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이야기

[이스라엘 이야기] 계약 궤의 행방

예루살렘 이슬람 황금사원(사원 내에 머릿돌이 보관돼 있다). 이스라엘의 옛 성막과 성전에서 우리는 계약 궤와 커룹 장식을 기억한다. 십계명을 보관하던 계약 궤는 주님 현존의 상징이었다. 성막이나 성전을 지은 목적도 본디 계약 궤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탈출 38,21 참조). 그러다 예루살렘 몰락(기원전 587/6년) 즈음하여 계약 궤가 자취를 감춘 뒤, 숱한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여럿 만들어냈다. 계약 궤(민수 10,33 등)는 ‘하느님의 궤’(2사무 6,12 등), ‘증언 궤’(탈출 25,22 등)라고도 불린다. 하느님의 궤는 그 이름에서부터 주님 현존의 상징임을 짐작게 한다. 증언 궤라는 호칭은 ‘증언판’(탈출 31,18 등)인 십계명 돌 판을 궤 안에 두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십계명 돌 판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증명’해주는 까닭이다(1열왕 8,21 참조). 커룹을 계약 궤 위에 장식한 건 그 안에 담긴 십계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커룹들은 얼굴을 속죄판(계약 궤 덮개)으로 향하고, 날개는 펴서 속죄판을 덮었다. 커룹이 맡은 이런 보호자 역할은 원조들이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커룹이 동산 입구를 지킨 창세기 3장 24절에도 드러난다. 인간이 에덴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지켰듯, 여기서도 속인들이 계약 궤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리고 커룹은 주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역할도 했다. 하느님은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분이기 때문이다(탈출 25,22; 1사무 4,4 등). 커룹들이 얼굴을 속죄판 곧 아래쪽으로 향한 것도, 십계명을 보호하는 의미 외에 자기들 위에 앉으신 하느님을 직접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주님의 어전에서 사랍들이 날개로 얼굴을 가린 이사 6,2 참조). 커룹 장식이 이렇듯 주님 왕좌를 상징하는 것이니, 그 아래 놓인 계약 궤도 왕좌의 일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구체적으로는 발판에 해당한다(1역대 28,2). 주님 발판 앞에 엎드린다는 시편 찬송(99,5; 132,7)도 지성소 안에 모신 계약 궤 방향으로 엎드린다는 뜻이다. 십계명을 궤에 담아 성막/성전 안에 보관한 건, 나라 간 체결한 계약이나 법적으로 중요한 문서들을 신전에 보관하던 고대 근동 관습에서 기원했다(1사무 10,25 참조).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은 이런 문서들을 신상의 발아래 두었는데, 그 내용이 잘 지켜지도록 신들이 감독해 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기원전 13세기 파라오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임금 하투실리스 3세도 쌍방이 맺은 계약을 이집트 신 라와 히타이트 신 테슙 밑에 놓았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신상을 만들지 않았기에, 주님과 맺은 계약의 증서인 십계명을 주님 발판에 해당하는 계약 궤 안에 두었다. 그러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배가 임박하자, 계약 궤의 종적이 묘연해진 것이다. 느보산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 탈무드는 요시야 임금이 계약 궤를 감추었다는 전승을 전하고(요마 53b-54a), 2마카 2,5는 예레미야가 느보산의 한 동굴에 숨겼다고 전한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자기들이 계약 궤를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두 확인할 방법은 없는 전승들이지만, 그렇다고 계약 궤의 실종이 이스라엘 신앙에 가공할 만한 위기를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대가 오면, 계약 궤가 필요하지 않게 되리라고 예고했다(예레 3,16-17). 그때는 하느님의 도성이 주님 옥좌라 불리고, 민족들이 주님의 이름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배가 끝난 다음 제2성전에서는 ‘머릿돌’(foundation stone)이 계약 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요마 54b). 머릿돌은 주님의 천지창조를 기념하는 바위인데, 지금은 그 위로 이슬람 사원이 세워져 있다. 자취를 감춘 뒤 감질나는 이야기들만 무성하게 키워온 계약 궤는 묵시 11,19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지상 성막이나 성전이 하늘 성전을 본 떠 지은 것이듯(탈출 25,9; 1역대 28,19 참조), 계약 궤도 본디 천상의 궤를 본 떠 만든 것이다. 묵시록에 나타난 건 바로 천상의 원형이다. 2마카 2,4-8은 하느님이 백성을 도로 모으시어 자비를 보이실 때까지 계약 궤가 숨겨진 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묵시록에 나타난 계약 궤는 하느님이 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실 것임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반면, 지상의 계약 궤는 예수님이 육화되어 인간 세상에 오신 이후 주님 현존을 상징하던 옛 의미를 잃었으므로, 그 행방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만 남게 되었다. 이번 호로 이스라엘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수고해 주신 필자 김명숙 박사와 애독해 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부터 구약성경에 대한 새 기획이 시작됩니다. 주원준 박사(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가 집필을 맡습니다.

