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재앙의 정체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떨어진 별’이 등장한다. ‘떨어진 별’을 두고 타락한 천사, 혹은 사탄이나 악마로 해석한다. 그 별에게 구렁의 열쇠가 ‘주어졌다.’ 별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별에게 열쇠를 주었다. 학자들은 이런 수동태 형식을 ‘신적 수동태’라 부른다. 요한묵시록은 악의 세력이 휘두르는 힘을 묘사하기 위해 대부분 신적 수동태의 형식을 빌려온다. 요한묵시록의 악은 힘이 있어도 얼마 안 가서 사라져 버리거나 무너져 버린다. 악은 그렇게 무능력하다. ‘신적 수동태’의 주체는 감추어져 있으나 대개 하느님으로 인식한다. 달리 말하자면, 참된 권능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이셔서 악은 하느님과 동등하거나 하느님을 대적할 힘 따위는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권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신념이 ‘신적 수동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만약 이렇다면, 하느님은 기쁨, 행복, 성공 그리고 정의, 진리, 평화 등의 단어들 틈에서만 사유되어서는 안된다. 재앙, 고통, 불행, 나아가 사탄과 악마의 틈바구니 안에서도 그분의 섭리에 대해 우리는 묻고 답해야 한다. 요한묵시록의 재앙은 그러므로, 사탄이나 악마의 폭력이나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다시 되새기는 메타포가 된다. 별이 구렁을 연다. 거기서 큰 용광로의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온다. 이 연기는 모든 것을 어둡게 만들고 모든 것을 집어삼켜 혼돈으로 만든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 그러니까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혼돈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장면 서술이다.(창세 1,2 참조) 하느님의 손길이 빚어내는 모든 ‘있음’ 이전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없음’과 동의어다. 떨어진 별로 시작하는 재앙의 서사는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없는 것들의 이야기다. 없는 것들을 아무리 자세히, 기묘하게 묘사한들, 그것은 사탄과 악마를 그려내는 ‘수동태’의 힘처럼 하느님 앞에선 부질없는 것들일 뿐이다. 부질없는 것들은 메뚜기, 땅의 전갈과 같은 것들로 형상화된다. 이것들의 폭력은 땅의 풀과 푸성귀, 나무로 대변되는 ‘자연’도 아니고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믿는 이들도 아닌,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다. 단번에, 그리고 습관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해석해 버릴 것이다. 요한묵시록의 재앙은 하느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나쁜 이들을 향한 경고라고. 그러나 이런 선악 구도의 결과론적 징벌이 요한묵시록의 재앙이라면 굳이 하느님과 어린양까지 언급하며 심판을 논할 필요가 있을까. 나쁜 일에 공분을, 선한 일에 기쁨을 지니는 건 인간 일반의 현상이므로. 우리의 이야기는 5절부터 재앙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차근차근 펼쳐나간다. 다섯 달, 한계가 명확한 그 다섯 달 동안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이들은 재앙의 희생자가 된다. 그 사람들은 죽는 게 아니다. 메뚜기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뿐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사람들은 죽기를 바란다. 한낱 메뚜기가 사는 시간이 다섯 달이고, 신약성경은 ‘다섯’을 ‘몇 안 되는 것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기도 했다.(1코린 14,19; 루카 12,6; 마태 25,2 참조) 그렇게 허무한 다섯 달인데, 그 짧은 시간을 버틸 재간이 사람들에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메뚜기, 그것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운 존재인가. 이제 메뚜기를 적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해치는 메뚜기는 그야말로 전투에 임하는 장수와 같다. 종말의 위기를 다루는 요엘서의 서술과 흡사하여(요엘 2,4 이하 참조) 메뚜기를 종말론적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메뚜기의 서술은 허망하다. 메뚜기에 관한 모든 서술은 실재하지 않는, ‘~같은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금관 같은 것’, ‘머리털 같은 것’, ‘사자 이빨 같은 것’, ‘마차들의 소리 같은 것’, ‘전갈 같은 것.’ 이런저런 ‘~같은 것들’은 실은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인식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견디기 힘든 고통 안에서도 좌절과 죄책감 빠지지 않길 마치 9장이 시작될 때 구렁에서 나온 연기와 같다. 모든 것을 어둠 속에 집어삼켜 무엇 하나라도 제 본연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나지 못하게 만드는 연기 말이다. 금관이든, 사자 이빨이든, 떠들썩한 마차 소리든, 모든 것은 메뚜기를 향하지만 메뚜기를 비껴가서 메뚜기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그러니 메뚜기는 히브리 말로 ‘아바똔’(אֲבַדּוֹן), 그리스말로 ‘아폴리온’(Ἀπολλύων)이라 부르는 ‘지하의 천사’(우리말 번역은 ‘지하의 사자’로 되어 있다)를 임금으로 모실 수밖에. ‘아바똔’은 ‘파멸의 공간’이란 뜻이고, ‘아폴리온’은 파괴자란 뜻이다. 두 단어 모두 생명에 반하는 ‘죽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메뚜기를 소재로 서술된 재앙과 고통의 끝이 죽음이라니. 전투사의 모습으로 꾸며진 메뚜기가 전투 한번 해보지 않은 채, 죽음의 메타포 ‘지하의 천사’를 제 임금으로 섬겨버렸으니, 잔뜩 긴장한 채, 이를 깨물며 재앙과 고통의 끝을 탐험하고 그 정체를 묻는 우리의 읽기는 허무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건질 것은 명확하다. 죽음은 대결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다섯 달로 한계 지워진 시간, 사람들이 그토록 죽고 싶어 하는 그 시간의 주인공 메뚜기는 사람들을 해치고 죽일 만큼 대단한 힘이 없다는 것. 모든 재앙의 끝은 죽음을 향하고 있어 재앙은 그렇게 허무하다는 것. 재앙과 고통의 끝에서야, 그 허무함의 민낯이 드러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지 모른다.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조차 죽음 같은 재앙은 징벌이 아니라는 희망 말이다. 견디기 힘든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못남을 탓하며 죄책감에 빠질 때가 많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어’, ‘나는 늘 왜 이럴까’ 하는 좌절과 패배의 소용돌이, 그 안에서 우리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겠지만 우린 다시 한번 그 고통의 정체에 대해 최대한 섬세하게 물어야 한다. 그 고통의 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허무한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은 우리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주눅 들어 미리 단정 짓고 후회하는 우리의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수님 대신 석방되어 목숨을 구한 바라빠

