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1700주년 맞은 ‘니케아공의회’…교회 일치의 시작이 되다

이승훈
입력일 2025-06-11 09:12:30 수정일 2025-06-11 09:12:30 발행일 2025-06-15 제 3446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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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특집] 최초의 세계공의회…325년 교부 318명 모여 교리 논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완성…‘주님 부활 대축일’ 산정 방법도 통일시켜

레오 14세 교황은 5월 30일 교황청 사도궁에서 세계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를 만나 튀르키예 방문을 논의했다. 방문지로 거론되는 튀르키예 이즈니크(옛 지명 니케아)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할 예정이었던 도시다. 바로 이곳에서 325년 최초의 세계공의회인 니케아공의회가 열렸다. 니케아공의회 개최 1700주년을 맞는 6월 19일, 그리고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삼위일체 교리를 공고히 한 니케아공의회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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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구에라의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출처 위키미디어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한 분인가?’…삼위일체를 논하다

325년 6월 19일 세계 각지에서 교부(敎父) 318명이 니케아에 모였다.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교리를 주장하며 극심한 분열에 이르자 교회의 일치를 바랐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계의 교부들을 니케아에 모두 소집한 것이었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성자 예수님은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논쟁이었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이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믿음, ‘삼위일체’는 초대 교회부터 이어온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였기에, 이를 잘못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이 나타났다. 그중 4세기에 팽배했던 사상이 아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아리우스주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는 창조되지 않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분은 성부 하느님 한 분 뿐이라고 봤다. 그렇기에 성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피조물, 즉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말씀(예수님)을 하느님이라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은총을 통해 하느님이 됐다는 것이고, 본성적으로 하느님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여러 성경구절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켰고 아리우스주의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일부 교부들도 아리우스주의에 동조했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중)

아리우스주의자들과의 격렬한 논쟁 끝에 교부들은 신경의 문장을 빚어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 한 본체임을 고백한 것이다. 공의회를 통해 완성된 ‘니케아 신경’은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며, 나뉠 수 없는 하나의 본질을 지니고, 성자의 본질은 모든 면에서 성부와 완전히 동일하며 동등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명확하게 했다.

이후 교부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를 통해 거룩한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 성령이 하느님임을 고백하면서 니케아 신경을 보완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완성했다. 교회는 오늘날까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미사의 공식 신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듯’…교회의 일치를 이루다

니케아공의회의 가장 큰 과제는 아리우스주의에 대응하는 것이었지만, 교부들은 이밖에도 교회의 여러 법규를 정비했고, 무엇보다 지역마다 제각각으로 지내던 주님 부활 대축일의 날짜를 일치시켰다.

주님 부활 대축일은 처음부터 교회의 모든 축일 중에서도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에 부활 대축일을 지냈다. 유다인들이 많이 머무는 지역의 신자들은 유다력의 파스카 축제일에 부활 대축일을 지냈지만, 유럽권에서는 파스카 축제일 다음에 오는 주일을 부활 대축일로 지냈다. 예수님이 안식일 다음 날, 주간 첫날인 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또 파스카 축제일은 유다력을 토대로 하는데, 유다력은 춘분을 기준으로 하되 달의 변화에 따른 달력을 사용했기에 로마의 달력이었던 율리우스력에서 계산하는 방식이 지역마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이 때문에 지역 교회 사이에 의견 차이가 발생했고, 또 어느 지역에서는 단식과 참회를 하고 어느 지역에서는 부활 축제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세계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니케아공의회는 온 교회가 같은 날 주님의 부활을 경축할 수 있도록 주님 부활 대축일을 산정하는 방법을 통일시켰다. 바로 오늘날과 같이 춘분 후 보름달 다음에 오는 주일에 주님 부활 대축일을 기념하게 된 것이다.

16세기에 율리우스력을 보완한 그레고리오력이 도입되면서부터는 그레고리오력에 따른 춘분에 따라 부활 대축일을 정하고 있다. 그래서 율리우스력을 고수하는 정교회와 부활 대축일에 차이가 생겼다. 그러나 니케아공의회 1700주년인 올해는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모두가 같은 날 부활 대축일을 보냈다. 달력 계산법에 따른 우연의 일치기는 하지만, 부활 대축일의 일치로 교회의 일치를 일궈낸 니케아공의회의 의미를 되짚어 볼 기회기도 하다.

우리는 1700년 전 신자들과 같은 믿음을 고백하고, 어느 나라의 교회에서도 같은 날짜에 부활 대축일을 지낸다. 니케아공의회를 통해 우리는 시간을 넘어, 공간을 넘어 일치하고 있다. 교회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일치하심을 고백한 니케아공의회는 교회 일치의 중요한 모범이다.

■ 니케아공의회 가르침 수호한 ‘성 아타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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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타나시오. 출처 위키미디어

교회는 니케아공의회를 통해 일치를 이뤘지만, 이단으로 선포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아타나시오는 이런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항해 니케아공의회가 선포한 가르침을 수호한 대표적인 성인이다.

사실 니케아공의회 당시 아리우스에 맞선 이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알렉산데르 주교로, 아타나시오는 그를 수행하던 부제였다.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데르 주교에게 직접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공의회 중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신학자들과 교류했다. 이렇게 알렉산데르 주교의 뜻을 이은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데르 주교의 후임으로 주교가 됐다.

그러나 아타나시오는 주교가 되자마자 큰 난관에 부딪혔다. 아리우스주의자를 비롯한 여러 이단들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를 노리고 아타나시오에게 누명을 씌워 고발하는 등 아타나시오를 공격했다. 게다가 황제까지도 이단자들의 편을 들면서 아타나시오는 5차례에 걸쳐 17년 동안 유배를 당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바람 잘 날 없는 세월이었지만 아타나시오는 탁월한 재능과 강인한 신념을 바탕으로 일생에 걸쳐 이단자들의 잘못된 주장에 맞서 니케아공의회가 선포한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수호했다. 온갖 시련을 딛고 말년에 이르러 다시 교구를 돌보게 된 아타나시오는 선종하기까지 이단자들로 인해 갈등과 폭력으로 피폐해진 교회를 재건하면서 여러 저술과 강론을 남겼다.

비록 생전에 아리우스주의의 종식을 보지 못했지만, 아타나시오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강조하며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에 ‘교회의 기둥’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아타나시오는 오늘날까지 동방·서방교회를 막론하고 위대한 교부요,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