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어린양의 삶과 죽음(묵시 5,6ㄴ-14)

어좌 한가운데 자리 잡은 어린양은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살해된 것처럼 서 있는’(ἑστηκὸς ὡς ἐσφαγμένον) 어린양이 과연 가능한가. 죽었는데 서 있는 게 가능한 일일까. 주석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하여 어린양의 모순적 양태성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어린양은 분명 죽었고, 또한 분명 살아 있다. 죽음과 삶은 물리적 시간의 전후에 머무르지 않는다. 죽음과 삶은 하나다. 흔히들 말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요한묵시록의 어린양은 이러한 이분법적 신앙 고백엔 그리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요한묵시록은 삶을 죽음의 대척점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모두가 승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죽음을 물리친 자리가 아니라 여전히 죽어가는 자리를 동시에 껴안는 자리로 묘사된다. 그 이유는 너무나 뚜렷하여 선명하다. 우리 주 예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여전히 세상의 찬바람을 끝끝내 버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사라진 게 아니다. 영원한 생명을 살아내는 신앙인 곁에 예수님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 위에 포개져 사유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양’의 형상은 단순히 역사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을 놓고 고민한 결과가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위에 신앙인의 삶과 죽음이 포개져 ‘어린양’의 형상으로 소개된 것이다. 문법적으로 살펴봐도 그렇다. ‘살해된 것처럼 서 있는’으로 번역된 분사 형태의 동사들은 어린양을 꾸미는 형용사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스말은 남성, 여성, 중성을 문법적으로 구별하는데, ‘살해되었다’는 동사는 남성형 분사다. ‘어린양’(ἀρνίον)은 중성 명사이기에 중성인 명사와 남성인 동사의 결합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이다. ‘살해되었다’는 동사가 남성형이라서 몇몇 주석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어린양을 통해 바라보지만, 중성인 어린양에 대한 해석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욱이 ‘살해되었다’는 동사는 ‘스파조’(σφάζω)로 쓰여있다. 목을 잘라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다. 살해된 어린양을 굳이 예수님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한묵시록은 11장의 두 증인 이야기에서 주님의 죽음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이 잘려 죽은 이는 누구일까. 어린양이 중성 명사라면 굳이 남성으로서의 예수님만을 언급하기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예수님의 죽음에 신앙의 증거로 함께 한 모든 순교자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예수님의 죽음은 실은 많은 신앙의 증거로 피가 끓어오르는 생명의 자리가 아닐까. 어린양은 예수님을 증언한 신앙인의 숱한 죽음 위에 새롭게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역사적 사실관계에 머물러 성경을 읽다 보면 무리수가 발생한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신앙의 해석과 상상을 가미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역사의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모든 신앙인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은 그분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그분의 죽음마저 우리에겐 생명의 선물로 사유하고 상상하는 자유를 어린양을 통해 마련하신다. 예수님을 두고 상상을 펼쳐나가는 요한묵시록 5장은 6절 후반부터 우주론적인 차원으로 뻗어 나간다. 권능을 가리키는 뿔과 지혜를 암시하는 눈을 각각 일곱 개씩 가진 어린양은 하늘과 땅을 이어놓는 친교의 상징체로 소개된다. 어린양의 일곱 눈이 온 땅으로 파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공간은 천상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양의 눈은 땅으로 파견되어 하늘과 땅이 어린양의 형상 안에 통합되는 것이다.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는 이러한 친교와 통합을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묵시 5,9) ‘주님의 피로’라고 번역된 그리스말은 ‘너의 피로’(ἐν τῷ αἵματί σου)라고 되어 있다. 천상의 ‘어린양’은 지상을 대표하는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에게 ‘너’라는 친근한 이웃이 된다. 어린양은 자신의 희생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을 하느님께 이끌었다. 묵시문학은 ‘모든’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네 가지 범주로 표현하는 습성을 지닌다. 모든 민족이라고 해도 충분할 터인데, 굳이 종족, 언어, 백성, 민족으로 구별하여 표현한다. ‘모든 이’가 진정으로 ‘모두’, 어린 양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으로 어린양을 통한 신앙의 상상은 마무리된다. 천상의 주님이 지상의 ‘너’가 되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너의 피’, 곧 예수님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속량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말 동사 ‘아고라조’(ἀγοράζω)는 다분히 상업적 의미를 지니는데,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물건을 구입할 때 사용하는 동사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희생을 부정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한 필연적 과정 혹은 치러야 할 대가를 말할 때 이 동사를 사용한다.(1베드 1,18 참조)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거저 우리 사람을 구원하신 게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라서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신 게 아니란 말이다. 하느님은 참된 인간으로서 바보 같은 죽음을 맞닥뜨리셨고 바보같이 돌아가셨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친교의 원동력은 끝없이 내려놓고 비워내고 스스로를 대가로 지불하는 하느님의 바보 같은 사랑 덕분이었다. 예수님은 오늘도 어린양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에게 주어진 나날들은 실은 죽어가는 시간의 연속이다. 죽음이 생명일 수 있는 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이 세상 모든 이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봉인을 열어 보이실 어린양은 그러므로 새롭고 신비한 천상의 놀라움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끝내 살아내는 숱한 일상의 희로애락을 다시금 살펴보게 할 것이다. 그 일상이 죽음을 향할지라도 우리 믿는 이들에겐 천상이요, 생명이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3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한가운데 더불어 하나 되는(묵시 5,1-6ㄱ)

요한묵시록 5장의 주된 질문은 이러하다.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묵시 5,2) 어린양의 등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하늘과 땅 위, 땅 아래 모든 곳을 살펴봐도 오직 어린양만이 봉인을 펼 수 있다고 서술한다. 요한묵시록 5장의 서술은 어린양에게 집중된다. 요한은 어린양을 찾을 때까지 울었다.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울음’은 어린양에 대한 집중도를 더욱 부각시킨다. 천상의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향한 시선이 어린양을 향해 변화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구약의 하느님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어좌에 앉으신 분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가 어린양에게 전해진 건, 요한묵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느님 섭리의 연장이고 완성이라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루마리는 안과 밖으로 쓰여 있는 글묶음이다. 전통적으로 안의 것을 신약성경으로, 밖의 것을 구약성경으로 이해하곤 했다. 