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삼위일체 교리와 신앙생활

5월 26일은 ‘주님의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을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로 지낸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초기 교회부터 이어져 왔다. 1334년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교회 전례력에 들어왔고, 1910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대축일로 선포됐다. 삼위일체 교리와 이를 따르는 신앙인의 삶에 대해 살펴본다. 신앙생활을 하며 가장 이해가 어려운 신비 중 하나가 삼위일체의 신비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말은 모순으로 보이지만 그 자체가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 현대교회는 신앙인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인간 삶과 유리된 형이상학적인 사변이나 초월적 신비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사랑 자체이며, 넘치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 인간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 하느님의 구세경륜을 표현하는 가르침으로 알아듣고, 사랑의 친교에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느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53항은 ‘삼위는 한 하느님이시다. 세 신들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 곧 ‘한 본체의 삼위’에 대한 신앙을 우리는 고백한다’라고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 다른 세 하느님이 아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데, 이 위격들은 신성을 나눠 갖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이시다. 삼위는 서로 동일하고,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다. 일반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격적 존재는 서로 다른 역할과 활동을 통해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성부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파견돼 계시와 구원 활동을 하시며, 성령은 우리 곁에 함께하시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하느님 나라로 이끄신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54항은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하시는 분이시다’라고 전한다.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은 한 마디로 사랑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영원으로부터 “자유로이 당신 복된 생명의 영광을 나누어 주고자”(「가톨릭교회 교리서」 257항)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 계획은 삼위일체의 사랑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고, “창조의 업적과, 인류의 범죄 이래 구원의 역사 전체와 교회의 사명으로 이어지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 안에 전개된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하느님 세 위격의 공동 작업’(「가톨릭교회 교리서」 258항)이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가톨릭교회 교리서」 260항)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부정하려는 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신학적 성찰을 통해 믿을 교리로 확립, 선포됐다. 신학은 삼위일체에 대해,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하느님의 내적 본질을 지칭하는 ‘내재적 삼위일체’, 인간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하는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로 나눠 설명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존재하시는지에 대해 사변적으로 고찰하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이다. 한편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구체적으로 하느님이 인류와 세상을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행업을 삼위일체의 본질로 파악한다.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별개가 아니라, 오히려 내재적 삼위일체의 계시다. ■ 성경 속 삼위일체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포함되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업적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공동 활동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은 성경에 드러난다. 구약은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지만, 하느님께 서로 구별되는 위격들이 있음을 암시하거나 그 계시를 준비하는 구절을 포함하고 있다. 창세기(1,26)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우리’라는 복수로 표현했다. 다른 여러 곳에서는 말씀, 영, 지혜라는 이름으로 하느님을 지칭하기도 한다. 신약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낸다. 예수 탄생 예고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라며 삼위의 신비를 표현한다. 예수 세례 장면도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라고 서술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난 전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라고 했고, 부활 후에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라고 당부했다. ■ “성부와 성자, 상호 간의 사랑이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하며 우리를 성삼위의 완전한 사랑의 일치에 초대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21년 5월 30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삼종기도에서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성부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성자 하느님도 사랑이시고, 성령 하느님도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신 한, 비록 유일하고 한 분이시지만, 고독하신 분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간에 친교를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그 자체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무한하고 독창적인 현실 안에서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시며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 성자께서도 성부께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며, 그분들 상호 간의 사랑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분들 간 일치의 유대이십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우리 모두 이 신비를 살아낼 수 있습니다.”

몽골에서 23년…그는 낯선 땅에서 ‘아버지’로 불렸다

[몽골 민경화 기자] 예수님은 허름하고 누추한 구유에서 가장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다. 입을 것도,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갓난아기를 본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자 마음먹었을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 계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나누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다. 지난해 55세 나이로 선종한 고(故) 김성현(스테파노) 신부는 몽골에서 선교한 23년 동안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의 가난한 모습을 기억하고 몽골인들에게 그런 예수님을 알려주고자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찾은 몽골에는 선교사의 업적과 같은 화려한 성당이나 그럴싸한 학교 건물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김성현 신부가 더 값진 것을 남겼음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 한국에서 온 나의 아버지 “신부님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아버지였습니다.” “신부님은 부모가 없는 아이들의 빈자리를 채워 주신, 우리 아빠입니다.” “담배 피우실 때도, 걸어 다니실 때도 늘 기도하고 계시다고 느꼈어요. 신부님과 만나면 예수님이 다가오는 것 같았어요.” “신부님은 게르에서 불피워 밥을 지어 먹고 말 타고 양을 돌보며 몽골 사람처럼 살았어요. 잠깐 들렀다 돌아가는 다른 외국인들과 달랐습니다.” 김성현 신부 선종 1주기를 두 달여 앞둔 4월 1일, 몽골의 봄은 아직 차갑기만 했다. 초원의 봄은 더욱 황량했다. 아직 생명이 자라지 못한 초원에서는 먹지 못해 생명을 잃은 가축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몽골에서 스물두 번의 혹독한 겨울을 버텼던 김 신부도 따뜻한 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삶은 남은 사람들에게 봄을 선물했다. 아버지의 든든함, 친구의 편안함,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한 김 신부의 삶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몽골교회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2000년 몽골에 도착해 2년 뒤 세운 항올 성모승천성당. 나그네가 쉬어가도록 문을 열어 놓는 몽골 전통 가옥 게르처럼 김 신부는 가장 먼저 성당 문을 열었다.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낯선 몽골에서 성당 문을 두드린 것은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이었다. 쓰레기를 주워 팔거나, 안전한 가정의 울타리가 없는 아이들에게 김 신부는 “성당에서 같이 살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12명의 아이들이 모였고 성당 한편에는 아이들의 침실과 공부방이 마련됐다. 그 순간 김 신부는 기도했다. “주님, 아이들을 보내 주십시오, 아이들과 평생 함께 살겠습니다. 이 아이들 중 몽골인 사제가 한 명만 나오게 해주십시오.” ■ 하느님이 몽골에 보낸 선물 성당을 짓고 안정된 공동체를 돌보며 숨을 돌릴 법한 순간, 그는 초원으로 향했다. 몽골에서 선교한 지 16년 만에 도심에서 200km 떨어진 에르덴산트로 떠난 것이다. 전기나 물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야 했던 시간을 김 신부는 “천국과 같았다”고 회상했다. 안식년과 국내연수로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어교사자격증을 딴 그는 에르덴산트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에르덴산트 사람들은 그를 ‘신부’가 아닌 ‘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좋은 건물을 짓거나 초원에 없는 값비싼 물건을 내밀며 “하느님을 믿어라”라고 말하지 않았다. 평소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했던 김 신부는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함께 살았다. 가난한 이들 곁에 머물렀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에르덴산트에 머물렀다. 에르덴산트에서 김 신부를 만났던 지엑멧 더르지씨는 “김 선생님은 줄곧 공부와 일을 열심히 해서 국가의 발전을 도와야 하고 아이들 공부도 열심히 시키라고 이야기해 주셨다”며 “우리는 가족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선생님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몽골 바잉허쇼 소피아 본당 주임 노상민(토마스) 신부는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냉담 교우가 많아지자, 신부님은 새로운 선교 방법이 필요하셨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며 “가난의 영성을 살아가는 것이 선교 사제의 사명이라는 생각에 몽골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고자 에르덴산트로 떠나신 것”이라고 말했다. 생전에 김 신부는 가진 것이 없었다. 추운 나라에서 건강을 챙기라며 가족들이 사준 옷과 신발은 모두 몽골 아이들에게 나눠줬고, 한국 가는 길에 판공비를 아껴 산 선물들은 한국에 사는 몽골인들 것이었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수많은 몽골 사람들이 곁에 남아 있었다. 기숙사에 살았던 아이들에게 김 신부는 “내가 죽으면 항올 성당에 공적비를 세워달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공세리성당 한편에 세워진 드비즈 신부의 공적비를 보고 “이 심심한 곳에 왜 오셨지?”라며 선교 사제를 꿈꿨던 자신의 과거가 몽골 신자들의 현재가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만난 신자들은 한결같이 “신부님이 아직도 내 옆에 살아계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바람처럼 김 신부는 초원의 바람으로 몽골교회와 몽골 신자들 곁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2024-05-26

