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참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선한 의지’의 중요성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세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을 인간의 ‘참행복’(至福)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구체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에 도달하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를 통해서 참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까?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 전체에서 이 질문을 방대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가능한 한 철저하게 이에 대해 단계적으로 다루어보겠다. 우리는 앞선 글(제5회)에서 성 토마스가 반사적인 행동들을 포함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이성적인 자유를 지닌 인간으로부터 생겨나는 행위, 즉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했음(I-II,1,1)을 살펴보았다. 토마스는 행복의 다양한 후보에 대한 고찰이 끝나자마자, 이 인간적 행위를 각자가 지닌 지성을 통해 “목적을 인식하면서 전개되는 의지적 행위”(I-II,6,1)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완전한 목적을 인식하고 또 그 목적을 향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의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윤리 규칙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의지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무려 15문제(I-II,qq.6-21)에 걸쳐 의지의 대상, 원인, 움직이는 방식 등을 토대로 ‘의지적 행위’에 대해서 상세히 다룬다. 지성적 욕구인 ‘의지’의 선함은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 성 토마스는 독특하게 ‘의지’를 욕구(appetitus)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욕구’란 자신과 유사한 것 또는 자신에게 편리한 것으로 기울어지는 경향(傾向)을 뜻한다. 짐승들은 감각적 본성에 따라 오직 물질적이고 개별적인 선을 향한 ‘감각적 욕구’만을 지닌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감각을 넘어서는 인식 능력인 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성적 욕구’도 지니며 토마스는 이를 ‘의지’(voluntas)라고 부른다.(I,80,2) 이 의지는 단순히 개별적 선들만이 아니라, ‘보편적 선’(또는 적어도 ‘선처럼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I-II,2,8) 이러한 표현은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외부적인 대상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의지가 종속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의지 자체가 발동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저지당할 수 없고, 원하자마자 즉시 실행된다. 물론 의지가 명령한 외부적인 행동들은 여러 요건에 따라서 저지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I-II,6,4) 토마스는 한편으로 의지를 강조하지만, 윤리적 고려에서 행위의 결과들을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행위자가 악한 결과들에 대해 책임이 있기 위해서는 그가 자기 행위의 악한 결과들을 미리 내다보고 의도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지에게 돈을 주었는데, 그 거지가 나중에 그 돈을 비윤리적으로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기부행위는 윤리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살인 청부업자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원수를 죽이도록 교사했다면, 그의 행위는 분명히 비윤리적이다. 앞의 예처럼 자기 탓 없이 무지(ignorantia)에서 행하는 행동은 의지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토마스는 ‘의지’ 개념이 너무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우려해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가 이성을 이용해서 구체적인 수단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에 ‘의도’(intentio, 지향)라는 별도의 명칭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서 봉사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같이, 비록 선한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다른 목적에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베푸는 행위는 결코 선한 행위일 수 없다. 이와 같이 토마스에 따르면, 윤리적 행위의 일차적인 조건으로는 우선, 주관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선한 의도’(intentio bona)를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인간이 지닌 ‘선한 의도’는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아직 충분조건은 아니다. 의지와 지성의 긴밀한 상관관계 그렇다면 의도가 선하다는 판정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선을 그 대상으로 삼을 때 선한 것이며, 의지가 작용하는 상황이란 선악의 판정에서 부차적이다.(I-II,19,1&2) 그런데 의지의 선성은 지성에 종속되어 있다. 지성이야말로 의지가 자신의 선택 능력을 실행해야 할 대상을 의지에게 제안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올바르다고 판정한 대상을 의지가 따르지 않는 경우에 이는 질서를 벗어난 것으로 악한 행위가 된다.(I-II,19,3) 반대로, 최고로 자유로우며 인간의 모든 능력에 대한 최고 통치권을 갖는 한에서, 의지는 “지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절대적으로 말해, 우위는 지성에 속한다고(I,82,3) 주장했기 때문에, 종종 ‘주지주의자’로 분류됐다. 그렇다고 토마스가 의지를 무시하고 지성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의지는 인간을 지성이 관련된 관조의 영역을 넘어서 인도하며 그를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한다. 의지는 욕구하는 대상, 즉 목적을 향해 인간을 밀어붙이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욕구하는 인간은 목적에 이를 때까지 이 목적을 향한 역동적인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의지는 또한 인간을 최종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I,82,1) 따라서 인간적 행위는 그것이 인간의 참행복을 보장하는 최종 목적에 얼마나 상응해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 이렇게 의지의 선성이나 올바름(rectitudo)은 근원적 규범인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의지는 세상에 있는 개별적인 선들보다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보편적인 선’을 원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 의지가 최종 목적인 지복 직관 또는 신적 의지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인간의 자유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의지의 고유한 특성은 자기 행위들의 주인이라는 데 있다. 즉, 의지는 자유롭다. 의지의 어떠한 행위도 필연에 의해 부과되지 않는다.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비록 이러저러한 결정된 대상이 아니라 행복을 자연적으로 욕구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해도, 선택될 수 있는 모든 대상 앞에서 자유롭다.(I,82,2) 그렇다면 최종 목적으로서의 하느님을 원해야 하는 의지와 필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들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다음 회에서 좀더 자세히 알아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하느님에 대한 직관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행복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세상에 있는 창조된 선 안에서는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양한 이유를 들어 밝혔다. 이어 그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우주의 근거이며 스스로 최고의 무한한 선인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I-II,4,4) 그리스도교 전통은 인간의 지극(至極)한 행복(幸福)이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直觀)하는 데 있다는 의미에서 이를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이라고 불러왔다.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 개념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토마스는 「신학대전」에서 세 문제(I-II,qq.3-5)에 걸쳐 이 개념을 상세히 설명한다. 자연적 인식과 사랑에 의해서 지복직관이라는 궁극적인 선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적인 피조물뿐이다. 