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구하소서

12년, 우리 모두에게 당신을 알렸던 그때로부터 한 해 한 해를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오셨던 교종께서 하느님 집으로 돌아가셨다. 많은 이에게 참된 제자 됨의 삶을 보여주셨던, 그렇기에 참으로 고단하고 힘들었을 12년이었다. 참 많이도 닮았다. 3년 공생활을 하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과 만난 사람들은, 12년 종들의 종으로 살아오신 교종의 그것과 참으로 많이 닮았다. 아무도 돌보지 않았고 자신도 포기했던 병자들, 세상의 탐욕과 권력에 지배당해 제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던 이른바 마귀 들린 사람들, 사람 취급받지 못했던 이방인들, 집도 일자리도 빼앗겨 갈 곳 없는 버림받은 사람들, 더럽고 천하다고 홀대받는 사람들….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을 빼앗긴 사람들, 그래서 더 많이 돌보아주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내민 예수님의 손은 다시금 그들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살기에 충분한 지지이며 연대였다. 작은 쪽배에 몸을 맡겨 지중해 바다를 건넌 사람들, 견뎌내지 못해 끝내 숨져간 동료와 자식들을 채 묻지도 못하고 앞길이 막막했던 이들을 즉위하자마자 찾아간 교종이었다. ‘이기는 편이 내 편’이라며 힘의 논리로 일관하는 강대국들의 얍삽한 처신에, ‘사람의 생명과 피조물의 안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앞세웠던 수많은 메시지였다. 그렇게 프란치스코 교종은 어떤 이들에게는 밉상이었다. ‘거리에서 노숙자가 죽어가는 것을 외면하는 언론이 주가의 변동에는 그처럼 예민한 뉴스로 다룬다’는 일침에, 배제하는 사회에 대한 비난에,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말씀에, ‘가난한 나라에 대한 책임이 그들을 침탈했던 강대국에 있다’는 선언에 얼마나 많은 정치인과 경제인이 흠칫했는지 모른다. ‘교회는 야전병원이 되어 거리로 나가야 한다’는 말씀에, ‘당신이 앉아 있는 교종의 자리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고언에,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지 말고, 그들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에 또 얼마나 많은 종교인이 곤혹스러웠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편을 가르는 와중에, ‘고통받는 이들 앞에서 중립은 없다’는 엄중한 가르침은 길 위에서 길을 찾지 못하는 이에게 이정표였다. 그러니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는 밉상일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 등 당대의 지배층에 밉상이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밉상스러웠던 그 말과 행위가, 어떤 이들 특히 삶의 나날이 고통으로 이어진 이들에게는 젖과 같은 고소함이요, 꿀과 같은 달콤함이었다. 그로써 고통스러운 하루를 견딜 수 있었고, 그 위로로 꺾인 무릎을 펼 수 있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던 순례자들에게는 내비게이션이었고, 젊은이들에게는 빼앗겼던 희망이었으며, 이주민들에게는 안식처가 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가신 분께 ‘시대의 성인’, ‘가난한 이의 성자’ 등 수많은 찬양과 숭배에 가까운 서술이 부여된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직 이분을 크게 현양하고 영웅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저 옆집에 사는 맘 좋은 아저씨로 남기고 싶다. 우리와는 다른 부류의 존재라고 여기며 격벽을 세울 것 같아서, 그래서 우리가 그와 같이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로 삼을 것 같아서 오히려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남긴 두 가지 말씀, “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구하소서”와 “옆집의 성인이 되어주십시오”를 기억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제 각 세대의 언어로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가시는 분께 인사드리고 싶다. 안녕, 호르헤 할아버지! 평안하세요, 프란치스코 아저씨! 잘 가시게! 곧 봄세!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우리 모두의 친구!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23면

또 하나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앞에서

예수님의 활동은 말씀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가엾은 마음’과 특정 대상에게 내미는 손의 촉감이 함께 어우러져 완성되어 간다. 차갑고, 딱딱하고, 마음 없는 기계와 접촉하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과 미래 세대에게, 타인에게 공감하는 연민과 손길이 닿는 접촉의 힘이 과연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산업혁명 이후 200년, 이제는 인공지능(AI) 등 기술의 발전을 통해 삶의 여러 부분이 큰 변혁의 문턱을 넘었다.(교황청 AI 연구 그룹 저 「인공지능과 만남」 참조) 인간의 성장은 한계를 모른다. 이 과정은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을 연상케 한다.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창세 11,3) 과연 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잠시 멈춰 단지 외적 발전이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인지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고귀하고 탁월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위대한 목표와 가치’에 대한 인본주의적 이해가 간과된다면(「찬미 받으소서」 181항 참조) 아무리 훌륭한 혁명이라도 실패할 수 있다. 