[특별기고] 124위 시복 10년을 기억하며

한국교회는 1925년 79위 복자를 탄생시키며 한국교회의 이른바 순교복자 시대를 시작했다. 그들 복자는 모두 기해박해(1839) 70위와 병오박해(1846) 9위 순교자들이었다. 거기에 1968년에 병인박해(1866) 24위 순교복자가 추가되었다. 이들 복자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4년에 모두 103위 성인이 되었다. 그런데 103위 시성 과정에서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한국교회가 평신도 중심의 신앙공동체로 시작했다고 알고 있는데, 왜 이들 복자 중에는 초기의 평신도 순교자들이 없느냐?” 물으셨다고 한다. 그때 청원인은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서 주로 1839년부터 먼저 시작되었고, 이들 후대의 순교자 중심으로 먼저 시복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초기 순교자들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교황님께서는 그 초기 교회 순교자들도 조사해서 시복을 추진하라고 당부하셨고, 그렇게 하여 결실을 보게 된 것이 2014년 124위 순교복자의 탄생이었다. 필자도 124위 복자 탄생에 조금은 기여한 바가 있다. 서울지역에서 순교하신 이들에 대한 현장 조사 실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포도청, 형조 터, 의금부 터 및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등 순교 장소를 지정하고 그곳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기록을 정리해서 올려야 했다. 지금 그 장소들은 모두 서울 국제 순례지에 포함돼 많은 이들이 도심 속 성지들을 도보로 순례하고 있다. 참으로 잘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순례하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준비하면서 출발하고 있는가? 한국의 순교성인과 순교복자들은 적은 숫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공자들조차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순교성인과 복자들은 그들의 삶으로 보나 순교했을 때의 신덕과 용덕으로 보나 정말 모범적인 신자들이었다. 정약종-정철상-유체칠리아-정하상-정정혜, 유진길-유대철, 홍낙민-홍재영-홍봉주, 김제준-김대건, 최경환-이성례-최양업 등 한 가족들이 보여준 신앙심은 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렵다. 그리고 최근에는 미디어를 통해 관련 역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찾아보고 기억하며 순례하는 것이 좋겠다. 다만 검증은 항상 필요하다. 시복시성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이다. 곧 신앙 선배들의 모범을 배우기 위한 것이다. 그들처럼 순교까지 할 수 있다면 더할 수 없는 은총이지만, 오늘날 순교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런 상황이 된다면 성당을 다니지 않을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순교는 못 해도 최소한 그들의 뛰어난 삶과 신앙은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코로나19 이후로 너무나 많이 위축된 교회 활동이 순례를 통해서 다시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시복식 때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당부하셨던 두 가지 키워드, ‘기억의 지킴이, 희망의 지킴이’가 되기 위해서 지상의 순례여정을 시작하자. 얼마 전 한 지인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세례 공동체가 시작(1784)될 때 양반과 중인 중심으로 모인 이들 연령이 20~30대 청년이었음을 새삼 알게 됐다. 이제 ‘희망의 순례’를 떠나면서 청년들은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더 아끼며 함께 여정을 가면서 기억과 희망을 지켜나가야 하겠다. 이 여정에는 그 어느 때보다 한국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전구가 절실하다. 한국의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글 _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2024-05-26

“아이들은 인류의 희망, 차별 없는 세상에서 자립할 역량 키워요”

