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메시아의 승리(묵시 12,5-12)

여인이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사내아이였고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리실 분이다. 그러나 아이의 탄생은 용의 저항과 함께 서술된다. 용은 사내아이를 삼키려 했다. ‘삼키다’로 번역된 ‘카테스티오’(κατεσθίω)는 완전히 먹어 치워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 파멸에 가까운 뜻을 지닌다. 한쪽은 생명의 시작을, 다른 한쪽은 생명의 파괴를 말하고 있는 서사의 대립은 하늘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진다. 사내아이는 하늘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다. 사내아이의 승천을 두고 메시아의 승리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내아이의 운명에 대해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린다는 시편 2장 9절의 내용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내아이를 예수님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프랑스 성서신학자인 A. 프이에(A. Feuillet) 신부는 사내아이의 탄생을 부활의 아침으로, 여인이 겪는 산고의 고통을 예수님의 수난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전통적 해석은 요한복음을 통해서도 강조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여인의 산고와 아이의 출생에 빗대어 말씀하신다.(요한 16,19-22 참조) 그럼에도 전통적 해석들은 한 가지 의문을 남긴다. 메시아가 하느님 백성 혹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관련된 존재라면 이 땅 위에서 펼쳐지는 메시아의 활동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 메시아라는 말마디 자체가 땅과 관련된 개념일진대, 메시아인 사내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곧장 하늘의 어좌로 들어 올려지고 만다. 메시아로서 이 지상을 쇠 지팡이로 다스리는 일은 예고되었으나 서술되지 않는다. 지상의 하느님 백성 안에 메시아의 역할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반면, 여인은 광야로 달아난다. 여인은 하느님 백성,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가리키는 형상이다. 하늘로 올라간 메시아와 달리 광야로 달아나는 하느님 백성을 우리는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메시아와 더불어 천상의 기쁨을 누려야 할 것 같은 상식적 바람은 광야라는 공간 앞에 허무하게 무너진다. 메시아 삼키려던 용 떨어지며 미카엘 천사와의 전쟁서 패배 속임수 안에서도 굴하지 않고 증언 통해 전지전능함 드러내 요한묵시록, 나아가 요한계 문헌의 전형적 특징은 대립적 공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광야를 두고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는 곳이 광야라고 선언한다. 여인은 천이백육십일 동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처소에서 보살핌을 받는다. 천이백육십일은 기원전 2세기 셀류코스 왕조의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누스가 유다를 박해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상징적 숫자다. 그 박해는 삼 년 반 동안 이어졌고, 삼 년 반의 시간은 마흔두 달로, 혹은 천이백육십일로 달리 표현된다. 박해의 시간과 광야의 공간은 서로 상응한다. 사실 광야는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노예와 죽음, 억압과 고통의 땅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복지로 걸어가는 필연의 공간이었다. 광야의 공간은 구원의 설렘을 담아낸 공간이었고 하느님을 체험한,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자리였다. 척박한 광야는 하느님의 자비로 가득 차게 되었다. 하느님의 백성, 메시아를 삼키려 했던 용은 어떻게 되었나. 사탄은 떨어졌다. ‘떨어졌다’라는 동사가 9절에 세 번이나 반복된다. 미카엘 천사와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인데, 미카엘은 하느님의 보호로 이스라엘을 지키는 천사로 구약은 소개한다.(다니 10,13.21; 12,1 참조) 욥기에 따르면 사탄 역시 하늘에 오르고 하늘의 어좌에 다가설 수 있었다. 사탄이라도 본디 자리는 하늘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사야의 승천’이라는 묵시문학 작품은 하느님의 어좌 곁에 있던 사탄은 끝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하늘 아래 어느 지역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전한다.(이사야의 승천 7,9 이하 참조) 사탄은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캐릭터로 해석되고 전해졌다. 요한묵시록 역시 하느님의 보호를 상징하는 미카엘 천사를 등장시켜 전쟁의 형식을 통해 사탄의 성격을 다시금 복기하고 있다. 사탄은 하느님의 자리와 그분의 보호를 막아서고 저항할 수 없다. 사실 용은 사내아이를 삼키려 했으나 삼키지 못했고 그러므로 용은 무력했다. 사내아이는 살아남아 메시아로서의 위용을 떨친다. 용의 저항은 실패했는데, 그 실패의 원인을 요한묵시록은 서술하지 않는다. 다만 사내아이를 삼키고자 하는 ‘원의’만을 언급할 뿐이다. 사탄은 옛날의 뱀이었다. 사탄을 그리스말로 바꾸면 ‘갈라지다’는 뜻을 지닌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이고 우리말로 ‘악마’라 한다. ‘세상을 속이는 것’이 사탄의 일이고 악마의 일이다. 그 옛날 뱀이 그랬다. 하와를 속여 아담을 속이게 했고, 그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를 요원한 것으로 갈라치고 말았다. 옛날의 뱀인 사탄은 그의 부하들과 함께 떨어져 땅이라는 공간을 제 근거지로 차지하고야 만다. 땅은 그리하여 속고 속이는 공간으로, 믿는 이를 고발하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늘과 땅은 그렇게 갈라지고 땅은 불행의 공간이 되어버린다.(묵시 12,12 참조) 그러나, 바로 이러한 땅은 믿는 이의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더불어 증언을 살아가야 할 공간이기도 하다. 메시아가 탄생하고,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는 이유는 이 땅 위에 믿는 이들의 증언이 펄펄 살아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속임수에도 굴하지 않고, 속임수 안에서도 진리와 신앙과 사랑을 증거할 형제들이 여전히 이 땅 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묵시 12,11 참조) 메시아는 믿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승리를 자축하신다. 어쩌면 하느님은 참으로 무력하시다. 우리 믿는 이들의 증언 외에 다른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실 수 없을 만큼 하느님은 무력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참으로 전지전능하시다. 당신의 그 무한한 권능으로 마음껏 호령할 수 있는 세상을,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가냘프고 소박한 증언의 방식으로 끝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실 만큼 전지전능하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20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하늘의 큰 표징(묵시 12,1-4)

묵시록 12장은 불쑥 튀어나온 느낌이다. 이를테면, 외길을 걷다 낯선 갈림길을 맞닥뜨린 것 같은 느낌말이다. 11장까지 일곱 나팔을 차례로 읽어 나가다가 갑자기 하늘에 큰 표징, 그러니까 여인과 용을 만나게 된다. 여인을 두고 이사야서 7장 14절의 말씀을 떠올리곤 한다. 이른바 임마누엘 신탁인데, 아시리아 제국의 침략으로 두려움에 떨던 유다 왕조의 앞길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예언자의 위로를 담고 있는 신탁이다. 유다 임금 아하즈는 아들을 갖게 될 것이며 그 아들 덕분에 유다 왕조는 멸망하지 않으니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라는 메시지도 신탁 안에 담겨 있다. 이 신탁은 후에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맞물려 하느님께서 이 세상 구원을 위해 직접 개입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었다. 예수님을 참된 메시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임마누엘 신탁을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접목하여 소개하기도 했다.(마태 1,23 참조) 학자들은 묵시록 12장의 큰 표징인 여인의 형상을 통해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다교회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여인은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쓰고 있다. 열두 지파를 가리키는 열두 개의 별 덕분에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전통적 형상으로 여인을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다. 