이미 알려진 구약의 내용을 신약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 주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라틴 교부들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설명하는 유명한 문구와 일맥상통하는 해석이다. “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신약은 구약 안에 숨겨져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밝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해석은 요한묵시록 5장의 서사 흐름과 얼마간 상이한 점이 있다. 어린양에게 주어진 두루마리는 ‘읽히기 위한 글묶음’이 아니다. 진즉에 주어진 질문은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는 이’를 찾는 것이었다. 어린양은 물론이고 요한묵시록은 두루마리 안과 밖의 내용에 대해선 침묵한다. 두루마리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열리는 것의 상징이다. 그리고 열기 위해 등장하는 어린양이 누구인지에 대한 읽기가 우선이어야 한다. 어린양은 사자와 연동되어 서술된다. 전통적으로 메시아와 그 집안을 가리켰던 힘센 사자가 요한의 눈에는 어린양으로 나타난다. 사자와 어린양은 힘의 구도 속에 공존할 수 없는 두 동물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구약의 전통과 신약의 새로운 해석이 서로 부딪히나 그럼에도 만나고 있음을 감지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 인간의 새로운 해석과 상상 안에 다양한 상징과 은유로 서술되고 전파된다. 미국의 성경학자 웨인 A. 믹스(Wayne A. Meeks)는 한 세미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은유의 상징으로 소개했다. 그 자리에서 다른 성경학자는 은유라는 표현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비판의 요지는 “십자가는 문자적 사실”이라는 것. 사도 바오로에 의해 십자가가 소개되고 서술되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사실적 요소를 바탕으로 적혀졌다는 이른바 역사비평적 견해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 비판에 웨인 믹스는 이렇게 답했다. “십자가가 은유가 아니라면 그저 나무 두 토막을 겹쳐놓은 것 뿐”이라고. 개인적으로 웨인 믹스의 견해는 요한묵시록을 읽는 데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수많은 시간들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새로운 은유와 상징으로 신앙인들 안에 소개되고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의 글과 표현에 얽매여, 그 글과 표현을 ‘사실’이라고 우겨대는 완고함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하느님을 인간의 한계지워진 인식과 사유 안에 가두어 버리는 교만일 뿐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하느님은 또 어떤 식으로, 어떤 상징으로 해석될 것인지, 그리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좀 더 가까이, 그들의 폐부 깊숙이 닿아 있는 하느님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 교회는 고민해야 한다. 사자를 어린양으로 새롭게 소개하는 요한묵시록의 해석을 좀 더 세심히 살펴보자. 어린양은 홀로 자랑스런 사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어린양의 공간적 형식을 가리키는 ‘한가운데’(ἐν μέσῳ)라는 말마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 성경 번역은 어린양의 공간을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로 해석하지만, ‘사이’가 아니라, ‘한가운데’이다. 어린양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어좌에 앉으신 분과 지상의 하느님 백성인 스물네 원로, 어디든 계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현존을 가리키는 네 생물과 ‘하나의 공간’ 안에 함께한다. 그러니까 어린양은 특정 공간이나 지위를 바탕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어린양은 시공간의 배타적 인물이 아니라 모든 시공간을 아우르는 친교의 장으로서 현존하시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 저런 분이시다 고백하는 건 쉬운 일이나 이런 분도, 저런 분도 되신다는 사실을 겪는 건 때론 고통스럽다. ‘내가’ 찾아 나서는 메시아가 뚜렷할수록, ‘우리의’ 메시아는 흐릿해질 수 있다. 예수님은 특정 개인의 구세주가 아니라 선인이나 악인이나, 죄인이나 의인이나, 아픈 이나 성한 이나 모두에게 구세주라는 사실은 때론 따뜻한 이야기이나 때론 불편하여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나와 불편한 이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사랑으로 다가오신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 하는 신앙의 당위이지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거북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린양을 살펴본다는 것은 긴 호흡과 용기를 필요로하는 일인지 모른다.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오늘의 예수님은 또 어떻게, 어떤 이들을 향해 당신의 보편적 사랑을 전개하고 펼쳐나가실지 질문해 본다. 민감하여 함부로 이야기하기 힘든 정치, 경제, 사회의 이슈들로 우리나라가 오늘처럼 두 쪽으로 완전히 갈라진 험악한 순간에도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실지 고민해 본다. 뜻이 안 맞는다며 내뱉는 단절과 배타의 언어에 우리는 참담했고, 그로써 우리는 조금씩 안정과 평화를 이 나라 이 땅에 만들어갈 것이다. 어린양은 늘 우리 ‘한가운데’ 저 혼자 돋보이지 않고 더불어 하나 되는 데 당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실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라오디케이아에 보내진 편지(묵시3,14-22)

라오디케이아는 기원전 3세기 안티오쿠스 2세에 의해 건립된 도시다. 에페소와 동쪽 지역을 잇는 도로 가운데 위치하여 상업적으로 번성한 곳이었다. 로마의 문인 키케로에 의하면 라오디케이아는 재정과 금융의 주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섬유 산업, 특별히 양모 산업이 발달했고 귓병에 좋다는 고약과 눈병에 좋다는 약재도 라오디케이아에선 유명했다. 우리가 읽는 편지도 안약을 언급하고 있다. 라오디케이아는 경제적으로 강했고 그로 인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묵시 3,17)라고 할 만큼. 그러한 라오디케이아는 60년경 지진으로 몰락하고 만다. 교회공동체에 전해진 우리의 편지도 부유함, 혹은 풍족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자만과 우월 의식에 대한 비판이 편지가 쓰인 동기 중 하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아들’은 ‘아멘’(ἀμήν)으로 소개된다. 신약성경에서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을 두고 ‘아멘’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탈리아의 요한묵시록 전문가인 우고 바니(U. Vanni)는 ‘아멘’이라는 호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하나 됨’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신앙 공동체와 하나 되어 육화하신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것. 편지가 교회공동체 내의 자만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상관없는 이를 향한 일갈이 아니라 자신과 하나 된 이를 생각하는 애틋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창조의 근원’으로 소개된다. 유다 사회는 창조 때의 하느님을 지혜와 연결하여 사유하곤 했다. 예컨대 잠언 8장 22절부터 23절까지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특별히 사도 바오로에 의해, 창조의 근원으로 예수님을 상정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15-16) ‘아멘’으로서, ‘창조의 근원’으로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 되어 모든 시공간, 그리고 만물을 또한 하나로 엮어내는 분이시다. 요컨대 사람의 아들은 ‘모든 것의 정점이자 모든 것, 그 자체’로 소개되신다. 모든 것은 부분적인 것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 됨은 갈라짐을 배제한다. 다른 어떤 것에 휩쓸리거나 다른 무엇이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을 흔드는 경우는 없어야 했다. 그러나 라오디케이아는 “미지근”(묵시 3,16)했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은 ‘적당한 수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노시스, 그러니까 영지주의적 사고에 젖은 신앙 공동체를 향한 비판이라 해석한다. ‘미지근’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에 세상의 가치가 혼재되어있는 상태를 말한다. 교회는 옳고 세상은 그른 것이어서 그른 것이 옳은 것을 침탈하고 방해한다는 이원론적 혼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올바름과 신앙의 올바름, 세상의 지고한 지혜와 신앙의 지혜를 분별없이 무턱대고 동일시하는 이른바 ‘혼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테면 세상과의 호흡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세상과의 불협화음보다는 친교와 사랑, 그리고 화해의 이름으로 세상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자세로 인식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 중에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세상에 맞서지 말고, 우상숭배든 황제숭배든,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적당히 세상의 분위기에 젖어 들 줄도 알아야 현명한 신자’라는 것. 