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발자취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뭐하는 사람이야?” 4월 23일, 프란치스코 교황 분향소가 마련됐던 수원교구 주교좌정자동성당 앞에는 조문을 기다리는 줄이 끝없이 이어졌다. 엄마 손을 잡고 온 한 아이는 긴 줄을 보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엄마가 “세상을 지키려고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 같은 분”이라고 설명하자 아이는 “천사가 하늘나라로 돌아갔으면 이제 세상은 누가 지켜?”라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은 그야말로 천사 같았다. 가난과 평화를 상징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라 정한 교황. 그의 삶은 늘 소박했고 그의 옆에는 집을 잃은 이주민과 노숙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함께했다. 또한 교황은 복음적 가치를 선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2016년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제정했고, 이주민과 난민의 권리 옹호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발표한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종교계를 넘어 전 세계가 생태위기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2014년 방한 때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곳은 고통받는 이들이었다. 당시 교황은 세월호 참사로 고통받고 있는 유가족과 한국의 모든 이들을 따뜻하게 감쌌고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고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언장의 끝에 “제 삶의 마지막에 맞이하는 고통을 온 누리의 평화와 만민의 형제애를 위하여 주님께 봉헌한다”는 말을 남겼다. 마지막까지 세상의 평화와 형제애를 위해 기도했던 프란치스코 교황. 천사는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지만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고자 발자취를 남겼다.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23면

기도

브라질, 한국, 일본, 교황청…. 여러 나라를 다니며 프란치스코 교황을 취재했다. 그때마다 계속 귓가를 맴도는 단어가 있었다. ‘기도’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교황. 취임 당시부터 교황은 입버릇처럼 어딜 가나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 아마 전 세계 신자들이 이미 교황을 위해 기도할 터다. 그럼에도 교황은 “기도해 달라”고 하기에 참 인상적이었다. 2023년 성 김대건(안드레아) 성인상 축복식을 취재하면서 교황과 악수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짧은 인사에 무어라 말할까 고민 끝에 “교황님,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악수를 하고 다음 인사할 사람을 위해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교황이 손을 강하게 잡았다. ‘꽉’이라는 부사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체온과 악력이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그렇게 손을 잡고 말했다. “I need.”(기도가 필요합니다.) 당황하는 내 눈과 마주친 교황의 눈에는 흔들림 없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문득 2014년 한국 방한 당시 교황을 만난 한 청년이 “기도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며 “나도 그렇게 기도하고 싶다”고 했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신자인 그가 기도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리가 없다. 아마 그동안 교황처럼 진심을 다해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말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기에 나오는 말이리라. 그리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 이상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리라.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부활 엠마오를 떠난 교황을 위해 두 손을 모아본다.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23면

사람에 대한 진정한 섬김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4월 9일 강원도 강릉 발달장애인 사회복귀시설 ‘애지람’이 운영하는 ‘케어팜’ 취재를 갔다. 애지람에서 생활하는 발달장애인들이 케어팜 농장에 매주 찾아가 농작물을 심고 꽃을 가꾸는 모습에서 부활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애지람에서 케어팜까지는 14km 떨어져 있다. 먼저 애지람에 들러 변중섭(빈첸시오) 사무국장으로부터 케어팜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다. 변중섭 국장의 설명을 1시간 정도 들으면서 케어팜으로 바로 가서 취재를 했다면 놓쳤을 중요한 사실들을 배울 수 있어 감사했다. 우선, 비장애인들이 부지불식간에 장애인들에게 갖는 편견이나 우월의식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보다 더 불행하거나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장애인들도 자신의 처지에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들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오만한 것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비장애인들로부터 돌봄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 변 국장이 보여 준 애지람의 조직도는 여느 기관과는 확연히 달랐다. 애지람을 대표하는 원장이 조직도의 제일 아래에 있었다. 다른 기관의 조직도를 거꾸로 해 놓은 모양이었다. 발달장애인 시설인 애지람에서는 그 안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이 주인이다. 그들의 권리가 실현되도록 일하는 원장부터 각 부서장과 직원들은 장애인들보다 낮은 곳에 있다. 이것은 지위의 상하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애지람을 운영하는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회 정신이기도 하고,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7면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교회

