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선물! 생명은 책임!

2025년 7월 15일 남인순 의원은 ‘모자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의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살펴봐야 한다. 여러 쟁점이 있지만, 가장 중대한 것은 국가의 생명존중 책임을 훼손했다는 점이다. 우리 헌법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국가의 의무를 명시해 왔다. 태아는 여성이 출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 생명이기에 존엄하다. 만일 여성의 출산 결정이 태아 존엄의 근거가 된다면, 생의 말기 생명도 누군가 돌봐주기로 ‘결정’했을 때만 존엄하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이는 생명의 시작을 보호하지 않는 사회가 결국 생명의 마지막도 보호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선택적 약자 정의는 설득력이 없다. 결국 그것은 법적·정치적 위선에 불과하다. 생명의 존엄을 외치면서도 가장 연약한 생명을 외면하는 정치인들에게 이 위선은 그대로 드러난다. 비록 헌법불합치 결정은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 결정은 결국 법 테두리 안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통해 낙태가 허용된다고 보는 논리를 열어놓았다. 그 출발점은 ‘태아 살해가 정당하다’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어떤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그 권리가 정당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권리는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행사되기 때문이다.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이는 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게 된다. 낙태의 경우, 그 사회적 압력은 제도적으로 건강보험과 의료진에게 전가되어, 낙태 수행을 위한 제반 조건을 뒷받침하라는 요구로 작용하게 된다. 이 논리 안에서 태아의 생명권은 이미 배제됐고, 여성의 자기결정이라는 이름 아래 자유와 권리의 남용은 예고되어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2020년 법무부 산하 양성평등 정책 위원회가 제출한 권고안이다. 이 권고안은 임신 주수와 상관없이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라고 주장했고, 이는 출산 직전까지도 낙태를 허용하라는 요구였다. 이 권고안이 말하는 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태아를 법적으로 보호하지 않는 체계를 만들겠다는 것이었고, 사회 전체에 걸친 생명경시 인식에도 분명한 영향울 끼쳤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2024년, 한 20대 여성이 임신 36주 차에 낙태한 뒤 유튜브에 그 과정을 공개한 일이다. 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죄책감조차 없는 태도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낙태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하며 자기연민에 빠져 있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36주 태아가 몸 안에서 움직일 때 아무 감각도 없었던 것인가?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 정말 몰랐던 것일까? 그러나 이미 2020년 권고안은 이러한 일이 법에 따른 제재 없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사회는 그런 일이 가능하도록 방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발의된 ‘모자보건법 일부개정안’은 임신 주수와 무관하게 낙태할 권리뿐만 아니라, 태아의 생명을 종결하는 시술과 약물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고까지 한다. 이는 공적 자금의 윤리적 배분 기준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건강보험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제도이지, 생명을 제거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방심하는 사이, 태아의 생명뿐 아니라 의료인의 양심권도 침해될 수 있다. “깨어 있어라”(마태 24,42)는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들리는 오늘이다. 인간 생명은 보호하고 증진해야 할 우선적 가치라는 점에는 모두 이의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7월 25일, 이번에는 이수진 의원이 무제한 낙태 허용을 위한 ‘모자보건법 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겉으로는 ‘약자 보호’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특정 집단의 이해만을 반영한 편향적 입법이다. 이는 법과 정책이 보편적 정의가 아닌 정치적 입장과 선택적 가치에 따라 좌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의의 기준이 자의적으로 설정될 때, 그 결과는 사회적 혼란과 도덕적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3면