이것은 함께 호흡하는 게 아니라 타협하는 것이었다. 어정쩡한 신앙의 고백은 신앙의 본질을 비껴가서 세상과 교회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것을 더 알고, 세상과 타협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훌륭하고 모범적으로 산다는 것은 대체로 좋은 일이나, 그러한 것이 신앙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것에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 외경 중 하나인 토마스복음에 따르면,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은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체가 되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토마스복음 21,37 참조) 우리가 얼마 전 읽은 스미르나에 보내진 편지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있다.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묵시 2,9) 초대교회는 세상의 물질적, 혹은 정신적 성장과 부유함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세상보다 더 깊고 넓은 지혜를 소유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 속 가장 낮은 곳에서, 때론 숨죽이고 때론 저항하며 버텨내는 삶을 살아서 그렇다. 세상이 모두 옳고 그름을 논박하며 가장 멋진 삶, 가장 훌륭한 삶을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살아내느라 세상의 손가락질과 모욕을 참아내며 살아야 했다. 죄지은 자, 병든 자, 세상의 상식에 벗어난 자를 ‘형제’요, ‘자매’라고 칭하며 어떻게든 용서와 화해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세상의 모욕은 신앙의 부유함이었고 풍족함이었다. 세상의 지혜와 부유함이라는 겉옷 위에 신앙을 액세서리로 꾸며내는 일보다는 우리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하느님 앞에 진정 부유한 일이다. 사도 바오로는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다”(콜로 2,3)고. 우리에게 진정 보물은 무엇인가. 우리의 편지 안에서도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고 함께 먹고 마시는 일(묵시 3,20 참조), 예수님의 어좌에 함께 앉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묵시 3,21 참조)이 그것이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요즘 자주 묻는다. 담배 끊고, 술 끊고, 심지어 피정의 이름으로 효소 단식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잦다. 제 한 몸 가꾸는 일이야 현대인의 필수 덕목에 가깝지만, 우리의 신앙이 제 마음의 평온이나 제 몸의 가벼움에 집중하는 일인가 자주 묻게 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배고팠고 예수님도 그랬다. 수많은 신앙의 증거자는 생명에 배고파 생명을 내던졌고 세상에 실패하며 신앙 안에 승리했다. 세상을 평온히 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한다면 우린 왜 성당에 다녀야만 하는가, 나는 자주 묻게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묵시 3,7-13)

필라델피아는 다른 곳과 달리 상대적으로 늦게 건설된 도시다.(기원전 2세기 중반) 페르가몬의 왕이었던 아탈로스 2세 필라델피아에 의해 세워져 그의 이름으로 불린 도시였다. 기원후 17년경 지진으로 무너진 후,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기도 했다. 화산이 많은 지역이라서 약한 지진이 빈번했지만 비옥한 토양이 있어 여러 도시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교회와 관련해서는 스미르나에서 폴리카르포가 순교할 때, 필라델피아의 그리스도인 열한 명이 함께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신앙에 관한 한, 필라델피아는 순수했고 열심이었다. 그래서일까.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에는 비판이나 꾸지람이 없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라고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문의 형상에 빗대어 열고 닫는 데 절대적 권능을 가진 이로 묘사된다. 문을 열고 닫는 권능의 이야기는 엘야킴에게 왕국의 권력이 이양되는 장면에서 나온다.(이사 22,22) 엘야킴에게 문을 열고 닫는 데 필수적인 다윗의 열쇠가 주어지는데, 하느님의 구원이 다윗 가문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은유의 표현이다. 요한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 가문 안에 배치한다.(묵시 3,3; 22,16)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 안에 수렴되고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주어진 문은 ‘열려진 문’(묵시 3,8)이다. 이제 문은 닫힐 리가 없다.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은 열려진 문이라는 형상을 통해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 바오로 사도 역시 ‘열려진 문’을 복음 선포의 보편성을 가리킬 때 사용했지 않던가.(1코린 16,9; 2코린 2,12; 콜로 4,3) 요한묵시록 21장에 가면 천상 예루살렘의 문도 사방으로 모두 열려 있다. 사실, 필라델피아는 ‘힘이 약하다.’(묵시 3,8) 모든 것을 감내하고 모든 이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필라델피아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내는 데는 실패하지 않았다. 약한 힘이 믿음을 지켜내는 데는 강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물이 아닐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징한 일이다. 믿음의 단순성은 주변 것들에 휘둘리는 일희일비의 가벼움을 걷어내는 것이기도 하겠다. 우리의 편지는 10절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네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우리말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다시 고쳐 번역하자면 이렇다. ‘왜냐하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으니…’가 된다. ‘나의 인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킨다. 본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당연한 운명으로 이해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세상살이 자체가 그리스도인들의 자리고 그 자리는 악을 제거하고 비워낸 천상이 아니라 악과의 투쟁 안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갈망하고 찾아 나서야 하는 자리다. 필라델피아 교회도 ‘땅의 주민들’의 시험 안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묵시 3,10) 세상의 우상숭배와 악함을 말할 때 사용된 ‘땅의 주민들’은 필라델피아 교회가 살아내고 있는 ‘삶의 자리’다.(묵시 6,10; 8,13; 11,10; 13,8.12.14; 17,2.8)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 한 분을 향한 단순한 일이라면 우리 생애의 복잡다단한 일들은 대부분 부수적인 것이 된다. 부수적인 것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경우도 많다. 상대적인 것들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제 인식을 진리의 기준으로 착각하며 행동하는 가벼움이 이 세상을 갈라놓고 찢어놓는다. 과연 우리는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내 삶의 조각들’로 여기는가. 주어진 조각들 하나하나를 예수님을 향해 맞추는가. 아니면 이런저런 조각을 내던지며 있지도 않을 새로운 조각을 갈망하며 애태우는가. 필라델피아 교회는 수많은 삶의 조각들을 제 것으로 당겨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내었다. 오직 예수님을 갈망하며. 그래서 필라델피아 교회는 참된 유다인이다.(묵시 3,9) 세상이 유다인이라고 인식하는 혈육의 유다인을 ‘사탄의 무리(회당)’라고 거칠게 비난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참된 유다인이라 말한다. 학자들은 필라델피아 내에 벌어지는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갈등을 생각하곤 한다. 추정컨대, 그리스도인의 복음 선포가 유다인의 혐오와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요한묵시록은 지금 필라델피아 교회를 위로하고 있다. 박해 속에 살아가도, 제 힘이 약해 세상에 억눌리더라도 그 속에서 참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일, 매우 어려운 그 일로 필라델피아는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유다인들이 누릴 복된 시간을 요한묵시록은 필라델피아 교회에게 돌려놓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발 앞에 유다인들이 엎드리게 하겠다는 말씀(묵시 3,9; 이사 45,14 참조), 그리스도인을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겠다는 말씀(묵시 3,12·유다 사회는 아브라함을 ‘세상의 기둥’으로 이해했다), 세상 구원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승리하는 이에게 새기겠다는 말씀들이 힘겨운 시간을 살아갔던 필라델피아 교회에겐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된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승리를 가리키는 ‘화관’을 ‘이미’ 쓰고 있었다.(묵시 3,13) 힘이 약하고 박해 속에 겨우 살아내고 있지만 필라델피아 교회는 ‘승리’하는 중이었다. 이 세상살이 자체를 제 운명으로 꼭 껴안고 있는 필라델피아에겐 이겨야 할 대상도, 이겨서 얻는 저만의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예수님처럼 오늘 하루를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열린 문이 행여 닫힐세라 그렇게 구원을 지켜내며 필라델피아는 승리하고 있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사르디스에 보내진 편지(묵시 3,1-6)

