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에 참례하면 늘 비슷한 내용의 강론을 듣게 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이니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 덧붙여지는 이야기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일화입니다. 위대한 교부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 교리를 골똘히 생각하며 바닷가를 걷고 있었는데 어떤 어린이가 바닷가 모래밭에 구멍을 파고 열심히 바닷물로 퍼다가 붓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나고 물었더니 아이가 바닷물을 퍼서 구멍에 다 담으려 한다고 답을 합니다. 성인이 웃으며 작은 구멍에는 절대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으니 헛고생 그만하라고 타일렀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성인에게 말하기를, “맞다! 그러니 당신도 삼위일체 신비를 당신의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하려 하지 말라” 하고 사라졌다는 이야기죠. 한 번쯤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삼위일체는 신학적으로 가장 어려운 교리입니다. 하느님의 존재 방식에 대한 교리이니 ‘신비’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비’는 이성을 통한 논리적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전혀 알 수 없다면 교부들이 어떻게 토론을 통해 그런 교리를 정립할 수 있었을까요? 결국 삼위일체가 신비라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미사에서 함께 자주 바치는 사도신경과 간혹 바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삼위일체 신비를 고백하는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신앙 고백은 이성을 통한 논리적 이해를 넘어 믿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증언입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 신비는 성경과 삶을 통해 묵상하고 이를 통해 배운 것을 나의 신앙으로 고백해 볼 때 조금씩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삼위일체 대축일 복음은 아주 짧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모든 민족에게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라는 사명입니다. 그렇게 사명을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당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삶을 떠 올려 보면 그분은 늘 기도하면서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길 바라셨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비우며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신 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고, 광야로 예수님을 인도하여 아버지의 뜻을 찾게 도우셨습니다. 그런 성령이기에 부활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께서 자신들에게 내려옴을 체험합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진정한 사도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여정에 본격적으로 나섭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부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성부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며 애쓰시는지, 우리가 당신의 뜻에 따라 살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가 모든 것의 주인이신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세상과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아버지, 우리를 용서하시는 자비의 아버지임을 알게 됩니다. 제2독서는 성령 하느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해주는 분이심을, 예수님이 걸으신 사랑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심을 알려줍니다. 그렇기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됐습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마치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된 것처럼 복음을 증거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돕고 계십니다. 성부가 없었다면 성자는 세상에 올 수 없었고, 성자가 없었다면 세상은 성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없었다면 성자는 성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성자가 없었으면 성령은 세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는 하느님이 세 분 계시다는 이상한 교리가 아니라, 사랑은 함께 협력하는 것이며 일치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은총입니다. 이런 이유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삼위일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론하셨나 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신학적인 내용을 훈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삶의 방식에 혁명을 꾀한다는 뜻입니다. 각 위격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지속적인 상호작용 안에서 서로를 위해 사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타인들과 함께 타인들을 위해 살라고 부추기십니다. 열린 마음으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삶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 나는, 내가 살아가기 위해 다른 이들이 필요하다고, 다른 이들에게 나를 내어줘야 한다고,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한다고 정말로 믿고 있는가? 나는 이를 말로 입증하는가, 아니면 내 삶으로 입증하는가?”(바티칸뉴스, 2022년 6월 12일) 저는 믿습니다. 세상 창조부터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신 성부 하느님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의 삶으로 초대한 성자 하느님을,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예수님을 닮게 하시는 성령 하느님을 믿습니다. 또한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시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도 그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라는 이끄심을 믿습니다. 이런 저의 믿음이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삶으로 증거될 수 있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5-26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불리한 전쟁에서 승리한 기드온