여인이 아기를 배고 있는 장면은 하느님 백성 안에 메시아의 탄생이 임박했다는 전통적 예언의 한 형태다.(이사 66,7 참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은 메시아 시대가 오기 전 겪어야 할 시대의 아픔과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다.(이사 13,8; 호세 13,13; 마태 24 참조) 그러니까 묵시록 12장의 여인은 유다 사회가 간직한 메시아에 대한 믿음의 표현들로 치장되어 있다. 그러나 여인만이 큰 표징으로 소개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묵시록 12장 3절에 붉은 용이 또 다른 표징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용의 형상은 고대 근동 안에서 혼돈과 어둠을 가리키는 악의 세력을 암시한다. 구약성경 역시 용을 그렇게 이해했다.(욥 7,12; 아모 9,3; 이사 27,1 참조) 용은 붉은 색을 띈다. 묵시록 6장 4절에 나타난 붉은 말의 색과 같다. 전쟁과 살인의 색이 붉은 색이어서 용을 형용하는 색은 용의 살인적 폭력성을, 그의 악함을 더욱 짙게 드러낸다. 용은 일곱 머리를 지니는데, 악함의 또 다른 상징들, 그러니까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묵시 13,1 참조)과 대탕녀 바빌론이 타고 있는 짐승(묵시 17,3 참조) 역시 머리가 일곱이다. 일곱이라는 숫자의 보편성과 전체성을 감안하면 악의 힘 역시 강하고 위대하다는, 그래서 묵시록 5장의 어린양과 대적할 만큼의 힘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실 악의 힘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여인을 쫓아가기도 하고 그 여인을 휩쓸어 버리려고 했고, 여인의 후손들과 싸우려고 덤벼들고 있다. 악은 늘 우리 곁에 머물며, 우리와 싸우고자 한다. 악은 힘이 빠지지 않는다. 용은 열 개의 뿔도 가지고 있다. 묵시록 17장 12절은 열 개의 뿔을 열 임금으로 규정한다. 뿔의 형상은 그러므로 세상 임금의 다스림을 상징한다. 하늘의 큰 표징인 용이 땅의 다스림을 가리키는 열 개의 뿔을 지닌다는 건, 악에 대한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해석에 대한 하나의 경고와 같다. 악은 현실적이다.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안에서, 우리 인간의 삶과 생각 그리고 행동들 안에서 악함은 상존한다. 특별히 용의 일곱 머리에 씌워진 작은 ‘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은 임금의 것이고 그의 다스림을 상징한다.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을 암시하는 요소들이 용을 형용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은 세상의 위정자들, 특별히 로마제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에 대해 묵시록은 비판적이라는 것이다.(이와 관련해서는 묵시록 17, 18장 대탕녀 바빌론 이야기에서 충분히 설명할 것이다) 용은 천상의 사변적 형상이 아니라 이 땅 위 실제 권력을 비판하기 위한 소재다. 용은 그러므로 현실적이다. 지금도 용은 세상의 몇몇 위정자들과 정치 모리배들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용은 또한 꼬리를 가지고 있다.(묵시 12,4 참조)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던지는 데 용은 꼬리를 사용한다. 다니엘서 8장을 보면 셀레우코스 제국의 임금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를 가리키는 ‘작은 뿔’이 등장한다. 그 뿔은 하늘까지 다다라 거기서 별들을 떨어뜨린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유다를 박해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다. 유다인들은 그의 박해를 세상 종말의 징표로 보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분기하여 마카베오 항쟁을 이끌었다. 항쟁의 결과는 놀랍게도 유다 사회의 승리로 이어졌다. 물론 셀레우코스 제국은 이미 쇠퇴했고 로마 제국은 아직 유다 땅까지 세력을 펼치지 못했기에 힘의 진공 상태여서 가능한 승리였다. 유다 사회는 하스모네아 왕조를 이루었고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까지 100여 년 독립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용의 꼬리는 유다 사회가 겪은 역사의 아픔과 박해를 암시한다. 용의 꼬리는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역사의 아픔을 다룰 때 어김없이 되살아나 악의 세력을 규정하는 은유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묵시록 12장은 이제 본격적으로 악의 세력을 분해하고 분석하여 그 실체를 파헤치려 한다. 악은 저 멀리서 찾아오는 불청객이 아니라 여인, 곧 메시아를 품고 있는 하느님 백성 한 가운데 버젓이 등장하고 활약한다. 악을 식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향하는 길목에서가 아니라 악에 대한 정확한 해석의 자리에서 가능하다. 불편하지만, 악함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다뤄봐야 한다. 우리 삶 어디에 묵시록 12장의 용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지…. 우리는 물어야 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또다시 하늘(묵시 11,15-19)

일곱째 나팔이 울린다. 나팔이 울릴 때마다 펼쳐졌던 재앙과 환난의 끝은 일곱째 나팔로 사라진다. 일곱 봉인에서도 그랬다. 일곱째, 그 마지막 순간에 하늘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일곱째 나팔이 울릴 때, 하늘은 재앙을 걷어내고 희망과 영광을 드러낸다. 하늘의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한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님과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묵시 11,15) ‘세상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κόσμου)’라는 말마디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실 때, 사탄이 호령하는 나라가 세상 나라였다.(마태 4,8 참조) 묵시록에서도 세상을 호령하는 땅의 임금들은 예수님과 대척점에 서서 사탄에 부역하는 존재로 묘사된다.(묵시록 17~19장) 일곱째 나팔은 세상 나라와 예수님과의 대립 구도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에겐 두 세상의 갈등이나 대립은 남아 있지 않다. 앞서 펼쳐진 온갖 재앙들의 의미는 일곱째 나팔의 시간에서야 비로소 참된 의미를 지닌다. 어긋난 이들에 대한 단죄나 심판, 혹은 하느님을 따르지 않은 이들에 대한 복수, 그로 인한 숱한 재앙의 장면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맞춰 가기 위한 여러 개의 조각이었고 일곱째 나팔은 그 조각들 모두가 하늘을 수놓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셈이다. 우리 눈에 어긋나는 일과 부족한 삶에서조차도 그리스도의 나라는 여전히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깨끗하고 고와서 선하고 아름다운 일과 삶 안에만 신앙의 본령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미련 없이 포기하게 만든다. 스물네 원로의 경배는 이런 서사의 맥락을 더욱 견고히 한다.(묵시 11,14-18 참조)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 땅 위에 실현된다는 것. 학자들은 이러한 경배의 말마디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읽어낸다. 그러니까, 이러저러한 인간 세상의 불의와 슬픔과 고통이 지나가고 다만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득한 종말의 시간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완성’이라는 표현은 일련의 시간이 지난 뒤에 펼쳐지는 결과론적 선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스물네 원로는 하느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 하느님으로 인식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한결같이 ‘완성’의 시간을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태초부터 우리는 완성을 살고 있고, 마지막을 처음처럼 살아간다. 다만 우리는 지금을 완성으로 보지 않고 미래 어느 시간의 화려함을 완성으로 규정한 채 지금을 결핍의 시간으로 쉽게 규정하고 만다. 그로 인해, 지금은 늘 목마르고 배고프다. 스물네 원로가 말하는 하느님의 다스림은 부족한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완성의 자리임을 고백하는, ‘나 자신과의 화해’가 아닐까. 그러나 누군가에게 ‘지금’은 하느님의 심판의 때이기도 하다. 18절에 민족들이 분개하는 것은 하느님의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배타적 완고함을 가리킨다. 반면 하느님의 종 예언자와 성도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한다. 그들에겐 상이 주어질 것이다. 사도행전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이란 표현을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가리킬 때 사용했다.(사도 13,16.43.50 참조) 사도 바오로는 성도들이란 표현을 통해 우상 숭배에 결연히 저항하는 이들을 소개한다.