전쟁에서 정전으로, 정전에서 종전으로, 마침내 평화로

지난달 25일은 6·25전쟁 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가슴 아픈 전쟁! 때로는 형제가, 그리고 부모 자식이 적이 되어 총부리를 맞댄 동족상쟁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는 그야말로 칼을 주러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렇게 형제가 적이 되어 싸움을 시작한 날로부터 75년이 되었다. 6·25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란 중에서 가장 처참한 전쟁 손해를 끼친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발표하는 곳에 따라 많은 오차가 있어서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국군을 비롯한 모든 군 사망자는 총 80만 명, 부상자 90만 명, 실종과 포로는 20만 명에 이른다. 사망, 부상, 납치 등 250만 명의 민간인 피해자가 한반도에서 발생하였다. 천만에 달하는 이산가족의 아픔은 오늘날까지도 개인과 지역, 그리고 한반도와 온 누리에 널린 비극의 뿌리가 되어, 또 다른 슬픔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게 비참을 가져온 전쟁은 잠시 멈추는 휴전을 하게 되는데, 다가오는 27일은 정전일 즉 3년간의 전쟁을 잠시 멈춘 날이다. 그로부터도 72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종전이 아닌 휴전,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실전은 이념 전쟁으로, 또 생활 전쟁으로까지 번졌다.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1년 사이에 진영이 서너 번씩 바뀐 지역의 주민들은 그때마다 멈추지 않는 보복과 처벌로 두려운 밤낮을 보내야 했고, 전쟁이 멈춘 후에도 학살은 계속되어 전 국민이 외상후증후군을 앓는 끔찍한 일이 계속 이어졌다. 민간인 피해자 중에서도 학살로 목숨을 잃은 이들이 그중 절반이라는 기록은, 단순한 피해를 넘어 극대화된 원한과 분노로 인간 본성까지 흔들어 놓는 처참함을 만들어냈다. 월북과 납북, 귀순과 월남이라는 기괴한 언어들이 남아있는 가족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삶의 자리를 흔들어 놓았다. 연좌제라는 이름으로,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들이 얼마나 많이 침해되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이어지는 분단은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되어 얼어붙게 하는 빙점이 되었다. 국방부 장관 후보의 청문회에서는 어떻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장할 것인가를 묻는 것보다 먼저 하는 질문이 있다. ‘북한이 주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장관 후보 마음속 생각을 캐어 묻는다. 통일부 장관 후보의 청문회에도 ‘통일을 위해서,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어떻게 노력할 것인가’를 묻기에 앞서 하는 질문은, 북한을 얼마나 증오하는지에 대한 확인이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위하여 논쟁을 벌일 때도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생각들은 늘 여러 번의 검증을 거쳐야 한다. 평화를 위해 쏟는 노력은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북한을 이롭게 하는 적대행위로 취급받았다.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를 수출하는 자랑스러운 K-방산에 대해 불편한 의사를 표현하는 것도,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도 눈치를 보아야 한다. 적의 적은 우리 편이고, 우리 편의 적은 적이 되는 기괴한 논리가 아직도 당연한 불편한 우리 처지이다. 이러한 차에 267대 교종이 되신 레오 14세의 첫 말씀이 ‘평화’인 것이 무척이나 반갑고 힘이 된다. 로마와 전 세계에 보내는 첫 강복에서 그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 무기를 내려놓은 평화,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 겸손하고 인내하는 평화, 하느님에게서 오는 평화”를 모두와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즉위 미사에서는 ‘평화를 이루는 희망의 누룩이 되자’고 교회와 온 세계에 호소하였다. 그 고마운 호소에 힘입어 해방과 함께 분단을 맞은 지 80년이 되는 해에, 이제 정전이나 휴전이라는 이름이 종전과 평화 원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는 올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23면

