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24주일

좋은 질문을 던져야 좋은 답을 얻는다고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에서도 맹목적 믿음보다는 스스로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가르침을 주셨지만, 때로는 질문을 통해 사람들을 성장시키십니다. 예를 들어,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는 질문,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는 질문은 단순히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성찰함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도록 초대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던지신 가장 중요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에 대한 질문입니다. 복음의 전후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논쟁하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며, 마귀를 쫓아내시는 가운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표징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의 답을 듣고,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혹은 예언자 중 한 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틀을 통해 판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기존 관념으로 타인을 판단하게 되면,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단순히 뛰어난 가르침을 주는 스승님, 사람들이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 초자연적 기적을 행하시는 신적 존재로만 본다면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 깨닫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의 시각을 넘어,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살아오면서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그들 자신의 언어로 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베드로가 이렇게 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수제자 베드로의 대답이 정답처럼 들리지만, 그 후의 복음 내용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가 겪어갈 길에 대해 알려주시는데, 앞서 정답을 말한 베드로 성인이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요? 더 나아가 예수님은 베드로 성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며 야단치시는 장면까지 나오니 더욱 혼란스럽게 다가옵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따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분과 마음이 다 통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그의 고백 역시 예수님을 진정 이해해서 한 대답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예전부터 들어온 그리고 기대해 온 그리스도라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대답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나서서 그 힘든 길을 갔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진리를 찾고, 사랑을 나누고, 그런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수 있기를 그들은 원했습니다. 이 열망과 용기를 하느님이 심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길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신들이 생각한 메시아의 모습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진정한 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걸어가는 사랑의 길은 세상의 환호에 안주하지 않고, 반대자들의 반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의 뜻을 살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이 길을 걷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반박까지 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뜻을 관철시키려 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기대를 이루고자 합니다. 이런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면서 계속 함께 가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을 갖고 따르면 함께 갈 수 없기에 각자의 인생에 부여된 하느님의 사명을 갖고 따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제 삶을 돌아봅니다. 저 역시 하느님이 주신 열망 덕분에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으나 어리석음과 두려움 속에서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저와 함께 걸으셨습니다. 이 여정을 통해 저는 무엇을 원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1·2독서에서 말하고 있듯이 주님께서 함께하시기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실천하는 믿음이 제가 예수님을 따를 때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알려줘서 알 수 있는 분, 열심히 공부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분은 늘 삶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셨고, 지금도 그렇게 삶을 통해 만나게 되는 분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정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인생을 걸어가면서 질문을 던지시는 분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삶에서 예수님이 던지는 이 질문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가 고민하고 자신의 삶에서 진실하게 답을 찾아갈 때 비로소 예수님을 이해하게 되고 만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이 길을 걸어갑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최후의 날 예언한 스바니야 예언자

