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성당 순례] 남양성모성지 성당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전담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이하 성지)의 성당과 티 채플 등이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와 페터 춤토르, 조각가이자 화가 줄리아노 반지(1931~2024) 등 거장들과 함께 예술로 빚어지며 신자들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관심을 받고 있다. 2월 가톨릭 미술상을 수상한 성지 성당에는 순례 당일에도 신자들뿐 아니라 대학교 건축과 학생들과 건축사무소 직원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처음부터 바실리카 인준을 염두에 두고 지어졌다는 성지 성당을 찾아갔다. 파도치는 나뭇결의 방주 “아베, 아베, 아베마리아~” 분명 가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매시간 울리는 종소리는 익숙한 노랫소리로 와닿았다. 성지에 들어서자마자 반긴 종소리와 함께 이중 원형 기둥의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축가 마리오 보타와 한만원(안드레아) 씨가 설계한 성당의 외관은 색감과 둥근 모양에서 드는 온화한 느낌에 더해 하얀 가로선과 기둥 수직선의 만남에서는 세련된 멋까지 났다. 2층에 있는 성당으로 오르는 어두운 돌계단 양쪽으로 은은한 조명을 두어 잠시나마 침묵 속에서 성찰에 잠기는 시간을 선물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나무 물결’에 압도됐다. 가늘고 얇은 살을 수직으로 설치해 빛을 조절한 나무 루버가 천장에 빼곡했다. 루버로 이루어진 수평 물결 사이사이마다 자연 빛이 들어오는 창들을 통해 파란 하늘이 비쳤다. “성당 안 어느 위치에 앉든 자연광으로 신자들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다”던 보타의 바람이 엿보였다. 우리나라 성당으로는 드물게 양 기둥 옆으로 여덟 개의 기도 공간인 채플을 마련했다. 이곳에는 우리 사회의 다문화 가정들의 화합을 상징하는 전 세계 성모상을 모시고 있다. 특히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은 이수경 작가가 우리나라 반가사유상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또한 그 기둥마다 고(故) 안선호(베다) 신부가 기증한 나자렛 성모 영보 동굴, 겟세마니 동산, 베들레헴 동굴, 골고타 등 이스라엘 여러 성지를 수리할 때 나온 돌들을 액자에 넣어 비치해 묵상을 도왔다. 무중력 속 고요함, 제단 제대 위 십자가상은 중력을 거슬러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을 부릅뜬 채 살아계신 예수님은 제단 위 수직의 창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받으며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줄리아노 반지 작가는 못 박혀 있는, 십자가가 일으켜 세워지는, 고통스러운 순간의 그분이 어디서든 ‘나’를 바라보도록 표현했다. 아울러 십자가의 못은 철로 만든 구속이 아닌, 부활을 상징하는 빛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반지 작가 작업한 유리 성화는 모래 아트가 생각나는 짙은 나무색의 부드럽고 따뜻한 작품이다. 이 또한 허공에 거짓말처럼 정지돼 있었다. 뒷면은 인물들의 뒷모습이 그려진 양면화이다. 왼편에는 ‘수태고지’와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이 담긴 <성모님의 생애>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최후의 만찬>이 묘사돼 있다. <최후의 만찬>은 유다가 부끄러워 얼굴을 숨기는 장면인데 작가가 “모든 세상을 넣고 싶다”며 나타낸 아시아인의 얼굴도 제자들 중 찾아볼 수 있다. 제단 위 원형 기둥에는 높다랗게 천창이 나 있다. 하지 즈음 성당의 방위와 태양 고도가 정확히 일치하는 시간이 되면, 천창의 빛과 그림자가 천사 날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제단이 여타 성당보다 넓은 것은 심포니 연주가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 의도에 의해서다. 문화의 시대에 맞춰 지역 주민과 함께 미사와 음악 둘 다 만족시키는 곳으로 탄생시켰다. 건축가 마리오 보타는 제대와 감실, 강론대, 해설대, 세례대, 성수대, 파이프오르간도 모두 직접 디자인했다. 내부 조화까지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조화’라는 균형의 추 1층으로 내려와 소성당으로 들어서자 파랗고 검은 벽, 예스러운 고상과 하얀 남양성모자상이 보인다. 색상의 조화와 단순함의 극치에서 오는 충격은, 그 검푸른 벽에 ‘쾅’하고 세게 부닥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벽면은 유태근 작가가 문경 한지 454장을 옻칠과 밀랍 작업으로 완성한 세계 최대 크기의 한지 벽화다. 남양성모자상은 강론대 자리에 모셔져 있어 사제가 성모님 옆에 서서 강론하는 구도이다. 고상은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1696~1787) 당시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제작했다. 이외에도 성지 내 경당으로 의뢰됐던 티 채플은 페터 춤토르의 의견에 따라 찻집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영적인 여정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환대, 친절함, 위로, 따뜻함 속에서 이룰 수 있는 곳이다. 성지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길 바라는 기대 속에 형성되고 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난 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모 성지로, 1866년부터 6년간 8000명을 처형한 병인박해 시 남양도호부에서 희생된 무명의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1991년 조성됐다. 오늘날 전 세계 예술가들이 한국 전통과 남양 성모님을 만나 세운 성당은 성지의 과거와 현대, 동양과 서양의 조화 그 정점을 이루고 있다.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퇴촌성당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중심이고,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또 신앙공동체의 부활을 기억하는 성당이 있다. 수원교구 제2대리구 퇴촌성당이다. 예수님 부활을 기념하며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광동로 97-9. 흐드러지는 벚꽃 사이로 외벽에 커다한 조형물이 설치된 성당이 보였다. 성당은 모습이 독특하다. 성당은 건축면적 330.79㎡, 연면적 798.14㎡에 지상3층으로 규모면에서는 여느 작은 시골성당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모습은 도시의 어느 성당보다도 현대적인 느낌이다. 일반적인 성당 건축이 대칭미를 추구한다면, 퇴촌성당은 비대칭이면서도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사다리꼴 형태의 전례 공간과 직육면체 형태의 교리실 등의 공간, 높이 솟은 첨탑, 1층의 필로티 구조가 이루는 균형미가 돋보인다. 외부만이 아니라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성당 내부에서도 이런 특징이 이어졌다. 