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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준식 기자

bjs@catimes.kr

안동교구, 최양업 신부 선종지 진안리성지서 시복시성 염원

안동교구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 선종 164주년 기념일인 6월 15일 경북 문경 진안리성지에서 교구장 권혁주(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주례로 ‘희망의 순례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시성 기원 미사’를 봉헌했다. 당초 교구는 신앙대회를 계획했지만 지난 3월 발생한 경북 지역 대형 산불로 피해를 입은 교구민·이웃들과 아픔을 함께하기 위해 행사를 취소하고 대신 미사를 봉헌했다. 권 주교는 강론을 통해 “최양업 신부님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쉼 없이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선 ‘길 위의 목자’이자 ‘땀의 순교자’였다”며 “여러분 모두가 가경자 최양업 신부님에게 시복시성의 은혜가 내려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오늘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시성을 위한 전구 기도의 날을 맞아 전구 기도를 통한 치유의 은총과 기적이 이뤄지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영성체 후에는 주한 교황대사 조반니 가스파리 대주교가 교구에 보낸 메시지를 사목국장 황영화(마티아) 신부가 대독했다. 가스파리 대주교는 “최양업 신부님의 삶과 사도적 열정은 시련 속에도 희망을 놓지 않고 서로 아끼며 살아가는 안동교구 신자들의 신앙 속에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며 “신부님이 하루빨리 복자품에 올라 온 교회의 공경을 받기를 기도한다”고 했다. 이날 미사 중에는 최양업 신부 서한 필사자 150여 명이 필사본을 봉헌하고 권혁주 주교의 축복장을 받았다. 또 프랑스 가수 클레르 시몽(Clarie Simon)이 ‘사명’을 독창했으며 교구 문경지구 성가대 아마레(AMARE)와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수녀들이 ‘희망의 순례자들’을 합창했다. 예비신학생과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수련 수녀를 위한 축복기도와 십자가 수여식도 열렸다. 한편 이날 행사장에는 안동 가톨릭 미술가회와 가톨릭 문인회가 최양업 신부를 주제로 제작한 작품들도 전시됐다. 작품들은 7월 15일까지 안동교구청에서 전시된다.

2025-06-17

안동교구, 6월 15일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 기원미사

안동교구는 최양업(토마스) 신부 선종 164주년을 맞아 6월 15일 오후 3시 경북 문경 진안리성지에서 교구장 권혁주(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주례로 ‘희망의 순례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시성 기원미사’를 봉헌한다. 진안리성지는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사에는 교구 사제단, 최양업 신부 서한을 필사한 교구 신자들과 제단체 구성원 등 500여 명이 참례한다. 진안리성지 담당 정도영(베드로) 신부가 최양업 신부 선종지인 진안리성지에 대해 소개하며, 최양업 신부 서한 필사자들의 서한 필사본이 봉헌된다. 필사 봉헌자들에게는 권혁주 주교의 축복장이 전달된다. 또 교구 문경지구 성가대 ‘AMARE(아마레)’와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수녀들이 함께 ‘희망의 순례자들’을 합창한다. 예비 신학생과 교구 신학생들도 최양업 신부를 기리는 노래를 봉헌한다. 교구는 당초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을 기원하는 교구 신앙대회를 계획했으나, 지난 3월 경북 지역에서 일어난 산불로 피해를 입은 이웃들과 아픔을 함께하기 위해 행사를 취소하고, 선종일에 맞춰 시복시성 기원미사를 봉헌하게 됐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1821~1861)는 한국교회의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 박해 시대에 깊은 신앙심으로 조선 전역을 다니며 헌신적인 사목 활동을 펼치다 젊은 나이에 탈진과 과로로 선종했다. ‘땀의 순교자’로 불리우는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 절차가 진행되고 있으며, 선종지로 알려진 진안리성지에는 선종 기념 성당과 기념관 등이 조성돼 순례자들이 최양업 신부의 삶을 묵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25-06-02