발행일 2016-06-26 제3000호 18면

[이스라엘이야기] 포도원지기

이스라엘의 포도원 전경. 출처 위키미디어 필자가 이스라엘에서 유다인과 아랍인을 벗 삼아 산 세월은 십수 년이다. 지금은 어떤 자리에서 중동인을 만나면 그 특유의 외모와 습성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이스라엘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동안 그들에게 묻어 있을 2000년 전 예수님의 모습도 숱하게 상상해보았다. 까만 눈동자에 곱슬곱슬한 머리, 태양에 그을린 고동색 피부. 가무잡잡한 내 이웃들을 볼 때마다 아가서의 1장 5-6절이 떠올라 웃음이 나기도 했다. “예루살렘 아가씨들이여 나 비록 가뭇하지만 어여쁘답니다, 케다르의 천막처럼 솔로몬의 휘장처럼. 내가 가무잡잡하다고 빤히 보지 말아요. 햇볕에 그을렸을 뿐이니까요.” 검게 탔다고 덜 아름다운 건 아니라는 한 소녀의 항변이다. 중동의 태양은 정말 지독해서, 오래 노출되면 꼭 숯덩이가 묻은 듯 시커멓게 된다. 피부가 희다 못해 창백한 서양인들은 적갈색 피부가 멋지다고 생각하고 또 일부러 피부를 태우기도 하지만, 피부가 까만 사람은 흰 피부를 동경하는 법이다. 소녀가 가뭇가뭇해진 건 포도원에서 오래 일한 탓이다. 오라비들이 소녀에게 포도원지기 임무를 맡긴 바람에, 정작 자기 포도원은 돌보지 못했다(아가 1,6). 그렇다고 소녀에게 포도밭이 따로 있었다는 건 아니다. 오빠들이 강제 노동을 시킨 것도 아니었다. 가족의 생업을 돕느라 제 몸 가꿀 겨를이 없었다는 뜻이다. 성경은 여인의 몸을 종종 농장이나 밭에 빗댄다. 이 소녀도 아가에서 과일나무 정원에 빗대어진다(4,12-13). 이사야서 5장 7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포도밭에 비유했다. 자식 낳는 여인과 열매 맺는 농장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소녀는 자기가 봐도 까맸는지 제 피부를 케다르의 천막, 솔로몬의 휘장에 견주며 과장한다. 둘 다 검은 염소 털로 만든 거라 흑진주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다. 케다르는 어원도 ‘검다’라는 뜻을 지녔다. 케다르인들 피부색뿐 아니라, 그들이 사는 텐트(예레 49,29; 시편 120,5 등 참조)도 검었기 때문이다. 케다르는 아라비아 부족들 가운데 하나였는데(에제 27,21 참조), 성경에는 이스마엘의 후손(창세 25,13; 1역대 1,29)으로 나온다. 에돔 땅 동편에 있는 광야에 살았으므로 이스라엘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활 솜씨가 특히 뛰어난 민족이었던 듯하다(이사 21,16-17 참조). 아라비아 부족들은 예부터 방목에 종사해왔다. 양이나 염소를 많이 키웠기에 염소 털로 텐트를 짜곤 했다. 이집트 탈출 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주님께 성막을 지어 봉헌했을 때도, 성막 위에 씌울 천막을 검은 염소 털로 만들었다(탈출 26,7). 무궁화 꽃 모습. 그렇다면, 아가가 소개하는 이 아름다운 포도원지기는 누굴까? 사실 아가는 노골적이고 색정적인 표현으로 연인 간의 애정을 묘사하고 있어, 정경에 들어가기까지 논란이 많았다. 두 남녀의 관계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사랑, 예수님과 교회의 사랑으로 풀이된 다음에야 경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실제로도 아가에는 그 관계성을 암시해주는 구절이 나온다.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이라 고백하는 2장 16절이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레위기 26장 12절과 상당히 유사하다. ‘내가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말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관계를 표현해주는 대표적 관용구다. 게다가 두 연인은 서로 ‘죽음만큼 강한 사랑’(아가 8,6)을 고백하는데, 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준 예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었다. 대신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으니, 그 사랑은 참으로 죽음만큼 강했다. 그러다 보니 이 소녀를 빗대는 ‘사론의 수선화’(아가 2,1)도 점차 예수님을 상징하게 되었다. 꽃잎이 다섯인 이 수선화는 지중해안의 모래를 뚫고 피어난다. 그래서 메마른 시온에서 끈질기게 피어난 예수님의 사랑(이사 53,2 참조)과 그 몸에 새겨진 다섯 상처가 수선화의 꽃잎 안에 새겨진 듯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우리 국화인 무궁화가 사론의 수선화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라꽃을 보는 눈이 더 깊어진다. 악조건에도 끈질기게 생존하는 무궁화는 ‘피고 또 피어 영원히 지지 않는 꽃’ 아닌가. 몸을 사리지 않고 이스라엘의 포도원을 가꾼 수선화 소녀, 죽음만큼 강한 사랑으로 피고 또 피는 예수님의 수선화,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진 우리 민족의 무궁화 사랑. 안타깝게도 요즘 무궁화가 천대받고 있지만, 이 사론의 수선화를 우리가 더 많이 심고 사랑해야 할 것 같다.