구조만이 아니라 색도 그렇다. 연회색빛의 벽돌타일의 외벽에 짙은 회색의 지붕, 노출콘크리트 등이 비대칭으로 연결되면서도 전체적으로 어우러져,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새롭게 보이는 신선함을 준다. 하지만 성당의 모습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성당 외벽에 설치된 ‘부활하신 예수님 상’이다. 고정수(프란치스코) 조각가가 제작한 이 성상은 높이 6.5m, 너비 5m 크기로, 무게만도 2.6톤에 달하는 대형 작품이다. 고 조각가는 1만 여 개에 달하는 스테인레스 스틸 조각을 용접으로 이어 붙여 예수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2015년 퇴촌본당 설립 3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이 성상은 양손을 활짝 펼친 채 신자들을 맞이하는 듯한 예수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손과 발에 난 상처가 수난과 죽음을 이겨내고 부활한 예수님의 모습임을 기억하게 해준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상’ 아래에는 ‘EGO SUM VIA VERITAS ET VITA’라는 문구가 보였다. 라틴어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단순히 기념만 하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따라 걸어야 할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줬다. ‘부활하신 예수님 상’만이 아니었다. 성당 내부와 외부 곳곳에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는 예수님, 성가정, 승천하는 성모님의 조각을 비롯해, 성모영보, 성모자를 담은 성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성당 내부의 벽돌 하나하나에도 신앙의 상징이 담긴 그림이 새겨져 있어, 신자들의 믿음이 한 장, 한 장 쌓여 완성된 성당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줬다. 활한 신앙공동체가 세운 성당 퇴촌지역은 사실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와 깊은 연관을 지닌다.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종 권철신(암브로시오)·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승훈(베드로)와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여러 신앙선조들이 서학 서적을 연구하고 자발적으로 신앙공동체를 이뤘던 천진암이 바로 이 지역이다. 1968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손성직(베드로)과 가족이 광주 소뫼(牛山里, 지금의 퇴촌면 지역)에서 이주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천진암강학 이후로도 퇴촌 지역에는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박해 이후로 퇴촌 지역에 신앙공동체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정작 한국교회의 신앙이 싹튼 이곳에 신앙공동체는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신장본당을 중심으로 퇴촌 지역에 전교활동을 활발하게 펼쳤고, 퇴촌 지역에는 다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 이듬해인 1985년 2월 ‘천진암본당’이라는 이름으로 본당 공동체가 세워졌다. 오늘날 천진암성지의 ‘광암성당’이 이전에는 천진암본당, 바로 퇴촌본당의 성당이었다. 퇴촌본당은 20여 년간 천진암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2006년 성지와 본당이 분리되면서 ‘퇴촌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터전을 옮겼다. 그렇게 2011년 준공하고, 2017년 봉헌한 성당이 지금의 퇴촌성당이다. 퇴촌본당은 설립 당시에는 어린이를 포함해 신자 수가 73명에 불과한 아주 작은 본당이었지만, 1992년에는 300여 명으로 신자 수가 증가했고, 현재는 신자 수 1790여 명이 이 성당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퇴촌성당은 신앙의 씨앗이 뿌려졌지만, 박해로 신앙공동체가 사라져 버린 곳에 부활한 신앙공동체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임마누엘성당

수원교구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 있다. 평범한 고등학생 방 한 칸만 한 크기의 성당. 사제의 꿈을 키우던 한 고등학생을 기리며 너도나도 작은 힘을 모아 세운 성당. 봄이 되면 마음 한구석에 떠오르고야 마는 성당. 수원가톨릭대학교(이하 신학교) 교정에 자리한 임마누엘성당이다. ■ 4월 16일, 그날을 기억하는 성당 신학교 교정. 신학교 1학년생들의 기숙사인 신덕관 주변은 교정 안에서도 4월이면 벚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는 장소다. 그 벚나무들을 바라보는 언덕에 자리한 작은 목조건물. 건물 현판에는 ‘임마누엘성당’이라는 이름이 가지런히 쓰여 있다. 종탑 위에 올라간 십자가, 그리고 종탑에 설치된 종, 스테인드글라스. 내부에는 작은 기도상도 있다. 작기는 하지만 성당다운 면모는 갖추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성당이라 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 일반적으로 공동체가 모여 하느님을 경배하는 미사나 전례 등을 하는 건물을 성당이라고 부르지만, 임마누엘성당은 그런 공간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작다. 사실 이 성당은 교회가 지은 건물도 아니거니와 성당 부지에 세워진 성당도 아니었다. 임마누엘성당이 지어진 것은 예비신학생이었던 박성호(임마누엘) 군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서였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성호군을 위해 시민들이 힘을 모아 안산 화랑유원지 내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앞에 성당을 지었다. 시민모임 ‘세월호가족지원네트워크’가 진행한 이 프로젝트에는 최봉수(베드로) 목수를 필두로, 종교 유무, 전문가 비전문가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이 자원봉사로 나섰다. 기부 받은 목재와 재능기부로 지은 15㎡ 규모의 아담한 성당. 성호군의 본당 주임이었던 인진교(요셉) 신부는 세월호 참사 200일째인 2014년 11월 1일 이 건물을 축복했다. 처음 지어질 당시 이 성당은 성호군의 이름을 따 ‘성호성당’이라고 불렸다. 이후 임마누엘성당은 세월호 합동분향소 앞을 지키며, 세월호 유가족뿐 아니라 분향소를 찾는 이들을 위로하는 상징적인 건물이 됐다. 참사로 온 국민이 슬픔에 잠긴 이 시기, 이곳은 종교를 막론하고 누구나, 언제든지 찾아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임마누엘성당은 2018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아 안산 합동분향소를 철거하기로 결정되면서 없어질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 교회, 잊지 않고, 잇다 갈 곳 잃은 임마누엘성당을 받아준 곳이 바로 신학교다. 