[초대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선종] 장례미사 이모저모

초대 안동교구장을 지낸 두봉 주교(杜峰·레나도·프랑스명 René Dupont)의 장례미사가 4월 14일 오전 11시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 권혁주(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주례, 전·현직 주교단 공동집전으로 봉헌됐다. 장례미사에 참례한 사제·수도자·신자들은 70여 년 사목활동을 통해 한국교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사회적 약자와 농민들을 진심으로 품어줬던 두봉 주교의 삶을 돌아보며 하느님께서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내려주시기를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 4월 10일 두봉 주교의 선종 소식이 알려지면서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안동교구 신자들은 지구별로 빈소를 찾아 위령기도와 선종미사를 봉헌했다. 선종 다음날인 4월 11일부터 빈소를 방문한 교구 사제단과 신자들은 소박하고 가난한 교회를 표방하며 한국교회를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고인이 하느님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전국 각 교구 사제단과 수도자들도 빈소에 속속 도착해 조문을 이어갔다. ◎… 두봉 주교의 장례미사가 봉헌된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는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한국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두봉 주교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수많은 신자들이 운집했다. 장례미사가 봉헌된 성당에 자리가 부족해 들어오지 못한 신자들은 본당 측이 야외에 특별히 설치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장례미사에 참례했다. ◎… 장례미사에는 그동안 두봉 주교가 한국 사회에 미친 큰 영향력을 보여주듯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이준석(안드레아) 개혁신당 의원, 이철우 경북도지사, 권기창 안동시장 등 정·관계를 비롯해 불교·유교계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례해 고인의 넋을 기렸다. ◎… 장례미사 직전 안동교구가 전한 두봉 주교의 마지막 순간은 신앙인들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4월 6일 뇌경색 증상으로 입원했던 두봉 주교는 4월 10일 오후 선종 직전 병문안을 왔던 안동교구 사제단에게 눈을 돌려 “성사”라고 힘겹게 말을 건넸다. “고해성사를 뜻하는 것이냐”는 물음에 “예”라고 답한 두봉 주교는 고해성사를 마친 뒤 한결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어 그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감사를 연이어 표시했고, 그때마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는 특유의 몸짓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호흡이 불안정해지며 주님의 품에 안겼다. ◎… 영성체 후 이어진 고별식은 두봉 주교 약력 및 각계 조전 소개, 고별사, 고별예식, 감사 인사 순으로 진행됐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라자로) 추기경은 조전을 통해 “평생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해주신 따뜻한 마음과 호탕한 웃음을 기억하자”며 “두봉 주교님께서 머지않은 장래에 시복·시성되실 수 있길 기원한다”고 전했다. 주한 교황대사 조반니 가스파리 대주교는 고별사를 통해 두봉 주교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조전을 대독하며 “두봉 주교님께서 보여주신 열정과 봉사의 삶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애도 메시지도 이어졌다.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하셨던 두봉 주교님은 저의 인생에 있어서도 거울 같은 분이셨다”며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을 두봉 주교님께서 인도해주시리라 믿는다”고 애도했다.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는 “소외된 이웃과 농민들을 위해 열성을 다하셨던 두봉 주교님의 삶은 격동의 한국사의 산증인과 같은 분이었다”며 “인자하신 주 예수님을 닮으셨던 분, 모든 신앙인에게 큰 귀감이 되고 영적 모범이 돼 주셨던 두봉 주교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 한국지부장 하대건(크리스토프 베라르) 신부는 “두봉 주교님을 병원에서 뵀을 때 눈빛으로 미소지으셨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우리의 소중한 형제였던 주교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눔으로써 더욱 빛나셨던 분”이라고 밝혔다. ◎… 사제단 대표로 고별사를 한 최숭근(비오·안동교구 울진 북면본당 주임) 신부는 “특별귀화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셨을 때 우리보다도 한국을 더 사랑하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봤다”며 “우리 사제들은 주교님의 뜻을 받들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수도자 대표로 고별사를 한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 윤요한 관구장 수녀는 “주교님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은총이었다”며 “우리 수도자들도 주교님 뜻을 이어받아 기쁘게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가겠다”고 전했다. 안동교구 평협 송규흠(아오스딩) 회장은 “예수님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던 그 사랑이 그리움으로 남는다”며 “주님에 대한 열정과 우리 신자들에 대한 사랑을 항상 기억하겠다”고 고인을 기렸다. ◎… 장례미사 고별식 마지막 순서에서는 두봉 주교가 선종하기 정확히 1년 전인 지난 2024년 4월 10일에 녹음된 고인의 음성 메시지가 성당 스피커를 통해 전해졌다. 평소 예수님의 사랑을 외치며 “감사합니다”를 유쾌하게 연호했던 고인의 음성이 성당 내에 울려 퍼지자 신자들은 웃음과 함께 눈물로 고인을 기렸다. ◎… 이어진 고별예식은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가 진행했다. 장례미사 후에는 사제단과 수도자, 신자들이 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성직자묘지로 이동해 하관예절을 진행하며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2025-04-15