2004년 개봉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열심한 가톨릭신자인 할리우드 스타 멜 깁슨이 감독한 영화였다. 많은 이는 그의 영화가 과거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영화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전혀 다른 영화를 연출했다. 영화의 첫 대사에서부터 현실감이 다가오도록 예수님이 말하던 당시의 언어인 아람어와 라틴어를 사용했다. 이 영화는 개봉 초기부터 예수님의 수난을 너무 잔인하게 묘사했다는 점이 논란거리가 되었다. 예수님이 유다인과 로마 군인의 무차별 구타로 눈이 퉁퉁 부어있는 장면, 로마 군인의 채찍질에 살점이 터져 나와 피가 흥건한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과거 영화에서 예수님은 수난 중에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통이 여과 없이 그려졌다. 일부 평론가들은 인간의 폭력성은 실제상황에서 더 참혹할 것이라며 인간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영화라고 했다. 유다인에게 중요한 유월절(유다인들이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에는 죄수 중 한 사람을 석방하는 전통이 있었다. 마침 바라빠라는 사형수가 있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바라빠를 데려와 군중에게 예수와 바라빠 중 누구를 풀어주겠냐고 물어본다. 바라빠는 반란에 가담해 로마에 대항하다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였다. 바라빠는 로마제국에 반대한 폭력투쟁의 지도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군중들은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했다. 사슬이 풀린 바라빠가 당혹감 속에서 한쪽 눈이 거의 감긴 예수님과 마주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있어 보였다. 예수님 대신에 극적으로 석방되며 목숨을 건진 바라빠는 가장 운이 좋았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라빠는 풀려 난 후 무엇을 했을까? 성경은 바라빠의 이후 행적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에 상상력이 더해진다. 스웨덴 출신의 작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는 「바라빠」라는 책에서 바라빠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했지만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상상의 이야기를 저술했다. 어쨌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예수님에 대해 바라빠는 궁금해졌을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도 접했을 것이다. 예수님 덕분에 목숨을 건진 바라빠의 인생에는 그분이 이미 깊이 들어와 있었을 것이다. 2002년 일본에서 <미션 바라바>라는 한일 합작 영화가 개봉됐다. 영화는 회개한 야쿠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야쿠자들은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후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속죄하는 의미로 바퀴 달린 십자가를 지고 일본 전국을 일주하였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우리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바라빠들이다. 덤으로 생명을 연장한 바라빠의 이후의 삶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위격으로 세 분이시나 본질과 실체로는 한 분이시라는, 모순처럼 보이는 존재론적 명제를 이성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신학자들과 설교가들이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했지만, 저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너무 단순한 비유들은 오히려 그냥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듯 느껴지기도 하여 이제는 그런 시도를 피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성으로 이해되고 설득되는 까닭이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알려주셨고 교회가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비롯하여 우리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가장 짧고도 명확하게 고백하는 기도인 성호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라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4~17장)에서는 ‘보호자’, ‘진리의 영’으로도 불리는 ‘성령’을 약속하시고, 성령께서 하실 일을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의 맥락 안에서 삼위일체 신앙의 바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먼저 강조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전제요 목적이며 근거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알고 믿어야 그분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요한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순종하고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는 관계이고 이를 통해 하나가 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그대로 제자들에게,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열려있는 관계입니다.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아들이 아버지와 누리는 관계에 모두 참여하게 됩니다. 그들과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 사랑하고(요한 14,21 참조), 그들이 계명에 순종하면 아버지는 그들이 청하는 것을 다 주실 것이며(요한 16,23 참조), 그들은 아들을 증언할 것이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요한 15,27. 17,22 참조) 이 사랑의 관계로의 초대가 예수님의 본론입니다. 성령의 파견에 대한 약속과 그분이 하실 일에 대하여는, 이 두 주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들이 그러셨듯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앞으로 올 일들을 알려주실”(요한 16,13) 것입니다. 그분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 보내어지신 것처럼(요한 17,8 참조),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요한 15,26 참조) 보내어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증언하실 것입니다.