임마누엘성당이 철거돼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안산대리구와 신학교는 신학교 교정에 임마누엘성당을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신학교는 임마누엘성당이 옮겨질 자리를 마련했고, 안산대리구는 이전 비용을 부담했다. 그렇게 임마누엘성당은 2018년 5월 1일 신학교 교정에 자리잡았다. 성당을 신학교로 이전하면서 명칭도 성호군의 세례명을 따라 임마누엘성당이라고 바꿨다. 임마누엘성당 오른편에는 뒤집어진 배와 노란 리본의 형상이 달린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십자가도 임마누엘성당처럼 처음부터 신학교 교정에 있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우리나라가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 진실과 정의의 나라로 향해가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2015년 8월 3일 진도 팽목항에 설치됐던 십자가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모은 기금으로 최병수 작가가 제작한 이 십자가도 세월호 인양 이후 팽목항 정비작업이 시작되면서 철거하게 됐고, 2017년 4월 25일 신학교 교정에 옮겨 세웠다. 이처럼 신학교가 임마누엘성당과 세월호 십자가를 받아들인 것은 다름 아닌 세월호 참사의 기억을 잊지 않고 이어나가기 위해서다. 신학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가 집중된 안산 지역이 수원교구가 관할하는 만큼, 수원교구의 사제로 양성되는 신학생들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고통 받는 이들 곁에 함께하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도록 임마누엘성당과 세월호 십자가를 교정에 품었다. 그저 품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신학교는 임마누엘성당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꾸준히 관리해 왔다. 임마누엘성당은 건축 당시 기부 받은 자재로 세워지다 보니 오랜 시간을 버틸 만큼 견고한 재료로 지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물과 습기에 약한 목조건물의 특성상 시간이 흐르면서 보수가 필요했다. 특히 2024년에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신학교는 임마누엘성당을 지은 최봉수 목수에게 보수공사를 의뢰해 지붕 너와를 물에 강한 적삼목으로 교체하고 건물을 전반적으로 보수했다. 성당 안에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여러 전시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참사 희생자들의 얼굴을 모은 모자이크화와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글, 그리고 임마누엘성당이 지어지고 옮겨지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사진도 전시돼 있다. 무엇보다 전면에 스테인드글라스에 기도상이 차려져있어 성당을 찾은 누구나 기도할 수 있도록 아늑하게 꾸며져 있다. 최근에도 다녀간 이가 있는지, 기도상에는 편지와 묵주가 놓여있었다. 신학교 교정에 있어 이전처럼 많은 이들이 쉽게 찾기는 어렵게 됐지만, 신학교에 사전에 연락하면 누구나 임마누엘성당에 방문할 수 있다. 2014년의 아픔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잊지 않겠다’고 한 약속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임마누엘성당은 여전히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우리를 위로해 주는 듯하다.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왕림성당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1길 71에 위치한 ‘왕림성당’은 한국교회의 역사와 함께해 온 유서 깊은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많은 신앙 선조들이 은신하며 신앙의 뿌리를 내린 이곳에 1888년 7월 14일 본당이 설립됐다. 한국교회 네 번째 본당이자 한강 이남 경기도 첫 본당으로서 명실공히 수원교구를 대표하는 신앙의 못자리이다. 교구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는 2020년 11월 29일 왕림성당을 ‘제1호 천주교 수원교구 순례 사적지’로 선포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왕림성당이 교구 서부지역 선교 요람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물론 교육을 통해 문맹 퇴치와 지역사회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던 역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137년의 긴 역사를 품고 있는 왕림성당을 찾았다. ■ ‘갓등이왕림성당’ 왕림성당 입구에는 예스러운 느낌이 드는 나무 간판이 걸려 있다. 나무 간판에는 ‘천주교 갓등이왕림성당’이라고 적혀 있다. 왕림본당(주임 황용규 스테파노 신부)에 비치된 주보에도 ‘갓등이 왕림성당’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갓등이는 ‘갓을 쓴 등불’이라는 뜻으로 박해시대에 사제를 뜻하는 말이었다. 사제라는 신분이 알려지면 안 되는 시대 상황에서 신자들끼리만 쓰던 은어였다. 1888년 왕림본당이 설립되기 전 공소 명칭도 갓등이공소였고, 박해 시기 이 지역에 형성된 교우촌도 지역 명칭을 따라 왕림촌이라고도 했지만 갓등이교우촌이라고도 불렀다. 성당 입구 나무 간판만 보아도 왕림본당이 박해 시기부터 걸어왔던 오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수원교회사연구소가 2011년에 펴낸 「앵베르 주교 서한」 등 교회사 문헌을 통해 조선대목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갓등이공소에 1839년 1월 방문한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지금의 왕림성당 주변에 교우촌이 형성된 시점은 1800년 전후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견해다. 왕림본당의 역사가 교우촌 시기를 포함하면 한국천주교 박해 초창기까지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왕림본당이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성당 인근에는 ‘갓등이 피정의집’, 천주 섭리 수녀회 등이 자리하게 됐고, 수원가톨릭대학교도 성당과 인접해 있어 가톨릭 공동체가 왕림성당을 둘러싸고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다. ■ 곳곳에 배어 있는 137년의 역사 왕림성당 경내로 들어서면 1888년에 설립된 역사가 한눈에 바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지금의 성전은 1986년에 완공됐기 때문에 외형만 보아서는 역사성이 전달되기는 힘들다. 왕림본당 첫 성전은 1889년 12칸으로 지은 초가 성당으로 200명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크기였다. 이후 1902년에 두 번째 성전으로 33칸 한옥성당을 지었고, 1971년 세 번째 성당은 벽돌조로 건축한 첫 건물이었다. 