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세례자 요한이 세례 운동을 벌이던 당시에, 요르단강에는 세례를 주던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대개는 물로 씻는 세례를 통해, 과거의 잘못을 씻도록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원할 때 필요한 만큼 반복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일종의 정결례였던 셈이지요. 하지만 요한의 세례는 달랐습니다. 요한은 ‘죄’를 씻는 것보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요구했지요. 요한은 세례를 청하는 사람에게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찾아온 사람에게 일생에 단 한 번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요구한, 새로운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요한은 군중들에게 말했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요한은 세리들에게 말했습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3,13) 요한은 군사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3,14) 오늘의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가르침은, 당시에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다 십일조나 제물을 충실히 바치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요한의 가르침은 그 시대 유다교 지도자들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지요. 그래서 어제의 사람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큰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요한의 가르침이 전통과 영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과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을 이끌던 두 기둥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자신들을 돌보아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율법과 성전의 제물봉헌은, 그런 하느님을 기억하게 하고, 그런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과 성전의 제물봉헌은 사람들을 나눔의 삶에로 이끌며,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율법과 예물봉헌을 두고 요한의 가르침을 되새깁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있다면 나누어라.’ ‘자신에게 주어진 몫보다 더 탐하지 마라.’ 요한은 모두에게 ‘새로운 삶’을 요구했습니다만, 요한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전통이 간직해온 정신을 당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각색했습니다. 역설적입니다. 가장 전통적일 때, 가장 혁신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한의 가르침에 큰 기대를 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획일적으로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모두에게 ‘새로운 삶’을 요구하되, 각자의 삶에 맞는 구체적 방식을 제시했습니다. 군중들에게는 ‘생존’과 직결되는 무엇을 두고, 적극적으로 나누라고 말합니다. 그는 옷 한 벌을 두고, 작은 빵조각을 두고 고군분투해온 사람들이, 살아남으려고 꼭 쥐고 있던 것들을 놓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보라고 시선을 돌립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만’을 요구하라 일렀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지금의 세무서 공무원같은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세금징수업자였는데요. 로마제국에게 세금징수권을 돈을 주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징세권을 얻기 위해 세금보다 많은 돈을 제국에 바쳤기 때문에, 그들은 제국이 정한 세금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갈취하곤 했습니다. 군인들에게는 ‘봉급’만으로 만족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고대의 기록(요세푸스 「유대전쟁사」)을 찾아보면, 당시의 군인들이 자주 범했던 잘못들이 언급됩니다. 도둑질, 강도질, 약탈 등, 그들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입히고 이익을 취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는 직업을 바꾸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청렴’을 요구했지요. 요한은 광야에 살면서도, 사람들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분투와, 식민지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사람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각자의 상식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짓밟고, 빼앗고, 죽이는 이야기로 가득하고, 우리 역시 그 굴레 안에 태어나 어느샌가 휩쓸려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림 시기를 지내며, 2000년 전 요한의 외침을 되새기는 이유는 거기에 있겠지요. 요한의 가르침은 가장 전통적이기 때문에 가장 혁신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삶의 자리에 어울리는 상식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제시한 새로운 삶의 이면에는, 그가 그리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도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3,17) 그의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만, 그가 그려내는 하느님은 여전히 엄한 심판자였습니다. 요한의 말과 태도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새로운 삶의 이유가 하느님의 엄한 심판이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지옥이 두려워 천국으로 도망가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움’과 ‘기다림’의 대림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워하고 또 기다리는 예수님도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엄한 심판자가 아니라 자비로운 아버지로 그려내셨습니다. 신앙은 두려움에 떨면서 지키거나 바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은 기쁘게 베풀고 나누는 삶으로 실천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살며,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아가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12-15

[말씀묵상] 대림 제2주일

어느덧 대림 시기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달력으로 보면 한 해의 끝자락이지만, 교회 전례력에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때입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계절의 흐름에서는 가장 추운 겨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전례력에서는 새로워지는 시기입니다. 겉보기에 두 흐름은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게 합니다. 대림절은 영어로 ‘Advent’, 즉 ‘오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한자로는 대림(待臨), 즉 ‘임하시는 것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다리다’라는 단어가 깊이 와닿습니다. 기다림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 복음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기다림은 참 묘한 감정입니다. 때로는 설레지만, 때로는 오지 않을까 두렵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을 동반합니다. 어릴 적에는 성탄절을 기다리며 마냥 즐겁고 설렜습니다. 