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천주교에 귀의한 것은 1964년 8월 14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사실 그 전에 하느님을 뵐 수 있었던 기회는 있었다. 6‧25전쟁을 피해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 갔을 때였다. 계산동에 있는 적산가옥에서 부모와 함께 셋방살이 생활을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은 어령칙하다. 큰길가에 있는 개신교 건물 건너 골목길에 들어서면 계산동이다.
바로 인접한 곳에 있는 가톨릭 주교좌성당 앞을 늘 지나쳤다. 높다란 첨탑 가운데 십자가가 있었지만 무심코 지나쳤다. 부모님도 가톨릭교회와 인연이 없었다. 하느님을 만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강원도 주문진에 이사 와서였다. 동네 여자 친구가 인도하여 성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벌써 62년 전의 일이다. 주문진본당에 교적을 두고 50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다. 지금은 강릉 임당동본당에 적을 두고 있다.
주문진본당에서는 두 번의 사목회장을 역임했다. 첫 번째는 31살 때였다. 본당 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나섰다. 헌금에 10원짜리 동전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성당은 가난했다. 작은형제회 소속 스페인 신부들은 교무금과 주일 헌금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에서 들여온 헌 옷가지를 비롯해 식용유와 우윳가루 등 구호물자를 지원받아 나누어 주었다. 그때만 해도 ‘밀가루 신자’가 많았다.
사제품을 받고 곧바로 낯선 땅 한국에 입국한 신부들은 일선 사목 경험이 없었다. 나는 본당 신부와 함께 수개월에 걸쳐 신자 가정을 방문했다. 가정방문을 끝내고 맞춤형 사목활동을 했다. 우선 본당 구역을 12개 지역으로 나눠 반을 조직하고 베드로회 등 12사도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매월 대화의 장인 ‘반회’를 개최했다.
친목을 도모하고 성당 사정을 알게 했다. 모임에는 본당 신부, 회장, 사목위원들이 참여했다. 저절로 자립의 기초를 다졌다. 오늘날 구역회보다 훨씬 앞선 일이다. 어려운 처지의 신자에게는 취업을 알선했다. 이때의 활동을 ‘우리는 이렇게 일한다’라는 제목으로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에 기고하여 1977년 6월 12일, 19일, 26일 3회 연재되었다.
두 번째 사목회장은 본당이 침체의 늪에 빠져 어려울 때였다. 내 나이 38세였다. 냉담자는 늘어가는 데 비해 입교자는 적었다. 성당이 노후되도 개‧보수는 엄두도 못 냈다. 공교롭게도 화재가 발생해 사제관이 몽땅 타 버렸다. 주일학교를 사제관에서 했는데 고물 미제난로가 과열로 삽시간에 천정에 불이 옮겨붙어 전소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난감했다. 교회 재정 형편으로 수천만 원의 재원 마련은 언감생심이었다. 당장 본당 신부가 거처할 곳이 없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월이었다. 하느님께 매달렸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신자들이 십시일반 거들었다.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해 직영공사 체제로 공사를 했다. 하지만 공사비는 부족했다. 70%밖에 조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춘천교구장 박 토마 주교에게 읍소했다. 마침내 교구의 지원으로 동해 일출이 보이는 훌륭한 사제관이 건립됐다.
애초에 하느님과 연을 맺게 해준 소화 데레사와 주문진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하고 부부가 되었다. 슬하에 4남매를 낳아 9명의 손주를 두었다. 이 모두 하느님의 가없는 은총의 덕분이다. 어느덧 산수(傘壽)가 되었다. 세상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아직 남아있다. 회개하는 삶이다. 나의 인생, 하느님을 만난 것은 최대의 수확이자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글 _ 정인수 아우구스티노(춘천교구 임당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