따라서 지복직관이야말로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기도 하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도 모르고 남이 타니까 덩달아 자기도 타고 가는 사람과 같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최종적인 진리, 즉 제1원인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토마스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인간이 지상에서의 여행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의 본질을 직관하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I-II,3,8)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이 세상에서의 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학이었다면, 토마스는 내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비되는 토마스의 지성 강조 우리는 이러한 토마스의 결론을 보면서, ‘하느님을 소유할 때에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를 통해 자연사물을 향유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을 향유하느냐 하는 태도에 따라 행복이 결정된다.(「신국론」 8,8) 두 성인의 가르침에 차이가 있다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토마스는 그 지성적인 인식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더 나아가 인간의 참행복은 실천적 지성의 작용보다는 사변적 지성의 작용, 하느님에 대한 관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많은 일에 사로잡히는 실천적 삶보다는 진리를 관상하는 삶이 더 행복하다.(I-II,3,2,ad4) 이러한 관상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인간적 행위이며, 이는 다른 것들보다 그 자체로 갈망되기 때문이다.(I-II, q.3, a.5) 그런데 토마스에 따르면, 현세에서는 신앙이 있든 없든 완전한 행복이 없다. 인간 인식이 육체적 역량에 본질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세의 조건 아래에서는 신적 본질 직관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I,12,11) 토마스는 이를 올빼미나 박쥐가 너무도 밝은 태양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 것에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현세의 인간도 본성만으로는 진리의 근본인 신적 본질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이 끝난 뒤에야 우리 자신의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지복직관이 지닌 중요한 특성들 어렸을 때부터 교리를 통해서 내세에 얻게 될 ‘지복직관’이란 개념을 배운 신자들에게도 이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멀게만 느껴진다. 도대체 지복직관은 어떤 구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토마스에 따르면, 참행복이란 완전한 상태이므로 그 상태에서 모든 행위와 욕구는 정지되며 획득한 선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천상에서의 참된 행복은 결코 상실되지 않아야 한다. 지복직관에 도달하게 되면 의지는 적절한 질서를 가지게 됨으로써 어떠한 잘못도 불가능하게 된다. 외부적 요인도 지복직관을 위협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악을 배제하는 셈이고, 따라서 그것을 상실할 두려움까지도 사라지게 된다.(I-II,5,4)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으므로, 지복직관에 이르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은총과 도움이 필요하다.(I-II,5,6,ad1) 인간의 자연적 본성만으로도 불완전한 행복을 가질 수 있지만,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는 데는 하느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지복직관’이라는 진정한 행복은 인간의 성취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약속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세상의 선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하느님은 홀로 인간의 의지와 지성이 지복직관에 이를 수 있게 할 수 있지만, 각 개인의 선행과 공로를 통해서 이를 추구하기를 원하신다.(I-II,5,7) 현세의 삶에서 하느님을 사랑했던 의지는 궁극적 단계에서의 ‘즐거움’으로 보상받게 된다.(I-II,4,1,ad1)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얻게 되는 지복직관이라는 참행복은 “덕스러운 행위들에 대한 포상”(I-II,5,7)인 셈이다. 비록 불완전한 행복을 주는 ‘세상의 선’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서도 우리는 가장 좋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우리가 이제까지 고찰해 온 외적인 선(재물, 명예, 권력 등)이나 육체와 영혼의 선들이라도 이를 올바로 추구한다면, 내세에서의 완전한 “행복으로 향하는 원동력”(I-II,5,8,ad3)이자 이를 누리기 위한 준비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지닌 자연적 역량과 도달해야 하는 진정한 행복 사이의 차이는 ‘공로’(meritum)의 성격을 가지는 행위들을 통해서 극복되어야 한다. 현세에서 ‘나그네’(viator)로서 살아가는 인간이 걷는 여정은 끝없는 방황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그를 위해 마련하신 초자연적인 목적인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지복직관’이 인간의 최종 목적이라고 해도, 짐승들이 자연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인간도 이를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복직관이란 목적지를 향해 끝까지 여행할지, 또는 도중에 있는 역에서 머물러 이를 포기할지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지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논의들을 통해 진정한 행복에 다가가는 방법들에 대해서 본격적인 성찰을 시작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진정한 행복은 ‘영혼의 선’ 안에서 발견될까?

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행복에 대한 전통적인 후보들에 대해 하나씩 검토해 왔다. 토마스가 받아들이는 인간의 세 가지 선에 대한 구분, 즉 외부적인 선, 육체와 관련된 선, 영혼의 선에 비추어보았을 때, 진정한 행복은 재물 등의 외적인 선이나 건강 등의 육체의 선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있다. 영혼의 선, 달리 말하면 인간성 자체의 완성이야말로 인간의 최종 목적이자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널리 알려진 ‘건강한 육체에 깃드는 건강한 정신’(mens sana in corpore sano)이라는 라틴어 속담도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은 건강한 정신이라는 영혼의 선에 있음을 보여 준다. 현대 사회의 욕구 이론을 대표하는 매슬로(A. Maslow)도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소속 욕구’, ‘존중 욕구’를 넘어서는 ‘자아 실현 욕구’를 강조한 바 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이 영혼의 선에 있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전통적인 철학자는, 바로 토마스가 행복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신의 멘토로 삼아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 한계와 극복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종 행복을 찾기 위해 ‘좋은’ 또는 ‘잘’(eu)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들을 분석한다. 우리는 수행해야 할 기능을 제대로 지닌 대상에 대해서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거나, 혹은 해야 할 행위를 ‘잘’하는 사람에 대해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판단의 기준은 바로 그 평가 대상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됐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특정 분야에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좋은’ 인간이 되게 해 주는 기능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전체로서의 인간이 갖는 기능을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기능, 즉 이성과 사유에서 찾는다. 좋은 의사가 환자를 잘 치료해 주는 사람이듯이, 훌륭한 인간도 인간의 고유한 이성적 역량을 충만하게 실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자로 대표되는 지혜로운 사람이야말로, 신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며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다. 인간이 수행해야 할 기능이 잘 이루어지는 것에서 행복이 온다는 주장을 듣게 되면, 현대 사회에서 난무하는 자기계발서들의 저자나 독자는 환호성을 지를지도 모른다. 자기계발서는 대부분 개인의 노력과 태도 등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고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많은 자기 계발서는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가짐만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식의 비현실적 약속을 남발한다. 실제로는 불평등과 차별 등 사회 구조의 문제 때문에 삶을 바꿀 수 없는 경우에도, 모든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는 비판도 등장한다. 이러한 성과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자기 영혼을 다른 방식으로 돌보려는 시도도 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 가고 있다. 