현재의 성당은 대성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사제관, 왼쪽에 수녀원이 일체를 이루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1986년 11월 25일 새 성전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뒤 1988년 11월 1일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식과 새 성당 봉헌식을 열어 본당의 역사성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성전 안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제1호 수원교구 순례 사적지 지정 현판과 교구 도보성지 순례길 현판이 붙어 있어 왕림본당의 오랜 역사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다. 성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초대 주임 파리 외방 전교회 안학고(야고보) 신부(재임 1888년 7월~1890년 4월)로부터 제29대 주임 임재혁(스테파노) 신부(재임 2022년 1월~2023년 12월)까지 29명의 역대 주임신부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다. 비록 왕림본당 초창기 성전의 실체는 사라졌지만 본당 설립 당시부터 사목을 이어온 사제들의 모습에서 130년이 넘는 본당 역사가 온전하게 전해진다. 성전 제대 아래에는 기해박해가 진행되던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발이 안치돼 있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1월경 갓등이공소를 방문하던 중 서울에서 들려온 박해 소식을 듣고 서울로 돌아갔다가 순교한 만큼 앵베르 주교의 순교 전 발자취를 제대 아래 모셔진 모발에서도 느낄 수 있다. 왕림성당은 2025년 정기희년 수원교구 순례지로도 선정돼 개인별, 본당별 신자들의 순례가 이어지고 있다. 기자가 성당을 찾은 3월 19일에도 제1대리구 비전동본당 신자들이 왕림성당을 찾아 제대 앞에 앉아 성체조배를 하고 성당을 둘러봤다. ■ 고풍스런 옛 사제관의 정취 왕림성당에는 남녀 신자들과 어린 양이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있는 독특한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본당 신자들의 신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모상을 바라보며 조금 더 걸어가면 고색창연한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이 한옥 기와지붕 밑에는 한자로 ‘사제관’(司祭館)이라고 씌어 있다. 1902년에 봉헌된 사제관이다. 1982년 9월에 본래 모습대로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제관 앞 넓은 정원에는 오래된 묘비 두 기가 서 있다. 하나는 1890년 4월 13일 선종한 초대 주임 안학고 신부의 묘비이고 다른 하나는 1914년 5월 26일에 선종한 제5대 주임 곽원량(가롤로) 신부의 묘비다. 이 묘비는 왕림공동묘지에서 옮겨온 것이며, 두 사제의 유해는 현재 교구 안성공원묘역 성직자 묘역에 안장돼 있다. 두 신부의 묘비에는 사제를 뜻하는 어휘로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탁덕’(鐸德)이 한자로 새겨져 있고, 출생과 사제서품, 입국과 선종 날짜가 기록돼 있다. 모서리가 마모된 두 사제의 묘비를 보고 서 있으면 왕림본당 130여 년의 역사가 오롯하게 전해진다. 옛 사제관 뜰은 수원가톨릭대학교와 계단을 통해 연결돼 있다. 수원가톨릭대 신학생들이 운동하는 활기찬 소리가 구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교구가 1983년 수원가톨릭대를 왕림성당에 인접해 설립한 것에서도 왕림본당이 수원교구를 대표하는 신앙의 못자리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요당리성지 성당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요당리(蓼塘里)는 조선 후기까지도 바닷물이 들어오는 마을로 여뀌(蓼)가 많은 연못(塘)이 곳곳에 있었다고 해 생긴 자연 지명이다. 성인·복자의 순교 터는 아니지만 신유박해(1801)를 기점으로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되면서 성 장주기(요셉·1803~1866)와 성 민극가(스테파노·1787~1840), 성 범 라우렌시오 주교(앵베르·1796~1839) 등 신앙 선조들의 혼이 서려 있는 곳이 있다. 경기 화성시 요당길 155에 위치한 요당리성지 성당(전담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을 찾았다. 따뜻한 분위기의 대성당 요당리성지에 들어와 빨간색 벽돌로 지은 대성당 앞으로 가면 맨 처음 눈에 띄는 것은 성당 봉헌 기념으로 세운 손 모양 조각상이다. 성당 건립에 후원을 해준 이들을 기념하며 만든 조각상은 하늘을 향해 손으로 성당을 봉헌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성당 입구 오른쪽에는 성 장주기의 흉상이 순례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서 있다. 성인이 당시 자신의 집을 신학교 학생들의 공부 공간으로 내어준 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문 앞에 서면 독특한 문양이 보인다. 바로 한국 103위 순교 성인 이름의 자음과 모음으로 만들어진 철물 장식이다. 나무 타일이 짜인 배경과 어우러져 멋스럽다. 문을 열고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색색깔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순례자를 반긴다. 이곳이 초기 교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운영되던 곳이었기 때문일까? 스테인드글라스의 문양은 곡식들이 자라나는 형상으로 보인다. 또한 정열의 붉은색에서 강렬한 푸른빛으로 차츰 변화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상에서 곡식이 자라기 위한 물과 햇볕, 또 이를 길러낸 순교자들의 선혈까지도 엿볼 수 있다. 제단 쪽에는 한 장 한 장 구워낸 주홍빛의 벽돌 위로 십자가, 그리고 한국 103위 순교성인이 새겨진 감실이 모셔져 있다. 십자가에 가로대가 없는 이유는 그것을 순례자의 몫으로 두어, 예수님과 십자가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고 가길 바라는 뜻이 담겼다. 성당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의 길은 이숙자 수녀(체칠리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의 작품으로 손이나 발 등 부분에만 집중한 조각을 통해 핵심을 짚어내어 묵상하도록 유도한다. 성지 성당으로는 흔치 않게 성당 뒤쪽에는 유아실이 자리해 있어 아이와 부모의 방문을 반긴다. 또한 중앙 통로 뒤 햇빛이 들어오는 길목에 푸른 장미 모양의 둥근 스테인드글라스를 배치해 성령의 빛을 형상화했다.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소성당 성당 오른쪽 건물 2층에 있는 소성당은 정답고 포근한 느낌이다. 십자가와 제대 뒤 벽돌이 대성당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소성당 십자가의 길은 조각가 이효주(아나스타시아) 씨가 1998년 화재를 입은 서울대교구 중림동약현성당의 불에 탄 목재로 만들었다. 그때까지 약 100년간 기도의 공간이었던 중림동약현성당의 얼이 서려 있어 묵상을 돕는다. 오랜 시간을 버텨온, 그래서 항상 그 자리에 영원할 것 같았던 거룩한 공간도 한 순간에 스러질 수 있음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잡고 성찰하게 만든다. 특히 사순이 시작된 지금, 폐기물이 돼버린 목재가 십자가의 길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날을 기다리게 만든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대성당과 빛이 쏟아지는 모습이 강조돼 있다. 