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한 사소하고 사소한 기억들 2

2011년 일본 동해에서 일어난 대지진은 일본 열도를 동쪽으로 2.6미터 옮기고, 지구 자전축을 16.5cm 이동시킬 만큼 큰 것이었다. 밀려온 쓰나미로 2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됐고, 부상자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 피해가 컸다. 세계의 모든 뉴스는 이 소식으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다시 해저 지진이 일어났고 쓰나미가 발생했음을 알리는 뉴스가 전 세계로 타전됐다. 늦은 오후였다고 기억하는데, 일본 기상청에서는 이 쓰나미가 오후 6시가 넘은 시간 일본 동해안으로 상륙할 것을 예고하며 피난을 당부하고 있었다. ‘내 기도 - 별로 잘 살지도 못하는 내가 드리는, 그리 길지도 않은 기도 - 가 과연 이 거대한 자연 현상 앞에 – 심지어 이미 일어났다고 하는 -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견고하고 오래된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나는 기도했다. 차마 없애 달라고는 못 하고 –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해 절대 없어지지는 못할 거니까 - 피해가 적게 해달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기다리다가 불안한 마음으로 오후 6시부터 매시간 뉴스를 찾아보았는데, 새로운 쓰나미에 대한 기사는 없었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었을까, 뉴스에서 간단한 공지가 있었다. “오늘 저녁 일본 동해안에 당도할 것으로 예측되던 쓰나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소멸하였습니다.” 이 짧은 구절 하나가 나를 건드렸다. 뉴스는 다른 뉴스들로 덮이고 시간이 세월이 되도록, 나는 그때의 충격과 의문을 간직하며 물었다. ‘왜지?’ 하고…. 그러나 그 질문과 함께 대답도 이미 내 마음속에 있었다. “왜냐하면 너와 온 세상이 한마음으로 함께 기도했기 때문이지.” 그 후부터 기도는 내게 “미안하다 기도밖에 해줄 수 없다”가 아니라, 거대한 행위가 되었다. 절망하는 친구를 붙들고 쓰나미 이야기를 해주며 말했다. “잊지 마. 기도는 쓰나미도 멈추게 한다는 것을…. 피해가 적게 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심지어 소멸해 버렸다는 것을….” 내 말에 무슨 근거와 권위가 있을 리가 없지만, 친구들은 희한하게도 내 말을 믿었다. 그들이 믿고 용기를 내는 것을 보고 나도 더 용기가 났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기도할 때마다 나는 막연히 느끼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얼마나 기다리시는지. 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졌나? 내 작은 경험을 하나 더 나누면 이렇다. 서울에서 평일 미사를 갈 무렵, 나는 친구와 처음으로 본당 교우가 되었다. 그 친구는 미사 시작 전 항상 성체조배실에서 조배를 하고 나오곤 했었다. 미사 때마다 맘이 울컥울컥해 눈물보다 많이 나오는 콧물 때문에 휴지나 손수건이 꼭 필요했던 나는 그날 성당에 가자마자 내가 둘 다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할지 망설이다가, - 울지 않는 날도 있으므로 – 그냥 기도 했다. “하느님, 아녜스에게, 올 때 휴지 좀 가져오라고 해주시겠어요?” 내가 이 기도를 믿음으로 했을까? 모르겠다. 반쯤은 그랬다. 그날따라 친구 아녜스는 입당 성가가 시작되도록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서 있는데 성가가 2절로 접어들 즈음, 아녜스가 내 옆자리로 오더니 제일 먼저 휴지를 내밀었다. 이걸 다시 이야기하고 있는 나도 웃음이 난다. 이걸 몇 명이나 믿을까? 미사는 시작되고 ‘어떻게 된 거야?’하고 물을 시간이 없었다가 미사가 끝나고 내가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네가 문자 보내지 않았어?” 물론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잠시 서로 마주 보다가 웃었다. 우리는 한때 이야기했었다. 화살기도는 문자메시지, 긴 기도는 편지, 그리고 미사는 만남. ‘무슨 소용이 있을까’하는 엄청난 유혹을 물리치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두 손을 모은다. 우리나라, 북한, LA 산불,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시리아와 중국을 위해. 주님은 우리의 희망을 부끄럽게 하시지 않을 것이기에.