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에로스’와 ‘에토스’의 만남

이승훈
입력일 2025-07-23 08:48:55 수정일 2025-07-23 08:48:55 발행일 2025-07-27 제 3452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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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뿌리 둔 ‘에로스’…욕망 무조건 덮을 것 아니라 정화 통해 새로운 형태 갖춰야

살아가면서 가장 억울한 일은 왜곡된 진리를 ‘참’이라 믿고 살아온 경우일 것이다. 성에 대한 의미도, 에로스에 대한 앎도 그렇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원론적이고 결의론적으로 사물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대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근대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데카르트,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가 말하는 인간과 인간의 성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그리고 에로스의 본질적 의미가 어떻게 축소, 왜곡됐는지를 설명한다.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 계획이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모로 분명히 인간에게 부여된 것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로스라고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에로스를 독살했으며, 에로스가 완전히 죽지 않았더라도 점차 악한 것으로 변질됐다고 주장했습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항)

플라톤은 ‘에로스’를 좋은 것, 참된 것, 아름다운 것으로, 진·선·미를 향해 인간을 끌어당기는 내적 힘(이끌림), 인간 정신의 주체적 행위의 강도로 표현했다. 구약성경의 아가서는 에로스의 특징, 즉 스스로 만족하는 법이 없고 계속 찾아다니는 특성을 노래한 것이다.

사랑은 관능적이면서 영적이다. 다만 그 힘이 너무 강해 절제하고 정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에로스에 담긴 최종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관능적 영역에서 ‘에로스’와 ‘에토스’가 서로 달리하지도 않고, 대립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두 가지 모두 인간의 마음 안에서 서로 만나도록 부름 받았으며 이 만남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부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47과 5항)

좋은 것, 참된 것, 아름다운 것을 향해 인간을 끌어당기는 내적 힘은 마음에서 일어난 부르심이기에 강하다. 즉 내적 일치에서 실제적 일치로 향하게 하는 사랑은 영적이며 관능적이다. ‘몸 신학’은 인간 사랑(에로스)의 의미를 다시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에로스는 인간의 본성 자체, 곧 하느님께 뿌리를 둔 것이다. 에로스의 역동성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의 현실에 다가가는 동시에 친교의 문을 열면서 그들 사랑의 출발인 ‘근원적 사랑’을 바라보게 된다. 이는 에로스적 긴장과 역동성 안에 숨겨져 있는 신비다. 그러므로 욕망을 무조건 덮을 것이 아니라 그 목적지를 바라봐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창조의 신비 속에 포함된 근원적인 힘이 그들 각자를 위한 구원의 신비가 지닌 은총의 힘이 된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46과 5항)

창조의 신비 속에 들어있는 근원적인 힘이 자신을 위한 구원 신비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시선에서 자신 안에 움직이는 욕망을 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性)은 처음부터 방향성을 지니고 있지만 나의 지향에 의해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을 인격으로 바라본다면, 결코 성애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기능적인 역할로 격하시키지 않을 것이다. 성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면이 있고 그 힘이 강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최고 성소는 세상 모든 것과의 관계를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영원한 질서를 바라고 지키는 것에 있다. 최고의 성소에서 오는 빛은 인간이 에로스를 바라보게 했다. 이로써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그 역사에 사람과 사랑이 선물로 주어졌고 완성하도록 초대됐다. 그래서 에로스는 단순히 관능적 욕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 대한 갈망으로 발전되고 완성에 이르는 질서를 지녔다. 그러므로 갈망이 최종 목적지를 바라보고 정화를 거쳐 새로운 형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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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