[초대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선종] ‘기쁘고 떳떳하게’…한국교회에 남긴 발자취

솔직담백하고 열린 마음. 생전 두봉 주교가 강조했던 사제로서의 모습이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국 땅에서 선교하며 사회적 약자와 농민의 편에 서서 정의를 외쳤다. 항상 소탈하고 떳떳한 모습으로 주님 사랑을 전한 그는 신앙인들은 물론 국민 전체에게 진한 감동을 주며 존경받아 온 한국교회의 큰 어른이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 하나로 70여 년 사목활동에 임해온 그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 ‘기쁘고 떳떳하게’ 두봉 주교는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교구의 가톨릭 가정에서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0년 21세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고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1953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와 한국의 인연은 한국교회 복음화 사명을 받고 1954년 12월 한국 땅을 밟으면서부터다. 처음 사목활동을 시작한 곳은 대전교구 주교좌대흥동본당이었다. 보좌신부로 힘차게 첫발을 내딘 그에게 당시 주임이었던 고(故) 오기선(요셉) 신부가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그의 프랑스 이름이던 ‘뒤퐁’을 음차한 두봉(杜峰)이었다. ‘두견새’와 ‘봉우리’를 뜻하는 이름, 두봉 주교는 그렇게 한국 땅에서 ‘한국인보다도 더 한국을 사랑한 프랑스인’으로 70여 년 삶을 이어가게 된다. 대전교구에서 사목하던 그는 1969년 5월 신설된 안동교구의 첫 교구장으로 임명된다. 1969년 7월 25일 주교품을 받고 안동교구 발전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았다. 교구장이었음에도 두봉 주교에게는 특별한 문장이나 표어가 없었다. 다만 안동교구 사명 선언문인 ‘기쁘고 떳떳하게’는 그가 선종 직전까지도 강조하고 소중히 여겼던 ‘사제로서의 사명’이었다. 2023년 사제서품 70주년을 맞아 본지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는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야합니다.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 불의 앞에 사회 정의를 외치다 이렇듯 두봉 주교의 신앙은 내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며 불의에 맞서 정의를 지킨다는 것이었다.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그는 농민들의 편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유신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77년 10월 30일, 안동교구는 주일미사 대신 공소예절로 대치하고 교구장 두봉 주교를 포함한 전 사제단이 신자 800여 명과 함께 안동문화회관 내 동부동성당에서 합동미사를 봉헌했다. 당국의 인권 유린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두봉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법과 양심’을 주제로 강한 어조로 정부를 비판했다. 유신정권의 심기를 건드린 두봉 주교에게 엄청난 압박이 가해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이후로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던 1979년 5월 5일,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오원춘 분회장이 보안기관에게 납치돼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군청에서 농민들에게 보급한 감자종자가 불량인 것이 대대적으로 드러나면서 이 사실에 항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농민회 임원이 농민을 위해 나섰다는 이유로 영양군 버스정류장 인근에서 납치돼 포항과 울릉도로 끌려가 모진 일을 당한 것이다. 두봉 주교는 즉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정부의 탄압에 항거하는 전국 특별기도회를 시작했다. 기도회에 참석했던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강조한 “이 땅에서 민주주의를 행하는 것” 바로 그것이 두봉 주교가 꿈꾸던 ‘진정한 한국의 미래’였다. 유신정권은 1979년 8월 18일 두봉 주교에게 ‘자진출국’할 것을 명령했으나 그는 이를 당당하게 거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26일, 민주주의를 행하지 않았던 유신정권은 스스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 소탈했던 삶, 넘쳤던 한국 사랑 6·25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 땅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한 그는 안동교구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이 땅의 사회·문화 발전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회적 약자와 농민을 위한 돌봄 시설과 기관 설립이 이어졌다. 한센병 환자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한 그는 1973년 경북 영주시에 ‘다미안 의원’을 개원하게 했다. 1978년에는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가 창립해 가난한 농민들이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나섰다. 미래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1969년 상지여자실업고등전문학교가 설립됐으며 이는 현재 가톨릭상지대학교의 발판이 됐다. 신자와 지역민을 위한 문화 사업을 위해 1973년 안동문화회관을 설립해 지역 문화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일평생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목활동에 매진했던 그의 삶은 ‘소탈’ 그 자체였다. 1990년 은퇴 후 경기도 행주공소에서 지내던 그는 현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의 간곡한 요청으로 2004년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에 자리잡았다. 소박한 텃밭을 일구며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던 그에게 ‘신자·비신자’라는 구별은 없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밝은 표정으로 대하며 진심을 주고받았다. 안동교구의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령의 몸을 이끌고 참석해 농민들과 함께 꽹과리를 치며 즐기는 등 소탈한 모습으로 모든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고마운 일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우리 모두는 항상 빛나는 존재입니다. 항상 떳떳하십시오.” (2023년 사제서품 70주년을 맞으며 본지와 나눈 인터뷰 대화 중) ◆ 두봉 주교 약력 ◆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출생 1947년 4월 20일 오를레앙시 쌩끄로아 고등학교 졸업 1949년 6월 오를레앙 대신학교 철학과 졸업 1950년 파리외방전교회 가입 1951년 6월 파리외방전교회 대신학교 신학과 졸업 1953년 6월 29일 사제서품 1954년 6월 로마 그레고리안 대신학교 대학원 신학과 졸업 1954년 12월 19일 ~ 1955년 5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신부 1955년 5월 ~ 1965년 5월 대전 대흥동본당 보좌 신부 1965년 5월 ~1967년 8월 대전교구청 상서국, 상서국장 신부 1967년 9월 ~ 1969년 6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신부 1969년 5월 29일 교황 바오로 6세 명에 의해 제1대 안동교구장으로 임명 1969년 7월 25일 주교수품 및 교구장 착좌식 1970년 10월 ~ 1984년 11월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장 1981년 10월 ~ 1984년 11월 주교회의 사목주교위원회 위원장 1984년 11월 ~ 1990년 주교회의 사목주교위원회 위원 1985년 10월 ~ 1990년 주교회의 교리주교위원회 위원 1987년 11월 ~ 1990년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장 1990년 10월 6일 안동교구장 사임, 은퇴 1990년 12월 2일 안동교구장 이임 2025년 4월 10일 선종