한때, 아시아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던 사르디스는 서기 17년 큰 지진으로 황폐한 곳이 되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사르디스의 재건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과세를 면제하기도 했다. 물론 황제를 위한 신전이 세워지기도 했다. 유다인들의 영향력도 제법 강한 곳이어서 사르디스의 공적인 일들에 유다인들의 참여 또한 활발했다. 사르디스에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묵시 3,1)다. 1장 4절에 일곱 영은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키고 1장 20절에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대표격인 일곱 천사를 지칭한다. 하여 사르디스가 소개하는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과 교회,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절대적 주권을 지닌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은 사르디스 공동체가 ‘한 일’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 일이란 게 좋은 일, 모범적인 일이 아니다. 사르디스 공동체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살아 있다고 여겼으나 사람의 아들은 ‘너가 죽어 있다’고 직격하기 때문이다.(묵시 3,1) 사르디스가 ‘한 일’은 죽음을 가리키는 상징이었던 셈이다. 무언가 해내고 있는데,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오히려 자멸하게 만드는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빌려오면 이렇다.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여도 신심의 힘은 부정할 것입니다.”(2티모 3,5) 신심 있는 듯 행동하지만 자신과 돈, 그리고 제 욕망을 추구하는 일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신앙 생활하는 이들을 가리켜 사도 바오로는 ‘신심의 힘’을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사도 야고보도 마찬가지 말씀을 남긴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야고보서가 말하는 실천은 ‘형제애’와 관련된 것이다. 저 혼자 배부른 삶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삶을 꿈꾸는 것이 믿음이 걸어 나가는 ‘생명’에로의 길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한다.(묵시 3,2) 깨어있음은 두 눈 부릅뜨고 제 인생을 갈고 닦는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 제시된 명령이 아니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으로 규정된 사르디스 공동체가 깨어있음을 실천해서 얻어 내야 할 것은 ‘생명’이고 그 생명에로의 추구는 결국엔 서로에 대한 개방과 환대의 실천 유무에 달려있다. 3장 3절의 ’회개’라는 말마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근대 이후 사람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개인’의 가치가 도드라지게 되면서, 회개라는 말마디를 개인적인 반성이나 성찰의 관점에서 해석해 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본디 회개는 ‘서로를 향해 돌아선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타자성’을 빼놓고선 회개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회개는 사람됨의 근본 이유이자 목적일 수 있으리라. 사람은 ‘사회적 관계’ 안에 살아갈 존재이고 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사람다움을 이야기하고 실천하고 다듬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사르디스에 보내진 편지를 읽으면서 주목해야 할 동사가 있다면, ‘받아들이다’라고 번역된 ‘람바노’(λαμβάνω)가 될 것이다.(묵시 3,3) 요한복음은 육적인 완고함이나 배타성에서 해방되어 복음에로 열려 있음을 논할 때 이 동사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깨어있을 수 없다. 회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또 한 번 빌려오자.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3-14) 듣고 받아들이는 것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 여기며 저 혼자 기도하고 묵상하는 일은 저만의 외로운 고행이 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저 혼자만의 신앙에 대해 경고했다. 선포하는 이, 그리고 듣는 이의 형제적 친교와 일치 안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복음서에서 여러 번 강조되기도 했다. 하느님 나라는 저 천상에 홀로 고립되어 있어 몇몇 의인이나 영웅들에게만 드러나는 밀교의 왕국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 한가운데 이미 드러나 있다.(루카 17,20-21) 깨어있음을 살아내야 할 사르디스 공동체가 여전히 죽어갈 때, 곧 스스로 유폐되어 서로를 향한 회개를 살아내지 못할 때, 사람의 아들은 ‘도둑’이 되어 ‘갑자기’ 나타나신다.(묵시 3,3) 사람의 아들이 ‘도둑’처럼 온다는 표현은 전형적인 종말의 심판을 가리키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도둑’으로 만나서는 안 될 일이다. 신앙인이 살아내야 할 회개의 자리, 친교의 자리는 예수님이 ‘도둑’이 아니라 ‘벗’으로서 다가서는 자리이므로. 믿음을 시작한 이래, 우리는 부족할지언정 스스로를 더럽히진 말아야 하겠다. 말하자면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겠다.(묵시 3,4) 14장 4절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14만4000에 대해 말한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이들은 흠도 결도 없이 오로지 예수님 안에 더불어 살아간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이들이다. 놀라운 일은 예수님을 향하는 것이 비로소 스스로의 이름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것.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그런 이들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기 때문이다.(묵시 3,5) 사르디스는 지진 후 다시 살아난 도시였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역사적 자료가 희박하여 사르디스라는 도시가 지녔던 재건에의 역동성과 그 희망에 대해 추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주석이 힘들면 해석의 상상력을 펼쳐보면 어떨까. 저마다 ‘한번 해 보자’며 미래의 달콤한 삶을 향해 덤벼드는 분위기, 거기에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했던 유다인들 마저 도시의 공적인 일에 열심히 뛰어드는 분위기, 그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어떠해야 할까. 저마다 희망을, 노력을, 성공을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인은 희망 뒤편에 쓰러진 절망의 사람들을 살려야 하지 않을까. 저마다 무언가 해내야만 한다고 핏대를 올리며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아무 일도 못 한 채 하루를 버텨내는 이들에게 ‘회개’라는 일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도시의 재건은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티아티라에 보내진 편지(묵시 2,18-29)

