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일간 신문들의 스크랩을 보다 1993년 11월 3일자 기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제목은 ‘맨몸 사투 14시간, 아내 얼굴이 나를 살렸다’였다. 파나마 선적의 배에서 일하던 당시 35살 송 씨는 대만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대만에 도착하면 비행기로 귀국이 예약되어 있어 새벽 4시도 안 돼 일어났다. 마치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마음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해오던 대로 배에서 준비 작업을 하려는 순간에 갑자기 큰 파도가 밀려왔다. 송 씨의 몸은 하늘로 솟구쳤고 차가운 바다로 빠지고 말았다.
그는 “사람 살려!” 하면서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배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고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었다. 송 씨는 부유물이나 구명조끼도 없이 맨몸으로 견뎌야 했다. 자꾸 실신하기를 여러 번, 생명의 끈을 놓으려는 순간 아내와 두 살과 세 살인 두 딸이 눈앞에 환시처럼 보였다. 그는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순간 기적처럼 배 한 척이 자신 앞에 나타나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14시간 동안 추운 바닷속에서 맨몸으로 버틴 힘은 가족들을 다시 봐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나치 수용소에 갇혔던 유명한 유다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가 매일 자살의 충동을 이기며 끝까지 지옥 같은 삶에서 버틸 수 있었던 힘은 같이 수용된 아내를 만나고자 하는 소망이었다고 회고했다. 불행히도 전쟁이 끝나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부인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사도 바오로는 세 번이나 배가 큰 파도에 부딪혀 난파되며 큰 곤경에 빠지곤 했다. 또한 바오로가 탄 배에는 그를 따르는 이들도 많았다. 나는 묵상기도를 할 때 바오로가 탄 배에 같이 있음을 상상해 보면 항상 온몸이 불안과 공포에 빠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막막해진다. 누구는 탈출해야 하고 누구는 남아있어야 한다면 그 순간의 선택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될 것이다.
사도행전 27장에는, 바오로가 죄인으로 압송되어 가는 배가 난파되었을 때, 사람들이 구조될 때까지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배가 난파하자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바오로를 믿고 그의 말을 따르게 된다. 2주 동안 표류하면서 탈진하고 항해할 수 없음에도 바오로는 사람들에게 생존의 믿음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몰타에 상륙해서 276명 전원이 구조되었다. 성경의 행간을 보면 선원과 승객들은 갈등과 분열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에 믿을 만한 지도자의 말에 순종해 생존했다.
폭풍 속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 선장보다 죄인으로 압송되는 바오로의 말을 따랐던 사람들의 선택도 대단하다. 그들은 생명을 바오로에게 맡긴 셈이다. 미국의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1803~1882)은 “지혜로운 사람은 폭풍이 닥치면 ‘위험’보다 먼저 ‘두려움’에서 구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고 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