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유리알] 날개가 없는 이유

냇가에 선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오리를 노려보는 길고양이를 본 적이 있다. 순간 상상은 저 너머로 향하고. ‘고양이에게 날개가 있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에 이른다. 그러면 ‘물에 닿지 않고도 독수리처럼 오리를 사냥하고, 쥐 대신 박쥐와 높이뛰기를 하며, 이왕 날개를 달았으니 위험에 빠진 아이들을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나 사람이나 하늘을 난다는 건 신비로운 상상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고양이는 너무 잠이 많다. 나는 지난해 ‘신학생들의 위로자’라고 불리던 남상근(라파엘) 신부를 만나러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앵무새 두 마리를 기르던 그는, 이제 통통한 고양이 아슬란까지 키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날개 달린 고양이가 그의 사제관 안에는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첫 번째 질문은 이랬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제직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는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만화에서 나오는 로봇 박사님 같은 그의 진지한 표정이 좋았다.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사제직 같아요. 변화무쌍하니까. 모르면서 시작했고, 안다고 생각했지만, 분명했던 것들이 갈수록 희미해져만 가요. 새 신부일 때, 주교님이 첫 본당에 보내셨는데 열심히 살려고 얼마나 긴장을 했겠어요. 본당 신부님과 처음 차를 마시는데 패기를 보여주려고 대뜸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다부지게 말했지요. 그런데 본당 신부님이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뭘 그렇게 열심히 살아? 그냥 살아~’였어요. 그 말씀이 오히려 제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짝 얼어서 있었는데, ‘그냥 신자들과 살면 되는구나’ 아무 탈 없이 기쁘게!” 남상근 신부는 내가 ‘답’이 아니라 ‘위로’를 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여주었다. “서품 50주년을 맞은,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수도회 신부님이 계셨어요. 누군가 할아버지 신부님에게 질문했다고 해요. ‘사제로서 어떻게 그리 잘 사셨나요?’ 보통은 하느님을 위해서 좋은 말씀을 하실 거 같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그러셨대요. ‘오늘 그만둘까 내일 그만둘까 하다가 50주년이 되었다’고. 사는데 왜 힘들고 험한 갈등이 없겠어요. 그냥 사는 거지.” 입학을 함께 한 사이라 그런지 나는 아직도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그런 든든한 어깨 같은 사람. 신학원 같은 반 친구가 짐을 싸서 다시 세상을 향해 떠나야 했을 때, 형님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한참 울어주던 사람이었다. 고학년이 되어서도 그의 방에는 언제나 위로와 쉼이 필요한 신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때 우리는 깨지기 쉬운 유리알 같았다. ‘저러다 공부는 언제 하나?’ 싶을 정도로, 한 명 빠지면 바로 다른 한 명이 그의 방을 채우고 그랬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내 문제로는 그를 귀찮게 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나는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인기가 있는 그가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때 그는 신학생다웠고 지금은 사제다웠다. 태어날 때부터 형님이 사제다웠을 거라는 생각에서 ‘부르심-성소’에 관해 물었다. 그는 대학원 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읽었던 ‘성가복지병원의 청년봉사자에 관한 기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집 가까이에 그 병원이 있었고,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 병원 간판이 보이자, 바로 내려 ‘봉사를 하고 싶다’고 시작한 것이 안내실 차트 정리였다. 그러던 중 병원의 한 수녀님이 ‘라파엘! 꼭 사제가 되면, 서품 첫 강복 받으러 갈게’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이게 부르심인가?’ 해서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 입학한 지 4년이 흘러 신학교 성소 주일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첫 강복을 받으러 오신다던 그 수녀님을 우연히 만나 너무 기뻤다고 했다. 그런데 그분이 오랜만에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왜 여기에 있어?”였다니! 당시 수녀님은 병원에 봉사 오는 모든 청년에게,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가라’고 했는데 ‘거기에 자신이 딱 걸린 것’이었다고. 이쯤이면 성소가 아니라 ‘착각’이 아닌가 싶은데. 그 후 형님의 서품식에 수녀님은 약속대로 오셔서 첫 강복을 받으셨다. 돌이켜보면 하느님의 손길은 자주 인생의 ‘우연’을 사용하신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바스테트’(Bastet) 여신의 머리는 고양이상으로, 처음에는 전쟁의 신으로 여겨졌다. 후에 이 여신의 비밀스러운 눈인 고양이가 어둠 속에서 은밀히 다니며 악한 기운을 부수고 모두를 보호하자, 밤의 수호신으로 추앙되었다. 이쯤이면 이집트 고양이들은 적어도 그 위세에 날개가 없다고 사냥을 못 하거나 누구를 돕지 못해 아쉬워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때론 그런 생각도 든다. ‘고양이에게 보이지 않는 날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천사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는 것처럼. 2025년 1월 12일 주일 새벽. 내가 사는 성당에 불이 났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남상근 신부가 연락해 왔다. ‘성전에 불이 난 것을 이제사 들었다며. 주일 저녁 미사를 마치고 늦게라도 꼭 오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는 차가 없었다. 분명 지하철로 그 밤에 왔을 것이다. 우리는 휴대전화 불빛을 켜고 아직 유독가스가 가시지 않아 매캐한 현장을 둘러보았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다치지는 않았냐’며 그는 안타까워했다. 오랜만에 만난 착한 동네 형 남상근 신부는 그렇게 찾아와 위안을 해주었다. 그는 말미에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요한 2,1-12)를 했다. ‘혼인잔치에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 않았냐고… 아직 이 좋은 술이 남아있었냐는. 우리가 눈앞에서 희망을 잃게 되고, 아픔이 찾아올 때 생각해 봐야 한다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이 변화시키신 그 좋은 술은, 바로 화재에도 서로를 지키고 있는 이 공동체가 아니겠냐고.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새 사제의 첫 번째 안수처럼 내 머리를 꼭 감싸며 기도를 해주고 그는 돌아갔다. ‘그의 위로’는, 주기 위해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다가가는 마음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형님은, 키우는 앵무새와 고양이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돕고 싶어한다는 것을.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 주님의 천사들은 날개를 접고 위안을 전한다. 형님 같은 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옛 성 베드로 대성당

교회 전승에 의하면 성 베드로 사도와 성 바오로 사도는 기원후 1세기 세상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고 그곳에 묻혔습니다. 로마는 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도시입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이 씻겨 사라지지 않고 땅속 깊이 스며들어 하느님 나라의 싹을 틔웠습니다. 로마 교회는 이렇게 두 사도의 두 기둥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전승과 후대에 쓰인 외경은 성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서 십자가형으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문학과 예술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더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때, 로마 교회는 땅속 깊숙이 좁고 어두운 곳에서 넓고 밝은 데로 나와 성당을 짓고 성찬례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 보편 교회가 11월 9일에 봉헌 축일로 기념하고 있는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이며, 이곳이 로마교회의 주교좌성당이 되었습니다. 또한 318년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실베스테르 1세 교황(314-335 재위)은 네로의 원형 경기장 옆 바티칸 언덕 기슭 성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곳에 첫 번째 사도의 순교를 기념하는 성당을 지어 봉헌했습니다. 