예로부터 사람들은 개를 가축과 애완용으로 길들여 옆에 데리고 살았다, 그 역사가 약 2만 년에서 4만 년 전부터라니 유구하다. 얼마 전 동영상에서 큰 곰이 우리를 넘어 강아지를 공격하자 어미 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10배나 큰 곰을 맹렬하게 공격해 곰이 허둥지둥 도망가는 것을 보고 그 용맹성에 놀랐다. 개는 훈련을 받으면 구조견이나 마약탐지견, 시각장애인인도견이 되는 아주 이로운 동물이다. 그런데 비슷한 줄 알았던 들개와 이리는 서로 다른 종(種)이다. 이리는 개와 달리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사납고 잔인한 동물이다. 성경에서 이리는 안 좋은 것에 비유할 때 자주 등장한다. 스바니야 예언자가 대표적으로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할 때 이리의 습성을 비유했다. “그 안에 있는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 그 판관들은 저녁 이리 떼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스바 3,3) 성경 저자들은 이리에 비유되는 악인들이나 악한 제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끔찍함과 잔인함을 비유하고 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기적인 종교 지도자들, 부정직한 대신들과(스바 3,3)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도 싸잡아 이리의 습성을 닮았다고 매섭게 공격했다. 스바니야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숨기셨다’ 또는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를 의미하는데 활동 현장은 예루살렘 성이었다. 기원전 7세기 중엽 이집트를 점령한 아시리아에게 근동의 패권이 넘어왔다. 아시리아는 주변 민족들을 파멸시키고 잔학 행위를 저지르며 세력을 키웠다. 이스라엘은 왕국의 주권과 하느님 신앙을 포기하고 아시리아의 위세에 눌려 납작 엎드렸다.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는 아시리아의 우상을 세워졌고, 매음이 성전에서 행해졌다. 요시야 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고작 8살이라 직접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어 상당 기간 섭정이 이뤄졌고, 이 시기에 스바니야가 열심히 활동했다. 요시야 왕 때 섭정을 한 권세가들은 우상 숭배를 자행하고 사회를 도탄에 빠뜨렸다. 이러한 시대 배경 아래 스바니야 예언자는 우상 숭배자들과 불의한 지도층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고(1,2-13), ‘아시리아의 몰락’(2,13-15)을 예언한다. 스바니야는 ‘교만’이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가르친다. 교만은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반항, 우상 숭배, 율법을 거스르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며 마침내 사회 부정과 불의로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스바니야는 ‘하느님의 심판’ 곧 ‘주님의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다른 예언자와 달리 무섭게 빠르게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의 예언은 50년 후 예루살렘 멸망으로 현실이 된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주님만을 찾으며 주님께만 기댈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 겸손한 사람들이 희망이 된다고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왕국이 멸망한 후에라도 미래를 희망할 근거는 존재한다는 스바니야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대하는 한 줄기 빛이 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1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과 스승 엘리야를 백성들과 이어준 엘리사

제2차 세계대전 말 독일은 천혜의 방어망 라인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았다. 라인강은 강폭이 넓고 회오리치는 곳이 많아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최적지이다. 히틀러는 라인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중부 라인강변에 도착한 미군 일부는 아침 안개가 걷히고 포연이 사라진 뒤 기적을 목격했다. 라인강 사이의 레마겐과 에르펠을 잇는 철교가 멀쩡하게 서 있었다. 이 다리에서만 폭발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군 특공대는 다리 위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한발씩 전진해 1945년 3월 7일 다리를 접수했다, 연합군에게 점령된 라인강 최초의 다리인 셈이다. 연합군은 라인강 너머로 교두보를 마련했고 대공포대를 설치했다. 베를린으로 직행하는 독일의 전략요충지로 계속 병력과 탱크와 물자를 수송했다. 히틀러는 크게 화를 내며 지휘한 장교들을 처형했고, 독일군은 여러 번의 공습과 심지어 실험 중이던 V2로켓까지 10발 이상 발사했지만 다리를 폭파시키지 못했다. 열흘 정도 지나 다리 중간이 무너졌지만 이미 많은 병력이 동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연합군의 라인강 도하는 연합군 심리와 사기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고,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베를린으로 밀고 들어갔다. 레마겐의 철교 덕분에 수많은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전투와 전쟁에서 다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레마겐 철교의 존재는 기적 같은 일이다. 예언자도 결국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기적을 사람들에게 이어주고 백성들에게 예언을 전하는 측면에서 말이다. 엘리사가 처음 예언자로 활동할 때는 아합의 통치 말년이었다.(1열왕 19,1-17)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와 같이 기적으로 유명하다. 엘리사의 첫 번째 공식 활동이 스승의 승천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엘리야의 옷을 집어 들고 내리쳐 요르단강물을 갈라친 것이었다. 