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수님 대신 석방되어 목숨을 구한 바라빠

2004년 개봉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열심한 가톨릭신자인 할리우드 스타 멜 깁슨이 감독한 영화였다. 많은 이는 그의 영화가 과거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영화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전혀 다른 영화를 연출했다. 영화의 첫 대사에서부터 현실감이 다가오도록 예수님이 말하던 당시의 언어인 아람어와 라틴어를 사용했다. 이 영화는 개봉 초기부터 예수님의 수난을 너무 잔인하게 묘사했다는 점이 논란거리가 되었다. 예수님이 유다인과 로마 군인의 무차별 구타로 눈이 퉁퉁 부어있는 장면, 로마 군인의 채찍질에 살점이 터져 나와 피가 흥건한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과거 영화에서 예수님은 수난 중에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통이 여과 없이 그려졌다. 일부 평론가들은 인간의 폭력성은 실제상황에서 더 참혹할 것이라며 인간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영화라고 했다. 유다인에게 중요한 유월절(유다인들이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에는 죄수 중 한 사람을 석방하는 전통이 있었다. 마침 바라빠라는 사형수가 있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바라빠를 데려와 군중에게 예수와 바라빠 중 누구를 풀어주겠냐고 물어본다. 바라빠는 반란에 가담해 로마에 대항하다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였다. 바라빠는 로마제국에 반대한 폭력투쟁의 지도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군중들은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했다. 사슬이 풀린 바라빠가 당혹감 속에서 한쪽 눈이 거의 감긴 예수님과 마주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있어 보였다. 예수님 대신에 극적으로 석방되며 목숨을 건진 바라빠는 가장 운이 좋았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라빠는 풀려 난 후 무엇을 했을까? 성경은 바라빠의 이후 행적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에 상상력이 더해진다. 스웨덴 출신의 작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는 「바라빠」라는 책에서 바라빠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했지만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상상의 이야기를 저술했다. 어쨌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예수님에 대해 바라빠는 궁금해졌을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도 접했을 것이다. 예수님 덕분에 목숨을 건진 바라빠의 인생에는 그분이 이미 깊이 들어와 있었을 것이다. 2002년 일본에서 <미션 바라바>라는 한일 합작 영화가 개봉됐다. 영화는 회개한 야쿠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야쿠자들은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후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속죄하는 의미로 바퀴 달린 십자가를 지고 일본 전국을 일주하였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우리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바라빠들이다. 덤으로 생명을 연장한 바라빠의 이후의 삶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수님이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던 니코데모

“어느 조그만 별에 어린 왕자가 살았습니다. 왕자님은 장미꽃 한 송이를 정성 들여 기르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별의 사막에서 만난 한 여우가 왕자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사물이 잘 안 보인단 말이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1900~1944)의 소설 「어린 왕자」의 중요한 부분이다.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편안한 생활을 뒤로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군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행방불명되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인간미를 추구했고 「야간 비행」과 「어린 왕자」, 「인간 대지」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욕심 없이 세상을 바라보아야만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명한 동화 「어린 왕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움과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에 평화와 사랑을 호소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관계와 욕심으로 인해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순수함을 잃고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며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신앙생활에서도 어린이와 같은 맑은 마음으로 새롭게 눈을 뜨고 세상을 사랑으로 본다면 더 많은 진정한 가치와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 니코데모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최고 의회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다인들의 최고 통치기구였다. 예루살렘 최고 의회(산헤드린)는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 귀족 계급의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 등 모두 71명으로 구성되었다. 니코데모는 사람들 눈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눴다.(요한 3,1-21 참조) 예수님과 니코데모는 알 듯 모를 듯 대화를 이어갔지만 니코데모는 진리를 찾는 사람이었다. 