발행일 2016-06-19 제2999호 18면

[이스라엘 이야기] 발라암과 나귀

유다 광야에서 볼 수 있는 나귀 택시. 유다 광야에는 베두인 목동들이 키우는 나귀가 많다. 자기들도 타지만, 대개는 광야 순례자들에게 택시(?)라고 권하며 호객 행위를 한다. 다소곳이 주인 처분만 기다리는 나귀 택시들을 보노라면, 억울하게 발라암에게 얻어맞고 하소연하던 나귀가 떠오르곤 했다. 이 콧대 높은 예언자는 미물 나귀를 통해서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가 민수기 22,22-35에 나온다. 사연은 이러하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이 모압 벌판에 도착하자, 모압 임금 발락이 두려움을 느끼고 백성을 저주하려고 발라암을 초빙했다. ‘발라’는 ‘삼키다’, ‘암’은 ‘친족’을 뜻하므로 발라암은 ‘친족을 삼키는 자’, ‘파괴자’를 뜻한다. 발라암의 파괴적인 주술 능력을 암시해주는 듯한 이름이다. 1967년 요르단에서 발견된 ‘데이르 알라 비문’(기원전 9-8세기)에도 발라암의 이름이 언급되므로, 그가 당시 근방에서 유명한 예언자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방 예언자였지만, 민수기에서는 그가 하느님의 신탁을 듣는다. 발라암이 발락을 따라가지 말라는 주님 대답을 듣고 청을 거절하자, 발락은 극진한 보답을 보장하며 다시 꼬드긴다. 이에 마음이 동한 발라암이 주님 신탁을 재차 확인하니, 이번에는 따라가도 좋다는 대답이 내려 나귀와 함께 길을 나섰다. 그런데 별안간 주님의 천사가 그 길을 막아선 것이다. 천사를 본 나귀가 비켜나서 밭으로 가자, 발라암이 나귀를 때린다. 그의 눈이 가려 나귀도 본 천사를 못 본 탓이다. 이때 주님께서 나귀의 입을 풀어 주시니, 나귀는 영문도 모르고 자기를 세 번이나 때린 발라암에게 꾸짖듯이 하소연한다. 발라암은 칼만 있었어도 말대꾸하는 나귀를 죽였으리라고 위협하지만, 저주의 ‘말’로 이스라엘을 해하기 위해 고용된 그가 언변으로 나귀를 당해내지 못한 건 역설적이다. 게다가 나귀를 죽이려 할 때는 ‘칼’이 필요했다. 발라암은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셨을 때에야 천사를 알아보고, 나귀 덕에 목숨을 구하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모압 땅의 모래 폭풍. 발라암이 도착하자 발락은 장소를 바꿔가며 저주를 시도하지만, 발라암은 주님 뜻을 어기지 않고 이스라엘을 끝까지 축복해주었다(민수 23-24장). 그런데 민수 31,16을 보면, 갑자기 프오르에서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끌어들인 범죄(25장)가 발라암의 음모였다는 말이 나온다(“프오르에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발라암의 말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님을 배신하게 하여”). 언뜻 발라암에 대한 전승이 엇갈리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애초부터 발라암은 발락이 제안한 복채의 유혹에 넘어간 상태였다. 발락을 따라가지 말라는 답이 내렸는데도, 발락이 파격적인 대가를 제시하자 주님 뜻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았나? 바로 여기에 뇌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모습이 반영된 것이다. 발라암이 재차 문의했을 때 주님은 당신 뜻을 바꾸시고, 가도 좋다는 허락을 내리셨다. 하느님은 뜻을 마구 바꾸시는 분이 아니지만, 그릇된 자에게는 그릇된 모습으로도 드러내신다(2사무 22,27: “깨끗한 이에게는 깨끗하신 분으로 대하시지만 그릇된 자에게는 비뚤어지신 분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참조). 주님 천사도 발라암의 검은 속마음 때문에 길을 막고 그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결국 금품에 미련이 남은 그는 이스라엘을 해할 요량으로 모압 여인들을 보내, 주님의 분노를 사게 된 듯하다. 신약성경에는 발라암의 이미지가 더욱 부정적으로 발전하여, 불의한 돈벌이를 좋아하고 그릇된 길을 보여주는 자로 묘사된다(2베드 2,15). 발락을 부추겨 이스라엘 앞에 걸림돌을 놓고,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우상과 불륜을 저지르게 한 자로도 평가 받는다(묵시 2,14). 그런데 이런 발라암이 예수님 탄생 성화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아마 이것은 모압 평야에 진을 친 이스라엘을 보며 그가 신탁을 내릴 때 메시아 관련 예언을 남겼기 때문으로 보인다(민수 24,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모습 옆이나 뒤로 발라암과 나귀를 그려 넣어, 그 옛날 이방 예언자도 구세주 신탁을 선포했음을 알리려 했다. 본디 민수기가 발라암 이야기를 서술한 목적도, 이방 예언자마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인정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발라암의 목숨을 구해준 나귀는 훗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타신 짐승으로 나온다.

발행일 2016-06-12 제2998호 21면

[이스라엘이야기] 에돔과 이두매아

요르단에 있는 광야 ‘와디 룸’. 출처 위키미디어 이스라엘 옆 나라 요르단에는 붉고 노란 모래로 빛나는 광야가 있다. ‘와디 룸’이라 불리는 곳이다. 홍해에서 북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계곡인데,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를 찍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와디 룸은 광야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장소다. 한 번 다녀오면 상사병에 걸린 듯 한동안 와디 룸 앓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발목까지 빠지는 붉은 모랫길을 걸을 때, 바로 여기가 에사우의 땅 에돔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에돔은 ‘붉다’, ‘빨갛다’라는 뜻으로 에사우의 피부색을 반영한 이름이다. 에돔은 성경에 자주 나오지만,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그리 많지 않다. 에사우가 조상(창세 36,1)이라는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알고 보면 모세의 형 아론이 에돔 경계에 있는 호르 산에 묻혔고(민수 20,22-29),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한 헤로데 임금도 부계 혈통으로 에돔인이었다. 에돔에 얽힌 이야기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야곱과 쌍둥이로 잉태된 에사우는 태 안에서부터 영역 다툼을 벌였다. 먼저 태어난 그는 몸이 붉고 털이 많아 ‘에사우’라 불리게 되었다. 동생은 형을 이기려는 듯 발꿈치를 붙들고 태어나 ‘야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창세 25,25-26). 에사우는 에돔,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다. 에사우는 배 속 싸움에서 승리했듯 육체적으로 우위였다. 커서도 솜씨 좋은 사냥꾼이 된다(창세 25,27). 그가 칼에 의지하여 살게 되리라는 구절(창세 27,40)도 에사우의 거친 성격을 암시해준다. 반면, 야곱은 천막에서 살아 온순한 이미지를 준다. 외형적으로는 에사우가 강했지만, 선택받은 아들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인생의 무게가 덜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선택받지 못했어도 그의 삶 또한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약삭빠른 야곱보다, 고집스럽고 무뚝뚝한 에사우에게 더 동정이 간다. 배고픈 형에게 그냥 줘도 됐을 콩죽으로 장자권을 앗아가고 형으로 분장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에 비해, 야뽁 강에서 동생을 재회했을 때 호방히 용서할 수 있었던 형다운 모습(창세 33,4)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는 한순간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장자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아우에게 뒤꿈치를 잡혔다. 그래서 에돔은 맏이답게 왕국을 먼저 확립하지만(창세 36,31), 다윗에게 정복당하여(2사무 8,14) 야곱의 우월을 증명해 주었다. 에사우가 들이킨 콩죽의 ‘붉은’ 색도 그의 다혈질적 성격과 에돔의 호전성(오바 10절)을 암시해준다. 에사우는 기름진 땅이나 하늘의 이슬 대신 칼에 의지해 살아갈 운명이 되었지만(창세 27,39-40), 나중에는 장정을 사백이나 거느릴 만큼 세력이 커진다(창세 33,9). 그가 정착해 산 곳은 세이르 지방이었다(창세 32,4 등). ‘털이 많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싸이르’라 하는데, 싸이르한 에사우가 세이르 곧 쎄이르 땅에 정착한 것이 흥미롭다. 본디 그는 가나안에 살았지만, 가산이 많아 가나안 땅이 야곱과 함께 살기에 좁았다고 한다(창세 36,5-8). 그 뒤 세이르는 대표적 에돔 영토가 되어, 에돔의 별칭으로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민수 24,18; 에제 35,15 등). 와디 룸보다 북쪽으로 좀 더 올라가는 산악 지대다. 사실 에사우는 아우에게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긴 뒤, 살인을 생각할 정도로 오랫동안 앙심을 풀지 않았다(창세 27,41). 그의 원한은 야뽁 강에서 야곱을 다시 만났을 때 사라진 듯했지만, 은연중에 자자손손 이어져 에돔의 적개심과 복수 행각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이사악이 야곱에게 내린 축복처럼, 에돔은 끝끝내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다 기원전 6세기 유다가 바빌론의 손에 망하자 에돔은 오랜 앙금을 담아 유다에게 복수했으며(에제 35,5; 오바 12-14절 참조), 마침내 제 목에서 이스라엘의 멍에를 떨쳐버릴 수 있었다(창세 27,40 참조). 바빌론 유배와 제2성전기를 거치는 동안에는 에돔이 이스라엘 땅의 남부 지방으로 침투해온다. 그래서 이스라엘 남동쪽이던 본래 위치가 이동하게 되었으며, 이름도 ‘이두매아’라고 바뀌어 불린다(1마카 5,3 참조).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한 헤로데 임금의 아버지가 바로 이두매아 출신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에돔은 유다의 왕좌를 차지한 헤로데를 통해 과거 역사를 묘하게 설욕한 셈이다. 붉고 노란 모래 속에 에사우의 흔적을 간직해온 와디 룸! 웅장하게 늘어선 바위산과 빛나는 토양은 에사우가 살아온 광야 같은 삶을 아름다운 색깔로 채색해준다.

