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고통의 간극을 어떻게 해석할까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린다. 요한묵시록 5장의 문제, 그러니까 봉인을 열 수 있는 주체를 찾는 일은 이제 그 끝에 다다랐다. 봉인은 모두 열렸고 봉인은 그러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열리는 과정은 지난했으나 그 흐름은 놀랍게도 구원에로 방향 지워졌다. 마지막 일곱 번째가 열리는 공간은 하늘이다.
하늘에서 봉인되어 있던 두루마리는 하늘의 자리에서 완전히 열렸다. 처음부터 하늘이었고 마지막까지 하늘인 봉인의 흐름은 요한묵시록의 구원 의지를 분명히 한다. 앞서 요한묵시록 7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을 다시 되새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이사야서의 한 대목을 옮긴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 그로 인한 하느님 백성의 희망을 노래한다. 봉인이 해제된 두루마리는 하느님의 구원을 찬찬히 살펴보게 하는 묵상의 글이 된다.
그러나 구원이란 게 그리 호락호락한 선물이 아니다. 한번 노력해서 한번 받고 끝나버리는 영화나 소설 속 해피엔딩이 아니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는 것을 두고 종말이 왔음을, 그 종말의 시간에 봉인을 펼친 유일한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이 완성된 데 주석의 방점을 찍는다. 이런 해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구원의 유일한 길과 목적은 예수님인 건 분명하나, 그 구원이, 종말이 어느 시간의 흐름 끝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요한묵시록은 구원 이전에서 구원 이후의 시간 흐름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미 이뤄진 구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해 쓰였다. 구원이 왔음에도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가 여전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구원과 고통의 간극을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요한묵시록의 집필 동기다.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를 통해 우리는 이미 그 동기를 얼마간 살펴보기도 했다.
예컨대 에페소 교회에 보내진 편지에서 말하는 ’첫사랑‘의 상실이 그러하다. 첫사랑은 십사만 사천과 닮았다고 보면 어떨까. 저만이 옳고 구원에 합당하다 말하는 니콜라오스파의 배타적 자세가 첫사랑을 상실한 것이라면 모든 이에게 열린 구원에의 외침을 가리키는 십사만 사천은 첫사랑의 회복일 것이니. 첫사랑은 그러므로 구원을 누리는 이들이 한결같이 지켜나가야 할 보편적 사랑, 누구에게도 열린 구원의 선포와 같은 것이니.
구원이 왔다, 종말이 당도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업적은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외치는 것은 오래된 중언부언이라 식상한 것이 아닐까. 구원을 이미 누리고 사는 이에겐 너무나 자명한 말이라 새롭지 않아 지루한 선포가 된다. 구원은 찾아 나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의 소재다.
‘반 시간’의 침묵은 그래서 소중하다. 전통적으로 ‘침묵’은 주님의 날이 임박했음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스바 1,7; 즈카 2,17; 시편 76,9 참조) 주님이 오시고 그분이 행하시는 것을 찬찬히, 겸허히 살펴보는 시간이 반 시간이다. 반 시간은 그러므로 주님의 시간이다. 일곱 개의 봉인이 인간 세상의 희로애락 속에서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폈다면 반 시간의 침묵 후에 펼쳐질 일곱 개의 나팔은 심판이라는 묵시문학적 장치들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어떤 것인지 소개할 것이다. 반 시간의 침묵 속에서, 그리고 구원이 완성된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숙제를 얻은 셈이다.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직접 개입하셔서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이 무엇을 향해 서술되는지, 그리하여 그 방향성 안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것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읽어내어야 한다.
구원, 시간의 끝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돼
구원은 찾아 나설 무엇이 아닌
어떻게 살지에 대한 성찰 소재
하느님의 일은 ‘일곱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유다이즘 안에서 일곱 천사는 대천사의 그룹으로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그분의 현존에 함께하는 천사로 소개된다.(에녹 20, 토빗 12,15; 이사 63,9) 천사는 일곱 나팔을 가지고 있는데, 하느님의 경고(예레 4,5)나 하느님을 위한 축제와 예배(2사무 15,10; 민수 10,10), 아니면 하느님의 현현이나 마지막 날 하느님의 등장을 상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탈출 19,16; 요엘 2,1; 스바 1,16)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은 하느님을 향한 지시체다. 반 시간의 침묵에 이어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은 하느님을 향해 더욱 세심히, 민감하게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일을 살피기 전, 우리에겐 하느님 그분을 향한 시선이 필요하다.
‘다른 천사’의 등장은 하느님을 향한 방향성을 더욱 탄탄하게 만든다. 우리말 성경은 제단 ‘앞에’라고 번역하지만, ‘앞에’라고 번역한 그리스말 ‘에피’(ἐπὶ)는 공간적 친밀성을 드러내는 전치사다. 그러므로 제단 앞은 하느님께 보다 ‘가까운’ 공간이다. 다른 천사에게는 금향로와 많은 향이 주어졌다. 다른 천사는 마치 사제와 같다.(레위 16,12; 민수 17,11 이하)
그러나 다른 천사가 보이는 뜻밖의 행동은 많은 의문이 남는다. 천사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숯불을 가득 담아 땅에 던진다. 향로와 향이 성도들의 기도일진대(묵시 8,3-4) 그 기도가 땅을 향해 던져지는 셈이다. 하느님을 향하는 기도가 땅을 향하는 공간적 연결성은 낯설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늘 이렇다. 4장의 천상이 땅의 공간과 하나 되어 서술되었고, 6장의 봉인이 열리면서 천상의 두루마리는 지상의 삶 자체를 겨냥했다. 요한묵시록 끝에 나타나는 새예루살렘 역시 하늘과 땅의 중간 어디쯤, 모든 것들이 통합되는 초월적 공간을 잉태한다.
주석학자들은 땅에 던져진 향로를 심판의 징조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요한묵시록 8장 6절부터 서술되는 그 ‘심판들’이 과연 흑과 백을 나누듯 잘못된 이들을 향한 심판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아니면 천상의 기도가 이 땅 위에 떨어져 한계 지워지고 부족하고 그리하여 슬픈 현실 속, 하느님을 향한 쓸쓸하지만 겸손한 오솔길로 거듭나는 건 아닐까. 구원을 이미 누리는 이로서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아간다. 구원은 그러므로 천상의 행복만도, 지상의 불행만도 아닌, 여전히 살아내어야 할 삶 자체에 주어진 하느님과의 인연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