이 성당이 새로운 대성당이 들어설 때까지 1200년 동안 여러 차례 이민족의 약탈을 견뎌 내며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맞이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당시 공공의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의 유형은 크게 ‘바실리카’와 ‘신전’의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먼저 바실리카는 공회당 같은 세속적 모임의 장소였기 때문에 다수의 대중을 수용하기 위해서 장방형의 기다란 형태를 가졌습니다. 반면에 신전은 종교적 모임의 장소로 제관만 들어갔고 일반인들은 신전 밖 공간에 머물렀기 때문에 소수의 인원이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정방형 혹은 원형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모임의 성격 면에서 본다면 성당은 사제가 하느님께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곳이기 때문에 신전에 가깝고, 따라서 정방형이나 원형의 형태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제사인 성찬례(미사)는 모든 신자가 참석하는 전례이기에 사제만 들어가는 신전 형태보다는 다수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는 바실리카 형태가 더 어울렸습니다. 이런 필요에 따라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선택하였습니다.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 평면을 보면, 중앙에 신자들이 앉는 넓은 공간인 ‘네이브’(nave)가 있고 양쪽에 통행로인 ‘아일’(aisle)이 두 겹으로 있는, 5랑식 구성입니다. 그리고 바실리카에서 안쪽 깊숙한 곳에 외부로 돌출한 반원형 공간이 있는데 이를 ‘앱스’(apse)라 부르고 그곳에 제단을 두었습니다. 네이브의 천장고와 아일의 천장고 차이를 이용해서 ‘네이브월’(nave-wall)의 상부에 외부에서 빛이 들어오도록 창을 만들었는데 이를 ‘클리어스토리’(clerestory)라고 부르고, 이 창 덕분에 성당의 중앙 바닥까지 빛이 닿았습니다. 천장은 목재로 구조 형틀을 만들고 그 하부를 평평하게 마감한 ‘목조 평천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금처럼 교황이 머무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교황은 로마의 주교이기 때문에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이 교황청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 후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은 황폐해진 상태였고, 이런 이유로 교황은 바티칸의 옛 성 베드로 대성당에 교황청을 마련했습니다. 이후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교회의 중심이 되었는데, 건축한 지 천 년이 넘은 이 대성당 역시 대대적인 보수 및 증축 공사가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처음으로 확장 공사를 시작한 교황은 니콜라오 5세(1447~1455 재위)입니다. 그는 처음에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를 통해서 새로운 대성당을 계획하였으나, 제단의 성가대석 부분을 확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즈음에 교회사적으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으로 멸망한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날인 1453년 5월 28일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에서는 마지막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서방의 로마 교회는 동방의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잃으면서 로마에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위상을 이을 대성당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니콜라오 5세 교황 이후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다시 무관심 속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렇게 50년이 지나고 1503년 율리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교황은 즉시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능가하는 새로운 대성당이 가톨릭교회에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대성당의 건립을 결정하였습니다. 1506년 브라만테의 설계로 새로운 대성당의 초석이 놓였으며, 브라만테는 이후 여러 차례 설계를 변경했는데 안타깝게도 설계 과정과 변경 내용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실 율리오 2세 교황은 브라만테뿐만 아니라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등 어느 시대도 비길 수 없는 건축과 예술의 대가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래서 브라만테가 설계한 대성당이 그대로 지어졌다면, <아테네 학당>이 있는 라파엘로의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에서 출발하여, <최후의 심판>이 있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경당(Cappella Sistina)’을 거쳐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르기까지 순례자들은 신앙과 예술의 향연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고, 브라만테는 그들과 함께 영원한 건축가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20면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 – 신학자 70인에게 묻다] (4·끝) 무관심한 세계서 ‘평화’ 찾는 교회

가톨릭신문은 새 교황 레오 14세의 선출을 맞아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 – 신학자 70인에게 묻다’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이끄는 교황의 가장 중요한 사목적 과제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곧 가톨릭교회 전체의 소명을 드러내며 하느님 백성 전체가 그 소명의 실천에 어떻게 협력하고 투신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총 4회에 걸쳐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와 하느님 백성의 나아갈 길을 살펴본다. 1. 시작하며 - 설문조사 결과 종합 2. 시노드 교회를 향해 - 시노달리타스의 실현 3. 교회는 쇄신돼야 -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현 4. 세상과 교회 - 빈곤과 폭력을 넘어 그리스도의 평화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교황명을 선택했듯이, 레오 14세 교황은 19세기 레오 13세 교황에게서 이름을 따왔다. 레오 13세 교황은 노동과 자본의 문제에 대해 교회가 처음으로 공식 입장을 밝힌 사회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반포했다. 사회교리, 세상과의 관계 방식 ‘레오 14세’라는 이름은 사회교리의 현대적 적용을 통해 새로운 세기의 도전에 응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그의 교황직 수행에 있어서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나타낸다. 레오 14세 교황은 지난 5월 10일 추기경단 전체 회의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노선을 이어갈 것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현에 헌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교회는 또 다른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 분야의 발전에 직면해, 인간 존엄성과 정의, 노동을 수호하기 위한 새로운 도전에 응답하고자 사회교리를 전 인류에게 선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황으로서 과거의 교도권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사회교리를 교회의 ‘세계와의 관계 방식’으로 여기며, 시대적 변화가 제기하는 새로운 물음에 신앙적으로 응답할 자세를 강조했다. 특히 그가 인공지능을 19세기의 산업혁명에 견주어 인공지능이 가져올 심대한 변화에 대응할 것을 요청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빈곤, 그리고 가난한 교회 설문에 응답한 70명의 신학자들은 시노드 교회 건설 다음으로 ‘빈곤, 경제적 불평등과 세계화 문제’(27명, 19.3%)를 새 교황이 해결해야 할 두 번째 중요한 과제로 지목했다. 여기에서 가난과 빈곤은 단지 절대적인 궁핍의 상태에 대한 우려에 그치지 않는다.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는 양극화,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를 야기하는 경제적 ‘불평등’의 상태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적한 ‘무관심의 세계화’ 현상과 연관되며, 갈수록 공고해 지는 제도적, 구조적 사회악으로서,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맹목적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오늘날 빈곤의 문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이념과 경제 체제가 만들어내는 극단적 양극화의 문제로 인식된다. 