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9·끝)] 수원화성순교성지 : 6·25 한국전쟁과 교회

‘심응영 뽈리데시데라도’, ‘유영근 요한’, ‘요한 콜랭’. 수원화성순교성지 제대 오른편에는 성지가 현양하는 하느님의 종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대부분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 순교자들이지만, 그중 마지막 3명은 순교한 연도가 1950년으로 적혀있었다. 6·25전쟁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이었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지 불과 5년 만에 교회는 또다시 큰 수난을 겪어야 했다. ■ 남북으로 갈린 교회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태평양전쟁 끝에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다. 일제에서 벗어났지만,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머물면서 교회도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특히 교회는 대한민국이 정부를 수립하는데 기여했다. 미국교회에서 시작한 메리놀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남한을 통치하던 미국정과 긍정적인 관계를 지속했고, 1949년 4월 교황청은 정식으로 ‘대한민국’을 인정하고 교황사절을 임명했다. 그러나 북한교회는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교회를 ‘남한과의 비밀 연락 근거지’로 여기면서 신부들을 체포하고 교회 시설물을 몰수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박해가 심해졌지만, 신부들은 본당을 지켰다. 아직 남쪽으로 넘어가지 못한 신자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춘천교구 양양본당 제3대 주임신부였던 하느님의 종 이광재(디모테오) 신부는 신자들이 몰래 남한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신부는 “나보다 훌륭한 성직자, 수도자들이 하나라도 더 월남해 남한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힘껏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며 38선을 넘어 월남하려는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을 무사히 남한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월남을 돕는 동시에 북한에 남아 있는 신자들을 위해 북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성사를 집전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1950년 6월 24일 밤부터 25일 새벽 사이에 제국주의자들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북한에 남아 있던 13명의 한국인 신부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했다. ■ 또 다른 박해 전쟁이 일어나자 교회는 북한군의 표적이 됐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교회는 일하지 않고 벌어들이는 착취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북한군에게는 교회의 지도자라는 것만으로도 박해의 이유가 됐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인간성을 상실한 특수한 상황 때문에 박해는 조선시대에 일어난 박해보다도 더욱 빠르고 가혹하게 진행됐다. 전쟁이 시작되고 북한군은 순식간에 남한 일대를 점령했고, 2~3달 안에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 150여 명이 납치되거나 처형됐다. 성직자라는 이유만으로 즉각 총살을 당하기도 했고, 어느 날 갑자기 납치돼 행방불명되는 일도 잦았다. 특히 연합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상황은 더욱 심해졌다. 그중에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를 비롯한 5명의 주교와 각 교구의 지도자들이 포함됐다. 북한군의 박해로 한국교회는 지도층을 대거 잃고 말았다. 짧은 시간에 많은 성직자들이 잡혀 들어간 것이 가장 큰 피해였지만, 물적 피해도 많았다. 북한군 점령 기간이 길었을 뿐 아니라 치열한 전투가 이뤄졌던 서울, 경기, 강원도 지역은 특히 물적 피해가 컸다. 북한군은 성당을 빼앗아 사용하면서 내부를 훼손하고 성물 등을 약탈했다. 또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폭격 등으로 성당이 파괴되는 일도 잦았다. 1950년 11월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군은 포로로 붙잡혔던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평양과 중강진을 거쳐 하창리 포로수용소로 이동시켰다. 또한 6·25전쟁 이전 잡아들였던 북한 지역 성직자 수도자들은 10월부터 북쪽으로 보내 만포를 거쳐 옥사독 수용소에 억류시켰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은 포로들을 열악한 위생환경 속에서 음식도 제대로 주지 않고 영하 40℃에 엄동설한에 강제로 걸어서 이동하도록 했다. 때문에 이 혹독한 과정 속에서 많은 포로들이 병사·동사·아사했고, 또 북한군에게 살해됐다. 그래서 이 두 이동을 ‘죽음의 행진’이라고 부른다. 이 죽음의 행진 속에서 여러 성직자·수도자들이 기도와 형제애로 서로를 다독이며 신앙의 삶을 증거했다.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아 전쟁 후 고국으로 송환된 마리 으제니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97년 선종)는 회고를 통해 “간수들은 우리에게 사상교육을 해보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면서 “그들은 우리의 처신, 참을성, 서로에 대한 애덕 실천, 영웅적인 죽음 등 모든 것에서 더 많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 교계제도의 설정 한국교회는 전쟁으로 인적, 물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휴전 이후 북한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다시 활발하게 하느님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한국교회는 전국 곳곳의 파괴된 성당과 시설을 복구하는 동시에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해방 이후 한국에 진출해 있던 미국가톨릭복지위원회는 원조사업을 전개, 미국교회에서 받은 구호물품을 각지의 본당과 교회시설을 통해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무상으로 나눠줬다. 이런 교회의 활동에 호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고, 이를 계기로 입교자들도 늘어났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 의지할 곳을 찾던 사람들과 실향민들이 교회를 찾았다. 휴전이 이뤄진 1953년 한국교회 신자 수는 16만6471명이었지만, 1960년에는 45만1808명이 됐고, 1962년에는 53만217명이 됐다. 불과 10년 사이에 신자 수가 3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또한 레지오 마리애, 조선천주교 순교자현양회 등 다양한 신심단체들이 확산됐다. 이런 교세의 성장에 성 요한 23세 교황은 1962년 교황령을 통해 서울·대구·광주대목구를 대교구로, 나머지 대목구들도 교구로 승격시켰다. 교황청이 직접 관할하는 교황대리감목구에서 이제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된 것이다. 