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잠든 성모 대성당은?

“저는 언제나 저의 삶과 사제직, 주교직을 우리 주님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께 맡겨드려 왔습니다. 제 육신이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교황 대성전인 성모대성당에서 쉬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2년 작성한 유언을 통해 자신을 로마 성모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의 지하에 묻어주길 희망했다. 성모대성당은 전 세계에 4곳뿐인 대(Major) 바실리카 중 하나로,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성모대성당은 성모님의 지시로 세워졌다. 328년 8월 5일 성모님은 자녀가 없어 걱정하던 로마 귀족 조반니 부부의 꿈에 나타나 “눈이 내린 곳에 성당을 지으면 소망을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이른 아침 성 리베리오 교황을 찾아간 조반니 부부는 교황 역시 같은 꿈을 꿨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들은 한여름의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에 눈이 쌓인 기적을 봤다. 그 자리에 세워진 성당이 성모대성당이다. 이런 전설로 성모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모대성당에 묻힌 첫 번째 교황은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이전에도 호노리노 3세·니콜라오 4세·성 비오 5세·식스토 5세·클레멘스 8세·클레멘스 9세 등 6명의 교황 무덤이 성모대성당에 있었다. 성모 순례지로 유명한 세계의 많은 곳들이 성모대성당과 영적 유대를 맺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대구대교구 성모당,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등 30여 곳의 성당이 성모대성당과 영적 유대를 맺고 있다. 성모대성당은 한국교회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 설정 칙서를 반포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선출 이전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 보좌주교와 교구장으로 사목할 당시 로마에 올 때마다 이 성당을 방문했다. 교황 선출 다음날 첫 일정으로 성모대성당을 찾아 기도했고, 이후로도 사목 방문 전후나, 기회가 될 때마다 성모대성당을 찾아 기도했다. 특히 교황이 기도하기 좋아했던 곳은 ‘로마 백성의 구원 성모성화’(Salus Populi Romani) 앞이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이 담긴 이 성화는 복음사가인 성 루카가 그렸다고 전해진다. 전 세계를 순회하는 세계청년대회의 상징물의 성모 성화가 이 성화의 사본이기도 하다. 교황은 유언을 통해 성모대성당에서 자신의 무덤이 자리할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했는데, 바로 이 성화가 있는 파올리나 경당 옆의 공간이다. 교황은 자서전 「희망」에서도 “교황으로서 사도 순방을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에도 꼭 (성모대성당을) 들러,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저를 이끌어 주시고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시며, 제 모든 행보를 보살펴 주시기를 청한다”며 “저는 성모님과 함께할 때 참된 평안을 느낀다”고 성모대성당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청빈한 삶’ 그대로 치러진 검소한 장례 절차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 절차는 청빈하고 검소하게 교황직을 수행했던 모습 그대로 진행됐다. 교황의 장례는 2024년 4월 교황의 승인으로 개정된 「교황 장례 예식서」(Ordo Exsequiarum Romani Pontificis)에 따라 품위 있으면서도 모든 다른 신자들의 장례 예식과 마찬가지로 간소하게 치러진 것이 특징이다.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삼중 관 대신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목관이 사용됐고, 신자들은 열린 관 안에 안치된 교황의 시신 앞에서 참배할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발표부터, 입관, 시신 운구, 신자들의 조문 행렬 그리고 교황이 남긴 유언을 소개한다. 교황청 궁무처장 패럴 추기경, 교황 선종 사실 발표 교황이 선종했다는 사실은 교황청 궁무처장 케빈 패럴 추기경이 4월 21일 오전 10시경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이탈리아어로 발표했다. 패럴 추기경은 생방송으로 송출된 선종 발표에서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깊은 슬픔을 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종을 발표한다”며 “오늘 오전 7시35분 로마의 주교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이어 “교황님은 전 생애를 하느님과 교회를 위한 봉사에 바쳤고, 특히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보편적 사랑을 지향하며 충실하고 용기 있게 복음의 가치를 실천하라고 가르치셨다”고 밝혔다.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교황의 선종 원인은 뇌졸중과 그에 따른 심부전이었다. 바티칸 시국 보건국 안드레아 아르칸젤리 국장은 22일 저녁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생했고, 교황청에 거주하고 있는 교황이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고 회복 불가능한 심부전을 일으켜 2025년 4월 21일 오전 7시35분 선종했음을 확인한다”고 작성한 서류에 서명했다. 교황청 공보부는 이 내용을 발표했다. 교황청의 22일 발표에 따르면, 교황은 20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봉헌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지는 못했지만 이날 낮 12시경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발코니에서 부활 담화(Urbi et Orbi)를 발표한 뒤 성 베드로 광장에서 약 15분 동안 교황 전용차를 타고 신자들과 몇몇 아기들을 축복했다. 이후 21일 오전 이른 시간에 혼수상태에 빠져들기 전 간병인인 마시밀리아노 스트라페티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평화롭게 선종했다. 교황의 시신을 관에 안치하는 입관예절은 21일 오후 8시 성녀 마르타의 집 경당에서 패럴 추기경이 주례했으며 추기경단 단장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 교황의 가족들, 의료진 등이 참석했다. 같은 날, 교황의 선종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조치로서 패럴 추기경은 성녀 마르타의 집 출입문을 봉인했다. 교황, 유언장에서 “로마 성모대성당에 묻어 달라” 교황청은 21일 교황 선종 후 수 시간이 지나 교황의 유언을 공개했다. 교황은 2022년 6월 29일에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작성한 유언장을 통해 자신의 시신을 로마 성모대성당에 묻어 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또한 유언장에서 “무덤은 지면 아래 있어야 하며, 단순하고 특별한 장식 없이 ‘Franciscus’(프란치스코)라는 이름만 새겨져 있어야 한다”면서 “제 무덤을 마련하는 데에 드는 경비는 한 은인의 후원금으로 충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교황청은 교황이 평소 가난한 이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던 점을 고려해 성모대성당에서 진행되는 안장예식에 가난한 이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초청했다. 교황의 장례 기간 중 성모대성당에도 많은 추모객들이 모여들었다. 관 운구 예식은 4월 23일 거행됐다. 교황청 궁무처장 패럴 추기경이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교황의 영혼을 위해 짧은 기도를 바치면서 운구 예식이 시작됐다. 14명이 관을 들고 성녀 마르타의 집 경당을 나와 성 베드로 광장 등을 거쳐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제대 앞에 관을 안치했다.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있던 2만여 명의 군중들은 교황의 관이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를 때 경건하게 박수를 치기도 했다. 패럴 추기경은 교황의 관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된 뒤 말씀의 전례와 분향 예식을 주례했다. 성가대는 교황의 안식을 빌며 라틴어로 성인 호칭 기도를 불렀고, 추기경들과 성 베드로 대성당에 모여 있던 신자들은 교황의 관을 바라보며 깊은 경의를 표했다. 