대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영역을 탐구하는 인문 사회학 부문의 학과들이 사라지고 있다. 물질적인 안정과 풍요, 그리고 육체적인 아름다움이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 인문학이 설 자리가 없으니, 물결처럼 밀려와 우리 앞에 우뚝 선 4차 산업혁명, 인간처럼 작동하는 AI 로봇을 과연 어떤 철학적 가치 아래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디지털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하는 인공지능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인간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 조절이 어려운 단계로 진입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가변성(Variability)과 불확실성(Uncertainty)이라는 디지털 알고리즘의 두 가지 쟁점은 직시해야 할 부분이다. 벌써 몇 년 전에 학생들과 TED talk(학술 강연 비디오) 시간을 통해 만난 인간형 휴머노이드 로봇 소피아. UN에서 자신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인공신경망을 통해 복잡한 학습 과정을 거쳐 예술 분야도 학습해 보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내 경악한 적이 있다. 인공지능들 사이에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그들을 생산한 인간의 상상을 넘어 다른 존재로 변신할 우려 또한 짐작해야 할 것이다. 무한하신 하느님의 창조에 기반을 둔 우주의 작은 행성 지구에서는 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로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새로운 사태」는 18세기 중반에서부터 19세기 초반에 기술의 혁신과 새로운 제조 공정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사회·경제 등의 큰 변화를 겪으며 레오 13세 교황(1810~1903)이 1891년 발표한 가톨릭교회 최초의 사회회칙이자 노동헌장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던 시대에서 욕망의 부추김으로 자연을 착취하여 성장을 추구하며 이루어지는 산업화는 우리에게 늘 인간존재의 이해에 대한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게 한다. 과학적 지식이나 기술의 소유 자체가 ‘권력’에 중요한 접근 경로가 되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의 사회구조에서는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자가 사회를 관리하거나 운영·조작할 수 있다.(기획재정부 「시사경제용어사전」 참조) 이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강조한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Technocratic Paradigm)의 해악을 기억하게 한다. 식별 없이 이윤을 목적으로 기술을 받아들이는 경제 논리와 정치는 자연과 인간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찬미 받으소서」 109항 참조) 과학기술이 삶의 질을 드높여 사람의 가치를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양극화의 골을 더 깊어지게 한다면 여기서 잠시 멈추고 삶의 본질적 의미를 되물어야 한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내면 깊은 곳으로 내려가 고독하게 걷는 회심의 여정을 과연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23면

정의와 불의, 식별하는 눈

사순 5주간 월요일 미사 독서는 매우 길었다. 구약 예언서인 다니엘서 13장이었는데 200자 원고지 35장 분량이다. 예언자 다니엘이 억울한 누명을 쓴 수산나를 구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바빌론의 넓은 정원이 딸린 집에 사는 부유한 요아킴이 주님을 경외하는 아름다운 여인 수산나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 무렵 어떤 두 원로가 재판관으로 임명되었고 줄곧 요아킴의 집에 머물며 소송 거리를 들고 찾아오는 이들을 만났다. 사람들이 없을 때 홀로 정원을 거니는 수산나를 눈여겨본 두 원로는 음욕을 품었고 하녀를 내보낸 뒤 혼자 목욕하던 수산나에게 달려가 겁박했다. 우리와 자지 않으면 젊은이와 간통했다고 증언하겠다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수산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달려왔고 재판이 열렸다. 백성의 원로이자 재판관인 두 사람의 일치된 말을 믿고 회중들은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다니엘이 나타나 온 백성에게 외쳤다.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어찌 그토록 어리석습니까? 신문도 않고 사실도 알아보지 않고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재판관인 이 자들은 수산나에 관하여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두 재판관을 분리한 뒤 한 사람씩 간통의 현장이 어디인지 물었는데 유향나무 아래와 떡갈나무 아래로 증언이 엇갈렸다. 거짓 증언이 들통난 것을 목격한 회중은 하느님께 희망을 가진 이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들고 일어나 거짓 증언을 했던 두 재판관을 사형에 처했다. 수산나의 무죄가 입증되자 온 가족이 수산나를 두고 하느님을 칭송하였고 다니엘은 백성 앞에서 큰 사람이 되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이주시켰을 때의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인데 매우 익숙하게 들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일어났던 일이어서 그럴 것이다. 정의와 불의를 공정하게 판단해 상을 줄 사람에게 상을 주고 벌을 줄 사람에겐 벌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지난해 12월 3일부터 123일을 이어온 내란도 다르지 않다. 다행히 헌법재판관들이 다니엘처럼 올바른 판결을 내려 정의와 불의가 명명백백해졌다. 