마음과 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체험 후였을 것 같다. 예수님이 수난을 받으실 때도 니코데모는 혼자 용감하게 변호했는데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혼자는 역부족이어서 결국 예수님은 사형을 당한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십자가형 이후 시신을 모셔다가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고 새 무덤에 안장하며 장례를 치렀다. 사형수로 죽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렀다는 자체가 의리와 신의를 지키던 인물임을 말해 준다. 예수님의 수난과 처형 당시 제자들이 도망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비교되는 행동이다. 이처럼 니코데모는 강직한 인물이었고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니코데모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유다인들 대부분의 군중과 최고 의회의 결정에 사형을 받은 분을, 그것도 최고 의회 의원이 장례를 치른 것은 정말 용감한 행동이었다. 대통령이 퇴임 후 수사를 받을 때 주변 사람들이 거의 모두 떠난 것을 본 적이 있다. 권력은 무상하면서도 비정하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잘못을 회피하고 진리에 눈감은 빌라도

우리나라 역사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들도 많았지만, 잘못을 저지르고 역사의 역적이 된 왕들도 있다. 12세기경 영국의 존 왕은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조카를 살해하고 왕의 자리를 빼앗았다. 좋지 못한 방법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훌륭한 왕이 되려고 노력했다면 모를 텐데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켜 영국 국민에게 큰 피해를 남겼다. 또한 교회와 사이가 좋지 않아 왕위를 내려놓을 위기에 처하자,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정하여 국왕의 체면을 잃었다. 올바른 길을 제시한 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 법률을 제정했다가 곧 법률의 무효를 선언하여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세익스피어(1564~1616)는 존 왕의 일을 연극으로 만들었다. “잘못을 범하면 그 잘못이 더 두드러진다”는 대사는 그의 연극 대본에 나오는 말이다. 처음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시작부터 진리에 눈을 감고 평생을 그릇되게 살아야 했던 존 왕의 일생은 많은 이에게 교훈을 준다. 지금은 조금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진리를 선택하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작은 거짓말이 큰 거짓말을 낳듯 악은 눈덩이처럼 더 커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방임한 로마제국의 총독이었다. 로마제국은 넓은 식민지를 정치적으로 잘 통치하기 위해 어느 정도 식민지의 종교를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유다인들의 종교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지만, 사법권이나 사형집행권 등 중요한 권한은 여전히 총독에게만 있었다. 그래서 유다인 대사제 가야파는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을 총독 앞으로 끌고 가 재판을 받게 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다. 심문을 해보니 흉악범도 아니고 사형을 선고할 죄목도 없었다. 빌라도는 로마제국의 총독이란 막강한 권력자였지만 골치 아픈 종교 문제에는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넘긴 의회 의원들과 율법학자, 대사제들은 자신들은 죄인을 십자가형에 처할 권한이 없으니, 십자가형을 선고해 달라고 졸랐다. 빌라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형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청하고 있으니 난감했다. 빌라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는 부하를 시켜 대야에 물을 떠 오게 하고 군중 앞에서 손을 씻었다. 자신은 아무 책임과 관계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권력자에게 무책임은 때론 무능보다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 빌라도는 진리에 눈감고 악과 타협한 것이다. 지도자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몸과 마음, 영혼까지 치유된 태중 소경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 카라얀(1908-1989)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모차르트 관현악단을 지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우연히 그날 연주회의 청중 중에는 울름의 시립극장 지배인이 있었는데, 그는 시립극장에서의 오페라 지휘를 카라얀에게 부탁했다. 이 제안은 그의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카라얀은 최선을 다했고, 그가 세계적 지휘자가 되기까지에는 울름 극장 지배인의 도움과 결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지배인은 5년 동안 울름에서 지휘자 생활을 잘하던 카라얀을 갑작스럽게 해고했다. 울름에서 안주할까 봐 한 행동이었다. 카라얀은 새 직장을 찾으러 밤잠도 설치고 굶기를 밥 먹듯 했다. 그는 1년 만에 70여 명의 단원과 오케스트라가 있는 독일의 한 극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카라얀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를 처음 보고 난 후 음악적인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의 지휘를 통해 마음의 눈이 완전히 열려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는 평범한 선율이 지휘를 통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새롭게 깨달았다. 그는 늘 토스카니니의 연주회를 보러 갔는데 한번은 400km 이상을 자전거를 타고 갔을 정도였다. 카라얀은 이러한 노력을 계속하며 마음의 눈을 떴고, 유럽의 모든 중심 도시로부터 출연 의뢰를 받는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었다. 