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온 편지-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창세기②: 창조주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세상 창조 이번 편지에서는 창세기가 전하는 하느님의 세상 창조에 대한 계시 말씀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의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에 대한 신앙(구두 전승)이 구약 당시의 표현 방식으로 기록(문서화)되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경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보편적 계시 진리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계시의 핵심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여기서 ‘한처음’은 세상의 시작을 말합니다. ‘하늘과 땅’이란 표현은 구약의 히브리어 용법에 의하면 온 세상을 뜻합니다. 한자어 천지(天地)의 의미를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창조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하느님께만 적용되는 고유한 표현으로 신적(神的) 창조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창세기 1장 1절은 한처음에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계시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가운데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계시 진리를 전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립니다. 구약성경의 이사야 예언서는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기에 만군의 주인이시며, 영원하시고 유일한 주님이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이사 44,6) 신약성경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사도 17,24)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에서도 창조주 하느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묵시 4,11) 성경이 전하는 계시 진리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하느님의 인간 창조 성경 말씀은 인간의 기원이 하느님께 있다는 계시 진리와 함께 인간이 가지는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와, 세상 안에서 가지는 인간의 위치와 사명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인간 창조에 대한 성경 말씀을 알아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여기서 ‘우리’라는 표현은 구약의 히브리어 용법에 따르면 인간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습’은 인간이 가지는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와 비슷하게’라는 말은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차별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히브리어 아담입니다. 여기서 아담은 첫 인간의 이름일 뿐 아니라 집합명사로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과 의지로 창조된 존재요, 하느님의 모습과 닮은 존재, 즉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인간관이요 가르침입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마태오복음 13장은 일곱 가지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인 ‘하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이라는 완전수에 담아내고 있지요. 씨 뿌리는 사람, 가라지, 겨자씨, 누룩, 보물, 진주 상인, 그물과 같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비유로 제시함으로써,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듣기 쉽게 전달하는 겁니다. 그중 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입니다.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자는 동안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는 내용이지요. 가라지와 하늘 나라는 어떤 의미와 연관성이 있는 걸까요? ‘가라지’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지자니온(ζιζάνιον)’은 생육 기간에는 밀과 생김이 흡사해 분간하기 매우 어려운 식물입니다. 또한 밀과 같은 계절에 열매가 익기 때문에, 추수 때 곡식이 섞이기는 더욱 쉽지요. 하지만 맛은 쓰기 때문에, 밀에 섞였을 경우 밀가루의 맛을 훼손한다고 하여 ‘독보리’라고도 불립니다.(김영숙, 「성경에 나오는 식물들」 참조) 복음에 의하면, 밀의 품질을 떨어뜨릴 가라지가 자라고 있으니, 종들은 그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그대로 두게 하지요. 종들이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마태 13,29) 모를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만약 집주인이 질 좋은 밀을 얻으려고 했다면, 가라지는 그냥 뽑아 거두어 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복음은 그 점이 ‘하늘 나라’에 비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밀과 가라지. 복음서는 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라고 말씀하는 걸까요? 이 비유는 세상에 선과 악이 왜 항상 공존해야 하는지 묻게 합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 걸까요? 거룩한 성교회 안에는 왜 여전히 위선과 죄인이 존재할까요? 왜 하느님께서는 그 죄악을 없애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실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만약 하느님께서 죄악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밀 또는 가라지‘만’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밀과 가라지가 모두 ‘함께’ 자라도록 하신 것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밀이 긍정성이라면 가라지는 부정성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부정성을 제거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긍정적인 것만 보고 싶은 것이지요. 철학자 한병철은 「신에 관하여」에서, “우리는 모든 형태의 부정성을 제거하려 드는 긍정성의 사회에서 산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은 세상을 마치 무균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부정성을 제거한 나머지 세상을 온통 매끄럽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보기 싫은 것은 아예 없애거나 안 보려고 하는 이러한 태도는 세상을 긍정성으로만 획일화시킵니다. 이를테면, 디지털화된 현대 사회는 타인의 저항을 줄이고 부정성이나 아픔을 일으킬 만한 맞수를 점점 더 사라지게 만들며, 끊임없는 ‘좋아요’로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마비시키는 거지요. 하지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오히려 깨져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 ‘깨짐’은 아픔이라는 부정성에 의해 발생하고요.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가라지의 비유는 부정성이 오히려 우리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성찰하게 합니다. 즉, 우리가 우리 내면의 가라지를 발견했을 때, 비록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것 때문에 시련을 겪을지라도,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하느님이 왜 가라지를 밀과 함께 자라도록 하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밀과 가라지를 모아들일지, 거두어서 태워 버릴지는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확 때, 곧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나의 가라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우리를 당장 거두시지 않는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 투성이인 나와 너, 우리지만, 모두 ‘함께’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것이 하늘 나라의 신비입니다. 