엘리야가 행했던 기적을 다시 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엘리사를 그들의 지도자와 엘리야의 계승자로서 섬겼다. 대부분의 기적 설화들은 깊은 존경심과 경건한 경외심을 지닌 예언자 그룹과 목격자들과 관련되어 있다. 엘리사는 기적 설화들이 쌓여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가장 유명한 기적은 나병 걸린 아람의 장군 나아만을 고친 것이었다. 죽은 후에도 엘리사의 기적은 중단되지 않았다. 죽은 엘리사의 몸에 닿은 다른 주검이 다시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섰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이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탁월하고, 동정심 많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는 엘리사의 인간성이 예언자 그룹의 제자들 기억에 깊이 간직되었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역사에 준 영향력에 대한 진정성은 명백했다. 왜냐하면 엘리사는 우선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을 맨 앞자리에 놓았다. 그가 행한 무수한 기적들도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엘리사는 평생을 스승과 제자단, 그리고 백성들을 이어주는 평화와 생명의 다리 역할을 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15

[말씀묵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신부님, 교목실 창문 너머에는 목련 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목련은 신학교 성당 곁에도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몇 해의 봄을 지나면서도 그 나무를 피해 다녔습니다. 꽃이 만개했을 때도, 애써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날아오를 듯, 포롱포롱 가지마다 핀 하얀 꽃잎들이, 질 때만큼은 너무나도 서글펐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올해 봄에는 무언가 홀린 듯이, 목련 지는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하얀 꽃잎이 녹슬어 떨어지는 모습은, 목이 잘리어 피를 흘리는 것 같았고, 저는 문득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목련이 피를 흘리며 지고 나니, 봄이 왔습니다. 봄을 알리는 그 꽃은, 봄이 만개할 때는 자취를 감추더군요. 학교 앞뜰에 벚꽃이 만개할 무렵 존재를 감춘 목련은, 여름 뙤약볕 아래 잎을 돋우어 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은 그 앞을 뛰어다니며 웃음 지을 것이고, 그 앞을 지나 성당에서 두 손을 모을 겁니다. 신부님, 당신이 목을 떨군 그 땅에, 교회는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꽃피우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도 찾지 않는 여름 목련 아래서, 당신을 기억합니다. 신부님과 동료 순교자를 기억하는 오늘, 교회 공동체는 루카 복음의 말씀을 되새깁니다. 말씀은 송연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목련꽃을 애써 피하고 다닐 무렵, 저는 이 말씀이 너무나도 서운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바른 정신을 가진 맑은 청년이 내몰린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입바른 소리가 싫어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그 억울한 죽음을 마주했다면, 다시는 누구도 십자가에 못 박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목도한 사람들은, 다시 그 십자가를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고통의 의미를,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신앙이 그런 방식으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때마다, 사람들은 스러져갔습니다. 우리 신앙은 왜 이리도 사람들의 고통에 관대한가. 신앙은 왜 고통을 예방하려 하지 않는가. 피로 새겨진 저 말씀을 눈물로 닦으며, 저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럴수록, 저 문장은 제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여름 목련 나무 앞에서, 다시 성경을 폅니다. 말씀 구절을 찾아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십자가를 ‘지다’를 표현하기 위해 ‘아이로’(αἴρω)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이 단어는 ‘짐을 짊어지다’는 뜻입니다. 이 낱말에는 무게를 견디어 내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복음 어귀에, 다시 한번 십자가 이야기를 꺼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오늘날 성경이 ‘짊어지다’로 번역하는 이 낱말은 ‘바스타조’(βαστάζω)입니다. 이 단어도 ‘옮기다’, ‘참다’, ‘짐을 지다’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 어감은 조금 다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안고 간다는 뜻에 가깝지요. 아기 엄마가 젖먹이를 품에 안고 갈 때, ‘아이로’보다는 ‘바스타조’에 가깝습니다. 역설적입니다. 아마도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놀랐을 겁니다. 십자가라는 형벌도구를, 아이를 품듯 하라니요. 그런데, 이 ‘바스타조’라는 낱말은 로마서에 다시 등장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나약한 이들의 약점을 그대로 받아주어야 합니다.”(로마 15,1) 바오로 사도는 나약한 이들을 보듬는 일을 표현하고자 ‘바스타조’란 낱말을 쓰고 있습니다. 어쩌면 ‘십자가를 지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누군가의 어려움과 고통을 돌본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십자가를 대하는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두 단어를 오가는 이유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또렷해지는 것도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견디어 낸 사람도 있지만, 한편으로 소중히 끌어안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 운명을 피할 길이 없다면, 저는 끌어안는 쪽을 택하려 합니다. 신부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들립니다. 교실 창가로 아이들이 보입니다. 