안전하게 자신들의 땅에 정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도는 이주민과 난민은 그 상징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의 피해자들이다. ‘레오 14세’ 교황명으로 나타낸 주요 사목 방향 ‘사회정의 실현’ 빈곤·분쟁·자연 파괴 등 원인…관계 단절에 의한 위기로 파악 만연한 폭력과 그리스도의 평화 ‘폭력과 무력 분쟁 해소 및 평화 회복’(12명)과 ‘기후위기와 생태환경 보전’(8명)이 각각 4위, 5위를 차지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력 충돌을 포함해 현재 세계가 직면한 수많은 분쟁 상황을 ‘제3차 세계대전’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레오 14세 교황 역시 새 교황으로서 처음 맞은 주일인 5월 8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평화를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바란다”며 전임 교황의 경고를 이어받아 “현재 우리는 ‘조각난 형태의 제3차 세계대전’을 겪고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신학연구소 박문수(프란치스코) 소장은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는 오늘날의 무력 분쟁들의 해소는 현 단계 인류 사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며 “교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 이 비극적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대학교 교수 방종우(야고보) 신부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전쟁과 민족주의, 난민 문제 등 폭력적 상황은 교회의 최우선 과제”라며 “레오 14세 교황은 교황 선출 직후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말로 시작해 시종 ‘평화’를 강조했다”고 말했다. 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 소장 강한수(가롤로) 신부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현대 세계의 상황을 지적하고 “한반도의 종전을 통한 평화 구축과 강대국에 의한 무력 분쟁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며 “인류는 세상의 평화를 구축하는 가장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고 교회가 그 평화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위기와 「찬미받으소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자신의 교황명을 따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공동의 집 지구를 돌보는 일이 신앙인의 본질적 소명에 속하며, 인간 생태계와 자연 생태계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통합적 생태론을 일깨웠다. 특별히 기후위기로 인해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살아가는 공동의 집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굴러가고 있다는 절박한 인식은 그리스도인들의 투신을 요구한다. 신학자들은 생태 문제를 단순한 자연 보호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을 넘어, ‘관계’의 문제로 인식했다.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박용욱(미카엘) 신부는 빈곤, 분쟁, 자연 파괴 등을 모두 ‘관계의 단절과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파악한다. 박 신부는 “관계를 잃어버리고 자본과 권력의 작동 기제에 소모된 현대인의 파편적인 삶인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생태 정의마저 파국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강대 신학연구소 홍태희(스테파노) 선임연구원은 “현시대의 절제 없는 인간 중심주의를 경계하며, 「찬미받으소서」로 상징되는, 모든 피조물을 향한 교회적 관심이 식지 않고 더욱 열매를 맺을 것”을 희망했다. 한국 외방 선교회 학술연구소 소장 김병수(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기업이나 국가는 모두 자본주의적 논리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기후위기 극복과 생태계 보호를 위한 노력은 교회가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9) 당대 지성인들의 개종 이야기

“나는 왜 가톨릭에로 개종하였는가 - 六堂 崔 베드루 南善 대개 가톨릭은 인류 문화의 종교 분야를 담당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말미암아 계시되고 연마되고 완성된 교문(敎門)에 희랍의 철학과 라마(羅馬, ‘로마’의 음역어)의 조직력과 내지 근지사상(近至思想)의 정화까지가 융회(融會, 자세히 이해함) 합성(合成)한 것이다. … 저 조물주로서 천지만물 제일원인을 명시하고 신의 권능과 섭리로서 만물상호의 질서와 조화를 설명한 것이, 그 일단(一端)이다. 이만할진대 개인의 구령으로나 민족의 부활 지도력으로나 아무 부지(不知)함이 없지 아니할까. …나는 이에 유교 불교 모든 교문에 광구(廣求)하여 얻지 못하던 바를 이제 가톨릭에서 얻은 느낌이 났도다. 그리고 아울러 백여년 전 선정(先正, 선대의 현인)의 가톨릭 도입(導入)의 진정신(眞精神)에 신합명계(神合冥契, 신과 하나가 되어 통하는 상태)를 깨달아 못내 기뻐하는 자로다.” (가톨릭時報, 1955년 12월 25일자 5면) 6.25전쟁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교회에서도 전쟁 이전에 조직됐던 각종 단체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선교 활동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1949년 조직됐던 한국천주교중앙위원회는 1952년 활동을 재개, 1955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로 확대 개편됐으며 1959년에는 전국 교구장을 구성원으로 하는 사단법인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습니다. 당대 지식인들의 개종기 흥미롭게도 당시 상당한 수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이들의 개종기가 천주교회보에 자주 실렸습니다. 예컨대 감리교 총이사였던 정춘수(천주교회보, 1952년 11월 1일자), 육당 최남선(가톨릭시보, 1955년 12월 25일자) 등 당시 지식인들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은 상당한 화젯거리였습니다. 천주교회보는 1953년 3월 7일 제122호부터 ‘가톨릭新報’로 제호가 변경됐고, 다시 1954년 1월 15일 제137호부터 ‘가톨릭時報’로 변경됐습니다. 가톨릭시보 1955년 12월 25일 자는 5면 전면을 할애해 당대의 지성 육당 최남선 선생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를 상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이 글은 원래 개종 직후인 12월 17일 자 한국일보에 발표된 것으로, 당대의 지성인답게 자신이 파악한 가톨릭 신앙의 요체를 설명하고,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당위성과 명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육당은 이 글에서 먼저 인생과 종교의 관계를 인체와 공기의 관계에 비유함으로써, 인간 삶에 있어서 종교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전제합니다. 이어 계시로서의 신(神)의 개념을 제시하고, 인간이 신에게서 무한한 생명과 권능을 발견함으로써 신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며, 그것이 종교의 구원 능력으로 인간 앞에 드러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불교 신자였던 육당 최남선…1955년 가톨릭으로 전경 개종 현대사 관통하며 지식인·정치인 등 귀의 이어져 종교적 구원은 개인 넘어 민족적 요청 육당은 나아가 종교적 구원은 개인의 구령인 동시에 국가와 민족의 공동체적 요구에도 적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당대 한국 땅에서 요구되는 종교는 개인 영혼의 구원이기도 하지만 국가와 민족적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육당은 개인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종교적 이상으로부터 인간 삶과 종교 문제에 깊이 천착해왔으며 불교로부터 혼탁한 세상의 구제를 기대했으나 얻은 바가 없다고 토로합니다. 이어 한국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돌아보며 그 찬란한 빛을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정신에서 찾았습니다. 육당은 또한 서양 근세의 문화, 그리고 그 바탕을 이루는 희랍의 정신 문화와 과학적 기초, 르네상스 이래의 인문 정신과 중세 스콜라 철학을 훑어보고 특히 2천 년 가톨릭교회가 보유하고 전하는 진리를 서양 문화의 진수로 파악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정신적 빈곤을 느낀 조선이 서학의 전래로부터 받은 정신적 충격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2천 년 역사를 영위해오면서도 여전히 흔들림이 없는 가톨릭교회에서 그토록 자신이 찾아 헤매던 바를 마침내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개인적 구원을 넘어 조국의 내일을 위해서도 가톨릭을 선택해야 할 명분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오늘날 이 정세에서 한국의 내일을 믿음직하게 맡길 곳이 이 가톨릭을 빼고 또 무엇이 있다 하랴! 1955년 11월 17일에 과거 50, 60년간의 종교적 체험을 청산하고 가톨릭에 입교하여 영세하니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구령(救靈)인 동시에 국가, 민족에 대하여는 조국 근대화의 밑바탕이라고 생각한다. 