발행일 2016-06-05 제2997호 18면

[이스라엘 이야기] 판관 기드온

기드온과 삼백 명의 군사들. 출처 바이블 카드 기드온은 므나쎄 출신 판관이다. 판관기가 전반적으로 그랬지만, 그는 무척 혼란한 시대를 살았다.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한 죄로, 이스라엘이 노동한 대가를 거둬들이지 못하는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백성이 씨를 뿌려 놓으면, 미디안과 이민족들이 올라와 양식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았다고 한다.(판관 6,3-4) 기드온이 판관으로 세워진 사연은 퍽 특이하다. 오프라에 있는 집에서 적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밀을 몰래 떨고 있는데, 향엽나무 아래에서 천사가 주님의 메시지를 전한다. 향엽나무의 히브리어 이름은 ‘엘라’인데, 이름 안에 하느님을 뜻하는 ‘엘’이 포함돼 있어 신성한 나무로 여겨졌다. 그러니 천사가 향엽나무 아래에 나타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이런 신성 때문에 향엽나무는 우상 숭배 장소로 타락하기도 했다.(에제 6,13; 호세 4,13 참조) 기드온의 향엽나무 밑에도, 그가 무너뜨리기 전까지 바알 제단이 있었던 것이다.(판관 6,25 참조) 처음에는 기드온이 천사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구약 시대 천사는 대개 평범한 모습으로 발현했기에 뒤늦게야 정체를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도 아들에 대한 수태고지를 전해준 이가 천사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제단 불길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판관 13,16.20-21) 기드온도 천사에게 그가 하느님의 전령임을 확인해주는 징표를 달라고 청한다. 이에 천사는 돌에서 불이 나오게 하여 기드온이 놓은 고기와 빵을 불살라 자기 정체를 증명해 준다.(판관 6,20-22) 당시 미디안이 진영을 꾸린 곳은 모래 언덕 아래 평야였다. 갈릴래아 지방을 지날 때마다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기드온은 그 맞은편 하롯 샘에 진을 쳤다.(판관 7,1) 미디안은 어떤 민족이었나? 아브라함과 그의 둘째 부인 크투라의 후손으로서, 본디 동방 땅에 살았다고 한다.(창세 25,1-6) 이스라엘 기준에서 동방이니, 지금의 요르단 동쪽 광야 방향이다. 그러다가 미디안이 남쪽 시나이 광야까지 유랑해 내려간 듯하다. 모세의 장인 이트로가 미디안 사람이었기 때문이다.(탈출 2,15-21) 그런데 흥미롭게도 기드온 바로 전인 드보라 시대에 가나안 장군 시스라를 쓰러뜨린 이도 미디안과 관계 있는 카인족 야엘이었다.(판관 4장) 카인족은 모세 장인의 후손이다.(판관 4,11) 그러니 이스라엘을 도와주던 미디안이 기드온 시대에 위협 세력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국제 관계라는 것이 좋았다가도 얼어붙듯, 미디안과 이스라엘 사이에도 비슷한 기복이 있었던 듯하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 요즘에도 안전하지 못한 먹거리 탓에 걱정이 많지만, 고대에는 땅의 소출을 잃는 건 민족의 미래를 위협하는 큰일이었다. 기드온은 군사 삼백을 추려 미디안 제압에 나선다. 군대가 너무 크면 이스라엘이 자기가 강해서 승리했다고 자만할 수 있으므로, 하느님이 숫자를 제한하셨다. 하롯 샘에서 물을 개처럼 핥아먹는 삼백 명만 뽑으셨다.(7,2-7) 사실 무릎을 꿇고 물을 떠먹는 병사가 뒤에 매복한 적도 살필 수 있어 더 노련하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일부러 노련하지 않은 병사들로 골라, 전쟁을 승리로 이끄실 주체가 당신임을 알리려 하셨다. 기드온이 적을 제압하는 방법도 독특했다. 삼백 군사와 함께 밤에 기습 공격하면서, 단지를 깨고 나팔을 불며 적을 교란시켰던 것이다. 미디안은 혼란에 빠져 한동안 자기들끼리 쳐 죽이다가, 자기들이 쳐들어온 방향인 요르단 동쪽으로 도망친다.(7,22) 기드온은 므나쎄를 비롯하여 납탈리, 아세르, 에프라임 지파까지 동원해 끝까지 추격했으며, 참패한 미디안은 그 이후로 이스라엘을 위협하지 않게 되었다. 성경은 주님이 미디안을 꺾으신 이 공적을 두고두고 치하한다.(이사 9,3; 10,26; 시편 83,10 참조) 하지만 이스라엘은 주님이 우려하신 바대로, 승리의 근원이신 주님보다 기드온에게 주목하며 그를 임금으로 세우려는 움직임마저 보였다. 물론 기드온이 자기 분수를 알고 권력은 사양하지만, 대가로 백성에게 전리품을 요구하는 욕심을 보인다.(판관 8,22-28) 지역 유지들의 딸들도 아내로 맞아 아들을 일흔이나 낳는다.(8,30 참조) 씨족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 억눌리던 옛 한이 터진 탓일까? 마지막에 범한 이 어리석은 행위는 결국 자기 집안에 올가미가 되어 돌아오게 되었다.(8,27) 그리고 이런 기드온의 실수는, 시작하는 재주가 위대해도 마무리 짓는 재주가 더 위대하다는 속담을 되새기게 한다.