성탄절의 즐거움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이 단순히 예수님의 생일 잔치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곧 구원을 기다리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경험이 쌓이고, 어려움과 세상의 암담함을 느끼면서 기다림에는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우리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을까? 예수님이 오셨는데 왜 구원은 여전히 멀게 느껴질까?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아니, 이런 세상에서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런 질문과 의문들 속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까요? 성경에는 예수님이 탄생한 뒤 성전에서 봉헌될 때, 그분을 기다리던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시메온과 한나입니다.(루카 2,25-39 참조) 이들은 누구보다도 간절히 예수님을 기다렸기에 성전에서 부모와 함께 온 아기 예수를 기쁘게 맞이합니다.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는 다 알 수 없지만 성경은 시메온에 대해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라 말하고, 한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고 묘사합니다. 이로 보아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깊이 신뢰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살아온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신뢰와 의탁의 마음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품어야 할 마음이 아닐까요? 반면, 자신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하느님 없이도 잘 산다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별로 기다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흥미롭게도, 구원의 역사에서 기다림은 늘 하느님의 몫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늘 인간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수많은 예언자를 통해 당신의 백성으로 살기를 바라셨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늘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답하는 척하면서도 실은 하느님께 가지 않고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기대를 채워줄 신을 찾을 뿐이었습니다. 오지 않는 인간을 기다리던 하느님은 기다림에 지쳐 결국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오시는 하느님을 가장 적극적으로 기다린 이는 앞서 말한 시메온도, 한나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인간을 위해 오시는 하느님을 막연히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기도하고,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주님의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요한은 사제 즈카리야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처럼 성전에서 하느님을 기다리지 않고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왜 그는 황량한 광야에서 주님을 기다렸을까요? 왜 기존의 관습과 달리 세례를 베풀며 회개를 촉구했을까요?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더 세상에 대한 절망과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과 회의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둠과 황량함으로 가득한 광야에서 세상에서 떠드는 소리가 아닌 자신의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 소리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세상에 하느님의 소리를 내라고 요한에게 말합니다. 이처럼 구원의 역사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환상보다는 짙은 어둠을 직시한 사람들에 의해 준비됩니다. 놀랍게도 요한의 외침에 많은 이가 응답했습니다. 그들도 어딘가에서 희망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향한 간절함과 기다림이 깨어났습니다. 요한은 ‘말씀’을 준비한 ‘소리’입니다. 그는 스스로가 ‘말씀’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세상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광야에서 ‘소리’가 되어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숨죽이고 있던 ‘기다림’을 깨웁니다. 요한은 우리를 광야의 소리로 살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막연히 넋 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향한 열망과 그분에 대한 기다림을 일깨우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한은 자신의 삶으로 보여줍니다. 오늘은 인권 주일이자 사회교리 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우리 모두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을 일깨우는 ‘소리’가 되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해야겠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12-08

[말씀묵상] 대림 제1주일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으로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마태 2,1 참조), 그리고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이미 베들레헴의 어느 한 작은 마구간 문 앞에 가있습니다. 대림초에 밝혀진 불빛을 보면서, 설레는 기다림 속에 “아기 예수님, 어서 오세요”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주일에 선포되는 복음 말씀에서는 우리가 기대하는 분위기와는 다른, 곧 기쁨과 설렘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그 내용이 예수님의 종말론적 담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에(루카 22,47-53 참조)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며(루카 20장 이후 참조) 예루살렘과 성전의 운명, 이 세대가 처한 위기에 대한 말씀을 전하며 세상에 닥칠 일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루카 21,5-36 참조). 오늘 복음 말씀의 초반부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오실 것이라는 예고가 중심을 이룹니다(루카 21,25-28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루카 21,25), 곧 하늘에서는 해와 달과 별의 표징들이, 그리고 바다에는 거센 파도를 일으키는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일 것인데,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징이 세상에 나타날 때,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루카 복음 21장 27절은 다니엘서 7장 13절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사람의 아들’의 등장에 대한 예고는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후반부의 주제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깨어 기도하라는 권고입니다(루카 21,34-36 참조). 이 권고로 (루카 21,5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종말론적 가르침은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언제, 어떻게 도래할지 모르는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과 걱정으로 짓눌려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루카복음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 중 하나인 ‘기도’가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론적 상황에서 처할 수 있는 긴장을 완화시켜 일상적 삶에서 마지막 날을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주님의 오심은 이미 구약성경, 특별히 예언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느님의 약속에서 예고되었습니다(「강론지침」 81항 참조).