종종 매스컴에서도 소개된 ‘멍 때리기 대회’나 템플스테이 등과 연계된 ‘명상에 대한 열풍’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런 시도는 외적인 선, 육체의 선만을 추구하는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바람직한 운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찾을 능력을 과연 인간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은 검토가 필요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질문에 대한 답에서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를 뒤따라가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최종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이 삶에서 가능한 관조(contemplatio)에 있을 수 없다. 철학적 사변은 모든 인간 인식 밑에 깔려 있는 조건, 곧 감각들의 영역에 묶여 있는 채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한다.(I,83,‘머리말’) 인간의 지성은 궁극적 원인을 본래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I-II,3,6) 더 나아가 토마스에게 ‘자기실현’은 결코 인간의 최종 목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잠재력과 개방성 덕분에 인간 영혼은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실현되고 완성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현세의 행복은 불완전한 행복일 뿐 그렇지만 토마스는 ‘영혼의 선’이 진정한 행복과 관련이 있음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개념이 매우 모호한 개념임을 지적하면서, 최종 목적으로서 ‘욕구되어야 하는 대상’과 ‘그 대상 자체를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작용’의 측면을 구별한다. 그 안에 인간의 최종 행복이 있는 대상은 영혼 자체도 아니고 영혼의 어떤 한 능력도 아니라 영혼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의 획득이나 사용에 관해 말한다면, 이는 ‘영혼의 선’과 직접 관련된다.(I-II,2,8) 최종 행복에 대한 강력한 후보들에 대한 검토를 마치면서 토마스는 창조된 세계의 그 어떤 것도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참된 행복은 잃어버릴 수 없어야 하고 확실하게 지속되어야 하는데, 이 삶에서는 어떤 것도 확실하게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매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 행복을 방해하는 질병이나 불행에 맞닥뜨릴 수 있으며, 이 삶에서 근본적인 위협이나 도덕적인 결함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 자신의 능력을 재창출하기 위해서 무위와 휴식의 단계가 필요하며, 심지어 어떤 개인이 이룩한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다시 파괴되어 버린다.(ScG III,48) 따라서 토마스는 현세에서의 행복을 ‘불완전한 행복’이라고 규정한다. 철학적 명상, 영혼의 선한 활동을 통해 일시적 만족을 얻을 수는 있지만, 창조되지 않은 신적 진리와의 완전한 합일 없이는 이런 만족은 지속될 수 없다. 선을, 창조된 선과 창조되지 않은 선으로 이등분한 것은 이제까지의 행복에 대한 논의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 토마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제시했던 현세의 이성적 삶은 불완전한 행복일 뿐, “욕구를 전적으로 쉬게 해야 하는 완전한 선”인 최종 행복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발견된다.”(I-II,3,3) 그렇다면 오직 “인간의 행복은 본질적으로 최종 목적인 창조되지 않은 선, 즉 하느님에게서만 발견된다”는 주장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며, 우리는 언제 어떻게 여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다음 회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1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육체적 선(善)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재물, 명예, 권력을 모두 가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건강을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신체의 건강보다 나은 재산은 없다’(집회 30,16)고 말한다. 또한 동양에서는 ‘5복’ 안에 건강과 치아가 모두 들어있을 정도이다. 더욱이 현대의 젊은이들은 ‘프로필 사진 촬영, 식스팩 만들기’ 등 남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자신의 ‘건강한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지대하다. 아직 젊은이들은 건강 자체의 중요함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매우 절실한 생존의 문제가 된다. 성경의 대표적 의인 욥도 재산과 자식을 모두 잃었을 때보다 온 몸에 ‘고약한 부스럼’이 덮쳤을 때 더 큰 고통을 겪은 것으로 묘사된다.(욥 2,1-10 참조) 그렇다면 건강이나 쾌락과 같은 육체적 선이야말로 최종 목적으로서의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닐까? 육체의 선을 넘어서는 인간의 최종 목적 성 토마스에 따르면, 행복에 있어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을 능가해야 한다.(I-II,2,5) 그러나 육체의 선만이 행복의 유일한 기준이라면, 많은 동물이 인간보다 우월하다. 인간은 결코 사자의 용맹함이나 코끼리의 힘, 치타의 빠름을 능가할 수 없다. 영광스러운 ‘올림픽 금메달’조차 나약한 인간들끼리 경쟁해서 얻은 성과일 뿐이다. 더 나아가 육체적인 선에만 인간의 행복이 있을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보다 높은 목적을 향해 살아가며 인간 자체가 최고선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이 생명 유지, 즉 인간 육체의 보존일 수는 없다. 성 토마스가 존경하던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는 이미 “살아있는 것들은 존재하는 것들보다 좋고, 인식하는 것들은 살아있는 것들보다 좋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살아있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강보다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더 높은 목적이 있다. 더욱이 성 토마스에 따르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에게서 육체의 존재가 영혼에 의존할지라도 인간 영혼의 존재는 육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육체 자체는 영혼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평생에 걸쳐 돈을 모은 부자들조차 중병에 걸리면,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거액의 치료비를 지불한다. 여기서 재물과 같은 외적 선들은 건강과 같은 육체의 선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 자체는 ‘지나가 버리는’ 본성을 지닌다. “삶 자체는 지나가 버리고 […] 우리는 자연적으로 [생명을] 가지기를 바라고 그 안에 영원토록 머물기를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으로 치닫기 때문이다.”(I-II,5,3) 이렇게 육체적 삶의 유한성은 장수와 건강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채우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육체적 쾌락을 능가하는 완전한 쾌락에 대한 성찰 그렇지만 육체의 선에는 건강만이 아니라, 인간을 즐겁게 해 주는 ‘쾌락’이 존재한다.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최종 목적이 아닐까?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을 극대화하는 삶은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며,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인 삶이라고 말한다. 또한 쾌락을 충족한다고 하더라도 그 즐거움은 단기적이어서 궁극적이거나 자족적일 수 없다. 그러나 쾌락을 이렇게 간단히 행복의 후보에서 제외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발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쾌락주의’의 대표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이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무엇보다도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행복은 즐거움 즉 쾌락이다. 모든 동물의 행동과 삶은 이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고통을 피하는 것 혹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든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쾌락을 욕구하고 그것을 최고선으로 즐긴다. 반면에 고통은 최고의 악으로 혐오하고 이를 가능한 한 피한다.”(키케로, 「최고선악론」) 그런데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런 주장들을 통해 오해를 많이 받았다. 그가 누명을 쓰게 된 데에는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영향도 매우 컸다. 그런데 그들의 오해와 달리 그가 생각했던 진정한 쾌락이란 결코 육체적 방탕이 아니었다.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정념에 사로잡힌 극적인 흥분 상태가 아니라 지극히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상태에서 찾았다. 따라서 쾌락은 그에게 ‘영혼의 혼란으로부터의 해방’, 즉 ‘정념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정의된다. 이런 상태를 에피쿠로스는 ‘영혼의 평온’(Ataraxia)이라 불렀다. 