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부활 제3주일, 생명 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 티베리아스라고도 불리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제자가 물고기를 잡기에 가장 좋은 때인 밤에 배를 몰고 나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밤새 허탕을 치고 맙니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이상합니다.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될 무렵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마치 짙은 어둠이 삼켜버린 것만 같았던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부활과 참 잘 어울리는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옛 교우들은 부활 새벽에 산에 올라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하고, 태양이 뜨고 있음을 알리는 수탉은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호숫가에 서신 예수님께서 약 100미터쯤 떨어진 배 위의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는 데 사용하신 ‘얘들아’(παιδία)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요한 21,5) 사실 이 단어로 제자들을 부르는 것은 어색합니다. 7세 미만의 어린아이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실까요?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당신을 배신하고 버린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 괘씸한 죄인이 아니라 마냥 무섭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도망쳐 버리고만 가련한 어린아이들로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오른편은 상서로운 방향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153마리나 되는 고기가 잡혔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에 따르면 당시 알려져 있던 물고기 종류가 153가지였다고 하니, 153마리의 물고기는 온 세상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첫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루카 5,1-11 참조)과 흡사한 이 장면은 예수께서 비록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떠났어도 그들을 다시 불러 모든 민족을 낚는 어부로 거듭나게 하심을 보여줍니다. 제자는 스승을 버렸으나, 스승은 제자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내 예수님을 알아본 베드로는 옷을 입고 그분께로 헤엄쳐 갑니다.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죄인의 반응입니다.(창세 3,10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죄책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의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해 세상으로 파견하기 전 손수 한 끼 식사를 챙겨 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과 생선을 나누어 먹이시는 모습은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신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신 죽음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성체성사 안에서 늘 일치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질문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는 슬퍼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슬픔은 곧잘 깨달음의 매개체가 되곤 합니다. 베드로도 슬픔을 통하여 세 번 배반한 자신에게 세 번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심으로써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두 번은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질문하시고 마지막 질문에는 ‘필레오’(φιλέω)라는 동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세 번 모두 ‘필레오’라는 동사로 대답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단어들을 모두 사랑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두 동사가 의미하는 바는 다릅니다. 필레오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 주로 사용되고, 아가파오는 신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아가파오로 물으시는 첫 두 개의 질문에 필레오로 대답한 것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이 아직 미숙함을 고백하며 그것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과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필레오로 질문하신 다음 당신 양들을 돌보라 명하십니다. 형제에게 향하는 필레오에 주님께로 향하는 아가파오의 비밀이 숨어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형제를 사랑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배우라는 가르침으로 이해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입맞춤으로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2014년 8월 18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명동대성당에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마지막으로 로마로 귀국하는 사목방문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사가 끝나기 전 교황님 제의실로 가는 데 경찰 통제선 안쪽에서 한 어머니가 울고 있는 아이와 같이 나에게 손짓했다. 가서 들어보니 어머니가 교황님께 축복을 받으려고 꼭두새벽부터 기다렸는데 입장하실 때 교황님이 다른 쪽을 향해서 인사를 하셔서 안수를 못 받았다고 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간절해 나는 아이를 데리고 제의실로 가서 기다렸다. 미사가 끝나고 교황님께서 복사단과 함께 들어오셨다. 