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꼭 실행에 옮기리라 결심했다. 요즘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말하지 않고 묵묵히 괜찮다고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불안과 불신의 마음이 엉켜 내 속이 편치 않았다.
저녁쯤,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초등학생인 아들과 함께 연산동 집에서 출발하여 서면까지 50분 남짓 지하철을 타고 내려 걸어서 남편 회사 부근에서 망을 보다가 퇴근하는 남편을 미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초등학교 5학년쯤, 내 아들 또래로 보이는 한 사내아이가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나에게 오더니 무작정 꽃을 사라고 했다. 내가 사지 않겠다고 해도 내 옆에서 가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장미꽃을 사라고 졸랐다. 내 아들 또래라서 왠지 측은한 마음에 3천 원을 주고 장미꽃을 샀다.
집에 가서 ‘성모님 상 옆 꽃병에 꽂아드려야지’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내 마음속에 저절로 평온이 찾아왔다. 성모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는데, 지금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싶어 부끄러운 마음에 아들의 손을 잡고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여는 순간, 매캐한 연기 냄새가 확 몰려왔다. 가스레인지 위 음식은 새까맣게 타고 있었고 집 안은 온통 연기로 꽉 차서 깜깜했다. 놀라서 얼른 가스불을 끄고 모든 창문을 연 뒤 안방 문을 여니, 아홉 살 어린 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무엇에 홀린 듯 성모님 앞에서 장미꽃을 들고 한참을 멍하니 그렇게 서 있었다. 마음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생각이 오갔다.
나에게 꽃을 사라고 졸라댄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모골이 송연했다. 그 사내아이를 누가 나에게 보냈을까? 왜 떠나지 않고 장미꽃을 사라고 끝까지 졸라댔을까?
성모님께서 이렇게 미약한 믿음에도 하해와 같으신 자애를 베풀어 주신다고 생각하면, 경건한 두려움으로 반성의 기도를 올리게 된다.
벌써 삼십여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게 된다. 초라한 나의 믿음에 너무나 큰 은혜로 지금까지 우리 가정을 이렇게 다복하게 지켜주신 성모님께 깊이깊이 감사드린다.
글 _ 김희님 마리아(부산교구 장림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