성 토마스는 육체적 쾌락을 인간이 누리는 대표적인 즐거움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물론 그는 육체적 즐거움이야말로 인간의 의지와 이성을 삼켜버려 다른 모든 선을 경멸하게 만들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쾌락이 곧 ‘최종 목적’이 아니라 “모든 즐거움은 행복을 따라오거나 행복의 어떤 부분을 따라오는 하나의 고유한 우유(偶有)”, 즉 행복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I-II,2,6) 더욱이 그는 즐거움은 선(善) 때문에 욕구될 만한 것이며, 이런 경우 선은 즐거움의 근원이며 그것에 형상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토마스는 만일에 인간이 자기에게 적합한 어떤 ‘완전한 선’을, 실제로 혹은 희망으로 혹은 적어도 기억 안에 가짐으로써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인간의 행복 자체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에 그것이 ‘불완전한 선’이라면, 그 쾌락이란 진정한 것이 아니라 행복의 한 부분만을 가진 것(分有)이나 행복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성 토마스에 따르면, 완전한 선을 따라오는 즐거움 그 자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행복의 본질이 아니고 우유로서 행복의 본질에 따라오는 어떤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토마스가 말하는 완전한 쾌락을 줄 수 있는 영혼의 선, 또는 정신적인 선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다음 회에서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명예나 영광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재물’이나 ‘부’는 주로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최종 목적이라는 행복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을 보면,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자연적 재물에 대한 유혹이 실패하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한다.(루카 4,1-13)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우리에게도 강력한 유혹의 후보들이 떠오른다. 명예나 명성 안에서 찾는 인간의 행복 고액의 연봉을 받는 직장인, 엄청난 계약금으로 스카우트된 운동선수나 연예인, 더 나아가 세계 최고의 부자들은 이에 상응하는 ‘명예’가 주어진다. 또한 우리나라에 골프붐을 불러왔던 박세리 선수가 그 성과를 기억하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박수로 환호하면서도 부러워했다. 그러한 현상은 소위 신지애, 박인비 등 ‘세리키즈’가 대거 등장하는 배경이 된다. 또한 한강 작가가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됐을 때는 작가 본인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자랑스러워했고, 외국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들을 바라보면, 그 근저에 놓인 ‘명예’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막강한 후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성 토마스는 ‘명예’야말로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 욕구할 만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명예는 각 분야의 가장 탁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며, 자기 명예가 훼손을 당할 위험에 빠지면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의 손실을 감수해서라도 이를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I-II,2,2) 그럼에도 그는 행복이 명예에 있음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명예는 명예를 받는 자 안에 있지 않고, 명예를 받는 자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 외부의 다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명예는 가장 탁월한 자들에게, 벌써 존재하고 있는 탁월성(excellentia)의 표시와 증명으로서 밖에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지, 명예 자체가 그들을 탁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명예는 행복에 따라올 수는 있지만, 행복이 명예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토마스는 명예와 비슷하지만, 직접적으로 덕행과 연관성이 없는 명성(fama)이나 영광(gloria)에는 더 낮은 가치만을 부여하고 있다. 명성은 주로 사람들의 평판에 달려 있다.(I-II,2,3) 그러나 사람들의 평판은 종종 크게 잘못될 수 있다. 사람들은 유명 가수나 배우들에게 열광했다가 그들의 실수나 잘못을 알게 되면 실망해서 그들을 과도하게 비난하곤 한다. 명성에 손상을 입은 연예인은 기존에 하던 광고 계약 등까지 해지되면 엄청난 재정적 손실도 겪는다. 이에 따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도 한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진정한 행복이 명성에 있을 수 있음을 배제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명성은 지나치게 우연적인 것이고, 둘째로 인간의 행복은 인간들의 칭송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명예훼손과 명예에 대한 집착(야욕)의 문제점 그럼에도 토마스는 명예나 명성을 영적인 선(善)으로 인정하며, 물질적 선들보다 더 소중히 다룰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명예나 명성을 보존하도록 각자가 지닌 권리를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미치게 될 피해를 고려해서 이웃의 명예나 명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명예훼손은 이웃에게서 어떤 것을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절도와 유사하지만, 현세의 사물 중에서는 가장 귀한 것 중에 하나인 명예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더욱 중한 죄다. 그러므로 중상이나 비방으로 이웃의 명예나 명성을 해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죄이다.(II-II,73,3)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무분별한 가짜 뉴스의 양산이나 ‘딥페이크’와 같은 기술을 이용한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자행되는 현대 사회에서 토마스의 경고는 더욱 시사성이 크다고 하겠다. 토마스는 명예나 명성(또는 영광)을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나 자신의 행위들에 더 강한 추진력을 갖기 위해서 추구하는 경우, 그 자체로는 완전히 합법적이라고 평가한다. “자신의 행위들로 인하여 칭송을 받음을 아는 사람은 더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간다.”(「악론」, IX,1) 더욱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의 교화를 위해서 명예나 영광을 바라는 것은 이웃을 위한 참사랑에 속한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명예를 무질서하게 욕구하는 것은 야욕(ambitio)으로 규정하고 죄가 된다고 비판한다. 이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이를 욕구하는 자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거나, 혹은 자신이 받는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배타적으로 자기 스스로 얻은 것으로만 자부하기 때문이다.(II-II,131,1) 성경 안에서도 분명한 예가 나온다. 헤로데가 티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연설하자 군중은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자,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쳐서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고 말았다.(사도 12,20-23) 토마스에 따르면, 명예나 영광을 바라는 것이 이성에 합치되는 질서를 벗어나게 되었을 때에는 많은 악을 저지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얻고자 할 때 중대한 죄를 저지르기 쉽다. <미생>과 같은 드라마에서도 나타나듯이, 많은 직장인은 무능한 상사가 자신의 노력을 가로채서 자신의 명예를 얻으려는 경우 매우 분노하기 마련이다. 과거 황우석 사태처럼 이미 자신이 이룬 성과 이상의 명성을 얻고 나서도 그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여 성과를 부풀림으로써 얻었던 명성과 부마저도 모두 잃어버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런 경우 행복하기는커녕 자신이 쌓아 놓았던 공든 탑마저 모두 무너져 더욱 큰 불행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부’도 ‘명예’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후보에서 탈락한 가운데, 떠오르는 또 하나의 강력한 후보가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나타나듯이 선거 때만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으려고 하며, 한 번 얻고 나면 이를 놓지 않기 위해 ‘계엄’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불사하는 ‘권력’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은 진정으로 행복을 가져다주게 될까? 다음 회에서 심층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행복은 재물에 있는가?

