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18주일

요즈음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관심을 받고, 이야기되는 것 중의 하나가 MBTI 프로그램입니다. ‘J ’유형인 저는 미리미리 계획하고, 계획한 것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을 무척이나 선호합니다. 그래서 가까운 내일 또는 다음 달의 계획뿐 아니라, 일 년 뒤, 어떤 경우에는 더 미래의 시간을 위한 계획도 미리미리 세우고 준비하는 것을 즐겨합니다. 그런데 내일, 한 달, 일 년 뒤의 경우에는 내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을까를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년 뒤, 수십 년 뒤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인생살이가 제가 계획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종종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계획으로 살아야 하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보다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어떤 부유한 사람’(루카 12,16) 역시 저와 같은 J유형의 인물은 아닐지 짐작해 봅니다. 그 부유한 사람은 나름대로 열심히 인생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인물로 보입니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둘 정도로 성실하고, 수확한 것을 보관하기 위해 새로운 더 큰 곳간들을 지으려는 계획을 세울 만큼 치밀하고, 쌓아놓은 재산으로 쉬면서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길 줄 아는 그런 역량 많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도 복음에서의 그 부유한 사람과 같은 마음과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하루하루의 삶을 위해 또 노후의 삶을 위해 어느 정도의 재산을 쌓고 준비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과 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부유한 사람이 자기만을 위하여 재물을 쌓고 준비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는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 부유한 사람의 인생 계획 안에는 하느님도, 이웃 사람들도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적합한 역량을 주셨고, 그 역량을 발휘하여 자기 생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부유한 사람이 혹시라도 곡식과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맺어 온 수많은 관계를 잊어버렸거나, 잘 맺지 못했거나, 또는 깨뜨려버렸다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볼 여유 없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앞만 보고 재물을 모아 왔다면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제일 안타까운 것은 그 부유한 사람이 당장 오늘 밤 자신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게 되는 그날이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어느 날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어느 날을 맞이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제한된 시간 속에서 삶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의 생활 안에서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저 위에 있는 것, 하늘나라의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콜로 3,1 참조) 그러기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여야 합니다.(콜로 3,5 참조)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재물을 모으는 이 세상에서의 부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루카 12,21 참조)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매일매일의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물질적 보장이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곧 물질보다도 더 소중한 무엇이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적절한 재물을 쌓고 준비하면서도, 삶을 더욱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줄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중히 가꿀 줄 아는 사람이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분노, 격분, 악의, 중상, 수치스러운 말, 거짓말은 버려야 합니다.(콜로 3,8 참조)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콜로 3,9)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7주일, 조부모와 노인의 날

“들어 주실 때까지 계속 기도하는거여”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조카인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재 기도를 합니다. 중재 기도는 일반적으로 세 번 반복하는데, 아브라함은 세 번씩 두 번 반복함으로써 더 절실하게 간청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중재는 막무가내식 떼쓰기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기에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악인을 벌하기 위해 의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인 때문에 심판을 미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시지만, 동시에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얼핏 하느님을 상대하는 아브라함의 태도가 마치 시전에서 물건값을 두고 흥정하는 사람처럼 보여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기를 먼지와 재에 비유하며 겸손하게 낮춥니다.(창세 18,27 참조) 그러니 아브라함은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기에 대등한 위치에 서 있는 사람끼리 하는 통상의 흥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대화 안에 가격을 여러 차례 제안하는 등 거래의 요소가 들어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의 값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더 낮은 가격에 구매하려고 여러 번 값을 깎지만, 하느님은 가격을 더 올리려 하거나 애초의 가격을 고수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이 거래에 응하는 후한 인심을 가진 판매자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아브라함은 최종적으로 의인 열 명과 소돔과 고모라 두 도시 전체를 거래하는 데 합의하게 됩니다. 이 사실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의인 한 명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보여줍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큰 도시에 의인 단 열 명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가 결국 멸망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느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의인 한 명이 존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려줍니다. 