(로마 15,26.31; 1코린 16,1.15 참조) 사도 바오로에게 우상 숭배는 제 신념과 신앙을 절대시하여 다른 이들에게 배타적인 이들의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예언자와 성도들은 어떤 고귀한 신앙적 가치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로 열려 있어 제 삶의 자리를 완고함과 배타심으로 분칠하지 않는, 그리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묻기보다,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희망·영광 드러낸 일곱째 나팔 미래 다른 곳 아닌 지금 이 땅에 하느님의 다스림 실현되는 것 우리 일상이 바로 완성의 자리 완고함과 배타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파멸로 향하게 된다.(묵시 11,18 참조) 파멸은 하느님을 맞서는 이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 안에 자주 등장했다.(예레 51,25 참조) 다만, 우리의 본문에서 파멸은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향한다.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파멸한다고 스물네 원로는 말하고 있다.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하늘을 향하고 하느님을 배척해서 파멸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을 파괴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은 땅을 하늘로 봐야만 가능한 생각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천상은 실은 이 지상을 회피하고픈 절망과 비겁함일 수도 있다.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현실의 삶을 죄악시하고, 그 삶을 비루하게 여기는 이들의 교만이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지만 우리는 저 하늘에 천사처럼 살고자 갈망하는 건 아닐까. 그 갈망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죽였다. 파멸에 대한 예고는 다만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계약 궤가 등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묵시 11,19 참조) 번개와 요란한 소리, 천둥과 지진들 역시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는 전통적 은유다. 땅을 파괴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은 또 다른 폭력이나 억압, 혹은 재앙이 아니라 하느님의 등장이라는 서사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강렬하다. 그러니까 심판은 결국 하느님을 또다시 소개하는 일이 된다. 하느님은 이렇게 인간 앞에 무력하다. 사랑이 가득한 분은 늘 그렇게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다시 땅 위의 완고한 이들에게 천상을 열어 보임으로써, 하느님은 다만 끝없는 사랑으로 남으실 뿐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죽어서 사는 일, 증언(묵시 11,7-14)

증언의 끝은 불행히도 죽음이다. 예수님을 증언하고 신앙을 살아가는 일의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지난한 신앙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신앙을 살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게 우리이지만 실은 세상에서 실패한 삶이 순교였고 증언이었다는 사실을 또한 인지하고 추앙하는 우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묵시록 11장의 두 증인의 죽음은 신앙의 결과가 참혹한 실패라는 ‘사실’에 대한 복기이자 해석이다. 두 증인의 죽음은 땅의 주민들을 기쁘게 하는 대상이 된다.(묵시 11,10 참조) 순교나 신앙의 증거는 세상 안에서의 실패나 참혹한 결과를 비껴가지 않는다. 두 증인은 정확히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죽음은 세상의 조소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담담히 읽어내야 한다. 그러나 이 죽음은 악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가 아니다. 묵시록 11장의 동사 시제를 살펴보면 그렇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싸워 이기는 대목에 사용된 동사는 미래형이다. 악의 승리는 여전히 요원하다. 우리는 묵시록 12장(1~8절)에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또한 만나게 된다.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권한이 주어진 짐승이지만 현실적인 전쟁이나 다툼은 묘사되지 않는다. 악의 존재는 서술하되, 그 권한이나 능력의 실행은 철저히 제한하는 묵시록의 서술 방식이다. 두 증인의 죽음을 가리키는 동사는 ‘현재형’이다. 두 증인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캐릭터는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 말하자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다. 다른 표현으론 ‘땅의 주민들’이기도 하다. 텍스트의 ‘지금’은 두 증인의 주검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해석(기뻐하고 즐거워하는)의 시간에 집중하고 있다. 악의 세력에 의한 두 증인의 실패가 아니라 두 증인의 주검에 대한 해석과 읽기가 우리 이야기의 현재다. 악의 세력은 두렵고 짐승의 힘은 대단한듯 하나 미래에 일어날, 그래서 지금은 공허하고 허무한 힘일 뿐이다. 지금의 시간은, 증언하는 일이 실은 죽는 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묻는 시간이다. 우리 이야기의 공간적 구성 역시 그러하다. 두 증인의 주검은 ‘큰 도성의 한 길’, ‘소돔과 고모라, 혹은 이집트’라고도 하는 도성에 버려져 있다.(묵시 11,8 참조) 이 도성을 해석하는 스펙트럼은 ‘영적인 눈’이다.(이 도성은 ‘영적으로(πνευματικῶς) 불린다’라고 본문은 말한다) 현실의 공간을 영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이미 사라진 저 옛날의 소돔과 고모라, 이집트까지 죄다 불러와 현실의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투사하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소돔과 고모라,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심판과 단죄의 공간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공간’이라는 서술을 덧붙인다. 악에 대한 심판의 공간 안에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것. 악함의 한가운데 두 증인의 주검이 있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자리라는 역설이 묵시록이 꾸며놓는 시·공간의 묘미다. 증인들의 주검은 주님이 함께하는 구원의 공간을 가리키는 지시체다. 묵시록 서사의 전형적 특징이 매번 이렇다. 선악의 완전한 구분을 이야기하는 얄팍한 이원론이 끼어들 틈이 없다. 두 증인의 주검을 바라보고 기뻐하던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은 묵시록 5장의 어린양이 속량한 사람들이기도 하다.(묵시 5,9 참조) 우리 모두는 선하기도 하고 동시에 악하기도 하다. 선악을 무 자르듯 딱 갈라놓고 생각할 수 있는 편리함은 이 세상에 애시당초 존재하는 게 아니다. 땅의 주민들이 두 증인의 주검을 두고 기뻐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두 증인이 선포한 예언의 말들이 그들을 괴롭혔기 때문이고 두 증인의 죽음으로 그 괴롭힘이 사라졌을 것이라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리라.(묵시 11,10 참조) 그러나 이 기쁨은 단지 사흘 반의 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묵시 11,11 참조) 마흔두 달, 천이백육십 일, 그리고 삼 년과 반 년의 시간들과 의미를 같이 하는 ‘사흘 반’의 시간은 완전 수 ‘7’이 반토막 난, 그리하여 미완의 시간으로 남는다. 땅의 주민들이 나누는 기쁨은 한시적일 뿐이다. 우리 이야기의 읽기는 한시적인 기쁨이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 세심히 살펴보는 데 있다. 악에 대한 심판의 공간에서 구원의 완성 이뤄지는 역설 ‘두 증인’ 죽었다가 살아나며 하느님 향한 끝없는 여정 증언 사흘 반이 지나고 두 증인은 제 발로 일어선다. 주검이 생명을 얻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주석학자들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재건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에제키엘서 37장의 ‘마른 뼈’를 떠올린다. 마른 뼈가 힘줄과 살이 붙어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부흥케 하리라는 희망을 노래한다. 묵시록 11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땅에서의 부흥이 아니라 구름을 타고 하늘까지 올라가는 두 증인의 모습을 기록하기 때문이다.(묵시 11,12 참조) 전통적인 주석학자들은 하늘을 오르는 두 증인이 구약의 엘리야와 모세라고 해석하기도 한다.(2열왕 2,11 참조)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베드로와 바오로라고 이해하는 전통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두 증인을 역사의 어느 인물로 고정할 필요가 있을까. 