두 개의 깃발 아래 서 있는 세계 – 겸손과 오만 사이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한 공동체에 감도는 긴장을 수도원 게시판을 통해 목격하면서, 다시금 이 세계에 만연한 ‘깨진 평화’를 마주하게 된다. 불안한 국제 정세, 고조되는 전쟁의 위험과 기후 위기는 모두 인류의 존립을 위협한다. 이 복합적 위기의 중심에는 세계 질서를 주도해 온 강대국, 미국이 있다. 군사 개입, 지정학적 외교, 기후 문제에 대한 소극적 대응 등 미국의 정책은 국제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력이 과연 평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이렇게 체감하게 되는 불안은 정치의 본질과 지도자의 자격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성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이라는 묵상을 제시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지향을 두 가지 길로 묘사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 곧 겸손과 가난, 자기 비움으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루시퍼의 깃발’, 부귀와 명예, 오만과 자기 영광으로 이끌리는 길이다. 이 두 깃발은 단지 신학적 상징이 아니라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결정과 가치의 선택 앞에 실재하는 실존적 기준이다. 오늘날 국제사회의 갈등과 위기의 뿌리 역시 이 깃발 사이의 선택 혹은 이끌림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정의’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정의로운 국가란 각 계층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통치자는 지혜로, 보조자는 용기로, 노동자는 절제로 삶을 유지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는 단순한 정치제도의 문제를 넘어서 각 개인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고, 이성·기개·욕망의 질서 있는 조화 속에 깃든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성 이냐시오가 제시한 두 개의 깃발과도 깊이 상통하는 부분이 아닐까. 국가란 하나의 유기체이며, 그 지향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평화 혹은 파괴의 길로 이끌릴 수 있다. 현 세계에서 이러한 성찰이 더욱 필요한 이유는 지도자들의 결정이 단순한 정책이나 전략 차원을 넘어 인간 생명과 공동체의 존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관련 뉴스나 대외정책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깃발이 아닌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루시퍼의 깃발이 미국 전역에 펄럭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권력의 논리, 무력의 우위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절대시하는 결정들은 이데아적 정의보다는 ‘강자의 이익’을 정의라고 착각하는 노선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서는 삶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평화와 사랑, 겸손과 희생의 길이다. 미국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세계를 선도하기 위한 국가가 되려면 ‘사사로운 이익’을 내려놓고, 무력과 제재를 통한 통제 대신 공감과 연대의 리더십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이민자 추방이나 군사적 개입은 정의의 기준에서 벗어난 행보로 읽힌다.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건국되어 이상주의와 공동체적 책임을 중시했던 나라가 자국 중심의 현실주의에 매몰되어 타자의 고통에 무관심한 모습은 도덕적 위기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정의란 어느 한 계층의 이익이 아닌, 모든 이의 삶을 보장하고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갈등이 아닌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미화하거나 권력을 정당화한 담론은 실제 고통받는 이의 현실은 가린 채, 마치 그것이 ‘정의’인 양 왜곡된 인식을 조장한다. 이 정황 속에서 우리가 바라볼 곳은 분명하다. 비폭력과 온유, 공동체의 일치를 지향하는 선택은, 현실 정치에서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삶에 근간이 됨을 기억하며 예수님께로 시선을 두어야 한다. 이 세계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로 이끌려 평화를 향한 참된 여정을 다시 시작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고 성찰한다. 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23면

이타적 이기주의

몇 년 전 「도시의 생존」이란 책이 출간되었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에드워드 글레이저, 데이비드 커틀러 교수가 코로나를 계기로 쓴 책이다. 두 저자는 묻는다. “도시는 늘 재해, 전쟁, 전염병 같은 위기를 맞게 되는데 과연 소멸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을까?” 저자들의 답은 매우 낙관적이다. 도시의 역사는 늘 위기의 연속이었지만 슬기롭게 대응해 생존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다. 한국어판 추천사 부탁을 받아 원고를 읽고 찾아낸 두 낙관론자의 논거는 ‘이타심’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 존재이지만 공동체에 위기가 닥치면 이기심을 누르고 이타심을 발휘한다. 위기 앞에서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공멸할 것이니, 나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라도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함을 본능으로 안다. 코로나 덕분에 ‘행복하지 않은 선진국 대한민국’의 원인과 해법을 일깨워준 귀한 책을 만났다. 대한민국은 단기간에 선진국으로 도약한 빛나는 나라다. 문화예술 역량은 세계 최고다. 그런데 이처럼 빛나는 부자나라 국민의 행복도는 매우 낮다. 우리는 지금 한편으론 빛나지만, 다른 한편으론 많이 아픈 나라에서 살고 있다. 중증 질환을 드러내는 증후들은 많다. 서울 강남 어느 산후조리원의 2주 사용료는 4천만 원이 넘는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막 태어난 신생아 의대 보내기 커뮤니티가 여기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4세 고시’의 진원지다. 성공하려면 무조건 경쟁하라고 몰아치는 ‘경쟁교육’이 아직도 지속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서울대 공대와 자연대에 합격한 신입생 수백 명이 의대를 가려고 자퇴하는 걸 어찌 보아야 할까? 월급을 평생 모아도 살 수 없을 만큼 치솟은 부동산도 아픈 대한민국의 한 증상이다. 집값은 내려가야 마땅한데 내려갈 수 있을까? 국민의 절반 이상이 내 집을 보유하고 있는데, 집값 하락을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집값 안정화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진국들은 일찍이 문제를 간파하고 대응했다. 19세기 말부터 주택법이 제정된 이유는 집을 ‘재물’이 아닌 ‘인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유럽 선진국들의 임대주택과 사회주택 비율은 20~30%를 차지한다. 10%에도 못 미치는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다.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손꼽히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 시민들 가운데 자기 소유 집에 사는 사람은 25%에 불과하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 가장 먼저 ‘인구 제로’에 도달할 것이라는 예측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도 우리가 많이 아프다는 방증이다. 인구문제의 핵심은 감소보다 쏠림이다. 수도권으로 인구가 쏠려 한쪽은 극심한 경쟁으로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고, 다른 한쪽은 지탱할 인구가 없어 소멸로 다가가는 악순환에 갇혀있다. 나라는 선진국이 되었는데, 국민은 왜 행복하지 않을까? 원인이 무엇일까? 지금 우리는 이기심과 이타심의 균형감을 잃고 마냥 이기적으로 내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자식만 잘된다면 경쟁교육도 좋고, 집값은 절대 내려가면 안 되며, 나고 자란 내 고향이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무심한 그 마음 때문 아닐까? 가난했던 시절에도 우리 마음에는 ‘이타심’이 늘 살아있었다. 어디에나 어려운 사람들은 있었지만 품고 살았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허리춤 조이고 노력해 ‘부자 나라’는 되었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경쟁해야 하는 ‘행복하지 않은 국민’으로 살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 병을 고칠 수 있을까? ‘이타가 곧 이기’라는 깨달음, ‘이타적 이기주의’가 치유의 길일 것 같다. 위기에 빠진 공동체가 생존하려면 이타심을 앞세워야 한다는 상식의 회복이다. “부자되세요!”란 말을 거리낌 없이 주고받던 때부터 이 병이 깊어진 것 같다. 균형감을 회복해 고쳐보자. 어디서나 누구나 함께 행복한 진짜 선진국을 만들어보자. 따뜻했던 본래 우리의 마음으로.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23면

