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침묵하라!

우리가 사막 교부들에게 배우는 두 번째 삶의 지혜는 ‘침묵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침묵은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자기표현에 익숙하고 자기주장에 거침없는 현대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침묵의 중요성 사막으로 물러난 그리스도인들은 침묵에 사로잡힌 이들이었다. 사막 교부의 금언에는 그들이 침묵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여럿 있다. 일례로,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루스가 스케티스 사막을 방문했다. 형제들이 팜보 압바에게 대주교가 감화될 수 있도록 그에게 한 말씀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내 침묵으로 감화되지 않는다면, 그는 내 말로도 감화되지 않을 것입니다.”(테오필루스 2) 팜보 압바의 이 대답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시사해 준다. 즉 ‘침묵 자체가 말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 사람을 진정으로 감화시키는 것은 현란한 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다. 성숙한 인격과 고귀한 품성, 진실성, 내적 깊이를 드러내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일 것이다. 침묵을 지키는 법을 배울 때까지 3년 동안 입에 돌을 물고 살았다는 아가톤 압바의 이야기도 전해진다.(아가톤 15) 우리에게는 너무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막 교부들이 침묵을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왜 침묵을 그토록 중시하고 강조했을까? 침묵과 경청 침묵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지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침묵은 듣기 위한 것이다. 자기 안팎의 소리를 듣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분주히 떠들면서 우리는 결코 타인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들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침묵 중에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침묵은 들음, 곧 경청과 연결된다. 침묵은 잘 듣기 위한 전제 조건과도 같다. 경청은 순종의 시작이고, 순종은 우리를 하느님께 되돌아가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무기다. 최초 인류는 불순종으로 낙원에서 쫓겨나 하느님에게서 분리되고 멀어졌다. 우리가 멀어진 하느님께 되돌아가 그분과 다시 일치되기 위해 우리가 잡아야 하는 무기는 순종이다. 따라서 침묵은 곧 경청을 위한 것이며, 더 나아가 순종과도 연결된다. 사막 교부들은 이런 이유로 순종을 강조했고, 순종의 시작인 경청, 경청의 전제인 침묵을 그토록 중요시했던 것이다. 사막 전통에 충실한 베네딕토 성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침묵의 중대성 때문에 아무리 좋고 거룩하고 교훈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제자들에게도 말하는 것을 드물게 허락할 것이다.”(규칙 6,3) 또 “점잖지 못한 농담이나 쓸데없는 말, 웃음을 자아내는 말은 어느 곳에서나 절대로 금하고 단죄하며, 이런 담화를 위해 제자가 입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이다.”(규칙 6,8) 심술궂은 침묵 베네딕토 성인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우리는 고대 수도승들이 전혀 웃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는 인상마저 받게 된다. 하지만 고대 수도승들은 대화를 금지하지 않았고 유머도 지니고 있었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애덕이 요구할 때 말하지 않는 경우를 ‘심술궂은 침묵’이라 표현하며 이런 침묵은 가장 포악한 말보다 더 고약하다고 말하고 있다.(담화집 16,18) 실제로 말해야 할 때 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공격수단이 될 수 있다. 그는 또 ‘분노의 무거운 침묵’을 언급하며 “그 목적은 침묵을 지킴으로써 겸손과 인내를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원한을 더 오래 간직하려는 것”(규정집 12,27,6)이라 말하고 있다. 포이멘 압바는 이렇게 말한다.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는 사람은 항상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이야기를 하지만 참으로 침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유익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포이멘 27) 침묵은 공격과 방어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말해야 할 때 상대를 무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침묵할 수도 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침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격적이고 교만하거나 비겁한 침묵은 모두 심술궂은 침묵으로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침묵이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코헬렛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코헬 3,7) 사막 교부들은 코헬렛의 이 말씀에 따라 침묵이란 말을 할 때와 안 할 때를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 말해야 할 때 안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때 해서 늘 문제가 된다. 