교실에 걸린 십자가 아래로, 아이들은 따뜻한 햇볕을 책상 위에 펴고, 책을 읽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이곳의 오늘은 안온합니다. 당신이 꿈꾸었을 일상을 저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더 이상 숨어서 신앙하지 않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함께 기도할 수 있고, 우리 손에는 한글로 된 성경이 들려있어서, 마음껏 성경을 소리 내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꾸벅꾸벅 졸 수 있습니다. 그런 일상을 살아가는 저희로서는,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들리셨나요. 어떤 힘을 내는 말이었나요. 저는 신부님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의 안온함은 어제의 절박함과 너무 멀고, 저는 그 소슬한 거리를 좁히지 못해, 격절의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제야 저는 어제의 서운함이 부끄럽습니다. 신부님, 어느 날 무심한 눈길이 목련에 가닿는다면, 저는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때 오늘 말씀을 포개어 두고, 삶과 꿈을 다시 성찰하겠습니다. 당신이 이른 봄의 목련꽃처럼 행하신 사제직을, 저는 여름 목련처럼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십자가를 품에 꼬옥 안고, 자박자박 걸으며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9-15

[말씀묵상] 연중 제23주일

저에게도 ‘귀먹고 말 더듬는 이’로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유학 시절입니다. 언어를 배우면서 현지 생활에 적응하던 시기에는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하고 싶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길거리에 산책을 나와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아이들, 심지어는 주인의 말을 알아듣는 강아지가 부러웠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갈릴래아 호수로 다시 돌아온 예수님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한 가지,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다시 듣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는 사람들의 바람에는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주심으로써 병자가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누구인가요?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귀먹은’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어 형용사 ‘코포스’(마르 7,32)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무딘’ 혹은 ‘둔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청각 장애를 가진 이들을 이방 민족과 연결지었는데, 이방 민족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이사 42,17-19; 43,8-9; 미카 7,16 참조) 이러한 연결점을 고려할 때,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간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던 이방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데려간 이는 들을 수 없었던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말을 더듬는’ 상태를 표현하고자 그리스어 형용사 ‘모길리오스’(마르 7,32)를 추가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형용사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마르코 복음 7장 32절에서만 등장합니다.(hapax legomenon) 이 단어는 이사야서 35장 6절의 칠십인역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말할 수 없는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이러한 의미는 마르코 복음 7장 37절에서 언급된 “말못하는 이”, 곧 그리스어 ‘알랄루스’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면서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받은 병자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마르 7,35)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귀가 열림’, 그리고 ‘혀가 풀림’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신적수동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예수님은 치유자이며 구원자이십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마르 8,18 참조)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놀라서 말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 사람들이 이처럼 놀란 것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치유가 특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당시 이러한 기적 행위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사건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비현실적 사건이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 제1독서) 오늘 복음은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의 귀가 열릴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고 선포합니다. 