오늘날 생명윤리-인간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충돌

오늘날 생명윤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부작용을 관리하는 생명에 관한 윤리쯤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그 윤리란, 속된 말로 무늬만 윤리일 뿐,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성장에 저해되지 않는 최소한의 규범을 만드는 방패로 환원된 지 오래다. 다시 말해서 생명윤리의 목적이 인간의 존엄을 위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논의 안으로 들어가 보면 무엇보다도 인간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관점의 충돌이다. 그 논의들은 배아 연구, 낙태, 유전자 편집, 의사 조력자살, 안락사, 장기이식, 인공지능 등의 현실 문제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 생명의 가치는 누가 결정하는가?” 이 물음은 우리 사회가 인간을 그리고 인간 생명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를 되묻게 한다. 생명윤리는 생명과학이 발전하면서 그 기술이 인간 생명의 시작과 끝에 개입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과거에는 신앙과 도덕 전통이 생명의 경계와 의미를 규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선택과 과학기술의 가능성을 더 중시하면서, 생명은 점점 선택 가능하고 조작할 수 있는 대상, 때로는 부담스러운 현실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생명윤리는 결국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길로 나아가는 분기점이 된다. 가톨릭 생명윤리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인간 생명의 고유한 존엄을 지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를 지닌 전인적 존재로서, 그 생명은 수정된 순간부터 그 자체로 목적이며, 존엄한 존재이다.(사목헌장 24항 참조) 이 사실은 보편적 진리와 연결되어 있어, 인간 생명을 어떻게 보호하고 존중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게 한다. 즉 인간 존재 안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이 새겨져 있다. 마치 우리 마음 안에 나침반이 있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아는 것처럼,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그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점점 우리 사회는 보편적 진리보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결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진리보다는 이익 추구를 우선시한다. 이러한 사고에는 공리주의나 원칙주의(Principlism)로 대표되는 현대 세속 생명윤리가 자리한다. 이들은 인간 생명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가치로 바라본다. 공리주의는 결과 중심의 사고로, 때로는 한 생명의 희생을 다수의 이익을 위해 정당화한다. 원칙주의는 자율성과 정의 같은 원칙에 따라 판단하지만, 그 원칙들이 인간 생명의 본질보다는 이성적 능력의 발휘나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가 바뀌기 때문에, 인간 생명 그 자체를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그 결과, ‘가치 있는 생명’과 ‘덜 가치 있는 생명’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며, 생명 자체가 평가받는 대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흐름은 점차 “생명을 거스르는 행위들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입법화하고, 심지어 그 행위들까지 모두 합법화”로 나타나고 있다.(「생명의 복음」 4항 참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생명윤리는 과학기술적 문제 해결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이다. 그는 “선과 악, 죽음과 생명, ‘죽음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의 엄청나고 극적인 충돌에 직면하고 있음을 충분히 깨달아야만 합니다.”(28항)라고 강조하며, 생명윤리는 그러한 충돌 앞에서 깊은 윤리적 성찰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생명윤리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 생명은 배아든 태아든 노인이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모든 인간 생명은 동일한 존엄을 지닌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세상에 증언해야 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생명의 신비를 지키고 존중하는 문화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23면

