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26) 에드바르트 뭉크의 ‘골고타’

그림설명: ‘골고타’, 1900년, 캔버스에 유채, 80x120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2009년이 시작된 지가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석달째 접어들었다. 세월의 무상함이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왜 이렇게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새해를 맞이하며 다짐했던 각오들과 희망이 결국 작년과 마찬가지로 무너질 것이라는 비관 때문일 것이다. 매년 새해가 오면 무엇을 꼭 이루겠다든가 혹은 예기치 못한 행운이 내 가슴에 푹 안겨주길 막연히 바란다. 내 경우엔 점점 아이가 되는 지 나이를 먹을수록 새해에 희망하는 것이 많아지고 그만큼 절망적으로 우울하게 연말을 맞이한다.그런데 작년에는 내 생애에 있어 가장 예외적으로 연말연시를 맞이했다. 12월 중순 경만해도 무의미하게 한 해를 보낸 것 같아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었는데 마지막 달을 3~4일 남긴 어느 날 학교 교무처에서 전화가 와 내가 교육부분 최우수 교수로 뽑혔다는 것이다.이 상은 대학 자체 내에서 매년 교육과 연구에 있어 업적이 높은 교수를 선정해 주는 것이다. 평소 상과 무관하다고 생각해왔고 또한 어떤 상이든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냉소적인 면이 있었다. 그런데 올해 1월 2일 시무식을 겸해 막상 상을 받으니 학생들이 축하해주고 해서 기분이 그럴 듯하게 좋았다. 한편으로는 내가 원하는 것이 달리 있는 데 겨우 상하나 받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구나 싶어 서글프기도 했지만 어쨌든 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예기치 못한 행운이 나를 비켜만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두 달 넘게 지난 지금 시점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그냥저냥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별다른 불행이나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바라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그럼에도 마음 밑바닥에는 여전히 하느님의 은총이 불쑥 날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지워지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다. 누군가가 은총이 결국 눈총으로 바뀌더라는 우스갯소리도 했지만 새해에 희망하는 신의 은총은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20세기를 맞이하면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절망의 땅, ‘골고타’를 그렸다. 그 당시 20세기가 되면 19세기의 세기말적 불안과 갈등이 치유되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유토피아가 전개될 것이라는 희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런데 뭉크는 20세기에 그린 첫 작품 주제로 ‘골고타’를 선택했다. ‘골고타’에는 우울한 청색을 배경으로 노란 그리스도가 못 박혀 있고, 예수가 흘린 피는 구름이 되어 잿빛 하늘을 가로지른다. 화면 중앙에 못 박힌 예수의 수평과 수직의 반듯한 구성은 드라마틱하고 통렬한 죽음의 고통이나 애도를 느끼게 하지 않지만 중립적이며 엄격한 심리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수많은 사람들 위에 당당히 서 있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발밑의 사람들의 운명을 관할하는 통치자로 보인다. 그런데 발밑의 사람들은 예수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은 경배의 태도를 취하기는커녕 예수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다.모두 각자 자신의 운명이 신에게 달려있음을 모르는 듯하며 심지어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 모두 함께 모여 있지만 그들은 독립적이며 자신 옆에 누군가가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다. 뭉크는 현대인의 불안에 관심이 많았지만 현대인이라는 대중이 아니라 현대인 개인이 갖는 소외, 고독, 불안 심리에 관심을 가졌다. 화면 전경의 얼굴들은 뭉크 주변 사람들이다.화면의 가장 왼쪽 긴 턱수염 가진 노인은 뭉크의 예술세계를 이끈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화가이자 사상가였던 크리스티안 크로그(Christian Krohg, 1852~ 1925)이며, 십자가의 예수 바로 아래에 있는 남자는 폴란드 출신의 문학가 프비지셰프스키(Stanislaw Przybyzewski)이다.한때 뭉크는 그의 부인과 불륜관계에 있으면서 ‘질투’라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 옆에 창백한 옆얼굴의 미소년 같은 남자는 젊은 날의 뭉크 자신이다. 뭉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서 뭉크를 키워주었고 예술가의 길을 가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해 준 이모 카렌(Karen Bjolstad)이다.이모의 분위기는 뭉크를 불행으로 떠미는 사탄 같은 느낌을 준다. 뭉크는 사탄에 떠밀려 예술가가 된 자신과 사탄에 의해 죽음에 이른 예수를 동일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화면 전경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각자 혼자이며 각자 고통을 안고 있는 독립된 개체들로 표현되어 있다.서로 심리적인 교류 같은 것은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모두 타인의 위로가 되어 줄 만한 여유도 없고, 타인이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다는 것도 믿지 않기에 위로를 원하지도 않는다.당연히 군중은 십자가에 책형당한 예수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내 고통도 감당하기 힘든 마당에 타인의 고통에 무슨 관심을 가질 것이며, 누가 모함을 받든지 죽든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현대인의 무관심,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를 뭉크는 죽음과 절망의 땅, 골고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 21세기는 어떤 곳일까? 골고타, 혹은…?김현화(베로니카·숙대 미술사학과 교수) ◆ Tip뭉크의 그림을 접하면 앙리 마티스의 말이 함께 연상된다. ‘회화는 표현이다.’ 뭉크는 대담한 화면 구성과 강렬한 색채 대비 등으로 자신의 내면과 시대상 등을 폭발적으로 표현해왔다. 예를 들어 뭉크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도 그의 작품 ‘절규’는 잘 기억한다. 그만큼 강렬한 표현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9세기말 상징주의 미술의 결정판이자 20세기 독일 표현주의 화풍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뭉크 작품의 대표적인 주제는 ‘죽음’ ‘사랑’ ‘불안’ 등이었다. 뭉크는 자신을 일컬어 ‘요람에서부터 죽음을 안 사람’이라고 종종 말해왔다. 6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누이마저 잃었던 충격, 뿐만 아니라 신경질적인 아버지와 정신적으로 나약한 형제들의 모습은 그의 유년 시절을 더욱 어둡게 했다. 이 기억들은 작품에도 고스란히 투영된다. 때문에 사람들은 뭉크를 절망의 화가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그는 절망에서 멈추지 않았고,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그림으로써 끊임없는 생명을 갈구하고 희망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보인 작가로 평가받는다.뭉크가 남긴 작품 등을 가장 폭넓게 만나볼 수 있는 곳은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30여년의 시간을 오슬로 교외에서 지냈던 뭉크는 전 재산을 오슬로시에 기증했다. 그가 남긴 재산 중에는 회화 1100여 점과 4500여 점의 소묘와 수채화, 1만8000여 점의 판화와 조각 6점 등이 있었다. 또 각종 판화의 원판과 책, 사진 등의 자료들도 포함돼 있다. 그는 유언장에 그림을 팔지 말라는 뜻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유산으로 미술관이 세워지길 바랐다. 뭉크 미술관은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에 문을 열었다.

