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과 사랑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커플이 늘어나고 연상연하 커플도 늘어나는 추세다. 또한 이들의 나이 차는 열 살을 넘어 스무 살 이상인 경우도 있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인식도 변화하고 있고 나이로 인한 현실의 장벽은 낮아진다. 두 사람이 사랑을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다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대상이 아동, 청소년, 성인과의 사랑이라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남성 중심 성문화에서 나이 어린 여성들은 가치 있고 예쁘다고 해석되거나, 좀 더 어린 여성들과 연애하거나 결혼하는 남성들은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유엔에서는 여성차별철폐조약에 따라 가입국의 경우 아동결혼을 금지하고 있지만 가난한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전히 조혼이 관습으로 남아 있다. 부모들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여아들을 중년 또는 노년의 남성과 결혼시킨다. 여아들의 인권유린적 현실과 더불어 부모들의 태도는 공분을 자아낸다. 하지만 딸을 학교에 보내지도 못하고 여성에게 정숙함을 요구하는 보수적인 성규범과 함께 가난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현실을 개인의 무지라고만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아들은 신체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원하지 않은 결혼을 하고 임신, 출산을 하면서 건강이 악화하거나 사망하기도 한다. 또한 이들의 결혼생활은 존중받지 못하고 경제적, 연령의 우위에 있는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거나 불평등한 관계에서 상처받기 쉽다. 영화 ‘프리실라’(소피아 코폴라 감독, 2024)는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와 아내이자 유일한 사랑이라는 프리실라와의 관계를 다뤘다. 이 영화는 극 영화이지만 그녀의 자전적 에세이를 참조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프리실라는 중학생 때에 팬으로서 엘비스를 만났다. 그녀의 첫사랑은 결혼으로 맺어졌지만 이들의 관계는 낭만적이지 못하다. 친구들이 학업에 몰두하고 꿈을 갖고 친구들과 학창시절을 보낼 때, 그녀는 우상이었던 엘비스의 구애를 받았고 그를 사랑한다고 믿고 결혼한다. 하지만 결혼 이후 그녀는 남편의 외도와 폭력, 거짓말로 상처받고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곁을 떠난다. 이러한 선택이 쉽지 않은 것은 그녀의 사랑이 그루밍 성폭력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루밍 성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하면서 길들이고 무력화시키고 지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폭력은 존경과 신뢰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즉, 연령, 경제적, 지적으로 취약한 아동, 청소년과 심리적 유대를 형성한 후 성적 가해를 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이를 폭력으로 인지하기는커녕 벗어나기도 어렵다. 그루밍 성폭력은 교사와 학생, 성직자와 신자,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디지털 공간에서 성인 남성과 아동, 여성 청소년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성폭력은 오프라인으로 연동되며 심각한 피해를 낳고 있다. 여성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은 성인 남성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해석하면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어린 여성들을 선호하고 이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는 여성 청소년의 성적 피해와 고통을 간과해 왔다. N번방 사건 이후 여성 청소년의 위치를 고려해 만 13세 이상 16세 미만 청소년과 성인의 성관계를 처벌하는 규정이 마련됐다.(‘청소년성보호법’ 8조 2항 참조) 그러나 남성 중심 성문화에서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여성 청소년이 성폭력에 취약한 구조를 인식하고 이들의 고통과 피해를 예방,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들의 인권이 우선시돼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법적 처벌을 넘어서서 여성 청소년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거래하는 남성 중심 성문화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요구된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2024-07-28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