티아티라는 여러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빵, 염색, 가죽 공예 등의 산업으로 꽃을 피운 곳이었다. 각각의 산업 분야마다 상인 조합들이 형성되었고, 장사를 할라치면 그 조합에 가입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적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자리 잡은 곳의 문화적, 종교적 관습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티아티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이방 문화와 종교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던, 혼합종교의 삶을 살아간 곳이 티아티라였다. 티아티라에 편지를 보내는 이는 “하느님의 아들”(묵시 2,18)로 소개된다. 요한묵시록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하느님의 아들’이란 호칭은 28절 ‘아버지’라는 표현과 맥을 같이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그분이 간택한 이를 아들로 엮어내는 것은 다분히 구약의 메시아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시편 2,8-9)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묵시 2,18)로서 하느님의 아들은 어느 누구도 대적 못 할 강한 힘을 지닌 듯 하다. 그 힘의 뒤편엔 그 어디에도 눈을 돌리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히, 강력히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라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도 존재한다. 티아티라는 사랑, 믿음, 봉사에 투철했다. 그럼에도 이제벨이라는 여자를 용인하는 것이 티아티라에 보내는 편지의 문제 제기다. 이제벨은 아합왕의 아내였고 바알신을 섬기도록 부추긴 여자였다.(1열왕 16,31) 하느님을 버리고 바알을 좇는 일은 예후에 의해 ‘불륜’으로 비난받기도 했다.(2열왕 9,22) 이제벨은 과거의 여자였으나 현재 티아티라의 상황을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은유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벨은 “예언자로 자처”(묵시 2,20)한다고 서술한다. ‘예언자’라는 말마디를 통해 학자들은 티아티라에서 몬타니즘이 성행했던 사실에 주목한다. 2세기부터 시작된 몬타니즘은 성령을 통한 환시와 황홀경을 중시하고 극단적 엄격주의를 통해 선민주의적인 행태를 보인 이단의 한 형태다. 몬타니즘은 특별히 여성 예언자, 예컨대 프리쉴라, 막시밀라, 암니아와 같은 여 예언자를 통해 활성화되었는데, ‘과거의 여성’ 이제벨을 소개하는 티아티라의 편지는 이러한 몬타니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이제벨로 대변되는 신앙의 일탈은 무엇이었을까. 몬타니즘을 배경으로 추정해보면 이렇다. 이제벨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특별한 영적 체험에 대한 과도한 맹신에 집착했을 것이다. 저만이 특별한 계시에 초대받았다는 증거가 환시나 황홀경의 체험으로 특정되었고 그 체험이 더욱 견고해지면서 다른 이들에 대한 비교우위의 배타적 신심에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초대교회의 관심사 중 단연 제일은 예수님의 재림이었을 테고, 그 재림이 무엇이고 누가 그 재림에 합당한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두려운 질문으로 남아 있었을 테다. 이제벨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두려운 질문을 자신들의 체험 안에서 명확한 정답으로 읽어내고 싶었을 것이고, 자신들의 영적 체험과 신앙적 신념을 절대화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보다 자신의 체험과 신념이 더 중요해진 신앙을 우리 성경은 ‘불륜’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불륜의 끝은 ‘죽음’이라고 티아티라에 보내진 편지는 분명히 한다.(묵시 2,23) 신앙의 일탈은 나쁜 짓, 악한 짓을 저지를 때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신념과 행동방식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데서 신앙의 일탈은 훨씬 심각한 것이 된다. 저만이 하느님의 신비를 제대로 꿰차고 있다는 착각 속에 다른 이들의 신앙 감각과 체험에 대해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완고함과 거만함이 신앙을 왜곡한다. 이제 신앙은 저만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그 누구의 말도, 조언도, 비판도 쓸모없는 것이 된다. 철저히 고립된 자신이 세상의 박해 속에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인인 양 고뇌하며 살아간다. 자기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곳에 하느님은 허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은 손가락 사이 무심히 흘러내리는 모래 한줌처럼 힘없이 사라질 뿐이다. 그 허상을 하느님이라 믿어 고백하는 일, 참 허망한 일이 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들은 티아티라에게 다른 짐은 지우지 않겠다고 하신다.(묵시 2,24) 다만 끝까지 지켜야 하는 일 하나를 제시하신다. 이제벨과 그 추종자들이 말하는 ‘사탄의 깊은 비밀’을 알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 제시하신다. ‘깊은 비밀’이란 표현에 영지주의적 색채가 짙게 배어있다. 영지주의는 더 많은 지식과 앎을 통해 누구보다 더 깊이 참된 진리를 얻어내려는 경쟁적 사상을 내포한다. 우리의 편지는 이러한 태도를 ‘사탄의’라는 수식어로 규정해 버린다. 하느님의 깊은 진리는 인격적 관계에 따른 타자에 대한 배려와 환대를 기본으로 한다. 저만의 노력이나 열정으로 타자를, 나아가 하느님을 알아내겠(었)다고 덤벼드는 일은 사탄의 일이다. 티아티라에게 남겨진 하나의 일은 어쩌면 하느님이 누구이신가 라는 질문 그 자체가 아닐까. 사탄의 깊은 비밀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의 깊은 신비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 11,33) 하느님의 깊은 신비는 여전히 두려운 질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에페 3,18)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순간, 그 모든 신앙은 실패한다.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한과 샛별을 받는 일은 다름 아닌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묵시 2,26-27; 22,16) 예수님과 하나 되는 일은 끊임없는 타자에 대한 질문으로 가능한 것이지, 자신이 정답이라 생각하는 순간, 질문은 강요가 되어 타자를 죽이고 하느님을 업신여기게 된다. 하느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용히, 겸허히 다시 한번 묻게 된다. “당신은 누구이신지요?”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묵시 2,12-17)

페르가몬은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하고 아주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도시다. 여러 신들을 위한 신전이 있었고,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 아탈로스 1세(아탈로스 왕조) 임금의 승리를 기념하는 여러 조각들이 산재해 있었다. 물론 소아시아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지배를 받은 이후로 황제들을 위한 예배 역시 성행했던 곳이다. 그래서일까.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는 페르가몬을 ‘사탄의 왕좌’(묵시 2,13)라고 단정해 버린다. 자비, 평화,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다소 잔잔하고 부드러운 뉘앙스를 지녀야 할 것 같은 성경의 문장들 틈에서 사탄의 왕좌라고 도시 전체를 규정하는 건, 아무래도 성급하거나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차갑고 거북한 성경의 문장들은 그래서 외면받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구약의 아모스서인데, 단죄와 심판, 그리고 질책이 가득한 문장으로 엮어진 아모스서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교회 안에서 본격적으로 읽혀진다. 끔찍한 세계대전을 전후로 아모스서의 날카로운 경고성 문장들은 세상에 부득불 필요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인간들은 끝내 무너지고 넘어져야 제 과오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페르가몬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분은 ‘쌍날칼’(묵시 2,12)을 지니신 사람의 아들이다. 날카로운 쌍날칼은 요한묵시록에서 그리스도의 복수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요한묵시록 19장에서 백마 탄 기사로 묘사되는 그리스도는 그야말로 장군이요, 승리자다. ‘하느님의 말씀’(묵시 19,13)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리스도는 날카로운 칼을 입으로 뿜어내며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묵시 19,16)으로 등장한다. 그리스도의 복수는 대립할 경쟁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권능을 지닌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쌍날칼을 지닌 사람의 아들이 계신다면, 그곳이 사탄의 왕좌 또는 다른 무엇이 있든, 주눅 들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주님이요 임금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에게 세상의 모든 곳은 주님을 증거하는 자리일 뿐이다. 페르가몬에는 안티파스(묵시 2,13)라는 증거자가 있었다. 