곡식을 잘 자라게 해주는 태양 빛이자 우리의 신앙을 길러주는 성령의 빛으로 해석된다. 제대 위에는 한 초 조각가가 기도하는 손과 못을 직접 새겨 봉헌한 사순 시기 보라색 초가 놓여 있다. 천장은 대성당처럼 나무로 마감돼 따스한 기운을 더했다. 섬세하게 정돈된 야외 성지 요당리성지에서 유명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 길은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기도의 광장을 디귿 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폭이 2~3m 되는 두 길은 양옆에 단풍나무를 심어 바람을 막고 그늘을 선사해 순례자가 쾌적하게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왔다. 십자가의 길은 성지 성당과 같은 양식이다. 묵주기도 길에 세워진 항아리 모양의 5단 묵주 알들은 이곳이 교우들의 생활터였음을 상징한다. 기도의 광장 가운데 계단에는 성모자상이 위치한다. 4월 말에서 5월 초가 되면 성모상 주변에 가득 피는 붉은 영산홍이 선조들의 숭고한 뜻을 받든다. 성모상 저 너머로 대형 십자가와 성인·복자·하느님의 종 일곱 분의 가묘가 있어 신앙 선조들을 기억하고 묵상할 수 있게 했다. 가묘 뒤와 성지 곳곳에 조성된 소나무는 순교자들의 절개를 보여준다. 게다가 성지 전체를 향나무 울타리가 둘러싸고 있어 오붓한 정취를 자아낸다. 성 장주기와 복자 장 토마스(1815~1866)의 출생지이자 하느님의 종 지 타대오(1819~1869) 등 증거자들의 터전이었던 요당리성지. 부활을 향해 열정을 불태웠던 그들의 피와 땀이 희년에 맞는 사순 시기에 더욱 빛나고 있다.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수리산성지 고택성당

수리산은 안양, 군포, 안산 등의 도심과도 가깝고 좋은 경관으로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등산명소다. 하지만 수리산은 신앙인들에게 그저 경관이 좋은 산에 그치지 않는다. 수리산(修理山). 진리를 깨닫고자 수양하는 산이라 불리는 이곳은 박해시대에 진리를 찾고, 또 진리를 따르는 삶을 지켜나가기 위해 모인 신앙인들을 품어준 곳이기도 하다. 그 역사를 담은 수리산성지 고택성당을 찾았다. ■ 산 속의 옛집 복작복작한 안양역을 지나 차로 10분가량 수리산을 향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한적한 길이 펼쳐진다. 군데군데 배낭을 멘 등산객들이 보이니 등산로라는 느낌이 물씬 든다. 그렇게 산을 오르는 초입에 고즈넉한 옛집이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08에 자리한 수리산성지 고택성당이다. 나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듯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는 기둥과 흙 빛깔의 벽, 나무로 만든 문, 정갈하게 올라간 기와. 옛 정취가 묻어나는 외관이 ‘고택’이라는 이름이 참 어울린다. ‘고택’성당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은 이 건물 자체는 그리 오래된 건물이 아니다. 고택성당은 2006년 6월 4일에 완공하고 첫 미사를 봉헌한 건물이다. 고택성당을 고택으로 부르는 이유는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이 살던 옛집의 터 자리에 최경환 성인 일가와 교우촌의 옛 모습을 기리며 다시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최경환 성인이 수리산으로 이주한 것은 1837~1838년 경으로 추정된다. 성인은 자신처럼 신앙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리산 자락을 찾은 신자들과 함께 교우촌을 이루고, 교우촌 회장으로서 신자들을 이끌며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교우촌의 신자들은 담배를 재배해 생계를 꾸려나가 수리산 교우촌은 ‘담배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당에 들어가니 성당 내부가 독특하다. 한옥의 형태이면서도 복층으로 구성된 것도 신선한 점이지만, 무엇보다 제대가 자리한 위치가 눈길을 끈다. 성당의 평면이 긴 직사각형의 모습인 경우, 대부분 긴 양 끝에 한쪽은 입구를 한쪽은 제대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고택성당은 직사각형의 좁은 끝이 아닌 넓은 면의 가운데 즈음에 제대가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인 성당은 신자들이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제대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면, 고택성당은 제대 주변에 오손도손 모여 앉는다는 인상이 들었다. 멀리 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곁에 계신 예수님이라는 느낌이다. 아마 교우촌에서 생활하던 신자들도 이렇게 예수님 곁에 오손도손 모여 기도하지 않았을까. ■ 아버지 최경환을 기억하며 고택성당을 들어서는 길목에는 성가정상이, 성당 제대 한쪽에는 아기 예수를 안아 든 성 요셉과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가정상은 이 고택성당이 있던 자리에서 성가정을 이뤘던 최경환 성인을 묵상하게 해줬다. 최경환 성인은 복자 이성례(마리아)의 남편이었고, 특히 한국교회의 첫 신학생으로 발탁돼 10년 이상 박해 중인 조선팔도를 걷고 또 걸으며 사목한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아버지였다.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 최경환 성인의 신앙의 모범을 통해 신앙을 성숙시켜 나갔다. 최경환 성인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앙을 위해 떠나자고 제안했고, 결국 성인에게 감화돼 온 가족이 신앙을 찾아 재산과 터전을 버리고 떠났다. 한양과 여러 산골을 연명하다 수리산에 정착하게 됐다.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해 떠나는 아버지를 보고 성장했다. 후에 최양업 신부는 이 사건을 두고 “프란치스코(최경환)의 가족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자진해 이런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다”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성인은 이후로도 늘 신앙과 교리에 관해 이야기하며 선교했고, 주변에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살아갔다. 최양업 신부는 “프란치스코(최경환)는 열변과 달변으로 천주교 진리를 강론하거나 강의했기 때문에 박학한 신자들이나 유식한 사람들까지도 그의 강론을 들으러 왔고, 매우 까다롭게 꼬치꼬치 따지는 비신자들까지도 그의 변론에 설복되어 돌아가곤 했다”면서, 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돼 있었다”고 기록했다. 성가정을 일구고 순교로 목숨을 바친 최경환 성인의 묘소는 고택성당 맞은 편 산길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가파른 경사에 설치된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오른 끝에 묘소가 있다. 성인의 묘소 앞에 서니 고택성당 제대 맞은편에 창 너머로 보이던 절벽의 바위가 떠올랐다. 성인이 살던 곳을 가능한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절벽을 깎아내거나 가리지 않고 성당을 지었기에 드러나 있던 바위다.