참된 침묵 침묵은 단지 외적 침묵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적 침묵으로 시작되지만 내적 침묵, 곧 마음의 침묵으로 나아가야 한다. 누가 아무리 외적 침묵을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엄청 수다스러울 수 있다. 또 이웃에 대한 비판이나 불평불만, 뒷담화로 우리 마음이 평화롭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참된 침묵이란 마음의 침묵, 곧 하느님 사랑으로 내적 고요와 평화 속에 머무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우리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침묵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침묵의 의미나 중요성을 모른 채 말이나 SNS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표현하는 것이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나 속으로 늘 시끄럽고 불안하다. 침묵 중에 내면으로 들어가 고요와 평화중에 자신과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노력이 아쉬운 때다. 사막 교부들의 ‘침묵하라!’는 권고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씀처럼 다가온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2025-01-26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물러나라

우리가 사막 교부들에게서 듣게 되는 첫 마디는 ‘물러나라’는 권고가 아닐까 한다. 이 권고는 본래 ‘세상에서 달아나라’(fuga mundi), ‘세상에서 물러나라’는 것이다. 아르세니우스의 물러남 물러남의 대표적 인물은 압바 아르세니우스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황실 고관으로 황제의 아들들을 가르쳤던 교사였다. 세상의 온갖 영화를 누렸던 고관대작이 어느 날 내면의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집트 사막으로 물러났다. 아르세니우스에 관한 금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압바 아르세니우스는 황궁에 살던 시절에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이끄소서.’ 한 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아르세니우스 사람들을 피해라. 그러면 구원될 것이다.’ 고독한 생활로 나아가면서 그는 다시 같은 기도를 바쳤는데,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르세니우스, 물러나라, 침묵하라, 그리고 평화 중에 머물러라.’”(아르세니우스 1-2) ‘물러나라, 침묵하라, 그리고 평화 중에 머물러라’는 권고는 구원을 위한 길로 간주되어 이후 수많은 동방 수도승의 모토요 생활 지침이 되곤 하였다. 아르세니우스는 이를 극단적으로 실행에 옮긴 대표적 인물로 제시된다. 아르세니우스는 스케티스 사막(4세기 이집트 북부의 수도승 생활 중심지 중 하나)의 한 암자에 살면서 암자를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철저하게 고독과 고요를 지키려 했다. 그래서 로마의 한 귀부인이 그를 보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 되어 찾아왔는데도 아주 매몰차게 대하였다.(아르세니우스 28) 그는 고요를 지키려고 주교들과 심지어 자기 형제들과도 맞섰다. “압바 마르쿠스가 압바 아르세니우스에게 말했다. ‘왜 우리를 피하시는 겁니까?’ 원로가 그에게 말했다. ‘하느님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시오. 하지만 나는 하느님과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소. 수천수만의 하늘의 군대는 하나의 뜻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많은 뜻을 가지고 있소.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자고 하느님을 떠날 수 없소.’”(아르세니우스 13) 물러남의 이유 4세기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독과 고요를 찾아 사막으로 물러났다. 이는 온갖 세상 근심·걱정에서 벗어나 고독과 고요 속에서 하느님만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독과 고요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하느님과 더욱 깊은 내적 일치에 이르는 데 있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 없이 우리는 결코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고독과 고요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세상의 온갖 근심·걱정에서 벗어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권고하시는 자녀다운 신뢰의 덕을 뜻한다. 즉 이 지상 생활의 근심과 일시적 상황에 대한 걱정을 밀쳐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맡겨드린다는 뜻이다. ‘물러난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막 교부들처럼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기는 더더욱 어렵다. 아니 우리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막으로 물러난 동기와 목적은 적어도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의 목표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우리의 물러남 우리는 분명 가정과 사회를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떠나 모두 사막으로 물러날 수 없다. 