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신비로운 식별(묵시 17,7-14)

요한 묵시록 17장 7절부터 우리의 시선은 대탕녀 바빌론이 아니라, 그녀가 앉아 있는 짐승으로 향한다.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그 짐승 앞에서 천사는 이것을 ‘신비’라 부른다. 그리스말 ‘신비’는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으로 ‘입을, 눈을 닫거나 감는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감추어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신비라는 말마디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 신비는 인간의 이성을 밀어내는 암흑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더 깊은 층위를 찬찬히 살펴보도록 부르는 하느님의 계시 방식이다.(로마 16,25-26 참조) 신비는 인식의 어둠이 아니라 깊이이며, 이성의 도피가 아니라 초대이다. 그러므로 짐승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요구하는 상징으로 읽혀야 한다. 짐승은 “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다시 올라올 것”이라 소개된다. 그러나 그 결말은 이미 명시되어 있다. 짐승은 멸망으로 방향 지어져 있다는 것. 요한 묵시록 13장에서 상처 입어 죽은 듯하였으나 다시 살아난 짐승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두려워하던 네로의 부활 전승이 이 서사에 스며 있겠지만, 성경은 특정 황제의 귀환보다 더 깊은 차원을 드러낸다. 짐승은 ‘그 옛날의 뱀’, 곧 세대마다 얼굴을 바꿔 나타나는 악의 원형이다. 그가 올라오는 자리가 죽은 자들의 심연, 곧 ‘아뷔소스(ἄβυσσος)’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악은 언제나 밑바닥에서 솟아오르지만, 마치 하늘의 것인 양 위장을 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하나다. 짐승은 결국 무너진다. 악은 오래가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문제는 그 멸망 이전의 시간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 곧 “생명의 책”(묵시 17,8)에 이름이 없는 이들이 그 짐승을 보고 놀라워하며 경배한다. 악은 종종 추해서가 아니라, 찬란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에는 멸망할 줄 알면서도 끌려다니는 수많은 논리와 제도, 유행과 집착이 존재한다. 효율, 성과, 속도, 성공, 그 모든 것이 짐승의 빛나는 외피일 수 있다. 한 번의 클릭과 한 줄의 말이 마음을 흔드는 시대에, 짐승은 더 이상 붉은 괴물이 아니라, 합리와 관성의 얼굴로 다가온다. 그래서 묵시록은 말한다. 이 상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고. 하느님의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가르는 식별력,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뜻을 감지하는 영적 민감함이 필요하다.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자 일곱 임금이라 한다. 이는 고대 독자들에게 일곱 언덕의 도시, 로마를 즉시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동시에 “다섯은 이미 쓰러졌고 하나는 지금 살아 있으며 다른 하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묵시 17,10)는 표현은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로 이어지는 제국의 연대를 상기시킨다. 여섯째는 요한 묵시록 시대의 로마이며, 마지막 일곱째는 그 제국의 연대가 다시 모습을 바꾼 짐승일 것이다. 요한 묵시록의 일곱 산의 소개는 역사적인 제국의 목록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악의 권력은 언제나 형태를 바꾸어 되살아난다는 사실이다. 시대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하느님 백성을 억압하는 힘의 구조는 본질상 같다. 열 뿔은 열 임금이다. 그들은 아직 왕권을 받지 않았으나 잠시 권세를 얻어 모두 짐승에게 바친다고 한다. 힘의 연합은 언제나 더 큰 힘을 섬기기 쉽다. 그것은 1세기 로마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권력은 여전히 짐승의 이름을 빌려 움직인다. 사람들은 그것을 ‘현실’이라 부르고, 그 현실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지혜’라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응이지, 식별이 아니다. 묵시록이 보여주는 시선은 분명하다. 짐승의 마지막은 멸망이며, 어린양의 마지막은 승리다. 어린양은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묵시 19,16)이시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어떤 패배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초대교회는 황제의 권력과 부유함도, 죽음의 위협도, 세상의 논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도 초대교회가 살아낸 삶이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가. 따라서 짐승에 대한 이해는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짐승은 붉은 몸 대신 투자와 수익률, 조회수와 효율, 진영과 혐오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성공과 성장의 언어가 은총과 회개의 언어를 밀어낸다. 믿음을 수치로 계산하기 시작할 때, 신앙은 이미 짐승의 문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무엇에 놀라고 있는가. 무엇을 멋지다고 여기며, 무엇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는가. 짐승은 다시 올라오겠지만, 결국 사라진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의 시선과 마음과 경배가 어디를 향할지 오늘 우리는 선택해야 할 일이다. 신비는 현실을 벗어나라는 부름이 아니라, 현실을 더 깊이 보라는 부름이다. 그 부름 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조금 더 맑아지기를, 세상이 아니라 어린양께 마음이 향하기를, 조용히 소망한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번영의 뒷자리, 대탕녀 바빌론(묵시 17,1-6)

드디어 대탕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요한 묵시록의 무대 위에 나타난 그녀는 등장과 동시에 심판을 선고받는다. 처음부터 이 인물에게 허락된 존중은 없다. 그리스어 ‘포르네(πόρνη)’를 우리말 번역은 ‘탕녀’라 하여 방탕의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정작 본문이 고발하는 바는 더 노골적이다. 땅의 임금들과 몸을 섞은 여인(17,2), 그러니 차라리 ‘창녀’라 부르는 것이 정직하다. 이 단어는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불편을 피하려 돌려 말하는 순간, 이 계시의 순수성과 급진성이 희석된다. 그녀는 그냥 창녀가 아니다. ‘큰’ 창녀다. 이 과장된 수식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 묵시록 17장 5절에서 밝혀지는 그의 진짜 이름, ‘큰 바빌론’과 닿아 있고, 다시 예레미야서 51장 13절이 말하는 대바빌론의 패망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예레미야가 말하던, “큰 물 가에 살며 보화를 많이 가진 자”, 그 바빌론을 요한 묵시록은 ‘물 위에 앉은 창녀’라는 표현으로 다시 고치며 심판의 대상을 분명히 한다. 예레미야의 바빌론은 요한 묵시록 시대에 로마로 은유되며 심판은 그러므로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당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한 제국이라는 체제를 향하고 있다. 그녀가 심판받는 이유는 불륜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불륜은 육체적 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결탁의 비유다. 땅의 임금들은 바빌론, 즉 로마와의 동맹 속에서 경제적 평온함을 확보한다. 요한 묵시록은 이 현실을 곳곳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묵시 2,9.13; 13,16–17 참조) 요한은 이 상황을 한 단어로 비유한다. ‘취기.’ 그는 말한다. 땅의 임금들이 창녀의 포도주에 취해 있다고. 취한다는 것은 판단력을 상실한다는 뜻이다. 오로지 성장과 돈의 감미로운 향에 취한 삶, 그것이야말로 예언자들이 경고하던 영적 실명이다.(이사 29,9; 호세 4,11–12 참조) 구약의 예언자들은 정치·경제적 번영과 그에 수반한 우상숭배를 흔히 불륜과 창녀의 이미지로 그렸다.(이사 23,18; 1열왕 5,1–12; 아모 1,9; 요나 3,5–10; 에제 16,33–34 참조) 요한 묵시록은 이 오래된 언어를 끌어와 18장(3.9–19)에서 경제적 번영을 곧 ‘불륜’과 ‘취기’라고 단언한다. 고대 창녀가 몸을 팔고 돈을 받았듯, 제국의 번영을 함께 누리는 땅의 임금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어준 셈이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 이미지는 낡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국제 무역의 복잡한 외교와, 그 틈바구니에서 소외되는 가난한 나라들의 현실을 생각해 보라. 번영의 논리는 언제나 누군가를 배제한다. 요한의 언어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누리는 번영이 혹시 누군가의 피를 대가로 얻은 것은 아니냐?” 이 질문을, 우리는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장면은 갑자기 광야로 이동한다. 광야는 시선의 전환을 위한 공간이다. 하느님의 관점으로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장소.(이사 21,10 참조) 이사야는 그곳에서 바빌론의 몰락을 보았고(이사 21,1–10 참조), 요한도 같은 자리에서 바빌론과 로마의 종말을 조망한다. 광야의 시선은 제국의 거대함을 상대화한다. 현실 세계에서 바빌론과 로마는 든든히 서 있다. 바빌론은 묵시록 쓰이던 시기 ‘로마’ 은유 종교·정치·경제적 결탁 현실 비판하며 오로지 성장과 물질에 취한 삶 경고 그러나 광야에 서면, 그 찬란함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권력과 돈과 명예는 광야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과도한 무게를 실어 온 우리의 삶을 뚜렷이 보게 되는 자리. 광야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그 광야는 단순히 거룩한 공간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진홍빛 짐승을 탄 여인을 본다. 