비록 거래는 안타깝게도 실패로 끝났지만,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려 노력한 아브라함은 중재 기도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직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 성장해야 합니다. 그가 하느님의 조건 없고 무한한 자비를 완전하게 믿었더라면, 의인 열 명이 없어도 중재 기도를 멈추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참된 기도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밤중에 친구가 집에 찾아옵니다.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한창 뜨거울 때를 피해 주로 아침 일찍 해 뜨기 전이나 저녁 서늘할 무렵에 길을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관이 없던 당시 상황에서 밤중에 친구 집을 찾는 것은 실례가 아니라 당연한 관습이었습니다. 친구는 저녁을 거른 채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집에도 먹을 것이 없자, 집주인은 밤중에 이웃집에 빵을 빌리러 갑니다. 한밤중에 빵을 빌리러 다니는 것은 유다인들이 내세우는 여섯 가지 덕목 중 첫 번째가 자녀 교육이요, 두 번째가 손님 대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요란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정이 많은 우리 선조도, 손님이 찾아왔는데 쌀이 없으면 이웃집에 쌀을 빌리러 가곤 했죠. 간 김에 달걀 몇 알과 김도 몇 장 빌리곤 했더랍니다. 그런데 당시 서민들의 집은 창도 없는 단칸방이었습니다. 온 식구가 한 방에 자고 있던 이웃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등불을 켜기도 귀찮고, 빗장을 풀고 문을 열어 집안을 소란스럽게 해 잠든 아이들을 깨우기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이 그냥 돌아가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배고픈 손님을 집에 두고 온 이웃은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절박함이 미안함보다 큽니다. 그래서 계속 ‘이보게 빵 좀 나눠주게’라고 청합니다. 이웃이 빵을 얻지 않고서는 절대로 돌아갈 것 같지 않자 결국 일어나 빵을 줍니다. 예수님은 이 빵을 빌리러 온 사람처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친구 신부에게 한 충청도 할머니가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하느님은 내 기도 참 안 들어주셔. 그래도 어쩔겨. 들어 주실 때까지 계속 기도하는거여.” 참으로 대단하고 부러운 신앙을 가진 할머니입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도 포기하지 않는 기도, 하느님의 응답이 없어도 멈추지 않는 기도, 우리의 기도는 이러해야 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예루살렘의 올리브산 동편에는 ‘베타니아’라는 마을이 자리해 있습니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자치 기구에 속하므로 높은 장벽이 세워져 예루살렘과 분리되었지만, 베타니아는 마태오복음 21장 17~19절에서 예수님이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꾸짖으신 장소로 보고됩니다. 사실 철이 아닌데 열매가 없다며 예수님이 나무를 죽게 하신 일은 수수께끼처럼 보이지만,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무화과나무에 비유하여 꾸짖고 가르침을 주시려 한 일종의 상징 행위였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주님의 백성다운 열매를 내지 못하고 들포도로 변질되었음을 질책한 이사야서 5장 2~7절, 예레미야서 2장 21절 등과 같은 맥락입니다. 특히 성전이 그러하였는데, 언뜻 그곳에서 백성이 기도도 열심히 하고 희생 제물도 바치는 등 여러 활동을 하는 듯 보이나 정작 공정과 정의는 맺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리리라고 선언하심으로써(마르 11,14 참조) 강도들의 소굴처럼 변질된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셨습니다.(마르 13,2 참조) 이런 예고를 베타니아에서 전달하신 까닭은 성전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올리브산의 뒤편 마을이 베타니아라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곧 성전 가까운 곳에서 그 파괴를 경고하신 것입니다. 분리 장벽만 없다면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버스로 3분 거리입니다. 예수님 시대 베타니아에는 라자로와 마리아, 마르타 남매가 살았습니다. 지명의 뜻은 ‘무화과의 동네’ 또는 ‘가난의 동네’로 추정됩니다. 특히 나병* 환자 시몬이 베타니아에 살았고(마르 14,3 참조) 라자로도 그곳에서 앓다가 죽었음(요한 11장 참조)을 고려하면 가난한 병자들이 많은 동네였던 듯합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바로 보이지는 않고 올리브산 뒤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을 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활동하시다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라자로 남매의 집에 자주 들러 머무신 듯합니다. 그런 다음 올리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절에서 마리아와 마르타가 자기 오빠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라 칭한 점에서도 예수님과 이들 남매의 사이가 각별하였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따르면 이때도 예수님이 베타니아를 방문하신 것 같은데,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들르셨다는 루카 복음 10장 38절의 “어떤 마을”이 베타니아로 보입니다. 사실 루카복음 10장 29절부터는 중요한 대목이 두 가지 나란히 등장합니다. 하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고, 그다음으로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런 배치는 예수님께서 으뜸 율법으로 가르치신 두 가지(루카 10,27 참조)의 본보기를 제시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제1계명인 ‘하느님 사랑’은 마리아의 행동에서 드러나고, 그다음 계명인 ‘이웃 사랑’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들이게 된 마르타는 주님을 환대하고픈 마음에 몹시 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어 불평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ㄴ)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답하시며,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손님 환대는 여러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에게 불편한 점은 없는지 살피는 일도 중요하지만, 손님 곁을 지키며 말씀을 듣는 것도 큰 환대입니다. 더구나 그 손님이 지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예수님일 경우에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마르타가 덜 중요한 일에 마음을 쓰고 있다고 에둘러 꾸짖으시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루카복음 10장 38절에 따르면, 마르타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들였”는데, 이런 환대는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루카 9,53)던 사마리아인들과 대조됩니다. 