신자들 3~5시간 기다려 조문 성 베드로 대성당은 23일 자정까지, 24일 오전 7시부터 자정까지, 25일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신자들의 조문을 받는다고 발표했다. 25일 오후 8시에는 관 봉인 예식을 엄수했다. 교황 선종 소식이 알려진 직후부터 신자들은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교황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묵주기도를 바치는 등 추모 열기가 교황청을 휩쌌다. 성 베드로 대성당 수석사제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이 교황 선종 당일 오후 대성당 계단에서 묵주기도를 바쳤고, 교황청 직원들은 주님 부활 대축일을 축하하기 위해 장식했던 꽃들을 거둬들였다. 감베티 추기경은 함께 묵주기도를 바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출입구”라고 위로했다. 교황의 관이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안치되고 23일 오전 11시가 조금 지난 시각부터 신자들과 시민들의 조문이 시작됐다. 조문객들은 짧게는 3시간, 길게는 5시간까지 줄을 서 기다리면서 교황을 추모했고, 23일부터 25일까지 총 25만여 명이 조문했다. 조문객들이 계속 몰려오자 성 베드로 대성당은 본래 발표했던 조문 시간을 연장해 자정에서 새벽 5시30분 사이에도 조문을 허용했다.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6면

[당신의 유리알] 빈무덤으로 온 편지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요한 20,11) 공경하올 테오필로스(하느님의 벗) 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 부활 이후, 부활 팔일 축제 주간의 복음들은 빈 무덤을 본 제자들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어두움에 빠져 있었지요. ‘어두움’은 길을 잃게 합니다. 빈 무덤 속에서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의 사라짐, 부재는 언제나 슬픔을 안겨주고, 사랑한 만큼 고통이 크다는 사실을 당신도 아실 겁니다. 마치도 지난 주님 부활 대축일 다음 날 아침, 우리가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선종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사실 교황님을 한 번도 직접 뵙고 인사드린 적이 없습니다. 꿈에서 딱 한 번 그분이 저를 아기처럼 안아 주신 적은 있지요. 어떤 사람은 운 좋게 교황님과 악수를 하고 나서 평생 손을 안 씻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런 기회가 저에게도 있을까요. 그러다가 지난 2월 말, 제가 본당 청소년들과 함께 2025년 희년을 맞아서 일 년 반 동안 준비한 로마 성지순례를 가게 됐습니다. 분명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멀리서나마 교황님께 인사를 드리고, 설날 세배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나 뵙기 일주일 전부터 그분이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교황청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주님의 종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시고 급히 입원하셨지요. 그래서 대신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성 베드로 광장에서 찍은 사진과 새해 인사가 담긴 편지를 대신 전달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저희 본당은 지난 1월 새벽 미사 후 성전에 불이 났습니다. 신자분들은 성모상 앞에서 많이 우셨고, 청소년들의 이탈리아 성지순례도 취소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성당 화재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마음속에 ‘내적 성전’을 세우는 일도 중요했기에, 서울에서 로마까지 이렇게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편찮으시단 말씀을 들었습니다. 쾌차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나중에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 때 꼭 뵙고 싶습니다”라고요. 54명의 청소년 희년 순례단은, 교황님을 뵙는 대신에 로마 성모대성당에서 그분의 건강을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테오필로스 님, 누구보다 가난한 이들의 종으로 사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돌아가신 부활 팔일 축제 주간은, 그분의 빈자리가 제게 무척 크게 느껴졌습니다. 알지요. 인간이면 누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던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성경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확인하고는 대성통곡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심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부활 제2주일인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아, 저는 많은 분들께 도움을 청하려고 했습니다. ‘1월 12일 성당에 불이 났고, 소화기 들고 불 끄러 갔다가 유독가스를 마시고 죽을 뻔했다’고 하느님의 벗들에게 하소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이 난 2층 성당은 내부 철거로 텅텅 비어 버렸고, 십자가까지 사라져 스산한 공간으로 변해 마치 예수님의 빈 무덤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 어디에도 주님이 안 계실 거 같은 이 자리에, 비 오는 토요일 어김없이 부활 성야를 맞이해야 했고, 본당 신자들은 비좁은 성당 카페에 앉아 미사에 참례하고 있으니 ‘제발 도와 달라’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 날 중에 지난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아침 수신인 삼각지본당 신부 이름으로, 교황청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것은 3월 26일 교황청 국무원 국무장관 보좌관 로베르토 캄피시 몬시뇰이 보낸 '교황님의 답장'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신부님께서 정성껏 전해주신 편지를 기쁘게 받아 보셨고, 그 안에 담긴 자녀된 마음의 신심과 존경의 뜻을 깊이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또한 삼각지본당 신자들과의 희년 순례에서 받은 은총을 전해주신 데에, 깊이 관심을 보이셨고, 성하께 드린 선물에 고마워하셨습니다. 또 신부님과 맡으신 사목 직무를 위한 지속적인 기도를 약속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신부님의 진심 어린 배려와 영적으로 함께해 주신 마음, 그리고 애정 어린 연대에 깊은 감사를 표하셨고, 삼각지본당 공동체가 함께 나눈 희년의 신앙 여정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며,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유대를 더욱 굳건히 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아울러 교황 성하께서는 신부님과 신부님의 사목 직무에 맡겨진 모든 이들을 제대 앞에서 기도로 기억하실 것을 약속하시며, 희망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애로운 전구를 청하시고, 마음을 다해 교황 강복을 내리시며, 그 강복이 위로와 평화의 표징이 되고, 주님 안에 바라는 모든 선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스승을 잃고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은 다락방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이 ‘평화’를 빌어주시자, 그제야 그들은 환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기쁨입니다. 당신 육신을 챙기기에도 버거우셨을 그 순간.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보내신 교황님의 답장은, 갑작스러운 화재와 복구의 지난한 과정에 지친 삼각지 본당 공동체에 부활의 선물을 주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테오필로스 님. 언젠가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뵙게 되겠지요. 아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부활이어도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느낄 수 없는 빈 무덤 같은 우리 마음에, 주님께서는 예기치 못한 편지로 그 사랑을 전하십니다. 