한여름의 빡빡한 한국 사목방문 4박5일의 일정을 다 마친 교황님은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교황님께 다가갔다. 그러자 교황님은 걸음을 멈추고 지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따듯한 미소를 띠시며 아이와 악수했다. 내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자, 교황님은 아이를 안으시고 볼에 입맞춤하셨다. 아이가 준 편지도 받아서 직접 제의 안으로 챙기셨다. 그때 보았던 교황님의 따듯한 미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입맞춤은 예로부터 평화와 우호의 상징으로 계약의 조인에도 사용되었다. 발이나 손에 하는 입맞춤은 겸손과 자발적 복종, 존경의 표시이다. 지금도 외국 성지순례 때 보면 성인상의 발등에 고개를 숙여 입맞춤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스승을 배신해 악인들에게 넘겨줄 때 입맞춤 장면이 언급된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22,47-48) 입맞춤은 본래 애정과 헌신의 표시였지만 주님을 배반한 유다에 의해 악용돼 배반의 표시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해 돈을 받고 팔아버려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로 생을 끝마쳤다. 예전에는 유다가 ‘예수의 13번째 제자’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13명의 사도단은 실제로 없었다. 지금도 서양권에서 성행하는 숫자 13을 기피하는 문화는 유다가 그 시작이었다. 유다는 사도단의 살림을 맡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뢰를 받았다. 단체에서 돈주머니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그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죄인들의 손에 팔아넘긴 이유는 성경에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스승이 유다인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킬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는 점이 그를 실망하게 했을까?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가끔 일하다 보면 진짜 걸림돌은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 장군이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앞으로 진격하는데 방해를 놓는 것은 독일군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편이 발목을 잡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예루살렘의 구도시(old city)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하는 순례지가 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시작해 골고타 언덕까지 이어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으신 ‘고통의 길’입니다. 지금은 옛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끄러운 시장이 됐습니다. 비아 돌로로사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며 골고타까지 가다 보면, 순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상인과 행인들의 눈길이 꽂혀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형틀 나무를 지고 올라가는 나자렛 사람 예수의 행렬을 많은 이들이 구경하였듯이 말입니다.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 구경하며, 메시아가 저럴 수는 없다고 혀를 찼을 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골고타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죄인들의 형 집행이 이루어졌고, ‘해골터’라는 지명 뜻처럼 무덤도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형벌 가운데 가장 잔인한 종류로서, 베드로도 이 형벌이 두려워 예수님과 한패가 아니라며 세 차례 부인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은 고통에 시달리다 서서히 죽었다고 하니, 예수님이 당일 운명하신 것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마르 15,44)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이 그런 십자가 위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점이 가장 놀라운 일이지만 말입니다. 마르코복음 15장 39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이방인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지는(마르 15,38) 광경을 그가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전은 예부터 주님의 현존이 상징적으로 자리하신 곳으로서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성전이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곳임을 암시해 주는 실마리는 성경에 여럿 존재합니다. 첫째, 에덴동산에서 원조들이 하느님을 자유롭게 뵐 수 있었듯이, 성전도 하느님께서 인간을 공식적으로 만나 주시던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두 곳 모두 죄 없는 상태, 정결한 상태여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원조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건 죄를 지어 합당한 정결함을 잃어서였고, 옛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정결 예식을 치러야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과 9장의 실로암 못이 예수님 시대 사용한 대표적인 정결 예식터였습니다. 셋째, 커룹의 존재도 공통됩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따르면 에덴동산의 입구에서는 커룹이 불 칼과 함께 지켰고, 성전에는 지성소의 계약 궤에 커룹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원조들이 에덴동산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커룹들이 지켰듯이, 지성소 또한 커룹이 자리해 있음으로써 일반 백성의 접근을 상징적으로 제한하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두 곳의 공통점은 ‘기혼’이라는 지명에서 드러납니다. 