복지부가 발표한 ‘2023 자살실태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민이 10년 만에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년기는 퇴직·은퇴·실직으로 인한 부채 비율, 수입 감소와 파산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의 주된 원인으로 나타났다. 좋은 직장을 찾는 이유가 대부분 높은 수입에 있고, 이것에 실패하는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라면, ‘부’(富)나 ‘재물’(財物)이야말로 행복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800년 전에 살았던 성 토마스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토마스는 행복을 위한 가장 강력한 후보를 찾는 작업을 ‘인간의 행복(beatitudo)은 재물에 있는가’(I-II,2,1)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재물은 최종 목적인 행복에 적합한 후보인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란 교환가치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단일 뿐이고, 그 돈을 지불해서 사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상위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돈은 결코 최종 목적이 될 수 없으므로 행복이라 불릴 수 없다. 토마스는 이 질문에 더 명확하게 답변하기 위해 우선 ‘자연적 재물’과 ‘인위적 재물’을 구분한다. 전자는 자연의 결핍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음식물, 음료, 의복, 주택 등) 그렇지만 이것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즉 인간의 생명과 자연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된다. 그러므로 자연적 재물은 인간의 최종 목적일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을 위하여 사용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화폐와 같은 인위적 재물은 자연본성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지만 상품 교환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 낸 일종의 척도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다만 생활에 필요한 자연적 재물들을 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최종 목적인 행복은 재물 안에 있을 수 없다. 더욱이 자연적 재물의 경우, 배부르면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본능적으로 더 이상 욕구되지 않지만, 인위적 재물은 충분한 양을 지니고도 이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왜 그렇게 재물에 집착하는 것일까? 성 토마스에 따르면, “어리석은 무리들은 물체적 선만을 알기에 돈에 복종”하여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다. 이런 집착의 배경에는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런 생각을 “팔릴 수 없는 정신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ibid.,ad2) 우리는 이미 토마스의 인격 개념을 다루면서 타인의 인격이 지닌 존엄성이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더욱이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은 후속작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저서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전통적으로 시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역이었던 성·입학자격·환경·교육 등에까지 침투한 시장주의를 비판한다. 토마스도 명시적으로 “인간적 선에 대한 판단은 지혜로운 사람들로부터 취해져야 한다”(ibid.,ad1)고 주장한다. 따라서 거짓 수요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장에 무비판적으로 우리를 내맡길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거래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며 우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의 힘이 필요하다. 재물 소유의 정당성 인정하면서도 불의한 집착 없는 올바른 사용 강조 잉여물은 보다 가난한 사람 위한 것 재물 소유의 정당성과 부당한 집착의 구별 그렇지만 토마스는 재물의 소유를 무조건 폄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근거를 들어 사유 재산권을 정당화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각자는 모든 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사용하는 것을 얻고자 가장 열심히 노력한다. 둘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돌보도록 지정한다면 더 질서가 있게 된다. 셋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소유가 있다면 국가는 더욱 평화롭게 된다. 공동으로 소유할 때에는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다.(II-II,66,2) 토마스에 따르면, 행복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재물의 소유도 정당하다. 그러나 모든 자연적 경향들은 인간 본성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이성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 “이 기준을 벗어나는 것, 곧 정해진 한계 이상의 재물을 획득하거나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죄이다.”(II-II,118,1) 토마스는 ‘재물 소유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을 인색(avaritia)이라 부르며, 이런 죄로부터 다른 악습들이 생겨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한 탐욕과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대해 동정할 줄 모르는 ‘완고함’이 생겨난다. 여기서 인간을 끝없는 근심과 쓸데없는 걱정으로 몰아넣는 ‘불안’이 나온다. 재물을 얻기 위해 폭력과 사기, 배신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도 나타난다. 토마스는 다른 인격체들을 착취하고, 도구화하고, 상품화할 재산으로 삼는 내적 상태를 단호하게 단죄한다. 재물의 소유와 사용에 대한 구분 토마스는 이렇게 재물에 대한 불의한 집착을 방지하기 위해서 재물의 소유와 사용을 구분한다. 자연적이나 인위적 재물이 사적인 것이라 해도, 재물의 사용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각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신과 자기 가족에 필요한 재화를 자유롭게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것, 즉 잉여물은 정의에 대한 의무에 따라 보다 궁핍한 사람들이나 사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II-II,118,4,ad2) 토마스는 심지어 ‘극단적으로 필요한 경우, 궁핍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재화를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은 정당하다’고도 주장했다. 소유물에 대한 권리보다 생명을 위한 권리가 더 우세하기 때문이다.(II-II,66,7,ad2) 이 주장 안에서는 E. 프롬이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내면적 지배, 착취의 태도나 경향을 의미하는 ‘소유’와 존중, 헌신, 사랑의 태도를 가리키는 ‘존재’를 구분했던 정신과의 유사점이 발견된다. 재물을 소유하는 데 실패한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는 문화는 결코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문화가 아니다. 토마스는 최종 목적인 행복은 아니더라도 이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재물을 올바르게 소유하고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만일 재물 안에 행복이 있지 않다면, 또 다른 강력한 후보인 ‘명예, 권력, 쾌락 등’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다음 회에서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찾을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의 도움으로 어느 시대의 인류도 누리지 못한 문명의 풍요를 즐기고 있다. 이처럼 전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원하기만 하면 새롭게 발전한 ‘챗지피티’(ChatGPT) 등을 이용하여 앉은 자리에서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현대인이 어째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인들조차 과거 왕이나 제후만이 누렸을 호사를 누리면서도, 현대인이 공허감과 소외, 권태, 상실, 좌절, 절망 등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근대 이후의 기술 발전에 고무된 인간들은 인간 이성은 끊임없이 진보하며 모든 행복과 자유를 성취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감은 20세기에 들어서며 체험했던 제1·2차 세계대전과 환경오염 등의 가공할 결과를 통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러한 위기와 함께 서구를 중심으로 허무주의와 무신론적인 경향이 널리 퍼지면서 현세적인 행복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성 토마스 「신학대전」 제II부에서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 행위’ 구분 인간적 행위만이 행복 찾는 출발점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새롭게 ‘진정한 행복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잘 알려지지 못했지만, 철학과 신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행복’에 대한 매우 풍부한 성찰이 제시되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철학과 신학이 쌓아 온 행복 개념에 대한 통합적인 성찰이 발견되는 곳이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다. 