학교에 다니고 사춘기를 겪는 평범한 우리 주변 청소년에 다들 익숙해졌다. 하지만 가깝게는 아시아, 멀게는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로 가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고통받는 아동·청소년들이 있다. 교육조차 못 받는 아이들은 자기 상황을 개선하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이다. 한국교회는 그런 지구촌 아동·청소년들을 어떻게 돕고 있을까.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이사장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 국제협력센터는 올해 중점 사업 분야로 교육을 내세운다. 다양한 원인으로 충분히 배우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교육에 초점을 맞췄다. 센터의 아동 및 청소년 교육 분야 개발협력사업은 아프리카 및 아시아 최빈국과 개발도상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청소년 주일을 맞아 존엄을 잃은 지구촌 청소년들에게 스스로 ‘해방’할 역량을 심어주는 센터의 활동을 알아본다. ■ 교육 소외의 원인 빈곤과 재해·재난은 아이들을 교육에서 소외시키는 대표적 원인이다. 마다가스카르 피아나란초아주에서는 빈부격차가 뚜렷하고 가뭄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 라우라 바꾸냐 학교 학생들은 지역에서도 최빈곤 가정의 자녀들이다. 대부분 영양실조를 앓고 고아와 장애 아동도 많은 현실에서 학습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지속적 교육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케냐에서 물 부족이 가장 심각한 이시올로주도 마찬가지다. 만성적 빈곤, 높은 실업률, 부실한 지역 기반 시설로 인해 주민 71%가 극빈층이다. 이런 상황에 지속되는 가뭄은 식량 위기를 가중시킨다. 탄자니아 이링가주에서는 청년이 전체 인구 75%를 차지하며 인구 70%가 국제 빈곤선 이하 수준의 수입(하루 약 1.25달러)으로 생활한다. 대다수 주민의 생계 수단은 농업이지만, 기후변화로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고 있다. 배움은 꿈도 못 꾼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우기마다 농업이 타격을 받아 사람들은 생계의 위협을 받는다. 캄보디아 푸삿주는 58%가 숲이고 다수 주민이 농민이다. 매년 되풀이되는 경제적 불안정에서 아이들 학습에 우호적 환경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학습권, 성평등, 신체적 다름에 대한 인식 부족은 지구촌 아이들의 교육을 더욱 방해한다. 스리랑카 푸탈람구·라트나푸라구 차농장 및 해안 지역의 학부모들은 자녀에게 학교에 가지 말고 노동해 생계비를 벌도록 강권한다. 오랜 내전으로 전쟁 과부, 미혼모가 많은 우간다 오모로구에서는 여성 문맹률이 특히 높다. 여성들은 어린 나이에 일찍 결혼하고 4~7명의 자녀를 키우며 가사와 농사를 병행한다. 읽고 쓰지 못해 교육 기회는 더 제한돼 자립적인 삶을 꾸리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탄자니아 므완자주 알비노 아이들은 신체적 다름 때문에 교육 기회를 뺏긴다. ‘선천성 색소결핍증’으로 알려진 알비노는 피부와 머리 색이 유독 밝아 아프리카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띈다. 아프리카에서 알비노가 가장 많은 탄자니아에서는 알비노의 신체 일부를 지니고 있으면 부와 행운이 찾아온다는 미신이 존재한다. 알비노 아이들은 늘 외상이나 폭행 위험에 노출돼 있어 정상적 학교생활이 불가능하다. ■ ‘해방’의 역량을 위하여 “한 자루의 연필, 한 권의 책, 그리고 헌신적인 교사가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아동·청소년기에 경험하는 성장 환경과 교육 수준은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러나 개발도상국과 최빈국 아이들은 대물림되는 가난과 제한된 교육 기회로 인해 ‘한계지어진 삶’을 살아간다. 센터는 그들에게 변화를 만들어 갈 역량을 키울 기초를 마련해 주고자 교육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교육은 가난한 아동과 청소년이 전인적 발전을 이뤄 대물림되는 사슬을 끊고, 자신과 자기 공동체의 삶을 해방할 수 있는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먼저 학생들에게 안정적인 학습 환경을 마련하고, 체감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줄여주는 것이 목표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살레시오 수녀회와 협력해 라우라 비꾸냐 학교 빈곤층 학생들에게 급식과 학비를 지원한다.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급식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돈이 없어 학업을 지속하지 못하는 취약계층 학생 130명에게는 1년치 학비를 지원한다. 케냐에서는 케냐 카리타스와 협력해 이시올로주 3개 농촌 초등학교에 교실 증축, 교실 내 개인 사물함 및 의자 구비, 학생 90명의 교복 구입을 위한 자금을 지원한다. 탄자니아 이링가주에서는 살레시오회와 협력해 돈보스코 직업 기술 학교(DBYTC, Don Bosco Youth Training Centre)를 통해 지역 청년 대상 농업 기술 교육을 제공한다. 학교에서는 농업 기술뿐 아니라 인쇄, 재봉, 전기공학, 용접 등 기술 교육도 이뤄진다. 농업 및 기술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캄보디아 푸삿주에서는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와 협력해 ‘안나스쿨’ 교직원 급여, 학생들의 급식 및 간식 구입비, 예체능 교육비, 문화 체험 활동비, 도서 구입비 등을 지원한다. 안나스쿨은 수녀회가 2013년부터 지역 성당에서 아이들의 방과 후 제공하는 학교다. 그 부근 깜뽕루엉 수상마을 언어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위해 크메르어(캄보디아 국어)와 베트남어 수업이 진행된다. 도농 격차가 큰 스리랑카에서는 착한 목자 수녀회와 협력해 푸탈람구·라트나푸라구 차농장 및 해안 지역 소외계층 어린이들을 위해 안전하고 교육적인 가정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한다. 아이들에게는 학습 동기 부여 프로그램과 리더십 강화 활동을 제공, 학부모에게는 인식 개선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성 불평등으로 제약받는 우간다 여성들도 존엄하고 자유로운 삶의 실현할 수 있도록 센터의 도움을 받는다. 센터는 올해부터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와 협력해 오모로 지역 여성들에게 문해·기술·위생 교육을 지원한다. 더 많은 여성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수녀회가 운영하는 여성센터의 시설 확장 공사 자금도 지원한다. 지역 여성들은 이곳에서 아촐리어(부족어)를 배우고 재봉, 미용, 요리와 같은 실용적인 기술을 익혀 경제적 자립 기반을 마련한다. 센터는 탄자니아에서는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폭력이 만연하는 현지 상황을 고려해, 지역 주민과 아동 및 청소년의 ‘인식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알비노 인식 개선과 알비노 관련 미신의 타파가 핵심 목표다. 북동부 아루샤와 킬리만자로 지역에서는 아동 청소년들에게 알비노 인식 개선 교육을 펼치고, 정부 및 지역 행정 기관과 함께 ‘국제 알비노 인식 개선의 날’ 행사를 개최한다. 므완자주에서는 아프리카 선교회(Society of African Missions, SMA)와 협력해 주민 인식 개선뿐 아니라 알비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준다. 선교회가 설립한 알비노 보호 시설 ‘탕가 하우스’의 교육 장비 구입 및 기숙사 내부 시설 구축, 알비노 아동 및 청소년 교육과 정기 건강 검진·치료 등을 지원한다. 센터 실무자 김다해(아녜스)씨는 “우리는 생각하지 못한 수많은 어려움을 가진 아동 청소년이 지구촌에 많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들 가려진 청소년들 또한 인류의 희망이기에, 그들이 교육을 통해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기억해 달라”고 전했다.