(요한 15,26 참조)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령께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믿는 이들, 교회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요한 14,16 참조) 그들이 하느님과 믿음의 일치를 이루도록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십니다. 사실 부활 이전의 제자들에게 성령은 세례성사나 주님의 말씀 안에서 간접적으로 체험된 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신 그분은 세상 끝까지 교회와 함께하시는 협조자가 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잘 묘사된 그 체험은 사도들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깊고 뜨거운 것이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사랑과 일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은 우리를 늘 곁에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고 우리가 서로 그렇게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의 모델이십니다. 세상에 오신 아드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은 살아계신 사랑이 되셨고, 교회와 함께 계시는 성령을 통해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은 영원히 살고 일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언제나 현재형의 사랑이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수님이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던 니코데모

“어느 조그만 별에 어린 왕자가 살았습니다. 왕자님은 장미꽃 한 송이를 정성 들여 기르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별의 사막에서 만난 한 여우가 왕자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사물이 잘 안 보인단 말이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1900~1944)의 소설 「어린 왕자」의 중요한 부분이다.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편안한 생활을 뒤로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군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행방불명되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인간미를 추구했고 「야간 비행」과 「어린 왕자」, 「인간 대지」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욕심 없이 세상을 바라보아야만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명한 동화 「어린 왕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움과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에 평화와 사랑을 호소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관계와 욕심으로 인해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순수함을 잃고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며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신앙생활에서도 어린이와 같은 맑은 마음으로 새롭게 눈을 뜨고 세상을 사랑으로 본다면 더 많은 진정한 가치와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 니코데모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최고 의회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다인들의 최고 통치기구였다. 예루살렘 최고 의회(산헤드린)는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 귀족 계급의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 등 모두 71명으로 구성되었다. 니코데모는 사람들 눈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눴다.(요한 3,1-21 참조) 예수님과 니코데모는 알 듯 모를 듯 대화를 이어갔지만 니코데모는 진리를 찾는 사람이었다. 마음과 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체험 후였을 것 같다. 예수님이 수난을 받으실 때도 니코데모는 혼자 용감하게 변호했는데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혼자는 역부족이어서 결국 예수님은 사형을 당한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십자가형 이후 시신을 모셔다가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고 새 무덤에 안장하며 장례를 치렀다. 사형수로 죽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렀다는 자체가 의리와 신의를 지키던 인물임을 말해 준다. 예수님의 수난과 처형 당시 제자들이 도망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비교되는 행동이다. 이처럼 니코데모는 강직한 인물이었고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니코데모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유다인들 대부분의 군중과 최고 의회의 결정에 사형을 받은 분을, 그것도 최고 의회 의원이 장례를 치른 것은 정말 용감한 행동이었다. 대통령이 퇴임 후 수사를 받을 때 주변 사람들이 거의 모두 떠난 것을 본 적이 있다. 권력은 무상하면서도 비정하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8면

[말씀묵상] 성령 강림 대축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인사를 하시고,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오순절에 제자들은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내려앉자, 성령으로 가득 차 다양한 언어로 복음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만으로는 믿기 어려운 부활에 대한 소식을 우리가 믿고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이끌어주십니다.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함께 걸어주시는 성령께서는 다양한 직분과 활동을 통해 ‘공동선’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적합한 사람에게 적절한 ‘은사’를 베푸십니다. 곧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을 고치는 은사,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예언을 하는 은사,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또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를 주십니다.