우리가 떠나야 하는 세상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 세속적 가치와 정신, 혈연과 지연과 학연이라는 울타리,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우리 자신의 에고일 것이다. 이런 것을 끊임없이 내려놓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고독과 고요의 시간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홀로 있는 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삶에서 ‘함께’와 ‘홀로’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있음’이 사람들과의 친교의 때라면, ‘홀로 있음’은 고독과 고요의 때다.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 일상과 사람들에게서 물러나 고독과 고요 중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사람들과 하느님과 동시에 있기는 참 어렵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낄 수 있지만 홀로 있는 고독과 고요의 시간은 전적으로 하느님 안에 몰입하는 시간이다. 예수님도 이 두 순간을 조화시키려 노력하셨다. 사람들과 함께 머무시며 그들의 필요에 봉사하셨지만, 어떤 결정적 결단의 순간이라든지 유혹의 때 혹은 재충전이 필요한 때에는 늘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다. 홀로의 시간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시며 그분 안에서 다시 힘을 얻고 사람들에게로 되돌아가셨다. 고독과 고요의 의미와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공허할 수 있다.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친교를 나누는 것 같지만 마음은 늘 부평초처럼 떠다닐 수 있다. 우리 존재의 근원에 뿌리를 두고 거기서 자양분을 끌어 올릴 때 우리가 맺게 될 친교의 열매도 튼실할 것이다. 우리는 고독과 침묵을 모르고 인간적 친교만을 추구하며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의 가벼움과 공허함을 종종 보게 된다. ‘홀로 있음’은 우리의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요, ‘함께 있음’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자양분으로 열매를 맺는 시간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에서 물러나 홀로 고요히 침묵 중에 머무르는 시간은 너무도 중요하다. 특히 앞만 바라보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물러남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정이나 어떤 식으로든, 정기적으로 일상에서 물러나는 지혜를 발휘해 보는 것은 어떨까? ▶ 본문에서 인용된 사막 교부의 일화나 말의 출처는 알파벳순 모음집 사막 교부들의 금언(베네딕다 워드, 「사막 교부들의 금언」, 허성석 옮김, 분도출판사 2017 참조)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2025-01-12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연재를 시작하며 - 사막 교부란

신문사로부터 올해부터 격주로 사막 교부의 삶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는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나누어 달라는 요청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는 우리와는 너무도 먼 4세기 이집트 사막이었다. 이렇듯 큰 시공의 차이로 인해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설고 심지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적 욕망과 싸우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갔던 그들의 치열한 삶, 그 삶이 가르치는 지혜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토대가 되었고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이 지면을 통해 앞으로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란 주제로 그들의 가르침을 하나씩 다루어 나갈 것이다. 그에 앞서 이번 첫 회에서는 먼저 사막 교부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통해 이해를 돕고자 한다. 사막 교부 어떤 이에게는 ‘사막 교부’(Desert Father)란 표현이 다소 생경하게 들릴 것이다. 사막 교부라고 말할 때, 엄밀한 의미로 4세기 이집트 북부(나일강 하류)의 사막에서 생활했던 유명한 독수도승을 일컫는다. 초세기 교회에서 ‘교부’는 본래 주교를 가리키는 말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성립되는 부자 관계를 적용한 데서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토대를 놓고 교회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준 분을 교회 교부(Church Father)라고 칭한다. 한편 실천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수도승 생활의 토대를 놓은 거룩하고 위대한 수도승은 수도승 교부(Monastic Father)라고 불린다. 사막 교부는 수도승 교부에 속하며 그리스도교 수도승 생활의 시조라 하겠다. 4세기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던 그리스도인들 안에 점차 새로운 영적 부성(父性)이 생겨났다. 이 영적 부성은 더 이상 교회 안의 공적인 기능과 교계제도에 연결되지 않고 ‘지혜’(분별력)와 ‘말씀의 특별한 은사’에 연결되었다. 이 은사를 얻은 사람만이 남을 지도하는 영적 사부가 될 수 있었다. 