기혼은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네 강 가운데 하나이자(창세 2,13) 예루살렘 성에 자리한 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옛 예루살렘의 중심에는 성전이 봉헌돼 있었고, 기혼 샘은 성전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형태였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기혼강이 흘러나왔다는 에덴동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컨대, 옛 이스라엘 백성은 부분적으로나마 성전에서 에덴동산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현존을 상징한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사제만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위 16,2.29.33) 그러나 신약 시대에 교회의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로 그 금지된 정원, 곧 에덴동산을 상징한 지성소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비가 이방인 백인대장의 고백 안에 담겨 있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확인하고 그분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서야 믿지만, 이방인 백인대장은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지는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신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다만 에덴동산을 상징적으로 재현해 준 성전은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무너졌고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덴동산을 상징한 성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신께서 성전이 되셨고(요한 2,20-21 참조), 또한 우리 모두가 그 이후 성령을 모신 성전이 됐기 때문입니다.(1코린 3,16; 2코린 6,16 참조).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세관에 있는 마태오를 부르신 예수님

예수님과 마태오가 처음 만난 장소는 세관이었다. 마태오는 세리였다. 유다인에게 세리라고 하면 창녀에 버금가는 죄인이었다. 세리는 유다인 사회에서는 배척을 받는 직업으로 같은 유다인들에게 두 배 내지 세 배의 세금을 징수하는 등 부당한 이익을 취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로마제국의 앞잡이와 같은 일을 하는 세리들은 유다인 사회의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세리들을 이방인과 같이 취급했고 겉으로는 내놓고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경멸했다. 당시에 로마의 징세 제도에서 세리들은 미리 담합을 벌여 다음 해의 세금 징수권을 따냈다. 세리로 등용된 이들은 자신이 사용한 돈 이상으로 이익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통행세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임산부를 2명으로 간주하는 등 비상식적인 세금 징수로 유다인들은 세리를 이방인 취급하여 ‘개’라고 부르곤 했다. 세리도 돈을 많이 벌고 호의호식했지만, 마음속에는 평화가 없었다. 인간에겐 돈과 재물보다도 중요한 것이 많다. 명예와 평화로운 마음을 회복하고 싶은 것은 인간 모두의 본성이다. 마태오도 적당히 법을 이용하여 재물을 많이 축적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진정한 친구나 지인보다 돈으로 얽혀있는 인간적인 만남이 많았을 것이다. 마태오는 주변 유다인이 자신을 도둑과 개처럼 멸시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죄인들과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저 다른 보통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해주시며 손을 내밀어 주셨다. 전혀 새로운 만남에 감동한 마태오는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 사도들의 명단 속에는 항시 마태오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태오 복음서만이 세리 출신의 제자를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10,3 참조)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을 위해 쓰였다. 마태오 복음서는 ‘팔레스티나 복음서’로 간주될 만큼 팔레스타인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교리서와 같은 책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그 선교의 대상이 되는 유다 세계와 유다 문화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집필연대는 내적 특성을 고려하여 마태오 복음서는 서기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10여 년이 지난 80~85년에 결정적으로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화에서 마태오는 성경(에제 1,10; 묵시 4,7)에 언급된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해 날개 달린 사람, 다시 말해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마태오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복음서를 시작한 것에 대해 리옹의 주교이자 교부인 이레네오 성인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세리였던 경력으로 인해 은행원과 경리,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교회 미술에서도 장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되기도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부활 대축일