그런데 끝난 것 같은 내란이 여전히 진행형인 것 같아 걱정이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판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켜보는 ‘식별’의 눈이다. 죄 없는 수산나를 죄인으로 몰고 간 재판관도 나쁘지만, 재판관의 말만 믿고 식별하지 못한 채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한 회중들의 잘못도 크다. 재판관의 잘못된 판정을 깨닫도록 눈을 뜨게 해준 예언자 다니엘 덕분에 정의와 불의를 명백하게 식별한 회중들이 뒤늦게 죄인을 벌할 수 있었다. 억울한 모함에 굴복하지 않고 입을 열어 소리쳤던 수산나와, 눈앞에서 벌어진 불의에 방관하지 않고 개입해 진실을 밝힌 다니엘, 그리고 옳고 그름을 따져 마침내 식별해 낸 회중까지 세 주체가 합심해야 정의로운 세상이 가능하다. 남의 것이 내 손에 있다면 그것은 불의다. 열심히 일한 만큼 대우하는 것은 정의다. 헌법을 지키는 것은 정의이고 헌법을 어기고 무시하는 것은 당연히 불의다. 자격 없는 자가 높은 자리에 앉아 사욕을 채우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은 자도, 앉힌 사람들도 불의한 무리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정의이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또한 정의다. 수산나를 살린 식별의 눈이야말로 올곧고 아름다운 정의다. 십자가의 죽음에 그치지 않고 찬란한 부활로 이어진 것 또한 정의다.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우뚝 세우는 이 ‘식별의 눈’을 우리는 가졌는가?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7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존엄한 죽음’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조력존엄사’라는 이름으로 이를 입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조력존엄사’는 얼핏 듣기에는 조력을 받아 존엄하게 죽는다는 의미처럼 들리지만, 실질적으로는 의사의 조력을 받아 자살하는 행위, 즉 의사조력자살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콩을 팥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언어의 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사조력자살을 존엄사로 부르게 된 배경은 1972년 미국 오리건주 주지사였던 톰 맥콜(Tom McCall)이 이 제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시민과 의회의 반발을 줄이고 지지를 얻기 위해 ‘존엄사’라는 표현을 전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결국 오리건주는 의사조력자살을 존엄사, 자비사 등으로 의미를 포장한 결과, 1994년 의사조력자살을 합법화에 성공했고 1997년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연명의료중단 및 유보’를 존엄사 또는 소극적 안락사로 언론이 보도하면서 ‘존엄사’라는 용어에 대한 혼란이 시작됐습니다. 이후 연명의료중단결정의 시행을 곧바로 죽음과 동일시하고, “연명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하더라도 환자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의료행위와 기본 돌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아가 2022년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을 요구하면서 의사조력자살을 안락사의 한 형태이자 존엄사로 간주하는 표현까지 혼용되기 시작했고, 그 오용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칭의 혼용은 단어의 본래의 의미를 흐릴 뿐만 아니라, 생명과 죽음에 대한 사회적 인식마저 왜곡시킬 수 있는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2024년 1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미래 사회 대비를 위한 웰다잉 논의의 경향 및 과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82%가 조력존엄사로 표현되는 의사조력자살에 찬성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사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의 결과가 드러납니다. 국민들이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서비스” 1~5순위로 첫째 생애말기 기간 동안 발생할 수 있는 통증 완화, 둘째, 생애말기 환자의 치료 비용 지원, 셋째, 생애말기 환자 및 가족의 심리 및 정서적 지원, 넷째, 집에서 받을 수 있는 생애말기 의료 돌봄 강화, 다섯째, 생애말기 기간 동안 받는 의료 서비스의 품질 개선 등을 꼽고 있습니다. 이는 “생명이 신성하며, 누구도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대 의학은 대부분의 통증을 충분히 완화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많은 이들이 생의 말기에는 돌봄과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점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의사조력자살과 안락사를 ‘존엄사’로 포장하여, 이를 입법화하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정부는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생의 말기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원에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마저도 삶의 가치를 유용성과 생산성의 기준으로만 평가하는 경향에 물들어, ‘사람들 사이의 친교와 연대’라는 본질적인 가치를 점점 희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한 권의 책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서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존엄한 죽음’의 의미를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의사조력자살과 안락사를 ‘존엄사’라고 부르는 언론, 입법자, 정부 관계자가 있다면, 그 표현이 부정확하다는 점을 분명하고도 정중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입법자들과 정책 담당자들은,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지지가 단순한 ‘찬성’의 표명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제도적 미비와 돌봄 체계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임을 깊이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23면

