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야, 사람들이 안 믿어서”

나는 아직도 밤마다 악몽을 꾸고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였다. 더구나 이 사건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도 나에게는 작지만 의문이다. 영화 <레퀴엠>(동명의 미국 영화가 아니라 2006년도 독일 영화)과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에밀리 로즈의 퇴마) 2005>가 그들이다. 이 두 영화는 모두 1976년 독일에서 일어난, 아넬리즈 미헬의 구마 의식으로 인한 사망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이비 종교가 아니다. 직접 교구의 허락을 받은 가톨릭의 두 신부가 이 구마를 집전했었다. 미헬은 당시 대학 휴학 중이었고, 죽었을 때 체중은 탈수와 영양실조로 30kg에 불과했다. 두 신부는 물론 부모까지도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유죄가 확정되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왜 30년도 더 지나 영화화가 될 만큼 화제가 되었던 것일까. 두 영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질문에 답해간다. 독일 영화 <레퀴엠>이 좀 더 현대적이고 심리학적 방식으로 그리고, 미국 영화는 할리우드의 전형적 방식으로. 미헬은 16살 때부터 간질 발작을 보였다. 정확하게 간질은 아니었다. 의학도 정확히 그 원인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원인 불명의 기억상실, 환청과 환시 성물이나 교회에 대한 혐오, 극도의 종교적 불안 등이 증상으로 나타난다. 바야흐로 1970년대 독일의 대학. 68혁명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는 독일에서 미헬이 이런 증상을 호소할 자리는 없었다. 그녀의 신앙은 비웃음을 당했고, 가족은 구태의연했다.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전통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란 미헬이 이런 분위기에서 외로웠을 것도 짐작이 된다. 친구들이 끝까지 병원행을 권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다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증상은 악화했고 미헬 자신도,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구마를 허락한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정신병이든 빙의든 한 젊은 여성이 그렇게 죽어가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처음으로 영화 말미에 악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법정에서 증거로 제시된 녹음테이프를 통해서였다. 모두 여섯 명으로 자신을 소개한 그들의 실제 목소리가 – 미헬의 입을 통해 나오지만, 그 여섯 명의 목소리는 모두 다르다 - 영화 말미에 소개된다. 우리가 살면서 악마의 목소리를 듣게 될 날이 또 있을까? 가장 끔찍했던 것은 묵주에 관한 질문이었다. 신부가 묻는다. “왜 묵주를 무서워하지?” 그러자 악마가 대답한다. 여러분은 설마 악마의 대답이 순하고 논리적이라고 상상하지는 않으시리라. 그는 단절적인 단어로 중얼거리며 혼란스럽게 대답한다. 정리하자면 대답은 이랬다. “왜냐하면 그게 우리를 방해해.” 그리고 악마는 웃는다. “하지만 아무도 기도하지 않아. 다행이야 사람들이 안 믿어서.” 법정은 유죄를 인정했으나 신부 두 사람에게는 모두 집행유예를, 부모에게는 그동안 그들이 겪었던 고통이 어떠한 형벌보다 더했으리라는 것을 참작하여 석방한다. 녹음테이프를 통해 생생히 전해지는 악마의 목소리를 중세 법정도 아닌 곳에서 인정하기도, 그렇다고 거짓말로 치부해 버리기도 난감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여름, 나는 두 영화 덕에 묵주를 꼭 붙들고 살고 있다. 그들이 또 이렇게 말할까 봐 말이다.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 우리가 없다고 말하는 거야. 다행이야, 그들이 안 믿어서.”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2면