글 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이사 55,10-11 / 제2독서 로마 8,18-23 / 복음 마태 13,1-23 어느 건축가가 지인의 배려로 박물관 수장고를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수장고에는 아직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은 많은 작품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둘러보다가 낯설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필체의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명필이라 할 수밖에 없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시되지 않고 이 수장고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친일파이자 매국노라 불리는 이완용이 쓴 글이라 전시 불가라고 합니다. 이완용은 실제로 당대 최고의 명필 중 한 명으로 꼽혔습니다. 특히 물 흐르듯 쓰는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에 매우 능했습니다. 이렇게 글을 잘 쓰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그 노력으로 충분히 후세에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그 죄가 너무 커서 모든 노력 자체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위대한 일을 많이 남겼어도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죄인의 삶을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어떨까요? 세상 안에서 남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관한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사실 땅을 먼저 갈고 씨를 뿌리는 우리의 농사 방법과 달리, 이스라엘 지역의 농사는 씨를 먼저 흩뿌린 뒤에 땅을 갈아엎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복음에 나오듯이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에까지 씨앗이 날아가도록 놔두는 농부는 없었습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봤을 때 낭비이고, 따라서 실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온 세상에 말씀의 씨앗을 던지시는 하느님의 무한하고 관대한 사랑을 상징합니다. 먼저 길가는 수많은 발길에 짓밟혀 단단하게 굳어버린 길입니다. 타성에 젖은 신앙이나 세상의 논리로 굳어버려 말씀이 한치도 스며들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돌밭은 겉으로는 흙이 있어 보이나, 그 밑에는 단단한 돌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동요나 위로를 구할 때는 기쁘게 말씀을 받지만, 신앙 때문에 감수해야 할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뿌리가 없어 이내 말라 버립니다. 가시덤불은 흙도 깊고 뿌리도 내렸지만, 주변의 가시덤불이 햇빛과 양분을 가로챕니다. 세상의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더 커서 영적 질식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마지막은 좋은 땅입니다. 말씀을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넘어 자기 삶의 실존적 결단으로 깨닫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은 수확량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비옥한 땅만 골라서 씨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굳어버린 길가 같은 내 마음, 얕은 돌밭 같은 내 결심, 걱정과 욕심으로 가득 찬 가시덤불 같은 내 영혼에도 끊임없이, 때로는 바보 같을 정도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혹시 자기조차 포기한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정작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네 가지 땅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 안에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의 모습이 모두 있습니다. 어제는 돌밭이었어도 오늘 쟁기질을 열심히 하고 돌을 골라내면 충분히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이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매우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 13,8)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때, 뿌린 씨의 4~5배 정도 거두면 평년작이고, 7~10배 정도 거두면 대풍년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백 배, 예순 배의 수치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풍요로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씨앗의 4분의 3이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져 허비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좋은 땅에 떨어진 4분의 1의 씨앗이 모든 실패와 낭비를 덮고도 남을 승리를 거둔다는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복음 전파의 길이 험난하고 세상의 유혹이 가득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창세기①: 개괄적 이해

이번 편지에서는 구약성경 오경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성경, 구약성경에 대해 간략히 소개드리고, 이어 오경과 창세기의 전체 내용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1)성경 성경에는 하느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이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경륜을 통해 계시됩니다. (2)구약성경 구약성경은 성경의 전반부로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계시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후반부인 신약성경은 하느님의 구원경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함) 구약성경에 속하는 46권의 책들은 그 내용과 문학 양식에 따라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오경’,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입니다.(성경의 목차 참조) (3)오경과 창세기 오경은 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인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하며, 원역사, 성조시대, 이집트 탈출과 광야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상의 기원, 인간의 기원과 운명, 하느님 구원 역사의 시작,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 구원 체험, 하느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생활 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 진리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오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기원(起源)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 진리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내용에 따라 ▲세상과 인간의 기원, 인간의 운명, 원복음(原福音)에 대한 말씀인 창세기 1-11장(원역사) ▲구약의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을 전하는 창세기 12-50장(聖祖 이야기)으로 구분됩니다. 창세기의 첫 부분인 1-11장에는 세상 창조에 이어 인간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계시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으로 창조되어 낙원에 있던 인간(1-2장)은 악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하고(원죄) 스스로 고통과 죽음이란 운명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3장) 이어 나오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인간이 범하는 ‘죄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인과 아벨(4,1-16), 카인의 후손 라멕(4,19-24), 거인족(6,1-4), 노아의 홍수(6,5-9,17), 노아의 가정(9,18-29), 바벨탑(11,1-9) 등이 그것입니다. 