머리 일곱, 뿔 열.(17,3) 12장 3절의 붉은 용과 동일한 형상이다. 광야는 하느님의 시선이 열리는 곳임과 동시에 악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요한 묵시록은 선과 악을 단순히 공간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 통찰이 깊어질수록 악의 본질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창녀가 그 짐승을 타고 있다. 이는 곧 제국의 경제적 번영이 악의 시스템과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짐승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으로 가득하다면, 그 번영 역시 하느님을 모독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해석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번영이라는 이름의 신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무릎 꿇어왔는가. 4절로 넘어가면 창녀의 외양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다. 견고한 번영의 색깔인 자주와 진홍 그리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한 큰 창녀 바빌론. 그녀의 손에는 금잔이 들려 있는데, 그 안에는 불륜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 화려함은 로마 제국의 무역 품목들과 정교하게 연결된다.(묵시 18,12–14 참조) 상업적 성공이 창녀의 유혹과 동일시된다. 사람들은 이런 비유에 불쾌함을 느낄 수 있다. “부유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왜 창녀의 짓인가?” 그러나 질문을 바꿔보자. 그 번영이 만들어낸 자리는 누구에게 열리고, 누구에게 닫히는가.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로마를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모든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이 모여 유행이 되는 곳.” 요한은 창녀를 “역겨운 것들의 어미”라고 부른다. 유행과 번영이 결합한 자리를 ‘어머니’라 이름 붙인 것은, 문명이 만들어낸 모든 욕망의 근원을 가리키기 위함이다.(예레 27,12 참조) 다시 말해, 세상이 탐하는 모든 화려함의 모태가 그 창녀라는 선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화려함 앞에서 박해를 받는다. 창녀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다는 것이다.(6절) 그리스도인은 번영의 행렬에서 낙오한 이들의 자리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 곁에 서려는 사람들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운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픔의 본질이다. 화려함의 앞줄에서 환호하는 대신, 뒤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존재론적 운명, 예수님의 운명도 그러했다. 세상은 그런 그리스도인을, 그런 예수님을 미련하다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후손인가, 아니면 창녀의 후손인가. 나는 때때로 백화점에서 그 질문을 떠올린다. 명품매장 앞에 늘어선 줄, 그 긴장된 눈빛들. 갖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 이해한다. 우리 인간은 그러하니까. 그러나 그 눈빛들 사이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단지 ‘좋은 삶’인가, 아니면 ‘옳은 삶’인가.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종말에 대한 성찰(묵시 16,17-21)

일곱 번째 대접은 일곱 번째 나팔과 닮았다. 번개와 요란한 소리, 지진과 엄청난 우박이 여전히 등장한다.(묵시 11,19 참조) 이집트에 내려졌던 다섯 번째 재앙과 역시 닮았다.(탈출 9,22 이하 참조) 완고함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이집트의 탈출이 실은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의 길이었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재앙들은 믿음의 길을 촉구하는 하나의 호소라는 사실을 우리는 몇 번이나 되짚었다. 대접이 쏟아지자 성전 안에 있는 어좌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등장한다. 대개 ‘하느님의 목소리’,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이 선포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 목소리는 이렇다. “다 이루어졌다.” 이 외침은 단순한 종말의 선언이 아니다. 세상이 끝장난다는 ‘마지막’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 안에 비로소 개입하신다는 외침이다. 이 외침은 하느님이 등장하는 서사들 안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들, 그러니까 천둥, 번개, 요란한 소리, 지진 등과 함께 묘사되기도 한다.(탈출 19,16; 묵시 4,5; 8,5; 11,19 참조)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을 통해 악의 지배 질서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창조 질서를 회복한다는 믿음이 “다 이루어졌다”라는 문장 안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좌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에 이어 ‘큰 도성’이 세 조각으로 갈라진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큰 도성’을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이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차원에서 단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은 은유적 표현이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은유를 통해 인간 세상과 그 역사의 불의와 부패를 가늠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쩌면 로마와 이방인의 세계는 지금 우리이기도 하겠고, 내일의 우리이기도 하겠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 앞에 어느 민족이, 어떤 세상이 지진과 같은 징벌의 대상이 될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가 말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적인 태도로 요한 묵시록의 징벌을, 세상의 불의를 살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특정 민족과 국가, 사람에게 세상의 잘못과 부패를 온전히 덮어씌우고 희생양으로 만들어서 그 특정 민족과 국가,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평화와 안정을 꾀하는 자세 말이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로마 혹은 그 이전의 바빌론이라는 국가는 역사적 실재이나 그것이 오늘날 여전히 악의 축인 것인 양 이해하면서 마치 특정 세력이 악하므로 그 특정 세력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철없는 의로움은 때론 폭력이 될 수 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해 놓고 ‘세속’에 따라 살지 말자는 외침을 함부로 남발하는 신앙은 하느님을 따르는 의로운 길이 아니라 제 이데올로기를 사수하는 선동가의 아집일 경우가 많다. 교회든 세상이든, 하느님 입장에선 당신의 섭리가 펼쳐져야 할 하나의 공간이다. 교회는 우주 만물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고 그분의 정의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가진 공동체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저만의 무릉도원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형제적 공동체다. 하느님은 ‘대바빌론을 잊지 않으신다’(묵시 16,19 참조)는 문장 역시 이러한 교회의 참모습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은 세상의 온갖 불의와 부패에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이미 확고히 제 자리를 잡고 있는 것들, 예컨대 모든 섬과 산이 자취를 감출 만큼 결정적이다.(묵시16,20) 교회가 세상 속 하느님의 정의를 알리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면, 교회 역시 권태로운 타협이나 눈치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고, 저만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기대어 세상을 등져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이 더 이상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새롭게 태어날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경고하고 움직여야 한다. 사실, 세상이라는 곳은 견고한 시스템과 복잡한 사상들이 얽혀 있는 곳이라 어느 하나도 쉬이 돌아서거나 변화되긴 힘들다. 21절에 엄청난 우박이 떨어져도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것은 그러한 세상의 완고함을 대변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박의 무게가 한 탈렌트인데, 26~36kg의 무게다. 이 무게는 로마군이 쏘아 올린 투석기에 담긴 돌의 무게와 일치한다. 재앙 묘사는 종말의 의미 아닌 악의 지배 질서를 심판하시고 세상에 당신의 섭리 펼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 담긴 표현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려 할 때 쏘아 올린 그 투석기의 돌이 한 예다. 유다 사회는 로마의 그러한 군사적 행동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요한 묵시록이 쓰여지는 때 여전한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우박이라는 재앙을 로마 군대의 투석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재앙이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한다. 사람들의 모독이 그리 단단하고 두꺼운 것이므로 사람들의 죄악이 그만큼 독하고 무겁다는 식으로 해석하기엔 성급하다. 