2025-04-15

부산 석포본당, 어르신 지킴이 ‘수호천사 봉사대’ 발대식

“어르신 신자들의 안전, 수호천사 봉사대가 지켜드립니다.” 부산교구 석포본당(주임 김현 안셀모 신부)은 4월 6일 성당에서 본당 위기대응팀 ‘수호천사 봉사대’ 발대식을 열었다. 수호천사 봉사대는 본당 신자들 중 의료계, 사회복지, 경찰공무원 등 직업상 연관성이 있는 봉사자 11명이 참여해 운영된다. 고령의 신자들에게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 위험 상황에 대처하고 성당과 주변 각종 시설들을 점검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또 긴박한 사고에 빠르게 대응하고 119 구조대가 도착하니 전에 응급조치해 인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본당이 수호천사 봉사대를 출범시키기로 한 것은 성당 안팎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르신 신자들의 안전사고를 예방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다수가 고령으로 지병이나 안전사고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데다 지역적 특성상 성당이 가파른 언덕에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미사 전후 이동을 위해 어르신 신자들이 승합차를 이용하고 있지만 승하차할 때 낙상 등 안전사고 위험성도 있다. 수호천사 봉사대는 위기대응 상황에 따른 매뉴얼을 만들고 심폐소생술과 재해 예방교육을 실시하는 등 준비 단계를 마쳤으며 응급의약품과 제세동기를 구비하는 등 필요한 장비도 준비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시범운영을 통해 미사 시간 전후로 주변을 살피며 위기상황에 대비하고 거동이 불편한 신자들을 부축하고 주차장에서 차량을 안내하는 등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쓰고 있다. 성당 근처에 있는 ‘라파엘 노인데이케어센터’(노인 주야간보호센터)와 비상연락망을 가동해 평일 안전사고 대책도 마련했다. 수호천사 봉사대 박태성(발렌티노) 단장은 “교우들이 보다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봉사대가 성당 전체에 작은 활력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현 신부는 “한국교회의 고령화율은 일반 사회보다 높아 어르신 신자들의 안전사고 위험도 높아지고 있다”며 “수호천사 봉사대가 우리 성당을 지키는 수호천사와 같은 역할로 안전과 신앙생활을 지키는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2025-04-09