그래서 빈 무덤은 이제 죽음의 거처가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이고, 우리에게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1면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내가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12년 남짓 교황직을 수행하며 전 세계의 수많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만나 위로와 희망을 줬다. 이에 본지는 2014년 방한 당시 교황의 수행비서 겸 통역 담당으로 교황의 곁을 지켰던 동아시아사목연수원 원장 정제천(요한·예수회) 신부와 한국 정부의 대표로 교황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간 이백만(요셉)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로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소회를 들어봤다. ■ 예수회 정제천 신부(동아시아사목연수원 원장) 저는 교황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위대한 영혼과 맞닿아있다는 의식을 하였습니다. 그 위대함이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이 저에게는 경이롭습니다. 교황님은 이웃집 아저씨나 수도공동체의 선배 같은 친근함과 편안함을 줍니다. 거룩함이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 제 삶의 화두입니다. 현대 세계에서 거룩함을 사는 길을 우리에게 일러주신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바로 교황님 자신의 내면 일기라고 짐작합니다. 교황님이 아시아의 첫 번째 방문지로 한국을 택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아르헨티나 한인 공동체와 성가소비녀회, 꽃동네를 통해서 한국인들이 부지런하고 신심이 깊고 잘 단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방한 당시 온 국민의 아픔이었던 세월호 사건을 아시고, 유가족들을 위로하고자 하였습니다. 남북 분단을 안타까워하시고, 모국어가 같다는 말은 어머니가 같다는 뜻이니 희망을 가지고 통일을 위해 노력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또, 짧은 시간에 전쟁의 잿더미에서 강국으로 부상한 저력을 인정하면서 그 성장과 발전의 그늘을 직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분입니다. 매사가 깔끔합니다. 전임 교황의 마지막 해에 각종 추문에 휩싸여 전전긍긍하던 교회가 그분의 등장으로 단숨에 말끔해졌습니다. 지난 2월 병원에 입원하시자 일부 언론은 조기 사임 등 섣부른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사임은 최선의 답이 아니었습니다. 두 교황이 연이어 조기 사임하면 다음 교황이 큰 부담을 안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 생각을 훌쩍 뛰어넘는 답을 갖고 계셨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바로 다음날 그분을 불러주셨습니다. 향년 88세였습니다. 지난 12년간 우리 모두 행복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현대 인류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지금 교황님은 주님 곁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실 것입니다. “교황님, 사랑합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저희와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 이백만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주교황청 대사 시절(2018년 1월~2020년 12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직접 뵐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아무래도 첫 만남과 마지막 만남이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첫 만남은 신임장 제정식 때였습니다. 2018년 2월 16일, 그날은 마침 한국 최대의 명절 설날이었습니다. 평창동계올림픽이 개막되어 열기를 뿜고 있었지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개적으로 핵 단추를 운운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신임장 제정식을 마친 후 교황님의 개인 서재에서 개별알현을 했습니다. 교황님과 독대(獨對)를 하다니! 꿈만 같았습니다. 한국 정부를 대표하여 교황청에 파견된 특명전권대사로서 교황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북한 방문 요청이었습니다. “교황님, 한반도가 무척 어렵습니다. 북한을 직접 방문하시어 북한 땅을 축복해 주시고, 북한 동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실 수 있습니까?” 교황님의 대답은 시원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내가 왜 가지 않겠느냐. 기회가 되면 꼭 갈 것이다. 내 가슴과 머리에는 항상 한반도가 있다.” 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교황님은 방북 의사를 피력하신 후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아르헨티나 시절 겪었던 한국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특히 성가소비녀회 수녀들의 병원 봉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교황님과의 독대는 이례적으로 40분 가까이 진행됐습니다. 교황님의 방북 프로젝트는 2019년 2차 북미정상회담의 결렬(하노이 노 딜)로 아깝게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불씨는 살아 있었습니다. 2020년 대사 임기가 끝날 즈음 귀국을 앞두고 이임 인사차 사도궁을 찾았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할 때였습니다. 교황님께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교황님, 문재인 대통령에게 말씀하셨던 ‘소노 디스포니빌레(나는 북한에 갈 수 있다)’는 여전히 유효하지요?” “그렇고말고. 남북한 지도자의 손을 잡고 판문점을 걷는 게 나의 꿈이다.” 그냥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교황님의 한국 사랑은 절절했고, 북한 방문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나는 교황님께 한국식으로 큰절을 드렸습니다. 절을 받고 난 다음 흐뭇해하시던 프란치스코 교황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8면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장례미사 이모저모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일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영면에 들어갔다. 4월 26일 오전 10시(로마 현지시간)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추기경단 단장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 주례로 봉헌된 장례미사에 이어 성모대성당에서 안장예식이 거행됐다. 장례미사는 전 세계에서 로마에 모인 추기경단과 주교단 등이 공동집전했다. 교황이 항상 낮은 곳에서 겸손한 삶을 살며 남겨 준 뜻에 따라 치러린 장례미사와 안장 예식 모습을 모아 본다. 교황이 4월 21일 평소 거처하던 교황청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88세를 일기로 선종하고 23일 교황의 관이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운구된 뒤 같은 날 오전 11시경부터 25일 오후 7시까지 조문객 수는 25만여 명이나 됐다. 조문객들은 길게는 5~6시간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도 관 안에 고요히 누워 있는 교황을 조문했다. 장례미사 전날 오후 8시부터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제대 앞에서 진행된 교황의 관 봉인 예식 또한 교황의 평소 모습 그대로 단순하고 간소하게 치러졌다. 교황청 전례원장 디에고 라벨리 대주교가 교황의 얼굴에 흰색 비단을 덮은 뒤 교황청 궁무처장 케빈 패럴 추기경이 성수 예식을 집전했다. 이어 나무 관 위에 아무런 장식 없이 십자가, 교황명과 간략한 생애, 교황 문장만이 새겨진 아연 덮개를 씌움으로써 교황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패럴 추기경은 아연 덮개에 인장을 찍어 봉인된 사실을 확인한 후 아연 덮개 위에 다시 십자가와 교황 문장만이 새겨진 나무 덮개를 덮고 교황청 직원들이 테두리를 따라 못을 박으면서 관 봉인 예식을 마쳤다.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이 서명한, 교황의 생애와 사목활동을 요약한 문서 마지막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성과 성스런 삶 그리고 보편적 형제애를 훌륭히 증거했다”고 기록됐다. 이 문서는 관이 봉인되기 전 관 안에 놓여졌다. 