교회가 요한 세례자 성인의 탄생을 축하하던 지난 6월 24일, 경기도 화성시 한 공장에서는 참담한 죽음이 발생했다. 일차 리튬 전지 업체인 아리셀에서 이주노동자 18명을 포함 23명이 사망하는 중대재해 화재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정직원이 아닌 인력 파견 업체 소속이었기에 제대로 된 안전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위험한 유해물질을 다루는 공장이고 이번 참사 며칠 전에도 화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안전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인 17명, 한국인 5명, 라오스인 1명이 화마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화재 사고 열흘 뒤인 지난 7월 2일 오후 7시,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행동이 열렸다. 추모행동 소식을 듣고 교구 이주민, 난민 활동가들과 함께 그 행사에 함께하기로 했다. 행사 장소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현수막 속 글귀였다.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는 안전하게 일하고 싶다!”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는 그말이 마음에 박혔다. 그들 모두 좀 더 나은 여건에서 가족들과 함께 할 날만을 위해 낯선 이곳에 온 것인데, 누군가의 무성의와 부주의와 안일함 때문에 이제는 영영 가족과 함께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 경위나 책임 소재를 밝히는 일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참사 전에 일어났던 화재 때 제대로 된 안전 대책만 마련했다면, 아니, 노동자들에게 비상 탈출구 위치 및 탈출 방법 교육만 제대로 했더라면 스무 명이 넘는 귀한 생명이 사라지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뒤늦은 후회로 마음을 채울 뿐이었다. 이런 유의 비극이 처음은 아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 김군 사망사고(2016년),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씨 사망사고(2018년), 평택항 이선호씨 사망사고(2021년) 등 몇 년마다 비극이 반복돼 일어나고 있다. 특히 김용균씨 사고를 계기로, 과도한 하청 및 재하청으로 제대로 된 교육이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성하는 분위기가 생겨나면서 ‘죽음의 외주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고, 결국 ‘김용균 법’으로도 불리는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 법을 적용한 첫 판결 결과가 집행유예로 나오면서 실효성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고 현 정권에서는 이 법이 기업의 사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개정할 뜻을 비추기도 하는 등,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번 참사는 이제 죽음이 외주화를 넘어 ‘이주화’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중국 국적 희생자 17명 중 대다수는 흔히 조선족이라 불리는 중국동포 여성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재외동포 신분이기에 엄밀히 말해 이주민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대한민국이 아닌 국가 출신으로 대한민국 국적자들이 기피하는 업종에 외주 인력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상황이 타 국적의 이주민들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외려 언어 장벽이 없기 때문에 소위 ‘가성비 좋은 이주노동자’로 취급되고 있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전체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는 총 812명이며, 그중 이주노동자는 85명으로 10.4%에 달했다. 올해 1분기 기준 이주노동자의 산재 사망자 비율은 11.2%(213명 중 24명)로 벌써 지난해 비율을 넘어섰다. 지난해 이주노동자 수가 총 92만3000명으로 전체 취업자 수(2841만6000명)의 3.2%를 넘겨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는 통계청의 발표를 고려할 때, 이런 유의 참사가 반복될 경우 희생되는 이주민의 수는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는 그들의 외침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

2024-07-21

고통이 무엇이지?

한 수도자는 몸의 이상으로 몇 년째 요양 중이고, 한 사제는 치통을 심하게 앓고 있다. 한 자매는 석화된 쓸개 제거 후 회복기에 있고, 한 형제는 척추가 휘어서 치료 중이다. 이들을 동반하는 의사들은 의과대학 정원과 관련해 정부와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는데,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한스 가다머는 1900년에 독일에서 나서 2002년에 죽은 철학자다. 그는 100세 때 하이델베르크 의대에서 ‘고통’을 주제로 발표했다. 가다머는 4살 때 여읜 어머니 요한나의 예술적 열정과 종교적 연대를 물려받았는데, 화학자이자 약학자였던 그의 부친 요한네스 가다머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61세에 폐암으로 죽기 직전, 22세 어린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고 하이데거를 스승으로 택해 교수자격 과정에 있던 아들을 염려했다. 그는 자기가 입원한 병원으로 하이데거를 오게 해서 물었다. “그 애가 이런 공부를 해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이데거는 답했다. “당신의 아들은 매우 탁월하며··· 그는 벌써 교수자격 과정에 들어가기 위한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철학이 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기지 않은 그의 부친은 하이데거가 떠나기 직전에 다시 물었다. “당신은 진실로 철학이 삶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충분하다고 믿습니까?” 하지만 가다머는 그의 부친이 택한 자연과학 세계와는 다른 철학계에서 예술적 감수성을 통합해 열어 간 해석학의 대가로서 수많은 사람에게 삶의 지혜와 충만을 매개했다. 1960년에 낸 「진리와 방법」은 존재 기반 해석학의 지평을 연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가다머가 100세에 이르러 신체적 ‘고통’과 관련해 의학자들 앞에서 말했다. “고통은 내게 나타나서 나를 덮치는 그러한 감정으로 우선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항상 이겨내야 하는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그 어떤 것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마침내 우리에게 부과된 그 어떤 것을 해결하기 위한 아마도 아주 대단한 기회다. 인생의 가장 고유한 차원은 자신이 극복하지 못한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예감될 수 있다.” 이어서 그는 현대 의학이 주기 어려운, 고통 과정이 주는 명약에 관해 말한다. “여기서 또한 나는 기술시대의 가장 위험한 것을 본다. 즉, 기술은 우리의 힘을 과소평가해서 우리가 더 이상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반해 잘 해내서 이겨냈다는 기쁨, 그리고 결국 다시 건강한 느낌을 갖게 됐다는 기쁨이 있다. 잘 이겨내서 깨어 있고, 그 깨어 있음에 몰두했다는 기쁨은 자연이 우리의 손에 쥐여 준 가장 훌륭한 약품이다.”(「가다머 고통에 대해 말하다」, 공병혜 역, 현문사, 2019, 33쪽) 이 기술시대에 의학계는 우리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고통을 경감시키거나 없애는 데 주력하는 면이 있다. 이것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그 엄청난 능력을 완전히 발휘해 다시 건강한 느낌을 갖게 되는 기쁨, 곧 ‘자연이 우리의 손에 쥐여 준 가장 훌륭한 약품’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술 지배 패러다임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서 우리를 고립시키고 온 세상이 하나의 ‘접촉 지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한다”(「하느님을 찬미하여라」 66항)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 가다머에게 고통은 자기가 자기를 살 수 있는 기회다. 고통은 삶을 건강하게 하는, ‘할 수 있다’는 생동감과 자신의 고유한 성취 능력을 다시 경험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고,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엄청난 힘들을 의식화하여 고통을 넘어 성취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동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가다머 고통에 대해 말하다」 40쪽)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