(1코린 12,4-11 참조) 한편, 성령께서는 개인의 성화를 위해 ‘성령 칠은’(지혜, 통찰, 지식, 식견, 공경, 용기, 경외)을 베푸십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자신의 저서 「성령의 약속」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삼덕’을 ‘성령 칠은’과 연결 지어 설명합니다. 곧 믿음의 덕을 키우기 위해 ‘의견, 지식, 통찰’의 은혜를, 희망의 덕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경외와 용기’의 은혜를, 사랑의 덕을 쌓기 위해서 ‘지혜와 공경’의 은혜를 청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의견’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이 공존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멀리하는 세상 안에서 영적 식별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식’의 은혜도 구해야 합니다. 이때의 지식은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고, 창조된 만물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을 하느님과 연관시키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영혼의 힘이 되는 ‘통찰’의 은혜를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뿐 아니라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 영광의 부활,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꿰뚫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기억하며,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외’의 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함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를 희망하는 일이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기를 청하는 일입니다. 또한 성령께 이끌려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용기’의 은혜는 하느님께만 두는 믿음과 희망의 표현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의 영을 온전히 맡기신 예수님의 의탁을 기억하며, 삶에서의 시련, 고통, 질병, 일탈 등의 극복과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용기의 은혜를 청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성령께 ‘지혜’를 일깨워 주고, 알아차리게 해 주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최고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지혜에 참여해야 합니다. 매 순간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지혜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볼 줄 알아야 하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공경’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일이 다릅니다. 제한된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이러한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구구팔팔이삼사’를 외치며 바라는 건강, 허비하지 않고 최대한 아름답게 사용해야 하는 시간, 의미 있게 사용해야 하는 재물, 그리고 인생 여행에 함께하는 동반자(배우자, 가족, 친구, 신앙 공동체 등)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의 삶을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공동선’을 지향하며, ‘일치’를 이루고, ‘겸손’하고, ‘교도권에 순종’하고, ‘이성’을 적합하게 사용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라 5,22-23 참조;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에 힘입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1코린 12,3)라고 선포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사랑의 삶, 의미 있고 행복한 인생 여정을 가꾸어야 합니다. 글 _ 조성풍 신부(아우구스티노·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나팔은 울려야 한다(묵시 8,6-13)

나팔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팔은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통적 형상이다. 나팔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참혹한 장면은 기어이 등장하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요한묵시록의 심판이 징벌이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초대라는 사실을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다.(6월 1일자 19면) 무서운 심판의 서사라는 다소 거칠고 투박한 방식으로 전개된 하느님의 호소는 일곱 나팔의 이야기 안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나팔이 불릴 때마다 ‘종말이다’, ‘심판이다’라는 건조하고 상투적인 해석으로 하느님의 간절한 호소를 이해하는 건 게으른 것이다. 심판의 서사가 어떻게 묘사되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세심히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지상의 것들이 무너지고 파괴되며, 땅의 삼분의 일이 사라지고 제거되는 장면이 도대체 하느님의 초대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그 심판의 끝, 그러니까 일곱 나팔의 소리가 완전히 울려 퍼졌을 때, 하늘은 왜 여전히 하느님을 찬송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인지(묵시 11,15) 섬세하게 물어야 한다. 요컨대, 심판의 참혹함이 하느님을 만나는 데 왜 필요한 것인지 묻는 일이 일곱 나팔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가 된다. 처음 네 개의 나팔은 땅의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땅에 떨어진 우박과 불, 불타는 큰 산과 바다, 그리고 쓴 물 등이 그렇다. 땅의 것들이 제 모습과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고 하나의 ‘상실’이나 ‘파괴’로 이해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다만, 그 심판은 옛날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재앙과 매우 닮았다. 우박과 불이 땅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이집트 재앙의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탈출 9,24-25 참조) 요한묵시록 저자는 ‘피가 섞인 것’으로 우박의 성질을 더욱 섬뜩하게 서술한다. 이집트 재앙 첫 번째에 나타나는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한 장면이나(탈출 7,17 참조) 요엘서 3장 3-4절에서 말하는 주님의 날의 징조를 우박에 접목해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간다. 