큰 도성이 갈라지는 일이 벌어져도, 우박이 매섭게 이 땅 위에 떨어져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 익숙해져 있고, 익숙한 만큼 변화를 싫어한다.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도 온 나라가 갑론을박의 긴장과 그로 인한 피로감에 젖어 들게 마련이다. 요한 묵시록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사실을 특정 불의나 구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데서 찾지 않는다. 이어지는 17장부터 바빌론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는데, 그것은 일상의 경제적, 정치적 체계를 드러낼 뿐이다. 로마가 특별히 악한 것이 아니었고, 로마가 유독 잘못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로마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요한 묵시록 저자의 입장에선 하느님의 뜻을 반한다고 여긴 하나의 ‘해석’ 이야기다. 결국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익숙함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익숙해서 다른 것과 낯선 것에 귀와 마음을 닫고 있는 일들 말이다. 가까이는 내 이익을 위해, 멀리는 거대 담론을 무턱대고 수용한 무지하고 성급한 사상들을 위해 타인과 그의 다름을 무작정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완고한가, 유연한가. 요한 묵시록이 끝나기 전에, 우린 그 답을 찾아낼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고통이란 행복(묵시 16,10-16)

다섯째 천사가 나타나 자신의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는다. 대접은 정확히 짐승의 중심부를 향한다. 짐승의 권세와 통치를 가리키는 ‘왕좌’를 향하고 있어서 짐승의 영향력 자체를 무너뜨리려 하는 게 다섯 번째 대접이다. 그 결과 짐승의 나라는 어두워졌다. 탈출기 10장 22절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하느님은 이집트 파라오의 완고함에 어둠이라는 재앙을 내리셨다. 이집트는 태앙신 ‘라(Ra)’를 섬기고 있었으므로 어둠이 내린 이집트는 하느님의 재앙 앞에 속수무책 무너진 것이다. 지혜서는 어둠을 가리켜 하느님과의 단절을 가리키는 은유로 소개한다.(지혜 17,2 참조) 이 단절을 요한 묵시록은 혀를 깨물 정도의 고통으로 다시 해석한다. 하느님과의 단절이 인간에게 고통이 된다는 도식은 복음서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바깥 어둠 속에 던져져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단절의 고통을 자주 언급한다.(마태 8,12; 22,13; 25,30 참조) 베드로의 둘째 서간과 유다서에서도 ‘어둠’의 자리는 배교자들이 심판받는 자리로 제시되기도 한다.(2베드 2,17; 유다 1,13 참조)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고통이 닥쳐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능은 불편함과 고통을 피하고 싶도록 작동할 터인데, 고통이 있어도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회개가 삶의 방향을 돌이켜 멀어진 것을 다시 가까운 것으로 만드는 전환의 행위라고 한다면, 하느님과 멀어진 것이 고통이지만 다시 하느님께 향하는 방향의 전환이 더더욱 싫은 것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일 때 회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고통이 있어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고통의 자리를 끝내 포기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가 넘쳐나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힘들어도 그것을 놓아 버릴 때 오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상실감이 회개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혜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부드러운 질타를 받고도 훈계로 삼지 않는 자들은 그에 합당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자기들이 신으로 여겼던 바로 그것들로 징벌을 받자 그것들에게 화가 난 저들은 사실을 보고서야 자기들이 전에 알아 모시기를 거부하던 그분께서 참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가장 무거운 단죄를 받았습니다.“(지혜 12,26-27) 고통과 질타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운명이 징벌과 단죄라는 가르침은 성경 안에서 확연하다. 그럼에도 요한 묵시록의 ‘사람들’은 다만 하느님을 모독할 뿐이다. 고통은 더 이상 회개를 위한 장치로 작동하지 않는다. 회개에로의 초대는 계속되나, 그 초대에 응답하는 건, 하느님의 재앙이나 그로 인한 고통으로도 가능한 게 아니다. 고통의 재앙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여섯 번째 대접은 이제 유프라테스강으로 향한다. 유프라테스강은 말라버린다. 그 강이 마르는 것과 해 돋는 쪽 임금들의 길이 나는 것은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 제국을 제압하는 역사적 사건을 하느님의 심판으로 해석한 대목이다. 물을 마르게 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심판으로 바빌론은 영원히 황폐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의 묘사다.(예레 28,3; 50,39-40 참조) 바빌론은 하느님을 거역한 세상의 모든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심판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함을 끊임없이 두드린다. 세상 그 누구라도 하느님의 심판은 여지없이 실행되어 회개를 촉구한다. 고통에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함은 그 위대한 바빌론마저 무너뜨리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끝내 항복할 것인가. 13절은 더 이상 사람들의 태도를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 대신 악의 세력 그 자체가 전면에 나선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은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나타난다. 유다 사회는 개구리 형상을 기만적인 헛된 소리, 파괴와 혼란의 울음 등으로 이해해 왔다. 그렇다면, 악을 가리키는 용과 짐승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헛된 것이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개구리같이 생긴 더러운 영은 온 세계 임금들을 모아 하느님과 전투를 벌이려 한다. 전투는 ‘저 중대한 날’에 펼쳐지는 것으로, 구약의 즈카르야가 말하는 ‘종말론적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즈카 12~14장; 스바 3장 참조) 종말론적 전투는 하느님의 승리로 끝이 나며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이 난다고 소개한다.(묵시 19,11-21 참조) 악의 세력 그것은 그리 힘센 것이 아니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논리다. 악의 세력에 기대어 완고해진 사람들의 회개 문제도 그 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우린 유추할 수 있다. 완고함의 끝은 사람들에게 허무하다. 끝내 버리지 못해 움켜쥔 것이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야 마는가. 깨어 있어 의로움 지키는 일 우리가 희망하고 촉구할 자세 신앙 안에 고통 겪는 신자에게 하느님은 ‘행복’을 선물하실 것 그러므로 우리가 희망하고 스스로 촉구해야 할 자세는 15절의 성도들을 통해 살펴보아야 한다. 성도들의 자세는 ‘깨어 있어 제 옷을 지키는 일’이다.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을 가리키고 벌거벗음은 우상숭배로 드러나는 수치를 말한다.(에제 16장; 나훔 3,5; 이사 20,4 참조) 이런 권고의 말은 악이나 그의 세력에 맞서는 대립적 자세를 부추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상황이 어떻든 제 삶의 고유한 정체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라는 격려에 가깝다. 우리가 읽고 있는 요한 묵시록은 더러운 영이 세상 임금들을 모은 곳이 ‘하르마게돈’이라고 한다. ‘므기또의 산’이라는 뜻을 지닌 ‘하르마게돈’은 의인들이 악한 왕국에 의해 공격받던 곳이고(판관 5,19 참조) 거짓 예언자들이 꺾인 곳이며(1열왕 18장 참조) 이스라엘의 슬픔이 가득한 곳으로(2열왕 23,29 참조) 이해되어 왔다. ‘므기또의 산’은 그러므로 또다시 한번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그분이 공격받는 곳을 상징한다. 어떤 공격이든, 어떤 위협이든 성도들은 제 옷을 지켜야 한다. 성도들이 겪는 고통은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재앙의 고통과 다르다. 제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면서 겪는 고통은 거룩하고 보람되며 의미가 있다. 제 완고함에서 비롯된 재앙의 고통은 스스로 옥죄는 자기 파멸의 고통이다. 그런 고통은 겪고 나면 자신이 사라진다. 성도들이 겪는 고통은 겪을수록 자신이 단단해진다. 하느님은 그런 성도들에게 행복이란 선물을 주신다. 그 행복은 설익은 감정의 환희가 아니라 억척스럽게 달릴 길을 달리고 난 후 내쉬는 가쁘고 깊은 호흡에서 느껴지는 뿌듯함이 분명하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 우린 행복하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일곱 대접의 호소(묵시 16,1-9)

