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입맞춤으로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2014년 8월 18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명동대성당에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마지막으로 로마로 귀국하는 사목방문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사가 끝나기 전 교황님 제의실로 가는 데 경찰 통제선 안쪽에서 한 어머니가 울고 있는 아이와 같이 나에게 손짓했다. 가서 들어보니 어머니가 교황님께 축복을 받으려고 꼭두새벽부터 기다렸는데 입장하실 때 교황님이 다른 쪽을 향해서 인사를 하셔서 안수를 못 받았다고 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간절해 나는 아이를 데리고 제의실로 가서 기다렸다. 미사가 끝나고 교황님께서 복사단과 함께 들어오셨다. 한여름의 빡빡한 한국 사목방문 4박5일의 일정을 다 마친 교황님은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교황님께 다가갔다. 그러자 교황님은 걸음을 멈추고 지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따듯한 미소를 띠시며 아이와 악수했다. 내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자, 교황님은 아이를 안으시고 볼에 입맞춤하셨다. 아이가 준 편지도 받아서 직접 제의 안으로 챙기셨다. 그때 보았던 교황님의 따듯한 미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입맞춤은 예로부터 평화와 우호의 상징으로 계약의 조인에도 사용되었다. 발이나 손에 하는 입맞춤은 겸손과 자발적 복종, 존경의 표시이다. 지금도 외국 성지순례 때 보면 성인상의 발등에 고개를 숙여 입맞춤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스승을 배신해 악인들에게 넘겨줄 때 입맞춤 장면이 언급된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22,47-48) 입맞춤은 본래 애정과 헌신의 표시였지만 주님을 배반한 유다에 의해 악용돼 배반의 표시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해 돈을 받고 팔아버려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로 생을 끝마쳤다. 예전에는 유다가 ‘예수의 13번째 제자’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13명의 사도단은 실제로 없었다. 지금도 서양권에서 성행하는 숫자 13을 기피하는 문화는 유다가 그 시작이었다. 유다는 사도단의 살림을 맡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뢰를 받았다. 단체에서 돈주머니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그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죄인들의 손에 팔아넘긴 이유는 성경에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스승이 유다인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킬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는 점이 그를 실망하게 했을까?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가끔 일하다 보면 진짜 걸림돌은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 장군이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앞으로 진격하는데 방해를 놓는 것은 독일군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편이 발목을 잡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세관에 있는 마태오를 부르신 예수님

예수님과 마태오가 처음 만난 장소는 세관이었다. 마태오는 세리였다. 유다인에게 세리라고 하면 창녀에 버금가는 죄인이었다. 세리는 유다인 사회에서는 배척을 받는 직업으로 같은 유다인들에게 두 배 내지 세 배의 세금을 징수하는 등 부당한 이익을 취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로마제국의 앞잡이와 같은 일을 하는 세리들은 유다인 사회의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세리들을 이방인과 같이 취급했고 겉으로는 내놓고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경멸했다. 당시에 로마의 징세 제도에서 세리들은 미리 담합을 벌여 다음 해의 세금 징수권을 따냈다. 세리로 등용된 이들은 자신이 사용한 돈 이상으로 이익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통행세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임산부를 2명으로 간주하는 등 비상식적인 세금 징수로 유다인들은 세리를 이방인 취급하여 ‘개’라고 부르곤 했다. 세리도 돈을 많이 벌고 호의호식했지만, 마음속에는 평화가 없었다. 인간에겐 돈과 재물보다도 중요한 것이 많다. 명예와 평화로운 마음을 회복하고 싶은 것은 인간 모두의 본성이다. 마태오도 적당히 법을 이용하여 재물을 많이 축적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진정한 친구나 지인보다 돈으로 얽혀있는 인간적인 만남이 많았을 것이다. 마태오는 주변 유다인이 자신을 도둑과 개처럼 멸시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죄인들과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저 다른 보통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해주시며 손을 내밀어 주셨다. 전혀 새로운 만남에 감동한 마태오는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 사도들의 명단 속에는 항시 마태오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태오 복음서만이 세리 출신의 제자를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10,3 참조)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을 위해 쓰였다. 마태오 복음서는 ‘팔레스티나 복음서’로 간주될 만큼 팔레스타인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교리서와 같은 책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그 선교의 대상이 되는 유다 세계와 유다 문화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집필연대는 내적 특성을 고려하여 마태오 복음서는 서기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10여 년이 지난 80~85년에 결정적으로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화에서 마태오는 성경(에제 1,10; 묵시 4,7)에 언급된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해 날개 달린 사람, 다시 말해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마태오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복음서를 시작한 것에 대해 리옹의 주교이자 교부인 이레네오 성인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세리였던 경력으로 인해 은행원과 경리,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교회 미술에서도 장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되기도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천둥의 아들’ 충직한 제자 야고보