마침내 한국교회가 보편교회의 일원으로서 독자적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2024-07-28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8)] 안성성당 : 일제강점기의 교회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국내 선교는 더욱 활성화됐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활동이 자유로워진 것은 물론이고, 조선인 사제들도 지속적으로 양성되면서 1910년에는 전국에 본당이 58곳으로 늘어나기까지 했다. 그런 가운데 조선 사회에는 큰 사건이 발생한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 일제강점기의 교회 1904년 한일의정서, 1905년 을사조약에 이어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을 일제가 강제로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은 주권을 잃어버리게 됐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조선을 식민 통치하기 시작했다. 한일합병조약이 공표된 당일 데라우치 마시타케 통감은 ‘유고’(諭告)를 발표했다. 식민 통치에 관한 다양한 내용이 담긴 유고에는 종교에 관한 내용도 있었는데, 총독부의 방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가 선교하는 것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특히 일제는 그리스도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선교사들과의 마찰이 선교사들의 본국과의 외교 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선교사 명의로 된 교회 부지, 주택 등의 소유권을 보장하고, 교회에 면세 특권을 부여하는 등 교회에 편의를 제공하면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한 교회의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한국교회 선교사들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아들였다. 1907년 프랑스 정부가 일제의 식민 통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이었던 선교사들도 모국의 외교 정책에 따랐던 것이다. 일제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면서 선교사들은 정치 불간섭주의를 표방했다. 교회나 신자들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의 지배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이었다. 일제와의 마찰을 피함으로써 교회를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교회 지도층은 일제강점기 내내 이런 입장을 고수했고, 일제에 저항한 신자나 성직자들을 엄하게 다스렸다. ■ 학교를 설립하다 한국교회 지도층은 일제에 대한 저항을 금지했지만, 신자들, 그리고 신자들 곁에 함께하는 사제들은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대표적인 활동이 애국계몽 활동이었다. 교육을 통해 조선인들을 일깨우고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워준 것이었다. 당시 일제는 일제에 충성하는 식민지 교육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을사조약 이후 학교를 세우고 치외법권을 내세워 일제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학교를 운영해 나갔다. 안성본당 초대 주임으로 사목하던 하느님의 종 앙투안 공베르 신부가 세운 사립공교(私立公敎) 안법학교도 이 시기 세워진 학교다. 공베르 신부는 1909년 1월 안법학교를 설립했다. 안법학교는 오늘날 안법고등학교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공베르 신부가 학교를 설립한 것은 교육기관을 필요로 하는 지역사회에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공베르 신부는 교육기관을 운영하는 것이 선교에 도움이 되리라 여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공베르 신부만이 아니었다. 여러 선교사들이 교육기관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일제는 이런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제하고자 나섰다. 일제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사립학교규칙」을 시행했다. 일제는 학교의 설립, 유지, 교원의 인사를 인가받고, 교원 이름과 교과목, 재적 학생, 교과서 등을 신고하도록 했다. 또 1915년에는 이 규칙을 더욱 강화해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기는 경우 강제로 학교를 폐쇄시켰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학교 설립을 포기하지 않았다. 수원본당(현 북수동본당)을 사목하던 하느님의 종 데지레 폴리 신부는 1934년 소화강습회를 열었다. 아직 본당의 성당도 채 건축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폴리 신부는 먼저 강습회를 열고 일제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에게 일본어가 아닌 한글을 가르쳤다. 폴리 신부의 소화강습회는 오늘날 소화초등학교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 3·1운동에 함께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교회 지도층은 만세운동 참여를 금지했다. 서울대목구 뮈텔 주교는 만세운동을 하려는 신학생들을 막았고, 그럼에도 독립 만세를 외치던 신학생들에 대한 징계로 그해 서품식을 거행하지 않았다. 대구대목구 드망즈 주교도 만세운동에 참여하려는 신학생들을 만나 참여하지 말도록 경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교회 지도층은 3·1운동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신자들 곁에 머물던 선교사들은 신자들의 3·1운동을 지지하며 적극 도왔다. 그런 대표적인 선교사가 안성본당의 공베르 신부다. 3·1운동 당시 안성지역 사람들은 공베르 신부를 찾아와 만세운동을 어떻게 전개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공베르 신부는 이미 다양한 활동으로 신앙유무를 막론하고 지역 사회 안에서도 존경을 받는 유지였기 때문이다. 공베르 신부는 “낮에는 국기를 들고 밤에는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조언하면서 질서 있게 만세운동을 지휘할 수 있는 지도자로 천주교 신자를 추천하기도 했다. 또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폭력은 일본군의 더 큰 폭력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폭력과 파괴행위를 하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동시에 일본군에게 박해중지를 요청하기도 했다. 만세운동 중 일본군의 진압이 시작되자 공베르 신부는 사람들을 보호했다. 일본군에 쫓긴 군중이 안성성당으로 몰려오자 공베르 신부는 성당 마당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 그리고 일본군에게 이곳이 치외법권임을 주장하면서 일본군의 진입이 국제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다며 일본군을 막아섰다. 공베르 신부는 직접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지는 않았지만, 3·1운동에 참여한 우리나라 국민들을 돕고 보호하며 함께 했던 것이다.