핏빛의 우박이나 불구덩이가 된 땅의 서술은 요한묵시록이 쓰인 시대로부터 2000여년 전 벌어진 사건의 이야기이지만, 유다 역사 안에서 그리고 요한묵시록이 쓰인 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위한 메타포의 한 예로 작용하고 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속 어렵고 힘든 일을 제 삶의 현실을 위한 하나의 메타포로 끌어다 사용했고, 성찰과 회개의 소재로 다루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66년에 발발한 유다 1차 항쟁이었다. 로마에 저항함으로써 유다 민족의 독립과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으나 그 결말은 하느님의 자리라 여겨진 예루살렘 성전의 불바다였다. 너무나 참혹한 사건이었고, 그로 인해 절망했으며, 그것으로 세상은 그 끝에 다다랐다고 모두 생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공관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서술하면서 유다 1차 항쟁의 역사를 끌어온다. 그 역사는 끝장난 역사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시발점으로 해석된다. 불타 무너진 성전을 예수님의 몸으로까지 해석하면서 역사의 고통을 믿음을 향한 다짐으로 어떻게든 바꾸어 내는 것, 그것이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의 땅으로 대변되는 심판에 대한 서사의 기능이다.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의 땅은 역사 속에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로 믿음과 삶이 완전히 무너질 때, 그 절망의 무게감에 사람들이 허덕일 때, 강렬한 심판의 형상으로 수없이 호출되지만, 혹독한 그 고통의 기억만큼이나 새로운 희망에 대한 간절함은 배가 된다. 둘째 나팔이 말하는 불타는 큰 산, 셋째 나팔이 불릴 때 나타나는 쓴 물, 넷째 나팔의 어둠 등이 차례로 서술되면서 심판이라 해석되는 여러 서술은 더욱 단단해진다. 참혹한 일로 믿음이 무너질 때 희망에 대한 간절함도 커져 이웃과 세상 고통 마주하며 그들의 아픔 함께 살아내야 그러나 다시 한번 되새기자면,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불리는 순간, 그곳은 하늘이다. 구원의 환호가 울리는 하늘, 하느님께 찬미 찬양이 드려지는 하늘. 어쩌면 하늘을 기다리기 위해선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끝내 통과해야 하는 고통의 삶은 필연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심판의 대상이 ‘삼분의 일’로 규정된다는 점을 살피며 심판의 대상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도드라지게 강조한다. 심판은 전체가 아닌, 부분의 일이라고 안도한다. 모두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류가 끝장나는 것이라서 믿는 이들은 안심해도 된다는 것. 이런 해석은 뭔가 원시적이고 천박하다. ‘삼분의 일’과 그렇지 않은 ‘삼분의 이’를 갈라놓고 적어도 나는, 우리는 그 ‘삼분의 일’과는 무관하다는 식의 해석은 가소롭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이런 해석을 두둔하며 ‘삼분의 일’의 회개를 주문한다. 심판의 징벌을 통해 속죄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따르라는 이런 주문은 삶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죄다 윤리적, 율법적 일탈로 편협하거나 게으르게 해석한 결과다. 이런 해석에 예수님의 일갈은 긴요한 것이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2) 역사 속에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을 심판의 형식으로 다시 복기하는 것은 죄악에 대한 경고나 일탈에 대한 징계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게 아니다. 그 참혹한 사건들이 제삼자의 일이라서 무심한 것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분, 혹은 전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시대 공감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절망하지 말자. 시대의 아픔에 무감각하게 살지 말자. 저만의 신앙을 지킨다고 이웃과 사회의 슬픔에 눈감지 말자.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는 우리 사회 도처의 아픔을 끊임없이 들추어내고 있다. 나팔이 울리듯, 세상의 고통과 아픔은 더욱더 알려지고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땅의 ‘삼분의 일’과 ‘함께’ 그 고통과 아픔을 살아내어야 한다. ‘삼분의 이’의 무릉도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팔이 모두 울려야 구원은 온다. 나팔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야 구원은 비로소 ‘우리’ 것이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하느님을 향한 구원(묵시 8,1-5)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린다. 요한묵시록 5장의 문제, 그러니까 봉인을 열 수 있는 주체를 찾는 일은 이제 그 끝에 다다랐다. 봉인은 모두 열렸고 봉인은 그러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열리는 과정은 지난했으나 그 흐름은 놀랍게도 구원에로 방향 지워졌다. 마지막 일곱 번째가 열리는 공간은 하늘이다. 하늘에서 봉인되어 있던 두루마리는 하늘의 자리에서 완전히 열렸다. 처음부터 하늘이었고 마지막까지 하늘인 봉인의 흐름은 요한묵시록의 구원 의지를 분명히 한다. 앞서 요한묵시록 7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을 다시 되새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이사야서의 한 대목을 옮긴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 그로 인한 하느님 백성의 희망을 노래한다. 봉인이 해제된 두루마리는 하느님의 구원을 찬찬히 살펴보게 하는 묵상의 글이 된다. 그러나 구원이란 게 그리 호락호락한 선물이 아니다. 한번 노력해서 한번 받고 끝나버리는 영화나 소설 속 해피엔딩이 아니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는 것을 두고 종말이 왔음을, 그 종말의 시간에 봉인을 펼친 유일한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이 완성된 데 주석의 방점을 찍는다. 이런 해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구원의 유일한 길과 목적은 예수님인 건 분명하나, 그 구원이, 종말이 어느 시간의 흐름 끝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요한묵시록은 구원 이전에서 구원 이후의 시간 흐름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미 이뤄진 구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해 쓰였다. 구원이 왔음에도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가 여전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구원과 고통의 간극을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요한묵시록의 집필 동기다.