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나는 여전히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주연
입력일 2025-07-23 08:50:19 수정일 2025-07-23 08:50:19 발행일 2025-07-27 제 3452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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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대상 아닌 희망의 주체, ‘라떼는 집밥’에서 제2의 인생 펼치는 박순전 어르신
식당 직원 평균 연령 75세…도시락 만들어 취약계층 전달

“나는 아직 쓸모 있는 사람입니다.” 올해 88세 박순전(바올리나·서울대교구 미아동본당) 어르신의 말이다. 그는 서울 번동에 있는 협동조합 겸 식당, ‘라떼는 집밥’의 도시락 포장팀에서 일한다. 이 도시락은 독거 어르신 등 취약 계층에 전달된다. 그는 틈틈이 식당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테이블을 닦으며 일을 돕기도 한다. 오랫동안 앓았던 우울증과 사별 후 혼자 지낸 긴 세월을 지나, 같은 처지의 어르신을 돕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손을 잡으며 이제 자신을 ‘향기’라 부르며 웃는다. 나이 들었기 때문에 끝나는 삶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피어나는 희망의 얼굴을 마주하는 모습이다. 
레오 14세 교황은 제5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고 했다. 박순전 어르신의 삶은 교회가 어르신을 어떻게 다시 바라볼 수 있는지, 사회가 고령화 시대를 어떻게 품어야 하는지에 관한 조용한 시사점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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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에게 메뉴를 설명하고 있는 박순전 어르신. 그는 “집밥 근무는 예수님의 사랑과 봉사를 배우는 자리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주연 기자

여전히 ‘향기’가 될 수 있는 삶 

‘나 때 먹던 집밥’이라는 뜻의 ‘라떼는 집밥’(이하 집밥)은 서울 번동에 자리 잡고 있다. 어르신들의 재사회화를 돕는 취지로 설립된 이곳은 건강한 집밥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고, 강북구와 협력해 1인 가구를 위한 무료 도시락도 지원한다. 

눈여겨 볼 점은 직원들의 평균 연령이다. 박순전 어르신을 포함한 6명 직원은 평균 연령이 75세다. 60대부터 95세까지의 직원들이 요리하고 홀 세팅과 서빙을 맡는다. 정규직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일하는 이들도 있다. 박 어르신은 이전에 아르바이트로 일하다가, 현재는 도시락 포장을 전담한다. 김성희 협동조합 사무국장은 “8시가 출근인데, 7시10분쯤 도착해 준비하시고, 포장도 하나하나 너무 예쁘고 야무지게 하신다”고 전했다. 

여기서는 모두 별명으로 서로를 부른다. ‘향기’, ‘올리브’, ‘오렌지’ 등 이름 대신 따뜻한 정서가 담겼다. 나이에 대한 선입견을 허무는 수평적인 일터 문화 속에서 어르신들은 서로를 동료이자 친구로 받아들인다. 박 어르신은 ‘향기’를 별명으로 택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돼라’는 성경 말씀처럼, 사람들에게 좋은 향기를 내고 싶어서다.

그와 이곳의 인연은 2018년 집밥을 있게 한 ‘두꿈인생학교’에 입학하면서다. 두꿈인생학교는 2016년 시니어를 위한 소통 교육을 이어오다, 2020년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며 협동조합을 꾸려 ‘라떼는 집밥’을 열었다. 박 어르신도 이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원이 됐다. 

1938년 북한 강계에서 태어난 박 어르신은 6·25 전쟁 때 남하했다. 결혼해 고된 시집살이와 네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우울증을 겪었고, 남편 안희백(바오로) 씨가 2006년 세상을 떠난 뒤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던 중 두꿈인생학교를 알게 됐고, 각종 수업과 소풍, 식사 나눔 등을 함께하며 삶은 조용히, 그러나 결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내성적이라 말도 잘하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있기만 했는데, 처음으로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냥 ‘내가 이렇게 대접받을 때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우울감도 줄고, 희망이 생기더라고요. 굴속에 있다가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아요. 너무 좋습니다.” 

집밥에서 일하며 박 어르신의 자아존중감은 더 높아진 듯하다. ‘위험하니 집에만 계시라’는 사회적 시선 대신, 식당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급여를 받는 과정에서 ‘나는 여전히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는 자긍심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매일 아침 갈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박 어르신은 나이에서 오는 신체적 어려움도 있을 법한데, “마음이 즐거우니까 몸도 가볍다”고 했다. “세상에 왔다가 이제 갈 때가 됐는데, 쓸모 있게 살 일이 생겼으니까 얼마나 즐겁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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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 집밥 간판 앞에서 박순전 어르신. 박 어르신은 교회도, 사회도, 노인을 단순히 ‘노인’으로만 보지 말고,  젊은 사람들 대하듯 여전히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대해주고 이끌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주연 기자

‘아무것도 못한다’ 치부하는 어르신 대접은 ‘유감’

그가 정성껏 포장하는 도시락은 대부분 고독사 위험군에 놓인 독거 어르신과 중장년층에게 전달된다. ‘어르신이 어르신을 돕는다’는 입장에서, 도시락의 무게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움직임이 줄고, 식사 준비에도 점점 무심해진다고 말한다. 배가 많이 고프지 않으면 끼니를 건너뛰는 일이 잦아지고,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양념조차 자주 잊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성껏 담긴 도시락을 받으면 식욕이 되살아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도시락을 받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큰 자부심과 기쁨을 느낀다. 일하는 동안 힘들었던 순간들도 자연스레 잊게 될 만큼, 봉사의 시간은 그에게 소중하다.

“집밥 근무는 그렇게 노동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곳에서 사랑과 봉사를 배우라’며 보내신 것 같다”고 말하는 그는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매일 되새기기는 자리”라고 전했다. 

1993년 세례를 받은 박 어르신은 30년 넘게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며 개근상을 받았고, 반장 역할도 25년 넘게 맡았다. 지금도 주회에 계속 참석하고, 평일 새벽 미사도 꾸준히 참례한다. 

그는 본당 활동을 이어오며, 교회 안에서의 어르신 사목이 여전히 한계를 지닌다는 점도 조심스럽게 짚었다.

본당 내 여러 신심 단체는 일정 연령 이상이 되면 참여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이 그의 경험이다. 의지는 있어도 체력이나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본당 프로그램이 어르신들을 ‘수동적인 존재’로만 대우하는 현실에 아쉬움을 느낀다. 단순히 자리에 앉아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듣는 데 그치는 ‘노인 대접’은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덧붙여 나이에 맞는 신심 활동, 교육 프로그램, 자발적 참여 기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인들이 단순한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참여하고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는 면에서, 함께 배우며 무언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는 그는 ”초고령화 지수를 넘어선 한국 사회도 이제 노인들이 인구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오히려 배제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다”고 밝혔다. 

같은 어르신들에게 나누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이 든 사람은 젊은이에게 말 한마디라도 좋은 말을 해주고 격려해 주고, 부담을 안 느끼도록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제5회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이한 소감을 묻자, “희망의 표징인 노인이라는 교황님 말씀에 깊이 공감했다"고 말했다. 

“100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교회도, 사회도, 노인을 단순히 ‘老人’으로만 보지 말고, 비록 젊은이들처럼 체력은 없을지라도, 젊은 사람들 대하듯 여전히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대하고 이끌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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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전 어르신이 어르신들의 취업 준비 요리 학교 수업 후 만든 음식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라떼는 집밥 제공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