돌이켜 보기를…

올해는 일제의 식민 통치를 끝내고 해방을 맞이한지 80년이 되는 해다. 우리 주변에서 80세가 안 되는 이들은 겪어보지 못했을 식민지 경험이다. 식민 통치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주권을 잃은 것이다. ‘이제 조선은, 대한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권을 잃었다는 것은 단지, 나라 이름과 깃발, 노래를 잃었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한 민족이 가진 역사와 관습, 전통과 더불어 살아오던 모든 양식을 빼앗긴 것이다. 문자와 말을 잃어버린 것이며, 삶을 잃어버린 것이다. 주인의 삶이 아니라 부속물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35년간의 식민지 삶을 청산하고 해방을 맞이한 날은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은 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해방은 모든 것을 되찾아오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해방된 조국에서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고 싶은 것은 모두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시절 우리 가운데에는 식민지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더 큰 외부 세력에 나라의 존망을 맡기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한 광복은 우리 안의 아픔을 계속해서 만들어 냈다. 분열과 파괴, 미움을 넘어서 증오, 증오를 넘어선 혐오. 나와 생각이 다르다면 그와 그 가족의 목숨마저도 가볍게 여기는 수많은 테러와 학살이 일상화되었다. 해방을 맞이하여 당연히 한마음이 되어 일구어야 할 새로운 역사는 일찌감치 피로 물들고 말았다. 또다시 4·3을 맞이했다. 77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름도 제대로 정하지 못한 아픔으로 가득 찬 사건이다. 당시 30만 명의 도민 중 3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정된다. 열 명 중 한 명이 역사의 잔인한 기록으로만 사망, 또는 사망 추정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 참담함이었다. 그야말로 유해도 찾지 못한 쓸쓸한 넋은 지금도 제주 섬 어딘가에 묻혀 있다. 1948년 11월 17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계엄령이 선포됐고,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됐다. 우리의 나아갈 발목을 잡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아서는 그 무시무시한 계엄령과 국가보안법 말이다. 육지에서는 쉽게 느끼기 어렵지만, 아직도 제주에서 4·3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쓸 수 없는 말이다. 한 집안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얽혀 있고, 서로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피해망상의 연속이기도 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된 이후에도 4·3의 망령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들을 얽어맸으며,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 콤플렉스 등 정신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4·3으로 인해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공안기관의 감시에 시달렸다. 그리고 4.3은 아직도 무수한 이야기를 남긴 채 정리되지 않은 파일로 남아있다. 작년 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복잡한 혼란 속에 던져져 있는 대한민국이다. 서로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오늘의 형국을 일컬어 해방정국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언제든 서로를 적으로 여겨 테러와 시해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전쟁의 포화 가운데 여기서 저기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아우성치는데, 우리는 우리 안의 전쟁을 이미 시작하고 있다. 결국, 남는 것이라고는 폐허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끔찍한 역사를 반복하려는 것같이 보인다. 역사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어리석음은 그 잘못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다. 증오를 부추겨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다면 역사를 다시 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었는지…. “증오, 폭력, 극단주의, 맹목적 광신주의를 선동하는 데에 종교를 이용하는 행태를 척결하고, 또한 살인, 추방, 테러, 억압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데에 하느님의 이름을 도용하지 않게 하는 데에 모든 이가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세계 평화와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인간의 형제애) 프란치스코 교황과 알아즈하르 대이맘 아흐메드 알타예브가, 가톨릭과 이슬람 수니파의 수장이 손을 맞잡으며 공동 서명한 역사적인 선언이다. 이 선언이 우리 안에 깊은 울림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 마음에 증오가 차오른다면 무엇을 위한 증오인지 보아야 한다. 역사와 진실을 저버린다면 똑같은 아픔을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3면