우둔한 나에게 이러한 식견을 열어주신 천주께 무한한 성총을 감사하면서 이 붓을 놓는다.” 시대 넘어선 지식인의 개종 열풍 육당 외에도 저명한 지성인들의 개종기가 가톨릭시보에 종종 실렸습니다. 전 감리교 목사였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정춘수 씨의 개종기(가톨릭시보, 1952년 11월 1일 자)는 당시 지성인 개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극작가인 이서구 씨도 6.25전쟁 체험 후 치유와 신앙적 필요에서 개종한다(1951년 12월 12일 자)고 밝혔습니다. 국문학자 서창제 씨는 1952년 8월 15일, 김홍섭 판사는 1953년 9월 26일 세례를 받았습니다. 김홍섭 판사는 특히 중죄수에 대한 교회의 활동과 교회사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사도법관(使徒法官)’으로 불렸습니다. 1955년 12월 24일에는 서울대 교수인 국문학자 이숭녕 박사, 이듬해인 1956년에는 훗날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국회의원 김대중 씨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민주당의 집단 개종’으로 불릴 정도로 제2공화국의 정치인들이 대거 입교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이보다 더 많은 수의 저명한 지식인이 가톨릭에 입교했습니다. 이처럼 지성인들과 사회 지도층이 대거 가톨릭에 귀의한 동기는 시대별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납니다. 먼저 1950년대에는 해방의 감격과 전쟁의 참상을 겪은 이들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민족사의 굴곡 속에서 가톨릭교회에서 정신적인 의지처를 찾으려는 경향이 엿보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두 차례의 정치적 혁명과 극심한 사회 변화 속에서 삶의 의미를 궁구하려는 지적 구도 의식이 작용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억압적인 정치 권력과 경제 성장 지상주의 속에서 교회가 정의 구현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는 모범적인 모습에 공감한 지식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1970년대 이후에는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김수환 추기경의 지적인 면모와 잘 훈련된 신학 교육을 받은 가톨릭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이 지식인과 대학생들의 호감을 얻은 면도 있습니다.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8면

“갈등과 분열 끝내고 모두가 존중받는 나라 만들어 주길”

한국교회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이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품위를 누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줄 것을 당부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6월 3일 역대 대선 최다 득표로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는 민주주의 회복을 바라는 국민의 강한 열망이 반영된 결과다. 한국교회 또한 국민적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은 이번 대통령 당선에 축하의 뜻을 전하며,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역할과 책임에 대한 메시지를 함께 전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법치주의라는 민주주의의 초석이 흔들리지 않도록, 원칙과 정의가 지켜지는 나라를 만들어 줄 것을 당부했다. 아울러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사법 체계의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는 12·3 비상계엄, 대통령 구속과 탄핵 사태 등을 겪으며 헌정 질서의 위기를 체감한 국민 다수의 공감이기도 하다.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는 6월 4일 ‘제21대 대통령 선거 당선인에게 드리는 축하와 당부’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갈등과 대립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며 정의와 참된 평화의 길을 걸어갈 믿음직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헌법 정신에 따라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되고,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품위를 누릴 수 있는 나라, 자신의 뜻을 당당히 표현할 권리를 보장받는 나라가 되도록 이끌어 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이 갈등과 분열로 갈라진 대한민국을 하나로 모으는 지혜로운 지도력을 발휘하길 부탁했다. 세대와 성별, 지역을 가르며 혐오와 배제를 조장하는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차별 없는 존중을 실현하는 정책과 연대를 강화하는 교육의 필요성도 강조됐다. 또한 한반도에 평화의 길을 열기 위해 남북 관계 개선에 지속적으로 힘써주길 기대했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 역시 이 대통령에서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대통령께서 이제 어느 한 편이 아니라 모두의 삶 곁에 서시어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국민 모두를 위한 품격 있는 통합의 지도력을 보여주시리라 믿는다”며 “벽이 아닌 다리를 세우는 지도자로서, 정파에 따른 이해관계를 넘어,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고 공동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시기를 거듭 당부드린다”고 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우리 사회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대통령이 돼주길 요청했다. 대통령이 취임 당일 가장 먼저 찾은 이들이 국회 방호원과 청소노동자였듯, 임기 중에도 소외된 이들 곁에 다가서며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잊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삶이 안정될 수 있도록 민생 안정이라는 현안을 풀어내고, 사익보다 공공의 이익과 공동선을 우선하는 정부의 모습을 바라고 있다. 또한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교회는 대통령이 기후위기 극복과 생태 보호를 위한 정책에 힘을 실어주길 기대하고 있다. 특히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운 4대강 재자연화와 재생에너지 전환의 추진은 생태적 회개를 지향하는 교회의 가르침과도 맞닿아 있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라자로) 추기경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며 “이제 우리 모두의 공복(公僕)인 대통령으로서, 특히 가난하고 어렵고 소외되고 희망을 잃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힘을 줄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안재홍(베다) 회장도 “사랑으로 통합된 사회, 평화로운 남북관계로 전쟁 없는 한반도, 정의의 회복을 통한 건전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 모든 국민이 존엄과 희망으로 살아가는 참된 공동선의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며 “대통령의 새로운 국정 여정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랑과 평화, 정의로 이끌어지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면

1700주년 맞은 ‘니케아공의회’…교회 일치의 시작이 되다