2024-05-26

성모 신심의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 뜻’에 일치하는 것

교회의 공적 신심 가운데 하나인 성모 신심은 초대 교회 때부터 시작될 만큼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오래된 교회의 공경과 그 표현이다. 한국교회에서도 성모 신심은 다른 어느 신심보다도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미 교회 창설기에 형성돼 박해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심 생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순교 영성이나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잘못된 성모 신심과 교리에 대한 오해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치유나 기적적 현상에만 집착해서 성모 발현과 메시지만을 신앙생활의 전부로 착각하는 사례도 있다. 성모 성월을 마무리하며 올바른 성모 신심에 대해 알아본다. 성모 신심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은 이미 2세기부터 시작됐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활동 무대였던 로마의 카타콤바에 200년경 그려진 성모 마리아 그림이 남아있는데, 이런 모습에서 당시 성모 공경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4~5세기경 동방교회에서는 마리아의 축일이 제정돼 전례적 공경이 이뤄졌고 ‘천주의 모친’을 공적 신앙으로 선포한 431년 에페소 공의회의 결정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본격적으로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됐다. 보편교회가 함께 거행하는 축일, 일부 지방 또는 교구 내지 수도 단체에서만 거행하는 축일 등 여러 성모 축일이 있으나 공식적인 교회의 신심은 주로 미사 전례와 성무일도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성모 신심은 마리아가 성자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하느님 구원 신비에 특별하고 탁월하게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결합함을 인정하고 공경하는 행위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성령과 함께 받는 흠숭(adratio)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인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에서 마리아의 구세사적 위치를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 안에서, 인간적이면서도 신학적인 측면에서 재조명하고 재확인했으며, 마리아는 결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임을 명시했다. 이를 비롯해 현대 교황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마리아 공경이 성서적·사목적 및 교회 일치의 관점에서 정립되고 신심 행위에 있어 개인 선택에 많은 융통성을 가질 수 있지만 성모 신심은 전례적이며 전통적이어야 함이 명시된다. 그릇된 신심 하느님보다 마리아를 더욱 미화 사적계시를 거짓 과장해 성역화 교회 가르침 위배되는 활동 강요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위원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가 펴낸 「올바른 성모 신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마리아 공경을 거부하는 프로테스탄트의 ‘반마리아주의’와 성모 마리아를 마치 하느님보다 더 자비하고 능력이 있는 여신처럼 간주하려는 ‘마리아 숭배'가 문제 되고 있다. 또 교회가 승인하지도 않은 사적 계시를 받았다고 선전하면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혼선을 가져오는 사례가 있다. ‘상주의 사적 계시를 중심으로 한 성모 신심’, ‘나주의 기적이나 사적 계시를 성역화하는 성모 신심’, ‘베이사이드의 성모 신심’ 등은 대표적인 빗나간 성모 신심들이다. 이외에도 ‘가계(家系) 치유를 위한 기도’ 모임 등 유사 영성에 기초한 신심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기도 모임은 그릇된 성모 공경 모임들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지난 2022년 2월 청주교구에서 교구장 명의 공문을 통해 잘못된 신심 행위를 조장하는 단체 및 기도 모임 활동에 대한 주의가 당부됐다. 이 단체가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성모 신심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 확인되면서 나온 것이었다. 교구는 교회가 인정하지 않은 성모 발현과 그 메시지를 따르는 이 단체가 올바른 성모 신심에서 벗어나 있고 한국교회가 인준하지 않은 단체임을 파악하고 활동과 모임을 불허했다. 「올바른 성모 신심」에서는 “이런 모임의 피해 사례 조사에 따르면 치유를 빙자한 헌금 강요는 물론 건전한 신앙과 영성 생활에 큰 피해를 끼치고 있다”며 “이같은 피해는 많은 신자들이 가시적 은총, 체험 등에 현혹된 까닭”이라고 진단한다. 올바른 신심 참된 신앙과 덕행 본받을 대상 구원사적 위치와 노력 인정하면서 성자의 어머니로서 공경심 표현 결론적으로 성모 신심은 모든 성인 성녀 위에 높임을 받아야 할 특별한 것이지만 성삼위께서 받으시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모 신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지향할 때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스테파노) 신부는 「양승국 신부의 성모님 이야기」를 통해 신앙인들이 올바른 성모 신심을 실천하기 위해 유념해야 할 요소들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성모 신심이란 ▲성모님이 지닌 존엄성이 그분의 구원사적 위치와 직능에서 나옴을 인정하고 공경하는 행위 ▲성모님의 모성적이고 모후적인 전구를 청하며 기원하는 것 ▲성모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는 봉헌과 성모님의 덕행을 본받는 모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양 신부는 “교회 가르침에 근거할 때 모든 신심은 본질상 성경과 전통에 근거하고 전례와 결부돼야 한다”며 “신앙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모든 신심이나 경솔한 태도나 감상에 이끌림과 신기한 것에 대한 지나친 탐구나 수용하기 힘든 전설적 요소들은 배제할 것이 강조된다”고 밝혔다. 성모 신심의 궁극적 목적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며 하느님 뜻에 일치하도록 이끄는 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모 공경에 대해 “거짓 과장이나 협소한 마음을 삼가도록 권고하면서 전통적인 성모 신심과 관습을 중시하며 적극적으로 전례적 공경을 드리도록” 역설한다. “진정한 신심은 쓸모없고 일시적인 감정이나 허황한 맹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된 신앙에서 나온다는 것을 신자들은 명심하여야 한다. 참된 신앙으로 우리는 천주 성모의 탁월함을 인정할 수 있고, 또 우리 어머니에 대한 자녀다운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그분의 덕행을 본받을 수 있다.”(「교회헌장」 67항) 교회에서 널리 행해지고 보급된 신심들로는 ‘묵주기도’와 ‘스카풀라’(scapulare), ‘기적의 메달’, ‘성모 칠고의 로사리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 등이 있다. 묵주기도는 마리아 신심을 가장 잘 나타내는 기도다. 교회는 루르드, 파티마, 보랭의 성모 발현에서 묵주기도가 특별히 권장됐음을 인정하고 있다. 스카풀라와 기적의 메달은 준성사에 속한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파티마의 성모 발현으로 널리 전파됐다. ‘레지오 마리애’와 ‘성모회’, ‘성모 성심회’ 등은 대표적으로 널리 보급된 성모 신심 관련 조직 기구다.

