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

[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 6(끝) 사적 제318호 익산 나바위성당

사적지 성당들이 예외없이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거나 지역 복음화의 요람이었던 것처럼 올해 1백 주년을 맞이하는 전북 익산 나바위성당도 우리 교회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조선 헌종 11년(1845년) 10월 12일 밤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첫 발을 내디딘 감격적인 유적지이다.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 나바위성당은 개화기 한옥 성당으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며 1998년 3월 국가 사적 318호로 지정 받았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토착화가 교회 건축의 근본 이념을 이룬 건축물인 나바위성당은 구조와 외관은 전통적 한국 목조 건축 양식을 따르면서도 내부 공간 구성은 서양 초기 그리스도교 양식인 바실리카식 교회를 따른 성당 건축사의 과도기적 건축물로 그 의의가 깊다. 본당 설립과 성당 건축1897년 설립돼 올해로 1백주년을 맞는 나바위본당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J·Vermorel,장약슬) 신부가 용안군 안대동에 거주하면서 성당 부지를 물색해 김여산의 12칸 기와집을 매입, 안채는 사제관으로 사랑채는 성당으로 행랑 사랑은 본당 사무실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이는 기존의 전통 한옥에 교회의 기능만을 수용한 것으로 박해기에 건축물 자체보다 병풍, 족자, 휘장 등의 가변적인 내부 치장으로 전례 공간의 요구에 부응한 것과는 달리 종교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된 1880년대부터 신부가 상주하는 집이 성당이 되는 전형적인 예이다.이때의 성당들은 기존의 건물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남녀석 구분의 칸막이 설치, 출입구 개조 등 최소한의 시설로 전례 공간을 마련했다.이는 건물을 지을 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부족한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동시에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반 백성에게 저항감을 주지 않고 전통문화와 충돌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1906년 베르모렐 신부는 전교에 주력하면서 성당 건립에 나서게 되는데 설계는 명동성당 건축을 감독하고 전동성당을 설계한 포와넬(Victor Louis Poisnel, 박도행) 신부가 도왔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았다.1906년 건축 당시 순수한 한식 목조로 건축되었는데 사용 목재는 임천 지방골 재목을 금강에 띄워 운반했다고 한다.당시 건물은 정면 및 툇간이 마루로 되어 있었고 정면 가운데 성당을 상징하는 목조 종탑과 십자가가 위치해 있었으며 1911년 9월 18일 드망즈 주교가 방문하여 축성했다. 증축과 현재의 모습나바위성당의 신축 당시의 모습은 정면 5칸 측면 13칸의 장방형으로 좌우 툇간 중 8칸씩과 정면 툇간은 툇마루이고 뒷툇간은 제의실이며 내진부분의 좌우 3칸은 익랑으로 전체적으로 T자 형을 이루고 있다정면 용마루 부분에 작은 종탑이 솟아 있으며 지붕 아래 사방으로는 둘러가며 8각 채광창을 두어 광창 역할을 하게 하였다.내부 공간은 중앙 열주에 의해 양분되고 내부 열주 사이에는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해 칸막이를 하였고 제대 부분에서는 열주가 멈추어 공간을 넓게 하고 양 기둥 사이에 영광의 문을 두어 제대를 향한 시선의 방해를 막고 지성소와 회중석의 공간을 분절시켰다.완전한 중층 구조는 아니지만 낮은 툇간의 부섭지붕에 의해 광창의 설치를 가능케 하고 종축성이 강조된 점 등은 이전에 지어진 한옥 성당들보다 한층 발전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나바위성당은 건축 10년 만인 1916년 고딕식 벽돌조 종각을 정면 툇간에 덧붙여 증축하게 되는데 이때 목조로 된 벽을 헐고 벽돌로 개조했으며 마루를 없애 회랑으로 만들었다. 1916년의 증축으로 나바위성당은 한양 절충식 형태를 띠게 되는데 몇 개의 이형 벽돌을 사용한 장식 등이 완전한 서양식 교회 건축의 입면을 이루었다.증축 때 사용된 벽돌은 여느 사적지 성당과 같은 회색과 적벽돌이었고 벽돌은 이 지방에서 직접 구웠으며 쌓는 일은 중국인들이 했다고 한다.또 1922년에는 회랑의 기둥 아랫부분을 석주로 바꾸었고 1982년에는 종각 내부를 수리하는 한편 1백 주년을 맞는 올해 성당 내부를 수리했다. 본당의 발전과 과제1784년 한국 교회가 세워진 후 첫 신부로 맞았던 주문모 신부가 6년 만에 순교하고 그 뒤 33년간 목자 없는 양떼였다가 다시 3명의 프랑스 신부를 맞이했으나 1839년 모두 잃어버려 6년 동안 또다시 목자 없는 암흑기를 지내는 한국 교회에 목자 그것도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입국은 참으로 감격적인 사건이었다.그 유서 깊은 첫 발자국이 남은 나바위성당은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며 민족의 애환과 함께 해왔다.1908년 8월 계명학교를 개설하여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교육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 참배를 거절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서북 지방의 공소를 관할한 나바위본당은 부근의 가옥과 토지를 매입하여 신자들에게 분배하고 인근 부락을 교우촌으로 만드는 등 활발한 전교활동으로 1929년 당시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본당으로 신자 수가 3천2백 명에 이르기도 했다.1949년부터는 간이 진료소라고 할 수 있는 시약소를 설립하여 1987년 폐쇄될 때까지 가난한 농민들의 건강을 돌보아 왔고 1955년 김대건 신부의 황산포 상륙 1백 주년을 기념하여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를 제막하였으며 59년에는 극빈자를 위한 진료소를 개설하기도 했다.1989년 화산과 나바위로 불리워지던 본당 명칭을 나바위로 확정했으며 1991년에는 본당 설립 1백 주년 기념 사업으로 수용 인원 3백 명 규모의 피정의 집을 완공해 김대건 신부의 정신을 본받고 신심을 수양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현재 교적상 신자 3백여 명의 작은 시골 본당으로 본당 관할 안에 슈퍼마켓조차 하나 없는 열악한 상황이지만 굳건히 신앙의 유산을 지켜오고 가꾸어온 나바위본당은 이 모두를 김대건 신부의 보살핌이라고 믿고 있다교회 내 문화유산을 가꾸기 위한 범 교구적 기금이 없는 현실 아래서 피정의 집 운영과 순례객들의 각종 기부금만으로 성지로서의 면모를 가꾸고 유지해온 나바위본당은 앞으로 적은 여력이나마 선조들이 살아온 모범을 따라 지역의 애환과 함께 하면서 고귀한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보전하기 위해 전 신자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발행일 1997-02-23 제2041호 20면