창세기의 두 번째 부분인 12-50장은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되는 성조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세 가지 축복 약속을 주십니다.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세 번째 축복 약속을 통해 계시됩니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3) 이 축복 약속은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 마침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축복 약속은 아브라함에 이어 이사악과 야곱 이야기의 중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야곱 집안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된 경위를 전하는 요셉 이야기(창세 37-50장)는 기근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안배였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창세 50,20) 다음 편지부터는 창세기의 첫 부분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8면

[말씀묵상]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바티칸 뉴스(2026년 1월 15일자)는 Open Doors의 2026년 보고서를 인용하며, 전 세계 약 3억8800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심각한 박해나 차별을 겪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왜 사람들은 박해받으면서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옥중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그는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힘을 저에게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열아홉 번째 서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거룩한 이름을 증언할 힘을 청하였습니다.(스무 번째 서한)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는 결국 ‘예수님의 이름을 포기하라’는 강요였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는 그분의 이름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였다”(사도 5,41 참조)라고 전합니다. 순교자들은 참으로 “당신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시편 119,132 참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와 사명, 권위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복음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다가 박해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오로를 두고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오로는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될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습니다”(사도 21,13 참조)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제1독서에서 즈카르야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이름을 알기 이전 시대의 인물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다가 목숨을 바쳤다는 점에서 그는 구약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3)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었던 힘도 결국 하느님께 대한 희망에서 나왔습니다. 화답송에서는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생각하시어 저를 이끌고 인도하소서. 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니”(시편 31,4-6 참조)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받는다면, 시편의 기도자는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보호와 인도를 청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박해의 이유이면서 동시에 신앙인의 힘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곧 그분께 속한 사람으로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고백입니다. 비록 순교의 칼날 앞에 서 있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 더 내어주며, 먼저 용서하고, 평화와 희망을 선택할 때 우리는 삶으로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언하는 용기입니다. 끝까지 그분의 이름을 붙드는 이에게 주님은 반드시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 -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편지를 시작하며

하느님의 계시 말씀이 담겨 있는 성경이 신앙생활에 있어 중요함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특히 구약성경은 더욱 그렇다. 이번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연재는 성서학을 전공한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가 매주 주보를 통해 교우들에게 보냈던 편지 형식의 글을 재구성한 것으로, 구약성경 중에서도 처음 다섯 권의 책인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을 간결하고 쉽게 전한다. “신부님, 세례받은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세상사는 일이 바빠서 신자로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느 신자 분이 답답해하시면서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고 싶고, 그분과 함께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것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앙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답을 찾는 것은 시간이 날 때, 여유가 있을 때 언젠가 하면 되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삶의 자세와 방향을 결정하는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 물음들에 답을 줄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십니다. 놀랍고도 감사하게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먼저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啓示)는 사도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거룩한 전통인 ‘성전(聖傳)’과,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거룩한 경전인 ‘성경(聖經)’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 삶의 근본과 참된 행복, 나아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왜 하느님을 믿고 공경해야 하는지,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성장을 위해, 행복한 신앙생활을 위해 성경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그분의 지극하신 사랑과 가르침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계시헌장도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의 자녀들에게 신앙의 힘, 마음의 양식, 영성 생활의 깨끗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힘과 능력을 간직하고 있다”(21항)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많은 분에게 생소하거나 어렵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귀중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진 하느님 구원의 의미를 충만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 분들이 하느님을 만나 그분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더 깊게 하고, 인생의 근본을 알아 삶의 참된 가치관과 희망을 가지며,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구원으로 나아가시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교우님과 함께 구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는 은혜로운 여정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여정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8면