발행일 2009-03-15 제2639호 18면

[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25) 로렌초 로토의 ‘성 크리스토포로와 두 성인’

“아기 예수님을 어깨에 짊어진 거인”탁월한 회화적 감각으로 인체와 자연을 묘사성 크리스토포로는 여행·순례자의 수호성인 성 크리스토포로에 관한 전설 성화 중에 가끔 중년의 거인이 어깨에 아기를 메고 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가 바로 뱃사공, 순례자, 여행자의 수호성인 성 크리스토포로(San Cristoforo)다. 성 크리스토포로는 순례 여행이 많았던 과거에도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많이 받았지만 현대에 들어서 여행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금 인기를 얻고 있다.전승에 따르면 크리스토포로는 일반인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키가 컸던 거인으로서 원래의 이름은 레프로보였지만 세례를 받은 후 크리스토포로로 불리었으며 이는 예수님의 운반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성 크리스토포로는 갑작스런 죽음에서 보호해주는 성인으로도 여겨져서 누구든지 성인의 그림을 본 사람은 당일에는 사망하지 않는다는 설로 인해 서양에서는 교회나 건물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이 성인을 그려놓곤 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그는 신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성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그는 3세기에 중앙 아시아에서 활동했으며, 리치아(Lycia)에서 순교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성인에 대한 이야기의 출처는 13세기 제노바의 한 수도자에 의해 쓰여진 ‘황금전설’이다. 성 크리스토포로가 키가 열두 척이나 되는 거인이었고, 생김새 또한 무시무시했다는 전설은 모두 이 책에서 유래한다. 황금전설에 따르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권세가 큰 통치자 밑에서 봉사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여겨진 왕에게 봉사하는 일을 시작했으나 왕보다 악마가 더 센 것으로 생각이 되자 이번에는 악마에게 봉사를 하는 것으로 자신의 주인을 바꾸었다. 마지막으로 악마가 십자가를 보자 도망치는 것을 보고는 예수 그리스도가 악마보다도 더 세다고 생각하여 오랫동안 그리스도를 찾아 헤매던 중 한 은수자를 만나 그리스도교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은수자는 “사람들이 강을 건너다가 자주 빠져죽는데 키가 큰 네가 사람들을 도와주면 그리스도가 대단히 좋아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존재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크리스토포로는 강 근처에 오두막 하나를 지어놓고 나무의 몸통으로 지팡이를 만들고는 이때부터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강을 건너게 해달라는 소리가 들려 나와 보니 한 아기가 있었다. 크리스토포로는 그 아기를 어깨에 메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가 점점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하더니 건널수록 물살이 세지고 위험해지는 것이 아닌가. 거인 크리스토포로는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네가 너무 무거워서 마치 온 세상을 짊어진 것 같구나.” “두려워 말라. 너는 세상뿐만 아니라 세상의 창조자를 짊어지고 있느니라.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아이의 말이 이어졌다.“강을 건너거든 네 지팡이를 땅에 심거라. 그리하면 내일 아침에 거기서 꽃이 피어난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내가 그리스도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아이가 말한 대로 했더니 다음날 과연 예언대로 이루어졌다. 이후 크리스토포로는 그리스도교 교인이 되어 리치아로 건너가 열심히 전교하며 지내다가 마침내 체포되어 우상숭배를 강요받았으나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이교도의 왕은 크리스토포로에게 화살을 쏘아 죽이라는 명을 내렸으나 그가 화살에 맞아도 죽지 않자 마침내 참수 당하여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로토의 성 크리스토포로 16세기 베네치아의 화가 로렌초 로토의 이 그림은 크리스토포로 성인의 특징을 참 잘 보여주고 있다. 높이가 3미터에 가까운 이 대작에 세 명의 성인이 그려졌다. 중앙에 아기를 어깨에 얹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강을 건너고 있는 사람이 성 크리스토포로이다. 아기는 운동장처럼 넓은 거인의 어깨에서 뭔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거인이라는 사실은 옆의 두 성인이 아이처럼 작게 그려진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세 성인은 각자 지팡이를 짚고 있거나 나무에 묶여 있는데, 지팡이의 크기만 비교해 보아도 성 크리스토포로가 얼마나 거인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로토는 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베네치아 최고의 거장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작품에서도 인체에 대한 묘사, 색상의 표현, 하늘, 물과 같은 자연 묘사는 이 화가가 더 이상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성 크리스토포로를 두른 붉은 천은 화면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화가의 탁월한 회화적 감각은 감상자로 하여금 감탄사를 아낄 수 없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고종희(마리아·한양여대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교수) Tip로렌초 로토는 작품 ‘성모영보’를 통해 만나본 바 있다. 로토에 대해 조금 더 소개를 덧붙이자면 초상화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회화 장르 중 초상화는 오래 전부터 권력자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거나 부자들이 재력을 뽐내기 좋은 수단이었다. 또 어떤 화가가 초상화를 그렸느냐는 권력의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로토와 동시대를 살았던 티치아노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화가였다. 때문에 황제나 교황들도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티치아노 못지않게 당대의 인물들을 캔버스에 생생하게 남겨 둔 이가 바로 로토다. 고종희 교수는 이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이 21세기에 태어났다면 아마 사진사라는 직업을 가장 많이 선택했을 것이라고 말한다.로토는 이탈리아 최초의 사진사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당대의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티치아노의 그늘에 가려진 로토는 유명 인물보다 지역의 지주 등을 주로 그렸다.빛의 효과를 한껏 활용해 일반 시민들의 내면의 심리와 욕망까지도 신비스럽게 재현한 로토는 영혼을 살아 숨 쉬게 만든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인물의 모습을 사진처럼 정밀하게 포착했던 그는 특유의 통찰력으로 15세기 화가들이 시작한 자연주의를 완벽의 단계까지 끌어올렸다. 작품설명‘성 크리스토포로와 두 성인’, 로렌초 로토, 1535년 경, 275 x 233 cm, 로레토, 교황 대리구 산타 카사.

입력일 2009-02-08

[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24) 칸딘스키의 ‘최후의 심판’