2024-07-14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들

얼마 전 지역 내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는, 부적응 청소년을 만났다. 현재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에 관한 공식적인 자료는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은둔형 외톨이가 10만 명에 이른다는 KBS의 보도가 있었으며, 실제 학업중단 청소년의 15% 정도가 은둔형 외톨이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은둔 유경험자 중에서 약 40%가 ‘청소년기’에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는 수치를 통해(광주광역시, 2020) 잠재적인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은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우리 주변에도 일상생활에서 의욕을 잃거나 때로는 사회생활을 단념한 학생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청소년 중에서도 실제 위기 상황처럼 보이지 않았음에도 개인 상담 등을 통해 다양한 어려움(학교 폭력, 따돌림, 보호체계의 이상 및 부재 등)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은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기피 현상을 보이며, 심할 경우 연락이 두절되거나 회피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분명한 이유 없이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타인과 대화도 꺼리며, 인간관계는 점점 줄어들고 이것이 반복되면 결국은 학업중단이나, 고립을 선택하는 등의 단계까지 이른다. 청소년기가 성인기에 요구되는 다양한 관계훈련을 하는 시기인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세상, 그리고 나를 마주하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이들이다. 그래서 은둔형 외톨이들에 대한 지원이 간절하다. 보건복지부가 고립·은둔 청년 88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실태 조사 내용 중 유의미한 것은 고립·은둔 청년 및 청소년 대다수는 ‘탈고립’ 의사를 뚜렷하게 드러냈으며, 적극적인 탈고립 시도를 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탈고립 시도 이후 다시 고립되는 비율은 45.6%다. 그 이유는 ‘돈과 시간이 부족해서’, ‘힘들고 지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가 가장 많았으며, 탈고립을 시도하지 않은 응답자 중에서는 ‘정보가 없어서’의 이유가 가장 많았다. 청소년기는 아동기 부모와의 의존관계에서 벗어나 보다 동등하고 상호적인 친구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을 배우는 시기다. 특히 다양한 측면에서, 급격하게 많은 변화를 겪으며 성장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당면하는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절한 도움이 필요하다. 따라서 청소년기의 또래 관계와 사회적 관계, 경험은 앞으로 건전한 성인으로 성장하여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은둔형 외톨이의 징후를 보이는 청소년을 초기에 발굴 및 개입했을 때 은둔의 장기화를 막고 성공적인 사회 복귀가 가능하지 않을까? 다행인 것은, 최근 정부는 위기 청소년 지원사업의 대상에 은둔형 청소년을 지원하는 내용으로 청소년복지 지원법 시행령을 개정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결심을 하고 나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클 것이다. 이와 같은 불안감을 긍정적인 경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안전한 지지체계와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 프로그램은 가장 필요하다. 은둔형 외톨이의 발생은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기 어려운 사회적, 환경적 원인에 의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은둔 생활을 하는 이들, 은둔으로 연결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한 이들을 조기에 발견해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과 사회의 의무일 것이다. 우리 주위를 살펴 혹시라도 가까이에 있는 은둔 청소년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 되겠다.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2024-07-07