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2025-01-26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시골에 살면서 많이 일어난 변화중 하나가 미사참례에 대한 것이다. 내가 살던 서울에서 나는 매일 새벽 미사에 참례했었다. 그런데 시골로 오니 우선 새벽 미사는 인근 50킬로 반경 내에 하나도 없고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안 가고 또 안타깝다- 평일 오전 미사도 아주 적거나 신부님 사정에 따라 없기가 일쑤였다. 나는 인근 성당의 미사 시간을 다 알아놓고 차로 한 시간 이상 달려가 평일 미사 참례를 하고 있다. 그래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참례가 힘들다. 그러던 어느 날 인근 성당에 미사가 없어 좀 먼 성당으로 평일 오전 미사를 드리러 갔다. 성당 정문에 이런 게 걸려있었다 ‘우리는 희망한다 윤석열 파면을’, 지난번에 왔을 때도 ‘우리는 국민에게 총 쏘는 대통령 필요없다’라는 플래카드를 걸어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대림 기간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 강론 시간에 한 야당 정치인을 이사야 예언자 같다고 말씀하셔서 내 귀를 의심했던 기억이 났다. 사춘기 시절, 우리 본당 신부님은 정의구현사제단이셨다. 내가 고2였던 유신 말기 어느 날, 신부님은 우리들 앞에서 사복 경찰에 체포되어 가셨다. 당시 안동가톨릭농민회 수배자를 은닉해 준 혐의라고 들었다. 신부님은 미사 시간에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었다. 대신 우리들 가슴에 ‘가난한 이웃’이라는 말을 새겨 주셨었다. 내 인생은 아마도 그때 반 이상 형성되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지금도 기억한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성당에 가면 있었다. 봉사라든가, 고통의 의미, 희생과 거룩함 혹은 생명. 가난한 이웃에 대한 숭고한 사랑 같은 거…. 그리고 또 있었다, 독재하에서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그 단어, 정의. 그때에도 고액 과외는 있었고, 그때에도 학력 우선주의는 있었으며, 부동산 투기는 노골적으로 만연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경멸할 수 있을 정도로 성당은 멋진 곳이었다. 성당에 와서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면 비로소 나는 내가 인간인 것이 허무하지 않았고, 산다는 것의 의미가 죽음보다 귀하게 여겨졌다. 나는 학교를 싫어했지만, 성당은 좋았다. 내가 존재해야 할 의미를 가르쳐주는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50년이 지났다. TV만 틀면, 핸드폰을 켜면 온 세상이 둘로 나뉘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보거나 듣지 않아도 나는 그들의 말들을 10자 내외로 요약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쟤 탓이고 쟤를 죽여야 내가 산다.” 미사 시간에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요’ 하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운동권으로 살면서 민주를 외칠 때, 나와 내 동료들은 비민주적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한다고 거리로 나섰을 때, 우리 가족에게 나는 독재자였다. 내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외칠 때, 내 가슴은 전쟁터보다 시끄러웠었다. 토마스 머튼은 히틀러를 두고 “우리 모두의 악이 그에게 가서 열매를 맺었다”라고 했다. 독재 시절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독재자 밑에서 청년 시절도 보내고 어쩌면 내 마음속에도 독재자가 산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세대가 나이 들어 다 사라져야 비로소 입이 아니라 몸으로 민주주의를 살 수 있는 세대들이 오는 것이 아닐까?’하고 친구와 자조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돌아서 나오는 길, 성당 한쪽에 근처의 사찰에서 보낸 성탄 축하 플래카드가 그제야 눈에 띄었다.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주려고 아기 예수님 오셨음을 축하합니다!’ 희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빈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2025-01-19