“때로는 침묵이 더 많은 얘기를 한다” 선적 율동과 자유로운 색채로 ‘최후의 심판’ 재현추상적 표현은 관람자에 무한한 해석의 자유 선사 얼마 전 수업 시간 중 잠깐의 휴식 시간에 학생들과 가벼운 얘기를 나눴는데, 어느 학생이 자신의 친구가 나를 보았는데 ‘눈빛이 너무 강렬하다’면서 호들갑을 떨며 말하더라고 전했다. 한 10년 전만 해도 가끔씩 ‘눈이 반짝 거린다’거나 ‘눈이 빛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제 나이를 먹으니 내면이 억세져 ‘강렬하다’는 말을 듣게 된 것 같아 그다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세월 따라 좋은 경험, 나쁜 경험, 억울하고 한스러운 순간들이 가슴 속에 차곡차곡 포개지면서 사람은 강해지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 경우에는 성격이 급한 편이고 자제력이 약해서 지금도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품기보다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바깥으로 폭발시켜 버리는 편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인지 약간의 변화가 오는 것 같다. 주변 사람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입 밖으로 쏟아내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지기 보다는 오히려 후회가 되고 기분이 언짢다. ‘침묵이 금’이라는 격언이 이래서 생겼나 보다. 주변을 보면 말이 많고 수다스러운 사람보다 말없고 냉소적인 사람이 강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20세기 초, 대표적인 화가 칸딘스키는 ‘침묵이 다변보다 더 많은 얘기를 한다’고 주장하며 추상미술을 탄생시켰다. 구상미술은 형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지시하지만, 추상미술은 원, 삼각형, 사각형 등의 형태 안에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수 세기 전 조토, 미켈란젤로 등이 그린 ‘최후의 심판’을 칸딘스키는 추상으로 재현하였다. 그의 ‘최후의 심판’에는 절대자인 하느님, 나팔을 부는 천사, 심판의 두려움에 아우성치는 인간 등 구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어떤 형상도 없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극적인 사건에 대한 두려움의 전율이 온몸을 휘감는 듯 한 긴장감, 장엄함, 절망, 공포, 두려움 등을 느낄 수가 없다.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경쾌하고 율동적이다. 여기에는 선적 율동과 자유로운 색채 구성만이 있을 뿐이다. 선과 색의 만남과 충돌 그리고 조화의 구성이 이야기적 서술성을 제거하고 있다. 칸딘스키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미켈란젤로, 조토 등 옛 거장들이 성경의 내용에 충실하고자 했다면 칸딘스키는 애초부터 성경이나 예수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모른다. 설령 성경 말씀에 관심이 있었다 할지라도 성경의 이야기를 재현할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구상적 형상으로 재현된 ‘최후의 심판’을 보면 그 그림이 제시하는 장면 이외의 것을 상상하는 데 구속을 받는다. 그러나 칸딘스키의 추상화된 ‘최후의 심판’을 볼 때는 무한히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다. 최후의 심판을 굳이 성경의 구절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매순간 느끼는 위기가 바로 최후의 심판이 아닐까. 칸딘스키는 관람자가 추상적으로 표현된 최후의 심판을 보고 해석의 무한한 자유를 갖도록 만든다. 즉 성경의 말씀을 떠올려도 좋고 다른 것을 상상해도 무방하다. 칸딘스키의 선과 색채의 자율성은 회화를 무한히 자유롭게 했다. 칸딘스키는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나 문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회화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구상적인 형상을 물질적이라 주장했고, 추상적인 형태는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형태요소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므로 구상적 형태의 파괴는 필수적이다. 그는 ‘재앙은 성자처럼 찬양 된다’라고 주장하며 구상적 형태를 파괴하고 인간 정신을 표현하는 추상이라는 새로운 회화의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딘스키는 회화가 자연을 재현하는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의 회화는 누군가의 얼굴을 담고, 자연의 어느 한 부분을 담았다. 마치 회화는 자연을 비추는 거울과 같았다. 그러나 추상회화의 등장으로 회화는 자연의 종속에서 해방되게 된다. 회화는 더 이상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며 신화나 전설, 성경 등의 문학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도 아니다. 회화는 회화일 뿐이다. 다시 말해 회화는 성경이나 문학적인 내용을 전달하거나 자연을 재현하는 역할을 하는 부차적인 존재가 아니라 회화는 회화로서 완벽한 독립된 세계라는 것이다. 회화는 자연과 동등한 독립된 세계다. 회화는 수다스러운 이야기의 서술이 아니라 무언의 침묵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말 없는 시선이 얼마나 풍요로운 감정과 언어를 담고 있는가. 그는 추상미술의 근간이 되는 기하학을 가장 침묵하는 형태라고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라오콘에 의하면 사과는 얼마나 조용하며 한 개의 원은 더욱 조용하다. (…) 침묵이 수다보다 훨씬 더 다변이고 무언이 말을 막힘없이 시원스럽게 하는 웅변보다 낫다’ 김현화(베로니카·숙대 미술사학과 교수) Tip 바실리 칸딘스키. 그는 현대미술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꼭 만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지난해 2~3월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칸딘스키-러시아 거장전’이 열렸다. 거장전이라고 기대한 것에 비해 전시 동선이나 환경이 미흡했지만, 대중들이 회화에 관심을 갖는 기회를 제공하는 자리라는데 의미를 두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김연아 선수 덕분에 비인기 종목에 가까웠던 피겨스케이팅의 인기가 급상승한 것과 비슷한 효과라고 할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다양하게 열리는 유명 작가전의 일차적 역할이 그러할 것이다. 현대 추상미술의 스타는 단연 칸딘스키다. 러시아 출신 프랑스 화가인 칸딘스키는 앞날이 보장된 법학교수직을 포기하고 미술에 입문했다. 30세 늦깎이 나이였다. 인상파 전시회에서 모네 그림에 매료된 것이 그 계기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칸딘스키가 추상회화를 탄생시킨 일화도 유명하다. 칸딘스키는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와 작업실로 들어서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 한 점을 본다. 도대체 누가 저 그림을 그렸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와 살펴보았더니 자신이 외출하기 직전 그렸던 그림이었다. 누군가가 그림을 거꾸로 벽에 세워두었던 것이다. 거꾸로 보인 그림에서는 자연의 외형과는 관계없는 선과 색, 형태의 조화와 구성 그리고 감동이 있었다. 이후 활동은 칸딘스키를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우뚝 서게 했다. 그는 추상미술의 이론적 근거를 세우고 추상미술과 관련한 필독서이자 영원한 고전이 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라는 저서 등도 집필했다. 대개 추상회화는 어렵다고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이 많은데, 추상회화에 있어서는 작가도 관람객들도 그림 자체도 자유롭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림설명칸딘스키, '최후의 심판', 1912, 유리에 먹과 수채, 33.6 x 45.3, 국립현대미술관, 파리.

입력일 2009-01-18

[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23) 라파엘로 산치오의 ‘풀밭의 성 모자와 아기 세례자 요한’