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를 통해 우리는 이미 그 동기를 얼마간 살펴보기도 했다. 예컨대 에페소 교회에 보내진 편지에서 말하는 ’첫사랑‘의 상실이 그러하다. 첫사랑은 십사만 사천과 닮았다고 보면 어떨까. 저만이 옳고 구원에 합당하다 말하는 니콜라오스파의 배타적 자세가 첫사랑을 상실한 것이라면 모든 이에게 열린 구원에의 외침을 가리키는 십사만 사천은 첫사랑의 회복일 것이니. 첫사랑은 그러므로 구원을 누리는 이들이 한결같이 지켜나가야 할 보편적 사랑, 누구에게도 열린 구원의 선포와 같은 것이니. 구원이 왔다, 종말이 당도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업적은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외치는 것은 오래된 중언부언이라 식상한 것이 아닐까. 구원을 이미 누리고 사는 이에겐 너무나 자명한 말이라 새롭지 않아 지루한 선포가 된다. 구원은 찾아 나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의 소재다. ‘반 시간’의 침묵은 그래서 소중하다. 전통적으로 ‘침묵’은 주님의 날이 임박했음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스바 1,7; 즈카 2,17; 시편 76,9 참조) 주님이 오시고 그분이 행하시는 것을 찬찬히, 겸허히 살펴보는 시간이 반 시간이다. 반 시간은 그러므로 주님의 시간이다. 일곱 개의 봉인이 인간 세상의 희로애락 속에서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폈다면 반 시간의 침묵 후에 펼쳐질 일곱 개의 나팔은 심판이라는 묵시문학적 장치들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어떤 것인지 소개할 것이다. 반 시간의 침묵 속에서, 그리고 구원이 완성된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숙제를 얻은 셈이다.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직접 개입하셔서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이 무엇을 향해 서술되는지, 그리하여 그 방향성 안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것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읽어내어야 한다. 구원, 시간의 끝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돼 구원은 찾아 나설 무엇이 아닌 어떻게 살지에 대한 성찰 소재 하느님의 일은 ‘일곱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유다이즘 안에서 일곱 천사는 대천사의 그룹으로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그분의 현존에 함께하는 천사로 소개된다.(에녹 20, 토빗 12,15; 이사 63,9) 천사는 일곱 나팔을 가지고 있는데, 하느님의 경고(예레 4,5)나 하느님을 위한 축제와 예배(2사무 15,10; 민수 10,10), 아니면 하느님의 현현이나 마지막 날 하느님의 등장을 상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탈출 19,16; 요엘 2,1; 스바 1,16)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은 하느님을 향한 지시체다. 반 시간의 침묵에 이어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은 하느님을 향해 더욱 세심히, 민감하게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일을 살피기 전, 우리에겐 하느님 그분을 향한 시선이 필요하다. ‘다른 천사’의 등장은 하느님을 향한 방향성을 더욱 탄탄하게 만든다. 우리말 성경은 제단 ‘앞에’라고 번역하지만, ‘앞에’라고 번역한 그리스말 ‘에피’(ἐπὶ)는 공간적 친밀성을 드러내는 전치사다. 그러므로 제단 앞은 하느님께 보다 ‘가까운’ 공간이다. 다른 천사에게는 금향로와 많은 향이 주어졌다. 다른 천사는 마치 사제와 같다.(레위 16,12; 민수 17,11 이하) 그러나 다른 천사가 보이는 뜻밖의 행동은 많은 의문이 남는다. 천사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숯불을 가득 담아 땅에 던진다. 향로와 향이 성도들의 기도일진대(묵시 8,3-4) 그 기도가 땅을 향해 던져지는 셈이다. 하느님을 향하는 기도가 땅을 향하는 공간적 연결성은 낯설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늘 이렇다. 4장의 천상이 땅의 공간과 하나 되어 서술되었고, 6장의 봉인이 열리면서 천상의 두루마리는 지상의 삶 자체를 겨냥했다. 요한묵시록 끝에 나타나는 새예루살렘 역시 하늘과 땅의 중간 어디쯤, 모든 것들이 통합되는 초월적 공간을 잉태한다. 주석학자들은 땅에 던져진 향로를 심판의 징조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요한묵시록 8장 6절부터 서술되는 그 ‘심판들’이 과연 흑과 백을 나누듯 잘못된 이들을 향한 심판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아니면 천상의 기도가 이 땅 위에 떨어져 한계 지워지고 부족하고 그리하여 슬픈 현실 속, 하느님을 향한 쓸쓸하지만 겸손한 오솔길로 거듭나는 건 아닐까. 구원을 이미 누리는 이로서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아간다. 구원은 그러므로 천상의 행복만도, 지상의 불행만도 아닌, 여전히 살아내어야 할 삶 자체에 주어진 하느님과의 인연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9면

[말씀묵상]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승천은 예수님께만 일어난 유일무이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경도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성모님의 승천은 교리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승천과 성모님의 승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늘에 오르신 것이고, 성모님은 하늘에 들어 올려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두 사건 모두 승천이라고 부르지만, 라틴말로는 구별되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주님의 승천은 ‘Ascensio’, 성모님의 승천은 ‘Assumptio’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신 뒤 원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승천(昇天)이야말로 참으로 귀천(歸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승천 사건을 상식과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깁니다. 하지만 죽음을 잠시 멈추는 소생이나, 영원히 죽음을 반복해서 맞이해야 하는 환생이 아니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놀라운 사건인 부활을 이미 믿고 있는 이들에게 승천은 믿지 못할 일이 아니겠죠. 예수께서 언제 어디서 승천하셨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1.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때에 갈릴래아에서 승천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2.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베타니아 근처에서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지 40일째 올리브 동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각각의 저자들이 모종의 이유로 승천의 때와 장소에 대한 기록을 달리하고 있으리라 추측할 뿐입니다. 