이제 우리는 성 토마스가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행복에 대해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행복 발견의 출발점이 되는 ‘인간적 행위’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에서, 본격적으로 행복에 대해서 고찰하기에 앞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한다. 인간이 행하는 호흡작용, 소화작용, 수면, 무릎 반사 등등은 모두 ‘인간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적 행위’란 오직 인간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행위만을 의미한다.(I-II,1,1) 성 토마스에 따르면, 다른 피조물들은 마치 궁수의 의지에 따라 화살이 표적을 향해 쏘아지듯이 육체적 필요성이나 동물적 본능의 충동에 의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I,2,3) 그러나 인간만은 자신의 행위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목표를 향해 행위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로 정의된 인간 인격의 고유함을 더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인간]는 스스로 자기 활동들의 원리이고, 말하자면 자유 의지를 소유하고 자기 활동들을 통제한다.”(I-II, 머리말) 따라서 오직 이 ‘인간적 행위’만이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구분은 동물, 심지어 곤충에 대한 생태 연구로부터 인간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려는 다양한 연구들의 타당성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만든다. 이런 연구의 결과는 ‘동물’로서의 인간 행동을 예측하는 데는 도움이 되더라도 ‘이성적 본성’을 지닌 고유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느낄 수 있거나 지각할 수 있는 행복”만을 주제로 삼고 있는 일부 심리학적 경향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려면 필수적으로 인격이 지닌 고유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인간 추구의 최종 목적인 ‘행복’ 성 토마스는 계속해서 인간은 행위할 때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므로, 의지를 온통 채워 줄 수 있는 일생의 ‘최종 목적’이 있어야 한다(I-II,1,4)고 주장한다. 그가 자신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전거로 삼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인간적 행위가 지니고 있는 목적 지향성에 대한 탐구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하나의 행위를 설명하는 목적에 대해 다시 그 목적을 정당화하는 상위의 목표를 물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행위를 ‘좋은 학점의 취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설명했다면, 다시 ‘학점의 취득’은 ‘취직’이나 ‘돈을 버는 것’이라는 보다 상위의 목적을 가지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목표가 어떤 좋음, 곧 선(善)을 달성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성적 본성 지닌 개별 실체 최고선은 ‘행복’으로 모두 동일해도 이를 실천할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 그런데 그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무한히 간다면 우리의 욕구 자체가 공허하고 쓸데없는 것이 된다고 하면서 어디선가는 더 이상 상위의 목적을 얘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고 말한다. 가령 ‘잘 사는 삶’이나 ‘인간다운 삶’은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 되지 않으면서 필요로 하는 것이 없는, 오직 그 자체로 자족적(自足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목적을 ‘최종 목적’, 곧 ‘최고선’이라 부른다. 성 토마스는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신의 기본 틀로 사용한다. 그런데 성 토마스는 이어서 모든 인간 활동의 원천이 되는 최고의 궁극적인 선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행위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데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최종 목적을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같이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마다 ‘행복’으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가와 이를 실천할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 활동의 목적들은 인간이 행복을 찾기 위해 쏟아붓는 에너지만큼이나 여러 가지이며, 그 최종적인 최고선이 무엇인지를 찾는 가운데 인간은 많은 실수를 범한다. 그러므로 행복의 본질을 찾는 우리 성찰의 다음 단계는 인간의 욕구 내지 의지의 건전함을 결정하는 것이고, 어떤 개별적인 대상이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다음 회부터는 많은 이가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 강력한 후보들, 즉 부(재물), 명예 또는 명성, 권력, 육체의 건강, 풍부한 지식 등을 하나하나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 존엄의 근거인 ‘인격’ 개념의 확장

‘땅콩회항’ 사건, 모욕을 못 견딘 아파트 경비원의 자살 등 ‘갑의 횡포’가 연일 보도돼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이보다 더한 충격은 학부모의 갑질을 견디다 못한 한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타인의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는 최근에도 불거진 직장 내 괴롭힘과 같이 대상과 정도를 달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근대 이전에도 용납되지 않았던 일들이 민주화된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인격’ 개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보에티우스가 제시한 인격에 대한 정의 인격 개념은 근대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통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제시한 정언명령(定言命令)의 제2형식은 “너는 너의 인격에 있어서도 또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도, 인류를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사용하지,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은 돈이나 권력이 있는 이들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으며, 특별한 경우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에만 근거를 두는 칸트보다 더욱 깊이 있는 인격에 대한 성찰이 중세철학의 전통 안에서 발전됐다. ‘인격’(persona) 개념의 정의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로마 최후의 철학자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의 것이다. 보에티우스, ‘개별적 실체’ 개념 부각 개인들의 고유한 지위 인정했지만 ‘관계성’ 충분히 설명하지 못해 비판 그는 “인격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다”(Persona est rationalis naturae individua substantia)라고 정의했다. 보에티우스는 우선 보편적인 본성을 중시하던 그리스 전통에 따라 동물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이성적 본성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라는 표현처럼 개별성을 중시하는 성경의 전통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따라서 인격을 보편적인 본성과 동일시하지 않고 오히려 ‘개별적 실체’라는 개념을 부각함으로써 개인들의 고유한 지위를 인정했다. 이런 정의는 플라톤처럼 인간을 단순히 영혼과 동일시하거나 유물론자들처럼 개체들이 지닌 물질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두 극단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스콜라철학이 시작되면서 보에티우스의 인격 정의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이 정의로는 ‘관계성’이 충분히 표현되지 못하고 ‘삼위일체론’에 적용될 경우 ‘삼신론(三神論)’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점이 주요 쟁점이었다. 성 토마스가 수용해서 확장시킨 보에티우스의 정의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에티우스의 정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필요 없이 해석을 심화시킴으로써 충분히 활용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보에티우스의 정의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비판까지 종합하여 ‘이성적’, ‘본성’, ‘개별적’, ‘실체’라는 각각의 요소들이 담고 있는 뜻을 더 분명하게 드러냈고, 다양한 입장들을 서로 연결시켰다. 그가 이러한 성과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의 철학적 천재성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통찰의 효과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 토마스는 인격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성적 실체 안에 있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은 [...] 