2024-07-14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7)] 미리내 성요셉성당 : 조선인 신부들의 활약

미리내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 앞에는 김대건 신부의 묘소 곁에 또 다른 신부의 묘소가 있다. 바로 김대건 신부,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뒤를 이어 조선인으로서 3번째로 사제품을 받은 강도영(마르코) 신부다. 박해가 끝나고 조선인 신부들이 활동하면서 이 땅의 선교는 더욱 활발해졌다. ■ 조선 땅에서 사제품 받은 첫 신부들 병인박해로 배론의 신학교가 초토화됐지만, 선교사들은 여전히 조선인 사제 양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페낭 신학교에서, 부엉골 신학교에서 신학생을 양성했고,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로는 서울 용산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사제 양성에 매진했다. 그리고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의 결실을 처음 얻게 된 것은 1896년의 일이었다.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896년 4월 26일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강도영 신부,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사제품을 줬다. 조선대목구가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국내에 설립한 신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교구장 주교가 서품식을 주례한 최초의 사제 서품식이었다. 이들 3명의 신부들은 조선 땅에서 서품을 받기는 했지만, 사제로 양성되기 위해 바다를 건너 먼 여정을 떠나야 했다. 이들이 처음 입학한 신학교는 말레이시아의 페낭신학교다. 페낭신학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가 세운 국제신학교다. 당시 조선교회는 1873년부터 신학생들을 선발해 페낭신학교에 보내고 있었는데, 이들 신부들은 1882~1884년 사이에 페낭신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 비록 김대건·최양업 신부처럼 중국, 필리핀 등지를 떠돈 것은 아니었지만, 유학생활은 고된 나날이었다. 특히 열대 지방 특유의 환경과 현지 음식, 풍토에 적응하는 일은 어린 신학생들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유학 중 병으로 사망하는 신학생마저 생기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 내에 신학교가 다시 설립되면서 신학생들은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고, 마침내 사제품을 받을 수 있었다. 김대건·최양업 신부에 이은 3번째 사제들이 서품된 다음해에는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신부, 한기근(바오로) 신부, 김성학(알렉시오) 신부가, 1899년 3월에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신부가, 10월에는 홍병철(루카) 신부, 이종국(바오로) 신부가 서품됐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조선교회에 두 곳의 교구가 생기기 전까지 18명의 조선인 신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 조선인 신부들의 활동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이래 조선 땅의 사제는 다시 서양인뿐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조선인 신부의 활동은 조선인 신자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신부들은 이 땅에서 신앙이 정착될 수 있도록 순교신심, 성체신심 등 다양한 신심활동을 전개했다. 김대건 신부가 묻힌 미리내에서 사목활동을 한 강도영 신부는 순교신심을 전파했다. 강 신부는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성당, 바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을 조성해 순례자들이 김대건 신부의 영성을 만날 수 있도록 도모했다. 우리나라의 첫 성지를 개발한 것이었다. 강 신부 다음해에 서품을 받은 한기근 신부는 1925년 7월 로마에서 열린 한국 순교자 첫 시복식에 참석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알렸다. 또 귀국해서는 「로마 여행일기」를 작성해 신자들이 로마의 성지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책은 한국 성직자가 쓴 첫 번째 성지순례기다. 풍수원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신부는 1920년 풍수원성체현양대회를 열고 신자들이 성체신심을 함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정 신부가 시작한 풍수원성체현양대회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오며 풍수원뿐 아니라 전국 여러 교구 신자들에게 성체신심을 전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정 신부는 또 성부안나회를 조직해 기도와 애덕을 실천하며 신자들이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조선인 사제들은 특히 신자·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지역 사회의 가난한 삶의 자리에서 함께 살아갔다. 강도영 신부는 성당 옆에 해성학원을 지어 교육에 힘쓰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또 농법 개량에도 관심을 두고 활동했으며, 신자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양잠업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으로 강 신부는 지역 사회 안에서도 큰 존경을 받았다. 강 신부가 34년간 본당 사목을 하다 선종했을 때, 장례미사에는 신자 800여 명뿐 아니라 안성군수와 비신자 지역 주민 100여 명이 참석하기도 했다. 비신자들이 강 신부의 공덕을 기리고자 기념비를 세우려는 것을 신자들이 말렸을 정도였다. 정규하 신부도 삼위학당을 설립해 성당 사랑방에서 한글과 한문을 비롯해 수학, 역사 등을 가르쳤고, 이 학당이 이어져 광동초등학교로 발전했다. 옥천본당 초대 주임 홍병철 신부는 신자들의 가난에 직접 동참했다. 홍 신부는 성당 주변에 호박을 길러 매일 호박죽으로 끼니를 대신하며 근검절약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1만여 평의 전답을 구해 주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2024-06-30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6)] 왕림성당 : 조불수호통상조약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는 1873년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끝을 맺게 됐다. 병인박해 중 선교사들 대부분이 순교하거나 조선을 벗어나 탈출했고, 800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는 등 조선교회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만에 조선 땅에는 본당들이 세워지게 된다. 1888년 설립된 교구 최초의 본당, 왕림본당도 이런 중에 세워진 본당이다. ■ 선교사들의 재입국 시도 병인박해로 탈출한 선교사들은 박해의 기세가 약해지면 즉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중국 곳곳에서 전전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비록 조선에서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1868년 중국 차쿠에서 조선대목구 성직자 회의를 열어 조선 입국이 가능해지면 선교활동을 체계적으로 펼칠 수 있도록 활동 방침을 점검하고 조선 입국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거센 박해, 그리고 밀고자들의 추격으로 번번이 입국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고,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마르티노 신부는 병을 얻어서 선종하기까지 했다. 1876년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이 수호통장조약을 체결하면서 그동안 쇄국을 고수하던 조선 사회는 개항을 하게 됐다. 이에 병인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은 신자들은 다시 본격적으로 성직자 영입을 추진했다. 신자들은 중국 차쿠에 머물던 선교사들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마침내 서해안 대청도에서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접선할 수 있었다. 대청도에서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가 조선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리델 주교는 두세 신부, 로베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리델 주교는 도착 즉시 조선 신자들을 위한 기도서와 교리서 발간을 위한 인쇄소 건립을 추진하고, 소신학교를 세우고자 했다. 또 부대목구장을 서품하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델 주교는 1878년 1월 붙잡히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리델 주교는 처형당하지 않고 조선에서 추방됐지만, 함께 체포된 신자들은 감옥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1879년에는 드게트 신부가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체포됐다. 하지만, 고문 등이 자행되지 않았고, 주중국 프랑스 대리대사가 조선 정부와 교섭하면서 무사히 석방됐다. 드게트 신부의 석방은 선교사들에게 희망을 줬다. 