장례미사가 봉헌된 26일 성 베드로 광장에는 2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장례미사에는 교황의 고향인 아르헨티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 세계 각국 정상들은 물론, 이주민과 난민, 노숙자 등 교황이 재임 중 늘 가까이 다가갔던 외롭고 소외된 이들도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참례할 수 있었다. 성 베드로 광장은 장례미사 시작 훨씬 이전부터 신자들로 가득 메워졌다. 일부 신자들은 전날 저녁에 미리 광장에 도착해 교황을 추모하는 기도를 바치고, 광장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한 뒤 장례미사에 참례하기도 했다. 장례미사를 주례한 레 추기경은 강론에서 교황이 생전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하곤 했던 일을 회상하면서 교황에게 “이제는 지상에 남아 있는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했다. 레 추기경의 강론을 듣던 신자들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눈물짓는가 하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할 교황을 생각하며 밝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교황의 관은 교황이 재임 중 사용했던 전용 차량에 실려 포로 로마나 유적지와 콜로세움 등을 거쳐 약 6km를 이동해 안장지인 성모대성당에 도착했다. 성모대성당에 이르는 운구 행렬 역시 패럴 추기경을 포함한 추기경 일부, 교황의 가족과 친지 등 소수만이 참여해 소규모로 이뤄졌다. 교황의 관이 지나가는 도로변은 교황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는 군중들로 북적였다. 군중들은 교황의 관이 자기 앞을 지나갈 때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고, 박수를 치거나 “교황님, 감사합니다”, “교황님, 영원히 사세요” 등의 구호를 외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교황이 성모대성당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유언장은 교황청에 의해 21일 공개됐지만, 성모대성당 부수석사제 롤란다스 마크리카스 추기경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교황의 말을 25일 기자회견 자리에서 공개했다. 교황이 성모대성당에 묻힐지를 분별하고 있을 때 성모 마리아께서 교황에게 “무덤을 준비하여라”라는 말을 들려줬고, 교황이 “성모 마리아께서 나를 잊지 않고 계셔서 행복하다”고 말하며 마크리카스 추기경에게 성모대성당에 “무덤을 준비하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교황의 관이 성모대성당 안으로 옮겨지는 동안 교황에게서 각별한 관심을 받았던 이주민과 노숙자 등이 꽃을 들고 교황을 맞이했다. 로마에 사는 어린이들도 성모대성당을 찾아 성모 마리아 이콘 아래 꽃을 올려놓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안장예식은 패럴 추기경이 비공개로 주례했으며, 교황 유언장에 적혀 있는 대로 ‘프란치스코’라고만 새겨진 곳에 교황은 안장됐다.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7면

[제28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산문 부문 수상자 윤흥길 작가

제28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산문 부문 수상작 장편소설 「문신」은 윤흥길 작가가 삶과 신앙, 언어와 역사에 바쳐온 시간의 총합으로 평가된다. 윤 작가는 집필을 시작한 지 25년 만에 완간된 작품에 대해 “혼신의 힘을 다해 천신만고 끝에 완성한 소설”이라며 “굉장한 애착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밝혔다. 소설은 순탄하게 쓰이지 않았다. 연재 잡지가 폐간돼 중단되기도 했으며, 건강 악화로 집필을 포기해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공황장애 증세로 인해 극심한 불면과 불안을 겪었습니다. 정말로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시기에 아내는 매일 새벽기도에 나갔고, 교회에서도 함께 기도해 주셨습니다.” 이후 치료와 기도로 점차 회복됐고,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그는 “그런 면에서 「문신」은 제게 매우 특별하고 의미가 깊은 작품”이라며, "한국가톨릭문학상 수상이 작품 그 자체뿐 아니라, 그간 쏟은 수고와 노력을 인정해 주시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더욱 감사하다”고 말했다. 「문신」은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가족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몸에 새기는, 한민족 고유의 문신 풍습 ‘부병자자(赴兵刺字)’에서 출발한다.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기보다 더 거슬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관습이다. 책을 읽다가 이 내용을 접한 윤 작가는 고유의 귀소본능, 즉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이 시신으로라도 고향에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포착했다. “살아 돌아오든 죽어 돌아오든, 고향에 묻히고 싶은 마음이 민족의 뿌리”라는 것이다. 또 일제 강점기 일본 홋카이도 등지로 징용된 조선인들이 “밟아도 밟아도 죽지만 말아라, 또다시 꽃 피는 봄이 오리라”고 노래한 ‘밟아도 아리랑’ 구절을 접하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 두 가지는 「문신」을 기획하는 모티프가 됐다. “세계의 다양한 문신 가운데 한국의 문신은 정말 독특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묻히고 싶다’, ‘시신으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처절한 귀소본능을 새기는 것이었습니다." 소설을 통해 “문신이라는 전통 속에 담긴 깊은 민족정신이 독자에게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한 그는 아울러 “일제강점기의 착취와 고통을 견뎌 낸 선대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뜻도 덧붙였다. 소설에는 다양한 신념과 욕망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일제 하에서 한국인들이 겪은 여러 가지 작은 인생 문제들을 한 집안에 몰아넣어 한반도 전체 상황을 그려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윤 작가는 작품에 담긴 부병자자 풍습을 그리스도교의 본향 개념과도 연결 지었다. “작품 속 인물 최순금은 개신교 신앙을 지닌 강인한 여성으로 그려진다”며 “그리스도교인이 천국을 본향으로 삼는다는 면에서, 민족의 귀소본능과 천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하늘과 땅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결국 같은 선상에서 만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 신자로 자라며 신앙이 자연스레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고 밝혔다. “사랑과 겸손, 온유 같은 가르침이 문학 속에 스며들도록 쓰고 있습니다. 직접 선교를 목표로 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교 정신은 숙명처럼 작품 속에 녹아 있습니다.” 「문신」은 현대 독자에게 쉽지 않은 소설이다. 긴 문장과 생소한 어휘, 복잡한 구성은 빠르고 간결한 흐름을 선호하는 세태와는 거리가 있다. 윤 작가는 “처음부터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불친절하기로 작심하고 쓴 소설”이라며 ,"‘경박단소(輕薄短小)’한 시대 흐름에 반해,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서사의 가치를 되살리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요즘은 모든 게 짧고 간결하게 소비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죠. 문학도 깊이와 무게가 필요합니다.” 소설에서 돋보이는 것은 낯설지만 풍부한 어휘와 인물들의 생생한 말투다. 남도 사투리와 입말, 옛말들이 많아 ‘우리말에 이런 말들이 있었나’ 싶어 사전을 뒤적이게 만든다. 이런 풍성한 말맛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을 곁에 두고 단어를 수집해 온 결과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고, 고딕체 표제어를 훑어가며 단어를 외우는 게 취미였다. 그는 독자들 사이에서 “사투리 같다”는 반응이 많지만, “대부분은 순우리말이나 표준어”라고 했다. “「문신」은 작가 생애에서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가장 힘이 많이 들어간 소설입니다. 이렇게 긴 작품은 남은 생에서 다시는 쓰지 못할 것 같아요. 제 대표작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현재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집필 준비 중이다. 