변치 않을 분 홀로 천주뿐이외다

초등학교·중학교 학창 시절, 성당 인근에 있던 수도원 덕분에 신문물을 조금 빨리 접할 수 있었다. 멕시코에서 온 수사님들이 선보이는 슬라이드는 그야말로 신천지를 보여주었다. 5원 내면 빌려주는 만화경을 손에 넣고, 이 막대를 내려 몇 컷 안 되는 만화 장면들을 신기하게 보고 또 보기만 했던 기억이 새롭다. 5원짜리 만화경을 비웃기라도 하듯, 예수님 이야기를 성경 줄거리에 따라 철커덩 철커덩 기계 소리와 함께 빛나는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기계의 신기함에 더 마음이 갔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에서 영화 상영을 한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둥근 휠이 짜르르 소리를 내며 돌아가면서 빛 속의 활동사진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포터블 영사기는 마음에 콕하고 들어왔다. 미아리에 있는 바오로딸 수녀원에 가서 필름을 빌려오는 심부름을 도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후 어느 순간 빔프로젝러라는 것이 등장하고, 이제는 안경 같은 것을 눈에 쓰면 영상이 펼쳐지는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이라는 것도 그다지 신기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교내 백일장이 되면 원고지 몇 장을 준비해야 했다. 200자 원고지에 칸을 채우기 위해 골머리를 싸맸는데, 신학교에 오니 학교 마크가 찍힌 리포트지에 과제를 써서 제출하게 되었다. 이도 잠시, A4용지를 끼워 넣고 손가락이 아프게 찍어 대던 마라톤 타자기가 활약을 했다. 신학원 복도에 울려 퍼지는 ‘타닥 탁탁’ 소리는 리포트 제출 마감이 다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신학교 때 일찌감치 타자기를 손에 익힌 덕분에 군대에 가서는 행정병이라는 꽃보직도 맡을 수 있었다. 먹지를 세 장이나 끼워 타자를 하다보면 손가락 끝에 감각이 없어지곤 했었다. 막상 제대하고 돌아온 신학교에서는 타자기는 사라지고 감광지에 사진처럼 찍혀 나오는 워드프로세서가 활약하고 있었다. 서품을 받고 첫 보좌 신부 때는 도트(Dot) 프린터가 강론을 뱉어냈고, 곧이어 새로운 컴퓨터와 프린터로 계속 업그레이드됐다. 뒤로 갈수록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타자기에서 워드 프로세서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이 7~8년이라면, 스마트폰에서 태블릿으로의 발전은 불과 1~2년 사이였다. 이제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문물이 눈에 들어온다. 새로운 것을 접할 때마다 신기하고 재미있어 익히던 것들이 이제는 점점 부담이 되어가는 것은, 세월이 빨리 덤비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따라가기가 너무 힘이 든다. 카페며 식당에서 주문하려고 문 앞에 서 있고, 식탁마다 매달려 있는 무인 주문 시스템의 기세에 눌린 어르신들을 보노라면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움츠러들기도 한다. 그래서 포기한 것들도 꽤 된다. 쓰고 그리고 구성하는 다양한 앱을 사용하는 것도 포기해야만 하고, 다들 잘한다는 PPT(피피티)도, 동영상을 편집하는 것도, 어린이도 한다는 유튜브 방송도 먼 산 너머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이제 포기해야지’ 하는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자본의 세상은 내 주머니 속의 작은 알갱이라도 빼먹기 위해서 조금 더 사용하기 쉬운 문명의 이기들을 내놓는다. 그래서 이제는 그만 쫓아가야지 하다가도 시대에 뒤처지는 것도,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을 이용하지 못 하는 것도 있어서 “그래, 여기까지만!”이라며 또 한 걸음 가기도 한다. 따라갈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어정쩡함을 동년배끼리 서로 나누며 허탈함을 물리기도 하지만 ‘낀 세대’가 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래서 제목을 ‘변치 않을 분 홀로 천주뿐이외다’로 뽑았는데, 위안으로 삼기에는 어째 어색하기만 하다. 그 수많은 변화를 겪는 인간들의 호소에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주를 통하여 구원하실까?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23면