기원전 8세기,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예언자의 심판 예고는 실현되었고, 이 결과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페르시아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바빌론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는데, 이때 예언자(제2이사야)는 바빌론으로부터의 귀환과 예루살렘 재건을 예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고향에로의 복귀가 임박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환과 재건의 희망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미래 없는 멸망을 예고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 안에 담긴 구원의 희망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과 바빌론 유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망과 시련을 체험하도록 하셨지만, 그들을 바빌론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셨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도 절망과 시련,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있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음으로써 자유와 해방, 곧 구원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져 ‘어둔 밤’ 속에서 헤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겠지만, 그들의 장애는 단순히 하느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결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두움을 비추는 밝은 빛을 준비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그 빛을 바라보도록 초대하십니다. 저는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풀어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9-0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언자들의 스승 엘리야

신학생 시절 한 선배가 소개해 준 헬렌 켈러의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란 글을 본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 장애인이었다. 그는 장애를 훌륭히 극복한 현대의 위인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의 삶을 성공적으로 가능하게 한 스승이 있다. 헬렌이 7세 때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보스턴의 한 시각 장애 학원을 찾았다가 만난, 평생의 교사가 될 앤 설리번이었다. 당시 앤 설리번은 겨우 21살이었다. 앤 설리번도 5세 때 눈병으로 시력을 잃었다가 수술로 시력을 회복했지만, 평생 실명의 불안과 싸우면서 살아야 했다. 앤 설리번의 이러한 체험이 헬렌의 교육에 도움이 되었다. 앤 설리번은 엄마가 아기에게 말을 걸듯이 끊임없이 헬렌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말을 써 주었다. 헬렌도 마찬가지로 손가락 말로 대답했다. 헬렌은 1904년 하버드대학 래드클리프 칼리지를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3중 장애의 몸으로 대학 교육을 마친 세계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앤 설리번은 학교 강의실에서 언제나 곁에 앉아 강의를 손가락 말로 헬렌에게 전해 주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내용을 점자로 다시 적어 읽게 하였다. 이처럼 헬렌 같은 위인의 생애에서 앤 설리번이라는 스승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인생의 큰 행복은 없을 듯하다.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 유명한 예언자 엘리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중의 하나였지만 그의 통치기간 중 이스라엘의 종교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합은 시돈 왕의 딸 이제벨을 아내로 맞아들였고,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기까지 하였다. 엘리야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역사적으로도 얼마나 혹독했는지 고증된 심각한 가뭄이 닥쳐올 것을 경고한다.(1열왕 17,1) 아합은 엘리야에게 나라를 불행하게 만든 자라고 힐책했지만, 엘리야는 오히려 임금의 잘못이라고 맞받아친다. 엘리야는 카르멜산으로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예언자 사백 명도 함께 모아 대결을 벌인다. 대결에서 엘리야가 승리하고 백성들은 반대편의 예언자들을 죽인다. 엘리야의 승천(2열왕 2,1-12 참조)은 엘리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정당성을 부과하고 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기 혼자 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엘리사는 여정을 같이 했다.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가 곧 승천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야의 영적 능력 가운데 장자로서 받아야 할 몫을 요구했다. 예언자들은 분명히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영감을 내렸다고 확신한다.(2열왕 2,15) 엘리야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과 열성적인 헌신으로 바알과의 투쟁을 선도한 예언자이다. 그의 제자들은 엘리야의 가르침을 계속 오랫동안 기억하며 실천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08

[말씀묵상] 연중 제22주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이며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생명의 망으로 연결된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라는 부르심을 기억하라는 초대의 날이며, 피조물 보호를 위해 이 시대의 예언자적 행동을 하도록 요구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으로 그 가운데 특별히 ‘부정과 정결’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대의 풍경이 선명하게 담긴 이 논쟁의 발단은, 제자들이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다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전통을 깨뜨린 제자들의 행동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날을 세우며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자신들이 삶에서 철저하게 견제해 온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행위가 문제인 것은 그것이 비위생적이어서가 아니라 비전통적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본뜻이 상실되고 맹목적으로 허상의 성채를 쌓는 모양새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숨겨진 위선과 오류를 가감 없이 드러내십니다. 