고통의 문제

유럽에 살고 있는 ㄱ은 지난 몇 년 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아이의 문제로 속이 문드러지는 일은 나도 지지 않는 분야(?)여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했고 함께 기도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냉소적인 신자였다. 그 무렵 나는 그녀와 함께 메주고레 성지 순례를 했었다. 기도를 바치며 십자가가 있는 산으로 올라가는데 그녀 혼자 돌연 쓰러지는 일이 일어났다. 쓰러진 그녀는 몽롱해 보이는 의식 속에서 말했다. “언니!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만드셨어. 우리를 사랑으로 만드신 거야.”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냉철했던 사람이었기에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이 중얼거림은 그러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게 남았다. 나중에 내가 물어보니까 그녀는 그 말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후 그녀가 달라진 것은 확실했는데 그만 그 이후 딸의 엄청난 방황 앞에 마주 서게 된 것이었다. 몇 년에 걸친 그녀의 고통과 회개 그리고 가족들의 폭포수 같은 눈물들을 받아낸 후 아이는 그 힘든 방황을 극적으로 끝내고 세계 유수의 대학인 취리히 의대에 진학했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신앙심 깊으신 그녀의 시댁, 이런 때일수록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던 남편의 눈물겨운 기도와 사랑이 하늘에 닿은 덕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새해 인사차 온 전화에서 ㄱ은 “나쁜 소식”이야 하고 말했다. 그녀와 내가 친구가 되게 해준 다른 친구 ㄴ이 암 선고를 받고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좋은 친구였던 ㄴ과 내가 헤어진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금전 문제까지 얽혀 나는 그녀에 대해 포기하고 있었다. 미워하지 않는 것만도 내게는 힘이 드는 일이었으니까. ㄴ으로 말하자면 좋은 남편에 여유 있는 생활, 반듯하고 열심한 신자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ㄱ과 내가 아이들과 다른 이유로 고통을 받는 동안 ㄴ은 미모와 건강에 신경을 썼고 바티칸시국을 비롯한 모든 순례지를 여행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공주보다 더 우대해 주었고 공주의 친구들인 우리들까지 가끔 그 대우를 받았다. “병 자체보다 병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ㄴ을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아. ” ㄱ이 말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ㄱ과 내가 할머니가 되도록 고통에 찌들어갈 때 ㄴ은 최첨단의 새로운 건강 보조 식품을 우리 앞에 내보이곤 했으니까. ‘인생이란 참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한 번 더 느끼면서 문득 나도 모르게 말했다. “ㄱ아 우리 지난 몇 년간 많이 많이 고통스러웠던 거 그거 어쩌면 하느님이 우리 보호해 주시려고 그런 거 아닐까.” ㄱ이 의아해했다. “우리에게 그 고통이 없었다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의 교만은 얼마나 자랐으며 온갖 유혹들 앞에 우리가 성히 보존되었을까. 그 고통이 있어 거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느라고 우리는 교만하지도 못했잖아. 명품백이나 건강 보조제 같은 거 신경도 못 썼잖아. 어쩌면 말이야, 어쩌면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고통의 울타리 속에서 잠시 보호해 주신 것인지도 몰라.” 강연할 때 나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말한다. “다 물어보세요! 저는 고통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도 고통이 다른 치명적인 유혹과 죄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처음 해보았다. 그러자 잠깐이지만 전율이 지나갔다. C. S. 루이스의 말대로 하느님은 기쁨 속에서 속삭이시고 일상 중에 말씀하시며 고통 중에 외치신다면, 어쩌면 고통 속에 헤맸던 지난 몇 년간의 ㄱ과 나는 하느님의 외침 안에서 그 우렁찬 복음과 함께 사는 축복을 그러므로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나갔던 것이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2025-01-12

희망을 잃지 말기를 바라요

2008년 2월 21일 새벽 미국 네바다주, 벤 옥슬리라는 남성이 자신의 집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직 벤만이 죽었고 용의자는 그의 곁에서 잠자던, 재혼한 지 2년 된 아내 멜리사가 되었다. 이 의심은 벤이 거액의 사망 보험금을 들어놓은 것이 알려지며 더 확실해졌다. 벤에게는 전처에게서 낳은 딸 엘리사가 있었는데 엘리사는 세상에 없는 아빠 바라기였다. 새엄마가 용의선상에 오르자, 당국은 6세의 엘리사를 친엄마에게로 격리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새엄마가 범인이라는 언론과 친엄마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경찰에게 사건이 있던 그날 밤 누군가 밖에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고 어떤 사람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증언하게 된다. 6세 소녀의 이 믿기 힘든 그러나, 단호한 증언에 의해 경찰은 사건을 재수사 하게 된다. 죽은 벤과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조사받게 되었는데 벤에게는 평소에 원한을 살만한 사람이 없었다. 단 한 사람, 엘리사의 친모 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돈은 그날 남자 친구와 함께 집에 머물렀다고 하고 남자 친구 역시 그렇게 대답했다. 이 둘에게는 마약을 비롯한 다수의 전과가 있었지만, 뚜렷한 살인의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돈의 아들이며 엘리사의 이복 오빠가 경찰을 찾아온 것이다. 그는 군대에 입대하는 길이었다. 망설이다가 그는 말했다. 사건 전날 자신의 엄마 돈이 남자 친구와 벤의 살인을 모의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이다. 이로써 사건은 극적으로 전환되어 먼저 남자 친구가 이어 친엄마 돈이 살인을 자백한다. 그날 밤 6살 된 엘리사가 본 어둠 속의 사람은 자신의 친엄마였던 것이다. 돈은 무기징역에, 실제로 총을 쏜 남자 친구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처해진다. 이 살인으로 아내인 멜리사에게는 물론 아빠만 바라고 살던 어린 엘리사에게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새겨졌다. 엘리사는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지 못했고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형이 확정될 때까지 4년의 세월이 흘러 10살이 된 엘리사는 뜻밖의 부탁을 재판장에게 하게 된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인 엄마의 남자 친구를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만남이 있던 자리에서 엘리사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기를 바라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친엄마마저 감옥에 보낸 이 소녀의 얼굴은 담담했으나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새엄마의 품에 안겨 함께 울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이 새엄마와 10세 소녀는 이렇게 하여 치유의 어려운 첫발을 내디딘다. 치유의 시작은 비극의 받아들임 그리고 용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엘리사의 이복 여동생, 이제는 고아가 된 브랜디를 입양하기로 한 것이었다. 짧은 행복 뒤에 남편을 잃어버리고 경찰과 언론에 의해 살인자로까지 몰렸던 멜리사는 이제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훗날 가진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그날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좋은 추억을 더 많이 생각하려고 해요. 지금도 그가 아주 그립지만 어느 때보다 그가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는 걸 느껴요. 그에게 딸 엘리사와 평생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거죠. 사랑하니까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어엿한 가족입니다. 저녁이면 모여 따뜻한 포옹을 하니까요.” 참혹한 범죄 속에서 상처 입은 여인과 소녀가 건져 올린 작고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되새겨보며 보내는 나의 성가정 축일은 복되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2025-01-05