안티파스에 관한 기록은 5세기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에 의해 처음 나타난다. 도미시아누스 황제 통치 시절(81~96년) 페르가몬의 주교로,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불에 달구어진 청동황소상 안에서 죽어간 순교자가 안티파스라고 전해진다.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는 안티파스의 순교를 보고서도 신앙공동체는 물러서지 않았고 제 믿음을 지켰다고 말한다. 쌍날칼을 지닌 사람의 아들을 믿는다는 건, 제 신념과 정체성이 세상의 어떤 논리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결심과 실천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를 읽는다는 건, 교회와 세상, 혹은 믿음과 불신의 대립 구도에 의한 이원론적 해석과는 거리가 있다. 마침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묵시 2,14) 세상도 아니고 불신도 아닌, 신앙을 끝끝내 지키고 살아가고 있다고 이미 인정한 ‘너’(페르가몬교회)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는 사람의 아들의 말씀이 당혹스럽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이유가 드러난다. “너에게는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묵시 2,14) 다른 이방 종교나 문화, 혹은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믿는 이들 내부에 믿음의 가치와 무관하거나 해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발라암은 구약의 예언자다.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모압 임금 발락의 청에 맞서 이스라엘을 축복해준 예언자였다.(민수기 22-24장 참조) 그러나 발라암이 축복한 이스라엘은 ‘프오로’에서 모압 여자들과 즐겼고 우상숭배를 자행했다.(민수 25,1-3) 하느님과의 계약을 모조리 거부한 이스라엘이었다.(신명 31,16) 발라암의 축복과 이스라엘의 일탈은 함께 갈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삶의 행태가 어떠하든 하느님의 백성이란 이유로 무작정 축복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초대교회는 발라암의 이야기를 통해 곧은 정체성을 지니지 않는 신앙의 ‘적당한 타협’이나 ‘무한 긍정’, 혹은 ‘원칙 없는 관대함‘에 대해 걱정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우상과 황제숭배의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적당한 개방과 환대의 수준에서 처리해버리는 일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또한 다짐하면서 말이다.(1베드 4,2-4) 세상의 위협이나 박해 앞에 신앙은 피아식별이 쉬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명확히 구별해 낸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문제에 눈을 돌리면 그 식별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세심한 관찰 없이는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신앙의 왜곡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신앙이 ‘인자함’이나 ‘중용’의 미덕으로만 꾸며질 때 그렇다. 신앙인은 착하고 부드럽고 온유해야 한다고 말하는 근거로 ‘사랑의 예수님’을 찾지만, 세속과 타협하고 정의에 맞지 않는 일이 교회 내부나 외부에서 일어날 때, ‘쌍날칼의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이 신앙이 되어선 안 된다.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건, 비겁한 타협이 될 수 있고, 말해야 할 바조차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하면서 사랑, 정의, 평화를 거론하는 건 허망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살이라는 게 실은 비겁한 타협이 연속일 때가 많고, 그것으로 우리는 후회와 성찰을 연거푸 살아내는지 모를 일이다. 결국 페르가몬은, 아니 우리 믿는 이는 회개해야 한다.(묵시 2,16) 숨겨진 만나를 먹고 흰 돌도 찾아 ‘새 이름’을 얻어야 한다. 탈출기에 나타나는 ‘만나’를 두고 랍비 엘리아자르는 이렇게 해석한다. “이 세상에서 너희들은 만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가올 세상에서 너희들은 만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만나를 ‘숨겨진 만나’로 칭하면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성찬례로 이해했다. ‘숨겨진’이란 그리스말 형용사를 ‘간직한’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특별히 유보된 만나는 다름 아닌 예수님 그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회개는 예수님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이다. ‘쌍날칼’의 예수님을 향하는 건 이러저러한 세상 논리에 휩쓸린 교회가 되지 않길, 그래서 할 말은 하는 교회이길, 행여 교회 조직의 견고함을 위하여 정치인과 경제인 앞에 적당히 타협하고 할 말을 잃(잊)어 가는 교회가 되지 않길 외치고 다짐하는 일이기도 하겠다. 그리하여 승리를 상징하는 흰 돌을 세상 마지막까지 간직하는 교회이면 좋겠다. 세상 속 홀로 신앙을 외치는 동시에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 어렵고 무거운 일이다. 우리는 그 힘든 일, 무거운 일을 해내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묵시 2,8-11)

기원전 600년경 스미르나는 완전히 무너진 도시였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에 이르러 스미르나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도시에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이”(묵시 2,8)로 자신을 소개한다. 한 도시의 흥망성쇠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해석하는 문학적 상상력이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를 장식한다. 사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에 대해 우리는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살아 있으되 죽을 것 같은 고통과 궁핍을 겪을 때가 많다. 어쩌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는 죽을 만큼 힘든 일들 앞에 크나큰 희망으로, 그리하여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살 것인지, 또 죽을 만큼, 아니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어떻게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지 우리는 아파하며 간절히 묻게 된다. 그 질문의 답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예수님 그분이 주실 수 있다는 희망으로.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는 시험, 환난, 충실 등등의 단어로 독자들을 단단히 준비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스미르나에는 유다인들의 공동체가 다른 어떤 곳보다 굳건히 자리 잡고 있어서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유다인들의 비난과 괴롭힘이 끊이지 않은 곳이 스미르나였다.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은 이방 문화와 종교에 친화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소아시아 지역의 유다인들은 곳곳에 자리 잡아 자신들의 신앙과 문화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적대적이었다. 다른 문화에 호응하면서 같은 하느님을 믿고 유다 문화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들에겐 혹독했다. 사도행전은 그런 유다인들의 태도가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사도 13,44-45) 비난과 모독, 박해를 살아가는 스미르나 공동체는 궁핍했으나 부유했다.(묵시 2,9 참조) 궁핍을 가리키는 그리스말 ‘프토케이아’(πτωχεία)는 그야말로 물질적 가난을 의미한다. 초대교회는 현실적 가난을 영성적 풍요로움을 이해하는 인식의 자리로 규정하곤 했다.(2코린 6,10; 야고 2,5 참조) 현실의 어려움이 더없이 클지라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더욱 단단해진다는 것이 ‘가난함’이 품고 있는 의미라는 것. 고통의 자리가 기쁨의 자리가 되고, 슬퍼하는 일들이 행복의 기회가 된다는 ‘자기 계발서’ 형태의 정신적 위로나 격려 따위의 충고가 아니다. ‘가난’은 가난한 것이고, 그로 인한 힘겨움은 폐부를 꿰뚫는 아픔을 동반한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되새겨 보자.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야고 2,5-6) 믿음의 부자가 된 것은 가난을 탈피하고,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걷어낸 결과론적 선물이 아니다. 믿음이 풍요로워 부자가 되는 것은 가난한 형제를 업신여기지 않는 형제애적 실천의 다른 말이다. ‘가난’은 그리하여 공동체가 함께하는 친교의 ‘원형’을 가리키는 상징체가 된다. 