[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 5. 사적 제290호 대구 계산성당

들어가는 말오늘날 국가가 지정한 유·무형의 가톨릭 사적지들이 그렇듯이 계산성당 또한 영·호남 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중부 이남 교회활동의 심장부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역할은 대구대교구 주교좌 성당으로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대구 계산성당 역시 사적지로 지정된 다른 가톨릭교회 건물들처럼 서양식 건축물이다. 정확히 말하면『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까운 벽돌조 성당』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현존하는 국내 가톨릭 사적지 대부분이 서양식, 다시 말해 고딕양식의 건출물인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알아보자.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서양식 건축물을 이 땅에 소개하고 본격적인 교회 건축물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바로 당시 한국에 진출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다. 종교자유 획득 이후 한국 교회를 이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이들은 대개 근대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성속 이분법에 기초한 경건주의 신앙, 그리고 문화우월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었다. 따라서 중세의 신학사상과 신념 체계를 잘 반영한 고딕양식을 교회 건축의 최고 이상으로 생각했다. 오랜 박해 끝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한국 교회에 하느님의 승리를 드러내는 데도 교회 건축이 가장 적합했을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했을 법 하다. 계산동 한옥성당지금의 계산성당 이전에 이곳엔 한식 목조 성당이 있었다. 1886년 본당 설정과 함께 로베르 신부가 경상도 지역의 전교를 위해 대구를 부임해 온지 11년 뒤인 1897년 현재의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그곳에 있던 초가집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다 3년 뒤인 1899년 전통 한옥 성당을 완공했다.『회랍식 십자형 평면에 팔작 기와 지붕에다 사방 날개의 길이와 폭은 9척 3칸이고, 종횡장 모두 9척 9칸씩 총 45칸의 건물(약 1백여 평)로서 단청까지 칠해져 있었던 것』으로 옛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더우기 라틴 십자형 내지는 바실리카식 평면 일변도의 한국 초기 성당 건축물 가운데 희랍식 십자형의 집중식 평면을 한 것은 당시 이곳이 유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식 목조 계산성당은 지은지 2년을 못 넘기고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영남 최초의 고딕건축1901년 2월 예기치 않은 화재로 한국식 십자형 성당이 소실된 뒤 로베르 신부와 신자들은 석재로 십자형 성당보다 더 큰 성당을 짓기로 하고 곧바로 모금활동에 들어간다.설계와 감독은 프랑스인 로베르 신부가 맡았고 시공은 중국인이 했다. 국내에서 구하지 못하는 자재를 프랑스와 홍콩에서 들여오기도 했다. 로베르 신부는 대구본당 신자들의 자발적인 봉사와 헌신적인 모금, 그리고 프랑스 신자들의 후원에 힘입어 1902년 말 2개의 종탑을 가진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까운 벽돌조 성당을 완공시켰다.신축된 이 성당은 당시 대구에서는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웅장한 고딕식 건물이 주민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성당 내부에는 두 줄의 기둥을 세우고 세 행각 안에 세대를 설치했다. 또 1902년 10월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 대구에 이송된 색유리(스테인드글라스)로 성당 창문을 장식해 서양식 중세풍의 성전 모습을 드러냈다.새 성전의 축성식은 1903년 11월 1일 봉헌됐다. 모든 성인의 날에 거행된 대구 대성당 축성식에는 영호남 지역 신자 대부분이 참석했고, 이를 신기하게 여긴 주민들까지 모여들어 대구 전체의 축제의 날과 같았다고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증축 이후 현재까지1911년 4월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 설정되면서 계산성당은 대구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됐다. 초대 감목으로 부임한 드망즈 주교는 교우 수의 증가 등으로 1917년 12월 주교좌 성당 증축공사를 추진키로 하고 공사에 착수했다.종각을 두 배로 높이고 1902년에 완공한 성당 뒤쪽 익랑을 확장했다. 증축된 성당은 1919년 5월 11일 축성식을 가짐으로써 명실공히 대구대목구 내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주교좌 성당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영호남 지방 사목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된다.대구 계산성당은 지난 91년 대대적인 성전 보수공사를 단행함으로써 면모를 일신했다. 본당 설정 1백5주년을 맞아 시행된 성전 보수공사는 1902년 한강 이남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선을 보인 이래 89년 만에 이루어지는 첫 대규모 보수 복원공사여서 관심을 모았었다.계산본당 측은 당시 그동안 건물 곳곳이 낡아 전면적인 보수 복원이 불가피한데다 신앙유산을 잘 가꾸고 보존한다는 취지로 공사를 단행한 것. 지붕은 함석을 벗겨내고 반영구적인 동판으로 보강했으며, 내외벽 연마 및 썩은 벽돌을 교체하고 창문과 출입문도 보수 혹은 교체했다. 설치 당시 국내 성당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았던 색유리도 복원시키고 종래의 마루바닥은 화강암으로 교체했다. 국가 지정 사적지국가 지정 사적지 290호인 계산성당은 초기 성당이 대개 박해시대의 순교지나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마을과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것과는 달리 예외적으로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평면 구성은 라틴 십자형 삼랑식이며, 열주의 아케이드와 천장에 의해 신랑과 측랑의 구별이 뚜렷하다. 주 현관은 서쪽 정면의 배랑(narthex)에 위치해 있고 배랑의 좌우측랑부에 2개의 동일한 종탑이 위치한다. 종탑에는 각각 8각의 높은 첨탑을 뒀으나 건물 길이와 몸체 높이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다.성당의 내부는 신랑과 좌우 단열의 측랑으로 구성된 7개의 회중석 베이(bay)와 좌우 복열의 익랑을 갖는 3베이의 교차부 및 1개의 성단(sanctuary) 베이와 반원 보회랑 후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뒤로 5각의 앱스를 더 달아 제의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후진 상부 벽에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루르드의 성모 동굴이 꾸며져 있다.전체 성당은 화강석 기초 위에 적벽돌과 회색 벽돌의 조적으로 회색 이형 벽돌의 사용은 플랫 버트레스와 정면 출입구의 아키볼트 및 창 둘레, 처마 코니스, 그리고 내부 열주와 천장 리브에 집중하고 있다.좌우 측면에는 플랫 버트레스가 동일한 간격으로 벽을 지지하고 그 사이에 반원형 아치를 둘린 창이 있으며, 6번째 베이에는 반원 아치의 출입구가 돌출해 있다.계산성당은 전체적으로 국내 성당 중 라틴 십자형(Latin cross)의 형태가 평면과 외관 및 내부 공간에서 가장 뚜렷하게 구현된 건출물로 인정 받고 있다.계산성당은 최근 노동법 사태와 관련 민노총 대구지부 관계자들이 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감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로 시민들에게 다가서는 기회를 맞기도 했다.일회적 사건에 불과하겠지만 서울의「명동성당」이 한국 민주화의 성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구의 계산성당 역시 그 역할을 해줄 수 있기를 기대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어쨋든 올해로 본당 설정 111주년, 성전 신축 95년째를 맞는 계산성당은 오늘날까지 영·호남 지역 신앙의 산파로서, 또 지역 양심과 사랑의 보루로 우뚝 서 있음이 분명하다.