앞으로 완주 한지를 소재로 한 소설도 꼭 쓰고 싶다고 했다. 1942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인 윤 작가는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장마」, 「완장」, 「황혼의 집」,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이 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삶의 진실과 시대의 모순을 꿰뚫는 리얼리즘 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며, 절제된 문체와 강렬한 사회의식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했다.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창작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 21세기문학상, 대산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박경리문학상, 장흥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 수상작 「문신」 「문신」은 2024년 전 5권으로 완간된 대하소설로, 원고지 6500매에 출간 도서 기준 2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대작이다. 윤흥길 문학의 결정체이자, 필생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2018년 1~3권이 먼저 출간됐으며, 2024년 4·5권이 출간되며 완간됐다. 전북 익산을 모티브로 한 가상의 지역 ‘산서면’이 배경인 작품은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의 혼란기에 이르기까지 한 지역 사회와 가족 공동체가 겪는 갈등과 파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중심 서사는 대지주 최명배 가문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최명배가 시대의 혼란을 틈타 부를 축적한 인물이라면 그의 자녀들은 각기 다른 신념과 길을 선택한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격동적인 시기 속에서 친일과 독립, 신앙과 불신, 권력과 저항 사이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걷는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한 시대의 혼란과 인간 군상의 복잡한 내면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자유를 위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누군가는 사상을 위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또 누군가는보신을 위해 ‘덴노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등 시대에 흔들리는 인간 군상의 삶을 조밀하게 그렸다.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인물들과 제국 시대의 생활상을 선명히 되살려낸 묘사는 탁월하고, 전라도 지방의 맛깔스러운 방언은 물론, 읽는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즐거움을 주는 감각적인 문장들이 풍성한 언어의 향연같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고전이 탄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분명한 답이 되어주는 작품이다. 이례적으로 완간도 되기 전 박경리문학상을 받았다. 박경리문학상은 국내 최고 수준의 상금을 수여하는 세계문학상이다. 완간 후에는 장흥문학상을 받았다. ◆ 산문 부문 심사평 “밟아도 아리랑, 밟아도 아리랑, 죽지만 않으면, 또다시 꽃 피는 봄이 오리라”는 아리랑 서사의 결정판이다. 한국 소설사는 어쩌면 윤흥길의 「문신」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더 이상 「문신」같은 소설이 나오기는 어려울 터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일어난 여러 역사적 사건을 복합적인 영혼의 숨결로 꿰면서, 고통의 강물을 건너는 아리랑 정서와 언어를 잘 빚어냈다. 고향으로부터 뿌리뽑히고 쫓겨난 민초들이 죽어서라도 귀향하기 위해 문신을 새기고 간절하게 몸부림치는 이야기, 그런데도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깊은 고통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지고 달래는 서사다. 기층의 아리랑 언어를 정말 웅숭깊게 되살렸다. 버림받은 이들이 가슴으로 빚어내는 말들의 카니발이 현묘하다. 윤흥길이 되새긴 민간 수사학의 절정이다. 역동적인 말들이 인물의 개성을 살리고 시대의 징후를 돌올하게 드러낸다. 작은 사람들의 마음들이 모이고 얽히면서 큰 서사의 금자탑을 쌓았다. 한국어로 쌓아 올린 우뚝한 서사인 「문신」에 제28회 한국가톨릭문학상을 헌정한다. - 우찬제(프란치스코) 문학평론가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2면

[제28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운문 부문 수상자 김윤희 시인

“한국가톨릭문학상을 받게 됐을 때, 제 마음이 정화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세례를 다시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구원이라고도 할 수 있죠. 가톨릭신자로서 영광스럽습니다.” 김윤희(이레네) 시인은 올해 1월 펴낸 일곱 번째 시집 「핵에는 책으로」로 제28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운문 부문 수상자가 된 소감을 세례와 구원에 비유했다. 그만큼 이번 수상을 더없이 크게 받아들이고 있다. 1964년 「현대문학」에 청마 유치환 시인(1908~1967)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후 61년 동안 끊임없이 시를 쓰는 인생을 살고 있는 김윤희 시인에게 가톨릭문학상 수상은 하나의 이정표로 여겨진다. “유치환 시인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의지와 관념의 시인이고 뜨거움과 냉철함을 분출한 시인이십니다. 유치환 시인으로부터 1962년에 제1회 추천, 1963년에 제2회 추천, 1964년에 추천 완료되면서 3분의 1 시인에서 3분의 2 시인을 거쳐 온전한 시인이 됐습니다. 스승에게서 벗어나 나만의 독립적인 시 세계를 갖고 싶었습니다. 제 시를 읽는 분들은 과묵하고 완벽을 추구하던 유치환 시인의 시 정신이 제 시에서도 느껴진다고 합니다.” 「핵에는 책으로」는 김 시인이 여섯 번째로 펴낸 「오아시스의 거간꾼」 이후 꼭 10년 만에 나왔다. 첫 시집 「겨울 방직」도 등단 후 6년 만인 1970년에 펴내는 등 김 시인은 등단 후 61년간 단 일곱 권의 시집만을 발간했다. 발표한 시집 수로 보면 작품 활동이 왕성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엄선에 엄선을 거친 시를 고르고 또 고르는 치열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단 한 권의 시집도 탄생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지금도 정신이 가장 맑을 때인 새벽 시간에 매일 시를 씁니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으면 곧 사망이나 마찬가지이고 시를 쓰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시다’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를 추구합니다. 아류나 ‘유사품’이 아닌 나만의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등단한 지 60년이 넘게 흘렀지만 지금도 등단을 꿈꾸는 문학청년의 심정으로 쓰고 있습니다.” 김 시인은 「핵에는 책으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완벽성을 추구하는 김 시인다운 품성을 엿볼 수 있다. “이전에 나온 여섯 권의 시집은 「핵에는 책으로」를 내기 위한 서론일 뿐입니다. 시의 완결성과 염결성(廉潔性)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여섯 번째 시집까지는 무(無)로 돌리고 싶습니다. 「핵에는 책으로」를 내면서 시인으로서 자부심을 찾았고 ‘나 이제 시인 됐나?’라고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었습니다. 진을 다 빼 가면서 쓴 작품이어서 미리 쓴 유언 같기도 합니다. 한국가톨릭문학상 수상 역시 제가 「핵에는 책으로」에 느끼는 자부심을 밝게 비춰 준 것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김 시인은 「핵에는 책으로」 발간 후에도 단 하루도 시 창작을 쉰 적이 없다.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하루 하루 시를 쓸 수 있는 건강을 하느님께 간구하며 새로운 창작으로 나아가는 궁리와 도모의 시간을 매일 갖는다.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들은 관례적으로 이미 발표한 시들 중 선별해 시선집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시선집을 내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새로운 시를 쓰겠다는 의욕으로 살고 있습니다. 