지난 3월 28일 저녁 어둠이 내린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일대에서는 ‘2025 주님을 위한 24시간’ 예식이 거행됐다. 특별히 이날 행사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지역조직위원회 주최·주관한 면에서, 청년대회를 준비하는 봉사자와 청년들이 주로 참가했다. 갑자기 추워진 꽃샘추위 에도 아랑곳없이,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청년들은 한명 한명 성전을 메웠다. 그리고 시린 야외에서 줄을 서서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청했다. 묵상과 침묵, 음악이 청년들 손에 어우러지고 다양한 방식의 고해성사와 전례가 만난 행사는 다양성, 자기표현, 공감, 진정성을 특성으로 하는 지금 청년들 가치관과 잘 맞았다는 생각이다. 2027 서울 WYD는 교회 청년 문제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부각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여러 자리에서 관련 문제들이 논의되고 청년 사목을 활성화할 방안이 보태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WYD는 교회 청년 문제를 한 번 더 짚어보는 것과 더불어 지금 청년들 신앙의 언어, 관계 방식에서 볼 때 교회가 머물 수 없는 구조와 방식을 지닌 것은 아닌지 살펴볼 기회일 것도 같다. 최근 10년간 가톨릭교회의 20~30대 신자 수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특히 여성 신자의 이탈이 뚜렷하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이런 숫자가 단순한 통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한 자료에서 2030 한국 청년의 키워드를 본 적이 있다. 설명, 경청, 나눔 중심이고 느슨한 소속감과 자율적 모임 등을 중시한다. 서울 WYD를 비롯한 청년 프로그램들이 이런 젊은이 특성과 감수성을 잘 반영하려면, 행사 참여 유도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청년들의 삶, 언어, 가치관 갈증에 더 깊이 연결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23면

팬데믹 이후, 다시 희망

3월 24일 저녁 서울 명동의 세종호텔 앞. ‘세종호텔 해고노동자와 함께하는 미사’가 봉헌되는 중에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다. 건너편 도로에 진입 차량의 고도를 제한하는 철제 구조물 꼭대기에 올라가 고공농성하는 해고노동자 고진수 씨였다. 고 씨는 호텔 내 일식집 주방장이었다고 한다. 2021년 호텔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경영난을 이유로 정리해고한 12명에 포함됐다. 고 씨를 비롯한 해고노동자들은 호텔 측이 특정 노조를 겨냥해 부당한 해고를 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호텔 경영이 팬데믹 이후 다시 흑자로 돌아선 지금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들을 복직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3년여 만에 국내외 여러 이슈들로 팬데믹은 어느새 기억에서 흐릿해져 갔지만, 팬데믹이 할퀴고 간 크고 작은 상처는 아직 우리 주변에 남아있다. 팬데믹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지금도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는지 여러 취재 현장에서 드러난다. 교회의 경우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파로 대면 만남이 불가해 각종 평신도 모임이 활력을 잃었었는데, 2025년 현재 “올해 모임은 팬데믹 이후 첫 대면 모임이다”라는 말을 아직도 듣게 된다. 심지어 팬데믹 이전에도 감소 추세였던 교회 내 청년 활동은 타격이 더욱 컸다. 하지만 그만큼 이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희망과 밝음도 찾을 수 있다. 팬데믹 이후 첫 모임을 열게 된 사목자, 참여하는 신자들의 표정에는 모두 기대와 기쁨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희망의 낯빛이 팬데믹으로 삶의 결정적인 것들을 잃은 많은 이의 얼굴에도 나타나기를 바란다. 추운 날씨에도 철제 구조물 꼭대기에 올라가야 했던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3면