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된 성인은 40일 이상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옥사했다. 어떤 고문에도 한결같이 굳건하던 모습에 형리들은 성인을 보고 “바위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택성당에는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고 성가정을 지킨 성인이 살았고, 또 순교해 묻힌 기억이 스며있었다.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용문성당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로 421. 언덕 위로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 있는 한 쌍의 노란 돔이 보인다. 이 2개의 돔과 그 사이의 지붕, 그 위로 세워진 3개의 십자가, 지붕 아래 벽감의 성모상, 세로로 길게 난 스테인드글라스들, 그리고 이들을 굳건하게 지지하는 벽돌조 외벽이 고풍스러운 건물 전면, 파사드를 이룬다. 제2대리구 용문성당이다. 한국교회 시작 당시 존재했던 양근 신자 고을 역사 이어진 곳 교구 순례사적지이자 희년 순례지 역사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 옹기가마처럼 생긴 기도방과 숲 둘러싸인 십자가의 길 눈길 ■ 신앙선조의 이야기를 품은 성당 용문성당 정문에 다가가자 출입문 좌우로 유리창마다 우리나라 신앙선조를 그린 성화들이 보였다. 주로 한국교회 초기에 활동했던 신앙선조들의 초상과 그 일화를 담은 성화들이다. 신앙선조에 관해 찾아본 이들이라면 한번쯤 봤을 법한 그림들. 이 그림들은 순교자들의 피로 신앙공동체를 꽃 피운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용문본당 공동체의 역사를 기억하게 해주는 그림들이기도 하다. 용문본당이 한국교회의 요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양근의 신자 공동체에서 이어오는 본당이기 때문이다. 양근은 하느님의 종 권철신(암브로시오)가 살던 마을이다. 일찍부터 이름 있는 학자였던 권철신의 문하에는 여러 젊은 학자들이 모여 들었다.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이승훈(베드로)·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비롯해 복자 홍낙민(루카)·윤유일(바오로) 등 초기 한국교회를 세우고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여러 신앙선조들이 그 문하생들이다. 권철신의 문하생들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천주교 신앙을 전파한 주역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종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권철신의 동생이고, 복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는 그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양근은 ‘교우촌’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전, 한국교회 설립 당시부터 신자들의 고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양근의 신자들은 용문의 산촌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용문산 깊은 산중으로 피신해 교우촌을 이뤄 살았다. 이 교우촌이 이어온 공동체가 1908년 교구의 5번째 본당인 용문본당으로 이어진 것이다. 성당 1층에는 ‘수원교구 순례사적지 용문성당 역사전시관’이 조성돼있었다. 서학 연구가 신앙으로 이어진 천진암 강학에서부터, 양근 지역 신앙의 역사, 박해와 오늘날의 용문 공동체에 이르는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또 신앙선조들이 사용하던 신심서적들, 미사에 사용한 제구들도 함께 살필 수 있어 신앙선조들의 역사와 신앙생활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교구는 교구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역사를 품고 있는 용문성당을 2020년 11월 ‘수원교구 순례사적지’로 선포해 많은 신자들이 순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2025년 희년 순례지로도 지정돼 희년 전대사도 수여받을 수 있다. ■ 피정에 머무는 곳 성당 외부에도 신앙선조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성모동산 옆에 자리한 기도방이다. 본당의 주보성인인 묵주기도의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마련된 이 기도방은 무엇보다 모습이 독특하다. 옹기나 도자기를 굽는 가마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살던 터전을, 생업을 모두 버리고 산속으로 떠난 신앙선조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선택한 활동은 옹기를 구워 파는 일이었다. 용문성당 인근에도 요곡(窯谷, 요골) 마을이 있어 1985년까지 옹기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성당에는 이런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성당 울타리를 항아리를 활용해 조성하기도 했다. 옹기가마 모형의 기도방에 들어가니 작은 창을 통해 은은하게 들어오는 자연채광으로 아늑한 느낌이 드는 둥근 형태의 방이 나타났다. 세속을 떠나 사막이나 산속 동굴에서 기도하던 옛 수도자들처럼 고요하게 하느님 안에 머물기 좋은 공간이었다. 기도방만이 아니다. 성당 뒤편 동산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은 숲으로 둘러싸여 자연 속에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묵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성당과 기도방, 숲속 십자가의 길 등은 순례자들이 짧게나마, 세속을 피해(避世) 조용한 곳에 머물며 기도할(靜念) 수 있도록, 피세정념, 즉 피정에 이를 수 있도록 초대하고 있었다. 특히 이곳 용문이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피정이 이뤄진 곳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용문성당에서의 순례 중 피정을 기억하는 것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1785년 명례방에서 열린 신자들의 모임이 발각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하느님의 종 김범우(토마스)가 유배를 가고, 이벽, 이승훈 등도 문중의 박해를 받으면서 당시 교회는 구심점을 잃고 말았다. 이때 권일신은 조동섬(유스티노)과 용문산에 올라 8일 동안 침묵 피정을 하고 다시 교회 재건에 힘썼다.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 “그(권일신)는 규칙적인 피정을 할 결심을 하고, 용문산에 있는 어떤 적막한 절로 들어가 피정 동안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기로 했다”며 “그들은 주님과 성인들을 본받고자 하는 바람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신심 수업, 즉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면서 8일을 지냈다”고 권일신의 피정을 묘사하고 있다. 달레 신부는 “이런 실천은 그들 자신과 그들이 피정 후에 가르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얻게 한 것이 확실하다”고 밝힌다.