알렐루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사도 10,40) 이 증언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시고 구세주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죽음을 이기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복음은 그저 역사 속의 한 의인의 이야기를 넘어서는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을 넘어서는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 부활 사건을 명백히 전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려한 수식어 등으로 독자를 현혹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체험하고 목격한 것을 담백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는데, 때로는 비유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예고하십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요나의 표징에 빗대어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마태 12,40) 하셨고, 요한복음에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하셨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직접적으로 당신이 고난을 받아 죽으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고 세 차례나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모든 예고를 제대로 알아듣거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그것을 믿게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을 목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의 증언을 듣고, 먼저 예수님을 만난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결국 그들이 직접 예수님을 뵙기 전까지는 믿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뵈온 이들의 증언을 믿지 않는 제자들의 불신을 꾸짖으시고(마르 16,11-14 참조),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믿게 하시려고 두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만져보게 하셨고 음식을 함께 드셨습니다. 복음은 이렇듯 솔직하게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경험을 통해,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하는 이들을 독려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이 부활을 믿고 있습니까? 이 어려운 일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나요? 애초에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기는 하였나요? 믿음이 가벼운 선택일 리는 없지만, 박해 속에서 목숨을 걸고 믿어야 하던 사도들이나 초대 교회의 신자들과 그 무게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고 새 생명을 살아가려 한다면 우리도 목숨을 걸고 그분을 믿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에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새 생명을 믿어야 죽음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이들에게 성공적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박해 시대에 기꺼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신앙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자들의 수가 날로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언변이나 논리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헌신으로 부활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무력한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가 구원의 표징이 되었고 부활의 확증이 되었습니다. 믿기 어려운 것을 믿기 쉽게 가공해서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믿기 어려운 것을 믿어서 목숨을 바치는 삶으로써 믿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같은 믿음으로 이어지다 이 땅에서도 순교자들을 내었고 그분들의 믿음을 통해 우리의 믿음도 주어진 것입니다. 알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올해에도 우리는 서로 부활을 축하하며 부활 인사를 나눕니다. 우리는 우리가 전해 받은 이 믿음을 어떻게 또 전할 수 있을까요?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요? 사도들과 교회를 도와주신 성령께서 깨우쳐주시고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2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어린양의 삶과 죽음(묵시 5,6ㄴ-14)

어좌 한가운데 자리 잡은 어린양은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살해된 것처럼 서 있는’(ἑστηκὸς ὡς ἐσφαγμένον) 어린양이 과연 가능한가. 죽었는데 서 있는 게 가능한 일일까. 주석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하여 어린양의 모순적 양태성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어린양은 분명 죽었고, 또한 분명 살아 있다. 죽음과 삶은 물리적 시간의 전후에 머무르지 않는다. 죽음과 삶은 하나다. 흔히들 말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요한묵시록의 어린양은 이러한 이분법적 신앙 고백엔 그리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요한묵시록은 삶을 죽음의 대척점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모두가 승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죽음을 물리친 자리가 아니라 여전히 죽어가는 자리를 동시에 껴안는 자리로 묘사된다. 그 이유는 너무나 뚜렷하여 선명하다. 우리 주 예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여전히 세상의 찬바람을 끝끝내 버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사라진 게 아니다. 영원한 생명을 살아내는 신앙인 곁에 예수님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 위에 포개져 사유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양’의 형상은 단순히 역사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을 놓고 고민한 결과가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위에 신앙인의 삶과 죽음이 포개져 ‘어린양’의 형상으로 소개된 것이다. 문법적으로 살펴봐도 그렇다. ‘살해된 것처럼 서 있는’으로 번역된 분사 형태의 동사들은 어린양을 꾸미는 형용사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스말은 남성, 여성, 중성을 문법적으로 구별하는데, ‘살해되었다’는 동사는 남성형 분사다. ‘어린양’(ἀρνίον)은 중성 명사이기에 중성인 명사와 남성인 동사의 결합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이다. ‘살해되었다’는 동사가 남성형이라서 몇몇 주석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어린양을 통해 바라보지만, 중성인 어린양에 대한 해석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욱이 ‘살해되었다’는 동사는 ‘스파조’(σφάζω)로 쓰여있다. 