게다가 예수께서 정확히 어떤 모습으로 승천하셨는지도 확언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점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승천 사건의 의미입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승천이 공간적인 수직 이동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미완료 시제의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마치 예수께서 제자들의 눈앞에서 훨훨 날아오르신 것처럼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 1장 9절은 예수께서 하늘로 날아오르시다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리셨다고까지 합니다. 이 말씀을 고대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우주여행까지 가능해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문자 그대로 믿기 어렵죠. 이미 구름 너머에 하느님의 성전이 없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간적인 수직 이동으로 묘사된 예수님의 승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어에는 특이하게 단수와 복수 외에도 쌍수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손이나 눈, 귀처럼 반드시 쌍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것인데, 히브리어로 하늘은 ‘하샤마임’(השמים), 즉 쌍수입니다. 하늘은 쌍으로 존재하는데, 하나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창공이요,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거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이 두 번째 하늘에 오르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곧 승천은, 오늘 제2독서인 에페소서 1장 20절이 증언하듯,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그 오른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예수님의 승천 사건은 부활 사건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가 예수님의 승천을 가시적인 사건으로 묘사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한 육신을 지니신 채 승천하셨다는 진리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인성을, 마치 달에 갈 때 우주복을 입어야 하듯, 지상에 존재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하시고는 사용 후에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지니신 채로 아버지께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승천 이후에도 예수님은 줄곧 ‘나자렛 사람’이라는 호칭으로 불립니다.(사도 2,22; 3,6; 4,10; 6,14; 22,8; 26,9) 이렇게 이 땅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 사람이 천상의 존재가 될 길이 열렸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비록 흙에서 왔으나,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늘에 오를 것입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잘못을 회피하고 진리에 눈감은 빌라도

우리나라 역사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들도 많았지만, 잘못을 저지르고 역사의 역적이 된 왕들도 있다. 12세기경 영국의 존 왕은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조카를 살해하고 왕의 자리를 빼앗았다. 좋지 못한 방법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훌륭한 왕이 되려고 노력했다면 모를 텐데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켜 영국 국민에게 큰 피해를 남겼다. 또한 교회와 사이가 좋지 않아 왕위를 내려놓을 위기에 처하자,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정하여 국왕의 체면을 잃었다. 올바른 길을 제시한 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 법률을 제정했다가 곧 법률의 무효를 선언하여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세익스피어(1564~1616)는 존 왕의 일을 연극으로 만들었다. “잘못을 범하면 그 잘못이 더 두드러진다”는 대사는 그의 연극 대본에 나오는 말이다. 처음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시작부터 진리에 눈을 감고 평생을 그릇되게 살아야 했던 존 왕의 일생은 많은 이에게 교훈을 준다. 지금은 조금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진리를 선택하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작은 거짓말이 큰 거짓말을 낳듯 악은 눈덩이처럼 더 커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방임한 로마제국의 총독이었다. 로마제국은 넓은 식민지를 정치적으로 잘 통치하기 위해 어느 정도 식민지의 종교를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유다인들의 종교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지만, 사법권이나 사형집행권 등 중요한 권한은 여전히 총독에게만 있었다. 그래서 유다인 대사제 가야파는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을 총독 앞으로 끌고 가 재판을 받게 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다. 심문을 해보니 흉악범도 아니고 사형을 선고할 죄목도 없었다. 빌라도는 로마제국의 총독이란 막강한 권력자였지만 골치 아픈 종교 문제에는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넘긴 의회 의원들과 율법학자, 대사제들은 자신들은 죄인을 십자가형에 처할 권한이 없으니, 십자가형을 선고해 달라고 졸랐다. 빌라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형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청하고 있으니 난감했다. 빌라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는 부하를 시켜 대야에 물을 떠 오게 하고 군중 앞에서 손을 씻었다. 자신은 아무 책임과 관계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권력자에게 무책임은 때론 무능보다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 빌라도는 진리에 눈감고 악과 타협한 것이다. 지도자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셀 수 없는 군중(묵시 7,9-17)