발행일 2016-05-29 제2996호 18면

[이스라엘 이야기] 이집트 신학의 중심 ‘심장’

‘사자의 서’ 파피루스 일부.(저울 왼쪽에 망자의 심장, 오른쪽에 마아트의 날개가 있다. 저울 아래 앉아 있는 괴물은 ‘아미트’다.) 고대 이집트 신학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이집트인들이 심장에 부여한 중요성일 것이다. 지금도 감정을 표현할 때 우리는 ‘심장이 쫄깃하다’는 신조어를 비롯해, ‘심장이 뜨겁다’, ‘강심장’ 등 몸의 기관 가운데에서도 심장을 자주 끌어들인다. 이는 예부터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에서도 비슷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듯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 ‘뇌’하기에 달렸다고 하지는 않는다. 마음 심(心)자도 심장 모양을 본따 만들어진 글자라고 한다. 고대 근동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성경에 나오는 ‘마음’은 대부분 심장을 의역한 말이다.(창세 8,21 등) 옛 이집트인들도 감정과 기억, 지혜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뇌가 아니라 심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라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보관한 것도 심장이었다. 뇌는 필요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내버렸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보유한 높은 의학 수준에도(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 참조), 뇌와 심장의 역할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특히 심장에 관련된 이집트인들의 신학은 탈출기에도 반영되어 있어,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보낸 세월을 감안하면, 이런 영향 관계는 무척 자연스럽다. 솔로몬이 맞아들인 왕비도 파라오의 딸이었듯(1열왕 3,1), 왕정 시대에도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문물 교환은 활발하게 이어졌다.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오시리스 신상’. 이집트 신학에서 심장이 맡은 역할을 확인하려면,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을 알아야 한다. 사자의 서는 망자가 하게 될 사후 여행에 대한 안내서로, 그가 저 세상에 잘 도착하도록 도와줄 주문을 다수 기록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주문은 망자의 심장을 마아트의 깃털과 함께 달아 무게를 재는 의식에 관한 것이다. 망자가 내세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는 의식인데, 사자의 서에 담긴 주문이 해당 의식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이끌어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망자를 묻을 때 사자의 서를 함께 매장하곤 했다. 이 의식에서 망자의 심장 무게를 가늠하게 될 깃털은 우주적 진리와 화합의 상징인 ‘마아트’의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마아트를 법과 정의·조화·진리·지혜의 여신으로 섬겼다. 태양신 라의 딸이며, 달의 신 토트의 아내다. 마아트는 보통 깃털을 머리에 꽂거나, 새의 날개를 양손에 든 모습으로 등장한다. 만약 망자의 심장이 마아트의 깃털보다 가벼우면, 망자는 저승의 신인 오시리스에게 갈 수 있다. 오시리스는 사후 법정에서 재판관 역할을 맡은 신으로, 법정의 수호 여신인 마아트의 뜻을 받들어 최대한 공정하게 판결을 내린다. 그런데 만약 망자의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그는 아미트라 불리는 괴물에게 먹힌다. 아미트는 악어, 사자, 하마의 모습이 섞인 괴물이다. 이 괴물에게 먹혀 버리면 망자는 저승에 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모든 걸 종합해 알 수 있는 건 심장이 무거운 사람은 죄 많은 사람, 심장이 가벼운 사람은 죄 없는 사람을 뜻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성경을 열어 탈출 10,1을 보자. 주님께서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 마음을 완강하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 구절을 히브리어 본문에서 직역하면, 이집트 관점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뜻이 담겨 있다. ‘완강하게 하다’라는 말이 사실은 ‘무겁게 하다’이기 때문이다. 곧, ‘주님께서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 심장을 무겁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전하는 직설적 의미는 그들 심장을 무겁게 만들어 죄를 짓게 하시겠다는 것으로, 이집트인들을 겨냥한 말씀에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지금도 우리는 ‘마음이 무겁다’ 또는 ‘가볍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흥미로운가? 성경에 반영된 이집트 문화는 이것 말고도 많다. 공정한 통치로 세상에 마아트를 유지시킬 의무가 있던 파라오는 이집트어로 ‘페르-아’(per-aa)라 하는데, ‘큰 집’을 뜻하는 말이다. 임금이 사는 궁전을 가리킨다. 이는 우리나라 왕조 시대에 왕비를 ‘중전’이라 부른 것과 유사하다. 중전은 ‘중궁전’(中宮殿), 곧 왕비가 거처하던 궁을 일컫는 말이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조선시대 문장가 유한준의 말처럼, 단순하게 지나갈 수 있는 성경 구절도 그 숨은 의미를 찾아 다시 보면 새롭다. 김명숙(소피아) :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발행일 2016-05-22 제2995호 18면