[말씀의 우물] 그리움과 목마름

영적인 목마름도 육신의 목마름도 있습니다. 유다 지방을 떠나 갈릴래아로 향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시카르’라는 동네에 이르시어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 쉬십니다. 햇빛이 강한 정오 무렵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그곳으로 물을 길으러 나옵니다. 여인은 매일 육신의 목마름을 달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여인은 깜짝 놀라 아룁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요한 복음사가는 짧게 상황을 설명해 줍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요한 4,9) 당시 유다인들은 혼혈 민족인 사마리아인들을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보고 그들과의 접촉을 매우 꺼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마태 10,5)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그 여인이 생수를 얻게 되었을 것이라고 아리송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3-14) 예수님 계시의 말씀을 듣던 여인은 아룁니다.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겠지요.”(요한 4,25)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명백히 선포하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고대 그리스어 ego eimi, ‘내가 그 사람이다’ 또는 ‘내가 존재한다’).”(요한 4,26) 여기서 예수님 계시의 말씀이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하신 계시 양식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놓아둔 채 마을로 달려가서 외칩니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요한 4,29) 날마다 붙들고 있던 생존의 무게보다 더 큰 기쁨, 곧 주님을 만난 기쁨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외침 덕분에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요한 4,39) 됩니다. 시카르가 복음화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복음 선포자가 되고,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뵙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전적으로 새롭게 됩니다. 영원성에 대한 그리움, 세상의 모든 아쉬움과 그리움을 삽시간에 다 채워주는 ‘생명수’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 영혼은 천상 주님으로부터 나와 주님께로 향하여 그분 안에서 완성에 이릅니다. 그러기에 우리 영혼의 목마름은 세상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 말씀을 듣다 보면, 결국 우리 내면의 가시지 않는 그리움과 목마름까지도 다 해소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 그동안 ‘말씀의 우물’을 연재해 주신 신교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오늘은 교회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님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교회의 일치와 보편적 사명을 되새기는 ‘교황 주일’(연중 제13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온전한 봉헌’, 또한 ‘그분의 이름으로 파견된 이들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복음의 환대’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선으로 가장한 불의에 타협을 요구하고, 자아의 확장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묻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제2독서), 가장 소중한 가족 관계마저 주님의 사랑 아래 두며(복음), 하느님의 사람을 위해 내 삶의 한 자리를 내어주라(제1독서)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에서 수넴의 한 부유한 여인은 엘리사 예언자를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합니다. 소박하지만 정성 어린 환대는 ‘생명의 잉태’라는 축복으로 되돌아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그들이 겪을 박해와 고난을 예고하셨지만, 동시에 그들을 환대하는 이들이 받을 상급을 선언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는 위로를, 신자들에게는 예언자들을 돌볼 거룩한 의무를 부여하셨습니다. 오늘, 이 환대의 영성은 교회의 가시적 일치의 중심이신 교황님과 복음화 현장에서 피 흘리며 헌신하는 목자들을 향한 우리의 기도로 확장됩니다. 그들을 환대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내 삶에 임금으로 모시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는 말씀에서 ‘~보다 더 사랑하다’라는 표현은 감정적인 미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사명 앞에서 마주하는 ‘선택의 절대적 우선순위’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제자직의 정점을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고 하십니다. 당시 로마 제국 체제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한 삶의 무거운 고뇌를 뜻하는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반역자로 처형당하는 자가 겪는 극도의 수치와 세상으로부터의 완전히 단절됨을 뜻하는, 생생하고도 끔찍한 현실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이 세상의 명예를 모두 버리고, 심지어 자기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해야 하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길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결합됐고, 그리스도처럼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됐다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복음 말씀대로 부모나 자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제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는 이유는, 내 안에 내 힘으로 살아가는 내가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 안에 사시는 분은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갈라 2,20 참조)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11)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내면에서 이뤄지는 영적 전쟁과 성전 건립의 차원으로 승화시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요구하신 부모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 또한 ‘내면의 애착으로부터의 정화’를 뜻합니다. 우리가 하느님보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가족에 대한 집착, 내 영적 위로를 더 사랑할 때, 마음은 소란스러워지고 영혼의 눈은 어두워집니다. 마음의 성전에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임금으로 모시기 전까지는, 영혼은 온갖 잡념과 정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중대한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자아와 인간적 애착이라는 낮은 땅에 갇혀 세상의 소음에 흔들리며 살아가겠습니까? 아니면 오늘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며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느님을 향해 고고히 피어나는 새 생명의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오늘 교황 주일을 지내며 보편교회의 목자이신 교황님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이름으로 파견된 모든 작은 이들을 환대하는 따뜻한 손길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삶의 자리에서 문득문득 찾아오는 염려와 집착의 순간마다 마음의 성전으로 들어가 가만히 예수님께 기도를 바치며 내면의 등잔불을 밝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 제 마음의 주인이 되어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고, 우리 안에서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풍요로운 생명의 기적을 목격하는 행복한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2주일