목을 잘라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다. 살해된 어린양을 굳이 예수님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한묵시록은 11장의 두 증인 이야기에서 주님의 죽음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이 잘려 죽은 이는 누구일까. 어린양이 중성 명사라면 굳이 남성으로서의 예수님만을 언급하기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예수님의 죽음에 신앙의 증거로 함께 한 모든 순교자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예수님의 죽음은 실은 많은 신앙의 증거로 피가 끓어오르는 생명의 자리가 아닐까. 어린양은 예수님을 증언한 신앙인의 숱한 죽음 위에 새롭게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역사적 사실관계에 머물러 성경을 읽다 보면 무리수가 발생한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신앙의 해석과 상상을 가미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역사의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모든 신앙인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은 그분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그분의 죽음마저 우리에겐 생명의 선물로 사유하고 상상하는 자유를 어린양을 통해 마련하신다. 예수님을 두고 상상을 펼쳐나가는 요한묵시록 5장은 6절 후반부터 우주론적인 차원으로 뻗어 나간다. 권능을 가리키는 뿔과 지혜를 암시하는 눈을 각각 일곱 개씩 가진 어린양은 하늘과 땅을 이어놓는 친교의 상징체로 소개된다. 어린양의 일곱 눈이 온 땅으로 파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공간은 천상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양의 눈은 땅으로 파견되어 하늘과 땅이 어린양의 형상 안에 통합되는 것이다.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는 이러한 친교와 통합을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묵시 5,9) ‘주님의 피로’라고 번역된 그리스말은 ‘너의 피로’(ἐν τῷ αἵματί σου)라고 되어 있다. 천상의 ‘어린양’은 지상을 대표하는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에게 ‘너’라는 친근한 이웃이 된다. 어린양은 자신의 희생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을 하느님께 이끌었다. 묵시문학은 ‘모든’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네 가지 범주로 표현하는 습성을 지닌다. 모든 민족이라고 해도 충분할 터인데, 굳이 종족, 언어, 백성, 민족으로 구별하여 표현한다. ‘모든 이’가 진정으로 ‘모두’, 어린 양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으로 어린양을 통한 신앙의 상상은 마무리된다. 천상의 주님이 지상의 ‘너’가 되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너의 피’, 곧 예수님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속량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말 동사 ‘아고라조’(ἀγοράζω)는 다분히 상업적 의미를 지니는데,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물건을 구입할 때 사용하는 동사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희생을 부정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한 필연적 과정 혹은 치러야 할 대가를 말할 때 이 동사를 사용한다.(1베드 1,18 참조)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거저 우리 사람을 구원하신 게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라서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신 게 아니란 말이다. 하느님은 참된 인간으로서 바보 같은 죽음을 맞닥뜨리셨고 바보같이 돌아가셨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친교의 원동력은 끝없이 내려놓고 비워내고 스스로를 대가로 지불하는 하느님의 바보 같은 사랑 덕분이었다. 예수님은 오늘도 어린양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에게 주어진 나날들은 실은 죽어가는 시간의 연속이다. 죽음이 생명일 수 있는 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이 세상 모든 이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봉인을 열어 보이실 어린양은 그러므로 새롭고 신비한 천상의 놀라움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끝내 살아내는 숱한 일상의 희로애락을 다시금 살펴보게 할 것이다. 그 일상이 죽음을 향할지라도 우리 믿는 이들에겐 천상이요, 생명이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3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천둥의 아들’ 충직한 제자 야고보

세계 어디서나 간호사가 되면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물려받자는 뜻에서 '나이팅게일 선서'라는 것을 하게 된다. 나이팅게일(1820~1910)은 간호사로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854년 크림 전쟁으로 부상병이 많이 발생하여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녀는 이 뉴스가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확신을 갖고 야전병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여성이 전쟁터에 가서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은 없어 나이팅게일의 부모님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거의 잠도 자지 않은 채 부상한 병사들을 돌보았다. 늦은 밤에도 램프를 켜서 들고 부상병들을 간호하는 그녀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녀의 이런 봉사의 모습은 널리 퍼져나가 세계인의 관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그녀를 위한 대대적인 환영대회를 준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나이팅게일은 눈에 띄지 않게 몰래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 주변에 “나는 위대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라고 이야기했다. 