새로운 시대를 창출하려면 일반적인 용기와 태도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 비난 중에도 지지를 받으려면 험난한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길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확고한 신념과 큰 용기를 지녀야 한다. 중국의 맹자는 전국 시대에 살았는데, 각 나라의 왕들은 유능한 인재를 끌어들이려 혈안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학식과 덕망 높은 대학자였던 맹자는 왕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맹자가 도덕 정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맹자는 왕이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백성을 사랑하고, 욕심을 버리고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이 매일 일어나는 마당에 맹자의 이런 주장을 귀담아듣는 왕은 없었다. 어느 날 높은 관리가 와서 진정한 용기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스스로 옳다고 생각되면 1000만 명이 가로막는다 해도 가는 것이 용기라고 가르쳤다. 남의 말에 귀를 닫으라는 말이 아니라 타인과 자신의 의견이 다를 때 깊이 성찰하여 하늘과 자신에게 떳떳하다면 용기를 내서 실천하라는 의미이다. 미디안족의 세력이 이스라엘을 억압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피하여 깊은 산속에다 은신처와 동굴 등 밖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곳들을 마련하였다. 그래도 미디안족과 다른 종족은 올라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지은 소출을 모두 약탈했다. 이렇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하느님께 절규하며 기도하였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에게 나타났다. 주님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말했다.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너는 마치 한 사람을 치듯 미디안족을 칠 것이다.” 기드온은 이게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했다. 집안도 변변치 못하고 어린 자신이 미디안족과 싸움을 할 수 있냐며 반문했다. 살기등등한 미디안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많은 수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소집되었지만, 하느님은 군인 숫자를 줄이라고 명령하셨다. 안 그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전쟁인데 병력 숫자를 줄인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았다. 많은 병력으로 전쟁에서 이기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고, 하느님께서는 이 전쟁을 자신이 이끄신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었다. 시험을 통과한 군인들이 겨우 300명이었다. 군인을 시험하는 방법도 특이했는데 물가로 데려가 개처럼 물을 핥는 이들을 뽑았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합격한 것이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인을 이끌고 전쟁에서 대승하였다. 이스라엘이 몇십 배가 넘는 적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민족의 영웅인 기드온도 말년에 전리품으로 탈취한 금을 가지고 에폿을 만들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 에폿을 섬기며 음란죄에 빠졌다. 말년에 한 번 잘못 판단한 실수로 인해 자신이 쌓은 평생의 명예가 무너져 버렸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5-26

[말씀묵상] 성령 강림 대축일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부활 제7주간이 끝나고 맞이하는 주일, 곧 주님 부활 대축일 후 49일이 되는 날에 교회는 성령께서 한자리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내려오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현상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심은 귀로 들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사도 2,2) 또한 성령 강림은 눈으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3) 여기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불꽃’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6항 참조) 히브리인들에게 이날은 ‘오순절’ 축제입니다. 그들은 과월절 첫날에서 일곱 주간이 지난 시반 달(5월) 6일에 축제를 지냈는데. 이 오순절 축제는 농경민족이었던 가나안인들이 첫 번째 보릿단을 수확할 때 지냈던 맥추절에서 비롯됐습니다(신명 16,9-13; 레위 23,15-16). 히브리인들은 이날 함께 모여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을 되새기고, 또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을 기념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으로 오순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날이 됐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이 완성됐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31항 참조).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파견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날은 노아와의 계약 또는 시나이산의 계약을 기념하는 오순절 축제일이 아니라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위업이 널리 알려지게 됐으며, 이는 모든 민족들에게 기쁜 소식이 됐습니다.(「강론지침」 56항 참조) 유학시절, 제가 거주하던 교구에서는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이 거행되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보내면서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제대 앞에 엎드려 서품을 받은 이들이 성령을 받고 파견을 받아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맡기신 구원의 사명, 곧 사도들에게,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후임자들에게 위임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특별한 은총을 청하는 바람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전례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점은 흥미롭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여러 사건 중 하나를 전해주는데, 이미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됐던 복음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에 해당합니다.