나는 당신을 이해해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고 모든 인간의 난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해도, 그리스도교적 진리는 제게 큰 힘이 됐어요. ‘운’처럼 보이지만 그 이전에, 모든 것의 시작에 시작을 만든 ‘누군가’(하느님)가 존재한다면, 또 그의 행동 원리가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것이라면! 거기서 살짝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죠.” 성유빈 씨(에디트 슈타인·21·인천 마전동본당)가 바쁜 일상에서도 ‘청년, 희망의 현재진행형’ 기획 인터뷰에 선뜻 화답하고 들려준 말이다. 성 씨를 비롯한 청년들 모두 각자의 인터뷰에서 결이 같은 말을 해서 감동이었다. 개인 영성과 평안함 추구에서 기도가 그치는 이들과 달리, 부조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통찰하는 청년다운 순수함이 녹아 있었다. 그런 청년들이 과연 신을 거부하기에 종교를 떠나갈까. 취재하며 만난 청년들은 냉담 중이더라도 존재론적이었고 물질 너머의 가치를 좇았다. 독실한 집안 분위기에도 냉담 중인 현아(가명·30·안젤라) 씨는 착취적 가축 산업에 반대해 채식주의자가 됐고 피혁 제품도 쓰지 않는다. “인간은 착취자가 아니다”라며 제로웨이스트도 실천한다. “그럼에도 신앙을 느낀 적 없다”는 현아 씨는 “나처럼 스스로 떠나온 부류에게는 교회에도 천국에도 나를 위한 공간이 없을 줄을 안다”며 적적하게 웃었다. 그런 청년들에게 “늦기 전에 회개하시오”라는 말만큼 폭력적인 게 있을까. 그때 내가 주변 신부님께 받았던 위로가 기억났다. 큰 상처에 대해 털어놓은 어느 날, 신부님은 “하느님은 오로지 공감하시는 분”이라며 단죄는커녕 포옹해 주셨다. 그래서 내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현아 씨, 우리는 같아요. 당신을 이해해요.”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3면

성령 안에서의 재회를 기다리며

경북 청송군 경북북부제1교도소 교육관에서 진행된 교정 사목 현장 취재는 교도소 관계자분들과 사단법인 꿈나눔 재단, 수용자분들의 큰 협조로 이뤄졌다. 소공동체 모임 후 개별 인터뷰 시간, 방문 전 미리 전달해드렸던 질문에 한 분씩 다가오셔서 건넨 답변지에는 손 글씨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컴퓨터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감 27년째라는 한 수용자는 “사회에 있을 때 자장면이 2000원 정도 했던 것 같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새삼 이곳이 사회와 동떨어진 곳임을 느꼈다. 얼마 전 기자가 보도한 꿈나눔 재단의 ‘네팔바람부 폴 직업기술학교’ 설립 기사 얘기가 나왔다. “기사 잘 읽었다. 스크랩해서 붙여놨다”는 수용자분의 말에 가톨릭신문을 교정 시설에 후원하는 분들께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마무리하려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꿈나눔 재단 신원건 이사장은 자신이 끼고 있던 묵주 팔찌를 빼서 오늘 모임에 새로 온 수용자분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동행한 꿈나눔 재단 후원자 김미자 씨도 팔에서 묵주 팔찌를 뺐다. 생각해 보니 내 팔목에도 언젠가 한 교구 주교님께 받은 묵주 팔찌가 걸려있었다. 신기하게도 세 명 모두 비슷한 나무 묵주 팔찌였다. “제 것은 주교님께 받은 묵주 팔찌에요.” “아이구야, 오늘 새로 온 함영(가명) 씨가 주교님 것으로 가져요.” 주교님께 받았다고 해서 더 효험(?)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예비신자가 됐다는 두 분께도 묵주 팔찌를 드리고 인사를 나눴다. 기도 안에서, 또 교회와 세상에서 성령과 함께 다시 만날 것을 기다리며.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3면