하늘이 전하는 침묵의 외침

아일랜드는 한때 ‘비의 땅’이라 불렸다. 연중 절반은 비가 내리고, 안개 낀 하늘이 일상이던 곳. 그런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뜨거운 햇살을 일상으로 맞이했다. 푸른 하늘이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현지인들조차 ‘이례적인 날씨(Unusual Weather)’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상기후는 낯선 단어가 아니다. 뉴스는 아일랜드 일부 강과 호수에 녹조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청정지역의 상징이던 곳에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단지 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기온과 수온 상승, 농업 폐수, 산업 오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흐르던 물이 고이면, 생명의 물은 곧 죽음의 물이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맑은 물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다. 그것은 세례의 상징이며, 내면 정화의 은총이며,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다. 그 물이 병들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침묵이 깊어만 간다. 맑디맑은 물의 침묵 속에 이는 경고음을 듣는다. 비슷한 시기, 4월 말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벌어졌다. 수 시간 동안 국가 전체가 멈춰 섰다. 열차는 멈추고 공항은 마비되었으며, ATM과 통신도 끊겼다. 마트는 생필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도로는 멈춘 차량으로 가득 찼다. 원인 중 하나로 기후로 인한 대기 진동이 지목됐다. 포르투갈 전력 당국은 “스페인의 극심한 온도 변화가 드문 대기 현상을 일으켜 정전을 초래했다”고 밝혔다. 자연의 균형이 무너지자, 전력이라는 문명의 축도 한순간 붕괴된 것이다. 스페인은 전체 전력의 60% 이상을 풍력과 태양광에 의존하는 재생에너지 선도국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단지 전력만이 아니라 문명 전체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우리가 누리는 시스템은 자연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기후의 요동은 제도와 문명, 일상과 신앙까지 흔들어 놓는다. 선종하신 교종 프란치스코는 권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에서 “아무리 부정하고 숨기며 위장하거나 상대화하려고 하여도, 기후 변화의 표징들은 갈수록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5항)고 하셨다. 이 말씀은 통계나 분석이 아니라 영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경종이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 그러므로 하느님의 땅에 대한 책임은 지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자연의 법칙과 이 세상의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섬세한 균형을 존중해야 함을 의미한다.”(62항) 하늘이 맑다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자연의 질서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고통받는 것은 취약한 존재들이다. 수도자의 삶은 본래 자연과의 조화 안에서 이루어진다. 기도와 노동이 하나 되는 삶은 자연의 리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나 자연이 아프면 기도도, 노동도 고통스러워진다. 이 시점에서 절실한 것은 단순한 에너지 전환이 아니라 마음의 전환이다.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을 내려놓고 자족하는 삶을 익혀야만 한다. 물과 흙, 공기와 햇빛을 ‘자원’이 아니라 인간과 동등한 ‘공동 피조물’로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이 필요하다. 태양과 달을 형제요 자매로 부르던 성 프란치스코의 눈길 위에 간절한 염원이 담긴 실천 하나가 절실하다. 지구가 보내는 이상 징후, 이 지속되는 새로운 사태 앞에서 침묵으로 응답하며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 침묵으로 답하며 움직이는 이들의 깊은 탄식과 소리 없는 외침은 희망이 된다. 그 침묵의 응답은 작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며, 고요히 고통받는 피조물들과 연결된 연대의 실천이다. 더 많은 소비의 흔적이 아닌 더 깊은 책임의 자취이다. 그리고 그 자취 위에 희망의 씨앗을 뿌려 꽃을 피우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희망의 순례자인 우리 모두의 몫이 되었다.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23면

‘인생은 음미체!’