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구원 신탁 중 일부분인데, 여기에서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주신 하느님의 약속을 듣게 됩니다. 이 약속은 하느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계약(2사무 7,11-16; 23,5; 시편 89,4-5 참조)에 기초하며,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예고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르면, 다윗 왕조의 재건은 “정의의 싹”(예레 33,15)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의 싹”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임금을 상징합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나무에서 새순이 올라 자라날 것입니다. 다윗 가문에서 후손이 나와 그가 세상에 정의와 공정을 세울 것이라는 예고는 세상에 울려 퍼지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예고는 남유다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치드키야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치드키야는 “주님은 나의 정의”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을 받았지만, 자신의 이름에 맞게 세상에서 공정과 정의를 세우지 못했고 유다의 패망을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자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갔는데(2열왕 25,1-7 참조), 이후 예리코 벌판에서 붙잡히고 맙니다(예레 39,5 참조). 오늘 독서와 복음은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우리 각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주님의 오심과 심판을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강론지침」 80항 참조). 이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중) 이 신앙 고백의 내용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2독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더욱 자라고 충만하게 되길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그 사랑은 각자 사랑을 지니고 있을 때 가능하고, 하느님께서는 각자 지니고 있는 사랑을 풍요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성숙되고 풍요로워져야 하는 이유는 흠 없이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랑이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자라나고 충만하게 될 수 있도록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이때에 구체적 결심을 세워봅시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격려하였듯이 오늘 우리를 격려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1테살 4,1) 글_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12-01

[말씀묵상]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오늘은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한다는 말은 곧 우리가 그분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시민임을 뜻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오늘, 수난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하지만 이로써 우리의 왕이 수난하는 왕, 생명까지 내어주는 왕, 심지어는 죽기까지 사랑하는 왕이라는 사실을 천명합니다. 공관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다스림’의 비유가 요한복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두 번 언급되기는 하지만(3,3.5), 요한복음은 십자가라는 왕위에 오르시는 예수님을 강조하며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권을 드러내는 것에 보다 초점을 맞춥니다. 또한, 공관복음에서 강조하는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일이지만 이미 현재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그려지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시간적 표현보다는 공간적 표현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리와 사랑이 머무는 하느님의 나라는 ‘위’로, 어둠과 거짓, 미움이 지배하는 영력은 ‘아래’, 흔히 ‘이 세상’으로 표현됩니다. 이 두 세계는 공존하지만 서로 다른 가치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문장 속 ‘당신의 나라’를 ‘어디에 있는’ 장소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신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본질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여러 곳을 오가며 여러 사람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재판받으시는 장면은 의외성으로 가득합니다. 누가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재판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평온한 데 비해 재판하는 사람들이 더 당황하고 당혹스러워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재판받는 사람의 죄보다 오히려 재판하는 사람들의 악함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빌라도의 재판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재판받는 사람이 빌라도인지 아니면 예수님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재판하는 빌라도는 피고인 예수님의 죄목을 알지 못합니다. 도리어 유다인의 고발로 자신 앞에서 있는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라는 질문을 던지기까지 합니다. 그는 재판장이면서도 재판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피고가 어떤 죄목으로 고발되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신원과 그분이 하신 일에 관한 질문 두 가지를 던집니다. 먼저,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라는 질문으로 예수님의 신원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세 번이나 동일한 질문(18,33.37; 19,39)을 반복할 정도로 빌라도의 관심은 온통 그것에 몰두하여 있습니다. 이 질문으로 인해 ‘예수님의 왕권’이라는 주제가 재판 전체의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정치적 의미가 아닌 신학적 의미로 풀어내십니다. 직접적인 답변보다는 질문을 되돌려주는 방식을 택하여 빌라도가 자신이 한 말의 진실성을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18,34) 이렇듯 죄수가 재판장을 신문하는 묘한 아이러니가 질문과 뒤엉켜 인상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신원에 대한 질문에서 그분이 하신 일로 질문을 바꿉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이 질문은 독자에게 그분이 주신 생명의 가르침과 생명의 활동을 반추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처벌받아야 할 범죄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였음을 독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만듭니다. 최고 정치 권력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인 빌라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진정한 본성과 그분의 사명이 생생하게 계시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에 쓰인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 역시 그분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빌라도는 자신이 하였던 첫 번째 질문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18,37) 요한복음 저자는 이 구절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로 왕이신 예수님의 신원과 그분의 사명을 강력히 피력합니다. 그와 동시에 빌라도를 단죄하고 있습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18,37)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렇게 우아한 방법으로 권력 때문에 진리에 눈멀고 거짓에 기울었다며 빌라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는지, 그리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왕을 섬기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물으시는 것 같아 괜스레 고개가 떨구어집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성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말씀 안에 머물며 다양한 목소리로 우리를 지배하는 거짓 왕들을 몰아내고 참 왕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글_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11-24