발행일 1997-02-16 제2040호 20면

[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 4. 사적 제288호 전주 전동성당

호남교회의 모태 본당인 전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권상연을 비롯하여 호남의 사도 유항검 등이 순교한 최초의 순교 성지이자 국가문화재 사적 제288호이다.전동성당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호남지방에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건물일 뿐 아니라 건축양식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한국에 있는 교회 건축물 중의 으뜸으로 꼽힐 만큼 빼어난 까닭이다.호남 교회의 풍파를 몸으로 겪어낸 전동성당은 이러한 점에서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큰 의의를 찾아 볼 수 있으며 오랜 세월 지역에서 민주화의 성지로 존경을 받아온 만큼 그 사회적 의의도 크다고 할 것이다. 역사적 의의전동본당은 선교사의 선교 정책이나 조선 교구장의 사목행정 방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 고장 지도급 신도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이루어졌다.한국 교회사의 출발과 꼭 닮은 이러한 전동성당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 터 위에 세워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1791년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이후 전동본당은 거의 1백년마다 새로운 변모를 겪게 되는데 두 순교자의 순교 1백 주년이 되던 해에 현재의 성당 터에 자리를 잡았고 2백 주년을 맞이하면서 성당의 대대적인 보수 및 성역화 작업이 전개되었다.또한 남문 밖 성지로만 알려졌던 전동본당이 순교 1번지로서의 자리매김을 위한 작업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전동본당은 1889년 설정되었으나 전주에 전라감영이 있었고 신도가 한 사람도 없어 초대주임 보두네 신부가 전주에서 사목을 하지 못하고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에서 거주하면서 전주 입성을 모색했다.1891년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은 보두네 신부는 당시에 있던 한옥을 임시 성당으로 개조하고 전교활동을 하다 20여 년 간의 절약 끝에 1908년 성당 건축을 시작했다.설계는 명동성당 건축을 감독한 포와넬(박도행, Poisnel Victor Louis) 신부가 맡았다.이 즈음 전주성 4대문 중 풍남문만 남겨두고 헐린다는 것을 알게 된 보두네 신부가 각고의 노력 끝에 헐린 성벽에서 나오는 흙과 돌을 성당을 짓는 데 사용했다.윤지충 권상연의 순교를 지켜보고 유항검의 목이 효수되었던 그 돌과 흙이 성전의 주춧돌로 변한 것이다.전동성당은 모진 고생 끝에 공사 시작 7년 만인 1914년 외형공사를 마쳤고 2대 주임 라크루 신부에 의해서 1931년 비로소 모든 시설이 완비되고 축성식을 가진 23년간의 대역사 끝에 완공됐다.전동성당은 1947년 중앙본당이 설립되기 전까지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이었으며 1988년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원인 모를 화재사건으로 대대적인 성전 복원사업이 이루어졌다. 건축적 의의초기 성당으로는 드물게 대구 계산동 성당과 함께 평지에 위치한 전동성당은 건물 폭 16.4m 길이 49m 건평 1백89평으로 명동성당의 3분의 1 정도 크기에 5백여 명이 앉을 수 있다.전동성당은 정면 종탑부와 양쪽 계단탑에 비잔틴 풍의 총화형 돔을 올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다.성당의 평면 구성은 삼랑식이며 8각 석조 열주의 아케이드(아치를 연속적으로 사용한 개방된 공간)와 천장에 의해 몸체와 옆 복도의 구별이 뚜렸하고 열주 사이에는 반원형 아치로 연결되어 있다.주 현관은 북서쪽 정면의 배랑에 위치, 아키볼트(장식 창도리)로 장식되었고 상부에는 종탑부가 구성되어 있다.종탑부에는 12개의 창을 돌린 12각의 드럼 위에 12각의 총화형 돔을 얹었다.내부 공간은 명동성당과 같이 아케이드와 공중 회랑 및 광창의 3층 구성을 하고 있으며 몸체의 천장은 반원형 궁륭천장이지만 옆 복도와 제대부 및 보회랑은 교차, 뼈대 있는 궁륭천장으로 되어 있어 각 네모 칸의 공간들이 융합하고 상호 침투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육중한 벽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부공간이 밝고 색감 등이 온화하며 이국적이면서도 토착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전체적으로 종탑부의 돔이나 부주두를 가진 석조 기둥 등 비잔틴 요소를 혼합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외관과 세부 기법, 내부 공간의 인간적인 스케일감 등 어떤 면에서는 계산동성당과 명동성당을 능가하는 건물이다.