“치열한 습작 끝에 얻어낸 자연스러움” 각 인물들 확실한 데생에 의해 정교하게 표현라파엘로, 소묘 중심의 로마-피렌체 화풍 창시 사랑스런 두 아기가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고, 여인은 그윽한 모습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성모님과 아기 예수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다. 우리가 흔히 보아 왔던 이런 성화에 대해서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것은 곤욕스러운 일이다. 특별한 이야기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형태가 특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평범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점이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이룩한 가장 큰 공로이자 르네상스 회화가 달성한 위대한 업적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주인공은 바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와 더불어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다. 작품의 구도는 세 개의 꼭지점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형태다. 위쪽의 꼭지점에는 성모님의 머리가 있고 오른쪽 꼭지점에는 성모님의 발이, 그리고 왼쪽에는 세례자 요한이 자리 잡고 있다. 세 사람의 자세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관람자는 굳이 구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이토록 안정되고 평화롭게 보이는 데에는 삼각형 구도가 밑받침되고 있기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인물들 상호 간의 자연스러운 관계다. 성모님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었음직한 아기 예수를 양팔로 조심스럽게 받치고 있다. 엄마의 부축을 받고 있는 아기 예수는 몇 달 먼저 세상에 나온 덕분에 제법 의젓해 보이기까지 하는 세례자 요한이 들고 있는 십자가를 덥석 잡고 있다. 요한은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하고 있으며, 아기 예수는 축성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인물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가운데서도 분명 위계질서가 있어 보인다. 아이들을 자연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성모님은 한편으로는 아기를 보호하려는 듯이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먼 훗날 이들의 운명을 알고 있는 듯한 단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는 개인적으로는 한 아기의 어머니이지만 공적으로는 죄 많은 인간을 위해 대신 돌아가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만인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흐트러짐도 없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 속에는 이 같은 복합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들 세 인물이 자리를 잡고 있는 배경은 넓은 초원이 끝없이 펼쳐지는 대지로서 지평선 너머에는 호수가 평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다. 공간처리 역시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이 같은 공간을 그리기 위하여 화가들이 수세기에 걸쳐 시행착오를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처럼 각 인물들은 드넓은 자연을 배경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확실한 데생에 의해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이것이 바로 색채 중심의 베네치아 화풍과 대조를 이루는 소묘 중심의 로마-피렌체 화풍으로,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이 화풍의 창시자다. 라파엘로는 이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습작을 남겼다. 아기 예수를 비롯하여 각 인물들의 자세를 다양하게 변화시켜 보았는가 하면 옷 주름 연습도 수 없이 하였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단숨에 그렸을 것만 같은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수없이 많은 연습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흡사 명배우의 명연기가 피나는 연습을 통해 탄생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라파엘로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그가 피렌체에 도착한 지 2년 쯤 지난 1506년으로 나이는 스물세 살쯤 되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대형 이벤트가 두 개쯤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고향을 떠났던 레오나르도가 돌아와서 미켈란젤로와 함께 시청 건물의 벽에 대형 벽화를 그리는 경합을 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레오나르도가 현재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성모자와 성 안나라는 유명한 스케치 밑그림을 일반인에게 공개한 사건이었다. 이 두 사건은 세기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물론 젊은 화가들에게 이들 대가들의 회화방식을 모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르비노라는 작은 도시에서 피렌체라는 르네상스 중심지로 유학을 온 라파엘로는 한낱 시골 청년에 불과할 뿐 감히 이들 대가들과 겨룬다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피렌체에서 대가들의 화법을 자신의 회화에 적용시켜 다양한 시도들을 해보았으며, 소시민들의 주문을 받아서 이 작품과 같은 작은 성모자상 그림들을 꾸준히 그려주었다. 이 시기에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자 상은 상당수에 이른다. 붙임성 있고 성실하였던 이 애송이 화가는 드디어 2년 후에는 동향 사람이자 로마의 성 베드도 성당의 설계자였던 브라만테에게 발탁되어 바티칸에 입성하여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된다. 바티칸에 입장하면 관람객을 위한 표지판이 곳곳에서 눈에 띠는데 결국 두 곳을 가리킨다.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가 있는 “시스티나 경당”이고, 다른 하나는 “라파엘로의 방”인데 바로 이들 방에 라파엘로의 벽화들이 남아 있다. 천재 화가란 때로 이 작품이 보여준 것처럼 평범함 속에 깊은 뜻을 담을 줄 아는 화가임을 라파엘로는 일찍이 보여준 셈이다. 고종희(마리아·한양여대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교수) Tip 지난 성탄, 아기 예수 곁에서 가장 인기를 누린 조연을 꼽으라면? 천사 가브리엘을 비롯한 수많은 천사들이 아닐까 싶다. 이 천사들은 수많은 성미술 작품 중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은 장면에서 유독 많이 등장해왔다. 그렇다면 서양미술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천사는 누구일까? 단연 라파엘로의 작품 ‘시스티나의 마돈나’에 그려진 두 명의 아기 천사가 꼽힌다.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표정이 특징인 이 천사들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화가 라파엘로를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라파엘로는 수많은 평론가들로부터 ‘일찍이 하늘이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고귀한 재능과 무한한 부를 받은 한 사람’이라고 불린 바 있다. 그만큼 뛰어난 예술적 솜씨를 쏟아냈고 그에 따라 풍요로운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또 미술사는 그를 일컬어 고대의 지식과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결합해 르네상스 예술의 정수를 창조한 화가라로 기록한다. 라파엘로는 초기 활동 무렵부터 수많은 제단화와 더불어 성모의 모습을 많이 그린 작가로 알려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는 피렌체로 이주한 이후부터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담은 작품을 더욱 다채롭게 내놓았다. 때문에 그를 ‘성모 화가’라고 부르는 이들도 많다. 성모자와 세례자 요한을 그린 작품은 이번 호에 소개된 작품 외에도 여러 점이 눈에 띈다. 그 중 ‘검은 방울새의 성모’는 지난해 10월,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에게 나타났다. 작품이 걸려있던 저택이 무너지면서 17조각으로 갈라졌던 이 작품은 10년간의 복원 작업을 통해 세월의 때와 미숙한 보수작업의 흔적을 씻어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된 ‘성모자와 아기 성요한’도 ‘풀밭의…’와 유사한 풍경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꽃피는 초원에 앉으려는 성모의 아름다움 덕분에 ‘아름다운 여정원사’라는 부제를 얻기도 했다.

입력일 2009-01-04

[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22) 조토 디 본도네의 '탄생'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 맑은 눈의 황소(현명함)와 다른 곳 보는 당나귀(무지) 비유적으로 묘사예수님 탄생 충실히 재현… 수난과 죽음, 교회 설립을 상징적으로 표현 얼마 전 패밀리레스토랑에 갔더니 남녀 대학생이 무리를 지어 앉아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큰소리로 떠들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한마디 할 수도 있었겠지만 생일파티라는 것이 떠들썩함을 충분히 이해하게 했다. 사람은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태어나는데 왜 그렇게 생일을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것일까. 조카가 5~6살 때 새해 달력에 제일 먼저 자기 생일을 표시하며 몇 번이나 생일을 강조해서 한참 웃은 기억이 있다. 부모 입장에서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사로 아이를 낳았으니 당연히 기쁘고 축하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에게 생일이 즐겁다는 것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 역시 한 세상 살아간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만한 나이인데도 생일에는 항상 마음이 들뜨면서 누군가의 축하를 받고 싶다. 그렇지 못하면 내가 여기저기 전화하면서 초대라는 명목으로 같이 식사할 사람을 찾기도 한다. 왜 그럴까. 때때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하고 때로는 왜 좀 더 멋있는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 못했는지 한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왜 막상 생일이 오면 자축하고 싶어질까. 생일이 7월인데 지금 벌써 생일에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 걱정 같지도 않은 걱정을 하며 적당한 레스토랑을 찾느라 머리를 굴려 보기도 한다. 12월은 예수께서 태어난 달이다. 그리스도교 교인에게만 즐거운 날이 아니라 무신론자, 타 종교인들에게까지 12월은 들뜨는 날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고 축하하는 그리스도의 생일이지만 그분의 일생은 그렇게 소란스럽게 축하받을 만큼 멋있지 않았다. 차라리 참혹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마구간에서 태어나 한순간도 영화를 누려 보지 못했고 더구나 모함을 받아 33살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이렇게 살다 죽었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생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의지의 선택이나 노력의 결과일까? 아니면 신의 뜻일까? 언제나 의문이다. 예수의 생을 보면 분명 하느님의 계획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이 다가왔을 때 피하지 않았고 순명으로 받아들였다. ‘하느님의 계획’이란 말을 보통 사람에게 적용하면 ‘운명’이란 용어가 될 것이다. 흔히들 사람은 태어날 때 자기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한편에서는 노력하면 모두 극복할 수 있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생에는 분명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미묘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다복과 박복, 행과 불행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 화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탄생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께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겪을 수난과 죽음 그리고 교회의 설립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탄생’을 보면 마리아가 당나귀와 황소가 있는 마구간에 마련된 초라한 나무 구유 위에서 낳은 아들 예수를 산파에게서 건네받고 있다(혹은 건네주고 있다). 마구간 밖의 하늘에는 천사가 예수 탄생을 알리며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 하며 찬양하고 있고 목자들은 놀라워하며 이 경이로운 장면을 보고 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누워있는 나무로 된 구유는 예수가 훗날 짊어지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게 될 십자가가 될 것이다. 황소와 당나귀는 예수가 탄생된 곳이 마구간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요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깨어있는 자와 깨어있지 못한 자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황소는 맑은 눈을 크게 뜨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당나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황소는 현명함을, 당나귀는 무지를 의미한다.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는 결국 죄를 낳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친 군중은 악한 자가 아니라 무지한 자다. 양과 염소는 옆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목자라는 것을 의미적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검은 염소 한 마리가 흰 양들 사이에 끼어 있는 모습이 뭔가 의문을 품게 만든다. 예수는 최후의 심판 날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세울 것이다” 하면서 흰 양은 선을, 검은 염소는 악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조토의 그림에 표현된 양과 염소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최후의 심판으로 우리를 지옥과 천국으로 가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분은 교회 설립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다. ‘탄생’의 전체적인 배경이 되고 있는 바위는 베드로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상징한다. 예수의 탄생이 교회가 된 것이다. 성탄절에 교회를 가야 될 이유를 조토가 보여주고 있다. 김현화(베로니카·숙대 미술사학과 교수) Tip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 혹은 근현대의 예술 작품을 감상하려면 미술관을 찾아가면 된다. 하지만 중세 시대 예술은 대부분 성당에서 더욱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서 중세시대 화가의 작품을 만나는 즐거움은 더욱 크다. 조토는 중세미술의 마지막 시기를 넘어 초기 르네상스의 싹을 틔운 작가로 ‘쉽게 보는 교회미술 산책’에서도 스크로베니 소성당 벽화를 통해 만나본 바 있다. 그도 당대 유명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비롯해 많은 성당의 벽화와 제단화 등을 제작했다. 성당이 아닌 미술관 중 조토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으로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꼽힌다. 미술관 내 ‘13세기와 조토’ 전시실에서는 조토가 제단화로 그린 템페라화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이번호에서 만나본 조토의 작품 ‘탄생’은 세계 4대 미술관 중 하나인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유럽의 대형 미술관들처럼 오랜 역사 등을 자랑하진 않지만, 동서고금과 지역을 막론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때문에 이 미술관은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에서 나온 예술을 한번에 보여주는 백과사전과 같은 공간이라고도 불린다. 전시 공간은 약 20만㎡ 규모로 중세미술만을 따로 전시하는 분관도 갖추고 있다. 기금을 통한 구입과 기증 등이 늘면서 현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330만점을 훌쩍 넘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림설명조토, '탄생', 1320, 나무 위에 템페라, 45.1 x 43.8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입력일 2008-12-21