[말씀묵상]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 신앙 언어, 유일하고도 불완전한 도구 신앙은 체험에서 출발합니다. 체험이 신앙이 되려면, 어떤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해석된 체험이 이야기(발화)되어, 신앙은 전해지고 기억이 재생산됩니다. 신앙은 체험이고, 체험의 해석이고, 여러 사람이 빚어낸 해석의 나눔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수적인 도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언어입니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체험을 포착하고, 해석하고, 발화하며, 보존합니다. 언어는 체험과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이므로, 본질이 아니라 도구(수단)입니다. 하지만 신앙행위는 언어 없이 벌어지지 않으므로 본질적 도구입니다. 게다가 언어는 다른 도구가 없는 유일한 도구이지요. 신앙에 있어 언어는 대체 불가능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도구라고 해서 완전한 도구는 아닙니다. 언어는 불완전합니다. 성서에는 첫 번째 신앙인들의 하느님 체험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읽는다고 그들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언어는 시대에 얽매여 있지요. 수천 년 전 사람들은 삶의 모습과 사고방식이 우리와는 완전히 달랐고, 언어에는 시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를 아무리 잘 번역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바로 와닿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 묵시문학, 예수님 시대 사람들의 언어 서설이 길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르 13,24-25) 이런 투의 언어를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문학은 기원전 2세기 유다인들이 만든 문서입니다. 성전(聖殿)의 파괴,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전쟁과 반란 등은 모두 유다교 묵시문학의 주제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신앙인들은 묵시문학에 아주 익숙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말할 때, 당연히 묵시문학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묵시문학의 표현들을 가져다 쓰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언어의 이면에는,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첫 번째 신앙인들의 체험도 있습니다. 기원후 66년, 유다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전쟁은 4년 뒤, 완전한 패배로 끝이 났습니다. 로마제국은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어버립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도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그리고 자신들을 박해하던 유다인들의 몰락을 보면서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던 ‘그날과 그 시간’을 떠올렸던 것이겠지요. 그렇게 그들은 물려받은 언어로 신앙을 표현했고, 자신들의 체험과 믿음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파국 이후에도 일상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이 남긴 언어를 더듬어가며 그들의 체험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두워진 해와 빛을 잃은 달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식과 월식은 지루한 일상에 소소한 재미를 주는 일이지요. 혜성의 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이 위에 말라붙은 문자가 시간과 공간을 건너 다리 놓고자 합니다만, 그 사이는 너무나도 멉니다. 어제의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외치고 있으나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시대에는 분명히 잘 작동했을 겁니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나고 지구 반대편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등불에 마음을 기대놓고 펜으로 이야기를 수놓아가는 복음사가는, 2000년 후 지구 반대편에서 이야기를 마주할 우리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의 질문을 도모하지 않았을 겁니다. ■ 일상과 성찰: 신앙언어가 담아야 하는 것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그곳에는 무화과나무가 지천으로 널려있고 어디서나 잘 자랐다고 하지요. 유다인들은 그 그늘에서 쉬고 어울리며, 그 열매로 허기를 달랬을 겁니다. 말하자면, 무화과나무는 일상 그 자체였던 셈이지요. 구약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무화과나무’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일상과 자신을 성찰하라는 말로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복음사가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복음사가는 당대를 읽고, 그런 읽기에서 나온 성찰을 언어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언어가 낡고 빛바랬을지라도, 시대를 읽고 신앙을 성찰한 그들의 노력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활동’을 본받아 우리 시대의 신앙을 찾아 나갈 수 있겠지요. 우리의 일상을 유심히 읽으며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는 이런 순간을 ‘묵시문학적’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은사 신부님이 소임하시는 성당에 가는 길에는 예배당 건물을 그대로 살린 카페가 있습니다. 지을 때는 하느님의 집이었겠으나, 팔 때는 교회건물이었을 그 카페를 보면서, 오늘의 종교현실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내일을 가늠합니다. 이웃 교구는 점점 고령화되고 소멸되어 가는 농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웃 교구의 형제들과 만나, 공동체의 상황과 고민을 나눌 때면, 그들은 이미 교회의 미래를 살고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찾은 그런 순간들이 여러분에게도 있겠지요. 많은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길어낸 깨달음을 살아있는 언어에 담아 고백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런 언어들이 쌓여 대화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런 언어로 담론을 엮어가는 곳에서, 파국 너머의 신앙이 싹틀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11-17