모든 어미들의 모범

친구 하나가 딸 때문에 고통받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위 때문에 고통받는 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집도 장모와 사위가 대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이 들어 알게 되었지만 사람 사이의 갈등이 생기면 일단 거리를 두는 것이 첫 번째 처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나의 충고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은 마흔이 다된 딸의 일상을 어미인 내 친구가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안다. 어미들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유혹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그의 하느님이 되고 싶은 것 말이다. 비록 개신교이나 신앙이 깊은 그였기에, 하느님께 맡기고 모든 것을 침묵하기를 권했으나 “자신은 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말로 내 충고는 거부되었다. 그가 딸 인생에 개입하려 하듯이 나 또한 친구의 인생에 개입하려 하는 것 같아 대화를 끊었다. ‘성모님께서 십자가 아래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던 것을 떠올려봐’ 했지만, 그것 또한 공허한 메아리가 되리라. 외람되지만 나는 가급적 우리 순교성인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공감 능력 과잉으로 고통받는 터라 그랬다. 그러나 주교회의에서 발간한 「한국천주교 성지순례」 책자를 들고 성지를 방문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당연히 그중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곳을 주목하게 되었다.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추자도, 거기에 아들 황경한을 놓고 떠난 정난주 마리아를 알게 된 것은 그때쯤이었다. 말들이 사지를 묶어 끌고 가며 젊은 육체를 생으로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으로 남편 황사영을 잃고 난주 마리아는 시어머니와 함께 두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유배길에 오른다. 아시다시피 정약용의 조카이며 황사영의 아내, 정하상 바오로의 누이였던 그녀는 유복한 양반 집안에서 자랐다. 제주로 유배 가는 길에 그녀는 몰래 감춰놓았던 패물들을 사공에게 다 주며 추자도에 들러 거기에 아기를 놓아두고 가자고 애원한다. 제주에 가서 관노로 살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죄인의 아들로 손가락질받으며 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감옥에서 이미 아기 경한의 옷에 이름과 생년 집안을 수놓아 둔 후였다. 햇볕이 작열하는 갯바위 위에 강보에 싸인 아기를 두고 떠나는 난주 마리아의 신앙 이야기는 울음을 참기 힘들었다. 세 아이를 낳고 키워본 어미인 나로서는 차라리 일찌감치 내가 죽는 것을 선택할 것이며, 그도 아니라면 차라리 아이가 죽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을 터였다. 실종은 죽음보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대체 얼마만 한 신앙이 아기를 갯바위 위에 놓는 모험을 택하게 한 것일까. 모세의 어머니도 나일강에 모세를 띄우고 모세의 누이를 시켜 지켜보게 하였는데 난주 마리아의 경우 이는 그보다 더 끔찍한 형벌 아닌가. 그녀는 아주 훗날 아이가 오씨 집안의 어부에게 발견되어 양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의 관노가 되어 60여 세의 일생을 산다. 살아생전 그들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성모님께서 나중에 요한 사도와 함께 제법 긴 인생을 사신 것과 비슷하다. 그녀는 아직 성녀도 복자도 아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성인의 삶이 있을까. 이 치욕을 견디며 산 그녀의 신앙은 어떤 순교 성인의 삶보다 우리를 울린다. 이 고되고 치욕스러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이 어떤 자세여야 하는지 그녀보다 더 가르쳐 주는 스승이 있을까 싶다. 그녀야말로 신앙을 가진 모든 어머니의 모범, 가장 성모님을 닮은 우리의 신앙 선조가 아니실까. 진도에서 추자도로 떠나는 배의 이름이 산타 모니카인 것은 우연일까. 아무래도 추자도를 방문하게 되면 오래오래 그 갯바위에 앉아 기도하게 될 것 같다. 난주 마리아, 우리 모든 어리석은 어미들을 위해 빌어주소서.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22면

