무한한 깊이의 의미를 찾으려 열중하다 보면 3시간 강의를 들은 것보다 더 큰 피로감이 밀려오곤 했다. 차곡차곡 쌓인 나날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었고, 매일미사는 아이와 소풍 가는 행복한 일상이 되었다. 신자들에게 보내주던 신부님의 묵상 글은 어떤 날은 너무 어려워 빙빙 돌기만 할 때도 있었지만, 어떤 때는 영혼이 깊이 꿰뚫리는 배움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나에게 첫 스승이 생겼다. 교회 안의 아버지였던 신부님을 첫 스승으로 만났고, 처음으로 스승의 날에 드릴 양말을 샀다. 그런데 첫 스승을 발견하자, 스승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마을버스 안 중년 부부의 수다 속에서,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말에서도 가르침이 들렸다. 어느 순간, 지난 삶의 단편 속에 나누었던 말 한마디에 담긴 의미, 상념을 통해 문득 다가온 섭리, 무심코 지나쳤고 몇십 년 동안 묵혀 있던 파편들이 진리로 연결되었다. 정말, 스승은 준비된 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의 깨어짐이 스승을 만나는 통로가 되었고, 그 통로에서 만난 모든 스승은 주님의 원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안간힘을 다해 답을 찾아보겠다는 간절한 질문이 내가 그토록 되지 않으려던 선생님의 위치에도 놓이게 했고, 유일한 스승이신 주님을 온 세상 안에서 발견하게 했다. 그렇게 오늘도 난 매일의 스승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22면

땅에 계시는 ‘최고 멋진 울 아빠’

나에게는 세 아버지가 계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교회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땅에서 나를 낳으신 아버지이다. 세 분 모두 나에게 엄청난 사랑을 쏟아부어 주시고, 그 덕분에 지금 내가 이만큼이라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아빠’라고 처음 부른 존재, 나의 휴대전화에 ‘최고 멋진 울 아빠’로 저장된 내 아빠는 나에게 더욱 특별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항상 특별하고 애잔한 존재이겠지만, 나에게 내 아빠가 더욱 최고인 데는 이유가 있다. 아빠의 어머니, 즉 나의 할머니는 동생을 낳고 돌아가셨다. 곧이어 갓난아기였던 동생마저 죽음을 맞았다. 당신 어머니의 장례식인 줄도 모르고 손님들 사이에서 놀던 5살의 아빠에게 곧 새어머니가 생겼다. 그 아래 6명의 이복동생이 태어났고, 장남이던 아빠는 단 한 번도 한국 사회의 큰아들이 받던 혜택을 누릴 새도 없이 콩쥐처럼 학대받았다. 학창 시절에는 온 식구가 먹은 아침밥 설거지를 하고 등교하느라 항상 지각 대장으로 불리었고, 대학 입학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과 학업을 병행하셨다. 80세가 넘으신 아빠는 지금도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깨어나는 경우가 있다. 몽둥이를 들고 문을 열어젖히는 새어머니의 서슬 퍼런 호통과 눈초리가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동 학대와 가정폭력에 사회가 개입해야 하는 이유는 한 아이의 소중한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함도 있지만, 폭력은 결국 눈덩이처럼 확대되면서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폭력에 시달린 아이는 그토록 싫어하던 폭력을 답습해 스스로 학대하는 부모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빠는 다행히 사랑 가득한 아내인 나의 엄마를 만났고, 부정적인 성장 기억은 반면교사가 되어 딸 셋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특히 맏딸인 나는 더욱 애틋한 기억이 많다. 집에 가면 만날 딸에게 학교로 편지를 보냈던 아빠,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뒤늦게 평화를 공부하러 멀리 떠나겠다는 딸을 흔쾌히 응원했던 단 한 사람, 먼 나라에서 인턴 근무를 하는 딸을 위해 스스로 설거지 기계가 되길 청하였고, 본인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내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기막히게 알아차리고 동생들 몰래 용돈을 보내주던 아빠의 모습, 셀 수 없이 기쁘고 가슴 찡한 순간들이 떠오른다. 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으로 와서 우리를 구원한 기적처럼, 이 땅에 사는 ‘최고 멋진 울 아빠’를 통해 사랑의 결핍을 극복하고 확장한 기적을 본다. 그 기적의 접점은 개인의 노력도 있겠지만, 결국 사랑이다. 한국전쟁 참전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조차 몰랐던 두 살 엄마는 외할머니의 사랑과 집성촌의 따스함 속에서 자랐다. 그 사랑은 아빠를 치유했고, 곧 나에게로 이어졌다. 이는 또 나의 아이와 주변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공동체에서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쩌면 나를 살리는 유일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땅에 계신 우리 아빠와 언젠가는 다 같이 만나겠지만, 최고 멋진 울 아빠가 이 땅에서 좀 더 오래 건강하게 제 곁에 머무르게 해 주세요! 제가 배우고 갚아 나갈 사랑에 닿으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거든요….”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2면