없는 사람이 더 없는 사람을 생각해준다는 일상의 경험칙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진 것이 많음에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사람은 경쟁이나 노력을 당연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나누고 함께하려는 사람은 무한 경쟁과 숨 막히는 노력이 벌어지는 삶의 자리 뒤켠에 지쳐 쓰러지는 이들을 염려하는 마음을 지닌다. 믿음의 부자는 이렇게 사람을 챙기는 일을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형제적 친교를 사는 일이 믿음이 걸어가는 풍요로운 길이다. 스미르나 공동체는 가난했으나 그 가난으로 부유한 친교를 살아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비난하고 시기하고 심지어 괴롭히는 이들은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면서 타민족이나 다른 사상을 단죄하고 멸시한 유다인들은 실은 ‘유다인’이 아니라는 것. 흔히들 요한묵시록, 나아가 요한계 문헌이 90년 유다의 얌니아 종교회의(그리스도인들을 유다 사회에서 배척하고 저주하는 결정적 자리) 이후에 적혀진 글이라 반유다인 정서를 배경으로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대립 구도를 적고자 한 게 요한계 문헌은 아니다. 참된 하느님 백성, 유다인은 혈통이나 육욕의 관점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요한 1,13 참조)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육화 사건의 수용 여부에 달려 있다고 초대교회는 생각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의 자리임을 선언하는 것이 참된 유다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자리가 하느님의 자리가 되어, 사람을 하느님처럼 배려하고 사랑하는 일이 참된 유다인의 일이어야 했다. 저들끼리 모여 회당에서 하느님을 칭송하지만 사상과 신념, 문화의 차이를 절대적 선악의 기준으로 삼아 이 땅 위에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횡포를 저지르는 이들은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고 ‘사탄의 시나고가’(우리말 번역에는 ‘무리’라고 되어있다)라고 스미르나에 보내진 편지는 단언한다.(묵시 2,9) 스미르나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열흘’의 환난을 겪을 것이다.(묵시 2,10) ‘열흘’을 두고 구약의 다니엘이 겪는 고초를 떠올리기도 한다.(다니 1,12 참조)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제공하는 음식을 거부하고 열흘 동안 채소와 물만 먹어도 용모가 뛰어나는 기적 같은 이야기는 ‘열흘’의 시간을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의 시간 개념으로 바꿔놓는다. 열흘 동안의 환난은, 그러므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시험할 기회다. 충실히 믿음을 지키면 승리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화관’을 얻게 될 것이다. 사는 게 힘들고 무너질 때, 행복과 성공을 갈망하다 제 삶의 참된 가치를 타협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몸이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제 신념의 죽음(두 번째 죽음)에 괴로워할 때가 있다. ‘고작 이렇게 살려고 내가 그렇게 행동했나’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에 죽지 않는 것, 스스로에게 ‘왜 사는가’를 묻는 것, 믿음의 충실성을 되짚어보는 이런 질문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2-23 제3430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에페소에 보내는 편지(묵시 2,1-7)

처음에 사랑이 있었고 불행히도 그 사랑은 추락하고 말았다. 에페소에 보낸 편지는 ‘추락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적 관점으로 이해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추락한 사랑을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와 여러 신들을 모시는 신전들 탓으로 돌린다. 그도 그럴 것이 에페소에는 기원전 29년부터 아우구스토 황제의 명에 따라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위한 신전이 있었고, 수렵과 궁술, 그리고 자연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아르테미스 신전 역시 존재했었다. 그래서 이방 문화와 종교들 틈바구니에 흔들리는 신앙인의 모습을 두고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에페소 교회에 말하는 이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있는 이’다. ‘쥐다’(κρατέω)라는 말은 ‘가지다’라는 말보다 강력하다.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방점이 찍혀 해석된다. 예수님이 교회의 근본이자 목적이라는 것. 쥐어진 일곱 별은 일곱 교회를 대표하는 천사를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를 꼭 붙들고 챙겨주고 보듬어 주는 신적 보호로 ‘쥐다’라는 동사를 읽어낼 수도 있겠다.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를 가리키는데 그 한 가운데를 거니는 분 역시 예수님이다. 우리말 번역은 일곱 교회 ‘사이’로 되어 있지만, 부정확한 번역이다. ‘사이’로 번역된 ‘엔 메쏘’(ἐν μέσῳ)는 공간적 일치를 가리킨다. 일곱 교회와 함께 하나 되어 머무시는 예수님을 ‘엔 메쏘’라는 말마디가 암시한다. 일곱 교회와의 일치는 이 말마디 하나로 더욱 강조된다. “나는 … 안다.”(묵시 2,2) 예수님은 에페소 교회가 행하는 일과 노고와 인내를 알고 계신다. 일, 노고, 인내라는 단어들은 모두 현실 속에 살아가는 신앙인의 ‘수고’(受苦)를 가리키는 것으로, 요한묵시록은 행복과 안식을 향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가르친다.(묵시 11,13)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삶이 슬프고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알아주신다는 이유만으로 그 힘든 삶은 살아지는 것이다. 에페소는 여러모로 훌륭하고 모범적이다. 그럼에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 그건 노력이나 희생, 혹은 성실함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딱 하나가 부족한 것이었고, 그 하나가 편지를 쓰게 된 동기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묵시 2,4) 에페소 교회의 ‘첫사랑’을 두고 요한계 문헌, 그러니까 요한복음, 요한의 편지들을 근거로 해석하곤 한다. 이를테면,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믿는 이들은 구원의 자리에 머문다는 것.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셨고,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 ‘첫사랑’은 그리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를 이루는 신앙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가 된다. 많은 신앙인이 행하는 일과 노고와 인내는 어쩌면 부수적인 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 본질적으로 질문해야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나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라는, ‘타자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 사람의 노력이 아무리 성실하고 완벽하다 할지라도 상대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숱한 삶의 경험들 안에 ‘타자’가 잊혀진 채 이루어지는 ‘선한 폭행’을 경험하고 있지 않나.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은 에페소 교회에 채근한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라’고.(묵시 2,5) 그 ‘어디’는 추락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더 사랑하라’가 아니라 어디서 추락했는지, 어디서 벗어났는지, 그리하여 어디서 사랑을 잃고 헤매는지 살펴보라는 말이다. 에페소 교회의 본디 자리는 ‘사랑’이었으나 그 ‘사랑’을 잃어버린 곳이 어딘 지에 대한 질문은 태초의 인간을 향해 던져진다. 아담과 하와가 있었고, 그 둘은 하느님과 결별하여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 인간은 본디 하느님과 조화로운 관계 안에 있었으나, 그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지혜서 7장 3절은 이렇게 노래한다. “나도 태어나서는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같은 땅에 떨어졌으며 첫 소리도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우는 것이었고….” 화려했던 솔로몬 역시 한계 지워진 인간의 처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인간 삶에 대한 부정적 해석은 하느님과의 조화로운 세상을 향한 갈망의 긍정적 해석이다. 그러므로, 첫사랑의 회복은 인간의 근본적 삶에 대해 또 다시 질문하는 일로 시작한다. 우리는 본디 ‘관계 안의 존재’였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서로에게 ‘알맞은 협력자’로 창조된 것이 인간이었다.(창세 2,18 참조) 인간이 진정으로 제 존재 양식을 구현하는 일은 무엇일까. 에페소에 보내는 편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에게 좋은 점도 있다. 네가 니콜라오스파의 소행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것을 싫어한다.”