2024-05-26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히로시마 상념(상)

한국과 일본 주교단은 1996년 이후 공통의 역사 인식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거의 해마다 각 교구를 방문하며 상대국 문화와 교회 사목 현황에 대한 이해를 심화해 왔다. 한국 주교단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옛날부터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도 있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를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기념관도 몇 차례 관람했다. 두 도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탄에 모든 생명체와 건축물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비극의 현장이다. 1945년 8월 6일 10만여 명의 히로시마 시민들이, 8월 9일에는 7만여 명의 나가사키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피폭 생존자들의 증언도 듣고 원폭 투하의 결과가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참극을 불러온 것인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히로시마 시민들은 참극을 직접 온몸으로 겪은 당사자나 그 후손들로서, 핵폭탄의 공포와 고통을 절감한 사람들이었다. 1945년 日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경험한 세계 유일의 도시 모든 생명과 건축물 잿더미 되고 각각 10만과 7만 시민 목숨 잃어 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폭을 경험한 세대로 인류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 전할 소명이 있음을 확신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히로시마 시민들이 평화의 소중함을 절감하고 세계에 평화를 호소하는 심정은 수긍하면서도 ‘왜 자신들이 입은 피해만 생각하고 아시아 대륙의 수많은 시민에게 일본이 입힌 가해 책임에 대한 성찰과 사죄는 못 하는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전쟁 중 히로시마에는 아시아 대륙을 향한 전쟁의 전초기지와 군부대가 있었고, 나가사키에는 무기와 군함을 건조하는 항만 시설들이 있었다. 미군에게는 당연히 이 두 도시가 다른 어느 지역보다 폭격의 최우선 대상이었다. 나는 히로시마 시민들 안에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먼저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을 시작한 근원적 책임 의식과 회심이 느껴지지 않아 마음에 안타까움과 서운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최근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씨가 쓴 「히로시마 노트」라는 저서를 읽으며 히로시마 시민들의 원폭 피폭에 대해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됐다. 어찌 보면 그 전의 나의 히로시마 인식은 주로 원폭이 폭발한 당일과 며칠간에 국한되어 있었다. 요즘 우크라이나에서, 또는 가자 지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있는가를 각종 보도에서 보고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히로시마 노트」를 읽고 난 다음 나는 그동안 핵폭발이 가져온 참상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접하고 있었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오에씨의 「히로시마 노트」는 1965년 4월에 쓰였다. 원폭이 폭발한 지 20년이 지난 다음이다. 오에씨 본인은 히로시마에서 거리가 먼 에히메현에서 태어난 타지역 사람으로, 히로시마 시민들의 피폭에 대해서는 평소 그다지 실감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히로시마 시민들을 만나고 히로시마를 몇 차례 방문하면서 피폭 히로시마 시민들, 바로 죽지 않고 생존한 피폭자들이 20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겪어간 고통과 죽음, 절망과 침묵을 들여다보며 엄청난 충격과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이 책을 남긴 것 같다. 오에씨는 1994년 노벨문학상을 탄 문인이고 많은 소설을 남겼지만, 그가 쓴 이 「히로시마 노트」는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히로시마를 여러 차례 찾고 피폭자들을 만난 후 기록한 현장 보고서에 가깝다. 세상은 큰 사고나 재앙 발생하면 규모와 사상자 수에 관심 많지만 평생 그날의 공포 안고 살아가는 사고 당사자와 후손 삶 생각해야 보통 큰 사고나 재앙이 터지면 언론은 사고 규모와 사상자 수를 먼저 알린다. 희생자 수가 많을수록 세상은 큰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 기억에는 수치들만 남는다. 그러나 피해를 겪은 당사자들에게는 피해에서 오는 신체적 고통과 트라우마로 시간이 멈추고 인생이 격변하고 세상이 뒤집히는 현재가 지속된다. 제주 4·3사건 관련 유가족, 세월호 유가족, 10·29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에게 시간이 멈추듯이 히로시마 피폭자들에게도 원폭 폭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런 현재가 이어지고 있다. 보통 우리가 히로시마 핵폭발을 거론할 때, 폭발 직후 사망자가 10만여 명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부상자도 10만이 넘었다는 사실은 잘 의식하지 못한다. 피폭 당시 히로시마 시내에는 298명의 의사가 있었으나 건강한 상태로 구조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의사는 28명, 치과 의사 20명, 약사 28명, 간호사 130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의료진 자신들도 환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불안과 무력감에 휩싸여 피폭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히로시마 의사회 원로 마쓰자카 요시마사(松坂義正)씨는 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는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상당한 시민을 구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을 채찍질해 가며 아들 등에 업혀서 다시 히가시 경찰서 앞으로 되돌아갔다. … 구조라고는 해도 보관하고 있던 자재가 모두 불타고 경찰서에는 기름과 머큐로크롬밖에 없어 모여드는 부상자들에게 화상에는 기름, 상처에는 머큐로크롬을 발라 줄 수밖에 없었다.” 히로시마의 의료인들은 한 번도 배운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원폭증에 속수무책이었다. 많은 부상자가 피폭으로 화상을 입고 피부가 켈로이드 상태로 녹아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환자들은 전신 피로, 식욕부진, 탈모, 심한 가려움증, 검붉은 피부발진, 궤양 증세를 경험하다 결국은 서서히 죽어갔다.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2024-05-26

[몽골 조르고 마렌고 추기경 인터뷰] “김성현 신부님의 삶은 몽골의 많은 이에게 빛이 되고 있습니다”