노년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노년의 모습은 질병과 장애, 노인돌봄과 연관돼 암울하게 느껴지므로 상상을 꺼리게 된다. 세대 갈등과 노인혐오 범죄가 증가한 고령사회 배경의 일본 영화 ‘플랜 75’(2024)에서 정부는 7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안락사 신청을 받는다. 노인들에게 죽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마지막 삶을 즐길 수 있도록 위로금과 상담까지 제공한다. 가난한 노인들은 건강이 악화되고 노동의 기회가 적고 사는 것이 힘들다며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삶의 질을 언급하며 안락사를 권유했던 정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비용을 절약하고자 시체 유기 등을 자행한다. 상상에 기초하지만 고령사회에서 있을 법한 공포스러운 상황을 재현했다. 현실 고령사회에서도 죽음과 노인돌봄은 삶과 분리되고 비가시화돼 있다. 한국 사회에서 노인요양보험제도가 실시되고 노인들은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지만 가족, 특히 자녀들은 노인돌봄의 일차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건강하게 장수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노인도 많지만, 만성질환에 시달리거나 치매나 와병 상태로 노년을 보내기도 한다. 자율성과 독립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액티브 에이징(Active Ageing)은 더욱 부각되지만, 나이 듦의 흔적을 지우는 노년의 삶은 젊음의 모방이나 연장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럼에도 미디어에서는 다양한 노년의 삶을 재현한다. ‘꽃보다 할배’ 시리즈는 경험과 연륜을 가진 멋진 노인 남성 배우들이 등장해 젊은이들에게 조언함으로써 노년 역할 모델을 제시했다. 드라마에서 젊은 주인공의 조부모로 나오던 배우들이 영향력과 카리스마 있는 조연·주연을 맡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남성들은 젊은 세대에게 선배로서 좀 더 다양한 노년 역할 모델을 제공하는 반면, 여성들은 할머니, 모성의 전형으로 따뜻하고 푸근한 정서적 측면이 강조되거나 고운 할머니로 한정된 역할 모델을 보여 준다. 이러한 역할 모델은 남성보다 다원적이지 않기에, 여성들이 자신의 노년 역할 모델을 선배 여성들에게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고령사회에서 노인 여성의 역할 모델은 다양하게 제시된다. 나쁜 시어머니나 자상한 친정 엄마 등으로 재현돼 왔지만 노년에도 활동하며 다양한 모습의 할머니, 공적 역할로 재현되는 노인 여성 배우들이 있다. 노인 여성 유튜버 크리에이터들이 인기를 얻고 젊은 여성들과 소통하면서 역할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배우 윤여정은 미국 오스카상 여우조연상이라는 수상의 명예와 함께 노년의 역할 모델로 손꼽힌다. 그는 한동안 주목받지 못한 배우였지만 성실하게 연기를 해왔다. 영어를 잘하고 젊은 감각을 지니고 소통의 기술을 발휘한다는 평가도 받는다. 배우 나문희와 김영옥은 오랜 연기 경력을 기초로 TV와 영화, 연극 등 활발한 연기 활동을 하고 연예·오락 프로그램에도 도전하고 있다. 그들은 할머니 역할을 주로 해 왔지만 획일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위로와 치유, 도전의 아이콘이 된다. 여성의 인물사를 기록하거나 노인 여성의 삶을 살펴보는 것도 노인 여성의 역할 모델을 창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2024)는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일하는 한국 최초의 여성 조경가 정영선의 삶을 담아낸다. 그는 자신을 자연과의 중개자라 생각하며 삭막한 도시 환경에 치유와 사색의 공간을 구성하고 후손에게 물려줄 생태적 환경을 조성하고자 헌신해 왔다. 다큐멘터리 ‘물꽃의 전설’(2023)에는 젊은 해녀에게 자신의 물질 노하우를 가르치는 노년 해녀 현순직이 등장한다. 노년은 느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도 질병과 장애를 수용하고 노인돌봄, 의료결정, 죽음 등을 준비하는 단계다. 가톨릭신자로서 노년 역할 모델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다양한 역할 모델을 통해 노년을 설계한다면 노년은 가지 않은 미지의 길이면서도 즐거운 도전이 될 것이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2024-06-30