일곱 대접이 쏟아지는 것을 두고 잘못한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징벌이나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일곱 대접의 이야기는 성전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로 시작한다. 구약성경 도처에서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한 것이 ‘큰 목소리’(시편 69,25; 예레 10,25; 42,18; 44,6 참조)다. 하느님의 개입이 재앙으로만 읽히는 건 슬픈 일이다. 일곱 대접이 쏟아져 벌어지는 현상이 참혹할지라도, 그 재앙이 가리키는 바가 이 땅의 멸절이나 파괴라는 사실로만 읽힌다면,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은 폭력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건 참 슬픈 일이다. 대부분의 성경 해석이 그렇다. 선과 악,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의 이원론적 사고에 갇혀 해석될 때가 많다. 잘못하면 하느님은 벌을 주시는 분으로 규정하고, 잘 살았다 싶으면 하느님으로부터 큰 상을 당연한 듯 기대하는 신앙은 얄팍한 상술(商術)과 다르지 않다. 일곱 대접의 이야기도 그렇다. 그것이 인간의 악행에 따른 결과론적 징벌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인간의 판단으로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이사 55,8 참조) 첫 번째 대접이 쏟아졌을 때, 짐승의 표를 지닌 사람들과 그 상에 경배한 사람들에게 고약한 종기가 생겼다고 전한다. 탈출기의 재앙과 닮아있는 서술이다.(탈출 9,8 이하 참조) 탈출기의 재앙은 재앙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알림에 가까운 것이었다. 재앙의 적확한 표적은 파라오의 완고함이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짐승의 표를 지닌 사람들과 그 상에 경배한 사람들, 그러니까 하느님과 어린양의 구원과 생명의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재앙이 내린다. 그들은 하느님을 싫어하거나 거부해서 재앙의 대상이 된 게 아니다. 자신들이 바라보고 이해하고 추구하는 것에 열심한 이들이어서 그들에게 하느님은 부수적인 존재였고 좋거나 싫어할 가치 부여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라오의 완고함은 요한 묵시록의 ‘그들’에게도 어김없이 발견되는 것이었다. 완고함은 하느님의 존재 가치와 이유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믿는 이들은 일곱 대접으로 시작되는 재앙의 서술에 대해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구원과 생명이 무엇이냐고, 그 구원과 생명을 거부한 탓이 재앙으로 서술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단순히 하느님께 등 돌린 이들에게 죄와 벌이 떨어져 아픔과 고통이 그들을 덮쳤다는 식의 가볍고 무지한 해석에 더 이상 붙들려 있지 말아야 한다. 사실 재앙의 서술은 묵시 문학적 장치이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도 아니다. 요한 묵시록 5장에서 봤듯이 하느님의 어좌와 어린양의 자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속량되는 자리였고, 7장의 십사만 사천은 한계가 없는 무한대의 구원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자리는 제한이나 한계, 조건이나 자질의 정도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탈출기의 재앙도, 요한 묵시록의 재앙도 잘못 살거나, 실수하거나, 부족하거나, 게으른 이들을 탓하며 징계하는 데 소용되지 않는다. 제 신념과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이 너무나 옳고 분명한 것이라 단정 지은 채, 이웃과 세상에 닫혀 있는 마음을 끊임없이 두드려 유연하게 만드는 도구가 재앙이란 것이다. 탈출기에 자주 반복되는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파라오는 마음이 완고해져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탈출 7,13; 8,15.32; 9,7.12; 10,20.27; 11,10; 14,8 참조) 탈출기든, 요한 묵시록이든 닫힌 마음을 여는 일에 재앙의 서사는 그 수준이 원시적이고 투박한 것이나, 그럼에도 필요한 것이었다. 재앙은 그러므로 징벌이 아니라 구원에로의 호소였다. 둘째 천사와 셋째 천사의 대접도 탈출기의 재앙과 엇비슷하다.(탈출 7,17-21 참조) 바다와 강이 핏빛으로 물드는 재앙은 물을 주관하는 천사를 통해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묵시 16,5-6 참조) 주님께서는 의로우신 심판관이라는 것, 그리고 재앙이 마땅한 것은 성도들과 예언자들이 피를 쏟았기 때문이라는 것. 주석학자들은 요한 묵시록 16장 5절부터 6절까지의 이 말씀이 제단 아래 영혼들이 바랐던 ‘피의 복수’(묵시 6,10 참조)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선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성도들과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그들이 마시는 이른바 복수의 피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고통과 멸망의 길을 걷는다는 것인가. 다만 우리는 6절과 7절의 외침이 하나의 전례적 찬가에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피를 흘리는 현실은 피를 통한 복수로 해결되지 않았다. 성도들과 예언자들은 현실 안에서 여전히 피를 흘리고 그 피에 대한 복수는 요원한 것이었다. 재앙, 징벌 아닌 구원의 호소 자기 신념과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과 이웃 배척하는 자세를 부드럽고 연하게 만드는 도구 다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과 예언자들은 전례적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정의 그것 하나만 갈망할 뿐이었다. 피 흘리는 현실 속 실체적 징벌과 심판을 기대하기보다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신앙적 결기가 전례적 찬가로 뿜어져 나온 것이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되어 마땅합니다”(묵시 16,6)라는 외침은 주님을 위해 흘린 피는 여전히 흘리고 있고 그 피에 대한 대가는 여전히 요원한 것이라는 현실을 끝내 받아들이는 외침이다. 그러므로 어떤 피 흘림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신앙의 마땅함은 늘 그렇게 현실을 이겨내고야 만다. 사실 세상은 꿈쩍하지 않는다. 8절에 이르러 네 번째 대접은 해의 뜨거운 열기로 사람들이 타 버렸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세상은 불에 타도 회개하지 않는다. 징벌이 내려져도 회개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옛날 파라오가 그랬고,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이 그랬고, 오늘날 우리마저 그럴 것이다. 제 지식과 신념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만큼, 우리는 얼마간 완고하고 완고한 만큼, 세상과 이웃에 배타적일 것이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구원은 세상 모든 이에게 향해 있을진대, 우리는 가끔 어설픈 정의감과 설익은 도덕 윤리로 세상을 가르치려 하면서도 정작 세상의 거친 삶에 대해선 거리낌을 가지고 세상에 비켜서서 무릉도원 같은 신앙생활에 익숙할 때가 많다. 잘못 사는 것이 독한 게 아니라 잘 산다고 여기는 그 완고함이 참으로 독한 것이다. 재앙의 서사는 그래서 더 독해지고 더 참혹해야 한다. 아직 세 개의 대접이 남아 있다. 우린 아직 회개해야 할 이유가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일곱 대접의 외침(묵시 15장)

요한 묵시록 15장부터 일곱 대접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앞서 일곱 나팔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한 흐름을 보여주는데, 땅으로부터 시작한 대접은 바다와 강 그리고 해와 관련해서 쏟아지고, 나머지 세 개의 대접은 악의 세력을 징벌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일곱 나팔 이야기에서도 첫 네 개의 나팔과 이어지는 세 개의 나팔이 구별되어 서술되었다. 일곱 나팔의 이야기에서 살펴봤듯이 일곱 대접 이야기의 근저에는 탈출기가 말하는 구원의 가치가 스며들어 있다. 두 개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세부적 표현들은 다르나 서로 다른 주제를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가치를 달리 표현하는 두 개의 해설인 셈이다. 일곱 대접의 이야기는 하늘에 나타나는 ‘크고 놀라운 다른 표징’으로 시작된다. 하늘의 ‘표징’이라는 단어는 요한 묵시록 12장 1절부터 3절에서 여인과 용을 가리키기도 했다. 용의 위협 속에서도 여인으로 상징되었던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보호 아래 구원의 여정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하늘의 표징이란 말마디가 암시한다. 일곱 대접의 시작에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이어지는 사사의 내용이 비록 두렵고 위협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구원의 길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곱 대접의 마지막에서 하느님의 심판이 성취되고 있고 이어지는 17장에서는 악의 최종 상징인 대탕녀 바빌론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어 하느님의 구원은 막힘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우린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의 구원이 악의 세력이나 그 위협 속에 전개되는 것은 요한 묵시록이 보여주는 서사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런 서사의 특징은, 현실이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신앙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편하고 안락한 현실을 보상받는 것으로 구원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일깨운다. 현실의 고통을 하느님 심판의 자리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고통을 피하기보다 오히려 정확히 그 고통에 직면하는 신앙의 결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고통 속에서 신앙의 본질은 더욱 도드라진다는 것이고 구원은 그런 신앙을 지닌 이들이 누릴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요한은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위에 서 있는 승리한 이들을 본다. 유리 바다는 하늘 창공 속의 물을 가리킨다고 여기는데, 문제는 ‘불’이다. 대개는 하느님의 현현(묵시 4,5 참조)이나 정의로운 개입(묵시 1,14; 8,5 참조)으로 해석하면서 얼마간의 징벌적 의미가 ‘불’이라는 단어에 스며들어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3절에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탈출기에 나타나는 홍해 바다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석하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위에 승리한 이들이 서 있는 관계로 옛날 히브리 민족이 노예에서 해방을, 죽음에서 생명을 향해 걸어간 하느님 구원의 여정이 바로 불이 섞인 유리 바다가 가리키는 것이라고. 