먼저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시어 ‘입술’의 섬김과 ‘마음’의 섬김을 대조하시며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지적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전통’일 뿐이라고 하시며 전통의 권위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 전통의 근원이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음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의 계명을 버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7,8)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의 전통’에 따라 ‘코르반’이라며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대신 하느님께 드렸다’라고 외치지만, 정작 십계명의 ‘부모공경’을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시며 주객전도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사람이 정해 놓은 것에 집착하여 더 중요한 율법은 오히려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질책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사람의 전통’을 율법보다 앞세우는 그들의 위선이 밑바닥까지 들추어지는 것 같아 속 시원함을 느낍니다. 논쟁의 구체적 쟁점은 음식을 먹기 전 ‘손 씻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주제는 단순히 손을 씻는 것보다는 훨씬 원천적이고 광범위합니다. 도덕적 정결함의 근본을 말씀하시며 더 광범위한 주제로 이야기를 전환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7,15) 예수님의 이 논리에 따르면 손을 깨끗이 씻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정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사람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오히려 몸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 부정하게 만든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간단명료한 답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아가 ‘음식이 모두 깨끗하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손을 씻지 않은 행위가 음식에 그 어떤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아울러 음식이 모두 깨끗하기에 손을 씻지 않고 먹은 그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으로 나뉜 오래된 구분이 사라지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 속에서 나오는’ 죄의 요소를 나열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이 비록 날카롭게 짚어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리스어 성경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단수형,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은 복수형으로 표현합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많고 악함을 드러내는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열두 개의 ‘악함’은 앞에 언급되는 여섯 개, 즉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악의는 자주 반복될 수 있는 행위를 나타내기에 복수형을 쓰고, 뒤에 언급되는 여섯 개, 즉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은 사람의 기질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단수형으로 표현하여 구분하고 있습니다. ‘겉’이나 형식이 아니라 모든 악행의 근원이 사람의 내면임을 명토 박아 말씀하시며,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면이 그렇지 못할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외적 행위에 집착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율배반적 모습을 들춰내시며 그들의 헛된 자부심을 벗겨냄으로써 분리와 배척의 상징이었던 ‘정결’과 ‘거룩’의 의미를 새롭게 하시고 재정립하십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돌보라’는 주님의 당부를 우리 삶의 공간에 옮겨봅니다. 우리의 ‘겉’과 ‘속’은 어떠한가요? 이 성찰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경건함’을 한 겹 한 겹 아프게 벗겨내는 과정은 우리를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9-0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일편단심 예언자 느헤미야

신사임당의 아들이자 조선 최고의 학자 중 하나인 율곡 이이(李珥)는 1582년 황해도 감사로 부임했는데, 그곳에는 갑작스런 부모의 죽음으로 양반집 딸에서 기생이 된 ‘유지’(柳枝)라는 소녀가 있었다. 총명하고 시도 잘 쓰는 유지는 율곡과 밤새워 이야기하는 말벗이 되었다. 얼마 후 율곡은 한양으로 떠나 둘은 이별했다. 그 후 어느날 율곡이 황해도 재령에 머물게 되었다. 밤이 깊은데 문을 두드려서 보니 성숙한 여인이 된 유지였다. 그리운 임을 보기 위해 험한 수십 리 산길을 걸어 찾아온 것이었다. 율곡은 유지와의 사연을 시로 남겼는데 “수용할 수 없는 사모의 정을 애틋하게 느끼면서, 천한 기생으로 고달프게 살아가는 유지가 걱정이 되고 만약 내세가 있다면 거기서 만나겠다”고 노래했다. 당시에 율곡이 유지를 소실(小室)로 두는 것에 걸림돌은 없었지만, 문제는 율곡의 건강이었다. 율곡은 자신이 갑자기 죽으면 어린 유지를 돌볼 수 없다는 책임감에 소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과 유지의 사랑을 담은 세 편의 편지 ‘유지사’(柳枝詞)는 이화여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유지는 율곡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삼년상을 치렀고, 그가 죽은 지 25년이 지나서도 율곡을 그리는 시를 썼다. 유지는 평생 죽을 때까지 율곡을 일편단심 마음에 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께 일편단심한 인물로 느헤미야 예언자가 떠오른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황제의 술을 책임지는 시종이었다. 