레오 14세 교황은 5월 30일 교황청 사도궁에서 세계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를 만나 튀르키예 방문을 논의했다. 방문지로 거론되는 튀르키예 이즈니크(옛 지명 니케아)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할 예정이었던 도시다. 바로 이곳에서 325년 최초의 세계공의회인 니케아공의회가 열렸다. 니케아공의회 개최 1700주년을 맞는 6월 19일, 그리고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삼위일체 교리를 공고히 한 니케아공의회를 돌아본다. 최초의 세계공의회 325년 교부 318명 모여 교리 논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완성 ‘주님 부활 대축일’ 산정 방법도 통일시켜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한 분인가?’…삼위일체를 논하다 325년 6월 19일 세계 각지에서 교부(敎父) 318명이 니케아에 모였다.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교리를 주장하며 극심한 분열에 이르자 교회의 일치를 바랐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계의 교부들을 니케아에 모두 소집한 것이었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성자 예수님은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논쟁이었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이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믿음, ‘삼위일체’는 초대 교회부터 이어온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였기에, 이를 잘못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이 나타났다. 그중 4세기에 팽배했던 사상이 아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아리우스주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는 창조되지 않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분은 성부 하느님 한 분 뿐이라고 봤다. 그렇기에 성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피조물, 즉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말씀(예수님)을 하느님이라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은총을 통해 하느님이 됐다는 것이고, 본성적으로 하느님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여러 성경구절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켰고 아리우스주의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일부 교부들도 아리우스주의에 동조했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중) 아리우스주의자들과의 격렬한 논쟁 끝에 교부들은 신경의 문장을 빚어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 한 본체임을 고백한 것이다. 공의회를 통해 완성된 ‘니케아 신경’은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며, 나뉠 수 없는 하나의 본질을 지니고, 성자의 본질은 모든 면에서 성부와 완전히 동일하며 동등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명확하게 했다. 이후 교부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를 통해 거룩한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 성령이 하느님임을 고백하면서 니케아 신경을 보완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완성했다. 교회는 오늘날까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미사의 공식 신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듯’…교회의 일치를 이루다 니케아공의회의 가장 큰 과제는 아리우스주의에 대응하는 것이었지만, 교부들은 이밖에도 교회의 여러 법규를 정비했고, 무엇보다 지역마다 제각각으로 지내던 주님 부활 대축일의 날짜를 일치시켰다. 주님 부활 대축일은 처음부터 교회의 모든 축일 중에서도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에 부활 대축일을 지냈다. 유다인들이 많이 머무는 지역의 신자들은 유다력의 파스카 축제일에 부활 대축일을 지냈지만, 유럽권에서는 파스카 축제일 다음에 오는 주일을 부활 대축일로 지냈다. 예수님이 안식일 다음 날, 주간 첫날인 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또 파스카 축제일은 유다력을 토대로 하는데, 유다력은 춘분을 기준으로 하되 달의 변화에 따른 달력을 사용했기에 로마의 달력이었던 율리우스력에서 계산하는 방식이 지역마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이 때문에 지역 교회 사이에 의견 차이가 발생했고, 또 어느 지역에서는 단식과 참회를 하고 어느 지역에서는 부활 축제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세계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니케아공의회는 온 교회가 같은 날 주님의 부활을 경축할 수 있도록 주님 부활 대축일을 산정하는 방법을 통일시켰다. 바로 오늘날과 같이 춘분 후 보름달 다음에 오는 주일에 주님 부활 대축일을 기념하게 된 것이다. 16세기에 율리우스력을 보완한 그레고리오력이 도입되면서부터는 그레고리오력에 따른 춘분에 따라 부활 대축일을 정하고 있다. 그래서 율리우스력을 고수하는 정교회와 부활 대축일에 차이가 생겼다. 그러나 니케아공의회 1700주년인 올해는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모두가 같은 날 부활 대축일을 보냈다. 달력 계산법에 따른 우연의 일치기는 하지만, 부활 대축일의 일치로 교회의 일치를 일궈낸 니케아공의회의 의미를 되짚어 볼 기회기도 하다. 우리는 1700년 전 신자들과 같은 믿음을 고백하고, 어느 나라의 교회에서도 같은 날짜에 부활 대축일을 지낸다. 니케아공의회를 통해 우리는 시간을 넘어, 공간을 넘어 일치하고 있다. 교회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일치하심을 고백한 니케아공의회는 교회 일치의 중요한 모범이다. ■ 니케아공의회 가르침 수호한 ‘성 아타나시오’ 교회는 니케아공의회를 통해 일치를 이뤘지만, 이단으로 선포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아타나시오는 이런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항해 니케아공의회가 선포한 가르침을 수호한 대표적인 성인이다. 사실 니케아공의회 당시 아리우스에 맞선 이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알렉산데르 주교로, 아타나시오는 그를 수행하던 부제였다.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데르 주교에게 직접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공의회 중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신학자들과 교류했다. 이렇게 알렉산데르 주교의 뜻을 이은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데르 주교의 후임으로 주교가 됐다. 그러나 아타나시오는 주교가 되자마자 큰 난관에 부딪혔다. 아리우스주의자를 비롯한 여러 이단들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를 노리고 아타나시오에게 누명을 씌워 고발하는 등 아타나시오를 공격했다. 게다가 황제까지도 이단자들의 편을 들면서 아타나시오는 5차례에 걸쳐 17년 동안 유배를 당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바람 잘 날 없는 세월이었지만 아타나시오는 탁월한 재능과 강인한 신념을 바탕으로 일생에 걸쳐 이단자들의 잘못된 주장에 맞서 니케아공의회가 선포한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수호했다. 온갖 시련을 딛고 말년에 이르러 다시 교구를 돌보게 된 아타나시오는 선종하기까지 이단자들로 인해 갈등과 폭력으로 피폐해진 교회를 재건하면서 여러 저술과 강론을 남겼다. 비록 생전에 아리우스주의의 종식을 보지 못했지만, 아타나시오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강조하며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에 ‘교회의 기둥’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아타나시오는 오늘날까지 동방·서방교회를 막론하고 위대한 교부요,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1면

“우리 땅이 만든 건강한 밥상으로 생태 보전해요”

‘찬미받으소서 주간’을 맞아 가톨릭기후행동(공동대표 양두승 미카엘 신부·박신자 여호수아 수녀·오현화 안젤라)은 지난 5월 29일 서울 종로구 무료급식소 종로밥집에서 지구를 살리는 ‘지구밥상’ 만들기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가톨릭기후행동 운영위원이자 우리 농업 기반 채식문화활동가인 성미선(엘리사벳) 씨의 강의로 진행된 이날 프로그램에는 16명의 생태사도들이 함께했다. 참가자들은 제철 쑥과 버섯이 들어간 쑥애탕, 유기농 딸기를 갈아 현미 소면에 말은 딸기 국수, 싱싱한 톳과 삼잎국화나물이 들어간 김밥 등을 손수 만들며 우리가 밥상을 차리면서 할 수 있는 ‘생태적 회개’ 방법을 제시했다. 이날 만든 음식의 재료는 모두 직접 채취하거나 국내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김밥에 들어가는 쌉싸름한 삼잎국화는 초여름까지 먹을 수 있는 식재료로, 성 씨는 “봄이 제철인 쑥도 단오 전인 5월까지는 향긋함이 유지되기 때문에 미리 뜯어놓고 냉동실에 보관해 두면 1년 내내 먹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기농으로 재배하기 힘든 딸기도 한 바구니 가져와 붉은색 단맛이 나는 딸기 국수를 만들었다. 다소 생소한 음식임에도 이날 참석자들은 딸기 국수가 가장 맛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현미밥에 미나리와 톳, 삼잎국화나물, 단무지 대신 참외 장아찌를 넣은 비건 김밥은 한 끼 식사로 든든할 뿐 아니라 자극적이지 않아 속도 편하다. 국산 콩으로 만든 두부와 쑥, 버섯을 다져서 만든 완자를 국산콩 된장을 푼 국물에 끓인 쑥애탕은 된장으로만 맛을 냈음에도 풍미가 가득했다. 환경과 동물권 보호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육식을 줄이고 식물성 재료로 만든 음식을 소비하는 채식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채식주의는 ‘환경을 지키는 식생활’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지만 우리 땅에서 생산된 식재료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았다. 성 씨는 “현재의 채식문화는 외국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간편식 등 지속 가능하지 않은 형태로 정착된 상황”이라며 “진정으로 환경을 살리는 식생활을 위해서는 우리 논과 밭에서 나온 농작물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화된 농업활동으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는 전체 배출량의 40%에 육박한다. 