희망을 품고 걷는 십자가의 길 위에서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마에 재를 얹으며 시작된 사순 시기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지를 상기시킨다. 가난한 한계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십자가에서 발견한다. 어긋나고 균열이 가 폐허 된 세상 곳곳을 바라보며 ‘희망의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근간을 부조리한 현실과 인간 실존의 어둠을 뚫고 십자가의 길 위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큰 사랑으로 걸음을 떼어 길을 내시고, 급기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샘 솟는 사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민의 마음으로 길을 내신 예수님의 우주적 사랑을 거슬러 사사로운 생각의 틀에 붙잡힌 악의 하수인들에 의해 십자가형은 집행되었다. 여전히 행해지는 불의의 한가운데서 과연 어떻게 ‘희망을 품은 순례자’로서 발걸음을 떼어갈 수 있을까. 독일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20세기 정치철학의 중요한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사유’는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히틀러 정권 당시 나치 독일에서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과정을 다루며, “히틀러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그를 비판했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는, ‘공무원’으로서의 아이히만의 진정한 무능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에 있다고 보고했다. ‘현실에 맞서 말할 수 없는 무능’,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할 줄 모르는 무능’,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없는 무능력’ 안에 깃든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지닌 이가 곧 아이히만이다. 악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채 개인주의에 머물러 아무 식별 없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때 드러난다. 공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명령 혹은 사적 안위만을 따르는 것은 악을 유발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비극은 계속된다.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하는 제주 4·3 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 침몰사고, 이태원 참사, 심지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학살에서도 ‘악의 평범성’이 낳은 참상을 목격할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조직사회 상부의 명령이다. 이 명령이 공동선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식별해 수행하는 것이 명령 혹은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의 자질이어야 한다. 12·3 비상계엄 당시 상부의 명을 받고 출동한 군 장교 중에는 상황을 파악한 후 부하들에게 총을 뒤로 메라고 한 이도 있었고,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맡은 직위에서 숙고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유하는 상급자는 항명하며 수하들을 바르게 통제할 수 있다. 악의 실체가 드러난 12·3 비상계엄에 대항했던 성숙한 시민들과 죽음을 불사하고 진실한 증언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어 우리가 빛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진정성 있는 이들과 달리 법 지식을 악용해 법망을 빠져나가는 법조인들과 위헌·위법에 위증을 일삼는 최고 통치권자에 대해 마땅한 판결이 내려지길 기다려 왔다. 십자가는 생사를 넘나드는 식별을 통해 수락한 사랑의 결정체이다. 예수님이 받아안은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답하는 말씀(프란치스코 교종)이다.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서도 묵묵히 정의를 지켜내고, 마음이 일러주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해 길어 올린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잠깐 멈춰 십자가에 깃든 하느님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둠 한가운데서도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3면

신앙인의 ‘확신’과 ‘의심’