나이팅게일은 모든 간호사의 모범이 됐지만 그저 항상 주님의 도구였을 뿐이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있다. 국적,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의 생명은 모두 소중한 것이기에 나이팅게일과 같은 소명의식을 가진 의료인들이 더욱 필요하다.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요한의 형이다. 즉흥적이고 열정적인 성격 탓에 예수님께 꾸지람(?)도 들어 ‘천둥의 아들’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야고보는 스페인과 수의사, 의사, 목수의 수호성인이다. 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명이인이라 교회에서는 그를 ‘대(大)야고보’라고 부른다. 그는 동생 요한과 함께 아버지를 도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어부로 일하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21-22 참조)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의 최측근으로 스승의 말씀을 충직하게 따랐던 제자였다. 야고보는 사마리아와 유다 지역에서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파하였고 이베리아반도까지도 다녀갔다는 교회전승이 전해진다. 그런 이유인지 모르지만 9세기경 야고보의 유해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장되어 모셔졌고, 당시 알폰소 국왕은 그 묘지 위에 150년에 걸쳐 웅대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건축하였다. 스페인과 유럽의 신심이 약화되던 시기에 젊은이들이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순례하는 피정 프로그램이 오늘날의 꾸르실료 신심운동을 탄생시켰다. 현재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까지의 순례길은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순례지다. 지금도 대성당 안에 그의 유골함이 전시되어 있다. 순례 끝에 충실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야고보 사도를 만나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2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간음하다 붙잡혀 죽게 된 여성

구약시대에 여성은 남자의 재산목록 중 하나로 매매가 가능한 존재였다. 그래서 여성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격리되었고 철저히 아버지나 남편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최근에도 이슬람 지역에서 여성이 몹쓸 짓을 당하고 집에 오면 가족 중 오빠나 사촌들에게 피해를 당한 여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명예살인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가장(家長)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딸이나 아내, 친척 여성을 살해하는 범죄로 매년 5000여 명이 명예살인으로 목숨을 잃고 있고, 실제로는 그 이상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악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있었다. 결혼한 사람이 자신의 아내나 남편이 아닌 자와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은 십계명의 제6계명에서 금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간음의 심각성을 알리며 간음을 우상 숭배 죄의 표상으로 보았다. 구약시대 여성들은 사회뿐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도 불리했다. 엄격한 토라, 율법, 랍비 문헌에서 여성의 참석을 금지하는 성전 의식을 실행했다. 이스라엘의 연중행사인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에도 여성들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여성들은 율법을 배울 수 없었고 율법 교사가 될 수도 없었다. 여자의 손에 토라가 들어가느니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시대였다. 이스라엘 여성의 위치가 노예와 법률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단 두 가지였다. 혼인 지참금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고, 남편과 이혼·사별할 때 여성에게 지급될 액수가 담긴 혼인 증서를 가지고 있었다.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공적인 삶은 철저히 남자들에게만 허용됐다. 집안에서도 딸들은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 했지만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는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던 시대가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여성도 한 인격체로 받아들이셨다. 어느 날 갈 길 바쁜 예수님의 일행을 막아섰다. 일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한 여인을 질질 끌고 왔던 것이다. 그 여자는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고 몸에 피가 흐르고 옷도 찢어져 있었다. 여자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선생님, 이 여자는 간음하다 현장범으로 붙잡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죽여야 하는데 선생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사실 당시에 간음은 돌로 공개처형을 하는 중죄였다. 교활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수작이었다. 예수님이 그녀를 용서하라면 율법을 거스리는 것이고 율법대로 돌로 죽이라고 한다면 평소 가르침에 위배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모든 이들은 예수님을 주목했다. 예수님은 적막을 깨고 별안간 입을 여셨다. “여러분 중에서 여태까지 죄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저 여자를 돌로 쳐죽이시오.” 나이가 많은 사람들부터 하나둘씩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예수님 앞에는 여자만이 남게 되었다. 예수님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이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젠 다시 죄짓지 않도록 하여라.”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한가운데 더불어 하나 되는(묵시 5,1-6ㄱ)

