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형’처럼 친근하게…먼저 다가가 위로 전해주는 천사
냇가에 선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오리를 노려보는 길고양이를 본 적이 있다. 순간 상상은 저 너머로 향하고. ‘고양이에게 날개가 있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에 이른다. 그러면 ‘물에 닿지 않고도 독수리처럼 오리를 사냥하고, 쥐 대신 박쥐와 높이뛰기를 하며, 이왕 날개를 달았으니 위험에 빠진 아이들을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나 사람이나 하늘을 난다는 건 신비로운 상상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고양이는 너무 잠이 많다.
나는 지난해 ‘신학생들의 위로자’라고 불리던 남상근(라파엘) 신부를 만나러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앵무새 두 마리를 기르던 그는, 이제 통통한 고양이 아슬란까지 키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날개 달린 고양이가 그의 사제관 안에는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첫 번째 질문은 이랬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제직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는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만화에서 나오는 로봇 박사님 같은 그의 진지한 표정이 좋았다.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사제직 같아요. 변화무쌍하니까. 모르면서 시작했고, 안다고 생각했지만, 분명했던 것들이 갈수록 희미해져만 가요. 새 신부일 때, 주교님이 첫 본당에 보내셨는데 열심히 살려고 얼마나 긴장을 했겠어요. 본당 신부님과 처음 차를 마시는데 패기를 보여주려고 대뜸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다부지게 말했지요. 그런데 본당 신부님이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뭘 그렇게 열심히 살아? 그냥 살아~’였어요. 그 말씀이 오히려 제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짝 얼어서 있었는데, ‘그냥 신자들과 살면 되는구나’ 아무 탈 없이 기쁘게!”
남상근 신부는 내가 ‘답’이 아니라 ‘위로’를 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여주었다. “서품 50주년을 맞은,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수도회 신부님이 계셨어요. 누군가 할아버지 신부님에게 질문했다고 해요. ‘사제로서 어떻게 그리 잘 사셨나요?’ 보통은 하느님을 위해서 좋은 말씀을 하실 거 같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그러셨대요. ‘오늘 그만둘까 내일 그만둘까 하다가 50주년이 되었다’고. 사는데 왜 힘들고 험한 갈등이 없겠어요. 그냥 사는 거지.”
입학을 함께 한 사이라 그런지 나는 아직도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그런 든든한 어깨 같은 사람. 신학원 같은 반 친구가 짐을 싸서 다시 세상을 향해 떠나야 했을 때, 형님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한참 울어주던 사람이었다. 고학년이 되어서도 그의 방에는 언제나 위로와 쉼이 필요한 신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때 우리는 깨지기 쉬운 유리알 같았다. ‘저러다 공부는 언제 하나?’ 싶을 정도로, 한 명 빠지면 바로 다른 한 명이 그의 방을 채우고 그랬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내 문제로는 그를 귀찮게 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나는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인기가 있는 그가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때 그는 신학생다웠고 지금은 사제다웠다.
태어날 때부터 형님이 사제다웠을 거라는 생각에서 ‘부르심-성소’에 관해 물었다. 그는 대학원 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읽었던 ‘성가복지병원의 청년봉사자에 관한 기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집 가까이에 그 병원이 있었고,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 병원 간판이 보이자, 바로 내려 ‘봉사를 하고 싶다’고 시작한 것이 안내실 차트 정리였다.
그러던 중 병원의 한 수녀님이 ‘라파엘! 꼭 사제가 되면, 서품 첫 강복 받으러 갈게’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이게 부르심인가?’ 해서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 입학한 지 4년이 흘러 신학교 성소 주일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첫 강복을 받으러 오신다던 그 수녀님을 우연히 만나 너무 기뻤다고 했다. 그런데 그분이 오랜만에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왜 여기에 있어?”였다니!
당시 수녀님은 병원에 봉사 오는 모든 청년에게,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가라’고 했는데 ‘거기에 자신이 딱 걸린 것’이었다고. 이쯤이면 성소가 아니라 ‘착각’이 아닌가 싶은데. 그 후 형님의 서품식에 수녀님은 약속대로 오셔서 첫 강복을 받으셨다. 돌이켜보면 하느님의 손길은 자주 인생의 ‘우연’을 사용하신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바스테트’(Bastet) 여신의 머리는 고양이상으로, 처음에는 전쟁의 신으로 여겨졌다. 후에 이 여신의 비밀스러운 눈인 고양이가 어둠 속에서 은밀히 다니며 악한 기운을 부수고 모두를 보호하자, 밤의 수호신으로 추앙되었다. 이쯤이면 이집트 고양이들은 적어도 그 위세에 날개가 없다고 사냥을 못 하거나 누구를 돕지 못해 아쉬워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때론 그런 생각도 든다. ‘고양이에게 보이지 않는 날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천사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는 것처럼.
2025년 1월 12일 주일 새벽. 내가 사는 성당에 불이 났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남상근 신부가 연락해 왔다. ‘성전에 불이 난 것을 이제사 들었다며. 주일 저녁 미사를 마치고 늦게라도 꼭 오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는 차가 없었다. 분명 지하철로 그 밤에 왔을 것이다. 우리는 휴대전화 불빛을 켜고 아직 유독가스가 가시지 않아 매캐한 현장을 둘러보았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다치지는 않았냐’며 그는 안타까워했다. 오랜만에 만난 착한 동네 형 남상근 신부는 그렇게 찾아와 위안을 해주었다.
그는 말미에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요한 2,1-12)를 했다. ‘혼인잔치에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 않았냐고… 아직 이 좋은 술이 남아있었냐는. 우리가 눈앞에서 희망을 잃게 되고, 아픔이 찾아올 때 생각해 봐야 한다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이 변화시키신 그 좋은 술은, 바로 화재에도 서로를 지키고 있는 이 공동체가 아니겠냐고.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새 사제의 첫 번째 안수처럼 내 머리를 꼭 감싸며 기도를 해주고 그는 돌아갔다.
‘그의 위로’는, 주기 위해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다가가는 마음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형님은, 키우는 앵무새와 고양이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돕고 싶어한다는 것을.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 주님의 천사들은 날개를 접고 위안을 전한다. 형님 같은 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