“왜 신앙인으로 사는가?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레지오 활동을 하고 구역모임 반모임에 빠지지 않는 이유가 뭔가? 크고 작은 봉사직을 맡아 헌신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사업이 잘되어 돈 많이 벌고 자녀들 건강히 자라 원하는 대학에 딱딱 붙게 해달라는 간절함 때문인가? 나와 가족들이 병에 걸렸는데 절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고 살려주셨기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뜨거운 신앙인으로 사는가? 신앙의 궁극적 바람은 무엇인가? 나와 내 가족의 안녕과 행복인가? 내 사업과 내 일들에 대한 보답인가? 내가 꿈꾸고 갈망하는 지위와 명예와 권력인가?”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어 초중고 내내 성당 주일학교를 다니며 학생회와 쎌 활동까지 한 뒤 대학생이 되어서는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다가 혼인 뒤 본당 사목위원으로, ME 발표팀으로 신앙생활을 지속해 온 나에게 스스로 묻는 질문이다. 나는 왜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가? 대학 4학년을 앞둔 겨울방학 때 서울에 우리집이 처음 생겨 감사한 마음에 집 가까운 잠실성당에 찾아가 미사를 드린 뒤 보좌신부님께 뭐든 시켜달라 했더니 주일학교 교사로 불러주셨다. 교사학교를 수료한 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는데 첫 수업 때 학생들에게 들은 얘기는 “교리 수업 재미없어요”였다. ‘멘붕’을 가라앉히며 그럼 뭘 하면 재미있겠냐고 물으니 축구를 하자길래 다음 주일엔 학생들을 데리고 한강에 가서 실컷 축구를 한 뒤 커다란 들통에 라면을 끓여 먹였더니 더없이 좋아했다. 교리를 전달하는 것보다 예수의 생애를 생생하게 알려주고 싶어 동료 교사들과 ‘예수 공부’를 시작했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와 사회를 이해하고, 예수가 만난 사람들과 어떤 일들이 있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공부했다. 특히 예수가 누군가와 만나 음식과 술을 나눈 ‘잔치’에 관심이 끌려 복음서에 나오는 잔치 이야기들만 따로 모아 비교표를 만들기도 했다. 지도를 펴고 예수가 33년 생애를 보낸 장소들도 짚어보았다. 이현주 목사의 「예수가 만난 사람들」에 실린 세리 자캐오 이야기를 읽을 땐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톨릭교회에서 발간된 책들뿐만 아니라 안병무 박사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간한 책들과 잡지「살림」도 읽었고 좋은 강의가 있을 땐 직접 들었다. 민중신학, 해방신학, 사회학적 성서해석 등을 공부하며 예수가 살고 죽고 부활했던 그때 그곳이 생생한 ‘현장’으로 다가왔고, 그 현장은 2000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동료·학생들과 함께했던 젊은 날의 예수 공부 덕에 오랫동안 신앙을 잃지 않고 살았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또 내게 묻는다. “나는 왜 신앙인인가?” 같은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왜 이렇게 서로 다를까? 대한민국은 지금 두 쪽이 난 것 같다. 신앙인들의 정치적 견해야 다를 수 있겠지만 마치 같은 신앙의 이름으로 전혀 다른 신을 섬기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예수 신앙의 핵심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약자들에 대한 사랑 아닌가? 예수 신앙의 뿌리인 야훼 신앙 또한 노예들을 해방해 주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아닌가? 입으로는 예수를 외치면서 실은 예수를 처형했던 유다 기득권과 로마 군대를 섬기는 것은 아닐까? 하느님을 부르짖으며 바알신 맘몬에게 달려가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영화 <콘클라베>를 보며 가슴에 꽂힌 말이 있다. 로렌스 추기경의 대사였는데, 우리 신앙인들에게 전하는 하느님 말씀처럼 들렸다. 한 톨도 안 되는 너의 그 확신을 버리고 의심하라는.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다양성’이고,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확신’입니다. 확신은 화합의 가장 큰 적이고 관용의 치명적 적입니다. 믿음은 살아 움직입니다. 믿음은 ‘의심’과 함께 존재합니다.” 글 _ 정석 예로니모 교수(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3면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우리나라 1970년대의 인구 조절 정책은 가족계획 표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 자녀 갖기’에서 시작해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1980년대에는 ‘하나씩만 나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으로 변경됐습니다. 정부는 인구 억제를 위해 피임과 정관수술을 장려하는 국민운동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세 자녀 가정에는 주민세와 의료보험료를 추가 부과하는 정책도 시행했습니다. 이러한 인구 억제 정책은 1990년대까지 이어지며, 피임과 정관수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자리 잡았으며, 낙태에 대한 묵인도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고 다자녀 출산을 부담스럽게 여기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출산율이 급격하게 감소하자, 가족계획 구호는 ‘허전한 한 자녀, 흐뭇한 두 자녀, 든든한 세 자녀’ 등으로 180도 바뀌었지만, 국민들은 다자녀 출산을 사회적 의무로 여기거나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가치와 태도가 변화했음을 의미합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우선 과거에 비해 우리 사회는 더 자유로워졌고, 더 부유해졌습니다. 반면, 경제 성장을 위해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했고, 그 수단으로 낙태를 묵인하고 조장하면서,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결국 인간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관이 전도되고 물질이 중심이 되면서 갖가지 사회문제가 여기저기서 표출”되고 있습니다.(「가톨릭신문」 창간 66주년 기념 특별 대담, 1993년 4월 25일) 이로 인해 약자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와 물질 중심의 사고방식이 확산되며, 우리의 마음은 점점 황폐해졌고, 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국회의 입법과 정부의 정책은 우리 사회와 국민 개개인뿐만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까지 직접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최근 정부 정책이나 국회의 입법안을 보면, 여전히 과거처럼 매우 근시안적이고, 잘못된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보건복지부는 ‘배아·태아 대상 유전자 검사 가능한 유전질환’을 2009년 63개 항목에서 현재 222개 항목으로 확대했습니다. 