말하자면 마르타는 예수님을 섬기고 따른 경건한 부인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과 각별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타가 저마다 몫을 택하였고, 무엇을 택했든 그에 충실하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처럼 타자의 선택을 인정하고 그것을 질투하거나 빼앗으려 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성당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봉사를 하느라 하루가 바쁜 이도 있고, 날마다 묵상 기도에 긴 시간을 보내는 이도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우열을 가릴 수 없듯이, 마리아와 마르타가 택한 몫도 그러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현재는 ‘한센병’으로 부릅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하느님의 가르침, 계명, 율법은 그분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뜻에 맞을까,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까,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선물이 주어지는 순간, 역설적인 부담이 함께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구원과 생명의 책임이 우리에게로 넘어오기 때문입니다. 그 가르침대로 살고 계명을 따를 것인지, 따르지 않을 것인지가 이제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 가르침이 쉽고, 직접적이고, 오해의 여지가 없을수록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의 가르침을 주신 후에 나오는 신명기의 말씀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 또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이제 너희의 입과 마음에 쉽게, 가까이 주어졌으니, 그것을 실천할지 말지는 온전히 너희에게 달렸다”(신명 30, 14 참조)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반문입니다. “자, 여기 있다. 이제 너는 어쩔래?” 오늘 복음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이 두 부분은 공통으로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1. 숨겨진 의도를 가진 율법 교사의 질문, 2. 예수님의 응답: (비유)+반문, 3. 율법 교사의 대답, 4. 예수님의 긍정적 대답과 명령(파견). 첫 번째 질문은 정답이 나와 있는 질문입니다. 율법 교사는 답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그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반문하십니다. 그 반문에는 “너는 율법을 모르느냐? 왜 모두가 아는 것을 묻느냐?”라는 반격의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계명에 대한 율법 교사의 대답과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잘 알고 있네? 그럼 묻지 말고 그렇게 실천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답으로 반격은 완성됩니다. 깔끔한 판정승입니다. 하지만 율법 교사는 두 번째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정당함을, 첫 번째 질문이 의미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이라는 접속사는 뭔가 토를 달 때 사용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에 토를 다는 것입니다. 아직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그 가르침이 충분히 쉽거나 명확하지 못하다는 응답입니다. 사실 이것이 율법 학자들의 일이었습니다. 이에 답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은 율법을 몰랐지만 강도를 만난 이에게 가엾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이나 사회적 통념,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그저 그 마음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선한 이방인을 사제나 레위인과 비교함으로써 윤리적 딜레마나 긴장을 일으키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일임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이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이웃이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이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서 가장 기본으로 삼을 수 있는 기준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구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초에 이 사랑의 계명은 이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고, 율법 교사는 그의 답에서 자비를 베푼 이를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칭함으로써 예수님의 의도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하시는 예수님의 두 번째 파견 말씀은 첫 번째의 것보다 부드럽게 느껴지며, 마치 제자를 파견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에 부담을 갖고 결단을 주저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실 듯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예’면 ‘예’, ‘아니’면 ‘아니’라고만 해라. 그 이상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영화 <타짜>, 마태 5,37 참조) 주님 사랑의 계명은 강요가 아니라 모범으로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무감이 아니라 마음의 감동과 응답으로 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만이 가득하기를 성령께 기도합니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4주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 34,9 참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을 위하여 이런저런 것들을 소유하고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더해가면 갈수록, 자신의 공간을 채우는 수많은 것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행복, 하느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 행복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영원한 행복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파견하십니다. 곧 일흔두 명의 제자를 ‘주님의 일꾼’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견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루카 10,3)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이리 떼 가운데 놓여 있는 양들만큼이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롯이 하느님께만 의탁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고 제자들은 걱정할 필요 없이 오로지 하느님께만 시선을 두고, 하느님께만 속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한 제자들은 그저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라고 인사를 건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8)고도 말씀하십니다. 