성적 타락의 반대말은

시골에 와서 깨닫는 것이지만, 육체노동만큼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일은 또 없다. 농사일은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이제는 200여 평의 정원을 돌보는데 매일 최소 한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의 노동이 소요된다. 해가 뜨면 너무 뜨거워 늦어도 6시 전에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 별것도 아닌 것 같은 평범한 정원을 만드는데 이렇게 지난한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이제는 잔디와 세상의 모든 정원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자연을 상대로 했을 때 하루에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작다. 지난여름에는 너무도 오랜 장마에 죽은 잔디를 어쩔까 하다가 붉은 벽돌을 주문해서 길을 만들었다. 혼자서 3천 장의 벽돌을 다뤄야 하는 일이었다. 시골 생활에서 깨달은 대로, “욕심부리지 말자.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남은 것은 내일 하자” 다짐했다. 무리를 했다가는 열사로 쓰러질 위험도 있었고, 아니면 앓아누워 며칠을 중단해야 했으니 겸손하게 페이스를 조절하는 일도 새로 배우게 되었다. 어느 날은 일을 마치고 밥을 먹었다. 나는 먹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양이 작았다. 그래서 평생 거의 한 번도 밥을 한 공기 이상 먹어 본 일이 없었다. 그날도 밥을 한 공기 먹기 시작했는데, 내 밥숟갈의 크기가 내가 생각해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한 공기가 비워졌고, 정말이지 아무 갈등 없이 나는 한 공기를 더 비우고 있었다. 목구멍 아래에서 마법의 손이 나와 밥을 다 가져가 버리는 것 같았다. 평생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고, 신기했다. ‘이게 바로 배고픔이고 이게 바로 ‘꿀맛’이라는 거구나’라는 깨달음의 기쁨은 얼마나 컸는지. 그날 저녁엔 좋아하는 막걸리를 반 잔도 못 들이켜고 자리에 누웠다. 침대 밑에서 커다란 자석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고 ‘불면은 무슨, 고민은 무슨.’ 나는 아마도 코까지 골며 잘 잤다. 돌아보니 육체 노동 – 가사 노동 말고 아니 어쩌면 그 가사 노동조차도 – 이런 강도로 해보는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어쨌든 우리 집에는 늘 도와주시는 분이 계셨고, 정원일을 혼자 도맡아 하는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수많은 동서양의 성인들께서 노동을 왜 강조하셨는지 새삼 또 납득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수많은 제국의 멸망 원인에 항상 있었던 ‘지배층들의 성적 타락’이 항상 궁금했었다. 어떻게 개인적 일탈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적 타락이 제국의 멸망을 가져오는지 말이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성적 타락의 반대말이 건강한 육체노동이라는 것을. 톨스토이도 그의 소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그 에너지를 건강하게 쓸 수 없는 자들이 빠지는 함정이 성적 타락’이라고 썼다.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혹은 하지 않았던 지도자들은 결국 기름진 에너지들을, 제국을 멸망하게 만드는 데 쓴다. ‘힘든 일은 내가 할 테니, 너는 공부나 하거라’라는 말만 들은, 좋은 대학에 간 모범생이 학생회장이 되어 세상을 호령하다가 남의 돈으로 공부하고 남의 돈으로 유학하러 가서 남의 돈으로 살고 돌아와 정치인이 된다면, 그는 모든 노동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인도할까. 만 원짜리 한 장을 더 얻어내기 위하여 가끔은 내 자존심마저 짓밟히는 수모를 견뎌야 했던 사람들의 눈물을 알까. 그리고 이건 비단 정치인들만의 일일까. 어쩌면 성직자들은? 햇볕이 뜨겁지만, 풀을 뽑으러 나가야겠다. 육체노동은 울화에도 효험이 있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22면

하늘나라는 이와 같이

왕복 10시간이 걸리고 준비하는 데도 시간이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내가 서울 구치소 사형수 미사 봉사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무엇보다 현재 사형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마땅한 봉사자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2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만나며 지금은 나의 친구가 된 우리 사형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더 큰 이유겠지만 아마 다른 이유도 있지 싶다. 이번 달에도 세 시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다섯 시 반에 길을 떠났다. 잠을 설친 탓인지, 아주 힘들었다. 커피 몇 잔으로는 도저히 달랠 수 없는 엄청난 피곤을 견디며 들어선 교도소에서, 그러나 지난달보다 훨씬 맑아진 얼굴로 우리를 만나러 나오는 사형수 형제들을 보면 사실 이런 피곤은 사라진다. 다섯 명의 사형수 형제를 네 팀의 봉사자들이 돌아가며 만나기 때문에 매달 보는 일은 없고 몇 달 만에 한 번 보기 때문에, 그의 삶의 흔적은 얼굴에 금방 나타나는데 거의 틀린 적이 없어 신기했다. 이번 달에 만난 형제는 내가 봉사자 일을 그만두려고 생각할 때 가장 맘에 걸렸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가장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만나러 나왔다. 첫마디에 내가 “그동안 기도 많이 하고 잘 살았군요” 했는데, 그는 칭찬을 처음 받은 어린아이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는 지난번 내가 이 칼럼에 쓴 사람으로 무더위 속에서 묵주 120단을 하루 종일 바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묵주 많이 하죠?” 내가 물으니 그는 이번에는 “네” 하며 그냥 웃었다. 복음 나누기 시간에 그가 입을 열었다. “지난주에 소 내에서 참을 수 없을 일을 당했어요. 예전의 나라면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겁니다. 화를 내야 하나 보복을 해야 하나 사흘을 고민했어요. 그러다 깜짝 놀라 생각했어요. 내가 이걸 고민하고 있구나. 예전 같으면 그냥 보복했을 텐데… 그래도 묵주를 계속했어요. 억지로 묵주를 굴렸죠. 억지로 했는데, 그래도 되나요? ” 구치소 방문 중에 우리들은 지난날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 이야기만을 나눈다. 그가 괴로워할 때마다 나는 가끔 그에게 말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당신은 죄인이고 나는 깨끗할지도 모르겠지만, 하느님 저울로 달면 어떨지 몰라요. 우리 모두 고만고만한 죄인일 수도 있어요. 게다가 당신은 이 연옥 같은 벌을 견디고 있고, 나는 내가 죄 없다고 생각하며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지내고 있죠.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듯해요. 기도는 원래 억지로 하는 게 대부분 아닌가요? ” 면회소의 희미한 에어컨 아래서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의 범죄는 유명하고, 그걸 본 사람들은 예외 없이 “저런 놈은 바로 사형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쩌면 나도 그런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처음 이 봉사를 시작했을 때, 나는 절망적이었다. “죄송해요. 하느님, 차라리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믿어도 사람은 못 믿어요”라고 기도하던 때였다. 그러나 이 사형수 봉사를 시작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인간에게 희망을 보았다. 내 주변의 모든 지식인과 부유한 사회지도층들에 느꼈던 절망을 이들이 치유해 준 셈이다. 미사 때마다 나는 기이한 체험을 했었다. “어쩌면 천국이 이와 같지 않을까?” 내가 봉사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아마 이것일 것이다. 내가 봉사 받아 치유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는 다시 생각했다. 하늘나라는 이와 같은지도 모른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주님께서 부르시는 사람들이 여기 있으니까. 나까지 모두.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22면