[몽골 민경화 기자] 몽골에 가톨릭교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992년이다. 원죄 없으신 성모 성심 수도회(CICM) 선교사 로버트 신부와 웬체슬라오 파딜랴 신부, 길버트 신부가 울란바토르 시내의 한 호텔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며 몽골 선교의 시작을 알렸다. 첫해 20명의 몽골인 영세자가 나왔지만, 국민의 50% 이상이 라마교를 믿는 몽골에서 가톨릭이 자리를 잡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350만 인구 중 가톨릭신자는 1400여 명.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 수는 이보다 적지만 몽골 울란바토르지목구장 조르고 마렌고(Giorgio Marengo) 추기경은 “몽골교회는 귀중한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몽골 신자들의 헌신적인 믿음을 이끌어 낸 선교사로 고(故) 김성현(스테파노) 신부를 지목했다. 척박한 땅에서 선교 사명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두 성직자가 그린 몽골교회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 급격한 사회변화 속 몽골에 남은 작은 양떼 사회주의국가였던 몽골은 1992년 자본주의를 도입하면서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었다. 유목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물든 젊은이들은 전통과 문화를 잃어갔다. 자본주의의 토대가 없었던 상황에서 생긴 급격한 변화는 부의 공평한 분배를 막았다. 뒤틀린 자본주의는 가난한 이들의 숨통을 조였고 몽골 국민 3분의 1은 빈곤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교회가 몽골에 선교의 씨앗을 뿌린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가난한 이들과 복음 안에서 동행하기 위해서다. 1991년 교황청이 몽골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뒤 2002년 울란바토르지목구가 설정되면서 적극적인 복음화 활동을 펼쳤다. 2016년 첫 몽골인 사제가 탄생했고 2021년 대전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은 산자 자브 신부는 현재 몽골 울란바토르의 성 베드로와 바오로 주교좌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김성현 신부가 몽골에 뿌린 복음의 씨앗은 산자 신부라는 값진 열매를 맺고 몽골교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조르고 마렌고 추기경은 2003년 몽골에 도착했다. 동양문화가 익숙하지 않았을 29살 젊은 사제에게 몽골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을까? “1990년대 초반 정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몽골인들은 사회 전반의 변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당시에도 혼란스러운 상황은 계속됐죠. 혼란스러운 가운데 있었던 교회는 아주 작은 양 떼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헌신적이면서 열정적으로 믿음을 이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몽골교회 믿음이 가진 힘이 보편교회에 귀중한 선물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적으로 척박한 가운데서도 열정과 기쁨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는 몽골 신자들은 이방인 사제에게 “복음 선포를 향한 신선한 열정”을 선물했다. 그리고 몽골 선교 여정에 동행하고 있는 한국인 사제들, 특히 김성현 신부는 마렌고 추기경에게 각별한 존재로 남았다. 신자 극소수 몽골에서 복음화에 대한 새로운 답 찾으려 노력한 참 사제 공동체 안정 후 신자 없는 초원으로 다시금 뛰어든 헌신 배워야 “선교는 가난 속에서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전 말씀 가슴에 새겨 ■ 복음을 산 목자, 몽골 교회에 빛이 되다 마렌고 추기경보다 3년 먼저 몽골에서 선교하고 있었던 김성현 신부는 몽골인들 삶 속에서 복음을 실천하며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었다. “몽골 사람들은 상대가 진심인지 아닌지 아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김성현 신부님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온 것은 그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겠죠. 제가 처음 본 김성현 신부는 복음에 헌신하고 복음을 따르는 삶을 산 사제였습니다.” 4년간 애써서 항올 성모승천성당을 건축한 김성현 신부는 도심에서 200km가량 떨어진 초원 지역인 에르덴산트로 보내달라고 당시 지목구장에게 청했다. 안정적인 공동체가 꾸려진 상황에서 신자가 없는 초원으로 가겠다는 김 신부의 결정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김 신부님은 몽골의 형제자매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가려고 결정한 것이죠. 에르덴산트에서 김 신부님을 만나 나눈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선교는 가난 속에서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우리가 어떻게 몽골 신자들이 삶 속에서 신앙을 표현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는지 논의를 한 경험은 참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김 신부님은 이미 알거나 도착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항상 현실에 도전하면서 복음화에 대한 새로운 답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보다 그들 안으로 들어가 복음적인 삶을 살았던 김 신부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그의 선교사로서의 역량을 눈여겨본 마렌고 추기경은 지목구장이 된 뒤 2020년 김 신부를 총대리로 임명했다. “선교 사제에게 중요한 요소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진정한 증인이라는 진정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성현 신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가슴 아프지만 그가 보여준 위대한 증언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오늘도 몽골의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 조르조 마렌고 추기경은 이탈리아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 출신이다. 1974년 태어나 2001년 사제품을 받았다. 2006년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선교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03년부터 몽골 선교를 시작했다.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 아시아지역 참사 겸 몽골 지부장, 몽골 아르바이헤르 자비의 모후본당 주임으로 활동했고 2020년 몽골 울란바토르지목구 제2대 지목구장에 임명됐다. 2022년에는 몽골교회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지목구는 선교지에 설립되는 지역교회 조직으로 교계 조직의 첫 단계다. 19세기 중반 생겨난 형태로, 독립된 교구와 달리 그 지역 선교를 맡은 선교회 또는 수도회의 일원에게 교황의 이름으로 지목구를 통치할 대리직권이 맡겨진다. 지목구장은 교구장 주교와 법률상 동등시되며, 주교좌 대신 준주교좌(Pro-cathedra)를 갖는다.

2024-05-26

따뜻한 밥 한 그릇…"마음의 허기도 채웠으면"