[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21) 미켈란젤로의 ‘사울의 개종’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바티칸 바오로 경당에 그려진 미켈렌젤로의 벽화갑자기 하늘서 빛이 비쳐 눈이 멀게 된 사울 묘사 얼마 전 작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세상을 떠나시기 한 달 전 즈음 우리 부부는 작은댁으로 문병을 갔다. 그날 작은 아버지는 우리의 방문을 받고 기쁜 표정으로 맞아 주셨고 안방에서 거실까지 그 짧은 거리를 힘겹게 걸어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셨다. 작은 아버지는 그 때까지만 해도 신자가 아니셨으나 작은 어머니로부터 친구들 중에 신자들이 많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은 아버지 세례를 받으시면 참 좋아요. 지금까지 지은 죄도 다 용서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도 영원히 사실 수가 있데요.” 작은 아버지는 겨우 들릴까 말까한 목소리로 “글쎄 세례를 받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말씀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3주가 넘는 긴 출장을 가게 되었고, 돌아오던 날 오후 작은 아버지께서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번 더 못 찾아뵈었다는 슬픔이 컸고 자책하는 마음으로 병원을 향했다. 그리고 영정 사진 앞에서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발견했다. “아! 세례를 받으셨구나!” 나는 그 사이에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고 슬픔은 컸으나 은총을 베풀어주신 주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한 영혼이 생의 마지막에 주님을 알고 떠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복된 일이 있을까 싶었다. 작은 아버지가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두 분의 수녀님과 한 분의 신부님이 계신 며느리 집안의 신앙의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때로 신앙인들이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끝난다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일까?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의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이고 위안인 것 같다. 금년은 바오로 성인의 해이다. 올해도 한 달 만을 남겨둔 지금 바오로 성인을 생각하며 잠시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바오로 성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며 오늘날 터키에 속하는 다르소 출신이다. 그는 예수님의 사후 그리스도 교인들을 박해하는 악명 높은 앞잡이로서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하였고, 성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순교 당할 때에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악명 높은 그리스도교의 박해자 사울이 그리스도교의 열렬한 전도자 바오로로 변신하게 된 경위는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사울에게도 엄청난 은총이 찾아온다.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췄다. 사울은 땅에 엎어졌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줄 것이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커스로 데려갔다. 그는 삼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기도를 바쳤다. 다마스커스에 아나니아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있었는데 주님께서 그를 부르셨다. “일어나 거리로 가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아라. 그는 나를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있는 곳으로 길을 나섰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볼 수 있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눈에 손을 얹으니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며 시력을 회복했고, 세례를 받았다. 이후부터 그는 사울이 아니라 바오로가 되었으며 그의 열정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쓰였다. 그는 3년간 광야에서 성서를 읽고 묵상을 하면서 사도직을 준비하였다. 이후 가는 곳마다 신자들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명하였다. 바오로 성인은 이후 온갖 고초를 겪으며 세 차례의 험난한 전도여행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만들고, 사람들을 그리스도 교인으로 개종시켰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청 내 바오로 경당(Capella Paolina)에 ‘사울의 개종’을 남겼다. 이 그림은 성 바오로가 다마스커스로 말을 타고 병사들과 가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그를 비추어 사울이 땅에 엎어지고 눈이 멀게 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바오로의 주변에는 동행한 병사들이 있는데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나뒹굴고 있다. 바오로의 감긴 눈이 떠지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듯 우리도 마음의 닫힌 눈을 떠서 은총을 받고 싶은 마음, 이 해를 보내며 더욱 간절해진다. 고종희(마리아·한양여대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교수) Tip 장장 10년여에 걸쳐 시스티나 경당 수선·복구를 마쳤던 교황청은 2004년, 성 바오로 경당과 프레스코화 ‘사울의 개종’, ‘성베드로의 순교’ 등의 복구 작업을 돌입했다. 성바오로 경당은 교황이 사적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공간으로, 매년 수백만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오가는 시스티나 경당과 달리 일반 신자들에게는 개방되지 않는다. 1537~1540년에 세워진 경당은 한때는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 장소로도 이용된 바 있다. 미켈란젤로는 1542년 교황 바오로 3세의 요청에 따라 경당 내에 두개의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즈음 미켈란젤로는 로마 캄피돌리오 광장과 성베드로 대성당의 둥근 지붕 등을 위한 설계 계획에도 바빴고, 작품 제작 도중에는 지병으로 인한 어려움도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돌입한 미켈란젤로는 8년에 걸쳐 벽화를 완성했다. 당시 그의 나이 75세로, ‘사울의 개종’은 그의 마지막 프레스코화 작품이 됐다. 예수님이 원근법에 의해 그려지고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이 작품의 형태는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와 유사하다. 천재적인 조각가이자 건축가, 화가였던 미켈란젤로는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 설계 등을 비롯해 시스티나·성바오로 경당 내에 역작들을 남겼다. ‘쉽게 보는 교회미술’에서 소개된 바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 창조’를 비롯해 벽화 ‘최후의 만찬’, 성베드로 대성당에 놓인 ‘피에타’ 등 역사상 대작으로 평가되는 작품들이 모두 미켈란젤로의 것이다. 500점에 이르는 데생을 포함한 그의 역작들과 그가 남긴 시, 글 등은 동시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림설명미켈란젤로, 사울의 개종(부분), 1542-45, 625x661cm, 프레스코 벽화, 바티칸, 성 바오로 경당

입력일 2008-12-07

[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20) 이탈리아 화가 조토 디 본도네의 ‘최후의 심판’