행복의 기초가 되는 평화의 인사와 음식을 서로 나누며, 한 식탁 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9)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걸어갈 이 모든 여정을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일러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스스로 걱정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사명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그간의 체험을 말씀드리며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진정 기뻐해야 할 일은 그들이 이룬 놀라운 일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때문에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0,20 참조) 이렇게 일흔두 제자는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낙인을 몸에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인생살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의 손길에 대한 체험을 예수님께 보고한 것처럼, 우리는 어떤 체험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매일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소중히 여길만한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 인생에서의 특별한 하느님 체험은 이렇습니다. 사제 수품을 준비하며 가진 30일 피정이 그 첫 번째입니다. 한 달이라는 긴 여정을, 그것도 성 이냐시오 영성에 따라 처음 걷게 되는 피정이었기에 낯설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피정을 마치며, 제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함께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자리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본당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의 사제 생활 가운데의 체험이, 체험을 더욱 키워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 또한 하느님의 체험을 더욱 깊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연수 봉사자들과 연수를 준비하면서, 연수가 진행되는 가운데 연수생들의 변화를 통해서, 그리고 연수 여정 안에서 제 안에 자리하고 있는 미성숙하고 미성장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치유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손길을 펼쳐주셨습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이제 우리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손길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8면

[말씀묵상]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 주일

오늘은 초대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두 사도는 여러 면에서 아주 다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인데, 예수께서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로 케파(바위)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마태 16,18 참조) 베드로는 아람어 케파의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촌 벳사이다(어부의 집)에서 요나의 아들(시몬 바르요나)로 태어나 어업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물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께 불림을 받습니다.(마태 4,19 참조)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그는 순수하고 솔직하기도 하지만, 수제자의 자격이 의심될 정도로 허술하기도 합니다. 바위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나약하고 겁도 많습니다. 스승은 근심과 번민에 휩싸여 계시는데 잠을 이기지 못하여 잠들어 버리기도 하고,(마태 26,40 참조)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나아가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에 빠지기도 합니다.(마태 14,30 참조) 결국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의 배반은 작지 않은 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3) 하물며 갈릴래아인 특유 억양의 사투리 때문에 예수님의 일행임이 탄로 난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부정했습니다.(마태 26,70 참조) 비록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주의 맹세까지 하면서 말입니다.(마태 26,74 참조) 그래서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를 깨달은 베드로가 대사제의 저택 밖으로 나가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8,12) 하지만 베드로는 죄에 절망하지 않고 회개했습니다. 단순한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후회는 주저앉아 뒤만 돌아보고 있는 것이고, 회개는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보다 큰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가 회개를 가능케 합니다. 한편,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였던 사울은 유다 땅 안에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17㎞나 떨어진 다마스쿠스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쫓아 서둘러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뵌 사울은 눈이 멉니다. 그런데 사울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눈이 먼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사울이 눈을 떴으나 볼 수 없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사도 9,8 참조) 이는 영적인 어둠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흘 동안 사울은 영적인 혼란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 시간 동안 사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 보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혀 기꺼이 박해자가 되기로 작정했지만, 이제는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이었던가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바오로는 더는 그분을 신성모독자로 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신성모독 죄를 지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사형 외에는 다른 형벌이 없는 그 치명적인 죄를 말입니다. 사흘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니아스로부터 성령의 안수를 받아 사울은 눈을 뜨게 됩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갔다는 표현(사도 9,18 참조)은 영적인 어둠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눈을 뜬 바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유다처럼 자신이 지은 죄에 절망하여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그 큰 죄에도 불구하고 감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거나 말입니다. 