인보 성체 수도회(총봉사자 한미란 사비나 수녀) 서울 인보의 집(원장 홍미라 루치아 수녀)은 2022년부터 서울 신림동과 수유동에서 화·금요일 저녁 6시~9시까지 청소년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무료 밥차를 운영 중이다. 고시원이나 원룸이 많은 신림동 밥차에는 취업준비생들이, 오락 시설이 많은 수유동 밥차에는 주로 학교 밖, 가정 밖 청소년들이 밥차를 찾는다. 청소년 주일을 맞아 오늘도 트럭을 모는 홍미라 수녀와 백남실(모니카) 수녀를 찾았다. 2022년부터 무료로 운영하며 취업준비생·학교 밖 청소년 등 돌봄 필요한 계층에 식사 제공 “끊임없이 기다리며 사랑 전해요” ■ 대화가 싹트는 곳, 밥상 “저도 수녀님처럼 남에게 베풀고 싶어요. 본받고 싶습니다.” 성 마티아 사도 축일인 5월 14일. 이날 가장 먼저 밥차를 찾은 민희(22·가명)씨는 벌써 2년째 알고 지내는 수녀들과 편안한 대화를 나누며 30분 넘게 밥을 먹었다. “네가 정말 최선을 다할 것 같으면 학원비도 대줄 수 있어.” 이런저런 이야기 중 생계에 대한 화제로 넘어가자, 수녀들은 민희씨의 미래를 걱정하며 말을 건넸다. 민희씨는 항상 선의로 대해주는 수녀들에게 감동받는다며 음식들을 한가득 싸서 돌아갔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찾는 밥차 메뉴는 토스트를 기본으로 매일 바뀐다. 오늘은 돈가스와 웨지감자, 오므라이스와 군만두다. 평소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는 불고기덮밥, 김치볶음밥, 오징어덮밥, 해물찜 등이다. 특별식으로 여름 중엔 한 번씩 철판에 삼겹살이나 목살을 구워주고 겨울에는 떡볶이에 어묵을 준비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선호하는 메뉴를 준비하다 보니 늘 잘 먹는 모습을 보게 돼 보람이 있다. 하지만 단골 아이들이 한 번에 3인분씩 먹는 모습을 보면 예쁘고 기분 좋은 한편, 마음이 아프다.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의 돌봄을 충분히 받는 요즘 청소년들은 아무리 성장기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안 먹는데, 거리의 아이들은 마음의 허기가 합쳐져 그런 것 같아 더욱 안타깝다. “중2짜리 여자애가 어느 날 와서 낙태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수녀님이 미혼모 시설 연결해 줄 수 있으니 다음에 이런 일 있으면 말해’라고 해줬죠.” 밥 먹으러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편하게 하다 보니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 어려움 중에도 힘이 나는 이유 ‘돈이 없어서 어떡하지, 이러다 거덜 나겠다’고 생각할 때면, 하느님께서는 미리 알고 채워주신다. 쌀이 떨어졌다 싶으면 다음 날 신기하게도 쌀이 들어온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다 채워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너희는 그냥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밥차를 후원해 주시는 분들이 다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초수급자도 소액 후원을 해주고 있고, 폐지를 주워 판 돈을 보내 주는 사람도 있다. 어려움은 체력이다.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고 정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밥차의 특성상, 조리를 하면서 크고 작은 화상과 상처는 부지기수다. 큰 트럭을 운전하다 보니 사고가 나기도 하는데, 한 번은 뺑소니를 치고 도망가는 운전자를 붙잡은 적도 있다. 갑자기 지나거던 행인 한 명이 수녀들에게 음료수 두 캔을 쓰윽 내밀고는 웃으며 지나갔다. 음료를 받은 홍 수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런 분들이 간혹 있으세요. 덕분에 힘이 나죠.” ■ 신뢰감이 형성될 때의 기쁨 홍 수녀는 한 번씩 식재료를 빠뜨리고 올 때도 있다. 한 번은 재료를 직접 사러 가는 대신 진수(19·가명)군에게 수녀원 법인 카드를 주며 “여기에 집도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은데 수녀님이 진수 믿고 줄 테니까 계란 한 판만 사다주렴”이라며 카드를 건넸다. 처음 진수는 알록달록한 머리에 거친 아이였다. 하지만 꼬박꼬박 밥을 먹으러 오면서 홍 수녀와 진수 사이에 신뢰감이 형성됐고, 카드를 선뜻 내주고 계란을 부탁할 정도로 믿게 됐다. 진수의 팔에 있는 자해 흔적은 홍 수녀에게도 아픈 상처다. 지금은 잘 오지 않지만 홍 수녀의 부탁으로 생존 확인은 가끔 해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오늘 밥차를 찾은 정운(30·가명)씨는 수녀들이 꽉꽉 담아준 오므라이스며 돈가스 등을 챙기며 연신 감사하다고 했다. “저는 기초수급 청년이라서 수녀님들 밥차 덕분에 살아갈 수가 있을 정도예요. 지금 생활이 너무 어려운데 정말 감사해요.” 기본 메뉴 외에도 유명한 제빵사의 빵이라며 두세 개씩 챙겨주는 수녀들의 손은 바빴다. ■ 여러 기관과 연계하며 자리잡아 “안녕하세요 수녀님, 여기 경찰 될 친구인데 잠깐 같이 일하게 돼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밥차를 찾아온 거리상담 전문요원들이 수녀들과 반갑게 인사했다. 2~3분 잠깐 나눴지만 함께 고민한 내용은 모두 보호받지 못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에 대한 것이었다. 5월 31일 신림역에서 연합 거리상담을 진행한다는 정보도 공유했다. 홍 수녀는 오늘 방문한 담당자와 연계됐던 한 아이가 시골로 내려간다며 연락 두절이 됐다는 제보도 했다. “한 아이에 대해서도 서로 역할이 달라 서울 A지T(담당 은성제 요셉 신부)라든가 서울시 청소년 이동쉼터, 거리상담 등 여러 지역 단체와 연계해 정보를 공유하면서 진행하고 있어요.” 처음엔 밥만 해주려 했다. 그런데 사회복지사로 일했던 홍 수녀 눈에 아이들의 여러 사정들이 안 보일 리가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일상에도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2022년 시작한 밥차는 자리 잡는 데 3년은 걸릴 것 같았지만 아이들의 입소문과 여러 단체들과의 연계로 1년 만에 어느 정도 터를 잡았고 이제는 3년 차가 됐다. ■ 아이들 곁에서 묵묵히 기다림 특히 마음을 열기 어려운 청소년 사목, 이에 대한 어려움을 홍 수녀는 서정주(1915~2000)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로 대신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힘들지만 아이들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시간, 성모님처럼 바라보고 묵묵히 기다리는 시간을 뜻하는 것 같아요.” 2년 넘게 통성명도 안 한 채 마음을 닫고 있다는 이들부터 검정고시를 통과하거나 취업에 성공해 인사 온 이들까지. 수녀들은 이 모두를 품어주며 그저 밥 먹고 가라고 토닥인다. ※ 문의: 02-793-9178 서울 인보의 집