[말씀묵상]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입니다. 매년 지내는 평신도 주일이 동료 평신도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궁금합니다. 1980년에 세례를 받은 저는 한동안은 평신도 주일이 뭔지 모르고 그냥 지내다가 언젠가부터 ‘매년 한 번씩 본당 사목회장이 강론 시간에 본당의 현황을 나누는 시간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좀 더 알게 되고 교회 안에서 성장하면서 이날의 중요성에 비해 평신도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생겼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평신도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태도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바라보시고 과부의 헌금이 갖는 의미를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저는 율법학자의 태도와 과부의 봉헌을 통해 예수님이 말하시고자 하는 신앙인의 삶, 특히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일지 질문해 보았습니다. 복음에서 보이는 율법학자들은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단죄합니다. 또한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옳음을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자신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동일시하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인사받기 좋아하고 높은 자리, 윗자리에 앉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들이 무시하는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마저 등쳐 먹으면서도 기도는 길게 합니다. 예수님이 보기에,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이 진정 어떤 분인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이런 율법학자의 모습은 종교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옳다는 것과 자신들의 가르침을 믿고 숭배합니다. 이런 율법학자들에게 분노하신 예수님의 눈에 가난한 과부가 보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과부는 저주받은 삶을 산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남편을 여의고 도움받을 사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할 험한 일들, 다른 사람들의 멸시하는 듯한 시선이 존재하는 슬픔이 배어 있는 삶입니다.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원망이 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헌금을 합니다. 그것도 생활비 전부를 다 넣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한 이런 봉헌은 어떤 마음에서 가능한 것인가요? 과부로서의 가난한 삶이 절망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그녀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하느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깊게 믿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현실의 삶이 비참하더라도 그 너머에 희망이 있음을 보는 듯합니다. 그녀에게 세상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삶을 바라보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는 생활비 모두를 봉헌하지 않았을까요? 평신도 주일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인해 생긴 날입니다. 공의회는 교회가 세상에 대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하면서 복음을 증거 해야 하고, 그렇기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현대세계의 복음 선포의 주인공이라고 선언합니다.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정신에 맞게 살아감으로써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과 사회적 활동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장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께 삶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간혹 하느님께 삶을 봉헌하는 것을 교회 봉사만 하면서 살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거나 기도와 성사 생활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으라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삶은 평신도의 삶이 아니라 사제와 수도자로서 봉헌하는 길입니다. 평신도는 세상 속에서 부르심을 듣고 일상을 통해 삶을 봉헌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살고 있는 그 자리가 봉헌의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가 보여주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필요합니다. 삶이 녹록지 않더라도, 내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비록 실패와 좌절을 겪더라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에게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것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이야기하십니다. 이런 신앙의 여정은 혼자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 여정을 동반하는 공동체는 서로 기도해 주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 세우며 함께 성장하는 힘이 됩니다. 또다시 맞이한 평신도 주일입니다. 이날을 계기로 모든 신자가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의식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들의 삶 안에서 드러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기를 희망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평신도 주일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기쁨을 함께 나누는 축제의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삶의 터전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살아온 신자들이 1년 동안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와 애씀에 대해 나누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한편으로는 성찰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평신도들이 자신들이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선교 사명을 살아가는 교회의 전망을 활발하게 나누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그럴 때 많은 이가 평신도로 사는 삶의 의미를 배우고 우리 모두가 교회임을 공감하며 우리가 받은 사명과 새로운 전망 안에서 일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평신도 주일을 지속적으로 지내며 살아가는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진정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11-10

[말씀묵상] 연중 제31주일

오늘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과 부활에 관한 논쟁(마르 12,18-27)을 벌이신 이후에 율법학자 한 사람과 ‘첫 번째’ 계명에 관한 대화를 나누십니다. 어느 한 율법학자는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논쟁을 옆에서 듣고 있었고, 잠시 틈을 이용하여 예수님께 다가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 물음에는 토라의 요약, 곧 모든 율법 조항이 도출되는 하나의 원리를 찾고자 했던 랍비들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율법학자는 모든 계명 중에서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쉐마’(‘너희는 들어라’라는 뜻: 신명 6,4-9)를 시작하는 구절, 곧 신명기 6장 4-5절을 인용하여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30) 이 조문은 신명기에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가장 잘 요약한 구절로서 모든 율법의 근원이자 믿음의 대상인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포함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계명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고대 이스라엘의 기본 교리와 규범을 알려주면서, 하느님을 헌신적으로 전인적 차원에서 사랑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쉐마를 머리 속에 암기해야 하고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바쳐야 합니다. 