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글로벌칼럼]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한 수요일

최용택
입력일 2025-06-10 16:58:30 수정일 2025-06-10 16:58:30 발행일 2025-06-15 제 3446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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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일 성모대성당을 방문한 레오 14세 교황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CNS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을 때, 우리는 모두 놀랐다. 교황은 전날만 해도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우르비 엣 오르비(Urbi et Orbi) 축복을 내리고, 포프모빌을 타고 성당 광장에 모인 인파 속을 지나다녔다.

주님 부활 대축일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커피를 마시는 중에 교황청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문자를 받았다. “교황님이 선종하셨어.” 나는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그리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여러 언론 매체로부터 인터뷰 요청 메시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날과 다음 날 내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인터뷰를 이어가야 했다.

4월 23일 수요일이 되어서야 겨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이틀 전 일어난 일을 비로소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나는 지난 12년간 로마 주교로 재임했던 교황이 내 신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되돌아보며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문득 떠오른 것은, 2013년 7월 22일 교황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에 참석하기 위해 브라질에 도착했을 때의 인사말이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지만, 나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것,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이의 마음에 타오르는 형제애의 불꽃을 다시 지피기 위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인사가 모든 이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길!” 잊을 수 없는 그 순간, 예수회 출신의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교황의 선종 이틀 후, 나는 이 말씀을 다시 읽으며 눈물을 터뜨렸다. 그가 교황 재임 동안 해 온 수많은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평화. 형제애. 예수 그리스도의 소중한 선물. 모두에게 전해진 인사와 열린 마음.

“Todos, Todos, Todos.”(모두, 모두, 모두) 프란치스코는 재임 중 여러 차례 이 스페인어 단어를 되풀이했다.

이 말은 최근 선출된 레오 14세 교황도 몇 차례 반복했다. 그가 보인 행보와 발언을 통해 판단컨대, 예수회 출신 전임 교황보다 조용하고 덜 급진적인 모습일지라도,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출신의 새 교황 역시 교회를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영적 보금자리이자 우정을 제공하는 장소로 만들려는 뜻을 이어갈 것은 확실해 보인다.

수십 년 전부터 수요일에는 교황이 신자들과 만나는 일반알현이 열렸다. 그리고 요즘 교황청에는 역사상 첫 미국 출신 교황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리고 있다. 5월 28일 수요일 정오 무렵, 그 일반알현을 피해 테베레강 건너편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성모대성당을 찾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곳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는 한산할 거란 예상은 정확했다. 성당의 성문(Holy Door) 앞 대기 줄은 매우 짧았지만, 내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무덤 앞에서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가득 찼다. 그 앞에서 잠시 기도하고 싶었지만, 경비들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움직이라고 지시했다. 성당 안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직 무덤에 다다르기도 전인데,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걷잡을 수 없는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잠시 후 프란치스코 교황의 소박한 묘비 앞을 떠나, 교회 중앙 네이브를 건너 성 비오 5세 교황과 식스토 5세 교황이 안장된 경당으로 향했다.

성 비오 5세 교황은 도미니코회 출신으로,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400년 넘게 이어진 전통 미사를 공인한 성인이다. 그 맞은 편에는 식스토 5세 교황의 무덤이 있다. 프란치스코회 출신이던 식스토 5세 교황은 ‘er papa tosto’, 로마 사투리로 ‘강단 있는 교황’ 혹은 ‘무서운 교황’이라 불렸다. 그는 단 5년 만에 폭력과 부패로 가득했던 로마와 교황청에 질서를 세웠으며, 지금까지도 거의 바뀌지 않은 교황청 행정 체계를 정비했다. 지난 12년간 나는 이 웅장한 무덤을 자주 찾아 프란치스코 교황을 위해 기도했다.

동성애자들에 대해 “내가 누구라고 그들을 심판하겠는가?”라며 관용을 베풀고, 교회를 비신자들과 소외된 이들에게도 열려 있는 곳으로 만든 이 다정하고 자비로운 교황은, 사실 또 하나의 ‘강단 있는 교황’이었다. 교황은 자칭 ‘가톨릭 바리사이’라 불리는 사제와 주교들을 주로 비판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프란치스코 교황의 넓은 마음속에는 가라지보다는 밀알이 훨씬 더 많았다. 그는 복음의 도전적인 말씀을 삶의 렌즈로 삼았고,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소박하고 충실하게 그 말씀을 실천하려 했다.

교황직 역사상 처음으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한 이가 있었기에 레오 14세 교황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이 이름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죽는 순간까지 곁을 지킨 제자이자 친구였던 수도자 레오에서 따온 것이다.

앞으로도 수요일마다 성모대성당을 방문할 생각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전처럼 식스토 5세의 화려한 무덤이 아니라, ‘Franciscus’라는 이름이 새겨진 소박한 묘비 앞에서 기도할 것이다. 그 기도는 바로 레오 14세 교황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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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로버트 미켄스
1986년부터 로마에 거주하고 있으며, 40년 가까이 교황청과 가톨릭교회에 관해 글을 쓰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1년 동안 바티칸라디오에서 근무했다. 런던 소재 가톨릭 주간지 ‘더 태블릿’에서도 10년간 일했으며, ‘라 크루아 인터내셔널’(La Croix International) 편집장(2014~2024)을 지냈다.