독자들 중에는 저의 시 중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시들을 이야기하는 분들도 많지만 저 자신은 아직 대표작을 쓰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대표작을 꼭 남기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제 인생에 남은 시간을 아끼고 있습니다.” 김윤희 시인이 80대 후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20대의 정열로 시를 쓰는 이유가 있다. 특히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살면서도 마음속에 허무함을 안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시는 무궁무진한 혜택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시를 읽는 이들과 읽지 않는 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시를 읽으면서 자아를 각성하기도 하고, 자기 영역을 확대할 수 있고, 물질의 세계가 던져 주는 허무함을 메울 수가 있습니다. 요즘처럼 활자 매체가 범람하는 시대에는 더욱이 아날로그적인 감성으로 시를 읽는 것은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 수상작 「핵에는 책으로」 제28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운문 부문 수상작 「핵에는 책으로」(136쪽/1만2000원/책만드는집)는 김윤희 시인의 지칠 줄 모르는 창작 욕구가 녹아 있는 역작이다. 우선 제목부터가 눈길을 끈다. 「핵에는 책으로」는 모두 8부로 구성된 시집의 첫 시 제목이기도 하다. 시인이 안질로 고생하면서 난청까지 따라 온 어느 날 TV 뉴스 화면 자막에 적힌 ‘핵에는 핵으로’가 ‘핵에는 책으로’로 둔갑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소소한 일상에서 우연히 일어난 작은 ‘불상사’에서 김 시인만의 감수성이 발휘됐다. 시인은 누가 제대로 ‘핵에는 핵으로’라고 알려 주기 전까지는 달콤한 세상을 잠시 살았던 행복감을 시로 표현했다. 김 시인은 이전에 발간한 여섯 권의 시집과 비교해 「핵에는 책으로」를 가장 충족감을 느끼는 시집이라 자평한다. 60년 넘는 활동에서 일곱 권의 시집만을 낼 만큼 스스로에게 철저하고 완전성을 갖춘 작품만을 추구하는 시인의 작품세계가 충실하게 구현돼 있다. 김 시인 스스로에게는 ‘시집을 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첫 시집과 다름없다. 독자들에 따라 난해하게 느껴지거나 쉽게 다가오는 작품도 있지만 「핵에는 책으로」를 관통하는 시 정신은 독창적인 시선으로 사회 현상과 인간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 형상화한다는 점이다. <촛불 취침>에서는 광장에서 벌어지는 촛불 시위를 바라보면서 촛불을 ‘지상의 별’이라 이름 붙이고, ‘어느 간절한 손에 들려 타는 함성’이라 묘사하고 있다. 김 시인이 지니고 있는 넉넉한 시야가 저변에 깔려 있다. <블랙커피 콤플렉스>에서는 40년 전 집으로 찾아온 남편의 여제자를 시의 소재로 삼아, “선생님은 블랙 드시는데요”라며 프림을 타지 못하게 말리던 그 제자가 오늘도 무사한지 궁금해 한다. 인간에 대한 김 시인 특유의 따뜻한 애정이 배어 있다. “시의 양식(糧食) 아니었으면/ 무엇으로 일생 연명했으리”라는 단 두 행으로 쓴 <미니 솔soul 1>은 시를 통한 자기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시가 곧 양식이고 시를 써서 일생을 연명했다는 담담한 시구는 60여 년 시인으로 살았지만 아직도 문학청년이기를 원하는 김 시인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 준다. ◆ 운문 부문 심사평 김윤희 시인의 시집 「핵에는 책으로」에는 60여 년의 시력(詩歷)을 쌓아 온 원로시인이 경험하는 소외와 고독, 비애의 감응이 묻어나지만 내면에서 솟아나는 힘찬 결기와 열정이 발랄하고 다이나믹한 탄성으로 그것을 역전시키며 튀어오른다. 이 ‘육성(肉聲)의 시’는 시적 표현의 날렵한 속도감과 압축적인 형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를 이중, 삼중으로 구사하는 중층적 비유를 동반하면서 내밀한 경험의 속살을 농축된 언어로 천연스럽게 표현한다. - 오형엽 문학평론가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3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메디치가의 부흥

1429년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Cosimo di Giovanni de' Medici, 1389–1464)는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로부터 유럽 전역에 진출해 있는 메디치가의 은행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코시모는 유산을 지키기 위해서 피렌체의 정치에 개입하게 됩니다. 특히 피렌체의 대지주인 리날도 델리 알비치가 코시모를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1433년 코시모는 결국 피렌체 근교의 메디치 영지로 피신하였는데, 새 피렌체 정부로부터 시뇨리아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가문을 위해서 시뇨리아 회의에 참석하였지만, 즉시 체포되어 90미터 높이의 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알비치는 코시모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시뇨리아를 압박했으나 결국 추방으로 타협하였고, 코시모는 베네치아에서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알비치는 주요 가문들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를 지배하게 되었으나,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 그리고 소시민들은 여전히 메디치가의 편이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시기에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사 중이었고, 알베르티는 피렌체에 들어와서 활동을 막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르네상스의 열풍이 일기 시작했을 때였기에,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코시모는 비록 몸은 베네치아에 있지만 피렌체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비치는 인문주의를 그리스도교의 적대 세력으로 간주하여 탄압했고, 시뇨리아를 무력화하여 민주주의를 무너트리려고 했습니다. 이에 시민들이 반발하고 도시가 분열되는 등 내전의 긴장감이 커지자 알비치 집단은 피렌체에서 도망쳤습니다. 결국 시뇨리아는 1년도 못 되어 코시모를 귀환시켰고 피렌체 시민들은 코시모를 환영하였습니다. 이후 피렌체는 일상을 되찾았지만, 실제 통치권은 코시모에게 넘어갔습니다. 코시모는 시민들이 원하는 평화를 보장해 준다면 그들도 그의 정치를 용인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코시모는 더욱 낮은 자세로 일하며 자신도 평범한 시민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 교회는 마르티노 5세 교황의 선출로 40년간의 서방교회 대이교를 마감하고 쇄신을 위한 공의회를 준비하였습니다. 1431년 교황은 바젤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후임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공의회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오스만튀르크의 공격을 받고 서방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목적으로 황제의 요청에 응하여 페라라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에 황제와 총대주교를 비롯한 700명 규모의 동방교회 대표단이 페라라에 도착하였고, 공의회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일치를 이루지 못한 교리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페라라에서 서방교회만이 아닌 대규모의 동방교회 대표단이 함께 머무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려웠으며, 더구나 재정이 열악했던 교황청은 더욱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네치아 망명 기간 중 베네치아 출신의 에우제니오 4세 교황에게 도움을 받았던 코시모는, 피렌체가 공의회의 참석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고 공의회에 들어가는 비용도 충당할 능력이 있는 도시라며, 피렌체에서 공의회를 개최할 의향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교황이 코시모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피렌체 시민들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대표단을 맞이하고자 1439년 초에 코시모를 시뇨리아의 의장으로 선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공의회의 개최가 가져다줄 엄청난 이득을 알았던 시민들은 공의회 참석자들을 최대한 만족시키려고 준비하였는데, 피렌체에 들어오는 동방교회 대표단의 행렬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기이한 복장의 사제들, 다른 색의 피부를 가진 몽골인, 무어인, 아프리카 흑인, 그리고 원숭이, 화려한 깃털의 새, 사슬을 두른 치타 등은 피렌체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습니다. 