세계 어디서나 간호사가 되면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물려받자는 뜻에서 '나이팅게일 선서'라는 것을 하게 된다. 나이팅게일(1820~1910)은 간호사로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854년 크림 전쟁으로 부상병이 많이 발생하여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녀는 이 뉴스가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확신을 갖고 야전병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여성이 전쟁터에 가서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은 없어 나이팅게일의 부모님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거의 잠도 자지 않은 채 부상한 병사들을 돌보았다. 늦은 밤에도 램프를 켜서 들고 부상병들을 간호하는 그녀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녀의 이런 봉사의 모습은 널리 퍼져나가 세계인의 관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그녀를 위한 대대적인 환영대회를 준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나이팅게일은 눈에 띄지 않게 몰래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 주변에 “나는 위대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라고 이야기했다. 나이팅게일은 모든 간호사의 모범이 됐지만 그저 항상 주님의 도구였을 뿐이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있다. 국적,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의 생명은 모두 소중한 것이기에 나이팅게일과 같은 소명의식을 가진 의료인들이 더욱 필요하다.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요한의 형이다. 즉흥적이고 열정적인 성격 탓에 예수님께 꾸지람(?)도 들어 ‘천둥의 아들’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야고보는 스페인과 수의사, 의사, 목수의 수호성인이다. 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명이인이라 교회에서는 그를 ‘대(大)야고보’라고 부른다. 그는 동생 요한과 함께 아버지를 도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어부로 일하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21-22 참조)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의 최측근으로 스승의 말씀을 충직하게 따랐던 제자였다. 야고보는 사마리아와 유다 지역에서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파하였고 이베리아반도까지도 다녀갔다는 교회전승이 전해진다. 그런 이유인지 모르지만 9세기경 야고보의 유해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장되어 모셔졌고, 당시 알폰소 국왕은 그 묘지 위에 150년에 걸쳐 웅대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건축하였다. 스페인과 유럽의 신심이 약화되던 시기에 젊은이들이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순례하는 피정 프로그램이 오늘날의 꾸르실료 신심운동을 탄생시켰다. 현재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까지의 순례길은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순례지다. 지금도 대성당 안에 그의 유골함이 전시되어 있다. 순례 끝에 충실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야고보 사도를 만나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2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간음하다 붙잡혀 죽게 된 여성

구약시대에 여성은 남자의 재산목록 중 하나로 매매가 가능한 존재였다. 그래서 여성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격리되었고 철저히 아버지나 남편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최근에도 이슬람 지역에서 여성이 몹쓸 짓을 당하고 집에 오면 가족 중 오빠나 사촌들에게 피해를 당한 여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명예살인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가장(家長)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딸이나 아내, 친척 여성을 살해하는 범죄로 매년 5000여 명이 명예살인으로 목숨을 잃고 있고, 실제로는 그 이상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악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있었다. 결혼한 사람이 자신의 아내나 남편이 아닌 자와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은 십계명의 제6계명에서 금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간음의 심각성을 알리며 간음을 우상 숭배 죄의 표상으로 보았다. 구약시대 여성들은 사회뿐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도 불리했다. 엄격한 토라, 율법, 랍비 문헌에서 여성의 참석을 금지하는 성전 의식을 실행했다. 이스라엘의 연중행사인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에도 여성들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여성들은 율법을 배울 수 없었고 율법 교사가 될 수도 없었다. 여자의 손에 토라가 들어가느니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시대였다. 이스라엘 여성의 위치가 노예와 법률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단 두 가지였다. 혼인 지참금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고, 남편과 이혼·사별할 때 여성에게 지급될 액수가 담긴 혼인 증서를 가지고 있었다.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공적인 삶은 철저히 남자들에게만 허용됐다. 집안에서도 딸들은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 했지만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는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던 시대가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여성도 한 인격체로 받아들이셨다. 어느 날 갈 길 바쁜 예수님의 일행을 막아섰다. 일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한 여인을 질질 끌고 왔던 것이다. 그 여자는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고 몸에 피가 흐르고 옷도 찢어져 있었다. 여자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선생님, 이 여자는 간음하다 현장범으로 붙잡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죽여야 하는데 선생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사실 당시에 간음은 돌로 공개처형을 하는 중죄였다. 교활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수작이었다. 예수님이 그녀를 용서하라면 율법을 거스리는 것이고 율법대로 돌로 죽이라고 한다면 평소 가르침에 위배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모든 이들은 예수님을 주목했다. 예수님은 적막을 깨고 별안간 입을 여셨다. “여러분 중에서 여태까지 죄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저 여자를 돌로 쳐죽이시오.” 나이가 많은 사람들부터 하나둘씩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예수님 앞에는 여자만이 남게 되었다. 예수님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이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젠 다시 죄짓지 않도록 하여라.”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가장 용맹스럽고 멀리 복음을 전한 토마스