여기서 바오로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그로써 사울이 바오로로, 최악의 박해자가 최고의 선교사로 거듭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1코린 15,10)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 모두 죄를 지었지만, 절망하여 주저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 ‘담대히’(사도 4,13; 28,31 참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이 담대한, 어찌 보면 뻔뻔한 복음의 선포자가 될 수 있게 해준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렇게 두 사도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회개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누구나 회개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스라엘 빵 가게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빵을 보면, 납작하고 둥그런 것이 광야의 돌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단식하실 때 사탄이 빵으로 유혹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사람이 오래 굶고 나면 눈앞의 것이 빵인지 돌인지 헷갈릴 터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당신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군중을 먹이셨다는 빵도 이런 것일 듯합니다. 지금은 먹을거리가 많다 못해 식이 조절을 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는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와 조상들은 굶는 자식을 보며 파종할 씨앗으로 배고픔을 달랠지, 다음 농사를 기약할지 치열하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씨를 뿌린 이들이 수확하여 기뻐하는 모습이 시편 126장 5~6절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옛 이스라엘에서도 가난한 이들은 보리 빵, 부유한 이들은 밀 빵을 먹었다고 하니 ‘꽁보리밥’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열왕기 하권 7장 16절에 따르면, 구약 시대 밀 가격은 보리의 두 배였습니다. 요한 6장 9절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징을 일으키실 때 한 어린아이가 마중물처럼 내어놓은 빵도 보리 빵입니다. 요한 6장 4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표징을 일으키신 때는 파스카 즈음입니다. 곧 보리를 수확하던 때입니다. 사실 파스카 축제는 맏배의 재앙에서 백성이 구원받은 기적을 기념하지만, 농사와 관련된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집트 탈출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주님의 은혜를 피부로 느낄 수 있기에 주님의 계명도 상대적으로 쉽게 지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주님의 은혜를 머리로만 알고 체감하지는 못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탈선을 방지하려고 오경에서는 백성이 자자손손 이집트 탈출의 구원을 기억할 수 있도록 파스카를 비롯한 명절들을 주님의 현존 앞에서 지키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다만 당시는 농경 사회였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되새기는 일도 중요하지만 농사를 팽개치고 주님 현존을 찾아가기는 어렵겠지요. 이에 성경에서는 주요 명절들을 농사 절기와 맞물리게 제정하였습니다. 탈출기 23장에도 그런 명절이 무교절, 수확절, 추수절이라는 농경 용어로 등장합니다. 무교절은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축제이므로 파스카를 가리키고요, 수확절은 밀을 수확하는 주간절, 추수절은 포도와 올리브 등을 거둬들이는 초막절을 가리킵니다. 이 가운데 무교절, 곧 파스카 즈음에는 보리 수확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명절은 농사 절기와 맞물리므로 기후와도 밀접하게 관계됩니다. 마르코 복음 6장 39절도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때가 파스카 즈음임을 추측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 자리 잡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나라이므로 풀밭이 푸른 시기는 늦가을부터 늦봄까지의 우기뿐입니다. 파스카를 지내는 봄에 늦은 비(신명 11,14)가 내리고 나면 건기로 접어들며, 그때부터는 온 들판이 누렇게 뜹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이 기적은 천지가 비를 맞아 생기를 되찾은 봄에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을 기념하는 성전도 갈릴래아 바닷가에 자리했습니다. 예부터 ‘일곱 샘’이 있던 장소라 하여 그리스어로 ‘헵타페곤’인데, 지금은 발음이 와전되어 ‘타브가’라 합니다. 이곳 성전의 제대 아래 검은 돌이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감사드리신 장소라고 합니다. 제대 앞에는 비잔틴 성당의 유적인 사병이어 모자이크도 있습니다. 다만 오병이 아니라 사병인 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이 한자리를 차지하신다는 상징성을 살린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이실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 일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기적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사실 당시 예수님께 오병이어를 내어놓은 아이 말고도 군중에게는 비상식량이 조금씩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교통이 발달하지도, 식당 등의 시설이 흔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뜻 나누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내 식량을 타인에게 주었다간 언제 굶게 될지 모르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한 아이가 내어놓은 빵을 예수님께서 나누기 시작하시자 덩달아 제 것을 꺼내다 보니 모두가 먹고도 남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먹고 남은 조각만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고 하니 이는 분명 빵이 많아진 기적입니다. 