‘바늘 귀 통과해 천국에 이르는 길?’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들의 천국·지옥행 묘사하단부엔 마리아께 성당 봉헌하는 엔리코 그려넣어 며칠 전 오전 수업을 마치고 박사 과정의 학생들과 점심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학생이라고 하지만 박사 과정에 있으니 30대 초반에서 마흔살 정도의 나이에 아이를 하나 혹은 둘 둔 엄마들이다. 자연히 아이들 교육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엄청난 돈을 지불해 가며 사교육을 시키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아이가 명문대학에 입학하거나 의사나 변호사 등의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갖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제자들 말에 의하면 그런 간절한 소망은 요즈음 돌날 상차림에서부터 나타난다고 한다. 옛날에는 돌상 위에 (부를 상징하는) 돈, (장수를 상징하는) 실, (학문을 의미하는) 연필을 놓았지만 지금은 청진기, 컴퓨터 마우스, 법률책, 골프공 등 구체적으로 직업을 나타내는 물건을 놓는다고 한다. 아이가 청진기를 집으면 장래 의사가 될 것이고, 법률책을 집으면 변호사나 판사, 컴퓨터 마우스를 집으면 빌 게이츠 같은 인물이 되어 엄청난 거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것은 진즉에 알았지만 정말 놀랍다. 20~30년 전만 해는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자신의 힘으로 생을 개척하는 강한 독립심이 미덕이었고, ‘청빈’이란 단어는 고결함과 숭고함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어떤 수단으로서든지 일단 부자만 되면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사람을 만나면, ‘어느 동네에 사는지’, ‘아파트의 면적은 어느 정도인지’, 심지어 아파트 층수를 묻기도 한다. 인기 층과 비인기 층의 가격 차이 때문인 것 같다. 가까운 지인들을 만나 가벼운 식사나 차를 마실 때도 세계경제사정에 관한 얘기를 나누게 되고, 대화의 마무리는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손해를 보았거나 혹은 이윤을 얻었다는 개인적인 경험담으로 끝난다. 돈이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허공을 맴돌 뿐이다. 돈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고 죽어서도 천국행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처럼 돈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돈이 현세에서의 행복뿐 아니라 사후에서의 행복도 보장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은 이미 오래전 1300년대에도 팽배해 있었다. 이탈리아의 화가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는 1305년에 파도바에 있는 아레나 소성당에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아레나 소성당은 그 당시 베네치아 근처 파도바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엔리코 스크로베니(Enrico Scrovegni)가 거금을 헌납하여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조토는 소성당의 좌우 벽면에 ‘예수와 마리아의 생애’, 마주선 벽면에는 ‘최후의 심판’을 재현하였다. ‘최후의 심판’에서 그리스도는 화면 중앙의 원 안에 거룩하게 앉아 있고 원 둘레에는 천사들이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을 불고 있다. 예수의 양 옆에는 열두 사도들이 근엄하게 앉아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판의 동요를 지켜보고 있다. 오른쪽 사람들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옷을 입고 질서정연하게 천국으로 들어가고 있고, 왼쪽에서는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지옥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악인이 지옥에 가고, 선인이 천국에 가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과연 누가 악인이고 누가 선인인지 악과 선에 대한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리와 창녀가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세리라고 하면 선량한 사람을 괴롭히며 세금을 거둔 냉혹한 사람이고, 창녀는 사회를 부패시키는 비도덕적인 인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천국으로 들어간다. 또한 그리스도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세상을 속이고 거짓말하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교회에 엄청난 거금을 헌금한다면…? 조토는 ‘최후의 심판’에 부로서 천국행을 약속받는 사람을 그려 넣었다. 아레나 소성당의 건축 기금을 헌금한 엔리코이다. 엔리코는 아버지 때부터 횡포가 대단했던 고리대금업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엔리코는 자신의 악행에 대해 스스로 잘 알고 있었고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교회에 거금을 헌금함으로써 천국행 티켓을 보장받고 싶어 했고 조토는 이것을 가시적으로 표현하였다. ‘최후의 심판’에서 엔리코는 무릎을 끓고 두명의 천사 보좌관과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에게 오른손으로 이 소성당을 바치고 있고, 왼손은 마리아가 내미는 손을 잡을 듯이 내밀고 있다. 소성당의 입구를 잡고 있는 오른손은 엔리코가 천국의 문 앞에 있음을 암시하고, 마리아의 손을 잡으려는 듯한 왼손은 그가 천국으로 올라가리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이 그림을 그린 조토 역시 고리대금에도 손대어 빚을 진 사람이 부채를 갚지 못하면 그들의 남은 재산을 인정사정없이 거둬들여 상당한 재력을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역시 ‘최후의 심판’의 엔리코처럼 부로써 천국을 약속받고 싶지 않았을까. 김현화(베로니카, 숙대 미술사학과 교수) Tip 스크로베니 소성당(Cappella degli Scrovegni)은 조토의 ‘유다의 입맞춤’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언급된 바 있다. ‘아레나 소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은 파도바의 갑부였던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아버지 레지날도의 속죄를 위해 봉헌했다. 성당은 길이 8.5m, 폭 2.4m, 높이 12.8m 규모로 자그마하지만, 온통 귀중한 벽화로 장식된 소위 보석상자 같은 공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당 벽과 천장 등에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각 작품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의 일생을 비롯해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에 관한 신학적 개념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다. 조토는 특히 작품 중 ‘최후의 심판’ 중앙 부분에 성모 마리아에게 성당 모형을 봉헌하는 엔리코를 그려 넣었다. 중세 시대 작품에는 예수 그리스도나 성인들에 비해 인간의 형상을 훨씬 작게 나타났으나, 조토는 이 작품에서 엔리코와 성모 마리아를 거의 같은 크기로 그려놓았다. 게다가 등장인물은 바로 작품의 주문자. 조토가 이러한 그림을 그린 이후 의뢰자들이 미술 작품 속에 자신의 모습을 그림에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관행이 됐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관행들은 신 중심의 경향이 강했던 중세에서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로의 이전하는 시대적 변화를 엿보게 한다. 중세를 넘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출발점에 서 있었던 조토는 종교성과 인간성을 조화시킨, 보다 인본주의적인 성향의 예술을 선보였다. 아울러 조토 이후 그려지는 작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중세의 작품 안에서처럼 인간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아닌, 인간들의 옆에 다가와 인간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바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입력일 2008-11-23

[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19) 루도비코 카라치의 ‘성 베드로의 울음’