조선의 박해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고, 나아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었다. ■ 조불수호통상조약 주중국 프랑스 대리대사의 활동으로 리델 주교와 드게트 신부가 석방되면서 선교사들은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던 중 1882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도 조약을 위해 적극적으로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조약은 쉽지 않았다. 조선은 프랑스가 조선과 전쟁을 치른 나라인 점, 그리고 선교의 자유를 얻으려 하는 점 등에 있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이에 조선어-프랑스어 사전과 조선어 문법책을 인쇄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코스트 신부는 베이징에 프랑스 총영사를 찾아 “이 문제는 신중함과 함께 인내가 필요하다”면서 조약문에 ‘윤리’, ‘가르치는 것’ 등을 첨가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직접적으로 ‘선교’를 언급하지 않고도 선교의 자유를 암시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프랑스는 선교사의 보호를 명문화하고자 했으나 몇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1886년 프랑스는 선교의 자유를 명시하는 것 대신에 타협안을 냈고, 조선도 이 안을 수용했다. 바로 코스트 신부가 제안했던 ‘가르치는 것’에 해당하는 교회(敎誨)라는 단어를 사용한 안이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 내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법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선교사로서 활동하는 것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지만, 프랑스인으로서 조선 내 여행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특히 제9관은 “언어와 문자, 법률과 예술 등을 학습 또는 교회(敎誨)하고자 조선에 가는 프랑스 국민은 항상 우호적인 도움을 받을 것이고, 프랑스에 가는 조선국인도 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다”라고 규정됐다. 비록 교회(敎會)라는 용어로 사용된 것은 아니기에 신앙의 자유가 완전히 명문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선교사들의 활동을 포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던 것이다. 1888년 설립된 수원교구 최초 본당 조선·프랑스 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교우촌 대신 사목 중심 본당 설립 선교사 교회 재건 활동 큰 힘 얻어 ■ 본당의 설립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선교사들의 교회 재건 정책은 큰 힘을 얻었다. 선교사들은 더 이상 숨어다닐 필요 없이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으면서 조선 각지를 방문할 수 있게 됐다. 선교사들은 ‘양대인’(洋大人)이라 불리는 특권적 존재가 됐다. 이에 선교사들은 사목에 적극 나섰다. 1885년에 11명에 그쳤던 선교사 수는 10년 만에 23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늘어나자 선교는 더욱 활발해져 해마다 10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됐다. 게다가 더 이상 선교사가 박해를 피해 수많은 교우촌을 떠돌며 지낼 필요가 없었다. 선교사들이 각자 자기 관할지역에 사목 중심지가 되는 본당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1882년 오늘날 주교좌명동대성당인 종현본당이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강원 이천에 이천본당, 부엉골본당(현 감곡본당), 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본당), 원산본당, 안변본당 등이 설립됐고, 조선교회 7번째 본당으로 갓등이본당, 바로 교구의 첫본당인 왕림본당이 설립됐다.

2024-06-16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5)] 죽산성지 : 병인박해의 확대

9명의 선교사들이 순교하면서 병인박해는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는 그해로 끝나지 않고 수년간 이어지면서 전국에서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는 혹독한 박해로 변모했다. 왜 병인박해는 이토록 가혹한 박해로 확대됐을까. ■ 병인양요 경기 안성시 죽산면사무소 앞에 있는 순교자 현양비는 많은 신자가 희생된 병인박해를 기억하게 해준다. 죽산 도호부는 지금의 안성시 죽산면·일죽면·삼죽면과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백암면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한 행정기관이었다. 교우촌이 다수 형성됐던 지역을 관할했던 만큼, 많은 신자가 이곳으로 잡혀 들어왔고, 이곳에서 약 4km가량 떨어진 현 죽산성지 자리에서 순교했다.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는 1873년 말이 돼서야 끝을 맺게 된다. 1866년에 선교사들과 수많은 지도급 신자를 처형하면서 한 차례 소강상태가 되지만, 오히려 그 이후 더 많은 신자가 순교하게 된다. 죽산성지도 그런 순교지 중 하나다. 이렇게 박해가 거세진 계기는 프랑스군의 조선 침공, 바로 병인양요의 영향이 컸다. 병인양요는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사건이다. 병인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프랑스 극동 함대가 있는 중국 톈진으로 가서 선교사들의 처형 소식을 전하고, 남은 선교사들과 조선인 신자들의 구출을 요청했다. 이에 극동 함대 로즈 사령관은 이 사실을 본국과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 대리에게 알렸고 조선 출정을 계획했다. 프랑스군은 9월 정찰을 위해 원정을 나서 한강 양화진, 서강까지 전진했다가 철수했고, 이어 10월 본격적인 침공에 나섰다. 프랑스 함대에는 리델 신부와 통역으로 조선인 신자들이 동행했다. 프랑스군은 10월 14일 강화의 갑곶진에 상륙, 강화부를 점령했다. 한강 하류를 막아 서울에 물자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면 조선 정부가 굴복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내에 있는 주요 방어진지를 무너뜨리고 불을 질러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정족산성에서 조선군의 기습으로 전투에 패배하자 로즈 사령관은 퇴각하기로 결정하고 11월 11일 떠났다. 프랑스군 조선 침공 ‘병인양요’ 병인박해 더욱 혹독해지는 원인 제공 대원군 부친 묘 도굴 시도 잇따르며 천주교 신자 체포·처형 극에 달해 프랑스군이 물러가자 박해가 더욱 심해져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돼 순교했다. 대원군을 비롯한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이나 강화도를 침략한 것은 천주교 신자들이 내통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특히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병인양요에 대한 책임을 묻고 프랑스와 내통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자 양화진에서 신자들을 처형했다. 이곳이 오늘날 절두산순교성지다. ■ 덕산 사건과 신미양요 병인양요로 박해가 가열된 가운데 또 외국에 의한 사건이 발생했다. 1868년 5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에서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 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오페르트는 1866년 2차례에 걸쳐 조선에 통상 제안했다가 실패했다. 그러던 중 그는 중국에서 페롱 신부와 조선 신자들에게 “남연군의 묘에 있는 부장품으로 대원군과 협상하면 통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제안을 받고 1868년 5월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봉분을 파내고, 석회층을 제거하는데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자 작업을 중지하고 도주했다. 덕산 사건은 박해에 더욱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충효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 사회에서 무덤을 훼손한 사건은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도굴 시도를 보고받은 고종은 “바다 밖의 서양 놈들이 어떻게 길을 알아서 거침없이 쳐들어왔겠느냐”며 “필시 우리나라의 간사한 물리들 가운데 그들을 부추기고 길을 인도한 자가 있었을 것”이라며 분노했다. 조정의 대신들도 서양 사람들이 일으킨 변란은 조선 사람들이 호응한 결과라고 하면서 신자들을 모두 잡아 처형할 것을 강조했다. 1866년에 체포됐다가 배교한 피영록의 증언에 따르면 “교우가 잡혀 배교하면 놓아주는 법인데, 덕산 사건 후에는 잡히면 배교하건 아니건 죽였다”고 한다. 실제로 1866~1879년 체포된 신자 수의 기록을 살피면 1868년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죽산에서 순교한 복자 박 프란치스코·오 마르가리타 부부도 1868년 9월 순교했다. 덕산 사건 3년 후인 1871년에는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신미양요는 미국함대가 조선을 침공한 사건이다. 대동강에서 불에 타 침몰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통상 조약을 요구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미국의 불법 침략을 문제 삼고 교섭을 거절했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사령관 로저스는 강화도 초지진을 시작으로 덕진진, 광성진을 공격, 점령했으나 결사 저항하는 조선의 항전에 결국 철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갑곶 나루터 등지에서 여러 신자들이 체포돼 순교했다.

