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참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선한 의지’의 중요성

이승훈
입력일 2025-06-11 09:13:34 수정일 2025-06-11 09:13:34 발행일 2025-06-15 제 3446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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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이 원하는 ‘보편적인 선’과 일치해야
선한 의도는 윤리적 행위 조건···다른 목적 지닌 선행과 구분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세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을 인간의 ‘참행복’(至福)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구체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에 도달하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를 통해서 참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까?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 전체에서 이 질문을 방대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가능한 한 철저하게 이에 대해 단계적으로 다루어보겠다. 

우리는 앞선 글(제5회)에서 성 토마스가 반사적인 행동들을 포함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이성적인 자유를 지닌 인간으로부터 생겨나는 행위, 즉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했음(I-II,1,1)을 살펴보았다. 토마스는 행복의 다양한 후보에 대한 고찰이 끝나자마자, 이 인간적 행위를 각자가 지닌 지성을 통해 “목적을 인식하면서 전개되는 의지적 행위”(I-II,6,1)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완전한 목적을 인식하고 또 그 목적을 향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의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윤리 규칙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의지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무려 15문제(I-II,qq.6-21)에 걸쳐 의지의 대상, 원인, 움직이는 방식 등을 토대로 ‘의지적 행위’에 대해서 상세히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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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떤 행위를 통해 참 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지에 관해 「신학대전」 제II부 전체에서 방대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신학대전」을 들어 보이는 성 토마스의 모습을 묘사한 베노초 고촐리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승리> 중 일부. 출처 위키미디어

지성적 욕구인 ‘의지’의 선함은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

성 토마스는 독특하게 ‘의지’를 욕구(appetitus)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욕구’란 자신과 유사한 것 또는 자신에게 편리한 것으로 기울어지는 경향(傾向)을 뜻한다. 짐승들은 감각적 본성에 따라 오직 물질적이고 개별적인 선을 향한 ‘감각적 욕구’만을 지닌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감각을 넘어서는 인식 능력인 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성적 욕구’도 지니며 토마스는 이를 ‘의지’(voluntas)라고 부른다.(I,80,2) 이 의지는 단순히 개별적 선들만이 아니라, ‘보편적 선’(또는 적어도 ‘선처럼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I-II,2,8)

이러한 표현은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외부적인 대상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의지가 종속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의지 자체가 발동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저지당할 수 없고, 원하자마자 즉시 실행된다. 물론 의지가 명령한 외부적인 행동들은 여러 요건에 따라서 저지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I-II,6,4) 

토마스는 한편으로 의지를 강조하지만, 윤리적 고려에서 행위의 결과들을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행위자가 악한 결과들에 대해 책임이 있기 위해서는 그가 자기 행위의 악한 결과들을 미리 내다보고 의도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지에게 돈을 주었는데, 그 거지가 나중에 그 돈을 비윤리적으로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기부행위는 윤리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살인 청부업자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원수를 죽이도록 교사했다면, 그의 행위는 분명히 비윤리적이다. 앞의 예처럼 자기 탓 없이 무지(ignorantia)에서 행하는 행동은 의지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토마스는 ‘의지’ 개념이 너무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우려해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가 이성을 이용해서 구체적인 수단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에 ‘의도’(intentio, 지향)라는 별도의 명칭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서 봉사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같이, 비록 선한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다른 목적에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베푸는 행위는 결코 선한 행위일 수 없다. 이와 같이 토마스에 따르면, 윤리적 행위의 일차적인 조건으로는 우선, 주관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선한 의도’(intentio bona)를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인간이 지닌 ‘선한 의도’는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아직 충분조건은 아니다. 

의지와 지성의 긴밀한 상관관계

그렇다면 의도가 선하다는 판정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선을 그 대상으로 삼을 때 선한 것이며, 의지가 작용하는 상황이란 선악의 판정에서 부차적이다.(I-II,19,1&2) 그런데 의지의 선성은 지성에 종속되어 있다. 지성이야말로 의지가 자신의 선택 능력을 실행해야 할 대상을 의지에게 제안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올바르다고 판정한 대상을 의지가 따르지 않는 경우에 이는 질서를 벗어난 것으로 악한 행위가 된다.(I-II,19,3) 

반대로, 최고로 자유로우며 인간의 모든 능력에 대한 최고 통치권을 갖는 한에서, 의지는 “지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절대적으로 말해, 우위는 지성에 속한다고(I,82,3) 주장했기 때문에, 종종 ‘주지주의자’로 분류됐다.

그렇다고 토마스가 의지를 무시하고 지성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의지는 인간을 지성이 관련된 관조의 영역을 넘어서 인도하며 그를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한다. 의지는 욕구하는 대상, 즉 목적을 향해 인간을 밀어붙이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욕구하는 인간은 목적에 이를 때까지 이 목적을 향한 역동적인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의지는 또한 인간을 최종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I,82,1)

따라서 인간적 행위는 그것이 인간의 참행복을 보장하는 최종 목적에 얼마나 상응해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 이렇게 의지의 선성이나 올바름(rectitudo)은 근원적 규범인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의지는 세상에 있는 개별적인 선들보다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보편적인 선’을 원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 의지가 최종 목적인 지복 직관 또는 신적 의지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인간의 자유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의지의 고유한 특성은 자기 행위들의 주인이라는 데 있다. 즉, 의지는 자유롭다. 의지의 어떠한 행위도 필연에 의해 부과되지 않는다.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비록 이러저러한 결정된 대상이 아니라 행복을 자연적으로 욕구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해도, 선택될 수 있는 모든 대상 앞에서 자유롭다.(I,82,2)

그렇다면 최종 목적으로서의 하느님을 원해야 하는 의지와 필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들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다음 회에서 좀더 자세히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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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