(요한 20,19-31) 요한복음서 저자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저녁에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숨을 내쉬어 ‘성령’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여기에서는 ‘숨을 내쉬다’ 혹은 ‘숨을 불어넣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그리스어 동사 ‘엠퓌사오’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창조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칠십인역)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첫 번째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신 것처럼(지혜 15,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부활, 곧 새로운 창조를 통해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복음’으로 선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주간 첫날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 오순절에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손에 넘겨지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한 14,15-31 참조), 이 약속은 주간 첫날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며 성취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약속이 성취됐음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으로 파견을 받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믿는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요한 6,39-40.57 참조)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기에, 누군가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 또한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복음으로 배정된 두 번째 이유는 성령 강림 사건이 부활 사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 위함입니다.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된 복음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다시 한번 선포됨으로써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완성하는 사건임이 증명됩니다. 50일 전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알렐루야’를 다함께 노래 부르며 시작된 부활축제가 어느덧 끝나갑니다. 그러나 부활의 축제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축제의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축제는 주님께서 당신의 충만함에서 풍성하게 부어주신 성령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축제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총을 청하며 기도합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환호송)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5-19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무적 장사(壯士) 삼손

중학교 시절 단체 관람으로 친구들과 함께 영화 ‘삼손과 들릴라’를 보았다. 솔직히 지금 생각나는 장면은 삼손이 사자를 맨손으로 죽이는 것과 소경이 된 그가 기둥을 무너뜨려 사람들과 함께 죽는 것만 기억난다. 나중에 성경을 읽으면서 들릴라가 필리스티아인들의 계략으로 삼손에게 일부러 접근한 스파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미인계는 일반적으로 예쁜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여 조종하는 작전을 의미한다. 현대의 가장 유명한 미인계 첩보전은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만한 ‘마타 하리’ 사건이다. 네덜란드 출신인 마타 하리는 아름다운 미모와 춤 실력을 이용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연합군 고위 장교들을 유혹해 군사 기밀을 빼돌렸다. 그녀는 스파이 활동이 발각되어 1917년 10월 15일 프랑스 정부에 의해 총살형을 받았다. 마타 하리는 배짱이 좋아 총살을 당할 때도 눈가리개도 거부하고 군인들에게 ‘총을 계속 들고 있는 것도 힘들 테니 어서 쏘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마음에 거슬리는 생활을 하자 필리스티아인들의 지배를 받게 했다. 단 지파의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아기를 낳지 못했다. 하루는 하느님의 천사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 이제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몸을 조심하여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을 일절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 천사는 또 한 가지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아들을 낳으면 그의 머리카락에 면도칼을 대지 말라며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으로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에게 구원할 것이라 전했다. 마노아의 아내는 천사의 말대로 아들을 출산했고 삼손이라 이름을 지었다. 삼손은 엄청난 힘을 가진 장사였다. 삼손은 당나귀의 턱뼈를 들어서 필리스티아인 1000명을 때려죽일 정도로 힘으로는 그를 상대할 수 없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꾀를 내어 미모가 출중한 들릴라를 포섭해 삼손에게 접근했다. 들릴라는 그의 힘이 근원이 머리카락임을 알게 되었다. 들릴라는 삼손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머리카락이 잘린 삼손은 힘이 빠져 필리스티아 군인들에게 잡혀갔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삼손의 눈을 빼어 소경으로 만들고 노예로 부리며 재주를 피우게 하며 복수하고 농락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삼손의 머리카락이 자라났다. 삼손은 축제가 있던 날에 한 소년의 도움을 받아 집의 기둥을 무너뜨려 많은 필리스티아인들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삼손은 큰 힘을 발휘하며 승승장구했다. 삼손이 경각심을 잃고 방심한 것이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 삼손의 괴력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힘이었다. 우리가 가진 탈렌트는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무상의 선물이다. 이것을 망각하고 교만해질 때 오히려 우리의 탈렌트가 오히려 독이 되어 멸망케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5-19

[말씀묵상]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며, 대중매체를 통한 효과적인 교회 사도직 수행을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홍보 주일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이 홍보 주일로 제정된 이유를 조심스럽게 짐작해보자면,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특별사명을 제자들에게 내리신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간의 품위를 들어 높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복음 홍보대사’로 부름받았습니다. 가톨릭신문사로부터 ‘말씀묵상’ 원고청탁을 받고 망설일 무렵, 친구 수녀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녀님 모친 고 분다(베네딕타) 어르신은 시골 작은 동네에 사시는 여건상 주일미사를 대체로 공소예절로 하셔야 하는데, 부족한 부분 때문에 매주 가톨릭신문을 꼭 읽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 홍보 매체에 대한 지평이 넓어진 순간인 것은 물론, 가톨릭신문이 수행하는 ‘집 안으로 찾아가는 교회’ 역할이 강렬하게 다가왔었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은 주님께서 강복하시며 하늘로 오르신 사건으로, 언제나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영원한 축복의 복음입니다. 