2024-06-02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4)] 남양성모성지 : 병인박해의 시작

남양성모성지는 오늘날 성모성지로 더 유명하지만, 남양이 성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이유는 성모신심 고양을 위서만은 아니다. 남양성모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됐던 순교지다. 남양성모성지는 순교자들의 성모신심만이 아니라 박해 사상 유래없이 큰 규모로, 또 가혹하게 진행돼 ‘대박해’라고도 불리는 병인박해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 베르뇌 주교와 대원군의 접촉 1864년 1월 철종이 사망하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고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였고, 수렴청정을 하게 된 조 대비는 흥선군을 대원군으로 세워 국정을 위임했다.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이 집권 세력의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천주교에 관한 인식이 변해 입교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박해를 주도하던 당파가 권력을 쥐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대원군이 조선의 선교사를 찾았다. 당시 러시아는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하고 조약을 체결하도록 주선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 대가로 시베리아 동부를 차지하게 됐다. 그렇게 두만강을 두고 조선과 접경하게 되자, 러시아가 조선에 국교를 요청해 온 것이었다. 대원군은 러시아의 요구를 물리치기 위한 방안으로 프랑스 개입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성 베르뇌 주교의 1864년 8월 18일자 서한을 보면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와 안면이 있는 관장에게 “만약 러시아 사람들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종교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러시아 사람들과는 종교가 달라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답했다. 베르뇌 주교의 거절에도 대원군은 한 번 더 베르뇌 주교에게 접촉했다. 러시아의 요구가 계속됐기 때문이었다. 이러는 사이 조선교회의 지도급 신자들 사이에서도 방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신자들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하는 방법이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일이며, 조선에 와 있는 서양 주교들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는 편지를 대원군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성 남종삼(요한)은 서한을 작성해 직접 대원군에게 전달했는데, 대원군은 좌의정 김병학과 의논한 후 남종삼을 불러 과연 베르뇌 주교가 러시아인들을 막을 수 있는지 확인한 후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자들은 종교의 자유가 곧 올 것이라는 희망에 기뻐했다. 신자들은 대원군과 주교들의 면담이 성사될 수 있도록, 주교들이 서울에 올 수 있도록 보필했고, 1866년 1월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가 서울에 도착했다. 주교들은 서울에 머물면서 면담을 기다렸지만, 면담은 이뤄지지 않았고 2월 19일에는 성 최형(베드로), 이어 2월 23일에는 베르뇌 주교가 체포됐다.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 병인박해의 시작 면담까지 생각했던 대원군의 태도 전환에 관해 샤를르 달레 신부는 러시아의 통상 요구가 사라지고 조정 대신들의 압력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단 선교사를 만나고자 염두에 둘 만큼 골칫거리였던 러시아의 통상 요구가 사라지면서, 대원군은 굳이 서양 선교사를 만날 필요가 없어졌다. 그 와중에 1866년 1월 중국에서 서양인들을 처형하고 있다는 조선 사신의 보고가 도착했고, 이에 대신들이 서양인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대신들의 의견을 따랐고, 병인박해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잡혀 들어가기 시작했고, 특히 서양 선교사들이 표적이 됐다. 서울에 있던 베르뇌 주교와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체포됐고, 경기도 지역에서 사목하던 성 볼리외 신부와 성 도리 신부가 붙잡혔다. 그리고 충청도 제천 배론신학교를 운영하던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잡혔다. 이렇게 체포된 선교사와 신자들 중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는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3월 9일 최형과 전장운이 순교했는데, 그 다음날 조 대비는 ‘사교(邪敎)를 금지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조 대비는 교서에서 “단속하고 특별히 더 체포해 기어코 모두 소탕한 뒤에 그치도록 해야 할 것”이라면서 “만약 숨겨두고 조사에서 발각됐을 경우에는 결단코 응당 남김없이 코를 베어 죽여야 할 것이며, 사람들도 역시 다 같이 그를 처단하게 될 것”이라고 강경한 박해 의지를 내비쳤다. 박해령이 내리고 푸르티에·프티니콜라 신부와 신자들의 처형이 이뤄졌고, 충청도에서는 다블뤼 주교가 체포됐다. 포졸들이 다른 선교사들이 숨어있는 곳을 재촉하자 다블뤼 주교는 신자들이 쓸데없이 약탈과 고문을 당할 것을 염려해 성 위앵 신부를 불렀고, 다블뤼 주교의 심부름꾼과 포졸을 만난 위앵 신부도 붙잡혔다. 성 오메트르 신부도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듣고 신자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생각에 자수했다. 불과 2달 사이에 당시 한국교회에서 선교하던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순교했다. 나머지 선교사들은 가까스로 조선을 빠져나가 중국으로 향했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신자들의 괴로움을 염려했던 선교사들의 바람처럼 박해는 소강상태가 됐다. 그리고 그해 9월 「척사윤음」이 반포되면서 박해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2024-05-19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3)] 남양성모성지: 박해시기 성모신심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성지로 112. 단아하게 머리를 묶고 치맛자락을 끌어안은 아기예수와 함께 서있는 성모상이 순례자들을 맞는다. 남양에 성모발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성모님에 관한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양에 ‘성모성지’가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박해시기 순교자들이 지녔던 깊은 성모신심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서다. ■ 성모님을 본받으려던 신자들 한국교회의 성모신심은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교회 신자들은 서적을 통해 성모신심을 배우고 키워나갔다. 아직 조선에 선교사가 오지 않았던 시절인 1791년 신해박해 당시 경기 감영에서 하느님의 종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을 수색했을 당시 「매괴경」이 발견됐다. 이미 초기 신자들은 성모님에 관한 교리뿐 아니라 묵주기도도 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초기 교회 지도자였던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는 「주교요지」에서 성모님의 동정 잉태와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는 정약종이 이끌었던 명도회원을 비롯해 그들에게 배운 초기 신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자 윤지충(바오로)과 복자 권상연(야고보)는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순교했고, 여러 순교자들이 죽음을 앞두고 성모님을 통해 기도했다.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파견된 선교사인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명도회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정하고, 신자들에게 성모신심을 가르쳤다. 초기 신자들 사이에 성모신심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복자 윤점혜(아가타)는 기도 중 성모님 위로 성령이 내려오는 모습의 환시를 보기도 했다. 또 주문모 신부는 동정부부를 맺어주고, 동정녀들의 모임을 축복하며 지도했는데, 이들은 특별히 성모님의 동정을 본받으려하는 의지를 보였다. 