세상 모든 민족을 향해 예언의 말씀을 선포한 이들이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드리는 지표와 모범이 된 것이 역사 속 한두 명의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두 증인이 하늘로 오르는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 도성 십분의 일이 무너졌고 칠천 명의 사람이 죽었다.(묵시 11,13 참조)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천재지변과 땅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서술은 ‘남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회개의 문학적 장치다. 두 증인의 죽음으로 시작한 세상 사람들의 한시적 기쁨은 하느님을 향한 회개에로 향하고 있다.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 나아가 무수히 많은 불행과 고통과 비참함이 우리 생에 닥치더라도 신앙인은 그 자리를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여정의 한 대목으로 이해한다는 다소 투박하지만 여전히 필요한 이야기가 묵시록 11장이 전하는 두 증인의 이야기다. 증언의 끝은 세상에서 죽음으로 결판난다. 그러나 그 죽음은 비로소 생명의 가치를, 그 본령이신 하느님을 알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또 죽어간다, 살기 위해서!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예언의 힘(묵시 11,1-6)

요한묵시록 10장에서 예언자 소명을 받은 요한은 11장에 들어서면서 지팡이 같은 하나의 잣대를 받는다. 그 잣대로 성전과 제단,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이들의 수를 측량하라는 말씀을 요한은 듣는다. 에제키엘서(40~43장)에서도 성전을 측량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빌론에 유배간 유다 민족을 위해 이미 사라졌으나 여전히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성전을 이상적으로 소개하는 이야기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에제키엘서와 요한묵시록 11장을 함께 열거하면서 위로와 격려의 예언자적 소명을 짚어내곤 한다. 에제키엘이든 요한이든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의 보호로 굳건히 살아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게 예언자적 소명이라는 것이다. 성전이란 형상은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고 어렵고 힘든 시간,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위로와 희망이 성전을 측량하는 이야기 안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요한묵시록 11장은 에제키엘서의 성전 측량과 다르다. 측량의 수치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측량의 행위가 서로 다른 두 공간의 분리를 만들어낸다. 요한은 성전을 측량함으로써 성전 바깥뜰, 그러니까 이민족들의 공간을 분리해낸다.(묵시 11,2) 성전 바깥뜰의 이민족은 폭력적 캐릭터로 묘사된다. “그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묵시 11,2) 폭력과 분리된 듯 서술되어야 할 거룩한 도성은 더 이상 평온하지 않다. 불행히도 거룩한 공간이 폭력의 공간이 된다. 성전과 성전 바깥뜰로 구분된 두 공간은 폭력으로 점철된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요한묵시록의 공간적 배치는 늘 이렇다. 천상이 지상 속에 스며들고 지상이 천상의 공간으로 확대되며, 선과 악이 하나의 공간 안에 뒤엉켜 각각의 의미를 더욱 섬세히 살펴보게 독자를 이끈다. 세상의 일이란 게 이분법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논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의 경험칙에서 얻을 수 있는 평범한 지혜다. 요한묵시록은 거룩함을 지켜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폭력과 악의 세력 안으로 밀쳐 넣는다. 거룩함은 천상에서 홀로 빛나지 않는다. 성전은 홀로 거룩해서 세상을 등진 공간이 아니다. 세상 속, 그 어두움 속에서 성전은 반드시 세워지고 꾸며져야 한다. 이민족의 폭력은 마흔두 달이라는 시간으로 제한된다. 마흔두 달과 관련해서 요한묵시록은 1260일(묵시 12,6 참조)과 3년 그리고 반년(묵시 11,3; 12,14 참조)의 시간으로 다시 소개한다. 같은 시간을 다른 표현으로 곱씹는 이유와 관련해서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다니엘서 7장 25절이 암시하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임금(기원전 175~163년)의 박해 시절을 떠올린다. 역사의 한 사건은 그것이 폭력적이고 참담할수록 깊고 묵직한 슬픔과 상처를 남긴다. 기원전 2세기의 그 박해는 요한묵시록이 쓰인 기원후 1세기 말엽에까지 이어져 어렵고 힘든 모든 시절의 메타포로 작동한다. 마흔두 달은 거룩한 도성, 거룩한 백성이 살아내는 모든 시간들의 상처가 된다. 그럼에도 상처의 시간은 절망과 소외의 시간이 아니라 예언의 시간이어야 한다.(묵시 11,3) 두 올리브 나무와 두 등잔대로 상징화된 두 증인이 나타난다. 유다 전통에서 두 올리브는 이스라엘의 두 영웅, 그러니까 대사제 여호수아와 세상의 지도자 즈루빠벨을 암시한다.(즈카 4,1-14 참조)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아우르는 두 영웅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의 등장을 기다리는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묵시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종말론적 영웅으로 재해석되었다. 구원 상징하는 ‘두 증인’ 등장 박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 함께하신다는 위로 전달 강력한 하느님 권능 재확인 역사의 두 영웅은 구원과 희망의 상징으로 거듭났고 두 증인을 소개하는 요한묵시록은 폭력의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었을 터. 좌절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두 증인을 통해 희망을 견지하라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건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증인을 소개하는 서사는 역사 속 하느님의 권능을 배경으로 더욱 힘찬 형식을 빌어 진행된다. 희망은 분명하게 강력한 것이어야 한다는 다짐을 한 것 마냥 두 증인에 대한 묘사는 단단하고 선명하다. 먼저 두 증인 입에서 나오는 불이다.(묵시 11,5 참조) 원수를 삼킬 정도로 강력한 불은 하느님의 분노를 가리키는 전형적 은유다.(2열왕 1,10 이하; 루카 9,54 참조)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는 모든 이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전통적 믿음이 불이라는 형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두 증인은 하늘을 닫는 권한도 지닌다. 하늘을 닫는 권능은 엘리야의 이야기를 참조한 듯하다.(1열왕 17,1)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엘리야를 통한 하느님의 힘찬 권능에 대한 이야기를 소중히 여겨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그분을 향한 믿음의 근거로 사용하기도 한다.(루카 4,25; 야고 5,17 참조) 물을 핏빛으로 만드는 모세의 이야기도 첨가된다.(탈출 7,17 참조) 모세는 그야말로 민족의 영웅이고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서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셨다. 두 증인이 모세처럼 꾸며지는 건,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의 역사하심은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리라. 두 증인에 대한 묘사는 11장 6절 후반부에 이르러 절정에 치닫는다.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닌, 특정 민족이나 공간에 치우치지 않는, 그리하여 온 세상 위로 권능을 떨치는 두 증인의 모습은 경이롭다. 그 누구도 대적 못 할 두 증인이기에 그들이 존재하는 한, 예언의 힘은 맹위를 떨칠 것이다. 그런데, 두 증인은 자루 옷을 입고 있었다.(묵시 11,3 참조) 마흔두 달, 천이백육십 일 동안 자루 옷은 두 증인을 감싸고 있었다. 자루 옷은 고통과 회개의 은유로 사용된다.(이사 22,12; 예레 4,8; 마태 11,21) 요한묵시록은 천상의 기쁨, 영광 혹은 권능을 드러낼 때 ‘흰 겉옷’을 사용한다. 자루 옷은 아니다. 두 증인의 옷차림에서 요한묵시록 서사의 긴장이 진하게 느껴진다. 예언자의 운명은 그리 영광스럽거나 화려하지 않다는 것. 그들은 고통과 회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그래서인가. 11장 7절에 다다를 때, 두 증인은 죽음을 맞닥뜨리고 만다. 그들의 죽음이 무엇인지…, 우리는 밝혀야 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작은 두루마리(요한 묵시록 10장)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지기 전, 작은 두루마리를 펴 들고 있는 천사가 나타난다. 구름에 휩싸인 천사의 모습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의 개입을 알리는 ‘사람의 아들’(다니 7,13 참조)과 닮았고 당신 백성 앞에 장엄히 나타나시는 하느님에 대한 서술과도 닮았다.(탈출 16,10; 1열왕 8,10 참조) 천사는 땅과 바다를 발판 삼아 서 있다. 