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하느님의 자유에 기초한 인간 자유의 충만함

이승훈
입력일 2025-07-23 08:48:51 수정일 2025-07-23 08:48:51 발행일 2025-07-27 제 3452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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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사한 가장 소중한 선물…하느님 향해 ‘선’ 따르며 참된 자유 실현 위해 노력해야

현대의 몇몇 사상가들은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구속하거나 제한하는 신이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하느님의 섭리를 인정한다면 인간의 자유는 인정할 수 없다’는 신학적 결정론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 안에서는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모두 인정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주제를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에서 철저히 다루었다. 특히 모든 것을 잃고 상심했던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에서 신의 섭리를 고려하면 이해하기 힘든 선한 이들의 고통조차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밝힌다. 그러나 마지막 제5권에서 ‘전지전능한 신이 영원으로부터 모든 것을 예견하시므로 인간의 행동, 생각, 원의를 다 알고 계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산문 3) 

보에티우스는 우연, 예지(豫知), 필연성 등의 개념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자유를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단순히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가 모순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을 넘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빛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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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자신을 이뤄 가는 일종의 ‘공동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자유라는 도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할 때, 인간 각자는 참된 자기완성과 아름다운 세계 건설에 기여할 수 있다. 요한 벤첼 페터의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 출처 위키미디어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하느님의 섭리  

토마스에 따르면, 하느님의 실재는 인간의 자유와 양립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그 확실한 토대를 구성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을 창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창조주의 주권적인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는 하느님과 그의 피조물이 서로를 제한하는 경쟁자라는 잘못된 가정이 포함된다. 창조주는 피조물들의 본성에 폭력을 가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하시고 당신 피조물들을 존중하는 분이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의 존재 구조를 보존하면서 그들의 행위에 개입한다. 

“신적 운동을 통해서 필연적 원인으로부터는 결과가 필연적으로 뒤따르지만, 우연적 원인로부터는 결과가 우연적으로 뒤따른다. …하느님은 의지가 필연적으로 어느 하나로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운동이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인 채로 남아 있도록… 그렇게 의지를 움직인다.”(I-II,10,4)

토마스는 ‘영향을 미치는 것’(Immutare)과 ‘강요하는 것’(Cogere)을 구별하고, 하느님이 의지에 대해 강요할 수 있음을 부정하지만, 은총으로 그것에 영향을 미쳐 그것을 강화하거나 특정 대상들을 향하도록 만들 수 있음은 인정하고 있다.(「진리론」 22,8)

더욱이 하느님의 영원성은 신적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공존할 수 있게 한다. ‘영원성’은 “시작도 끝도 없는 지속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I,10,2) 만일 하느님이 시간 속에 있다면 그분의 전지함은 미래를 확실하게 예견하는 것을 포함하므로 인간은 하느님이 예견한 행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 로봇처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롭지 않게 되어 그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이며 인간의 기도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시간 속에 있지 않다면’, 그분은 문자 그대로 어떤 것도 ‘미리’ 아는 것이 아니며, 단지 현재 속에서, 우리에게는 과거나 미래인 모든 것을 그분 자신의 현재에서 알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특수한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분은 그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을 지켜보고 계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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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자신을 이루어가는 일종의 ‘공동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자유라는 이 도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할 때, 인간 각자는 참된 자기완성과 아름다운 세계 건설에 기여할 수 있다. 그라블로와 샤틀랭의 원화를 바탕으로 한 스코탱과 콜의 에칭 <동물의 이름을 짓는 아담>. 출처 Wellcome Collection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사하신 가장 소중한 선물인 자유

인간의 모든 행동이 아니라 최종 목적에 비례하는 행동만이 인간을 그 목적 안에서 완성되도록 인도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에 의존되어 있다. 그의 자유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자유이며, 인간은 하느님의 자유에 참여하는 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는 빛이 색을 완성하는 것으로 비유된다. 빛은 모든 색을 초월하므로 모든 색을 완성한다. 하느님 또한 피조물을 초월하기 때문에 그분의 은총은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힘, 특히 인간의 자유의지까지도 완성한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을 향하는 가운데 선을 선택할수록 더욱 자유로워지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선물로 주신 소명을 실현할 수 있다. 

만일 인간 존재자가 자신의 근원적인 원리를 망각하고 참된 진리에 접근할 가능성을 잃어버리면, 근대의 인간들이 지상 과제로 여겼던 온전히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유는 인간 자유의 근본 원천이다. 하느님의 자유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가 어떻게 해야 충만함에 이르는지 그 진정한 모델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더 큰 관계, 즉 자연과 절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참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로운 커다란 삼각형(하느님, 이웃, 자연)의 세 변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또한 자기 자유의 수행을 위한 한계와 규칙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자유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사하신 가장 소중한 선물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자기실현에 있어서 필수적이고 필요한 도구로 이해된다. 자유는 진리를 알기 위해, 그리고 선을 추구하도록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귀중한 선물이며, 자기 자신의 인격의 깊이를 실현하고, 보다 아름답고 참된 세상을 건설하라는 소명을 수행하기 위한 값진 도구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너’로 부르시며 당신의 협력자로 삼으시고 그가 자유로운 결정을 통해 이 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하신다.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자신을 이루어가는 일종의 ‘공동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자유라는 이 도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할 때, 인간 각자는 참된 자기완성과 아름다운 세계 건설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약하는 내적인 요인 중에서 감정과 충동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현대 심리학은 바로 전통적으로 ‘정념’(Passio)이라고 불렸던 인간의 감정이나 무의식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놀라운 지식을 축적해 왔다. 토마스는 이에 대해서 어떤 통찰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다음 호부터 집중적으로 인간의 정념을 고찰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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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