신자들은 성모님에 관한 다양한 신심서적을 읽고, 또 묵주기도에도 열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유박해 당시 신자들의 집안에서 압수된 물품 중에도 묵주, 성모님의 상본, 성모님에 관련된 다양한 서적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한 성모신심 확산 성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은 성모신심을 더욱 확산시켰다. 앵베르 주교는 특히 성모신심이 돈독했다. 그는 편지를 통해 조선 입국과정을 설명하면서 “우리의 착하신 예수님의 어머님의 축일인 12월 18일 밤, 사랑하올 동정녀의 보호 아래서 사고 없이 중국의 국경을 넘었다”면서 “우리는 원죄 없으신 마리아와 성스러운 천사들의 보호 아래 조선의 수도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자신의 선교가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도움으로 이뤄졌다고 여겼던 것이다. 앵베르 주교는 입국한지 1년 만인 1838년 12월 1일 조선교구의 주보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로 정하고 교황청에 허가를 요청했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41년 이를 승인했다.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 신부는 성모님의 도움 아래 활동하고자 수리치골에 ‘성모성심회’를 설립했다. 성모성심회는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돼, 성모님을 공경하고 성모님의 전구로 하느님께 죄인들의 회개를 청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신심단체였다. 성모성심회를 설립한 두 선교사는 곧바로 파리 본부에 편지를 보내 조선교회 성모성심회 회원들의 명단을 보냈다. 사실 이 단체는 이미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신학생 시절에 가입했던 단체다. 성모성심회 회원들은 ‘기적의 패’를 몸에 지니고 매일 성모송을 바치며,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기도를 바치는 활동을 이어 나갔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모성심회의 활동은 적어도 병인박해가 발생한 1866년까지도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865년과 1866년 첨례표에는 성모성심회와 관련된 날이 표기돼 있을 뿐 아니라 성모성심회 회원들이 전대사를 얻을 수 있는 방법도 수록돼 있다. ■ 묵주기도를 바치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성모님에 관한 교리를 공부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묵주기도를 바쳤다.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 다블뤼 주교가 교우촌 순방 때마다 “신자들을 매괴회와 성의회에 입회시키는 일을 한다”고 기록한다. 성모성심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조선의 신자들은 매괴회 등의 신심단체를 통해서 묵주기도를 바쳐온 것이다. 1850년대 후반 신자들 사이에서 묵주기도는 가장 대중적인 기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1857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작은 십자가와 성패 등을 보내주시되 묵주는 보내지 말라”며 “묵주는 조선 교우들도 아주 잘 만든다”고 전하고 묵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집게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최양업 신부가 신자들에게 묵주 만드는 법을 가르친 것은 무엇보다 묵주기도를 가르치고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였다. 병인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기록에서는 묵주기도에 관련된 일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성 최형(베드로)는 묵주를 만들어 보급하는데 앞장섰고, 1869년 죽산에서 순교한 유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나서도 “묵주를 꺼내 목에 건 다음 십자고상을 앞에 모시고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2024-05-05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2)] 부엉골 : 신학교의 설립

경기 여주 강천면 부평리 581. 부엉이가 많았다고 해서 부엉골이라 불리던 이곳에는 박해 시기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려던 선교사들의 열망이 가득했다. 전국 구석구석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걸어야 닿을 수 있는 외진 이곳은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아직 박해가 끝나지 않은 1885년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다. ■ 신학교 설립을 위한 노력 파리 외방 전교회는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이래 꾸준히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첫 번째 목적으로 삼고 활동했다.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해 조선인의 힘으로 교회가 유지되는 것이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36년 첫 번째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성 김대건(안드레아)·가경자 최양업(토마스)·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이후로도 신학생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페레올 주교는 1850년 병으로 사목 순방을 다니기 어려운 성 다블뤼 신부에게 신학생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리고 1854년에는 이렇게 국내에서 기초 교육을 받은 3명의 신학생을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유학을 통해 사제를 양성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여러모로 어려움이 컸다. 어린 신학생들이 유학길을 견뎌야 했을 뿐 아니라 현지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에 걸리거나 최방제의 경우처럼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조선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박해 때문이었다. 성 앵베르 주교도 성 정하상(바오로) 등을 비롯한 신학생을 국내에서 양성했지만, 1839년 기해박해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박해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 성 요셉 신학교 설립 마침내 1855년 메스트르 신부는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했다. 성 장주기(요셉)가 배론 교우촌의 3칸짜리 초가집을 봉헌해 신학교 건물로 사용했고, 1856년 입국한 푸르티에 신부가 교장으로 임명됐다. 초기 성 요셉 신학교는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이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일부 신학생들은 다른 마을에 거주하면서 학교를 오가기도 했고, 비신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소리 내서 글을 읽는 것도 조심해야 했다. 신학생들이 박해를 피해 안전하도록 밤낮으로 좁은 방안에서 문을 닫아걸고 공부하다 보니 면역력이 약해져 병에 걸리기 일쑤였다. 1865년 푸르티에 신부는 서한을 통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 신학교의 학생들은 거의 환자로, 이러한 병의 원인은 장소의 협소함보다는 운동과 활동의 부족에 있다”면서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작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나의 불쌍한 학생들은 낮이나 밤이나 문을 굳게 닫고, 병에 걸린 상태에서 공부한다”고 전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성 요셉 신학교는 점차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1861년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신학교 교사로 합류해 교육체계를 다져나갔다. 신학교육은 라틴어과와 신학과로 나뉘어 있었고, 신학과에서는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쳤다. 신학교 교사를 맡은 두 신부는 신학생들을 교육하면서도 교리서를 번역하고, 또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페낭에서 유학하던 신학생들도 1861년과 1863년에 귀국해 성 요셉 신학교로 편입하면서, 10여 명의 신학생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1864년에는 배론 교우촌을 방문한 베르뇌 주교가 신학생들에게 삭발례, 소품(小品)을 주는 성과도 있었다. 