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숨통 조인 군사 정권…교회는 ‘쿠데타 옹호’ 역사적 과오
4·19 민주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의 독재 체제는 막을 내렸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장면 총리를 중심으로 이승만 정권의 억압적 통치에 맞섰다는 이미지를 형성하며, 한국 사회의 한 주역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일제 강점기 동안 조국과 민족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떠올릴 때 고무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는 당시 교회가 과연 용기 있게 조국과 민족의 선익을 위해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었던가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1960년 4월, 그 격동의 시간에 교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19 민주혁명은 교회가 자신의 예언자적 소명을 자각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었지만, 당시 교회는 여전히 그 소명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장면 정권
4·19 민주혁명 후 치러진 7·29 총선에서는 많은 천주교 신자 정치인이 입후보하게 됩니다. 가톨릭시보는 총선을 앞둔 7월 17일자에서 40여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입후보 현황을 전했습니다. 8월 7일자에서는 총 10명의 신자 당선자 명단을 전하고, 8월 28일자에서는 “장면(요한) 씨 국무총리에”라는 제목으로 제2공화국 초대 국무총리로 장면이 인준됐다는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지난 10년간 민권수호 투쟁과 독재 타도의 선봉에 섰던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장면 박사는 이로써 빛나는 제2공화국 초대 국무총리의 영광을 차지하였으며 앞으로 ‘정치 안정’ 지향과 ‘4월 혁명 완수’라는 대과제를 해결해야 할 중대 임무를 양어깨에 메었다. 12년의 폭정과 각종 불법·부정을 시정하고 도탄에 빠진 국민 생활 향상과 국위(國威)를 선양하는 등 문자 그대로의 새 나라 재건을 부여받은 장 총리는 취임 첫인사로 ‘몸이 부서지도록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한국 교회는 대표적인 천주교 신자 정치인인 장면이 총리직을 맡게 됨에 따라 이를 크게 경축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국정에 반영하기 위해 적극 나섰습니다. 산아 제한 반대나 교황청과의 외교 관계 격상 등 교회의 입장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정책들을 제안하고 추진했습니다.
5·16 군사 쿠데타
하지만 장면 정권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일단의 군인들이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불과 11개월 만에 몰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며 군사 정권에 협조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쿠데타 이후, 군부 세력은 천주교회의 협조를 얻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주한 교황사절 주피 대주교(Saverio Zupi)에게는 군사 쿠데타의 이유를 반공 체제 강화라고 강조했습니다. 주피 대주교는 주한 외교사절 가운데 가장 먼저 쿠데타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성직자에게 다양한 명분으로 상훈(賞勳)을 수여하고, 교회가 주도하던 신협에 국가 보조금을 지급했습니다. 또 공영방송에서 천주교를 홍보할 기회를 부여하기도 하고, 여러 교회 학교들의 설립 인가를 내주기도 했습니다.
반공주의를 앞세운 군사 정권의 회유책은 효과적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장면 정권을 적극 지지해 왔지만, 집권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쿠데타로 무너지면서 당혹스러운 처지가 됐고, 노기남(바오로) 주교 스스로 토로하듯 ‘한층 난관에 부딪히게’ 됐습니다.
쿠데타를 지지하다
군사 정권의 회유 속에서, 교회는 다른 어떤 사회 집단보다 앞서서 쿠데타 세력을 인정하고 군부에 접근하고자 했습니다. 가톨릭시보가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28일자 2면에 게재한 ‘[VOX CATHOLICA] 政權(정권)은 自然法(자연법)에 連結(연결)되어야’라는 제목의 글은 이러한 교회의 속내를 드러내는 듯합니다.
“서울에서 일어난 장군들의 ‘쿠데타’는 처음부터 성공이었다. 장교들의 밝은 지성과 세계에서 최대 강군(强軍)의 하나로서의 실력이 실지로 성공할 수 있는 정권 장악을 기도(企圖)했던 것이다. 이제 이 제3의 시도(試圖)가 이 나라 안에 경제적 복리(福利)를 수립하도록 되어야 할 것이다. ... ‘이’, ‘장’의 집권 때와 마찬가지로 UN 및 거액의 미국 돈의 원조가 또한 요청될 것이다. 반공 정책은 이전보다 더욱 강화될 것 같이 보인다.”
가톨릭시보는 성공적인 쿠데타를 치하하는 듯했으며, 이제 나라의 발전은 경제 성장과 반공 정책이 관건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나아가, 그 과정에서 교회에 대한 국가적인 지지와 국정에서의 동반을 요청합니다. 즉 “민주주의는 가치와 원칙의 공고한 질서가 있는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없이는 장래를 더 바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반공주의
이승만 정권과 대립하고, 4·19 민주혁명 후 장면 정권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제 민주주의의 싹을 밟아버린 군사 정권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군부 세력에 의해 박해를 받게 될까 하는 우려가 첫 번째 이유일 것입니다. 또한 군부 세력이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운 반공주의가 그 두 번째 이유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가톨릭시보 1961년 5월 28일자 2면에는 ‘군사정권과 반공정책 - 반공은 국토 통일보다 중요하다’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려 있습니다.
이 사설에서 가톨릭시보는 군사혁명 정부가 내세운 ‘철저한 반공’을 현명한 정책이라며 격려하면서, “이 땅이 공산화되더라도 국토를 통일해야 한다든가, 공산당의 음모를 알면서도 민주주의 이론에 충실하기 위해서 언론 집회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본말(本末)이 전도된 일”이라고 규정합니다.
사설은 급기야 4월 혁명 중 제기된 민족 통일 운동의 염원을 공산화 음모의 일환이었다며, 그 정신을 짓밟은 군부 쿠데타를 치하합니다. 뿐만 아니라 쿠데타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둔 듯, “우리나라의 실정을 돌보지 않고 선진국의 민주 정책을 그대로 도입하려는 경박한 생각을 지양”하라며 서구식 민주주의의 이념과 체제를 부정하기까지 합니다.
이렇듯 군사 쿠데타를 옹호하고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논조를 보인 가톨릭시보는 이후 대대적으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수많은 기사를 양산함으로써 쿠데타 세력의 반공 노선에 동의를 표시했습니다. 가톨릭시보의 이러한 논조는 당시 한국교회의 처신과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군사 정권과의 유착 관계가 심화되면서 교회 당국은 훗날 민족과 역사 앞에 용서를 구해야 할 많은 과오를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는 이러한 과거사를 비판적이고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계기를 맞게 됩니다. 그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입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