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덕에 오른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하며 늘 평정심 유지 교만·허영심이 가장 큰 걸림돌…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
‘덕을 채집하라!’ 이 주제어가 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이 말은 ‘덕을 쌓다’, ‘덕을 획득하다’, ‘덕을 닦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채집하다’란 표현은 ‘지혜로운 꿀벌’ 개념에서 착안한 것이다. 덕(德)을 라틴어로 ‘비르투스’(virtus)라 하는데, 이는 선을 행하는 ‘힘’ 또는 ‘용기’를 뜻한다. ‘나쁜 습관’을 뜻하는 ‘악습’(vitio)의 상대어로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겠다. 수행 생활은 악습을 제거하고 덕을 심는 과정이다.
그래서 악습과의 싸움과 동시에 덕의 획득을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악습에 대한 승리는 그에 상응하는 덕의 획득을 가져온다. 카시아누스는 인간 안에 악습과 그 반대 덕이 동시에 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양심에 따라 악마나 그리스도 중 누구에게 주도권을 부여할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다.(담화집 1,13-14)
지혜로운 꿀벌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안토니우스를 지혜로운 꿀벌에 비유하며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초기에 안토니우스도 자기 마을 근방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열정으로 가득한 어떤 사람에 대해서 듣자마자 그는 지혜로운 꿀벌처럼(칠십인역 시편 6,8 참조) 그를 찾아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그를 보고 덕의 길을 가기 위한 일종의 양식을 얻기 전에는 자기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안토니우스의 생애」 3,4)
꿀벌이 여러 꽃에서 꿀을 채집하듯 안토니우스는 다양한 사람에게서 덕을 채집하려고 노력했다. 어떤 한 사람에게서 모든 덕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서 각각의 고유한 덕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꿀벌이 꿀을 찾아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니듯 능동적으로 덕을 찾아 본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시아누스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다. “누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한 사람에게 모든 덕의 모범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 어떤 이는 인식의 꽃으로 장식되고, 또 어떤 이는 분별의 기술을 더 잘 갖추고 있으며, 어떤 이는 인내의 무게를 기초로 하고, 어떤 이는 겸손의 덕으로 승리하며, 어떤 이는 극기의 덕으로 승리합니다. 또 다른 이는 단순성의 은총으로 장식됩니다. 이 사람은 관대함, 저 사람은 자비나 철야, 또는 침묵이나 노동에 전념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능가합니다.
이 때문에 영적인 꿀을 채집하려는 수도승은 매우 지혜로운 벌처럼 어떤 덕에 더 나아간 사람들에게서 각각의 덕을 채취하여 자기 마음의 그릇에 정성껏 모아야 합니다. 상대에게 부족한 덕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오직 그에게 있는 덕을 얻는 데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게서 모든 덕을 얻으려 한다면 본받을 모델을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규정집 5,4,1-2)
참으로 일리 있고 유익한 가르침이다. 우리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모든 덕을 갖추고 있을 수 없다. 사람마다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지혜로운 꿀벌처럼 타인의 장점을 찾아 본받으려 노력할 때 영성 생활이 더욱 진보하게 될 것이다.
덕을 위한 노력
사막 수도승들은 덕을 얻으려 분투했다. 압바 이시도루스는 그 이유를 말한다. “악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서로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빨리 악에서 돌아서서 덕을 추구해야 합니다. 덕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고 서로 일치시켜 줍니다.”(이시도루스 4) 악습이 여럿이듯 그 상대 덕도 여럿이다.
그들은 가능하면 많은 덕을 얻으려 노력했다. 압바 포이멘의 다음 두 금언은 이를 잘 말해준다. “한 형제가 압바 포이멘에게 물었다. ‘사람이 오직 한 가지 행위에만 의지할 수 있습니까?’ 원로가 대답했다. ‘압바 요한 콜로부스가 말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모든 덕을 조금씩 갖고 싶습니다.’”(포이멘 46) “누가 집을 지으려고 준비할 때, 그는 집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한데 모읍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자재들을 수집하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온갖 덕을 조금씩 얻읍시다.”(포이멘 130) 압바 요한 콜로부스도 “사람은 모든 덕을 조금씩은 가져야 합니다”(요한 콜로부스 34)라고 말한다.
사막에서 여러 해 동안 함께 화목하게 생활한 두 형제의 일화는 그들이 덕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인내와 겸손에서 경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한 형제의 눈에 다른 형제의 성덕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 형제는 다른 형제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그 순간부터 그를 형제가 아니라 사부로 부르며 자기 원로로 대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96) 여기서 우리는 영적 경쟁에서 쉽게 빠질 수 있는 교만이나 시기심이 아닌 지극한 겸손을 보게 된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질투와 분노, 교만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
사막 교부들은 덕을 닦는 데 있어서 교만과 허영심을 가장 큰 걸림돌로 보았다. 교만은 영혼이 소유한 모든 덕을 무자비하게 약탈한다. 카시아누스는 말한다. “교만의 질병이 얼마나 위험하고 심각합니까! 세상의 본성과 법칙까지도 바꿀 만큼 그렇듯 많은 정의와 덕, 그렇듯 위대한 신앙과 헌신이 한 번의 허영심으로 파괴되어, 그 모든 덕이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규정집 11,10,3)
그리고 “교만의 악만큼 모든 덕을 제거하고 인간의 모든 의로움과 거룩함을 빼앗아 발가벗기는 악습은 없습니다. 교만은 온몸에 널리 퍼진 전염성 있는 질병과 같아서 단지 한 지체만을 오염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을 해치며, 이미 덕의 정상에 도달한 이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분쇄하려 합니다.”(규정집 12,3,1)
그래서 그들은 교만을 가장 경계했다. 어떤 원로는 덕행이 뛰어난 세속인이 있다는 계시를 받는다. 완덕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원로들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느님은 종종 그들을 교만에서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 못지않게 덕스러운 평신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어떤 독 수도승은 천사를 통해 자신이 평신도 농사꾼보다 거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를 만나 그의 말에 감명을 받는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288-9)
모든 덕의 으뜸은 겸손이다. 겸손이야말로 사막 수도승들에게 일상생활의 본질이었다. 그들은 모든 덕에 나아가고 온갖 악습을 없애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였다.(규정집 6,6) 그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완덕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완덕에 오른 사람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며(마태 11,29 참조), 늘 한결같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온유와 겸손, 평정심은 바로 덕스러운 사람의 표지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회·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