뿐만 아니라 전동성당은 내부 공간의 분절화 통일성 방향성 등을 통해 전례의 기능뿐 아니라 하느님을 표상하거나 지향하는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가톨릭 개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회적 의의한국 교회 최초의 자치 교구로 설정된 전주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서 오랜 세월을 지내온 전동성당은 그 시작에서부터 지역민의 애환을 함께 해온 지역사회의 보물이자 정의와 평화의 상징이었다.해성중고, 성심여중고등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한편 대건신용협동조합 설립, 한솔야간학교 설립 등 지역사회 개발에 혼신을 다해 전동성당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은 지역에서 복음적 의미를 지녀왔다.특히 1970년대 이후 전동성당은 전북지역에서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되었다.74년 11월 11일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를 비롯한 사제 수도자 평신도의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시발로 정의 평화기원미사, 인권강연회 및 김지하 문학의 밤 등 크고 작은 집회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5월 광주 민주항쟁 이후 그 강도와 정의에 대한 열망은 전동성당을 집권자들의 눈에 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특히 87년의 6월 항쟁시에는 전동성당이 전북지역에서 시위대의 마지막 거점이 되어 연일 철야농성이 계속되었고, 88년부터는 시민들의 민주의식 고양을 위한 매월 시민강좌를 개최하였다.이처럼 전동성당에서 시국문제 등에 관한 강연회와 각종 집회가 계속되던 1988년 10월 10일 성전이 원인 모를 화재에 휩싸이게 된다.미온적인 당국의 수사로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이 사건에 대해 관계자들은 특정 세력의 의도적인 방화로 여기고 있다.그러나 이 화재는 본당 설립 1백 주년을 맞아 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히려 더욱 굳건한 민주화의 요새가 되었다.89년부터 94년까지 만 5년 간의 긴 성전의 보수공사 이후 전동성당은 비로소 이곳이 한국 최초의 순교지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되는데 이를 전동 신자들은 성령의 역사라고 굳게 믿고 있다. 순교 1번지로서 새로운 도약어려운 본당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전동성당이 현재와 같은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일화가 있는데 바로 치명생수의 개발이다.전국에서 찾아오는 순례객들과 지역 주민을 위해 생수를 개발하기로 한 전동성당은 전동본당 설립 1백3주년이 되던 1992년 업체와 지하 1백10m를 파기로 계약했다.9월 19일 굴착을 시작한 생수 개발은 순교자 대축일인 9월 20일 지하 103m에서 기계가 고장나면서 물이 솟기 시작했다.전동본당 신자들은 이물을 치명생수라고 명명하고 이를 계기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 터인 전동성당을 위상에 걸맞게 꾸미기 위해 전 신자가 발 벗고 나서게 된다.순교 1번지를 상징할 구조물로 윤지충·권상연 순교 동상 건립, 각종 순교 책자 발간, 유항검과 동정부부 순교자상 건립, 순교자 현양 가든 음악회 개최 등 각종 순교신심 고양을 위한 행사를 펼치는가 하면 성당 소개 팸플릿을 제작, 전국에 배부해 전동성당이 한국 교회 내 첫 순교 성지임을 알리면서 전동성당 제 자리 찾기운동을 벌였다.이제 확고히 순교성지 성당으로 자리매김한 전동성당은 앞으로 윤지충·권상연 순교일 및 유항검과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일을 공식적인 기념일로 제정하는 데 총력을 모으는 한편 순교자 현양운동을 통해 시성시복운동을 펼쳐 나갈 계획이다.또한 전동성당의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고려한 교구에서도 현재 사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주교관을 복원하여 교구장 이병호 주교가 전동성당으로 이사올 계획이며 차후 교구청을 전동성당 구내에 건립해 성당 일대를 인접한 성심여중고등과 함께 가톨릭 마을화할 계획으로 있다.