서방교회의 대표단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짐을 풀었고, 동방교회의 대규모 대표단은 메디치가를 비롯한 유력 가문들의 저택들에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공의회는 피렌체의 여러 성당에서 진행되었는데, 많은 교리적 논쟁이 있었음에도 1439년 7월 6일 피렌체 대성당 브루넬레스키의 돔 아래에서 양 교회의 대표가 교회 일치 교령에 서명함으로써 마무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성령의 발출(필리오퀘), 성체로 축성할 제병, 연옥과 지옥, 로마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리고 동방교회 대표단은 서방교회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동방교회 내부에서 일치 교령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서방교회의 군사적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군대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하지만 피렌체는 공의회 덕분에 교황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메디치가의 위상은 더 높아졌습니다. 당시 인문주의는 플라톤 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것 역시 코시모가 피치노에게 플라톤의 저서를 번역하고 보급하도록 지원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부패한 실베스테르회를 추방하고 산 마르코 수도원을 도미니코회에 맡겼을 때, 코시모는 수도원 건축의 모든 비용을 대고 그 설계를 친구 미켈로초(1396-1472)에게 맡겼습니다. 코시모는 ‘팔라초 메디치’를 지을 때도 먼저 브루넬레스키에게 설계를 의뢰했으나, 결국 브루넬레스키의 웅장한 설계를 반려하고 미켈로초에게 맡겼습니다. 세간의 이목을 끌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습니다. 코시모는 메디치가와 피렌체,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헌신했지만, 고질적인 통풍에 시달리며 병상에서 지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만 갔고, 결국 1464년 그가 사랑하는 가족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히 잠들었습니다. 시뇨리아는 국가 원수에 해당하는 장례를 계획했지만, 코시모의 평소 바람대로 한 시민으로 산 로렌초 성당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시뇨리아와 시민들이 코시모에게 바치는 영예를 거절할 수 없어서 그의 무덤에 ‘국부’(Pater patriae)라는 비문을 새기는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20면

하느님 사랑 만끽하는 우리 “고통은 치유로, 절망은 희망으로”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마뗄암재단(사무국장 이영숙 베드로 수녀, 이하 재단)은 암 환자를 위해 보건복지부로부터 허가받은 국내 유일의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암 자체의 치료보다 병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가정의 갈등과 환자 내면의 상처 치유를 위해 설립됐다. 재단이 연 18회 시행하는 암 환자 무료 피정 ‘희망의 꽃’이 강화도 마뗄 쉼터에서 열렸다. 부활 제3주일이자 생명 주일을 맞아 방문한 마뗄 쉼터는 그 어느 곳보다 생명력과 사랑이 넘쳤다. “며칠이라도 자연에서 쉬고 싶다” 인천 강화 석모도 민머루해수욕장 갯벌 앞에 갈매기 떼가 모여들었다. 새들을 향해 과자를 들고 ‘까르르’ 소녀처럼 웃는 한 무리는 ‘희망의 꽃’ 프로그램 중 자연 피정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암 환자들이다. 한바탕 갈매기 먹이 주기가 끝나자 열 명 남짓한 참가자들은 중력이 분산되는 사뿐함을 느끼며 고운 갯벌 위를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따스한 햇볕, 시원한 바람, 부드러운 진흙이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는 자연의 선물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탄성을 터트렸다. 하늘이 선사하는 아름다움 속에서 참가자들이 허심탄회하게 “갯벌엔 아이 숙제하러나 와봤지, 온전히 내가 즐기기 위해서는 처음”이라든가 “내 아픔을 남편이 이해 못해 서운하다”는 말을 나누며 여유롭게 십여 분 발걸음을 옮기자 드디어 찰랑이는 파도가 보였다. 바닷물을 발로 차기도 하고 진흙으로 범벅이 된 발을 맞대며 화기애애 사진을 찍은 참가자들은 이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이들은 다음 장소인 온천 터로 자리를 옮겨 뜨뜻한 해수에 발을 담그고 뻥튀기와 음료를 나누며 힐링의 시간을 만끽했다. 족욕이 끝나고 들른 카페에서 못다 한 이야기꽃을 피운 뒤 귀가한 마뗄 쉼터에는 영양 만점 보쌈과 몇 시간이나 정성 들여 끓인 뽀얀 들깻국이 반기고 있었다. 자신도 33세에 암 투병 생활을 했고, 공식적으로만 2000명 이상의 임종을 지킨 이영숙 수녀는 “많은 암 환자에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며칠만이라도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서 마음 편안하고 자유롭게 쉬고 싶다’고 대답한다”며 “비록 길지 않지만 대지 속에서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통해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선물하고 싶다”고 밝혔다. 암 치료해주니 자살 시도로 실려와 “암 치료 지원금도 주고 지극정성을 쏟아 겨우 살려놨더니, 완치 판정을 받고도 자살 시도를 해 병원에 다시 실려 오는 환자들이 있었어요. 육체적 치료뿐 아니라 내면 치유도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암 환자들은 진단 순간부터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치료 과정에서 겪는 고통으로 우울증과 절망에 빠져 죽고 싶다는 충동도 자주 느낀다. 이 수녀는 오랜 투병 과정에서 가족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자신으로 인해 가족이 불행해진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환자들의 모습을 많이 봤다. 여기에서 받는 마음과 삶의 상처는 의료기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하느님의 사랑만이 치유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단순한 휴식을 넘어서서, 환자들이 생명의 고귀함을 재발견하고 희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전인적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모든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믿기에,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자신의 생명과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돕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강조한 이 수녀는 “이곳에서 환자들이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13년째 재단 실무를 맡고 있는 김옥녀(안젤라) 실장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 환자들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기고 단절됐던 관계도 회복해 삶이 변화한다”며 “이곳에 오신 분들이 ‘내가 정말 사랑받고 있구나’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기도와 정성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마뗄 쉼터가 운영하는 환자 피정 ‘희망의 꽃’과, 환자와 가족 등이 머물다 가는 ‘사랑이 핀 쉼터’는 성별·연령·종교 상관없이 활동 가능한 모든 암 환자에게 열려 있다. 무료로 진행하다 보니 재정 부담이 없지 않지만, 다행히 올해는 사랑의 열매 전국단위 신청사업에 선정돼 보다 나은 환경에서 이뤄지고 있다. 재단은 인근에 말기 암 환자 돌봄 센터 ‘가브리엘라 천사의 집’도 건립 중이다. 양손 가득 담아가는 하느님 사랑 갑상선암을 13년 전 발견하고 8번의 항암 치료와 후유증, 코로나로 인한 림프 전이 등을 겪은 이병희(그라시아) 씨는 “이곳 수녀님들이 친정엄마 같고, 일하는 모든 분이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대해주셔서 항암 약을 먹으며 생긴 우울감과 불안 장애가 없어졌다”며 “‘여기서 하느님 사랑을 가슴 가득 안고, 등에 지고, 주머니에 담고, 손에 쥐고 그리고 나가서 더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을 듣고 가슴이 따뜻해졌다”고 말했다. 2년 전 유방암 2기 진단을 받은 뒤 자연 요법으로 치료 중인 오인숙(체칠리아) 씨는 친언니의 권유로 마뗄 쉼터에 왔다가 34년간의 냉담을 풀었다. 