황제는 늘 독살의 위험이 있어 술 시종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였다. 어느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이 굶주리고 성전은 폐허로 형편없다는 소리를 듣고 통탄하며 슬피 울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왕에게 ‘고향 이스라엘’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고 작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청했다. 황제는 느헤미야를 신뢰했기에 그의 예루살렘 귀환을 적극 도왔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바빌론 유배가 끝난 지 두 세대가 지난 뒤였는데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가난에 시달렸고 정치가들은 여러 파로 갈려 자기들 이익만 챙기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황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며 백성들에게 힘을 내어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도록 이끌었다. 꼭 좋은 일에는 훼방을 놓는 사람들이 있다. 성전재건은 불가능하며 반대하고 심지어 느혜미야가 왕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 건축을 한다는 가짜 뉴스도 성행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처음부터 일을 벌이지 않고 지혜롭게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성전 건립이라는 대공사를 밀어붙였다. 느헤미야에게 성전 재건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여러 곳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루살렘 성전 공사는 어쩌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처럼 어려웠다. 전쟁보다 더 많은 방해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환난 중에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돌파하는 강력한 지도자가 역시 필요하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01

[말씀묵상] 연중 제21주일

요한복음 6장의 말미를 마주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합니다. 하지만 네 복음서 모두가 이 이야기를 전한다고 해서, 그 태도까지 같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특히 세 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 복음서는 빵이 많아졌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매조짓습니다만, 요한복음서는 바로 그 일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시고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신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의 관점은 다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를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그 긴 ‘생명의 빵’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복음은 제자들의 반응부터 전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0절) 긴 이야기에 대한 ‘한줄평’ 혹은 ‘댓글’ 정도가 되겠지요. 새 번역 성경이 ‘거북함’으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는 ‘스클레로스’(σκληρός)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담은 그 단어를 조금씩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공동번역) “이 말씀은 모질구나. 누가 차마 그것을 귀담아들을 수 있겠는가?”(200주년 신약성서) 세 가지 번역은 어떤 부정적인 반응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 닮아있습니다만,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거북하다’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어렵다’는 말에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느낌이 강하고, ‘모질다’는 낱말에서는 당혹감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듣고 있다’, ‘알아듣다’, ‘귀담아듣다’라는 표현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번역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먼저는 제 그리스어 실력이 짧은 탓입니다만, 무엇보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의 생각을 한 문장에 담아내기는 어렵다는 이유도 있을 겁니다. ‘스클레로스’라는 낱말을 저마다 조금씩 달랐을 부정적 감정의 그릇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 낱말을 그렇게 사용하면, 저 번역들은 읽는 사람들의 여러 마음도 담아낼 수 있을 겁니다. ‘생명의 빵’ 이야기를 돌아다보면, 솔직히 불편한 지점들이 있습니다. 그 대화에서는 예수님의 뜻과 사람들의 욕구가 끝없이 어긋나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기어코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굳이 들추고 헤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그래도 사람들은 묻기도 하고 청하기도 하는데,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33.35.51절) 사람들은 이 말씀 앞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집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42절)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칙 안에서 의문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날 그곳의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을지 알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습니다. 문장에 기대어 대화에 뛰어든 우리는 저마다 무엇을 느낄 것이고, 그렇게 질문을 할테니까요. 사람들은 떠나고 제자들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물끄러미 물으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새 번역, 공동번역) 그런데 누군가는 이 말을 다르게 옮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걸려 넘어지게 합니까?”