존재는 불법일 수 없다

올해 초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2023 인권의식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본인의 인권이 존중된다는 응답이 2019년 이후 증가세에서 처음으로 전년 대비 1.9%p 감소한 86.5%를 기록했다. 사회 전반의 인권이 존중받는다는 응답은 2021년 이래로 계속 감소세를 보이며 71.0%로 나타났고, 사회적 약자, 소수자에 대한 인권이 존중되고 있다는 응답 또한 작년 대비 감소한 50.3%에 그쳤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 집단을 세분해 인권이 존중되고 있는지 조사한 결과는 여성 인권이 81.2%로 가장 높았고, 이주민 인권이 36.7%로 가장 낮았다. 특히나 혐오 표현의 대상으로 이주민이 14.9%, 난민이 7.3%를 자치하고 있는데, 난민은 다행스럽게도 작년 대비 3.6%p 감소했지만, 이주민은 작년과 거의 동일한 수치로 나타났다. 여성(31.2%), 장애인(27.6%), 노인(22.2%)에 비하면 이주민과 난민이 혐오 표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적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주민 인권 존중이 가장 낮게 나타난 조사 결과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관심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혐오 표현은 이주민과 난민이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부당한 판단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이주민과 난민의 피부색, 국적, 외모 등을 가지고 그들을 깎아내리는 식의 표현이 주를 이룬다. 또한 그들에 대한 차별, 심지어는 폭력까지 조장하며 혐오 표현을 쏟아내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 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에서는 2018년부터 ‘혐오의 말을 잠재워라!’(Silence Hate) 프로젝트를 펼치며 교육과 토론을 통해 혐오 표현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해 오던 용어가 차별과 배제를 담기 시작하면서 혐오 표현으로 변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용어가 ‘다문화’다. 다문화 가정은 ‘서로 다른 국적‧인종이나 문화를 지닌 사람들로 이뤄진 가정’을 지칭하는데, 한국사회에서는 국제결혼으로 한정해 결혼이주민과 한국인으로 구성된 가정을 일컫는 말로 흔히 사용돼 왔다. 하지만 다문화 가정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에도 우리 사회의 이주민 수용 역량이 강화되지 못하다 보니 이 표현이 그들을 차별하고 심지어는 혐오하는 표현으로 전락했다는 것이 당사자들의 호소이기도 하다. 차별과 배제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용어는 ‘불법체류자’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불법체류는 ‘정식 절차를 밟지 않거나, 기한을 어기면서 다른 나라에 머무르는 일’이다. 합법적 체류 자격을 얻지 못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합법의 반의어인 불법을 사용하는 것이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불법체류와 불법체류자는 완전히 다른 맥락을 지닌다. 전자는 체류 자격의 합법, 불법 여부를 가리는 말이지만 후자는 한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불법으로 전락시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이런 맥락을 지적하며 지난 2018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용례를 따라 ‘불법체류자’(illegal immigrant)라는 용어를 ‘미등록 이주민’(undocumented immigrant)으로 변경할 것을 권고한 바 있으며, 현재 이주민, 난민 관련 활동가들 역시 미등록 이주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과 비슷하게 당신 모습으로 만들어 내셨다고 믿어 고백하며(창세 1,26 참조), 모든 인간 존재가 존엄하다고 선포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눈에 ‘존재는 불법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문 기사와 뉴스 영상에서 불법체류자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이 말을 비롯한 차별과 배제의 혐오 표현을 지양하고 인간 존재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