천상과 지상의 공간적 구분은 천사의 형상 안에서 희미해지고, 희미해진 만큼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 역사 안에, 백성들 삶 한가운데 천상의 섭리가 천사를 통해 구현된다. 천사의 머리 위 무지개는 그래서 특별하다. 하느님과 인간 세상을 연결하는 계약의 상징인 ‘무지개’(창세 9,13 참조). 천사는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는 메타포로 등장한다. 천사를 둘러싼 시간적 구성도 매한가지다. 천사가 등장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묵시 10,6 참조)이다. 우리말 성경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번역했지만, 그리스말 본문은 ‘더 이상 존재할 시간이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시간은 도대체 어떤 시간일까. 천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없는 그 시간에 천사는 창조의 하느님을 호출하고 그분을 두고 맹세한다. 이 맹세는 마지막 때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대목과 겹친다(다니 12,7 참조). 다른 시간을 허용하지 않아 더 이상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 시간은 사실 마지막, 완성의 시간이(어야 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시는 하느님께 맹세하는 천사는 마지막 종말의 때를 이야기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온다. 처음과 끝이 하나가 된다. 우리의 이야기는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울리는 시간’ 또한 소개하고 있다.(묵시 10,7 참조) 혹자는 ‘아직 다다르지 않은 종말의 시간’이라고 해석하고 종말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과도기적 시간이 우리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해석하다 보면 우리말 성경처럼 하느님의 섭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그 완성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울릴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대로 그분의 신비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묵시 10,7) 그러나 그리스말 본문은 ‘과거형’ 동사를 사용한다.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가 울리는 장면은 이야기의 서술상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11장 15절에 가서야 등장한다), 그 시간을 물리적 시간의 미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고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 울리는 시간은 하느님의 섭리가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것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 요컨대, 천사가 외치는 이야기의 현재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는 ‘진공(眞空)의 시간’이라면 그 시간이 바로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라는 것이고,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시간이라는 것이다. 사실 믿는 이들의 시간은 늘 ‘완성의 시간’이고 ‘마지막 시간’이다.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다가올 시간에 대한 설렘은 믿는 이들의 몫이 아니다. 믿는 이들은 온전히 지금을 전부로, 마지막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기록은 필요치 않다. 더 이상 읽어야만 하고 그래서 깨달아야 하고, 깨달음을 기반으로 무언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외침이나 환시의 시간은 무용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마지막이고 완성된 시간을 살아갈 ‘주체’, 곧 ‘예언하는 주체’를 소개한다. 천사가 요한에게 제시하는 작은 두루마리는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히기 위해 등장한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두루마리를 먹는 행위를 두고 말씀을 받는 것, 그러니까 예언자적 소명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에제키엘서 2장 참조) 요한의 캐릭터는 본 것을 글로 옮기는 필자에서(묵시 1,19 참조)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변모한다. 글이 말로써 생명력을 얻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 이어지는 요한묵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묵시 11,3.6.10 참조) 일곱째 천사 나팔 울리는 때를 물리적 ‘미래’로 해석해선 안 돼 믿는 이들에게 시간은 언제나 완성의 시간이며 마지막 시간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언자의 운명은 혹독하다. 작은 두루마리를 삼키는 것이 입에는 달지언정 배 속은 쓰리기 때문이다.(묵시 10,10; 예레 15,10.15-18 참조) 예언의 말씀은 고맙거나 기쁘거나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때론 반감과 대립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예레 20,3 참조) 예언의 말씀이 불러오는 반응의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꾸며놓은 시간의 성격을 다시 되짚어 보면 어떨까. 마지막이라서 더 이상의 기대와 바람이 필요 없는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설렘이나 지금에 대한 비판이 아닐 것이다. 빗대자면, 생의 마지막에 내놓아야 할 마지막 말이 앞으로의 계획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 혹은 제 삶에 대한 후회가 전부일 수 없듯이 마지막에 외쳐야 할 예언의 말씀은 그저 마지막 꼭 해야 할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꼭 해야 할 그 말은 머뭇거림이 없어야 하고, 계산이 없어야 한다. 그 마지막 말이 예언의 말씀이라면, 그 마지막 말을 듣고 기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실은 마지막을 살지 못하는 이들의 섣부른 편견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이 마지막 시간에 예언자들의 등장은 울려 퍼져야 할 말들을 늘어놓는 도구가 필요해서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두루마리를 삼킨 요한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며 요한묵시록 어디에도 요한이 설파하는 예언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요한은 그저 말씀이 체화된 한 ‘주체’가 된 것이고 그 주체가 있음으로 되었다고, 그것이면 충분하고 그것으로 마지막 시간에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것이라고 요한묵시록 10장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말씀의 사람, 예언자는 온 생애 매 순간, 마지막을 살듯 살아가는 사람이고, 삶의 모든 순간에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길 제 몸으로 증거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제 속으로 삼켜져 말씀 자체로 거듭나는 이가 예언자일 것이다. 예언은 늘어놓는 말과 언변이 아니라 살아내는 인격을 통해 하느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두려움(묵시 9,13-21)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다.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간은 죽어간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제 손으로 행한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저만이 숭배하는 우상을 끝내 움켜쥔다. 죽음의 재앙도 인간의 완고함을 꺾지 못한다. 대개 재앙의 서사를 인간의 부도덕성이나 일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재앙의 성격은 그러하다. 잘잘못을 가려 정의의 단호한 심판을 재앙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묵시문학의 전형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재앙과 관련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질만한 소재가 요한묵시록 9장 13절 이하에 눈에 띈다. 재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유프라테스에서부터 그 질문은 시작한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하자, 하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큰 강 유프라테스에 묶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 주어라.”(14절) 요한묵시록 7장에서 네 천사는 하느님 백성의 등장을 알렸지만, 9장에서는 땅을 향한 재앙을 알리는 존재로 소개된다. 네 천사는 유프라테스강에 묶여 있다. 동쪽 끝을 가리키는 유프라테스는 미지의 무서운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의 시작점이기도 하다.