아울러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주님의 승천은 부활 사건의 완결입니다. 그런데 주님 승천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 복음서가 매주 적은 지면만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마르코복음의 승천 이야기는 단 한 구절에 불과하고 마태오와 요한복음은 승천 이야기를 아예 생략했으며, 루카복음 역시 후속책인 사도행전에 유보한 탓인지 매우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간결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이 들려주는 주님 승천 이야기를 요약하면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승천은 주님의 지상 사명의 완성으로 사도들 앞에서 일어난 공개적 사건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주님 승천은 주님 재림의 약속과 더불어 성령의 약속까지도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듣게 되는 마르코복음은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사도들과 우리 모두를 복음선포 홍보대사로 위촉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이유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기 위함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사명은 세상을 향해 기쁜 소식을 선포(16,15)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르코복음에 나타나는 부활 메시지 전체는 다른 이를 향한 기쁜 소식의 선포에 있습니다. 무덤에서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여인들에게 선포되고,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전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부활 체험과 주님 부활 소식은 선교라는 사명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르코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 후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은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와 사도신경이 선포하지만, 복음서에서는 마르코만이 전하는 사건입니다. 시편(2편과 110편)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이 구절을 마르코가 전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심을 확증하고, 그분이 우주의 통치자가 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습니다. 승천하심으로 주님의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과 함께하시며 다섯 표징으로 보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쫓겨나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고, 손으로 뱀을 잡고 독을 마셔도 무해하며, 병자들을 치유하는 놀라운 이적들이 그 보증입니다.(16,17-18)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시던 일을 위임하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당신이 하셨던 귀한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은 부재하면서도 존재하는 경이로운 방식으로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거리를 극복하고 계십니다. 마르코복음은 주님 승천 후 제자들이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파견받은 제자들이 표징과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16,20) 주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크고 대담한 배포를 선물한 듯 보입니다. 기적의 첫째 목적은 기적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람들이 복음을 믿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교회의 탁월한 본보기로, 그분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선교 사명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라는 근원에 닿아있습니다.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에서 우리의 선교지가 ‘온 세상’임을 확인합니다. 지역과 대상의 제한 없이 온 세상이 우리의 일터인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한 가지는, 말씀의 첫 번째 선포 대상은 언제나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복음의 증거자입니까? 방관자입니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이 사명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우리의 존재가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 속에 있는지 되짚어 보아야겠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 삶의 지표를 재정립하는 은총을 빕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5-12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유리천장을 깨트렸던, 드보라 판관

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을 꿈꿨던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 유세 내내 유리천장을 깨뜨릴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대선에서 낙선한 후 “언젠가 누군가는 그 유리천장을 깨뜨릴 것이다”라며 의미 있는 메세지를 전했다. 유리천장(glass ceiling)은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직장 내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 등의 이유로 고위직을 맡지 못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경제학 용어이다. 유리천장이란 말은 우선 ‘성’(gender)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대신학교 1학년 학보사 기자 시절 학보인쇄를 위해 하루 종일 어느 작은 출판사와 인쇄소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다. 여직원은 경리를 맡은 한 사람이 있었고 나머지는 남직원들이었다. 남직원들이 여직원을 대하는 것을 보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현재 법적 차원에서는 모두 성추행 등 위법행위가 될 말과 행동이 수없이 자연스럽게 행해졌다. 더 큰 문제는 여직원을 같은 동료가 아니고 다른 차원의 사람으로 차별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유리천장은 존재한다고 느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은 뒤 왕정시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판관시대를 맞게 된다. 판관이란 왕은 아니지만 민족을 지도하는 통치자로서 사법과 행정을 관할하는 직분을 맡은 사람이다. 판관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위급한 국가위기 상황에서 군인들의 총사령관 역할도 담당했다. 이스라엘의 판관 중 드보라는 유일한 여성이다. 여성이 사회적 불평등을 당하던 당시에 여자 판관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여자 예언자 드보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면서 재판을 주관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정세는 가나안 왕이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드보라는 만 명의 군인을 출동시키면서 자신도 함께 전선에 참여했다. 