집 안과 집 밖, 쉴 때나 일할 때 거듭하여 계명을 암기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쉐마를 암기하여 바침으로써 선택된 민족, 곧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거듭하여 확인합니다. 마르코 복음 12장 29-30절에 따르면, ‘하느님 사랑’이라는 요구는 ‘하느님의 유일성’이라는 신학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비교: 마태 22,37; 루카 10,27)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답변으로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이 계명은 이른바 성결 법전(레위 17-26장)에 속하는 규범으로서 한 분이신 하느님처럼 이웃, 곧 동료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을, ‘둘째’ 계명으로 이웃 사랑을 열거하고 계시지만, 이웃 사랑에 대한 언급 후에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라는 표현을 덧붙이시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을 연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 못지않게 중요한 계명이며, 이 두 계명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유학 시절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순례 여정의 후반부에 예루살렘 순례가 포함되어 있었고, 거기에서 통곡의 벽을 방문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고개를 숙이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모습은 특이한 장신구를 두르고 기도하는 남자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장신구는 ‘성구갑’이라고 부르는데, 조그만 말씀 상자와 두 개의 끈으로 구성된 기도 용품입니다. 유다인 남자들은 상자 하나를 이마에, 다른 하나를 왼팔 심장 가까운 곳에 끈으로 매달고 기도를 바칩니다. 이들은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문 중 하나인 ‘쉐마’를 종이에 적어 작은 상자에 넣은 다음 이마에 묶었고, 심장에 닿는 왼쪽 팔뚝에도 끈으로 매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신명기 6장 8절(“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의 말씀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성구갑을 넓게 만들며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걸 지적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신구는 유다인들이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신명 6,5-6)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견뎌야 했을 시련과 고통의 세월에도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던 데에는 ‘성구갑’도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유다인들의 전통은 누군가에게는 유별나고 유난스러운 행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이러한 장신구를 두르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위선자’라고 부르며 그들을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구에게는 그들의 모습이 신앙의 모범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신 신앙을 지켜낸 민족입니다. 유다인들이 강대국 사이에서 오랜 질곡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종교 혼합주의의 유혹에서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한 분이신 주님을 하느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하느님께 일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내어드리는 유다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 각자의 마음과 자세, 그리고 우리의 실천은 어떠했는지 되돌아보는 하루를 보냅시다. 한 분이신 주님께 우리 각자의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의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합시다.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사랑할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두어라.”(신명 6,4-6)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 교수)

2024-11-03

[말씀묵상] 연중 제30주일

연중 제30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바르티매오의 치유를 들려줍니다. 이는 마르코복음에 나타나는 마지막 치유 기적이자 치유된 사람의 이름을 유일하게 밝히는 기적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모든 제자들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다른 두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치유된 사람의 이름을 알려준다는 건 바르티매오의 이야기가 단순한 치유 기적이라기보다는 제자로의 부르심에 더 큰 비중을 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당신 제자로 부르실 때 사용하셨던 ‘부르다’(φωνέω·포네오)라는 동사가 이 이야기 속에 세 번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 배와 아버지, 그물을 버렸습니다. 바르티매오 또한 부르심을 듣자마자 자신의 겉옷을 버립니다. 당대의 겉옷은 단지 외투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이불’을 지칭할 때도 있었고, 입는 옷이라기보다 덮는 옷에 가까웠습니다. 때로는 신분을 드러내는 도구가, 때로는 담보 잡힐 수 있는 재산이, 또 때로는 보호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겉옷’을 던져 버리는 행위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바르티매오의 응답과 결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진행 과정의 상세한 서술에서 저자가 이야기에 공들인 흔적들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티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티매오는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력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불렀으나 바르티매오만은 그분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일컬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하느님 약속의 메시아, 구원자라는 의미로 일종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는 호칭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 그 어떤 인물도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의 고백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며 핀잔을 주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소리로 외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길’이라는 공간 역시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은 당신이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며 묻히시는 장소로 여행의 종착지임과 동시에 생의 마침표입니다. 바르티매오는 그런 예수님의 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분을 따라나섰다는 것은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분의 사명을 수용한 사람, 곧 제자가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길가에 ‘주저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따라나섰다는 것은 사실적 묘사이기도 하겠으나 그보다는 바르티매오의 삶이 변화하였음을 의미하는 표현에 가깝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이 치유 기적보다는 제자 됨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따르다’와 ‘길’은 제자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는 바로 앞서 부르심을 받았던 부자 청년(마르 10,17-22)을 소환시킵니다. 