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두 개의 깃발 아래 서 있는 세계 – 겸손과 오만 사이에서

박효주
입력일 2025-07-16 09:10:49 수정일 2025-07-16 09:10:49 발행일 2025-07-20 제 3451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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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한 공동체에 감도는 긴장을 수도원 게시판을 통해 목격하면서, 다시금 이 세계에 만연한 ‘깨진 평화’를 마주하게 된다. 불안한 국제 정세, 고조되는 전쟁의 위험과 기후 위기는 모두 인류의 존립을 위협한다. 이 복합적 위기의 중심에는 세계 질서를 주도해 온 강대국, 미국이 있다. 군사 개입, 지정학적 외교, 기후 문제에 대한 소극적 대응 등 미국의 정책은 국제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력이 과연 평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이렇게 체감하게 되는 불안은 정치의 본질과 지도자의 자격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성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이라는 묵상을 제시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지향을 두 가지 길로 묘사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 곧 겸손과 가난, 자기 비움으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루시퍼의 깃발’, 부귀와 명예, 오만과 자기 영광으로 이끌리는 길이다. 이 두 깃발은 단지 신학적 상징이 아니라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결정과 가치의 선택 앞에 실재하는 실존적 기준이다. 오늘날 국제사회의 갈등과 위기의 뿌리 역시 이 깃발 사이의 선택 혹은 이끌림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정의’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정의로운 국가란 각 계층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통치자는 지혜로, 보조자는 용기로, 노동자는 절제로 삶을 유지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는 단순한 정치제도의 문제를 넘어서 각 개인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고, 이성·기개·욕망의 질서 있는 조화 속에 깃든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성 이냐시오가 제시한 두 개의 깃발과도 깊이 상통하는 부분이 아닐까. 국가란 하나의 유기체이며, 그 지향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평화 혹은 파괴의 길로 이끌릴 수 있다.

현 세계에서 이러한 성찰이 더욱 필요한 이유는 지도자들의 결정이 단순한 정책이나 전략 차원을 넘어 인간 생명과 공동체의 존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관련 뉴스나 대외정책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깃발이 아닌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루시퍼의 깃발이 미국 전역에 펄럭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권력의 논리, 무력의 우위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절대시하는 결정들은 이데아적 정의보다는 ‘강자의 이익’을 정의라고 착각하는 노선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서는 삶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평화와 사랑, 겸손과 희생의 길이다. 미국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세계를 선도하기 위한 국가가 되려면 ‘사사로운 이익’을 내려놓고, 무력과 제재를 통한 통제 대신 공감과 연대의 리더십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이민자 추방이나 군사적 개입은 정의의 기준에서 벗어난 행보로 읽힌다.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건국되어 이상주의와 공동체적 책임을 중시했던 나라가 자국 중심의 현실주의에 매몰되어 타자의 고통에 무관심한 모습은 도덕적 위기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정의란 어느 한 계층의 이익이 아닌, 모든 이의 삶을 보장하고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갈등이 아닌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미화하거나 권력을 정당화한 담론은 실제 고통받는 이의 현실은 가린 채, 마치 그것이 ‘정의’인 양 왜곡된 인식을 조장한다.

이 정황 속에서 우리가 바라볼 곳은 분명하다. 비폭력과 온유, 공동체의 일치를 지향하는 선택은, 현실 정치에서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삶에 근간이 됨을 기억하며 예수님께로 시선을 두어야 한다. 이 세계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로 이끌려 평화를 향한 참된 여정을 다시 시작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고 성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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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