승리자들은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찔렀다. 짐승은 로마의 권력을 가리켰고 그 상과 그 이름은 두 번째 짐승, 그러니까 첫 번째 짐승인 로마의 힘을 경배하게 만든, ‘현실 논리’의 거대한 힘이라고 앞선 글들에서 언급했다. 로마는 건재했고, 그 힘은 대단했으며, 신앙인은 그 대단한 힘의 현실 논리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무찌른 것’은 없었다. 무찌를 수도 없었다. 승리자는 그러므로 현실 앞에서는 패배한 것처럼 여겨졌다. 불의하고 불편한 현실에서 안락한 보상 얻는 것으로 구원 이해해서는 안 돼 고통 직면해 주님 뜻 구해야 그럼에도 그들이 승리자로 스스로 여긴 것은 ‘수금’을 들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금’과 ‘노래’는 다분히 전례적이다. 현실의 실패는 전례를 행하는 신앙인들의 무리 속에서 승리의 찬가로 탈바꿈한다. 힘든 삶은 전례를 통해 끝내 극복되어야 한다는 다짐이 승리자들의 노래다. 요한 묵시록을 읽고 또 읽은 그 시대의 신앙인은 그렇게 하느님을 찾으며 현실을 버텨나갔다. 수금을 타며 부른 노래는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다. 모세를 통해 히브리 민족의 탈출을, 어린양을 통해 십자가의 예수님이 보여주신 구원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는 구원의 기쁨을 경축하는 노래다. 노래 안에 하느님은 주님이시고 또한 임금님으로 소개된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은 크고 놀랍다.(탈출 15,11; 시편 92,6; 11,2 참조) 하느님은 정의롭고 참되시다.(신명 32,4; 시편 145,17 참조) 하느님은 모든 민족의 임금이시다.(예레 10,7 참조) 하느님 앞에 모든 민족이 와 경배할 것이다.(시편 86,9-10; 말라 1,11 참조)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는 온통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는 구약의 전통으로 꾸며져 있다. 승리자들의 노래는 자신의 승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을 승리로 해석한 것이다. 신앙인의 승리는 맞서야 할 상대를 꺾어 누리는 것이 아니다. 옳지 못한 이들, 불편한 이들을 비난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구원을 갈망하는 것이 신앙인의 승리다. 맞서야 할 상대나 상황이 있다면 오히려 구원의 길을 묻고 사유하며 추구하는 기회라 여기는 것이 신앙인의 승리다. 5절에 증언의 천막 성전이 열린다. 증언의 천막 성전은 히브리 민족이 거쳐온 광야를 떠올리게 한다. 척박한 광야에서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그 천막은 암시한다. 우리의 본문은 천막이란 단어에 바로 이어서 성전이라는 단어를 연결하고 있다. 광야의 천막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난 후 솔로몬에 의해 지어진 성전과 하나 된다. 광야든, 가나안의 복지(福地)든, 하느님은 그분의 백성과 늘 함께하신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 그 천막 성전에서 빛나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두르고 있는 일곱 천사가 등장하는데, 다분히 천상의 구원을 상징하는 차림새의 천사들이다. 그 천사들이 하느님의 분노가 가득 담긴 금 대접을 들었을지라도 천막 성전이라는 하느님 현존의 공간에서 구원의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천사들이 쏟아 놓을 일곱 재앙이 끝날 때,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이 가득한 성전에 비로소 우리는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묵시 15,8; 21,3 참조) 일곱 재앙이 강력할수록 구원을 향한 발걸음은 더욱 힘찬 것이 된다. 일곱 대접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그러므로 구원의 길을 재촉하는 큰 외침일 수밖에 없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20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심판으로 읽고 구원을 생각하다(묵시 14,14-20)

요한 묵시록 14장 14절부터 본격적인 심판의 이야기가 서술된다. 심판을 이야기하는 묵시문학 글들에 습관적으로 혹은 전통적으로 나타나는 말마디들이 요한 묵시록 14장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하느님의 진노, 낫, 불, 피 등 우리가 듣기에 거북하거나 두려운 말마디들이다. 불편한 말마디들 사이에 ‘추수’와 ‘수확’이라는 말마디 역시 자리 잡고 있다. 추수와 수확은 어느 시간의 마지막을 가리킨다. 애써 키운 작물들이 마지막 때에 이르렀다는 것은 성취나 성공의 의미일 텐데, 요한 묵시록 14장의 추수와 수확이란 말마디는 심판 이야기 한가운데 낯설게 버티고 있다. 추수와 수확은 전통적으로 마지막 때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을 가리켰던 말마디라고 해석하나(요엘 4,12-13 참조), 그런 해석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 요컨대 하느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지 않는 이들에게 마땅할 뿐이다.(묵시 14,12) 스스로 믿는 이라 여긴다면, 추수와 수확은 심판과 징벌의 은유로 읽힐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요한 묵시록은 결정적 심판을 19장에 가서야 서술한다. 학자들은 요한 묵시록 14장의 심판에 관한 서사를 19장을 위한 하나의 ‘예변적’ 장면이라 말한다. 19장의 결정적인 심판을 준비하는 경고성 문구들이 14장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요한 묵시록 19장의 심판은 마지막 시간의 근원적 심판, 그러니까 악의 근본적 상징이었던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을 향한 심판이고, 요한 묵시록 14장의 심판은 우상 숭배에 물들어 하느님을 저버리는 인간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대부분의 학자는 심판의 관점에서 요한 묵시록 14장을 다루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러나, 우린 조금 다르게 읽어 보자. 우리가 비록 부족하나마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말이다. 마침 우리가 읽는 요한 묵시록 14장 14절은 ‘사람의 아들’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11장에 이미 나타나기도 한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 나타나는 메시아에 닿아 있다. 심판의 시간에 구원을 가져다줄 메시아의 등장은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 메시아가, 그 사람의 아들이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과 사뭇 달라 당황스러울 뿐이다. 금관을 쓰고 날카로운 낫을 들고 있어, 사랑 가득하고 겸손하며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복음서의 사람의 아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금관을 쓰고 있어 힘이 있는 임금이 떠오르고(묵시 4,4 참조) 날카로운 낫을 들고 있어 두려움이 서려 있는 종말의 심판관이 떠오른다.(요엘 4,13 참조) 구원의 상징이기도 하고, 심판의 주체이기도 한 메시아의 이중적 묘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메시아는 우리의 믿음 여부에 따라 구원자이기도 하고 심판자이기도 해서,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리라.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9) 만약 메시아의 이중적 성격 중 하나를 우리의 행실로 선택 가능하다면, 낫을 휘두르는 사람의 아들이 인자하거나 다정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무서워할 이유가 있을까. 피범벅의 공간 ‘1600스타디온’ 하느님 분노 피할 길 없다는 뜻 주님 심판의 효력 대단할수록 구원 더욱 간절해진다는 의미 나의 행실이 하느님의 계명 안에 있으면 낫을 든 사람의 아들은 오히려 듬직하거나 자랑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사실 낫을 휘둘러 땅의 곡식을 수확하는 것은 전형적인 종말의 선포와 닮았다.(마태 3,12; 9,37; 마르 4,29 참조) 구원받은 이들은 수확의 그 마지막 때에 하느님 품에 안길 것이므로 그들에게 낫을 휘두를 그 마지막 때는 회피가 아니라 갈망의 시간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 묵시록 14장 19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분노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불에 대한 권한을 가진 천사가 낫을 든 천사에게 땅의 포도를 거두라고 명령한다. 불은 징벌을 가리키는 은유이고, 땅의 포도는 징벌을 받아야 할 대상을 가리킨다. 거두어진 포도는 도성 밖 큰 포도 확에 던져진다. 도성을 두고 대개의 주석학자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예루살렘 밖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이민족의 공간이었고(4에즈 13,35; 2바룩 40,1 참조) 요엘서와 즈카르야서는 종말의 마지막 심판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일어난다고도 예언했다.(요엘 4,2.16; 즈카 14 참조) 요한 묵시록 14장의 이런 서사 흐름에서 공간 대립에 대한 관찰은 중요하다. 하느님의 분노는 큰 포도 확을 형용하고 큰 포도 확은 예루살렘 밖이라는 것. 더군다나 도성 밖은 피범벅의 끔찍한 공간이다. 포도 확에서 흘러나온 피가 “천육백 스타디온”이라는데, 한 스타디온이 200m가 조금 안 된다. 1600스타디온은 대략 300km의 거리다. 어떤 이들은 팔레스타인 땅의 북쪽과 남쪽 거리로 300km를 해석하기도 하지만 1600이라는 숫자는 4의 배수(4×400; 4×4×100; 40×40)이고 4가 지리적인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피는 이 세상 모든 곳을 잠식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요컨대 하느님의 분노는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 묵시록 21장과 22장에 가서 천상 예루살렘이 모든 민족을 향한 구원의 자리라는 사실을 또한 만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분노가 온 세상을 덮친다는 것과 그분의 구원이 모든 민족을 향해 있다는 것이 모순 관계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의 안과 밖의 강력한 대립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그 모순은 두 공간의 상생을 통한 하나의 논리로 확연해진다. ‘온 세상의 피범벅’으로 묘사되는 징벌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예루살렘 안의 구원은 더욱 또렷해진다는 것. 예루살렘 밖에 벌어지는 하느님의 심판과 그 효력이 대단할수록 예루살렘 안의 구원은 더욱 값지고 간절해진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우리의 추수는 구원인가, 심판인가. 행여 심판의 두려움으로 요한 묵시록 14장이 읽힌다면, 그 두려움은 불안이나 슬픔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여정을 갈망하는 애절함이 아니겠는가.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9-28 제3460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오십시오!(묵시 14,6-13)