또한 다량의 농약 사용은 수질오염과 토양손실을 야기하고 있다. 성 씨는 지구밥상을 차리며 우리가 매일 음식을 먹으며 어떻게 생태적 회개를 실천할 수 있는지 설명했다. 성 씨는 “2050년에 우리에게 다가올 기후위기에서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채소 섭취를 두 배로 늘리고 육류 소비를 절반으로 줄여야 할 것”이라며 “이때 우리가 소비하는 채소는 탄소 발자국이 덜 발생하는 지역의 먹거리와 소농의 건강한 생산물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톳과 삼잎국화, 쑥, 딸기 등 이날 사용한 식재료들은 바다와 땅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풍성하게 머금고 있었다. 제철 식재료를 손으로 다듬고 요리하고, 먹어보는 시간은 단순히 요리를 하는 행위가 아닌 지구와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작은 실천을 배워 나가는 시간이었다. 지구밥상에 참가한 최희영(요안나) 씨는 “두부에 강황을 넣거나 완두콩으로 소스를 만드는 조리법을 배우며 보기에도 예쁘고 맛도 좋은 다양한 채식 밥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유익했다”며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왜 채식을 해야 하는지’ 알게 돼 앞으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육식을 자제하는 밥상을 차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정은지(마리아) 씨는 “동물권에 관심이 많아 채식을 시작했는데 오늘 지구밥상에 함께하면서 기후위기와 채식이 밀접하게 연관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특히 다양한 제철 음식이 있다는 것도 알게 돼 지구와 나의 건강을 위해 제철 식재료를 활용한 채식을 해야겠다는 생각했다”고 말했다.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6면

주교회의 생태위, “자연 한계 존중하며 해수 유통 늘려야”

새만금이 지속 가능한 생태계로 바뀌려면 자연의 한계를 존중하고 그 한계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공유됐다.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위원장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는 5월 30일 전주 치명자산성지 평화의전당에서 ‘기후위기 시대 새만금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묻다’ 심포지엄을 열고 새만금 생명 공동체의 회복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모색했다. 문규현(바오로·전주교구 원로사목) 신부는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통합생태론의 관점에서 새만금 문제를 성찰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전망했다. 문 신부는 “환경, 경제, 사회 문제는 서로 분리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의 여러 측면임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며 “이윤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틀 안에서는 사물들의 실제적 가치, 인간과 문화에 주는 의미, 가난한 이들의 이익과 욕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새만금 사업은 생태계 파괴 뿐 아니라 그 곳에서 삶을 일궈온 사람들의 권리와 존엄을 빼앗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문 신부는 “환경 착취와 파괴는 지역 공동체의 생계 수단을 고갈시킬 뿐만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과 더불어 고유한 공동체 생활 방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회적 자원도 망가뜨린다”며 “새만금 사업은 정부 측의 일방적인 사업추진이 아니라 새만금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고 협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말했다. 문 신부는 “새만금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려면 인간은 자연의 한계 안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며 상시 해수유통과 수라갯벌 보전을 구체적인 방안으로 꼽았다. 문 신부는 “해수 유통을 늘려야 담수호의 수질이 개선될 수 있고 아울러 새만금 내부 갯벌을 보전했을 때 해양 생태계가 회복될 수 있다”며 “시화호의 사례와 같이, 해수 유통을 확대하는 방안으로 수력발전을 추진한다면 재생에너지 확보와 수질 개선이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개발을 이유로 2007년 12월 27일 ‘새만금 사업 촉진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전북 군산시, 김제시, 부안군에 걸쳐 33.9km에 달하는 새만금 방조제가 건설됐다. 1991년 착공 당시에는 수자원 확보와 침수 피해 방지가 목적이었지만 2000년대 이후 재생 에너지 단지, 스마트 수변 도시 등 각종 경제개발 계획이 가속화되면서 새만금호의 해수 유통이 제한됐다. 이후 해수와 담수가 층을 이뤄 산소가 이동할 수 없는 염분 성층화 현상으로 새만금은 생물들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 2024년 6월 새만금상시해수유통서명운동본부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23년까지 새만금 사업에 따른 전라북도 어업 손실액은 16조 3000억 원에 달한다. 이로 인해 새만금 지역의 부안군 인구는 1990년 약 10만 3000명에서 2019년 5만 4000명으로 줄었다.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6면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 평화·정의·공동선·환경 수호하는 지도자 되길 희망

6·3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제2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가톨릭신문은 새 대통령 취임에 발맞춰 ▲남북화해 ▲정의평화 ▲사회복지(빈민) ▲생태환경 등 4개 분야에서 활동하는 교회 내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새 대통령과 정부에 전하는 바람을 담았다. 계엄과 탄핵으로 얼룩진 6개월 간의 혼란에서 벗어나 가톨릭 사회교리에 걸맞은 정책의 변화를 ‘새 대통령’에게 희망한다. ■ 민족화해 - 남북 관계, 방송과 전단지로는 변하지 않는다 연말연시가 되면 늘 듣게 되는 상투적인 표현이 있다. 바로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이라는 말이다. 꼭 연말이나 연초가 아니더라도, 과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기를 맞이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다. 실제로 지난 6개월 동안 많은 국민은 정말 ‘숨 가쁘게’ 일상을 살아왔다. 무너진 민주주의와 헌법 정신을 지키기 위해 수십만, 수백만의 시민들이 주말을 포기하고 광장으로 나섰다. 매일 뉴스를 지켜보며 오늘은 또 누가 꼼수를 부릴지 조바심을 내야 했다. 이제 대통령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가 구성됐고, 많은 이는 이제는 조금 숨을 돌릴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물론 국민들이 한숨 돌리기 위해서는 새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앞으로 책임을 맡게 될 이들에게 더 큰 기대와 응원의 마음을 먼저 전한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5,17)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선언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치기에,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한 개인의 회심이 그를 구원으로 이끈다면, 한 사회의 쇄신 역시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 것이다. 그렇기에 새 시대를 바라는 모든 이와 함께 과거와 작별하고 새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남북 관계에서 우리가 작별해야 할 과거 중 하나는 바로 ‘적개심’이다. 남과 북은 80년 가까이 서로를 미워하도록 강요받아 왔다. 일상의 작은 생산품에서부터 국가 단위의 외교와 국방에 이르기까지, 남북은 미움을 기반으로 한 경쟁의 길을 걸어왔다. 이미 경쟁이 무의미해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증오와 미움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남북의 경제력은 이미 50배 이상, 군사비 지출도 30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불안감을 느낀다면, 우리보다 북한이 더 크게 느낄 것이고, 위협 역시 상대가 더 크게 체감할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더 큰 포용력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 역량을 갖추고 있다. 새 정부는 우리 안의 적개심을 내려놓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갖추길 바란다. 그리고 적개심을 극복한 자리에 자신감을 갖추었으면 한다. 무기를 쌓아 올려서 생기는 자신감이 아니라, 공감과 포용의 마음으로 상대를 품을 수 있는 자신감 말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을 열게 된다. 내가 살아온 길을 알고, 현재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이에게 진심을 보이게 된다. 