이 검사를 통해 유전적 이상을 완화하거나 치료할 수 있는 유전질환은 극히 제한적이며, 유전자 이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 발현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배아나 태아를 선별하는 목적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정책이 발달상의 결함을 지닌 아기의 출산으로 인해 발생할 비용과 이익을 비교하는 관점에서 정당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이로 인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심화되고, 바이오산업이라는 시장 경제 논리 속에서 출산이 마치 상품 검증 과정처럼 여겨지며, 일정 기준에 미치지 못한 아이를 임신한 여성들에게 낙태 압력을 가중시키는 데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또한 지난해 10월 국회에서 발의된 모자보건법 일부 개정법률안(이재강·정혜경·강경숙 대표 발의)은 초저출산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비혼 임신 시술 지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합니다. 임신과 출산에 관한 결정을 혼인 여부에 따라 제한하는 것은 헌법이 명시한 행복추구권의 보장과 배치된다는 것입니다. 과거 인구 억제를 위해 태아를 경시하는 사고방식이 이제는 태아를 생산물처럼 여겨 국가 차원에서 인구 증가를 도모하며, 비혼인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기 위해 아이를 소유물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비혼 임신 과정에는 정자 및 난자 매매, 체외수정, 유전자 검사 및 유전자 편집, 대리모 등 거대한 의료 산업 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과 혼인 및 가정의 의미를 상실한 인구 정책이나 개인의 행복추구는 머지않아 우리 사회에 부메랑이 되어 또 다른 사회문제를 초래할 것입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우리가 깊게 성찰해야할 현실입니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23면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들

낯선 곳을 찾아갈 때 갑자기 용감해지는 경우가 있다. 아는 곳도 아닌데, 그냥 계속 가면 목적지가 나올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다. 어쩌다 한 번 그 예감이 맞으면 행복한 일이겠으나, 대부분은 지나친 길을 되돌아 나올 때가 많다. 목적지도 잃어버리고, 목적지로 가는 길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떠올려 보면 운전할 때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두껍고 묵직한 지도 하나만 있으면 가보지 않은 장소를 찾아갈 때도 자신 있었다.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그 역할을 하지만, 지도를 잘 보는 사람이 능력자로 인정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계엄 선포로부터 시작하여 탄핵과 체포 구금, 헌법재판소, 태극기와 성조기, 응원봉, 남태령 대첩, 키세스 부대, 서부지법, 찬성과 반대…. 들려오는 소리는 많은데, 담을 말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우리는 이렇게 또다시 가르고 갈라서 적이 되어 살아야 하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셨던 그날이 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 이처럼 혼란의 시대에 우리에게 그 길을 알려주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이 혼란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기준 삼아 살아야 할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4항은 “현대 세계의 상황에서 사제들의 설교는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듣는 사람들이 마음을 더욱 적절하게 움직이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일반적으로나 추상적으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 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하여야 한다”고 밝힌다. 이에 가톨릭 사회교리의 중요한 내용인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들을 상기하면서 우리의 길을 찾고자 한다. 첫째는 진리에 입각하여야 한다. 진리를 가장한 수많은 말들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고발했던 바리사이들처럼,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기 위해 거짓을 동원한 이제벨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양 선포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면 우리의 근본 가치를 송두리째 저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자유이다. 인간존엄성의 탁월한 표징인 자유를 행사할 권리는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선물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가치로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로서의 자유’와 도덕과 양심에 따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는 인간다운 사회생활을 이끄는 귀중한 가치이다. 다음은 정의이다. 교회는 정의를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이웃에게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라고 한다. 교회는 ‘가장 고전적인 정의의 형태인 교환 정의, 분배정의, 그리고 법적 정의에 대한 존중’을 요구한다. 