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들도 많았지만, 잘못을 저지르고 역사의 역적이 된 왕들도 있다. 12세기경 영국의 존 왕은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조카를 살해하고 왕의 자리를 빼앗았다. 좋지 못한 방법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훌륭한 왕이 되려고 노력했다면 모를 텐데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켜 영국 국민에게 큰 피해를 남겼다. 또한 교회와 사이가 좋지 않아 왕위를 내려놓을 위기에 처하자,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정하여 국왕의 체면을 잃었다. 올바른 길을 제시한 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 법률을 제정했다가 곧 법률의 무효를 선언하여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세익스피어(1564~1616)는 존 왕의 일을 연극으로 만들었다. “잘못을 범하면 그 잘못이 더 두드러진다”는 대사는 그의 연극 대본에 나오는 말이다. 처음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시작부터 진리에 눈을 감고 평생을 그릇되게 살아야 했던 존 왕의 일생은 많은 이에게 교훈을 준다. 지금은 조금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진리를 선택하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작은 거짓말이 큰 거짓말을 낳듯 악은 눈덩이처럼 더 커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방임한 로마제국의 총독이었다. 로마제국은 넓은 식민지를 정치적으로 잘 통치하기 위해 어느 정도 식민지의 종교를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유다인들의 종교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지만, 사법권이나 사형집행권 등 중요한 권한은 여전히 총독에게만 있었다. 그래서 유다인 대사제 가야파는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을 총독 앞으로 끌고 가 재판을 받게 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다. 심문을 해보니 흉악범도 아니고 사형을 선고할 죄목도 없었다. 빌라도는 로마제국의 총독이란 막강한 권력자였지만 골치 아픈 종교 문제에는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넘긴 의회 의원들과 율법학자, 대사제들은 자신들은 죄인을 십자가형에 처할 권한이 없으니, 십자가형을 선고해 달라고 졸랐다. 빌라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형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청하고 있으니 난감했다. 빌라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는 부하를 시켜 대야에 물을 떠 오게 하고 군중 앞에서 손을 씻었다. 자신은 아무 책임과 관계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권력자에게 무책임은 때론 무능보다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 빌라도는 진리에 눈감고 악과 타협한 것이다. 지도자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