신앙은 횃불처럼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 지방 바르(Var) 지역의 울창한 계곡 속에는 12세기경 건축된 르 도로네(Le Thoronet)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 입구의 성물방에 들른 나는 이 수도원의 복도를 찍은 사진 액자를 보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성물 하나 못 사고 나는 서둘러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오래 광야를 떠돌다가 아버지 집에 돌아오면 그런 느낌일까, 나는 성당을 다 돌아보지도 못하고 아무 의자에나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르 뚜르네 수도원을 짓기 전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가 이 수도원에 들렀다가 예정에도 없이 한 달을 더 머물며 책을 썼다고 했다. ‘진실의 건축’, 나는 그때 건축가의 영성이 콘크리트나 돌 혹은 나무에 스며들어, 그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영성을 나누어 준다는 사실을 처음 체험했다. 그리고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많은 잘못들의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오기 시작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나는 설명을 다 듣지 못하고 일행과 떨어져 홀로 울었다. 즐거운 스페인 여행 중 왜 갑자기 내 잘못들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성당의 정식 이름이 ‘Temple Expatori De La Sagrada Famillia’, 즉 ‘성가정의 참회의 성당’이었다. 성인 품에 오를 가우디의 영성이 내게 전해져 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은 왜관의 성 베네딕도 문화영성센터. 이 건물에서 머물면 하염없는 평화가 온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어떤 곳에든 여행을 가면 아침마다 늘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제 집으로 갔어야 했어“라고. 그런데 이곳에서는 생각하곤 한다. ”이 고요에 이 평화에 하루 더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해 봤는데, 이건 건축가 승효상의 영성이었다. 그는 개신교 신자이지만, 이 건물을 짓는 이 년여 동안 거의 수도원에 머무르며 다섯 번의 매일 시간 전례 기도에 모두 참례했다. 그의 가족은 오래된 개신교 신자들로, ‘신앙의 자유'를 위해 북한에서 남으로 이주하여 가난을 견딘 것으로 유명했다. 나는 가끔 그에게 100세에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의 신앙에 대해 듣곤 했는데, 그 역시 내색하지 않았지만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이었다 . 어쨌든 그런 건축가 승효상의 강연을 들으러 하동에서 남양 성모 성지까지 나는 먼 길을 떠났다. 나는 십여 년 전 그곳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정말 시골 냄새가 풀풀 풍기는 논두렁 사이에 서 있던 가난하고 작은 성당. 그런데 십여 년 만에 방문한 그곳은 엄청난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이상각 신부님은 미사에서 강론을 한 시간 넘게 한 것도 모자라, 자신이 묵주기도를 하루에 백단 이상을 한다는 말을 계속했다. 고상한(?) 신자였던 내가 그런 물량에 질려버렸던 것은 물론이고, 그에게는 약간 광신의 냄새도 난다며 투덜거렸던 기억도 났다. 그런데 그 남양 성모 성지를 오르면서 나는 다윗 같은 한 인간을 느꼈다. 가난한 그 사제는 묵주 딱 하나만을 들고 있었다. 대성당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래서 울고 있었다. 이런 경험 또한 처음이었는데, 이번에는 대성당을 건축한 유명한 건축가 때문이 아니었다. 그 건물을 지은 건축주, 이상각 신부님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길, 나는 묵주를 다시 집어 들었다. “어차피 기도해도 하느님 맘대로 하실 거잖아요” 반항하며, 이즈음 나는 우울함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또 기도를 시작하는가. 그러니 어쩌면 신앙은 횃불과 같은가 보다. 그 곁에 가면 싫어도 기어이 불이 옮겨붙고 마는.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22면

