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이 내리는 정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 폭풍우가 올 것 같은 바람이 부는 날, 경북 의성에 다녀왔다. 문화마을길 6-5 하얀 문 앞에 서니 지난 4월 선종하신 두봉 주교님의 ‘기쁘고 떳떳하게’ 좌우명이 새삼 눈가를 촉촉하게 하는 날이다. ‘세상에 예수님의 모습을 더 보여주고 가셔도 되었는데…’ 하면서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어쩌다 시작한 독서 모임이었다. 서로에게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 오래되었다. 가족사와 서로의 걱정을 아는 사람들이다. 만나면 정답고 즐겁다고 지은 이름이 ‘독서 정겨미’다. 창의성이 조폭 이름 짓는 경찰도 울고 갈 수준이다. 창의성이 늙어감의 즐거움이다. 또 하나의 좋은 점은 힘 빼고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믿음이 가장 강한 크리스티나의 신앙 설명을 잠시 듣고 자리를 옮겼다. 아녜스는 취향에 맞는 차를 섬세하게도 챙겨왔다. 누가 누가 가장 남을 잘 웃기나 하는 시간이다. 크리스털 목소리의 소유자이자 우아한 크리스티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재야 개그우먼 아녜스를 이길 수 없었다. 개그 감각은 하느님이 주신 재능이다. 언젠가 빛을 보게 될 테니 더 갈고 다듬으라고 우리는 아녜스를 격려했다.
이번에 크리스티나가 독서한 내용을 말했다. 그녀는 책 제목을 말했다. 동화이지만 어른을 위한 동화 같았다. 내용이 어렴풋하지만 적어본다. 목욕탕이 있었다. 손님으로 코끼리가 때를 밀고 갔다. 주인은 목욕탕이 더러워져 코끼리보다 작은 하마를 받았다. 그런데 그 동물 역시 목욕탕을 더럽혔다. 그래서 하마보다 작은 동물, 그보다 작은 동물을 차례차례로 받았다. 마지막에는 화가 난 주인이 개미만 받는다고 했다. 개미가 목욕탕에서 안 나오자, 주인이 탕 안으로 들어가 봤다. 개미는 커다란 수챗구멍에서 발견되었는데, 알고 보니 코끼리의 때 때문에 익사하지 않은 것이다. 때가 수챗구멍을 막고 있었다.
여기까지 줄거리를 듣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쓸모 있음을, 모든 것이 귀함을 다시 깨달았다. 하찮은 때가 아니었다. 우리는 기쁘게 살자고 결의하고 대구에서 헤어졌다.
만물이 지어진 이유는 하느님이 아신다. 오늘 아침 읽은 성경 구절 또한 깨달음과 무관하지 않다. 이사야 44장 21절이다. “야곱아, 이것을 기억하여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나는 너를 잊지 않으리라.”
우리는 하느님께서 빚으셨다. 어디에 있든 소중하며 필요한 존재다. 떳떳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글 _ 정영란 가타리나(대구대교구 월성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