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구원의 길 열망하던 지성인들, 가톨릭 신앙에서 해답 찾다
“나는 왜 가톨릭에로 개종하였는가 - 六堂 崔 베드루 南善
대개 가톨릭은 인류 문화의 종교 분야를 담당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말미암아 계시되고 연마되고 완성된 교문(敎門)에 희랍의 철학과 라마(羅馬, ‘로마’의 음역어)의 조직력과 내지 근지사상(近至思想)의 정화까지가 융회(融會, 자세히 이해함) 합성(合成)한 것이다. … 저 조물주로서 천지만물 제일원인을 명시하고 신의 권능과 섭리로서 만물상호의 질서와 조화를 설명한 것이, 그 일단(一端)이다. 이만할진대 개인의 구령으로나 민족의 부활 지도력으로나 아무 부지(不知)함이 없지 아니할까. …나는 이에 유교 불교 모든 교문에 광구(廣求)하여 얻지 못하던 바를 이제 가톨릭에서 얻은 느낌이 났도다. 그리고 아울러 백여년 전 선정(先正, 선대의 현인)의 가톨릭 도입(導入)의 진정신(眞精神)에 신합명계(神合冥契, 신과 하나가 되어 통하는 상태)를 깨달아 못내 기뻐하는 자로다.” (가톨릭時報, 1955년 12월 25일자 5면)
6.25전쟁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교회에서도 전쟁 이전에 조직됐던 각종 단체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선교 활동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1949년 조직됐던 한국천주교중앙위원회는 1952년 활동을 재개, 1955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로 확대 개편됐으며 1959년에는 전국 교구장을 구성원으로 하는 사단법인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습니다.
당대 지식인들의 개종기
흥미롭게도 당시 상당한 수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이들의 개종기가 천주교회보에 자주 실렸습니다. 예컨대 감리교 총이사였던 정춘수(천주교회보, 1952년 11월 1일자), 육당 최남선(가톨릭시보, 1955년 12월 25일자) 등 당시 지식인들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은 상당한 화젯거리였습니다. 천주교회보는 1953년 3월 7일 제122호부터 ‘가톨릭新報’로 제호가 변경됐고, 다시 1954년 1월 15일 제137호부터 ‘가톨릭時報’로 변경됐습니다.
가톨릭시보 1955년 12월 25일 자는 5면 전면을 할애해 당대의 지성 육당 최남선 선생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를 상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이 글은 원래 개종 직후인 12월 17일 자 한국일보에 발표된 것으로, 당대의 지성인답게 자신이 파악한 가톨릭 신앙의 요체를 설명하고,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당위성과 명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육당은 이 글에서 먼저 인생과 종교의 관계를 인체와 공기의 관계에 비유함으로써, 인간 삶에 있어서 종교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전제합니다. 이어 계시로서의 신(神)의 개념을 제시하고, 인간이 신에게서 무한한 생명과 권능을 발견함으로써 신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며, 그것이 종교의 구원 능력으로 인간 앞에 드러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불교 신자였던 육당 최남선…1955년 가톨릭으로 전경 개종
현대사 관통하며 지식인·정치인 등 귀의 이어져
종교적 구원은 개인 넘어 민족적 요청
육당은 나아가 종교적 구원은 개인의 구령인 동시에 국가와 민족의 공동체적 요구에도 적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당대 한국 땅에서 요구되는 종교는 개인 영혼의 구원이기도 하지만 국가와 민족적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육당은 개인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종교적 이상으로부터 인간 삶과 종교 문제에 깊이 천착해왔으며 불교로부터 혼탁한 세상의 구제를 기대했으나 얻은 바가 없다고 토로합니다. 이어 한국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돌아보며 그 찬란한 빛을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정신에서 찾았습니다.
육당은 또한 서양 근세의 문화, 그리고 그 바탕을 이루는 희랍의 정신 문화와 과학적 기초, 르네상스 이래의 인문 정신과 중세 스콜라 철학을 훑어보고 특히 2천 년 가톨릭교회가 보유하고 전하는 진리를 서양 문화의 진수로 파악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정신적 빈곤을 느낀 조선이 서학의 전래로부터 받은 정신적 충격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2천 년 역사를 영위해오면서도 여전히 흔들림이 없는 가톨릭교회에서 그토록 자신이 찾아 헤매던 바를 마침내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개인적 구원을 넘어 조국의 내일을 위해서도 가톨릭을 선택해야 할 명분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오늘날 이 정세에서 한국의 내일을 믿음직하게 맡길 곳이 이 가톨릭을 빼고 또 무엇이 있다 하랴! 1955년 11월 17일에 과거 50, 60년간의 종교적 체험을 청산하고 가톨릭에 입교하여 영세하니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구령(救靈)인 동시에 국가, 민족에 대하여는 조국 근대화의 밑바탕이라고 생각한다. 우둔한 나에게 이러한 식견을 열어주신 천주께 무한한 성총을 감사하면서 이 붓을 놓는다.”
시대 넘어선 지식인의 개종 열풍
육당 외에도 저명한 지성인들의 개종기가 가톨릭시보에 종종 실렸습니다. 전 감리교 목사였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정춘수 씨의 개종기(가톨릭시보, 1952년 11월 1일 자)는 당시 지성인 개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극작가인 이서구 씨도 6.25전쟁 체험 후 치유와 신앙적 필요에서 개종한다(1951년 12월 12일 자)고 밝혔습니다.
국문학자 서창제 씨는 1952년 8월 15일, 김홍섭 판사는 1953년 9월 26일 세례를 받았습니다. 김홍섭 판사는 특히 중죄수에 대한 교회의 활동과 교회사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사도법관(使徒法官)’으로 불렸습니다. 1955년 12월 24일에는 서울대 교수인 국문학자 이숭녕 박사, 이듬해인 1956년에는 훗날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국회의원 김대중 씨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민주당의 집단 개종’으로 불릴 정도로 제2공화국의 정치인들이 대거 입교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이보다 더 많은 수의 저명한 지식인이 가톨릭에 입교했습니다.
이처럼 지성인들과 사회 지도층이 대거 가톨릭에 귀의한 동기는 시대별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납니다. 먼저 1950년대에는 해방의 감격과 전쟁의 참상을 겪은 이들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민족사의 굴곡 속에서 가톨릭교회에서 정신적인 의지처를 찾으려는 경향이 엿보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두 차례의 정치적 혁명과 극심한 사회 변화 속에서 삶의 의미를 궁구하려는 지적 구도 의식이 작용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억압적인 정치 권력과 경제 성장 지상주의 속에서 교회가 정의 구현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는 모범적인 모습에 공감한 지식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1970년대 이후에는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김수환 추기경의 지적인 면모와 잘 훈련된 신학 교육을 받은 가톨릭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이 지식인과 대학생들의 호감을 얻은 면도 있습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