발행일 2025-02-16 제3429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보정성당

뾰족한 지붕과 종탑, 벽돌조 벽, 아치…. ‘성당’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유럽의 전통적인 성당 건축 양식에서 온 이미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옛 모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성당 건축들도 등장하고 있다. 제1대리구 보정성당도 전통적인 성당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성당이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신촌로73번길 24. 아파트 단지 사이로 마치 여러 개의 정육면체가 쌓여 높이 솟은 듯한 건물이 보였다. 그 건물 위로 십자가가 올라가 있었다. 보정성당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은은한 상아색의 외벽이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온 이라면 사방을 덮은 ‘라임스톤’의 색을 기억한다. 라임스톤은 이스라엘 지역에서 많이 나는 석회암이다. 이스라엘의 옛 건축물들은 대부분 이 라임스톤으로 지었고,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의 건물은 외벽을 라임스톤 색으로 통일하고 있다. 그래서 이 라임스톤 색의 대리석은 ‘예루살렘골드’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성당 앞 안내문을 보니 이 라임스톤 빛깔 외벽제의 정체는 베들레헴·헤브론 지역에서 난 대리석이었다.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는 성당 외벽의 돌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마을 인근에서 왔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온 듯한 느낌마저 든다. 아마 예수님도 이 라임스톤 색이 가득한 마을에서 생활하셨을 터다. 성당에 들어서니 길게 뻗은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 서쪽면에 위치한 계단은 1층에서 3층까지 한 방향으로 완만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돼있었다. 흔히 계단 이용은 힘들고 다소 답답하기 마련이다. 지그재그 형태의 계단은 효율적이지만, 앞이 막혀있어 다소 답답하기도 하고, 층을 오르면서도 같은 풍경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정성당의 계단은 앞이 길게 탁 트여있는데다 라임스톤 색의 벽 사이로 스테인드글라스의 채광이 비치니 3층까지 오르면서도 기도하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계단을 끝까지 다 올라오니 빛이 밝아오는 듯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집을 향해, 밝아오는 빛을 향해 오르는 신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계단이다. 성당 제대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제대는 제대 정면으로 난 큰 창이나 별도의 전기조명 없이도 밝았다.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 는 제대 측면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천장에 난 창의 반사광 덕분이다. 특히 제대 좌우측, 동서방면으로 난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사선으로 쏟아지는 색색의 빛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오전에서 오후까지 시간에 따라 움직이면서 제대를 빛으로 꾸미고 있었다. 밝은 제대에 비해 다소 어두운 신자석은 제대와 제대에 모셔진 성체를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묵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으로 거듭났다. 공동체의 모습을 담은 성당 보정성당은 순례하고 기도하기에도 좋은 성당이지만, 무엇보다 지금 이 자리를 살아가는 신자공동체의 모습을 담은 성당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하다. 성당 전체의 모습은 언뜻 불규칙하게 직육면체를 쌓아 올린 듯한 모습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동편에서도 세로로 긴 직사각형 다섯, 서편에서도 세로로 긴 직사각형 다섯이 눈에 띄게 보인다. 이 긴 다섯 개의 직사각형은 손가락을 나타낸 것으로, 양쪽에서 가지런히 손가락을 모아 하늘을 향한 모습, 바로 성당 전체가 기도하는 손의 형상으로 디자인됐다. 전통적인 고딕 양식의 성당 모습에서 탈피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정관념을 떠나 현대적인 건물로 성당을 기획하면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 그러나 현대적인 디자인 안에서도 전통적인 의미를 재해석해 건물의 수직성을 통해서 고딕 양식 성당의 높은 첨탑이 드러내고자 했던 하느님의 신성함과 하느님을 향한 교회의 마음을 담아내고자했다. 동시에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평면 구성을 통해 주님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표현했다. 무엇보다 미사만 드리고 떠나는 성당이 아니라 언제라도 머물고 싶은 성당을 만들고자 고심했다. 본당은 1층에는 성모동산과 북카페를 만들어 신자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삼았고, 2층의 교리실, 회합실 등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방을 동쪽 공원 방향으로 배치해 밝고 또 자연을 가까이서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런 공동체의 마음이 담긴 성당은 2012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으며 인정을 받았다. 한국건축문화대상은 건축의 본질과 시대의 정서, 기능성이 구현된 건축물을 발굴·시상하는 대화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교구 세곡동본당, 대전교구 원신흥동본당 등 전국의 여러 본당에서 보정본당을 답사하고, 모티브를 얻어 새 성당을 건축하기도 했다. 보정성당은 하느님을 향한 공동체의 모습을 담은 성당, 현대적 성당 건축의 모범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발행일 2025-01-26 제3427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은이성지 성당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은이로 182. 은이성지에 다다르니 하얀 외벽이 인상적인 아담한 성당이 나타났다. 바로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닌 은이성지 성당이다. ■ 380년 역사를 지닌 성당 은이성지 성당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성당 정문 위로 천주당(天主堂)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중국에서 성당을 일컫는 말이다. 문구만이 아니었다. 건물의 형태도 중국식이고 지붕의 기와 역시 중국에서 사용하는 형태의 기와가 올라가 있었다. 380년 전 중국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이기 때문이다. 김대건 성인을 기억하는 성지에 왜 중국식 성당이 세워졌을까. 이 성당의 옛 이름은 김가항(金家巷)성당이다. 1644년 중국 상하이에 있던 중국 전통 양식의 큰 주택을 성당으로 개조한 것이 이 성당의 시작이다. 이 유서 깊은 성당은 중국 난징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사용되면서 증축을 거쳤고,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이 성당에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성당은 그저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성당을 재현하기만 한 성당이 아니다. 중국에서 철거된 김가항성당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 성당이기 때문이다. 상하이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김가항성당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교구는 2001년 김정신 명예교수(스테파노·단국대 건축학과)를 비롯한 전문가를 현지에 파견, 성당을 정밀하게 실측했다. 교구는 이렇게 정밀한 도면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2001년 3월 25일 마지막 미사를 끝으로 김가항성당이 철거되자 성당에 사용된 주요 자재들을 은이성지로 가져왔다. 교구는 은이성지에 김가항성당을 복원하고자 계획했지만, 교통·환경 영향 평가 등을 이유로 복원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다 2013년 김대건 신부가 세례를 받은 은이공소 터를 매입하면서 복원 작업에 착수, 2016년 복원을 완료했다. 교구는 중국 상하이의 김가항성당을 원형대로 복원하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기둥 4개와 보 2개, 동자주 1개 등 철거 당시 가져온 목자재를 그대로 사용했다. 심지어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3차례에 걸쳐 증축한 흔적까지도 복원해 380년의 역사성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건축면적 540㎡에 불과한 성당은 220명가량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크기다. 그러다 보니 복원이 진행되기 전 많은 순례자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성당을 넓혀서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최대한 옛 모습을 살려서 복원하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380년의 역사가 이 성당을 통해 이어질 수 있었다. ■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기억하는 공간 은이성지 성당이 복원해 낸 것은 비단 중국 상하이에 있었던 한 성당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건물에 있었던, 그리고 이 자리에 있었던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성당 오른편에는 물방울을, 그리고 성령의 불을 떠올리게 하는 철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이 조형물에는 한 사제가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소년이었던 김대건 신부가 세례를 받은 은이공소 터를 알리는 조형물이다. 은이 교우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김대건 신부는 성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돼 중국으로 떠났다. 성당 내부에 들어오니 옛 김가항성당에 자리하고 있었던 그 기둥과 보가 어떤 것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오랜 세월로 목재의 색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 목재들에 담긴 세월의 흔적을 바라보니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았던 김가항성당의 풍경이 절로 그려졌다. 제대 앞에 엎드리고, 또 무릎 꿇고 안수를 받았을 청년 김대건 신부는 우리가 보는 이 모습의 성당을 보고 있었을 터였다. 김가항 성당은 은이 교우촌에서 중국으로 떠난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이어주는 공간이었다. 성당 제대 벽면에는 나무로 된 제대가 설치돼 있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사제와 신자들이 함께 제대를 바라보며 미사를 봉헌하던 제대의 형태다. 이 제대 또한 중국에서 사용하던 옛 제대의 모습을 고증해서 제작됐다. 제대를 바라보니 김대건 신부가 집전했을 미사의 모습을 상상하게 됐다. 김대건 신부가 사제로 활동할 당시에는 벽면에 설치된 제대를 바라보며 미사를 주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활동한 짧은 사목기간 동안 이곳 은이를 찾아 미사를 봉헌했다. 선교사들의 입국 경로를 찾기 위해 서해안의 섬들을 조사하러 갔다가 박해자들에게 체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 곳도 은이공소였다. 제대 오른편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 교우촌까지 옮기던 길목에 은이공소가 있었다. ‘삼덕고개’라 불리는 이 길은 많은 신자들이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며 걸어온 길이다. 유년시절에서 세례성사, 신학생 선발에서 사제서품, 사제로서의 사목과 순교에 이르기까지 김대건 신부의 생애가 은이성지 성당에 담겨있다.