남과 북 역시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상대를 압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한반도에서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모습을 진정성 있게 보여 주길 바란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선동에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불신, 불안, 증오, 미움, 혐오를 부추기는 말과 행동이 아니라, 기다리고 먼저 손 내밀며 상대의 입장에서 그 마음을 헤아려 보자. 지난 3년 동안, 서로를 비난하는 방송과 전단지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지 않았나?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부위원장) ■ 정의평화 - 단호함과 너그러움, 세상은 좋아질 수 있습니다 어지럽고 메슥거렸습니다. 지난 6개월간 믿었던 것들이 무너지고, 거짓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부끄러움이 실종된 시간에서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멀미 나는 듯한 역사적 장애물 경기를 함께 내달린 이웃들을 생각하며, 새 정부의 시작에서 두 단어를 입에 올립니다. 단호함과 너그러움. 서로 반대되는 말 같지만, 이 두 단어가 제 자리에만 선다면 세상은 훨씬 좋을 수 있습니다. “진실은 정의와 자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입니다.” (「모든 형제들」 277항) 거짓에 대해 단호해지십시오. 거짓의 폐해는 그것을 말한 소수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다수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공적 영역에서 진실을 다루는 언론과 미디어는 그 영향력만큼이나 엄정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정의를 실현해야 할 사법 체계 역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법의 잣대가 누구에게는 단호하고 누구에게는 너그러워진다면, 그것은 이미 법이 아닙니다. 제대로 책임을 묻지 못한 과거는 ‘오늘날 거짓’의 부모가 되고 있습니다. 진실과 정의를 지킬 수 있도록, 단호한 사법 체계의 올바른 회복이 새 정부의 첫 책무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치의 정신에서 핵심이 되는 이 애덕은 언제나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사랑입니다.”(「모든 형제들」 187항) 다름에 대해 너그러워지십시오. 6·25전쟁과 제주, 광주의 아픔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혐오와 분열의 유령은 아직 떠나지 않았습니다. 세대, 성별, 지역을 가르며, 서로 다른 존재를 배척하는 문화는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습니다. 광화문 거리에서 한복을 곱게 입은 열 살 아이가 ‘○○○ 박멸’이라는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린 손에 쥐어진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과연 우리는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을 벌레처럼 대하는 태도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단호한 혐오가 자리한 비극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혐오를 멈추고 연대를 키우는 교육, 다름이 불편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정책, 소수자에 대한 우선적 배려가 절실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단호해야 할 자리에 너그러웠고, 너그러워야 할 자리에 단호했습니다. 그 결과 어긋난 시간이 우리 공동체 모두를 베었습니다. 새로운 정부는 이제 그 어긋남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권력은 공동체 회복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단호함으로 거짓을 멈추고, 너그러움으로 상처를 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함께 희망으로 걸을 수 있습니다. 박진균 안드레아(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 사회복지·빈민 - 사회적 약자와 동행하고, 공공의 이익 우선시하는 정부 되길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건 이재명 정부가 ‘사회적 약자와 동행하는 정부’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중에서도 ‘가난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따뜻함을 지녔으면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적인 진영 논리를 넘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차별과 배제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이 안에서 ‘나’와 ‘너’는 철저하게 구분되고, 가난한 이들은 ‘우리’라는 범주에 쉽사리 다가가지 못한 채 주변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선거철이나 혹서기, 혹한기 때에만 잠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명의 엑스트라로 동원될 뿐이다. 지난 대통령 취임선서 때 새로운 대통령이 처음으로 찾은 사람들은 바로 국회 방호원과 청소 노동자들이었다. 혹자는 가식적인 쇼라고 비판하지만 그 모습이 진심임을 믿고 싶다. 그 모습 그대로 이 사회에서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낮은 자세의 대통령이 되길 희망한다. 모든 정부에서 예외 없이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민생안정’이다. 모든 사람이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요즘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이들의 삶이 안정될 수 있도록,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국가주도의 정책으로 힘을 실어주셨으면 한다. 이를 통해 인간중심의 대통합을 이루어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길 희망한다. 이를 바탕으로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15만 평이나 되는 공공의 땅인 옛 용산정비창이 그리고 2021년부터 ‘서울역 쪽방촌 공공주택 및 도시재생사업’이 계획되었던 동자동 쪽방촌이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의 바람과 원래 예정된 계획대로 공공개발이 된다면 그 이익은 비교적 골고루 공공(公共)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시 주도의 용산국제업무지구 추진과 토지, 건물주들의 민간개발 추구는 공익 보다는 사익을 우선시하는 기울어진 운동장만을 만들 뿐이다. 공공의 땅이나 주택이 사적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쓰일 때 약자들이 받는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다. 패널티를 내고도 공공임대주택의 소셜믹스를 거부하는 서울 모처 아파트 재개발 구역의 모습은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새로운 대통령께서 지난 3월 인터뷰에서 현재 급속도로 진행중인 인공지능(AI) 시대의 투자에 대해 수익의 일부를 국민에게 돌려 모두가 세금에 대한 큰 걱정 없이 살아가면 좋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공익을 우선하는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뜻을 변함없이 지켜나가시길 바란다. 나충열 요셉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 생태환경 - 작은 소리에 귀 기울여 주길 희망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한다. 길고 긴 겨울과 봄을 지나, 이제 전환과 통합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라 기대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첫 날, 필자는 금강 세종보에 갔다. 봄은 짧고 여름이 오고 있어서 강변에 꽃들이 예쁘게 펴서 손짓하고 있었다. 세종보 재가동을 막기 위해 활동가들이 그 자리를 1년 넘게 지키고 있다. 이들은 자연과 벗 삼아서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폭염·폭우와 혹한에도 행여나 수문을 닫을까 걱정되어서 천막을 지키고 있다. 세종보만 이런 상황인 것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활동가들이 현장을 지키고 있다. 가덕도, 새만금, 홍천, 삼척, 설악산 등에서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존재들과 연대하고 이들의 소리를 온몸으로 전하고 있다. 이곳들은 정권이 뒤집히는 긴 세월을 관통하며 일관되게 추진되는 개발의 현장으로, 어떤 곳은 경제적 이익의 한계를 알면서도 추진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4대강 재자연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댐과 보 건설 위주의 물관리 정책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이 공약이 단순히 전 정부를 부정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각각의 개발 논리들은 이어져 있기에 전 정부에서 추진하던 정책만 핀셋처럼 들어내서 폐기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새만금과 가덕도의 신공항은 윤석열 정부 이전부터 추진되었지만, 경제적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막대한 환경파괴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은 이제 익히 잘 알려졌다.