교회가 기억해야 하는 것

3월 1일, 서울 광화문광장은 인파로 북적였다. 두 진영 모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었지만 한쪽에선 대통령의 탄핵을, 다른 한쪽에서는 탄핵 기각을 외치고 있었다. 106년 전 일본에게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벌였던 만세 운동을 기념하는 2025년 3월 1일, 대한민국은 독립의 기쁨을 기억하는 것이 무색할 만큼 둘로 쪼개져 있었다. ‘하나된 대한민국’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현장에서 일본으로부터 고통받은 이들을 기억하는 미사가 봉헌됐다. 9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남·녀 장상연합회 등이 포함된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천주교 전국행동이 주관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미사’였다. 미사에 참례한 이들은 50명 남짓. 광화문광장의 거대한 인파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인원이지만 이들이 함께한 기도는 큰 울림을 남겼다. 힘없는 소녀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희생된 것은 역사 안에 살아있지만 피해 할머니들은 “돈을 벌러 자진해서 간 것”이라거나 “돈을 더 받아내고자 대중 앞에 나오는 것”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같은 민족으로부터 들어야 했다. 나라가 지켜주지 못한 누군가의 인권을 기억하는 이날 미사는 광화문광장에 끝없이 수놓인 태극기와 겹쳐 아픔과 상처를 남겼다. 교회는 이처럼 정부가 외면한 작고 힘없는 이들의 인권을 되찾고자 30여 년째 기도로 힘을 모으고 있다. 미사를 집전한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하성용(유스티노) 신부는 “이 문제는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이고 사람의 도리에 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더 이상 힘에 의해 인권이 무시당하고 도리를 해치는 일이 없기를 이번 미사를 통해 바란다.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23면

채식과 금육 사이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첫 문장이다. 소설에서처럼 우리 사회에는 아직 ‘채식주의자’라 하면 ‘별나다’라는 시선이 남아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에 채식을 하는 인구가 250만 명에 달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채식을 낯설게 여기는 이들도 많다. 그런 ‘특별한 사람’들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우리 신앙선조들이다. 성지를, 교회사를 취재하다보면 ‘채식’에 관련된 신앙선조들의 일화를 많이 접할 수 있다. 신앙선조들은 특정 시기, 특히 사순 시기가 되면 채식주의자로 변모했다. 거기에 단식도 곁들였다. 신자들의 채식은 비신자들, 박해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신유박해 당시 충주목사 이가환은 신자들을 체포하려고 선비들을 초대해 고기를 대접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해자들은 채식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인 줄을 알았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면서 채식을 했기 때문이다. 그 별난 채식을 우리는 ‘금육’, 소재(小齋)라 한다. 금육도 채식도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행위는 같다. 세상이 ‘별나다’고 여기는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금육과 채식은 다르다. 우리의 금육은 그저 건강이나 동물권이나 환경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우리의 금육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행위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후 첫 미사 강론에서 말했듯 “예수를 증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가 아니라 동정심 많은 비정부기구(NGO)에 불과하다.” 이번 사순 시기, 우리 신앙은 채식과 금육 사이 어디쯤 서 있을까? 아니면 혹시 어디에도 서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성찰의 시간을 보내야겠다.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23면

공소 신자들에게 배우는 점

원주교구 공소사목협의회 2025년 정기총회가 배론성지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에서 2월 20일 오후 2시 시작해 다음날 오후 1시경 끝났다. 1박2일 일정이지만 시간으로 치면 만 하루 동안 진행된 자리였다. 첫날 취재를 하면서 기자에게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 공소사목협의회 박종섭(힐라리오) 회장이 공소별로 참석자를 소개하는 순서였다. 원주교구 36개 공소 명칭을 하나하나 부르며 참석 인원 수를 말했다. 공소 명칭을 부르긴 했지만 “참석 못하셨습니다”라고 말한 곳도 10여 군데나 됐다. 공소 신자들 대다수가 60대 이상 고령층이다 보니 정기총회 장소까지 차를 운전할 사람이 없으면 오고 싶어도 못 오는 사례가 많았다. 공소 신자들 중에는 동해안 지역에서 버스와 기차를 몇 번씩 갈아타고 배론성지까지 온 분들도 계셨다. 대도시에 거주하며 집에서 가까운 본당에 다니고 있는 신자들은 공소라는 말만 들어 보았을 뿐 공소의 실재 존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듯하다. 공소 신자들은 대도시 본당 신자들에 비하면 외형적으로 아주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사제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도 한 주일 혹은 두 주일에 한 번 미사 봉헌하는 때가 거의 전부다. 기자는 원주교구 공소사목협의회 2025년 정기총회 자리에서 비록 짧은 시간 동안 공소 신자들과 대화를 나눴지만 그분들에게서 한국천주교회 신앙의 원류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한국천주교회 역사의 뿌리와 전통을 찾아가다 보면 공소가 등장한다. 공소는 과거에 비해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한국천주교회의 커다란 자산이고 신앙의 모범을 제시한다는 것을 배웠다.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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