(묵시 2,6) 니콜라오스를 두고 역사의 한 인물로 규정하는 노력은 많았다. 예컨대, 사도행전의 ‘니콜라오스’는 초대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한 분이셨다.(사도 6,6 참조)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니콜라오스였다. 혹자는 니콜라오스를 따르는 신앙인의 무리가 교회 내부에 있었고, 니콜라오스의 모범을 추종했던 그 무리가 엄격주의로 빠져들면서 신앙의 게으름을 탓하는 배타적 무리가 되었다는 점을 언급한다. 굳이 역사의 한 인물로 시작한 이런 해석을 절대화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신앙 공동체에서도 이런 정황은 발견되니까. 제 신앙의 가치를 절대화해서 다른 이의 신앙을 폄훼하거나 무시하는 일, 제 노력을 정당화해서 다른 이의 노력을 게으름이나 일탈로 규정하는 일, 모두가 니콜라오스파의 소행과 유사한 것들이다. 기억하자. 우리는 ‘승리하는 사람’이다. 단절과 소외, 비난과 무시에 승리하여 인간 본연의 자리를 다시 질문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낙원에서 생명 나무의 열매를 ‘함께’ 먹을 사람들이다.(묵시 2,7 참조)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인색한 오늘, 경쟁과 노력에 흠뻑 젖어 인간다움을 한낱 행동 방식의 문제로 격하시킨 오늘, 우리는 첫사랑이 그립다. 사랑은 다른 이가 그 다른 이로 존재할 수 있도록 알맞게, 세심히 어루만져주는 것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2-16 제3429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일곱 개의 편지

요한묵시록이 묵시문학적 작품이라는 것에 이론은 없다. 그러나 2장과 3장의 일곱 개 편지는 묵시문학과 그 형식에 있어 달라도 너무 다르다. 편지는 모호하지 않고 뚜렷하다. 온갖 상징들로 신비스럽게 꾸며가는 묵시문학과 달리 편지는 말하는 이와 말을 듣는 이가 대체로 명확하며 편지 속에 담아내는 메시지 또한 시의적(時宜的)이고 현실적이다. 그런 이유로, 요한묵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개 편지들을 읽는다는 건, 어쩌면 요한묵시록의 모호한 상징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구체적인 지렛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곤 한다. 편지를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말하고픈 게’ 있어서다. 그래서 편지는 말하고픈 이와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을 품고 있다. 요한묵시록에서 말하는 이는 ‘사람의 아들’(묵시 1,13)이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묵시문학의 대표적 인물이 ‘사람의 아들’(다니 7,13-14)인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해 왔다. ‘사람의 아들’은 천상의 신비를 지상의 현실 속에 밝히고 드러낸 종말의 대표적 인물이다. 예수께서 육화하셔서 하늘을 땅의 역사 안에 온전히, 그리고 굳건히 드러내셨기에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의 삶 자체와 비견될 만했다. 요한묵시록 역시 일곱 개의 편지를 소개하기 전, 일곱 별과 일곱 등장대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의 아들’을 먼저 소개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아들’이 편지를 쓰도록 요한을 재촉했다. 요컨대,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 ‘말하고픈 게’ 있어서 일곱 편지는 쓰여졌다. ‘사람의 아들’이 누군지 종말론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노력은 많다.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을 알리는 묵시문학적 인물로 정리되는 그러한 노력들은 사실, 모호하다. 구름에 싸인 듯 현실 세상과의 괴리감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형상 위에 여전히 맴돌기 때문이다. 요한묵시록이 소개하는 사람의 아들은 다르다. 이유인즉, 요한묵시록의 일곱 개 편지의 시작은 사람의 아들을 교회의 구체적 현실과 접목하여 묘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묵시 2,1)라고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교회 공동체의 주권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음을 가리킨다.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묵시 2,8)는 스미르나 교회의 몰락과 재생의 역사를 사람의 아들에 투사하여 교회의 운명이 사람의 아들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암시한다.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묵시 2,18)는 신심 있는 티아티라 교회의 신자들을 더욱 격려하기 위해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신적 보호의 전통적 표상들을 사람의 아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사람의 아들’은 믿은 이들의 현실적 삶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육화’를 확연히 드러내는 형상이다. 더 이상 모호하고 감추어진 하느님의 개입은 없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역사 속, 사람들 안에 하느님은 구체적인 캐릭터로 다양하게 스며든다. 그럼, ‘말을 들어야 할 사람’, 편지를 전해 받는 사람은 누굴까. 요한묵시록의 일곱 편지를 받는 이는 ‘천사’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의 ‘천사론’을 유다 전통과 다른 맥락에서 짚어내는데, 바로 이 구절 때문에 그렇다. “이러지 마라. 나도 너와 같은 종이다.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너의 형제들과 같은 종일 따름이다.”(묵시 19,10) 요한묵시록의 천사는 천상의 구별된 존재가 아니라 지상의 형제적 관계 안에 배치된다. 천사를 인간의 처지에서 이해하는 요한묵시록의 천사론은 혁명에 가깝다. 천상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거룩하고 신비스런 메시지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요한묵시록의 천사는 절망스런 존재일 뿐이다. 더 이상 신비스럽거나 초월적인 메시지는 없다. 현실의 공동체가 겪는 일들을 정확히 직시하게 만드는 게 요한묵시록의 일곱 개 편지이고, 그 편지를 수령하는 이는 천사를 위시한 신앙 공동체다. 이미 천상의 천사는 지상의 인간들과 ‘형제’가 되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 덕택에 그리되었다. 일곱 개의 편지는 소아시아에 위치한 일곱 개의 신앙 공동체를 향해 쓰여졌다. 그렇다고 각각의 교회를 각각의 사건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는 없는 듯 하다. 일곱 개 편지에서 공히 반복되는 구절이 발견된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묵시 2,7.11.17.29; 3,6.13.22) ‘여러 교회’로 번역한 것은 적확하지 않다. 그리스말 본문은 ‘그 교회들에게’(ταῖς ἐκκλησίαις)라고 되어 있고, 그런 이유로 ‘여러 교회’는 ‘일곱 교회’로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 ‘일곱’을 완전 수, 혹은 가장 풍성한 수로 이해하는 묵시문학적 전제 하에, ‘그 교회들’은 시·공간을 초월한 모든 신앙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요한묵시록의 일곱 개 편지는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들을 우리의 주님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신앙 공동체에 공히 전해진 편지가 된다. 더불어 일곱 개의 편지는 그 형식에 있어 대동소이하다. 대략 이렇다. 사람의 아들이 각각의 교회 공동체 현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각각의 교회는 믿음에 관하여 얼마간의 부조리와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교회는 회개해야 하고, 회개한다는 조건 하에 여러 선물들이 주어질 것이다, 라는 식으로 일곱 개의 편지는 적혀졌다. 크게 보면,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또렷하게 드러나는 형식이다. 그래서일까. 일곱 개 편지의 시작마다 ‘~를 ~이가 말한다’고 반복하는데, 과거 예언자들의 상투적인 어투이기도 하다.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회개를 두고 요한묵시록의 편지들과 예언자들의 글들은 많이 닮았다. 일곱 개의 편지들을 읽어가다 보면 묵시문학을 모호함과 신비감으로 읽으려는 이들의 무모함을 상당부분 상쇄시킬 수 있겠다, 싶다. 회개하라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마주하며, 묵시문학적 상징 뒤에 숨은 채 현실을 회피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차분히 우리 삶을 직시하려는 움직임이 회개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화려한 상징들로 판타지와 같은 미래를 꿈꾸기보다 지금의 우리 삶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일이 믿음의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을 회개하여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 요한묵시록의 일곱 개 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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