말하자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기쁨도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우리 속담처럼 나눔 끝에 풍성하게 돌려받은 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위격으로 세 분이시나 본질과 실체로는 한 분이시라는, 모순처럼 보이는 존재론적 명제를 이성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신학자들과 설교가들이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했지만, 저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너무 단순한 비유들은 오히려 그냥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듯 느껴지기도 하여 이제는 그런 시도를 피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성으로 이해되고 설득되는 까닭이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알려주셨고 교회가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비롯하여 우리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가장 짧고도 명확하게 고백하는 기도인 성호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라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4~17장)에서는 ‘보호자’, ‘진리의 영’으로도 불리는 ‘성령’을 약속하시고, 성령께서 하실 일을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의 맥락 안에서 삼위일체 신앙의 바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먼저 강조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전제요 목적이며 근거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알고 믿어야 그분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요한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순종하고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는 관계이고 이를 통해 하나가 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그대로 제자들에게,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열려있는 관계입니다.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아들이 아버지와 누리는 관계에 모두 참여하게 됩니다. 그들과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 사랑하고(요한 14,21 참조), 그들이 계명에 순종하면 아버지는 그들이 청하는 것을 다 주실 것이며(요한 16,23 참조), 그들은 아들을 증언할 것이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요한 15,27. 17,22 참조) 이 사랑의 관계로의 초대가 예수님의 본론입니다. 성령의 파견에 대한 약속과 그분이 하실 일에 대하여는, 이 두 주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들이 그러셨듯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앞으로 올 일들을 알려주실”(요한 16,13) 것입니다. 그분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 보내어지신 것처럼(요한 17,8 참조),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요한 15,26 참조) 보내어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증언하실 것입니다.(요한 15,26 참조)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령께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믿는 이들, 교회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요한 14,16 참조) 그들이 하느님과 믿음의 일치를 이루도록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십니다. 사실 부활 이전의 제자들에게 성령은 세례성사나 주님의 말씀 안에서 간접적으로 체험된 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신 그분은 세상 끝까지 교회와 함께하시는 협조자가 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잘 묘사된 그 체험은 사도들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깊고 뜨거운 것이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사랑과 일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은 우리를 늘 곁에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고 우리가 서로 그렇게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의 모델이십니다. 세상에 오신 아드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은 살아계신 사랑이 되셨고, 교회와 함께 계시는 성령을 통해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은 영원히 살고 일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언제나 현재형의 사랑이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8면

[말씀묵상] 성령 강림 대축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인사를 하시고,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오순절에 제자들은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내려앉자, 성령으로 가득 차 다양한 언어로 복음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만으로는 믿기 어려운 부활에 대한 소식을 우리가 믿고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이끌어주십니다.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함께 걸어주시는 성령께서는 다양한 직분과 활동을 통해 ‘공동선’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적합한 사람에게 적절한 ‘은사’를 베푸십니다. 곧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을 고치는 은사,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예언을 하는 은사,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또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를 주십니다.(1코린 12,4-11 참조) 한편, 성령께서는 개인의 성화를 위해 ‘성령 칠은’(지혜, 통찰, 지식, 식견, 공경, 용기, 경외)을 베푸십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자신의 저서 「성령의 약속」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삼덕’을 ‘성령 칠은’과 연결 지어 설명합니다. 곧 믿음의 덕을 키우기 위해 ‘의견, 지식, 통찰’의 은혜를, 희망의 덕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경외와 용기’의 은혜를, 사랑의 덕을 쌓기 위해서 ‘지혜와 공경’의 은혜를 청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의견’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이 공존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멀리하는 세상 안에서 영적 식별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식’의 은혜도 구해야 합니다. 이때의 지식은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고, 창조된 만물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을 하느님과 연관시키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영혼의 힘이 되는 ‘통찰’의 은혜를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뿐 아니라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 영광의 부활,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꿰뚫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기억하며,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외’의 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함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를 희망하는 일이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기를 청하는 일입니다. 