인류 최고의 의사로 칭송받는 슈바이처(1875~1965)는 “생명을 북돋워 주는 것은 선이고, 생명을 부수고 가로막는 것은 악”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의사, 신학자, 음악가, 사상가로 당대의 최고 천재였다. 다재다능한 그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질병으로 혹독한 고통당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의사가 되어 이들을 위한 진료에 평생을 바쳤고 그 공로가 인정되어 1952년 노벨상을 받았다. 슈바이처는 노벨상을 탔을 때에도 그 상금을 모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사용했다. 마흔이 다 된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반대가 심했다. 편안하고 여유 있게 일생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난데없이 아프리카로 가는 슈바이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아프리카는 온갖 독벌레와 세균이 들끓었던 미개한 곳이었다. 의사도, 병원도, 약국조차 없었다. 그곳 사람들은 질병 속에 완전히 버려져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사람을 고치는 것은 의사의 본분이고, 자신이 의사가 된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탈렌트를 이용하여 모든 생명을 구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슈바이처는 재산을 다 털어 그곳에 병원을 지었다. 그는 질병과 더위와 싸우며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과 만났을 때 빠졌던 토마스는 다른 사도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믿지 못했다. 성경을 보면 토마스는 깨달음이 부족해 예수님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엉뚱한 반응을 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부활도 직접 보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떼를 부린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너는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하자 감격한 토마스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이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지금까지도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토마스는 특별한 고집이 있어 가장 열성적이고 강직한 제자 중 하나였다. 이 구절은 의심 많은 믿음이라는 설교의 예화로 자주 등장한다. 예수님은 의심을 ‘불경하다’며 피하지 않고, “보아라” 하시며 제자의 의혹을 적극적으로 풀어주고 확신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한 문장만 가지고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했을 정도다. 토마스는 성경에서 예수님에게 직접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유일한 사도인데,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사도들의 리더 자리를 받았음을 생각해 보면 토마스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토마스를 많이 아꼈다. 예수님 말씀이 이해 안 갈 때 다른 제자들이 대충 가만히 있어도 토마스는 꼭 질문을 다시 했다. 맹신하는 것보다 토마스처럼 의심하고 질문하는 게 오히려 좋은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가톨릭 전승에 따르면, 토마스는 인도에까지 복음 선포길에 나섰다 순교했는데, 토마스의 성격이나 도전성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진리를 찾는 진실한 사람, 바르톨로메오

철학과 예술이 발달했던 아테네에서 거지꼴을 한 노인이 거리에서 큰소리를 외치고 있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노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들은 무엇을 하며 사는가?”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표현했다. 부자나 관리, 유명 인사가 되겠다고 자신의 꿈들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노인은 “돼지가 되어 즐기기보다는 사람이 되어 슬퍼하겠네. 사람은 먹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먹는 것이니까”라고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였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에게 찾아왔다. 그때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부패한 정치가와 학자들을 비판하며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아테네 정부는 청년들을 미혹하고 국가에 해를 끼친다는 죄목으로 소크라테스를 체포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죄 없이 죽는 것이 억울해 그를 탈출시키려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사형을 받아들였다. 교회의 오랜 전승은 바르톨로메오와 나타나엘을 같은 인물이라 여긴다. 사도의 명단에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는 항상 같이 짝을 이룬다. 실제로 필립보는 나타나엘의 친구였고 나타나엘을 예수님에게 소개했다. 필립보는 예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바로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참 예언자를 찾았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란 말을 들은 나타나엘은 멈칫한다. 나자렛은 성경에 언급된 중요한 곳이 아닌 시골 마을이었다. 그러자 필립보는 그래도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갔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보자 “이 사람이야말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했다. 나타나엘은 첫 만남에서 예수님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 제자가 된다. 그리고 ‘톨로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르톨로메오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서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진 경건한 사람인 바르톨로메오는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던 인물이다. 예수님이 언급한 참다운 이스라엘 사람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고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사실 편견이나 선입견을 극복하기가 어렵다. 많이 알수록 새로운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고함이 자리잡고 있기 마련이다.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전교하다가 순교했다. 그는 칼로 가죽이 벗겨지고 참수를 당했다. 그래서 칼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성화의 상징이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평생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위해 죽었던 진실한 사람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열혈당원이었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시몬