고(故) 두봉 주교 빈소에 추모 발길 이어져

초대 안동교구장을 지낸 고(故) 두봉 주교(杜峰·프랑스명 René Dupont)의 선종 소식이 알려지면서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안동교구 신자들은 지구별로 빈소를 찾아 위령기도와 선종미사를 봉헌했다. 선종 다음날인 4월 11일부터 빈소를 방문한 교구 사제단과 신자들은 소박하고 가난한 교회를 표방하며 한국교회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고인이 하느님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전국 각 교구 사제단과 수도자들도 빈소에 속속 도착해 조문을 이어갔다. 고인의 장례미사는 4월 14일 오전 11시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다. 장지는 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성직자묘지(경북 예천군 지보면 암천리). 두봉 주교는 지난 4월 6일 뇌경색 증상으로 병원에서 시술을 받고 치료 중이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0일 오후 7시 47분 향년 96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6·25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 땅에서 70여 년간 사목활동을 이어온 고인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임하며 사회 정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평소에는 농민들과 함께하는 소탈한 모습으로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 왔다.

2025-04-11

초대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선종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한국 땅에 파견돼 경북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농민들과 희로애락을 나누고 소박한 삶을 함께하며 70여 년 사목 활동에 매진해온 참 목자가 주님 품에 안겼다. 초대 안동교구장을 지낸 두봉(杜峰·프랑스명 René Dupont) 주교가 4월 10일 오후 7시 47분 선종했다. 향년 96세. 고인은 지난 6일 뇌경색 증상을 보여 경북 안동의 병원에서 시술과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고인의 장례미사는 4월 14일 오전 11시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다. 장지는 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성직자묘지(경북 예천군 지보면 암천리).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3남2녀 중 차남으로 출생한 두봉 주교는 21세의 나이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했다.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1953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인 1954년 12월 한국에 입국했다. 대전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를 시작으로 1955~1967년 대전교구에서 사목했으며 1969년 7월 25일 주교품을 받았다. 1969~1990년 초대 안동교구장을 역임했으며 1990년 12월 퇴임했다. 지난 2019년 12월에는 특별귀화자로 선정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다. 두봉 주교는 9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도 경북 의성군의 공소에서 지역 신자들을 위해 미사를 주례하고 고해성사를 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안동교구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석해 지역 신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등 소탈한 모습으로 신자들에게 항상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목자였다. 또 두봉 주교는 가난한 교회를 표방하며 항상 사회적 약자들의 손을 잡고 사목활동을 펼쳐왔다. 안동교구장 재임 시절인 1973년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다미안 의원’이 경북 영주시에 개원했으며,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가 1978년 창립되기도 했다. 또 재임 시절 상지여자실업고등전문학교(현재의 가톨릭상지대학교), 안동 문화회관을 설립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교육·문화 사업에도 매진했다. 농민사목에 특히 노력을 기울여온 두봉 주교는 지난 1979년 농민들에게 불량 감자종자를 배급한 군청 측이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오원춘 분회장을 폭행하는 이른바 ‘오원춘 사건’이 나자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전국적인 기도회를 열었다. 농민의 앞에 서서 불의에 항거했던 두봉 주교는 이 일로 인해 당시 유신정권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는 등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사회 정의를 위한 사목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202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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