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사도 무덤 위에 세운 ‘바실리카 양식’ 성당 다수 신자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1506년 브라만테에 의해 개축 시작
교회 전승에 의하면 성 베드로 사도와 성 바오로 사도는 기원후 1세기 세상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고 그곳에 묻혔습니다. 로마는 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도시입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이 씻겨 사라지지 않고 땅속 깊이 스며들어 하느님 나라의 싹을 틔웠습니다. 로마 교회는 이렇게 두 사도의 두 기둥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전승과 후대에 쓰인 외경은 성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서 십자가형으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문학과 예술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더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때, 로마 교회는 땅속 깊숙이 좁고 어두운 곳에서 넓고 밝은 데로 나와 성당을 짓고 성찬례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 보편 교회가 11월 9일에 봉헌 축일로 기념하고 있는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이며, 이곳이 로마교회의 주교좌성당이 되었습니다.
또한 318년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실베스테르 1세 교황(314-335 재위)은 네로의 원형 경기장 옆 바티칸 언덕 기슭 성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곳에 첫 번째 사도의 순교를 기념하는 성당을 지어 봉헌했습니다. 이 성당이 새로운 대성당이 들어설 때까지 1200년 동안 여러 차례 이민족의 약탈을 견뎌 내며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맞이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당시 공공의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의 유형은 크게 ‘바실리카’와 ‘신전’의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먼저 바실리카는 공회당 같은 세속적 모임의 장소였기 때문에 다수의 대중을 수용하기 위해서 장방형의 기다란 형태를 가졌습니다. 반면에 신전은 종교적 모임의 장소로 제관만 들어갔고 일반인들은 신전 밖 공간에 머물렀기 때문에 소수의 인원이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정방형 혹은 원형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모임의 성격 면에서 본다면 성당은 사제가 하느님께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곳이기 때문에 신전에 가깝고, 따라서 정방형이나 원형의 형태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제사인 성찬례(미사)는 모든 신자가 참석하는 전례이기에 사제만 들어가는 신전 형태보다는 다수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는 바실리카 형태가 더 어울렸습니다. 이런 필요에 따라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선택하였습니다.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 평면을 보면, 중앙에 신자들이 앉는 넓은 공간인 ‘네이브’(nave)가 있고 양쪽에 통행로인 ‘아일’(aisle)이 두 겹으로 있는, 5랑식 구성입니다. 그리고 바실리카에서 안쪽 깊숙한 곳에 외부로 돌출한 반원형 공간이 있는데 이를 ‘앱스’(apse)라 부르고 그곳에 제단을 두었습니다. 네이브의 천장고와 아일의 천장고 차이를 이용해서 ‘네이브월’(nave-wall)의 상부에 외부에서 빛이 들어오도록 창을 만들었는데 이를 ‘클리어스토리’(clerestory)라고 부르고, 이 창 덕분에 성당의 중앙 바닥까지 빛이 닿았습니다. 천장은 목재로 구조 형틀을 만들고 그 하부를 평평하게 마감한 ‘목조 평천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금처럼 교황이 머무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교황은 로마의 주교이기 때문에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이 교황청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 후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은 황폐해진 상태였고, 이런 이유로 교황은 바티칸의 옛 성 베드로 대성당에 교황청을 마련했습니다.
이후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교회의 중심이 되었는데, 건축한 지 천 년이 넘은 이 대성당 역시 대대적인 보수 및 증축 공사가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처음으로 확장 공사를 시작한 교황은 니콜라오 5세(1447~1455 재위)입니다. 그는 처음에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를 통해서 새로운 대성당을 계획하였으나, 제단의 성가대석 부분을 확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즈음에 교회사적으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으로 멸망한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날인 1453년 5월 28일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에서는 마지막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서방의 로마 교회는 동방의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잃으면서 로마에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위상을 이을 대성당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니콜라오 5세 교황 이후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다시 무관심 속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렇게 50년이 지나고 1503년 율리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교황은 즉시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능가하는 새로운 대성당이 가톨릭교회에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대성당의 건립을 결정하였습니다. 1506년 브라만테의 설계로 새로운 대성당의 초석이 놓였으며, 브라만테는 이후 여러 차례 설계를 변경했는데 안타깝게도 설계 과정과 변경 내용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실 율리오 2세 교황은 브라만테뿐만 아니라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등 어느 시대도 비길 수 없는 건축과 예술의 대가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래서 브라만테가 설계한 대성당이 그대로 지어졌다면, <아테네 학당>이 있는 라파엘로의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에서 출발하여, <최후의 심판>이 있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경당(Cappella Sistina)’을 거쳐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르기까지 순례자들은 신앙과 예술의 향연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고, 브라만테는 그들과 함께 영원한 건축가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