(창세 15,18; 신명 1,7; 1열왕 5,1; 에녹 56; 에제 38-39 참조) 네 천사는 인간의 삼분의 일을 죽이려는 준비를 이제껏 해왔고 마침내 그 시간은 무르익었다. 네 범주로 소개되는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이라는 그 시간은 ‘필연적이고 확실한 시간’을 가리키는 묵시문학의 은유적 시간이다.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 건 피할 수 없고, 반드시 혹은 필연적으로 삼분의 일의 죽음은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은 품고 있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부터 오는 재앙은 인간들이 그렇다고 믿은,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두려움을 먹이 삼아 커나간다. 이 두려움은 유다 사회가 오래전부터 믿어온 하나의 ‘민간 신앙’이다. 묵시주의는 이러한 민간 신앙을 발판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했다. 동쪽에서 올 것이라는 막연한 심판의 재앙, 그것이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재앙이라면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민중이 스스로의 삶을 심판하고 정제하고 다잡는 인생의 길잡이로 재앙을 쓰고 읽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향하는 길을 다듬어 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잡이는 더욱 강하고 더욱 선명하면 좋을 터. 제 삶이 더욱 반듯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16절부터 기병대가 나타난다. 기병대는 ‘이억’의 숫자로 소개된다. 그리스말 본문은 ‘디스뮈리아데스 뮈리아돈’(δισμυριάδες μυριάδων)으로 되어 있는데, 굳이 직역하자면, ‘만(萬)들의 이만(二萬)’, 그러니까, 2×10,000×10,000= 200,000,000이 된다. ‘만’(萬)을 가리키는 ‘뮈리아스’(μυριάς) 는 ‘대단히 많은’ 혹은 ‘셀 수 없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이런 숫자는 셈을 하기보다 셈을 하지 않는 게 맞다. 다만 우리는 ‘이억’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내포하는 두려움의 극단을 읽어내야 한다. 인간이 삼분의 일이나 죽어가는 일은 너무나 두렵고, 두려운 만큼 황망한 일이라는 것. 그 옛날 소돔의 멸망 역시 그러했으리라. 이억의 기병대가 뿜어내는 불과 연기와 유황은 소돔이 종말을 맞닥뜨릴 때 결정적으로 등장한 상징체들이다.(창세 19,24.28 참조) 그러나 인간이란 참 질기고 억세다. 우리가 만든 것들, 우리가 이루어 온 것들, 그리고 우리가 지탱해 온 것들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나머지 사람들도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들을 숭배하고 또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묵시 9,20) 인간의 욕구는 숭배 대상에 정확히 투사된다. 불의한 자 심판받는다는 서사 민중 스스로 다듬어온 신앙 정작 욕망 포기 않는 이들은 회개할 의지 없이 우상숭배 숭배는 자기의 인정 욕구에 대한 숭배가 되어버린다.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우상들을 마치 살아 있는 듯 숭배하는 인간들은 무엇을 숭배하는지 모른 채 그 무엇을 늘 찾아다닌다. 타자화해 놓은 것은 실은 자신을 투사시킨 지독한 교만과 이기(利己)의 신기루가 된다.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숭배다. 끝끝내 자기를 두고 숭배하는 인간은 스스로 회개하지 않는다.(21절) 회개하지 않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을까. 우리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전통적 인식 아래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끝을 파멸이나 징벌로 정리되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나머지 인간들’의 운명에 대해선 우리는 모른다. 다만 제 작품을 포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은 두려움이 없기 마련이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의 재앙에 두려워할 줄 아는 인간은 실은 복된 이들이기도 하겠다. 제 잘못에 대한 일말의 공포심은 정의나 선에 대한 갈증이나 존중을 내포하고 있어, 죽어간 인간의 삼분의 일은 적어도 제 삶에 대해 부끄러움을 지닌 이들이 아닐까. 삼분의 일의 죽음은 그리하여 스스로 회개할 줄 아는 최소한의 양심을 위한 손짓이 아닐까.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행여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며 안타까워하거나 혹은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일까라며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참혹한 사건 앞에 아무런 감정의 요동을 표하지 못(안)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당황스럽다. 얼마나 죽어야 그 완고함이 해제될까. 얼마나 참혹해야 저만이 옳다고 믿는 그 우상을 던져버릴까. 이억의 기병대가 오기 전에, 그리하여 또 다른 죽음이 닥치기 전에, 헛된 우상에 물든 이들에게 우리는 담대히 재촉해야 한다. 얼른 회개하라고….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재앙의 정체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떨어진 별’이 등장한다. ‘떨어진 별’을 두고 타락한 천사, 혹은 사탄이나 악마로 해석한다. 그 별에게 구렁의 열쇠가 ‘주어졌다.’ 별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별에게 열쇠를 주었다. 학자들은 이런 수동태 형식을 ‘신적 수동태’라 부른다. 요한묵시록은 악의 세력이 휘두르는 힘을 묘사하기 위해 대부분 신적 수동태의 형식을 빌려온다. 요한묵시록의 악은 힘이 있어도 얼마 안 가서 사라져 버리거나 무너져 버린다. 악은 그렇게 무능력하다. ‘신적 수동태’의 주체는 감추어져 있으나 대개 하느님으로 인식한다. 달리 말하자면, 참된 권능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이셔서 악은 하느님과 동등하거나 하느님을 대적할 힘 따위는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권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신념이 ‘신적 수동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만약 이렇다면, 하느님은 기쁨, 행복, 성공 그리고 정의, 진리, 평화 등의 단어들 틈에서만 사유되어서는 안된다. 재앙, 고통, 불행, 나아가 사탄과 악마의 틈바구니 안에서도 그분의 섭리에 대해 우리는 묻고 답해야 한다. 요한묵시록의 재앙은 그러므로, 사탄이나 악마의 폭력이나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다시 되새기는 메타포가 된다. 별이 구렁을 연다. 거기서 큰 용광로의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온다. 이 연기는 모든 것을 어둡게 만들고 모든 것을 집어삼켜 혼돈으로 만든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 그러니까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혼돈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장면 서술이다.(창세 1,2 참조) 하느님의 손길이 빚어내는 모든 ‘있음’ 이전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없음’과 동의어다. 떨어진 별로 시작하는 재앙의 서사는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없는 것들의 이야기다. 없는 것들을 아무리 자세히, 기묘하게 묘사한들, 그것은 사탄과 악마를 그려내는 ‘수동태’의 힘처럼 하느님 앞에선 부질없는 것들일 뿐이다. 부질없는 것들은 메뚜기, 땅의 전갈과 같은 것들로 형상화된다. 이것들의 폭력은 땅의 풀과 푸성귀, 나무로 대변되는 ‘자연’도 아니고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믿는 이들도 아닌,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다. 단번에, 그리고 습관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해석해 버릴 것이다. 요한묵시록의 재앙은 하느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나쁜 이들을 향한 경고라고. 그러나 이런 선악 구도의 결과론적 징벌이 요한묵시록의 재앙이라면 굳이 하느님과 어린양까지 언급하며 심판을 논할 필요가 있을까. 나쁜 일에 공분을, 선한 일에 기쁨을 지니는 건 인간 일반의 현상이므로. 우리의 이야기는 5절부터 재앙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차근차근 펼쳐나간다. 다섯 달, 한계가 명확한 그 다섯 달 동안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이들은 재앙의 희생자가 된다. 그 사람들은 죽는 게 아니다. 메뚜기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뿐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사람들은 죽기를 바란다. 한낱 메뚜기가 사는 시간이 다섯 달이고, 신약성경은 ‘다섯’을 ‘몇 안 되는 것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기도 했다.(1코린 14,19; 루카 12,6; 마태 25,2 참조) 그렇게 허무한 다섯 달인데, 그 짧은 시간을 버틸 재간이 사람들에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메뚜기, 그것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운 존재인가. 