‘닭이 울자 말씀이 생각나 슬피 울었다’ 허공에 내민 손가락·간절한 눈빛으로 베드로 후회 묘사아래 쪽 투박한 발 옆에는 천국의 열쇠가 어렴풋이 보여 성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가장 먼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그들 중 가장 연장자로서 사도 중의 으뜸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았고, 교회를 세우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제 1대 교황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성경에서 열두 사도들을 언급할 때 언제나 가장 먼저 이름이 나오며, 예수님은 변모의 기적을 행할 때나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늘 베드로를 동반하셨다. 그러니 베드로는 얼마나 축복받은 제자이며,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던가. 역사상 많은 화가들이 베드로를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 대표적인 주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성경의 이 부분은 베드로의 정체성과 그의 역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일 것 같다. 예수님은 그를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라 불렀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으며,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다. 그에게 주님의 지상 대리인의 역할을 맡기신 것이다. 베드로가 열두 제자 중의 으뜸이자 제 1대 교황이 된 것은 여기서 기인한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베드로 그런 베드로도 평생 후회할 만큼 큰 잘못을 한 번 저질렀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신 후 하녀 하나가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베드로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이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한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하며 세 번째 부인하자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베드로를 그린 그림 중에 ‘베드로의 후회’ 혹은 ‘베드로의 울음’이라는 제목으로 된 작품들이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그 치명적 과실로 인해 평생을 눈물로써 참회하였으며, 이로 인해 눈가가 패어있었다고 전해진 내용을 그린 것이다. 루도비코 카라치(Ludovico Carracci, 1555~1619)가 그린 ‘베드로의 울음’은 닭이 옆에 그려져서 지금 막 그가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슬피 우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허공에 내민 손가락과 간절한 눈빛에서 그가 온몸으로 후회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화면 아래 쪽 투박한 어부의 발 옆에는 베드로를 상징하는 천국의 열쇠가 어렴풋이 보인다. 화가는 화면의 시선을 베드로에게만 집중시키기 위해 배경은 아예 새까맣게 처리해버렸다. 루도비코 카라치는 볼로냐의 그 유명한 카라치 가문이 배출한 3명의 걸출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이들은 트렌트 공의회 이후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의 새로 정립된 교리와 이념을 그림으로 그려낸 대표적인 가톨릭 개혁 화가들에 속한다. 자칫 이념을 대변하는 작가의 그림들이 설득력에 치중하다 보면 예술성에서 뒤질 수도 있지만 루도비코의 이 작품은 성 베드로의 본질을 참으로 인간적이고, 절실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베드로의 후회는 인간의 나약한 속성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예수님을 그토록 따르고 사랑하던 애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이 가장 어려움에 처한 순간에 모른다고 부인하는 잘못을 저질렀는데 세상의 그 누가 인간적 실수 혹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문제는 죄를 지은 이후의 태도가 아닐까. 다른 한편으로 베드로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토록 절실하게 눈물을 흘리며 평생을 참회할 일도 없었을 것이니, 인간이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주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염치없게도 불쑥 들었다. 고종희(마리아·한양여대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교수) Tip 이번 호에 소개된 작가와 작품 경향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반종교 개혁 운동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고 지나가자. 반종교 개혁은 프로테스탄트에 의한 종교 개혁에 대응하기 위해, 즉 가톨릭 교회가 영향력을 회복하는 동시에 교회의 쇄신을 목표로 일어난 운동이다. 이 운동은 주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이미 받아들인 특정 지역의 한정된 분야에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펼쳐졌다. 바로크 미술(예술)이 발전하는 데는 반종교 개혁도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르네상스의 영광이 매너리즘에 밀려난 시기,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 등을 통해 프로테스탄트의 세력 확산을 막기 위해 고심했고 구체적인 노력의 하나로 미술을 통해 신앙을 격려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을 적극 권고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술 작품이 감동적이면서도 신자들에게 호소력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문맹인 경우도 많았던 일반 신자들은 보다 사실적인 미술 표현을 통해 교회의 가르침을 보다 쉽게 이해하곤 했다. 루도비코 카라치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 사이의 과도기에서 활동한 가톨릭 개혁 예술가로 불린다. 가톨릭 개혁 예술가들은 평신도들의 신앙심을 고취하고 또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예술을 장려했고, 결과적으로 바로크 미술도 성장했다. 특히 카라치 집안은 볼로냐 출신의 대표적인 화가들을 배출하며 바로크 미술 확립에 크게 공헌한 바 있다. 또 루도비코 카라치는 사촌동생인 아니발레 카라치 등과 함께 미술아카데미를 설립해 바로크 미술의 출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림설명루도비코 카라치의 '베드로의 울음', 캔버스에 유채, 1613~15, 153×112cm, 프린스턴, 바르바라 존슨 컬렉션.

입력일 2008-11-02

[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18)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십자가 책형 습작’

“인류 역사의 잔혹한 본성” 예수 그리스도를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로 표현존엄성 상실당한 현대인의 존재적 위치 형상화 요즈음 웰빙 개념에서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고 육식을 줄여야 된다고 강조하지만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기를 먹지 못하면 왠지 힘이 없고 허전하다. 난 그다지 크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채소만 먹고는 못 살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미국산 소고기 파동으로 TV에서 자주 비추어준 피부가 벗겨지고 사지가 묶여 줄줄이 걸려 있는 소고기 작업장 장면을 보고 나니 고기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과연 소, 돼지 등의 동물을 채소, 과일처럼 먹거리 개념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옳을까. 동물은 생물학적인 기능과 감정적인 측면에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기쁨, 슬픔,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갖는다. 소, 돼지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까. 결국 우리가 식탁에서 맛있게 먹는 고기는 죽음의 징후로 공포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어갔을지도 모를 동물의 시체이다. 때로 인간도 전쟁, 테러, 정신병적인 살인자들에 의해 동물이 도살당하듯 살점이 찢겨지는 고통 속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하기도 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죽은 사람을 해부해서 고깃덩어리로 정육점에 걸어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은 “나는 푸줏간에 갈 때마다 짐승 대신에 내가 거기에 걸려 있지 않음을 알고는 늘 놀라곤 한다”며 인간과 동물을 동일시했다. 그는 십자가의 예수도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와 같은 맥락에서 보았다. 그는 여러 점의 ‘십자가 책형’을 그렸고 그 중 1962년에 발표한 ‘십자가 책형 습작’이란 세 개의 패널로 구성된 작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로 표현하였다. 왼쪽 패널에는 두 명의 남자가 있고, 화면 아래에서 해부당한 뼈 골격 형상이 밀폐된 공간 안으로 서서히 침투되어 들어오고 있다. 이 형태와 유사한 형상이 중간 패널과 오른쪽 패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패널에서는 도살당해 정육점에 걸려 있는 듯한 벌건 고깃덩어리가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다. ‘설마 그리스도를…’ 이렇게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베이컨은 이 형상을 그리면서 피렌체에서 본 치마부에(Cenni di Cimabue, 1272~1302)의 ‘십자가 책형’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다. 푸줏간에 걸려 있는 고깃덩어리의 형상은 치마부에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를 거꾸로 본 모습으로 변형한 것이다. 베이컨은 왜, 무엇 때문에 신성한 그리스도를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로 표현할 것일까. 베이컨은 십자가 책형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무신론자이며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믿지 않았다. 그럼 그가 신성 모독이라도 하기 위해 이렇게 끔찍하고 구토증 나는 형상으로 예수를 표현한 것일까. 베이컨은 십자가 책형 사건을 종교적인 문맥에서 이탈시켰다. 그는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성경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었다. 베이컨은 십자가 책형을 예수의 개인적인 이야기라기보다 인간 본능에 내재된 잔혹성의 광기가 야기시킨 보편적인 인류의 사건으로 인식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 문구에서 예수라는 인물을 삭제한다면 주인공은 우리 모두가 해당될 수 있다. 우리 모두 언제든지 십자가에 책형당할 수 있고, 우리 모두 이데올로기, 사상, 종교 등의 이질성을 이유로 아무런 죄의식 없이 누군가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잔혹성을 가지고 있다. 잔혹성은 광기다. 광기는 죽음의 징후다. 그러므로 베이컨이 던지는 화두는 잔혹성이다. 본능적인 잔혹성으로 죄 없는 누군가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며 소리 지르고 피의 축제를 즐기는 자도 인간이고, 제물이 되어 희생당하는 자도 인간이다. 십자가 책형은 서로 모함하고, 살인과 방화,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여 있는 인류 역사의 동물적 본성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가해자의 잔혹성은 피해자의 극단적인 공포를 수반한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다. 십자가의 죽음을 순명으로 받아들인 예수 역시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하늘을 향해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소리치며 절규했다. 누구도 예수의 절규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외롭게 죽었다. 예수께서 죽음의 징후 앞에서 느낀 극한의 공포와 고독이 살육당한 짐승의 모습으로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이다. 사실 베이컨이 제시하는 종교화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십자가 책형의 주인공은 예수가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에 책형 당하듯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고깃덩어리가 된 예수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베이컨은 존엄성을 상실당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존재적 위치로 고깃덩어리가 된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그리스도교인인 나는 이 그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극단의 고통과 치욕을 스스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하며 가슴 떨리는 전율을 느낀다. 김현화(베로니카·숙대 미술사학과 교수) Tip 몇달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900억원이 넘는 가격에 낙찰된 그림이 있었다. 전후 현대미술 최고가를 경신한 이 그림의 작가는 영국인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이었다. 베이컨은 현대회화의 궁극, 완결판으로까지 평가받고 있는 화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베이컨은 초등학교 이후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미술에서 유일한 위안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피카소의 작품은 베이컨이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독학으로 예술세계에 뛰어든 그는 술집 사환, 요리사, 도박꾼, 전화교환수, 실내장식가 등을 전전하며 실력을 다져갔다. 베이컨의 그림을 감상한 경험이 있는 일반인들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듯한 캔버스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거나, 고개를 돌려버린 기억들도 있을 듯 하다. 이미지를 파괴시키고, 변형과 해체를 일삼은 그의 회화는 피카소의 회화와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피카소의 작품에서는 유희에 가까운 쾌감이, 베이컨의 경우 경악과 같은 감정이 두드러진다. 베이컨은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의 육체와 영혼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라는 문제를 표현할 때면 더욱 생생하게 뒤틀린 형상들을 앞세운다. 몇몇 평론가들은 베이컨은 우리가 인간이기 이전에 서로 먹고 먹힐 수 있는 살덩어리라는 사실을 소름끼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우리 시대의 일상 속에 잠재된 야만과 폭력을 극적으로 재현해 낸 베이컨 덕분에 관객들은 편안히 서서 작품을 구경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뒤틀린 형상들을 앞세워 던진 가혹한 물음들은 점점 더 생생한 빛으로 살아나 우리를 끊임없이 전율시킨다. 그림설명 : 베이컨, '십자가 책형 습작', 1962, 캔버스에 유채와 모래, 삼부작, 각 판넬, 196×145cm,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입력일 2008-10-12