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때이다. 아울러 윤석열 정부는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과 핵진흥정책을 밀어붙이며 AI와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해 전력수급이 필요하다고, 즉 경제발전을 위해 핵발전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기후위기 시대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으나, 어떤 경로로 어떻게 전환을 만들어갈지가 당면한 과제로 남았다. 임기 내 수명이 만료되는 핵발전소 10기를 폐로하고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추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특히 이미 민영화, 외주화되고 있는 에너지 생산을 다시 공공의 영역으로 가져와 발전 노동자의 희생 없이 산업이 전환되고, 에너지 민영화로 인한 불필요한 개발과 요금 폭탄이 국민에게 전가되지 않기를 바란다.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승리의 기쁨과 찬란함 때문에 현장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장의 아름다움과 그늘, 웃음과 탄식이 지난 겨울과 봄의 다채로운 광장의 불빛을 만들었다. 부디, 이 목소리들을 소중히 들어주시길 부탁한다. 오현화 안젤라(가톨릭기후행동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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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8) 민족 상잔의 비극, 6·25전쟁

해방 후, 한국교회는 반공과 멸공을 지상 최대 과제로 삼고, 공산주의 세력을 ‘악마’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는 전쟁이 시작됐다고 선언했습니다.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반그리스도교를 대항하는 십자군 전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간신히 해방된 우리 민족은 열강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서로를 향해 증오에 찬 총부리를 겨눠야 했습니다. 1953년 7월까지 3년 1개월간 한반도에서 벌어진 이 야만의 전쟁으로 우리 민족의 인적·물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온 나라가 황폐해졌고 수많은 소중한 생명이 희생됐습니다. 천주교회보는 전쟁 발발로 휴간했다가 1950년 11월호부터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회보는 1950년 11월 10일 자에서 ‘양을 위해 희생된 거룩한 목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전쟁 와중에 희생된 성직자들의 소식을 전하고 교구별로 희생자와 피해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교황사절 이하 세 위 주교를 납치당하는 잊지 못할 비분과 함께 적에게 잡히어 피살당한 성직자가 4명, 납치되어 끌려가신 주교와 신부와 수녀가 23명이며 교우 중 교회 단체의 간부가 13명, 행방불명된 성직자가 10명이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 남침으로 비롯된 전쟁…남·북한 교회 모두 심각한 타격 한국 교회, ‘반공주의’ 내세우며 ‘멸공 총궐기’ 주장 평화 조약 없이 휴전…민족 화해·일치 노력 아쉬움 남아 3년여의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은 30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유독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으며, 정확한 수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대 1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됩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민간인 희생자 수보다도 많습니다. 극단적인 이념 갈등이 원인인 전쟁이었기에 서로 대치를 하다가 사상이 다르면 무작정 학살을 자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교회의 경우에도 남한과 북한 교회 모두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는데, 특히 북한 지역 교회 활동은 거의 정지됐습니다. 북한 교회는 전쟁 이전인 1949년부터 이미 타격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평양교구 홍용호 주교가 체포됐고, 함경남도 덕원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원장 신 보니파시오 주교도 체포돼 감옥에서 사망했습니다. 북한 지역의 성직자들은 사실상 전쟁 발발 전에 거의 모두 체포되거나 전쟁 중 살해되고 행방불명됐습니다. 대부분의 성당과 교회 기관은 폐쇄됐는데,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1949년, 평양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원은 1950년 해산됐습니다. 남한 교회 또한 대구교구 일부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들의 납치와 죽음으로 큰 인적 손실을 보았습니다. 당시 한국인 성직자 수는 모두 144명이었는데, 전쟁 전후에 체포돼 피살되거나 행방을 알 수 없는 한국인 성직자가 40명에 달해 4명 중 1명꼴로 희생된 셈입니다. 또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 대부분도 체포되었으며, 끌려간 153명 중 전쟁 후 돌아온 사람은 96명뿐이었습니다. 28명이 수감 중 사망했고, 17명이 살해됐으며, 12명은 행방불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이처럼 전쟁은 한국교회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교회는 의료봉사와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각종 순교 신심 운동과 성모 신심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외국교회의 구호물자를 피난민에게 나눠주며 굶주리는 이들을 구제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깊이 성찰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맹목적인 반공과 멸공주의 그리고 같은 동족과의 전쟁에서 무력과 폭력을 통한 말살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것이 과연 복음적인 것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에게 가한 야만적인 처사와 그로 인해 생겨난 증오와 적개심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교회마저 민족의 분열과 분단, 전쟁이 가져온 비극적인 참상 앞에서 증오와 대결을 유일한 길로 여긴 것은, 적어도 후대의 우리들이 생각할 때 복음의 정신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전쟁 후 발간된 천주교회보는 예외 없이 공산주의라는 악마와의 대결에서 무력으로 승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1950년 11월 10일 2면에는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한이 실렸습니다. 이 서한에서 노 주교는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있는 한 세계에 평화 수립은 불가능하다며 모든 신자에게 “멸공에 총궐기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노 주교는 당시 로마를 거쳐 파리에 머물다 전쟁 소식을 듣고 홍콩과 일본,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형제상살의 비극의 원인은 오직 무신론 공산주의 침략자들의 마수였습니다. …저 악독한 공산주의자들도 이전에 천주를 믿고 그리스도 신앙을 가졌을 때는 가장 사랑할 민족이었으며... 한번 저 사상에 물들리자 저렇게 악독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진정한 회개를 위하여 기구와 보속하는 동시에 이 사상의 박멸을 위하여 총궐기할 것을 맹세합시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 같은 신문 4면, 편집부가 작성한 ‘전란의 교훈’이라는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안일에 흐르며 부패해지는 근성이 있으며 재난을 당해서 반발해서 향상함으로 전쟁도 가열한 자연계의 시련과 같이 인류를 타면에서 각성시키고 이를 이끌어 진진한 건설과 진보에로 향하게 하는 데 효과가 큰 것이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 민족적 비극의 참상이 되고, 분단의 원죄를 자아낸 전쟁이 각성과 진보로 나아가는, 정당하고 필요한 것으로까지 합리화되는 구절입니다. 무신론자들에 대한 철저한 말살의 신념을 확고히 한 교회는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참담한 전쟁에 대해, 새로운 탄생을 위한 종교적 수난과 시련으로 포장하기도 했습니다. 한 핏줄 한 가족들이 생이별해 그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눈을 감을 수조차 없는 비극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됐지만 이는 잠시 전쟁을 멈춘 것일 뿐, 평화 조약이 체결되지 않아 여전히 전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반공과 멸공보다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훨씬 더, 수십 년이나 지난 뒤에야 조금씩 우리 민족의 마음에 생겨나기 시작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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