발행일 1997-02-09 제2039호 12면

[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 3. 사적 제287호 인천 답동성당

항도 인천의 중심부에 자리잡아 근 1백10년 간을 인천의 역사와 함께 해오면서 지역의 정신·문화의 중심지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던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대성당(주임=이수일 신부)은 1981년 국가 지정 사적지 제287호로 지정됐다.인천뿐 아니라 경인지역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했던 답동본당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과 현란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지어진 건축사적 의미도 함께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명동성당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성역이라면 답동 역시 인천지역 민주화의 산실 역할을 해왔다. 지금도 성당에는 개악된 안기부법과 노동법 원천 무효화를 위해 인천지역 청년 학생들이 텐트를 치고 농성 중에 있는 이 곳 역시 그리 순탄하지 못했던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해왔다. 건축 문화사적 의의인천시의 중심부인 답동 낮은 언덕의 정상부에 위치한 답동성당은 1896년에 지은 옛 성당을 그대로 둔 채 외곽을 확장 개축한 건물이다. 장호원 성당을 설계한 바 있는 지사원(Chizallet) 신부가 설계한 이 성당은 정면에 3개의 종탑을 갖고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답동은 이전의 서양식 성당과 달리 벽돌과 돌을 혼용하였으며 내부 기둥들과 2층 바닥을 콘크리트로 하는 등 순수 자연석이 아닌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벽돌조를 혼합했다.1981년 9월 25일(문화재 관리국 자료)에 사적 287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는 답동성당은 정면 3개의 종탑 중 중앙 종탑에 비해 양 모서리의 탑은 왜소하며, 8각 튜렛(turret 작은 탑)에 뾰족한 돔을 얹었다.답동의 창 형태는 모두 반원형 아치이며, 아치부와 창대만 돌로 되어 있다. 종래의 성당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회색의 서로 다른 벽돌에 의한 정교한 장식을 석재로 볼딩 처리해 단순화·곡면화했다.또한 성당 내부의 기둥 사이는 원형 아치로 연결되고, 기둥과 외벽의 반원형 편개주(반으로 자른 아치 기둥) 사이는 외벽 전체와 반원형 볼트(아치)로 연결됨으로써 반은 그로인(아치의 종류) 볼트, 반은 베렐(아치의 종류) 볼트의 특이한 천장의 형태로 되어 있다. 신랑(신자석)의 천장은 반원형 베렐 볼트이고, 제대부의 천장은 리브(부채살 무늬)있는 8각형 돔으로 되어 있다.답동성당은 일제 후반기의 성당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크기에 있어 명동 성당 다음가는 규모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구조 전체는 순수 조적조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벽돌 구조의 혼용이나 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비교적 충실한 건물이다.또 내벽은 모르타트 위에 수성 페인트를 바르고, 제대부 벽면은 진한 청색이며, 나머지는 미색이다. 바닥은 원래 목조 마루였으나 1973년 내부 수리 공사시 콘크리트 슬라브 위에 인조석을 얹었다. 벽면에 있는 콘크리트 14처와 추상적인 현대 디자인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어우러져 있는 답동성당은 아름다운 성당 건축의 백미로도 꼽히고 있다. 본당 설립과 성장1996년 현재 총 신자 수가 3천6백66명인 답동성당은 인천교구 주교좌 본당으로 1889년 7월 1일 설립됐다. 설립 당시의 이름은 인천의 옛 지명인「제물포」로 불리다가 1958년「답동」으로 변경됐다. 성 바오로를 주보로 탄생된 답동본당의 초대 주임은 안중근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던 빌렘 신부이고 현재는 이수일 신부가 15대 주임이다.답동성당의 설립은 조선교구에서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이 장차 발전할 것을 예상하고 1888년부터 성당 대지를 물색하게 된 데서 비롯됐다. 대지 매입을 결정한 조선교구에서는 당시 말레이반도 페낭신학교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빌렘 신부에게 새 본당 지역을 맡아 주도록 요청, 빌렘 신부에 의해 본당 설립이 추진됐다.빌렘 신부는 초대주임으로 발령을 받고 1889년 7월 8일 성당으로 쓰던 가옥에서 85명의 신자들과 첫 미사를 드리게 된다. 빌렘 신부는 다음해인 1890년에 어렵게 대지 3천2백12평을 매입하고 여기다 성당과 교리 교실을 건축하려다 용산 예수성심학교로 전임되었다. 빌렘 신부의 뒤를 이어 부임한 르비엘 신부는 이웃의 야산을 추가로 매입하고, 임시 성당 겸 경리부 건축을 시작하여 1891년 7월에 이를 완성한다. 그러나 그는 병으로 홍콩 요양소로 떠나게 된다.답동성당이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제3대 주임 마라발 신부 때다. 그는 1893년 4월 부임하자마자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당 설계도를 받아 기초 공사를 시작했다. 이듬해 8월 수녀원이 완공되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수녀 2명을 파견하여 제물포 분원을 창설하고 보육사업과 무료 진료사업을 시작했다.답동성당의 건립 공사는 1895년 8월 11일에 정초식을 갖고 1897년 7월 4일 축성식을 갖게 됐다. 당시 성당의 건평은 3백96평이었다. 또한 답동은 늘어나는 신자 수를 수용하기 위해 1937년부터 근 4년간 기존 성당을 그대로 두고 외벽을 쌓아 현재의 아름다운 성전이 완공됐다. 드뇌 신부 33년간 사목답동성당이 선교의 거점으로, 또 인천의 명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 것은 1904년부터 1937년까지 근 33년 간을 주임신부로 사목활동을 했던 제4대 드뇌 신부 때부터. 드뇌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일본인들의 교회 부지(현 신흥동) 침입으로 야기된 문제를 해결했고 특히 전교에 노력, 1910년까지 새말(현 시흥군 소래읍), 고잔(현 김포군 검단면), 구월리, 부평에 공소를 신설하고 영종도에 공소 강당을 축성했다.드뇌 신부는 1915년 2월 1일「바오로 성인」을 본당의 주보로 결정하고 학교 운영에도 남달라 1917년 남 여부를 통합「인천 박문학교」로 개칭함과 동시에 설립자 겸 교장이 됐다.이런 초창기 신부들의 노력에 힘입어 답동본당에는 최초의 한국인 주임인 임종국 신부(5대)를 비롯 장요한(6대), 설 헨리꼬(7대), 강의선(8대), 박성규(9대), 김병상(10대), 김상용(11대), 송주석(12대), 강용운(13대), 정윤화(14대) 그리고 현재의 이수일 신부(15대)가 부임, 인천지역이 정신·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으로 발전시켰다. 인천지역 등대로 우뚝멀리 바다와 인천 시내를 내려다 보는 답동성당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인천지역의 등대로 우뚝 서 있다. 문화적 가치는 물론 인천지역의 정신적 지주로서 의미를 갖고 있는 답동은 1989년 창립 1백 주년을 맞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변모를 시도하고 있다.더군다나 국가가 선포한「문화 유산의 해」를 맞아 답동성당이 명실공히 신앙의 요람, 정신 문화사적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답동 공동체 구성원은 물론 교구민 전체의 관심이 기대된다. 문화재로서 건물의 관리와 보존도 중요하지만 답동성당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한 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 더욱 존재 가치가 빛날 것이다.이수일 본당신부는『도시 공동화 현상으로 신자 수는 현저하게 줄었으나 답동이 갖는 역사 문화적 가치는 여전하다』고 전하면서『지역사회에 열린 공간으로서의 성전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발행일 1997-02-02 제2038호 12면