자기 행위에 대해 지배권(dominium sui actus)을 가지며, 다른 사물들과 같이 작용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작용한다.”(STh I,29,1) 그는 이 설명을 통해서 ‘이성적 본성’과 이에 따른 ‘자기의식의 중요성’, 윤리적 행위 결정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칸트를 비롯한 후대 인격 개념이 지녔던 인간 이성이 지닌 가능성을 충분히 포괄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개별적 실체’, 그 자신의 용어로는 ‘자립성’을 주목하면서 이를 인격의 ‘교환불가능성’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이 개념을 통해 인격이 지닌 유일회성과 대체불가능성을 부각시킴으로써 타인의 인격을 대상이나 수단처럼 다루려는 이들에게 큰 경종을 울렸다. 이를 넘어서 보에티우스의 정의에는 표현되지 못했던 ‘관계성’과 신과의 유비적 연결에 기반을 둔 ‘자기 초월성’에도 주목했다.(STh I-II,서문) 이러한 통찰은 현대에 각광받은 마틴 부버(「나와 너」)의 대화론적 인격 개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성 토마스는 더 나아가 인격이야말로 ‘전체 자연(본성) 중에서 가장 완전한 것’(STh I,29,3)이라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 모든 특성을 포괄하는 ‘완결된 전체’가 지닌 근본적인 ‘존엄성’을 발견한 셈이다. 성 토마스가 제시한 풍부한 인격개념의 활용가능성 물론 성 토마스의 이러한 종합이 결코 인격이 지닌 신비적인 성격을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와 현대의 많은 인격론 안에서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돼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렇게 풍부한 인격 개념은 단순히 이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국가 및 종교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의한 개인의 존엄성이 위협되는 모든 곳에서 이런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지침이 될 것이다. 성 토마스, 신학적 통찰까지 더해 인격의 정의에 대한 해석 심화하며 이성적 본성·자율성·책임성 등 강조 예를 들어 토마스의 인격개념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갑의 횡포’를 비판해 보자. 아마도 횡포를 부리는 갑들은 자신의 돈을 가지고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의 ‘인격’마저도 구매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돈을 가지고 다른 이들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 등을 구매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많은 부를 지닌 갑부도 결코 자신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타인의 인격’은 살 수 없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하게 창조된 ‘인격체’는 무엇으로도 손상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게 자신의 직위나 부를 앞세워서 인격적인 모독을 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직장 갑질 방지법’, ‘교권 보호 위원회’ 등의 변화를 통해 사회 전체가 각성하여 자신을 돕는 이들의 ‘인격’을 새롭게 발견하고 존중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2-23 제3430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영혼과 육체로 결합된 완전한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 수용 지난 회에서 살펴보았던 헬레니즘 문화로부터 유래한 이원론을 따르는 인간관은 우리의 경험과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에 여러 차례 비판의 대상이 됐다. 결국 13세기에 이르러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극복되기에 이른다. 그는 인간이 원천적으로 전적인 단일성을 지닌다는 성경의 관점을 12세기부터 새롭게 유행한 그리스 철학적 개념을 통해 정리했다. 이 작업은 성 토마스가 서방 세계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의 인간관을 계승해 변형시킴으로써 착수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개의 불완전한 실체가 결합돼 비로소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완전 실체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영혼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인간이 아니고 육체와 함께 할 때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활동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지어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을 통해 사유하고 배우며, 사물을 관찰하는 지각 행위는 영혼이나 육체의 한 측면에 제한되지 않고 육체를 통해서 영혼이, 영혼을 통해서 육체가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나름대로 고유한 도구를 가지고 자신의 창작 활동을 수행할 수 있듯이, 영혼도 각자 고유의 육체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 즉 사유 능력을 영혼과 구별했다. 바로 이 지성과 육체의 형상인 영혼의 관계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못함으로써 이후에 많은 혼란이 나타났다.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와 정신을 개방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불분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교정함으로써,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성경의 관점과 상응하는 인간관을 피력했다. 성 토마스의 통합적인 인간관 성 토마스는 “인간은 영혼만이 아니고 영혼과 육체로 결합된 어떤 것임이 명백하다.”(STh I,75,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다. 이어서 ‘영혼이 육체의 유일한 형상’(forma)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있다.(STh I,76,1&3) 여기서 인간은 두 개의 실재로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요, 영혼은 육체를 통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실체적 형상인 이성적 영혼이 있는데, 그것은 다만 이성 작용들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생명을 유지하고 감각 기능을 수행하는 원리이기도 하다.(STh I,76,4) 성 토마스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인간의 실체적 형상이 복수라고 가정하게 된다면 인간의 통일성은 훼손되고 말 것이다. 토마스에게는 영혼과 육체의 통일이란 부자연스러운 어떤 것일 수 없다. 영혼과 육체가 통일되어 있음은 영혼이 그 본성에 따라 활동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영혼은 사고력을 가지고 있으나 생득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감각 경험에 의해서 그 관념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다.(STh I,84,6) 그는 영혼이 엄격하게 육체와 연관되어 있어서, 육체 없는 영혼이란 몸에서 떨어진 손과 같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 토마스에게서 육체는 영혼과 대조적으로, 즉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지 않다. 육체는 영혼의 현세에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으로, 육체가 없다면 영혼은 도대체 존재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체는 더 이상 영혼의 감옥(플라톤)이나 영혼이 전생에 지은 죄의 결과(오리게네스)가 아니라 선의 원천이며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 정신은 육체를 통하는 과정을 거쳐서 진리를 발견하고 선을 사랑할 수 있으므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영혼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로운 것이다. 성 토마스의 통합적인 육체-영혼관은 가톨릭교회의 공적 교리로 인정받았다. 그 이후 교회는 인간을 물질적 육체와 정신적 영혼이라는 두 개의 구성 원리로 이루어진 합일체로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통합적인 인간관이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인정받았음에도 플라톤적 이원론은 서구의 문화적 유산에서 지속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인간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통합적인 육체-영혼관이 지닌 의미 일상적인 체험으로부터 우리는 육체와 영혼을 서로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정신적으로 넘어설 수 있고 육체를 마치 대상처럼 관찰할 수도 있다. 또한 인간의 육체가 병들고 노화될지라도, 그의 정신은 건강하고 젊을 수 있다. 여기서 인간 존재는 단 하나의 유일 원리로 소급시킬 수 없는 복합적 존재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두 요소를 하나로 환원하는 유물론자나 유심론자들의 일원론적 해결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을 세계와 관계하도록 해주는 육체와 그 육체의 제약성을 극복하도록 상승시켜주는 영혼은 긴밀한 상관관계 속에서 하나의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다. ‘소우주’라고도 지칭되는 인간은 모든 영역 안에서 자신을 하나요, 동일한 인간으로 체험한다. 