가나안 군이 상상할 수 없는 무기로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도 드보라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군에게도 계속 공격을 명령했다. 패배감에 젖어있는 이스라엘 군인에게 하느님께서 우리들 앞에서 전진하니 꼭 승리할 것이라 확신과 용기를 주었다. 결국 이스라엘 군인의 높은 기세에 눌려 적군은 도망쳤고 이스라엘은 승리를 쟁취한다.(판관기 4장 참조) 드보라는 지혜와 용기, 신앙을 겸비한 여성 정치가였다. 그녀는 용기 있는 결단으로 민족을 구한 이스라엘의 국모(國母)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능력이나 역할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성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다. 신앙인에게는 어떠한 인종, 문화, 사회적이나 성적 차별이 존재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생각과 의식이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별의 선입견이 존재하지는 않는지 늘 반성해야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5-12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믿음과 용기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칼렙

1950년, 갑작스러운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6·25전쟁에서 아군은 순식간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뒤집었지만,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 참전으로 유엔군은 패퇴를 거듭했다. 하지만 유엔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 처음으로 승리하면서 자신감과 사기를 되찾는다. 작은 지역의 전투였지만 전쟁 후반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었다. 양평면 지평리는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였다. 미군 23연대 전투단이 지평리를 사수했다. 사흘 동안 7000명이 안 되는 병사들이 중공군 10만여 명을 상대로 포위된 채 3일 동안 그야말로 사투(死鬪)를 벌였다. 이 전투에는 프랑스대대의 몽클레르 중령 휘하에 한국군 180여 명도 참여했다. 특히 환갑에 가까웠던 몽클레르 중령은 아픈 다리를 이끌고 전장을 오가며 지휘했다. 꽹과리, 북을 치며 공격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은 칠흑 같은 밤중에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려 상대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한 한국군 병사가 온몸을 떨고 있었는데 프랑스 병사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에 손을 얹어 안심시켰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마치 큰 형님이 ‘걱정하지 마. 내가 있으니까’라는 신호 같았다. 전투 중에도 자신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사기를 북돋웠다 한다. (이정환 저 「지평리를 사수하라」에서 발췌) 어느 날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할 사람들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모세는 공정하게 각 지파의 대표 12명을 뽑아 가나안땅을 수색하게 했다.(민수기 13장 참조) 수색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 사실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위험한 작전이다. 12명의 수색대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40일 만에 돌아왔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탐한 사실을 알리는데 대원들의 의견이 서로 갈렸다. 일부는 강한 부족이 자리 잡고 있어 전쟁을 치르면 크게 패배할 것이라 미리 패배를 예상했다.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사람들을 패배감에 젖게 만든 것이다. 그때 유다 지파를 대표해 뽑혔던 칼렙이 나서며 이스라엘이 꼭 승리할 것이라 장담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론이 갈라지면서 갈팡질팡했다. 심지어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여론이 팽배해졌다. 그때 옷을 찢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가나안 정복을 호소했던 이들이 여호수아와 칼렙이었다. 가나안 땅은 하느님이 선조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라 승리할 수 있다고 두 사람은 확신했다. 지도자는 늘 고독하게 결단해야 하고 결과와 책임도 감당해야 한다. 칼렙과 여호수아의 가나안 진격은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평화 때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지도자의 역량이 잘 나타난다. 칼렙의 승리를 확신했던 근거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다. 칼렙은 노령에도 계속 전의를 불태우는 역전의 용사였다. 여호수아에겐 칼렙과 같은 충직하고 용기 있는 전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위기의 순간에 능력 있는 지도자는 솔선수범하고 올바른 판단으로 부하들의 사기와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5-05

[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최후의 만찬에서 남겨주셨던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새로운 계명,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예쁘고 따뜻한 말씀조차도, 어떤 일상 앞에서는 서운하게 들리는 날이 있습니다. 교무실 자리 건너편에는 안전생활부장 선생님이 계십니다. 학생들의 갈등이나 일탈을 담당하는 분이시지요. 예전에는 학생주임이라고 불리던 그런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건너편 자리에서 한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늘 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갈등과 일탈은 끊이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과 아이들의 마음이 어긋나는 그런 순간들이지요. 선생님의 한숨은 실패한 사랑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저조차도 속이 상합니다. 본당 사목자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으로 봉사하겠다고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을 할퀴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이야기 앞에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결정은 누군가에게는 공정과 정의이겠으나, 반대편에서는 배제이고 편애로 비치겠지요. 이 사람도 제 신자고 저 사람도 제 신자인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럴 때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채찍처럼 느껴졌습니다. 과연 이 말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저 ‘사랑하라’ 하셨다면 될 일을, 굳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아름다운 말씀이 서운한 날에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의 계명에다 묵상이랍시고 말을 덧대는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침묵을 지키고 싶습니다. 