이제 메뚜기를 적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해치는 메뚜기는 그야말로 전투에 임하는 장수와 같다. 종말의 위기를 다루는 요엘서의 서술과 흡사하여(요엘 2,4 이하 참조) 메뚜기를 종말론적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메뚜기의 서술은 허망하다. 메뚜기에 관한 모든 서술은 실재하지 않는, ‘~같은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금관 같은 것’, ‘머리털 같은 것’, ‘사자 이빨 같은 것’, ‘마차들의 소리 같은 것’, ‘전갈 같은 것.’ 이런저런 ‘~같은 것들’은 실은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인식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견디기 힘든 고통 안에서도 좌절과 죄책감 빠지지 않길 마치 9장이 시작될 때 구렁에서 나온 연기와 같다. 모든 것을 어둠 속에 집어삼켜 무엇 하나라도 제 본연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나지 못하게 만드는 연기 말이다. 금관이든, 사자 이빨이든, 떠들썩한 마차 소리든, 모든 것은 메뚜기를 향하지만 메뚜기를 비껴가서 메뚜기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그러니 메뚜기는 히브리 말로 ‘아바똔’(אֲבַדּוֹן), 그리스말로 ‘아폴리온’(Ἀπολλύων)이라 부르는 ‘지하의 천사’(우리말 번역은 ‘지하의 사자’로 되어 있다)를 임금으로 모실 수밖에. ‘아바똔’은 ‘파멸의 공간’이란 뜻이고, ‘아폴리온’은 파괴자란 뜻이다. 두 단어 모두 생명에 반하는 ‘죽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메뚜기를 소재로 서술된 재앙과 고통의 끝이 죽음이라니. 전투사의 모습으로 꾸며진 메뚜기가 전투 한번 해보지 않은 채, 죽음의 메타포 ‘지하의 천사’를 제 임금으로 섬겨버렸으니, 잔뜩 긴장한 채, 이를 깨물며 재앙과 고통의 끝을 탐험하고 그 정체를 묻는 우리의 읽기는 허무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건질 것은 명확하다. 죽음은 대결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다섯 달로 한계 지워진 시간, 사람들이 그토록 죽고 싶어 하는 그 시간의 주인공 메뚜기는 사람들을 해치고 죽일 만큼 대단한 힘이 없다는 것. 모든 재앙의 끝은 죽음을 향하고 있어 재앙은 그렇게 허무하다는 것. 재앙과 고통의 끝에서야, 그 허무함의 민낯이 드러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지 모른다.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조차 죽음 같은 재앙은 징벌이 아니라는 희망 말이다. 견디기 힘든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못남을 탓하며 죄책감에 빠질 때가 많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어’, ‘나는 늘 왜 이럴까’ 하는 좌절과 패배의 소용돌이, 그 안에서 우리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겠지만 우린 다시 한번 그 고통의 정체에 대해 최대한 섬세하게 물어야 한다. 그 고통의 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허무한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은 우리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주눅 들어 미리 단정 짓고 후회하는 우리의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나팔은 울려야 한다(묵시 8,6-13)

나팔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팔은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통적 형상이다. 나팔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참혹한 장면은 기어이 등장하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요한묵시록의 심판이 징벌이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초대라는 사실을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다.(6월 1일자 19면) 무서운 심판의 서사라는 다소 거칠고 투박한 방식으로 전개된 하느님의 호소는 일곱 나팔의 이야기 안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나팔이 불릴 때마다 ‘종말이다’, ‘심판이다’라는 건조하고 상투적인 해석으로 하느님의 간절한 호소를 이해하는 건 게으른 것이다. 심판의 서사가 어떻게 묘사되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세심히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지상의 것들이 무너지고 파괴되며, 땅의 삼분의 일이 사라지고 제거되는 장면이 도대체 하느님의 초대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그 심판의 끝, 그러니까 일곱 나팔의 소리가 완전히 울려 퍼졌을 때, 하늘은 왜 여전히 하느님을 찬송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인지(묵시 11,15) 섬세하게 물어야 한다. 요컨대, 심판의 참혹함이 하느님을 만나는 데 왜 필요한 것인지 묻는 일이 일곱 나팔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가 된다. 처음 네 개의 나팔은 땅의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땅에 떨어진 우박과 불, 불타는 큰 산과 바다, 그리고 쓴 물 등이 그렇다. 땅의 것들이 제 모습과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고 하나의 ‘상실’이나 ‘파괴’로 이해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다만, 그 심판은 옛날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재앙과 매우 닮았다. 우박과 불이 땅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이집트 재앙의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탈출 9,24-25 참조) 요한묵시록 저자는 ‘피가 섞인 것’으로 우박의 성질을 더욱 섬뜩하게 서술한다. 이집트 재앙 첫 번째에 나타나는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한 장면이나(탈출 7,17 참조) 요엘서 3장 3-4절에서 말하는 주님의 날의 징조를 우박에 접목해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간다. 핏빛의 우박이나 불구덩이가 된 땅의 서술은 요한묵시록이 쓰인 시대로부터 2000여년 전 벌어진 사건의 이야기이지만, 유다 역사 안에서 그리고 요한묵시록이 쓰인 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위한 메타포의 한 예로 작용하고 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속 어렵고 힘든 일을 제 삶의 현실을 위한 하나의 메타포로 끌어다 사용했고, 성찰과 회개의 소재로 다루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66년에 발발한 유다 1차 항쟁이었다. 로마에 저항함으로써 유다 민족의 독립과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으나 그 결말은 하느님의 자리라 여겨진 예루살렘 성전의 불바다였다. 너무나 참혹한 사건이었고, 그로 인해 절망했으며, 그것으로 세상은 그 끝에 다다랐다고 모두 생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공관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서술하면서 유다 1차 항쟁의 역사를 끌어온다. 그 역사는 끝장난 역사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시발점으로 해석된다. 불타 무너진 성전을 예수님의 몸으로까지 해석하면서 역사의 고통을 믿음을 향한 다짐으로 어떻게든 바꾸어 내는 것, 그것이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의 땅으로 대변되는 심판에 대한 서사의 기능이다.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의 땅은 역사 속에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로 믿음과 삶이 완전히 무너질 때, 그 절망의 무게감에 사람들이 허덕일 때, 강렬한 심판의 형상으로 수없이 호출되지만, 혹독한 그 고통의 기억만큼이나 새로운 희망에 대한 간절함은 배가 된다. 둘째 나팔이 말하는 불타는 큰 산, 셋째 나팔이 불릴 때 나타나는 쓴 물, 넷째 나팔의 어둠 등이 차례로 서술되면서 심판이라 해석되는 여러 서술은 더욱 단단해진다. 참혹한 일로 믿음이 무너질 때 희망에 대한 간절함도 커져 이웃과 세상 고통 마주하며 그들의 아픔 함께 살아내야 그러나 다시 한번 되새기자면,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불리는 순간, 그곳은 하늘이다. 구원의 환호가 울리는 하늘, 하느님께 찬미 찬양이 드려지는 하늘. 어쩌면 하늘을 기다리기 위해선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끝내 통과해야 하는 고통의 삶은 필연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심판의 대상이 ‘삼분의 일’로 규정된다는 점을 살피며 심판의 대상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도드라지게 강조한다. 심판은 전체가 아닌, 부분의 일이라고 안도한다. 모두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류가 끝장나는 것이라서 믿는 이들은 안심해도 된다는 것. 