[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17) 기를란다요의 ‘성모님의 탄생’

“구세주 어머니여, 온 세상이 기뻐 춤춥니다” 15세기 피렌체 최고 거장… 미켈란젤로의 스승성모 탄생화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손꼽혀 성모님의 탄생에 관해 성경에서는 언급이 없으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성모님의 아버지 요아킴과 어머니 안나는 주위의 존경을 받으며 행복한 생활을 해왔으나 한 가지 근심거리는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요아킴이 성전에 제물을 바치러 갔는데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사제로부터 제물을 거부당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일로 여겨졌다. 슬픔에 젖은 요아킴은 광야에 가서 은둔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안나 역시 온 정성을 다해 기도했으며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교회에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져 천사가 요아킴에게 나타나 아기의 탄생을 예고하며 성전의 문으로 가라고 예언했다. 안나에게도 천사가 나타나 똑같은 예언을 했다. 서로 다른 곳에 있던 두 사람은 황금 문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성전의 성문으로 가서 만나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눴다. 성모님의 탄생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14세기부터인데 그 중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1449~ 1494)의 것이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힌다. 기를란다요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 워낙에 출중한 천재 제자에 가려져 이름이 덜 알려졌으나 15세기 피렌체 최고의 거장으로서 특히 프레스코 벽화에서는 따를 자가 없었던 거장이었다. 그림을 보면 평범한 가정집이라고 하기에는 호화로운 실내에 여인들이 모여 있다. 방안에는 정교한 목상감으로 장식된 가구가 보이고, 꼬마 푸티들이 춤을 추는 부조 장식은 방의 격조를 더해주고 있다. 침대에 누워있는 여인이 산모 성 안나이고 그 아래에는 하녀가 갓 태어난 아기 성모님을 안고 있다. 발레리나가 춤을 추듯 우아한 자태로 하녀가 아기를 씻길 대야에 물을 따르고 있는데 일상에서 쓰는 세수 대야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멋들어진 고전풍이다. 이들 앞에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며 방문한 여인들이 서 있는데 가장 앞줄에 선 젊은 아가씨는 얼핏 보아도 당대 최고의 패션을 자랑할 만한 멋진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녀는 바로 작품을 주문한 조반니 토르나 부오니의 딸 루도비카로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딸에게 주는 최고의 결혼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주문자 조반니는 예술 후원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외삼촌으로 피렌체의 최고 명문가 사람이었다. 뒤에 있는 여인들은 가문의 주요 여인들일 것이다. 화가는 주문자의 가족을 성화 속에 그려 넣음으로써 성모님의 탄생에 후원자 가족이 참여하는 것처럼 했다. 감히 성화 속에 세속인을 그려 넣다니 말이 안 될 것 같지만 사실 이는 막대한 돈을 지불하여 교회의 곳곳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대가로 자신들의 모습을 후대에 길이 남도록 초상화로 그리게 한 전형적인 르네상스 문화의 산물이며, 이 모든 것은 주문자의 철저한 요구와 계약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서 화면 왼편 위쪽에 한 쌍의 노인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독자들이 짐작하신대로 성모님의 부모님인 성 요아킴과 성 안나가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성전 문에서 만나 기쁨을 나누는 장면이다. 화가들은 성모님의 탄생 장면에 전승에 의해 전해지던 이들 부부의 성스러운 만남을 함께 그리기를 좋아했다. 화가 기를란다요는 서로 다른 시기 이뤄진 두 사건을 한 공간에 그려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문제는 배경이 당시 르네상스 시대의 호화판 저택이라는 너무도 사실적인 공간이라는 점이다. 작가가 고안한 해결책은 공간을 나누는 것. 그러고 보니 화면은 아름다운 기둥에 의해 나뉘어 있다. 오른 쪽은 성모님의 탄생이 이루어지고 있는 방안이고, 왼편은 현관에서 계단을 통해 실내로 이어지는 공간이다. 화가는 예루살렘 성전문을 대신해 이 현관 문에서 천사의 예언을 들은 성모님의 부모님을 만나게 한 것이다. 기를란다요의 이 작품은 배경이나 인물들이 너무도 아름다워 세속적인 냄새가 폴폴 나는 성화이지만 신학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화가는 이곳에 이 작품을 비롯하여 성모님의 일화와 세례자 요한의 일화를 14점의 대형 벽화에 그렸는데 이들 그림의 높이는 건물의 3~4층 높이에 이르는 방대한 것으로서 피렌체가 자랑하는 최고의 걸작에 속한다. 이 벽화가 있는 곳은 피렌체 중앙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고딕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제대 뒤쪽 성가대석 벽이다. 필자가 피렌체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중앙역을 나오자마자 거대한 교회가 보이기에 “역시 피렌체답게 대성당도 거대하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대성당은 따로 있었고, 이 같은 규모의 성당이 여러 군데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규모에서나 질에서나 예술의 도시 피렌체의 진면목을 생각케 하는 성당이다. 고종희(마리아·한양여대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교수) Tip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20여 년간 화가로 활동하며 무수한 프레스코화를 남긴 작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어떻게 화가 수업을 받고 화가로서 출발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이번 호에 소개된 ‘성모 마리아의 탄생’은 세례자 요한의 일생과 함께 기를란다요가 마지막이자 최대 규모로 그린 연작 프레스코화로 더욱 유명하다. 기를란다요는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 대성당 부속 토르나니부오니 성당 벽에 그린 이 연작의 완성은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때문에 작품의 끝마무리는 그의 제자들이 담당했다. 기를란다요의 작품은 미술사 외에도 역사풍속 등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가 누구보다 세밀하고 사실적인 표현에 뛰어난 덕분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다른 프레스코화보다 더욱 일화적인 내용, 귀족 저택의 실내장식과 당시 의상 등의 모습을 자세히 만나볼 수 있는데 흡사 스냅사진을 보는 것과 같은 분위기다. 이렇게 철저한 사실기법으로 “기를란다요는 상점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얼핏 보고서도 아주 닮게 그릴 수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고. 교황 식스토 4세 초청으로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그리기 위해 로마에 머무는 동안에도 기를란다요는 고대 유적들을 드로잉하며 스스로 훈련을 더해 자와 컴퍼스 등의 도구 없이 어떤 대상이든 정확한 비례로 그려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기를란다요란 이름은 중세 유명 화가의 일생을 언급할 때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가 그린 피렌체 온니상티 성당의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큰 감동을 주어 최후의 만찬을 그리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천재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13세 때 기를란디요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1년여간 수학한 인연이 있다. 그림설명기를란다요, '성모 마리아의 탄생', 1486-1490,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

입력일 200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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