기도에 대한 사소하고 사소한 기억들

구순이 넘으신 나의 어머니는 가톨릭 여학교 출신이시다. 고등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 나의 언니도 어머니와 동창이 되었다. 이런 영향 때문이었을까? 집안에서 아무도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없었지만 내가 집 앞의 성당을 찾아간 것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겨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교리를 배워나가면서 나는 엄마와 자주 언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건 다시 성당에 나가시라는 나의 설득에 당시 이미 20년 가까이 냉담하고 있던 어머니가 그걸 거절하면서였다. 그 후로도 40년이 넘도록 나와 언니는 어머니에게 전교를 해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단호하고 차가운 거절뿐이었기에 나는 모든 것을 단념하고 언제부터인가는 그 희망 없는 기도조차 멈춘 지도 오래였다. 그런데 10여 년 전 인생의 시련 속에서 “하느님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하고 내가 하늘을 보고 원망의 말만 되뇌던 그때, 그리하여 몹시도 불행하던 그때 갑자기 본가로부터 소식이 들려왔다. 어머니가 다시 성당에 나가시는데 심지어 당시 80이 넘은 아버지까지 모시고 가서 세례를 받게 하고 이제 관면 혼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결혼식 날(?) 꽃다발을 들고 찾아간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어떤 신비하고 어떤 대단한 일이 일어났기에 50여 년의 냉담을 풀게 되셨는지 말이다. 어머니가 대답했다. “글쎄 말이야…. 뭐 큰일은 없었어. 그냥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 이제 그만 가자, 하고.”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아파트 앞 눈길에서 미끄러졌어. 순간 내 골반은 다 부서지겠다 예감했지. 그런데 누가 내 옆구리 사이로 손을 넣어 나를 잡았어. 나는 눈길에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단다. 순간 눈물이 터지더라. 그게 예수님 손이었던 걸 난 느낀 거야.” 엄마는 아직도 울먹이고 있었고 나도 울컥했다. 엄마랑 이런 대화를 하는 날이 오다니, 꿈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내 머릿속으로 선명한 영상이 떠올랐다. 열네 살인가 그 언저리 어느 날, 무릎을 꿇고 기도했었다. “하느님 저 고약한 아줌마 말고 여학생, 구두 위로 눈이 쌓여 발이 얼어붙어도 매일 같이 그 깜깜한 새벽 미사를 갔던 소녀를 기억해 주세요. 그 소녀가 우리 엄마 마리아에요.” 40년도 넘는 기억이 이렇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너는 이 기도를 잊었어도 나는 그걸 잊지 않았단다.” 늘 생각하는 일이지만 그러니까 아무리 나쁘다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우리가 불행할 수가 있을까, 기도할 수 있는 한 말이다. 글_ 공지영(마리아) 소설가 1988년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대표작으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인간에 대한 예의」, 「도가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등이 있으며,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1·2」,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등을 통해서는 신앙과 하느님 체험을 나누고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펼쳤다. 한국가톨릭문학상(장편소설 부문)을 비롯한 21세기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