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 되다
일곱째 나팔이 울린다. 나팔이 울릴 때마다 펼쳐졌던 재앙과 환난의 끝은 일곱째 나팔로 사라진다. 일곱 봉인에서도 그랬다. 일곱째, 그 마지막 순간에 하늘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일곱째 나팔이 울릴 때, 하늘은 재앙을 걷어내고 희망과 영광을 드러낸다.
하늘의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한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님과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묵시 11,15) ‘세상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κόσμου)’라는 말마디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실 때, 사탄이 호령하는 나라가 세상 나라였다.(마태 4,8 참조) 묵시록에서도 세상을 호령하는 땅의 임금들은 예수님과 대척점에 서서 사탄에 부역하는 존재로 묘사된다.(묵시록 17~19장) 일곱째 나팔은 세상 나라와 예수님과의 대립 구도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에겐 두 세상의 갈등이나 대립은 남아 있지 않다. 앞서 펼쳐진 온갖 재앙들의 의미는 일곱째 나팔의 시간에서야 비로소 참된 의미를 지닌다. 어긋난 이들에 대한 단죄나 심판, 혹은 하느님을 따르지 않은 이들에 대한 복수, 그로 인한 숱한 재앙의 장면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맞춰 가기 위한 여러 개의 조각이었고 일곱째 나팔은 그 조각들 모두가 하늘을 수놓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셈이다. 우리 눈에 어긋나는 일과 부족한 삶에서조차도 그리스도의 나라는 여전히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깨끗하고 고와서 선하고 아름다운 일과 삶 안에만 신앙의 본령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미련 없이 포기하게 만든다.
스물네 원로의 경배는 이런 서사의 맥락을 더욱 견고히 한다.(묵시 11,14-18 참조)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 땅 위에 실현된다는 것. 학자들은 이러한 경배의 말마디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읽어낸다. 그러니까, 이러저러한 인간 세상의 불의와 슬픔과 고통이 지나가고 다만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득한 종말의 시간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완성’이라는 표현은 일련의 시간이 지난 뒤에 펼쳐지는 결과론적 선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스물네 원로는 하느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 하느님으로 인식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한결같이 ‘완성’의 시간을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태초부터 우리는 완성을 살고 있고, 마지막을 처음처럼 살아간다. 다만 우리는 지금을 완성으로 보지 않고 미래 어느 시간의 화려함을 완성으로 규정한 채 지금을 결핍의 시간으로 쉽게 규정하고 만다. 그로 인해, 지금은 늘 목마르고 배고프다. 스물네 원로가 말하는 하느님의 다스림은 부족한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완성의 자리임을 고백하는, ‘나 자신과의 화해’가 아닐까.
그러나 누군가에게 ‘지금’은 하느님의 심판의 때이기도 하다. 18절에 민족들이 분개하는 것은 하느님의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배타적 완고함을 가리킨다. 반면 하느님의 종 예언자와 성도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한다. 그들에겐 상이 주어질 것이다. 사도행전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이란 표현을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가리킬 때 사용했다.(사도 13,16.43.50 참조) 사도 바오로는 성도들이란 표현을 통해 우상 숭배에 결연히 저항하는 이들을 소개한다.(로마 15,26.31; 1코린 16,1.15 참조)
사도 바오로에게 우상 숭배는 제 신념과 신앙을 절대시하여 다른 이들에게 배타적인 이들의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예언자와 성도들은 어떤 고귀한 신앙적 가치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로 열려 있어 제 삶의 자리를 완고함과 배타심으로 분칠하지 않는, 그리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묻기보다,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희망·영광 드러낸 일곱째 나팔
미래 다른 곳 아닌 지금 이 땅에
하느님의 다스림 실현되는 것
우리 일상이 바로 완성의 자리
완고함과 배타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파멸로 향하게 된다.(묵시 11,18 참조) 파멸은 하느님을 맞서는 이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 안에 자주 등장했다.(예레 51,25 참조) 다만, 우리의 본문에서 파멸은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향한다.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파멸한다고 스물네 원로는 말하고 있다.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하늘을 향하고 하느님을 배척해서 파멸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을 파괴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은 땅을 하늘로 봐야만 가능한 생각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천상은 실은 이 지상을 회피하고픈 절망과 비겁함일 수도 있다.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현실의 삶을 죄악시하고, 그 삶을 비루하게 여기는 이들의 교만이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지만 우리는 저 하늘에 천사처럼 살고자 갈망하는 건 아닐까. 그 갈망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죽였다.
파멸에 대한 예고는 다만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계약 궤가 등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묵시 11,19 참조) 번개와 요란한 소리, 천둥과 지진들 역시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는 전통적 은유다. 땅을 파괴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은 또 다른 폭력이나 억압, 혹은 재앙이 아니라 하느님의 등장이라는 서사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강렬하다. 그러니까 심판은 결국 하느님을 또다시 소개하는 일이 된다. 하느님은 이렇게 인간 앞에 무력하다. 사랑이 가득한 분은 늘 그렇게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다시 땅 위의 완고한 이들에게 천상을 열어 보임으로써, 하느님은 다만 끝없는 사랑으로 남으실 뿐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