독립운동가 중에서 이봉창 의사(1900-1932년)는 처음으로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한국인의 용기를 드러낸 인물이다. 오사카에서 철공소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어려운 생활이 일본인의 식민정책에 연유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는 1931년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스스로 찾아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드디어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 의사는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애국선서식과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슬퍼하는 김구 선생을 오히려 위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봉창 의사는 사전답사를 하고 1932년 1월 8일 도쿄 경시청에서 히로히토 일왕이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는데 히로히토를 명중시키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다. 이봉창 의사의 거사가 알려지자 특히 중국 신문들은 한국 청년 이봉창이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였다고 대서특필했다. 이후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어 독립투사의 활동을 은연중에 많이 돕게 됐다. 1932년 10월 10일 일본 경찰이 둘러싼 가운데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이봉창 의사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이봉창 의사는 체포부터 심문, 재판, 심지어 교수형 직전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여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수님의 제자 명단에 열혈당원 시몬(마태 10,4)이 등장한다. 열혈당은 극단적인 유다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모임으로 우상숭배와 배교, 율법적인 죄에 대한 하느님의 의로운 진노와 심판의 대행자로서 하느님께 헌신한 자들이다. 열혈당원들은 하느님만이 그들의 왕이고 로마인들에 대한 세금 납부도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쉽게 설명해서 대부분은 현대의 테러리스트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타협적인’ 유다인들에 대해서는 약탈, 살인을 저지르는 공격을 감행하였다. 서기 70년 열혈당은 로마에 대항에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런데 열혈당원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감화되어 제자가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성 시몬은 이집트에서 설교하였다. 시몬은 톱으로 육신이 두 동강이 나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성화에서 시몬을 톱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예수님과 열혈당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인간에 대한 태도 속에 있다. 열혈당은 율법을 어기는 자를 엄단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새 율법을 선포하셨다.(루카 6, 27-36 참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인 행동의 중심이며 규준이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의 모범이었다.(루카 10,30-37 참조) 폭력은 다시 폭력을 낳지만 진정한 사랑과 화해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현실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진리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마지막까지도 사랑을 설교했던 사랑의 사도 요한

서울 성북동의 고즈넉한 언덕에 유명한 길상사가 있다. 본래는 대원각(大苑閣)이란 이름의 건물이었다. 주인이었던 김영한 선생은 평생을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 그녀는 20살 때 23살의 청년 시인 백석(白石) 백기연을 만났다. 젊은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서로 똑똑해서 대화도 정말 잘 통했다.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백석의 집안에서 기생(妓生)인 자야를 반기지 않았다. 백석은 자야와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만주로 도망하기로 했지만 자야가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재인 백석의 앞길을 자신 때문에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백석은 6·25전쟁 후 사회주의자로 북쪽에 머물며 문학의 꿈을 펼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공산당의 압력으로 결혼하고 가정을 이뤘다. 그 소식을 들은 자야는 마음이 아팠지만 자신의 사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30여 년 전 1000억 원(지금은 적어도 2500억 원 이상)을 법정 스님께 조건 없이 봉헌했다.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했던 자야는 기자들에게 “돈 1000억 원은 백석의 시 한 줄 값도 안 된다”며 백석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백석이 자야와의 이별의 심정을 담은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교과서에도 실렸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사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도는 요한이다. 요한은 주님께 특별히 사랑받던 제자였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요한에게 성모님을 모시도록 했다.(요한 19,26-27) 이후 전승에는 요한이 오래도록 에페소에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에페소에 도착한 요한과 성모 마리아를 위해 에페소 신자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에페소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성모님의 집은 전 세계 순례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후 죄인들의 손에 잡혔을 때 사랑받던 제자 요한도 무서워 떨며 도망쳤다. 그러나 다음날 예수님이 처형당하는 십자가 밑으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을 데리고 다가갔다. 그는 십자가 밑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스승의 임종을 지키며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새겼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늘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시오”라며 사랑을 역설했다고 한다. 요한은 하느님의 아들인 스승이 살고 가르쳤던 가장 중요한 정수(精髓)가 사랑이라 몸소 체험한 인물이었다. 사랑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지만 인간 삶의 최고 가치임이 틀림없다. 하느님을 표현할 때도 사랑 자체라고 하는 이유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 바오로의 회심