성경에는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태중 소경’이 등장한다. 유다 사회에서 소경의 삶은 너무 비참해 대부분 길거리에서 구걸해야 했다. 한 태중 소경이 어느 날 실로암 연못 근처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다. 그도 예수라는 선생님이 무척 용하고(?) 메시아일지 모른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과 그 일행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태중 소경을 본 예수님은 흙을 침으로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면서 말씀하셨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물로 씻으시오.”(요한 9,1-7 참조) 태중 소경은 어찌 보면 의미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한 가닥 믿음을 갖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었다. 그리고 눈을 뜨게 됐다. 눈을 뜬다는 것은 여태까지 몰랐던 것을 새롭게 깨닫고 알게 된다는 의미도 지닌다. 예수님 일행이 떠난 직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치유 받은 소경을 심문하며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서 율법을 어겼으니 그 사람은 죄인이라는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눈을 뜬 소경이 그분은 분명히 예언자라고 믿는다고 하자 화가 난 바리사이들은 그를 회당 밖으로 쫓아냈다. 태중 소경은 육신의 눈만이 아니라 영혼의 눈도 떠서 전인격전 치유(全人格的 治癒)를 체험하고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5 참조)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마술사 시몬

1980년대 중반 이스라엘의 마술사 유리 겔라는 우리나라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방송에서 염력이나 텔레파시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TV 앞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앉아 숟가락을 들고 함께 구부리려 그의 말에 집중하는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유리 겔라는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뿐 만 아니라, 고장 난 시계 고치거나 손가락으로 사람을 들어올리는 등의 시연도 선보였다. 외국에서 마술사라는 말에는 ‘아티스트’란 의미가 있다. 마술사란 기묘한 현상처럼 보이는 속임수나 환상을 자연적인 방법으로 연출해 관객을 즐겁게 하는 일종의 공연 예술가란 의미다. 대부분의 마술은 마술사의 행동에 주의를 끌게 해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에 집중시켜 눈속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마술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는데 마술사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마술사들이 악마를 위한 의식을 행하는 자로 여겨져 탄압을 받기도 했다. 신약성경에도 사마리아 지역의 마술사 시몬이란 사람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마술사가 미래를 예언하고 병을 낫게 하거나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사마리아 지역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아 다른 이방 지역처럼 주술적 믿음이나 마술 등 이교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만연했고 잡신들의 기운이 강해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렸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미래의 운세를 알기 위해 점쟁이를 찾는 경우가 많다. 구약성경에도 예언자들은 이방인의 마술 행위를 끊임없이 고발한다. 마술 행위는 결국 유다인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해를 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에 내려온 필립보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기적을 행하자 많은 이가 세례를 받게 됐다. 마술사 시몬도 필립보를 찾아가 그의 말과 기적 행위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자신은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 필립보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필립보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됐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필립보처럼 기적을 행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여러모로 부족함이 있었다. 얼마 후 사마리아 지방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다. 사도들이 오순절 날의 체험처럼 , 불길처럼 성령을 내려보내자 치유와 예언 등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시몬은 갑자기 돈을 챙겨 사도 베드로에게 가서 사도들처럼 기적을 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느님의 성령을 돈을 주고 사려했던 마술사 시몬에게 베드로는 따끔하게 충고한다. 신앙을 갖는 동기는 여러 가지이다. 한 선배 사제는 공소에 오시는 신부님이 김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마음이 동해 신학교에 왔다고 했다. 우리가 계속해서 회개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하며 뉘우친다면 진정한 신앙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2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원한 악녀 헤로디아