‘파견 설교’라고도 불리는 오늘 복음의 골자는, 너희가 제자가 된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마태 10,32 참조)하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마태 10,26)인 까닭이지요. 그분이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숨긴다고 숨겨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기 마련이고, 진리는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마태오 복음이 ‘드러낸다’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입니다. 이는 함께하는 단어 앞에 붙어서 ‘~으로부터’ 또는 ‘~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온다는 의미를 강화하는 전치사 ‘아포’(ἀπό)와 ‘덮거나 감추다’라는 뜻을 가진 ‘칼립토’(καλύπτω)가 합쳐진 말이지요. 직역하면 ‘덮어진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니, 결국은 감추어진 것이 밖으로 환히 드러난다는 뜻이 됩니다. 아포칼립토는 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라고 하신 말씀에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드러나게(아포칼립토)’ 하는 주체가 성자 예수님이 아니라 성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숨어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직접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느님의 ‘자기 계시(revelatio)’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시는 걸까요? 그것은 “당신 뜻의 신비를 기꺼이 알려주심으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계시헌장」(Dei Verbum) 2항 참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느님께서 드러내시는 계시 진리를 통해 하느님을 뵙고(visio Dei)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하느님 본성에 참여’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라고도 하였습니다.(「신학대전」 I-II, q.3, a.8) 계시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한, 만날 수밖에 없는 진리의 빛입니다. 인간은 그 빛으로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거지요. 계시는 항상 인간에게 ‘눈이 열리는 것’으로 체험됩니다. 이를테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루카 24,16)지요. 그러나 그분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루카 24,31)습니다. 예수님을 못 보던 이들이 다시 알아보게 된 건, 갑자기 또 다른 예수님이 새롭게 등장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아포칼립토가 말하는 하느님의 드러냄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우리 앞에 새로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눈이 열리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눈을 뜬다는 건 때때로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 자신의 나약함까지 고스란히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뜰수록 자기 환상은 무너지고, 꼭꼭 숨겨 두었던 상처가 드러납니다. 나의 위선은 그대로 폭로되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던 나의 삶이 산산이 조각나는 과정을 겪게 되지요. 어쩌면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보기에 앞서, 인간 실존의 나약함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숨겨왔던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마태 10,26)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죄의 경향성을 ‘드러내’ 주심으로써, 당신 사랑과 자비를 ‘계시’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나약함이 드러날수록 그분의 자비 또한 환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18면

[말씀의 우물] 메시아(그리스도)는?

신약성경에서 메시아(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쉽고 짧게 알려주는 구절로 다음을 꼽겠습니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묵시 5,6) 본디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일곱은 충만함과 구원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뿔이 일곱이니까, 수난당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으로 충만하신 분 곧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앎을 뜻하는 눈이 일곱 개라는 말은 앎으로 충만하신 분을 상징합니다. 종합하면 요한 묵시록 5장 6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과 앎으로 충만하신 곧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고 계시하는 구절인 것이죠.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그리스도론)를 누가 이보다 더 쉽고 간결하게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힘과 앎으로 충만한 승리자로서의 어린양은 유다교 메시아상에 상응합니다. 유다교의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을 성취하는, 곧 모든 악을 물리치는 궁극적 승리자로서의 모습을 담은 메시아상은 성서 어디에 나올까요? 다음 두 구절이 그 답을 줍니다.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그리스어로 구원의 뿔)를 일으키셨습니다.”(루카 1,69)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일곱 뿔과 일곱 눈을 들어서 메시아가 누구신지를 그림을 들여다보듯이 그렇게 입체적으로 그려주는 요한 묵시록 5장 6절 말씀은 4장부터 5장에 걸쳐 드러나는 ‘천상 예루살렘 예배’에 나옵니다. 천상 예루살렘 예배의 절정, 곧 예배 끝부분에서 하느님과 어린양께 대한 찬미 노래가 다음과 같이 울려 퍼집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하고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묵시 5,13-14) 이 천상 예루살렘 예배 장면 안에 요한 묵시록의 핵심 신학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사실 묵시록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혀주는 책입니다. 묵시록 저자는 곧 수난당한 어린양으로 등장하는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기다려오던 메시아(그리스도)이심을 밝히기 위하여, 당시 통용되던 온갖 상징과 숫자 등을 동원해 보다 쉽고 입체적으로 그 신비를 묘사합니다. 기원후 97년경 묵시록 저술 당시에는 천사와 황제 숭배(신격화)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특히 영지주의자(Gnosis)들은 육신은 경시하고 영적인 측면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순수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을 평가절상하는 반면, 우리 인간처럼 육체를 지니신 예수님은 평가절하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즈음에 묵시록 저자 요한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천사의 위치를 바로잡아 줍니다.(묵시 1,1 참조) 천사는 신이 아니라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고백합니다. “나(요한)는 …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마라. 나도 너와 너의 형제 예언자들과 … 같은 (하느님의) 종일 따름이다.’”(묵시 22,8-9 참조)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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