2024-06-23

내가 기후

6월 5일 환경의 날을 지냈는데, 우리는 지구 안에서 지구와 함께 지구를 통해서 산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후 안에서 기후와 함께 기후를 통해 산다. 생태적 진리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흙과 물과 빛과 바람, 지수광풍(地水光風)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는 물론 모든 생명체가 생존할 수 없다. 이 지수광풍이 서로 작용해 발생하는 기후는 지구 현상으로서, 우리의 존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기후를 떠나서는, 곧 기후 밖에서는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후가 변하고 기후위기가 발생하고 이상기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변하고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기상청이 2024년 4월에 발표한 「2023년 이상기후 보고서」에 의하면, 2023년 장마철에 남부 지방에 내린 강수량이 712.3mm였다. 이 지역에서 내린 연간 강수량을 측정한 이래 가장 많은 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내리기 전에 남부 지방은 2022년부터 227.3일간, 광주·전남 지역은 281.3일간 극심한 가뭄이 발생했다. 남부 지역의 가뭄은 우리나라에서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오래 지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 우리나라 전국 평균기온이 3월에 9.4℃였고, 9월에는 22.6℃였다. 이 기록은 1973년 이후 모두 가장 높은 것이었다. 9월에도 한여름 무더위가 계속돼서 열대야 현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다. 온열질환자 2818명이 발생했는데, 2022년 1564명에 비해 환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2월 평균기온은 평년 기준 1.6℃ 높았고, 3~4월 평균기온은 2.4℃ 높았다. 11월에 하루 평균기온이 가장 높았던 날과 가장 낮았던 날의 기온 차는 19.8℃(5일 18.6℃, 30일 -1.2℃), 12월에는 20.6℃(9일 12.4℃, 22일 -8.2℃)로 나타나면서, 1973년 이후 기온 차가 가장 큰 것으로 기록됐다. 기상청은 우리나라에서 자주 발생하지 않는 극단적인 기온 상태, 곧 ‘이상기후’ 상황이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이같은 이상기후 현상은 필연적으로 개화 시기를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최초로 식물 계절 관측을 시작한 홍릉 시험림 내 66종의 평균 개화 시기가 50년 전(1968~1975년)에 비해 14일, 2017년 대비 8일 빨라졌고, 모감주나무, 가침박달, 회양목 등의 개화 시기는 20일 이상 빨라졌다. 2023년 김장철에 배추 가격이, 올해에는 사과, 배, 귤, 파 등 과일값과 채소값이 급격하게 올랐는데, 이상기후가 그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아마존과 미국과 유럽 등 지구 전역에서 기후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2040년에는 전지구의 60% 이상 지역에서 이같은 열대화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기후를 우리 밖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생각한다. 기후변화와 기후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면서 그 방법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기후와 자기를 구분해서 접근하고는 한다. 하지만 창세기 2장 4-7절이 증거하듯, 우리가 신토불이(身土不二)고 그러므로 ‘내가 지구’인 것이 생태 창조 신학적 진리라면, 내가 기후다. 실제로 기후가 다르면 사람의 피부색부터 시작해서 생활 방식도 성격도 사고방식도 다르게 나타나지 않는가. 이웃 나라 도시 중국 베이징은 2023년 여름 51°C에 달하는 초고온 사태를 겪었다. 우리나라에서 51°C까지 올라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지진(地震)은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는 사태라면, 이상기후는 하늘의 균형이 깨져서 하늘과 하늘 아래 모든 생명체들을 덮치는 ‘천진'(天震)과도 같은 파국적 현상이다. 이것은 자기의 존재가 깨져서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우리는 이 이상기후, 이 기후위기가 자기에게 그리고 우리 뒤에 오는 세대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사는가? 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