자신이 인간일 뿐임을

2009년 2월 미국 코네티컷주 스탬퍼드에서 침팬지가 사람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침팬지의 이름은 트레비스. 산드라 부부는 14년 전 아기 침팬지를 5만 달러(한화 약 6700만원 정도)에 샀다. 트레비스는 옷이 가득한 옷장을 가지고 있었고 식탁에서 밥을 먹었으며 열쇠로 문을 열 수도 있었고 간단한 컴퓨터 검색도 했다. 그는 유명해졌고 사랑받았고 각종 광고에도 출연했다. 트레비스가 사춘기가 되던 무렵, 나들이를 가고 있던 트레비스는 옆 차의 아이들이 던진 코카콜라 캔에 맞았는데 그는 갑자기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뛰어내려 그 아이들이 탄 차를 공격했으며 그 차가 도망치자 다른 차들도 공격, 순식간에 스탬퍼드 시내를 혼란시켰다. 경찰들이 출동했고, 이미 코카콜라 광고에도 출연한 이력이 있는 트레비스를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달래 차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 이후 당국은 트레비스에게 공공장소 출입 금지령을 내린다. 부부는 넓은 그들의 정원에 트레비스 우리를 마련했고, 놀이 시설을 설치해 주었다. 그러나 트레비스는 점점 더 포악해져갔고, 부부 중 남편이 먼저 죽고 나자 산드라는 그를 통제하기가 버거워진다. 침팬지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혼자인 그는 스트레스를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그녀의 친구 찰라 내쉬라는 여인이 트레비스의 보모로 고용된다. 찰라 역시 트레비스를 극진히 돌보았고 트레비스도 그 사랑에 보답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드라는 찰라에게 급히 전화를 건다. 트레비스가 집안에서 난폭해졌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급히 집으로 달려온 찰라를 공격한 90킬로의 트레비스는 그녀의 두 손과 얼굴 자체를 다 찢어버렸다.(같은 체중의 경우 침팬지는 인간보다 1.5배의 힘을 가진다고 한다) 산드라는 경찰에 전화해 말한다. “총을 가지고 오세요. 그를 쏘세요!” 총에 맞은 트레비스는 비틀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그는 자신이 쓰던 침대 기둥을 붙들고 쓰러져 죽은 채 발견된다. 나는 성경 중에 창세기를 가장 좋아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묵상할 게 정말 많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하느님은 뭐 하러 선악과를 만들어 골치 아프게 하셨을까’ 궁금했지만, 훗날 알게 되었다. 그건 ‘네가 피조물 인간임을 알라’는 메시지였다. 그걸 어긴 인간은 범죄자나 독재자가 되는데 이는 신이 되고 싶었던 원죄의 반복이라고 한다. 북한의 김일성이 ‘솔방울로 포탄을 만드시고’ 같은 이야기는 더 꺼낼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모든 독재자는 엄청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그 자신도 미치광이처럼 파괴되어 버린다. 인간인 그가 자신이 인간임을 잊고 신처럼 군림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혹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이렇게나 중요하다. 침팬지의 본성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우리 트레비스는 착해요, 사랑받았답니다’라는 안이한 생각이 몇 사람의 인생을 영영 망쳐버리고, 인간의 허영과 안이로 인해 하느님의 아름다운 피조물은 살인 괴물로 변하고 말았다. 침팬지에게 총을 쥐여 주면 안 된다. ‘그는 착해요’라는 말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시어 자신이 인간일 뿐임을 알게 하소서”(시편 9,20 참조)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권력자에게 반드시 견제가 필요한 이유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그때에는 어떤 선의도 아름다움도 다 괴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아아,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22면