도리 없이 말해야 한다면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어떤 물음이 가능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물어보든 그 질문은 예수님이나 요한 복음사가를 만났던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과 닮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요한을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요한은 스승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와 함께하며 배웠습니다. 요한은 묻고 예수님은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요한은 노년을 맞았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순교했고, 그는 홀로 세상에 남아 주님에 대해 말해야 했습니다. 스승과 함께한 시간보다 한참을 더 살아낸 요한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언가 가르쳐주기를 청했습니다. 질문을 하던 청년 요한은, 이제 유일한 사도로서 답해야 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은 그렇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킨 뒤에 아주 짧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십자가로 나아가던 스승의 가르침을, 죽음을 앞둔 요한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 요한이 이제 스승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대답에 많은 사람들은 ‘또 사랑이냐?’하고 푸념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에게 다른 이야기를 기대했나 봅니다. 어쩌면 요한조차도 실패했는지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던 그 순간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엇갈려나갔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습니다. 수난을 앞두신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도, 몸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모든 것을 쏟아 내시며 사랑하실 때도, 그야말로 당신이 친구라고 부르시는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바로 그 저녁에도 그랬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고, 나머지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그날에도, 예수님의 한결같은 마음과는 달리, 제자들의 마음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결같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마주한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고민해야 하지요. 그렇게 매 순간 사랑을 고민하는 것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주님과 제자들, 사랑의 사도 요한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려웠던 그 사랑은, 우리에게도 아득히 멀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시도하겠지요. 그리고 그만큼 자주 서로 사랑하는 데 실패할 겁니다. 그러나 실패할 일이라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가르침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덧붙여 놓으셨지요. 사랑의 계명 안에, 이미 주님의 사랑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겠지요. 서로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닮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5-05

[말씀묵상] 부활 제5주일

부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을 전해주던 앞의 주일 복음과 달리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포도나무와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복음에서 저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성경 구절은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입니다. 하느님이 ‘농부’라니, 여러분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저에게 농부는 푸근한 인상, 그러나 누구보다도 진실하게 땀 흘리는 삶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사람이 뭘 잘못하나를 감시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하며 좋은 포도나무들이 자라도록 땀 흘리며 애쓰는 농부라고 예수님은 말하시는 것 같습니다. 밭에는 돌이 있고, 잡초도 있고, 해충들도 있기에 농부는 바쁩니다. 이런 것들을 제거하고 거름도 주고, 비바람에도 대비하고 때론 가뭄이 들 때 물도 대어주어야 포도나무가 잘 자라기에 정말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로 바쁘실 것 같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세상에서 사랑과 평화가 넘치도록 온 인류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느님의 초대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초대에 응한 사람들에게는 사명을 주시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다 더 사랑하시는데 온 힘을 다 하실테니까요. 아니,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믿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이 가장 흡족해하는 포도나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포도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따뜻한 햇빛, 적절한 비, 땅이 주는 영양분이 다 필요하듯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 은총과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섬기는 삶 모두를 양분으로 해서 살아가셨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풍성한 열매를 살아가는 내내 맺고 나누셨기에 그렇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가장 건강한 ‘참 포도나무’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이 말씀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과 내 인생이 별 관계가 없는데도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말일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내 인생은 나 혼자 알아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인생의 진실을 물으며, 그분의 삶에서 구원의 신비를 발견하고, 따라 살아가고자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 우리는 성경 묵상을 통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아무 걱정도 없이 알아서 잘 살아가신 분이 아니라, 인간이 갖는 한계와 어려움을 온전히 겪으면서도 인간의 삶 안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그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신 ‘나와 같은’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성사 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에게서 내 삶의 근원적 지혜와 힘을 얻고 그분의 제자로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삶은 너무 이상적이기에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단정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일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이 쉽지 않고 치열하다고 느낄수록, 나 혼자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왜 우리에게 이런 인생을 허락하셨는지, 우리는 어떻게 인생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살 수 있는지를 묻고 배우도록 초대받은 것이 축복 아닐까요?