대품(大品)을 통해, 또 한 명의 조선인 성직자가 탄생하는 것도 머지않은 일처럼 보였지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신학교는 1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문을 닫게 된다. 당시 성 남종삼(요한)을 체포하기 위해 제천에 왔던 서울의 포졸들이 서양 선교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성 요셉 신학교를 급습했던 것이다.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는 이때 체포돼 3월 11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 신학교의 부활 병인박해의 피해는 컸지만, 선교사들은 여전히 조선인 사제 양성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는 로베르 신부에게 신학교 설립을 지시했고, 마땅한 자리로 찾은 곳이 부엉골이었다. 배론의 신학교처럼 박해로 신학교가 와해되지 않기 위해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부엉골본당 주임을 맡았던 가밀로(Camile Bouilon) 신부는 “로베르 신부는 오직 호랑이와 부엉이들만이 살고 있는 이 험난한 산속의 마을 부엉골보다 더 나은 장소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1885년 부엉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숲에서 통나무를 베고 진흙 벽돌을 쌓아 초가집을 짓고 신학교를 세웠다. 20년 만에 다시 신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부엉골에 다시 세워진 신학교 교장을 맡은 마라발 신부는 신학교를 ‘예수 성심 신학교’라 명명했다. 페낭 신학교에서 귀국한 신학생 4명과 국내에서 입학한 신학생 3명이 예수 성심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부엉골에 자리했던 신학교는 2년 만에 용산으로 이전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박해가 종식되면서 더 이상 깊은 산골에 숨어있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1945년 다시 서울 혜화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지금의 가톨릭대학교로 이어오기까지 수많은 한국인 사제를 탄생시키고 있다.

2024-04-21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21) 손골성지 : 파리외방전교회와 프랑스 교회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신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시작됐지만, 박해를 딛고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은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프랑스교회의 헌신적인 도움은 한국 땅에 신앙이 깊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큰 힘이 돼줬다. 프랑스교회는 어떻게 한국교회의 역사와 함께해왔을까. ■ 파리 외방 전교회의 헌신 손골성지 주차장 뒤편을 보면 벽돌을 쌓아 탑을 만들어 그 위에 십자가를 올린 듯한 모습의 순교비가 있다. 바로 성 도리 헨리코 신부를 기억하는 순교비다. 이 순교비는 프랑스교회와 한국교회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함께했음을 기억하게 해준다. 순교비 위에 세워진 돌십자가는 도리 신부의 고향에서 보내온 것으로, 도리 신부의 부모가 사용하던 맷돌로 만든 두 개의 십자가 중 하나다. 프랑스 딸몽본당은 1966년 도리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하나는 도리 신부의 생가에, 다른 하나는 도리 신부가 사목하던 손골에 보냈다. 이 돌십자가를 계기로 손골성지 개발이 시작됐다. 손골은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를 비롯해, 여러 선교사들이 우리말과 풍습을 배우고, 사목을 하던 곳이었다. 이 선교사들은 모두 프랑스에 본부를 둔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이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를 시작으로 많은 사제들이 목숨을 걸고 조선 땅을 향했다. 병인박해 직전 조선에는 12명의 사제가 활동하고 있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이른 새벽에 기상해서 묵상과 미사 봉헌을 하고 저녁 늦은 시각까지 활동했다. 오메트르 신부는 편지를 통해 “주교님은 초보 선교사들에게 7시간의 수면을 명령하시지만, 정작 당신은 절대 4시간 이상 주무실 수가 없다”고 전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1년에 2차례가량 교우촌들을 순방했는데, 이 기간에는 신자들의 교육, 고해성사, 예비신자들의 시험을 비롯해, 사목 관할지에 필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했다. 특히 선교사들이 이동 중에는 늘 상복을 입고 커다란 모자를 덮어썼다. 상복을 입은 이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 조선의 풍습 덕분에 서양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은 조선교회의 자립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매진했는데, 파리 외방 전교회는 원칙적으로 양성된 사제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온전히 현지 교회만을 위한 사제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7세기 무렵까지 해외선교를 맡은 수도회들은 대체로 현지에 해당 수도회 분원을 세우는 형태로 이뤄졌다. 이는 수도원의 영성을 전하고, 본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견하고 지원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현지 교계제도 정착이나 복음의 토착화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반면 파리 외방 전교회는 전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지인들을 통해 현지에 복음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을 뒀다. 그래서 파리 외방 전교회 회칙은 “방인 성직자단이 형성되고, 선교사들의 협력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면 흔쾌히 모든 시설을 방인사제들에게 넘기고 물러나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 전교회의 후원 조선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건은 비단 선교사들만의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선교사 뒤에는 수많은 프랑스 신자들의 영적·물적 후원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활동에 가장 크게 협력한 단체는 ‘전교회’다. 전교회는 복자 폴린 마리 자리코가 프랑스 리옹에서 시작한 평신도 단체다. 전교회 회원들은 함께 모여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금을 모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전했다. 이런 후원금은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활동하는 선교자금으로 활용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전교회 이사회가 내게 5600프랑을 기부했다”면서 “이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걸작이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파견된) 선교지들의 성공을 열렬히 바라는 강력한 동기”라면서 전교회 연보 편집장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이런 든든한 후원에 힘입어 선교에 필요한 비용과 물품을 충당할 수 있었다. 조선까지 가서 생활하기 위한 경비는 물론이고, 성사를 위한 제의나 포도주, 기름, 신자들을 위한 성물, 선교사들의 생활용품에서 커피 같은 기호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원이 이뤄졌다. 이런 지원이 조선교회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말할 것도 없다. 전교회의 지원 내역을 살피면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 해인 1865년에는 2만6789프랑을 조선교회를 위해 지원한 것으로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전교회 회원이 프랑스에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던 조선교회의 신자들도 전교회 회원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서한을 통해 “1년 동안 181명의 신자를 전교회에 가입시켰다”고 밝히기도 하고,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도 전교회에 입회하기를 원했다는 일화도 전하고 있다. 프랑스 신자들과 조선의 신자들은 이 땅에 복음을 뿌리내리기 위해 한마음이었다. 피상적으로 마음을 모은 것 아니라 ‘전교회’라는 한 단체에서 활동하며 선교를 지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교회는 1922년 교황청 소속 기구로 승격됐는데, 바로 오늘날의 ‘교황청 전교기구’다.

