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하나가 딸 때문에 고통받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위 때문에 고통받는 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집도 장모와 사위가 대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이 들어 알게 되었지만 사람 사이의 갈등이 생기면 일단 거리를 두는 것이 첫 번째 처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나의 충고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은 마흔이 다된 딸의 일상을 어미인 내 친구가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안다. 어미들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유혹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그의 하느님이 되고 싶은 것 말이다.
비록 개신교이나 신앙이 깊은 그였기에, 하느님께 맡기고 모든 것을 침묵하기를 권했으나 “자신은 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말로 내 충고는 거부되었다. 그가 딸 인생에 개입하려 하듯이 나 또한 친구의 인생에 개입하려 하는 것 같아 대화를 끊었다. ‘성모님께서 십자가 아래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던 것을 떠올려봐’ 했지만, 그것 또한 공허한 메아리가 되리라.
외람되지만 나는 가급적 우리 순교성인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공감 능력 과잉으로 고통받는 터라 그랬다. 그러나 주교회의에서 발간한 「한국천주교 성지순례」 책자를 들고 성지를 방문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당연히 그중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곳을 주목하게 되었다.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추자도, 거기에 아들 황경한을 놓고 떠난 정난주 마리아를 알게 된 것은 그때쯤이었다.
말들이 사지를 묶어 끌고 가며 젊은 육체를 생으로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으로 남편 황사영을 잃고 난주 마리아는 시어머니와 함께 두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유배길에 오른다. 아시다시피 정약용의 조카이며 황사영의 아내, 정하상 바오로의 누이였던 그녀는 유복한 양반 집안에서 자랐다.
제주로 유배 가는 길에 그녀는 몰래 감춰놓았던 패물들을 사공에게 다 주며 추자도에 들러 거기에 아기를 놓아두고 가자고 애원한다. 제주에 가서 관노로 살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죄인의 아들로 손가락질받으며 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감옥에서 이미 아기 경한의 옷에 이름과 생년 집안을 수놓아 둔 후였다.
햇볕이 작열하는 갯바위 위에 강보에 싸인 아기를 두고 떠나는 난주 마리아의 신앙 이야기는 울음을 참기 힘들었다. 세 아이를 낳고 키워본 어미인 나로서는 차라리 일찌감치 내가 죽는 것을 선택할 것이며, 그도 아니라면 차라리 아이가 죽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을 터였다. 실종은 죽음보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대체 얼마만 한 신앙이 아기를 갯바위 위에 놓는 모험을 택하게 한 것일까. 모세의 어머니도 나일강에 모세를 띄우고 모세의 누이를 시켜 지켜보게 하였는데 난주 마리아의 경우 이는 그보다 더 끔찍한 형벌 아닌가.
그녀는 아주 훗날 아이가 오씨 집안의 어부에게 발견되어 양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의 관노가 되어 60여 세의 일생을 산다. 살아생전 그들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성모님께서 나중에 요한 사도와 함께 제법 긴 인생을 사신 것과 비슷하다. 그녀는 아직 성녀도 복자도 아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성인의 삶이 있을까. 이 치욕을 견디며 산 그녀의 신앙은 어떤 순교 성인의 삶보다 우리를 울린다.
이 고되고 치욕스러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이 어떤 자세여야 하는지 그녀보다 더 가르쳐 주는 스승이 있을까 싶다. 그녀야말로 신앙을 가진 모든 어머니의 모범, 가장 성모님을 닮은 우리의 신앙 선조가 아니실까. 진도에서 추자도로 떠나는 배의 이름이 산타 모니카인 것은 우연일까. 아무래도 추자도를 방문하게 되면 오래오래 그 갯바위에 앉아 기도하게 될 것 같다. 난주 마리아, 우리 모든 어리석은 어미들을 위해 빌어주소서.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