중국사에는 3대 악녀(惡女)가 있다. 바로 한나라의 여태후(呂太后)와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청나라의 서태후(西太后)이다. 이들은 높은 권력을 쥐락펴락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고 나라의 근간을 크게 흔들었다. 한나라의 초대 황제,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는 유방의 소실, 척부인과 그녀의 아들인 유여의와 갈등이 심했다. 자신의 아들, 혜제가 왕위에 오르자 유여의를 독살하였고 척부인은 산 채로 손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약을 먹여서 귀머거리로 만든 다음에 돼지우리에 던져버렸다. 중국사에서 유일한 여황제인 당나라 측천무후는 자신이 황후 자리에 오르는 데 반대한 공신들을 모두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일설에 의하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과 딸마저 죽였다고 하니 악녀가 맞다. 청나라의 서태후는 3명의 황제가 집권하는 동안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는 아들들이 나이가 어려 수렴청정했는데 아들이 성인이 되어 갈등이 생기자 황제들을 죽였다. 당시 국제 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의 국력이 쇠퇴하고 있는 중에도 서태후의 생각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 유지였다. 악녀들의 행동은 일종의 사이코패스 성형을 보인다. 다른 이의 고통에 전혀 공감을 못 하며 살인에 대한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신약성경 속에서 헤로디아는 그의 딸과 함께 대표적인 악녀이다. 그는 필립보 임금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시숙 헤로데 안티파스와 결혼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여러 차례 헤로데 왕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왕으로서 법도에 맞지 않다”고 계속 진정했다. 헤로데는 군중들의 여론이 두려워 일단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비판을 받은 헤로디아의 마음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마침 헤로데의 생일 축하를 위한 연회에서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가 춤솜씨를 뽐냈다. 헤로데는 기뻐서 살로메에게 “소원을 말해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했다. 헤로디아는 지체 없이 살로메에게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귀띔했다. 헤로데도 세례자 요한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병사를 보내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게 했다. 잠시 후 경비병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돌아왔다. 사람들은 피가 흐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살로메는 쟁반에 담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받아서 헤로디아에게 주었다.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보면서 너무 기뻐했다. 헤로디아와 살로메와 같은 인물은 정말 비정하고 무섭다. 자신을 비난한다고 해서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비정함이 끔찍하다. 인간의 악행은 도대체 어디까지 갈까?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사실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감정이다. 중요한 것은 정말 실행에 옮기는가이다. 인간은 분노와 화를 잘 조절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파멸할 수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입맞춤으로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2014년 8월 18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명동대성당에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마지막으로 로마로 귀국하는 사목방문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사가 끝나기 전 교황님 제의실로 가는 데 경찰 통제선 안쪽에서 한 어머니가 울고 있는 아이와 같이 나에게 손짓했다. 가서 들어보니 어머니가 교황님께 축복을 받으려고 꼭두새벽부터 기다렸는데 입장하실 때 교황님이 다른 쪽을 향해서 인사를 하셔서 안수를 못 받았다고 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간절해 나는 아이를 데리고 제의실로 가서 기다렸다. 미사가 끝나고 교황님께서 복사단과 함께 들어오셨다. 한여름의 빡빡한 한국 사목방문 4박5일의 일정을 다 마친 교황님은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교황님께 다가갔다. 그러자 교황님은 걸음을 멈추고 지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따듯한 미소를 띠시며 아이와 악수했다. 내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자, 교황님은 아이를 안으시고 볼에 입맞춤하셨다. 아이가 준 편지도 받아서 직접 제의 안으로 챙기셨다. 그때 보았던 교황님의 따듯한 미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입맞춤은 예로부터 평화와 우호의 상징으로 계약의 조인에도 사용되었다. 발이나 손에 하는 입맞춤은 겸손과 자발적 복종, 존경의 표시이다. 지금도 외국 성지순례 때 보면 성인상의 발등에 고개를 숙여 입맞춤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스승을 배신해 악인들에게 넘겨줄 때 입맞춤 장면이 언급된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22,47-48) 입맞춤은 본래 애정과 헌신의 표시였지만 주님을 배반한 유다에 의해 악용돼 배반의 표시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해 돈을 받고 팔아버려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로 생을 끝마쳤다. 예전에는 유다가 ‘예수의 13번째 제자’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13명의 사도단은 실제로 없었다. 지금도 서양권에서 성행하는 숫자 13을 기피하는 문화는 유다가 그 시작이었다. 유다는 사도단의 살림을 맡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뢰를 받았다. 단체에서 돈주머니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그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죄인들의 손에 팔아넘긴 이유는 성경에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스승이 유다인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킬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는 점이 그를 실망하게 했을까?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가끔 일하다 보면 진짜 걸림돌은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 장군이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앞으로 진격하는데 방해를 놓는 것은 독일군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편이 발목을 잡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세관에 있는 마태오를 부르신 예수님