쉰 살을 막 넘겼을 때 마음에 새긴 내 삶의 모토는 ‘인생은 음미체!’였다. 음악, 미술, 체육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벗이자 동반자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40대 때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여러 번 체험했다. 집안과 직장과 사회에서 내게 주어지는 일들과 스트레스로 인해 마음도 몸도 몹시 힘들었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아서라는 걸 깨닫고 삶의 태도를 바꿨다. 일을 줄이고 나를 돌보는 시간을 늘렸다. 그렇게 친구가 되어 준 ‘음미체’가 나를 지켜 주었다. 돌아보면 어렸을 적부터 ‘음미체’와 함께 살아왔다. 주일 아침은 아버지께서 틀어 주신 가곡이나 영화 음악을 들으며 잠에서 깼고, 덕분에 음악과 친해졌다. 중학생 때 형이 치는 기타를 어깨너머로 배운 덕에 지금도 아들과 함께 기타 치고 노래를 부른다. 동네 만화가게에서 살다시피 한 덕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중학교 땐 미술부 활동도 했다. 초등학교 야구부에 들어갔고, 축구와 탁구, 테니스까지 ‘운동권’으로 살았다. 우연한 기회로 배우기 시작한 트럼펫 덕분에 교무처장 보직을 맡았던 2년을 잘 건너왔다. 출근 전 한 시간 트럼펫 연습 시간이 숨 쉴 공간이 되어 주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제자와 후배들에게도 음미체를 권한다. 출근 전 한 시간쯤 음미체에 몰입한 뒤 일과를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전 직장 후배는 내 권유로 아침 수영을 시작한 뒤 검도까지 이어져 지금은 건강한 60대를 산다며 고마워한다. 일만 하면서 살 순 없다. 쉬고 또 즐기며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 음미체로 함축되는 ‘문화, 예술, 체육’이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해 준다. 새 정부의 할 일이 많겠지만 ‘음미체의 생활화, 문화 예술의 일상화’도 중요한 국정 과제로 삼아 주길 바란다. 선진국이지만 국민은 정작 행복하지 않은 대한민국을 더 건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에도 음미체가 단단히 한몫할 것이다. 교무처장으로서 꿈꾼 일 중 하나는 신입생 교양 교육을 인문학과 음미체로 바꾸는 것이었다. 긴 세월 입시 지옥을 건너 대학에 온 새내기들이 1년 만이라도 다른 공부는 다 내려놓고 인문학과 음악, 미술, 체육을 배우며 산다면 문화 예술로 샤워를 한 것처럼 상큼하고 개운한 젊은이로 거듭날 것이다. 악기를 배우고 협주와 합창을 해 본다면, 그림을 그리고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본다면, 몸을 움직여 춤추고 달리고 날아오르게 한다면 그만큼 좋은 교양 교육은 없을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이루지 못한 꿈이 못내 아쉽다. 음미체의 생활화는 어디서든 가능하다. 재작년에 우리 대학 성악 동호회에 가입해 귀한 선물을 받았다. 음악 전공 지도 교수와 대학원생들 덕분에 성악에 낯선 교직원들이 매주 성악 공부를 하고 학기 말에는 공연도 한다.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게 떨리는 일이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감사하고 성취감을 느낀다. 좀 더 갈고닦아 졸업생과 신입생들 앞에서 공연도 하고, 학교를 위해 궂은일로 애쓰시는 분들을 위한 뜻깊은 공연도 해 보고 싶다. 우리나라 못지않게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나라가 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발트 3국이다.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1989년 8월에 세 나라 국민 200만 명이 620킬로미터 인간 띠를 이었고 한목소리로 ‘일어나라 발트야’ 노래를 불러 2년 뒤 독립을 쟁취했다. 4~5년마다 온 국민이 참여하는 ‘노래와 춤 축제’도 열리는데 수만 명이 함께하는 군무와 합창은 2008년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더욱 빛이 난다. 학교, 직장, 교회, 마을에 그리고 도시와 지역과 온 나라에 음미체가 일상이 되고 생활이 되면 좋겠다. 경쟁하고 이기기 위해서가 아닌, 함께 어울려 배우고 익혀 풍요롭게 나누는 음미체로 ‘문화 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보자. 인생은 음미체! 국가도 음미체! 행복에 이르는 길, 음미체!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23면

“너희가 바르게 살면, 세상도 바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대다”