용서에 대하여

2003년 10월 9일은 한글날이 최초로 공휴일에서 제외된 날이었다. 출근했던 고정원 씨는 저녁 퇴근 후에 집에 돌아와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다. 자신의 노모와 아내 그리고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던 것. 한참 후 범인이 밝혀지는데 그는 유영철이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불교 신자들이었는데, 그는 문득 죽기 전 아내가 “우리 함께 성당에 갑시다” 했던 제안을 떠올렸고 성당에 나가 세례를 받고 루치아노가 된다. 그러나 세례를 받아도 허무하고 다친 마음은 위로받지 못했다. 그는 유영철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을 본 후, 이제 그 자신이 죽기로 결심한다. 그는 날마다 한강 다리에 서서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것은 선택할 여지도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밤, 강물을 내려다보고 하염없이 절망의 눈물을 흘리던 그의 마음속에서 이런 속삭임이 들려온다. “그러지 말고 용서해 보지 그래, 죽을 용기가 있다면 까짓거 못 할 것도 없잖아. ” 그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용서라는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고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갑자기 죽고 싶지 않아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천사의 목소리라고 회상했다. 그는 몇 날을 고심한 끝에 유영철을 용서하기로 하고 법무부에 탄원서를 내고 유영철에게도 편지를 보내 그를 양자 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유영철의 아이들도 돌봐주겠다고 덧붙인다. 유영철도 감옥에서 편지를 보냈고, 그는 한번 면회하러 가겠다고 했다. 내가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를 알게 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결심이 사람들에게 감동만 주었다고 믿는 분은 없으리라. 그는 ‘아버지는 미쳤다’고 말하는 딸들과 오래 불화했고 후일 살인 피해자 가족들의 맹비난에 직면한다. - 가톨릭은 사형제도 폐지 운동을 하고 있었고, 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쓰려고 구치소 봉사단에 참가하고 있던 때였다. 가톨릭 교정사목위원회는 이 외에도 피해자 구제 모임 ‘해밀’을 운영하고 있었다. 교정사목위원회는 유영철과 고정원 형제의 만남을 주선하는 한편, 내가 만나고 있는 일반 사형수들과 해밀의 피해자와의 만남도 주선했는데, 유영철은 끝내 그 만남을 거부했다. 도저히, 자기가 죽인 살인자 피해자의 가족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이코패스로 유명한 그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 걸까? ‘글쎄’ 싶었는데, 나중에 일반 피해자 가족을 만난 우리 사형수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형수들 또한 자신이 직접 가해한 사람이 아닌데도 일반 피해자 가족과 만남이 있기 며칠 전부터 자신의 범행들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만남이 있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식은땀을 흘렸다고 했다. 영화 <밀양>의 그 위대한 문제 제기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나는 인간은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를 만나 그렇게 뻔뻔하게 ‘나는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소설을 쓰려했다고 해도 취재 중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중단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살인마 사이코패스 유영철의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하느님이 “우리를 닮은 사람들을 만들자" 하는 창세기를 떠올렸으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현인 양심“이라는 구절을 담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구절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주의 기도’, 예수님 친히 가르쳐 주신 그 위대한 기도문에서 인간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다. 어쩌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단 하나, 그게 아마도 ‘용서’이니 용서는 죽음마저도 이겨낼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22면