2024-04-07

[수원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20) 손골성지 : 조선의 두 번째 사제

광교산 기슭에 자리한 손골성지. 손골성지는 특별히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를 현양하고 있다. 그러나 손골은 조선의 두 번째 사제,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 동료 사제들과 함께 손골에 관한 최양업 신부의 기록은 그가 1857년 9월 14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저는 두 번이나 페롱 신부님을 찾아가서 여러 날 묵었다”고 밝혔다. 이어 “저는 신부님이 미리 알려주신 덕분으로 페롱 신부님을 잘 알고 있었고, 페롱 신부님도 저의 외로운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로 우정을 느꼈다”며 “또 우리가 인연으로 함께 묶여있음을 미리 맛보고 있는 터였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함께 나눴다”고 손골에서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당시 전국 방방곡곡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신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 해에만 조선 신자의 28%를 만났다고 하니 그 고단함을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외롭고 고단한 여정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 중 하나가 바로 함께 사목하는 동료 사제들이었다. 홀로 외진 교우촌을 찾아야 했던 최양업 신부는 대부분 혼자 사목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료 사제들과 함께 사목하는 일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활동이 신학생 양성이다. 최양업 신부는 1854년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조선에서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떠난 신학생 3명의 안부를 물으면서, 신학생을 지도하는데 필요한 각 신학생들의 특성과 신앙, 지식수준, 염려되는 점 등을 설명했다. 최양업 신부가 안부를 물은 신학생들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신부 등에 이어 선발된 조선인 신학생들이었다. 최양업 신부 이후 신학생 양성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1850년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후에 제5대 조선대목구장을 맡게 되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에게 신학생 교육을 명하면서부터다. 이후 다블뤼 신부는 신학생을 양성하기 시작해 1854년 3월 신학생 3명을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다블뤼 신부는 이 기간 중 1853년 여름에는 손골에서 머물기도 했다. 자료의 부족으로 최양업 신부도 신학교 설립과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는지, 그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최양업 신부와 동료 사제들의 서한에서 유추해 볼 때, 최양업 신부는 조선인 신학생 각자를 상세히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양업 신부가 직접 신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알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 경신박해와 최양업 신부의 선종 최양업 신부가 열정적인 사목을 펼친 결과, 조선교회의 교세는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1859년 11월 베르뇌 주교는 예비신자를 1200명 이상으로 추산했는데, 그 수는 2개월 만에 2000명으로 증가했다. 최양업 신부도 1860년에는 자신이 맡은 사목지에서만 세례 받을 준비가 된 예비신자가 1000명 가량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신박해는 이런 희망을 무너뜨렸다. 경신박해는 1859년 말 개인적으로 천주교에 반감을 품고 있던 좌포도대장과 우포도대장이 조정의 허가 없이 교우촌들을 급습하면서 시작됐다. 이 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잡혔는데, 이 과정에서 신자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집을 불태우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당시 조정은 비교적 천주교에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약탈과 방화 등의 만행이 저질러지자 두 포도대장을 파면시키고 박해를 중단시켰다. 경신박해는 국가가 주도한 대대적인 박해는 아니었지만, 최양업 신부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전국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최양업 신부는 주요한 박해 대상이었다. 박해자들에게 붙잡힐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이에 최양업 신부는 박해를 피해 경상도 남쪽의 죽림 교우촌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사목을 멈추지는 않았다. 밤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낮으로 인근 교우촌을 찾고 성사를 집전하면서 활동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이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그보다도 신자들이 박해의 위협에 신앙을 잃는 것이 더 걱정이었던 것이다. 박해가 잠잠해지자 최양업 신부는 1861년 성사 집전 상황을 보고 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서울로 가던 중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치면서 위중한 상태가 됐고, 결국 그해 6월 15일에 선종했다. 베르뇌 주교가 “우리 중에 가장 튼튼한 사람은 최 토마스 신부”라고 말했을 정도로 건강한 최양업 신부였지만, 경신박해로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크게 쇠약해졌던 것이었다.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푸르티에 신부는 “그(최양업)는 아주 열정적으로 예수, 마리아 두 이름을 되풀이하고 있었다”면서 “두 이름을 죽기 직전의 고통 속에서도 그처럼 분명하게 발음하는 것을 보며 각별한 은총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미 경신박해로 침체된 조선교회는 최양업 신부의 선종으로 또다시 큰 슬픔에 빠졌다. 최양업 신부의 빈자리는 그가 아닌 다른 누가 메울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페롱 신부는 “그(최양업 신부)의 죽음은 조선교회 전체의 초상”이라고 슬퍼했다. 그는 특히 “그(최양업 신부)가 남쪽의 오지에서 방문하던 지역들은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고, 그의 한문 지식과 조선인으로서의 장점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일에 누구보다 적격이었다”며 “종교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20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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