예수님과 마태오가 처음 만난 장소는 세관이었다. 마태오는 세리였다. 유다인에게 세리라고 하면 창녀에 버금가는 죄인이었다. 세리는 유다인 사회에서는 배척을 받는 직업으로 같은 유다인들에게 두 배 내지 세 배의 세금을 징수하는 등 부당한 이익을 취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로마제국의 앞잡이와 같은 일을 하는 세리들은 유다인 사회의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세리들을 이방인과 같이 취급했고 겉으로는 내놓고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경멸했다. 당시에 로마의 징세 제도에서 세리들은 미리 담합을 벌여 다음 해의 세금 징수권을 따냈다. 세리로 등용된 이들은 자신이 사용한 돈 이상으로 이익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통행세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임산부를 2명으로 간주하는 등 비상식적인 세금 징수로 유다인들은 세리를 이방인 취급하여 ‘개’라고 부르곤 했다. 세리도 돈을 많이 벌고 호의호식했지만, 마음속에는 평화가 없었다. 인간에겐 돈과 재물보다도 중요한 것이 많다. 명예와 평화로운 마음을 회복하고 싶은 것은 인간 모두의 본성이다. 마태오도 적당히 법을 이용하여 재물을 많이 축적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진정한 친구나 지인보다 돈으로 얽혀있는 인간적인 만남이 많았을 것이다. 마태오는 주변 유다인이 자신을 도둑과 개처럼 멸시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죄인들과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저 다른 보통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해주시며 손을 내밀어 주셨다. 전혀 새로운 만남에 감동한 마태오는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 사도들의 명단 속에는 항시 마태오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태오 복음서만이 세리 출신의 제자를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10,3 참조)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을 위해 쓰였다. 마태오 복음서는 ‘팔레스티나 복음서’로 간주될 만큼 팔레스타인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교리서와 같은 책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그 선교의 대상이 되는 유다 세계와 유다 문화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집필연대는 내적 특성을 고려하여 마태오 복음서는 서기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10여 년이 지난 80~85년에 결정적으로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화에서 마태오는 성경(에제 1,10; 묵시 4,7)에 언급된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해 날개 달린 사람, 다시 말해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마태오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복음서를 시작한 것에 대해 리옹의 주교이자 교부인 이레네오 성인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세리였던 경력으로 인해 은행원과 경리,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교회 미술에서도 장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되기도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천둥의 아들’ 충직한 제자 야고보

세계 어디서나 간호사가 되면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물려받자는 뜻에서 '나이팅게일 선서'라는 것을 하게 된다. 나이팅게일(1820~1910)은 간호사로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854년 크림 전쟁으로 부상병이 많이 발생하여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녀는 이 뉴스가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확신을 갖고 야전병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여성이 전쟁터에 가서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은 없어 나이팅게일의 부모님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거의 잠도 자지 않은 채 부상한 병사들을 돌보았다. 늦은 밤에도 램프를 켜서 들고 부상병들을 간호하는 그녀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녀의 이런 봉사의 모습은 널리 퍼져나가 세계인의 관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그녀를 위한 대대적인 환영대회를 준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나이팅게일은 눈에 띄지 않게 몰래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 주변에 “나는 위대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라고 이야기했다. 나이팅게일은 모든 간호사의 모범이 됐지만 그저 항상 주님의 도구였을 뿐이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있다. 국적,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의 생명은 모두 소중한 것이기에 나이팅게일과 같은 소명의식을 가진 의료인들이 더욱 필요하다.