이러한 조화롭고 통합적인 인간관은 성경의 히브리적 사고에 잘 나타났으며, 성 토마스를 통해서 이론적인 체계를 이룰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불리는 인간이 서로 분리된 육체나 영혼이 아니라 단 하나의 통합된 인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실로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바탕으로 타인이나 자연 사물을 구체적으로 접촉하고 만남으로써 자신의 인간 존재를 현실화할 수 있고,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육체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이성적 영혼에 의해 통합되는 방향으로 발전할 때, 참다운 인간 실현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성 토마스는 인간의 내적, 개인적 영역뿐만 아니라 외적, 공적, 사회적 영역도 다루었다. 이렇게 그는 근대 데카르트 이후 널리 퍼져 있는 인간에 대한 이원론이 야기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주요한 사고틀을 제공해 줬다. 더욱이 이러한 해결책은 르네상스와 근대를 넘어 서양 사상 안에서 명시화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성찰에 기초를 제공해 준 ‘인격’ 개념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다음 회에서는 ‘인격’ 개념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2-09 제3428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고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신에 대한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을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놀라운 성찰들로 가득하다.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을 제시하는 「신학대전」 제2부를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 운동이 필요하다. 성 토마스가 지닌 ‘인간관’은 현대인들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인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행복을 찾으려 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격적인 행복 논의에 앞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먼저 고찰해 봐도 좋을 듯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성적 동물’, 또는 ‘생각하는 갈대’와 같은 표현들 안에는 함축적으로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들어 있다. 바로 이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과 통일성에 대한 문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특히 이 문제는 이원적인 사고가 야기한 여러 종류의 부작용 때문에 오늘날 더욱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근대 이후 급격하게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침내 이를 창안한 인간마저도 ‘하나의 검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육체만을 분리시켜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려던 서구 의료제도는 많은 발전을 이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코로나19 사태를 비롯해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더욱이 최근에 등장한 AI를 활용한 로봇은 인간에 대한 기존 관념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비단 철학이나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과학에서도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 보는 이원론은 근대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도 강력한 영향을 끼쳐왔다. 신화 등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던 영혼과 육체의 구별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은 바로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348)이다. 그는 영혼이 사멸하는 육체에 속하지 않고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영원을 인식하는 영혼은 지상의 현실 세계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었으며,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다. 그런데 그 영혼이 지상의 육체 세계로 하강하여 “마치 감옥이나 무덤 안에처럼, 육체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은 영혼이 진리와 접촉하는 것을 방해하고 제약하는 것으로 육체를 생각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본질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결국에는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혼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며, 육체를 거스르고 통제함으로써 그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세계로 귀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플라톤적 이원론은 플로티노스에서 아우구스티노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서구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근대에 들어서며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의 철학에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에 도달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이 자아(自我)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탐구한 끝에 자아를 ‘사유하는 사물’이라고 규정했다. 그에게서 사유하지 못하고 시공간 안에 위치하고 있는 사물에 불과한 육체는 단지 기계와 마찬가지로 취급됐다. 이렇게 데카르트가 발견한 ‘순전히 의식 안에 살고 있는 자아’는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버렸다. 데카르트는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다. 후대의 사상가들도 이 질문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차라리 한쪽을 편파적으로 더욱 강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영혼과 정신의 작용만을 강조하는 유심론(唯心論)은 자칫 잘못하면 인간의 육체적인 요소를 너무나 격하시켜 육체노동의 천시, 더 나아가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 등을 유발하게 된다. 또한 유심론이 극단적인 관념론으로 발전할 경우, 인간 존재의 개별성을 가차 없이 말살하는 독일의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전체주의로 변질될 위험성도 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의 영혼과 정신작용을 모두 육체로 환원시키는 유물론(唯物論)은 인간 고유의 영적 고귀성을 해치기 쉽다. 육체만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천민자본주의의 논리와 상업주의에 편승하여, 육체와 성의 상품화 등 왜곡된 형태의 육체 중심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육체와 영혼 각각의 고귀함을 인정하며, 이들 사이의 조화를 모색할 수 있을까? 성경의 통합적 인간관 많은 신학자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놀랍게도 성경 안에 담겨있는 통합적인 인간관 안에서 찾으려 한다. 성경의 통합적인 사유 방식에서는 인간을 육체, 영혼, 정신이 함께 합쳐진 전체로서 고찰한다. 성경에는 이렇게 히브리 사상에 뿌리를 둔 통합적인 사고의 전통이 있었음에도, 그리스도교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점차 그리스적 사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이 육체를 경멸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했다. 헬레니즘 문화권에 퍼져 있던 영지주의(gnosticism)는 물질로 표현되는 육체와 세계 창조를 경시했으며, 영혼의 승천만을 강조함으로써 육체의 부활을 사실상 부정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교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았지만,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이원론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성적 영혼만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인간 영혼이 상부의 광명 세계에 속해 있었으나 자유 의지를 통한 범죄로 말미암아 추락했다고 생각했다. 또 그리스도교 최고의 스승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는 강하게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을 기능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만 파악했다. 이처럼 그의 육체-영혼관은 인간의 육체성을 경시하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서구에서 고행과 금욕의 수행을 강조하는 수도 생활이 퍼져 가면서, 육체를 경시하는 경향은 더욱 강조됐다. 육체는 저급한 것이고 인간 정신의 감옥이며, 육체의 쾌감은 천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원론적인 인간관에 의해 육체의 경시와 학대가 강화되고 있을 때, 성경에 나타나는 통합적인 인간관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학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다음 회에서는 본격적으로 성 토마스가 제시한 통합적인 인간관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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