[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 2. 사적 제258호 명동대성당

한국 가톨릭교회의 최대 문화유산인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지금 수난을 겪고 있다. 한국 가톨릭 신앙의 모태일 뿐 아니라 소외되고 힘없는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요, 우리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는 최후의 보루로 지난 1백년 간의 위상을 견고히 다져왔던 명동대성당이 공동선을 외면한 공권력과 농성자들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가톨릭교회의 문화유산적 가치와 더불어 국민의 정신적 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더해온 명동대성당이 겪고 있는 오늘의 시련,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한국 가톨릭교회의 유형문화재이며 전 국민의 또 다른 의미의 무형문화재인 명동대성당이 이 땅에 존재하는 진정한 의미를 함께 찾아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명동 대성당은 1892년 착공, 6년간의 난공사 끝에 1898년에 완공됐으며 지난 1977년11월22일자로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 제258호로 지정받았다. 건립과 완공명동대성당은 조선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1883년 6월부터 시작, 1899년 6월까지 30여 차례의 부지 매입작업 끝에 지금의 터를 확보했다.명동대성당 터는 목멱산(남산) 줄기의 중간 재에 해당하는 곳으로 조선시대 때부터「북단재」혹은「종현」으로 불리던 곳이다.명동대성당은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해 1892년 8월 5일 성모 무염시태께 봉헌한 대성당 머릿돌을 축성하고 정초식을 가지면서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용산신학교와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가 설계와 감독을, 공사는 기초 공사를 담당한 약간의 조선인 석공을 제외하고는 중국 상해의 목공과 석공, 벽돌공, 노동자들이 도맡았다.하지만 재정난과 자재난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기술이 미숙해 공사 중 붕괴사고가 일어나자 설계를 변경해 종탑의 높이를 낮추는가 하면, 바닥의 타일 주조, 천장의 아치형 공사, 스테인드 글라스, 제대 설비, 성 베네딕도 상과 예수성심 제대 제작 때마다 새로 기술자를 부르거나 외국에서 자재를 들여와야만 했다.명동대성당은 공기 6년 만인 1898년 5월 29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종탑 46.7미터, 길이 68미터, 너비 29미터, 면적 4백27평의 고딕 양식으로 완공돼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축성됐다. 건축 개요명동대성당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재정 지원과 신자들의 노력 봉사와 성금으로 건립됐다. 준공 직후의 독립신문 기사에서는 총 공사비가 6만 달러로 보도되었다. 건축 관계자들은 지금 건립할 경우 부지와 예술품을 제외한 실공사비만 해도 최소 50억 원 이상이 들 것이라고 예상했다.명동대성당은 지형과 진입로에 따른 주변 여건에 의해 정북에서 30.5°서쪽으로 기울어진 북북서쪽에 입구를 가진 남북 배치 형태를 하고 있다. 평면 구성은 라틴 십자형 삼랑식이며 구조 방식은 벽돌조로 일반 벽체, 기둥 등을 구성하고 있다. 주요 목구조로는 지붕의 트러스 구조와 내부 궁륭(두 개의 둥근 천장의 교차에 의해 형성된 부분) 천장 구조, 종탑의 종 지지 구조와 뾰족탑 구조 등이 있다.성당 내부는 채광 면적을 높이기 위해 높은 창의 창턱 부분과 그 하부 벽체가 예리하게 절삭되어 유리 접착 부분까지 급경사 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명동대성당은 또 한강통 연와송에서 우리 흙으로 제작한 붉은색과 회흑색 벽돌로 지어졌는데 붉은 벽돌은 배경을 이루는 일반 벽체에만 썼고 회흑색 이형벽돌은 장식 효과를 내기 위해 부축벽, 기둥 등의 주요 골조 부분과 돌림띠, 창 테두리 등에 사용했다.성당 내부의 공간은 고딕적 분위기에 비해 단순한 외관과 견고한 벽체, 분절적 구조의 노출 등 구조 체계와 공법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깝게 건축해 중세 서양 교회 건축 양식의 수용이 갖는 여러 특성 즉 건축 체제의 비고딕적 성격과 고딕 지향적 건축 계획, 비고딕적 구조, 벽돌 재료의 의장적 고딕 적응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수공사명동대성당은 1898년 축성 후 지금까지 5차례의 큰 보수공사가 있었다. 1925년에는 기해·병오박해 79위 순교자 시복식을 기념해 복자 제대와 복자 성화를 장식했고, 다음 해에는 14사도(바오로와 바르나바 포함)의 상본을 장발(루도비코) 선생이 제작해 설치했다.