그 군중이 그 군중이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공주였다고 한다. 아름답고 총명한 그녀를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가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그를 거절했으나 아폴로는 그녀에게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예언의 능력을 주며 그녀를 유혹한다. 그러나 그 예언의 능력을 받고도, 그녀는 그의 사랑을 거절한다. 신은 불멸이고 늙지 않는데, 자신은 인간이고 늙고 죽으니 그 결과는 비참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젊은 그녀가 이 당연한 것을 알고 있다니 놀랍다. 대개 젊은 아가씨일 경우, 얼굴이나 성격이 맘에 안 들어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가 아닌가. 그러니 어쩌면 그녀가 아폴로에게 능력을 받기 전에 이미 예언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아, 어쩌면 예언이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 아무튼 이 신의 아들은 화가 났으나, 한번 부여해 준 예언의 능력은 철회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카산드라의 입에 침을 뱉으며 자신이 사랑하며 축복하던 그 입으로 저주를 내린다. “그래 너는 올바른 예언을 할 것이다.하지만 아무도 너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카산드라는 아름다워서 사랑을 받았다가 총명했기에 신의 사랑을 거부하자 바로 그 이유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형벌을 받는다. 그리하여 그녀는 고독과 고통의 터널로 영원히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나라와 함께 멸망하여 목숨을 잃는다. 일전에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라는 책에도 썼지만, 몇 년 전 예루살렘 광장에 섰을 때 나도 카산드라를 떠올렸었다. 내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가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거기서 군중에게 돌에 맞아 죽은 스테파노 성인을 생각했고, 이곳에서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벌이던 젊은 예수를 떠올렸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구세주를 환영하던 그 군중들이 며칠 지나지 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했던 그 군중으로 변해버렸던 것을. 하지만 또 생각해 본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것도 분명 저주이지만 어떤 사람이 거짓만 말해도 열광하는 군중이 있다는 것도 엄청난 저주라는 것을 말이다. 이미 인류의 역사는 우리 모두를 비극으로 이끌어 가던 이런 종류의 열광을 수도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만일 두 기로에 서 있다면 어떨까. 만일 둘 중에 너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 묻는다면 말이다. 스테파노 성인 혹은 이 땅과 온 세상의 순교자들을 생각할 때 그들이 겪은 육체적 고난보다 더 고통스레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들의 외로움이었다. 언제나 그것이 나를 더 많이 울렸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어둡고 절망적인 책이 아니다. 요나가 있고 니느웨의 군중들도 있다. 그곳의 군중들은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했고 절제하기 시작했기에 멸망의 예언을 거슬러 구원받았다. 니느웨의 백성들은 말하자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치다가, 예언자의 말을 듣고 깨달아 “호산나”라고 외친 것이다. 어떤 순서를 밟을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예수에게 외쳤던 내 지난날은 변화할 수 있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 하고.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반드시 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거짓을 말해도 열광 받으며 이 지상의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마음을 힘겹지만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결심,“이의 있습니다” 하고 말해야 하는 용기. 그리하여 홀로 있는 시간에 “주님 저는 많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당신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라는 결심을 말이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22면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배달하 필립보 신부님을 내 젊은 날 주말마다 가던 시골집의 본당 신부님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두고두고 생각해도 행운이었다. 당시 고3이던 딸이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주일 미사에 참례했다가, 신부님의 강론에 감동하여 고3인데도 바로 예비자 교리반에 등록해서 세례를 받은 것도 그분의 훌륭하고 좋은 강론 때문이었다. 그분의 여러 가지 좋은 강론 중에서 기도에 대한 것은 아직도 내게 선명히 남아 있다. 탈출기 17장 12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싸우는 동안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려놓으면 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모세는 지치기 시작했고 자꾸 손이 내려가자, 사람들이 그를 앉히고 양쪽에서 그의 손을 억지로 받쳐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이 구절이 무슨 소린지 몰랐다. 특히 구약에 보면 ‘이런 걸 왜 성경에 썼을까’ 싶은 구절이 많이 나오는데, 신부님이 이 구절을 가지고 강론하신 것이었다. “무엇이든지 하면 할수록 익숙해지는 것이 인간의 이치입니다”라는 말로 강론은 시작되었다. “스포츠도 등산도 요리도, 하다못해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매 맞는 행위라도 소위 이골이라는 게 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기도는 해도 해도 힘들어요. 이 모세의 행위는 기도에 대한 말입니다. 기도는 자발적으로 이렇게 해도 좋지만 정말 힘들면 억지로 남에게 끌려서라도 하라는 말이에요. 이 구절은 그런 뜻입니다. “ 좋은 말씀을 들었을 때 언제나 그렇듯, 가슴이 작게 콩콩 뛰었다. 기도에 어려움을 겪던 나에게, ‘왜 나는 묵주기도를 하는 동안 잡념의 잔치를 벌이는 것일까?’ 죄스럽던 나에게 하신 말씀인 것 같아서였다. 이 강론은 후에 아빌라의 데레사의 거둠기도라는 것에서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기도하려는 의지를 보신다. 기도하는 시간이 힘겹고 아무 감동이 없어도 우리가 그 자리에 머무르려는 ‘사랑의 선택’ 자체를 받으신다." 운전할 때나 여행할 때 늘 묵주기도를 하곤 하는데, 가끔은 ‘내가 어디까지 했지’ 싶을 때가 있다. 그때는 내가 의식적으로 했던 묵상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곤 하는데, 한번은 어떤 나눔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묵주기도는 묵상이야. 그렇게 양으로 많이 한다고 해서 묵주기도가 제대로 되는 거야?”하고 누군가 묻기도 했다. - 대체 이 바리사이 자매들은 어디에나 있고, 꼭 제때 나타난다! - 가끔은 그런 말들에 기운이 빠져 ‘내가 지금 제대로 하는 게 맞나?’ 싶지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내가 당신을 생각하고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를 보시는 거’라는 말씀에 힘을 내곤 한다. 가끔 누군가가 묻는다. ‘기도하면 믿어지나요? 믿어져야 기도하나요?’ 나는 대답한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믿음은 그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저는 기도합니다. 저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제가 늘 당신을 마음속에 그리고 매 순간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라고. 혹시나 – 그럴 리가 없지만 - “'예수님이 내게 오셔서 무엇을 주랴. 하나만 말해보라' 한다면 저는 대답할 거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요즈음 하느님은 내 기도를 하나도 들어주시지 않는다. 어린 시절과는 달리, 마음이 그리 상하지 않는 것은 그 지루한 양의 기도를 통해 나의 믿음이 아주 작게 자랐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언제나 내 바람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그렇다. 그래서 가끔은 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깨닫게 되었기에 말이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22면