요한 묵시록 14장 6절부터 세 천사가 연달아 나타나면서 메시지를 전한다. 그 메시지는 ‘영원한 복음’에 관한 것인데, 구체적으로 심판, 바빌론의 파멸, 그리고 하느님의 진노를 담고 있다. 이상하다. 복음이란 게 일반적으로 기쁜 소식을 말할 터인데, 심판이니 진노니 하는 말마디들과 함께 이루어진 복음에 대한 서사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교부들, 예컨대 오리게네스는 ‘영원한 복음’을 두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페타우의 빅토리누스는 말라키의 예언(말라 3,5 참조)을 토대로 엘리야의 재림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 영원한 복음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고심해야 한다. 마지막 시간, 영원한 복음을 듣는 이는 ‘모두’다. 복음을 듣는 데 예외로 분류된 사람은 없다. 묵시문학에서 습관적으로 ‘모두’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네 범주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모든 민족, 종족, 언어권, 그리고 백성. 그 모든 이에게 첫 번째 천사는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초대한다. 경외는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 갖추어야 할 자세다.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마지막 시대에 갖추어야 할 자세는 경외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경외는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묵시 4,9.11; 5,12; 19,7 참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경외는 회개와 성찰로 요한 묵시록은 설명한다.(묵시 11,13; 16,9 참조) 경외의 이유와 목적은, 그러므로 하느님이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는 데 있다. 심판이라는 개념 역시 경외의 이해와 맞닿아 있다. 심판은 잘잘못을 가려 이른바 상선벌악의 프로세스만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요한 묵시록에서 심판은 이미 끝났고, 그 자리에 구원이 뚜렷하게 등장한다. 요한 묵시록은 이미 11장 18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민족들이 분개하였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진노가 닥쳤습니다. 이제 죽은 이들이 심판받을 때가 왔습니다. 하느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고 낮은 사람이든 높은 사람이든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모든 이에게 상을 주시고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파멸시키실 때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때를 맞닥뜨린 이들을 향해 요한 묵시록 14장 7절은 이렇게 호소한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샘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여라.” 어떤 상황이든, 심판의 때는 경배의 때이다. 요한 묵시록은 이미 완성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 구원을 굳건히 누리고 지켜야 하는 당위를 심판이라는 말마디로 환기시키고 있다. 요한 묵시록 11장의 두 증인이 그렇고, 14장의 십사만 사천이 그렇고, 구원은 한번 얻어 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줄기차게 구원을 증언할 이들 안에 구체화 되는 것이다. 심판의 때는 구원의 때를 알리는 또 다른 호소다. 8절은 두 번째 천사의 선포를 들려준다. 심판의 끝은 ‘바빌론’을 향하고 있다. 요한 묵시록의 시대에 ‘바빌론’은 존재하지 않은 과거의 제국이었으나 ‘로마’를 빗대어 가리키는 은유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1베드 5,13; 2바룩 11,1 이하; 시빌 5,143 참조) 바빌론은 사라졌으나 로마는 바빌론의 위협을 그대로 간직한 채 요한 묵시록의 시대를 점령하고 있었다. 바빌론은 ‘난잡한 불륜의 술’을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했다. 하느님을 적대시하고 그분의 뜻에 반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전형적 문장이다.(나훔 3,4; 이사 1,21; 23,15 이하 참조) 하느님의 뜻에 반한다는 건, 단순히 성적 일탈이나 윤리적 해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불륜의 술은 일종의 우상숭배를 가리킨다.(예레 51,7 참조) 로마는 위대했고 화려했으며, 그로 인해 매력적인 추앙의 대상이었다. 우상숭배는 쉽게 식별되는 어긋난 것들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원의가 투사되는 ‘좋은 것들’ 안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는 법이다. 9절에 세 번째 천사가 나타나 또 다른 술을 언급하는데, 이번에는 하느님의 진노의 술잔이다. 이 표현은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형이다.(이사 51,17; 예레 25,15; 시편 75,9 이하 참조)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은 요한 묵시록 13장에 서술된 두 짐승을 떠올리는 표현들로 서술된다. 짐승의 표, 짐승의 상을 향한 경배, 그리고 그 짐승들을 따르고 추앙하는 이들이 요한 묵시록 13장에 이미 등장했었다. 신상생활은 예수님 따르는 것 세상 권력과 명예 탐하지 않고 주님에 대한 갈망과 열정으로 현실 논리 내려놓고 비우는 일 진노의 잔에는 다른 어떤 것도 섞이지 않는다.(당시 술을 마시기 위해 향신료 등을 섞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만큼 하느님의 진노는 확실하고 순수해서 우상숭배 하는 이들에겐 결정적이고 불가역적이다.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징벌을 가리키는 불과 유황이라는 말마디까지 곁들여져 하느님의 진노의 확실성을 배가한다.(창세 19,24; 신명 29,22 이하; 루카 17,29 참조) 그럼에도 우리의 희망은 ‘성도’들에게 있다. 성도들은 ‘인내’를 요구받는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바빌론, 짐승으로 대변되는 현실의 논리에 비껴가지 않는다. 현실 논리 안에서 계명과 믿음을 지키는 일은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묵시 1,9; 13,10 참조)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지 현실의 화려함과 부유함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어서 세상의 권력과 명예에 휘청이지 않는다. 요컨대 신앙은 주님 안에 죽는 일이다.(13절) 주님 안에 죽는 일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요한 묵시록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으나, 그 죽음은 좌절이나 실패, 불행이나 슬픔이 아니라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을 만나고픈 그 열정 하나로 현실의 논리를 과감하게 내려놓고 비워내는 나 자신의 해방이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 14장 8절에서 두 번째 천사가 외치는 그 선포는 나의, 우리의 결심이자 신앙의 목표가 된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오늘의 바빌론은 여전히 힘이 있으며, 내일의 바빌론으로 또다시 이어질지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우리 신앙인은 주님 하나로 오늘을, 내일을 살아가기에,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에 수많은 바빌론은 무너진 채로 의미가 없으리라. 우리는 그저 이렇게만 말하면 되리라.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17)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9-21 제3459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십사만 사천의 ‘동정’(묵시 14,1-5)