일제 말기에는 쇠붙이 공출령에 따라 철제 영성체 난간이 강압적으로 공출돼 목재로 교체됐으나 노기남 대주교의 완강한 저항으로 종만은 공출을 면했다.명동대성당은 노기남 대주교 허락으로 1944년 6월 11일 지붕과 벽체 등이 대대적으로 보수됐다. 시설로는 1946년 종각 피뢰침이 설치되는 등 두 번째 보수공사가 실시됐다. 한국전쟁 중에는 유리화가 파괴되고 성모무염시태 상이 훼손됐으나 그 외 큰 피해는 없었으며 1958년 7월과 8월에 성녀 소화 데레사 상과 예수성심 상이 안치됐다.이어 1964년 8월 황민성 신부가 14처 상을 교체하면서 세 번째 보수공사를 실시했고, 제13대 주임 최석우 신부는 1972년「명동대성당 복원보수위원회」를 구성, 6월부터 네 번째로 대대적인 복원공사에 착수, 지붕과 벽체 보수공사를 실시, 1973년 말 제14대 김몽은 신부가 마무리했다. 또 1982년 유리화 복원공사와 지붕 동판 보수작업을 실시해 다섯 번째 보수공사를 마무리 지었다.아울러 1991년 1월부터 7월까지 명동대성당 축성 1백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구성돼 교구와 본당이 함께 1백주년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1995년에는 1백주년 기념관 설계 경기를 개최하고 모금운동을 시작,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회적 역할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회 안에서의 교회의 역할이 재조명되면서부터 1960년대 이후 명동대성당은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의 산실로, 소외된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로 자리잡아 왔다.유신 독재에 항거한 1971년 김수환 추기경의 성탄 강론을 시작으로 불 붙기 시작한 명동대성당의 사회운동은 1975년 2월 6일 인권회복기도회와 1976년의「3.1 명동사건」즉「민주 구국 선언문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이어 1978년 동일방직사건, 1979년 안동농민회사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 인한 시국 선언문 채택과 집회들이 이어졌으며, 1986년 6월 10일 명동성당 농성과 촛불 시위는「6·29 선언」을 낳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명동대성당은 1995년 6월 한국통신 노조 사건과 관련, 과거 군사독재시대 때에도 없었던 성지 침탈을 당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이 땅의 민주화와 힘없는 이들의 양심을 대변하는 자리로 지켜왔고 지금도 개정 노동법과 안기부법 철폐문제와 관련 사제들과 신자, 많은 시위대들이 찾아와 시국 기도회와 농성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변신명동 대성당은 성당 축성 1백주년을 기해 미래 교회상에 맞는 선교와 신자 재교육, 시민들의 문화공간, 정보서비스센터 등의 기능을 갖추기 위해 종합개발사업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총 사업비 1천억여 원을 예상으로 벌이고 있는 이 사업은 우선 지난 해 96년 6월 1일부터 98년까지 1단계 준비작업으로 1백억 원을 모금할 예정이다.명동본당 주임 장덕필 신부는『명동 대성당 1백주년 기념관은 건물 중심의 공간이 아닌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누구나 와서 기도하고, 공부하고, 평안함을 얻는 곳으로 만들 계획』이라며 『명동대성당의 종합개발계획은 명동 신자들만의 몫이 아닌 전국 모든 신자들, 그리고 명동대성당을 성지로 생각하는 모든 국민들이 동참해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명동대성당은 가톨릭 신자들만의 성지가 아니라 전 국민이 인정한 성역이다. 이를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어떻게 가꾸어야 할 것이냐에 대해서 지난 1월 12일 주의 세례 축일 때 발표한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 말씀에 명확하게 담겨 있다.김 추기경은 명동대성당이『종교적으로는 언제나 성역이지만 법적으로는 성역으로 보존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오로지 우리 모두가 이 자리를 성역으로 존중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천명했다.김 추기경의 말씀 대로 모두가 명동대성당을 성역으로 존중할 때 사랑과 평화, 화합의 성지가 될 것이다.