사막에 새로 도착한 사람은 자기 압바(Abba, 영적 사부인 원로)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따라서 독수도승을 지도하는 원로를 ‘사막 교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막으로 간 이유 사막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자 악령들의 본거지였다. 또한 온갖 유혹과 시련을 통한 정화의 장소, 하느님을 체험하는 장소였다. 4세기 초 박해가 끝나자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살며 ‘한 가지 필요한 일’, 곧 ‘하느님 찾는 일’에 투신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의 소음과 동요,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깊은 고독과 침묵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철저하고 근본적인 포기와 물러남은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에 더 잘 응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막에서 새로운 박해자 악령들과의 치열한 싸움과 엄격한 금욕생활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삶 자체가 자신을 포기하는,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또 다른 순교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수도승 생활을 순교의 지속이라 하였고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라고 해서 ‘백색 순교’라고도 했다. 그들의 삶이 중요한 이유 사막 교부의 삶은 그리스도인 삶의 이상적 모델을 제시한다. 사막 교부들은 복음을 더 철저히 살려는 그리스도인이었기에, 그들의 삶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 삶의 심화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삶과 가르침은 수도승 생활과 영성의 뿌리와도 같다. 그리고 수도승 생활은 그리스도인 삶을 충만히 실현하는 삶의 한 양식이며, 수도승 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토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막 교부의 모범적인 삶과 가르침은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성에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치를 지니며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가 사막 교부의 삶과 그들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은 그들의 외적 삶의 모습이나 방식을 모방하자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오늘 우리를 위한, 나를 위한 어떤 가치와 정신을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신과 가치다. 구체적 삶의 양식은 그것을 담는 외적인 그릇에 불과하다. 외적인 틀은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언제나 변화될 수 있고 또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금언을 통해서 우리는 온갖 인간적 욕정과 악습에 맞선 치열한 싸움, 인간의 나약함, 하느님의 자비. 좌절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 신앙과 희망 등 우리 삶을 위한 지혜로운 가르침을 보게 된다. 여전히 영적 사부인가? 사막 교부의 영웅적인 삶과 성덕은 당시 수많은 사람을 사막으로 끌어들였다. 마치 벌이 향기를 맡고 꽃을 찾듯 수도승들의 거룩한 삶과 성덕의 향기를 맡고 사람들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그들은 구원에 필요한 한 말씀을 듣기 위해 유명한 원로들을 찾아갔다. “압바, 한 말씀 해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사막의 원로를 찾아간 이들의 전형적인 질문이었다. 동시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이다. 우리는 영적 스승, 영적 사부를 갈구한다. 우리에게는 가시적인 모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려 노력했던 참 신앙인의 모범이 필요하다. 사막 교부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에 나타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스승의 인격을 본받으려 노력했던 훌륭한 신앙인의 모범이자 영적 사부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는 제자가 스승에게 다가가듯 그들에게 다가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삶의 지혜를 청해보자. “압바,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한 말씀 해주십시오.” ▶ 이 연재에서 소개하는 내용이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기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참조할만한 자료를 소개한다. 「수도 영성의 기원」(분도출판사, 2015), 「사막 교부들의 금언」(분도출판사, 2017), 「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분도출판사, 2006), 「담화집(제1-13담화)」(분도출판사, 2022), 「담화집(제14-24담화)」(분도출판사, 2023), 「천국의 사다리」(분도출판사, 2020), 「프락티코스」(분도출판사, 2011).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1995년 사제품을 받고 교황청립 로마 성안셀모대학교 수도승 연구소에서 수도승 신학을 전공했다. 미국 뉴멕시코주 성 베네딕도회 사막수도원에서 3년간 수도생활에 전념하고 성 베네딕도회 화순수도원 원장, 분도출판사 사장,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본원장 등을 거쳤다. 「수도 영성의 기원」, 「천국의 사다리」 등 여러 책을 번역했다.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