2024-06-16

인사합시다

얼마 전 해외 방문 중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아이스크림 상점에 들렀다. 잠시 후 모든 직원들이 일을 멈추고 “어서오십시오, 저희는 손님을 위해 맛있는 아이스크림 제공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세 번을 외치더니 다시 일을 시작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기분이 좋았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도 좋아 보였다. 보아하니 2시간마다 전 직원들이 가게를 찾는 손님들을 위한 인사 서비스였다. 지나치듯이 내뱉는 성의 없는 인사가 아닌 진심을 다하는 직원들의 인사 외침 소리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왜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아이스크림을 사려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인사는 모든 순간을 기분 좋게 만드는 특효약인 것이다. 요즈음은, 학교에서도, 지자체에서도, 복지관련 분야에서도 인사 캠페인이 한창이다. 경기도 화성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학부모들과 학생자치회 학생들이 미리 교문에 나와 등교하는 학생들과 하이파이브, 손하트 인사, 주먹 인사 등으로 즐겁게 아이들을 맞이하는 ‘웃으면서 인사해요’ 아침 맞이 캠페인을 하면서 학생들이 즐겁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한다. 동작동 복지시설에서는 지역주민 간 관계를 향상하고 어르신이 살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자 “내가 먼저 인사해요, 안녕하세요!” 캠페인을 진행했다. 경남 남해군에서도 만나는 이들과 소통하고 상호 존중하는 공동체를 위한 준비로 인사 나누기 캠페인을 했다. 이런 캠페인으로 무엇이 달라질 수 있겠냐고 하겠지만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단 1명이라도 먼저 인사를 건네준다면 지역 사회를 바꾸는 초석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23」에 따르면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은 3년째 제자리걸음이며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주일미사를 참례하던 신자 25%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통계가 나왔다.(가톨릭신문 2024년 5월 5일자 참조) 이에 따르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자 비율이 늘지도 않았지만 줄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통계가 암시해 주듯이 예비 신자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면서 이 귀한 분들을 모셔 오기 위해 본당은 애를 쓰고 있다. 얼마 전 서울 도림동본당에서 예비 신자를 모시기 위해 본당 사제와 전 신자들이 가두선교를 위한 준비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 사례를 접하면서 새 신자를 모셔 오는데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지금이 우리 교회의 현실이란 것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교회도 신자들의 노력으로 모셔온 예비 신자들을 맞이하는 준비로 따뜻한 인사 나누기 운동을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부터 먼저 내가 잘 모르는 신자들과 인사 나누기를 실천하고 예비 신자들이 성당에 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친절하고 반갑게 맞이하는가? 따뜻한 인사로 그들을 알아봐 주는가? 어색해하고, 쭈뼛거리는 그들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는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사는 서로를 알아봐 주는 첫걸음이다. 따뜻함이 머금은 얼굴로 “안녕하세요! 찬미 예수님” 이 한마디가 사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본당 내 신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여 성당에 가는 발걸음을 신명나게 하고 본당 신자들의 형제자매 이웃의 체감도를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사 전과 후에 내가 아직 모르는 신자들에게 반갑게 인사 나누는 운동을 통해 성당을 웃음이 피어나는 신앙 공동체로 바꾸고 약자들이 편함을 느낄 수 있는, 누구나 환영하고, 모두가 환영받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시대의 부름이기 때문이다. 어색한 형제, 자매에게 인사를 나눕시다.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인사를 잘하면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2024-06-09