발행일 1997-01-26 제2037호 12면

[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 1. 사적 제252호 약현성당 / 사적 제255호 원효로 성당과 옛 용산신학교

■ 사적 제252호 약현성당 최초의 서양식 성당 종교는 문화의 텃밭에 부는 정신의 바람이며, 그 텃밭을 적셔온 영혼의 물줄기이다. 가톨릭도 민족 역사의 숨결과 어울리고 전통문화와 조화를 이루면서 새로운 문화 전통의 맥을 열어나가는 문화유산들을 남겨왔다. 97년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기획「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를 여는 것도 제3천년기 새로운 문화복음화 시대를 준비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적 가톨릭 문화유산의 예술적, 역사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기획이 올 한 해 순교의 피로 적신 이 땅 위에 찬란한 가톨릭문화를 꽃피운 한국 천주교회의 문화유산들을 가꾸고 알리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수 있도록 하는 작은 불씨가 되길 희망한다. 한국 가톨릭교회 건축물 중 제일 먼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 것이 서울 약현(현 중림동)성당이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2호로 지정된 약현성당은 1백3위 한국 순교성인 중 44위가 순교한 서소문 밖 네거리를 내려다보는 서울시 중구 중림동 149-2번지 약현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옛날 이곳에는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많았기 때문에 「약초밭이 있는 고개」라 해서「약전현」이라 불렀고, 후에 약전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고종 29년 즉 1892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Coste) 신부의 설계 감리로 완공된 약현성당은 길이 약 32미터, 폭 12미터, 넓이 1백20평의 벽돌조 건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성당 건물이었다. 1887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수렛골(현 순화동)에서 문밖공소로 출발한 약현본당은 1891년 종현(현 명동)본당에서 분리되어 서울에서 2번째, 전국에서 9번째 본당으로 설립됐으나 모 본당보다 성당 건립은 5년 앞섰다. 성당 건축의 모델 교회 건축물의 권위자인 김정신 교수(단국대)는 『약현성당이 한옥과 양식을 포함해 한국 최초로 지어진 성당이기에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성당 건축에서 줄곧 한국 성당 건축의 모델이 되었었다』고 설명했다. 약현성당은 1893년 4월 축성된 후 1905년 종탑 꼭대기에 첨탑을 올렸고, 1921년 성당 내부의 칸막이를 철거하고 벽돌 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하는 내부공사를 했으며, 1974년부터 2년간 해체 복원 등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약현성당은 천정이 낮아 뾰족 아치를 쓰지 않고 둥근 아치로 만든 반면, 제대 정면 출입구와 측면 출입구 창들은 뾰족 아치로 처리, 고딕 요소가 극히 적은 단순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로마네스크 양식 약현성당의 평면 구성은 시내쪽으로 향해 동측에 출입구 정면을 둔 라틴 십자형 삼랑식 구조로 신랑과 측랑의 구별은 내부에서는 확연하나 외부에서는 낮은 단층 지붕으로 나타나지 않고, 종탑은 출입구 정면 중앙에 있으며 꼭대기는 하부의 4각에서 8각으로 꺾인 도머 창을 가진 급경사의 브로치형 첨탑으로 되어 있다. 김정신 교수는『약현성당은 벽돌의 자작 생산과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란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하고 『성당 건축물이 고딕 지향적인 양식을 추구, 한옥 성당과는 달리 토착화의 장애 요인도 되었지만 일본의 굴절을 거치지 않고 비교적 순수한 형태로 전래된 서양 건축문화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 사적 제255호 원효로 성당과 옛 용산신학교 위풍당당한 고딕 건물 지금 서울 성심여고 부속 성당과 예수성심수녀회 관구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원효로 성당과 옛 용산신학교는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5호로 지정된 한국 가톨릭교회의 두 번째 국가 지정 문화재이다. 최초의 근대식 신학교 한국 최초의 근대식 신학교 건물인 옛 용산신학교 2층 교사는 고종 29년 1892년에 완공된 것으로 벽돌조 조오지안 양식으로 코스트 신부가 설계했고 용산신학교 성당(원효로 성당)은 1902년에 준공됐다. 일반 성당과 다른 구조 원효로 성당은 출입구 안쪽 상부 명문에 성당 건축 기간이 1899∼1902년이라는 것과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이니셜 A.K 및 그의 생존 기간(1821∼1846)이 로마자로 표기되어 있다. 작지만 지형을 잘 이용 원효로 성당은 신학교 부속 성당이기 때문에 일반 교구 성당과 평면 형식이 다르다. 정면 입구에 배랑이 없으며, 출입구는 제대쪽 양측 면에 나 있고 제의실이 제대 반대측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2층 성가대석 갤러리가 설치되어 있다. 신자석 바닥도 원래는 제대를 향해서가 아니라 중앙축을 향해 좌우에서 아레나 형식으로 단을 지어 내렸으나 지금은 바닥이 평평한 마루로 바뀌었고, 제의실은 신자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김정신 교수는 『언덕을 이용해 전면 일부는 언덕 아래의 3층으로 되어 있고 언덕 위는 단층으로 되어 있는 것이 이 성당의 특이한 점』이라며『매우 작은 건물이지만 지형을 잘 이용, 고딕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원효로 성당은 또한 명동과 약현성당처럼 회색 벽돌과 적색 벽돌을 써서 고딕의 디테일을 살렸고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천장과 제대부의 천장 구성 등은 명동, 약현성당에 비해 더욱 고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원효로 성당에는 김대건 성인의 유해가 성당 축성 당시부터 1958년까지 모셔져 있었고,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소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의 유해가 거쳐갔던 유서 깊은 곳이다. 한편 옛 용산신학교 교사는 외부 조오지아풍 2층 벽돌로 건물이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일부를 3층으로 증축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발행일 1997-01-19 제2036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