‘1654년 11월 23일 밤의 회심’이라 불리는 파스칼(1623-1662)의 초월적인 체험은 지금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는 말을 남긴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은 39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인류에 남긴 영적 유산은 무척 크다. 파스칼은 11세 때 이미 ‘음향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썼고, 16세 때 유명한 수학 논문을 발표했던 천재였다. 현재 사용하는 컴퓨터의 전신인 전자계산기를 발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회개 사건은 하느님의 세례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이 초월적인 체험 이후로 파스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쾌락에 빠진 방탕한 생활을 완전히 끊고 신앙을 생활의 신조로 삼는 그야말로 새사람이 되었다. 그는 회심한 후 매우 어렵게 지내면서도 가난한 이웃을 돌보았고 그리스도에 관한 글을 계속 저술했는데, 파스칼의 사후에 이런 그의 글들을 엮어 출간된 책이 바로 「팡세」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은 악과 비참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인간마다 마음속에 공백이 있는데, 이 공백은 다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라고 강조한다. 본래 이름이 사울이었던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율법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울은 그리스도교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복종하고 지키는 것이 바로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사울은 각지로 흩어진 이단자들인 그리스도교인을 잡으러 다마스쿠스로 떠난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였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사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그 이후 눈이 보이지 않는 등 우여곡절 끝에 그는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 태어난다.(사도 9장 참조) 세례를 받은 후 그는 바오로라 불려지고 온 세계를 무대로 선교사업을 하는 데에 맹활약했다. 그 후의 바오로는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사도가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큰 영향을 끼쳤고 사도 베드로와 두 기둥을 이루는 초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신학, 그리스도론, 교회론 등의 이론을 세운 그는 그리스도의 박해자에서 열렬한 추종자로, 이방인의 사도로 변모했다. 끝내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한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우리도 가끔 다른 이들에게 잘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체험을 할 때가 있다. 이 순간이 바로 우리가 회심해야 할 시간으로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기도해야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수님께 베드로를 소개한 동생 안드레아

예전에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님과 함께 그리스 성지를 순례할 때였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파트라이 지역에 가까워지자, 옆에 앉은 염 추기경님은 많이 상기한 듯 보였고 눈가엔 이슬이 살짝 비쳤다.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파트라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 도시에 들어서자, 곳곳에 많은 X자 모양의 십자가가 눈에 띄었다. 안드레아 사도가 스승과 같은 십자가에 못 박힐 자격이 없다고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묶여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X자 모양의 십자가는 ‘성 안드레아 십자가’로 알려져 있다. 염 추기경님은 어두운 성당에 무릎을 꿇고 한참 동안 말없이 기도하셨다. 밖에 나오면서 평소에는 감정을 잘 안 드러내는 염 추기경은 눈가가 촉촉해져 “여기를 평생에 꼭 한번 오고 싶었어. 이제야 오게 된 것이 참 미안하고 감사해”하며 말을 잇지 못하셨다. 본래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다가 357년 콘스탄티우스 2세 때 아카이아 지역의 파트라이로 옮겨졌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이 1461년 로마로 망명하면서 안드레아의 유해 중 머리를 로마에 가져왔다. 비오 2세 교황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드레아의 머리를 봉안했다. 그런데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정교회와의 공존과 화해를 위해 다시 그리스 파트라이로 반환했다. 안드레아는 순교 이후에도 유해가 여러 곳에 옮겨 다니는 고단한(?) 삶을 살았다. 안드레아 사도는 형제인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첫 제자이다. 안드레아는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고 고백했을까? 안드레아는 본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 예수님은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받으셨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라고 증언하였다.(요한 1,29-33 참조) 다음날 세례자 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있다가 예수님이 보이자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하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다. 다음날 안드레아는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하며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갔다.(요한 1,35-42 참조) 안드레아는 형 베드로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이었고 뒤에서 보조자의 역할, 대중과 주님, 이방인과 주님, 제자들과 주님을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잘 실행했다. 안드레아는 5000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예수님에게 한 어린이가 가져온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와 기적의 발판을 마련했고(요한 6,8), 그리스 출신의 이방인들에게 다가가 스승을 방문하도록 조치했다.(요한 12,22) 제자들을 대표해 안드레아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함께 따로 예수님이 챙기는 사도단에서도 신임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언제나 사도단에서 겸손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던 인물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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