신앙의 빚을, 신앙의 빛으로!

가톨릭 신자가 된 지 어느덧 30년이 되어간다. 문득 ‘나는 어떻게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신앙의 길이라 말할 수 있는, 나의 첫 시작은 언제였을까? 내가 생각하던 평화가 산산이 깨진 덕분에, 바닥부터 다시 돌이켜 내 삶을 전환한 15년 전이었을까? 아니면 예측조차 못 한 사건을 처음 맞닥뜨린 타국에서의 청춘 시절이었을까? 잘 알아듣지도 못하던 영어 미사에서, 할아버지 신부님이 끊임없이 절박하게 반복하던 한 마디 “Hang in there(조금만 더 버텨)!”라는 구절에 매달려 겨우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그 20대 끝자락이었을까? 아니면 유럽 배낭여행 이후 개종한 시점이었을까? 그렇게 거슬러 오르다 보니, 결국 가닿은 곳은 사람이었다. 6살쯤 만났던 가무잡잡한 동네 친구, 간식을 준다며 나를 이끌던 그 친구를 따라 개신교회에 갔다. 그리고 나 혼자 가던 교회에 온 가족이 하나씩 모여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맛있는 간식에 이끌린 나의 응답이 우리 가족을 교회로 인도한 계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무렵 아빠가 사랑하던 이복동생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그 일이 부모님을 교회로 이끈 더 깊은 계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였던 나는 ‘만나’처럼 내려오는 간식을 따라 교회에 갔다. 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을 계속해서 캐묻던 어린 나의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음을 이미 그 시절에 감지했음에도, 친구를 만나러 교회에 갔고 열심히 활동했다. 그런데 한 달 남짓의 배낭여행은 그리 길지도 않았건만, 유럽의 성당과 바티칸 먼발치에서 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주케토의 영향이었을까? 나는 물 흐르듯 가톨릭교회에서 다시 세례를 받았다. 자연스레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교회 친구들과는 연락이 뜸해졌고, 나를 처음 교회로 데려간 그 친구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기도 중에, 꼬마였던 그 친구가 떠올랐다. 그에게 큰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은 그렇게 가볍고 즐겁게 그 친구를 통해서 나를 부르셨구나. 그 시절의 친구들을 다시 찾았다. 그들 중 몇몇은 목사가 되었고, 몇몇은 서로 사랑해서 부부가 되었고, 몇몇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고, 아름다운 제주에서 가장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좋은 버스 기사도 되었다. 그들을 다시 만나면서 종교와 종파를 넘어선 하나의 교회인 그리스도의 일치를 느꼈다. 종교 간의 대화와 원리는 그리 멀리 있지도 어려운 데 있지도 않았다. 우리가 만나는 매일의 일상 속에 섞여 사는 사람들, 그저 옆에 있기에 서로를 돌보고 사랑했던 날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매일 빚을 지며 살아간다. 결국 신앙은 하느님과 나의 관계이자,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완성되어 갈 것이기에…. 이미 시작된 2026년 이 뜨거운 여름, 두 달 동안 내가 진 신앙의 빚을 작은 빛으로 나아가도록 이끈 사람들을 기억하며 이 여름을 보내볼까 한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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