(200주년 신약성서) ‘귀에 거슬리다’와 ‘걸려 넘어지다’는 번역의 원문은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랍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대개 ‘죄를 짓다’(짓게 하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스칸달론’입니다. 이 낱말에는 ‘장애물’(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 같은)의 의미가 있습니다. 추문을 뜻하는 ‘스캔들’이 여기서 나온 말이지요. 하지만, 다른 사용도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걸음이 멈추듯이, 말씀을 듣다가 어떤 낱말이나 표현에 마음이 멈추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교양인들과 어떤 교부는 그런 순간을 ‘스칸달론’이라고 표현했다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쪽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스클레로스’에 표현한 사람들의 마음은 ‘스칸달리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복음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66절) 빵을 먹은 사람은 오천 명이 넘었는데, 이제 남은 사람은 열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예수님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열두 제자들은 남았습니다. 베드로는 질문을 멈추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시작하여 생명의 빵 이야기를 따라 듣는 동안, 어느 땐가 우리의 발걸음은 멈추고, 때로는 불편한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계속 따라간다면, 언젠가 우리의 걸음은 다시 멈추고, 그만큼 자주 우리의 마음은 불편해질 겁니다. 하지만 이 걸음을 포기한다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며 어떤 힘을 낼지 영영 알 수 없겠지요. 열두 제자를 향하던 질문이 우리에게도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8-2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니네베의 멸망을 예언한 나훔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1883~1945)는 청년 시절 문학적이며 지성적이었다. 그는 마르크스 얼굴이 새겨진 메달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로 사회주의 이념에 진심이었다. 무솔리니는 19세 때 병역을 피해 스위스로 도망쳐 낮에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사회주의를 연구했는데, 선동가로 활동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11번이나 감옥에 갇혔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10년 동안 저널리스트로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가져온 파멸 상태를 본 그는 사회당원으로서의 활동을 그만뒀다. 1918년 무솔리니는 구체제의 악습들을 완전히 청산해 낼 수 있는 단호한 독재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의 파시스트 운동은 민족주의와의 결합에 힘입어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재향군인들의 실업과 정부의 취약성, 국회의원들의 부패 사이를 파고들어 무솔리니는 세력을 확장했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폭동을 이용해서 무솔리니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 권력을 잡았다.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동맹을 맺고 국민들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한 지도자의 정책이 나라의 운명을 지옥과 같은 고난으로 몰아넣은 사례가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대표적이다. 1945년 4월 27일 무솔리니는 파르티잔에게 붙잡혀 처형됐다. 그의 시체는 밀라노 미잘로 로레토 광장 과거 공산당원들을 공개 처형하던 바로 그 교수대에 거꾸로 매달렸다. 예레미아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예언자 나훔은 고향이 ‘엘코스’라는 것 외에는 별로 정보가 없다. 나훔서는 지도자들의 불의한 시책이 국가를 패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니네베의 폐허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도자들의 올바른 지도와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예언자 나훔은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로 가서 예언했다. 기원전 8세기 후반과 7세기 초엽은 앗시리아가 주도권을 잡고 팽창하는 시기였다.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100여 년간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다. 기원전 652년부터 왕좌 계승을 위한 형제간의 권력다툼을 통해, 결국 앗시리아의 힘은 기울고, 멸망을 향해 추락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612년 니네베가 멸망하고 시리아 하란 지역의 아시리아 군대도 공격으로 전멸당해 기원전 609년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하느님께서 위로하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훔은 이름 그대로 고통 중에 억압받던 유다인 위로하며 악행의 말로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전체적으로 나훔서에는 앗시리아의 지배에 고통 당하던 유다인의 울분과 증오가 잘 담겨 있다. 나훔은 니네베의 멸망은 하느님의 뜻이며, 심판의 날에 악인은 처벌당하고 성읍은 완전히 파멸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예언한다. 나훔서의 내용은 니네베의 멸망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주제를 향하고 있다. 니네베의 멸망을 초래한 것은 결국 포악한 통치자들 때문이다. 나훔은 불의는 결국 망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결국 승리한다는 위안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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