사회적으로 부유한 사람인 청년과 사회적으로 가장 가난한 사람인 바르티매오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지만 재산을 포기하지 못해 떠나갑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마르코는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부자 청년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르티매오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과도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마르 10,35-40) 둘은 직책을 요구하였던 반면 그는 오직 자비만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동일하게 던지시는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라는 질문이 야고보와 요한, 바르티매오의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이야기의 바로 앞 단락에는 열두 제자들 간의 자리다툼과 서열 싸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가 있자마자 제자들 사이에는 서열 다툼이 발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이나 당신 수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바르티매오의 행동과 완전히 대조됩니다. 마르코복음의 저자는 열두 제자가 아닌 바르티매오를 통해 삶의 본보기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떠한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 천명합니다. 바르티매오의 행동과 외침이 오래도록 잔상과 이명을 남깁니다. 눈먼 이가 오히려 제대로 보는 사람이고, 멀쩡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눈먼 이와 같은 묘한 역설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에게 있어 제자란 예수님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분의 소명을 수용한 사람이자 수난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새로운 눈 뜨임을 청해야겠습니다. 움켜쥔 채 놓지 못하고 있는 겉옷도 이제는 내려놓아야겠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10-27

[말씀묵상] 연중 제29주일·전교 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마태오복음서의 마지막 이야기를 마주하며, 이란의 한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놓습니다. “관객에게 답을 알려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상영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아스가르 파르하디,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감독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그 감독은 좋은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맺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말이 복음서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부제 시절, 서울 어귀에 있는 정교회 성당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지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길이가 같은 네 팔을 십자 모양으로 뻗고 앉아 푸른 돔을 쓰고 있었습니다. 네 복음서가 전해주는 예수님을 오롯이 담아내려는 듯, 네 기둥은 네 아치를 만들고 있었고, 성당의 천장과 벽면은 온통 이콘과 성화로 가득 차, 주님의 행적과 제자들의 이야기를 품어내고 있었지요. 그 수많은 성화와 이콘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정문 어귀의 내벽을 보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벽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주님의 양옆에는 사도들과 여러 민족들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다양한 복색을 한 여러 인종이 있고, 그들 가운데는 치마저고리를 하고 쪽진 여성도 있습니다. 성당을 떠나려던 저는 그 벽 앞에서 조용히 말씀을 읊조렸지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사람들이 그 문을 다 건너갈 때까지 기다리며, 그 광경을 눈에 담아 마음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동방 형제들의 성당, 그 한쪽 벽을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하는 이유는, 그 쓸모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나가는 길에, 정문 내벽에 눈길을 주겠지요. 오늘날 로마 교회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하시오!”(Ite missa est!) 하고 외치며 ‘파견’하듯, 동방 형제들은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이들을 벽면에 초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이콘 신학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동방 형제들은 이콘을, ‘그림의 형태로 써 내려간 말씀’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방 형제들의 그 성당은 하나의 복음서이고, 정문 내벽은 그 복음서의 마지막 장이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성당을 떠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간직했을까요. 그 부제님들은 이제 사제품을 받으셨겠지요. 그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계시며,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실까요. 저는 복음서의 마지막을 마주할 때마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의 벽면을 떠올려 왔습니다. 저는 이제야 복음서의 마지막 이야기가 다소 엉성하게 끝나는 이유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라는 선물은 신앙의 해답을 주는 책일까요. 분명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만, 그러나 이 책은 우리에게 선명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신앙은 선명한 해답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추호의 의심도 없는 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더러는 의심했다는 고백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니까요. 오히려, 복음서는 해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신앙인들에게 숙제를 주는 책입니다. 여전히 흔들리는 이들에게 사명을 주니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했던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요. 그들은 이 이야기의 끝에서 시작한 걸음을 어떻게 걸었고, 또 어떻게 멈추었을까요. 베드로는 소아시아(지금의 튀르키예)를 거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박혔습니다. 안드레아는 러시아까지 선교를 가서 X형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큰 야고보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선교하다 예루살렘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필립보는 소아시아에서 선교하다 십자가에 달려 돌에 맞아 숨집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를 선교하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졌습니다. 토마스는 인도로, 마태오는 에티오피아로 갔다가 순교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이집트에서 방망이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타대오는 페르시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시몬은 이집트를 거쳐 페르시아로 건너갔다가 톱에 잘려 순교했습니다. 