요한 묵시록 13장의 두 마리 짐승은 단순히 영성적이거나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현실이었고 그 현실의 무게는 꽤나 무겁고 저항하기 두려운 힘이었다. 그래서 ‘땅의 주민들’은 그 현실에 순응하고 말았다. 요한 묵시록 14장은 ‘땅의 주민들’과 다른 ‘십사만 사천’을 언급한다. 요한 묵시록 7장에서 구원을 노래했던 십사만 사천은 하느님 백성이었고 그 백성의 자리는 십사만 사천이 지니는 수적 가치, 그러니까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무한대의 자리였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은 십사만 사천을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했다.(묵시 7,9 참조) 십사만 사천이 두 짐승의 이야기 바로 다음에 등장한다. 현실의 무게 한가운데, 하느님의 백성이 자리 잡고 있다. 십사만 사천은 또한 어린양과 함께 있다. 요한 묵시록 5장 6절에 살해되었으나 서 있던 어린양은 이제 ‘서 있는’ 모습 하나로 소개된다. ‘서 있음’이 부활과 생명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서 있는 어린양은 하느님 백성의 자리가 생명이 가득한 자리라는 사실 또한 은유한다. 더욱이 어린양이 서 있는 공간은 ‘시온산’이다. 시온산은 전통적으로 종말의 순간에 구원이 완성된 공간으로 이해된다.(요엘 3,5 참조) 기다리거나 주저해야 할 시간과 공간은 어린양과 십사만 사천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 여기가 구원이요, 마지막이어서 어린양의 생명과 그 생명을 누리는 십사만 사천은 하나로 영원하다.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는 짐승의 표가 아니라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있다. 성서신학자 로버트 헨리 찰스(R. H. Charles)는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을 받은 십사만 사천을 순교자로 이해한다. 우리는 요한 묵시록 7장에서 십사만 사천이라는 셀 수 없는 무리가 환난 속에서 구원을 외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살폈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의 환난 속에서도 꿋꿋이 제 신앙을 지켜내고 살아 낸 이들이 십사만 사천이었다. 요컨대 요한 묵시록 14장에 나타나는 십사만 사천과 어린양이 머무는 자리 시온은 환난 속에서도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믿는 이들이 하나 되는 현실의 삶 자체다. 본디 그리스도인이든 땅의 주민들이든 삶을 지탱하는 자리는 현실 논리가 맹렬한 이 땅 위에서다. 서로의 체험과 지향이 다를 뿐,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아간다. 누구는 현실 논리를 따라 살지만, 누구는 하느님의 뜻을 골똘히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만들어낸다. 두 짐승이 자리한 가운데, 믿는 이들은 어린양과 더불어 시온산을 기어이 만들어낸다. 하늘에서 큰 물소리 같기도,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목소리는 십사만 사천만이 배울 수 있는 새 노래다. 그 노래는 천상의 전례에 참여한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울려 퍼진다. 우리는 이미 요한 묵시록 5장에서 ‘새 노래’를 맞닥뜨렸다. 요한 묵시록 5장에서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는 어린양의 속량 행위를 노래했고, 어린양을 통한 구원을 확증했다. 요한 묵시록 14장의 새 노래가 가리키는 것 역시 어린양의 구원 업적에 대한 칭송이라 학자들은 추정한다. 요한 묵시록 5장에서 어린양의 피로 속량 된 세상의 모든 민족과 땅으로부터 속량 된 십사만 사천은 새 노래를 중심으로 하나다. 이를테면, 새 노래는 통합의 노래다. 지난 노래와 구분되어 배타적인 노래가 아니라 우주를 품듯,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구원의 자리로 이끄는 통합의 노래다. 그리하여 보편적 숫자인 십사만 사천만이 배울 수 있다. 보편은 보편이 담을 수 있다. 4절부터 십사만 사천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와 ‘더불어 몸을 더럽히지 않은, 동정’을 지킨 사람들이라 규정한다. 다분히 성(性)적 절제주의나 금욕주의를 떠올리는 말마디인데,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록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낯선 표현이다. 현대에 와서 이 대목은 안티페미니즘(반여성주의)으로 해석되어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오히려 쿰란 공동체의 절제주의에 부합하는 ‘동정’이란 말마디를 우린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예수님을 따르고 구원에 합당한 이들은 금욕이나 절제를 생활화해야 한다는 뜻일까. 십사만 사천은 곧 하느님 백성 이마에 성부와 성자 이름 받고 세상 환난에서도 ‘어린양’ 따라 꿋꿋이 신앙 지켜낸 순교자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과 구원의 문제를 연관시켜 해석하는 일은 요한 묵시록을 읽는 데 합리적이지 않다. 요한 묵시록은 남녀의 관계나 성적 문제 등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묵시 6,15 참조) 다만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스스로 동정을 지켜 거룩해지는 이들에 대한 칭송을 엿볼 수 있다.(마태 19,12; 1코린 7,1.8.26 참조) 이는 육체적 관계에 대한 비난이나 폄훼가 아니라 거룩함에 대한 열정에 방점이 찍혀 해석되어야 한다. 요컨대 다른 것으로 참된 신앙이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것. 4절의 ‘더럽히다’라는 동사 ‘몰뤼노(μολύνω)’는 ‘얼룩이 지다’라는 뜻으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축제와 제사에 참여하여 그 고기와 음식을 먹는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할 때 이 동사를 사용하기도 했다.(1코린 8,7 참조) 요한 묵시록은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니콜라오스파에 물들지 않는 성도들을 ‘자기 겉옷을 더럽히지 않는’ 이로 소개한다.(묵시 3,4 참조) 17장에 가서 타락한 로마 제국의 사치를 언급하면서 ‘대탕녀’라는 여인을 등장시키는데, 이것 역시 여성에 대한 폄훼가 아니라 하느님과 대척점에 서 있는 불신앙의 은유로 사용했다. 에우세비우스가 쓴 「교회의 역사」는 베티우스 에파가투스가 순교하기 전 남긴 말을 이렇게 전한다. “그는 어린양이 가는 어느 곳이든 따라간다.”(「교회의 역사」 5,1.10) 십사만 사천은 어린양이 가는 길, 곧 순교의 길을 걷는 이들이다. 순교의 길은 거짓이 없고 거짓 우상에 물들지 않는다.(이사 44,20; 57,4; 예레 3,23; 13,25 참조) 십사만 사천의 동정은 현실 한가운데 하느님의 자리와 그분의 뜻을 결코 잊지 않는 우리 신앙인의 결기와 다르지 않다. 두 짐승이 설쳐대는 현실 안에 신앙은 참으로 힘든 것이지만 참으로 의미 있는 것임은 틀림없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9-14 제3458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현실 논리라는 짐승(묵시 13,11-18)

두 번째 짐승은 땅에서 올라온다. 사탄의 세력을 가리켰던 바다가 아니라 인간이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땅 위에서 두 번째 짐승이 올라온다. 어린양처럼 뿔이 있으되 두 개밖에 없고, 용처럼 말하되 용은 아닌, ‘~처럼’으로서 묘사되는 두 번째 짐승은 저 스스로의 모습이 빈약한, ‘허상’(虛像)의 존재다. 두 번째 짐승의 역할은 다분히 종교적이다. 첫째 짐승을 온 땅과 땅의 주민들이 경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일이다.(묵시 13,12 참조) 이 경배는 실은 속이는 일이기도 했다.(묵시 13,14 참조) 경배는 진실된 것이 아니라 속이는 것이어서 두 번째 짐승을 두고 ‘가짜 예언자’로 해석하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초대 교회는 가짜 예언자로 몸살을 앓았다. 두 번째 짐승은 초대 교회의 가짜 예언자를 은유하는 표현들로 꾸며진다. 예컨대, 큰 표징과 불(묵시 13,13 참조). 큰 표징을 보여주는 일은 종말의 순간에 거짓 그리스도, 거짓 예언자들이 행하는 것으로 서술된다.(마르 13,22; 2테살 2,9-10 참조) 기원후 3세기에 콥트어로 쓰인 엘리야 묵시록 3장에서도 거짓 그리스도 혹은 적그리스도(요한의 첫째 서간에서도 다루고 있다)가 등장하는데, 물 위를 걷거나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여러 이적들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짐승은 또한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리기도 한다.(묵시 13,13; 1열왕 18,38; 2열왕 1,10 참조) 예언자들의 대표 격인 엘리야를 흉내 내는 두 번째 짐승은 하느님을 알리고 선포하는 참된 예언자가 아니라 용‘처럼’ 말하는 ‘가짜 예언자’의 전형이다. 두 번째 짐승의 공간이 ‘땅’이란 이유로 역사 비평적 주석은 소아시아의 사회적, 종교적 상황에 주목한다. 요한 묵시록의 시대에 소아시아는 황제와 여러 신들을 향한 숭배와 제사 등이 일상의 주축이었다. 현대인이 이해하는 단순한 종교적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은 신의 세계가 이 세상에 구현되어 세상살이의 확실한 보증이 되길 바랐다. 거기에 황제 숭배와 여러 신들에 대한 경배는 사회 일반의 ‘당연함’으로 기능하였다. 사회 일반이 그러하다면 여러 신전의 건축과 그에 따른 예식과 제의 등의 참여와 실천은 현실의 상식 그 자체다. 여러 표징을 보여주고 짐승의 상을 세우라고 말하는 두 번째 짐승은 이러한 당시 사회 일반의 ‘당연함’을 더욱 당연하게 만드는 사회의식을 반영한다. ‘표징’과 ‘상’에 관련해서 주석 학자들은 당시 그리스도교 신앙과 대립하는 마술쟁이를 언급한다. 사도행전에도 바르예수라는 마술쟁이로 소개되기도 한다.(사도 13,6 참조) 마술쟁이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거짓 예언자의 또 다른 표상이어서 주석학자들은 요한 묵시록의 두 번째 짐승을 인간 세상 안에 횡행하는 악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 낸다. 그러나 두 번째 짐승을 하느님과 대적하는 악의 은유, 혹은 하느님을 향하는 정통 신앙에 벗어난 이교나 이단 정도로 해석해 버리는 것은 너무 편협하거나 게으른 일이 아닐까.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복잡한 논리를 초월적 신에 대한 신앙 정도로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규정하는 건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다. 하여, 우리는 두 번째 짐승을 통해 이렇게 질문하고 해석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이른바 ‘현실 논리나 상식’을 근거로 신앙적 가치를 적당히 가미시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말이다. 현실의 모든 표징과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는 일은 현실의 논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틈바구니 안에 하느님이 어떻게 소외되고 상처 입는지 밝혀내는 지난한 순교의 여정이기도 하겠다. 많은 경우 우리는 과학을 믿는다고 하지만 또 많은 경우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이유로 속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우려한다. 가톨릭 신앙을 가지면서도 세속의 정신문화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에 우려한다. 예를 들어, 성공과 행복이 거의 신앙화 되어 있는 오늘, 신앙 역시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만 기능한다는 사실. 고통과 슬픔, 혹은 불안과 우울에 대해선 신앙적 고민이나 사유가 배제된 채 패배의식이나 죄의식으로만 분리되어 처리된다는 사실. 큰 표징 앞세운 거짓에 속아 짐승의 ‘표’ 받는 땅의 주민들 현실 논리나 상식에만 기대어 신앙 외면하는 우리와 닮아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았고, 자기의 핏값을 치러 세상 모든 민족을 속량한 어린양이었다. 어린양의 핏속에 제 겉옷을 빨아 희게 만드는 것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참된 성도이기도 했다. 