2024-05-26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오광섭 작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탈렌트 어릴 때부터 미술 시간이 제일 즐거웠어요. 무언가 만들고 표현하는 게 좋았어요. 나이를 더 먹고 대학교 진학을 선택할 때까지도 제일 자신 있는 부분이 미술이었어요. 아마도 제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아버지께서는 일반 회사를 다니셨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시고 참 잘 그리셨어요. 제 미술 숙제도 많이 대신 해주셨죠. 특히 밀린 방학숙제는 아버지께서 다 해주셨어요. 그렇게 대학을 조소과에 입학했어요. 대학 생활은 조형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새로운 것을 찾았던 저의 목마름은 해결해 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더 큰 세계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르게 됐어요. 이탈리아에서 작가들의 스튜디오와 주물공장, 돌공장을 두루 찾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했어요. 특히 한 주물공장에서 밀랍 주조법을 배웠어요. 보통 작품은 점토로 작품을 만들고 이후 틀을 만들어 구리 물이나 쇳물로 주조를 해요. 그런데, 밀랍 주조법은 점토보다 더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었어요. 붙였다 떼어내고, 자르고 지지고, 가늘게 혹은 굵게 마음대로 세세한 표현까지 가능한 밀랍 주조법에 매료됐죠. 조형에 대한 무한한 승부욕을 가졌던 그 시절 나에게 돌파구를 찾아준 참말로 고마운 재료였어요. 나의 교만함을 깨우쳐 주신 주님 대학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종교가 없었어요. 그런데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형수님께서 저희 집안에 시집을 오셨어요. 이후로 어머니를 시작으로 가족들이 다 세례를 받았어요. 저는 이탈리아 유학 시절에 세례를 받게 됐어요. 아내와 함께 유학길에 올랐는데, 로마 공항에서부터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당시 공항에서 페루자로 가야 했는데, 말도 안 통하고요. 현지에 사시던 한국 분의 도움을 받았는데, 고광호(안드레아) 선생님이라고 그곳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여행 가이드를 하던 분이었어요. 그리고 이분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학하시던 신부님들을 알게 됐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아시아 선교 활성화를 위해 아시아 신자들에게 직접 세례를 주셨는데, 우연찮게 제가 선정돼서 속성으로 예비 신자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았어요. 교황님께 세례를 받다니 참 영광이었죠. 귀국해서는 나름 독자적인 작업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요. 가톨릭미술가회에서 활동하지도 않고 저만이 순수미술 작품활동 했어요. 혼자서 개인 작업을 하고 작품 발표도 주로 개인전으로 하고요. 국전이나 이런 데에도 출품하지 않았어요. 이름도 좀 알리게 되니 자만했던 거죠. ‘내 작품을 보고 싶으면 개인전으로 와라’ 식으로요. 이런 사회적 성공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교회미술 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1995년 서울 석촌동본당의 주임이었던 김승구(마르티노) 신부님이 본당 성모상 제작을 의뢰하셨어요. 처음 성미술 작품을 하는 거라 여기저기 성모상들을 알아보는데,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외국인의 모습에 팔등신의 모습인 거에요. 그래서 저는 한국인의 얼굴에 6등신 정도의 도안을 만들어 신부님께 보여드렸어요. 신부님께서는 깜짝 놀라시더니 ‘그냥 놓고 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러고는 며칠 뒤에 ‘해보자’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성모상을 만들어 봉헌했는데, 나중에는 그 성모상이 없어졌더라고요. 신자들의 정서에 맞지 않았던 거죠. 그 이후로 성미술은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작품이 아니라 신자들과 교감이 되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느님께서 저의 교만함을 꾸짖으신 거였죠. 다양한 성미술 작품 나와야 이후로 서울 논현2동성당 성당 입구 청동문과 십자가의 길을 의뢰받아 제작했어요. 당시 주임신부이셨던 한영석(라우렌시오) 신부님은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하신가를 청동문에 담고자 하셨어요. 제대 뒤에는 ‘자비의 하느님’ 성화가 모셔져 있었지요. 그 콘셉트에 따라 1층 현관에 ‘돌아온 탕자’, 2층 성전에 ‘간음한 여인’ 청동문을 세우게 되었죠. 십자가의 길은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해 감동이 일도록 노력했어요. 서울 아현동성당 천장 조명 프로젝트를 의뢰받았을 때인데요. 아현동성당은 팔방형으로 지어졌고, 성당 지붕이 꽤 높았어요. 생각해 낸 것이 묵주 콘셉트였어요. 조명을 묵주알처럼 만들고 제대의 십자고상을 묵주의 십자가에 연결시켰죠. 그런데 알고 보니, 아현동성당 주보성인이 묵주기도의 성모였어요. 나중에 알고 정말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성미술 활동은 그 이후로도 꾸준히 이어졌어요. 서울 종로성당 리노베이션을 감독했고,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에서는 야외 십자가의 길과 예수성심상을 제작했어요. 최근에는 서울 화양동성당에 예수승천상과 십자가의 길, 제단 등을 봉헌했어요. 요즈음 성미술 작품을 보면 예전보다는 훨씬 좋아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외국 작품들을 답습하려는 작가들이 보이기도 해요. 성미술의 주제나 소재같은 것들이 한정돼 있기도 하고요. 우리는 보통 성미술이라고 하면 성모상이나 십자가상, 예수성심상 등이 대부분이죠. 그런데 외국의 성당을 보면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다양한 작품들이 있잖아요. 우리도 이런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그리고 성당을 계획할 단계에서부터 성미술 작품도 함께 고려하면 좋겠어요. 성물이 들어감으로써 성당이 더 풍요로워져야 해요. 일단 건물을 다 지어놓고 십자가의 길이나 제단, 십자고상을 끼워맞추듯 하는 일은 지양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작가들도 성물은 신자들을 신앙으로 채워줄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는 신앙인의 마음으로 작품 활동에 나섰으면 좋겠어요. ◆ 오광섭(다미아노) 작가는 1955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82년 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1985년 카라라 미술아카데미 조소과를 졸업했다. 1982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2019년 성미술 작품전까지 9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밀랍 주조기법을 통한 섬세한 조각 표현으로 독자적인 작품을 내놓고 있으며, 서울 논현2동성당 청동문, 서울 아현동성당 묵주 조명등,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 예수성심상 및 예수부활상, 서울 화양동성당 예수승천상 등을 제작했다.

2024-05-26

124위 복자 기념일은 왜 5월 29일일까

오는 5월 29일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기념일이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례한 시복식을 통해 124명의 복자가 탄생했다. 박해 시기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형을 집행하던 관청이 밀집해 있던 광화문에서 시복식이 거행됐다는 것도 의미가 크지만, 교황청이 아닌 지역교회에서 거행된 시복식을 교황이 직접 주례했다는 사실 또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124위 복자 시복 예식서(Ritus beatificationis)를 보면, 당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가 교황에게 “한국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 위원장 주교는 가경자 하느님의 종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반열에 올려 주시기를 겸손되이 청원합니다”라고 요청하자 교황이 “본인의 사도 권위로, 가경자 하느님의 종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을 앞으로 복자라 부르고, 법으로 정한 장소와 방식에 따라 해마다 5월 29일에 그분의 축일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라고 답한다. 시복식을 통해 복자 124위 기념일이 5월 29일로 공식 선포되는 순간이다. 순교자 기념일은 보통 순교일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124위 복자 중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1759~1791)이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12월 8일이 124위 복자 기념일로 논의됐다. 하지만 12월 8일은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점을 감안해 한국 주교단은 다른 날을 선택했다. 한국 주교단은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이 전주교구 순교자인 점을 고려해 전주 숲정이성지(전라북도 기념물 제71호)에서 이일언(욥), 신태보(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정태봉(바오로), 김대권(베드로) 등 5위가 1839년 기해박해 중 순교한 날짜인 5월 29일을 124위 복자 기념일로 정해 교황청의 허락을 받았다. 2015년 5월 29일 안명옥 주교는 담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첫 기념일을 맞이하여’를 발표하고 124위 복자들에게 전구해 구체적인 기적 한 건이 증명되면 시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그분들의 시성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안 주교는 한국교회가 124위 복자 기념일을 지키는 이유는 시복은 시성으로 가는 전 단계이지 종착점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은 9월 20일이다. 본래 103위 성인 시성 이전에는 9월 26일을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로 지내고 있었지만, 한국 주교단은 1984년 103위 성인이 탄생함에 따라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없애고 9월 20일을 103위 성인 대축일로 지내기로 결정했다. 9월 복자 성월은 순교자 성월로 변경했다.

202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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