친밀한 관계와 폭력

연애에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존중과 배려에 대한 해석은 자의적일 수 있다. ‘사랑싸움’이라는 이름하에 제3자의 개입을 꺼리는 데이트폭력, 이별폭력은 사회적 쟁점이 됐고 그 범죄의 잔인함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신문 사회면에 오르내리는 충격에 비해 제도적 차원에서 예방과 대책은 충분하지 않다. 몇몇 사람은 피해자들에게 사람 보는 안목이 없거나, 폭력을 당하면서도 관계를 끊지 못한 우유부단함을 비난한다.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그런 일을 당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장담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은 폭력 피해를 개인의 탓으로 해석하고 성별 권력이나 구조적,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2023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에 따르면 2021년 여성가족부 산하 상담소에 접수된 데이트폭력 상담은 1만7137건, 스토킹 상담은 5454건에 이른다. 데이트폭력에서 남성 가해자는 2021년 1만975명, 스토킹으로 검거된 남성 가해자는 462명이다. 데이트폭력과 스토킹 피해자 대다수가 여성임을 보여준다. 젠더 폭력은 성별 권력의 불균형한 구조 속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남성의 소유나 정복의 대상으로 해석하는 문화와 연관된다. 데이트폭력의 가해자들은 폭력을 인지하지 못하고 ‘사랑해서 그랬다’고 말한다. 이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피해자에게 상처를 준다. 이러한 행동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거나 희생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별폭력 피해자들은 이별 이후가 아니라 데이트 과정에서 크고 작은 피해를 경험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족들까지 고통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 이별하지 못하거나 안전한 이별의 방법을 고민한다. 이별폭력은 ‘만나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하거나 집 앞에서 기다리는 등 스토킹과 맞물려 상대방을 괴롭힌다. 스토킹은 헤어진 연인 사이뿐 아니라 사귀지 않은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또 스토킹이 신체적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피해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느낌은 불안과 공포를 초래하고 삶을 억압·파괴한다. 스토킹은 벌금형이라는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가해자의 재범을 초래했고 피해자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스토킹범죄처벌법’의 제정으로 징역형 처벌이 가능해졌지만, 데이트폭력으로 고통받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으므로 교육과 캠페인을 통한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 로빈 스턴(Robin Stern)은 저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2018)에서 가스라이팅 가해자의 심리를 분석한다. 스턴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친밀한 관계에서 정서적으로 상대방을 감시·통제·조종하려는 행위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의 현실감과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들면서 자신에게 의존하게 한다. 연애에서 가스라이팅은 파트너의 옷차림이나 일정을 간섭하고 일을 못 하게 하거나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몰래 확인하는 행위다. 또한 피해자가 다른 사람들을 못 만나게 하거나 욕하고 비난한다.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의심하지 못하고 낮은 자아존중감과 우울증, 무력감을 경험한다. 그들이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려면 가해자의 행위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별 이후에도 자기 삶이 지속될 수 있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또 혼자 고민하지 말고 가족, 지인, 경찰, 젠더 폭력 상담소에 도움을 청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인격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연애 윤리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고 상담을 통해 피해자 구조와 치유를 도와야 한다. 가스라이팅은 부부,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직장 선후배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몰지각한 소수의 문제가 아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상처받기 쉽다는 인식 위에 상대방의 독립과 자유를 존중할 때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2024-06-02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의정부교구 주교좌성당 한편에는 작은 갤러리가 있다. 이름은 ‘갤러리 평화’. 건물 외벽에는 ‘평화’를 뜻하는 단어들이 여러 나라말로 적혀 있다. 가장 크게 보이는 건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שְׁלָם)와 그리스어(εἰρήνη)다. 이 밖에도 라틴어와 영어, 중국어로 평화를 뜻하는 글자들이 십자가 형상을 이루고 있다. 벽면 자체가 십자가 희생을 통해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땅에 가득하길 기원하는 작품인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건넨 일성은 바로 평화였다. 끌려가는 당신을 내팽개치고 도망간 제자들에게 싸늘한 시선과 원망의 말을 건네도 인간적으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건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원하신다. 반면 제자들은 좌불안석이다. 복음사가들은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스승을 버리고 와서 죄송스럽긴 하지만 스승은 이미 돌아가셨고, 목숨 잘 보전하는 게 능사라고 생각해 문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는데, 그런 제자들 앞에 죽은 줄 알았던 스승이 나타나다니. 꾹꾹 눌러 왔던 죄책감이 온 존재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터져나갈 것 같은데, 스승은 온화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묘한 긴장감은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이는 성과 속, 영과 육의 대립으로 느껴지는 긴장감이다. 우리 안에 신앙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을 때, 그러니까 신앙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 일어난다. 먼저 머리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속엔 복음의 가치와 기준보다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더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치 있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마음속에는 그 가르침을 따라 살다 시쳇말로 ‘호구 잡히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떠나질 않는다. 그리하여 그 안에 뿌려진 신앙의 씨는 싹을 틔우지 못하고 말라버리기 일쑤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침묵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는 있지만 머릿속 계산이 마음을 압도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그저 감정에 지나지 않거나 더 심하게는 “나도 예수님 사랑해”라고 하는 일종의 립서비스에 그칠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은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그리스도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두고 있는 경우이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는지는 시대마다 다르지만, 주로 권력과 명예, 물질적 부였다. 하지만 요즘 사회에선 물질적 부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하다. 돈만 있으면 저절로 권력이 생기고 명예도 생긴다고들 이야기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 안에는 그 어떤 신앙의 씨앗도 그 어떤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자리할 공간이 없다.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필요한 것뿐이다. 당대의 주류 세력에게 배척을 받아 비참한 죽음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가르침과 뜻이 아닌 것은 단호하게 반박하며 이 땅에 하늘나라를 보여주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내셨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선포하신 평화는 더 큰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폭력의 부재로서의 평화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평화를 선포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일이다.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

202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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