[이스라엘 이야기] 쥐엄나무

예루살렘 눈물 성당 입구에 자라는 쥐엄나무. 쥐엄나무는 신약성경에서 돼지 밥으로 통한다. 아버지 재산을 미리 받아 탕진한 아들이 돼지치기가 됐는데, 배가 너무 고파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먹기를 바랐지만 얻지 못했다고 한다.(루카 15,16) 돼지 밥으로 언급된 이 열매가 바로 쥐엄 열매다. 탈무드(샤밧 155a)도 짐승 사료 가운데 하나로 쥐엄 열매를 언급하고 있다. 기아가 심할 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 열매로 배를 채웠다 하니, 일종의 구황작물이기도 했다. 열매는 콩꼬투리 모양으로 주렁주렁 열리는데, 껍데기는 딱딱해도 씹으면 꽤 달콤하다. 맛은 초콜릿하고 비슷하지만, 끝 맛이 떫어서 그리 인기 있는 열매는 아니었다. 지금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초콜릿 대신 이 열매와 시럽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지만 말이다. 비타민, 단백질, 무기질, 섬유질을 고루 갖춰 영양가가 높다고 한다. 쥐엄나무는 이스라엘을 포함해 키프로스, 터키 등 지중해 지역에서 잘 자란다. 예루살렘 올리브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눈물 성당’(예수님이 타락해가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한탄하신 마태 23,37-39를 기념하는 곳) 입구에도 쥐엄나무가 두 그루 자란다. 쥐엄나무는 히브리어로 ‘하루브’, 영어로는 ‘케롭’(carob)이라 한다. 일명 메뚜기 나무로 통하는데, ‘하루브’라는 이름이 ‘하가브’(메뚜기)하고 비슷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듯하다. 학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먹었다는 메뚜기(마르 1,6)가 쥐엄 열매였다고도 추정한다. 때문에 쥐엄 열매는 ‘세례자 요한의 빵’이라는 애칭도 얻었다. 완숙한 열매. 이 열매는 한 여름이 지날 무렵부터 갈색으로 완숙한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추수할 수 있어, 가난한 이들의 먹을거리이자 짐승 사료가 되었다. 그러니 고대에는 쥐엄 열매가 가난의 상징이었던 셈. 그러다 위상이 역전된 건, 쥐엄 열매 씨 캐롭이 다이아몬드 무게를 재는 ‘캐럿’(carat)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쥐엄 열매 씨는 예부터 무게를 재는 단위였다. 성경에 나오는 ‘게라’(에제 45,12)가 그 씨를 가리키는 도량형이다. 게라 하나는 0.45~55그램 사이였다고 한다. 씨앗 크기는 수박 씨 두 배 정도로, 완두콩보다는 작다. 그런데 이렇게 보석 단위가 되어 신분(?)이 급상승했으니,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마태 19,30)처럼 그 반전이 눈부시다. 쥐엄나무는 구황작물이자 동물 사료로서 좋은 역할을 해왔지만, 열매는 일흔 해가 지나야만 맺힌다. 탈무드(타아닛 23a)에는 쥐엄나무의 이런 특성에 얽힌 이야기가 나온다. “주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되돌리실 제 우리는 마치 꿈꾸는 이들 같았네”(시편 126,1)라는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한 ‘호니’라는 의인 이야기다. 그는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이스라엘(시온)이 운명을 회복하는 데- 곧 유배에서 풀려나는 데- 일흔 해 걸렸는데(2역대 36,21; 예레 25,12 참조), 어떻게 그동안 잠을 자면서 꿈꾸는 일이 가능한지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쥐엄나무를 심고 있는 남자를 보고, 열매 맺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나 심느냐고 물었다. 그가 70년이라고 대답하자, 호니는 ‘그럼 당신은 70년 더 살 자신이 있으신가 보군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나는 내 조상이 심어놓은 쥐엄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소. 이 나무는 내 후손을 위한 거요’라고 대꾸했다. 그 뒤 호니가 그 근처에서 식사를 했는데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그런데 깨어 보니 어떤 남자가 쥐엄 열매를 모으고 있지 않겠나? 그 남자에게 당신이 그 나무를 심은 사람이냐고 물어보니, 그의 손자라고 대답했다. 곧, 호니가 자는 동안 일흔 해가 흐른 것이다. 놀란 호니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아무도 그가 호니라고 믿어 주지 않았다. 이에 호니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올린 뒤 쓰러져 죽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이러하다. 유배의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으로 가는 길은 멀어 보여도, 일단 지나고 나면 쏜살같다. 그렇지만 그걸 그냥 건너뛰려면, 호니처럼 평생 보낼 시간과 그 안에 찾아올 수많은 경험, 사연도 희생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만약 시간을 압축해서 그다음 시대로 곧장 간다면, 그때도 여전히 예전의 나로 남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가 저마다 소명을 행할 수 있는 곳은 지금 이 세상이지, 그다음 시대가 아니다. 바로 이 이야기에 70년을 기다려 열매를 내보내는 쥐엄나무가 등장한다. 김명숙(소피아)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발행일 2016-05-15 제2994호 18면