번듯한 삶과 행복한 삶은 적어도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에겐 관심사가 아니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살아가는 시대, 로마의 권력과 상업적 성공 앞에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은 “나도 잘 살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로마의 현실 논리에 뒤섞이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세상에 실패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분처럼 죽어가는 것을 힘겹지만 기꺼이 받아들이길 빌고 빌었다. 그렇게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은 현실 논리와는 멀어져도 한참 멀어진 곳에서 기어이 현실을 살아내고 있었다. 반면, ‘땅의 주민들’은 거의 모두 짐승의 표를 받는다.(묵시 13,16 참조)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표를 받는다. 그 표를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사거나 팔지 못한다.(묵시 13,17 참조)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현실 논리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짐승은 그 현실 논리의 ‘어쩔 수 없음’을 너무나 강력하게 증거하고 책동한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지혜로워야 한다.(묵시 13,18 참조) 요한 묵시록 17장 9절에 로마의 사치를 가리키는 대탕녀 바빌론이 등장할 때도 우리의 요한 묵시록은 지혜로운 마음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를테면, 666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 짐승은 666이다. 6이란 숫자가 악마적 요소를 지니고 그것이 세 번 반복한다고 해서 악의 본령으로 해석하는 고전적 경향이 아직 뚜렷하다. 그러나 666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악을 대변하지 않는다. 요한 묵시록은 분명히 ‘사람’이라고 밝히기 때문이다. 역사 비평적 관점은 그 사람을 로마의 황제들 혹은 로마 제국 자체로 해석하기도 한다.(묵시 17,11 참조) 그만큼 요한 묵시록의 시대를 살아간 신앙인에게 로마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역설적이게도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악의 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현실 논리’ 속에 우리의 666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현실이 그런데 어떡해?!’라는 우리의 자조(自嘲) 속에 666은 여전히 살아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9-07 제3457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첫 번째 짐승의 입(묵시 13,5-10)

짐승의 입은 모독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큰소리를 지르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짐승의 입은 구약의 다니엘서가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가리킬 때 사용한 작은 뿔이 지닌 ‘큰 입’과 같다.(다니 7,8.20 참조) 다니엘서의 ‘큰 입’은 하느님께 드리는 이스라엘의 제사를 금지시켰고 나아가 하느님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했다.(다니 7,25; 1마카 1,24; 다니 7,25; 11,36 참조) 요한 묵시록의 ‘큰 입’은 다니엘서의 ‘큰 입’과 같다.(묵시 13,5 참조) 요한 묵시록의 첫 번째 짐승의 입은 ‘주어져 있다’. 그리고 주어진 권한은 마흔두 달이라는 시간으로 한정되어 있다.(앞서 우리는 ‘마흔두 달’이란 시간이 기원전 2세기 중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 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주어졌다’라는 수동태 형식의 표현을 학자들은 ‘신적 수동태’라고 일컫는다. 짐승은 하느님을 거스르되, 자신이 가진 고유한 권한이나 권능이 없다는 것. 모든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 아래 놓인 것이고, 그러므로 첫 번째 짐승의 권한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 신적 수동태의 형식을 빌려 요한 묵시록은 짐승이 내뱉는 모독의 언사에 힘을 빼고 있다. 말은 있으되, 힘이 없는 말. 말의 크기는 거창하되, 그 실속은 너무나 하찮은 것이 첫 번째 짐승의 ‘큰 입’이다. 짐승은 하느님만이 아니라 그분의 ‘거처’를 모독한다. ‘거처’로 번역한 그리스말은 ‘천막’으로도 번역되는 ‘스케네’(σκηνή)이다. 요한 묵시록 7장 15절은 어좌에 계신 분이 십사만 사천의 ‘천막’이 되어주신다고 서술한다. 요한 묵시록 21장 3절은 하느님의 거처가 사람들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거처는 천상이 아니라 이 땅, 이 삶의 자리다. 요한 묵시록은 이른바 ‘육화 사상’을 전제로 하느님을 생각한다. 육화하신 하느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은 하느님의 거처가 된다. 천상은 지상 안에 온전히 구현된다. 짐승이 하느님의 거처를 모독하는 건 하느님을, 동시에 그분의 백성과 이 세상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길 것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스릴 권한을 받는다.(묵시 13,7 참조) 다니엘서 7장 21절을 그대로 옮겨온 표현이고 요한 묵시록 12장 17절의 용을 그대로 모방한 표현이기도 하다. 신앙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처절히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는 것이 짐승의 승리가 가리키는 바다. 많이들 경험하지 않는가, 신앙인은 참고 희생하고 그러므로 손해 보는 일이 많다는 것을. 사실 예수님도 그러했다. 십자가를 짊어지면서 세상에선 실패했다. 세상의 힘에 짓눌렸고, 세상과의 싸움에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했다. 성도들의 운명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상 논리 앞에 신앙은 실패와 패배의 어리석음이라 여겨도 무방하리라.(1코린 1,21 참조) 땅의 주민들이 짐승을 경배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묵시 13,8 참조) 세상은 그렇게 힘이 있어 보이는 권력자에게 경배한다. 우리는 그것을 탓할 수 없다. 땅의 주민들은 ‘모두’ 짐승에게 경배한다. 그들 ‘모두’는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묵시 13,8 참조) 생명의 책과 관련해서 결과론적 해석이 난무한다. ‘착한 일’,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다는 윤리 도덕적 지침의 실천 여부가 생명의 책에 기록될 가능성을 가늠한다. 절대적인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는 조건이 된다면, 시대가 다르고 문화나 관습이 달라 어느 시대는 옳지만 다른 시대에는 허용하지 않는 상대적 규범들에 대해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생명의 책이 인간의 행동 방식이나 선택에 따라 그 허용 범위가 달라지는 책으로 인식하는 건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생명의 책을 인간 인식이나 행위의 수준에서 다루는 가벼운 생각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한계가 지워지고 익숙한 경험치에 의존하는 인간의 행동 방식과 어린양의 생명의 책을 연계해서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영원하시고 초월적인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 모독하는 짐승의 입 거창하지만 실속은 하찮은 것 세상의 권력과 흐름 따르기보다 존재 성찰하며 하느님 뜻 찾아야 하여, 우리가 주목할 표현은 이것이다. “세상 창조 이래”라는 표현.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은유일 때, 생명의 책은 세상 창조의 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보증하는 상징이 된다. 요한 묵시록은 3장 14절에서 예수를 가리켜 하느님 창조의 근원이라 밝혔다.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인간의 행동 방식에 따른 결과론적 심판이 아니라, 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해석되어야 한다. 생명의 책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이고 그 갈망은 근원적이고 운명적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 존재하고 있고, 존재함으로 생명의 책과 끊어내려야 낼 수 없는 필연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기에. 그렇다면, 짐승을 따르고 경배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 존재의 근본을 잊(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제 존재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이리저리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떠넘겨버리는 일, 그것이 짐승을 경배하는 일이 된다. 사실 어린양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창조주 하느님의 구원과 그분을 향한 경배로 불렸다.(묵시 5,6 참조) 이러한 구원의 섭리는 인간의 몇몇 행동으로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보다 더 강한 권능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건 불가능하지 않는가. 다만 구원을 받았음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통해 구원을 지향하는 것, 그것은 무지한 일이지 악한 일은 아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알기 이전에, 제 인식의 수준과 넓이와 깊이가 부족함을 알고, 진정으로 저 자신이 무엇을 디디고 서 있는지를 아는, 자신에 관한 공부이기도 하겠다. 그 공부의 끝에 하느님은 비로소 발견된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8-31 제3456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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