이런 해석은 뭔가 원시적이고 천박하다. ‘삼분의 일’과 그렇지 않은 ‘삼분의 이’를 갈라놓고 적어도 나는, 우리는 그 ‘삼분의 일’과는 무관하다는 식의 해석은 가소롭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이런 해석을 두둔하며 ‘삼분의 일’의 회개를 주문한다. 심판의 징벌을 통해 속죄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따르라는 이런 주문은 삶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죄다 윤리적, 율법적 일탈로 편협하거나 게으르게 해석한 결과다. 이런 해석에 예수님의 일갈은 긴요한 것이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2) 역사 속에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을 심판의 형식으로 다시 복기하는 것은 죄악에 대한 경고나 일탈에 대한 징계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게 아니다. 그 참혹한 사건들이 제삼자의 일이라서 무심한 것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분, 혹은 전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시대 공감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절망하지 말자. 시대의 아픔에 무감각하게 살지 말자. 저만의 신앙을 지킨다고 이웃과 사회의 슬픔에 눈감지 말자.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는 우리 사회 도처의 아픔을 끊임없이 들추어내고 있다. 나팔이 울리듯, 세상의 고통과 아픔은 더욱더 알려지고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땅의 ‘삼분의 일’과 ‘함께’ 그 고통과 아픔을 살아내어야 한다. ‘삼분의 이’의 무릉도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팔이 모두 울려야 구원은 온다. 나팔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야 구원은 비로소 ‘우리’ 것이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하느님을 향한 구원(묵시 8,1-5)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린다. 요한묵시록 5장의 문제, 그러니까 봉인을 열 수 있는 주체를 찾는 일은 이제 그 끝에 다다랐다. 봉인은 모두 열렸고 봉인은 그러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열리는 과정은 지난했으나 그 흐름은 놀랍게도 구원에로 방향 지워졌다. 마지막 일곱 번째가 열리는 공간은 하늘이다. 하늘에서 봉인되어 있던 두루마리는 하늘의 자리에서 완전히 열렸다. 처음부터 하늘이었고 마지막까지 하늘인 봉인의 흐름은 요한묵시록의 구원 의지를 분명히 한다. 앞서 요한묵시록 7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을 다시 되새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이사야서의 한 대목을 옮긴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 그로 인한 하느님 백성의 희망을 노래한다. 봉인이 해제된 두루마리는 하느님의 구원을 찬찬히 살펴보게 하는 묵상의 글이 된다. 그러나 구원이란 게 그리 호락호락한 선물이 아니다. 한번 노력해서 한번 받고 끝나버리는 영화나 소설 속 해피엔딩이 아니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는 것을 두고 종말이 왔음을, 그 종말의 시간에 봉인을 펼친 유일한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이 완성된 데 주석의 방점을 찍는다. 이런 해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구원의 유일한 길과 목적은 예수님인 건 분명하나, 그 구원이, 종말이 어느 시간의 흐름 끝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요한묵시록은 구원 이전에서 구원 이후의 시간 흐름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미 이뤄진 구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해 쓰였다. 구원이 왔음에도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가 여전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구원과 고통의 간극을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요한묵시록의 집필 동기다.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를 통해 우리는 이미 그 동기를 얼마간 살펴보기도 했다. 예컨대 에페소 교회에 보내진 편지에서 말하는 ’첫사랑‘의 상실이 그러하다. 첫사랑은 십사만 사천과 닮았다고 보면 어떨까. 저만이 옳고 구원에 합당하다 말하는 니콜라오스파의 배타적 자세가 첫사랑을 상실한 것이라면 모든 이에게 열린 구원에의 외침을 가리키는 십사만 사천은 첫사랑의 회복일 것이니. 첫사랑은 그러므로 구원을 누리는 이들이 한결같이 지켜나가야 할 보편적 사랑, 누구에게도 열린 구원의 선포와 같은 것이니. 구원이 왔다, 종말이 당도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업적은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외치는 것은 오래된 중언부언이라 식상한 것이 아닐까. 구원을 이미 누리고 사는 이에겐 너무나 자명한 말이라 새롭지 않아 지루한 선포가 된다. 구원은 찾아 나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의 소재다. ‘반 시간’의 침묵은 그래서 소중하다. 전통적으로 ‘침묵’은 주님의 날이 임박했음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스바 1,7; 즈카 2,17; 시편 76,9 참조) 주님이 오시고 그분이 행하시는 것을 찬찬히, 겸허히 살펴보는 시간이 반 시간이다. 반 시간은 그러므로 주님의 시간이다. 일곱 개의 봉인이 인간 세상의 희로애락 속에서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폈다면 반 시간의 침묵 후에 펼쳐질 일곱 개의 나팔은 심판이라는 묵시문학적 장치들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어떤 것인지 소개할 것이다. 반 시간의 침묵 속에서, 그리고 구원이 완성된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숙제를 얻은 셈이다.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직접 개입하셔서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이 무엇을 향해 서술되는지, 그리하여 그 방향성 안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것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읽어내어야 한다. 구원, 시간의 끝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돼 구원은 찾아 나설 무엇이 아닌 어떻게 살지에 대한 성찰 소재 하느님의 일은 ‘일곱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유다이즘 안에서 일곱 천사는 대천사의 그룹으로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그분의 현존에 함께하는 천사로 소개된다.(에녹 20, 토빗 12,15; 이사 63,9) 천사는 일곱 나팔을 가지고 있는데, 하느님의 경고(예레 4,5)나 하느님을 위한 축제와 예배(2사무 15,10; 민수 10,10), 아니면 하느님의 현현이나 마지막 날 하느님의 등장을 상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탈출 19,16; 요엘 2,1; 스바 1,16)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은 하느님을 향한 지시체다. 반 시간의 침묵에 이어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은 하느님을 향해 더욱 세심히, 민감하게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일을 살피기 전, 우리에겐 하느님 그분을 향한 시선이 필요하다. ‘다른 천사’의 등장은 하느님을 향한 방향성을 더욱 탄탄하게 만든다. 우리말 성경은 제단 ‘앞에’라고 번역하지만, ‘앞에’라고 번역한 그리스말 ‘에피’(ἐπὶ)는 공간적 친밀성을 드러내는 전치사다. 그러므로 제단 앞은 하느님께 보다 ‘가까운’ 공간이다. 다른 천사에게는 금향로와 많은 향이 주어졌다. 다른 천사는 마치 사제와 같다.(레위 16,12; 민수 17,11 이하) 그러나 다른 천사가 보이는 뜻밖의 행동은 많은 의문이 남는다. 천사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숯불을 가득 담아 땅에 던진다. 향로와 향이 성도들의 기도일진대(묵시 8,3-4) 그 기도가 땅을 향해 던져지는 셈이다. 하느님을 향하는 기도가 땅을 향하는 공간적 연결성은 낯설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늘 이렇다. 4장의 천상이 땅의 공간과 하나 되어 서술되었고, 6장의 봉인이 열리면서 천상의 두루마리는 지상의 삶 자체를 겨냥했다. 요한묵시록 끝에 나타나는 새예루살렘 역시 하늘과 땅의 중간 어디쯤, 모든 것들이 통합되는 초월적 공간을 잉태한다. 주석학자들은 땅에 던져진 향로를 심판의 징조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요한묵시록 8장 6절부터 서술되는 그 ‘심판들’이 과연 흑과 백을 나누듯 잘못된 이들을 향한 심판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아니면 천상의 기도가 이 땅 위에 떨어져 한계 지워지고 부족하고 그리하여 슬픈 현실 속, 하느님을 향한 쓸쓸하지만 겸손한 오솔길로 거듭나는 건 아닐까. 구원을 이미 누리는 이로서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아간다. 구원은 그러므로 천상의 행복만도, 지상의 불행만도 아닌, 여전히 살아내어야 할 삶 자체에 주어진 하느님과의 인연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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