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는 내 경험, 내 생각, 내 판단이 옳다고 믿고 그것들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인생에 관심을 갖고, 그분이 삶에서 가장 중시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나 역시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삶일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 삶의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맺게 해주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우리가 정말 원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주님이 필요한 은총을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맺는 열매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이고, 이렇게 서로 사랑할 때 아버지 하느님이 영광스럽게 된다고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을 부활과 연결지어 다시 묵상해 봅니다. 부활은 단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걸었던 사랑의 길이야말로 죽음을 이기고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 길임을 고백하는 사건입니다. 사랑의 길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사랑의 길을 믿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알게 되고 새롭게 태어난 사건이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셨을 뿐 아니라 그 구원 사업에 우리도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부활을 체험하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런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님이라 고백하고 그분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알아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농부이신 아버지 하느님은 포도나무가 건강히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시고, 건강한 포도나무인 예수님에게 달린 가지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사도로 파견하시면서 축복하십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4-2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힘과 용기의 지도자, 여호수아

이스라엘 역사에서 안타까운 장면 중 하나는 모세가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 숨을 거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광야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동고동락했던 사람들과 이별했다. 광야에서 자신들을 이끌었던 지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자, 이스라엘 민족은 큰 시름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전사로서 용맹하게 가나안의 각지에서 계속 싸우며 결국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찰하고 전략을 세워 전투를 벌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희세지웅(希世之雄)이란 사자성어는 난세에 보기 드문 영웅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역사에서 보면, 때에 맞는 지도자가 나타나 활약하는 것은 그 나라나 민족을 위해서는 큰 행운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탄생시킨 지도자라고 하면 여호수아는 실제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던 전사(戰士)형 리더였다. 이미 오래전에 터를 잡아 살고 있는 가나안 주민들을 공격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리한 점이 많았지만, 여호수아는 이를 극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한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실제로 국가를 세운 사람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였다. 모세는 그를 무척 신임하고 일찍부터 후계자로 생각했다. 여호수아는 실제 전투에서 많은 공을 쌓았고 실전 경험을 터득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측근으로 이집트 탈출을 하면서 광야 생활 내내 큰 공로를 세운 충직한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작 가나안 땅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그동안의 광야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모세에 대해 반란이라도 할 기세였다. 게다가 이들이 맞이한 가나안에는 만만하지 않은 적들이 버티고 있었다. 가나안에 있는 민족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보잘것없었다. 싸우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의 기세에 눌려 전전긍긍했다. 전투에서 전의(戰意)를 상실하면 싸움은 해보나 마나 필패이다. 이때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와서는 옷을 찢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과 같은 땅에 들어갈 수 있소. 적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하느님이 우리 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반대하고 이집트로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 환경에서 여호수아의 외침이 제대로 먹힐리 없었다. 오히려 전투를 독려하는 여호수아는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 빠졌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죽음을 무릅쓰고 소신있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위기에서 포기해 버리고 모험에 나서지 않는 지도자는 리더로서 자격이 없다. 여호수아의 용기 있는 행동은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꾼다. 그는 무엇보다 힘과 용기를 가지라고 하며 함께하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다. 여호수아는 전투에서는 맨 앞장서서 싸우는 힘과 용기가 있는 유능한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믿음이 강한 인물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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