요한묵시록 5장의 주된 질문은 이러하다.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묵시 5,2) 어린양의 등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하늘과 땅 위, 땅 아래 모든 곳을 살펴봐도 오직 어린양만이 봉인을 펼 수 있다고 서술한다. 요한묵시록 5장의 서술은 어린양에게 집중된다. 요한은 어린양을 찾을 때까지 울었다.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울음’은 어린양에 대한 집중도를 더욱 부각시킨다. 천상의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향한 시선이 어린양을 향해 변화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구약의 하느님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어좌에 앉으신 분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가 어린양에게 전해진 건, 요한묵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느님 섭리의 연장이고 완성이라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루마리는 안과 밖으로 쓰여 있는 글묶음이다. 전통적으로 안의 것을 신약성경으로, 밖의 것을 구약성경으로 이해하곤 했다. 이미 알려진 구약의 내용을 신약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 주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라틴 교부들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설명하는 유명한 문구와 일맥상통하는 해석이다. “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신약은 구약 안에 숨겨져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밝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해석은 요한묵시록 5장의 서사 흐름과 얼마간 상이한 점이 있다. 어린양에게 주어진 두루마리는 ‘읽히기 위한 글묶음’이 아니다. 진즉에 주어진 질문은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는 이’를 찾는 것이었다. 어린양은 물론이고 요한묵시록은 두루마리 안과 밖의 내용에 대해선 침묵한다. 두루마리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열리는 것의 상징이다. 그리고 열기 위해 등장하는 어린양이 누구인지에 대한 읽기가 우선이어야 한다. 어린양은 사자와 연동되어 서술된다. 전통적으로 메시아와 그 집안을 가리켰던 힘센 사자가 요한의 눈에는 어린양으로 나타난다. 사자와 어린양은 힘의 구도 속에 공존할 수 없는 두 동물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구약의 전통과 신약의 새로운 해석이 서로 부딪히나 그럼에도 만나고 있음을 감지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 인간의 새로운 해석과 상상 안에 다양한 상징과 은유로 서술되고 전파된다. 미국의 성경학자 웨인 A. 믹스(Wayne A. Meeks)는 한 세미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은유의 상징으로 소개했다. 그 자리에서 다른 성경학자는 은유라는 표현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비판의 요지는 “십자가는 문자적 사실”이라는 것. 사도 바오로에 의해 십자가가 소개되고 서술되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사실적 요소를 바탕으로 적혀졌다는 이른바 역사비평적 견해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 비판에 웨인 믹스는 이렇게 답했다. “십자가가 은유가 아니라면 그저 나무 두 토막을 겹쳐놓은 것 뿐”이라고. 개인적으로 웨인 믹스의 견해는 요한묵시록을 읽는 데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수많은 시간들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새로운 은유와 상징으로 신앙인들 안에 소개되고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의 글과 표현에 얽매여, 그 글과 표현을 ‘사실’이라고 우겨대는 완고함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하느님을 인간의 한계지워진 인식과 사유 안에 가두어 버리는 교만일 뿐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하느님은 또 어떤 식으로, 어떤 상징으로 해석될 것인지, 그리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좀 더 가까이, 그들의 폐부 깊숙이 닿아 있는 하느님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 교회는 고민해야 한다. 사자를 어린양으로 새롭게 소개하는 요한묵시록의 해석을 좀 더 세심히 살펴보자. 어린양은 홀로 자랑스런 사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어린양의 공간적 형식을 가리키는 ‘한가운데’(ἐν μέσῳ)라는 말마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 성경 번역은 어린양의 공간을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로 해석하지만, ‘사이’가 아니라, ‘한가운데’이다. 어린양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어좌에 앉으신 분과 지상의 하느님 백성인 스물네 원로, 어디든 계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현존을 가리키는 네 생물과 ‘하나의 공간’ 안에 함께한다. 그러니까 어린양은 특정 공간이나 지위를 바탕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어린양은 시공간의 배타적 인물이 아니라 모든 시공간을 아우르는 친교의 장으로서 현존하시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 저런 분이시다 고백하는 건 쉬운 일이나 이런 분도, 저런 분도 되신다는 사실을 겪는 건 때론 고통스럽다. ‘내가’ 찾아 나서는 메시아가 뚜렷할수록, ‘우리의’ 메시아는 흐릿해질 수 있다. 예수님은 특정 개인의 구세주가 아니라 선인이나 악인이나, 죄인이나 의인이나, 아픈 이나 성한 이나 모두에게 구세주라는 사실은 때론 따뜻한 이야기이나 때론 불편하여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나와 불편한 이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사랑으로 다가오신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 하는 신앙의 당위이지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거북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린양을 살펴본다는 것은 긴 호흡과 용기를 필요로하는 일인지 모른다.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오늘의 예수님은 또 어떻게, 어떤 이들을 향해 당신의 보편적 사랑을 전개하고 펼쳐나가실지 질문해 본다. 민감하여 함부로 이야기하기 힘든 정치, 경제, 사회의 이슈들로 우리나라가 오늘처럼 두 쪽으로 완전히 갈라진 험악한 순간에도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실지 고민해 본다. 뜻이 안 맞는다며 내뱉는 단절과 배타의 언어에 우리는 참담했고, 그로써 우리는 조금씩 안정과 평화를 이 나라 이 땅에 만들어갈 것이다. 어린양은 늘 우리 ‘한가운데’ 저 혼자 돋보이지 않고 더불어 하나 되는 데 당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실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9면