발행일 2025-01-12 제3425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정자동주교좌성당

수원교구의 중심이 어디일까. 교구는 교회의 수위권자인 교황이 임명한 주교를 중심으로 이룬 교회공동체(교회법 제389조)다. 그렇다면 교구의 중심은 교구장 주교이고, 장소적으로는 교구장 주교가 앉는 곳, 바로 주교좌다. 교구의 주교좌, 정자동주교좌성당을 찾았다. ■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 그리고 주교좌 외국의 주교좌성당(Cathedral)은 흔히 대성당이라고 번역되곤 한다. 주교좌성당이 대성당이라고 불리는 것은 교회 안에서 그만큼 큰 위상을 지니기 때문이다. 모든 주교좌성당은 규모나 역사, 건축 양식에 관계없이 로마에 자리한 4개의 대(大) 바실리카성당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이다. 교구 안에서는 가장 중요한 성당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자동주교좌성당은 중요도 면에서도 그렇지만 ‘대’성당이라는 이름에 손색이 없다. 실제로도 큰(大) 성당이기 때문이다. 지하 1층, 지상 5층에 건축면적 6611㎡에 달하는 이 성당은 높이만도 50m가 넘는다. 아파트로 치면 15~18층에 달하는 상당한 높이다. 게다가 외벽이 연회색의 화강암으로 둘러싸여 있어 굳건한 성벽처럼도 보인다. 무엇을 지키는 굳건한 성벽일까. 성당 입구에 새겨진 문장을 보며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교구장 이용훈(마티아) 주교의 주교 문장이다. 이 주교의 문장에는 교구를 상징하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청색은 교구 주보인 평화의 모후를 상징하고, 칼과 종려나무, 죄인의 목에 채우던 칼의 형상은 교구가 순교자들의 피와 그 영광 위에 세워진 교회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문장 전체를 가로지르는 방패 형상은 교리와 교회를 수호하는 주교의 직무를 나타낸다. 마치 주교좌성당의 크고 굳건한 모습과도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방패 형상의 중앙을 수원 화성의 성곽을 형상화한 선이 가로지르고 있어 우리 교구 공동체를 지켜주는 튼튼한 성벽이라는 느낌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화강암으로 완성된 성당 외벽 교구 공동체 지키는 상징 역할 제대 둘러싼 12사도 목각부조 신앙선조 순교 상징물 등 다채 성당에 들어서면 더욱 주교좌성당의 의미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제대의 십자가상을 중심으로 12사도의 대형 목각부조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12사도 조각을 떠올리게 하는 이 목각부조들 위에는 각 사도들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그 위로는 성령을 상징하는 불꽃과 비둘기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한가운데 주교의 의자, 주교좌가 자리하고 있다. 사도들과 성령의 형상은 주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로 주교가 성령을 통해 사도들의 지위를 계승하는 목자이기 때문이다.(교회법 제375조) 예수님이 임명한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 공동체를 이끌었고, 오늘날 주교들은 그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교리를 수호하고 교회 공동체를 사목하고 있다. 교회의 예식 안에서 주교가 앉는 주교좌는 그런 주교의 권위와 가르침, 그 직위를 상징한다. 그렇기에 주교좌(cathedra)라는 말이 성당 자체를 일컫는 표현이 된 것이다. ■ 한국 순교성인을 기억하는 곳 예로부터 주교좌성당은 ‘문맹자의 성경’이라고 불렸다. 주교좌성당 곳곳을 가득 채운 성미술들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 것에 그치지 않고 성경의 일화와 교회의 가르침을 글을 읽지 않고도 알 수 있도록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정자동주교좌성당은 중세 유럽의 주교좌성당처럼 성경 속 일화를 담은 수많은 성미술로 가득 찬 성당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성미술을 통해 성당의 주보성인이기도 한 한국 순교성인들을 기억할 수 있다. 일단 3층 대성당을 들어가는 입구에서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느낄 수 있다. 대성당 문의 좌우측과 상단에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굽히지 않고 순교를 향해 묵묵히 걸어갔던 신앙선조들의 모습이 목각으로 담겨 있다. 칼을 쓴 옥중의 신자에서부터 조선시대의 다양한 방법으로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던 신자들, 처형을 위해 형장에 끌려가는 신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양쪽 문에는 그런 신앙선조들이 성모 성심 아래, 예수 성심 아래 모여 있는 모습이 담겼다. 하느님을 향한 문은 결코 평탄하거나 안락하지 않고, 예수님이 그러셨듯, 순교자들이 그랬듯 수난과 죽음이 동반하는 고통의 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문을 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천장을 바라보면 그 고통의 길의 끝을 묵상할 수 있다. 성당 천장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돔 형태의 조명에는 원의 가장자리에는 한국 순교자들의 형상이 그리고 중앙의 움푹한 돔 안에는 12사도의 형상이, 그리고 정중앙에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형상이 있었다. 순교의 끝에 마주한 천상교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다. 그리고 그 그림에서 내려오는 빛이 성당 전체를 밝히는 모습이 마치 성인들과 사도들의 전구로 그리스도의 빛을 가득히 받은 지상교회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발행일 2025-01-01 제342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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