작년 12월 이후 우리 사회는 매우 추한 사실 하나를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설마 이 정도까지 상식이 무너진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 만큼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지난 반년 동안 거의 매일 같이 벌어졌습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을 현실에서 겪으며, 우리 사회는 ‘정의’와 ‘진리’가 ‘이익의 추구’ 속에서 얼마나 희석되고 상대화되고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고대 철학자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는 “정의란 곧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이 말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의와 진리’를 외치고, 그 개인들이 다수를 이루게 될 때, 정의는 결국 ‘강자의 이익’으로서 구현되는 듯합니다. 그래서 진리에 기반하지 않은 정의는 여전히 우리 사회 안에서 진영을 나누고, 대립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새겨봅니다. 어쩌면, ‘진리’ 자체가 상대적인 관점에서 왜곡되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진리와 정의의 방향이 다수의 힘, 즉 누가 강자의 위치에 서느냐에 따라 쉽게 좌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집단 지성은 올바른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을 파악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경제적인 측면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경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통 방식과 진리, 정의에 대한 이해입니다. 최근 선출된 레오 14세 교황은 우리가 현실에서 마치 바벨탑과 같은 혼란스러운 언어 구조 속에 빠져 있음을 지적합니다. 즉, 이념적이고 편향되며 사랑이 결여된 언어 속에서 우리가 소통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소통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형성”합니다.(언론인들과의 만남, 2025년 5월 12일) 이는 우리 사회의 언론들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 그리고 그 언어를 통해 어떤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이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한 소통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교황은 또한 가정의 중요성과 함께, 태어나지 않은 생명(배아와 태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병자, 실업자, 시민, 장애인 등 우리 사회에서 연약하고 취약한 이들의 존엄을 보장하는 노력에서 누구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외교사절단과의 만남, 2025년 5월 16일)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점점 약자와 취약한 이들을 이념적이고 편향된 언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다수가 될 때, 사회는 결국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만 인권을 강화하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이제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조차 점점 더 상대화되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교황은 또한,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진리 없이는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없으며, 특히 말의 의미가 모호하거나 이중적으로 사용되어 현실을 왜곡할 때, 참된 관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진리가 사랑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마도 교황이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설교」 80, 8)을 인용했듯, 나부터 가장 연약한 존재인 배아에서 모든 인간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부족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겠습니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23면

5월과 6월 사이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거세고 힘이 있다. 파란색과 빨간색의 차가 수시로 번갈아 지나가면서 우렁찬 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6월 3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신들이 더 잘할 수 있다’라거나, ‘다른 편의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을 담은 높은 톤의 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그렇게 6월이 되면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커다란 경계선에 서 있는 느낌이다. 정치, 경제, 복지, 개헌, 교육, 주거, 노동, 일상생활, 문화와 미디어, 의료, 기후 환경, 과학기술, 외교, 통일과 국방, 공동체. 어느 하나도 뒤로 물릴 수 없을 중차대한 분야들에 대해 각계각층의 요구 또한 쌓여만 간다. 한편으로 저 많은 약속이 과연 물리적으로 지켜질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켜켜이 쌓이고 있다. ‘하느님이 오셔도 안 되는 일’이라며, 미리부터 손사래를 치며 정치에 대한 포기를 선언하는 이도 종종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영역에 참여하는 일에 대해 많이도 언급하셨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이기에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되며, 참된 신앙은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여 이 지구를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늘 급진적이라고 오해받는 프란치스코 교황만 그런 말씀을 한 것이 아니다. 보수적이라고 오해받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도 당신의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정당한 몫을 받는 정의로운 사회 질서와 국가 질서의 건설은 모든 세대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가장 중대한 임무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임무로서 교회의 직접적인 책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인간의 가장 중대한 임무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성의 정화와 윤리 교육을 통하여 정의의 요구를 이해하고 정치 영역에서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자기 나름대로 이바지할 의무가 있습니다…”(28항) 라며 정치 참여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셨다. 이제 6월이 되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자리에는 새로운 권력이 자리한다. 한편에서는 기대가 차오르는 지금, “다른 모든 민족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이스라엘 원로들에게 왕을 세우게 되면 당신들의 아들들을 데려다 병사로 삼고 일을 시키며, 딸들을 데려다 시중을 들게 할 것이요, 세금을 거두어 가고 종으로 부릴 것이라는 예언자 사무엘의 우려가 다시금 떠오른다. 이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정치하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다가가야 한다. 당장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지난 겨울 광장에서 이 땅의 주인들이 목 놓아 부르짖었던 정의에 대한 갈망이 펼쳐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많은 숙제가 있지만 우선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창조물이 창조물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생명과 관계된 일들이다. 모든 창조물은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 생명을 저버리고 만들어낸 이상세계는 있을 수 없다. 눈앞의 이윤을 위해서 어느 한 생명이라도 저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시작부터 누군가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다. 눈물을 닦아주어도 시원치 않을 그 일꾼이 억울하고 핍박받는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억울한 사람, 억울한 소리가 제대로 들려 그 한을 풀어주는 일, 하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땅으로 내려와 일터와 쉼터로 돌아가는 것, 안전이 보장된 일터에서 일하고 쉼이 보장된 거처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것, 모두가 행복을 찾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이를 이루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요 소명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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