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요한의 형이다. 즉흥적이고 열정적인 성격 탓에 예수님께 꾸지람(?)도 들어 ‘천둥의 아들’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야고보는 스페인과 수의사, 의사, 목수의 수호성인이다. 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명이인이라 교회에서는 그를 ‘대(大)야고보’라고 부른다. 그는 동생 요한과 함께 아버지를 도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어부로 일하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21-22 참조)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의 최측근으로 스승의 말씀을 충직하게 따랐던 제자였다. 야고보는 사마리아와 유다 지역에서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파하였고 이베리아반도까지도 다녀갔다는 교회전승이 전해진다. 그런 이유인지 모르지만 9세기경 야고보의 유해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장되어 모셔졌고, 당시 알폰소 국왕은 그 묘지 위에 150년에 걸쳐 웅대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건축하였다. 스페인과 유럽의 신심이 약화되던 시기에 젊은이들이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순례하는 피정 프로그램이 오늘날의 꾸르실료 신심운동을 탄생시켰다. 현재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까지의 순례길은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순례지다. 지금도 대성당 안에 그의 유골함이 전시되어 있다. 순례 끝에 충실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야고보 사도를 만나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2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간음하다 붙잡혀 죽게 된 여성

구약시대에 여성은 남자의 재산목록 중 하나로 매매가 가능한 존재였다. 그래서 여성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격리되었고 철저히 아버지나 남편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최근에도 이슬람 지역에서 여성이 몹쓸 짓을 당하고 집에 오면 가족 중 오빠나 사촌들에게 피해를 당한 여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명예살인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가장(家長)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딸이나 아내, 친척 여성을 살해하는 범죄로 매년 5000여 명이 명예살인으로 목숨을 잃고 있고, 실제로는 그 이상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악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있었다. 결혼한 사람이 자신의 아내나 남편이 아닌 자와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은 십계명의 제6계명에서 금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간음의 심각성을 알리며 간음을 우상 숭배 죄의 표상으로 보았다. 구약시대 여성들은 사회뿐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도 불리했다. 엄격한 토라, 율법, 랍비 문헌에서 여성의 참석을 금지하는 성전 의식을 실행했다. 이스라엘의 연중행사인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에도 여성들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여성들은 율법을 배울 수 없었고 율법 교사가 될 수도 없었다. 여자의 손에 토라가 들어가느니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시대였다. 이스라엘 여성의 위치가 노예와 법률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단 두 가지였다. 혼인 지참금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고, 남편과 이혼·사별할 때 여성에게 지급될 액수가 담긴 혼인 증서를 가지고 있었다.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공적인 삶은 철저히 남자들에게만 허용됐다. 집안에서도 딸들은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 했지만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는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던 시대가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여성도 한 인격체로 받아들이셨다. 어느 날 갈 길 바쁜 예수님의 일행을 막아섰다. 일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한 여인을 질질 끌고 왔던 것이다. 그 여자는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고 몸에 피가 흐르고 옷도 찢어져 있었다. 여자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선생님, 이 여자는 간음하다 현장범으로 붙잡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죽여야 하는데 선생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사실 당시에 간음은 돌로 공개처형을 하는 중죄였다. 교활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수작이었다. 예수님이 그녀를 용서하라면 율법을 거스리는 것이고 율법대로 돌로 죽이라고 한다면 평소 가르침에 위배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모든 이들은 예수님을 주목했다. 예수님은 적막을 깨고 별안간 입을 여셨다. “여러분 중에서 여태까지 죄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저 여자를 돌로 쳐죽이시오.” 나이가 많은 사람들부터 하나둘씩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예수님 앞에는 여자만이 남게 되었다. 예수님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이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젠 다시 죄짓지 않도록 하여라.”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8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