[이스라엘 이야기] 다윗과 골리앗

예루살렘 다윗 성채 박물관에 있는 다윗상. ‘필리스티아’ 하면, 다윗이 쓰러뜨렸다는 골리앗을 떠올리게 한다. 골리앗의 민족 필리스티아는 기원전 12세기경 에게 해 방향에서 들어온 이주민이다. 지중해 쪽으로 정착하기 시작해, 이스라엘에서는 갓·에크론·아스돗·아스클론·가자라는 다섯 성읍을 차지했다.(여호 13,3) 이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한 가자는, 삼손이 필리스티아 신전을 무너뜨리고 최후를 맞은 곳이다.(판관 16,23-30) 갓은 골리앗의 고향이다.(1사무 17,4) 사울 시대만 해도 필리스티아는 이스라엘보다 우세했다. 이스라엘은 청동기를 사용한 반면, 필리스티아는 철기 문화를 독점하고 있었다. 청동이 철보다 약한 건 아니지만, 제작 방법이 까다로웠다. 성경은 사울과 요나탄을 제외하고 군사들은 칼도 창도 없었다고 전한다.(1사무 13,22) 백성이 농기구를 벼리려 해도, 필리스티아까지 가야 했다.(1사무 13,20) 필리스티아가 우위를 차지하던 상황은 다윗 시대에 가서야 역전된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당시 필리스티아에 몸을 숨긴 적 있었는데,(1사무 21,11-16) 그때 필리스티아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아닌가! 필리스티아는 이스라엘 중앙으로 진출하려고 늘 호시탐탐 엿보았기에,(1사무 7,7-14 등 참조) 이들 사이에는 전쟁이 잦았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전쟁은 1사무 17장에 나온다. 필리스티아는 소코와 아제카 사이에 진을 치고 있었고, 사울은 엘라 골짜기에 군사를 집결시킨 상태였다.(1-2절) 쉽게 말하면,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두 진영이 대치한 상황이다. 필리스티아에서 먼저 골리앗이라는 거구가 나와, 일대일로 겨루자고 도전해온다. 전 군사가 맞붙어 싸우는 게 아니라 일대일로 승부를 내는 건 필리스티아의 고향인 그리스에서 자주 사용하던 방식이었다.(「일리아스」 3권: 트로이아 장군 파리스와 헬레나의 전남편 메넬라오스의 대결 참조) 군사들이 흘릴 피를 최소화하려는 목적이었는데, 다윗 병사들도 나중에 사울 아들인 이스보셋 병사들과 전쟁할 때 비슷한 전법을 사용한다.(2사무 2,14-16 참조) 당시 다윗은 베들레헴 집에 있었다. 아버지 이사이는 출전한 세 아들의 안부를 살피려고 막내 다윗을 심부름 보낸다. 베들레헴에서 아제카까지 꽤 먼 거리였기에, 다윗은 아침 일찍 출발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20절) 그런데 그곳에서 할례받지 않은 한 부정한 필리스티아인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걸 듣고,(26절) 자기가 나가 싸우겠다고 자원한다. 할례는 이스라엘 고유의 전통이 아니라 주위 이민족들도 행하는 관습이었지만, 필리스티아는 그리스 출신이라 할례를 받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할례받지 않은 자는 죽은 뒤에라도 포피를 잘라내야 할 만큼 부정하다고 여겼다.(1사무 18,27 참조) 이런 이방인이 하느님을 욕보인 것이다. 결국 다윗은 힘센 장정들을 제치고 골리앗과 겨루게 되는데, 양을 칠 때마다 맹수의 위협을 막아냈다는 그의 말(34-36절)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골리앗은 볼이 붉고 선연한 소년 하나가 다가오자 그를 업신여긴다. 다윗이 쥔 막대기가 얼마나 허약한지만 볼 뿐,(43절) 그가 챙긴 돌이나 머릿속에 세운 전략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골리앗은 방패병의 호위까지 받고 있었으므로,(41절) 돌 몇 개 있는 다윗과 완전 무장한 그의 대결은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하지만 골리앗은 덩치가 너무 커서, 방패병이 얼굴은 가려줄 수 없었다. 다윗은 무릿매질로 방심한 골리앗을 쓰러뜨리는데, 당시 무릿매질은 아이들 놀이가 아니라 군인도 사용하던 전쟁 기술이었다.(판관 20,16 참조) 표적을 정확히 겨누어 쓰러뜨리려면, 날래고 숙련된 솜씨가 필요하다. 다윗은 둘 사이 간격이 적당히 좁혀지자, 돌을 조준하고 재빨리 이마에 명중시킨다. 그러자 태산 같던 골리앗이 얼굴을 땅에 박고 쓰러졌는데, 그 모습은 필리스티아 신전에서 얼굴을 땅에 박고 주님의 궤 앞에 쓰러진 다간 신상(1사무 5,4)을 떠올리게 한다. 이 전투를 두고 말콤 글래드웰은 이런 말을 했다. “강해 보인다고 강한 것이 아니며, 약해 보인다고 약한 것이 아니”라고. 이순신 장군도 임진왜란 때 보잘것없는 조선 수군의 힘으로 막강한 왜군을 격파했다. 장군이 총통을 쏴 적함에 접근하지 않고도 침몰시킬 수 있었듯, 다윗은 골리앗의 거구에 다가가지 않고도 무릿매질로 그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북서쪽이 에게해, 동쪽이 이스라엘이다. 붉은 색은 필리스티아인의 이동 경로다. 김명숙(소피아)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발행일 2016-05-08 제2993호 18면

[이스라엘 이야기] 요시야 임금과 여예언자 훌다

요시야 임금이 전사한 므기또 유적지. 기원전 7세기로 돌아가 보자. 이스라엘에서는 남왕국의 위대한 임금 요시야와 여예언자 훌다를 만날 수 있다. 요시야는 여덟 살 나이로 왕위에 오른 뒤(2열왕 22,1), 성경에서 한 번도 흠을 꼬집은 적이 없는 유일한 임금이다. 특히 그는 우상 숭배로 물든 이스라엘 종교를 개혁하는 업적을 남겼다. 이곳저곳 세워 놓은 산당을 모두 없애고, 종교 전례를 예루살렘 성전 한곳으로만 집중시켰던 것이다(2열왕 23,4-20). 요시야는 부전자승(父傳子承)이라는 옛말이 무색하게, 아버지 아몬이나 조부 므나쎄와 달리 신앙의 모범을 보였다. 그의 행적은 오히려 증조부 히즈키야를 떠올리게 한다. 히즈키야도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없애,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다(2열왕 18,4). 사실 산당이 처음부터 부정한 곳은 아니었다. 성전을 봉헌하기 전에는 사무엘(1사무 9,12-13)이나 솔로몬(1열왕 3,2-3)도 산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산당이 불법이 된 건, 가나안의 악습이 되살아나거나 이방 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 우상 숭배 장소로 타락했기 때문이다(1열왕 14,23-24; 2열왕 21,2-3 등 참조). 요시야가 종교 개혁을 단행하게 된 계기는 성전에서 율법 두루마리를 발견한 사건이었다. 당시 그는 대사제 힐키야를 감독으로 두고, 성전을 정화·보수하던 참이었다. 이 작업을 위해 많은 백성이 헌금했으며, 그 돈으로 일꾼들 보수를 마련했다. 그러던 중 율법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던 것이다(2열왕 22,3-9). 힐키야는 발견한 두루마리를 서기관 사판에게 주어, 요시야 임금에게 읽어 주도록 했다. 요시야는 사판이 낭독하는 두루마리의 율법을 듣고, 유다 백성이 행하던 관습과 너무 달라 옷을 찢으며 애도했다(2열왕 22,13). 옷을 찢는 건 몸의 일부가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상징한다. 아버지와 조부의 우상 숭배로 백성이 잘못된 길로 빠졌다는 사실을 통감한 것이다. 그래서 그 두루마리의 율법이 아직도 유효한 건지 하느님께 문의해 보기로 결정한다. 당시 유다에는 예레미야와 스바니야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두 예언자 모두 아시리아 점성술을 근절하고 이스라엘 신앙을 바로 세우는데 노력한 이들이다. 그런데 요시야는 그 둘을 제치고 여예언자 훌다에게 고위층 사절단을 보냈다(2열왕 22,14). 남성위주 사회였는데도 여인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물어보다니 신기할 정도다. 뿐만 아니라 훌다가 두루마리의 권위를 인정하자, 요시야는 군말 없이 그 율법대로 산당을 없애는 종교 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학자들은 성전에서 발견한 두루마리가 신명기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단 요시야 임금이 행한 종교 개혁 내용이 신명기 율법(12,1-11 등)과 일치한다. 요시야가 주재한 파스카 축제(2열왕 23,21-23)도 탈출 12장보다는 신명 16,1-8을 따른 것이다. 탈출기는 각 가정에서 파스카를 지낼 것을 규정하지만, 신명기는 주님께서 당신 이름을 두신 곳, 곧 예루살렘에서만 지내야 한다고 율법을 수정하고 있다. 요시야가 파스카를 지낸 곳은 예루살렘이었다. 하지만 그가 남자 예언자들을 제치고 훌다에게 문의한 건 참으로 수수께끼다. 구약 시대 활동한 여예언자는 총 다섯으로, 손에 꼽을 만큼 소수다. 훌다를 뺀 넷은 미르얌(탈출 15,20), 드보라(판관 4-5장), 이사야의 아내(이사 8,3), 노아드야(느헤 6,14)다. 탈무드는 훌다가 예레미야의 친척이었다고 전한다(메길라 14b). 곧, 자기 친척이라서, 요시야 임금이 훌다를 대신 찾아도 예레미야가 서운해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다. 유다 전승 다른 하나는, 남자보다는 여자인 훌다가 주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더 적당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아람어 성경(타르굼)은 훌다가 예루살렘에서 교육 기관을 운영했다고 덧붙여 엘리트였음을 암시했다. 요시야가 훌다를 찾은 이유가 무엇이었든, 훌다의 영향력과 중요성은 예루살렘 성전에 반영되어 ‘훌다 문’이라 불리는 게이트가 있었다. 지금도 그 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더니, 훌다는 성전 문에 자기 이름을 새겨 명성을 제대로 남긴 셈이다. 그리고 조상과 백성의 죄를 고백하고 종교 개혁을 단행한 요시야 임금은 훌다의 신탁대로(2열왕 22,20: “내가 이곳에 내릴 모든 재앙을 네 눈으로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유다 왕국이 몰락하는 비극(기원전 587/6년)은 보지 않고 죽었다. 다윗 성채 박물관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훌다 게이트 유적. 김명숙(소피아)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발행일 2016-05-01 제2992호 18면