“이것도 얼마나 참았다가 쏜 건데”

한 지인이 하소연을 해왔다. 먼 집안 조카를 데려다가 일을 시켰는데 어느 날 그 조카가 회삿돈을 들고 남자와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경찰에 바로잡히기는 해서 손실은 크지 않았지만, 지인은 덧붙였다. “얌전한 아이였는데 설마 이런 어리석은 일로 자기 자신을 망치고 나와의 관계를 끊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안 했어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다니.” 내가 지인에게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역시 그런 일을 당한 경험이 있어서였다. 돈 계산을 알아서 하시라고 어떤 이에게 그걸 맡기고 믿었던 것은, ‘나중에 이 모든 일이 점검되면 횡령이 드러나고 그 자신은 밥벌이를 잃을 텐데 설마’라는 안이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중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점검해 보니, 그가 내 돈을 많이 횡령해 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당장 거래는 끊겼고 나와의 계약은 파기되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는 아주 곤궁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의 교만은 “내가 없으면 자기가 돈을 벌지 못할 텐데 설마 그런 어리석은 짓을”에서 멈추어 있었고, 나중에 나는 내 게으름과 교만을 깊이 반성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픈 기억이다. 잘못은 그가 했지만 내 탓도 없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어릴 때 읽은 이솝 우화가 떠올랐다, 어느 지역에 홍수가 나서 전갈이 고민하는 이야기 말이다. 전갈은 물가에 서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두꺼비 한 마리가 막 강을 건너려고 하는 게 보이자, 전갈이 말을 건다. “두꺼비야 나를 네 등에 태워서 물을 좀 건네주라.” 두꺼비가 대답한다. “전갈아, 나는 너를 알아. 네게는 독이 있는 침이 있고 그걸로 다른 생물들을 죽여 왔잖아. 그런 네가 내 등을 한 방 쏘면 난 죽을 텐데 싫어.” 그러자 전갈이 대답한다. “그런 걱정을 하다니, 생각해 봐라 만일 네가 헤엄치는 동안 내가 널 쏘면 너는 가라앉고 수영 못하는 나도 같이 죽을 텐데 그런 어리석은 일을 내가 하겠니?” 두꺼비가 생각하기에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마음 착한 두꺼비는 전갈을 태우고 헤엄쳐간다. 그러나 물 한가운데쯤 갔을 때 등으로 따끔한 충격이 왔다.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이가 없는 두꺼비가 묻는다. “네 입으로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을 거라더니? 이러면 우리 다 같이 죽는 거잖아.” 그러자, 전갈이 대답했다. “아아 미안해! 그러나 이것도 얼마나 참았다가 쏜 건데.” 어린 시절 나는 대체 이 우화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기에 이걸 기억하고 있었다. 해석되지 않는 불편함으로 말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 많은 고통을 겪고 이 우화를 보자 선명하게 그 뜻이 보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이성적이라면 전 세계의 감옥이 그렇게나 만원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우화의 뜻을 젊은 그때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내 인생은 다른 길로 갔을까?’, 나는 그 후로도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전갈의 그 특성은 다른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내게도 있을 테니 설사 이 모든 것을 알았다 해도 나 역시 다시 이 어리석은 길을 걸어오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도, 자신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의 본성을 아는 것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내가 전갈이 아닌지, 내가 두꺼비가 되려는 것은 아닌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큰 선거를 앞두고 두꺼비와 전갈을 떠올려본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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