십사만 사천의 군중에 이어 셀 수 없는 군중이 등장한다. 십사만 사천을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 해석하고, 셀 수 없는 군중을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이라 해석한다. 하느님 백성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셀 수 없는 군중에 대한 서술을 시작으로 모든 백성에게 열려 있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이들이 셀 수 없는 군중이라고 요한묵시록 스스로 규정하고 있다.(7,9) 구원은 이제 모든 이를 향한다.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도 셀 수 없는 군중과 닮은 서사가 나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22,17) 구원은 애시당초 모든 이를 향해 있었다. 다만 모든 이를 위한 보편적 구원이 특별한 민족, 특별한 인간들에 의해 규정되면서 사달이 났다. 바빌론 유배(기원전 597~538년) 이후, 이른바 ‘유다이즘’을 형성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에 배타적인 사상을 더욱 공고히 가져갔고 저들만이 하느님의 구원에 합당한 민족이라 여겼다. 요한묵시록의 셀 수 없는 군중은 이런 배타적 민족주의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린다. 수를 세어 구원에 합당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지금도 폐쇄적인 사이비 종교나 배타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교회들 안에서 심심찮게 등장한다. 셀 수 없는 군중이 머무는 곳은 어좌와 어린양 앞이다. 요한묵시록 4~5장에서도 살펴봤듯, 어좌라는 곳은 천상에 유폐된 공간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함께 모여 온 곳이다. 어린양은 세상 모든 민족들을 모아 ‘사제의 나라’로 만들었다.(묵시 5,10) 요한묵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군중은 마치 사제처럼 어좌 앞에 서서 구원의 완성을 노래한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묵시 7,10) 요한묵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에서도 같은 장면이 나온다. 세상 모든 민족이 모여오는 새 예루살렘에서 어좌에 앉아계신 하느님과 어린양은 경배와 흠숭의 대상이 된다. 셀 수 없는 군중은 구원의 영광과 기쁨을 가리키는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있다. 승리하는 이들이 드는 야자나무 가지 또한 들고 있다. 초대교회는 야자나무 가지를 순교의 승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이해했다. 세상의 폭력 앞에 신앙은 무력하지만 끝끝내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승리한 것이라 초대교회는 이해했다. 야자나무는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초막절 예식에 사용된 것이기도 하다.(레위 23,40 이하)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을 향하는 구원의 길에 야자나무로 엮은 초막은 수없이 세워지고 옮겨지고 또다시 세워졌다. 수난 동참하는 것이 환난이고 증거의 삶 살아가는 것이 구원 환난과 구원 분리하지 말아야 야자나무는 구원의 길의 고단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갈망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복지를 향한 희망과 설렘의 상징이기도 했다. 요한묵시록 7장 15절은 초막절의 분위기를 더욱 뚜렷하게 묘사한다. 셀 수 없는 군중은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어좌에 계신 분은 셀 수 없는 군중을 위한 천막이 되어주신다는 것. 그러므로 요한묵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군중이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구원을 노래하는 것은 이집트 탈출로 선명히 새겨진 구원이 모든 민족, 모든 시대를 향해 온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구원은 보편적이며 현재형이다. 셀 수 없는 군중이 외치는 구원은 시편 118편 25절의 ‘호산나’(הוֹשִׁ֘יעָ֥ה נָּ֑א)를 닮았다. ‘구원을 주소서’라는 뜻의 ‘호산나’는 정확히 하느님과 어린양을 향한다. 구원의 주체이신 하느님을 향한 이 외침은 초막절에 야자나무 가지를 흔드는 순간 울려 퍼진 것이기도 하다. 호산나와 더불어 요한묵시록 5장 12절에 나타났던 찬미가가 셀 수 없는 군중을 통해 다시 등장한다.(묵시 7,12) 어좌, 스물넷 원로, 네 생물 모두가 셀 수 없는 군중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한다. 온 우주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구원을 노래한다. 모든 이를 향한 보편적 구원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13절부터는 셀 수 없는 군중의 신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원로가 묻는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요한은 답하지 못했고 원로가 부득불 답을 한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마지막 날, 종말의 시간에 고통과 박해, 수난이 닥친다는 생각은 묵시문학의 전통적인 생각이다. 구원을 노래하는 군중이 환난을 반드시 겪어내어야 한다는 전통적 믿음은 다니엘서 12장 1절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우리의 요한묵시록은 환난과 구원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말 번역은 셀 수 없는 군중을 환난을 ‘겪어 낸’ 이들로 이해하는데, 그리스말 본문은 환난을 ‘겪고 있는’(그러니까, ‘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현재 분사형인 ‘에르코메노이’(ἐρχόμενοι)가 사용되었다) 이들로 소개한다. 환난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일이라서 끝난 게 아니다. 환난을 여전히 겪고 있는 이들이 구원을 노래한다. 그러나 환난을 부정적인 고통 자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나타나는 구절에서 환난은 어린양의 피에 겉옷을 빨아 희게 만드는 일로 소개된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 환난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그러므로 지속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수난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구원이 또렷이 드러난다. 모든 이를 향한 구원을 노래하는 일은 이제 우리 삶의 자리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다. 우리 삶이 예수의 삶과 닮았는가,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 길이 되는가, 그리하여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이 힘겨워도 행복한 삶이라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반성들이 구원을 이해하는 첫 번째 작업이어야 한다. 모든 이가 구원을 받을 만하지만, 모든 이가 십자가를 지는 데 덤벼들지는 않는다. 모든 이가 누릴 구원은 예수님의 증거의 삶이 지금 여기서 여전히 진행되어야 이루어진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내려놓게 해달라 기도하는 우리에게 과연 구원은 가능한 것인가. 우린 무엇을 증거하고 무엇에 승리하고 있는가.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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