[말씀묵상]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예수님 수난기에 등장하는 제각각 다른 모습의 사람들 중 나는 누구 모습인지 묵상하며 의미있는 성주간 보내야 각자의 머리에 재를 얹으며 시작한 사순 시기가 마무리되어 가는 오늘, 성주간의 첫째 날에 우리는 성지(聖枝)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합니다. 또한 ‘주님의 수난기’를 들으며 성금요일에 이루어질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묵상하며 준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최후 만찬 때에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를 두고 말다툼을 벌이고, 잠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 채 예수님 홀로 수난의 길을 걷게 한 ‘제자들’과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도 갈 수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고 외쳤지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한 ‘베드로’를 떠올리게 됩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성전 경비대장들’, 제자의 칼에 잘린 오른쪽 귀를 치유 받은 ‘대사제의 종’,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추궁하는 ‘대사제의 하녀’도 떠오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 급급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최고 의회 의원들’과 예루살렘 입성 때 환호했던 사실을 잊어 버리고 바라빠를 풀어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루카 23,21)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백성들’을 바라봅니다. 또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들려오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외면하고, 군중의 폭동과 지위 상실에 대한 위협에 굴복하여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리고 바라빠를 풀어 주는 ‘빌라도’와 예수님을 하나의 조롱거리 장난감 정도로만 여기는 ‘헤로데’를 봅니다. 예수님을 대신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해골 언덕으로 오르는 키레네 사람 ‘시몬’과 십자가의 길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을 만납니다. 그저 죽음의 시간만을 기다리다가 이유도 모른 채 석방된 ‘바라빠’,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 그리고 자신이나 구원해 보라며 빈정거리고 조롱한 ‘지도자들과 군사들’도 만납니다. 당신은 메시아시니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수 한 사람’과 예수님은 무죄임을 고백하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실 때 기억해 주십사고 청하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다른 죄수 한 사람’의 모습도 봅니다. 예수님께서 의로운 분이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아보는 ‘백인대장’, 멀찍이 서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모심을 지켜보고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는 ‘갈릴래아에서부터 함께 온 여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무덤에 모시는 아리마태아 출신 최고 의회 의원 ‘요셉’의 믿음을 봅니다. 이 모든 사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의 길에 자리한 이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각자 저울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과 새 계약의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시며 기억하고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22,17-20 참조) 서로 섬기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루카 22,26-40 참조)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십니다.(루카 23,34 참조) 회개하는 이들에게 낙원을 약속하십니다.(루카 23,43 참조) 오후 세 시에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이 가르치고 보여주신 그 한없는 사랑을 이제 스스로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완성하고 계십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6-9 참조)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바칠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마음을 새기려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나는 누구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지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길에서 자신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이제 한 주간 앞으로 다가온 부활을 준비하며,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 주간을 좀 더 의미 있게 가꾸어야겠습니다. 영원한 삶을 믿고 희망하는 부활 대축일에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필리 2,11)이시라고 기쁘게 고백합시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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