모든 시간이 좋았지만 특히 기도방에서 환자 한 명 한 명과 성심껏 함께 봉헌해준 이영숙 수녀의 기도가 마음을 울렸다. 오 씨는 “앞으로는 서울역 근처 노숙자분들을 위해 봉사를 하며 받은 사랑을 나눌 생각”이라고 밝혔다. 유방암과 갑상선암을 동시에 겪은 조은아(세라피나) 씨는 마뗄 쉼터 방문 일주일 전 세례를 받았다. 조 씨는 “피정에서 서로의 투병 과정과 아픔을 나누는 순간 나만 이런 고통의 시간을 보낸 게 아니란 걸 깨닫고는 불면증 없이 단잠을 잤다”며 “나는 버려진 게 아니고,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고 기다리셨다는 걸 느끼자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남편이 나에겐 너무 큰 가시”라던 한 환자는 피정 후 “그 가시는 내가 만든 것 같다. 남편에게 따뜻한 밥상 한 번 못 차려준 게 미안하다. 이곳에서 먹은 사랑과 정성의 식사처럼 집에서도 그렇게 하겠다”고 고백하고 돌아가 달라진 모습을 보였고, 감동한 남편이 마뗄 쉼터를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한 적도 있다. 또 한 보호자는 큰 기대 없이 왔던 ‘사랑이 핀 쉼터’에서 말기 암인 남편, 사이가 좋지 않던 자녀와 극적으로 화해해 남편의 여생 3개월을 극진히 돌보다 평안하게 보내기도 했다. 김옥녀 실장은 “아픔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모든 이의 생명은 끝까지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생명의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 후원 : 농협 355-0064-3508-93 재단법인 마뗄암재단 ※ 정기·일시후원 : https://online.mrm.or.kr/MrX5kTi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6면

5월 7일 시작 ‘콘클라베(Conclave)' 어떻게 진행되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4월 21일 선종함에 따라 사도좌 공석(Sede vacante)이 된 교회는 추기경단의 주도 아래 차기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교황 선거 ‘콘클라베’는 어떻게 진행될까? ■ 추기경 선거인단 오늘날 콘클라베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96년 반포한 교황령 「주님의 양 떼」(Universi Dominici Gregis)에 따라 이뤄진다. 교황령에 따르면 사도좌 공석이 된 시점에 만 80세 미만인 추기경에게 교황 선거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진다. 전통적으로 교황 선출권 보유 추기경 수는 120명 이하로 제한돼 임명됐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중 80세 미만 추기경을 이 제한보다 더 임명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한 4월 21일 기준으로 135명의 추기경이 교황 선출권을 지니게 됐다. 135명의 추기경을 서임한 교황별로 살펴보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5명, 베네딕토 16세가 22명, 프란치스코 교황이 108명이다. 대륙별로는 유럽이 53명, 아시아가 23명, 북아메리카가 20명, 남아메리카가 18명, 아프리카가 18명, 오세아니아가 3명이다. 현재 교황 선출권을 지닌 추기경 전원이 참석하게 되면 역대 최다 인원이 참석한 콘클라베가 될 것으로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2013년과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된 2005년 콘클라베에서는 선거권을 가진 추기경이 115명이었고,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된 1978년 콘클라베에는 111명이 참석했다. 교황 선출권 지닌 추기경 현재 135명 교황청 공식 발표, 5월 7일 콘클라베 시작 5월 중순 새 교황 맞이할 듯 ■ 콘클라베 진행 과정 콘클라베가 개최되면 선거인 추기경들은 교황궁의 바오로 경당에 모여, ‘오소서, 성령님’(Veni Creator) 성가를 부르며 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 행렬을 지어 시스티나 경당으로 간다. 시스티나 경당에 도착하면 추기경들은 한 명씩 복음서에 손을 얹고 서약문에 따라 맹세한다. 마지막 추기경의 맹세가 끝나고 외부인이 모두 퇴장하고 나면 새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시스티나 경당은 봉쇄된다. 투표는 ‘나는 교황으로 뽑는다’라는 문구가 쓰인 투표용지 하단에 피선자의 이름을 작성해 반으로 접어 집표함에 넣는 비밀투표 방식으로 이뤄진다. 콘클라베의 비밀누설에는 파문 제재가 따를 정도로 엄격하게 비밀이 지켜진다. 추기경들은 “나를 심판하실 주 그리스도를 증인으로 삼아 나는 하느님 앞에서 당선되어야 한다고 판단하는 사람을 선거합니다”라고 말하며 집표함 뚜껑 위에 투표용지를 올리고 뚜껑을 뒤집어 투표용지를 집표함에 넣는다. 선거인 추기경단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은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된다. 만약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은 사람이 없으면 다시 투표를 진행해야 한다. 투표를 마친 후에는 투표용지를 태워, 그 연기를 통해 외부에 결과를 알린다. 교황이 선출되지 않았으면 검은 연기를, 교황이 선출됐으면 흰 연기를 피워 올린다. 그래서 신자들은 시스티나 경당 굴뚝이 보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에 모여 선한 목자의 탄생을 기도하며 흰 연기가 피워 오르길 고대한다. 콘클라베는 첫 날 한 차례 투표를 진행하고 다음 날부터 오전과 오후 각각 두 차례씩, 하루에 총 네 번까지 투표를 실시한다. 만약 이렇게 사흘 동안 투표가 이뤄졌는데도 의견 합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하루 동안 투표를 중단하고 추기경들은 기도와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이후 일곱 번의 투표 후에도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다시 하루 중단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투표 끝에 교황이 뽑히면 선임 추기경이 피선자에게 교황직 수락 동의를 구하고, 피선자가 동의하면 콘클라베는 종료된다. 콘클라베가 종료되면 선거인 추기경들은 새 교황에게 경의와 순종을 표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새 교황과 교황명을 발표하고 새 교황이 ‘로마와 온 세계에’(Urbi et Orbi) 사도적 축복을 내린다. ■ 언제 새 교황을 만날 수 있을까? 교황령 「주님의 양 떼」는 사도좌 공석이 된 순간부터 만 15~20일 사이에 콘클라베를 시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교황청은 4월 28일 열린 추기경단 총회에서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5월 7일 시작된다고 발표했다. 콘클라베 기간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길어도 5일은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교황 선출 시에는 각각 5차, 4차에 걸친 투표로 이틀 만에 교황이 선출됐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경우 8차 투표로 콘클라베 기간이 사흘이었다. 20세기 이후 가장 길었던 콘클라베는 비오 11세 교황을 선출했을 때다. 1922년 열린 이 콘클라베는 5일에 걸쳐 14번의 투표 끝에 교황을 선출했다. 5월 7일 콘클라베가 시작되고 5일 이내에 투표가 마무리 되는 경향을 생각하면 늦어도 5월 중순에는 새 교황을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콘클라베는 콘클라베(Conclave)는 ‘열쇠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 ‘쿰 클라비스’(Cum Clavis)에서 온 말이다. 초창기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은 지역 성직자와 신자들의 선거로 뽑혔다. 그러나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보편 교회의 수장으로서 영향력이 커지자 교황 선출에 황제나 왕, 귀족들의 간섭이 커졌다. 이에 1059년 니콜라오 2세 교황은 선거권을 추기경들에게 국한시켰고, 1179년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통해 3분의 2 다수결 선출 방식이 결정됐다. 그러나 다수결 선출 방식으로 진행되다보니 1268년 비테르보에서 열린 교황선거는 1271년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긴 선거에 지친 비테르보 시당국과 시민들은 성당 문을 잠그고 빵과 물만 제공하며 빠른 결정을 촉구했고, 결국 2년 9개월 2일만에 교황이 선출됐다. 바로 첫 콘클라베다. 첫 콘클라베로 선출된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1274년 콘클라베를 제도화했다. 이후 세부적인 규칙은 수정·보완돼왔지만, 추기경단이 문이 잠긴 성당에서 3분의 2 다수결로 교황을 선출하는 형태의 콘클라베는 계속 이어오고 있다.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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