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글로벌칼럼] 니케아 신경에 담긴 궁금한 이야기

최용택
입력일 2025-07-23 08:48:40 수정일 2025-07-23 08:48:40 발행일 2025-07-27 제 3452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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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도서관 시스티나 홀 벽에 그려진 니케아공의회 프레스코화의 모습. CNS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서 주일 미사 중에 낭송되는 ‘니케아 신경’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오래된 신앙 고백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신경은 325년 8월, 약 세 달간 이어진 니케아공의회를 마치며 발표되었으며, 올해로 1700년을 맞는다.

하지만 니케아 신경이 가장 오래된 신앙 고백은 아니다. 그 영예는 초기 로마 교회의 세례 신앙 고백을 바탕으로 한 ‘사도 신경’에 돌아간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경은 교회 역사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적 설명이 훨씬 더 정교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두 신경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를 이루지만, 사도 신경이 간결하다면 니케아 신경은 더욱 정밀하다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합법화했다. 그로 인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로마 제국 내에서 박해의 대상이 아니었고, 오히려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부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리적 논쟁은 단순한 학문적 토론을 넘어서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리우스라는 사제가 “예수는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이며, 시간상으로도 본질적으로도 하느님과 같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적지 않은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리우스는 하느님의 절대적 우월성을 주장하며, 예수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최초이자 가장 사랑받는 피조물이라고 보았다. 그는 “하느님 아버지만이 시작이 없고, 무한하며 영원하다”고 말하며,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고 탄생한 존재로, 존재하지 않았던 시점이 있었던 유한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성경도 근거로 들었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4,28),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콜로 1,15) 등의 구절을 인용하며, 예수는 하느님과 동등하거나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알렉산드리아교구 내부에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고, 결국 교회 전체의 문제로 확산됐다.

당시 교회 문제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논쟁을 종식하고자 직접 나섰다. 그는 325년 제국 전역의 주교들을 니케아(현재 튀르키예의 이즈니크)로 소집해 공의회를 열었다. 이는 교황이나 주교단이 아닌,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이교도 황제가 소집한 최초의 ‘보편 공의회’였다.

회의에는 주로 제국 동부 지역에서 온 300여 명의 주교가 참석했다. 성 실베스테르 1세 교황은 고령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지만, 두 명의 사제를 대표로 파견했다. 아리우스 본인도 참석했고, 그의 반대편에는 젊은 부제였던 아타나시오가 있었다. 그는 훗날 삼위일체 신앙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가 되었고, 평생을 아리우스주의와 싸우며 보냈다.

회의는 황제 본인이 주재했으며, 때로는 논쟁에 직접 참여하고 이끌기도 했다. 당시 아리우스를 지지한 22명의 주교는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중심으로 뭉쳤지만, 아리우스의 저술 일부가 회의에서 낭독되자 대부분의 주교는 이를 신성 모독이라며 비난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본질상 동일하다’는 삼위일체 입장을 옹호한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였다. 그의 후계자 아타나시오의 주장은 결국 공의회에서 채택되었고,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 본질(Homoousios)’이라는 표현이 니케아 신경에 명시되었다. 이는 아리우스의 주장과는 양립할 수 없는 신학이었다.

325년 6월 19일, 공의회와 황제는 알렉산드리아 지역 교회들에 회람을 보내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하고 추방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니케아에서 승리한 삼위일체 진영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리우스가 추방되었고 공의회에서 결론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주의 논쟁은 지속되었다. 327년 알렉산데르 주교가 죽자 아타나시오가 그 뒤를 이었고, 콘스탄티누스는 점차 아리우스 측 인사들에 대해 관대해지기 시작했다.

이 초기 교회의 신학 논쟁을 되돌아보면 놀라움이 앞선다. 당대 사람들은 신앙과 신학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고 심지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현대인들은 신앙보다는 경제와 부의 축적에 관심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하다.

니케아공의회는 신학적 문제에 관해 결정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셈법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아리우스주의는 신앙의 형태로 초기 교회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많은 신학자가 조용히 복권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실제 삶에서 바른 믿음(Orthodoxy)과 바른 행위(Orthopraxis)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정답자에게 상은 없겠지만, 되새겨 볼만 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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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미론 페레이라 신부
예수회 사제로 평생을 기자 양성 등 언론 활동에 힘써 왔다. 인도 하비에르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라 크루아(La Croix) 등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