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만나보지 못한 외할아버지가 있다. 해방 이후 가치와 이념의 대혼란을 겪던 1949년, 그는 젊은 아내와 어린 남매를 남겨두고 북으로 떠났다. 가는 이도 보내는 이도 머지않아 다시 만날 줄 알았기에 작별의 인사는 짧았다. 하지만 곧이어 닥친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북으로 간 아버지’가 있는 남매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랐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채 십 년도 되지 않아 어머니마저 잃었다. 남매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았다. 오빠인 외삼촌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서야 남매는 그동안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버지와 헤어질 당시 세 살과 여덟 살이던 남매는 아버지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눈을 비벼봐도 아버지의 모습은 희미하기만 했다.
사진, 어딘가에 사진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북으로 간 가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얼굴이 드러나는 사진은 이미 태워지고 버려진 지 오래였다. 얼마나 찾았을까? 처분의 운명을 피한 단 한 장의 사진이 남매의 손에 들어왔다. 고향 집 앞에 나란히 선 두 명의 청년. 하지만 남매는 그 두 사람 중 누가 아버지인지 가려낼 수가 없다. 어떤 날은 동그란 얼굴의 왼쪽 청년이, 어떤 날은 안경을 쓴 오른쪽 청년이 아버지일 것 같다. 결국 남매는 두 청년을 모두 아버지라 여기기로 했다. 때로 쓸쓸하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남매에게 사진은 아버지가 있었다는 유일한 징표였다.
엄마를 모시고 강릉으로 2박3일의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사위도 며느리도 손자 손녀도 다 두고 오로지 엄마가 낳은 4남매만 동행했다. 우리는 모처럼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엄마 앞에서 어리광을 부렸고 깔깔거리며 바닷가를 거닐고 오죽헌을 둘러보고 향기로운 커피도 마셨다. 그러다가 마지막 여정은 사진관이었다. 우리는 여러 포즈로 가족사진을 찍었고 다음은 엄마의 독사진 차례였다. 엄마는 준비한 새 옷을 입고 더 곱게 화장을 하고 멋지게 사진을 찍었다. 특별히 뇌경색으로 표정이 사라진 왼쪽 얼굴이 덜 보이도록 신경을 써서 포즈를 취했다. 훗날 인화된 사진을 보고 엄마는 무척 마음에 든다 하셨다. 그리고 당부하듯 덧붙이셨다. 이 사진으로 엄마를 기억하면 좋겠다고. 엄마에게 사진은 세상에 남겨질 또다른 자신이었다.
핸드폰 속 사진 보관함을 열어봤다. 거기엔 ‘34359’라는 엄청난 숫자가 찍혀 있었다. 그동안 부지런히 찍은 사진의 숫자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보기 전에, 찍는다. 우리는 찍음으로써 기억하고 찍은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적으로 존재한다. 단 한 장의 아버지 사진이 절실했던 어머니와 달리, 지금 우리에게 사진은 ‘삶을 구성하고 연출하며, 공유하는 방식’ 그 자체가 되었다.
그렇다면 사진의 숫자만큼 우리의 기억은 단단해지고 추억은 풍성해지고 있는 것일까? ‘34359’. 디지털 시대에 넘쳐나는 사진들 속에서도 나는 잊지 않고 싶다. 어떤 사진은 여전히 삶을 증명하고, 누군가에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사람을 꺼내어 보여주는 창이다. 사진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