또한 성령께 이끌려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용기’의 은혜는 하느님께만 두는 믿음과 희망의 표현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의 영을 온전히 맡기신 예수님의 의탁을 기억하며, 삶에서의 시련, 고통, 질병, 일탈 등의 극복과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용기의 은혜를 청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성령께 ‘지혜’를 일깨워 주고, 알아차리게 해 주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최고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지혜에 참여해야 합니다. 매 순간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지혜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볼 줄 알아야 하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공경’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일이 다릅니다. 제한된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이러한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구구팔팔이삼사’를 외치며 바라는 건강, 허비하지 않고 최대한 아름답게 사용해야 하는 시간, 의미 있게 사용해야 하는 재물, 그리고 인생 여행에 함께하는 동반자(배우자, 가족, 친구, 신앙 공동체 등)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의 삶을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공동선’을 지향하며, ‘일치’를 이루고, ‘겸손’하고, ‘교도권에 순종’하고, ‘이성’을 적합하게 사용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라 5,22-23 참조;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에 힘입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1코린 12,3)라고 선포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사랑의 삶, 의미 있고 행복한 인생 여정을 가꾸어야 합니다. 글 _ 조성풍 신부(아우구스티노·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승천은 예수님께만 일어난 유일무이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경도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성모님의 승천은 교리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승천과 성모님의 승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늘에 오르신 것이고, 성모님은 하늘에 들어 올려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두 사건 모두 승천이라고 부르지만, 라틴말로는 구별되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주님의 승천은 ‘Ascensio’, 성모님의 승천은 ‘Assumptio’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신 뒤 원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승천(昇天)이야말로 참으로 귀천(歸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승천 사건을 상식과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깁니다. 하지만 죽음을 잠시 멈추는 소생이나, 영원히 죽음을 반복해서 맞이해야 하는 환생이 아니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놀라운 사건인 부활을 이미 믿고 있는 이들에게 승천은 믿지 못할 일이 아니겠죠. 예수께서 언제 어디서 승천하셨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1.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때에 갈릴래아에서 승천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2.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베타니아 근처에서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지 40일째 올리브 동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각각의 저자들이 모종의 이유로 승천의 때와 장소에 대한 기록을 달리하고 있으리라 추측할 뿐입니다. 게다가 예수께서 정확히 어떤 모습으로 승천하셨는지도 확언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점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승천 사건의 의미입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승천이 공간적인 수직 이동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미완료 시제의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마치 예수께서 제자들의 눈앞에서 훨훨 날아오르신 것처럼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 1장 9절은 예수께서 하늘로 날아오르시다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리셨다고까지 합니다. 이 말씀을 고대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우주여행까지 가능해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문자 그대로 믿기 어렵죠. 이미 구름 너머에 하느님의 성전이 없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간적인 수직 이동으로 묘사된 예수님의 승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어에는 특이하게 단수와 복수 외에도 쌍수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손이나 눈, 귀처럼 반드시 쌍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것인데, 히브리어로 하늘은 ‘하샤마임’(השמים), 즉 쌍수입니다. 하늘은 쌍으로 존재하는데, 하나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창공이요,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거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이 두 번째 하늘에 오르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곧 승천은, 오늘 제2독서인 에페소서 1장 20절이 증언하듯,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그 오른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예수님의 승천 사건은 부활 사건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가 예수님의 승천을 가시적인 사건으로 묘사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한 육신을 지니신 채 승천하셨다는 진리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인성을, 마치 달에 갈 때 우주복을 입어야 하듯, 지상에 존재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하시고는 사용 후에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지니신 채로 아버지께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승천 이후에도 예수님은 줄곧 ‘나자렛 사람’이라는 호칭으로 불립니다.(사도 2,22; 3,6; 4,10; 6,14; 22,8; 26,9) 이렇게 이 땅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 사람이 천상의 존재가 될 길이 열렸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비록 흙에서 왔으나,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늘에 오를 것입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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