요한은 순교하지 못했습니다만, 살아남은 유일한 사도로서 홀로 오랫동안 교회를 보살피며, 주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머나먼 곳으로 선교를 떠났다가 순교로 마무리되는 이 이야기들은 전승으로 전해질 뿐, 복음서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복음서는 사도들의 부끄러운 자기 고백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안, 사실은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끌어안고 나아가시는 동안,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하고 도망갔다고 고백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골라서 복음서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을 마주 뵙고도 “더러는 의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부끄러운 자기 고백을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어제를 정직하고 겸손하게 고백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복음서의 마침점 너머에서, 그들은 그런 삶을 살다가 자신의 신앙을 완성시켜 왔습니다. 복음서가 마침점을 찍어도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이어지는 일상에서 신앙의 이야기는 완성되겠지요. 신앙은 성당 안에서 시작되어, 일상에서 완성될 겁니다. 복음서를 덮으며 의심이 남아있어도 괜찮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남은 숙제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때 끝없이 함께 해주실 주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복음서의 마침점 너머에 우리의 일상도 이어질 겁니다. 우리도 열한 제자처럼 우리의 신앙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10-20

[말씀묵상] 연중 제28주일

교회에 젊은이들이 줄어들어 걱정이라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세례받고 줄곧 주일학교를 다니고, 청년부 활동을 하면서 성장하면서 인생에서 제일 친한 친구들을 사귀었고, 사춘기에 많은 고민을 그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렇기에 젊은이들이 찾지 않는 교회의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은 한 젊은이가 주인공입니다. 이 젊은이는 남달라 보입니다. 세상의 성공보다는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이 젊은이는 어릴 적부터 중요한 계명을 다 지키며 살아온 훌륭한 젊은이입니다. 저라면 이 젊은이와 함께 식사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고 쉬운 일부터 하면서 공동체를 잘 따라오게 권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요구는 너무 과격해 보입니다. 이런 젊은이에게 모든 것을 팔고 따르라니요! 너무 급격한 변화를 원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이 성경을 묵상하면서 많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젊은이는 무엇을 진심으로 원했을까?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왜 돌아갔고 무엇이 그에게 어려웠을까? 예수님이 말한 ‘가진 것을 팔고 따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부자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많은 것을 가진 부자의 삶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합니다. 넉넉함이 주는 여유와 그 여유가 가져오는 관대함,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으려고 하는 능력은 부자가 갖고 있는 ‘빛’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진 것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느끼는 우월감, 그것을 잃었을 때 받아들이기 힘든 절망, 소유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충동, 그리고 부의 힘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은 부자의 ‘어둠’입니다. 복음 속 부자 청년은 부자가 가진 ‘빛’을 보여 줍니다. 어릴 적부터 계명을 지켜온 신실함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으려는 관대함, 진리를 찾으려는 열망 등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모든 계명을 지키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부자의 ‘어둠’이 드러납니다.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을 동일시 하기에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슬픔이 크게 일어납니다. 이런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크게 놀랍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왜일까? 부자가 그렇게 잘못인가?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맞게 나를 비우고 동료들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온 길이고 우리에게 알려주신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내 삶을 전적으로 의탁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삶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내 삶을 맡기려는 절박함이 부족합니다.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통해 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가진 것들이 많기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뭔가를 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인정도 받아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을 쉽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내가 가진 것은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노력합니다. 이처럼,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어려움으로 다가오기에 우리를 난감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씀에서 실마리가 보입니다. 이 말씀은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이 말의 진의는 내가 삶의 관점을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바꿀 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것이 가능한 것이 된다는 뜻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살아온 경험을 통해서 보게 되면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많은 것을 갖고 살아도 좋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에 가장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동안 중요하게 여기면서 꼭 있어야 한다고 믿은 것이 내게 있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 뜻을 따라 사는데 도움이 되도록 일시적으로 허락된 것으로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내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기에 그것들을 팔고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그것 말고 내게 더 필요하고 좋은 것을 주실 것도 믿게 됩니다. 부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제 이야기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도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을 찾고 살고 싶었으나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인정받는 것,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성장하면서 제가 갖고자 하는 것들이 인생에서 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저는 가장 의미 있다고 믿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조금씩 더 선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슬퍼하며 돌아갔던 부자 청년도 아마 저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내게 일시적으로 허락한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찾기 위해서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함을 깨닫고 예수님께 다시 돌아왔을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더 갖고자’ 하는 삶을 떠나 ‘머리 둘 곳조차 없다’하셨던 예수님의 길을 쫓아갑니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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