[이스라엘 이야기] 에제키엘

예루살렘 다윗 성채 박물관에 있는 바빌론의 유배 생활을 묘사한 부조.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부·권력·명성을 가진 사람이 사회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 지도층이 갖추어야 할 높은 도덕성을 의미한다. 옛 이스라엘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를 꼽으라면 에제키엘을 빼놓을 수 없다. 에제키엘은 신분 높은 사제 출신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민족 존립의 위기를 겪을 때 그걸 극복하도록 이끌어준 예언자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즈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에제 1,3) 어린 시절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스물다섯 되던 해인 기원전 598/7년에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자로 살았기에, 그가 활동한 곳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현 이라크)였다. 유다 임금 여호야킨과 귀족들만 유배당한 시기에 함께 유배된 걸로 보아, 명문세족에 속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에제키엘은 시종일관 ‘사람의 아들’이라는 익명으로 자신을 감추며(3,1; 12,2 등),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투신하는 겸손을 보였다. 에제키엘은 히브리어로 ‘예헤즈케엘’이라 하며, 이름 뜻은 ‘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시다’이다. 본디 나이 서른에는(민수 4,2-3 참조)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로 봉직해야 했지만, 바빌론 유배라는 정황상 예언자 소명을 받고 활동했다. 그가 거주한 마을은 크바르 강 가 텔 아비브 정착촌(에제 3,15)으로 추정된다(크바르 강은 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들이던 운하다). 유배지에서 에제키엘은 유다 원로들이 찾아와 조언을 구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8,1; 20,1 등 참조) 하지만 예언을 밥벌이 삼아 백성을 속이는 거짓 예언자들이 주변에 워낙 많아, 소명 수행이 쉽지 않았다. 예루살렘과 성전 몰락을 예고하는 에제키엘과 달리, 거짓 예언자들은 바빌론이 곧 물러가고 평화가 찾아온다는 감언이설을 선포했기 때문이다.(13,10: “정녕, 평화가 없는데도 그들은 평화롭다고 말하면서, 내 백성을 잘못 이끌었다” 참조) 동료 유배자들도 듣기 싫은 질책이나 재앙을 선포하는 에제키엘을 달가워하지 않아 따돌리거나, 조롱거리·비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했던 듯하다.(2,6; 3,9; 21,5: “아, 주 하느님! 그들은 저를 가리켜, ‘저자는 비유나 들어 말하는 자가 아닌가?’라고 합니다” 참조) 이런 상황에서도 에제키엘은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면 자기 목숨도 위험해진다고 생각했을 만큼(3,16-21 참조), 백성 하나하나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다. 예루살렘 몰락 직전에는 하느님이 그의 아내를 앗아가시고 애도조차 허용하지 않으셨음에도 그 상황을 오롯이 견뎠다.(24,16-18: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이튿날 아침에 내가 백성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아픔에 말문이 막혀 애도조차 못하는 에제키엘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기쁨이자 자랑인 성전을 잃는 고통에 애도마저 잊게 될 것임을 예고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외로운 고투에 종지부를 찍은 건 예언대로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고 난 다음(기원전 587/6년)이었다. 그 이후부터 에제키엘은 참예언자로 인정받아, 유배된 백성에게 회복의 시대를 예고해 줄 수 있었다. 예루살렘 파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민족의 죄 때문에 재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며 심판을 선포했지만(1-24장), 나라 멸망 이후에는 제2의 탈출 곧 바빌론 탈출을 선포해 귀환의 희망을 심어주었던 것이다.(33-48장) 이렇듯 에제키엘은 이방 땅에서 제2의 모세처럼 나라 잃은 백성을 이끌었다. 하지만 정작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듯, 에제키엘도 자신이 예언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보지 못하였다. 시온 귀환은 그로부터 몇 십 년 뒤인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정치권의 판세를 뒤집었을 때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느님과 민족을 향한 소명에 지와 덕을 다한 예언자 에제키엘. 고통이 따르는 임무를 맡고 일생을 투신한 그는 처녀의 몸으로 순종해 기꺼이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귀족 출신으로서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백성을 위해 헌신한 책임감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할 수 있겠다. 젊은 날 고향을 떠나 바빌론에 정착한 에제키엘은 그곳에서 마지막 생을 보냈으며, 무덤은 이라크 땅 힐라 마을 근처 알-키플에 있다고 전해진다. 유프라테스 강 전경. 출처 위키피디아 김명숙(소피아)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발행일 2016-04-24 제2991호 18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