누구의 편이어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르는 문제이다. 옳은 것은 무엇보다도 도덕적이어야 한다. 마지막 가치는 사랑이다. ‘사랑은 정의를 전제로 하는 동시에 정의를 초월한다. 정의는 사랑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개별 행동을 재촉하는 사랑’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사랑’을 가르친다. 고통스럽고 버림받은 이들을 저버리지 않고 손을 내미는 것이 개별 행동을 재촉하는 사랑이라면, 그가 처한 처지를 만들어 내는 사회적 요인을 제거하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사랑이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들을 고려하여 우리가 처한 사회생활의 면면을 살핀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가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23면

숲의 죽음은 우리 삶의 종말이다

‘숲의 죽음은 우리 삶의 종말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형 벌목업자들과 농장주들이 아마존을 약탈하는 것에 대항했던 ‘아마존의 성녀’ 도로시 스탕 수녀(1931~2005)는 2005년 괴한에 의해 총살당했다. ‘숲의 수호자’(Guardians of the Forest)에 참여한 이들이 잇따라 아마존에서 죽음을 맞았다. 2020~2021년 1만3235㎢의 아마존 열대우림이 사라졌다. 아마존 산림파괴는 2019년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가속되었다.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변화와 멸종은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탄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실정인 우리나라의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4대강 토목사업으로 자연스럽던 강의 흐름을 막아 환경을 파괴했는데, 이제는 이 작은 나라에 탄소 배출량이 가장 높은 운송 수단인 공항 8개를 더 짓겠다 하니 한심한 노릇이다. 이미 있는 것에서도 적자가 나는 마당에 공항을 더 늘리겠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가속화되는 기후변화, 멸종위기에 놓인 생물종과 연결고리가 끊겨 가는 생태계는 우리의 마음을 타게 한다. 지난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무안 국제 공항의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탑승자 181명 중 179명이 숨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 사고의 최초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조류 충돌’이다. 한때 멸종위기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되었던 가창오리 무리의 이동 경로가 사고 항공기 비행경로와 겹쳤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되었다. 공항을 신설할 때 환경을 고려했을 터인데 조류의 서식지와 먹이터 등 활동 지역과 이동 경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변수를 헤아리지 않은 것이다. 새들은 해가 뜨면 무리를 지어 먹잇감을 찾다가 해 질 무렵, 큰 무리를 이뤄 비행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군무를 연출했겠는가. 그러나 이 자연의 위대함은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경로로 비행하다 문명과 충돌하게 된 것이다. 가창오리 또한 예측불허의 사고를 당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인공은 자연에 의해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5년 주기로 수립하는 제6차 공항개발종합계획(2021년~2025년)에 의하면, 백령, 서산, 새만금, 흑산, 가덕, 제2제주, TK(대구·경북), 울릉의 공항이 신설될 예정이다. TK를 제외한 공항 부지는 모두 철새도래지로 새들의 삶터이다. 이 중 새만금은 참사가 일어난 무안 국제 공항보다 조류 충돌 가능성이 무려 610배나 높다고 보고한다.(전북녹색연합) 산을 깎아 바다를 매립 후 건설할 가덕도, 염생식물과 갯벌 등 블루 카본(blue carbon)으로 인해 기후변화에 대응할 잠재력이 큰 새만금 신공항 등은 수려한 자연을 파괴한 후 불을 보듯 뻔한 적자의 위험을 안고 들어선다는 점을 신중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현재 국내 공항 15개 중 인천, 김포, 제주, 김해 공항만이 흑자다. 2시간 이내 항로를 폐쇄하는 유럽의 추세를 직시해야 한다. 공항 건설은 대형 국책사업이다. 계획수립, 건설 후 개항까지 장기간이 소요된다는 말이다. 정치적 혼란으로 민생이 어려운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재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질서에 어긋난 기후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신공항 건설은 철회되어야 마땅하다. 지금은 하늘에서 새가 내려다보듯(Bird's-eye view) 우리의 시선을 넓힐 때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고양이의 눈으로(Cat's-eye view) 먹잇감을 찾아 물어버린다면 지구는 생존능력을 잃을 것이다.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의 삶에서 돌아서야 한다.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고유한 선과 완전성을 지니고 저마다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선의 빛을 반영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그들 자신과 환경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사물의 무질서한 이용을 피해야만 한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 받으소서」 69항 참조)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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